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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우석훈 지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신혼여행 비행기 안에서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옆에 앉은 친구가 공부하러 왔느냐고 타박을 하였지만 요 재미있는 주제를 재미있게 요리하는 경제학자의 마지막 글귀를 미루고 싶지 않아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잠 대신 책을 청했다.
내가 FTA를 만나는 경로는 대충 이렇다. 우선 지하철에서 매일같이 보는 전광판의 표어로 만난다. FTA는 우리의 선택이며, 정부는 반드시 성공적인 협상을 하겠노라는 다짐과 자신감이 간결하게 표시돼 있는 것을 보고 출퇴근을 한다.
그리고 신문 스크랩에는 따로 'FTA'라는 카테고리를 두고, 1차에서 4차까지의 표면적인 이야기들을 챙긴다. 해봐야 웬디 커틀러 대표가 내 고향 제주의 중문 초등학교를 방문했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를 듣게 된다. 좀더 깊이 있게는 격월로 찾아오는 녹색평론에서 요즘 중심 의제로 다루고 있다. 멀리 나프타의 이야기나 다양한 구성원의 관점에서 심층적으로 전개되는 논리는 나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하다.
FTA를 이런저런 통로를 통해 듣다 보면 아쉬운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정부의 장밋빛 선전은 물론이거니와 FTA 반대자들의 의견 또한 한쪽의 의견을 옹호하거나 치우쳐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FTA를 하면 세상이 반쪽이라도 날 것 같은 주장, 설령 정말 반쪽이 난다고 하더라도 위기감을 증폭시켜 폭력 투쟁 같은 과열 양상만 유도하기보다는 최악과 차악, 최선과 차선의 시나리오를 설정해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의 가이드를 만들어주는 것을 무척이나 기대한다. 협상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항상 남겨두기 때문에 그에 대한 다각적인 대비가 필요한데, 지금은 덮어놓고 안 된다는 논리만 펼치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답답함이 느껴진다.
반대자들의 반듯한 논리가 납득할 수 있다고 하여도 협상의 과정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내용처럼, 우리가 예측하기 힘든 변수가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다. 이런 의미로 볼 때 반대 논리 그 자체는 너무나 외롭고 순진한 형세를 취하고 있다. 그것이 외롭지 않기 위해서는 논리와 함께 '지침'이 포함되어야 한다.
FTA가 한창 떠들썩할 때 공명심에서 'FTA국민보고서'라는 책을 구입했는데, 두꺼운 양에 기겁해 아직까지 보지 못하고 있던 차에 반가운 책을 만났다.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이하 '폭주')'는 단순 명쾌한 사고로 무장한 경제학자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담박한 필체로 현실을 그대로, 그리고 분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분량이 적절하다. 적절한 분량에서는 긴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 헌법의 역사로부터 외국의 사례, 정부 의사결정 구조, 철학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간결한 어조로 서술하고 있다. 특히 FTA에 관한 필자의 의견보다는 사실 전달과 파생 효과에 대한 예견에 신경을 쓰고 있어 읽는이를 배려한 흔적이 보인다. 게다가 각 직업군에 대한 행동 방침을 챙겨준 세심함에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은 헌법과 다양한 협의 방식, 의사결정 구조 등에 관한 상식을 설명하며, 현재 진행되는 FTA가 이러한 상식에 많이 벗어나 있음을 역으로 증명하고 있다. 일단 시작하겠다고 다짐한 시점부터 그 다짐의 동인이 생긴 배경, 다짐을 현실로 옮기는 과정, 그 뒷 이야기들의 각 단계들을 분석하며 '황당한 관찰기'를 계속 쓰고 있다.
마치 노름빚 100만원을 빌린 사람과 정식 협상을 하면서 그 과정에서 노름빚을 갚아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 노름빚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둘만 아는 관계이다. 이면계약이라 할 수도 있겠다. 뭔가 캥기는 게 있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너무나 동등하지 못한 협상이다.
열린우리당을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당이라고들 한다. 열린우리당의 이러한 정신이 담겨 있는 참여정부의 FTA는 역시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협상이 되지 않을까 필자는 슬슬 걱정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정치' 빼고는 까막눈이라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FTA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정부의 관료들이다. 관료들은 오랜 동안 정부의 녹을 받으며 닦아온 노하우를 통해 정부를 조종하고 있다. 이것을 옛날 당나라나 한나라의 '환관정치'로 비유하면 딱 맞다. 황제 옆에서 오랜 동안 지켜보며 정치의 생리를 파악한 환관들이 정사를 좌지우지하는 내용이다.
필자가 이야기하는 가장 위험한 지점은 바로 '몰이해'이다. FTA를 진행하는 정부에서 협상국은 물론 우리의 실정에 대해서까지 매우 막연한 이해나 몰이해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에 협상은 백전백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기꾼들이 사기를 칠 때는 달콤할 정도로 좋은 말만 한다. 따라서 수익률이 기준을 심하게 넘어설 때는 일단 '사기'에 대한 의심을 가질 수 있다. 국가에게 좋은 말, 희망, 가능성만을 들은 나로서는 나의 조국을 '사기꾼'으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윌 듀런트라는 미국의 철학자는 현대의 철학이 단순히 '솔직'하기만 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체념했다. '진정성'이 매우 귀한 시대이다. 나는 누구보다 정부에게 FTA를 체결하면 나는 얼마를 손해보고 얼마를 더 지불해야 하는지 듣고 싶다. 그것이 정부가 나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이라 생각한다.
내가 얼마를 받고 어떤 기회를 얻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을 뿐더러 미덥지도 않다. 이 책이 제안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균형'을 부여잡을 수 있다면 나는 정부의 어깨를 가볍게 하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균형'이란 쌍자협상의 일방적 관계보다 다자협상의 상호 견제적 관계를 선호하는 것이며, 쌍자 협상 내에서도 인적 교류나 무역 구제 등을 통해 양국이 일방적 폐해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를 두는 것이다. 정부가 총력을 펼치는 이번 협상에 국민들이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책임'이 없고 의지가 없고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책의 제목 글자인 '폭주'라는 말은 은유적으로 사용되었다.
비행기에서 책읽기를 마치고 졸고 있는 신부를 쳐다봤다. 내가 그에게 희망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행위 중 대단히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그에게 충분히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나의 존재 이유가 된다. 하지만 거기에는 매우 중요한 전제가 들어가 있다. '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나의 존재는 그와 나의 건강한 관계 안에서만 발현되는 것이므로 나는 나의 존재를 잃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여야 한다.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불확실한 미래형 수사는 내 신부의 현재의 행복을 위해 이쯤해서 책을 덮고 볼에 살짝 키스를 해주는 것에 비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