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맞춤법의 특징 중 유달리 중요시되는 것은 하나의 형태에 이질적인 의미를 가진 낱말을 무척 싫어한다는 점입니다. ‘부치다’라는 단어처럼 하나의 단어에 여러 가지 뜻이 달려 있을 수도 있지만, 그와 발음이 비슷한 ‘붙이다[부치다]’가 ‘부치다’와 혼용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글맞춤법 제6장(그밖의 것) 중에서도 마지막 손님인 57항에 그에 관한 방침을 명시해 놓았습니다. 언중들이 이 용어들을 혼용하는 이유는 1. 발음이 비슷하고, 2. 두루뭉수리로 써버리거나 3. 사동/피동형태를 모르거나, 의미를 분별하지 못할 때 등의 이유가 있습니다. 맞춤법에 명시된 것이나 일상적으로 쓰는 단어 중 빈번한 것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놀랠 정도로 → 놀랄 정도로

☞ 놀래다 → 놀라다의 사동형(놀라게 하다)



마음으로 바래다 → 마음으로 바라다

☞ 바래다 → 색이 바래다



세 살박이 → 세 살배기

☞ 박이다 → 살이 박이다(굳은살이 생기다)

※ 살이 배기다(백이다) → 살이 박이다



조리다 / 졸이다

조리다

☞ 어육이나 채소 따위를 양념하여 간이 충분히 스며들도록 국물이 적게 바짝 끓이다. (생선을 조리다, 생선조림)


졸이다( 졸게 만들다(사동형) / 초조해하다)

☞ ‘졸다’의 사동형

※ 졸다 : 찌개, 한약 따위의 물이 증발하여 분량이 적어지다. / 겁먹어 기를 펴지 못하다(‘쫄다’는 구어체)



부딪히다 / 부딪치다

무딪히다

☞ ‘부딪다’의 피동형 (~에, ~와 등 다른 사물이나 현상 등에 당하다는 의미)


부딪치다

☞ ‘부딪다’를 강조하여 이르는 말 (내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뚫고 가거나 마주치다 등 나의 행위가 능동적으로 문장에 드러나는 경우)



가름 / 갈음

가름

☞ ‘가르다’의 명사형(분별이나 구분을 뜻함)

예 : 이 일에 대해서는 가름이 잘되지 않는다

※ 판가름

갈음

☞ ‘갈다’의 명사형(대신하다 또는 바꾸다의 뜻)

예 : 저를 도와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로 축사를 갈음합니다.



든/던의 차이


'-든'은 선택적 상황에 대한 표현에 활용된다. 다만 반드시 둘 이상의 대상이 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 : 내가 무엇을 하든 무슨 상관이야!

예 : 네가 그것을 하든 말든. (하던 말던 X)

 

이에 비해 '-던'은 과거의 상황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선택적 상황은 올 수 없습니다.

예 : 공부를 하던 교실이다. (하든 X)


이 외에도 시대와 세대에 따라 문화와 지역에 따라 변천하여 구분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죽음 / 주검, 놀음 / 노름 등이 그 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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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1-29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져갑니다

승주나무 2006-01-29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니까, 두 번 가져가셨더군요. 좀 더 정진해서 연재 횟수를 늘리도록 하겠습니다.^^
 

[건강]연말 술자리 이것만은 지켜라


2005년 을유년도 한달이 채 안 남았다. 이맘 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한 잔 술로 지난 한 해 동안 이루지 못했던 계획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고 안 좋았던 일들을 털어내려 한다. 그러나 번번이 한 잔으로 시작했던 술은 한 병이 되고 두 병이 돼 연말을 술로 허덕이며 보내기 일쑤다. 물론 적당한 음주는 스트레스를 씻어주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독이 된다.

무엇보다도 간이 가장 큰 타격을 입는다. 간은 각종 영양분의 대사는 물론 뇌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독성물질들을 해독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그 해독능력을 넘어설 만큼 과음을 하게 되면 알코올 분해 과정에서 생긴 아세트알데히드라는 독성에 의해 상처를 받게 된다. 특히 장기간 과음을 하면 혈압이 높아지고 심장과 혈관 질환 등이 발생할 수 있고 남성호르몬 감퇴로 성욕이 줄어들고 발기부전을 유발할 수도 있다.

#몸 축나지 않게 술 마시기

몸무게가 60㎏인 성인의 경우 간에 무리를 주지 않는 알코올 양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하루 80g 정도이다. 이는 소주 2홉들이 1병, 맥주 2,000 포도주 600㎖ 기준 1병, 양주 750㎖ 기준 1/4병에 해당한다. 술을 마시는 횟수는 1주일에 2회를 넘지 않는 것이 좋다. 섭취한 알코올을 해독하고 간이 제 기능을 회복하는데 적어도 2~3일이 걸리기 때문이다.

술자리는 대개 속이 빈 상태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공복에 술을 마시면 알코올 흡수속도가 빨라지고 혈중 알코올 농도도 급격히 상승한다. 뿐만 아니라 직접 위 점막을 자극하므로 급·만성 위염이나 위출혈을 유발할 수도 있다. 따라서 가벼운 식사나 담백한 안주를 먹으면서 술을 마시는 것이 위를 덜 상하게 하는 방법일 수 있다.

술은 되도록 천천히 마시는 것이 좋은데, 소주 한 병을 30분 동안 마시는 것이 소주 두 병을 2시간 동안 마시는 것보다 더 해롭다. 술 마시는 속도를 늦추면 늦출수록 뇌세포에 전달되는 알코올 양이 적어지므로 간이 알코올 성분을 소화시킬 수 있는 충분한 여유를 부릴 수 있다.

술은 섞어 마시면 좋지 않다. 술은 각 종류마다 알코올 농도와 흡수율, 대사 및 배설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섞어 마실 경우 술끼리 상호 반응을 일으켜 더 취하게 만든다. 또 사이다나 콜라 같은 탄산음료수와 섞어 마시는 것도 삼가야 한다. 술과 탄산음료수를 섞어 마시면 술의 쓴맛이 없어지고 알코올 도수가 낮아져 마시기는 쉽지만 이는 위 속의 염산과 작용, 탄산수소가 발생하면서 위 점막을 자극해 위산 분비를 촉진시켜 결국 탄산수 자극으로 위산 과다를 발생시킨다.

#술과 함께 먹는 음식, 내장과 간에 그래도 쌓여

술에 의해 얻어지는 에너지는 축적되지 않으므로 우리 몸의 대사과정에 필요한 모든 에너지를 술에서 얻어지는 에너지로 쓰게 된다. 따라서 함께 먹게 되는 음식은 대부분 지방 형태로 전환되어 주로 내장과 간, 혈액 내에 축적됨으로써 복부비만과 지방간, 고중성지방혈증과 같은 고지혈증을 유발하게 된다.

을지대학병원 가정의학과 최희정 교수는 “술과 함께 먹는 음식이나 안주는 대부분 칼로리가 높으며 늦은 시간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먹고 마시게 되므로 위장질환이나 간질환이 생기기 쉽고 복부비만의 원인이 된다”며 “주 3~4회 음주를 하다보면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되고 충분한 휴식이나 수면을 취할 수 없으므로 생활 리듬이 깨지면서 만성피로를 유발하게 된다”고 조언한다.

#당뇨병, 고혈압, 관절염 환자 특히 조심

만성질환이 있는 환자들은 되도록 술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겠으나, 피치 못할 경우 보다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약물치료를 하지 않는 당뇨환자의 경우 과음과 과식은 혈당 상승으로 이어지며, 혈당강하제를 복용하는 당뇨환자의 경우에는 간에서 글리코겐을 분해하거나 포도당을 생성하는 과정이 저하되므로 저혈당이 발생하기 쉽다.

고혈압이 있는 환자는 다음날 혈압이 상승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으며, 약물치료로 혈압 조절이 잘 되던 환자도 지속적으로 음주를 하는 경우 약물의 용량을 올리거나 다른 약을 추가해야 할 정도로 혈압이 상승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관절염 환자의 경우는 소주 한 병 이상을 마실 경우 65%가 관절에 통증과 함께 부종이 생기고 28%는 아파서 걷기조차 힘들게 된다. 아세트알데히드가 관절로 가는 피의 흐름을 방해하고 그로 인해서 관절염이 더욱 심하게 된다. 특히 장기간 과음을 하게 되면 뼈를 만드는 세포가 파괴되고 칼슘 흡수가 저하되어 관절뿐 아니라 골다공증의 위험도 증가하게 된다.

#숙취 계속되면 지방간, 간경화로 이어져

많은 사람들이 과음한 다음날까지 구토를 하고, 머리가 무겁고 식욕이 떨어지는 것을 한번쯤은 경험한다. 이는 알코올이 대사되는 중에 생긴 산화물인 아세트알데히드라는 독성 물질이 혈액 내에 축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숙취 해소에 가장 좋은 방법은 보리차나 생수를 마셔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는 것과 섭씨 38~39도 정도의 온수욕을 하거나 땀이 날 정도의 운동을 통해 알코올 대사산물을 빨리 몸밖으로 배출시키는 것이다.

따뜻한 물에서 목욕을 하면 혈액 순환이 좋아지므로 해독 작용을 하는 간의 기능이 활발해진다. 그리고 그 이후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어 숙면을 취할 수만 있다면 더욱 좋다. 간장은 잠을 자는 동안에 가장 활발하게 술 찌꺼기를 처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음 후에 사우나를 찾아서 섭씨 40도 이상의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으며 오히려 해로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술을 많이 마시게 되면 탈수 현상이 생기게 될 가능성이 있는데 특히 사우나를 하거나 너무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게 되면 알코올 배출이 조금 빠를 수는 있겠지만 과도하게 땀을 흘림으로써 탈수 상태가 더 심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출처 : 경향신문〈이준규 의학전문기자·보건학박사 jk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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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김용민 화백의 휴가

김용민 화백이 '또' 휴가를 떠났다.

경향신문을 보면서 내 신문보는 습관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스포츠면부터 보기 시작하다가,

혹시나 해서 1면부터 보는 거였는데,

이제는 만평부터 보게 된다.

그것으로도 성이 안차 전날 저녁에 몰래 다음날의 만평을 훔쳐보기까지 한다.

다른 신문도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인터넷 신문은 다음날 기사를 미리보기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런데 '다음날 만평'이 실리지 않은 날은 1. 토요일 저녁, 2. (앗! 갑자기 까먹었다), 3. 김용민 화백의 휴가이다.

특히 내가 얼마 전에 있었던 김 화백의 휴가일을 기억하는 것은 경향 만평을 그만큼 찾는다는 말도 된다. 군에서는 이런 경우를 '땡보'라고 하는데, 군 생활 내내 그런 소리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병 인사를 (겉으로만) 좌지우지하는 '병 인사 관리병'이었기 때문에..
아무튼 김 화백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괜한 걱정이 들기도 한다. 경향 관계자에게 몰래 물어볼까? 혹시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귀띔이라도 좀...

그런 의미로 최근 만평 중 기억나는 혹은 기억할 만한 김 화백의 만평을 하나 덧붙인다.



미국의 명언

워싱턴에서 전해오는 정동식 특파원의 칼럼을 즐겨 본다. 항상 똑같은 사진이라 아쉽지만, 근엄한 표정이 묻어난다. 주제도 다양하고 '글빨'도 차분하고 진중해서 좋다. 어제자 기사 말미에 미국의 유력 잡지 "TIME"이 공화당의 보수화 전략과 부시 35%, 공화당 77%의 지지율을 보여주며 "비가 올 때 비를 막어주는 것은 지붕인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지붕"이라고 결론지었다고 했는데, 그 말이 참 명언인 것 같다. 그것을 한나라당에 적용하면 "한나라당이 별다른 쇄신 없이 죽쑤고 있어도 지지율이 올라가는 것은 한때 국시(國是)로까지 신성시되었던 반공의 은택이자, 극우 세력이 사회 모처에서 협력(?)하고 활약(?)하여 만든 핵우산" 때문이다.

미국의 명언 하면 생각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2001년에 911이 터지고 나서 4년 만인 2005년에 911 최종보고서가 제출된 것으로 기억하는 데, 보고서를 브리핑하던 총 책임 장성이 자료를 덮으며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미국이 911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미국의 국력이 약해서도 아니고, 정보력이 취약해서도 아니다. 바로 상상력(想像力)의 부재다."

이를 보고 나도 상상력의 의미를 환기하는 기회로 삼았다. 상상력이란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판타지'가 아니다. 상상력에 관해서는 과학자들이 전문가인데, 과학자에게는 2개의 상상력이 있다고 한다. 인문학적 상상력 외에 과학적 상상력이 하나 더 있는 것이다. 상상력은 확인할 수 없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힘이다. '논리'는 사실 상상력의 도구일 뿐이다.

명언까지는 아니지만, 이번에 MBC 사건을 접하고 참 안타까웠다. 이 방송사가 뉴스데스크를 통해 사과방송을 한 것만도 올해 일곱 번째라고 한다. 그야말로 '사과방송 데스크'라는 오명을 쓸 판이다. 미스터 엠비(엠비 씨)가 오기를 갖고 분발하고 자진하고 쇄신하고 정신을 번쩍 차리라는 의미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명언(明言)
을 하고자 한다. 엠비 氏는 명심( 銘心)하여 이를 극복하고 더욱 분발해주기 바란다. (그런 의미로 아주 새빨갛고 선명하게...)

정당한 의문(을) 부당한 방법(으로)

프랑스와 일본의 역사 왜곡

이 뉴스를 접하면 아마 나같이 잘 모르는 사람은 깜짝 놀랄지도 모르며, 잘 아는 사람들은 그저 그런 생각이 들 것 같다. 프랑스는 '2005년 2월 23일 법' 가운데 역사 왜곡을 주장하는 한 조문을 다수결로 재확인했다고 한다. 그것은 곧 과거 식문 국가에서 프랑스의 '긍정적 역할'을 교과서에서 인정하자는 것이다. 사실 지금 유럽의 발전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피와 살점으로 이루어졌으며, '100원을 버는 사람이 있고 그 100배를 고스란히 갚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처럼 오늘날 제3세계의 냉전과 갈등, 내전, 독재 등 분열과 고통의 정국은 제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철없는 애 도토리묵 해집어놓듯이' 철없는 제국주의의 애들이 인류를 초월한 자연과 문화와 역사와 신과 철학에 모조리 제국주의의 빨간색을 칠해버린 것이다.
프랑스는 북아프리카 식민지(알제리 등) 국가에서 토지를 개간하고, 방역을 하며, 근대화 교육을 시켰다고 주장해 왔고, 이번 기회에 교과서에 정식(?)으로 올릴 심산인가보다.

우려할 만한 일은 내가 프랑스를 미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프랑스의 우경화 추세는 차치해놓고서라도, 프랑스는 1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 독일에게 방대한 배당금을 챙겨 독일 경제를 피폐하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독일은 그 가시밭길을 극복하며 점점 힘을 키웠고, 프랑스가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까지 자라나자 프랑스를 정복해버렸다. 이로서 프랑스는 세계의 웃음거리가 된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프랑스를 어떻게 봐야 할까? 혼란스럽다. 일본과 같은 수준으로 봐야 할 것인가? 프랑스 학생들이 힘겹게 치른다는 바칼로레아는 한낱 프랑스식 과시에 불과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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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5-12-08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우연히 김용민 화백과 통화를 했습니다. 또 휴가간 이유는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고, 회사적인 일이기도 하답니다. 우려했던 '별일'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플라톤의 저서를 읽기 위해 그 작품의 연대를 상세히 전하는 철학사의 한 부분을 인용한다. 쓰고 보니 플라톤의 저작이 적잖게 소개돼 있는 것 같다. 플라톤 연구가로 유명한 박종현 선생이 서광사와 함께 플라톤 전집을 작업 중이신데, 그 작업이 별탈없이 마무리되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플라톤이 출간했던 전집이 아직도 보존되고 있다. <변명>과 서간을 제외한 모든 저작들이 대화형식으로 씌어 있다. 플라톤의 저작활동은 약 50년간에 걸쳐 펼쳐진다.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 하나의 저작들을 연대순으로 상당히 정확하게 이 기간 내에 배열할 수가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을 청년기, 과도기, 원숙기 및 노년기의 것으로 구별한다.

 

청년기의 저작들 중에서, <라케스>는 용기, <카르메니데스>는 사려>, <에우티프론>은 경신, 지금은 <국가>의 제1권으로 읽혀지고 있는, <트라시마코스>는 정의, 그리고 <프로타고라스>는 전체적인 덕의 본질을 다루고 있다. 더 나아가 <이온>, 힙피아스 I과 II>, <변명> 및 <크리톤>도 이 시기에 속하는 것들이다.  모든 대화편들은 가치와 앎이라는 소크라테스가 제기한 문제들을 소크라테스의 방법으로 다루고 있으나, 이 모두가 다 끝까지는 해결하지 못하고 만 문제(아포리아=Aporie)로 끝을 맺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플라톤이 이미 자기의 최초의 시기에, 스승을 능가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점차로 새로운 것을, 특히 <이데아론>을 주장하는 일련의 저작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과도기의 저작들이다. 이 시기에 속하는 저작들로서는, 우정을 논하는 <리시스>, 플라톤의 언어철학을 내포하는 <크라틸로스>, 소피스트들, 특히 안티스테네스의 괴변을 비웃는 <에우티데모스> 및 조그마한 <메넥세노스> 등이 있다. 이 대화편들도 첫 번째의 시실리아 여행 이전에 씌어진 것들이다. 그런데 <메논>과 <고르기아스>는 그 뒤에 씌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두 편의 대화는 피타고라스의 영혼윤회설의 영향을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메논>에서는 덕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고르기아스>에는 소피스트들의 방법과 세계관에 대한 격렬한 고발이 담겨져 있다.

원숙기의 저작들은 세계문학의 걸작들로 손꼽히는 것들이다. <파이돈>은 죽음에 관한 대화다. 우리들은 감각과 감각적인 세계 때문에 죽는데, 죽음으로써, 정신, 즉 죽지 않는 영혼은 풀려나 이데아의 세계로 올라간다고 말하고 있다. <심포지온>(잔치 또는 향연이라고 번역됨)은 삶에 관한 대화다. 우리들은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다 보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파이돈>에서는 철학과 순수한 앎에 의해서라고 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에로스(Eros)에 의해서 우리들을 근원적인 아름다움과 영원한 가치의 나라로 올라가게 하라고 권하고 있다. 플라톤의 주저, 즉 10권으로 되어 있는 <국가 정체>(Politeia)에서는 정의가 본래적인 주제(테마)로 되어 있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인식론ㆍ형이상학ㆍ윤리학ㆍ교육학ㆍ법철학ㆍ국가철학 등 철학 저니체가 논해지고 있다. 올바른 것과 참된 것, 여러 가지 이상(理想)의 세계 등은 어디에서든 볼 수가 있다. 이렇게 해 놓은 이유는 우리들이 이런 것들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늘에는 임 원형이 있다. 그래야 착한 의지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그들 자신을 그것에 따라 형성해 나갈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략 374년 경에 <국가>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 다음에 오는 것이 <파이드로스>인데, 이것은 엄밀하게 가려내는 기술에 관한 작품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주제만 보자면, 수사학(修辭學)에 관한 것 같으나, 실제론은 플라톤의 철학 전체를 요약해 놓은 것으로서, 플라톤 철학에 관한 가장 좋은 입문서이다. 그 다음이 <파르메니데스>인데 여기서 플라톤은 자기의 이데아론의 여러 가지 아포리아들에 관해 변명을 하고 있다. <테아이테토스>는 주로 인식론의 문제를 좇으면서, 헤라클레이토스, 프로타고라스, 안티스테네스 및 아리스티포스 등과 대결하고 있다.

 

 

 

 

 

367년 이후의 저작들은 노년기의 저작들로서, <스피스테스>, <폴리티코스> 및 <필레보스> 등이 있다. 여기서는 플라톤의 관심의 대상이 달라진다. 오직 <필레보스>에서만 가치의 문제가 한 번 더 나타날 뿐, 다른 곳에서는 논리적ㆍ변증법적인 문제들이 주로 다뤄지고 있다. <소피스테스>는 소피스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추구하고, <폴리티코스>는 정의(定義)ㆍ내포ㆍ외연ㆍ분류 및 구분 등의 관점에서 정치가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추구한다. <티마이오스>는 플라톤의 우주론이다. 이 대화편은 이후 수세기에 걸쳐 서구의 세계상을 형성하였다. 플라톤의 생활을 매우 잘 밝혀주는 제7서간은 아주 말기에 속하는 저작이다. 제일 마지막 저작, 즉 <법률>(Nomoi) 12권은 이미 플라톤 자신이 간행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읽고 있는 <법률>은 아마 오푸스의 필립포스가 편집한 것일 게다. 이 <법률>은 다시 한 번 국가를 주제로 삼는다. 그러나 이 노년기의 작품은 이미 <국가>가 가지고 있는 그런 철학적인 정열과 사변적인 비약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 대신에 정치적ㆍ법률적ㆍ종교적 및 특별히 교육적인 규범들로 가득찬 자상함과 폭을 가지고 있다. "가장 깊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가장 생생한 것을 사랑한다." 이 시기의 저작들에서는 백발이 성성한 노철학자의 생활경험과 원숙한 지혜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제 플라톤도 훨씬 너그러워졌다. <국가>에서 부인들과 어린이의 재산을 공유하라고 하던 과격한 요구는 <법률>에서는 빼버리고 말았다. 기타의 모든 플라톤의 대화에서 말을 이끌어가던 소크라테스는, 노년기의 저작들에서는 차츰차츰 물러앉고 만다. <법률>에는 소크라테스가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대화의 형식이 이렇게 바뀌는 것은 플라톤의 사상이 바뀌었다는 증후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그의 스승을 너무나도 멀리 넘어서 버렸기 때문에 자기의 사상을 스승의 입에 담게 할 수는 없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출처 :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서, 이문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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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 문명과 문명의 대화, 개정판 살아있는 휴머니스트 교과서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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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들의 저항사



제목을 다소 특이하게 ‘약자들의 저항사’라고 붙인 이유는 이 책의 집필 의도이기도 하지만, 세계사를 하나의 관계사로, 그리고 하나의 드라마로, 하나의 전체로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역사가 그 사실 안에 숨기고 있는 힘의 원리를 드러내고,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을 정해준 것은 가장 매력적인 점이다.


사실 세계사는 힘의 관계사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서 최소한 힘은 두 가지 의미로 전승된다. 힘이 있으면 상대를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합법적으로’ 빼앗을 수 있다. 이것은 곧 힘의 유혹이다. 18세기 유럽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습격하여 일부는 식민지로 만들고, 일부는 물건을 팔기 위한 시장으로 만든 것은 제국들이 힘의 첫 번째 원리를 철저히 인식하였다는 말이고, 노회(老獪)해질 대로 노회해진 그들이 남긴 것은 내전과 독재, 민족 갈등, 종교 갈등 등 자국의 이익과 상관없는 결과이며, 한편으로는 그들이 부당하게 이익을 벌어들인 비용을 치른 결과이다. 지금도 서남아시아의 종교 갈등과, 아프리카의 독재·인종탄압, 곳곳의 끊임없는 내전 등은 철없는 가족의 빚을 대신 갚아주는 것과 같이 제국주의가 타다쓴 빚을 피와 갈등으로 갚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제국주의가  이익을 얻는 방법이란 천박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그들이 100원을 번다면 그 100배에 달하는 부대비용을 나머지 세계가 부담해야 하는 구조로 역사는 흘러왔다. 오늘날 세계의 불균형한 부의 격차는 이런 비효율적인 경제 운용방식의 반영일 뿐이다.


여기까지가 우리들이 배운 역사서의 내용이다. 무릇 힘이 있는 자들은 언제나 화려하다. 힘에 의해 자본에 의해 정치력에 의해 역사는 언제나 미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미화는 대개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이들이 역사의 주인공은 아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이하 ‘살아있는 세계사’)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은 부분은 바로 나머지 ‘힘의 원리’를 세계사 곳곳에 반영함으로써 진정한 역사의 주인공을 가려냈기 때문이다. 약자들의 저항사가 드러난다면 강자들은 한낱 약자를 단합하고 단련시키기 위한 트레이너로서 그 가치를 마감하게 된다. 괴롭힌 사람보다 괴롭힘을 이겨내 승리한 사람을 승리자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는 ‘제국의 보물창고’라는 이유로 피폐하고 고단한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자신들의 소중한 것들을 지키는 ‘힘’이 필요하다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는 이 두 가지 힘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 다만 그 힘은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철저히 지배당하거나 완전히 독립해야 한다.



역사가 문학을 만났을 때



이 책의 특징은 본문과 어우러진 다양한 시청각 자료와 ‘역사 속의 테마 기행’이다. 당대의 한 구성원의 입장에서 현실과 일상, 속내를 전한다. 시점(視點)을 달리하며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현장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저술한 작품이어서 그런지 ‘한글맞춤법’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구사하고 있다. 물론 그 적용이 너무 기계적인 경우(예컨대 조국을 의미할 경우 ‘우리나라’는 붙여 쓰는 것이 옳다)도 있었지만, 이 책의 한 문장 한 문장을 꼼꼼히 살펴보면 맞춤법·띄어쓰기 실력을 기를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사 교과서’에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역사 면면이 하나의 큰 흐름 안에 전개된다는 사실이다. 기존 역사서의 나열식 구조를 탈피해서, 역사적 사실마다 인과의 관계를 형성했다. 이슬람 제국과 몽골 제국의 유라시아 정벌을 보여주는가 하면, 이슬람과 몽골 제국에 지배당한 국가들의 입장에서 그 사건을 다시 보고 있다. 하나의 사건은 각각 다른 입장의 경험자들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면만을 조명한다면 역사가 드러나기 힘들다. 반드시 영광이 있으면, 영광에 희생된 자들의 사실도 언급해야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점에 대해서 적잖은 배려를 하고 있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를 통해 커다란 인과관계를 접하고, 세부 사실로 나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역사는 진정한 현대사’라는 말이 있다. 시대와 현실에 따라 언제나 다시 읽혀야 한다. 다시 읽고 다시 판단하다보면 잘못된 점을 발견할 수도 있고, 안타까운 역사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도 있다. 세계사는 하나의 유기적인 생물체처럼 나의 마음과 현실 안에 헤엄쳐 다녀야 하며, 나는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영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지금도 나는 역사 위에 서 있기 때문이며, 이 역사를 누군가는 몇 번이고 다시 살펴볼 것이기 때문이다.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좋은 책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특히 정신이 없어서 2주 남짓한 시간 동안 두 권의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데 무리가 있었지만, 조금씩 틈을 만들어 이렇게 글을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역시 저에겐 즐거운 역사로 남게 되겠죠. 이 책을 읽으며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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