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력만 되었어도 비주얼하게 보여드릴 수 있었을 텐데, 여건이 안 되니 글로만 묘사합니다.

절친한 친구 쇼페인트는 신기한 친구들과 교유합니다. 덕분에 저도 신기한 것을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지난번에는 '시계혁명전'이라는 전시회엘 갔었습니다.

대문에 씌인 커다란 글씨가 먼저 들어옵니다.

'시간은 아날로그로 흘러간다'

첫 번째로 구경한 시계는 '우는 시계'였습니다.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 왜 그렇게 슬픈 걸까요. 둥근 쟁반 크기의 대부분은 얼굴 모양이 차지합니다. 울상인 얼굴입니다. 왼쪽 눈에서는 눈물 같은 것이 떨어집니다. 처마에 빗물 떨어지듯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1초씩 바뀝니다.

'이 작가가 시간에 대해 생각하는 관점은 '슬픔'이지만, 그것을 두 가지로 표현하였지. 하나는 이렇게 시계를 작게 해서 우리들이 흘리는 눈물이 시간을 능가한다는 것이고, 반대로 얼굴을 작게 하고 시계를 크게 한 것은 시간 하나 하나가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지. 이 사람이 평생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우는 일밖에 없단 말야. 이 사람의 작품은 그럴 듯하면서도 재미가 없어. 또 다른 작품은 60개의 표정을 만들어서 1초가 지날 때마다 얼굴이 울상이 되다가 마침내 울어버리는 작품이었지. 노골적인 슬픔만큼 유치한 것이 어디 있겠어?'


쇼페인트는 괜히 짜증을 냅니다.

두 번째로 본 시계는 '멀어져가는 화살'입니다.
이것은 주로 어린이들에게 시간의 교훈을 가르쳐주기 위해 만든 작품이라고 합니다.
시계의 원을 따라서 크기가 다른 화살표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초침이 지나가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마다 전구가 들어 있습니다. 전구가 한 번씩 켜질 때마다 시계의 크기가 점점 작아집니다. 그러다가 60초가 다 왔을 때쯤에는 보일락말락합니다.

'어릴 때는 이런 시계를 꽤 진지하게 보며,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시계의 크기란 것이 다 거짓말이야. 우리가 사는 시간은 해봐야 100년도 안 되지만, 커다란 시공의 관점에서 보면 초침의 크기가 무슨 상관이 있겠어.' '길게 말하지 말고 다음 시계로나 가지?'

잘난 척하는 녀석에게 어깃장을 놓으면서 우리는 '비굴한 시계'에게 갔습니다.

이 시계는 진자운동을 하면서 돌아가는 시계인데, 진자의 위치에 사람 눈알을 그려넣고, 궤도를 둥그렇게 사람의 얼굴이 두르고 있습니다. 보고 있으면 한 사람이 불안해하며 이쪽저쪽 살피는 모습을 닮았습니다.

'평생 눈치를 보고 살아가면서, 자신이 만든 작품까지 사람들 눈치를 보게 하고 싶을까?'
(이 작품은 코엑스몰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거기는 동물들이 눈치를 보더군요.)

이번엔 내가 쇼페인트의 흉내를 내 봅니다. 녀석은 선수를 빼앗겨서 분개한 듯이 아무 말 없이 다음 작품으로 걸어갑니다. 다음으로 본 시계는 '하루'입니다..

시계 배경에는 산 그림이 그려져 있고, 다섯 개의 버튼이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써머타임', 버튼을 누를 때마다 배경이 조금씩 바뀌고 화면의 밝기도 바뀝니다. 낮이 길어지는 날은 좀 빨리 밝아지고 낮이 길어지는 날은 한참 동안 어둠이 시계의 배경을 이룹니다.

'여기 있는 작품 중 드물게 실용적인 시계야. 이 시계 들고 유럽에 간 일이 있었는데, 마침 써머타임을 하고 있었지. 그래서 버튼을 맞춰 놓고, 하루 종일 시계와 창밖만 보고 있었지. 신기하게 이 시계의 밝기와 창밖의 밝기가 똑같은 거야. 아마 이 시계를 발명한 사람은 굉장히 많은 경험을 토대로 만들었을 거야.'

특이하게 이 시계에는 초침이 없고, 분침보다 시침이 길었습니다. 시침이 해를 상징하고 시계를 한 바퀴 도는 것입니다. 시계란 꼭 시침이 분침보다 짧아야 할 이유는 없겠죠.

다음으로 본 시계는 ''화합'입니다.
초침이 0초를 가리키면 이불에 싸인 물아기가 등에 성화를 매달고 기어갑니다. 그리고 5초 지점이 지나면, 그보다 조금 큰 아이가 성화를 받고 기어갑니다. 이렇게 성화가 5초마다 전달되면서 세대와 세대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이 시계도 여러 가지 소재로 효과를 낼 수 있어. 인종이 번갈아 성화를 전달할 수도 있고, 동물과 사람, 옛날과 현재의 사람들이 성화를 들고 달려갈 수도 있지. 이것은 내가 본 60초 중 가장 크고 아름다운 60초 작품이야.'

쇼페인트가 감동을 받는 것은 매우 드문 장면입니다.


이밖에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신기하고 재미있는 시계가 많이 있었습니다. 산고(産苦) 시계는 산모의 배가 점점 커지고 산모는 소리까지 지릅니다. 아마 못된 작가가 만들었나 봅니다. 그리고 앨범 시계에는 좋아하는 사진을 스캔해서 저장하면 시간이 바뀔 때마다 사진이 바뀝니다. 평소 앨범을 볼 기회가 없는 사람들이 자주 애용하며, 심하게 싸운 부부나 애인들이 자주 이용하는 시계입니다.  아름다웠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계속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리고 60초라는 소재를 이용해서 60갑자 시계도 선을 보였습니다. 특히 이 시계는 고전문헌이나 역사를 전공한 사람들이 애용합니다. 이것은 시계라기보다는 차라리 참고서에 가깝습니다. 60초 동안 먼저 갑자를 보여주고, 다음에는 1분간 갑자에 대한 소개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갑자 해에 있었던 일들을 화면으로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민족문화정진회의 학자들이 십 년간의 노고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예비고전학자들에게 선물로 많이 줍니다. 제가 알기로 이 시계는 적어도 1년 동안은 다른 정보를 제공하며, 지금도 계속 업데이트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안에는 여러 가지 기능이 있어서, 선택해서 정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계들을 보면서 시계란 휴대폰 시계에 밀릴 정도로 불필요한 기계덩어리가 아니라, 우리에게 시간이라는 것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소재인 것 같습니다.  시계는 맨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동일한 모델입니다. 간간히 외형만 바뀔 뿐 초침이 돌고, 분침이 도는 형태는 똑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정의하면서 어떤 일의 기준이 되는 척도로 본 후로, 시계는 줄곧 보조수단의 역할만 해왔습니다. 시계 자체, 혹은 시간 자체에 대해서 성찰하는 기회를 좀처럼 얻을 수도 없고, 얻으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파스칼은 '어리석은 사람들은 지나간 과거를 그리고, 다가올 미래를 그리다가 정녕 실제적인 현재를 내팽개친다'고 한탄했을까요. 아무튼 좀 엉뚱한 구석이 있는 친구이지만, 쇼페인트와 교유하면서 굳어버린 제 생각들이 조금씩 금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다음에는 어떤 재미있는 것들을 보여줄지 벌써부터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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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30 03: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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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고이즈미 씨가 독특한 논리법을 개발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오사카 고등법원에서 위헌 판결을 받은 이유는 다름 아닌 자신의 복장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즉 제복을 입고 참배에 오른 것이 위헌의 이유이므로, 위헌 판결에 경의를 표함과 동시에 자신의 의지를 실천할 수 있는 방식을 제안했다.

그의 논리는 단순하다. 사복을 입고 참배하면 된다는 것이다. 복장 하나만 가지고 총리가 되었다 민간인이 되었다 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리고 이것을 좀 더 교묘하게 이용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만약 의회에서의 발언이 물의를 일으켰다면 사적 총리로 회피하는 것이 굉장히 수월해졌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발언을 하기 전에는 정복의 단추 하나를 풀어둔다. 여론이나 해당 정당, 국가에서 문제를 제기하여 궁지에 몰렸을 때는 가차없이 "공적 총리는 정복의 단추 다섯 개를 다 매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발언을 할 때 단추를 네 개밖에 매지 않았기 때문에 사적 총리로서 발언한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 발언에 대해서 해명해야 할 하등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특히 고이즈미 씨는 이 방법은 한국에도 대단히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접한 한국의 어떤 특별한 사람들은 이 논리법이 매우 유익하게 응용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예컨대 지난 국감 때 술자리 폭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모 당의 모 의원은 이 논리법으로 구제를 받게 되었다. 즉 자신은 폭언을 할 당시 양복을 입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우선 그의 국민들은 고이즈미 씨가 언제는 총리이고, 언제는 '고이즈미 할아버지'가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총리'라는 직함을 포기하고 아예 그를 민간인으로 여길 공산이 크다. 고이즈미 씨는 자신이 사적 총리로서 발언을 할 때는 반드시 눈에 확연히 드러나도록 단추를 풀겠다고 해명했으나, 받아들여지긴 힘들 것 같다.

일부에서는 이 논리법에 대한 부작용을 우려하고 있다. 즉 이 일이 예상치 못하게 고이즈미 씨의 정계 은퇴를 앞당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공명당의 한 의원은 "고이즈미가 사적 총리 개념을 활용한 순간 공적 개념으로서의 총리는 끝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며, 이것이 그의 정치 인생의 종지부를 찍는 사건으로 기록될 수 있다."고 고백했다.

고이즈미 씨의 참배와 거의 같은 시각에 일본의 한 대학생이 자신의 국적 부정을 선언했다. 만약에 자신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일본인이며 대학생인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모두 포기할 것이며, 나의 이 행동에 대한 법적 권위는 고이즈미 씨가 보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존재는 선택할 수 없는 것이며, 특히 많은 사람을 이끄는 지도자는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과 그들의 생각을 끌어안고 치열한 자기 모순을 극복해 상생할 수 있는 의견을 제시해야 하며, 중의와 소신이 부딪혀 자신의 소신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자신이 소신을 포기함이 모순되지 않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이즈미 씨는 오늘도 유난히 주머니가 많이 달린 흑색 정복을 입고 사무실로 출근하고 있다. 오늘도 역시 그의 정복 단추 하나가 풀려 있는 채로...

* 다음은 동화 1편에서 소개되었던 쇼페인트와 함께 '시계혁명전'이라는 독특한 전시회를 다녀온 일화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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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알라딘 우수리뷰로 뽑혀서 영어책 두 권을 사게 되었습니다. 고맙고 즐겁기도 해서 내친 김에 서재도 정리하고, 알라딘 가족들과 이야기도 나눌 겸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만남에도 형식이 있어야 하기에, 동화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동화는 처음 써보지만, 제가 쓰는 장르는 퓨전 동화입니다. 시사와 철학에 무게를 실어서 써볼 예정입니다. 호응이 괜찮아야 할텐데. 이 글은 원제가 '생명의 기원에 관하여'인데, 너무 거창해서 스토리의 주제에 맞춰 바꾸었습니다.

몽상가 쇼페인트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태어나는 것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고생만 하다가 죽을 때도 곱게 죽지 못하는데, 도대체 사람이 태어난 의미가 무엇이란 말인가. 쇼페인트는 항상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베아트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하게 되자, 비로소 자신이 태어난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베아트는 불행히 쇼페인트의 옆에 오래 있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쇼페인트는 처음의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것을 보는 고통을 주려고 누군가 사람을 태어나게 하는구나 하는 절망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베아트를 만나 행복을 느끼는 것은 나중에 맞을 더욱 커다란 고통을 위한 과정일 뿐이야. 사기꾼의 수법처럼 처음에는 조그마한 이익을 주다가, 걸려들었을 때 왕창 빼앗아 가는 것이 세상의 원리야.

쇼페인트는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세상도 가족도 국가도 나중에 벌어질 일에 비하면 사기꾼의 미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관계를 버리고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하염없이 걷다가 지치면 풀섶을 모아다가 한숨 자고, 또 걸었습니다. 그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듯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본능에 따라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힘들면 쉬고..

그러다가 그는 몹시 추운 땅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이제까지 밟아온 어떤 땅보다도 추운 곳이었습니다. 너무 추워 한발짝도 떼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쇼페인트는 추위를 피할 만한 곳을 찾았습니다. 마침 동굴이 있어서 거기서 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동굴 앞에서 이상하게 생긴 두 사람이 말싸움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쇼페인트가 가까이 온 줄도 몰랐습니다.

보르테르! 왜 자꾸 생명을 낳는 거야. 그의 생명이 다해서 죽여야 할 때 얼마나 소름끼치는 줄 알아? 그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겠지만, 마치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것 같단 말야. 네가 반만 낳는다면, 나의 고통은 반으로 줄어들 거야.

그러자 듣고 있던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매르서스! 자네에겐 미안하지만, 여기는 너무 춥지 않나. 나는 불을 때는 것처럼 세상에 하나의 불을 낳는 거네. 세상을 밝히고 따뜻하게 하려고 한숨도 쉬지 않고 계속 생명을 만들어내는데, 만들어내면 만들어낼 수록 더 추워지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네. 새생명을 하나 낳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지 알기나 하나? 자네는 죽어가는 사람 옆에 있다가 숨통만 조금 건드려놓으면 되지만, 나는 내가 낳은 생명이 고통을 당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단 말일세. 힘들게 만든 불이 세상을 더욱 춥게 하고, 애써 살린 빛이 세상을 더욱 어둡게 할 때 쓰라림을 자네는 아는가?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말게.

쇼페인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누군가를 괴롭히며 태어났고, 평생 동안 괴롭히고 있다는 것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없을 테니까요. 쇼페인트는 보르테르의 고통에 압도된 셈입니다.

보다 큰 기쁨과 보다 큰 슬픔 안에서 쇼페인트는 자신의 자리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 졸속으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이름을 보면 아시겠지만, 쇼페인트는 쇼펜하우어, 베아트는 베아트리체, 보르테르는 볼테르, 매르서스는 맬서스를 패러디했습니다.

특히 보르테르는 볼테르가 역설적으로 풍자한 깡디드의 캐릭터를 다시 한 번 역설적으로 풍자해서, '모든 것은 최고의 것 중에서도 가장 최고의 것을 위해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사실로 받아들인 의미입니다. 맬서스는 인구의 기하급수적 증가를 조정하기 위해 기근이나 전염병이 필요하다고 한 사람이라서 그런 이미지를 좀 땄습니다.


다음 호에는 '고이즈미 씨의 私的 총리 개념'이라는 동화를 연재합니다. 많은 기대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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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 (지은이), 홍영남 (옮긴이) | 을유문화사
 
이기적 유전자는 도킨스의 유전자 첫번째 책으로 개체는 유전자의 이동을 위한 로봇일 뿐이라는 이론으로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그의 유전자가 불멸의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은 참으로 리얼하다. 유전자와 유전자의
복제를  통해 유전자의 작품이자 아들들이 그 시대를 살다가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생명과 생존을 유전자 단위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책.

 

 

 

 

리처드 도킨스 (지은이), 홍영남 (옮긴이) | 을유문화사

<이기적 유전자>에서 던졌던 화두이다. 이 책은 <이기적 유전자>의 후편 격으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가 행동하는 영역을 하나의 생물체 '안'만이 아닌 그 생물체의 '바깥', 사회와 문화 전반으로 확장시켰다.(알라딘)

 

 

 

 

<이기적인 유전자>와 <확장된 표현형>으로 잘 알려져 있는 리처드 도킨스의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결 양상을 다룬 책.(알라딘)

 

 

 

 

리처드 도킨스 (지은이), 이한음 (옮긴이) | 바다출판사

지난 25년간 리처드 도킨스가 썼던 기고문과 연설문, 회고록과 논설문, 서평과 헌사 가운데서 정수만을 가려 뽑아 엮은 책(알라딘)

도킨스의 저작들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우리말로 번역된 책들의 저작 순서는 위와 같다.

도킨스의 책을 읽기 전에 다윈의 종의 기원을 먼저 읽는다면, 도킨스의 철학을 좀 더 완숙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도킨스와 다윈은 하나의 선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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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핵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
조셉 콘라드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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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핵심』- 무시무시한 진실


들어가기 전에


요즘 영문학 작품을 가지고 독서스터디 비슷한 것을 하고 있어요. 좀 쫓기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읽고 토론하고 배출하는 모양이 어느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그 첫 작품이 암흑의 핵심은 아니에요. '테스'였는데, 아직 제가 정리를 못했네요. 비교적 짧은 분량인 이 이야기가 영문학 첫번째 후기가 되었군요. 두 주 동안 세 작품 정도 남았는데, 영문학 후기는 일단 5편이 될 것 같아요. 소설에 관해 후기를 쓰는 것은 낯설군요. 차라리 소설을 쓰듯이 후기를 남기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아무튼 제 사제 데뷔작이었습니다.



벌거벗은 진실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수년간 끌려다닌 끝에 삶을 위한 투쟁에서 도의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죄수들만이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알게 모르게 온갖 방법과 수단을 쓸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잔혹한 폭력, 도둑질, 심지어는 친구까지도 팔아넘겼다. 어떻게 불러도 상관이 없겠지만 천만다행히도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던 소수의 우리들은 가장 훌륭한 사람들은 돌아올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빅터 플랭크, 『죽음의 수용소에서』 중에서


우리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암흑을 가끔 상상하지만, 진짜 경험해보지는 못한다. 대개 암흑을 끊임없이 그리는 가운데 그려진 그림이 암흑이라고 판단하기 쉽지만, 진정한 암흑은 우리의 상상보다는 오히려 본능에 호소하는 것 같다. 인간성의 심연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극단의 정글에서 제국주의는 드디어 분열된 자아를 드러낸다. 이 이야기는 화자인 말로가 콩고로 가는 제국주의의 기선을 타고 가는 선장으로서, 거기서는 이미 전설이 되다시피한 ‘커츠’라는 사람에게 점점 다가가는 틀로 진행된다. 어떠한 가식적 이념도 여지없이 알몸을 드러내길 요구하는 밀림 안에서 화자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분열된 이상이며, 그 이상을 둘러싸고 서식하는 ‘백인’들의 행태이다. 그가 '백인‘이라는 표현으로 그들과 단절하는 이유는 밀림이 이야기하는 진실과 그 진실의 세례를 온몸으로 견뎌낸 커츠라는 인물을 통해 서서히 드러난다. 그것이 지배인이 오래도록 건재하며 커츠가 죽음에 이르게 된 이유이다. 커츠는 콩고행 직전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제국주의가 표방하는 정의의 이념을 주창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제국주의는 목적이 분명한 제국주의임이 드러나자마자 커츠의 이상은 표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진실에서 통속적인 가치밖에 갖지 못한 지배인은 당당히 살아남고 보다 깊숙이 진실로 다가가려는 커츠와 화자는 죽음에 이르거나 죽음에 준하는 국면을 맞게 된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사뭇 그 지역에 고용되어 있었던 흔한 상인 중 한 사람이었을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의 명에 복종했지만, 그가 사람들에게 애정이나 두려움의 감정을 불어넣진 못했고 또 존경도 받지 못하고 있었지. 그는 그저 불안감만 불어넣고 있었던 거야. 불안감, 바로 그거였어. 어떤 명확한 불신감이 아니라 그저 불안감이었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구. 이런, 뭐라 할까. 이런 능력이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는지는 알 수가 없지. 그에게는 일을 조직한다든가, 주도권을 잡고 일한다든가, 심지어는 질서를 잡는 재주 같은 것이 없었어. 그 주재소의 형편이 말이 아닌 상태에 있었다든가 하는 그런 몇몇 가지 것을 보면 그 점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지. 그는 학식도 지성도 갖추고 있질 못했어. 그가 지배인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연유는 어디 있었을까? 그건 아마도 그가 병에 걸린 적이 없었기 때문일 걸세……. 그는 거기서 3년 임기를 이미 세 번이나 채웠으니까……. 일반적으로 뭇사람들의 체질이 그곳 기후로 인해 망가지는 판에 혼자서 기세등등하게 건강을 누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기 때문이야.
- 본문 중에서



인간의 기층과 기생하는 무리들



이 이야기는 커츠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마치 원심 운동을 하듯이 전개된다. 커츠는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다방면의 진실을 함의하고 있는 인물이다. 빛과 어둠과 진실을 모두 함유한 모순이 바로 커츠라는 인물 안에 그려져 있으며 어떤 이는 거기서 어둠을 살라먹기도 하고, 빛을 맹신하기도 한다. 화자가 처음 만난 회계 직원에게 커츠는 ‘주목할 만한 인물’인데, 그것은 ‘그 고장에서도 가장 오지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그는 다른 모든 교육소에서 수집한 상아를 모두 합친 것만큼 많은 상아를 보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커츠라는 인물의 기층 중 가장 테두리를 형성하는 진실의 모습이다.



그분은 마치 천둥과 번개처럼 원주민들 위에 군림했던 겁니다. 원주민들은 일찍이 그런 걸 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아주 무서워했던 겁니다. 그분은 아주 무서운 사람으로 비쳤던 거지요. 우리가 커츠 씨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는 여느 사람에 대한 판단을 내리듯이 할 수가 없다구요. 없고말고요.
- 본문 중에서


화자가 말하는 그의 마지막 제자라는 청년은 커츠를 위대한 이념을 갖춘 사상가로 보고 있었다. 사실 원주민들이 생전 보지 못했던 모습이란 것은 다름아닌 이념을 말한다. 이념은 죽음보다 강하다. 이념 아래 추장들은 매일같이 그의 앞에서 기어다녔던 것이며, 커츠씨가 화자에게 우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젊은 마지막 제자에게는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젊은이는 커츠에게 반항하다가 심판받은 자들의 목을 가리켰다. 커츠의 막사 양쪽 기둥에 하나씩 그들의 목은 박혀 있었다.



그는 내가 그곳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하면서, 그 말뚝 위의 머리들은 커츠에게 반항한 자들의 머리라는 것이었네. 내가 웃으니까 그는 몹시 충격을 받는 듯했어. 반항자들이라니! 그간 원주민들을 적이니 죄인이니 일꾼이니 하는 말로 지칭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지만, 이제는 그들을 반항자라고 부르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던 걸세. 그 말뚝에 꽂힌 반항자들의 머리는 내가 보기에 완전히 진압되어 있는 듯했네.
- 본문 중에서


그러나 마지막 제자가 커츠와 같이 파멸에 이르지 않은 이유는 ‘이념’이 그를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이념’이 진실을 가려 주는 대신 그의 젊음을 자극하여 주었다.



나는 일종의 감탄이랄까 아니면 부러움이랄까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 그 매력적 아름다움이 그를 충동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했고, 그로 하여금 위해를 받지 않도록 해주었던 거야. 그가 밀림으로부터 얻어내고자 한 것은 숨을 쉴 공간과 뚫고 나갈 공간뿐이었어. 그에게 필요한 것은 가능한 한 최대의 위험과 최악의 궁핍을 감수하면서라도 존속하며 전진하는 것이었거든. 일찍이 절대적으로 순수하고 비타산적이며 비현실적인 모험 정신이 한 인간을 지배한 적이 있었다면, 그 정신의 지배를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니라 바로 그 얼룩백이 옷을 입고 있는 젊은이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
- 본문 중에서


 


하지만 그의 순수하고 젊은 헌신은 우상과 숙명론의 기만에 갇혀 있었다. 이들의 젊음은 ‘악한 의도’에 의해서 오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히틀러 유겐트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악행을 저지르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때문에 화자는 '그 헌신이야말로 일찍이 마주쳤던 위험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커츠의 약혼녀가 서식하고 있는 기층은 커츠의 기억이다. 그것은 본성이나 밀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젊고 자상한 애인의 기층이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한번이라도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분의 친구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거예요.> 그녀는 말하더군. <그분은 사람들에게서 가장 좋은 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방편삼아 사람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곤 했지요.> 그녀는 감정에 겨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그건 위대한 사람들의 천품이기도 하지요.> 그녀는 말을 계속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녀의 나직한 목소리는 내가 기왕에 들은 적이 있는 불가사의함과 황폐함과 슬픔으로 가득한 다른 모든 소리들을 동반하고 있는 듯했지.
- 본문 중에서


그녀의 커츠에 대한 감정과 신념을 거짓이라고 하는 것은 부당할지 모른다. 그녀의 마음은 충분히 진실을 담고 있으며, 커츠 또한 감정을 속인 적이 없다. 그녀는 커츠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듣고 싶어한다. 화자를 전율케 했던 진실의 소리를 그녀에게 들려주는 것은 그녀에게 하나의 거짓을 조장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화자는 알고 있었다. 하나의 진실이 누군가에 의해서 거짓으로 둔갑하는 것은 우리들이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닌가. 차라리 적절한 거짓을 섞어서 그녀 나름의 진실에 위배되지 않을 정도로 타협하는 것이 화자에게는 최선의 선택인 듯 했다.



<그분의 마지막 한마디는 당신의 이름이었습니다.>
가벼운 한숨 소리가 들리더군. 그러자 어떤 끔찍한 희열의 외침,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승리와 말할 수조차 없는 고통이 섞인 외침으로 인해 내 심장은 갑자기 고동을 중단하는 듯했어. <저는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 확신하고 있었지요…….> 그녀는 알고 있었다는 거야. 확신하고 있었다는 거야.
……
내가 커츠를 정당하게 대접해서 그가 실제로 했던 그 무서운 말을 그녀에게 들려주었다고 하더라도 하늘이야 무너지지 않았을 거야. 커츠는 자기가 정당한 대접을 받는 것을 원할 뿐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는 그를 그렇게 대접할 수가 없었어. 나는 그녀에게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던 거야. 그 진실이 그녀에게는 너무 암울하게, 온통 너무 암울하게만 들렸을 테니까.
- 본문 중에서


그것은 이를테면 하나의 데드라인이다. 그 선을 중심으로 커츠와 화자의 군과 ‘백인들’이 나뉘어진다. 지배인이 커츠에게 불평을 하는 것도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마지막 제자가 그 선을 넘어선 커츠의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증언해준다.



그분은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지요. 그래서 이곳 생활을 싫어했다구요. 그런데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떠날 수가 없었던 거예요. 나는 기회를 엿보아 그분에게 너무 늦기 전에 이곳을 떠나자고 간청해 보기도 했어요. 함께 떠나겠다는 제의도 했죠. 그럴 때면 그분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지만 계속해서 남아있는 거에요. 또다시 상아 사냥을 하러 나선 후 몇 주일 동안은 보이지 않곤 했죠. 그는 이곳 원주민들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잊고 있었던 거예요. 아시겠어요?
- 본문 중에서



암흑의 핵심



핵심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각 기층을 하나씩 잡고 오르다가 비로소 기층과 대면하는 경우가 있고, 온갖 곳에 널려진 핵심의 강요에 못이겨 대면하는 경우가 있다. 화자에게 기층은 핵심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핵심이다. 그가 별다른 세계를 볼 줄 아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감수성만으로 눈을 뜬 것이다. 때문에 그는 콩고에 가기 전에 자기가 짐승과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고 화자가 콩고에 가서야 비로소 그것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들을 감싼 관습 때문이다.



자네들은 이해할 수가 없을 거야. 자네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나? 자네들이야 단단한 보도를 딛고 서서, 늘 자네들을 격혀라거나 덤벼들 듯 다정한 이웃들에 둘러싸인 채, 푸주한과 경찰관 사이를 조심스럽게 오가면서, 추문과 교수대와 정신병자 수용소 따위를 거의 종교적으로 두려워하며 살고 있으니 자네들이 어떻게 상상인들 할 수 있겠나? 경찰관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철저한 고독으로 인해, 그리고 다정한 이웃이 여론이랍시고 속삭여주는 경고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는 철저한 침묵으로 인해 한 인간의 자유로운 발길이 어떤 특정한 태초의 땅으로 인간을 이끌고 갈 수 있는지를 자네들은 아마 상상할 수 없을 거야. 이런 경찰관이니 이웃이니 하는 사소한 것들이 있느냐 없느냐가 실은 큰 차이를 이루는 법일세.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자네들은 자네들 자신의 타고난 힘에 의존해야 하고 또 스스로 충실하게 살 수 있는 능력에 의존해야 해.
- 본문 중에서


콩고라는 땅은 화자의 오래된 본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이 화자로 하여금 소름끼치도록 만들었으나 비인간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이며, 커츠가 완전히 동화되어 버린 이유이기도 하다.



그 땅은 이 세상의 땅같이 보이질 않았어. 우리는 정복당한 괴물이 족쇄를 차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는 데만 익숙해 있었거든. 그러다가 거기서 괴물이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던 거야. 그건 이 세상 풍경이 아니었고, 게다가 그 사람들은……아니야, 그들을 인간답지 않다고 할 순 없었어. 내가 가장 괴로웠던 건 그들 또한 비인간적이지는 않았다고 하는 바로 그 생각이었어. 그런 생각은 서서히 떠오르는 법이지. 그들은 소리지르며 깡충깡충 뛰거니 제자리에서 빙빙 돌거니 하면서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었어. 그러나 그 광경을 바라보던 우리를 몸서리치게 한 것은 그들 또한 우리들처럼 인간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 야성적이고 열정적인 소동이 우리와는 먼 친족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어. 그건 흉측한 생각이지. 아무렴, 흉측한 생각이야. 하지만 우리가 참으로 용감한 인간이라면 그 무섭게도 솔직한 소동에 대해 우리가 마음 속으로 희미하게나마 맞장구치는 흔적이 있다든가, 우리가 태초의 밤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소동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이해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생각이 든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네.
- 본문 중에서


커츠와 화자는 밀림이 말하는 모든 인상들을 공유한다. 극한의 배고픔과 맞서는 인간에게 미신이니, 믿음이니, 원칙이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며, 도덕이나 사회성 같은 것이 낄 자리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 엄연한 사실로 다가왔다. 우리들은 사실 이 진실로부터 도시와 사회로 도망간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화자는 이미 커츠의 분신이다. 아니, 이 미지의 자연과 인간들 모두 우리들의 분신이다. 그들은 다만 이 진실이라는 갈림길에서 각자 헤어졌을 뿐이다.



내가 보기에 그간 내가 체험해 온 것은 바로 커츠의 극한 상황이었어. 사실, 그는 마지막 한 걸음을 성큼 내딛으며 죽음의 문턱을 넘어갔던 거야. 그러나 나는 그 문턱에서 머뭇거리다 물러서도록 허용되었지. 아마도 그와 나 사이의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을 거야.
- 본문 중에서


그러나 진실에 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인생이라는 건 우스운 것, 어떤 부질없는 목적을 위해 무자비한 논리를 불가사의하게 배열해 놓은 게 인생이라구. 우리가 인생에서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우리 자아에 대한 약간의 앎이지. 그런데 그 앎은 너무 늦게 찾아와서 결국은 지울 수 없는 회한(悔恨)이나 거두어들이게 되는 거야. 나는 죽음을 상대로 씨름을 해왔어. 그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다툼 중에서도 가장 맥빠진 다툼이지. 그 다툼은 어떤 막연한 회색 공간에서 일어나는데, 발 밑에 딛고 설 땅이 없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으며, 구경꾼도 없고, 소란도 없고, 영광도 없고, 승리를 향한 커다란 욕구도 없고, 패배에 대한 커다란 두려움도 없고, 미지근한 회의(懷疑)로 가득한 그 진저리나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 자신의 정당함에 대한 많은 믿음도 없이, 또 우리 적수(敵手)인 죽음에 대한 믿음은 더더구나 없이 다투기만 하는 거야. 만약 이런 것이 궁극적 지혜의 형식이라면 인생은 우리 몇몇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어. 나는 내 삶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릴 마지막 기회를 간발의 차이로 놓쳤지만, 어차피 내게는 아무런 할말도 없었을 것임을 알고 굴욕감을 느꼈을 뿐이야. 내가 커츠를 주목할 만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어.
- 본문 중에서


이 무시무시한 진실의 모습을 직접 대면한 커츠는 단지 <무서워라! 무서워라!>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고, 화자는 커츠의 사랑스런 애인 앞에서 은폐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진실의 핵심이자 암흑의 핵심이며 은폐될 수밖에 없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위험하거나, 배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 이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진실을 가슴속에 품고 죽음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지도 모른다. 화자에 따르면 진실이란 위대하지만 비정하며, 우리들의 사회란 죽어가는 흑인 노예가 어색하게 두르고 있는 소모사(梳毛絲) 조각과 같다. 화자는 진실의 땅 위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작업장에서 쫓겨나 서서히 죽음을 기다리는 흑인 노예의 비유를 통해 희미하게나마 그려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곳은 다름아니라 작업을 돕던 원주민 중의 몇몇 사람이 물러나서 죽음을 기다리는 곳이더라구.
그들은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네. 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었고 죄수들도 아니었지만 이미 이 세상 사람다운 데는 없이 질병이나 기아로 인해 죽어가는 검은 셩상들에 불과했으며 그 침침한 녹음 속에 어지럽게 누워 있었을 뿐이야 일정 기간의 고용 계약이라는 합법적 수단으로 해안 각처에서 끌려온 후 자기네 체질에 맞지 않은 환경에 내던져진 채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다가 지금은 병이 들어 비능률적인 노동자로 전락하니까 작업장에서 기어나가 그늘에서 쉬도록 허락되었던 거야. 이 죽어가는 형상들은 이제는 공기처럼 자유로웠지만 한편 공기처럼 엷은 존재들이기도 했어. 나무 그늘 속에서 반짝이고 있던 그들의 눈이 보이기 시작했어. 그래서 내려다보니까 바로 내 옆에 한 사람의 얼굴이 보이더군. 그 피골이 상접한 검은 몰골은 한쪽 어깨를 나무에 기댄 채 다리를 죽 펴고 누워 있었어.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가더니 우묵히 들어간 휘둥그런 눈이 나를 멍청하게 쳐다보는 거야. 그러나 그 안구의 깊은 곳에서 새어나오던 이미 시력을 잃은 듯한 흰 빛은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어. 그는 젊은이 같았는데 혹시 소년이 아닌가도 싶었지만 우리로서는 그들의 나이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웨덴 선장의 배에서 얻어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선원용 비스킷을 하나 그에게 내미는 일밖에 없었다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그걸 움켜잡긴 했지만 다른 동작이나 다른 눈길은 보이지 않더군. 그는 목에 하얀 소모사(梳毛絲) 조각을 두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왜 두르고 있었을까? 그걸 어디서 구했을까? 그건 배지였을까, 장식품이었을까, 부적이었을까 아니면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한 조처였을까? 혹시 어떤 이념이 그것과 관계되어 있기라도 했을까? 이런 생각이 들더군. 어쨌든 바다 건너에서 가져온 이 하얀 실 토막이 그의 검은 목에 둘러져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지.
- 본문 중에서



에필로그




“진실은 시간이라는 이름의 옷을 벗어버린 진실이지. 바보들이야 입을 벌리고 몸을 떨고 있겠지만,
용감한 인간이라면 진실을 알면서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을 것이네.”
- 본문 중에서

여기서 진실은 무엇인가?
→ 이 소설은 진실의 층위를 문제삼고 있다. 분열된 자아와 분열된 진실이라는 문제는 혼란된 시대상황만큼이나 우리들의 지적 체력을
요구하는 본격적인 문제들이다. 화자는 이 이야기에서 "백인들"과 나를 구분하고 있고, 오히려 "원시인"들에게 친근감을 느낀다.
사실 그것은 저자가 의도적으로 '뒤틀은 구조'이다. 여기서는 오직 '옷입은 원시인'과 '옷벗은 원시인'이 있을 뿐이다.
'시간'은 문명과 동의어이다. 이곳에서 원시인들이 보이는 원초적 행위들이 화자에게 익숙하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소름끼쳐 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전혀 다른 대상으로 보인다. 진실은 그들을 비웃고 있다. 물론 화자도 그
비웃음을 벗어날 순 없다. 진실은 화자에게도 좀처럼 속살을 보여주지 않으며 좀더 용감하다고 할 수 있는 커츠를 매혹시키고는
파멸에 이르게 한다. 여기서의 진실은 비정한 진실이자, 익살스러운 존재이다.


커츠는 어떠한 유형의 식민주의자이며, 그는 식민주의의 어떤 측면을 대변하는가?
→ 커츠는 식민주의 그 자체이다. 즉 식민주의가 가지는 온갖 생리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커츠가 콩고에 들어가기 전에 제출한
보고서에 의하면 그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을 계도해야 한다는 사상이 다분히 드러나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커츠의 궁핍함이 그려진다.
식민주의자들의 양면성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겉으로는 교화를 외치면서도 실질적인 이익을 끝까지 추구하는 식민주의 근성이다.
그 모순은 커츠의 막사에 걸려 있는 두 개의 목을 만나 여지없이 드러난다.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중
용감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교화시키려는 백인들의 가식이 똑바로 보인다. 그들은 위압으로도 누를 수 없고, 설득시킬 수도 없다.
명분과 정의가 없다는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화자는 그들이 '진압된 것일 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커츠의 가장 통속적인 측면에 기생하는 지배인과 회계 직원은 좀더 노골적으로 식민주의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오로지
실적에 의해서만 커츠를 판단하고 있으며, 지배인은 더 나아가 '좀더 뽑아낼 수 있었는데, 커츠가 괜히 반발심만 키워서 일을 그르쳤다'
고 불평하기까지 한다. 커츠가 식민주의의 늪을 빠져나오려고 한 순간 "백인들"에게도 "진실"에게도 용서받을 수 없다.
커츠의 죽음이 어떤 '죄과'를 의미한다면 이것이 커츠의 명백한 죄과일 것이다.


말로는 왜 커츠의 약혼녀의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아주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는가?
→ 그것은 이 이야기가 다루고 있는 '진실 자체'의 문제를 함축한다. 커츠는 진실을 가지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태다. 그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오히려 왜곡될 수도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면 진실 자체는 이미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다.
진실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때로는 조작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진실이 그만큼 진실과 멀다는 것을 말하며,
최소한 진실의 작은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말한다. 과학자들이 흔히 하는 오류는 순진하게 진실의 정당성을 맹신한다는 것이다.
아르키메데스가 그러했고, 갈릴레오가 그러했다. 우리는 그나마 진실의 편린을 정성스레 모아, 좀더 안정적인 진실의 상에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말로가 커츠의 약혼녀에게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이다.


커츠는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의 핵심’을 궁극적으로 인식하게 되는가?
→ 만약 '어둠의 핵심'을 '진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면, 커츠는 이미 죽는 순간 진실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물론 진실의 제일보를
보여준 것은 커츠였으나, 이제는 말로가 진실의 증언자가 되고 있다. 진실의 모습은 커츠의 삶보다 더욱 복잡하다.
커츠가 죽은 이유는 진실의 모습을 온전히 사유하지 못한 이유가 크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은 어느 정도 관조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커츠는 출발부터 진실을 배반하고 있었고, 자신이
대면한 진실의 일부를 꽉 움켜잡고 동화되어 버린다. 깊고 어두운 수렁에 빠져들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말로가 암흑의 핵심에서 살아돌아온 것을 보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의 모습이 궁극적으로 어두운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말로는 왜 커츠에게 집착하며 동질감까지 느끼는가. 영국에 돌아와서도 커츠를 기억 속에서 지우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 말로가 커츠를 찾는 이유는 의무감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보다 호기심이 더 강했다. 그의 보고서를 이미 보았고, 그에 관한 이야기는
무수히 들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말로는, 원주민들이 자신의 오래된 본성을 일깨워주었듯이, 오래된 영혼을 일깨워준 커츠를 만나고자 한다.
즉 커츠는 말로의 분신이다. 진실은 오래도록 두 영혼을 묶어두고 있었으며, 그 구속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둘에게 부과된 사명이다.
커츠가 그 속으로 먼저 들어갔다. 거기서 온갖 모순과 원초적 본성에 시달리며, 그것을 정확히 주시하는 마지막 순간에 '두렵다'는
일말의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너무 늦게 알아버린 것이다.
말로는 이 지점에서 커츠와 헤어진다. 진실은 커츠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말로를 놓아주지만, 오른손을 놓아주었을 뿐이다.
말로는 또다른 손을 펴보기 위해 커츠만큼의 무시무시한 모험을 감행해야 하며, 그때까지 '유보된' 것이다.


말로의 이야기의 등장인물 중 왜 말로와 커츠만이 이름을 가지고 있을까?
→ 만약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이름을 붙일 필요를 느낀 인물이 있다면 이 두 사람 뿐일 것이다.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백인들'이나 '약혼녀', '지배인' 등으로 부를 수 있다. 이들은 진실의 핵심이 아니라 각 층에 서식하는 기식자들이며, 배경과 같은
인물들이다. 때문에 이들은 진실이 굳이 구속하려 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에서는 이름을 가진 두 명확한 인물을 구심점으로 그려진 수채와와 같다.


왜 말로의 기억 속에서 커츠는 ‘목소리’ , ‘담론’ , 또는 ‘달변’으로 이미지화 될까?
→ 말로는 진실의 허상이다. 진실인 듯 보이지만, 이미 이만큼 진실에서 빗겨져 있다. 이야기 속에서 실제로 화자가 말로와 대면하는
지면은 극히 적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모든 지면은 커츠에 관한 풍문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곧 진실이 자신의 몸을 숨기는
오래된 습관과 일치한다.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진실이 아니다. 커츠의 존재가 '목소리'나 '담론'으로 이루어진 것은
진실로 가기 위한 '이정표' 혹은 진실이 파놓은 '함정'일 수 있다.
오히려 진실은 말로가 커츠를 만나기 위해 겪어가는 과정 속에 녹아들어 있으며 그것이 또한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커츠는 분명 진실의 어느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진실의 증언자는 말로이며 그의 '행동'인 것이다.


화자가 말하는 진실의 모습이 왜 이렇게 무시무시할 수밖에 없었는가?
→ 어느 시인의 말처럼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생명을 걸어야' 한다. 곧 진실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저자의 진실은 희미하며 아슬아슬한 벼랑 위에 꽂힌 조그만 백년초와 같다.
그런 극단적이고 원초적인 조건이 없다면 진실은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저자에게는 명백하다.
이미 진실을 포기한 군상들이 이야기 곳곳에 널려있지 않은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진실이라 부르지 않는 건 명백하다.
우리들이 옛 성인처럼 달관의 경지에 있지 않고서야 생활 속의 관조는 불가능하다. 더구나 이렇게 인간성이 말살되고 모순이 팽배한
곳 속에서 진실을 얻기란 콩고의 어둠 속을 탐험하는 것보다 요원한 일일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신념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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