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고전 강의 - 통합논술 세대를 위한
손병목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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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동양고전이 지속적으로 소개되면서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게다가 대입 논술문제에서 동양고전이 차지하는 비중도 날로 늘고 있기 때문에 논술공부를 위해서라도 동양고전에 대한 절실한 필요도 늘어가고 있다. 하지만 선뜻 고전을 잡고 읽을 수 없는 이유는, 원전과의 ‘간극’ 때문이다.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사용하는 언어나 사고방식이 현대와는 크게 다른 것이 동양고전을 어렵게 만든다.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동양고전이 가지고 있는 심오한 철학에 있다. 반복적으로 읽고 그 의미를 헤아려야만 이해가 되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통합 논술세대를 위한) 동양고전 강의』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먼저 동양고전에 자주 등장하는 철학자나 철학서의 요지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였고, 거기다 더해 현대적인 예시나 친숙한 용어를 사용하여 학생이나 일반인들이 본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쉽고 친숙하게 설명하면서도 비판적 독해와 핵심 사상에 대한 재구성을 준수하게 수행하고 있다.
주제에 대해서 직접 접근하지 않고, 관련된 정보들을 차근차근 정리하면서 핵심으로 다가가는 서술 방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는 단편적인 지식은 아는 것을 벗어나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원전에 대해서 비판적 독해를 시도하거나 원문을 아예 비판적으로 재구성해 하나의 독서 방법론까지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고 난 독자들은 동양고전의 내용에 함몰되지 않고 보다 주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단락의 말미에 입문을 위한 추천도서와, 본격적인 독서를 위한 원전도서를 제시하고, 낱말퀴즈로 마무리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결국 이 책은 원전을 위한 친숙한 해설서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고전을 읽기 전에 느낄 수 있는 부담감을 완화하고 생각을 말랑말랑하게 도와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동양고전의 독법은 애초부터 텍스트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뜻’을 읽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물신주의나 무한경쟁 세계화 시대일수록 시대적 본질을 꿰뚫고 자신이 취해야 할 선택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뒤처지거나 세태에 따라가기 급급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논술문제를 풀거나 처세를 익히는 데 애쓰는 것도 좋지만, 과거 선조들이 고민했던 뜻을 이어받아 자신은 물론 이웃들의 미래에 대해서 기여하는 것이 이 책이 숨기고 있는 취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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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다고지 - 30주년 기념판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5
파울루 프레이리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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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지성이 태어나는 곳

 

 

책1 :  페다고지 / 파울로 프레이리, 그린비, 262쪽, 2002년

 

 

책2 :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 플라톤, 서광사, 492쪽, 2003년

 

 

영화 : 죽은 시인의 사회(1990) (피터 위어 감독, 로빈 윌리엄스 주연)

 

 


 

 

 

전통, 명예, 규율, 최고

 

 

 

학부모 및 학생 여러분! 지식의 촛불입니다.

100년 전, 1859년에도 41명의 소년들이 여기 앉아서 학기를 시작하는데 있어서 여러분을 반기는 똑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4개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전통, 명예, 규율, 최고!

웰튼 아카데미가 설립된 해에 5명의 학생이 졸업했고 작년에는 51명의 학생이 졸업을 했습니다. 그 중 75%가 넘는 학생들이 아이비리그에 진학했습니다. 이런, 이런 훌륭한 업적은 우리 학교가 열성적으로 가르친 원칙들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곧 학부모님들의 자제 분들을 이곳에 보내는 이유이기도 하며 이곳이 미국에서 최고가는 대학 진학 예비 학교인가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 『죽은 시인의 사회』, 명문 웰튼 고등학교의 새학기 개강식 교장선생님 축사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이다. 바로 ‘아이비리그’ 대신 서울대나 고려대 같은 국내 유명 대학을 집어넣으면 감쪽같이 국내 유명 고등학교의 개회사가 될 것이다. 학생들은 기숙사로 돌아가서 명문 모교의 4대 교훈을 조롱한다.

“여러분? 4개 교훈이 뭐지? / 익살, 공포, 타락, 배설!”

이 학교의 학생들과 같이 교장 선생님의 축사를 신나게 비판해 보자. ‘지식의 촛불’이나 ‘전통’은 ‘실적’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새로운 발견을 하고 인류에게 유익한 가치를 전해준 것과는 전혀 상관 없이 명문 대학에 몇 명 진학했는지 하는 ‘실적’이 이것을 대표하는 것이다. 명문대학에 진학한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광이다. 교장 선생님의 축사는 이것을 학교의 차원으로 조금 넓혀놓았을 뿐이다. 이들에게 지식이란 것은 명문 대학의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능력이므로 ‘기술’이라고 해야 옳다. 이것이 ‘전통’으로 불리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왜냐하면 인류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신분상승이 오히려 ‘명예’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폐단이 바뀌지 않고 대대로 전승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명문’ 고등학교가 정체돼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명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모든 고등학교의 현실인 셈이다.

그러면 세 번째 교훈인 ‘규율’은 어떨까?

 

 

(교사가 설명자인) 설명은 학생들이 셜명된 내용을 기계적으로 암기하도록 만든다. 더 나쁜 것은 학생들을 교사가 내용물을 ‘주입’하는 ‘그릇’이나 ‘용기’로 만든다는 점이다. 더 완벽하게 그릇 안을 채울수록 그 교사는 더욱 유능한 평가를 받는다. 또한 내용물을 고분고분 받아 채울수록 더욱 나은 학생들로 평가된다.

이렇게 해서 교육은 예금 행위처럼 된다. 학생은 보관소이고 교사는 예탁자다. 양측이 서로 대화하는 게 아니라, 교사가 성명을 발표하고 예탁금을 만들면, 학생은 참을성 있게 그것을 바당 저장하고, 암기하고, 반복한다. 이것이 바로 ‘은행 저금식’ 교육 개념이다. 여기서는 학생들에게 허용된 행동의 범위가 교사에게서 받고, 채우고, 보관하는 정도에 국한된다. 물론 학생들도 자신이 보관하는 물건들의 수집가 또는 목록 작성자가 될 수 있는 기회쯤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결국 이런 오도된 제도에서는 누구나 창조성, 변화, 지식이 결여되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탐구 정신과 프락시스(practice, 변혁을 위한 인간의 능동적 실천)가 없으면 진정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 지식은 창조와 재창조를 통해서만 생겨나며, 인간은 끊임없고 지속적인 탐구 정신을 통해 세계 속에서, 세계와 더불어, 또 타인과 더불어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이다.

저금식 교육관에서 지식이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아는 것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무지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억압 이데올로기의 한 특징이며, 탐구 과정으로서의 교육과 지식을 부정한다.

- 『페다고지』

 

 

규율이라는 것은 ‘고분고분 말 잘 듣는 것’을 말한다. 이미 만들어진 지식의 체계를 강요해도 거기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지 않는 학생이 바로 규율을 잘 따르는 학생이다. 이것을 페다고지에서는 ‘은행저금식 교육’이라고 이름지었는데, 창조성과 능동적 사고가 결여된 ‘죽은 교육’을 뜻한다. 이것을 잘 따르기만 한 학생은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없다. 때문에 ‘최고’라는 교훈은 자기모순적이다.

‘최고’는 그보다 낮은 무엇인가를 상정한 개념이므로 ‘최하’와 같은 개념들이 있다. 그러나 가치판단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최고’인지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은 한 이것은 하나의 고정관념이나 헤게모니에 불과할 것이다.

인간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누구도 나의 삶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나’는 ‘절대적 가치’가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최고’라는 사고방식은 이러한 가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개념이다. 최고와 최하를 가르는 순간 인간의 존재가치는 사라진다.

 

 

믿거나 말거나 여기 있는 우리 각자

모두는 언젠가는 숨이 멎고 차가워져서 죽게 되지

이쪽으로 와서 과거의 얼굴들을 지켜봐라(100년 가까이 된 선배들의 사진을 가리킨다)

여러 번 이 방을 왔어도 유심히 본 적은 없었을 거야

너희와 별로 다르지 않을 거야. 그렇지?

머리모양도 같고 너희처럼 젊고 패기만만하고 너희처럼 세상을 그들 손에 넣어 위대한 일을 할거라 믿고 그들의 눈도 너희들처럼 희망에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 당시 그들의 능력을 발휘할 시기를 놓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 사람들은 죽어서 땅에 묻혀 있는지 오래이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여러분들이 잘 들어보면 그들의 속삭임이 들릴 것이다

자, 귀를 기울여봐, 들리나?

카르페

들리나?

카르페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

인생을 독특하게 살아라

-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 선생님의 첫 강의

※ 카르페 디엠(Carpe diem)

‘이 날을 붙잡아라’‘현재를 즐겨라’의 뜻을 가진 라틴어

 

 

키팅 선생님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현재적 가치를 강조한다. ‘최고’라는 허무한 관념에 지배당하기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현재를 즐기는 메시지를 던진다. 바로 이것이 ‘최고의 인생’이 아닐까?

 

 

 

지성이 태어나는 곳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상당 부분은 코네티컷 대학의 영문과 교수로 있는 사뮤엘 피커링(Samuel Pickering)과 함께 한 사립학교 학생들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말하는 학교는 지성이 태어나는 곳이다. 하지만 학교의 의미는 점차 변질되고 있다. 학원폭력 등 학교문제의 이면에는 일방적인 교육정책에 소외된 구조적 문제가 암존한다. 학교는 이제 ‘어떻게 가르치느냐’보다는 ‘어떤 학교를 졸업했느냐’로 가치기준이 바뀌고 있다. 키팅 선생님은 시와 인생, 교육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자, 계속 찢어라. 이건 전투요, 전쟁이다. 지면 마음과 영혼이 다친다.

우수한 학생들한테 시를 측정하게 만들다니, 안되지!

여러분! 이제 여러분은 생각하는 법을 다시 배우게 될 거야

여러분은 말과 언어의 맛을 배우게 될 거야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말과 언어는 세상을 바꿔 놓을 수 있다 ……

비밀을 하나 얘기해 주지

가까이 모여라! 가까이 모여!

시가 아름다워서 읽고 쓰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에 시를 읽고 쓰는 것이다. 인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해

하지만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인 거야

휘트만의 시를 인용하자면

“오, 나여! 오, 생명이여! / 수없이 던지는 이 의문! / 믿음 없는 자들로 이어지는 도시 / 바보들로 넘쳐흐르는 도시 / 아름다움을 어디서 찾을까? / 오, 나여! 오, 생명이여!”

대답은 한 가지 네가 거기에 있다는 것

생명과 존재가 있다는 것

화려한 연극은 계속되고 너 또한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

화려한 연극은 계속되고 너 또한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

여러분의 시는 어떤 것이 될까?

-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 선생님

 

 

키팅 선생님에게 있어서 ‘시’는 한 사람의 인생이다. 그래서 시는 아름다운 것이다. 이런 아름다움을 측정할 수 있는 잣대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다만 인간의 오만과 무지가 있을 뿐이다. 의학, 법률, 경제, 기술. 이런 것들을 이제는 인생의 목적이라고 가르치지만, 진정한 인생의 목적은 시와 미, 낭만, 사랑이다. 인류의 생명과 존재와 어울리는 궁극적이 가치는 이것들밖에 없다. 이처럼 인생의 도구와 목적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바보이지만, 휘트먼 시인의 말처럼 이 세상에는 바보들로 넘쳐난다.

 

 

문제제기식 교육 방법은 교사-학생의 행동을 이분화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교사가 어떨 때는 ‘인식적’이고, 어떨 때는 ‘설명적’인 일이 없다. 즉 교사는 학습안을 준비할 때나 학생들과의 대화에 참여할 때나 똑같이 늘 ‘인식적’이다. 교사는 인식 대상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지 않고, 자신과 학생들이 함께 성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이런 식으로 문제제기식 교육자는 항상 학생들을 배려하여 자신의 성찰을 재형성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더 이상 유순한 강의 청취자가 아니라 교사와의 대화 속에서 비판적인 공동 탐구자가 된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생각할 재료를 제시하며, 학생들이 각자의 견해를 발표할 때 예전에 가졌던 자신의 생각을 재고한다. 문제제기식 교육자의 역할은 학생들과 함께 독사(doxa) 수준의 지식이 로고스(logos) 수준의 참된 지식으로 바뀌는 과정을 창출하는 데 있다.(그리스 철학에서 독사란 ‘낮은 차원의 주관적 지식’을 뜻하고 로고스란 ‘사색의 결과로 얻어지는 지식’을 가리킨다)

은행 저금식 교육은 창조성을 마비시키고 금지하지만, 문제제기식 교육은 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전자는 의식의 침잠을 유지하려 하지만, 후자는 의식의 출현과 비판적 현실 개입을 위해 노력한다.

학생들은 점점 세계와 더불어 그리고 세계 속에서 자신들과 관련된 여러 문제들을 대하게 되기 때문에, 점점 자극을 받으며 그 자극에 반응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 학생들은 그 자극을 이론적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총체적 맥락 속에서 다른 문제들과 연관된 것으로 이해하므로, 점점 비판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고 따라서 점점 덜 소외된다. 자극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새로운 자극을 낳고 뒤이어 새로운 이해를 낳는다. 이런 식으로 학생들은 점차 자신도 몰두하고 헌신할 수 있다고 간주하게 된다.

- 『페다고지』

 

 

키팅 선생님에게 한 사람의 인간이 아름다운 시와 같다면 페다고지에서는 ‘로고스’와 같다. 사색하는 창조적인 인간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문제제기식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교사와 학생이 지성을 탐구하는 공동참여자로서 대등한 관계를 가지며, 비판적 지성으로 현실문제에 참여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학생은 총체적 맥락 속에서 세계를 파악할 수 있으며 나날이 세상을 거듭나게 만들어나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상적인 교육 모델이다.

 

 

 

이상적 교육의 좌절

 

요즘 인기 있는 개그 프로에 다음과 같은 유행어가 나온다.

“현실은 달라요!”

교육의 문제 역시 떡하니 버티고 선 구조적 문제에 대해 이상적인 교육철학이나 개인 차원의 노력은 좌절되기 쉽다. 아래의 표는 어느 신문사가 조사한 올해 지방대 수석 졸업자들의 취업률 현황이다. 미취업자와 취업자, 진학자가 대체로 같은 분포도를 보이지만, 진학자들 중에서는 취업이 여의치 않아 진학을 택한 졸업생도 있으리라 추측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더 많은 학생들이 사실상 미취업 상태에 놓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대학의 수석졸업자는 대학 생활 내내 성실하게 학업에 열중한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회는 개인의 그러한 노력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교육적 가치는 왜곡되기 쉽다. 키팅 선생님의 좌절은 아마도 예견될 일인지도 모른다. 평소 학교의 교육 방침에 따르지 않아 눈의 가시 같은 존재인 키팅 선생님이 학교에서 쫓겨나게 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학생의 자살 사건과 비밀 모임에 대한 사주이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학생들의 가슴 속에 숨은 열정과 감수성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폐쇄적인 사회에서는 이러한 특성들이 죄악시된다. 소크라테스 역시 그와 같은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아테네 여러분! 바로 이 캐물음으로 말미암아 저에 대한 많은 증오심이 생겼는데, 그것도 아주 고약하고 심각한 것들이어서, 마침내는 이로 인해 많은 비방이 생겼으며, 또한 이 현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도 된 것입니다. 그건 그 때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이, 제가 다른 사람을 논박하게 되는 그 문제들에 있어서 저 자신이 지혜로운 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실은 신이 지혜롭고, 또한 신은 이 신탁의 응답에서 이 점을, 즉 인간적인 지혜는 별로 아니 전혀 가치가 없다는 걸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한데, 이에 더하여 갑부들의 자식들로서 아주 여가가 많은 젊은이들이 자진해서 저를 따라다니게 되었는데, 이들은 사람들이 캐물음을 당하는 걸 들으며 즐거워하고, 때로는 자신들도 저를 흉내내어서는, 다른 사람들한테 캐어묻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니, 자신들은 대단한 걸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아는 것이라곤 별로 없거나 전혀 없는 숱한 사람을 이들이 발견하게 되는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이들한테서 캐물음을 당한 사람들은 저한테 화를 내지 이들한테는 그러지 않거니와, 그들은 또한 말하기를 소크라테스라는 자는 지극히 혐오스런 자이며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 『소크라테스의 변론』

 

 

소크라테스와 키팅 선생님은 몇 가지 공통적인 죄목(?)이 있다.

첫째, 젊은이의 가슴에 진정한 지식에 애정과 열의를 불어넣었다.

둘째, 부당한 전통에 대해 저항하고 맞서는 비판정신을 가르쳤다.

셋째, 미신보다는 자신의 이성을, 헛된 환상보다는 자신의 실체를 성찰할 수 있게 하였다.

넷째,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해 가르쳐서, 아름다움이 젊은이의 가슴에서 떠나가지 않도록 만들었다.

위에 열거한 죄목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처형을 당했고, 키팅 선생님은 추방을 당했다. 위와 같은 항목들이 과연 ‘죄’가 되는지에 대해서 의아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의 가치가 올바로 평가되느냐 왜곡되게 평가되느냐는 순전히 그 사회의 성숙도에 달려 있다. 중국의 시인 굴원의 말처럼 ‘세상은 모두 취해 있는데 나만 깨어 있다면’ 결국 나 혼자 취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개인이지만, 그것은 개인들 간의 연대가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소크라테스와 키팅 선생님이 올바르게 평가받는 날, 그날이 과연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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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라스 세계는 지금 - 정치지리의 세계사 책과함께 아틀라스 1
장 크리스토프 빅토르 지음, 김희균 옮김 / 책과함께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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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그림의 움직이는 지도

 

사회과부도를 던저버려라

 

 

 

역사는 두 줄기로 흐른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정적인 흐름과 역동적으로 변화해 자신조차도 흔적 없이 바꿔버리는 동적인 흐름이 있다. 세상이 안정과 질서를 찾아가기 시작하면 정적인 흐름으로 편승하다가 혼란스러워지면 순식간에 동적인 흐름으로 바뀐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기업가들이 국가 위에 군림할 수 있게 된 것은 ‘변화’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질서란 변화가 가져다준 산물에 불과하므로 사람은 질서에 편승하기보다 시대변화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동양에서 철학의 비조로 받드는 공자와 맹자도 전국시대에는 한낱 일개 학파에 불과했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지배하고 중국을 움직인 사람들은 시시각각의 형세에 주목하는 종횡가들이었다.

다가올 미래는 한정된 자원을 놓고 현재보다 더욱 극심한 경쟁을 벌여야 할 것이다. 때문에 우물 안에서 벗어나 세계의 숨 가쁜 변화를 포착하고 활로를 모색해도 시원치 않건만 미래의 자원을 가르치는 우리의 교과서는 10년째 감옥에 갇혀 있다.

 




<표1> 시판 중인 중학교 검정교과서 사회과부도 8종 분석(2007년도, 경향신문)

 

 

 

위 표를 보면 우리 학생들이 공부하는 사회과부도가 2007년도의 것인지 90년도의 것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가장 기본적인 세계인구조차 2000년의 자료를 반영한 곳이 단 1곳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 교재를 통해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이다. 학생의 입장에서 위 정보에 대한 최신 자료를 획득하는 길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사정은 가르치는 사람도 별반 다르지 않다.

“성의있는 교사라면 ‘구닥다리’ 통계수치나 자료를 자체적으로 보완해서 가르치는데, 사실상 상당수 교사들이 그냥 가르친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일선학교를 담당하는 장학사의 고백이다. (관련기사 : 케케묵은 ‘사회과부도’…10년 넘은 통계자료 버젓이)

이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이‘정적인 접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디에 무엇이 있고, 어느 해에 무엇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의 ‘변화’이며, 그 위치가 만들어낸 ‘관계’이다. 그것을 파악해야만 역사라는 커다란 흐름이 어느 곳으로 향하고 있는지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이 흐름은 오래된 과거에서부터 흘러왔고, 미래로 향해 가고 있다. 곧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흐름이다. 미래는 언제나 불투명하게 다가온다. 과거의 신호를 읽어내지 못하는 자에게 미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 각지의 사정과 변화양상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사회과부도’가 나왔다. 『아틀라스 세계는 지금』이 그것이다. 이 책이 흥미를 끄는 것은 다큐멘터리를 출판화했다는 점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역사학자가 공동으로 기획하고 프랑스 지상파 제5채널인 아르테 방송에서 1990년부터 「지도의 이면」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그러고 보면 서양에서 다큐멘터리가 출판 고전이 되는 환경은 매우 익숙하면서도 부럽기 그지 없다. 그만큼 교양에 대한 일상적 환경이 마련되었다는 뜻이다. 영국 BBC 방송은 클라크의 「문명」이라는 텔레비전 시리즈에 이어, 우리가 잘 아는 J.브로노프스키와 함께 인류의 문명을 추적한 텔레비전 시리즈「인간등정의 발자취」를 만들었다. 그것이 1970년대 초반의 일이다. 이 시리즈가 책으로 출판된 것이 바로 『인간등정의 발자취』이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이는 ‘지식과 일상과의 괴리’와 달리,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지식의 일상화를 실천하고 있다. 외국의 연구소는 해마다 정기적으로 지역 주민들에게 오픈하우스를 열어 과학에 대한 흥미를 불어넣어주는데, 이것을 ‘아웃리치’라고 부른다. 뿐만 아니라 과학과 대중을 연결시키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경우가 일상화되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과학커뮤니케이터’라고 한다. (관련기사 : “학문의 ‘크로스오버’ 더 많아져야”)

우리의 경우는 지식인들과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의 거리가 너무나 멀다. 일반인들은 과학이나 지식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고, 학생들은 구닥다리 찌꺼기나 훑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환경 안에서 ‘황우석 사태’를 낳았으며,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이러한 시점에서 ‘지식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지식을 널리 공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타국의 지식인들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아틀라스 세계는 지금』 역시 정치와 지리, 외교 등 전문가, 식자층에게만 국한되었던 정보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연합의 개념

 

 

전국시대는 秦(진)나라라는 서쪽의 강국과 나머지 6개국(越(월), 趙(조), 韓(한), 魏(위), 楚(초), 齊(제))이 겨루는 형국이었다. 6국의 전선으로 통일작업을 한 전략을 合綜(합종)이라고 하고, 진나라를 중심으로 각국과 교섭하는 통일전략을 連橫(연횡)이라고 한다. 오늘날로 따지면 합종은 WTO나 각종 지역연대와 유사한 형태이며, 연횡은 FTA와 같이 쌍자 단독협상에 비유할 수 있다. 비록 전략가나 국가 고유의 역량차이는 있겠지만, 합종은 구조적으로 깨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왜냐하면 연횡은 ‘진나라의 이익’이라는 단순한 목표가 있는 반면, 연횡은 6개국의 이해관계가 6중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힘을 모으기가 힘들고, 연횡의 교란에 넘어가 자중지화에 빠질 우려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진나라의 장의는 각국의 이해관계와 지형상의 이유를 들먹이며 끈질기게 합종을 교란하였고, 영토를 하나씩 먹어들어간 끝에 진나라의 중국 통일을 현실화할 수 있었다.

 

 

제후들이 합종을 하려는 것은 그것으로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임금을 높이며 군대를 튼튼하게 하여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합종하는 자들은 천하를 하나로 통일시켜 의형제가 되기로 약속하고 洹水(원수)라는 곳에서 白馬(백마)를 잡아 피를 마시며 맹세하여 서로의 결속을 굳게 지키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부모에게서 난 형제끼리도 서로 재물을 다투는 일이 있는데, 간사하고 거짓을 일삼으며 이랬다저랬다 하는 소진(대표적인 합종가)의 술책을 믿으려고 하니,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역시 명백합니다.

만약 왕께서 진나라를 섬기지 않으면 군대를 동원하여 조나라와 국경을 맞대는 북쪽 지역 전역을 취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나라는 남쪽으로 내려와 위나라를 돕지 않을 것입니다. 조나라가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위나라도 북쪽으로 올라가 돕지 않을 것이고, 위나라가 북쪽으로 올라가지 않는다면 합종의 길은 끊어질 것입니다. 합종의 길이 끊어진다면 왕의 나라는 아무리 안전을 바라더라도 위태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 사마천, 『사기열전』 중 장의(대표적인 연횡가)가 위나라 왕을 협박하는 모습

 

 

 

『아틀라스 세계는 지금』은 유럽연합(EU)부터 시작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유럽의 정치·경제 통합을 실현하기 위하여 1993년 11월 1일 발효된 마스트리히트조약에 따라 유럽 12개국이 참가하면서부터 출범한 연합기구인데, 2007년 현재 참가국이 27개국으로 늘어났으며 중국, 미국에 이은 우리나라의 최대 무역 파트너이다. 하지만 정치와 경제의 공동체를 표방하는 유럽연합의 구성원을 보면 당연히 가입할 것 같은 나라들은 스스로 가입을 꺼려하고 있다.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 스위스가 그러한데,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는 수산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스위스는 금융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가입을 꺼리고 있다. 이는 연합이라는 개념이 철저히 경제원리에 입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하나의 특징을 보여주는 나라는 ‘터키’이다. 터키는 1986년에 이미 가입 신청서를 제출해놓은 상태이지만, 유럽연합은 터키의 가입을 주저하고 있다. 왜냐하면 터키는 영토 대부분이 아시아에 위치해 있으며, 종교 또한 97%가 이슬람교도로 터키의 EU 가입은 유럽 안에서 이질적인 문화가 충돌하는 것을 의미한다. 2006년에 덴마크의 조그만 신문사가 게재한 마호메트 만평이 보여주듯 유럽과 이슬람은 앙숙의 골이 깊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이슬람이 유럽의 식민지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 책이 특정 대륙이나 국가에 앞서 ‘연합’을 첫 번째 화두로 삼은 것은 앞으로 펼쳐질 미래세계에는 국경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현대로 오면서 이와 같은 이합집산이 더욱 두드러졌다. 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이었던 구소련(러시아)과 미국이 패권을 다투며 50년 넘게 냉전을 유지해 온 것에서 시작해, 앙숙이었던 러시아와 중국이 미국에 대항해 손을 잡고 있다. 심지어 베트남전쟁으로 인해 미국과 전쟁을 치른 베트남은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다. 하기야 미국에 의해서 수십 만의 국민들이 목숨을 잃었던 일본은 지금 미국 없이는 못 사는 나라가 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동력은 바로 ‘이익’이다. 이익을 중심으로 모이고 흩어진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것은 오늘날에는 매우 당연한 말이 되었다.

 

 

 

 

 

‘이익’이라는 이데올로기

 

 

아프리카는 풍부한 천연자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대륙이다. 지구상에 있는 49개의 ‘미개발국’ 가운데 34개국이 아프리카이다. 아프리카에 총 52개의 나라가 있다는 것을 보았을 때 ‘가난과 혼란’을 상징하는 곳이다. 아프리카에는 지독하게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데, 심지어 아프리카에 저축한 돈도 선진국이나 금융규제를 덜 받는 외국에 투자되는 실정이다.

이러한 역설은 왜 일어날까. 자본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간단하다. ‘누가’ 아프리카에 투자할 것인가? 이 책의 저자는 ‘인도적’이라는 말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보다는 ‘수익성’이 더 확실한 근거이다. 세계는 아프리카에 대해서 ‘인도적’으로 보기보다는 철저히 ‘비지니스’의 관점으로 본다. 중국의 아프리카 투자는 세계투자의 22%를 차지하는 데, 거기에는 ‘훌륭한 자원’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아프리카에는 수많은 내전이 일어나고 있고, 이로 인해서 무고한 주민들이 피를 흘리고 있는데, 세계자본의 입장에서는 내전이 유지되는 것이 ‘이익’이 된다. 스위스의 국제대학원연구소는 아프리카에 약 3천만정의 소형무기가 있다고 추산하고 있다. 그 중에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총기상’들에 의한 밀수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중국 등 무기수출국들은 합법성을 주장하지만 합법이든 불법이든 검은 대륙을 피로 적시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무기 팔아 돈 벌고 그 가운데 일부를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이 선진국들의 일반적인 행태이다. 저자는 전쟁이 일어날 때에는 그 전쟁으로 ‘누가’ 이익을 얻는가를 잘 살펴보라고 주문한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것은 ‘석유’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미국은 자유와 정의를 사랑하는 나라라고 공공연히 주장하지만, 역사상 가장 많은 독재정권을 지원한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독재정권이 유지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한 나라의 자원이 있을 때 이것을 독재자가 독점하고 있다면, 이 자원은 독재자와 독재자를 지원하는 나라가 나눠가지면 된다. 하지만 민주화가 이루어졌을 때 이 자원은 ‘만인의 공동 소유’가 되기 때문에 독재자를 지원하는 나라로서는 그만큼 가져가는 것이 적어진다. 이것이 바로 독재정권이 존립하는 확실한 이유가 된다. 저자는 국제사회가 분쟁과 위기에 대응하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개입 자제

알제리와 콩고민주공화국, 체첸의 분쟁에 국제사회는 개입하지 않았다.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고, 민간인에 대한 공격이 자행되고 있는데도, 국제사회는 침묵하고 있다. 반대파에 대해 한 국가가 전면전을 벌이지만, 국제사회는 대답이 없다. 한 국가 혹은 한 지역의 안정을 위해서 ‘살인권’을 보장해주고 있는 꼴이다.

 

인도적 지원

개입을 하는 대신 대규모 인도적 지원을 하는 경우도 있다. 분쟁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이다. 직접 개입하는 데 따르는 정치적, 군사적 비용 대신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1996년 기근 이후로 식량이 부족한 북한에 대한 지원이 대표적 예이다. 또 1998년 앙골라 전면독립민족동맹이 무너졌을 때도, 2002년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도, 국제사회는 앙골라에 인도적 지원을 해주었다. 인도적 지원이 끊기면 수단 남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근이 발생하고, 분쟁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군사적 개입

국제사회의 마지막 선택은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시에라리온이 그랬고, 아프가니스탄이 그랬고, 이라크가 그랬다. 이때에도 물론 인도적 지원이 병행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군사적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지, 진짜로 ‘인도적’인 것은 아니다. 이처럼 ‘인도적 전쟁’은 두 가지 얼굴을 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전쟁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지원을 해주는 것이 인도적 전쟁이다.

- 책 167쪽

 

 

 

 

아름다운 그림속의 아름답지 않은 모습

 

 

이 책의 자랑은 무엇보다 350개의 아름다운 지도이다. 이 지도의 아름다움은 색채와 자료의 정확성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기 어려운 그 지역의 속사정에 대해서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다는 데 있다. 예컨대 중국을 설명하는 지도는 화선지를 이용하여 동양적 색감을 주고 있다. 아래의 지도는 2005년 현재 완공된 이스라엘의 장벽이다. 완공된 빨간 선을 따라가다 보면 이 장벽이 얼마나 자의적이며 제국적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상위의 빨간 색은 녹색 선의 한참 안쪽까지 세워져 있다. 그 이유는 단지 이스라엘인의 정착지가 있다는 이유다. 그 안에는 팔레스타인 주민들도 사로 있는데, 이와 같이 비상식적으로 세워진 장벽 때문에 10개의 팔레스타인 마을에 사는 5,200은 완전히 갇힌 신세가 되었다.

 

 




<이스라엘 장벽, 책 106쪽>

 

이제 우리가 민족감정을 분출하는 독도 문제에 대해서 이 책은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알아보자. 독도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를 알아야 한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섬을 확보한 덕에 일본은 자기 영토의 열두 배나 되는 배타적 경제수역을 가지고 있다. 바다는 일본의 확실한 자원으로서 그 덕에 일본은 전 세계 어업 생산량의 12퍼센트를 확보할 수 있었다. 나고야와 치바의 항고에 집중된 조선업은 세계 제1위이고, 편의치적선(각종 규제를 피하기 위해서 타국에 등록한 선박)을 제외하면 그리스 다음으로 많은 상선을 보유한 나라가 일본이다. 이처럼 일본에게 바다는 무척 중요한 자원이다. 일본 영토는 땅이 아니라 바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 것이다.

- 글과 그림, 책 142쪽

 

 

위 그림을 보면 일본이 한국뿐 아니라 중국, 러시아와도 영토분쟁, 아니 해역분쟁을 벌이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는 독도나 동해 명칭에 대해서 과도한 민족감정이나 여타 추상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에 비해 일본을 철저히 실리적 외교를 펼치고 있는 것 같이 보이며, 독도와 동해 문제는 거대한 해상 계획의 일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지구본을 쳐다보면 평범한 공 모양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구는 우리에게 많은 말을 하고 싶어한다. 이 책은 지도가 하고 싶은 말을 구체적으로 재현했다. 강조해야 할 부분에는 좀더 큰 그림을 보여주고, 헷갈린 곳은 색깔을 이용해 이해하기 쉽게 보여준다. 마치 아이들이 진흙놀이를 할 때처럼 이리 주무르고 저리 주물러서 만든 ‘움직이는 지도’이다. 때문에 이 책의 결론은 역시 ‘환경 문제’이다. 지도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전쟁’도 아니고 바로 ‘환경’이기 때문이다. 아예 지도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다고 이 책은 경고한다. 이 결론에 관해서는 이 책의 그림을 쓰기보다는 더 좋은 그림이 하나 있다.

 

 




 

<경향신문, 2005.9.23일자 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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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7-05-15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2기의 첫 작업인데, 시간이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네여 ㅡㅡ;;

마늘빵 2007-05-15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걸 시도하고 계시는군요! :)

승주나무 2007-05-16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아프 님//저의 인생은 언제나 도전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믿기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본격적으로 서평을 쓰기 시작한 것은 군대생활하면서이다.

다행히 좋은 환경에 배속되었고, 좋은 커뮤니티를 만났던 게 나에게 '독서'에 대해서 새롭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들었다.

서평과 리뷰를 다르게 보는 것이 다소 억측일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 최소한 나에게는 그 두 개념이 조금씩 다르게 전달되기 시작했다. 서평은 '책에 대한 감상을 객관화하여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공론화하는 글'이라고 한다면 '리뷰(review)'는 책을 포함해서 영화, 예술, 사회문제 등 생활의 광범위한 '만남'을 사회, 문화적으로 대상화하여 공론화한 형식'이라고 정리했다. 때문에 이전의 여러 활동을 '리뷰 1기'로 지정한 것이다.

 

리뷰 1기의 특징은 주로 '자기학습'의 관점을 보인다. 그러니까 책에 나타난 내용을 내적으로 의미화하는 데에 공을 들이는 반면, 그것을 '사회적으로 확장'하는 데에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 다만 '내적 의미화'라는 것 자체가 공개된 활동이므로 '공유'라는 차원에서는 어느 정도 '사회화'가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을 '사회화'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좀 나쁘게 말하자면, 그때의 리뷰는 대체로 '원작에 대한 다이제스트'의 기능을 한다. 때문에 본문에 충실하고, 일상과의 접목을 많이 시도했다. 아래와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과학혁명의 구조] 어떻게 세상이 바뀌는가

[엔트로피] 엔트로피 카지노, 당신의 지갑을 확인하라

[이기적 유전자] 생존을 위한 혈투

[인간 등정의 발자취] 현대를 의미 있게 하는 것들에 대한 겸손한 기억

[플루타르크 영웅전 전집 1] 동서열전후기-1

[부분과 전체] 학자의 인품

                                      <리뷰 1기의 졸작들>

 

그 이후에도 수적으로는 다양한 리뷰를 만들었으나, 과도기적인 리뷰이거나 '사회적 확장'을 위한 준비단계라고 볼 수 있다.

리뷰 1기라는 말 속에는 몇 가지 전제가 담겨 있다. 인간의 불완전성이라든지, '변화' 같은 개념이 그것이다. 나의 리뷰는 완성을 갈구하지만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다만 '근사하게' 펼쳐질 뿐이다. 그리고 리뷰 1기와 리뷰 2기를 구분하는 유일한 척도는 '변화'뿐이다. 단지 변화에 대한 의지가 '리뷰 2기'를 선언하게끔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명백한 변화'를 염두에 두는 것이다. 리뷰 2기에 대한 시도는 있었다. 얼마 전에 무리하게 '사회화'를 추진한 '대학'에 대한 리뷰가 그것이다.

 

[동양사상3-총기난사사건과 관련하여]<대학>모든 學은 大學이라야 한다

 

 

나는 리뷰가 2개의 항으로 이루어진 방정식이라고 생각한다. 좌변은 '내적 성찰'이면 우변은 '공유'이다. 이것의 비율에 따라서 리뷰의 성격이 좌우되는 것이지만, 좌변과 우변은 불변의 위치를 차지한다. 아무리 사회적 확장과 공론을 이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적 성찰에 기인하지 않을 수 없으며, 내적 성찰 역시 사회적 성찰로 확대된다는 측면에서 이 두 변은 불변이다. 이 두 변은 서로 영향을 준다.

 

내가 왜 지금 시점에 리뷰 2기를 선언하느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리뷰 1기와 리뷰 2기의 차이를 확인했다면 오래 전에 2기를 선언해서 쓰기 시작하면 될 일인데, 왜 2기를 주저했을까? 사회적 교감 내지 숙려라고 하면 답변이 될까? 군 전역자이자 사회부적응자이던 재작년 봄부터 신문 하나를 지정해 꼼꼼하게 스크랩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나의 끈기를 믿는다. 불가피한 누락을 몇 건 제외하고는 2년 동안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신문을 스크랩했고, 현재까지 12,500건 가량의 B/D를 구축했다.

 

 

문제의 신문스크랩 블로그 ==> 신문여행

 

물론 신문을 읽는다고 사회에 대해서 눈을 뜬다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지만, 인간의 모든 산물이 반복과 축적에 의한 결과라고 나는 믿는다. 신문을 학습하면서 사회변화의 일정한 패턴을 익혔고, 이제까지 나의 리뷰에 넣지 않았던 사회적 언급들을 펼쳐보이려 한다.

 

그러면 리뷰 3기와 리뷰 4기 같은 것들도 있을까? 나는 일단 '있다'고 대답하고 싶지만, 그것은 '비율의 문제'일 뿐이다. 리뷰 2기 이후의 모양새에 대해서 예상은 해볼 수 있다. 멀리는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의 '리뷰'가 '모델'이 될 수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역을 다방면의 사회문제에 반추해서 나름대로의 결론을 만들어낸다. 가라타니 고진과 같은 철학자도 이와 같다. 도킨스를 먼저 언급한 것은 그의 '유머' 때문이다.

가깝게는 김수영이나, 고원과 알라딘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는 '로쟈'도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얼핏 보면 '도움글'로 읽히기도 하지만, 사실 가슴 속에 있는 큰 물음표를 향하여 돌진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다만 '의도적'으로 많은 흔적을 남기는 이유는 '연대' 때문이다. 이 싸움은 전선을 얼마나 확대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2기에서는 무엇이 변하나? 미안하지만 변하는 것은 별로 없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리뷰가 서평을 포함하듯, 2기가 1기를 포함한다고 말할 수는 있다. 모든 책에 대해서 리뷰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고, 사회적 확장이 굳이 필요치 않은 책에 대해서 꼭 사회화를 시도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유연함도 아마도 2기의 특징일 것이다. 2기의 관건은 상황판단과 황금률이다.

"악마는 비율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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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theme 2007-05-14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연함도 아마도 2기의 특징일 것이다. 2기의 관건은 상황판단과 황금률이다.

기대하겠습니다.

마늘빵 2007-05-15 0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주나무님 요새 뜸하십니다. :)

승주나무 2007-05-15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ntitheme 님//저도 기대가 됩니다 ㅋㅋ
아프 님//회사를 안 다니니까 더 바쁘네요. 그보다 아프 님을 만나기에 앞서 할 일이 많군요. 논문은 잘 마무리되고 있나요^^;
 
 전출처 : 로쟈 > 가라타니 고진을 읽는 시간

경향신문의 고전읽기에서 일본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새물결)가 다루어지고 있길래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나는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민음사)을 도서관에서 대출하고 그 영역본을 타대학 도서관에 대출신청했다(내가 갖고 있는 국역본은 '고아원'에 가 있다). 올 문단의 큰 논쟁거리를 가져온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b)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 그 '기원'에 관한 이야기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자연스레 생각했기 때문이다(고진 스스로가 문제삼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트랜스크리틱>에 대한 내용정리를 마저 끝내는 일도 아직 미뤄둔 숙제로 남아있다.

 

 

 

 

개인적으로 가라타니 고진에 관한 페이퍼들을 자주 올렸다고 생각되는데, 내가 제일 처음 읽은 책도 <탐구1>이었다. 그의 '비평'은 '고진식 비평'이라고 따로 분류해도 좋을 만큼(적어도 국내에서는 그런 종류의 비평을 접하기 어려웠던 거 아닌가? 철학과 문학을 횡단하는 쪽으로는 김우창 교수의 비평 정도가 예외적이었을 뿐) 독특하고 흥미로웠는데, 게다가 '읽히는' 비평이었다(아래의 기사를 보니 <탐구>는 '90년대 일본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고진급의 비평가가 흔한 건 아니라는 데에서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읽은 게 <은유로서의 건축>이었던 듯하며 나는 이 책을 영역본과 나란히 놓고 읽었다.

 

 

 

 

영역본을 위한 이 선집이 <탐구>에서 더 나아간 것처럼 여겨지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이후에 나는 고진의 애독자가 되었다. 당연히 이후에 출간된 고진의 모든 책을 사들였으며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정도를 빼고는 다 읽어본 듯하다. 그리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그의 몇몇 저작(가령 <의미라는 질병> 같은 비평집)을 은근히 고대하고 있다. 혹 당신이 아직 이 거물급 비평가를 만나본/읽어본 적이 없다면 (뚜쟁이로서 말하건대) 한번쯤 시간을 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대충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되면 당장 비평을 써보시라. '고진을 넘어선 비평'이 탄생하는 흔하지 않을 장면을 나는 목도하고 싶다...

경향신문(06. 09. 30) ‘타자’와 ‘윤리’에 대한 치열한 성찰

한 권의 책이 생각하는 감각을 바꾼다고 할 때, 이는 날카로운 칼에 베는 일과 같다. 한 번 벤 자리는 아물어도 예전 같지 않다. 벨 때의 고통은 떠나겠으나 몸은 이미 전과 다르며, 미열이 가시지 않는 혼미함 속에서도 정신은 각성되어 있다. ‘탐구’를 읽고 나서는 전처럼 생각하기 힘들다.

저자인 가라타니 고진(1941~) 자신에게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는 ‘탐구’를 ‘전환’이라 일컫는다. ‘탐구’의 글들은 1985년에서 88년까지 잡지 ‘군조우(群像)’에 연재됐는데, 그 2년은 첨예한 논쟁의 연속이었다. 고진이 ‘기존 철학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진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 대결해야 했다. 국내에서도 유명한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1978), ‘일본근대문학의 기원’(1980) 이후 고진은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그는 이 시기 자신의 사상적 고투를 ‘패배한 전쟁’이라 일컫는다. 그의 싸움은 이러한 것이었다. “나는 일부러 나 자신을 ‘안’에 묶어 두려고 했다. …나는 바깥을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상정되지 않도록 하였는데, 바깥이란 일단 그렇게 파악되면 이미 안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내성과 소행’)

그는 형이상학과의 지난한 싸움에 나섰다. 경제학, 문학, 철학의 영역으로 전략적으로 자리를 바꿔가며 형이상학과 맞섰다. 자리를 옮겼을지언정 고진은 한 번도 쉽사리 자신을 형이상학 밖에 있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오히려 끊임없이 형이상학의 내부로, 사유되지 않은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갔고, 종국에는 형이상학을 안으로부터 무너뜨리기 위해 철저한 논리적 작업을 거쳤다. 그 결과가 ‘은유로서의 건축: 언어, 수, 화폐’(1983)이다.

그러나 그는 패배했다. 초월적인 의미를 제거하기 위해 전투에 나섰으나, 그 전투가 자신에게 남긴 것은 메마른 감각과 갑갑한 논리였다. 거기에서 빠져 있는 것은 ‘타자’라는 생명력이었고, ‘윤리’로서의 소통이었다. 이제 고진은 형이상학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을 사유하기 시작한다. “내가 ‘탐구’를 연재하면서 계속 질문했던 것은 ‘사이’ 혹은 ‘외부’에서 살기 위한 조건과 근거였다고 할 것이다.”(‘탐구’ 후기)

‘탐구’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타자(他者)’이다. ‘타자’라는 말은 그 함의와는 달리 결코 낯설지 않다. 빈번히 사용되는 이 개념은 낯선 존재를 범박하게 처리하는 상투어가 되고 만다. 그 까닭은 타자라는 말이 자기 확장의 의미를 띠고 사용되기 때문이다. 고진은 이러한 용법을 가장 경계한다. 그에게 타자는 주체의 ‘바깥’이지만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바깥’이다. 만약 그 ‘알 수 없는 거리’가 빠져있다면 타자는 그저 주체 ‘안’의 존재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서 상정되는 신은 자기의 확장일 따름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의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소리이다. 자신의 말을 마치 누군가의 말인 양 듣는다. 그때 타자와의 ‘거리’는 발생하지 않는다. 신이 전지전능하게 나를 꿰뚫고 있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바를 내가 안다는 사실과 동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원하는 바를 가장 잘 아시는 신의 상정, ‘기복 신앙’은 자기독백이다.

여기에서 빠져 있는 것은 ‘비대칭적 관계’이다. 타자는 내가 품는 의미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존재이다. 이쪽에서 자명하다고 저쪽에서도 자명하지는 않다. 이때 고진이 ‘타자’로 문제 삼으려는 것은 ‘독아론(獨我論)’이다. 독아론은 나에게 타당하면 다른 이들에게도 타당하다는 사고방식이다. 독아론에서 남은 나와 동일한 주체로서, 동일한 규칙을 소유하는 사람으로 설정된다. 하지만 이들은 내면화된 존재일 따름이다.

고진은 플라톤 이래의 서구 형이상학은 바로 이러한 독아론의 소산이었다고 지적한다. 거기에서 배제된 존재들은, 광인(푸코, ‘광기의 역사’)처럼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실제의 삶이란 무수한 존재들간의 차이, 그리고 그 차이들을 뛰어넘는 ‘가늠할 수 없는’ 도약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타자를 성찰하는 일은 ‘윤리’적이다. ‘윤리’란 타자와의 ‘비대칭성’을 품으면서도 관계를 실현하는 행위이다. ‘탐구’는 이렇듯 ‘타자’와 ‘윤리’에 관한 책이다.

일본의 사상지 ‘유레카’는 90년대 일본 최고의 책으로 ‘탐구’를 선정했다. 80년대 후반의 저작이 90년대 최고의 책으로 꼽힌 것은 ‘탐구’가 90년대의 맥락에서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소위 동구권의 몰락 이후 ‘역사의 종언’이 고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서구이성 혹은 자본주의의 독백일 따름이다. 문제는 그에 맞서는 해체주의가 90년대에 이르러서 파괴력을 잃고, 지적 유희의 경향을 걸었다는 점이다. 그 때 빠져있는 것 역시 ‘타자’와 ‘윤리’였다. ‘탐구’는 역사에 대한 목적론을 부정하면서도 그 반편향으로 어려운 지적 수사에 이르지도 않았다. 다만 실제의 삶에 대해 말한다. 이제 고진이 ‘탐구’에서 자주 인용하는 비트겐슈타인의 한 구절을 이해할 수 있다. “세계 안에 신비는 없다.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신비이다.”(윤여일|‘수유+너머’ 연구원)

06. 10.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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