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는 경학(經學 : 중국 유가(儒家) 경전의 글자 ·구절 ·문장에 음을 달고 주석하며 연구하는 학문)의 '시작'이자 동시에 '끝'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내가 유년을 보냈던 성산포의 통밭알 같은 바다와 같다. 넓게 펼쳐진 해변과 언덕을 넘으면 전혀 새로운 분위기의 바다가 펼쳐진다.
거기에 동네사람들은 폐수도 버리고 발바닥을 문질러 가며 조개도 파고 바위를 깨뜨려 낙지도 잡고는 했다. 문학도가 되고부터는 시를 쓰러 자주 갔다. 군대 휴가 때는 시 쓰던 추억이 떠올라 다시 갔다. 지금도 성산일출봉보다 더 가보고 싶은 곳은 인적 드문 통밭알 바다이다.
그냥 리뷰도 아니고 '논어'에 대한 리뷰를 쓰기 위해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봤다. '시작과 끝' 내게 주는 당혹감은 대개 다음과 같다. 논어를 다시 찬찬히 읽었다는 것은 이미 가지고 있었던 지식의 편린들을 이름짓고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나는 전혀 다른 '논어'를 읽고 기가 질리고 말았다. 젠장! 대체 논어의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논문을 쓰지.
그래서 몇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논어 바다에 들어가서 필사적으로 빠져나오기로 작전을 짰다. 그것도 알려진 구구절절한 이야기보다는 다소 새롭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은, 즉 내가 읽은 부분, 밑줄친 부분을 중심으로 재구성해보겠다 이말이다. (내가 원래 사설이 좀 길다)
우선 논어를 '공자'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편견을 버릴 것을 권장한다. 논어는 선생님을 위한 제자들의 제문(祭文)이다. 논어가 공자의 소유물이었다면 '子'라는 호칭이 무색할 것이다. 따라서 논어는 선생님을 보고 배우고 느낀 제자들의 관점에 매우 충실하다. 그것은 마치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대화편' 위에서 뛰어논 것과 일치한다.
1. 다양한 층위
논어를 경학의 시작과 끝이라고 하는 이유는 논어가 가지고 있는 매우 다양한 층위 때문이다. 그러니까 논어는 독서를 할 줄 아는 어린 아이에서부터 인생의 온축이 묻어나는 달관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느끼는 맛이 제각각이다. 휴대폰 MP3에 넣고 다니면서 거의 매일같이 논어를 '청취'하는 내가 논어를 '정리'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 층위 때문이다. 어릴 적 멋모르고 썼던 동시에서부터 시를 알고 어려워하던 습작시와 시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고 나오는 자연스러운 시에 이르기까지 '시'는 변함이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논어'도 변함이 없다.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옹야6편의 18절, 이하6-18>
싹은 돋았으나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도 있으며, 꽃은 피웠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있다.
(苗而不秀者有矣夫! 秀而不實者有矣夫!)<9-21>
함께 배울 수는 있을지라도 함께 道에 나아갈 수는 없으며, 함께 道에 나아갈 수는 있어도 함께 확립할 수는 없으며, 함께 확립할 수 있을지라도 함께 시의적절한 중용과 권도(權道)는 행할 수 없다.
(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9-29>
문제는 일이독 가지고는 층층의 맛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혹시라도 한문에 빠져든다면 그 중독성을 피할 수 없다는 점도 우려된다.
2. 논어의 감정처리
논어의 감정처리를 보면 우리가 얼마나 감정을 못되게 쓰고 있으며, 그것이 세상을 얼마나 혼란스럽게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정치인들이 자주 쓰는 '포용과 관용'이라는 말 역시 세상을 거꾸로 뒤흔들 만한 치명타를 숨기고 있다. 대권 주자들이 전직 대통령에게 새해 인사를 다녔던 이른바 '세배정치'가 사회적 물의가 된 적이 있다. 특히 광주항쟁을 계기로 운동권의 길을 걸었다던 원희룡 의원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세배를 올리는 장면은 젊은이들의 영혼을 두고두고 괴롭힐 것이다.
포용이라는 미덕은 얼마나 변색되기 쉬우며 이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공자의 의견을 들어보자.
혹이 물었다. "은덕으로써 원한을 갚는 것은 대승적 차원에서 어떨까요? 공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은혜는 무엇으로 갚겠는가? 원한은 곧음으로 갚고, 은덕을 은덕으로 갚아야 한다."
或曰: "以德報怨, 何如?"
子曰: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14-36>
공자의 비타협 정신이 잘 드러나 있는 대목이다. 사실 우리는 갈등을 너무 쉽게 풀려고 한다. 일본에게 외자 유치 좀 받아서 풀려고 하고, 대승적 차원에서 용서하고 풀려고 한다. 비타협 정신이 만능은 될 수 없으나, 감정처리에 미숙하거나 능구렁이처럼 넘어가려 한다면, 해악은 피할 수 없다.
논어의 동양학이 다른 동양학이나 여타 철학과 특이하게 다른 점은 바로 '차등애'(差等愛)를 설파했다는 점이다. 이 차등애는 '맹자'에서 맹자와 묵자의 간접 논쟁으로 비화될 정도로 경학에서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세계 모든 철학이 '사랑'을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두고 있음을 생각할 때 유학이 말하는 이러한 '사랑'에 대해서는 숙고할 필요가 있다.
섭공이 공자에게 말했다. "우리 고음에 정직함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의 아버지가 양을 훔쳤는데 아들이 그것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공자가 대답했다. "우리 고을의 정직은 이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숨기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주니, 정직함은 이 안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葉公語孔子曰 "吾黨有直躬者, 其父攘羊, 而子證之." 孔子曰 "吾黨之直者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13-18>
이와 비슷한 예시가 맹자에 나온다. 유가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 순 임금에게는 고수라는 못된 아버지가 있었는데, 맹자의 제자가 '만약 순의 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다면 순은 어떻게 할까요'하고 묻는다. 맹자는 왕이라도 법을 저버릴 수는 없다고 말하자, 제자는 순이 아버지에게 사형을 집행할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맹자의 대답은 '순은 임금이기 때문에 법을 버릴 수 없는 입장이다. 때문에 임금직을 버리고 아버지와 멀리 도망가서 함께 행복하게 살 것이다.' 논어의 차등애는 성경의 박애와 더불어 사랑에 대한 신선한 향기를 준다.
3. 개념의 종합, 퓨전의 달인
하나의 미덕에는 여러 개의 키워드가 담겨 있다. 그런데 그 키워드는 그 미덕에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미덕에 참여한다. 그렇게 해서 키워드의 그물망이 만들어진다. 그물망 안에서 '미덕'이 본 모습을 드러낸다. 공자는 일상적인 의미의 도덕가가 아니다. 유학 역시 도덕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다만 주요 개념들을 재구성해서 온전한 의미의 미덕과 철학을 제시한다.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을 잘하지만, 말을 잘하는 이라고 해서 반드시 덕이 있는 것은 아니다.
有德者必有言, 有言者不必有德; 仁者必有勇, 勇者不必有仁.<14-5>
공자가 말했다. "자로야 너는 육언(六言)과 육폐(六蔽)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느냐",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앉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마. 仁을 좋아하고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가림은 '어리석음'이요, 슬기를 좋아하고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가림은 '방탕함'이요, 믿음을 좋아하고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가림은 '박절함'이요, 용맹을 좋아하고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가림은 '어지러움'이요, 강인한 것을 좋아하고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가림은 '조급함'이다.
子曰: 「由也, 女聞六言六蔽矣乎? 」 對曰: 「未也. 」 「居! 吾語女. 好仁不好學, 其蔽也愚; 好知不好學, 其蔽也蕩; 好信不好學, 其蔽也賊; 好直不好學, 其蔽也絞; 好勇不好學, 其蔽也亂; 好剛不好學, 其蔽也狂. 」<17-8>
돌턴 이후로 우리는 혼합물과 화합물을 구분할 수 있었다. 각각의 화학 원소는 각각의 원자를 가지며, 원자들이 일정한 비율로 결합하여 분자(돌턴은 분자를 ‘합성 원자’라고 불렀다)를 이루듯, 각각의 개념들은 자신의 고유한 값을 가지고 다른 개념과 또는 다른 미덕과 연결되는데, 우리는 공자의 퓨전 개념법을 통해 실질적인 개념에 가까워질 수 있다.
4. 정제된 인생
한때 김윤식과 김현의 문체를 사랑했던 적이 있었다. 안도현과 기형도의 시를 사랑한 적도 있었으나 '백석'의 시를 발견하고 나서 옛사랑이 모두 식었다. 내가 겉멋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내가 관념에 경도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나를 읽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읽는 '논어' 앞에 고백한다는 말이다. 공자의 전통을 잇는 경학은 '이륜(彝倫 : 보통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을 근본정신으로 하고 있다. 형이상학적이나 고차원적인 논변을 거부하고, 백성들의 언어 혹은 백성들이나 어린아이라도 이해하기 쉬운 언어를 통해 철학을 표현한다. 따라서 실생활의 현실적 언어가 주를 이룬다. 서양이 행위에서 관념을 분석해낸다면, 이 동양학은 관념을 행위 또는 일상생활에 적용시켜 하나의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메시지를 분석하면 여러 개의 키워드와 키워드의 연결 등으로 분석되지만 이 동양학은 분리된 키워드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하나의 근사한 인간형에 도달하기 위해 그 인간이라면 하기 마련인 지극히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이야기로 책의 곳곳을 뒤덮었다. 이러한 자질구레한 이야기가 심금을 울리는 것은 건강하고 원시적이며, 시적 압축률이 굉장하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이 인식론의 함정에 빠진 것에 비해 동양의 철학은 언제나 현실과 직면하고 있는 그 자체였다.
사실 경서는 모두 정제된 시이다. 2~3000년의 세월을 견뎌온 리듬이다. 그리고 2~3000년을 살아온 동양인들의 견뎌야 할 일상이었고,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일상의 안내서였던 것이다.
정제된 인생으로 가기 위해서는 정제된 언어를 넘어야 하며, 정제된 철학을 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인생 역경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사람이 품었던 애정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공자가 교과서적이라거나 신적 인간이라는 것은 아니다. 공자는 다만 자기 시대의 문제를 고민했고 제자들을 사랑한 어리숙하고 어눌한 선생일 뿐이다.
5. '논어' 텍스트
교수신문이 펴낸 '최고의 고전번역을 찾아서'에서는 성백효 씨의 '논어집주'를 추천한다. 원문과 주해가 상세한 이 책은 무리가 없지만 구글의 번역기를 생각나게 할 정도로 기계어 번역이 많다. 경향신문의 '책읽기 365일'에서 이해인 수녀님이 추천한 '논어'는 서문문고본으로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내가 학부 다닐 때 남명서당에서 사서특강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교수님 졸라서 텍스트를 하나 추천받았다. 그것을 지금도 보고 있는데, 현음사에서 나온 '주주금석(朱註今釋) 논어'이다. 주자의 주해에서부터 정약용의 주해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고 번역에 옛투가 나오기는 하지만 대체로 깔끔하다.

6. 하고 싶은 말
무엇이든 손을 붙이면 '괴롭게' 하는 스타일 덕에 작정해서 쓴 리뷰는 길이가 매우 길다. 이번에도 간만에 매우 긴 리뷰를 손댔다. 사서의 맨 첫머리로서 '논어'를 소개하는 것은 무엇보다 논어가 유학의 진수를 담고 있는 원전 중의 원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토리가 있고, 무엇보다 시가 있다. 제목의 뒷부분에 해당하는 '철학적 시와 시적 철학'의 이야기는 글자수가 너무 미어터저서 생략했다. (지금 하고 싶은 말도 참아야 할 지경인데...쯧쯧)
서양의 논리체계에 비해서 동양의 우월성을 애써 내세우고 싶은 마음은 없다. 동양 역시 분명 한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내가 논어를 주목하는 이유는 논증의 형태가 아니라 '완결된 인생'의 형태로 보존된 철학이 드물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대화조차도 주제에 너무 천착하기 때문에 종합적 판단을 자꾸자꾸 환기시켜주지는 않는다.
나는 논술선생으로서 대입논술만 하다가 재미도 없고, 중등논술 '창작'이라는 미션이 걸려서 더욱 열심히 논어를 읽고 있다. 논어에서는 매우 많은 등장인물들이 강력한 캐릭터를 뽑낸다. 그리고 그 가운데 공자가 있다. 공자한테 개기는 제자들이 매우 일상적일 정도로 논어는 철학 교과서라기보다는 '학문생활 르포'에 가깝다.
논어와 유학, 공자, 경학에 대한 '유교전통적 편견'이 사라지고 좀더 가까운 거리에서 '논어'를 만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