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탄핵 범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한 여의도 촛불문화제는 6천여 명이 운집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윤중로를 'ㄴ자 모양'으로 길게 이어진 행렬에 사람들이 자꾸 뒤이어 들어오는 형국이었다. 참여자의 구성은 매우 다양했다. 물아기를 안고 온 엄마부터 초중고등학생, 직장인, 주부 등 모든 세대가 한데 모인 자리였다. 세대가 다른 만큼 생각도 다르고 이해관계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텐데, 인터뷰를 해본 결과 요구사항은 나이든 사람이고 어린 사람이고 다르지 않았다. 초등학생부터 5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 기자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이명박 정부의 쇠고기 협상에 항의하는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자 앞에 앉은 사람들부터 뒤에 앉은 사람들에게 촛불을 나눠주어 거리는 금세 촛불로 뒤덮였다.>

 

세대는 달라도 걱정은 한결같아

 

"어린이신문에서 30개월 이상 소도 수입한다는 기사를 보았어요. 무서워요"(이담초 5학년 이수정 양)

"국민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세요.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주세요"(중학교 3학년 학생)

"사람들의 걱정이 커지지 않게 정보를 공개했으면 좋겠다"(용화여고 2학년 여학생)
"국민을 대변하는 것이 정부인데, 정부의 역할을 똑바로 해주세요"(영산고 2학년 학생들)
"정보에 대한 통제와 끊임없는 밀실정치를 당장 그만두라"(IT 업종에 근무하는 20대 직장인)
"국민이 원하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일곱 살 아이를 둔 30대 주로미 주부)

"국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었으면 좋겠다"(중학생 딸을 둔 40대 주부)

"다수의 사람들이 행복한 정치를 해달라"(고2 딸을 가진 51세 주부 이모씨)
- 이상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에 꼭 해주고 싶은 말"에 대한 답변


우석훈 씨는 <88만원 세대>라는 책에서 대한민국 사회는 세대간 착취현상이 매우 심각하다고 우려한 바 있는데, 최소한 여의도 광장에 모인 서로 생각이 통하는 듯했다. 초등학생부터 50대 주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대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지만, 걱정하는 내용은 한결같았다. 이명박 정부는 왜 국민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국민에게 제대로 알려주지 않느냐는 질타다. 한 학생은 "청와대 분들과 정부에 계시는 분들이 직접 이곳에 나와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청계천의 두 번의 집회를 포함해서 세 번째로 집회에 참여한다는 50대 주부는 "청계천에서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여의도는 아기엄마나 주부들이 많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기자가 만난 고등학생은 용화여고, 회수고, 영산고 등이었는데, 학교에 따라서 40명 반에서 10명에서 많게는 25명 반에서 16명까지 적지 않은 고등학생들이 청계천과 여의도에 있었던 3회의 집회에 참여했다고 학생들은 전했다. 기자는 학생들과 인터뷰를 하기 전에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전했다. 어른으로서 여기까지 오게 한 것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태극기 아래 수천 명의 점점한 촛불 행렬이 늘어서 있다.>

 

죽기 싫어서 나왔다

 

어떻게 해서 직접 참여를 하게 되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 학생은 망설임 없이 "죽기 싫어서요"라고 대답해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 학생은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 쇠고기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하지만 자신들처럼 절실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어른들은 알지만 아이들은 느낀다는 것이다. 행사를 알게 된 것은 대부분 인터넷 카페 등을 통해서다. 자신을 고3 수험생이라고 소개한 한 남학생은 "개교기념일이라 쉬는 날이지만,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 참여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학원수업을 빼먹고 온 학생들도 적지 않은 듯했다. 대체로 학생들은 사진을 찍는 것과 실명을 공개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학교 공개는 괜찮다고 말했다. 언론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이 노출될 경우 부담이 만만치 않다는 말이다.

"공부를 하는 것이 학생의 본분이 아니냐" 하는 짓궂은 질문을 던져 보았다. 돌아오는 대답이 그야말로 우문현답니다. "배운 것을 활용할 수 있어야 진짜 학생이다"라는 회수고 3학년 최재용 학생의 말에 기자는 그만 기가 죽고 말았다. 한 학생은 "학생도 국민이므로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무엇보다 용화여고 2학년 학생의 말을 듣고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저희가 나설 정도면 상황이 좀 심각하다는 얘기다"
면목동에 사는 송이 엄마 주로미 주부는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행렬에 동참하고 싶어서 나왔으며, 특히 아기 엄마이기 때문에 (아이를) 지켜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이와 함께 이 자리에 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아이의 문제일 거라고 생각해 직접 보여주고 싶어서 데려왔다"고 말했다.

 

<애독하는 어린이신문을 통해 쇠고기 문제의 심각성을 알았다는 이담초등학교 5학년 이수정 어린이와 남동생. 이수정 어린이는 솔직히 집에서 동생과 놀고 싶었다고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당신이 내 옆에 있어서 나는 든든하다

 

여의도 광장에는 학생들이 천 명은 넘게 보였다. 이를 감안해 학생과 어른들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선택한 것이 바로 '애국가'다. 태극기도 여기저기서 쉽게 볼 수 있었다. 군중이 태극기를 가지고 온 이유는 "우리도 애국자입니다"라는 진행자의 소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학생들의 직접 참여에 대해서 어른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IT업종에 근무하는 직장인은 "휘둘리는 건 위험하지만 그들이 나오는 것은 정당한 권리다"라며 학생들을 응원했다. 성산동의 한 주부는 "지난 두 번의 선거에서 20대의 투표율이 너무 저조해서 걱정을 많이 했지만, 오늘 여기서 젊은 사람들과 학생들을 많이 만나게 돼 대한민국의 미래가 아직 어둡지 않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며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행사에 참여한 한 학생도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것을 느껴서 좋았으며, 특히 옆에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니 매우 든든하다"며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오늘 열린 촛불문화제를 포함해서 현재 인터넷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국민의 행동과 이를 바라보는 언론에 대해서 우려와 불만이 쏟아졌다.

한 직장인은 정부의 밀실정치도 문제지만 도농의 정보격차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언론에만 유지하는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과 국민적 메시지를 잘못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주부는 최근 조갑제 씨가 "1만명을 모두 잡아들이라"고 한 발언을 들며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고 질타했다. 어른들은 물론 학생들도 언론의 편파적인 보도에 대해서 불만을 나타냈다.

 

<5월 6일 저녁 9시 20분경, 여의도 광장의 윤중로에 촛불을 든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다.>

 

인터뷰에 응한 한 학생은 학교에서 배운 현대사 과목을 예로 들며 "4.19 혁명 때 언론은 제대로 보도한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지금 와서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현재의 언론 실태를 비판했다.

한편 이번 행사를 주최한 이명박 탄핵 범국민운동본부는 '정치선동'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신경을 쓴 듯 보였다. 며칠 전 청계 광장에서의 행사와 달리 정치적인 구호를 외치지 않고 침묵과 애국가, 촛불만을 가지고 행사를 진행했다. '조아세' 등 시민단체나 각종 정치 세력들이 호기를 틈타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는 팜플렛을 배포했지만, 이로 인해 주최측과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진행자의 선창에 맞춰 따라 한 구호는 "농부 아저씨들, 우리가 지켜드리겠습니다"나 "어른들이 미안합니다"와 같은 메시지뿐이었다. 이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없지는 않았다. 인천 용현동에 사는 안형남 씨는 "이곳에 나와서 어떤 방식으로든 의사를 표출하는 행위 자체가 정치적인 행동인데 너무 몸을 사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직장인 박 아무개씨 역시 "메시지가 없는 행사라 밋밋했다"는 평이다.
세 번의 운집, 만 명이 넘는 행렬에 혹자는 냄비와 월드컵을 떠올렸다. 월드컵처럼 집회를 즐기기 위해서 참여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고, 다른 건수가 터지면 곧 묻힐 거라는 비관적인 이야기도 많았다. 하지만 인터뷰에서 만난 고등학생의 말처럼 쇠고기 문제는 아무리 양보한다고 해도 생명과 건강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쉬이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현장의 중론이다. 그 중에서도 한 시민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냄비가 끓더라도 이번에는 좀 제대로 끓여보자!"


<한 어린이가 엄마와 촛불을 들고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여의도 광장에서는 어린이를 데리고 오거나 심지어 아기까지 업고 온 엄마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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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5-07 0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학생들 인터뷰 내용 읽으며 눈물났어요~~ 아침부터 찔끔거리며시작하는군요.
국민의 우매화 정책은 세월이 흘러도, 세상이 변해도 집권자들이 즐기는 정책인 듯...
국민의 생각이 정책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는 세상은 그리 어려운 것인가!
알만한 분의 실명이 반가웠어요~~~~~

승주나무 2008-05-08 22:38   좋아요 0 | URL
네~ 그 분밖에 실명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요~ 그 분한테 무척 감사한 일이죠^^

Jade 2008-05-07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천에 사는 안형남씨와 직장인 박아무개씨....ㅋㅋ

승주님 기사를 보니 더 절실하네요.
"우리가 나설정도면 심각한거다"란 말이...
예전 우석훈 강연에서 "중학생들이 나오면 어느 정권이든 뒤집어지게 되어있다"라고 한 말이 기억나네요 ㅎㅎ


승주나무 2008-05-08 22:38   좋아요 0 | URL
"우리가 나설정도면 심각한거다"
결국 이게 메인 제목으로 됐더군요^^;
 

새벽3시에 글쓰기를 시작했다.
매일 그러는 것은 아니고,
띄엄띄엄 일기처럼 쓰는데,
생활하다 보면 하루에도 수십 개의 단상과 감상이 지나가기도 하고,
격정이 치올라오기도 한다.
아침잠이 많은 나이지만, 새벽3시의 기운은 빼앗기고 싶지 않다.
새벽3시에 글을 올리기 위해서는 새벽2시 정도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길게 가야 1시간을 넘기지 않아야 다음날 지장이 없다.
새벽3시만으로도 충분히 지장이 있다.
앞으로 새벽2시에 글을 올릴 수도 있지만,
새벽3시가 주는 영감을 그대로 살리면서 제목을 바꾸지 않을 계획이다.

어떤 글이든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 이유는
독서량에 비해서 배출량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3년간 미친 듯이 신문스크랩을 했는데,
그때 3만건의 기사를 스크랩하는 동안 나의 글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은 어떤 특정한 주제나 뚜렷한 형상(책 제목 등)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것보다는 '접속'이라는 의미가 강했던 것 같다.
내가 책을 읽는 내용은 대체로 나의 생활과 관련된 내용이 많고
나의 풀리지 않은 어떤 주제에 대해서 생각지도 않은 도움을 주는 경우도 많다.
책을 읽을 때는 접속해 있는 상태여서 나의 마음 속에서 어떤 답이 무작위로 떨어져 나오는 경우도 있다. 한동안 그 답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고민하다가 또 다시 우연히 그것이 맞아들어가는 상황을 겪어보면 마치 내가 '신탁'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글은 어떤 틀이 있어서 그 틀을 중심으로 내용을 조합하고 완성하려는 자동시스템이 갖춰진 것 같다. 하지만 창조적인 글을 쓰고 싶을 때 이런 시스템은 죄악과 같다. 나의 글쓰기는 이를테면 이 자동시스템을 교란시키기 위함이다. 자동시스템은 진화하면서 스스로를 업데이트하고 나의 교란작전도 업데이트를 거듭한다. 이렇게 아귀다툼처럼 교란이 펼쳐지지만 '접속'이라는 공통분모 덕에 엮이게 된다.

한동안 인문사회 에세이를 읽다가 멜기세덱 님의 고마운 제안에 따라 김유정문학기행을 하면서 김유정을 다시 한바퀴 돌았다. 소설만 전집으로 돌았는데, 새로이 깨달은 바가 많았다. 다시 리뷰를 쓴다면 김유정의 도시적 면모와 치열한 현실저항 의지를 담아보고 싶다. 김유정이 준 선물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나에게 문학적 관심을 환기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오덕 선생의 유고집을 보고 이원수 선생의 동화책과 동요집을 하나 샀다. 몹시 기다려진다. 이오덕 선생에 의하면 내가 어릴 적 썼던 동시는 어른의 흉내를 낸 몹쓸 동시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래서 나의 꿈이 하나 생겼는데, 동시를 써보는 것이다. 나의 꿈은 미처 써보지 못한 동시를 쓰는 것이다. 또 멜기세덱의 도움으로 백석의 새로운 책을 구하게 되었다. 멜기세덱 칭찬을 오늘 많이 하게 되는데, 멜기세덱이 없었다면 나는 여태 사회과학 서적이나 인문학 서적을 뒤적이며 사회에 대한 갖은 불만만 토해냈을 것이다. 내가 문학을 읽는 이유는 나의 세계를 갖추기 위해서다.

나의 세계를 갖추기 위한 첫 번째 과제는 선순환을 만드는 것이다.
먹고 싸는 순환이 있어야 숨이 유지되듯
읽고 싸는 과정이 나를 숨쉬게 할 것이다. 새벽세시라는 묘한 시간에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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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5-06 0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정한 배출량을 갖는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새벽 3시의 글쓰기 멋지군요.
좋은 친구가 님을 멋진 세계로 연결해주었네요.^^

승주나무 2008-05-08 14:11   좋아요 0 | URL
요즘은 새벽3시도 일찍 자는 편인걸요.
그놈의 술이 문제ㅠㅠ

hnine 2008-05-06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지하님의 <새벽네시>라는 시가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시인데...
이 페이퍼 아침에 한번 읽고서 지금 다시 읽어보고 가네요.
저도 새벽 시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그런가봐요.

승주나무 2008-05-08 14:11   좋아요 0 | URL
봄바람이 불어서 댓글을 제때 못 달았네요. 미안합니다.
hnine님이 소개해준 시는 꼭 찾아 읽어볼게요.
김지하 시인의 한창때가 그립군요~~ 요즘은 더욱더..
 

"그 천진난만함과 완전한 것에 이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 아이들이 끊임없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무서운 것으로 되어 버릴까!" (故이오덕 선생)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며 어버이"라는 말은 내게는 진리로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어린이날'은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시간을 내서 놀아주거나 문구점에서 선물을 사다가 바치는 날이 아니라, 어린이에게 반성문을 쓰는 날이 되어야 한다.
나는 집안에서 막내로 자라서 철이 없었는데, 지금도 철이 없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그것은 나에게 단점이기보다는 자랑이다. 어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어린이의 시체를 안고 있는 어른과, 살아있는 어린이를 안고 있는 어른이다. 자신이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알 것이다. 나의 어린이가 몇 살때 죽었는지. 그때는 어린이가 죽어야만 어른이 된다는 이상한 상상이 만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학원강사로 일하면서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을 자주 접했고 더러는 어린이들도 접했다. 이들을 접하면서 내가 새롭게 깨달은 사실은 어린이 역시 두 종류가 있다는 사실이다. 죽은 어른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는 어린이와, 살아있는 어른을 머릿속에 그리며 살아가는 어린이다.

내 마음속에 어린이가 죽는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과정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죽어야 어린이가 죽는다는 것을 안다면, 그야말로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육체적인 죽음은 맨 마지막에 찾아온다. 때로 어린이 시절부터 간직해온 꿈을 잃지 않은 어른들은 육체적인 죽음'만' 찾아오기도 한다. 그것은 사실상 살아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앞선 시대를 살다간 성인이나 지성인들은 인사치레로 어린이를 그린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 가능성으로서 어린이를 염원했다. 그들이 어린이에게 가졌던 관심은 '인간'에 대한 절실한 관심이었다.

● 천재성이란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해 이제 튼튼한 기관과 제멋대로 축적된 재료들을 모두 정리해 주는 분석적 정신을 갖춘 마음껏 되찾은 어린 시절에 지나지 않는다. (보들레르, 꿈꾸는 알바트로스)

● “대인이란 그 어릴 적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맹자, 이루하)

● 만약 너희가 어린이처럼 되지 않는다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처럼 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하다. (예스 그리스도)

● 중후한 덕을 품은 이는 갓난아이와 같으니, 독충이 쏘지 않고, 맹수도 덮치지 않으며 독수리도 할퀴지 않는다. (노자, 도덕경)

나는 이번 어린이날을 특별한 어린이날로 삼으려고 한다. 조카들에게 선물이나 사줄 걱정을 하지 않고, 나의 어린이정신은 온전한지 그렇지 않은지 살펴서 어린 시절의 나에게 배움을 얻어야겠다. 시골에 태어난 나에게는 유년시절의 원형이 남아 있는데, 그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

바닷가에서 태어난 나는 방학이 되면 아침 먹고 바닷가로 뛰어갔다. 해변에서 잘 생긴 짱돌을 하나 쥐고 썰물이 만들어놓은 신천지를 걸어서 갔다. 신천지에는 언제나 소라며 성게, 굴 같은 것이 가득했는데 점심은 그걸 깨먹으면서 해결하고 해가 빨갛게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우리 동네에는 바다의 이름이 세 개 있었는데 각각 오정께, 통밭알, 수메밑이었다. 수메밑과 오정께는 일출봉을 빙 둘렀다. 일출봉은 나에게 미지의 세계였는데, 수메밑으로 해서 일출봉을 삥 둘러서 걸어봐야겠다는 나의 꿈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출봉 뒤쪽에는 돌고래들이 둥지를 틀었다는데, 직접 보고 싶었다. 오정께는 아침의 바다였다. 물질하는 우리 엄마는 수메밑에서는 해삼물을 캐다가 오정께 옆에 있는 우뭇개에서 관광객들에게 파는 일을 했다. 엄마가 바다에 갔다가 벗어놓은 몸빼바지에서 나는 바다내음이 너무 좋아서 밤새 그것만 붙잡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바다 냄새와 엄마의 살내음이 땀내음이 함께 전해져 왔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붉혀지기도 하고 야릇한 구석도 있을 테지만, 어렸을 때는 그것을 어찌 알겠느냐. 수메밑으로는 멸치떼 같은 것들이 모래사장까지 밀려오기도 하는데, 그때는 잔치라도 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어 멸치떼를 잡아갔다. 가끔 밀물에 밀려왔다가 바위 웅덩이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어린 고기떼들을 만나기라도 하면 서너 시간은 족히 재미를 볼 수 있었다. 고기떼들은 쪼로롱 쪼로롱 떼를 지어 가다가 가끔 한번씩 몸을 비틀어서 은빛 비늘을 뽐냈다. 한번은 새끼 복어가 걸린 적이 있었는데, 뜰채로 홱 낚아채니 화가 단단히 난 듯 삐익~ 소리를 내며 몸을 한껏 부풀리는 거다. 나는 겁이 몹시 나서 물가에 던져 버렸는데, 둥둥 떠다니는 모습이 우습기 그지 없었다.
통밭알은 내가 노을바다 또는 설핏바다라고 별명을 지어 주었다. '설핏'(부사)이란 "해의 밝은 빛이 약해진 모양"을 뜻한다. 이 바다는 우리집 마당에서 올레(입구)로 향해 있었기 때문에 저녁마다 마당에 나가서 해가 떨어지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봤다. 아침바다는 이글이글 해를 팔팔 끓일 정도로 거세지만, 설핏바다는 국이 식는 모양처럼 잔잔하고 온기가 배어 있다. 그것은 물만 짰지 거의 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몰은 온갖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 어린 시절에도 일몰을 바라보는 것은 슬프기도 하고, 하루 동안 수고 많았던 해가 한숨을 쉬는 듯한 대견한 모습까지 보였다. 이것은 나의 유년의 이미지를 대표하게 되었다. 해질 무렵마다 마당에 나가서 설핏 바다에 해가 기울어지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봤으니 그러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아쉬우면 바다까지 직접 가서 수면 위로 길게 늘어져서 하늘거리는 빨간 해님을 오랫동안 배웅한 적도 있다.

이러한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마음 속의 어린이를 잃지 않기 위해서 단단히 신경을 썼다. 힘들었던 시절은 중고등학교 때였는데, 어린 남학생들의 치기를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공부를 못해서 상고를 나왔는데, 상고의 녀석들을 3년간 감당하기 위해서 나는 육두문자와 쌍욕을 거의 달고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언어가 존재를 규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말은 입에 담지도 않지만 나의 어린이가 참 힘들었을 것 같다.

어린이를 살해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당신의 어린이는 건강한지 안부를 물어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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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5-05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나 마음에 와닿는 글이에요. 지천명을 코앞에 두고도 철들지 못한 나를, 나름으론 동심으로 살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거든요.^^ 내 마음속의 어린이가 천진하고 건강하게 살도록 앞으로도 신경써야겠어요. 님 덕분에 멋진 어린이날의 의미를 새로 발견하듯 합니다!

승주나무 2008-05-06 00:01   좋아요 0 | URL
순오기 님, 감사합니다. 마음에 와닿는 글을 써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네요^^ 순오기 님이 제 글에 응원댓글을 자꾸 달아주신 덕분입니다 ㅎ

마노아 2008-05-05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 '어린이를 살해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당신의 어린이는 건강한지 안부를 물어보았으면 좋겠다.'에 감동먹었어요. 승주나무님은 시인이 되어도 좋을 것 같아요. 참으로 뜨거운 정서가 느껴져요.

승주나무 2008-05-06 00:05   좋아요 0 | URL
마노아 님, 과찬이십니다.
아는 친구가 예전에 제게 "너는 천상 산문이다"고 말했던 게 기억납니다. 시인은 동경의 대상입니다. 가끔 소설가 중에 시인처럼 멋진 문장을 구사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참 부러운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새벽세시에는 누구든 정서가 달아올라 있을 겁니다. 자지만 않는다면요^^;
 

서중석 선생과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하면서 못내 아쉬웠다.
정리한 분량도 짧지 않지만,
문맥에 따라 내용을 맞추다 보니,
문맥에 들지 못하는 내용들이 많이 실리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67년의 선거 이야기는 꼭 담아야 했던 것인데, 담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67년경부터 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베트남 파병이나 각종 차관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 선거가 엉망이 되었다.
관광버스에서 사람들을 실어 날랐고,
전국은 향락의 도시가 되었다.
서중석 선생은 그때의 선거를 최악으로 꼽았는데,
그것은 '돈으로 영혼을 산 선거'이기 때문이다.

87년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는 민주화 세력들이 분열되어
지역구도가 고착화되기 시작했지만,
67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는 2007년의 대선과 2008년의 총선에서
67년보다 더 영혼에게 미안한 선거를 남기고야 말았다.
사실 이명박의 '경제'는 어떤 경제인지 살펴 보았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BBK 스캔들은 검증의 기회를 동시에 날려버린 셈이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직이 되었으면'이라고 적은 어느 취업희망생의 메모가 떠오른다.

영혼이라는 게 뭐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오묘하지만,
그 자체로 돈이 안 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영혼이 있기에 우리는 돈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인데,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돈이 순식간에 거덜날 수도 있고, 돈이 순식간에 나를 잡아먹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돈의 처분'에 따른 것으로, 우리는 돈님의 처분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영혼을 팔아먹었을 때는 그렇게 된다.

영혼은 뚝배기 그릇이 참 어울린다.
천천히 끓지만, 한번 끓면 좀처럼 식을 줄 모르고,
오래도록 온기를 잃지 않는다는 점.
당장 효과를 보지 못한다는 점이 뚝배기와 참 닮았다.
이번에 청계천 소라광장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여러분은 냄비가 아니라 뚝배기입니다."
사실 이명박이나 한나라당은 정치선동에 의한 동원이라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그들에 대한 민심은 오래 전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오늘 아내를 위해서 한우로 만든 소고기를 넣고 미역국을 끓였다.
냄비로 끓이면 편리하지만,
뚝배기를 꺼내서 정성을 들여 끓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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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5-05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린 뚝배기로 살자고요~
부인 생일이라 미역국을 끓이신건가요? ^^

승주나무 2008-05-05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미역국 끓이기를 취미로 해서 자꾸 끓인답니다. 저도 먹을 요량으로요^^
얼마 전 처제가 곰탕을 고와 줘서 곰탕미역국을 끓이고, 정육점에서 소고기를 좀 사다가 소고기미역국을 끓였는데, 소고기미역국이 더 맛있다고 하네요.
나는 소고기 맑은미역국을 만들고 싶었으나, 초짜라서 뿌연색 미역국이 되더라구요 ㅎㅎ

Mephistopheles 2008-05-05 0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뚝배기는 절대.절대. 세재로 닦으면 안된다네요. 숨쉬는 그릇이라 틈틈히 세재가 잠입한 후 열을 가열하면 다시 밖으로 배출된데요..^^

승주나무 2008-05-05 03:38   좋아요 0 | URL
네~ 예전에 아는 선배네 집에서 좋은 사기 그릇이 왔다길래 구경갔었는데, 서제로 설거지 하는 이야기를 했더니 막 팰려는 눈으로 보더군요 ㅋㅋ
 

 








4월 29일은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4,776명의 명단을 공개한 날이다. 그 날 서중석 교수는 그 자리에 함께 해 달라는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기자와의 인터뷰 약속이 잡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 참여하지 못할 만큼 급한 인터뷰는 아니었는데 괜히 역사에 죄를 짓는 것 같아 속상했다. 서중석 교수는 전날 밤늦게 요청전화가 와서 불가피했으니 너무 괘념치 말라고 오히려 기자를 달랬다. 인터뷰는 오전에 성균관대 서중석 교수 연구실에서 진행했고, 그날 저녁 역사비평사가 주최하는 서중석 교수 강연회의 내용을 묶어 인터뷰 형식으로 재구성하였다. - 기자주

 

인간적 감화를 주는 지식인 소묘

 

성균관대 교수연구실에서 서중석 교수와 인터뷰를 했다.

 

나는 지식인의 인상적인 유형으로 두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인간적 감화를 주는 지식인이며, 둘째는 지적 감화를 주는 지식인이다. 첫째 유형에 걸맞는 인물은 스피노자를 들 수 있는데, 그의 철학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 일관된 삶의 방식에 존경을 표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철학자 러셀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의 저서 <서양철학사>에서 스피노자를 "가장 고귀하고 또 존경할 만한 대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기록하며 "지적인 면에서 그보다 탁월한 철학자가 몇몇 있기는 하였지만, 윤리적인 면에서는 그를 따를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둘째 유형에 걸맞는 인물은 '루소'를 들 수 있다. 그의 사상은 프랑스혁명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교육학이나 사회학에 영감을 준 바가 컸으나, 사생활에 있어서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자신을 통해 태어난 아이들을 모조리 고아원에 보냈기 때문이다. 물론 격변기를 살았던 그의 신상을 생각하면 봉시불행(逢時不幸), 즉 시대를 잘못 만난 탓도 있었겠지만 그가 남긴 지적 성과는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이렇게 지식인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서중석 교수에 대한 인상을 기록해 두기 위해서다. 서중석 선생은 대한민국 헌법과 같은 해(1948년)에 태어났다. 현대사의 주요한 변곡점과 마디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975년 2월 17일 석방되었고, 당시 '정치 신문'과 동의어였던 <동아일보>에서 약 10년간(1979~1988) 기자 생활을 했다. 현재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의 상임공동대표와 '제주 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의 위원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강연회에서 "역사의 방향에 맞춰서 진지하게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밝혔는데, 나는 그런 사람을 보고 있는 듯하였다. 강연을 하는 동안,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의 표정에서 현대사가 생생하게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안타까운 순간을 말할 때는 아쉬운 표정, 화가 나는 순간을 말할 때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신명나는 순간을 지나가면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것처럼 화색이 돌았다. 나는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 그와 같이 일체화시킬 자신이 없다. 그가 일궈낸 역사적 연구성과나 정치적 입장과는 무관하게 그를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갑자기 궁금했다. 현대사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동시대인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 그러면서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냉정함. 이성에도 '온기'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러한 모습이 아닐까 한다. 서중석 교수와 인터뷰를 나눈 주제는 현대사, 선거, 교과서 문제 등이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인터뷰의 내용이다.

 

서중석 교수, 성균관대 연구실에서 

 

현대사를 불편하게 보고 피하려 하는 경향 안타까워

 

개성에 다녀오셨다고 들었다. 북한의 분위기는 어떤가?

- 지난주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 동안(24,25일) 북한의 학자들과 학술토론을 했다. 남북역사학자협의회에서 남북역사용어사전을 공동편찬하기로 협의한 데에 따른 모임이었다. 모임의 성격은 민간교류이므로 남북 당국에서 막으려 하지도 않고 필요성도 느끼고 있지만 미묘한 분위기가 감지되는 것은 사실이다. 민간교류 성격이지만 사전편찬 등으로 정부의 자금지원을 받을 때는 또 다른 것 아니겠나. 북쪽에서는 "남쪽의 태도를 '이해'하겠다"는 입장이라는 데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 정부 또한 남북관계가 안 좋게 되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 것으로 본다. 결국 남북이 안 풀리지는 않을 거 아닌가.

 

요즘 드라마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사와 관련된 책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다. 반면 현대사에 관한 책은 너무 적다. 그 이유가 뭐라고 보는가?

- 독자들이 고대사나 조선사는 좀 친근함을 가지고 접근하지만, 여기에는 일종의 '보상심리'가 작용하지 않나 생각한다. 국제적으로 대단한 영향력을 보였고 강토를 넓혔다는 주장들은 일반인들에게 고대사에 대한 흥미와 유혹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부정확한 내용이나 과대하게 포장된 부분이 적지 않다. 조선사도 마찬가지로 왕실의 이야기나 애정관계, 권력투쟁을 주로 다루며 대중의 흥미를 유발하지만 일반 서민의 모습이 그 안에 얼마나 담겼는지는 의문이다. 이것을 보면 대중들이 현실과 관계있는 것을 고민하기보다는 그것을 피하려는 인상을 주는 것 같다. 그것은 우리가 일제시대에 최초로 나라를 빼앗겼고, 6.25로 최초로 분단현실을 맞은 것과도 상관관계가 있다고 본다.

 

나라를 빼앗긴 것이 비단 일제시대만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삼전도 굴욕에서 보듯이 청나라에게 항복한 경험이 있으며 삼국시대도 일종의 분단현실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 삼전도 굴욕사건을 예로 들면 청나라는 곧바로 철수하고 '조공형태'로만 지배관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빼앗겼다기보다는 일종의 외교관계의 재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시대 역시 엄밀한 분단국가가 아니라 역사가 통합ㆍ진전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분단이라고 볼 수는 없다.

 

사람들이 현대사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수강신청률 같은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근현대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때문에 자기 자신조차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데, 이를 불편하게 보는 시선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뭔가 잘못했다는 자괴감 같은 거다. 그것은 현대사의 부정적인 면이 너무 과장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사를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분명히 사회ㆍ문화적인 면에서도 발전하고 있고 동태성ㆍ능동성ㆍ활기가 분명히 포착되는데, 이런 점이 부각되지 못한 점이 안타깝다. 예전에 강의를 받던 학생이 "현대사는 고통과 비관에 차 있는 것 같다"고 한탄을 하는 말에 충격을 받았던 경험이 있다. 지금도 강의당 학생 수는 좀 줄었지만 꾸준히 등록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현대사 시험을 보고 나면 성적이 참 좋지 못하다. 그것은 초중고등학교 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온통 박정희 찬양만 들어서 객관적인 관점으로 현대사를 바라보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 크다고 생각한다. 교육이란 결국 반복효과 아니겠는가. 그런데 현대사 강의에서는 이제까지 들어서 알고 있는 것과 거꾸로 된 것을 일러주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거다.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가 너무 크거나, 내가 너무 현대사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학생들을 짓누르는 면이 있다. 때문에 나는 학생보다 오히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수를 하는데, 골자는 교사들이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면에 비중을 두어서 학생들의 기를 펴줘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을 전달해주는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 교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수를 가 보면 "남북관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같은 질문들만 해서 토론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내가 무슨 예언자인가? 그런 걸 알게.

 

서중석 교수, <역사비평사> 주최로 열린 <풀로엮은집>의 대중강연에서 

 

새역모 교과서 채택률은 저조하지만 대중서는 반향 엄청나 

 

교사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묻겠다. 이번에 새역모가 출판사를 지유샤(自由社)로 바꿔서 문부과학성에 검정 신청을 했고 신청이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만약 내년 3월에 검정에 합격하고 4월에 채택전이 시작되면 또 시끄러워질 것 같다.

- 새역모가 내홍을 통해 두 파로 갈라진 것으로 안다. 그것은 미국에 대한 입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거기도 책을 팔아야 한다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수요자가 거부감이 일어나지 않게 이번에는 더 부드럽게 만들 거라는 말이 들린다. 내용이 달라지고 좀더 교묘해질 것으로 예상한다. 사실 이전 교과서는 내용에서 문제가 많고 독자들에게 극단적인 주장을 강요한 측면이 없지 않다. 교과서 치고는 얇은 두께인 데도 불구하고 러일전쟁에서는 무려 4쪽을 할애하였고, 소화천황에 대한 내용도 불필요하게 길다.

2001년도에는 0.03%, 2005년에는 0.4% 정도로 미미한 수치이지만, 이 수치에 안심하기는 이르다. 새역모의 위상을 생각해 보자. 일본 자민당 의원의 다수와 민주당의 상당수가 사실은 새역모 교과서와 사관을 똑같이 한다고 보면 된다. 새역모의 일반용 단행본은 넉달만에 50만부가 팔렸다. 그것의 만화판은 더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것은 일본 대중이 군국주의 사관에 호응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시장에서의 성공과 대중의 지지, 정치세력으로서는 의회의 다수파가 우군이 받쳐준다는 것이 새역모의 실상인데 0.4% 채택률로 위안을 받을 수 있겠는가.

 

이명박 대통령은 22일 ‘일본에 과거 사죄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대일정책을 선언했다.

-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문제가 생긴다면 그 태도를 바꿀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실 최근의 대통령들은 처음에는 모두 그렇게 시작한 거 아니냐.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일본과의 협력·우호를 강조했지만, 과거사와 관련된 일본의 망언이 나오기가 무섭게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는 강경 발언을 했고, 김대중 정부는 ‘21세기 한·일 파트너십 선언’을 통해 조심스러운 출발을 했으나 교과서 파동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했다. 노무현 정부 역시 초기에는 사상 처음으로 양국 정상 셔틀회담이 마련될 정도로 좋은 분위기를 유지했지만 독도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여론이 악화되자 단숨에 일본과의 ‘외교전쟁’을 거론하는 단계까지 갔다.) 노무현 대통령의 예만 들어도 2005년 86돌 삼일절 기념사에서 역사 문제에 대한 단호한 대처를 약속했고, 정부는 ‘외교 문제보다 독도 문제를 상위개념으로 두겠다’고 정책 전환을 선언하는 등 능동적인 자세를 보이면서 지지가 올라갔거든. 때문에 일본에서는 정략적이라고 들고 일어난 것이다.

 

사람들이 과거사를 말할 때는 독일과 일본의 예를 든다. 독일의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해달라.

- 일본 대중들은 자신들이 침략을 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참화'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누구나 자기가 당한 것을 오래 기억하는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본에 대한 제재를 제대로 못하고 오히려 육성해준 것이 지금까지 역사관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독일 역시 나치에 협력한 세대들은 반성을 안했다. 하지만 68혁명을 주도한 진보적 학생을 중심으로 독일에서는 자기반성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다. (올해는 68혁명 40돌 되는 해이다.) "희생자의 편에서 역사를 보아야 진실이 보인다. 우리 아버지, 부모 세대 잘못을 반성하자"는 주장이 공감대를 얻었고, 스스로 반성하고 후학들을 가르침으로써 잘못을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 무척 노력을 했다. 독일 총리가 희생자에게 사죄를 하거나 엄청난 비용을 관련 사업에 후원한 것은 본질이 아니다. 독일의 시민과 학생, 청년 사이에서 진정으로 우러나는 반성이 있었다. 이것이 중요한 사실이다. 지금도 독일에서 과거사와 관련한 세미나가 있을 때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듣는다. 일본의 경우는 어떤가 하면 작년에 의미 있는 전시회가 있었다. 1923년 9월 1일 간토대진재(관동대지진) 학살사건(일본 정부에 의해 조작된 유언비어에 의해 살인자와 약탈자로, 강도와 성폭행범으로 몰린 재일조선인들이 일본 경찰과 자경단들에 의해 6천여 명이나 학살되었던 사건) 84주기 전시회할 때 수십일간 전시회를 열었지만 그곳을 방문한 시민들은 많지 않았다. 이 대목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을 '국민성'의 차이로 볼 수 있는가?

- '국민성'으로 접근하면 결정론과 흑백론에 잘못 빠지기 쉽다. 그보다는 시민의 의식이 얼마나 성숙했는가 하는 차이가 큰 요인일 것이다. 일본 시민사회는 여전히 부국강병의 사고가 만연해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현재까지 아직도 천황제에 대한 비판의식이 없는 것 같다.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고 청산하는 계기가 마련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고 지금은 너무 늦어버렸다. 한국은 활기라도 있는데, 일본은 그게 없다. 무엇보다 자기 사회를 비판하는 사람을 외면하는 사회에서는 건강한 시민의식이 자라나기 힘들다.

 

그래도 68혁명의 대표지성인 샤르트르가 일본에서 강연을 할 정도로 지적인 분위기가 무르익었고(이 강연은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라는 걸작으로 출간됐다) 전공투 세대가 활약하지 않았나?

- 전공투의 활약은 평가할 만하다. 미일신안보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1960년 기시정권을 무너지게 한 주역들이다. 하지만 1970년대 엄청난 속도로 경제 발전을 이룩하면서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했다. 일본은 당시 '경제동물'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즉 도덕성, 가치관, 민주주의, 과거사와 함께 이뤄낸 경제발전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90년대의 '잃어버린 10년'을 계기로 일본인의 의식이 멈추고 보수화ㆍ우경화로 나타나고 말았다. 과거사 반성은 더욱 약화됐으며, 고이즈미가 신사참배를 공약으로 내세웠을 때는 절정에 달했다.

 

이명박 정부 역시 '경제살리기'에 치중하고 있어서, 우리나라도 10년 후에 그렇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 우려된다.

- 우리나라 역시 삶의 질은 따지지 않고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을 펼쳐 왔다. 이렇게 가치관 없는 발전을 이룩하면서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하지만 일본과 한국은 크게 다른 점이 적지 않다. 일본 보수세력은 일본인에게는 매우 긍정적으로 보인다는 점, 에도 정부와 도쿠가와 막부, 30년대 군국주의 침략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역사관이 일본인에게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은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정권을 비판적으로 보는 측면이 많다. 말뿐 아니라 몸으로 저항하다가 다들 감옥소 갔다온 역사가 있지 않은가. 나는 우리 역사를 그렇게까지 비관적으로 보지는 않지만, 그렇게 볼 만큼 나쁜 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서중석 교수, 합정역 근처 풀로엮은집 강의실에서 

 

진보세력조차 현대사 공부 너무 안 한다.

 

선거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선거의 결과를 어떻게 보나?

-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막판에 혈전 비슷하게 나타났다. 민심 동향이 달라진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가장 우려되는 점은 역사상 최하인 50%의 투표율이 안 되었다는 점이고, 특히 젊은층이 투표를 하지 않았다는 점은 두고두고 뼈아프다. 서울ㆍ경기권에 사는 젊은이 2~3%만 투표했어도 한국사회가 더욱 동태적으로 되고, 국회가 논의의 장이 되었을 것이다. 정치권의 판도와 양상이 달라질 수 있는 득표율이었는데 참 아쉽다. 이 역시 현대사의 역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번 선거에도 '현대사의 역설'이 작용했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 보수세력은 젊은이나 여성, 노동자 등이 투표장으로 오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그들이 어디에 투표할지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선거연령의 변천으로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 남조선 과도입법부에서 보통선거법을 통과시켰을 때 이승만은 선거연령을 아주 높여 놨다. 피선거권을 25세, 선거권을 23세로 규정한 것이다. 미군정이 이 법안을 보고 무척 놀랏다. 이건 안 된다. 요새 이런 나라 없다고 설득할 정도였다. 당시 유엔감시위원단의 선거방식을 담당한 대표국가는 프랑스였는데, 프랑스 대표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18~20세에서 선거권이 정해지는 데, 이러한 '터무니없는' 선거법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3월 중순 발표된 보통선거법에 의하면 선거권은 21세, 피선거권은 23세가 되었다. (대한민국 유권자로서 프랑스 대표에게 감사(?)한다) 선거권이 20세로 낮아진 것은 그로부터 12년 후인 1960년대였다. 여기서 또 1년이 낮아지기 위해서는 40여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이렇게 수십 년 동안 싸워서 얻어낸 선거권 연령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투표하지 않았다. 이것이 현대사의 역설이 아니고 무엇인가?

 

<선거이야기>에서는 역설적 현상, 또는 '이성의 간지(奸智)'라고 표현했는데, 다른 역설도 몇 가지만 소개해 달라.

- 지방자체제, 정당제, 공천제를 소개하면 될 것 같다. 52년 정부통령 선거 당시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이승만의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국회에는 이승만의 반대세력이 득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내각책임제가 민주주의의 보증수표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이승만이 짜낸 묘안은 자유당을 만든 것이다. 자신에게 힘을 실어줄 집단을 만든 것이다. 이를 관제여당이라고 하는데, 박정희의 공화당,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이 대표적인 관제여당이었다. 최초의 공천제 역시 그 의도가 불순한데,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을 허용할 것"이라는 개헌 각서에 사인하는 사람에게만 공천을 준 것이 최초의 공천이 된 것이다. 지방자치선거는 더 기가 막히다. 이승만은 처음에는 지방자치 제도 자체를 거들떠도 안 보다가 전쟁 중인 1952년에 뜬금없이 지방자치선거를 했다. 당시 국회의원들은 압도적으로 이승만을 반대했는데, 이승만은 "읍면도의원도 민의를 대변하는 선량이다"고 주장하며 지방의원들을 자신의 권력유지용도로 활용한 것이다. 이처럼 의도는 나빴지만 결과적으로 이 제도가 한국정치에 공헌한 바가 크다. 하지만 역설적인 변화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성장하지 않는 한 우연적일 수밖에 없다.

 

이번 두 번의 선거로 인해 선거제도 자체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선생님의 <선거이야기>는 그렇지 않다고 하고 있는데, 간단히 소개해 달라.

- 4.19혁명이 일어난 과정을 살펴 보자. 먼저 3.15 부정선거가 있었다. 그에 대항해 3월 학생운동이 바로 일어났고 100명의 희생자가 생겼다. 이것을 발화로 해서 4.19혁명이 일어난다. 이로 인해 결국 이승만이 퇴진하게 되었다. 결국 '선거'는 4.19를 이끌어낸 동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0.26 역시 사건 자체보다는 문맥을 살펴야 한다. 10.26 직전인 1978년 12월 12일에 선거가 있었는데, 야당 득표가 1.2% 앞섰던 것이 결정적이다. 이런 민의를 의식해서인지 1978년 대통령 취임식에는 세계 어떤 나라도 축하사절을 보내지 않았고, 일본 역시 비공식 사절단만 12명 보냈을 뿐이었다. 80년대는 더욱 빠르다. 살얼음같은 서울의 봄이 12.12와 5.17에 의해 좌절되었지만, 85년 2.12총선에서는 세상이 뒤집어지려는 분위기를 누구나 감지할 수 있었다. 여당인 민한당 의원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며 한 한민당 후보는 "'이거 큰일 났다. 이거 큰일 났다'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고 했다. 2.12총선은 그야말로 폭풍이 불어닥친 선거였다. 이로 인해 6월 대항쟁으로 나아가는 대도가 뚫린 것이다. 당시 정치인들은 이런 민의를 잘 대변했다. 정치는 이런 거다 하는 기백이 있었다. 그래서 이승만과 박정희를 마지막 코너로 집어넣을 수 있었다. 조봉암의 경우 한때 주먹으로 날렸다는 시라소니조차도 무서워서 곁을 떠날 만큼 배짱이 있었다. 그 배짱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있을 때, 민중과 일체될 수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런 정치인을 찾기가 쉽지 않다.

- 정치의 국면으로 따지자면 한국정치는 갈 데까지 갔다. 야당은 지리멸렬하고, 지금 시류에 맞지 않은 주장들을 하는가 하면 아마추어리즘을 노출하곤 한다. 무엇보다도 진보세력조차 현대사 공부를 너무 안 하는 것 같다. 만약 그들이 현대사 공부를 조금만 했더라면 이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민노당과 진보신당이 총선 직전에 분열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면 그들을 '학습미달 정치인'이라고 부르면 되겠다.

- 학습미달이 맞다. 이런 나쁜 정당정치는 고통 속에서 정리될 것이다. 박정희 18년 정치가 부재했던 것이 가장 큰 영향일 것이다. 정치부재의 사회, 중앙에 의한 중앙정치의 사회. 박정희 시절은 현대사의 허리에 해당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는데, 성장제일과 근대화 지상주의에 빠지는 등 그 시절이 보인 패착이 주는 그림자가 매우 길고도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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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8-05-02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중석 선생님 얼굴이 너무 붉게 상기되셨어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술 한잔 걸치신 줄 알겠어요 ㅎㅎ

승주나무 2008-05-03 15:07   좋아요 0 | URL
서중석 선생님이 현실에 대해서 갖는 애정으로 읽혔어요^^
기쁨과 슬픔을 어떻게 이렇게 일체화시킬 수 있는지~~~
나도 나이가 들면 저런 표정 만들 수 있을지 궁금해요^^

순오기 2008-05-05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감사^^
우리딸이 대학입학 후 두달만에 집에 와서 하는 말이 '애들이 현대사를 너무 모른다.'는 한탄이었어요.ㅠㅠ 이 글을 읽으니 훨씬 심각하게 느껴집니다. 이 책 방학에 오는 딸을 위해 찜합니다!

승주나무 2008-05-03 15:07   좋아요 0 | URL
저도 2000년까지 현대사의 현 짜도 모르는 형편이었어요. 현대사는 자기가 스스로 찾아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영원히 멀어지는 것 같아요~

마노아 2008-05-03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중석 선생님은 지식인의 인상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요? 인터뷰 잘 읽었어요. 오늘 근현대사 시험 채점했는데 가장 점수가 좋은 반만 평균 59점이었고, 2등반이 47점이었어요.
수능에서 선택과목으로 채택한 학생들이 한 반에 다섯 명 정도인데, 그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관심이 전무하다고 봐야 하더라구요. 가심이 쓰렸습니다. ㅜ.ㅜ

승주나무 2008-05-04 02:49   좋아요 0 | URL
당연히 인간적 감화를 주는 지식인상이었습니다.
<선거이야기>는 그런 특징이 잘 나타난 책인 것 같습니다. 일관된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도전일 텐데, 그것을 잘 이겨낸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몹시 기분이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