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승주나무님의 "알라딘 2.0은 언제쯤 선을 뵈나요??"

음.. 그렇군여. 감사합니다. 블로그와 미디어 간의 통합은 추세인 것 같군요. 경향신문의 미디어 칸 블로그와 드림위즈 블로그, 디지털타임즈 블로그가 통합되었는데, '드림위즈의 마이미디어 3.0 사건'이 개발에 참조가 될 것 같아서 링크를 남깁니다. 지금도 수정 중이긴 하지만, "짠~"하고 먼저 출시했다가 지금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습니다. 욕을 먹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이전의 유용한 기능들은 다 사라지고 혼란만 가중했기 때문이죠. 네티즌들 중에는 물론 앞서 가는 분들도 있지만, 복고적인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복고적이라고 하면 쓰던 거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쓰던 기능들은 고스란히 가지고 가면서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는 것이지요. 한글2005가 욕을 먹은 이유는 이전의 단축키들을 마음대로 바꿔버렸기 때문이죠. 마치 이용자들의 뇌리를 헤집는 것처럼,,, 이거는 광고성 공지 http://blog.dreamwiz.com/help/blog3_guide.htm 여기는 개편하고 나서 올라온 성토글들^^ http://blogcafe.dreamwiz.com/cafe/CafeFolderList.asp?cid=mmlover&folder_no=5 너무 재촉하지는 않을게요. 출시 전에 아무리 궁금해 미치겠어도 출시 이후에 겪을 혼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그냥 궁금해서요.. 미디어칸 블로그는 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신문 스크랩을 하면서 정이 많이 들었는데, 3.0으로 바뀌고 나서 새글을 올리지 못하고 있어요. 이대로 가면 내가 아끼는 블로그를 하나 버려야 할 듯....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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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처음에는 '무한공유이론을 위하여'라고 썼다가 다시 '지씨만 구속!!!'으로 바꿨다. 그리고 맨 마지막 글을 쓰고 난 후에는 다시 앞 제목을 썼다. 그 이유는 읽다 보면 나온다.


오늘 행려환자처럼 시청 주변을 거닐었다.

친구가 일하는 동네에 일이 있어서 연락을 했는데, 받지를 않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닐었다.

한 두 시간 정도 걷다가 쭈꾸미 김치찌개를 먹었는데, 비싸지 않으면서도 맛이 있었다.

쭈꾸미가 제법 컸다. 나는 왜 그때 꼴뚜기를 생각한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의 난독증은 지독하다.

얼마 전에 10,000원 결제를 해야 하는데 눈 부릅 뜨고 20,000원을 결제하지를 않나

또 며칠 전에는 박근혜 씨가 '그어지고' 나서 며칠 후에 신문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신문에는 박근혜 씨 사건을 거론하며 "지만씨 구속"이라고 대문짝 만하게 나 있는 게 아닌가.

지만씨가 누구인가. 박근혜 씨의 동생으로 매우 오랜 동안 방황의 길을 걷다가

예쁜 색시와 예쁜 애를 돌보고 있는 가장이 아닌가. 별 이상스런 생각이 다 들었지만,

그 신문기사를 다시 보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신문의 올바른 기사는

"지씨만 구속"이었다.

아무튼 내가 늘 이렇다.

글이란 참 이상하다. 원래는 매우 진지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는데, 잠깐 빠진 샛길이 큰길이 되었다.

그러니까 본문이 되어 버렸다. 이제 내가 원래 쓰려던 본론을 각주처럼 쓴다.

제목은 '무한공유이론을 위하여'로 썼다가

아무도 안 읽을 것 같아서, 자극적인 제목으로 바꿨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행려환자로부터 시작된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는데, 사람들마다 저마다의 표정으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청 앞 광장이란 데는 처음 가봤는데, 분수가 올라오고 길도 그냥 아스파(아스파는 아스팔트 까는 재료, 아스팔트 깔고 나서 똥 같은 껌댕이가 남는데, 우리는 그것을 뺑끼라고 했다)가 아니라 짱돌바닥이었다.

그런데 참 묘하다. 그 때 든 생각은 이 많은 사람들을 합치면 '하나'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1/n에 불과하지만 n/n이 정상이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1이고 이 사람들도 1이지만, 우리가 다 합쳐야 1이 된다. 무슨 민족 개념따위를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지극히 수학적이다. 1/n인 우리들이 많이 모이면 n/n까지는 아니어도 비슷하게 따라갈 수는 있다. 그때는 온전한 1의 강한 기운이 유출된다. 2002년에 느꼈던 1의 기운은 내게 그대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후로 나는 언제나 1/n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n이 무한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1/n은 0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무한공유 이론과 무슨 관계가 있냐구?

그렇다. 우리들의 지식과 자본, 힘을 모두 합쳐야 우리는 온전한 의미의 1이 된다. 여기서 천박하게 '큰 1'과 '작은 1'을 구분해서 볼 수는 있다. 작은 1은 대한민국의 모든 힘들이 집결된 1이며 큰 일은 세계의 모든 1이 집결된 1이다. 자연 재해나 온난화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큰1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daum 마인드, naver 마인드, megastudy 마인드 등을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 사람들은 1이 아니라 1/n보다 더 작아지려 하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1과 1/n만 있는 것이 아니라 0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좀 혼탁하게 말하면 0과 1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짝짓기 게임을 연상해 보라. 점점 1명씩 떨어지게 된다.

나는 무한공유의 장 위에서 이것을 '움직이는 0과 1의 게임'이라고 말하고 싶다. 즉 우리가 1을 향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0을 향하게 되는 구조이다. 우리가 무한공유로 재빨리 나아가지 못하면 0이 우리를 잡을 것이다.

내가 갑자기 본심을 드러내고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군에서부터 꿈꾸던 '무한 공유 이론'을 실천할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온전한 1이 되고자 한다.

이것으로 각주는 다시 본론의 지위를 찾았으나, 나는 독자를 잃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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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5-30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뫼비우스의 띠처럼 난해하고 복잡스런 난독성 페이퍼를 봤나..!!! ㅋㅋ

승주나무 2006-05-30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피 성님.. 난독증의 원인입니다.^^
 





                  

   
    


VS












'한길 큰책'에서 왕필의 노자주가 나왔다. 작년에 나와서 로자 님이 소개까지 했는데 모르고 있었다.

왕필이 누구인가. 노자를 노자처럼 해석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시인은 시로서 시를 해석하고, 그것이 시이다.

철학자는 철학으로 철학자를 연구하고 철학사를 연구하므로, 그가 쓴 철학사와 철학자 연구는 모두 철학이다.

왕필이 노자의 대가가 된 이유는 상세한 주석이 아니라, 대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노자가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우고 그 배를 채운다.
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왕필은 주석에

마음은 꾀를 품고 배는 음식을 품는다. 그러므로 꾀를 비우고 무지를 채운다.
心懷智而腹懷食, 虛有智而實無知也



하고 받아친다.

성인의 말씀을 경문(經文)이라 하고, 현자의 해석은 전문(傳文)이라 하는데, 대개 전문이 경문(원문)보다 분량이 길고, 구절 하나하나를 해석한다. 공부 못하는 것들이 말은 길게 하지 않는가 말이다. 하지만 이 시건방진 왕필은 노자보다 더 묘하게 말한다. 그리고 길게 말하지도 않는다. 길게 말해 무엇하랴. 제주 말로는 '하영 곳지 말라'이다.

그래서 나는 왕필이 좋다!!

원래는 예문서원의 텍스트를 가지기로 했는데, 한길사로 갈아타야겠다.

혹시 여기에 이의 있으신 분은 손!!!^^

덧 : 이제는 마지막으로 '좌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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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5-30 0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반가운 책 왕필의 노자

Mephistopheles 2006-05-30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들 가운데 큰 글씨로 VS라고 써 놓으시니...저책들의 10단콤보 기술이 무엇인지 궁금해지는군요...^^

승주나무 2006-05-30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 님//드디어 왕필의 노자를 보게 되었어요. 업무상...
매피 성님//10단 콤보 기술이 무엇인지 함 보고 올리도록 하지요^^
 











김수영산문전집, 민음사

갑자기 김수영 시인의 산문집에 나오는 '학문자유의 원칙'이라는 산문이 생각난다. 학문의 자유는 지나쳐도 모자라다. 학문의 도전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회라면 사회적 역량 자체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정식 논문으로 제출한 연구는 '학문' 안에 포함되고, 인터넷이나 대중 잡지 등에 기고한 글은 '학문'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논리도 궁색하기 그지 없다. 그러면 네티즌이나 나 같은 일반인의 생각은 그저 그런 가십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자존심 상한다. 기분나빠서 학위를 따든가 해야지 원. 공자도 속수 이상 가지고 오면 학문을 전수했듯이, 동양은 서양에 비해 비교적 일찍이 정보의 독점 시대를 극복해냈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지만, 이와 같은 판결에 이와 같은 근거를 들으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슬프다. 간만에 글도 남기는데...


학문의 자유가 조금이라도 없다는 것은 학문의 자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뜻하며, 학문의 자유가 없다는 것은 학문이 전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李政權 때의 일이다. 펜 클럽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분들을 모시고 조그마한 환영회를 갖게 된 장소에서 각국의 언론자유의 실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끝에 모 여류시인한테 나는 『한국에 언론자유가 있다고 봅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여자 허, 웃으면서 『이만하면 있다고 볼 수 있지요』 하는 태연스러운 대답에 나는 내심 어찌 분개를 하였던지 다른 말을 다 잊어버려도 그 말만은 3,4년이 지난 오늘까지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시를 쓰는 사람, 문학을 하는 사람의 처지로서는 <이만하면>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언론자유에 있어서는 <이만하면>이란 中間辭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언론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의 둘 중의 하나가 있을 뿐 <이만하면 언론자유가 있다고> 본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그 자신이 시인도 문학자도 아니라는 말밖에는 아니된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소설가, 평론가, 시인이 내가 접한 한도 내에서만도 우리나라에 적지 않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문학의 후진성 운운의 문제를 넘어서 더 큰 근본문제이다.
- '김수영 산문전집' 학문자유의 원칙



강정구 유죄…실정법에 묶인 ‘정신의 자유’

출처 : 경향신문
입력시간: 2006년 05월 26일 18:14

강정구 교수에 대한 법원 판결은 ‘현실과 흐름’을 절묘하게 배분한 결과로 분석된다. 국가보안법에 따른 법적 책임은 명백히 물으면서, 형량에 있어서는 ‘국보법상 찬양·고무 조항은 손봐야 한다’는 사회적 합일을 반영한 것이다. 아울러 변화된 남북관계와 우리 사회의 성숙도도 적극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법원의 이같은 판단 근거는 4가지 쟁점별 분석에 그대로 녹아 있다.

- “통일전쟁 발언은 北과 흡사” -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고 보는 것은 북한주장과 흡사하다.’

강교수는 지난해 7월 한 인터넷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6·25전쟁은 통일전쟁이면서 동시에 내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미국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전쟁은 한달 내에 끝났을 것이고 살상과 파괴라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검찰은 이런 견해는 ‘6·25전쟁을 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항거한 민족해방전쟁’이라고 보는 북한의 주장과 아주 유사한 것으로, 북한을 찬양·고무한 행위라고 판단해 국보법을 적용했다. 법원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참전이 없었으면 북한에 의한 통일이 이뤄져 현재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없다고 볼 때 강교수의 주장은 대한민국의 존립과 영속성을 명백히 부정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 “만경대 방명록 北 동조 의사” -

‘만경대 방명록 글은 북한 동조 의사로 봐야 한다.’

2001년 8월 평양을 방문한 강교수는 만경대(김일성 생가)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라는 글을 남겼다. 그는 평소의 소신인 자주적인 통일을 이루자는 뜻을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검찰은 만경대와 김일성, 김일성과 주체사상은 분리할 수 없는 것임을 고려할 때 방명록 내용은 주체사상의 창시자인 김일성을 찬양한 것이라고 판단, 강교수를 재판에 넘겼다. 법원은 평소 북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강교수가 당시 정부와의 약속을 어기고 만경대까지 찾은 것은 북한을 동조할 의사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강교수는 방북 직전인 그해 7월 경북대에서 “주체사상이 통일성취시대의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한다”는 강연을 한 바 있다.

- “국가존립위협 선동은 불용” -

‘국가존립위협하는 주장은 학문의 자유에 포함될 수 없다.’

강교수측은 헌법이 보장하는 학문의 자유를 강조하며, 국보법이 학문 자유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가능성이 많다는 논지를 폈다. 그러나 법원은 이 또한 강교수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미국을 ‘전쟁광’ ‘원수’로 표현하고, 북한을 ‘민족 정통성’이라고 본 그의 주장은 학자의 입장에서 나온 것으로 보기에는 자극적이고 선동적이라고 판단했다. 또 강교수가 주장 내용을 논문보다는 대중잡지, 인터넷 매체, 강연 등을 통해 주로 발표한 점도 재판부가 학문의 자유를 적극 고려해 주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로 보인다.

- “극단적 주장도 사회서 포용” -

‘우리 사회 사상검증 능력 높다.’

법원이 강교수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면서도 실형을 내리지 않은 가장 큰 이유다. 서울중앙지검은 지난 1일 결심에서 강교수 주장에 대한 사회적 위험성을 들어 실형(징역 4년 구형)을 내려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했다.

재판부는 “강교수 주장으로 인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위험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아졌다고 평가할 정도로 (우리 사회가) 건강함과 자신감을 가졌다”고 판단, 양형에 반영했다.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 발전을 이뤘고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확연한 우위를 보여, 이제는 다소 극단적인 주장일지라도 사회내에서 포용할 수 있을 만큼 표현의 폭이 넓어진 것도 강교수에 대한 불구속 재판과 집행유예를 이끈 요인 중 하나로 보인다. 재판부는 아울러 적용법률인 국가보안법에 대해 개폐논의가 진행 중인 상황 또한 실형선고를 하지 않은 요소 중 하나로 꼽았다.

〈김용석기자 kimy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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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르포] 계화도 마지막 생합잡이 “가슴이 답답혀요”
입력: 2006년 05월 19일 17:34:18 : 6 : 2
 
시한부 조개잡이 전북 부안 계화도 갯벌에서 어민들이 이른 아침부터 그레(조개잡는 도구)로 생합(백합)을 캐고 있다. 썩어가는 갯벌에서 언젠가 그레를 놓아야 할 일이 걱정인 듯 한 숨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삼성풀, 오전풀, 조개풀, 구복작, 새땅, 돈지골, 거나니풀….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도갯벌에 붙여진 이름이다. 저마다 이야기를 간직한 채 전해온 그 이름을 더이상 부를 수 없을 것 같다.

33㎞의 세계최장 새만금 방조제가 지난달 21일 연결됐다. 개발이냐 환경이냐의 가치 대립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15년 만에 이어진 방조제이지만 간척지의 활용방안과 생태환경에 대한 논란 등이 또다른 시험대에 올라 있다. 대립과 논란 속에서 정작 갯벌이 삶의 근간인 어민들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새만금 물막이 공사가 끝난 보름 뒤 찾은 계화도. 해가 뜨자마자 조개잡이에 나선 어민들을 실은 경운기 소리가 갯벌의 정적을 갈랐다. 바닷물이 한참이나 들지 않아 말라버린 갯벌이 사막처럼 펼쳐져 있었고, 그 위로는 셀 수 없이 많은 조개들이 썩은내를 풍기며 널려 있었다. 15살 때부터 갯벌에 나와 50년 넘게 조개를 캤다는 한 할머니는 “여기서 지금껏 자식 키우고 잘 살았는데 왜 못 살게 구느냐”면서 “뻘도 썩고 물도 다 썩었다”며 분통을 삭이지 못했다. 간밤에 물이 들었던 곳에 이르자 일찌감치 도착한 어민들이 그레(조개 캐는 도구)로 뻘 바닥을 긁어 생합(백합)을 캐내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환경에 생합의 양도 많이 줄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곧 그레를 놓게 될 날이 올 것에 대한 걱정에 긴 한숨소리가 가득했다.
쫓겨날 신세 아는지 새만금 갯벌은 세계적인 도요새 중간기착지다. 방조제 공사이후 군산 옥구염전에서 계화갯벌로 쫓겨 온 도요들이 자기네 서식지를 또다시 잃을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레질하는 어민들 머리위에서 아름다운 군무를 펼치고 있다.

“답답혀, 답답혀”를 연발하며 말을 꺼낸 계화도 주민 이순덕씨(58)는 “일년 내내 아낌없이 주기만 하는 갯벌인데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하다. 비 오던 날, 물을 한참이나 먹지 못한 생합들이 짠물인 줄 알고 올라왔다 말라죽어가는 걸 보며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며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 주민 추귀례씨(50)는 “갯벌은 단순한 무엇이 아니다. 바다에 나가 힘든 거 다 잊었고 그래서 행복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방조제가 하나로 연결된 뒤 조류의 흐름이 막히고 물의 염분이 빠지기 시작했다. 갯벌에 깃들여 살던 동죽, 갯지렁이, 왕구슬우렁이, 비단고둥, 좁살고둥, 농게, 민챙이 등 수많은 생명들도 갯벌이 말라가듯 하루가 다르게 그 생명이 잦아들고 있었다. 국토개발이냐 환경보호냐의 가치 계산 이전에 갯벌이 ‘삶’ 그 자체인 어민들은 자식처럼 소중했던 갯벌 생명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해수를 유통시켜 갯벌을 살리고 생명을 되돌리자는 어민들의 요구는 삶을 지켜내려는 원초적 몸부림이었다.

솟대처럼 살아나라 주민들이 살금갯벌에서 지난밤 비바람에 쓰러졌던 짱뚱어 솟대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 환경지표 동물이자 새만금의 생명을 상징하는 짱뚱어 솟대는 지난 2003년 부안주민들이 ‘새만금을 살리자’며 새만금 갯벌에서 서울 광화문까지 리어카에 실어 행진한 바 있다.


삶을 캐는 갈고리 한 어민이 갈쿠리를 이용해 조개를 캐고 있다. “대학 다니는 자식들 용돈벌이 정도는 된다”며 조개 캘 날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듯, 쉴 새 없이 갈쿠리질을 했다.


갈라진 갯벌, 길잃은 어선 조류의 흐름이 끊어진 한 포구. 물이 들지 않아 거북등처럼 갈라진 바닥 위에 조업을 포기한 어선들이 서있다.


누가 이 생명을… 썩은 내를 풍기는 갯벌. 말라 죽은 비단고둥 위에 게 한 마리가 뒤집어진 채 죽어있다.


〈사진·글/ 강윤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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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5-20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안타깝네요

물만두 2006-05-20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말랄때 말을 들어야 말이지요,

Mephistopheles 2006-05-20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럴 줄 알았다니까...

마태우스 2006-05-22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엊그제 새 한마리가 앉아있는 사진이 나왔었죠. 나중에 삭막해서 어찌 살려고 이러는지요

승주나무 2006-05-22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 님//정말 눈물이 나도록 안타깝군요. 다른 사진도 있는데, 조개들이 떼죽음을 당했대요. 매일같이 들어오던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자 목이 말라 갯벌 속에 꽁꽁 숨었었는데, 비가 오니 바닷물인줄 알고 조개들이 일제히 뭍으로 나왔던 거에요. 그런데 바닷물이 아니라 빗물이었기 때문에 떼죽음을 당했다고 해요.
물만두님//댓글을 보니 이 만평이 생각나네요.







매피님// ㅠㅠ
마태님//생태계는 물 같아요. 우리가 막으면 막히고 트면 트이고. 동물들이 새만금 공사가 뭔지 알겠어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