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승주나무입니다.

비록 회사 이름으로 나가는 거지만, 중앙일보와 공동으로 '논술극화'를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2월 28일에 첫 회가 나갔구요. 오늘 2회가 나갔습니다.

중앙일보 프리미엄지 강남섹션을 보시는 분들은 원고를 보았을 텐데요,

다른 분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여기에 원고를 올립니다.

첫 회는 홈페이지에 업데이트가 되지 않은 관계로 스캐너로 복사해서 올려야 할 것 같고

일단 인터넷에 소개되는 대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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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3-07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런 것도 하시네요. 대단해요.

승주나무 2006-03-07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 님// 힝. 부끄럽사와요^^

마늘빵 2006-03-07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님의 연세가 궁금해졌어요.

승주나무 2006-03-07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파릇파릇한 이십대입니다^^

아영엄마 2006-03-07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승주나무님이 이십대이셨어요?? @@

승주나무 2006-03-07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 님// 안녕하세요? 예, 이십 대의 생기발랄한 문체가 돋보이지 않던가요(퍼퍼퍽!!)
유통기한은 올해까지입니다^^

승주나무 2006-03-08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뽀뽀님 // 예, 98년 한메일 처음 나왔을 때 만들었습니다. 문학동아리에 있어서 '다작'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했는데, 지금도 안 어색합니다^^
 
 전출처 : 딸기 > 만평 파문, 총정리.

전세계 무슬림(이슬람교도)들의 이른바 ‘무하마드 만평시위’에 대한 뉴스가 한동안 시끄럽게 외신을 장식했다. 이슬람권의 중심인 아랍국들에선 시위가 어느 정도 사그러들었지만 파키스탄과 인도네시아 등지에서는 무슬림들의 항의시위와 유혈충돌이 그치지 않고 있다. 석달 가까이 계속된 시위로 곳곳에서 사망자가 속출했고, 결국 최대 피해자는 유럽인들이 아닌 무슬림들이 되고 있다.

만평, 항의, 폭력, 유혈사태. ‘비무슬림’의 시각에서 보기에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격렬한 만평 시위는 왜 일어난 것일까. 무슬림들은 ‘별것도 아닌’ 신문 만화에 어째서 그렇게 거세게 항의하고 나선 것일까.


# ‘표현의 자유’와 센세이셔널리즘을 오간 언론들

이 사건을 바로 보는 첫걸음은 원인이 된 만화들을 보는 것이다. 만평 파문을 촉발한 것은 덴마크 일간지 율란츠포스텐이다. 신문에는 무함마드를 테러범으로 암시한 그림을 비롯해 만화 12점이 실렸다.

‘어째서 기분나빠하는지’를 알려면 과연 이것들이 ‘어떤 그림들인지’를 알아야 한다. 한국의 무슬림 인구가 10만 명에 이르지만(한국이슬람중앙회 통계) 한국 사회에서 무슬림들의 발언권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해 한국의 일부 언론은 무하마드 만평을 거리낌 없이 지면과 화면에 내보냈지만, 국내 언론에 공개된 만평은 문제가 된 12점 가운데 가장 ‘덜 모욕적인’ 무하마드의 얼굴 그림 정도였다(‘덜 모욕적인’ 것이었다고는 하지만 무하마드의 머리에 폭탄 모양의 터번을 얹었다는 것만으로도 무슬림들이 불쾌하게 여기기에는 충분했다).

이슬람에서 예언자 무하마드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라는 사실은 이미 여러 언론에서 짚었다. 그러나 엄격한 신성모독 기준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12점의 만평들은 노골적으로 이슬람을 모독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라는 혐의가 짙다.

“이제 테러는 그만해, 너희들에게 줄 처녀가 모자라잖아.”

서방에 맞선 무자히딘(전사)들에게 예언자 무하마드가 “처녀가 모자란다”고 말하는 내용을 그려놓고서 “모독할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니, 무슬림들에게 그런 해명이 받아들여질 리는 없지 않은가. ‘처녀들’은 꾸란(코란)에서 천국을 묘사할 때 명시돼 있기 때문에 그것조차도 유럽인들의 횡포로 볼 수만은 없겠지만, 무슬림들이 자신들의 경전을 악용해 서방에 맞선 모든 투쟁을 희화화하는데에 동의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 만화들을 앞다퉈 실은 뒤 유럽 언론들은 `표현의 자유'를 주장했다. 물론 유럽 전체가 ‘표현의 자유’ 옹호론자들로 뒤덮여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럽에서 ‘표현의 자유’는 정치적, 사회적 혹은 윤리적인 이유로 종종 제한을 받아왔으며 ‘무제한적인 표현의 자유’가 용인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만평 항의시위가 한창이던 2월20일 오스트리아 법원은 나치 옹호론자였던 영국 역사학자 데이비드 어빙(67)에게 징역 3년형을 선고했다. 어빙은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학살)를 부정하는 것을 범죄행위로 규정한 법에 따라 지난해 체포됐다. 법정에서 어빙은 자신의 견해가 잘못됐음을 시인했지만, 재판부는 ‘잘못을 시인하는 태도가 진실해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 뒤 오스트리아 학계에서는 학자들이 다양한 관점과 학설을 제시할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는 반발이 터져나왔다.

표현의 자유를 무제한적으로 인정해줄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으로 해를 미치는 견해’를 발표하는 것에 제약을 가할 것인가. 각각의 주장은 나름의 논거를 갖고 있고, 제각기 타당한 측면이 있다. 문제는 유럽(내지는 서방)의 태도가 무슬림들에게 극히 이중적으로 비친다는 사실이다. 홀로코스트를 부인할 자유는 없지만 무슬림들을 모독할 자유는 있다? 미국에 미운털 박힌 이란의 한 관영 언론이 ‘홀로코스트 만평’을 공모하겠다고 나선 것은 유럽의 이중 잣대를 비꼬기 위한 것이었지만, 서방(그리고 한국)의 몇몇 언론들은 이란을 우습게 묘사하는 데에 급급했다. 이란의 행동에 이스라엘은 ‘이란 폭격론’까지 주장했다.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은 이슬람권이 미국과 서방을 미워하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국 언론들이 무하마드 만평을 경쟁적으로 싣는 가운데서도 영국의 가디언 같은 좌파 언론과 미국 워싱턴 포스트 등은 그림을 싣지 않았다. 이 신문들이 내세운 입장은 “다만 도발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만평을 싣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만평을 싣는 언론들의 행위가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센세이셔널리즘에 치우쳐 있음을 지적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만평을 게재한 유럽 언론들이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면서 신문판매고가 급증하는 상업적 효과를 거뒀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유럽 언론들은 무하마드 만평을 놓고 ‘표현의 자유’와 센세이셔널리즘 사이에서 줄타기를 벌인 셈이다.


# 뿌리깊은 이슬람 차별과 ‘이주민 몰아내기’

앞서 한국의 무슬림 수가 10만 명이라고 했지만 그 중 70%는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온 외국인들이다. 유럽도 상황은 비슷하다. 2대, 3대 째 유럽에서 거주해온 무슬림 주민들도 있지만 1970년대 이후 건너온 이들이 대부분이다. 덴마크의 경우 인구의 3%인 17만 명이 무슬림인데 아랍계 이주민은 오히려 적고 터키와 파키스탄, 북아프리카, 이란 등지에서 온 노동자들이 많다.

이슬람에 대한 서방의 적대적인 인식의 뿌리를 찾기 위해 십자군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다. 무슬림 주민들이 율란츠포스텐의 만평에 격분한 이유는 ‘표현의 자유’ 이면에 있는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 때문이기도 하다.

덴마크의 경우 국민들의 종교의 자유는 헌법으로 보장돼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종교가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입헌군주국인 덴마크는 루터파 복음주의를 국교로 규정해놓고 있다. 이밖에 기독교의 다른 종파나 유대교는 헌법상 지위를 보장받는다. 그러나 무슬림은 그렇지 못하며, 교회가 정부 산하 기구의 하나이기 때문에 출생·사망신고를 교회에서 해야 한다. 파키스탄 출신으로 덴마크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코미디언은 지난달 5일자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이 나라에선 개도 매장지가 있는데 무슬림에겐 이슬람식 매장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썼다.

이런 차별의 일선에 서있는 것이 바로 만평들을 게재한 율란츠포스텐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만평 파문은 유럽의 우파 신문들이 ‘몰고간’ 기색이 역력하다. 율란츠포스텐은 덴마크의 대표적인 우파 기독교 신문이고, 이슬람 문제가 아니더라도 도발적인 보도로 수차례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고 한다. 만평 게재에 항의하는 이들은 특히 덴마크에서 2001년11월 우파 정권(이 정권의 총리는 만평 파문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누차 말했었다)이 집권한 이래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 전반의 적대감이 커졌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율란츠포스텐 같은 우파 언론들의 부추김이 있었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만평들을 실으면서 ‘표현의 자유’를 주장했던 프랑스수아르라는 신문은 발행부수 4만5000부의 작은 매체인데, 역시 센세이셔널리즘으로 벌이를 해온 우파 대중지로 알려졌다.

덴마크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백인 원주민과 무슬림 이주민들 간의 불화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재작년 무슬림 광신도가 테오 반 고흐라는 영화감독을 살해한 뒤 기독교도들의 반격으로 대대적인 ‘모스크(이슬람사원) 파괴’가 벌어졌다. 지난해 영국 런던에서 발생한 7·7테러와 프랑스 파리 소요사태에서 보이듯 유럽 내 무슬림 차별은 이미 심각한 상태다. ‘백인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무슬림들’에 대한 적대감이 사회 전반으로 퍼지고, 그것을 상업주의 언론이 돈벌이에 이용하려 하면서 만평 사태가 불거져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유럽 자체의 문제점 뿐 아니라 이슬람권 전역의 반미 감정이 반(反)서방·반기독교 감정으로 확산되면서 폭력사태로 치달은 측면도 물론 무시할 수는 없다.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와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으로 이슬람권에서 반미 감정이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번 만평 파문에서 미국은 한 발 비껴서 있었으며 당사국이 아니었지만, 무슬림들의 분노는 결국 미국을 향해 갔다. 인도네시아 미국대사관이 공격을 받았고, 아프간과 파키스탄에서는 미군 기지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3월4일 부시대통령의 파키스탄 방문 때에도 격렬한 시위가 계속됐다.


# 이슬람 세계 내부의 요인들

앞서 무슬림들이 무하마드 만평에 격렬한 반응을 보인 이유들을 나열했지만, 이슬람권 내부의 문제도 간과할 수는 없다. 자신들의 종교를 모독한 데 대한 이슬람권의 대응은 성숙하지 못했고 폭력적이었다. 일본에서 혐(嫌)한류 만화가 출간됐다고 해서 한국인들이 일본 기업 건물을 부수거나 서로 죽고 죽이진 않는다. 만평 사태는 분명히 이슬람권의 전근대성과 고질적인 모순들을 반영하고 있다.

만평을 놓고 두드러지게 독설을 내뱉었던 것은 이란이었고,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라크 등 이슬람권 전역에서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가장 극렬한 반응을 보인 곳, 아직까지 시위의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곳은 파키스탄이다. 파키스탄은 인구로 보아서는 인도네시아에 이어 2위 규모의 이슬람국가이지만 이슬람권에서는 ‘변방’에 속한다. 파키스탄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만평 폭력시위가 지역 내 억압구조와 관련돼 있음을 시사한다.

파키스탄은 아프간전쟁 때 미군 기지였고 지금도 알 카에다 체포 작전이 전개되고 있다. 부시대통령의 방문에 맞춰 파키스탄 정부군은 대대적인 탈레반 공격작전을 벌였으며 4일에는 아프간 접경지대에서 정부군이 ‘탈레반 잔당’ 56명을 사살했다.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은 아프간 전쟁 때 기지사용을 허용하면서 미국으로부터 3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받았다. 하지만 국민들에게는 직접적인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으며 무샤라프 정권은 이슬람 세력을 계속 탄압하고 있다. 미군과 정부군의 `탈레반 제거작전'으로 민간인 피해가 계속되고 있는 파키스탄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가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만평 항의시위가 유혈극으로 번져 기독교·무슬림 주민 간 학살에 가까운 참사가 일어난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는 독재정권이 종교 갈등을 부추기며 국민들을 억압해왔던 곳이다. 사니 아바차를 비롯한 독재자들은 남부 기독교도들과 북부 무슬림들을 이간질시키며 정권을 유지했다. 아바차 정권이 무너지고 올루세군 오바산조 대통령이 이끄는 새 정권이 들어섰지만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다. 만평 사태가 일어난 뒤 덴마크 대사관 방화사건이 벌어진 레바논은 1980년대 기독교 세력과 무슬림 세력이 내전을 벌였던 곳이다. 독재정권의 압제를 받아온 이슬람 국가들에서 국민들은 선거와 같은 절차적 민주주의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역사의 교훈으로 새겨 왔다. 이런 나라들에서 증오의 화살이 독재정권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해준 미국과 서방을 향하게 되고 폭동에 가까운 대중 시위로 이어진 측면이 있다.

한국 사회는 어떤가. 이슬람이라는 특정 종교에 대한 탄압이라든가, 이슬람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여태까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수치상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무슬림 이주노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유럽이나 마찬가지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차별 측면에서는 유럽보다 낫다고는 자신하기 힘들 것 같다. 한국의 언론이 유럽의 상업주의 언론보다 낫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듯하다.

표현의 자유, 이주 노동자, 종교 갈등,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해 한국 사회는 격렬한 논쟁에 부딪친 적도 없고 해법을 찾기 위해 사회 전체가 공동의 노력을 기울인 경험도 적다. 유럽에서 벌어진 문제들에 대해 한국인들도 ‘우리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고민을 해볼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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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순수 국산 웹브라우저 ‘웹마’ 개발 김대정씨

포털 사이트의 플래시광고 때문에 컴퓨터가 ‘버벅인’ 적이 있다면? 각종 팝업 사이트 때문에 짜증난 적이 있다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아닌 다른 웹 브라우저를 쓰면 된다. 요즘 나오는 웹 브라우저는 팝업 문제뿐 아니라 웬만한 해킹에도 안전하다. 인터넷 해킹의 대부분은 익스플로러를 대상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세계 웹 브라우저 시장에서 견고하던 익스플로러의 아성이 흔들리고 있다. 2004년부터 파이어폭스와 오페라 등 다양한 웹 브라우저들이 공개되면서 익스플로러 사용자는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다. 90%대를 넘어서던 시장 점유율은 현재 80%대 밑으로 떨어졌다. 파이어폭스의 경우 점유율이 전세계 네티즌 10명 중 1명이 쓰고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익스플로러의 점유율이 요지부동이다. 하지만 최근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국내에서 개발된 웹 브라우저가 익스플로러의 자리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특히 ‘웹마’는 사용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입소문만으로 조용히 사용자가 늘고 있다. 웹마는 놀랍게도 국내 프로그래머가 만든 순수 국산 웹 브라우저이다. 프로그래머 김대정씨(30)는 2003년 이 웹브라우저를 혼자 만들었고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기능. 플래시와 광고 차단, 자동 로그인, 페이지 스크롤캡처, RSS 리더기 탑재, 드래그와 우클릭 제한 해제, 마우스를 흔들어 이전 페이지로 이동하기 등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너무 많아서 그 기능을 전부 사용하기 힘들 정도다.

“2003년에 쓰던 컴퓨터가 486이었는데 포털사이트의 플래시광고 때문에 듣고 있던 노래가 메모리 부족으로 끊기는 현상이 자주 발생했어요. 그 짜증 때문에 플래시를 막는 방법을 연구했고, 그해 5월 웹마를 개발했죠.”

처음엔 배포할 목적이 아니었다. 혼자서 쓰다가 지인들에게 써보라고 추천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홈페이지(www.mdiwebma.com)에 올리자마자 인기가 폭발했다. 지금은 새로운 버전으로 업데이트하면 홈페이지가 트래픽 초과로 접속불가가 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조사해보니 웹마의 하루 실행횟수가 4만2천번 정도더라고요. 대충 계산해도 2만명에서 3만명 정도는 된다는 얘기죠. 무료 소프트웨어라서 빨리 확산된 것도 있지만 언론에 소개된 적도 없고 광고를 한 적도 없는데 입소문만으로 이 정도 퍼졌으니 인기가 높다는 방증인 거 같아요.”

무료이긴 하지만 자발적인 기부는 받는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좋은 소프트웨어에 대해 기부하는 문화가 확산되어 있다. 파이어폭스 같은 경우 한해 수십만달러의 기부금이 모인다. 하지만 김씨가 2년반 동안 받은 기부금은 50만원 정도. 서버 유지 비용을 감당하기도 쉽지 않은 돈이다. 게다가 1년의 개발시간과 끊임없는 업데이트 노력을 감안한다면 완전 봉사수준이다.

“익스플로러가 대기업 제품이기 때문에 제조자 중심의 웹 브라우저라면 웹마는 사용자 중심이죠. 수백개의 기능이 있어 복잡하긴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기능만 골라서 쓸 수 있거든요. 익스플로러가 시장 지배력을 잃어가는 이유도 너무 경직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위기를 느낀 마이크로소프트는 올초 ‘인터넷 익스플로러 7버전’을 공개했다. 탭 브라우저 등 상당수는 대안 웹브라우저의 기능을 옮겨 심었다. 웹마의 기능도 상당 부분 추가됐다. 하지만 아직도 기능면에서 다른 브라우저에 비해 한참 뒤진다. 익스플로러라는 ‘골리앗’은 변화 추세를 감지하고 있지만, 몸집이 너무 커서 빠른 변화에 적응을 잘 못하기 때문이다.

파이어폭스가 우리나라에서 해외만큼 아직 힘을 못쓰는 상황에서 웹마는 익스플로러를 대체할 수 있는 유력한 웹 브라우저이다. 오로지 김씨의 경험과 국내 네티즌들의 요구로 개선되어온 웹 브라우저이기 때문이다.

김씨는 “웹마는 사용자가 원하는 기능은 모두 탑재할 것”이라며 “앞으로 웹마가 어디까지 발전할지는 그 자신도 모른다”고 말했다. 웹 브라우저 시장의 전쟁이 치열해질수록 김씨도 바빠질 것이다.

〈글 김준일기자 antk@kyunghyang.com

   출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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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문화유산 자장면
입력: 2006년 03월 03일 17:55:13 : 16 : 0
 
소설가 황석영은 얼마전에 발표한 자전소설 ‘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에서 자장면은 자장면이 아니라 짜장면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외래어 표기법에 어긋나더라도 짜장면으로 쓰겠다고 선언했다.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자장면의 우리말 표기는 짜장면이었다. 그러던 것이 1986년 외래어 표기법이 제정되고 1989년 외래어 표기법에 중국어가 포함되면서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같은 어문당국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99.8%는 자장면을 짜장면으로 발음한다고 한다. 안도현 시인은 ‘짜장면’이라는 어른을 위한 동화에서 ‘짜장면은 짜장면’이라며 ‘앞으로 어떤 글을 쓰더라도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표기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어문당국이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표기토록 한 것은 현지발음에 충실한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자장면의 원형이라는 중국 작장면(炸醬麵)의 발음이 자장면에 가깝다는 이다.

짜장면이든 자장면이든 이 서민적인 음식은 지난 100년 동안 대한민국 국민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 온 별식이었다. 중국 음식점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요즘도 전국에는 2만4천여개소의 중국 음식점이 있으며 하루에 소비하는 자장면도 7백20만 그릇이 넘는다고 한다. 전 국민의 6분의 1이 하루에 한번은 자장면을 먹는다는 계산이다. 그 자장면이 드디어 문화유산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문화재청은 1905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중국 음식 자장면을 선보였던 인천 선린동의 공화춘(共和春) 건물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그러나 정작 중국엔 자장면이 없다고 한다. 몇해전 한 방송사 취재팀이 자장면의 원형을 찾아 중국 곳곳을 뒤졌지만 못찾았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자장면은 중국 음식이 아니라 우리의 고유 음식으로 봐야 한다. 굳이 속지(屬地)주의까지 끌어대지 않더라도 자장면을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 먹기 시작했으면 우리 음식이고 이름도 외래어 표기원칙과는 상관없이 짜장면으로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이광훈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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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tella.K > 똑똑해지고 싶은가? 보지 말고 읽어라

 

똑똑해지고 싶은가? 보지 말고 읽어라


읽기 > 보기 + 듣기
공부 잘하는 상위 10%학생들, 책·신문 2배 더 읽어
TV 자주 보면 좌뇌활동 둔화… 논리·분석력 약해져
"책과 가까이 하는 것만으로도 두뇌발달에 큰 효과"

대구 경일여고 3학년 이슬반양은 아침 자습시간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책을 읽는 시간은 10분. 그러나 이양은 짧은 아침독서가 자신의 삶을 바꾸었다고 말한다. 고등학교 들어와서 책과는 담을 쌓았던 이양이 다시 책을 잡은 것은 대구지역 초·중·고교가 지난해 3월부터 도입한 ‘아침독서 10분’ 프로그램 때문.

“중학교 때 읽었던 책을 아무것이나 집어와 읽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중학교 때 읽을 땐 전혀 눈에 보이지 않았던 구절도, 그리고 읽어놓고도 그냥 넘어갔던 부분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모의고사에서 언어영역의 점수가 눈에 띄게 올랐다. 많은 학원과 많은 문제집으로도 오르지 않던 점수가… ‘이래서 독서를 하라고 하는구나’라고 느꼈다.”(‘대한민국희망1교시 아침독서’에 실린 이양의 글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취미는 ‘읽기’

뇌 연구 전문가들의 연구와 독서 효과에 대한 실태 조사들은 한결같이 ‘똑똑하고 싶다면 보지 말고 읽으라’고 결론 내린다. 한국교육개발원과 함께 지난 2002년 서울시내 50개 고등학교 1, 2학년 학생 5000명을 대상으로 학습실태 설문조사를 실시한 성기선 가톨릭대 교수(교육학)는 “공부 잘하는 상위 10% 학생들은 책과 신문을 즐겨 보고 영상매체를 멀리했다”고 지적했다.

상위 10% 학생들의 35%가 거의 매일 신문을 읽었다. “자주 읽는다”는 대답도 22.3%를 차지, 절반 이상인 57.4%가 신문을 즐겨 읽었다. 반면, 나머지 90%의 학생들은 신문을 매일 읽는 학생(15.2%)과 자주 읽는 학생(15.6%)을 합해도 30.8%에 불과했다. 또 상위 10% 학생들 가운데 문학작품을 읽는 비율은 22.4%인 반면, 하위권 학생들은 10.8%에 머물러 상위권 학생들이 교과서 밖 독서에도 관심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서점에서 책을 사는 비율도 상위권(19.3%)이 하위권(11.6%)보다 높았다.


◆고소득 고학력일수록 읽기 중시

한국출판연구소가 20대 이상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2004년 12월 발표한 국민독서실태 조사는 학력이 높고 소득이 많을수록 문자(text)의 힘을 믿는 경향을 보여준다. “독서가 사회생활에 영향을 주느냐?”는 질문에 대해 대학 재학 이상 응답자의 79.2%가 “그렇다”고 답한 반면, 중졸 이하는 46.5%만이 글의 영향력을 인정했다. 고졸은 70.2%였다. 소득별로는 301만원 이상 소득자의 76.9%, 201만~300만원 71.3%, 200만원 이하 67.4%가 “그렇다”고 대답, 소득이 높을수록 글 읽기를 중시했다.

한편 고교생을 대상으로 독서와 논술의 상관관계를 묻자 대다수(74.6%)가 “폭넓은 독서가 필요하다”고 응답하면서도 “실제로 독서를 했다”는 응답은 15.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 고교생의 독서지도와 독서를 위한 시간 할애가 절실한 것으로 드러났다.

◆TV 많이 보면 논술 능력도 떨어져

이정춘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문화인프라 구축을 위한 독서와 도서관의 역할’이란 논문에서 읽기와 뇌 발달 사이의 상관관계를 분석했다. 그는 “장기간에 걸친 지속적인 TV 시청은 좌뇌 활동의 뚜렷한 약화를 초래한다”는 내용의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 연구성과를 인용하며 “(영상미디어에의 노출은) 논리와 분석력을 약화시켜 인간의 원천적 문화기술인 읽기와 쓰기, 그리고 셈하기를 퇴보시킨다”고 지적했다.

논문은 또 1983년 미국에서 초등학교 5학년~중학교 3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TV시청과 필기능력’ 조사결과, ‘문법과 정서법, 문장부호, 문장 작성법, 사고력 평가에서 4시간 이상 TV를 보는 이른바 중시청자(重視聽者)들이 저능한 필기능력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한국교육개발원이 엮은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가 21세기를 지배한다’는 책은 “공부는 문자(text)를 바탕으로 하고 논리력을 요구하는 반면 컴퓨터는 영상(image)으로 표시되며 감각적 작용을 요구한다”며 “영상에 익숙해진 학생들은 한 줄 한 줄 이어지는 문자로 표현된 글을 읽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성적 상위 10% 학생의 절반 이상인 50.4%가 TV를 한 시간 이하로 시청하는 반면, 하위 90%의 학생들은 69.4%가 한 시간 이상 시청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성적 우수 학생 가운데 TV를 세 시간 이상 보는 학생은 3.2%에 불과한 반면, 하위 90% 학생들은 13.7%나 됐다.

◆어려서부터 글과 놀아라

생후 1년 이하의 영아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1992년 영국에서 시작된 북스타트(Bookstart) 운동은, 단지 책을 가까이 하는 것만으로도 영아의 언어발달과 집중력, 읽기기술 등에 놀라운 효과가 있음을 입증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북스타트 운동에 관한 연구’ 결과 보고서에서 “북스타트는 교육의 의도를 배제하고 영아에게 책을 장난감으로 주는 것”이라며 “부모가 책을 읽어준 아이, 어려서부터 책을 갖고 논 아이가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커가게 된다”고 지적했다.


김태훈기자 scoop87@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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