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해도 괜찮아 -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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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천 평화시장 전태일의 삶을 그린 만화 로 유명한 최호철 작가가 한진중공업과 관련해서 그림 그림(경향신문 7월11일자 3면)

▲ 김두식 교수의 최신작 [불편해도 괜찮아]의 마인드맵 리뷰

이 그림을 보고 자주 듣는 이야기가 있다.

 

"와우~ 정말 정리 잘 하셨네요!"

 

미소로 답변을 했지만, 사실 나는 마인드맵으로 책을 정리한 게 아니다. 마인드맵을 통해 "나의 주장"을 펼쳤다. [불편해도 괜찮아]는 주장을 보충하기 위한 매개일 뿐이었다. 이 생각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아서 불가피하게 각주를 달아보기로 했다.

 

마인드맵의 여러 가지 원칙 중에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원칙은 아래와 같다.

1. 직선형이 아니라 방사형으로 그릴 것

2. 이미지와 색깔, 키워드를 주로 표현할 것

 

맨 가운데의 책 제목은 원래 책을 모방했다. 그림 실력이 없는 것은 알았지만, 카피도 이렇게 못 하는 줄은 몰랐다. 그런데 베끼기를 하면서 느낀 생각은, 베끼다 보면 더 자세히 사물을 관찰하게 된다는 점이다.

 

책 표지 상단의 이미지는 국제 연합 인권 이사회(United Nations Human Rights Council, UNHRC) 로고다. 그 위에서 [빌리 엘리어트]의 빌리가 춤을 추고 있다. [불편하지만 괜찮아]를 읽으면 두 권의 책에 대한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데, [빌리 엘리어트]와 [앵무새 죽이기]다.

 

마인드맵은 연결고리를 통해 연관관계를 밝히지만 나는 숫자를 달아놓아서 연상작용을 도왔다. [불편해도 괜찮아]의 첫 번째 장이 청소년 인권이라는 데에는 절대 공감한다. 남자를 중심으로 보면 취학 전, 학창시절, 군대 시절이 인권 지뢰밭이다. '비행 청소년'이라는 한국적인 표현은 청소년들을 잠재적 범죄자이자 보호 대상자로 만든다. 자기 아이들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은 '인권'의 출발부터 숨막히게 만든다. 우리나라가 인권 후진국이 된 데는 청소년 인권의 말살이 가장 큰 이유인데, 경기도교육청에서 추진하는 청소년인권 헌장이 시급히 필요한 까닭이다.

 

오른쪽으로 1,2,3,4,6장은 공통점이 있다. 인권의 주인공인 '사회적 약자'를 모아놓은 것이다. 인권을 설명하기 위해서 내가 등장시킨 캐릭터는 '팩맨'이다. 아이템을 마구마구 집어삼키는 오래된 게임 캐릭터는 인권의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할 것 같았다. 우리나라의 언어 관습인 '다르다'(different)는 아이템이 되고, '틀리다'(wrong)는 팩맨이 된다. 성 소수자는 우리나라에서 '틀린 사람' '잘못된 사람'이 되기에 뱀에게 잡혀먹는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한다. 장애인은 더 심하다고 생각한다. 4번 항목에과 5번 항목에 쓴 아닐 非 자는 무시무시한 무기와 날카로운 가시로 표현했다. 반인권적인 국가이기 때문에 비인간적인 태도가 자주 나온다.

 

내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3번 '여성인권' 항목인데, 여성 女자를 거꾸로 뒤집어놓았다. 그리고 3번 항목으로 연결된 화살표는 점으로 표현했다. 여성에 대한 인식이 유치한 수준임을 표현했다. 바로 서 있는 女 자는 점선으로 위태롭게 서 있고, 나머지는 모두 뒤집어져 있다. 그리고 간사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간姦자와 질투(嫉妬시기할 질, 질투할 투)라는 글자를 통해서 여성에 대한 동양의 뿌리깊은 관습을 짚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여성을 인간으로 바로볼 수 있는 날을 불안한 시선으로 예견하고 있다. 6번 종교적 양심과 병역거부에서는 십자가에 수갑을 채우는 것으로 현상황을 표현했고, 1년에 600명씩 현재 누적 수감자가 1만명에 달하고 있는 상황을 숫자로 표시했다. 대체복무에 대한 오래된 대안은 병역필이라는 팩맨에게 다시금 잡아먹히는 신세다.

 

인권이 가장 광범위하게 위협받는 사람들은 노동자다. 그래서 5번 노동자 인권은 별도의 비중을 두었다. 5번으로 이어진 화살표는 가시덩쿨인데 한마디로 '가시밭길'을 표현한 것이다. 전태일 열사는 차별과 단결이라는 반석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데, 그 아래는 '비정규직'이라는 뿌리가 점점 무섭게 자라나고 있다. 비정규직 다시뿌리 오른쪽에 낫과 압정은 '해고'라는 글자를 표현했다. 낫과 칼, 압정 등은 '살인무기'를 상징한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상징을 담고 있다. 불가피하게 해고시킬 수는 있지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해고는 보이지 않는 칼로 보이지 않는 영혼을 난도질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지나치기 쉬울 수 있는 아래 그림은 '노동법'이 아니라 '노동볍'이다. 일부러 오탈자를 낸 것이 아니라 '노동법'의 현실을 표현한 것이다. 파리가 달라붙고 피와 커피, 물때가 법조문에 묻어 있어서 '누더기'가 되었고, 아전인수로 노동법을 적용하고 유명무실하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낙서한 모습으로 그렸다. 노동자를 보호하는 노동법은 현재 유명무실하기 때문이다.

 

7번의 검열과 표현의 자유는 한 가지 사실을 중시했다. '19금'은 누가 결정하는가이다. 그리고 그들이 왜 19금이라고 결정하고, 그들이 왜 그 자리에 올라서 가위질을 하느냐이다. 대체로 등급심의위원은 우수한 성적으로 법대 나와서 높은 관직에 있는 지체 높은 분이 저잣거리의 문화를 재단하는 형태가 오늘날의 현실이라고 한다. 19금을 둘러싼 두 가지 질문은 검열과 표현의 자유를 대변해준다고 생각한다.

 

8번과 9번은 인권의 막장드라마다.

인종차별로 따지면 대한민국은 선진국인데, [불편해도 괜찮아]에는 이 주장이 설득력 있게 표현돼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나라의 인권 현실을 처절하게 이해하게 된다. '반구저기'(反求諸己)라는 맹자 편의 사자성어를 인용했다. [앵무새 죽이기]의 변호사 아버지가 주인공인 딸에게 해준 말이자, 이 책의 주제가 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는 거란다" 반구저기가 기본적으로 안 되기 때문에 인종차별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 극단은 인종청소다.

 

이번에는 '다름'의 아이템들이 팩맨에게 먹히는 정도가 아니라 뿌리까지 잘려나갈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이미지로 표현했다. 그리고 신경써서 그렸지만, 아무도 알아보지 않는 '역사 국도'다. '인권 국도'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인종청소, 학살'은 100km로 달릴 수 있고, 정의실현과 인권은 50km의 속도로 달릴 수밖에 없다. 당연히 효율성 측면에서 제노포비아에게 뒤질 수밖에 없다.

 

인권감수성이란 것은 인류가 오랜 인권유린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알게 된 깊은 지혜다. 처음에는 죽여버리는 게 효율성이 있을 지 모르겠지만, 끝내는 인권감수성이 국력을 신장해준다는 취지다. UN이 괜히 제네바 협약 등을 합의하는 것이 아니다. 인권감수성이 돈이 된다는 사실은 서구의 선진국에서는 거의 일반적인 상식이 된 것 같다.

 

저자는 인권감수성의 지수로 우리나라를 다시 보는 새로운 관찰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아주 차분한 어조로 우리의 현상황과 가야할 길을 놀랍도록 통찰력 있게 표시해준 작가(김두식 교수)에게 이 그림을 바친다. 그 분이 받아주실 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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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7-11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니?
그렇지 않아도 통 안 보이길래 궁금했다.
근데 이렇게 짠 나타나 주네.ㅋ
그렇지. 인권감수성이 국력이다. 동감이야.^^

승주나무 2011-07-11 23:38   좋아요 0 | URL
스텔라 누나 잘 지내요.
요새 리뷰 쓰기가 참 힘들어서~~
알라딘 와서 댓글도 남기고 서재들도 마실다녀야 하는데...
사업 시작한 후로는 참 쉽지 않네요. 알지도 소홀하고^^;;;

stella.K 2011-07-13 13:49   좋아요 0 | URL
ㅎㅎ 아참, 사업한다고 했지?
이 사실도 잊을 정도로 멀어졌구나.
그것도 모르고 왜 안 보이지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으니
내 정신두...ㅋㅋ
앞으로 네가 안 보이면 사업 잘하고 있나 보다 할게.
그래도 가끔은 소식 전해주면 좋을텐데...ㅠ
 
아직도 가야 할 길 아직도 가야 할 길
M.스캇 펙 지음, 최미양 옮김 / 율리시즈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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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선하게 생긴 노인이 재판장으로 불려 왔다. 그리고 변호사석, 검사석에는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이 재판은 신과 종교,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관한 치열한 법정 공방이 계속되고 있었다.

 

 

<배역>

 

재판장 : 소셜북스 회원

 

피고 : 스캇 펙

 

검사 : 스피노자

 

변호사 : 파스칼

 

 

 

<검사 변론>

 

 

존 경하는 재판장님. 본 법정은 신과 인간에 관한 중요한 논의를 하는 자리입니다. 스캇 펙 피고는 제가 개인적으로 존경해 마지 않는 심리치료사입니다. 그리고 그가 심리 연구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점 역시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을 '인격신'으로 상정함으로써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자신의 하느님과 가까이 있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또한 자신이 하느님의 권력의 대리자가 되며 하느님처럼 될 것을 강요받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은총에의 부름은 사랑으로 돌보고 수고하는 삶에의 부름이며, 봉사와 희생이 요구되는 삶에의 부름이다"(<아직도 가야 할 길>(열음사판) 440쪽)

 

피고는 이런 주장을 책의 후반부에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본 검사는 피고의 이런 주장이 대중의 오해를 호도하며 폐해를 야기한다고 생각합니다.

 

신 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이며 자기 스스로를 포함해 모든 존재의 원인이 됩니다. 인간은 신의 일부이자 결과로서 존재합니다. 인간은 스스로는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스캇 펙 박사가 피고석에 설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신과 인간의 이러한 관계를 모르고, 쉽사리 신에게 인간의 정서를 부여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모든 자연물이 어떤 목적을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며, 더욱 그는 신이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만들었으며 신을 숭배하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위험한 까닭은 신의 완전무결성을 훼손시키기 때문입니다. 만일 신이 인격신이거나 목적을 위하여 작용한다면 그는 자신이 결여하는 어떤 것을 필연적으로 욕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신에게 표상을 귀속시킨 것입니다. 신은 자신을 사랑하는 한에 있어서만 인간을 사랑할 수 있고, 따라서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과 신에 대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실체인 신과 인간의 관계를 둘로 나누는 순간 커다란 혼란이 야기됩니다.

 

 

<변호사 변론>

 

 

 

존 경하는 재판장님. 검사는 신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한 자세를 보이고 있지만, 오히려 그것은 무신론에 가깝습니다. 모든 존재에게(미생물까지도) 신적 요소가 담겨 있고 인간도 신의 일부라고 하는 주장은 범신론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검사의 신관(神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신이라는 추상적인 논변보다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신앙은 증명과는 다릅니다. 증명은 인간적인 것이고 신앙은 신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신의 인식에서 신을 사랑하게 되기까지는 얼마나 거리가 먼지 잴 수도 없습니다. 검사는 이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버렸는지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신 이 있다는 것은 불가해(不可解)하고 신이 없다는 것도 불가해합니다. 영혼이 육체와 함께 있다는 것은 불가해하고,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도 불가해합니다.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것은 불가해하고, 세계가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도 불가해합니다. 원리가 있다는 것은 불가해하고 원리가 없다는 것도 불가해합니다.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 검사도 자신의 철학을 위해서 '신'을 요청했을 뿐입니다. 세계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신으로 하여금 한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피고와 본 변호인에겐 있고 검사에겐 없는 것이 있습니다. 스피노자 검사가 보시는 바와 같은 입장을 취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영성을 경험했고, 스피노자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스캇 펙 피고의 신앙은 정당합니다.

 

 

<검사>

 

 

 

재판장 님, 신의 존재는 불가해하지만 신에 대한 인식은 가해합니다. 파스칼은 무지로부터의 환원(귀류법)을 통해서 신에 대한 인식을 흐릿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 컨대 만일 지붕 위의 돌이 머리에 떨어져서 어떤 사람이 죽었다면, 그들은 돌이 그 사람을 죽이기 위해 떨어졌다고 여기고 다음과 같이 증명할 것입니다. 만일 돌이 신의 의지에 따라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정이(왜냐하면 주변의 많은 사정이 흔히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우연히 일치할 수 있는가? 바람이 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람이 그곳을 지나갔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다음처럼 반박할 것입니다. 왜 바람이 바로 그때 불었는가? 왜 그 사람은 바로 그곳을 지나갔는가? 만일 여기에 대하여, 전날까지도 날씨가 좋았지만 갑자기 날씨가 거창해지고 그때 바람이 불었으며 그 사람은 벗의 초대를 받았다고 답한다면 물음은 끝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다음처럼 논박할 것입니다. 왜 바다가 거칠어졌는가? 그 사람은 왜 그때 초대를 받았는가? 이처럼 그들은 계속해서 원인의 원인을 물어서 끝내는 신의 의지, 곧 무지의 피난처에 도피할 대까지 그렇게 끊임없이 물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또한 인간의 신체 구조에 대해 경탄하며, 그러한 위대한 기술의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이로부터, 그것은 기계적 기술이 아니라 신적 또는 초자연적 기술에 의하여 만들어져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을 손상시키지 않게끔 되어 있다고 결론 내립니다. 그러므로 기적의 참다운 원인을 탐구하는 사람,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경탄하는 대신에 학자로서 자연물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을 흔히 이단자나 불경한 사람으로 여기며, 일반 대중들이 자연과 신들의 대변자로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비난받게 됩니다.

이것은 그들의 뻔한 수법입니다.

 

본 재판정은 누가 누가 신앙이 깊은가를 가리는 경기장이 아니라 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판받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감정이나 행위에 대한 논의보다는 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본 검사는 판단하는 바입니다.

 

 

재판은 격론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스캇 펙 박사의 최후진술 시간이 되었다.

 

 

<최후진술>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 재판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많은 방청객님들. 이 노구의 변변치 못한 노인네를 아껴주셔서 정말 감사하며, 이렇게 피고의 몸으로 재판에 오게 된 점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저 는 차이보다는 공통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검사와 변호사, 저는 모두 신앙의 편견에 빠진 기독교인들을 비판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기독교인들 때문에 수입이 늘었다"고 농담함으로써 기독교가 인간의 심리를 혼란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신앙을 이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노력에 대해서는 검사님도 인정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제 가 쓴 "인격신으로서의 하느님" 표현은 논의의 본질이 아닙니다. 다만 스피노자 검사는 인식을 통해 신을 지적으로 사랑하는 경지를 이야기했고, 저는 "무의식"을 통해서 신과 합일되는 경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이미 스피노자 검사 또한 인간이 자신의 본질과 원인을 이해하려는 각고의 노력을 통해서 신에게 다가가고 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설정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우스갯소리의 소재로 삼은 기독교인들은 여기서 벗어난 사람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의식의 세계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도 중요하며, 무의식 역시 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다만 제가 스피노자 검사의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논변에 대해서 걱정스러운 부분은 과학 자체가 하나의 종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 역시 스피노자 검사, 파스칼 변호사, 제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부분입니다. 저는 화해를 바랍니다.

우 리 세 명의 과정은 한마디로 영적 성장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방식으로 영적 성장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영적 성장이란 쉬운 길을 가려고 하고 날짜가 지난 지도나 낡은 관행에 집착하려고 하며 변화를 싫어하는 본능 등을 극복하고, 자기 마음대로 길을 가려는 자연의 저항을 이겨 내야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스피노자 검사가 신앙의 허위에 대해서 파고든 것을 저는 영적 성장으로 간주하고자 합니다.

 

나머지는 재판장님의 판결에 맡기겠습니다. 이 노인은 어떠한 처분을 받든지 유감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재판관이라면 어떻게 판결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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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서구도서관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독서방법 강좌 <행복한 독서클럽>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원고와 함께 강의 MP3 파일을 첨부합니다. 1시간 내외의 오디오 파일을 들으시면 텍스트의 내용이 더 잘 이해되시리라 생각합니다. 강좌는 격주 간격으로 진행되므로 연재도 이 흐름을 따라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http://ge.tt/7He4zxi?c

 

행복한 독서클럽

3장 생각의 단위

1. 생각의 단위가 중요한 까닭

 

철 학자와 논리학자들은 공리, 정리, 본질, 개념이라는 단어를 쓴다. 우리가 그러한 단어를 쓸 필요는 없지만, 이러한 단어들은 사고를 명료하게 하기 위한 그들의 열망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 개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생각의 탑을 모래성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무한히 많은 책들과 생각들을 동원했는가다. 아울러 같은 인간이라도 사고의 깊이에 따라 전혀 다른 운명을 살아간다는 점이다.

 

맹자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점을 명확하게 짚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을 쓰는 것을 일삼고, 어떤 사람은 육체를 쓰는 것을 일삼는다. 마음을 쓰는 사람은 힘을 쓰는 사람을 다스리고, 힘을 쓰는 사람은 마음 쓰는 사람의 다스림을 받는다. 힘을 쓰는 사람은 마음을 쓰는 사람을 먹여살리고, 마음을 쓰는 사람은 힘을 쓰는 사람의 부양을 받는 것이 천하에서 통용되는 원칙이다(맹자, 등문공 상)

 

이 말은 가만히 보면 참 무섭다. 생각이 깊고 명료하거나 지식이 많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사실상 지배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무한경쟁시대에 남보다 앞서지는 못해도, 차별성 있는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나름대로의 논리 체계를 갖춰야 한다. 그것은 바로 명료한 생각을 단위로 사고할 때 얻어질 수 있다. 영업자라면 고객에 대해서, 직장인이라면 상사에 대해서, 선생님이라면 학생에 대해(요새 교수나 교사 평가제가 만만치 않다고 한다), 취업 지망생이라면 면접관에 대해서 자신의 경쟁력을 설득시켜야 하는데, 이 때 필요한 것이 명료한 생각의 단위이다.

어떻게 하면 명료한 생각의 단위를 얻을 수 있을까?

 

2. 기록하고 메모하라, 그러면 명료해질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모든 진지한 독서는 ‘다시 읽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꼭 두 번 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구조 전체를 시야에 넣고 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노스럽 프라이)

 

명료한 생각의 단위를 얻는 방법은 어이 없을 정도로 쉽다. 읽은 부분을 메모하는 것만으로도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뇌 는 데이터를 쌓아놓는 창구가 아니다. 정리된 데이터를 활용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거나 파편들을 조합하는 고도의 기능을 수행한다. 뇌를 뇌답게 대우해주면 삶이 풍요로워진다. 하지만 우리들은 독서를 하거나 공부를 할 때 뇌에게 허드렛일을 시켜오지 않았는가?

 

메 모독서의 가장 큰 장점은 뇌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책의 시시콜콜한 정보를 기억하는 창고의 임무에서 벗어나 전체를 조망해 나와의 연관성에서 책을 관조할 수 있는 역할이 생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메모나 책의 표시를 통해서 뇌가 책의 내용을 일일이 기억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책을 읽은 후에 메모한 부분이나 표시한 부분을 다시 살펴보면 책의 전체가 저절로 간추려질 것이다. 메모독서의 이와 같은 장점을 몸에 익히고 나면 메모를 그만두기 어려울 것이다.

 

 

3. 메모독서의 방법과 응용

 

메 모의 방법은 자신에 맞게 사용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책을 읽는 과정에서 인상적인 대목을 체크할 수 있어야 하고, 책을 다 읽은 후에 체크한 부분이 한눈에 펼쳐지도록 해야 한다. 나는 A4 용지를 반으로 접어서 책에 꽂아두고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 A4 용지를 반으로 접으면 일반적인 단행본(223*152mm (A5신))에 들어갈 만한 크기가 된다. 빨간색과 파란색 볼펜 등 2가지 정도의 색깔펜을 이용해 짧은 인용문이나 첫어절~끝어절, 그리고 요지문이나 코멘트를 쓰는 식으로 구분하면 훌륭한 기록표가 나온다.

 

일 람표는 서평을 쓸 때 가장 강력한 효과가 있다. 책을 읽고 나서 서평을 써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앞서 설명했다. 피드백을 통해서 독서효과를 더욱 증대시키기 위함이다. 책을 완독하고 나서 서평을 쓰려고 하면 모호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좀처럼 글을 쓸 수 없다. 뇌가 자기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렇게 만든 것은 뇌의 주인 잘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모로 표시한 대목이 한눈에 들어온다면 책의 내용을 다시 한번 간추릴 수 있고, 어떤 대목을 이용해서 나의 생각을 보탤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것이 뇌가 진짜 해야 할 일이다. 이런 방식의 책읽기와 서평쓰기를 반복하다 보면 책의 지식이 내것이 되고, 독서는 나의 가장 큰 경쟁력이 된다. 그리고 독서를 통해 세상 전체를 읽어가는 힘을 기르게 된다.

 

앞서 소개한 메모의 방법은 “책”의 관점에서 소개한 것이다. 책뿐만 아니라 어떤 주제(예컨대 인권)에 관해서 정리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아래 표와 같이 자신의 독서 이력을 정리하면 나의 독서생활 전체를 점검할 수 있다.



▲ 독서이력표 샘플. 독서 시작일과 독서 종료일, 출판사와 판본 형태를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게 좋다. 

 

 <다른 연재목록 보기>

[머리말] 책읽는 습관만 고쳐도 세상이 바뀐다
http://story.aladin.co.kr/happyreadin/47327?link=http://blog.aladin.co.kr/booknamu/4649328 

나의 독서생활 돌아보기
http://story.aladin.co.kr/happyreadin/48052?link=http://blog.aladin.co.kr/booknamu/4684977  

전체읽기 연습
http://story.aladin.co.kr/happyreadin/48681?link=http://blog.aladin.co.kr/booknamu/471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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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옥수 2011-06-03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넵, 지금껏 정리가 되지 않아서 ,,,잘 활용해쥐...감사감사
 


▲ 지리산 농부 송헌수 님이 키운 "제멋대로 유정란"입니다. 알을 낳은 곳은 가장 은밀하게
그리고 편안한 닭호텔로 꾸며줘야 암 탉들이 좋아합니다. 송헌수 님은 자신이 '닭의 심부름꾼'일 뿐이라고 말씀하셨죠. 카이스트는 학생들의 주인 행세를 하고, 학생들이 알을 낳는 곳을 가장 드러나고 불편하게 만들어줬기 때문에 이런 유정란이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겁니다.

 

서남표 총장님,

지리산 끝자락에서 제멋대로 키워진 닭이 낳은 달걀(제멋대로 유정란)을 선물합니다.

가운데는 큼지막하지만 양쪽 4개는 몹시 작습니다.

그 4개를 '초란'이라고 합니다. 닭이 처음으로 낳은 달걀이라는 뜻입니다.

카이스트에서는 4명의 학생이 안타깝게도 자살하고 말았죠.

 

알이 작다 해도 그 알에서 태어나는 닭이 작지는 않습니다.

초란에서 태어난 닭이 더 많은 알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크든 작든 한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서남표 총장님과 카이스트가 학생들에게 한 정책을 이 달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양쪽의 4개는 상품성이 없다며 당장 깨뜨려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운데 있는 큼지막한 달걀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달걀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겠죠.

그래서 결국 10개의 무궁무진한 잠재력 중에서 9개는 버려지고 기껏해야 1개 정도만 빛을 보겠죠.

학교에게 영광을 줄 수 있는 확률이 1/10로 줄어드는 어리석은 방법입니다.

 

카이스트와 서남표 총장님이 고민하셔야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이 10개의 잠재력을 잘 키워서 사회에 공헌하게 만들까 아닐까요?

애초에 4개의 작은 달걀을 깨뜨리는 게 목표는 아니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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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1-04-12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아무리 천재이고 수재일지라도 사상의 자유가 없다면..그건 평범한 인간일 뿐일 꺼에요.
천재들을 모아 놓아 바보로 만드는 학교는 멀리 있지 않더군요.

승주나무 2011-04-13 00:33   좋아요 0 | URL
"천재들을 모아 놓아 바보로 만드는 학교" 우리나라 학교들을 잘 설명해주는 말 같아요^^

하이드 2011-04-12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란이 몸에 좋다고 더 비싸지 않나요?

초란에서 나온 닭이 보통 닭과 같나요? 아무래도 다를 것 같은데

무슨 이야기하시려는지는 알겠는데, 예로 든 이야기에 공감이 안 가니, 그 쪽으로만 눈이 가네요.

승주나무 2011-04-13 00:41   좋아요 0 | URL
우리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초란은 작고 보잘것 없는 알에 불과했습니다.
128개의 RT와 73개의 "좋아요"를 누른 네티즌과 하이드님은 다르니까요.
http://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32574

탈옥수 2011-06-03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양함이 존재하지요, 속내를 열고 들어가보면 자신보다 더 못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평범한 진실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자신이 아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도요,,,,자신이 귀하듯 귀하지 않은 무엇도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본 재판은 스캇 펙 박사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을 법정공방 식으로 작성한 리뷰다. 이러한 독특한 리뷰를 쓰게 된 이유는 아래의 글과 같이, 페이스북의 한 네티즌이 남긴 댓글 때문이다. 이 문제의식에 공감하므로 오랫동안 고민을 해서 '신'과 '신앙'에 대해서 나름대로 일가를 이룬 스피노자(에티카)와 파스칼(팡세), 그리고 스캇 펙(아직도 가야 할 길)의 저서를 통해서 때로는 열띤 토론으로, 때로는 진정한 화해의 제스처로 표현을 해보았다.

 

<배역>

 
<피고 : 스캇 펙 박사> 


<검사 : 스피노자>


<변호사 : 파스칼>

선하게 생긴 노인이 재판장으로 불려 왔다. 그리고 변호사석, 검사석에는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이 재판은 신과 종교,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관한 치열한 법정 공방이 계속되고 있었다.

<검사 변론>

 

 

존경하는 재판장님. 본 법정은 신과 인간에 관한 중요한 논의를 하는 자리입니다. 스캇 펙 피고는 제가 개인적으로 존경해 마지 않는 심리치료사입니다. 그리고 그가 심리 연구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점 역시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을 '인격신'으로 상정함으로써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자신의 하느님과 가까이 있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또한 자신이 하느님의 권력의 대리자가 되며 하느님처럼 될 것을 강요받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은총에의 부름은 사랑으로 돌보고 수고하는 삶에의 부름이며, 봉사와 희생이 요구되는 삶에의 부름이다"(<아직도 가야 할 길>(열음사판) 440쪽)


 

피고는 이런 주장을 책의 후반부에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본 검사는 피고의 이런 주장이 대중의 오해를 호도하며 폐해를 야기한다고 생각합니다.

 

신 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이며 자기 스스로를 포함해 모든 존재의 원인이 됩니다. 인간은 신의 일부이자 결과로서 존재합니다. 인간은 스스로는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스캇 펙 박사가 피고석에 설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신과 인간의 이러한 관계를 모르고, 쉽사리 신에게 인간의 정서를 부여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모든 자연물이 어떤 목적을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며, 더욱 그는 신이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만들었으며 신을 숭배하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위험한 까닭은 신의 완전무결성을 훼손시키기 때문입니다. 만일 신이 인격신이거나 목적을 위하여 작용한다면 그는 자신이 결여하는 어떤 것을 필연적으로 욕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신에게 표상을 귀속시킨 것입니다. 신은 자신을 사랑하는 한에 있어서만 인간을 사랑할 수 있고, 따라서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과 신에 대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실체인 신과 인간의 관계를 둘로 나누는 순간 커다란 혼란이 야기됩니다.

 

 

<변호사 변론>

 

 

 

존 경하는 재판장님. 검사는 신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한 자세를 보이고 있지만, 오히려 그것은 무신론에 가깝습니다. 모든 존재에게(미생물까지도) 신적 요소가 담겨 있고 인간도 신의 일부라고 하는 주장은 범신론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검사의 신관(神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신이라는 추상적인 논변보다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신앙은 증명과는 다릅니다. 증명은 인간적인 것이고 신앙은 신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신의 인식에서 신을 사랑하게 되기까지는 얼마나 거리가 먼지 잴 수도 없습니다. 검사는 이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버렸는지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신 이 있다는 것은 불가해(不可解)하고 신이 없다는 것도 불가해합니다. 영혼이 육체와 함께 있다는 것은 불가해하고,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도 불가해합니다.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것은 불가해하고, 세계가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도 불가해합니다. 원리가 있다는 것은 불가해하고 원리가 없다는 것도 불가해합니다.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 검사도 자신의 철학을 위해서 '신'을 요청했을 뿐입니다. 세계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신으로 하여금 한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피고와 본 변호인에겐 있고 검사에겐 없는 것이 있습니다. 스피노자 검사가 보시는 바와 같은 입장을 취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영성을 경험했고, 스피노자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스캇 펙 피고의 신앙은 정당합니다.

 

 

<검사>

 

 

 

재판장 님, 신의 존재는 불가해하지만 신에 대한 인식은 가해합니다. 파스칼은 무지로부터의 환원(귀류법)을 통해서 신에 대한 인식을 흐릿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 컨대 만일 지붕 위의 돌이 머리에 떨어져서 어떤 사람이 죽었다면, 그들은 돌이 그 사람을 죽이기 위해 떨어졌다고 여기고 다음과 같이 증명할 것입니다. 만일 돌이 신의 의지에 따라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정이(왜냐하면 주변의 많은 사정이 흔히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우연히 일치할 수 있는가? 바람이 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람이 그곳을 지나갔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다음처럼 반박할 것입니다. 왜 바람이 바로 그때 불었는가? 왜 그 사람은 바로 그곳을 지나갔는가? 만일 여기에 대하여, 전날까지도 날씨가 좋았지만 갑자기 날씨가 거창해지고 그때 바람이 불었으며 그 사람은 벗의 초대를 받았다고 답한다면 물음은 끝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다음처럼 논박할 것입니다. 왜 바다가 거칠어졌는가? 그 사람은 왜 그때 초대를 받았는가? 이처럼 그들은 계속해서 원인의 원인을 물어서 끝내는 신의 의지, 곧 무지의 피난처에 도피할 대까지 그렇게 끊임없이 물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또한 인간의 신체 구조에 대해 경탄하며, 그러한 위대한 기술의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이로부터, 그것은 기계적 기술이 아니라 신적 또는 초자연적 기술에 의하여 만들어져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을 손상시키지 않게끔 되어 있다고 결론 내립니다. 그러므로 기적의 참다운 원인을 탐구하는 사람,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경탄하는 대신에 학자로서 자연물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을 흔히 이단자나 불경한 사람으로 여기며, 일반 대중들이 자연과 신들의 대변자로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비난받게 됩니다.

이것은 그들의 뻔한 수법입니다.

 

본 재판정은 누가 누가 신앙이 깊은가를 가리는 경기장이 아니라 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판받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감정이나 행위에 대한 논의보다는 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본 검사는 판단하는 바입니다.

 

 

재판은 격론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스캇 펙 박사의 최후진술 시간이 되었다.

 

 

<최후진술>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 재판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많은 방청객님들. 이 노구의 변변치 못한 노인네를 아껴주셔서 정말 감사하며, 이렇게 피고의 몸으로 재판에 오게 된 점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저 는 차이보다는 공통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검사와 변호사, 저는 모두 신앙의 편견에 빠진 기독교인들을 비판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기독교인들 때문에 수입이 늘었다"고 농담함으로써 기독교가 인간의 심리를 혼란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신앙을 이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노력에 대해서는 검사님도 인정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제 가 쓴 "인격신으로서의 하느님" 표현은 논의의 본질이 아닙니다. 다만 스피노자 검사는 인식을 통해 신을 지적으로 사랑하는 경지를 이야기했고, 저는 "무의식"을 통해서 신과 합일되는 경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이미 스피노자 검사 또한 인간이 자신의 본질과 원인을 이해하려는 각고의 노력을 통해서 신에게 다가가고 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설정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우스갯소리의 소재로 삼은 기독교인들은 여기서 벗어난 사람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의식의 세계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도 중요하며, 무의식 역시 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다만 제가 스피노자 검사의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논변에 대해서 걱정스러운 부분은 과학 자체가 하나의 종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 역시 스피노자 검사, 파스칼 변호사, 제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부분입니다. 저는 화해를 바랍니다.

우 리 세 명의 과정은 한마디로 영적 성장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방식으로 영적 성장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영적 성장이란 쉬운 길을 가려고 하고 날짜가 지난 지도나 낡은 관행에 집착하려고 하며 변화를 싫어하는 본능 등을 극복하고, 자기 마음대로 길을 가려는 자연의 저항을 이겨 내야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스피노자 검사가 신앙의 허위에 대해서 파고든 것을 저는 영적 성장으로 간주하고자 합니다.

 

나머지는 재판장님의 판결에 맡기겠습니다. 이 노인은 어떠한 처분을 받든지 유감이 없습니다.



※ 이 글에 대한 법정 외의 공방을 댓글로 확인하려면 하래 링크를 참조
http://www.facebook.com/note.php?note_id=209615159066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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