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사만 알아도 띄어쓰기의 반은 넘은 셈 2


- 품사의 궁합




우리가 체언과 용언, 어간과 어미를 잘 알아야 하는 이유는 이들이 각 문장 성분을 배열하는 뼈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똑같은 말도 체언과 어울리느냐 용언과 어울리느냐에 따라 띄어쓰기를 달리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성분들이 점집에 갔습니다. 왜냐구요? 궁합을 보기 위해서죠.


체언을 먼저 알아봅시다. 체언은 오만한 귀족입니다. 왜냐하면 자립성이 굉장히 강하기 때문에 다른 말이 오지 않아도 웬만한 의미는 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어에서는 ‘자립성’이 강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띄어쓰기의 적용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한글맞춤법 제2항 아시죠? 다른 것은 몰라도 한글맞춤법 제1,2항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제1항 한글 맞춤법은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 


제2항 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한다.




제2항에 나오는 ‘각 단어’라는 것은 ‘자립성을 갖춘 단어’를 말합니다. 일단 모든 명사는 자립성을 갖추었습니다. 자립성을 갖추었다는 것은 그 말만으로 내용 전달을 할 수 있거나 뒤에 다른 말이 오지 않아도 말이 성립되는 것을 일컫습니다. 명사, 대명사, 수사, 의존명사, 단위명사 등 명사족은 모두 자립성이 있으며, 관형사와 부사도 자립성이 있습니다.




조사(서술격 조사 포함), 접사, 연결어미 등은 자립성이 없기에 다른 말 옆에 기생하지 않으면 혼자 설 수 없습니다. 특히 조사(祖師)는 기생족들의 왕입니다. 이는 체언에도 붙고, 용언에도 붙고, 부사에도 붙고, 조사끼리 붙기도 합니다. 누군가 ‘-었-’이라고 하거나 ‘-이다’라고 말하면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지요?




①나는 그것을 잘 ②한다는 말을 ③반드시는 아니지만 그 ④사람만큼은 할 수 있다고 공언할 수 있다.




①은 조사가 체언에 붙은 경우, ②는 용언에, ③은 부사에, ④는 조사(만큼+은)에 붙은 경우입니다.


특히 한 단어가 어떤 때는 의존명사로 어떤 때는 조사로 활용되기도 하는데, 대표로 ‘뿐’을 봅시다. ‘뿐’은 체언과 놀 때는 조사로 쓰여 서로 붙여 씁니다. 하지만 용언과 어울릴 적에는 ‘의존명사’로 쓰여 띄어 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의존명사는 명예로운 명사족이므로 자립성이 투철할 뿐만 아니라 용언도 역시 하나의 단어이므로 서로 다르고 자립성 있는 단어끼리는 띄어 써야 한다는 원칙에 의해 띄어 쓰게 됩니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그도 그것을 할 수 있을 만큼 자랐다.




앞의 ‘만큼’은 ‘나’라는 체언 앞에 조사로 활용돼 붙여 쓰지만 뒤의 ‘만큼’은 ‘있을’이라는 용언 뒤에서 ‘의존명사’로 활용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있을’에 있는 ‘ㄹ’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있다’의 어간과 결합해 앞 말이 관형사 구실을 하게 하는 어미입니다. 국어사전에 ‘ㄹ’이나 ‘ㄴ’의 쓰임도 자세히 나와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에는 이런 품사를 휘두르는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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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사만 알아도 띄어쓰기의 반은 넘은 셈 1


-체언과 용언, 어간과 어미




글을 쓸 때 가장 힘든 부분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대부분 ‘띄어쓰기’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거창하게 ‘띄어쓰기만 제대로 해도 우리말의 대부분은 통달한 셈’이라고까지 합니다. 나도 ‘띄어쓰기’에 자신이 없어서 서점에서 두꺼운 ‘띄어쓰기 사전’이라는 것과 ‘띄어쓰기 편람’을 샀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이 정성들여 쓴 논술지를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국어사전 하나면 띄어쓰기를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두꺼운 두 사전을 놔두고 주로 국어사전을 보며 첨삭을 하며, 거기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한국어맞춤법/문법 검사기’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국어사전이 ‘굉장한 마술사전’인 점에 대한 소개를 하기 전에 띄어쓰기를 게임이라 생각하고 룰을 정해보겠습니다.




우리말의 체계는 크게 체언과 용언으로 구분됩니다. 체언과 용언은 불교에서 말하는 ‘본체’와 ‘작용’에서 따온 말로, 체언은 문법상으로는 활용되지 않는 말, 즉 명사․대명사․수사 등을 가리킵니다. 용언은 오늘날 문법상의 술어로 ‘활용하는 말’이라는 뜻으로 이것은 다시 변하지 않는 큰 줄기인 어간(語幹)과 의도와 목적에 따라 자꾸 변하는 어미(語尾)가 있습니다. ‘한국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라는 말은 바로 어미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알지 못할 것도 없으나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기도 하다.




위 문장을 아리송하게 만든 범인이 바로 밑줄 친 문장이며, 그 중에서도 두목이 어미입니다. 첫 번째 밑줄 친 문장은 ‘못하다’로 끝날 수도 있지만 ‘할’이라는 어미가 문장이 끝나는 것을 방해하여 자꾸 말들을 불러 모읍니다. 두 번째 밑줄 친 문장도 ‘없다’로 세 번째 밑줄 친 문장도 ‘분명하다’로 끝날 수 있으나 뒤 문장이 자꾸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논술은 ‘어미’를 얼마나 잘 다루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됩니다. 학생들의 논술지를 보고 있으면 끊을 때 적절히 끊을 줄 아는 학생은 어미의 활용을 잘 하는 것이고, 만연체로 길게 늘어지면서 점점 논거의 힘을 잃고 급기야 자기 모순에 빠져 자멸하게 되는 것도 ‘어미’를 제대로 길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품사의 가장 기초인 체언과 용언, 어간과 어미를 잘 기억해 두십시오. 용언의 어간은 체언과 같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같이 알아두면 좋습니다. 다음 장에는 이 주인공들이 점집에 간  일을 이야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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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 거리의 풍경

 

이제 논술을 보지 않고는, 웬만한 대학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게 되었다. 한 번쯤 들어보았을 만한 대학은 죄다 이 시험을 보고 있으니, 논술을 보지 않는 대학을 골라 들어간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게 되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즐겁지 않고서는 무슨 발전이 있으랴.
지금까지 논술을 풀고 대학에 들어간 선배들과, 그 선배들을 가르쳐온 선생님들과, 시험을 출제했던 선생님들이 과연 논술을 재미있게 하였는지 생각해 보자.
논술 시험 도입의 큰 뜻을 어찌 알랴마는, 단순 반복 학습과 암기 위주의 교육으로 상징되는 ‘교과서’를 벗어나, 시대가 요구하는 창조적이고 통합적인 사고 능력을 기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곳곳에서 ‘타도 교과서’ 또는 ‘포스트 교과서’ 열풍이 심상치 않은 것은 논술 시험 취지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다져진 ‘지식 위주의 교육 마인드’가 깨질 수 있을까.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을 간다”고 한다. 학생들은 ‘정답’에 익숙해져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가르치던 선생님들도 ‘정답’에 익숙하고, 시험을 출제한 선생님들도 ‘정답’에 익숙하다.
그들은 ‘새로운 사고’가 무엇인지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결국 ‘정답’이 ‘논술’을 먹어버렸다. 논술 선생님들은 자신만만하게 ‘모범 답안지’를 가르쳐주고, 출제 위원 선생님들은 학생의 자질을 정량적으로 산출한다고 하여 장문의 제시문을 넣고, 아래와 같이 조건을 세밀하게 달아 정답을 강요한다.


[제시문 1]은 기계의 발달이 시장체계를 발전시켰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고, [제시문 2]는 철도의 부설이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변화시켰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두 제시문의 논지를 발전시키고 그것들을 서로 연결하여 산업혁명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계의 발전이 인간의 ①사회적 관계와 ②문화적 양식을 어떻게 변화시켜 왔으며, 이러한 변화가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논술하시오.


이 결과 논술은 또 하나의 지긋지긋한 교과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우리말의 위상


그렇다면 우리말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들이 써내는 논술문에는 얼마나 세련된 글이 구사되어 있을까. 한마디로 참담하다. 기본적인 맞춤법은 물론, ‘구어체’와 ‘문어체’에 대한 구분이 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논술문제마다 논제가 있다. 논제에는 글에 대한 조건과 몇 가지 규칙들을 설명해 놓았다. 그 규칙들 중 맨 마지막에는 이런 말이 있다.

한글맞춤법을 준수할 것.


그렇지만, 맞춤법에 대한 관심은 거기까지이다. 논술문에 대한 배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출제의도’와 같은 출제자의 입장을 접했을 때 ‘논리전개’와 ‘이해력’에 대한 내용이 있을 뿐 ‘표현’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때문에 학생들은 ‘맞춤법’이나 ‘표현법’ 등을 교과목으로 치면 ‘기술/가정’처럼 등한시한다.


표현이 내용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일까, 내용이 표현에 가치를 부연하는 것일까. 마음만 좋고, 취지만 좋다면 표현은 자연히 따라오는 것일까. 프랑스의 철학가이자 과학자인 파스칼은 "의미는 말에 품위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에서 품위를 얻는다"고 지적했는데, 일리 있는 이야기이다.

신기하게도 우리의 젊은이가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와 우리 경제가 투자부진에 활력을 잃은 이유와, 우리 사회가 양극화의 어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모두 여기에 담겨 있다. 이것들은 공통적으로 ‘표현의 부재’라는 병통을 안고 있다. 우리의 젊은이는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자신의 애인이 알아줄 것이라 생각하고 ‘사랑의 표현’에 소홀해 결국 다른 ‘로맨티스트’에게 애인을 빼앗겨 버렸다.

우리 기업들은 ‘손해’를 두려워해 투자를 줄이면서 돈만 불릴 생각을 하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우리 경제가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있다고 진단했는데, 이는 마땅한 표현을 얻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

양극화도 마찬가지다. 양극화에 대한 우려만 있을 뿐 이에 대한 대안은 없다. 정신의 양극화, 정치의 양극화, 경제의 양극화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양극화로 치닫고 있다. 양극화를 이겨낼 방안은 당사자들이 ‘타협안’을 내놓고, 이를 위해 각자 양보하는 것이다. 즉 어떤 아이디어든 ‘표현’이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표현’은 없고 ‘걱정’만 만연해 있다.


논술에서도 역시 표현의 문제에 대해서 소홀하다. “자꾸 써봐야 한다”는 식의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제시되고 있다. ‘어떻게’ 자꾸 쓴다는 말인가. 자꾸 똑같은 글을 쓸 것이 분명한데 말이다. 그리고 논리전개가 완성되고, 생각이 갖춰지면 표현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라는 생각은 오만에 가깝다. 지금까지 글 한 줄도 자신의 생각을 써오지 않은 사람이 하루아침에 자신의 마음에 있는 생각을 강물처럼 술술 쓸 수 있을까.


우리말의 심각한 오염은 ‘우리말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이를 위해 우리 국어학계에서는 무슨 일을 했는가. 과학은 세계적으로 ‘대중화’를 선언하고 나섰다. 일상생활에서 펼쳐지는 과학의 원리를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려는 노력이 전 지구적으로 시도되는 가운데, 세계 문화유산인 한글의 대중화를 위한 노력은 어떤 평가를 해야 할까. 물론 리이도 교수를 비롯해 몇몇 의식 있는 학자들이 우리말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했고, 일반 대중과 호흡을 맞춰 왔다. 하지만, 우리말의 원리와 그 복잡한 용례를 단순히 ‘한글맞춤법’에만 맞추기를 원하는 것은 또 다른 오만에 해당한다.


이 책은 이런 문제의식을 안고 씌어졌다. 우리말과 ‘한글맞춤법’은 문학과 인문학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다. 그만큼 재밌고 철학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글을 제자원리가 대단히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반면, 이를 이해하는 수준이 ‘기계적’이어야 되겠는가. 먼저 1부에서는 ‘맞춤법’에 대한 기본적인 소개와, ‘사전 찾기’와 같은 실용적인 이야기가 채워질 것이다.

2부에서는 ‘한글맞춤법’에 대한 원리를 각 장을 통해서 풀어낼 것이다. 한글맞춤법은 ‘법규’가 아니라, 우리말의 자모의 성격과 그 합성에 따라서 달라지는 화학반응을 그려낸 ‘문학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준하는 형태로 그려질 것이다.

3부는 표현 영역이다. 학생들이 실제로 쓴 ‘논술문’을 바탕으로 ‘글쓰기/표현’에 대한 본격적인 내용을 다룰 것이다. 가칭으로는 ‘효과적인 글쓰기를 위한 논술 clinic’이다. 기본적인 글쓰기 방법론에서부터 학생들이 자주 범하는(일반인들도 거기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사례를 조목조목 지적하며, 올바른 표현에 대해 알아본다. 그리고 글쓰기 전문가(기자, 문학가, 평론가 등 전문 저술가)의 잘못된 사례와 잘된 사례를 토대로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예술적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 다뤄 본다. 한 국어학자가 지적했듯이, 우리말이 번역투 문장으로 전락하거나 심각한 오염을 빚은 것은 전문 저술가의 잘못이 크다. 그들이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논술과 글쓰기를 이루기 위한 첫 단계를 제대로 밟아 나갔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논술교육은 희망이 있다. 종합적 사고력을 키우고, 교과의 한계를 벗어나 창의적인 인재를 키울 수 있는 결정적인 대안은 될 수 없지만, ‘미래의 인재’를 키우기 위한 하나의 가능성은 될 수 있다. 나는 논술 교육의 현 상황을 ‘논술1기’로 보고 하루빨리 ‘과거’로 바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자면 이 모든 폐단을 아우르며, 커다란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논술2기’가 찾아와야 할 것이다. 이것은 논술 교육자뿐만 아니라, 논술 출제자들에게도 해당하는 사항이다. 논술이 바뀌지 않고 이대로 묻힌다면 우리나라 교육의 가능성은 몇 단계 퇴보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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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 생각하며 아픔 이겨낸 다산

 

서울에서 8백리가 넘는 경상도 포항 곁의 장기에서 귀양 살 때의 다산의 시가 우리의 마음까지 아프게 합니다. 유배살이의 초기인데다 낯설고 길들지 않은 생활이어서 참으로 견디기 힘든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산은 그 참기 힘든 고통을 끝내 이겨내는 지혜를 찾았습니다. 자신처럼 억울한 유배살이를 넉넉히 이겨낸 옛 어진이들의 삶을 본받아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을 찾았던 것입니다. 「아사고인행(我思古人行)」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한(漢)나라 때의 소무(蘇武)라는 사람이 흉노(匈奴)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그들에게 억류되어 19년이라는 긴긴 세월을 온갖 수모와 고통을 당했지만 끝까지 절개를 굽히지 않고 버텼으며 마침내 허연 백발의 노인으로 한나라로 돌아왔습니다. 다산은 그분을 본받아 자신의 고통도 이겨내겠다는 시를 읊었습니다. “지금부터 힘써서 하늘의 화기를 보전하고 그 옛 분을 생각해 번뇌를 없애야겠네.”

이어서 마지막 장에서는 자신보다 더 먼 곳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당나라 대문호 한유와 그가 겪은 어려움을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옛날 분 한유(韓愈)를 생각하네
불교를 공격했던 죄로 남쪽으로 귀양 갔네.
한유가 귀양 간 곳은 8천여 리의 먼 곳인데
거기 천리가 나는 백리니 고금의 다름이네.
이제는 떠돌이 신세 슬픔일랑 말하지 말고
옛 분을 생각하며 사람 그릇 키우려네.
我思古人思韓愈  坐攻佛法謫南土
韓愈八千餘里謫  彼千我百殊今古
自今勿言萍梗悲  我思古人恢器宇

19년의 유수(幽囚)생활을 끝까지 이겨낸 소무를 본받고, 8백리보다 10배나 더 먼 8천리 밖에서 귀양살이하는 어려움을 극복한 한유를 본받아 자신의 억울한 귀양살이를 이겨내겠노라는 의지를 다짐한 시가 바로 「아사고인행(我思古人行)」이라는 시였습니다. 고통일랑 슬픔일랑 번뇔랑 다 버리고, 마음껏 연구하고 공부해서 오히려 대학자가 되겠다는 뜻이 담긴 글입니다. 이런 강고한 의지가 있었기에 다산은 귀양살이를 하지 않은 정승이나 판서 등 어느 누구도 남기지 못한 업적과 명예를 세상에 전하게 되었습니다.

비애와 절망을 자신의 힘으로 극복하는 자제력을 지닌 사람만이 역사적 인물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다산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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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金尙憲)의 청백(淸白)

 

청음 김상헌은 조선의 사나이였습니다. 안동김씨 명문을 일으킨 훌륭한 선비이자 벼슬아치로 정승의 지위까지 오른 당대의 위인이었습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에 피신했던 인조가 청나라 임금에게 항복하겠다고 항복서를 바치려하자, 청음은 그 항복서를 찢으며 나라의 정기를 살리자고 외쳤던 분입니다.

끝내는 화의에 반대한 척화파로 몰려 중국으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었던 것은 역사에 너무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세월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라는 시조를 읊으며 청나라로 끌려가던 김상헌의 기개는 대단했습니다.

역시 그런 선비는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청백했습니다. 『목민심서』에는 그에 대한 칭찬이 자주 등장합니다. “김상헌이 벼슬살이에 청백했다. 어느 벼슬아치가 자기 부인이 뇌물을 받아 비방을 듣고 있음을 걱정하자, 김상헌은 ‘부인의 요구를 하나도 들어주지 않으면 비방이 그칠 것이다’고 일러주었다. 그 벼슬아치가 크게 깨닫고 그 말대로 하였다. 그 부인이 항상 김상헌을 욕하기를, ‘저 늙은이가 자기만 청백리가 되었으면 그만이지 왜 남까지 본받게 해서 나를 이렇게 고생하게 하는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金淸陰尙憲 居官淸白 有一官人 憂其婦女受賂有謗 公曰婦人所請 一不施行 則謗息矣 官人大悟 一如其言 婦人常罵金公曰 彼老漢 自爲淸白吏足矣 何令人效之 使我喫苦如此)

청백리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 준 이유로 욕을 먹는 김상헌, 그 욕은 얼마나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욕인가요. 세상에 전해지는 말로 ‘베갯머리 송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편이 고관인 경우 부인에게 뇌물을 주면 가장 약효가 크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부인이 요구하는 바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약한 남자들에게 주는 경고의 말입니다. 아무리 부인에게 뇌물을 바쳐도 남편이 부인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뇌물의 효험은 없어지고 부인에게 뇌물 바치는 일도 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김상헌 같은 청백리에 그의 가르침을 실행한 벼슬아치, 오늘은 그런 분들이 그리워지는 세상이 아닌가요.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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