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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목사의 대학 중용 읽기
이현주 지음 / 삼인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내게 매우 매력적이다. 목사님이 경서를 읽는다는 것 자체도 그러하지만, 기독교리의 관점에서 문구를 해석하기보다는 '보편'에 다가가려는 노력이 매우 진정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주요 주석가들의 저술을 세심하게 인용한 점이 또한 특이하면서도 훌륭하다. 이것은 이현주 목사가 종교를 초월해 세상의 바른 도리를 얻고자 하는 간절한 열정이 읽히는 대목이다.
함석헌 선생은 인도의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의 주석서를 출간했다. 힌두어를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허름한 사전에 의지해 방대한 금언의 세계로 홀로 들어간 노고가 대단하다. 이러한 사상의 통합 정신은 선조에게 뿌리가 닿아 있다. 유불선(儒佛仙)을 '삼현(三玄)'이라 하여 몸소 익히지 않으면 정사를 제대로 펴지 못한다는 정신이 조선 시대의 선비들이 가지고 있던 지침이다.
이 사람들이 '정신에 대한 열정'으로 종파를 초월했다면, '실천에 대한 열정'으로 종파를 초월한 사람들도 있다. 바로 삼소회(三笑會)* 사람들이다. 삼소회는 불교의 비구니, 가톨릭·성공회의 수녀, 원불교의 정녀(교무) 등 각 종교의 여성 성직자들이 종교간 화해와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이다. 1988년 출범한 삼소회의 기도모임에서는 ‘자비로 충만하신 부처님’과 ‘사랑의 하느님’ ‘은혜의 본원이신 법신불 사은님’에게 각각 세번씩 모두 아홉번 절을 올린다. 비구니가 절에서 ‘아베마리아’ 노래를 연습하고 수녀가 수녀원에서 ‘찬불가’를 부르는 등 삼소회 회원들의 ‘퓨전 신앙’은 초기에는 적잖은 오해를 받기도 했으나 지금은 많은 일반신자들도 모임에 참석한다고 한다.
*삼소회 관련기사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02231759321&code=990201
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01101748191&code=960100
앗, 책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자꾸 뒷이야기로만 흘렀다. 어떤 종교가, 또는 종교들이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명쾌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으로 따진다면 모든 인간은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이 싸우는 것은 '보편'에 도달하기 위한 '각론'들이 달라서이다. 참여정부의 '취지'를 가리켜 비웃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들의 '각론'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각 종교도 '궁극'으로 나아가기 위한 '각론'들이 있을진대, 사실 '각론'이 '본질'은 아닐까.
이현주 목사의 '보편'은 다른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보편'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이다. 종교를 '믿음'의 총화라고 한다면, 그 믿음의 시각을 다른 곳에도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종파 간에 문제가 되는 곳에서는 항상 '믿음'의 방향이 움직이지 않는다. 믿음의 방향이 움직이지 않을 때 종교는 물론 인간 세상 안에서도 꽤나 시끄러운 장면들이 많이 연출되는 것이다.
유학에서 꽤나 숭고하고도 심연이 보이지 않는다는 '인(仁)'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대목을 보자.
하늘은 사사로이 덮지 않고 땅은 사사로이 싣지 않으며 해와 달은 사사로이 비추지 않는다(天無私覆 地無私載 日月無私照)고 했다. (예기[禮記]) 이것이야말로 인의 본질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인은 그 자체로써 완전한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우스복음' 5:45, 48)(73)
대학이나 중용 등의 경서를 읽으면 여러 장의 소감이 나온다. 대학이나 중용 등을 해석한 책을 읽으면 또 여러 장의 소감이 나온다. 이 책과 같이 해석과 심사를 반반 섞어놓은 책을 읽으면 앞의 것들보다 더 많은 장수의 소감이 나와서 애초부터 이런 책은 리뷰의 관점을 잘 잡아야 하며, 읽는 분들도 관점을 잡고 읽어야 한다. 대학에 대한 내용은 어디든 주워들을 수 있으므로, 선현들께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이현주 목사의 이야기를 더 담아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글머리를 한참 돌린 후에 다시 무엇을 쓰겠다는 이야기인가. '수신(修身)'이라는 이야기 말이다.
대학에서는 수신이 배꼽이다. 인간사 모든 것이 거기서 나오고 그리로 돌아간다. (54)
대학에서 '수신'을 말한다면 단계의 시작도 끝도 아닌 중간의 지점이다. 수신의 속에는 나 외의 다른 사물을 동일시한다는 학문과 정신의 단계가 놓여 있고, 수신의 겉테두리에는 천하를 올바르게 재단하고 바로잡는 행위의 단계, 또는 입신양명 출세의 단계가 정해져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우주는 '수신'이라는 하나의 지점에서 모인다. 이를테면 서울의 시청앞 광장이나 광화문, 아니면 동작구 사당3동(우리 동네ㅋㅋ) 쯤 될 것이다.
이현주 목사에 따르면 '수신'은 지식이나 자기단속을 가지고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니다. 선택적 순간의 대단한 용기와 직관적 사고가 필요하다. 지식으로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배웠다는 자들이 그 지식을 돈과 맞바꾸는 일에 이토록 태연할 수 있을까. 그들은 여러 날 배웠지만 '수신' 하나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들은 '돈'과 맞바꾸지 않는 법을 알지 못한다. 비위를 저지르고 평생 닦아온 길에서 낙마하는 사람들을 보고 "인생 참 아깝군." 하는 우리들보다 그 판사 양반들은 비위를 저지르는 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며,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대학 경문에서도 '수신'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지만, 수신에서 방점을 발견하고 그 관점으로 대학 경문을 파헤친 이현주 목사의 끈기도 쪽 바깥의 감동을 준다. 매우 간단한 '수신'이지만, 학자와 지식인들은 혼신의 지식으로, 일반인들은 '진정성'으로 도달하기에 배운 사람들에게 '수신'은 그만큼 먼 이야기이다. 일반인과 구분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지식을 가지고 그 위치에 있다면 그 지식에 맞는 '수신'의 값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이 살면서 무슨 일을 하든, 장사를 하든 정치를 하든 농사를 짓든 예술을 하든, 아무튼 그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일을 통해서 그가 이루어낼 마지막이 바로 '수신'이라는 얘기다. (171,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