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 1 - 1부 대망
야마오카 소하치 원작, 요코야마 미쯔데루 극화, 이길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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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헌책방에 들락날락거릴 때는 항상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 질의 책이 있었다. 하나는 '플루타르크 영웅전'이었고, 하나는 '대망'이었다. 나는 하나의 '질'을 보고 있었고, 드디어 그것을 샀다. '플루타르크 영웅전' 말이다.

대망은 여러 번 들어오던 이야기이다. 그 분량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만화책으로 나왔다니, 보지 않을 수 있나. 서평단을 신청했더니, 1부 1권이 왔다. 아무리 서평을 쓴다는 조건으로 책을 받지만 만화책 한 권 가지고 '대망'의 '대의'를 가늠하기는 힘들지 않나?

그래서 '1권 어치'만 서평을 쓰려고 한다. 애초에 내가 읽지 않은 책을 '만화책'에만 의지해서 '완결성'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택도 없는 일'이니만큼, 내가 애써 '1권 어치'를 강조하지 않더라도, 내게서 나오는 글은 그것을 뛰어넘지 못할 것이다. 남는 것은 '푸념'밖에 없겠지.

이야기를 꽉 누르는 것은 '난세'이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모두 숙명론자들이다. 물론 이것은 '동트기 전'의 일이기 때문에 '영웅'이 나타나면 '현실'이 될 것이다.

대개 사람은 자신의 시대가 '가장 어려운 난세'가 되기 마련이다. 난세는 대개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다. 그 무게감에 '나의 존재'마저 위축된다.

이 책을 읽으면 '난세'를 견디는 두 가지 길을 알게 된다.
하나는 난세의 역풍에 마냥 휩쓸리지 않고, '무게중심'을 찾는 일이다.

"지금과 같은 난세에는 얄팍한 계략 따위는 도움이 되지 않아. 참된 진실을 가지고 양가를 결합시켜 신불의 뜻에 부응하는 승리를 거두리라 생각했어."

가리야 성의 성주 미즈노 다다마사가 자신의 딸 오다이를 적장 마쓰다이라 히로타다에게 시집보내며 되뇌이는 말이다. 그의 아들과 다른 적들은 다다마사가 오직 정략적인 의도에서 딸을 시집보내는 것이라고 의심하지만, 그것이 의심이 아니라 '정의'였다는 사실은 곧 드러난다.

이것이 난세를 견디는 최소한의 방식이다.

난세를 견디는 두 번째 방식은 아직 책에 아주 조금 드러난다.
'난세' 안으로 뛰어들어 그 중심에 있는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러한 인물이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주 복합적인 기술과 운이 필요하다. 첫 번째 미덕인 '무게중심'을 포함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정의'가 수립되어야 한다. 그리고 '일이 되게 하는 법'에 대한 처세술이 닦여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여러 꼼수를 멀리 하고 '단순'하고 '신의' 있고 '선 굵은' 행동들이 그의 '영웅됨'을 보증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토대가 되는 일본의 전국시대는 중국의 전국시대에 비견할 만하다.
하지만 그 차이점은 명백하다. 일본의 전국시대는 한두 명 정도의 영웅을 중심으로 모두 의지하는 형국이다. 중국의 전국시대는 여러 영웅이 겨루는 형국이다. 때문에 중국의 전국시대가 볼 거리는 더 많다.
그리고 일본의 전국시대는 담박한 맛보다는 '복잡하고 조잡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반일감정에서 나오는 심사는 아니다. 머리로 하는 수싸움이 너무 잦아 '휴머니즘'의 서사시가 흘러나올 구멍이 없는 것은 분명한 단점이다.

이 책은 원 저작과 함께 보는 것도 무척 좋겠지만, 사마천의 사기열전이나 종횡가들이 활약했던 시대를 그린 '전국책'과 함께 보면 재미와 깊이가 더할 것 같다. 우리도 지금 '난세'이지 않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전13권
제1부
1권 '동트기 전'
2권 '이별'
3권 '주인없는 성'
4권 '발걸음의 조절'
5권 '형제의 술잔'

제2부
6권 '운명의 별자리'
7권 '도리이 스네에몬'
8권 '낙일(落日) 전후'
9권 '정략'

제3부
10권 '인간으로서의 탑'
11권 '돌풍전야'
12권 '반쪽만 남은 오동잎'
13권 '전야(前夜)의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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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야 청산 가자 - 청소년과 어른이 함께 읽는 동화
최영철 지음 / 문경(문학과경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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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이 글은 3월 19일 이후에 공개해야 할 것이었다. '전국토론논술대회'의 필독 도서이기 때문이고, 내가 때아닌 '동화'를 읽은 것도 '일' 때문이다. 하지만, 베끼지만 않는다면, 여기까지 와서 이 글을 읽게 될 '참가자'의 노력은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올린다.

그리고 처음으로 '논술버전'으로 리뷰를 썼다. 제시문과 그에 대한 간단한 메모인데, '리뷰'와 너무 동떨어지지 않도록, 특히 '정떨어지지 않도록' 쓰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 스포일러도 신경을 쓴다고 썼는데, 스토리가 드러나지 않도록 한 데서 그 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는 '일반 버전'과 '논술 버전' 두 가지로 쓸 작정이었으나, 이 책이 무슨 '상전'이나 된다고 서평을 두 번이나 쓸까. 그 만한 정도의 책은 아니다. 장 그르니에의 '섬'에서 고양이의 특징과 비유를 많이 땄으며, '어린왕자'의 이야기도 제대로 녹아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이야기의 전개가 유기적이지 않다. 왜 그렇게 '조력자'는 많이 나오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인가, 일부러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 무리하게 조력자들 등장시키는 것을 '무엇'이라고 했는데, 그 '무엇'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문학 이론'에 빈번이 등장하는 말인데. 특히 마지막 장면은 좀 실망이다. 에잇! 또 서두가 너무 길었다. 이거 병 아닌가. 아무쪼록 '참가자'들이 혹시라도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길게 쓴 서두는 그냥 넘어가고 '좋은 의미', '좋은 글'로 된 본문을 많이 봐주기를 바란다. 그래도 처음으로 해보는 거라 재밌었다^^

우리도 한번 고양이가 되어 보자


논술의 시선으로 문학 바라보기


우리는 문학작품을 논술화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논리적 전개에 의한 비문학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문학이 비논리적 전개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고도의 기법을 통해서 가려져 있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압축’돼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소한 방식으로 된 문학(소설)을 논술과 연결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등장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문학이든 비문학이든 모든 문제는 나를 향하며, 나로부터 시작한다. 소설은 등장인물이 이야기 안에 깊숙이 참여해서 갈등과 메시지를 양산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등장인물에 대한 분석과 접근이 필요하다.

둘째, ‘극적 갈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비문학이 논거를 가지고 주장을 펼치듯, 문학 특히 소설은 이야기 안에 전개되는 ‘갈등’을 가지고 글쓴이의 주장을 전개한다. 따라서 소설의 핵심이 되는 주요 갈등을 분석하여 글쓴이가 보내는 메시지를 잘 해석해야 한다.

셋째, 이야기 안에서 사용되는 ‘상징’을 잘 해석해야 한다. 『나비야 청산가자』에서는 비교적 상징이 뚜렷이 명시돼 있다. 예컨대 ‘배불뚝이’는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을 상징한다. 배불뚝이는 좋은 대학을 나오고 유수의 기업에 입사하여 젊은 나이에 ‘대리’라는 위치에 올랐지만, 이야기 안에서는 ‘세속적이고 교양 없는 무식꾼’으로 묘사된다. 이 밖의 여러 가지 ‘상징’들을 찾아다니며 글쓴이가 감춰둔 메시지를 하나씩 들춰내는 것이 필요하다. 마치 보물찾기와 같이 알쏭달쏭하고 어렵지만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넷째, 이야기를 이야기에만 한정시키지 말고, 현실에 자꾸 적용시켜 보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하지만 이야기에서 보았던 의미와 메시지는 현실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나의 현실과 작중 인물의 현실을 대조해보기도 하고, 나를 그 이야기 속에 넣어 보는 등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현실의 목적과 길을 찾을 수 있는 힌트를 끊임없이 찾아내야 한다.

우리는 이름 없는 한 마리 고양이가 된다.(고양이는 ‘제석’이라는 의미 없고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달고 다닌다) 고양이가 되어서 본래의 야성(정체성)을 찾는 긴 여정을 함께 떠나 본다.


이상과 현실, 통념과 자각


#제시문 1

배불뚝이는 채리 아가씨네 식구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거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도대체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르는 철면피처럼 배불뚝이는 그런 환영이 당연하다는 듯이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채리 아가씨는 잔뜩 얌전을 떨면서 배불뚝이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이윽고 채리 아가씨가 헛기침을 한 다음 배불뚝이에게 물었다.

“직장이 어디라고 했지?”

그러자 배불뚝이가 미처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채리 아가씨가 재빨리 대답했다.

“아이, 아빠두.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기업 대리예요, 대리.”

“으흠, 그렇다고 했던가?”

“네 그렇습니다, 장인어른. 저는 채리 씨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습니다.”

배불뚝이는 자신감에 차서 거들먹거렸다. 장인어른이라니. 나는 기가 막혔지만 채리 아가씨는 당연하다는 듯이 배불뚝이를 내버려두었다. 배불뚝이의 태도는 자신감이 아니라 자만심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아빠. ○○기업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대기업이고, 이 나이에 대리면 앞으로의 출세는 따 놓은 당상이예요.”

채리 아가씨가 한술 더 뜨자 배불뚝이는 불룩한 배를 한껏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채리 아가씨의 엄마가 무슨 신기한 보석이라도 보는 듯이 배불뚝이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대학도 그럼 거기를 나왔겠네? 거기, 거기 대학 말이야.”

이번에도 채리 아가씨가 낼름 대답했다.

“엄만. 그렇대두. 그 대학 안 나오고는 ○○기업에 들어갈 수가 없죠. 곧 일본이나 미국 지사로 나갈지도 모른대요.”

그래 놓고 채리 아가씨는 배불뚝이를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프랑스에도 지사가 있다고 그랬죠?”

배불뚝이는 유치한 개그를 늘어놓던 그 교양 없는 말씨를 숨기려는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채리 아가씨는 황홀한 표정이 되어 있었고, 나는 비로소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실망과 절망 속에 빠져버렸다. 배불뚝이가 일류 대학을 나오고 일류 회사의 대리라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 바로 채리 아가씨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본문 중에서>


요즘 우리들이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은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즉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는 죄를 지어도 벌을 안 받고, 돈 없고 빽 없는 사람은 죄가 없어도 죄인처럼 산다”는 말이다. 이야기 안에서 배불뚝이가 채리 아가씨의 가족들에게 실질적으로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가족들은 마치 커다란 은혜를 베푼 사람을 대하듯 고분고분하다. 배불뚝이 또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고양이는 배불뚝이와 종족이 달라 아무런 관습도 공유하지 않는다. 단지 배불뚝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 일류 대학과 대기업이란 것이 고양이에게는 우습기만 하다.

우리는 미천한 고양이의 ‘눈’이라고 무시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이라도 서 있는 현실과 거리를 두고 본 적이 있을까. 한번이라도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와 전혀 다른 고양이의 눈, 우리와 전혀 다른 외국인의 입장, 아직 때 묻지 않은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어떻게 비춰질까.

우리들이 ‘일류대’라 하며 떠받드는 대학들은 세계 대학 순위 100위권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야말로 우물 안의 승자인 셈이다. 지식과 역량은 개인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에 학교의 서열은 종래에는 큰 의미가 없다. 

좋은 직장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정부 고위 공무원이 OECD에 파견갔다가 크게 망신을 당했다고 한다. 기본적인 영어 회화와 작문이 되지 않아 함께 일하기 힘들다며 한국 정부에 불만 가득한 공문을 보낸 것이다. 배우지 못하고 못사는 사람들 앞에서는 떵떵거릴 수 있지만, 세계에서는 당당히 고개조차 들 수 없는 것이다.

제시문 1에서는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일상의 한 단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하고 있는지 깨닫게 해준다. 여기서는 이상과 현실의 이중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류대, 일류 기업의 꿈은 나의 꿈인가 다른 사람의 꿈인가. 다른 사람의 무상한 꿈에 내가 힘겹게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진정한 나의 꿈은 무엇일까. 배불뚝이가 가족에게 공언한 ‘채리 씨의 행복’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채리 씨는 과연 행복할까. 여러 가지 의문이 중첩되며 전달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채리 씨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채리 씨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행복’이 아니라 ‘나의 행복, 채리 씨의 행복’에 대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들의 행복은 저당 잡혀 있는 셈이다. 별 볼 일 없는 통념 안에.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제시문 2

내 옆에는 늘 채리 아가씨가 있었고 나는 외롭다거나 불안하다는 등의 절박한 심정을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는 사이 나는 내가 지키고 있어야 할 고양이로서의 야성을 많이 잃었다.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 내 감각은 무디어졌고, 맛있고 부드러운 먹이에 내 이빨과 발톱은 녹이 슬었다.

내 어머니 아버지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 할아버지 할머니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야성이 내게 아직 남아 있을까?

나는 명상에 잠긴 채 몸을 뒤척이며 채리 아가씨의 식구들이 모여서 터뜨리는 요란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외로웠다. 온몸의 신경이 외로움으로 꽁꽁 얼어붙은 듯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나 혼자 이 넓은 우주에 내동댕이쳐질 날이 오리란 것을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날이 밝자 식구들은 아침 일찍 찾아온 친척들과 어울려서 채리 아가씨를 데리고 모두 나가버렸다. 결혼식에 가는 모양이었다. 채리 아가씨의 결혼식에는 나도 꼭 참석해서 축하해 주고 싶었지만 아무도 신경을 써주지 않았다.

사람들이란 자기들 필요할 땐 뭐든 다 빼줄 것처럼 하지만, 일단 마음이 돌아서면 순식간에 그것을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쓸 만한 가구나 가전제품들을 함부로 내버리는 걸 보면서,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버려지는 고양이나 개, 다른 애완동물들을 보면서도 해보지 않았던 생각들이 그제야 스멀스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운명은 흐르는 물과 같고, 그 물은 험난한 고비와 울퉁불퉁한 기복을 만나면서 흐르게 되어 있듯이, 나에게도 언젠가는 이런 일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왜 진작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

사람이란 고양이보다 더 변덕이 심해서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도 언젠가는 짜증을 내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고양이는 몇 십 년을 함께 살아도 결코 싫증나지 않을 존재라고 나는 너무 굳게 자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고양이는 개처럼 시종일관 충직하지도 않고 새나 열대어처럼 멍텅구리도 아니다. 우리는 감정의 표현에 충실할 뿐 아니라 상대방의 반응에도 민감하다. 변화무쌍하고 시시각각 다른 기분을 연출해서 사람들을 심심하지 않게 해준다. 그것이 고양이로서 내가 가진 자부심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는 고양이인 나 자신을 믿었고, 채리 아가씨에게는 내가 꼭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역시 나는 혼자 사는 아가씨의 심심한 시간을 채워 주던 존재에 불과했던 것일까.

가족들 모두 결혼식장으로 몰려간 텅 빈 집에서 그렇게 잊혀지고 버려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자 으스스 몸이 떨렸다. <본문 중에서>


제시문 2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우정, 사랑’, 그리고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다. 채리 아가씨의 따스한 손길 안에서 고양이의 감각은 무뎌지고 이빨과 발톱은 녹이 슬어버렸다. 고양이는 온데간데없고 하나의 장난감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집에서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을 당연하듯 챙겨먹고 살이 뒤룩뒤룩 쪘다. 아버지가 주시는 용돈으로 비싼 게임 프로그램이나 사치스러운 장식품, 옷가지 등으로 몸을 감싼다. 운동량은 없고 공부 몇 시간 하면 나의 일과는 끝이 난다. 나도 장난감이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내 스스로에 의해 하는 일은 몇 가지나 될까. 나는 나의 주장을 제대로 펼칠 수 있을까. 나의 신념에 따라 행동할 수 있을까.

사랑은 그 사람을 마냥 행복하게 한다거나, 쾌락만을 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곧게 세상에 설 수 있도록 자립심을 키워주고,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 아닐까.

언젠가는 나도 고양이처럼 현실에 내던져질 것이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따뜻하고 배불리 잘 지내오다 갑자기 현실의 벽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게 될 것이다.

“우정이란 두 육체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고 그 옛날 아리스토텔레스 할아버지는 말하지 않았던가. 채리 아가씨는 우리의 고양이를 진정으로 사랑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적적하고 외로운 마음을 채우는 데 고양이를 이용하였을지도 모른다. 외로움을 달래줄 사람이 나타나면 더 이상 같이 있을 이유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우정’이나 ‘사랑’은 아니다.

고양이도 몹시 후회한다. 아끼고 쓰다듬어주는 사람 앞에 너무 쉽게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 셈이다. 고양이가 고양이인 이유는 남다른 야성과 감각, 날카로운 발톱에 있다. 야성도 정체성도 매번 환기되지 않으면 낡고 녹슬게 된다. 자기 자신이 있고 나서 다른 사람과의 우정이 성립된다. 나의 영혼과 성격, 적성과 개성을 깡그리 버리고 그 사람을 좇겠다는 것은 나를 포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의 사랑까지도 포기하는 셈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의 장점을 북돋아주고, 커다란 단점이나 좋지 않은 습관이 있을지라도 시간을 두고 고쳐나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스스로 설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랑과 우정이 아니라 ‘독’을 안겨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이 제시문에서는 진정한 사랑과 우정, ‘관계맺기’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랑과 자유, 그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


#제시문 3

하지만 나는 채리 아가씨를 생각하면서 갈색 고양이에게 말했다.

“나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같이 살고 있어. 그것도 나쁘지 않아. 넌 누가 사랑해주니?”

“사랑? 난 혼자야.”

“혼자라고?”

“그럼.”

“누구를 사랑하지도 않고?”

“사랑하게 되면 자유를 잃어버려. 고양이는 자유야.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지. 그게 자유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뭐가?”

“사랑하지 않는 게 사랑하는 일이 된다니 말야.”

“그건 네가 사랑이란 걸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야. 사랑은 혼자 가지거나 누구로부터 얻어서 가지는 게 아니야.”

“가질 수 없다면 사랑이 무슨 소용이 있어?”

“지금은 내가 뭐라고 해도 이해가 잘 안 갈 거야. 네가 홀로 설 수 있을 때, 그때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거야.”

“난 그러고 싶지 않아. 홀로 서고 싶지 않아.”

나는 갈색 고양이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홀로 선다니. 채리 아가씨가 결혼식을 치르고 신혼여행을 떠나고 하던 때를 생각하면 두 번 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잠이 잘 안 온다며?”

“그렇긴 하지. 그래도 그건…….”

“그래. 그건 밤이 되면 고양이의 야성이 발동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말야, 네가 지금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야.”

“난 만족하고 있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 하지 마.”

“어쨌든 지금부터 가끔 홀로서기 연습을 해 보는 것도 생각해 봐. 방랑자로 사는 재미가 어떤 건지 알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갈색 고양이는 말을 마치더니 휑하니 사라져버렸다.

……

어떻게 숲으로 간단 말인가. 그렇지만 나는 다시 돌아갈 곳이 없었다.

‘이제는 혼자야.’

‘아무도 없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혼란한 생각들을 잠재우려고 되도록 한곳으로 생각을 집중시켰다. 방음벽 꼭대기로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혼자라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것.’

‘사랑할 사람이 없다는 것.’

‘홀로 서야 한다는 것.’

위험한 고속도로를 자유롭게 건너다니는 갈색 고양이 방랑자의 말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고양이는 자유야.’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자유를 잃게 돼.’

그랬다. 나는 혼자가 되었고, 자유였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잃어버렸던 자유, 채리 아가씨를 사랑하면서 잃었던 자유를 마침내 되돌려 받게 되었던 것이다.

채리 아가씨와의 이별로 얻게 된 외로움과 안타까움 사이로 자유라는 새로운 공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보니 외로움과 자유는 둘이 아니라 하나였던가 보다.

새로운 공기, 새로운 삶.

나는 방랑자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갑자기 혼자가 되고, 갑자기 자유를 얻어낸 내게는 조언자가 필요했다. 방랑자를 만나면 물어봐야 할 게 많은 것 같았다. <본문 중에서>


우리는 진정 자유를 원하지만, 사실 자유를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발톱을 다듬고 야성을 기르고, 정체성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괴롭고 힘든 과정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안락함’에 빠져들곤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사랑을 잃는다”는 건 무슨 말일까. 그리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은 또 뭘까. 자꾸 문제가 복잡해지고 어려워진다. 그것은 ‘자유’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까 그 사람의 ‘무엇’을 사랑하는 것일까. 진정으로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감싸는 모든 환경들보다 그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나를 둘러싼 주위의 모든 조건들에서 자유로울 때 진정한 사랑은 가능하다.

“자유는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말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수월할 것이다. 고양이는 자유를 저당 잡힌  채 사랑 아닌 사랑을 하다가 쓸쓸히 버려졌다. 하지만 버려짐으로써 자유를 되찾게 되었다. 말하자면 너무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 고양이가 ‘사랑’으로 착각한 것은 사실 사랑이 아니었다. 때문에 앞의 말을 풀어서 쓰면 “사랑 아닌 사랑을 하게 되면 진정한 사랑을 잃는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일까. 무엇이길래 이토록 많은 것을 지불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고양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면서 사랑을 했더라면 사랑도 자유도 지킬 수 있었고, 쓸쓸히 버려질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의미 없는 것’을 사랑하기 쉽고, ‘무상한 것’에 마음이 쏠리기 쉽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사람은 “그 동안 쓸데없는 곳에 공력을 들여 왔다”고 한탄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보게 된다. 어떤 것이 의미 있고, 어떤 것이 무상한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의미 있는 것’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자신의 눈’으로 보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이나 통념을 통해 그것을 판단하려 하기 때문이다.

고양이처럼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깨닫는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한평생 살면서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우리는 ‘자유와 방종’, ‘자유와 책임’을 이야기하지만, ‘자유와 비용’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인생은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기회를 잃어버리고, 자유를 버리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책임이다. 누군가를 위해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것이기 때문에 ‘책임’이라는 말은 온당하지 않다.

이렇게 ‘자유’라는 의미를 알고 있다면 고양이처럼 크게 혼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랑은 ‘노예상태’나 다름없다. 그것은 자신의 권리와 존재가 없는 사랑이므로, ‘장난감 사랑’이다. 나는 나인가 장난감인가. 나는 자유롭고 개성 넘치고 정체성을 확립한 자아인가, 타성에 젖어있고 끌려다기만 하는 ‘장난감’인가.

고양이가 방랑자를 찾는 이유는 명백하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친구가 ‘방랑자’이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방랑자에게 사랑과 자유에 대해서 다시 물어볼 것이다.


사랑은 함께 하는 것


#제시문 4

나비가 아직 그 사람들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것 같아 나는 걱정이 되었다.

“아마 그럴 거야. 요즘은 비행기를 타고 멀리 이민을 가기도 하니까. 이젠 안 기다릴 거야?”

“그럴 작정이야. 좀 더 기다릴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이사를 왔거든.”

“그 사람들이 널 내쫓았니?”

“쫓겨난 건 아니야. 내가 그냥 나왔어.”

나비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안 봐도 눈에 선했다. 전에 함께 살았던 파마 아줌마처럼 몽둥이를 들고 나비를 밖으로 내쫓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이제 자유를 찾은 거네.”

“그런 셈이지. 하지만 좀 혼란스러워.”

“첨엔 나도 그랬어. 곧 익숙해질 거야. 전에 살던 집 얘기나 좀 해봐.”

나비는 조금 슬픈 표정을 짓더니 그 사람들이 아직 그립다는 듯이 말했다.

“동물을 아주 사랑하는 좋은 사람들이었어. 재롱둥이 푸들, 아침마다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는 하얀 문조, 열심히 헤엄치며 돌아다니는 열대어와 함께 살았지.”

“그 많은 동물들과 한 집에 살았다니, 야, 대단했겠구나.”

나는 나비의 기분을 돋우어 주려고 소리까지 질렀다. 그 많은 동물들이 한 집에서 산 건 분명 신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물들을 사랑해서 그랬을 거란 나비의 말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보다 남을 더 사랑하지 않는다. 남을 사랑하거나 남을 위해 봉사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도 실은 자기 감정에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이야. 채리 아가씨가 그랬고 배불뚝이가 그랬고 영은이가 그랬고 파마 아줌마가 그랬다.

……

“걱정하지 마. 우리끼리 잘 살 수 있어. 사람들 때문에 그걸 아직 잘 모르고 살았던 거야. 우리에게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능력들이 많이 있거든. 뭐가 걱정이야. 그리고 …… 내가 있잖아.”

내 가슴은 알 수 없는 무엇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나도 이제 누군가의 울타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벅차게 했다. 사랑이란 누군가의 햇볕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그늘이 되기도 하는 것인가 보다.

나는 앞으로 닥칠 시간들에 대해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는 나비에게 햇볕이 되고 그늘이 되어줄 자신이 있었다. 사람이나 고양이나 암컷은 자신 외에도 다른 생명을 키우는 본능이 있으니까. <본문 중에서>


하나의 촛불이 만 개의 촛불을 다 밝혀도 맨 처음의 촛불은 꺼지거나 어두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사랑이다. 베풀면 베풀수록 커져만 가는 것이 사랑의 모습이다.

나비는 고양이의 남자친구이다. 고양이처럼 사랑 아닌 사랑을 하다가 방금 쫓겨났는데, 안타깝게도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부질없는 기다림과 배신감에 치를 떨고 나서는 차차 차가운 현실을 자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 시점에서 조언자를 만난 것이다. 고양이는 조언자를 찾았지만, 운명은 아리송하게도 고양이를 조언자로 만들어 버렸다.

고양이에게는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해줄 친구가 생긴 것이다.

이제는 앞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물음에 대답할 시간이다.

“사랑 아닌 사랑을 하게 되면 진정한 사랑을 잃는다”

우리는 사랑 아닌 사랑은 알았지만, 진정한 사랑을 알지는 못한다. 어떤 것이 진정한 사랑일까. 자유와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은 사랑을 받기 위해서도, 사랑을 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두 번째 물음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 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앞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은 아닐 것이다.

‘사랑 아닌 사랑’은 누군가의 개성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말한다.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진정으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감정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소중한 것을 배려하는 것을 ‘할애(割愛)’라고 한다. 자유에도 비용을 치르듯이, 사랑도 비용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이 들어올 만큼의 자리를 비워줘야 한다. 남을 위해 자기 것을 비우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현실에서 ‘진정한 사랑’이 어려운 것이다.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박애(博愛)’의 정신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자기 주위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배려하고 아끼는 것이다. 나의 사랑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전달되고, 그것이 모든 사람을 연결할 때 비로소 ‘박애’가 실천되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고양이의 몸을 빌려 ‘진정한 사랑’과 ‘진정한 자유’에 대해서 생각해 왔다. 많은 사람들은 고양이처럼 자아를 상실하고 관습에 젖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양이가 자아를 찾고 자유를 찾기 위해 치러야 하는 것은 비용만이 아니다. 다른 집에서 충분히 안락하게 살 수 있었던 기회를 박차고 차가운 야생의 숲으로 돌아간 것은 커다란 ‘용기’였다. 나의 안락한 생활을 뒤로 하고, 진정한 자유와 사랑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어머니의 탯줄을 끊고 세상으로 뛰쳐나온 것조차도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현실의 벽은 나를 감싸고, 안락함은 우리를 유혹한다. 나는 나의 이름으로 세상을 살아갈 권리가 있으며, 온갖 옳지 않은 것들을 배척할 의무가 있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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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이 2007-02-04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식의 글쓰기 - 독서논술문 - 괜찮겠는데요. 특히, 제시문을 통한 독서논술문이 신선하네요. 담아갑니다. 감사~.

승주나무 2007-02-04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롱이 님//안녕하세요. 예전에 썼던 원고입니다. 논술은 어디까지나 독서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이상하게 독서와 연계하려는 시도는 너무 더디네요. 한번 고민해 볼려구요^^
 

뭐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철학자 간의 인과관계가 있는 순간을 하나의 꽁트를 통해 잡고 싶은 것뿐이다.

"쾌락과 고통은 우리들의 욕망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기 때문에 그 사물을 욕망 하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 사물을 욕망하기 때문에 사물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다"

위와 같은 말을 한 사람은 스피노자이다. 쾌락을 위해 우리는 애를 쓰지만, 쾌락을 얻고 나면 '왜 이리 심심해?' 하고 푸념하기 쉽다. 그것은 이미 쾌락의 가치가 다 끝났기 때문일 것이다.

쇼펜아우어는 돈 많고 시간 많은 행운아로 여기저기서 자료를 모아다 진중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스피노자를 놓치지 않았을 리도 없지.

쇼펜하우어를 '염세주의자'라고 정리하기에는 약간 아쉬움이 없지 않다. 그가 염세주의자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그의 시대가 '모든 것이 끝난 시대'였던 것이다. 나폴레옹이 시민 혁명을 일으킨 후에, 다시 왕관을 받음으로써 민주주의는 퇴보하였고 괴테는 '이 시대에 노년에 접어들었다는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한다'고 하였다. 쇼펜하우어가 태어난 시대는 지식인들에게는 그토록 절망적인 지옥이었다.

아무튼 '염세주의자'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고,
쇼펜하우어는 위의 말을 받아 다음과 같은 사유를 펼친다.

"우리들의 동화와 이야기가 주인공들의 행복으로 끝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행복의 페이지가 조금이라도 넘어가면, 그들은 역시 평상시와 같이 우울하고 절망적인 나날을 보낼 것이므로, 차라리 행복했던 순간들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끝맺는 것이 여러 모로 좋은 것이다. 그 다음 이야기를 하려고 들지 마라"

환상과 공포의 작가 에드거 앨런 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자, 이 결론은 우리가 문헌에서 알아낸 이야기의 대단원이다. 의심할 바 없이 대단히 정당하고 행복한 결말이다. 아! 그렇긴 하지만, 수없이 많은 해피엔딩의 평범한 이야기들처럼 진실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행복한 결말이다. 내가 이러한 오류를 수정한 것은 전적으로 『텔미나우 이즈잇소오어낫』의 저자 덕택이다.
한 프랑스 격언이 강조하듯 "더 좋은 것은 좋은 것의 원수"라고 한다. 아까 세헤라자데는 이야기가 담긴 일곱 광주리를 상속했다고 한 언급은 이제 그 바구니 수가 일흔일곱 개로 늘어났다고 수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제 그 진실된 이야기를 덧붙여 보기로 하자.
(그 진실된 이야기는 '우울과 몽상'이라는 책에 담겨 있으니, 궁금한 사람은 책을 사서 보기 바란다)

※ 텔미나오 이즈잇소오어낫
'Tellmenow Isitsoornot'를 띄어쓰기하면 'Tell me now  Is it so or not'으로, '이제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내게 말해 달라'라는 뜻이 된다. 이는 작가 포가 의도적으로 띄어쓰기를 생략함으로써 동양의 문헌 같은 느낌을 주도록 고안해낸 단어이다.

출처 : 에드거 앨런 포 '우울과 몽상', 중 '천일야화의 천두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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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소진 소설가는 요절한 작가였지만, 지금도 '언어사용'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가 군대 시절부터 가지고 다녔다고 하는 허름한 노트는 다름아닌 '국어사전'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보았던 단어들을 스스로 정리해서 사전을 만든 것인데, 그것이 자신에게는 가장 보석이었다고 하였으니, 그 정성이 소설에 반영되지 않았을까.

이외수의 '글쓰기의 공중부양'이라는 데에 또 같은 말이 나온다. 이외수 선생이 뭐가 모자라서 논술 마당에 뛰어든 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을 것 같아서 샀다. 그도 역시 자신만의 국어사전을 만드는 것을 권한다.

그래서 블로그에 국어사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중에 양이 되면 항목별로 나눌라고^^

우리 한 번 '나만의 국어사전'을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하늘하늘하다「부」

「1」조금 힘없이 늘어져 가볍게 자꾸 흔들리는 모양. ¶흰 장다리꽃이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린다.§「2」물체가 꽤 무르거나 단단하지 못하여 자꾸 뭉크러지거나 흔들리는 모양.

「3」어디에 매인 데 없이 멋대로 한가하게 놀고 지내는 모양.

「4」『북』김, 연기, 아지랑이 따위가 조금씩 자꾸 피어오르는 모양.

「5」『북』어떤 기색이 조금씩 차츰 나타나는 모양. ¶호룡 령감의 가슴에는 남모르는 욕심이 하늘하늘 불타올랐다.≪선대≫§
「참」 흐늘흐늘.


너부데데-하다 「형」

얼굴이 둥그스름하고 너부죽하다. ¶얼굴이 너부데데하다.§ 「준」{넙데데하다. }
「참」나부대대하다.
※ '넓데데하다'는 잘못된 표현임

 
데데-하다 「형」

변변하지 못하여 보잘것없다. ¶데데한 물건/데데한 선물/데데한 사람/무능해서인지 그는 데데한 짓을 한다./어쩌면 남자 양반이 저렇게 데데할까.≪이문희, 흑맥≫§

 
구지레-하다 「형」

구저분하고 더럽다. ¶구지레한 옷차림/변명을 구지레하게 늘어놓다/대포나 포탄 등 짐을 지우고 오거나 보초를 세우는 등 구지레한 허드렛일만 시켰다.≪송기숙, 녹두 장군≫ §

 
큼큼「부」

「1」목소리를 고르게 가다듬으려고 기침하듯이 자꾸 내는 소리. ¶큼큼 헛기침으로 목을 다듬고 나서 방아 타령 한 대목을 뽑기 시작하였다.≪문순태, 타오르는 강≫ §

「2」냄새를 맡으려고 코로 숨을 들이쉬는 소리. 또는 그 모양.

 
큼큼-거리다 「동」

「1」목소리를 고르게 가다듬으려고 기침하듯이 자꾸 소리를 내다. ≒큼큼대다〔1〕. ¶고향 생각에 목이 메는지 한동안 큼큼거리던 그는 잠시 후에야 다시 말을 이었다. §

「2」냄새를 맡으려고 코로 자꾸 숨을 쉬다. ≒큼큼대다

 
드잡이「명」

「1」서로 머리나 멱살을 움켜잡고 싸우는 짓. ¶드잡이 싸움/차고 지르고 드잡이를 쳐서 코가 터지고 갓양태가 떨어진 이 비장과 배 비장은….≪박종화, 임진왜란≫/방 안에서는 사뭇 드잡이를 놓는지 요란하다. 그 드잡이 속에서 금순이의 뭐라고인지 포악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캑캑 소리만 나는 것이 아마 뭘로 입을 틀어막은 눈치다.≪이무영, 농민≫§
「2」빚을 못 갚은 사람의 가마나 솥 따위를 떼어 가거나 세간을 가져가는 일.
  드잡이-하다

뒤룩-뒤룩01[--뛰-]「부」
크고 둥그런 눈알이 힘 있게 자꾸 움직이는 모양. ¶그는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며 열변을 토한다.
「참」 뛰룩뛰룩01. ;되록되록01.

뒤룩-뒤룩02[--뛰-]「부」
군살이 처지도록 살이 몹시 쪄서 뚱뚱한 모양.
「참」 뛰룩뛰룩02. ;되록되록02.

※ '디룩디룩'은 틀린 말임

-투성이「접사」

일부 명사 뒤에 붙어)'그것이 너무 많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물,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흙투성이/피투성이.§
※ '투성이'는 접사이므로 다른 단어와 띄어 쓸 수 없음


어기대다 「동」

순순히 따르지 아니하고 못마땅한 말이나 행동으로 뻗대다

예)아이들이 되레 성가셔서 어기대지만 그래도 할머니는 기를 쓰고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고 매만져 주고 하였다.≪한설야, 탑≫

 

어깃장「명」
어기대는 행동 (~을 놓다)
예) 어깃장을 놓다

 ¶ 사람이란 늙으면 대개의 경우 어깃장도 놓고 이기적으로 된다고들 한다.≪박경리, 토지≫

 너스레 : 1. 흙구덩이나 그릇의 아가리 또는 바닥에 이리저리 걸쳐 놓는 막대기≪그 위에 놓는 물건이 빠지거나 바닥에 닿지 않게 하려고 쓰는 물건≫ 2. 남을 농락하려고 늘어놓는 말이나 짓(-를 놓다, -를 떨다)

우리는 흔히 '너스레를 떨더'는 표현을 심심찮게 보게 됩니다.
너스레는 '수다스럽게 떠벌려 늘어놓는 말이나 짓'을 말하는데, 신문기자들이나 사람들이 이 단어만 익숙하기 때문에 '너스레'와는 관계 없는 상황에서 자꾸 너스레로 일관할 때가 많습니다. 
예컨대, 사람들의 무리가 있다고 칩시다. 한 사람이 각광을 받는데, 여러 사람들은 그를 추켜세우다가 골리다가를 반복합니다. 이 사람도 약이 올랐는지 한 동료의 말에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고 표현합니다. 이때의 '너스레'는 옳지 않습니다. '어깃장을 놓다'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에게 반항하는 분위기가 역력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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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2-27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승주나무님 참 멋집니다

승주나무 2006-02-27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님 자꾸 업데이트를 할 예정입니다. 생각날 때마다.. 책 한 권 될 때까지^^
 

기냥.쩝, 나중에 한 번 볼라고

Name  

   無所依   (2006-02-12 12:04:07)
Subject  
   [비전공]사회적 현상의 원인과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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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의 이론에서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부분은 인과관계의 설정입니다. "A때문에 B가 생겼다"라는 주장을 할 경우 A는 B의 원인이 되고 B는 A의 결과가 되지요.

종종 많은 사람들이 A와 B가 동시에 관측될 경우 A는 B의 원인이다(혹은 그 반대)라는 이론을 만들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게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실제로는 고려하지 않은 C라는 변수가 있어서 A와 B를 동시에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이런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사회과학적 이론을 만들때 인과관계의 설정은 이론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기도 하고 연구자들이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A때문에 B가 생겼다"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C라는 다른 변수가 없는지, 혹시 B때문에 A가 생긴 것인데 그것을 거꾸로 해석하는 것은 아닌지, A와 B가 실은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이 그저 동시성 혹은 시간상의 차이만 있는데 그것을 인과관계로 해석하는 것은 아닌지 정말 아주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유학때문에 우리 사회가 이런 형태로 구성되었다"는 susi...님의 글을 읽으며 그것이 유학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C라는 요소가 있어서 유학의 도입 및 융성과 사회구성을 동시에 초래했는지, 사회구성의 필요에 의해 유학이 도입되고 융성한 것은 아니었는지하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에 대해 면밀히 검토를 해 보시고 그런 주장을 하셨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몇가지 다른 가설 혹은 질문들을 제시해 봅니다. (susi..님의 유학에 대한 견해가 타당하다는 전제를 합니다.)

1. 유학이 도입되지 않았을 때는 사회의 구성이 이렇게 위계적이 아니었을까?
("위계적이었다"가 대답이라면 유학이 현재의 위계질서의 근본원인이 아닐 가능성도 있습니다.)

2. 위계적 사회질서의 존속이 유학적 의식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반대로 유학적 의식의 존속이 위계적 사회질서의 존속 필요때문이었을까?
(역의 인과관계를 고려하자는 얘기지요. 역의 인과관계가 성립한다면 현재 또한 유학때문에 위계질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위계질서의 필요때문에 유학이 '팔리고' 있는 것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3. 유학을 구성하는 특정한 부분들(예컨대, 위계질서)만이 남아있다고 간주될 이유는 무엇일까?
(예컨대 "도끼를 들고 상소를 했다"는 부분을 생각해보면, 현대사회에서 공무원이나 정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시민사회집단의 움직임은 왜 유학으로 해석될 수 없고 위계질서만 유학으로 해석되어야 하는지 의문이 됩니다.)

4. 유학을 받아들이지 않은 다른 사회에서는 동일한 위계질서가 발견되지 않을까? 만일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이라면 유학은 그 정도의 차이만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현실적으로 유학과 아무 관계가 없었던 중세의 서양을 생각해보면 위계질서는 유학과 상관없이 생겨나고 발달된다고 볼 수도 있지요.)

5. 유학이 정도의 차이만을 가져온 것이라면 위계질서의 근본원인은 유학이 아니라는 가설도 성립가능하지 않을까?
(다음 질문과 관련이 있는 얘깁니다.)

6. 동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질서와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질서의 차이는 무엇일까? 동물들에게는 유학이 없는데 왜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것일까?
(위계질서는 유학의 영향이라기 보다는 권력을 추구하는 동물적 본성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7. 수많은 질문들이 있을 수 있고 다른 가설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생략하겠습니다.

요는, susi...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리 간단하지많은 않다는 얘기입니다. 특히 사회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말을 할때는요. 아직은 님은 "유학적 행동패턴과 이 사회의 위계적 질서는 상당히 흡사하다"는 관찰을 한 것 뿐이지요. 다른 분들이 제기하시는 관찰 자체의 타당성을 차치하고라도, 님의 관찰이 "유학이 현재의 위계적 사회질서의 원인"이라는 님의 이론을 정당화하기까지는 님께서 검토하고 분석해야할 수많은 단계들이 남아 있는 셈입니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사회현상의 원인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을 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지고 자신이 없어집니다. 다른 곳에도 글을 썼습니다만, "이 이론은 옳다"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론이 있다면,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정말 행복할 겁니다. susi..님이 본인의 이론에 대해 너무도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아서, 그 믿음을 본인이 과연 충분한 의심과 검토를 통해 검증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한눈에 보기에 옳기에 옳다고 믿고 계신 것인지 여쭙고 싶었기에 글을 씁니다.

 

 
無所依 (2006-02-12 12:19:38)    
susi...님이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이라는 책을 권하셨더군요. 카프라던가요, 지은이가? 1980년대부터던가 이른바 new age movement라는 사회적 흐름이 등장합니다. 서양의 사고방식에 sick-up 한 서양사람들이 동양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새롭게 조명하고 받아들이고 싶어하지요. 그 근원은 아마 60년대의 히피에 두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그 당시 라즈니쉬니하는 신비주의자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일본의 문화가 서양에서 대대적으로 받아들여졌고, tao(도의 중국식 발음입니다)에 대한 탐구가 인기를 끌었고, 인도기행 같은 것이 유행했고, 중국이 재평가되었고 그랬습니다.

그 책도 그런 움직임중의 하나였지요. 그 책 이전에 [현대과학과 불교사상]이던가하는 책도 있었습니다. 그 책보다 몇년 전에 나왔던 책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카프라의 책과 거의 동일한 내용이었습니다. 둘 다 현대물리학에서 발견된 것들은 동양철학(특히 도교와 불교)에서는 이미 수천년 전에 알려진 것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실제로는 그 책들은 "나는 불교와 도교가 현대과학과 일치한다고 해석한다"는 책에 불과합니다. 좀 말을 심하게 하자면 일종의 견강부회지요. 그 책에 있는 내용이 전혀 타당성이 없다고는 말을 못하겠지만, 석가나 노자가 살아있을 당시 혹은 그 후인들이 불경들과 도덕경, 장자 등을 만들 당시에 과연 현대의 과학자들과 같은 지식을 가지고 그 책을 만들었을까하고 생각을 해 본다면 그 답은 '아니올시다'가 될 가능성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일례로 불경에 시간을 계산하는 단위로 '겁'이 나옵니다. 그리고 우주의 나이가 수백억겁이라고 하지요. 현대 천문학에서 그 의견에 동의할까요? 님이 동의하시지는 않겠지만, 그 책은 불교와 도교의 내용중 현대과학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할 수 있는 부분들만을 인용해 동양의 신비주의를 팔아먹는 상술에 불과한 책입니다.)
아르키... (2006-02-12 12:21:30)    
[물리] 당시 유학을 일으켰던 학자들 모두 그 시절의 권력구조나 사회 체제를 뒤집겠다는 수준의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제후 저 제후를 찾아가서 자기들의 이론에 따라서 정치를 하자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계급이나 사회 전반을 모두 부정하면서 자신을 기용해 달라고 할 수는 없죠.

유학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에도 중국은 충분히 계급 체제가 강했고, 요즘 사람들이 보는 관점에서는 왜 저렇고 비민주적일까 했죠. 고려에 성리학이 전해지기 전에도 우리나라는 위계질서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강력한 학문 이론 더 나아가서 생활 전반에 끼치는 영향력이 큰 언행과 사고의 지침으로서 세뇌되면서 조선 후기부터 이상하게 변한 것은 사실입니다. 유교 경전에 있는 문장을 점점 맘대로 해석하고 억지를 부리면서 오늘날에는 잘못 알려진 것들이 많죠. 하다 못해 속담의 뜻도 원래와 달리 이해하는 사람들이 늘었습니다. 가끔씩 퀴즈를 프로그램을 보면 얼토당토 하지 않는 내용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더군요.
無所依 (2006-02-12 13:18:22)    
아르키...//약간의(혹은 아주 큰) 이견.

"하다 못해 속담의 뜻도 원래와 달리 이해하는 사람들이 늘었습니다."

전 원래의 뜻이 무엇이었든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쪽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 시대의 사람들이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사용하느냐의 문제지 원래의 뜻이 무엇이었느냐는 아니라는 사고방식이지요.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해석이라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마누라'라는 단어는 원래 고려시대 고위층 부인을 지칭하는 말이었다지요? 현대에는 그 단어는 자신의 아내에 대한 비칭에 가깝습니다. 둘중의 어떤 것이 옳은 용법일까요? 보다 적절한 형태의 질문을 하자면, 옳은 용법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요?

딴지는 아니고 그냥 '절대적 준거점'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굳이 쓴 것이라고 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volt... (2006-02-12 14:17:31)    
[인문학]흥미로운 주제였음에도 짜증스럽게 유교관련 글타래를 지켜보게만 되었던 것은 글타래를 시작한 분의 태도가 지나치게 단정적이어서 그러했습니다. 그처럼 극단의 단정적인 주장을 제기함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시비로 직결되는 것으로 전혀 바람직한 대화의 태도라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무례하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적어도 사실에 대한 정확한 과학적 인식을 전제로 논쟁이 전개되는 이곳에서, 인문학적 주제도 그 수준에 부합하는 형태로 다루어 졌으면 합니다.

공자의 사상과는 별개로 유교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사람으로서도 역사적으로 유교가 지닌 가치가 그렇게 쉽게 폄훼될 것은 전혀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서구가 근대산업화에 성공하기 이전 유교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문명사회인 중국과 한반도 사회의 국가적 이념으로 성공적인 작용을 하였으며, 그것은 물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비교적 안정된 풍요를 결과한 사상체계로 평가되는데 이견이 있기 힘들것입니다.

더구나 임진왜란 이전 조선사회에서 만개한 유교사회의 지적인 고아함과 풍요를 당시 인간 사회의 수준을 감안한다면 어찌 평가 절하할 수가 있는지요? 문제는, 아르키님의 의견에 반하는 것이지만 조선사회에 있어서 사회체제가 지나치게 성공적인 유교사상의 내면화 내지는 심화된 체득 등의 이유로 경화되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극한의 국가적 위기 상황을 겪고서도 왕조의 교체나 전면적인 국가 개혁을 초래하지 못하는 지경을 초래했다는 측면입니다. 이런 측면을 감안하면 조선의 계급체계는 도를 넘어서 안정된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중국이나 여타의 것보다 훨씬 견고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유교란 상당히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더구나 유교는 그 자체의 전승에 있어서도 변화와 발전을 계속해온 사상체계로서 앞으로의 열린 가능성 뿐만 아니라 과거의 유의미한 영향과 결실이라는 역사적 경륜을 내포한 것입니다. 한반도 사회의 유래 없는 패망과 비극을 함께하였기에 유교에 대한 비판과 부정은 필연적이겠지만 그것의 역사적 가치와 미래에 대해서 보다 긍정적인 관심을 견지하는 태도를 당부드립니다.
無所依 (2006-02-12 15:28:21)    
volt...//혹시 필명을 Voltaire로 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 문득 생각이 듭니다. 만일 그러시다면 참 멋진 이름을 사용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Volt...님의 인문학적 글과 아울러, 유교와 사회구조에 대한 다른 견해 하나를 읽으시라고 저도 글 하나 올립니다. susi...님의 주장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반론 정도 될 수도 있겠군요.

중세 서양얘기부터 해야겠습니다. 길게 얘기할 수는 없지만, 중세질서의 파괴는 상인경제의 출현과 식민지 정책 등으로 잉여생산물이 늘어나면서 생긴 현상 즉, 물적 토대의 변화에 기인한 상부구조(사회구조)의 변화로 볼 수 있습니다. 정치경제학적 사고방식으로는 사회구조의 변화에 잉여생산물의 존재와 물적토대(경제적 구조)의 변화가 굉장히 필수적인 부분이지요.

조선의 경우 양란은 조선의 경제를 파괴해 잉여생산물을 소진시켰습니다. 게다가 조선시대의 정책으로 인해 상인경제가 발달하기 어려웠지요. 그래서 사회구조가 변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가 없었습니다.

양란이후 왕조의 교체나 국가체제의 개혁이 쉽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경제적 토대의 부족때문이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유교이념의 경화때문이라기 보다는요. 유교이념의 경화는 오히려 경제적 토대 파괴의 결과로 해석될 개연성이 높을 것 같군요.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분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분배구조의 중앙통제가 아주 중요하지요. 유교는 그 상황에서 중앙통제에 대한 이념적 근거제공을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실제로 유교가 민중의 생활 깊숙히 침투한 것은 양란을 거치면서 생긴 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유교가 조선사회의 경화를 촉진했다기 보다는 조선사회의 물적 토대 부족이 유교를 지배이데올로기로 민중이 받아들이는데 역할을 했다는, susi..님이 가정하시는 것과는 반대의 인과관계가 성립합니다.

현재는 유교가 지배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는 사회는 아니지요. 이미 그 물적 토대(부유함의 정도, 주요 생산분야 등등)는 유교가 전제로 하는 사회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적 질서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현재의 사회구조가 유교에 기반한 사회구조가 아니라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즉, susi...님이 유교적 질서라고 단정하신 것은 실은 유교적 질서가 아니라는 얘기지요. 제 본 글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유교가 없던 사회에서도 위계질서는 존재했습니다. 유교는 위계질서의 정당화도구였을 뿐, 유교 자체가 위계질서를 생성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지요.(중세 서양의 신학도 그렇습니다. 신학이 위계질서를 생성했을까요? 신학은 이미 존재하던 중세적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했지요. 그러다 사회경제적 변화로 중세의 질서가 깨지자 신학에서도 균열이 생겨납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등장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념은 사회적 질서의 정당화도구이자 사회적 질서의 종속변수이지 질서의 생성도구는 아니라는 얘기지요.) 한국사회가 보이는 위계적 구조, 구조적 문제점은 실은 다른 국가사회에서도 약간의 패턴의 차이 혹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존재하고 있으며, 한국사회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우리사회의 부정과 부패가 이태리와 비교해 보면 그리 차이가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유교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의 원흉이라고 단정하신 susi...님의 글은 제 관점으로는 인과관계의 오류를 보이는 결론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volt... (2006-02-12 22:04:48)    
無所依님, 제 아이디는 좀 특이한 것이어서...^^. 그리고 스스로도 의식하고 계시리라 짐작 합니다만 이제는 식상해 보이는 경제 결정론적 관점을 반복하시는 것은 좀 의아한 일입니다. 그 같은 결정론적 관점 자체가 지나친 단정들을 역시 결과했다고 생각하시지 않으신지 궁금합니다.

"사회구조가 변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가 없었다...양란이후 왕조의 교체나 국가체제의 개혁이 쉽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경제적 토대의 부족때문.... 유교이념의 경화는 오히려 경제적 토대 파괴의 결과... 이런 관점에서 볼때 유교가 조선사회의 경화를 촉진했다기 보다는 조선사회의 물적 토대 부족이 유교를 지배이데올로기로 민중이 받아들이는데 역할을 했다... 유교는 위계질서의 정당화도구였을 뿐, 유교 자체가 위계질서를 생성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 이념은 사회적 질서의 정당화도구이자 사회적 질서의 종속변수이지 질서의 생성도구는 아니라는 얘기..."

위와 같은 내용들이 아직도 역사적 실제에 부합하는 이론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뭐 주어진 모든 답을 이미 가지고 계신것과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제 질문은 한가지 입니다. "실제로 그러했는가?"입니다.
susi... (2006-02-13 00:23:02)    
실제로 유교가 한민족을 망친 가장 대표적인 예는 조선 초기 한국의 국학 관련이나 문학 책을 거두어 없애버렸다고 단정(거의 사실)되기 때문입니다.

세조실록에보면 1457년,
세조 3년에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노,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 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하였다.

즉 세조는 국학책을 금서로 만들어 수거하고 다른 책으로 바꾸어준다고 하였다. 이사건 이후로 위 책들 제목은 조선왕조실록 전체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우리 역사에 우리 역사책이 사라진 것이다.
통탄할 일이다. 모두 거두어 불태운 것으로 보인다.

지금 [한단고기]라는 책에, 위에 나오는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노,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의 일부, 혹은 전부가 전한다.
문제는 유교의 폐단으로 사대를 내세워 우리 국학을 조선이 말살한 것이다. 제 나라 역사를 망친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을 것인가?

세조의 유교정책은 자아를 상실한 조선인을 만든 것이다.
성종 때는 남여상열지사라고 고대 노래의 가사를 바꾸도록 하였다.
태종은 음양서를 모두 불태웠다.

중세의 기독교보다 더욱 가혹하게 조선의 유교는 우리 민족정신을 불태워 재로 만들었다.
나는 제 나라 역사, 제 조상의 역사를 말살한 이들을 저주하고 싶다.
일제36년 치하에서 일본인이 한국 역사관련책 20만권을 불태웠다지만, 세조때 세조와 유학자들은 이 일본인보다 더 나쁜 매국노였다.
(혹자는 세조의 유시가 유학자의 뜻이라는 증거가 없다고 반박할 것이나,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다.)
bunn... (2006-02-13 01:20:51)    
(비전공) 제가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했지만서도 그런 제가 보기에도 전혀 흥미롭지도 않고, 영양가도 없는 토론을 계속하고 계시는 군요. 유교는 무슨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별입니까? 중국이 중앙집권적 군주체제를 강화하고 통치이데올로기를 수립해야 하는 필요에서 생겨난 것이죠.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통치이데올로기가 필요했고, 어떤 형태로든 생겨나는 것이죠. 누가 위계질서의 원인이 유교라고 한답니까?

일례로 유교적 전통이 있는 나라만 남녀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죠. 유교가 남녀차별의 원인이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하지만, 유교에서 가르치는 덕목이 남녀차별을 정당화하기까지 하는 것이 많죠. (여기서 다시 유교의 근본 원리는 어쩌구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속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제 유교원리가 중요한 것이니까. 또, 호주제 폐지 반대하는 유학자들이 무소유님보다 근본 원리를 몰라서 그러고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되니까.) 유교를 비판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유교가 남녀차별보다 먼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당시에 이미 존재하던 남녀의 위계를 합리화하고, 오히려 긍정적인 방향으로 계도하려고 했던 것이겠지요. 모든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선의"를 가지고(혹은 가장하고) 만들어 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지만, 현재에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지아비를 따르고 어쩌구....늙어서는 아들을 따르고...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선생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인데요. 유교적인 사고방식이 "교육자는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라는 현대적인 개념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왜 미국 대학의 교수들보다 우리나라 교수들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겪어보신 분들은 이 점에 대해서 아니라고 하지는 않으실텐데요. 제가 보기에는 교수들의 지위에 대한 지나친 보장, 학생들의 교수 평가제도에 대한 거부감.....이런 것들이 전형적인 유교적 사고방식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도 답답해서 글이 좀 길어졌군요. 더이상 유교에 대한 왈가왈부는 그만 하셨으면 합니다.
無所依 (2006-02-13 01:53:36)    
volt..,susi...//제 글(본글과 댓글)의 모든 초점은 사회적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해석하는데 있어 매우 많은 주의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전공(경제학입니다)상 전 경제결정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님의 글 밑의 댓글은 님에 대한 댓글이라기 보다 susi..님의 관점에 대해 다른 관점도 있고 그 관점하에서는 susi..님의 주장과는 달리 이데올로기와 사회구조의 인과관계가 역전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사회적 현상의 인과관계를 논할때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제 본글의 보론정도 되는 셈이지요.

제 관점이 맞느냐? 전 맞다고 봅니다만 여기서 논할 가치는 없다고 봅니다.

* 참, 전 유교 자체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습니다. 그냥 어릴때 사서(사서삼경의 사서) 좀 읽은게 다입니다. 그래서 susi...님이 촉발하신 유교논쟁에 끼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제 주장은 susi..님의 사회이론이 사회적 현상의 인과관계에 대해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것 같다는 것 뿐입니다.
volt... (2006-02-13 02:16:33)    
無所依님, 쓰신 글이 내용이 저에 대한 댓글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단지 평소에 쓰신 글의 내용에 미루어 좀 의외의 관점이시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쭈어보았습니다.
無所依 (2006-02-13 02:48:05)    
위의 글을 수정한 순간에 volt..님이 댓글을 다셔서 별도의 글로 올립니다. volt..님이 제기하신 질문, 즉 "실제로 그러했는가?"라는 질문은 매우 핵심을 찌르는 점이라고 봅니다. 제가 제대로 해석을 했다면 이 질문은 "중요한 것은 이론의 구축이 아니라 이론이 사실관계 혹은 현실의 데이터와 부합한지 확인하는 일이다"라는 말씀이 될 것 같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제 모든 글이 바로 그 점을 지적하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과연 이론이 현실의 데이터와 부합하는가? 실은 사회과학상의 많은 이론들은, 현실의 데이터와 부합하더라도, 그 사실이 그 이론이 참이라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저 '기각할 수 없는 가설'정도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사회과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이 '참'임을 주장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유의미한 가설정도로 평가하지요. 사실들이 이론을 지지하지 않는 경우는 그 이론이 기각됩기에, 이론에 대한 단 하나의 반례(통상 통계적 수준의 반례입니다)만 관측되어도 그동안 타당하다고 믿어졌던 이론들도 한순간에 기각이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과학자들의 역할은 '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기각되는 이론'들을 걸러내는 것이라고 까지 해도 될 것 같습니다.

============= 딴소리.

하하. volt...님은 그동안의 제 댓글에서 제가 대책없는 수준의 자유주의자 정도로 느끼신 모양입니다. 실은 어찌 보면 그렇고 어찌 보면 안 그렇고 합니다. 얘기하기 시작하면 매우 길어지니, 경제결정론적 시각과 자유주의적 시각 사이에 실은 별로 모순이 없다는 정도로만 말씀을 드리지요. 간단히 말씀드려서 어떤 이론을 도그마화해서 받아들이느냐 '유의미한 가설' 정도로 평가하느냐하는 문제와 관련있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volt... (2006-02-13 02:58:13)    
"경제결정론적 시각과 자유주의적 시각 사이에 실은 별로 모순이 없다"

간단한 문장으로 무척 많은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런데 궁금증이 더해지는 것은 뭔가 새로운 차원의 경제 결정론이라도 구상하신 것이 아니라면, 기존의 그것에 대한 논리적 결함의 지적이 학계에서 이미 충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닌지요. 심지어는 거의 무시당하는 상황으로 보이는 관점을 너무 태연히 말씀하시니 오히려 관심이 가는군요. 제가 무심하여 놓친 학계의 변화가 있었다든가...
無所依 (2006-02-13 03:00:07)    
bunn..//그냥 딴지.

제 친구(저보다 한참 어린 친구입니다)중에 이태리 애가 있습니다. 이 친구 왈, "이태리에서는 교수 되기가 쉽지 않아. 왠지 알아? 한번 교수가 되면 절대로 안 나가거든. 그래서 새로 교수를 뽑지 못해. 대신 되면 인생 피는거지. 뭐 제대로 가르치기라도 하면 내가 말을 안해. 그리고 그 권위주의란 정말..."

...여전히 전 교수들의 행태(?)가 유교적 의식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에 반대하는 셈입니다.
無所依 (2006-02-13 03:25:13)    
volt...//'학계'라고 통칭하셔서 정확하게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경제학 특히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단 한번도 경제결정론적 관점을 놓은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공부하는 자본주의 경제학에서는 아직까지는 인간의 의식구조와 경제현상간의 문제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없습니다.)

사회학분야 같은 경우 관심의 초점이 다소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정확하게 말씀드리기는 제가 관련 지식이 부족합니다. 역사학의 경우 적어도 부분 부분의 역사적 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 경제적 동기 혹은 경제적 구조와의 연관관계에 대한 고찰은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자신있게 말씀 드릴 수 있는 부분으로 경제사학이 있습니다. 미국식 경제사학은 통계를 통해 (미국의) 경제구조의 변화가 인간의 이익추구행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분석하는 것이 주 연구분야입니다. 예를들어 미국의 노예제 폐지가 노예의 생산성 감소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는 통계적 증거가 있지요. 어떤 의미에서는 경제사학은 그 자체가 사회적 상부구조(제도, 법, 관습 등등)가 하부구조(경제적 동기, 이해관계 등등)에 의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인문학에서는 부정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전 인문학에 대한 소양이 거의 zero입니다), 사화과학분야에서는 경제결정론적 시각이, 필요에 따라 수정되거나 정교하게 보완되기는 하더라도, 부정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volt... (2006-02-13 03:58:18)    
비록 사회학자로 분류되기는 합니다만 경제학에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 같은 저술의 관점을 다루지 않는 다면 문제가 있군요.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결정론적 관점에서 경제적 결정론에 대립하는 대표적 저술입니다.

사학 분야에서 경제사적 연구의 지평을 연것으로 평가되는 인물은 페르낭 브로델로서 특정 시대의 하부구조를 연구하여 상부구조와의 상호관계에서 그 시대의 사회상을 설명하고자 하였지만 결정론적 관점을 채택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제학 내부에서 경제사학이 어떤 경유로 세분화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식 경제사학 자체가 경제결정론에 근거하여 설립되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매우 놀라운 소식입니다.

그리고 간접적으로만 언급하자면 만약 인문학에서 규명된 논리적 결함에 근거해 수립된 경제 이론이 있다면 그것이 현실적으로 연계되어 부정되지 않는 것이 신기해보일 것입니다.
bunn... (2006-02-13 04:28:33)    
無所依 / 유교 때문이라는게 아니라, 유교가 변화에 장애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경제학을 하신다면 사회가 그렇게 단선적인 인과관계에 의해서 굴러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실텐데요. 왜 그렇게 모른 척을 하시는지요. 한국에서 유교 하나 배척한다고 교수들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구요. 이태리에는 이태리 나름의 문제가 있겠지요. 모든 기득권이라는게 그렇지 않습니까? 일단 이태리의 상황에 대해서는 알 바가 아니고, 한국에서는 적어도, 교육서비스의 질적 상향을 위한 개혁에서 유교가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bunn... (2006-02-13 04:35:03)    
無所依 / 제가 남녀차별이 유교 때문이다 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수들 문제가 유교 때문이라고 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시나요? 근데, 왜 제가 교수들 문제가 유교 때문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시죠? 상대방의 논리를 지나치게 단순화시켜놓고 반박하는 것은 좀 삼가해주시죠.
無所依 (2006-02-13 05:22:10)    
bunn..//예, 삼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님의 글 전체를 반박했다기 보다는 전 그저 님의 글 중에서

"제가 보기에는 교수들의 지위에 대한 지나친 보장, 학생들의 교수 평가제도에 대한 거부감.....이런 것들이 전형적인 유교적 사고방식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라는 부분에 대해 반대의견을 제시한 것 뿐입니다. 그것들 조차도 어쩌면 유교적 사고방식에 기인한 것은 아닐수도 있다는 얘기를 한 거지요.

참, "사회가 그렇게 단선적인 인과관계에 의해서 굴러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실텐데요. 왜 그렇게 모른 척을 하시는지요."라고 하셔서 덧붙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제 생각과 님의 생각이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제 본글과 초기의 댓글이 그런 단선적 인과관계 가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글입니다. (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님에 대한 제 댓글은 저 한문장에 대한 이견을 말한 겁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제 글이 님의 논리를 강화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게 느껴지신 모양입니다. 저 스스로 글을 '좀 쓴다'고 자만하고 있었는데 반성해야겠습니다.
無所依 (2006-02-13 06:24:27)    
volt..님 전공을 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역사발전을 인간 정신의 움직임이라고 본 대표적인 학자가 헤겔입니다. 마르크스는 헤겔을 뒤집었지요. 마르크스가 맞느냐 헤겔이 맞느냐? 전 알지 못합니다. 사회과학의 이론을 잠재적으로만 의미있는 가설로 간주하는 저로서는 두가지 이론이 모두 논리적 정합성을 가지고 있고 비슷한 정도의 현실설명력을 갖는다면 전 둘 다 적절한 이론으로 인정할 용의가 있습니다. 둘중의 어느 것을 개인적으로 더 믿느냐라고 질문하신다면 전 마르크스를 선택하는 쪽입니다만 헤겔을 선택하신 분께 왜 옳지 않은 것을 주장하느냐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브릭이 아니라면 관련된 논쟁정도는 할 수 있겠지요.

2. 베버의 저술과 관련해 프로테스탄티즘의 등장 자체가 중세경제조건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는 얘기(엥겔스의 주장입니다)를 한 것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베버가 맞느냐 엥겔스가 맞느냐? 전 잘 모르겠습니다.(실은 여기서 논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문제는 자본주의의 시작을 어디서부터로 간주하느냐하는 논쟁과 관련이 있습니다.) 베버가 엥겔스의 주장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 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우리가 엥겔스 대신 베버를 택해야할 이유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어느 쪽을 택하느냐? 엥겔스입니다. 이유는? 그게 제가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역사관과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역사관이 아니냐? 글쎄요...

3. 개인적인 얘기입니다. 베버는 하도 오래전에 읽어서(한 20년 된 것 같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 책 읽으면서 '뭐야, 이 사람은 왜 기독교가 자본주의를 정당화해야 한다고 믿고 있지?'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한 뿌리에서 나온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에 대해 서로 상반된 태도를 취하는데 왜 그럴까하는 질문도 스스로에게 했던 것 같군요. 이 질문이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를 가지고 온 것인지 혹은 자본주의는 이미 존재했는데 나중에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해 정당화된 것인지에 대한 제 답과 관련이 있습니다. 제 오독이었을수도 있습니다.

4. 페르낭 브로델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바 전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5. 제 글에서 '경제결정론'이라는 표현이 오독의 여지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경제구조가 사회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이론은 (당연히) 아닙니다. 사회과학 이론에서 글자 그대로의 결정론이란 있을 수 없지요. 일반적으로 사회과학자들이 '결정론'이라고 하더라도 신학이나 고전물리학적 의미의 결정론은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굳이 얘기를 하자면 "사회현상을 이해하는데 경제적 구조변동에 대한 이해가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된다"는 정도로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통계를 공부하셨는지 모르겠는데 통계학적 용어로 말씀드린다면 경제적 구조에 관련한 설명변수들이 가장 유의적이고 설명력있게 나온다는 정도가 되겠습니다.

6. 막스베버를 경제학에서 다루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다는 님의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실은 제가 공부하는 경제학에서는 마르크스조차 다루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경제학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경제학에 문제가 없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문제 많습니다. 하지만 그게 막스 베버를 다루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는 아니라는 얘깁니다.) 다루는 대상과 연구의 필요에 따라 공부하는 것이 달라지는 것 뿐입니다. 경제학에서 막스베버를 다루지 않는 것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7. 한 학문분야의 결과가 다른 학문분야에서 이용되기란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학문분야의 성과가 상충되는 경우 어떤 것이 더 타당한지 판단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A라는 관점이 인문학에서는 부정되지만 사회과학에서는 인정되는 경우 인문학에서 부정되므로 사회과학에서도 부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면 동일한 논리로 사회과학에서 인정하므로 인문학에서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도 가능하겠지요.

일반적으로 보아 인문과학에서 다루는 현상과 사회과학에서 다루는 현상은 다를 겁니다. 대상이 다르다보니 사용하는 도구가 달라지는 것으로 이해해도 될 가능성이 많을 것 같군요. 천체관측을 위해 현미경을 사용할 수 없고, 세포관측을 위해 망원경을 사용할 수 없지요. "현미경도 없이 연구하는 것이 무슨 과학이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천체물리학자들에게는 매우 실례되는 말씀이겠지요.

8. 경제결정론(그냥 부르기 편하게 이름붙였다고 봐 주십시오. 마르크스 식으로 표현하자면 유물론적 변증법이 되겠습니다)적 시각은 개별 인간의 행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적용하는 경우 많은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집합적 인간 행위(사회 전체의 움직임)를 해석하는데는 여전히 중요하고 막강한 이론입니다. 몇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8-1. 유물론적 변증법은 왜 깔뱅이 하필 그때 자신의 신학이론을 제시했는지는 설명하기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왜 중세 말기에 가서야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고, 그것이 왜 당시 대토지 소유주들에게서는 극심한 반발을 받았던 반면 신흥 경제계급(자본가들)으로부터는 큰 지지를 받았는지를 설명하는데는 아주 유효합니다.

8-2. 링컨의 노예해방선언(남부의 노예에 국한된 선언이었습니다) 이전에도 북부의 몇몇 주들은 사실상 노예제가 폐지되어 있었습니다. 남부는 끝까지 노예제를 유지하려고 했지요. 그게 북부 사람들은 남부사람들보다 더 휴머니즘적이어서그랬을까요? 실은 남부와 북부의 경제기반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남부는 대규모 플랜테이션이었고 북부는 공업이었지요. 그게 노예제에 대한 남북부의 차이를 이끌어 낸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론도 경제결정론적 이론의 하나지요.

8-3. 영국의 노예해방은 대충 보아 한 40년 걸렸습니다. 그 40년동안 일관되게 노예해방을 지지하던 계층은 공장소유주들이었고 일관되게 반대하던 계층은 토지소유주들이었습니다. 두 계층의 차이가 개인적 휴머니즘의 차이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휴머니즘의 관점에서만 보자면, 당시 영국 공장노동자의 삶은 노예보다 훨씬 열악했습니다. 공장소유주들이 더 휴머니즘 적이어서 노예해방을 주장한 것이 아니지요. 역시, 기반하고 있는 산업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susi... (2006-02-13 11:30:28)    
volt..//"사회구조가 변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가 없었다...양란이후 왕조의 교체나 국가체제의 개혁이 쉽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경제적 토대의 부족때문.... 유교이념의 경화는 오히려 경제적 토대 파괴의 결과...
에 동감하지 않습니다.
중국에서 국민들이 배가 고프지 않으면 혁명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황건적의 난이나 등등...모택동은 중국을 기아에서 해방했다고 중국사상 최고의 인물이라는 추앙도 받았는데 혁명을 예방했다고 할 수 있죠.
따라서 양란을 통해 굶주린 백성들을 혁명으로 제대로 구제하지 못한 것은 당시 한국 지식층의 유교의식과 인내심(=기회주의?)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無所依//경제사적으로 역사적 성군을 재평가하기도 하더군요. 중국사에서 성군은 그때 마침 국민이 잘살았으면 성군이라 불리게 된다는 재해석입니다. 당태종의 정관의 치는 당태종이 잘한게 아니라 당시 교역으로 물자가 넘쳐났다거나...임금이 아무리 잘해도 굶주리면 반대가 되구요.
그 식으로 해석하면 링컨이 위대한 것은 그때 마침 북부가 노동자의 공급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라는 셈이지요.
無所依 (2006-02-13 12:46:49)    
susi//
님이 volt..님의 글로 인용하신 부분은 실은 제 글을 volt..님이 재인용하신 부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답을 합니다.

이 곳이 사회과학 게시판이었다면 저 역시 기쁘게 이 논쟁을 계속 해 나갈 의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군요.

여러차례 제가 얘기를 했지만, 제 글은 제 주장이 옳음을 강변하거나 설득하기 위해 한 얘기는 아닙니다. 따라서 님이 제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고 하셔도 그에 대해 이곳에서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이 주장이 그렇게 간단히 무시할 수 있는 황당무계한 주장만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저 님이 워낙 본인의 주장을 확고하게 믿고 계신 것 같아서 그에 대해 약간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본인의 주장이 타당한 사회과학적 이론이 되기 위해 필요한 논리적 절차를 밟았는가하는 의문의 제기와, 본인의 주장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라고 가정해도 그것이 유일한 이론은 아니다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것을 통해 사화과학의 연구에서 쉽게 빠지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혹은 인과관계 설정의 오류에 대해 님이 인식해 주셨으면 했던 거지요.

*****

링컨에 대해 언급하셔서 한마디 합니다. 노예해방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작은 기쁨을 드리기 위해 씁니다. 링컨은 실은 노예해방 반대론자였습니다. 링컨이 각종 집회에서 한 연설을 보면 링컨은 노예에게 정상적인 시민들과 같은 대우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링컨의 노예해방문은, 잘 읽어보시면, 남부의 노예에 한정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링컨은 남부의 노예들에게 얘기합니다. 너희 해방되었으니 공연히 남군 편 들지 말고 북군에 와서 싸워라. 링컨의 노예해방은 직접적으로는 내전 상황에서 상대방의 인적 자원을 소진시키려는 전략에 불과했지요. 노예해방이 남부에 한정되었기에 북부의 노예제는 공식적으로 상당기간 더 유지되었습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도 자발적으로 폐지한 주들 말고 북부의 3개주는 노예제를 유지합니다. 한참 뒤(2-3년 뒤)에 가서야 노예제는 미국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언한 것은 남부이 병역자원을 고갈시키려는 심사였고, 북부 사람들에게 그것이 별로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실은 꽤 많은 북부지역에서 자발적으로 노예제를 이미 포기했던 이유)는 북부의 산업기반이 공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volt... (2006-02-13 15:28:19)    
정확히 말씀드려서 베버를 다루지 않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 결정론에 반대되는 관점을 다루지 않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입니다. 말씀하셨던 바로 경제결정론 류의 관점은 경제학에서 주요하게 자리잡은 것으로 표현되었으니까요.

귀하의 입장에 대한 설명은 감사드립니다. 단 이해는 합니다만 전혀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라는 말씀 정도를 드리고, 저 역시 브릭에서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 좀 어색하게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저는 실제로 제 전공을 그냥 인문학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제 관점에서 철학,정치학,심리학,경제학,사학,법학 등의 전공을 세분화 하는 것은 반지성적이고 작위적인 행태로 보여서요.
susi... (2006-02-13 15:39:31)    
無所依//
이제까지 무소의님이 댓글로 말씀하신 부분에 대하여 별 감정없이 쓰신 것으로 믿고 재밌게 읽었으며
저의 표현에 껄끄러운 점이 있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토론도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이 토론할 수 있다는 자체가 좋은 것이고...

80년대 군부집권초에, 우리나라는 굶지 않기 때문에 군사정권에 대하여 민중혁명이 불가하다고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고정불변한 것은 없겠지요. 전두환은 물가를 잡았고 무역흑자를 처음 달성했으며, 그래서 군사정권이 공고화되었는데, 그 경제 성장이 또한 군부를 개화시켰는지 전두환의 친위구테타 요청을 군부가 거부해서, 87년 617, 629가 가능했던 것으로 봅니다. 친위쿠테타가 다시 성공했으면, 87년 서울이 80년 광주 재판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생각하기도 끔찍하군요.
아무튼 87년 상황은 님의 의견, 경제적 토대가 제공된 것이기도 합니다.
無所依 (2006-02-13 18:10:40)    
susi..//감정없이 보아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실제로 감정없이 쓴 글이지요. 하하.

volt..//통상의 의미에서 얘기하는 전공에 대해 여쭈어 보았습니다. 전공을 알고싶어했던 이유는 전공을 통해 님의 배경지식에 대해 제 나름대로 추측하고 적절한 표현을 쓰고 싶어서였습니다. 말씀을 안 해주시니 어쩔 수 없군요.

토론이 끝나가는 마당에 굳이 이 얘기를 짚고 넘어가고 싶어하는 까닭은 님의 몇몇 말씀이 저로 하여금 님에 대해 약간의 의혹을 갖게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논리적 결벽증이 있거든요. 뭔가 클리어하지 않으면 몹시 괴로워하지요. 그런 병적 증세가 발동했다고 이해해 주십시오.

우선은 님이 경제결정론이 "학계"에서 그 모순을 지적받은 것이라고 주장을 하셨습니다. 제가 어느 학계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여쭈어 보았는데 말씀이 없으시더군요. 철학계를 말씀하시는지, 사학계를 말씀하시는지, 경제학계를 말씀하시는지, 경제학에서도 근대경제학계를 말씀하시는지, 정치경제학계를 말씀하시는지. 경제학 이론이 물리학계에서 모순을 지적받지는 않을 겁니다. 어떤 학계에서 경제결정론을 "식상해 보이고" "모순이 있는 이론"으로 판단을 했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아울러 님이 어떤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도 알고 싶군요.

둘째, 님이 인문학이라고 일괄해 지칭하신 학문분야들은 현재의 구분으로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으로 구분됩니다. 물론 둘 다 인문학이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면 전 별다른 의견이 없습니다만, 문제는 '경제학'을 다른 분야의 학문과 같이 취급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습니다. 경제학이 잘나서가 아니라, 경제학을 연구하는 방법론이 다른 분야와 매우 다른 접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간단히 말씀드리면, 경제학자중에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시작하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반대로 물리학, 전기공학, 기계공학, 수학, 통계학 뭐 이런 것 한 사람 무지 많습니다(저도 학부전공은 물리학이었습니다). 현대 경제학은 다른 사회과학과는 별종의 좀 기묘한 학문입니다. 인문학들과 비교해보면 그 기묘함은 말도 못하지요. 이런 것을 하나의 학문분야로 묶어서 같이 공부를 해야 한다고 보신다는 말씀이신지...

그렇게 철학부터 경제학까지를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으시는 것이 저게는 몹시 생소하고 발바닥 한가운데가 간지러운 듯한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을 주는군요. 철학부터 경제학까지 아우른 님의 기준에서의 '인문학'이 어떤 모습인지 저로서는 상상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여쭈어 본다면, 님은 심리학과 경제학을 같이 공부하실 수 있나요? 학부수준의 공부가 아니라 이런 토론과정에서 관련분야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말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의 공부를 말하는 겁니다. 두가지 공부를 다 하는 사람의 모습이 제게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됩니다. 억지로 같다 붙이자면 추상수학 전공의 수학자가 영문학 박사학위도 가지고 있는 것하고 느낌이 비슷합니다. 못할 것야 없지만 아주 이질감이 심한 뭐, 그런 거지요.

셋째, 위에서 구분한 님의 학분분류와 함께 님의 베버 혹은 경제결정론에 대한 언급이 제 머리 속에서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한 느낌을 만들어내는군요. 경제학에서 베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요? 경제결정론이 아닌 다른 이론, 예컨대 헤겔을 든다면, 그 사람을 경제학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넷째, 경제학은 속칭 자본주의 경제학과 정치경제학 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님이 인문학에 포함시킨 경제학이 둘 중 어떤 것인지 모르겠군요. 둘 다 인가요? 둘은 같이 태어난 것들이기는 한데, 하나는 지구인, 하나는 화성인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실은 아주 이질적인 분야입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자본주의경제학자들)은 정치경제학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고, 정치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경제학을 아주 경멸하지요. 정치경제학은 철학이 있습니다만 100% 경제결정론이고, 자본주의 경제학은 인문학이라고 보기는 거의 불가능한 수준으로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어떤 경제학을 포함시키신 건지요?

제가 시비거는 것처럼 느껴지실까봐 미리 사과드립니다. 시비라기 보다는 제 성격상 장애라고 보아야 할 것 같군요. 답 하시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답을 주신다면 제가 좀 편해지는데 도움을 주시는 것이 될 겁니다.
volt... (2006-02-13 22:16:48)    
無所依 님, 시비라니요. 당치도 않으십니다. 이런 논쟁은 일상적이고 즐거운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습니다. 더 나아가 많은 분들의 참여가 있었다면 더 유익해질 수 있었다고도 생각합니다.

저 역시 유사한 성격상 장애가 심했던 사람이어서 뭔가 無所依께서 꺼내놓으신 모든 이야기들에 그럴 듯한 마무리라도 해드리고는 싶은데, 이런 조건에서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죄송합니다.^^*

제가 능력이 안되는 이유나마 설명을 드리자면,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미루어 지적인 배경에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추측이 되는 면들이 많고 의사 소통이 용이한 경우가 아니라는 판단에서 입니다. 오해하시면 안되는 사항은 제가 지금 지식의 수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지적인 기반과 지향의 상이함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경우라면 통상 대화가 대단히 힘들어 진다고 생각합니다.

제 주변에서 흔히 오가는 말 중에 "아는 수준 만큼 질문도 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진지하게 드리는 견해로 이미 질문하신 내용에 대해서 나름대로 답을 하실 수 있는 것이 많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하신 내용은 매우 유의미해 보입니다.
無所依 (2006-02-14 06:05:42)    
죄송합니다. 다른 것은 다 떠나서 한가지만 답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맨 처음 한 질문입니다.

님이 말씀하신 "학계"가 어떤 것인지, 경제결정론이 "이제는 식상해 보이"고 "논리적 결함의 지적이 학계에서 이미 충분히 이루어진" 것이며 "거의 무시당하는 상황으로 보이는 관점"이라고 판단하신 님의 말씀을 어떤 학술적 근거에서 하신 것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님이 그냥 "나는 경제결정론을 믿지 않는다"라고 하셨거나 "내 생각에는 그 이론은 시대착오적이다"라고 하셨다면 제가 이토록 집요하게 여쭙지는 않을 겁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 제 의견과 틀리다고 이런 토론이 썩 적합하지 않은 BRIC에서조차 누가 맞는지 따져보자고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님은 학계의 평가는 이미 그 이론에 대해 사망선고를 내렸다(논리적 결함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거든요. 그 "학계"가 어디인지 제발 알려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volt... (2006-02-14 15:30:00)    
제가 답글을 주저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無所依께서 접하시는 학계와 제가 접하는 학계가 다른 것은 거의 분명하고, 서로가 어찌 되었든 추상적이지만 주류학계를 접하고 있다는 생각을 각각 하고 있는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범주의 학계가 정통성이 있는 주류이고 아니고를 말하는 것 따위도 전혀 의미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말썽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집요하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 논리적으로 대립적인 관점에 서 있는 상대로 부터 우호적인 반응을 얻어 내시기에는 약간 공격적이신 셈인가요^^. 현실적으로 의견이 다른 집단과 개인 간에 우발적이고 불필요한 조우가 초래한 사소한 잡담거리라고 생각합니다.
無所依 (2006-02-14 17:01:41)    
아, 그런 취지는 아닙니다. 제가 뭐 어떤 학계인지 안다고 해서 거기에 가서 '깽판'놓을 위인도 못 되고 능력도 없습니다. 순전히 제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 혹은 세계관의 이론적 정합성때문입니다.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으로 사회적 현상을 해석하는 큰 틀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 틀이 최고의 틀이 될 수는 없겠지만, 공부를 하는 사람으로서 최소한 틀 자체의 문제나 모순은 제거해 나가도록 해야 하지요.

제 경우에는 그에 대한 강박관념이 훨씬 심합니다. 현재 제가 가지고 있는 틀을 갖추기 위해 제가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은 님이 상상하실 수 있는 것 이상입니다. (간단히 말씀 드리자면 이 틀을 갖추기 위해 제가 공부했어야 하는 분야는 수학, 논리학, 서양경제사, 계몽주의철학, 과학철학, 특정시대에 관한 동양역사, 정치학, 일부 사회학, 일부 심리학, 일부 신학, 비교종교학, 일부 동양철학 그리고 당연히 경제학 등이었습니다. 먼저 말씀드린대로 제 학부전공은 물리학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위의 분야에 대한 책들을 찾아서 읽어나가는데 어떤 노력이 필요했을지 짐작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노력과 시간을 들여, 다른 틀보다 우월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적 모순은 가지지 않은 분석의 기준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요.

그런데 이 틀이 공식적으로 논리적 결함이 있다는 선고가 내려졌다는 말을 님에게서 들은 겁니다. 좀 심한 비유를 하자면 자기 자식에 대해 아주 많은 자부심을 가진 부모한테 "당신 자식은 형편없어"라고 말씀을 하신 셈입니다. 도대체 어떤 점에서 모순이 있는 것인지는 알아야 제 틀을 고치든지, 모순이 있다는 지적을 무시하든지 할 것 아닙니까? 내 자식이 도대체 어떤 점에서 형편이 없는지는 알아야 애를 고치든, 그 말을 무시하든 할 것이 아닙니까?

제 댓글에서 쓴 바와 같이 제가 가지고 있는 틀이 인간 행위의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님의 말씀하신 모순이 모순이라기 보다 취약성이고, 제가 이미 그 취약성을 알고 있는 부분이라면 전 그냥 그 지적을 받으면 됩니다. 예를 들어 님이 만일 신학을 하시는 분이고, 신학자의 입장에서 볼때 경제결정론은 모순이라고 하신 것이라면 전 100%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님이 만일 사학을 하시는 분이고, 사학자의 입장에서 모순이 지적되었다면 이건 제게는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님이 동양철학을 전공하셨고 동양철학적 차원에서 모순이 제기되었다면 전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다. 그건 모순이라기 보다 두 이론이 지향하고 분석하는 세계가 다른 데서 기인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님이 만일 사회학을 하는 분이라면 이 지적은 제게는 매우 중요한 지적이 됩니다.

님께 계속 전공을 여쭈어보고 어떤 학계인지을 질문하는 것은, 누가 맞나 따져보자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지만, 적어도 제게는 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이냐에 따라 아주 큰 사건이 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사고의 틀 없이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과학 공부를 하는 사람 입장에서 제가 사회를 분석하는 준거가 뭔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걸 확인하지 않고 그냥 넘기고 말기에는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제 마음이 용납을 못하는 거지요.

단 한줄이면 됩니다. "어떤 학문분야에서 이러이러한 이유로 누구에 의해 문제가 지적이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제가 나름대로 상당히 많은 분야에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님이 그 한줄만 써 주시면 제가 관련분야 서적들을 찾아 읽고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제 자식이 어떤 면에서 형편이 없는지 간곡히 수차례 여쭙고 있습니다. 답을 부탁드립니다. 좀 별종인 인간이라는 점은 말씀 안하셔도 잘 알고 있습니다.
volt... (2006-02-15 01:37:37)    
無所依 님, 인터넷에 항상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답글이 오가는데 시간적 간격이 길어져 죄송합니다.

귀하의 어떤 학문적 집요함에 대해서 저는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스스로를 낮추는 말씀을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라고 판단하면 제가 대응이나 말없이 무시하면 그만입니다. 지금 저와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심각한데 그걸 인지하지 못하시는 점이 유감입니다. 저로서는 황당할 정도로 점점 더 의사 소통이 안되고 있습니다. 제가 귀하를 조롱하거나 무시할 이유가 없고 나름대로는 뭔가 대화를 하려고 노력을 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며, 이 건에 대해서는 귀하께서 원하는 방향의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불가하다는 말씀을 다시 드립니다.

공개된 게시판에서 익명으로 의견을 나누고 있으며 제가 무슨 대단한 권위자로 등장한 것도 아닙니다. 귀하의 자식이 제가 뭐란다고 형편없는 아이가 될리가 없습니다.

약간은 죄송한 마음으로 최근에 어떤 사람들과의 나누었던 이야기를 대신하여 드리고자 합니다. "인문학적인 자질이 뛰어난 사람의 경우 자기 존재의 불안감을 항상적으로 느끼며 살아간다는 관찰을 왕왕 하게 됩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확고한 답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無所依 (2006-02-15 08:43:46)    
님이 저를 조롱하거나 무시한다고 생각했다면 애초부터 이런 부탁을 이토록 집요하게 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저도 무시하면 되지요. 그리고 님의 댓글이 만약 제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으로 쓰여졌다면 역시 이러지 않을 겁니다. 속으로 이러고 말았을 겁니다. "당신이 뭘 안다고..."

위에서 읽은 님의 댓글(특히 유학에 대한 댓글)을 통해 님께서 제가 충분히 인정할 만한 수준의 지적 배경을 갖춘 분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즉, 님의 '학계'와 '경제결정론'에 대한 언급이 간단히 무시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는 거지요. 적어도 그런 언급에 대한 학술적 근거는 갖추신 분이라 판단을 하고 있다는 얘기지요.

그런데 님의 바로 위 댓글은 솔직하게 좀 실망스럽습니다. 이론물리학하는 분께 "당신 계산이 틀렸어"라고 한 뒤, 어디가 틀렸냐고 물으니 "굳이 알 필요 뭐 있어? 내가 틀렸다고 틀린 것은 아니니까 당신 스스로 맞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야"라고 대답을 하신 셈입니다.

제가 "제 존재에 대한 확고한 답을 가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론에 대한 확고한 답은 가지고 있지 않지요.사회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이론이 100% 옳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새로운 상황이 생기거나 이론이 등장하면 끊임없이 자기의 이론적 틀에 맞추어 해석하려고 노력하고 해석이 안될 경우 자신의 이론적 틀을 수정하지요.

제가 질문하는 것에 대해 답을 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확실치 않군요. 아마도 더 이상은 댓글을 달지 않으실 모양입니다. 결국 저는 제 궁금증을 풀 수 없게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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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의 하나, 정말 만의 하나입니다. 혹시 님이 그냥 별 생각없이 그리고 별 근거없이 '학계'를 말씀하시고 '모순'을 말씀하셨던 것이라면, 앞으로는 그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론물리학자들한테 "당신 계산 틀렸어"라는 말이 얼마나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되는지 모르시지요? 사회과학자한테 "당신의 분석도구는 모순이 있다고 증명되었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말을 소위 '일반인'도 아니고 [인문학]을 전공하신다는 분의 입에서 들으면, 게다가 그 인문학의 범주에 사회과학까지 포함시켜야 마땅하다고 주장하시는 분의 입에서 들으면 그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 만의 하나, "학계에서 사망선고 난 이론으로 알고 있는데?"라는 말씀이 그저 "난 그 이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라는 뜻이었다면, 두번 다시 이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volt... (2006-02-15 23:40:25)    
저는 귀하가 원하는 방향에서의 답을 드리지 않겠다는 의중을 누누히 밝혔습니다. 그러나 답은 드린 셈입니다. 이 글타래의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을 해보시지요. 귀하의 글이라는 생각을 버리시고 전혀 모르는 남이라는 가정으로 특히 귀하의 글을 연달아 읽어 보십시요.

저는 귀하를 이 글타래를 통하지 아니하고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글타래를 통하여 이해되는 無所依란 분의 사고체계와 태도의 문제는 경제결정론의 문제와 별개의 것이 전혀 아니지요. 특히 만의 하나...운운하신 부분은 거의 절정 부분으로 귀하와 본인의 격을 시궁창에 던져 넣는 수준이군요.
無所依 (2006-02-16 06:14:11)    
제 격을 스스로 시궁창에 던져넣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기 싫어서 계속 님께 답을 부탁드렸지요. 하긴, 이 게시판에서 다른 사람의 질문에 답을 할 의무는 없지요. 그래도 토론의 상대방이 개인적인 얘기까지 토로해 가며, 매우 정중히 질문을 드렸으면 답을 해 주시는 것이 토론상의 예의일 겁니다.

제가 한 부탁은 그저 님이 알고 있는 사실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말해 달라는 것이었지요. 제가 님께 님의 의견을 철회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제 의견을 용납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방향의 답"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그 정중한 부탁에 대한 님의 답은 결국 "넌 몰라도 되"였네요.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난 말했는데 네가 못 알아듣는 거야"로군요.

하지만 님은 님의 글에서 제가 여쭙고 있는 '사실'에 대한 말씀은 안 하셨습니다. 시종일관 "난 당신 의견에 대답하지 않을거야" 혹은 "당신하고 나하고는 사고방식의 차이가 있어"라는 말씀만 하셨지요.

제가 그거 여쭙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님이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 말씀해달라는 겁니다. "어떤 학문분야에서 이러이러한 이유로 누구에 의해 경제결정론의 문제가 지적이 되었다."라는 사실에 대한 기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님이 저를 한심한 놈으로 보시든, 말귀도 못알아듣는 멍청한 놈으로 보시든, 인격이 시궁창인 놈으로 보시든, 그건 제가 관여할 수도 없고, 관여할 이유도 없겠지요. 그러니 제게 그 사실에 대한 한줄의 기술만 주시면 저는 님께 감사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지요. 님이 제 글과 제 태도에서 부당하다고 지적하시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사과드리겠습니다. 제발 님이 알고 계신 것을 알려주십시오.
volt... (2006-02-16 15:49:58)    
제가 요즘 정신적으로 아주 한가한 시기입니다. 그러다 보니 브릭 같은 곳에도 들러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합니다. 특히 황박사 사건 이후 저로서는 책임감있고 엄정한 사고방식을 견지하고 있는 지식인이라면 이곳에서 전개된 일련의 논증 과정을 직접적으로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 개인적으로는 이곳에 글을 올리시는 분들 특히 비전공분들에게 우호적인 관심과 태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귀하에 대해서도 다르지 아니합니다. 이제 이글타래가 뒷페이지로 옮겨졌고 타인의 이목도 덜하여졌으니 한가한 마음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이글타래를 통하여 저에게 드러나는 無所依님의 모습은 우선 너무나 다급한 분으로, 제 소견으로는 기본적인 태도에서부터 타인에게서 어떤 답을 구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다시 지적을 합니다만 지금 공개된 게시판에서 익명으로 의견을 나누고 있습니다. 귀하나 제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의 추측도 병행이 됩니다만 일단 이 게시판에서의 대화 상대는 無所依라는 분의 글로서 형성된 캐릭터가 전부입니다. 글로서 드러난 귀하의 태도는 죄송합니다만 형식적으로도 정중하기까지 한 것인지 의문이 있고 내용상으로는 무례한 것이 사실 아닌가요?^^ 문제로 삼지는 마십시다. 그리고 저는 "난 말했는데 네가 못 알아듣는 거야"라는 의견을 전한 것이 아니고 "귀하 스스로가 말한 것에서 귀하가 옳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의 문제가 드러난다."는 의견을 전한 것인데요...누가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서로 의사 소통이 잘안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주십시요.

無所依님은 자신의 질문 자체가 황당하고 말이 안되는 것일 수 있다는 일고의 의문도 이 시점까지 스스로 가지시지 않으시는군요. 제가 "아는 수준에서 질문을 한다"든가 "귀하의 질문이 유의미해 보인다"라고 한 표현은 가능한 정중하고 완곡하게 귀하의 질문이 "자기 사고체계의 한계에서 단 한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질문을 하고있다"와 귀하의 질문이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만 틀려있다"는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전혀 생각치 못하신 듯합니다. 無所依님이시라면 적어도 틀린 이론도 의미와 역할이 있었다는 측면은 이해하시겠죠.

"인문학적인 자질이 뛰어난 사람의 경우 자기 존재의 불안감을 항상적으로 느끼며 살아간다는 관찰을 왕왕 하게 됩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확고한 답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란 말씀을 드린 것도 無所依님께서 스스로도 말씀하셨듯 지적인 강박관념에 떠밀려서 조급하게 답을 찾는 태도 자체가 잘못이라는 지적을 하려는 것이 주요 이유였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외람됩니다만 이런 것입니다. "귀하의 질문내용과 질문하는 방식과 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질문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데 무슨 바른답을 하라는 것인지요? 너무 답에 집착을 하시기에 우려에서 유치한 설명을 더 드리자면 "어떤 학문분야에서 이러이러한 이유로 누구에 의해 경제결정론의 문제가 지적이 되었는가?"란 질문이 현 시점과 상황에서 어떻게 제기될 수 있는지 그 자체를 저는 아예 납득하지 못하는 입장의 사람이고, 그런 측면에서 귀하와는 의사 소통이 매우 어려운 사고체계를 가진 사람입니다.
無所依 (2006-02-16 18:18:09)    
"기존의 그것(경제결정론)에 대한 논리적 결함의 지적이 학계에서 이미 충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닌지요. 심지어는 거의 무시당하는 상황으로 보이는 관점을 너무 태연히 말씀하시니 오히려 관심이 가는군요."

제 질문은 님께서 써 놓으신 이 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저렇게 말씀 하셨기에, 님께서는 어떤 분야에서 누구에 의해 경제결정론의 문제가 지적이 되었는지 알고 계시다고 간주해야 마땅하겠지요. 제가 다른 댓글에도 써 놓았지만, 님의 글이 수준미달의 형편없는 글이었다면 위의 말에 대해 별 관심두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님의 글은 제가 충분히 인정해드릴만한 글이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질문을 한 거지요.

제가 말하는 것이 옳고 그르고 이런 생각 없습니다. 그냥 님의 저 글이 저로 하여금 몹시 궁금하게 만들었던 것 뿐입니다.

질문방식이 잘못되었다면 사과드립니다. 특히 제 끝부분 댓글에 님의 기분이 상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제가 계속 드리는 질문 내용은 그저 님께서 써 놓으신 저 글의 학술적 근거를 좀 알려달라는 것 뿐입니다. 님의 사고체계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님과 누가 옳고 그르고 따지려는 쪽도 아닙니다.

그냥 님이 어떤 것을 알고 계시기에 저 글을 쓰셨는지 말씀해 달라는 겁니다. 그거 답 해주시기 그렇게 어려우십니까?
無所依 (2006-02-16 18:18:51)    
문득, 님이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제가 이런 토론을 할때 좀 공격적이 됩니다. 혹시 그점때문에 오해를 하고 계시다면 오해를 푸시기 바랍니다.

저 질문은 그냥 질문입니다. 제가 과문해서인지 전 저런 평을 못 들었거든요. 그런데 님께서 저런 말씀을 하신 거지요. 그래서 궁금해졌습니다. 제 댓글중 만의 하나 운운한 댓글은 님께서 하도 제 질문에 답을 안 하셔서 저렇게까지 생각을 했다는 얘깁니다. 불쾌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사과드리지요.

님의 전공분야가 뭔지 모르지만 폄하하고 싶은 마음 없고, 님의 지식에 대해서 역시 폄하하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폄하할 분이라고 느껴지지도 않았습니다.) 제 글이 그렇게 느껴졌다면 오해를 푸시기 바랍니다.
volt... (2006-02-16 20:13:57)    
오늘 좀 시간이 나서 이야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뭐 별 의견이랄 것 없는 의견을 나누면서 저는 저 나름대로 얻는 것이 있었습니다. 無所依님도 시간만 낭비했다는 경우가 아니시기 바랍니다.

"뭔가 새로운 차원의 경제 결정론이라도 구상하신 것이 아니라면, 기존의 경제결정론에 대한 논리적 결함의 지적이 학계에서 이미 충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닌지요. 심지어는 거의 무시당하는 상황으로 보이는 관점을 너무 태연히 말씀하시니 오히려 관심이 가는군요." 라는 요지의 발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뭐 세세한 지적을 하지면 정확히 "거의 무시당한다"고 표현했고 부정당했다고 평가하지는 않았습니다. 제스스로는 무심하게 했던 발언임에도 無所依님 덕분에 여러 정황을 돌아보고, 또 다시 보아서 현 시점과 상황에서 큰 잘못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로서는 최선의 답을 드렸습니다. 저에게는 답인 것이 귀하에게는 답이 아니고 저에게는 사실인 것이 귀하에게는 사실이 아닐 정도로 커다란 시각차가 존재합니다. 저는 이런 경우가 처음이 아닙니다만...귀하로서는 의외의 경우이신가 봅니다. 그리고 이런 공개적인 인터넷 상의 게시판은 깊이 있거나 유의미한 토론 장소로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판단합니다. 귀하에 대해서 분명히 화가난 부분은 "만의 하나..." 운운하신 부분으로, 이미 불만을 표했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까지 하셨으니 되었습니다.^^ 귀하의 이해를 구하고자 하는 것은 저로서는 가능한 정직하게 답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귀하가 구하시는 답은 제게서 얻으실 수가 없습니다.
無所依 (2006-02-17 03:41:40)    
마지막으로 저도 제 입장을 정리하고 끝내지요. 경제결정론에 대한 제 입장이 아니라 님과 토론(?)을 한 것에 대한 입장입니다.

1. 최초에 님의 전공을 여쭈어 본 것은, 만일 님이 신학이나 동양철학 같은 것을 하신 분이라면 이런 질문을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님이 [인문학]에 경제학을 포함시켜 마땅하다고 하셔서 이 질문을 계속 드린 거지요. 본인 스스로 인문학에 경제학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하셨고, 본인의 전공이 인문학이라고 하셨으므로 저는 님이 경제학에 대한 적절한 수준의 소양은 갖추었다고 가정해야 마땅합니다.

2. 경제결정론이 무시당하는 학설이냐 아니냐를 여기서 논할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그런 것 얘기할 곳도 아니고, 제 경제결정론적 역사해석도 제가 맞다는 얘기를 하기보다 susi..님의 의견에 대해 다른 견해도 있을 수 있다는 정도로 얘기를 한 것이었습니다.

3. 제 질문의 핵심은 "논리적 결함의 지적이 학계에서 이미 충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닌지요"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님의 이 말씀에 대해 제가 "당신이 뭘 알아?"라고 따지자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학계의 누구에 의해 어떤 결함이 지적이 되었길래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물었지요. 님은 "결론적으로 귀하가 구하시는 답은 제게서 얻으실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시는 것이고.

4. 전 여전히 님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님을 불쾌하게 만든 제 댓글에서 제가 그런 추론을 했습니다. 학계운운 하신 것이 별 근거없이 본인의 느낌으로 하신 말 아니냐라는 추론이었지요. 님이 그 글에 대해 "스스로 격을 시궁창에 넣는"다는 말씀으로 저를 비난하실 정도로 강하게 부정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긴 시간을 할애해 수차례 글을 쓰고 감정을 상하고 또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느니, 그냥 그런 말 한 학자 몇명 이름과 관련된 그들의 저술을 써주면 그만이었을 것이었지요. 제가 님이었다면 그렇게 하고 끝냈을 겁니다. (그게 제가 알고 싶었던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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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바로 위 댓글에 제가 이해못할 말씀을 하셨습니다.

1. "현 시점과 상황에서 큰 잘못이 보이지 않습니다."
- 전 님의 말씀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정말 열번도 더 드린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요. 전 님의 경제결정론에 대한 시각이 잘못되었다거나 그런 말씀을 해서는 안되었다거나 하는 얘기를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님의 말씀이 근거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싶어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2. "저에게는 답인 것이 귀하에게는 답이 아니고 저에게는 사실인 것이 귀하에게는 사실이 아닐 정도로 커다란 시각차가 존재합니다. 저는 이런 경우가 처음이 아닙니다만...귀하로서는 의외의 경우이신가 봅니다."
- 님과 저의 시각 중에서 누가 맞는지 논쟁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저도 당연히 저와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을 아주 많이 알고 있습니다. 제가 경제결정론이 맞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경제결정론을 님께 강요하는 것이 아님을 반복해 말씀 드립니다. 전 단지 님이 알고 계신 사실이 무엇인지 계속 묻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알고계신 사실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시각차가 있다는 답을 계속 하고 계신 겁니다.

3. '님의 말씀이 근거하고 있는 사실'이라고 말씀을 드리자니 제 글투가 따지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 같아서 제가 사용한 표현이 "어느 학문분야에서 누구누구가 어떤 모순을 지적했는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알고 싶어하는 사실은 그 세가지였다는 얘기지요.

4. 여전히 전 님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fact를 좀 알려달라'고 하는 제 질문에 님의 대답은 '관점이 다르다'는 겁니다. 제 질문이 님의 관점이 틀렸으니 논쟁해보자는 쪽으로 읽혔습니까? 그토록 반복적으로 그게 아니고 그저 사실에 대한 궁금증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제 사적인 얘기를 한 것도 님이 제 질문을 논쟁을 해 보자는 쪽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것이었습니다.
volt... (2006-02-17 09:12:24)    
"알고계신 사실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시각차가 있다는 답을 계속 하고 계신 겁니다."

상호간 아예 사실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다름으로 답이 불가하다는 사람에게 "알고 있는 사실이 무엇이냐"고 계속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기괴하고 마무리로 멋져보이지 않으네요. 어찌되었든 저로서는 얻는 것이 있는 대화였고, 많은 시간을 할애하시어 질문하신 결과가 만족하지 못하신 점은 유감입니다. 인사드리는 것으로 마무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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