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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세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 고전총서 서양문학 4
B. 파스칼 지음, 김형길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2006년의 설을 전후로 '미래'와 '현재'에 치중하던 나의 '읽고 쓰기'가 '과거'로 약간 이동했다. 지나간 글을 돌이켜 보고, 정리를 하자는 뜻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속도에 대한 반성'이다.
동양철학은 허투루로 배운 줄 아느냐! '느림의 미학'보다 중요한 미학은 '일시정지' 즉, '엑스캔버스하다(XCANVAS-hada)'이며, '돌아감'이다. '돌아감'이라는 말은 참으로 풍부하게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안성맞춤의 용어이다. '빙 돌아감'과 '회귀'와 '돌아가심'이라는 뜻이 모두 담겨 있다. 옛말에 '게으른 선비가 책장을 헤아린다'는 속담이 있다. 책을 읽다 보면 '권수'와 '페이지수'에 눈이 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텍스트와의 진정한 독대'를 이루기 위해서는 뒤로 돌아가 보기도 하고, 처음부터 다시 읽기도 하고, 아예 베껴써보기도 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과거 읽기'가 천박한 '쪽수 헤아리기'의 못된 병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에잇! 서두가 너무 길어졌다.
철학자가 가장 철학자다워 보일 때는 '모순'이나 '역설'을 이용해서 사상을 전개할 때이다. "쾌락과 고통은 우리들의 욕망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기 때문에 그 사물을 욕망 하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 사물을 욕망하기 때문에 사물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다"라고 한 스피노자의 명쾌한 주장도 유쾌하며, "의미는 말에 품위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에서 품위를 얻는다"는 파스칼의 주장도 시원스러워서 좋다.
자타가 공인하는 파스칼의 미덕은 '간명한 문장'이다. 다른 말로는 '금언', '격언', '아포리즘', '잠언' 등 여러 가지 말로 불리기도 하는데, 파스칼 자신이 '늘어지는 문장'을 매우 싫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정신이 번뜩 하는 것은 한 줄이면 충분하다. 그것이 시가 영원히 살아남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랄리스트'는 '인간성' 자체를 탐구하는 사람들이다. 도덕적 사상이 전개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솔직담백한 각성이 필요하다. 때문에 '도덕'으로 가기 위한 '자기 반성'이 모랄리스트들이 주로 한 일이었다. 이 두 가지 키워드를 고르게 묻혀야 그 의미가 드러나므로 한쪽의 의미에만 너무 경도되지 않기를 바란다.
파스칼의 모랄리스트적 면모는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처세'에 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보다 '근원적인 것'에 있다. 이 역시 서로를 염두에 둔 철학이기 때문에 양분하기 힘들다. 팡세의 구절 중에
남을 효과적으로 훈계하고 그의 잘못을 지적해 주려 한다면, 그가 사물을 어떤 측면에서 보고 있는가를 관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사물은 보통 그 측면에서는 올바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올바른 점을 인정하면서 그의 잘못된 다른 측면을 지적해 주어야 한다. - 본문 중에서
라는 내용을 보자. 이것은 '처세'와 더욱 연관이 있겠지만, '근원적인 것'을 무시하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파스칼의 철학은 근원적인 것이 처세적인 것을 향하며, 처세적인 것은 근원적인 것을 줄기차게 향하는 구도로 정리돼 있다.
파스칼의 '근원적인 사유'를 이야기할 때 가장 어울리는 말은 '모순'이다. 철학자든 문학자든 모두 이 동굴에서 태어났다. 파스칼은 철학, 문학, 과학에 두루 걸쳐 있기 때문에 그의 '모순'은 보다 강력한 힘을 갖는다.
인간의 위대성은 자기의 비참함을 아는데 있다. 나무는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자기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위대한 일이기도 하다. - 본문 중에서
위대성과 비참함은 묘하게 중첩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안정된 '의미'를 이룬다. 모순과 역설이 '강력한 철학'의 동력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들의 타성에게는 '경종'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바꾸어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철학자는 간단히 앞과 뒤의 말을 바꿈으로써 놀랄 만한 의미를 만들어낸다. 습관과 본성은 어떠한가.
습관은 제2의 본성이며, 이 제1의 본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런데 본성이란 무엇인가? 습관은 본성적이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될까? 습관이 제2의 본성인 것처럼 이 본성 자체가 제1의 습관이 아닐까? - 본문 중에서
이것뿐만 아니다. 방정식에 비유하자면, 우리는 좌변과 우변을 거꾸로 두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아예 중요 지수를 빠뜨리는 일도 많다. '잃어버린 지수, 언어'를 되돌리는 일도 철학자의 역할이다. 문학자와 철학자가 자꾸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은 '창조자'가 아니다.
나의 저작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의 저작에는 이미 많은 사람의 저작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저작'이라고 해야 한다. - 본문 중에서
파스칼은 그의 학문 영역 만큼이나 사유의 스펙트럼이 넓다. 단순히 한 문구씩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유익하고 놀라운 이야기가 많다. 그리고 요즘도 많은 문필가들에게 인용되는 단골 문구인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는 말과 같이 파스칼은 '실존 철학'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종교' 이야기이다. 우리는 '신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종교를 부정하지만, 파스칼은 '신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종교를 긍정한다. 신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신이 아니라 인간과 다름 없는 어리석고 미천한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그의 화법이 어김없이 드러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는 신이나 종교에게 무리한 '인간적 강요'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팡세의 상투적인 수식어로 빠지지 않는 것이 '미완성'이라는 꼬리표이다. 물론 파스칼이 '필생의 역작'을 의도로 작업을 하다가 요절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다면 너무 '무책임한 독자'가 되어버리지 않을까? 그것을 '완결'짓는 것은 파스칼이 아니라 '나'가 아닐까. 모든 '완결'된 저작들이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