10년 전 이 계절에 대학 교정을 걷고 있었습니다.
마치 단풍산처럼 교정 전체가 노랗고 빨갛게 단풍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나름 감수성이 있었는지 빨간 단풍나무 아래서 아주 조그마한 잎사귀가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직 변변하게 자라지도 않았지만 그 애기단풍 역시 '계절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죠. 그 광경은 나에게 큰 인상을 남겼습니다.




▲ 10년 만에 만난 애기단풍입니다. 옆에 떨어진 단풍을 보면 이 단풍이 얼마나 작은지 알 수 있습니다.

대전에 친구 결혼식이 있어서 갔다가 빨갛게 물든 단풍 사이에서 애기단풍을 다시 만났습니다. 10년만의 일이죠. 10년 전의 애기단풍은 단풍나무 밑동에 기생하고 있었는데, 이번의 애기단풍은 아예 땅 속에 혼자서 뿌리를 내렸더군요.





▲ 올 가을에는 단풍산 구경을 못 가서 아쉬웠는데, 대전에서의 단풍구경으로 위안이 되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살아가는 환경에 따라서 계절을 지낸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에 보았던 <푸지에>라는 단큐멘터리가 생각합니다.




푸지에는 여섯 살배기 몽골의 여자 아이입니다. 말을 능숙하게 타고 양과 염소를 호령하는 목동입니다. 그는 목동의 임무에 대해서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 앳된 여섯 살배기 표정을 숨길 수는 없지만, 말을 타고 고원을 고원을 호령하는 모습에서 위엄이 느껴집니다. 양 모는 일은 세 살짜리 그의 사촌동생 바사가 넘겨 받았습니다. 우리의 계절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모습입니다. 푸지에의 모습에 애기단풍이 오버랩되었습니다.




▲ 1999년 의사이자 탐험가인 세키노 요시하루가 남미의 최남단에서부터 인류의 탄생지인 아프리카까지를 목표로 여행 하던 중 몽골에 머무르며 푸지에
가족과 인연을 만들어가는데, 세키노에게 푸지에는 유목민의 척도였고, 강한 자립심, 능력, 확신의 소유자였다. 푸지에는 2006년 카즈야 야마다 감독이 발표한 다큐멘터리다. 

 
사람은 세상과 함께 크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장면입니다. 몽골에서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시장경쟁이 도입되면서 유목민들은 부상을 입으면 병원에도 못 가고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애처로운 처지에 내몰렸습니다. 푸지에는 여섯 살에 불과하지만 유목민의 목축업이 계절로 따지면 겨울에 들어섰기 때문에 여섯 살의 겨울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푸지에에 대한 달느 이야기는 EBS 다큐멘터리 푸지에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애기단풍은 개인과 세계가 강력한 공동운명체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생을 살아가지만 세계의 운명에 의해서 자신의 생이 결정된다면 나의 운명은 곧 세계의 운명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나의 생만 가꿀 것이 아니라 세계의 생을 가꾸고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명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사회의 생과 개인의 생이 좀처럼 섞이지 않는 듯 보이지만, 계절의 대세가 천천히 걸어가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애기단풍의 가르침이 10년 만에 새삼 되살아난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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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11-17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지에 보고서 참 먹먹했어요. 지금 베트남 관련 책을 읽고 있는데 사회주의 국가에 자본주의 경제가 도입되면서 교육과 의료 부문에서 급 취약해지는 부분들을 보아요. 푸지에도 그랬고요. 씁쓸한 일이지요.

승주나무 2008-11-17 17:00   좋아요 0 | URL
푸지에도 그렇지만 푸지에 엄마의 죽음이야말로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죽음이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푸지에 역시 사회적인 죽음의 과정 속에서 서서히 숨을 거두지 않았을까 하는.. 지인은 무방비로 있다가 한방 먹었다는 표현을 썼는데, 참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탐험가 세키노 요시하루씨는 얼마나 먹먹했을까요 ㅡㅡ;
 

1. 음악가들의 만년작 - 베르디, 베토벤, 모짜르트

만년작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대가는 바로 베르디이다.
베르디는 1870년을 전후로 모든 활동을 접었으며 부세토 근교의 농장으로 은퇴해서 오페라 리허설에 기울였던 것 이상으로 농사일에 몰두했다. 하지만 그의 음악적 열정을 깨운 것은 바로 <셰익스피어>였다. 보이토가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각색해 베르디에게 선보였다. 〈오셀로〉의 극적 내용은 연속적이고 탄력적인 음악에 녹아들어 있었고, 그 음악은 등장인물의 모든 성격과 동작을 낱낱이 반영하고 있었다. 그것이 1887년의 일이다. 오페라 〈오셀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베르디 역시 이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정작 베르디의 마지막 작품은 셰익스피어 〈헨리 4세 Henry Ⅳ〉의 내용을 보충해 각색한 희가극 〈팔스타프〉였다. 베르디는 거기에 놀라울 정도로 빈틈없는 음악을 붙였고 이 작품이 불멸의 만년작이 되었다. 김정환 시인에 따르면 이 작품은 얼핏 듣기에는 흐트러져 보이지만 조화된 예술 본능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 베토벤의 만년작은 현악 4중주 9번이다. 베토벤이 청력을 잃고 나서 만든 유명한 작품이다. 모짜르트의 교향곡 39~41번, 현악 5중주가 만년작으로 뽑힌다.


 2. 작가들의 만년작 - 도스또옙스끼, 셰익스피어

도스또옙스끼의 데뷔작부터 장편 저작들은 거의 모두 섭렵했지만 도스또옙스끼 최고의 작품은 역시 만년작 <까라마조프가 형제들>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만년작으로 의도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지금까지의 인물계보와 주제의 완성도가 모두 이 작품에서 이루어졌다.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인 이반이 보여주는 정신분열적 결말은 도스또옙스끼 인물군의 한 축을 이룬다. 지하생활자 - 라스꼴리니꼬프 - 스따브로긴에 이르는 인물군은 이반 표도로비치에게 완성된다. 도스또옙스끼는 오로지 이성만으로는 파멸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의미심장한 메시지의 용도로 이반을 세운다. 알료사는 종교적 인류애의 전형으로 표현된다. 죄와 벌의 소냐 - 백치의 므이시낀 백작 - 악령의 샤또프에 이어 까라마조프 가의 막내아들이자 사제로서 종교애와 가족애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주제 역시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기나긴 작품세계를 완성하고 있다. 도스또예프스끼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문제의식과 주제 중에서 '가족'이라는 주제로 수렴된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결론이다. <까라마조프가 형제들>을 두 번이나 보았지만, 그 묵직한 주제의식을 아직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만년작>이라는 말의 기원은 셰익스피어로부터 비롯됐다. 바로 <폭풍우>가 만년작이다. 이른바 셰익스피어 4대 비극 등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계략과 음모, 배신과 인간의 나약함이다. 이런 요소들이 엮이고 엮여 견딜 수 없는 파멸을 초래하는 것이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향취다. <폭풍우>역시 이런 특징들이 사라지지 않는다. 형을 배신해 유배시키고, 유배지에서조차 왕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모리배들이 등장하지만 만년작에서는 '해소'를 이룬다는 점이 특징이다.





'견딜 수 없는 파멸'에서 '상생과 해소'로 이어지는 과정이 능숙하게 그려지는 모습, 그리고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보이는 '환상성'이 만년작 <폭풍우>의 진면모다.


▲ 도스또옙스끼(왼쪽)와 셰익스피어(오른쪽)는 만년작(각각 까라마조프가 형제들, 폭풍우)를 통해 작가가 평생 동안 탐구해왔던 인간의 본성과 엇갈린 운명을 녹여내면서 동시에 스스로의 모순을 해소하는 데 성공을 거뒀다.


대가들의 만년작은 다가가기 힘든 산과 같다. 이전의 작품들을 어느 정도 섭렵하고 있어야 만년작이 가지고 있는 생생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도스또옙스끼의 장편과 셰익스피어의 비극 작품을 본 정도여서 만년작의 향취를 많이 느낄 수는 없었지만 그나마 맛을 알 수는 있었다. 움츠려들고 싶은 겨울, 대가들이 추구했던 문제의식과 인간에 대한 탐구를 따라가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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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8-11-17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jade는 도스토예프스키 책 읽는 낙으로 산답니다....ㅋㅋ

승주나무 2008-11-17 17:01   좋아요 0 | URL
도 선생이 그리워요~ 이번에는 단편집들을 좀 읽어보고 싶네요.. 책장 앞에 설 때마다 손이 먼저 간다는 ㅎㅎ
 




▲ 아프락사스 님이 캡처해주신 사진^^

"과거의 미디어 소비자에만 머물러 있던 독자들을 미디어 주인으로 끌어올린 시사인이 어떻게 성장할지 주목됩니다. "


"1년이 넘는 투쟁 끝에 기자들은 독자들을 믿었고 독자들은 기자들을 믿었습니다."(시사투나잇 2007년 9월 17일 방영)


미디어는 대체로 높은 자리에 있고 돈이 많거나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는 쪽으로 몰려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경마 저널리즘이니 황색 저널리즘이니 하는 비아냥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미디어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낮은 곳으로 자꾸 들어가서 그곳에 사는 약한 사람들의 사정을 세심히 관찰해 이를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는 미디어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너무나 적어서 탈이지만요.

시사투나잇이 마지막 방송을 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심상정, 노회찬 의원이 낙선의 고배를 마신 일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가장 훌륭한 의정활동을 했던 정치인들이 다음 국회에서는 기회를 얻지 못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미디어에도 그대로 연출되었습니다. 시사투나잇이 폐지된 이유는 분명합니다. 낮은 곳에서 끊임없이 약자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었고, 꺼내기 어려운 문제들을 자꾸 들춰내서 위정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시사저널 기자들과 함께 싸우고 <시사IN>이라는 매체를 탄생시키는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시사투나잇이 취재를 왔습니다. 우리들은 창간호를 포장해서 광화문, 전라도, 제주도, 강원도 등 전국 곳곳에 창간을 알리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시사투나잇은 3일에 걸쳐서 포장하는 작업, 광화문에서 배포하는 작업 등을 촬영해 갔고, 9월 17일 방송하였습니다.

이제까지 미디어오늘이나 오마이뉴스 등 몇몇 인터넷매체에 잠시 소개되었던 시사모는 KBS라는 전국매체를 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우리들의 뜻도 함께 알릴 수 있었습니다.

"독자들이 이제까지는 계속 소극적인 위치에 있었고, 말하기보다는 침묵하려고 하는 모습이 많이 있어서 우리가 이번 기회에 독자들도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일종의 모델로 보여주고 싶었다."

시사인독자단 회장이라고 자막이 잘못 나오기는 했지만(시사인독자단 운영위원이 맞음) 우리들의 언론소비자운동을 전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직접적인 연관은 없겠지만, 이후에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운동의 조중동 광고지면불매운동 등 언론소비자운동이 확산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시사모의 활동이 방송이나 중앙 매체에서 보도된 것은 시사투나잇이 거의 유일합니다. 시사투나잇의 문제의식과 예민한 촉수를 따라올 시사매체는 나오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시사투나잇의 폐지는 곧 우리 언론의 감수성이 엄청나게 위축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 약자들의 소소한 목소리, 독자들의 몸부림을 지켜봐주겠습니까.
그래서 많이 슬프네요. 시사저널을 딛고 시사인이 일어났듯, 시사투나잇이 다시 좋은 프로그램으로 태어나기를 간절하게 기원합니다.


 
 

독설닷컴에서 시사투나잇 제작진의 마지막 단체사진을 퍼왔습니다.


★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시사투나잇에 관한 포스팅으로 오늘 하루 블로그스피어를 물들이는 것은 어떨까요.
많은 사람들이 시사투나잇의 가는 길에서 함께 생각해볼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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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11-14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투 쫑파티(?? 눈물의 파티도 파티라면..._) 사진 보니깐 괜스레 눈물이 나네요. ㅠㅜ

승주나무 2008-11-17 15:48   좋아요 0 | URL
가슴에 와닿네요.. 눈물의 파티도 파티라면...
정권에 의한 쫑파티는 이제 그만 했으면 하네요 ㅠㅠ
 

내가 가진 수많은 블로그 중에서 유일하게 활성화된 블로그가 있다면
티스토리 <승주나무의 면모>와 알라딘 <승주나무의 책가지>다.
주로 책에 관한 리뷰나 페이퍼를 쓰고, 커뮤니티를 나누는데,
오늘 리뷰를 쓰다가 수상한(?) 점을 발견했다.

알라딘에도 드디어 블로거뉴스가 탑재된 것이다.
알라딘은 티스토리와 이글루스 등 오픈블로그와 교류하긴 했지만,
다음블로거뉴스와 교류한 것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알라딘 서재관리에서 <블로거뉴스 설정>을 누르면 가입을 할 수 있다.

 

나는 이미 가입해 있기 때문에, 서재를 통해 가입을 하려면 다른 계정 하나를 더 열어야 하지만,
블로거뉴스에 가입하지 않은 리뷰어라면 가입을 권한다.


그런데 리뷰어는 특성상 자신의 블로그를 '독서수첩'처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다소 폐쇄적으로 블로그를 이용하는 리뷰어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블로거뉴스에서 조회수가 폭발해서 하루에 10만명이 방문해 버린다면 그 당혹감,
또 블로거뉴스를 돌아다니는 블로거들의 댓글이 야성적이기 때문에
차분히 책읽기를 좋아하는 리뷰어에게 하나의 도전이 될지도 모르겠다.

암튼 블로거뉴스에 들어온 알라딘을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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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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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 듀런트라는 미국 철학자의 <철학 이야기>(문예출판사)를 통해 나는 철학에 첫 발을 들여놓았다. "책을 한 권 집으면 다음 권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는 말처럼 철학의 매력(사실은 듀런트의 문장)에 이끌린 나는 그 어렵다는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잡고 읽었다. 좋은 구절을 정서하면서 여름방학 두 달을 다 보냈다. '마녀의 빗자루 효과'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됐는데, 에티카 5장을 다 읽을 쯤에는 뽕 맞은 것처럼 몸이 붕 뜨는 감정을 느낀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도서관 한가운데에서 뽕 맞은 상태가 된 나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때부터 나는 틈만 나면 스피노자, 스피노자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이 모습이 안타까워 보였는지 철학과의 교수는 나에게 의미심장한 조언을 해준다.

"승주야. 특정 철학자의 저서를 통해 철학 전체를 관망하는 것은 좋지 않다. 철학사 전체를 통해 흐름을 조망하고 특정 철학자로 다가가는 것이 좋겠구나."

나는 당장 이 말을 시행에 옮겼다. 철학사 중에서 읽을 만한 책을 선배에게 물어서 '러셀'의 <서양철학사>(을유문화사)를 찾아낸다. 러셀은 이 책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철학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철학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람은 러셀뿐이 아니다. 베르그송도 철학자이면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서양철학사>는 러셀의 재기발랄한 문장으로 오감을 자극한다. 다만 나는 그때 <스피노자>라는 유럽의 합리론에 귀의해 있었기 때문에, 라이벌인 영국 경험론의 계보를 갖고 있는 러셀의 서술 방식이 유감스러웠다. 특히 스피노자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그의 철학과는 무관하게 철학자로서의 삶의 자세는 위대한 철학자들의 존경을 받기에 충분하다"

이 말은 사실 철학보다 철학 외적으로 스피노자를 깎아내리는 것에 다름아니었다.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대중적인 책이다. S.P.램프레히트의 <서양철학사>(을유문화사)는 정리가 무척 잘 돼 있다. 철학에 관심이 많은 비전공 철학도에게 철학사의 핵심 요소를 가장 깔끔하게 설명해줄 것이다. 분량도 한권으로 깔끔하다. 만약 철학의 내부를 면밀히 들여다보고 싶다면 코플스톤의 철학사 시리즈를 추천하고 싶다. 지금은 절판돼 아쉽지만 <그리스 로마 철학사>와 <중세철학사>, <대륙합리론>, <영국경험론>, <현대철학사> 등 시대별로 이루어진 시리즈는 전공 철학도들에게 필수 도서로 추천되곤 했다. 코플스톤처럼 독하게는 아니지만 철학교수들이 사랑하는 철학책은 요한네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상,하)이다. 나도 상권을 읽고 부분 부분 참조하긴 했지만, 철학의 내면과 상황적 필연성을 개연성 있게 잘 연결시킨 점이 만족스럽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책들은 서양철학사에 머물러 있으며 <세계철학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실정이다. 중국의 철학은 풍우란의 <중국철학사>(상,하)(까치), 인도의 철학은 라다 크리슈난의 <인도철학사>(1,2,3,4)(한길그레이트북스)를 보면 된다.

이제야 본서를 소개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광고 카피 때문에 조금은 주저했던 것도 사실이다.

철학의 본고장 독일에서 출간되어 60만부 이상이 팔렸고,
전 세계 20개국에서 번역된 세계 최고의 철학사!
1950년 초판 출간 후, 끊임없는 개정과 증보를 거듭해 1999년 17번째로 개정된 최종 결정판의 완역 출간!

이 책은 현재적 가치에 충실하며 사실은 영원한 질문의 다른 표정인 현재적 질문을 끝까지 놓지 않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믿어도 좋은가?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던 세 가지 원칙은 책의 어떤 면을 펼치더라도 위배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내게 매우 만족감을 주었던 이유는 두 가지다.

1. 처음으로 만난 '세계철학사'다.
2. 강의 방식을 훌륭하게 탈피했다.

철학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세계철학사'를 한 권에 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것이다.
대체로 서양철학사, 중국철학사, 인도철학사 이런 식으로 단행본을 나누게 되는데, <세계 철학사>는 인도철학, 중국철학, 서양철학을 모두 소개하고 있다. 1,200페이지라는 분량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평생을 놓고 사유하며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철학사에서 아쉬웠던 점은 똑똑한 선생이 나타나 강의를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세계 철학사>는 처음으로 책에서 나와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말을 걸어준다는 것은 상황을 교과서처럼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철학자나 그 상황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를 따져 준다는 말이다. 1,200쪽을 단숨에 읽을 수는 없지만, 밤에 잠자기 전에 고요한 기분으로 오래 두고 읽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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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8-11-14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힐쉬르베르거, 렘프레히트 등등의 책들이 책상 앞에서 노려보고 있네요.. 이 책들 언제나 제대로 읽어볼지 졸업 전에는 해야될텐데ㅠ 소개시켜주신 세계철학사도 나중에 한번 펴볼게요 감사합니다.

승주나무 2008-11-14 22:14   좋아요 0 | URL
오~ 바라 님~ 이미지가 엄청 길어서 아래가 많이 남네요. 철학도이신가 봐요, 반갑습니다. 힐쉬르베르거와 램프레히트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후자를 추천합니다. 후자를 먼저 읽고 전자를 읽으면 더 좋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