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코스 지음, 김병철 옮김 / 범우사 / 1999년 2월, 350쪽 

 

호전적인 스파르타의 법률에도 은 나라와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번 전쟁하는 것은 금지하고 있다. 적군이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 익숙해지면 전쟁을 통해서 오히려 적을 훈련하고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다. 후세의 아게실라우스 왕은 이러한 점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왕이 자주 전쟁을 한 결과, 처음에는 상대도 되지 않았던 테베스가 라케다이몬과 세력을 겨룰 지경으로 강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날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아게실리우스 왕을 보고 안타르키다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전쟁을 원하지도 않았고 또 할 줄도 모르던 테베스 사람들을 훌륭한 전사로 만드시느라 그토록 애를 쓰시더니, 그 값을 톡톡히 받으셨군요.”

  - 『플루타르크 영웅전』, 리쿠르구스」 편 중에서

 

습관의 힘은 무섭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사람은 죽음에도 익숙해질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 의해서 하나의 고착화된 이미지로 보인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더구나 그것이 내가 만든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옳은 소리를 한다지만 너무 자주 마음속의 이야기를 해버리면 진실의 의미는 이상하게도 상쇄되고 만다. 화를 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무는 개 짖지 않는다’라는 속담처럼 정말 무서운 사람은 자주 화내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무섭다.


습관과 함께 우리가 가진 적응력도 있다. 어디에 떨어지든 금세 적응해 버린다. 문학자나 철학자는 어디에든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작을 만들어낸다.


나는 내가 제일 무서울 때가 이미 어떤 일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잡고 있을 때이다. 거기에 이미 나는 없다. 어떤 일에 부딪치면 기계처럼 자동 동작이 나오는 것이다.


참 궁금하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만 신은 신비로운 것들을 보여주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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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드는 말을 들으면 그가 무엇에 눈이 가려 있는지를 알고, 마음 깊이 물들어버린 말을 들으면 그가 무엇에 빠져 있는지를 알며, 못된 말을 들으면 그가 어떻게 원칙에서 멀어졌는지를 알며, 그가 둘러대는 말을 하면 아쉬워하는 바를 안다.

詖辭에 知其所蔽하며, 淫辭에 知其所陷하며, 邪辭에 知其所離하며, 遁辭에 知其所窮이니라.

- ꡔ맹자ꡕ , 「공손추 상」 2


맹자는 바르지 않은 말을 하는 사람은 분명 뭔가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기울어진 부분을 잘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때로는 그것이 그가 의도한 것이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게 빠져드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들은 자신들이 꾀가 많거나 기술이 좋아서 온전히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빤히 보고 있는 사람 앞에서 술수를 부리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말은 서로에 대한 약속이기 이전에 자신에 대한 약속이자, 진실에 대한 약속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진실에 닿아 있어야 말로서의 품위와 의의를 지킬 수 있다. 그러나 말로서 말을 무마하고, 진실까지 어떻게 해보려는 사람들은 이미 듣는 사람에게 정당하지 못한 약점을 노출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오래 속일 수 없다. 지금까지 속여 온 것도 그들의 기술 때문이 아니라 그에 대한 믿음 곧 진실의 힘 때문이었다. 진실의 힘이 다 떨어지면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오랜 길을 돌아 진실로 다가가는 말은 있다. 그러나 진실에서 멀어지는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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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건 / 이원길 / 신원문화사, 326쪽(1,2회 두 권)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어느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시장 구석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이 둘이 뭔가를 두고 말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 아이들은 공자를 보더니 공자에게로 와서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첫 번째 아이가 말했다.



‘선생님, 우리는 지금 해가 언제 가장 커지느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요, 저는 해가 아침에 궁궐보다 더 크게 보이기 때문에 그 때가 가장 커진다고 생각해요. 중천에 떠버리면 주먹만해져서 미미하잖아요.’



두 번째 아이가 금세 대든다.



‘아니야! 선생님,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는 옷을 벗고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흐르기 때문에 가장 큰 거에요. 해는 뜨거운 불덩이로 이루어졌는데, 가장 뜨거울 때가 가장 클 때니까 한낮이 해가 가장 클 때가 아니에요.’



모두 공자에게 의견을 물었다. 고심하던 공자는 이내 입을 연다.



‘음,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누구의 이견이 옳다고 딱히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아이들은 실망하면서 돌아갔으나, 제자들은 뭔가 깨닫는 바가 있었는지 저마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 ꡔCEO 공자ꡕ 중에서





사람은 세상에 오래 살아갈수록 덕과 지성이 쌓여간다. 덕과 지성과 함께 커지는 것은 그에 따르는 명예이자 기대치이다. 대학교수나 학교 선생이라고 하면 아이들의 질문을 청산유수처럼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때문에 아무리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나름대로의 대답을 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고 내가 나의 기대치에 이끌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을 하려고 애쓴 적은 없는지 반성을 하게 된다.





만약 초등학교 초년생 같은 조카가 내게 뭔가를 물었을 때 나는 ‘모른다’고 용감히 대답할 수 있을까. 우리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속으로 진실은 숨어버린다. 우리들은 당연하다고 치부된 말의 쓰레기장을 뒤적이며 당연하지 않은 것을 발굴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학자들이 자신의 학문에 단순히 솔직할 수만 있더라도 지금처럼 낙후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하기도 한다. 진정 우리가 의지하고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할 수 없다’라고 듣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우리에게 ‘인간’이 아니라 ‘신화’가 되어 버린다면 그와 우리는 서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진실은 용기 있는 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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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우리가 삶에 걸고 있는 기대는 진실로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삶이 우리들에게 걸고 있는 기대인 것이다.”

우리는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멈출 필요가 있다. 그 대신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매일같이, 또는 수시로 삶에게 질문을 받는 존재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대답은 반드시 말과 명상이 아닌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처신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궁극적으로 삶의 의미는 삶의 문제에 대해 올바른 대답을 찾아내야 한다는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리고 개개인의 앞에 끊임없이 놓여지는 삶의 과제를 수행해 나가는 것이다.

- 빅터 플랭크, ‘죽음의 수용소에서’ 본문 중에서


빅터 플랭크 박사는 실존적 정신요법의 창시자이다. 인간의 정신을 히스테리로 세분화시키지 않고, 인격 단위로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가 삶에게 의미를 묻는 것이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의미를 묻고 있다는 의미심장한 표현은 니코스 카잔챠키스의 말을 연상하게 한다.


“신은 죽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살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신을 가지고 목적에 맞게 살렸다 죽였다 한다. 신은 우리의 논쟁 유무와 관계없이 자유로운 존재다. 그 자유를 인간적으로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어제 2호선을 타고 집에 가는 길에 한 부부가 타더니 에어컨을 틀지 않았다고 지하철공사에 전화를 하라고 부인한테 이야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당연하고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으면 불만을 거침없이 토로하는 것은 현대인의 익숙한 습성이지만, 이런 것들이 소중하기만 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참을 만한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누리는 시대가 얼마나 오랜 과정과 대가를 겪고 난 것인지 알기 때문에 쉽게 불평하지 않는다. 다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을 두고 불합리하고, 부당한 처사에 대해서 성토할 뿐이다.


자연과 세상의 모든 위대한 것들과 약자들은 말을 좀처럼 하지 않지만, 그것이 곧 침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 귀가, 내 눈이 어두울 뿐이다.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리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힘겹게 세상과 ‘대화’라는 것을 시도해야 한다. 그것이 정정당당하기도 하다. 세상은 나의 민원창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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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열전 - 상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이 말은 사마천이 사기라는 책을 다 쓴 다음에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즉, "나는 황제부터 해서 한무제 태초 연간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차례로 서술하여 마치게 되니 총합 130편이다."

나도 1~2년간의 스터디를 마치게 되었다. 나로서는 가장 끈질기게 매달린 사업을 마무리지을 수 있어서 기쁘다.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두 번씩 만나서 버벅대기도 하고, 사기를 쳐서 상대방을 현혹시키기도 했고, 데이투한다고 땡땡이도 많이 쳤다. 암튼 원년 멤버가 사기를 시작한 이래로 나와 선배 단 둘에 이르기까지 팀을 꾸려서 스터디를 마쳤으니, 연인원은 10여 명에 해당하고, 모임의 횟수는 대략 200여 회에 달한다.

나의 경우 그간 사용한 포스트이트의 분량은 크고 작은 것 500여 매, 쳐박은 볼펜 수는 10여 개, 공들인 시간은 3~400시간 등이다.

물론 수적인 데이터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냥 기억해두고 싶어서 남긴다.


사마천의 마지막 발언은 굉장히 의미심장하며 여러가지 애달픈 사연과 역사의 비정함이 담겨 있는 구절이므로 조금 옮겨 본다.


태사공 사마천은 말한다.
"아, 우리 조상은 일찍이 이 일을 주관하여 당우(唐虞) 시대에 이미 알려졌고, 주대(周代)에 이르러서도 이것을 맡았다. 그러므로 사마씨는 대대로 천관(天官)을 맡아왔고, 그것이 나에게까지 이르렀구나! 삼가며 새겨두어야 할 것이로다. 삼가며 새겨두어야 할 일이지..암!"
그래서 천하에 흩어져 있는 구문(舊聞)을 망라하여 왕업(王業)이 일어난 그 처음과 끝을 살피고 흥성하고 쇠망한 것을 살펴보았으며, 사실에 입각하여 논하고 고찰했다. 대충 3대를 추정하여 기술하고, 진나라와 한나라를 기록하되, 위로는 헌원[황제]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래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12본기」를 지었으니, 모두 조례를 나누어 기록했다. 그러나 시대를 같이하는 것도 있고 달리하는 것도 있어서 연대가 확실치 않으므로 「10표」를 만들었다. 또 [시대에 따라] 예악이 줄어들거나 늘어나고, 법률과 역법의 개정, 병권·산천·귀신·천인(天人)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폐해지는 것을 살피고, 세상의 변화에 적응해 나가는 내용으로 「8서」를 만들었다. 28수는 북두칠성을 향해 돌고, 30개의 바퀴살은 한 개의 바퀴통을 향하여 끝없이 돈다. 지금 보필하는 고굉의 신하들이 이에 부응하여, 충신(忠信)으로 도를 행하여 군주를 받드는 모습을 「30세가」로 지었다. 의를 지지하고 재능이 뛰어나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천하에 공명을 세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70열전」을 지었다. 무릇 130편에 52만 6,500자이니,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한다. 개략적인 것은 「자서(自序)」로 지어 본문의 빠진 부분을 보충하여 일가(一家)의 말을 이루었고, 육경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을 정리하고, 백가의 잡다한 학설을 정리했으며, 정본(正本)은 명산(名山)에 깊이 간직하고 부본(副本)은 수도에 두어 후세의 성인·군자들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제70을 자서로 마름하였다.

태사공은 말한다.
"나는 황제로부터 역사를 서술하여 태초(太初 ; 한무제의 연호)에 이르러 마치니 130편이다.
- 김원중 『사기열전(史記列傳)』(을유문화사) 하권을 참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정본(正本)은 명산(名山)에 깊이 간직하고 부본(副本)은 수도에 두어'라는 대목이다. 왜 정본을 명산 깊숙이 간직할 수밖에 없었을까.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한 해는 효무제(한무제라고도 함) 연간이다. 한무제는 한나라를 부흥시켜서 고려의 광종에 비유할 수 있는 명군이면서도, 잔인하기로는 진시황에 비유할 수 있다. 사마천은 유가의 덕목을 몸소 닦았으므로 형벌이 엄정한 법가에 점점 치우치는 한무제가 못마땅했다. 그래서 열전 안에 한무제의 죄상을 낱낱히 기록해 놓았다. 그중에 가장 두드러진 장은 '이장군열전'과 '급정열전'이다. 이 두 사람은 사마천이 보기에 한나라의 무신과 문신을 대표한다. 그러나 무제 때는 빛을 보지 못했다. 그 까닭은 자신의 소신을 다했고, 뜻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시의에 맞춰서 자기 자신을 맡긴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원문을 보다 보니 사기의 원본이 많이 산실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효경제와 효무제 본기는 아예 없어졌는데, 그것은 아마 한무제의 분노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을 접한 효무제의 분노는 대단했다. 한무제는 맹자를 아주 싫어했는데, 그것은 맹자가 역성혁명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심할 때마다 맹자의 초상화에다가 활쏘기놀이를 했다. 그 덕에 맹자는 송나라 주자학자들이 복원하기 전까지 그저 시중에 나도는 잡지책에 불과한 대접을 받았다. 사마천도 맹자와 비슷한 이유로 미움을 받았다.

사기열전 마지막 자서의 주에 이런 말이 있다. "사마천은 효경제의 단점과 효무제의 과실을 적나라하게 언급했는데 효무제는 노하여 책을 모두 없애버린 다음에 사마천을 이릉을 천거했다는 명목으로 연좌시켰다. 이릉은 흉노에 투항하였기 때문에 그를 두둔한 사마천을 잠실로 내려보내 궁형에 처하였고 이 때 사마천은 원망을 품었는데, 그가 옥사(獄死)하였다고도 한다."
※내 해석이 잘못되었을지 모르므로 원문을 싣는다.

漢書舊儀注曰司馬遷作景帝本紀極言其短及武帝過, 武帝怒而削去之後坐擧李陵, 陵降匈奴故下遷蠶室有怨, 言下獄死

아마도 그 과정에서 열전의 여러 부분과 무제와 관련된 사료가 소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 사마천의 연보를 제대로 볼 수가 없어서 어떤 식으로 사기를 저술하였는지 알 수 없고, 또 이릉의 화를 당하게 된 연도와 사기를 제작하는 연도의 관계가 모호한 구석이 있지만, 암튼 사마천이 마지막으로 위의 말을 했을 때 무슨 심정을 느꼈는지는 참 따라가보고 싶다.

사마천은 자기 할 말은 다 끝났다고 했는데,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아서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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