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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과 열린사회
김용환 지음 / 철학과현실사 / 199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책제목 : 관용과 열린사회
저자 : 김용환 지음
출판 : 철학과현실사 | 1997.08
나는 '관용하는' 사람(관용인)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관용에 대해서 심각한 질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사실상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질환이기 때문에, 질환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사람에 따라서 수년에서 수십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내가 서두부터 이렇게 비관적으로 운을 떼는 이유는 수천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몇몇 사람만이 '관용의 자격'을 스스로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상적으로 자유로운 사람, 이를테면 장자나 이탁오 같은 사람들만 그 가치를 향유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단에 갇혀 살았다. 일례로 '사생활'이라는 말도 동양에서는 생소한 개념이다.
이것이 얼마나 생소한지를 설명하는 예화가 있다. 조선 시대의 '왕'은 사생활이 철저히 봉쇄당하는 불쌍한 존재였다. 심지어 간밤에 몇 번째 궁녀와 잤는지까지 기록될 정도였다. 우리에게 사(私)라는 것은 항상 공(公)과 상대되는 의미이며,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지식인들이 정신에 비해서 '육체'를 하찮은 것으로 평가절하한 현상과 일맥 상통한다.
이 글은 책에 대한 내용을 앵무새처럼 종알대기보다 내가 잘못 생각한 부분이 무엇이었는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1. 관용의 사전적 의미는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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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03 (寬容)
「명」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 또는 그런 용서. ≒아용(阿容). ¶관용을 베풀다/이번 한 번만 관용을 베풀어 주시면 개과천선하여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국립국어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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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이라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매우 재미 없는 녀석이다. 대부분 '목적어'로 사용되며, 그 수법도 '관용을 베풀다'는 식의 뻔한 관용구만 즐겨 활용된다. 때문에 우리는 '관용을 베풀다'는 뻔한 표현보다도 '아량을 베풀다'는 보다 근사한 표현을 사용한다. '관용'은 '베풀다'에 갇힌 단어이다.
관용이 목적어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관용하다'라는 동사 역시 표제어에 등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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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하다02
「동」【…을】 =>관용03. ¶상사는 때에 따라 부하의 잘못을 관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국립국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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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뜻은 나오지도 않았고 위의 관용03을 찾아보라고 안내만 써 있다. 그리고 예시 역시 '관용을 베풀다'형으로 썼다. 글쓴이는 '관용'의 출발을 '우리 모두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하자고 하였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는 '국어사전'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 같다.
사전적 의미에서 확인한 것과 같이 우리나라에서 '관용'이라는 말은 권위주의의 가치를 담은 별 의미 없는 수사라고 할 수 있으며, 일종의 편견이다.
나의 사전에서 관용이라는 말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는 관용을 권위자의 행위로만 인식했다. 사실 관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권위자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다.
2. 조작된 공포감이 관용과 불관용 사이에 휴전선을 놓다.
관용은 사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것이다.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타협의 자세를 가지고 상대를 대등하게 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등한 관계라면 분명히 자신이 양보를 해야 할 지점이 생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기득권 중에서 공자의 아래와 같은 비판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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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말했다. 비루한 무리들과 어떻게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그들은 무엇을 얻거나 이루지 못하면 그것에 매달려 전전긍긍하며, 이미 얻었다고 해도 그것을 잃게 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구나. 만약 그들이 그것을 잃을까 노심초사한다면 세상에 못할 짓이 없을 것이다. <논어, 양화편>
子曰: 「鄙夫可與事君也與哉? 與, 其未得之也, 患得之; 旣得之, 患失之.苟患失之, 無所不至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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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후로 우리는 불관용에 갇힌 상태가 되었다. 상실과 좌절, 패배, 틀림은 관용으로 가지 못할 정도로 공포감을 일으킨다. 이는 당연히 안정되지 못한 상태, 만족하지 못한 상태, 갈등이 증폭된 상태이다. 사실 이것은 기득권의 논리인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다 보니 왠만한 사람들은 앵무새처럼 읊고 다니며 진짜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이에 비해 관용은 자유의 상태, 대등한 상태, 안정된 상태, 합의된 상태, 갈등이 해소된 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이 불관용과 관용의 거리이다.
이것은 비단 '집단'의 문제만이 아니라 '개인'의 차원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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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인자만이 누군가를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다. <논어, 이인편>
子曰: 「唯仁者能好人, 能惡人.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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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은 개인에게 엄청난 용기를 요구하는 개념이다. 사람은 스스로에게 매우 관용적이기 마련인데, 스스로에게 철저히 불관용하는 것이 관용을 실천하는 첫 번째 계단이다. 특히 관용은 '관계'를 전제한 용어이기 때문에 개인이 관용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느냐에 따라서 사회의 성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사실 말하기는 쉽지만 스스로에게 불관용하기란 쉽지 않다. 나의 오류를 인정해야 하며, 나는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1/2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궁극적인 반성을 이끌어내야 한다. 글쓴이는 이것이 어느 한쪽의 자세여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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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원리 : 내가 틀릴 수도 있고 당신이 옳을 수도 있다." 이 원리는 관용이 가능하기 위한 필요 조건이다. 나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한 타자의 의견이나 행위에 대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간섭이나 방해 같은 부정적 행위를 자발적으로 중지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원리는 상호 호혜적인 진술일 때만 의미가 있는 원리이다. 즉 이 진술 안에는 자기 부정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같이 틀릴 수 있다는 동시 반성의 고백이 함축되어 있어야만 한다. 나의 오류만을 인정하는 일방적인 진술일 경우 우리는 타자의 의견과 행위에 대해 관용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할 수 없으며 오히려 타자의 의견에 동의해야 할 의무만이 발생한다." <관용과 열린사회, 62~6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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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용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 관용이라는 미덕을 붙인다고 했을 때, 끼워지지 않고 자꾸 튀어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 이유는 관용을 학습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지만, 서구의 관용 문화나 발전된 합리적 사고 등을 예시하며 비판하거나 아쉬움을 나타내는 것은 어쩌면 불필요하거나 문제를 더욱 풀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놈팽이와 사랑에 빠진 아는 여자' 또는 그 반대 경우인 아는 남자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설명을 해주더라도, 이 모든 설명은 그가 '한번 대어 보는 것'만 못하다.
글쓴이는 서양에서 관용이 자리잡게 된 역사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했는데,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서구의 관용 문화는 피의 반성"이라는 것이다. 엄청난 피를 흘린 후에 그 반성으로 관용의 문화가 정착되기는 했지만 서양의 종교는 아직도 '이기적인 하느님'을 신봉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양이든 동양이든 '종교'가 불관용의 본산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하지만 '관용의 종교'라는 이례적인 사례도 있다. 특이하게도 인도의 철학에서는 '다른 신'을 인정하고 있다. 바가바드기타라는 책에는 "어떠한 신자가 신앙을 가지고 어떤 형태의 신을 예배하기를 원하더라도 나는 그의 신앙을 튼튼하게 해준다"(vii. 21)는 선언이 담겨 있다. 물론 이를 통해서 자신의 신앙이 완성도 있고 깊이가 있다는 것을 보이려 한 것이지만, 이런 관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동양의 문화를 기억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구호적으로 '관용' '관용' 하는 것이 관용에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될까? 차라리 관용이 없음으로 인해서 무자비한 인권유린을 당하고 피해를 보는 사례들을 수집해서 이 상황에 대한 개별 해법을 고민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글쓴이(김용환)가 주장하는 관용이란 한국 사회에서 선언적 의미에 머무른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고백했듯 철학자가 '관용'에 대해서 접근하기는 매우 취약한 구조다. 관용은 윤리적 문제라기보다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문제, 즉 일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해괴한 일들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불관용과 관용 사이에 간극을 좁히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다.
동시 반성의 고백이라는 말도 이상론에 머무를 가능성이 있다. 쌍방이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면 그 구조를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국방장관 회담, 장성급 회담, 총리급 회담 등이 자꾸 열리지만 협의가 쉽지 않은 까닭, 6자 회담이 매우 느린 속도로 진행되는 현재의 모습은 이를 충분히 증명한다. 만약 이 문제를 풀기를 원한다면 보다 실증적인 사례연구를 통해 성공의 사례와 실폐의 사례를 보여주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4. 관용을 '한다'는 것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관용'을 한다는 것은 수많은 도전에 직면한다는 것을 말한다. 수천년 동안 쌓여 있던 고정관념을 드러내야 하고 스스로는 궁극적인 반성을 통해 관용이 들어올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나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 역시 '관용 주파수'가 호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어려운 까닭은 선교행위처럼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스스로 '반성'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떠나서, '관용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유롭다는 뜻이 아닐까? 세상의 온갖 너저분한 관습과 타성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켜, 몸과 머리 속에 들어 있는 관념의 먼지들을 털어내어 한껏 가벼운 상태가 아닐까? 나는 나 스스로의 자유를 위해서라도 '관용인'이 되고 싶다.
질문 :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관용을 실천하고 상대방의 관용을 이끌어낼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