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슬픈 이야기.

아내의 절친한 친구가 영문도 모르게 자살하고,
아버지는 기약도 없이 돌아가시고,
얼마 전 내게 무척 잘해주던 사촌형님이 피살됐다.

근 1년 사이에만 벌써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죽음이 세 번째다.
더 안타까운 사연은
두 딸과 형수를 남기고 떠났다는 사실과
그보다 더 말못할 안타까운 사연 때문이다.

형님의 죽음은 극단적이며 우발적인 면이 적지 않지만,
살펴보면 매우 구조적인 데서 기인한다.
카지노 판촉팀에 근무한 형님의 업무 환경을 안다면,
유수의 관광호텔에 떡 하니 들어가 가족들을 자랑스럽게 만들었던 기억이 몹시도 초라해진다.
자체적으로 수입이 안 되기 때문에 직원들은 영업을 뛰어야 한다.
일본의 도의원 아들이며 중소기업을 운영한다는 그는
사촌형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3차에 이어 4차에 가자는 무리한 요구를 받아줄 수 없어서 호텔로 안내하려 했던 형의 태도에
수가 틀렸는지 딴지 걸 곳을 찾았겠지.
그런데 옷이 몸에 닿았는지 어쨌든 말도 안 되는 핑계로 화를 버럭버럭 냈다고 한다.
고개를 숙이고 정중히 사과를 하는 형님은 그야말로 단말마의 비명을 저질렀다.
그가 건달처럼 구둣발로 형님의 머리를 위에서부터 찍어누르는 통에
형님은 두개골이 아스팔트에 심하게 부딪히며 뇌진탕을 일으켰고
일 주일간 생사를 왔다갔다 하다가 끝내 명을 달리했다.

화가 나고 안타까운 것 세 가지
1. 경찰은 이 사건은 '과실치사'로 몰고가기 위해 목격자들에게 유도심문을 하거나 현장검증을 게을리하는 등 직무유기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특히 일을 크게 만들기를 꺼려한다.
2. 일본인은 세를 믿고 있는지 몇 억 정도의 목숨값을 내놓고 얼른 이 일을 처리하고 싶어하며, 처리되는 대로 본국으로 떠나고 싶어한다.
3. 유족은 살인범의 처벌을 원치 않으며 적절하게 합의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

시민기자로서 지금이야말로 사건을 낱낱이 취재해서 고발을 해야 하건만,
나는 비겁하게 이 일을 다루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그냥 여기서 비겁하게 끄적일 뿐이다.
이 사건이 얼마나 중대한지 그들이 알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을 가르치고 싶지도 않다.
유족의 뜻이 그러한대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을까?
"돈으로 살인을 사는" 광경을 목격하니 토할 것 같다.
이 더러운 것들을 다 게워내야겠다.

거지같은 자식들~
형님..잘 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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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죽음의 풍경
    from 승주나무의 책가지 2008-05-20 17:44 
    죽음에 관해 친근한 감정을 느끼는 때가 있다. 이때는 자살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들고, 매우 묘하다. 이것은 격정의 풍랑을 견디는 제주인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는데, 그들은 죽음을 초월한다기보다는 죽음을 일상화시키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다. 며칠 전부터의 경험을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불의의 사고로 사촌형은 영안실에 고이 누워 있었다. 흑빛 얼굴을 하고 사촌형의 영정에 절을 하는데, 사촌형의 형님이 맞절하고 나서 한
 
 
마노아 2008-05-20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이 너무나 가까이에서, 또 빈번히 발생했군요. 게다가 목숨에 값이 매겨져 덮어지는 현장을 보아야 하다니 가혹하고 기막힙니다. 약 20여 년 전 이모는 연쇄 살인범에게 피살되셨어요. 놈은 사형당했지만 반성의 한마디도 남기지 않았어요. 오늘 낮에 문득 이모 생각이 났었는데 여기서 이 글을 보니 착잡한 마음이 더 커집니다. 승주나무님을 비롯해서 유족들이 많이 힘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목숨이 가벼워지는 것은 결국 사람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바람돌이 2008-05-20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마음이 많이 아프시겠다는 말로는 제대로 그 맘을 다 표현할 수 없을 것 같고... 사람이 사람을 존중하는게 그렇게 어려운건지.... 기운내시라는 말로만으로는 안타깝기만 합니다. 형님의 명복을 빕니다.

순오기 2008-05-20 0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이 신새벽에 이런 기사 읽었으니 어쩌누~~~ ㅠㅠ
산자는 산자대로 가야할 길이 있으니... 그 유족들이 저럴 수밖에 없는 심정도 이해는 갑니다. 따지고 들어봤자~~~ 게란으로 바위치기일테니까, 애들 장래를 담보잡힐 수 없는 엄마 마음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들어요.ㅠㅠ

마늘빵 2008-05-20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개XX들이 너무 많군요. 아 화난다. 2000년쯤 제 후배가 군대에서 '자살'이란 이름하에 의문사 '당한' 일이 생각나는군요. 그때도 군부대가 그따위 짓을 저질렀죠. 에혀. 욕이 아까운 새끼들 같으니.

하늘바람 2008-05-20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
뭐라 드릴 말이 없네요 마치 전국 뉴스를 들은 기분이에요.
참~

2008-05-20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5-20 1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비돌이 2008-05-20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 사람은 살아야지, 라고 하는 이 무지막지한 이데올로기 앞에서 일개인이 저항한다는건 힘든 일이죠. 막말로 죽은 사람만 개죽음 당한거지. 고인의 명복을 빌고, 승주나무님도 기운차리시기 바랍니다.

시비돌이 2008-05-20 11:34   좋아요 0 | URL
근데요. 과실치사라도 형은 사는 거 아닌가요? 합의 여부가 형의 감량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어두요.

승주나무 2008-05-20 11:45   좋아요 0 | URL
유족 측이 탄원서를 제출하면 집행유예가 확정될 수 있다고 하네요~
그 점이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제 친형이었다면 이렇게 안 했을 텐데...

승주나무 2008-05-20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 님//마노아 님에게도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마노아 님의 말씀을 들으니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말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목숨값보다 더 소중한게 뭔지..
바람돌이 님//위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단한 삶을 내려놓았을 형님보다 제가 나을 게 있는지 회의가 듭니다.
순오기 님//신새벽에 슬픈 소식을 전해드려서 저도 안타깝습니다. 좋은 소식, 즐거운 소식을 많이 전해드려야 하는데, 세상이 그렇게 하도록 하지 않네요.ㅠㅠ
아프 님//글로벌한 개XX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소시민들이 무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하늘바람 님//제주 뉴스에서 잠깐 다뤘답니다. 요즘 일본 교과서 어쩌고 하는데, 일본 사람들이 참 밉다는 마음이 자꾸 드네요.
시비돌이 님//그래도 저항하지 못한 자의 비굴함은 남아서 오래도록 저를 괴롭힐 것 같습니다. 시비돌이 님의 위로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stella.K 2008-05-20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가 이래저래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구나.
그래도 밝은 모습 잃지 않는 너를 보면 참 기특하단 생각을 해.
너의 마음 이해할 같다. 힘내라.

승주나무 2008-05-20 16:13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누나~
이렇게 슬픈 일을 전염시키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속셈이 아닐까 해요. 혼자 견디기 어려워서 이렇게 말을 하면 나는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다는 순전한 이기심이죠~ 제 사연을 들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불편하게 해드려 미안하구요^^;

이리스 2008-05-21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어찌 이런 일이.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저따위 짓을 한 놈은 저따위 짓의 곱배기 일을 사는 동안 당하리라 생각합니다.

승주나무 2008-05-22 10:52   좋아요 0 | URL
그 놈이야 어떤 식으로는 대가를 치르겠지만, 꼭 그렇지도 않을 거란 불안감이 들기도 합니다. 워낙 그런 놈들이 많아서요..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다.
아니면 원래 이상한 사람이었는데,
그때 비로소 정체성이 찾아지는 건지 모르겠다.

어제 시비돌이 님이 택시까지 마중나와주셨던 것까지는 기억합니다.
그 후로 침대에서 몇 번 떨어지긴 했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하이드 님~
서재질도 하고 좀 그러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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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5-16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고로 하이드님의 요즘 서재질 패턴은...
롯데가 이겼을 때 페이퍼가 올라오더라...입니다.

승주나무 2008-05-16 14:04   좋아요 0 | URL
아~ 글쿤요.. 당장 수배해야겠따~~
저도 10년 전 롯데가 코리안시리즈 준우승할 때부터 롯데 팬이었어요 ㅋㅋ

Jade 2008-05-16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승주님의 변신하는 모습을 한번도 본적이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승주나무 2008-05-16 14:04   좋아요 0 | URL
제이드 // 정도의 문제가 아닐까..
술 먹으면 더 한다는 거겠지~~요ㅋㅋ

시비돌이 2008-05-16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쉬셨나요? 근데 술은 승주나무님이 드시고, 절 만나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고
절 이상한 사람으로 모시는 건가요? ^^

승주나무 2008-05-19 22:03   좋아요 0 | URL
제주도에 급한 일이 생겨서 다녀왔습니다. 페이퍼나 댓글을 일찍 남겼으면 좋았을 텐데, 이제야 남기네요.
시비돌이님은 연금술사나 산파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잘 자고 있는 나의 자아를 깨웠으니까요 ㅋㅋ 실은 제가 제 기분에 취한 것이지만요 ㅎㅎ

웽스북스 2008-05-17 0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봤는데 ㅋㅋㅋ

승주나무 2008-05-19 22:03   좋아요 0 | URL
웬디양 님~ 쉿!!
 

그냥 평소처럼 다음에 접속했다.
다음에서 타먹은 캐쉬라고는 1만원이 전부였는데,
블로그에서 애드클릭스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클릭을 할 때마다 몇 십원에서 몇 백원 정도씩 올라가는데,
10만이 좀 넘는 역대 회원수에 비해서 좀 작다 싶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갑자기 10만원이 떡하니 생긴 거다.

떨어진 돈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 다음에서 잘못 입금한 게 아닐까?
10만원이 들어온 이유는



얼마전 썼던 블로그 기사 때문이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블로그 특종상!!!




아프 님과 멜기세덱 님과 여의도 촛불문화제 현장에 가서
촛불 안 들고 딴짓만 했는데,
예를 들면 아프 님한테 자리 챙겨달라고 하고 앞줄부터 인터뷰 대상을 물색해서
들이대는 일 등이다.
거기서 기웃거리다 안희태 기자의 문자를 받고,
용달차 위에 올라가 사진도 찍어 보고 현장교육도 받았다.
미안한 말이지만, 촛불만 들고 있기엔 너무 아까운 순간들이 많았다.



쇠고기 청문회가 있던 날 블로거기사 메인에 올라가 조회수 7만여 회와 추천 232회, 댓글 509개와 엮인글 18개..
소박한 블로그를 꾸려오던 내게는 처음 있는 일.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간만에 자랑질하며 소리질러 본다~ 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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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8-05-16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촛불 안 들고 딴짓햇다구? 너 답다. ㅋㅋ

승주나무 2008-05-16 14:02   좋아요 0 | URL
네~ 그림이 보이시죠 ㅋㅋ

순오기 2008-05-16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 추천수 232 중에 제가 누른것도 하나 있어요~ 메인에 떴길래 들어갔었죠!^^
축하합니다~~~~ 수고의 댓가에요!!

승주나무 2008-05-16 14: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의 블로그에는 언제 다녀가셨나요. 순오기 님 덕분에 상금 탔습니다^^

마노아 2008-05-16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캐쉬로 주나요 통장으로 주나요? ^^ㅎㅎㅎ
축하해요. 더 열심히 뛰라고 주는 건가봐요^^

승주나무 2008-05-16 14:03   좋아요 0 | URL
캐쉬로 주는데, 통장으로 환급이 가능합니다. 환급을 할 때는 세액공제를 합니다.
감사합니다. 현금성으로 받기는 처음이네요 ㅋㅋ

L.SHIN 2008-05-16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멋지다.
옳고 정당한 일을 하는 것에 그만한 보상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
이것을 스프링 삼아 더 멋진 기자님이 되어주세요.^^

승주나무 2008-05-19 22:04   좋아요 0 | URL
Lud-S 님//감사합니다. 스프링을 제대로 달아야겠는걸요 ㅎ

하늘바람 2008-05-17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축하드려요

승주나무 2008-05-19 22: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피노체트가 군사쿠데타로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고 신자유주의학파라고도 부르는 '시카고 보이스'(Chicago Boys)를 중용해 완전한 금산결합을 실시했다. 그 결과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이 결합해 거대한 복합투기자본이 되었지만, 마침내 1980년대 초에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2~3년 만에 GDP가 15%쯤 축소되고, 금융시스템 전체가 무너져내렸다. 결국 가장 극단적으로 시장정책을 시행했던 나라가 역설적이게도 공적자금을 대거 투입하여 은행이 다 국유화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이런 역사적 교훈을 통해서 사실상 모든 나라들이 금산분리 원칙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 한국경제 새판짜기 302~303쪽


칠레이야기의 해피엔딩은?

국유화 이후 아시아 금융위기가 났을 때 남미에서 여러 번 금융 불안정이 야기되었을 때 칠레는 영향을 가장 덜 받고 안정을 유지했다. 혹자는 이것이 1980년대 초의 끔찍한 경험으로 금융을 함부로 자유화하면 안 돤다는 걸 알게 되어 규제를 비교적 잘했기 때문이라고도 얘기한다. 단기성 국외자금 유입을 억제하기 위한 외화 가변예치의무제가 칠레가 발명한 유명한 정책상품이다.

★ 가변예치의무제
외국에서 핫머니가 급격히 유입돼 국내금융시장을 교란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마련된 장치로, 반입되는 외화의 일부를 외국환평형기금에 강제로 예치시키는 제도, 가변유치 대상은 거주자나 비거주자나 들여오는 외자로, 증권투자 또는 부동산투자 등 핫머니성 자금에 국한되고, 수출입대금 등 기업활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외자는 제외되는 게 보통이다.


가변예치의무제라..
참 좋은 제도라고 생각한다.
삼성에서 칠레까지의 거리가 과연 얼마나 될까?
칠레행 열차를 타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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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5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5-15 1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87년 민주항쟁에는 거대한 승리와 거대한 착각이 동시에 존재한다. 87년은 시민의 형식적인 승리와 노태우의 실질적인 승리를 모두 함의하고 있다. 때문에 87년을 진행형으로 보아야 하지만, 지금까지 87년을 과거형이나 완료형으로 보려는 관점들이 착각을 일으켜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우석훈 씨에 의하면 87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은 지금 아이들을 외국으로 유학보내거나 사교육 열병을 주도하는 부모가 되었다고 한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으나, 첫 술에 배가 부르다고 하는 현상. 이것을 87현상, 또는 87의 법칙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87은 박제된 현대사이며, 87 이후는 또다른 슬픈 현대사다.

2. 4.3특별법이 발의되던 2000년 벽두에 나는 제주도에 있었는데, 당시 작가들과 문학비평가 등 지식인들이 4.3의 이름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 참여했다. 4.3은 아직도 이름이 없는 상태인데, 나는 그때 4.3특별법 발의 이후에 우리들이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지 질문했으나 시원스런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4.3을 내게 처음으로 '학습'시켜주고 특별법 발의를 간절히 기원했던 선배는 특별법 발의 이후에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특별법이 통과되었으니 이제 다 해결된 거 아니냐?" 나는 참 황당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세간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4.3특별법은 아직도 보수 세력의 폐지 압박을 받고 있다.

3. 시사IN은 전직 시사저널 기자들이 사장의 편집권 전횡에 항거해 거리로 나오면서 독자들의 지지를 모아 발간한 자유언론의 완충지대다. 나는 거리에서부터 기자들을 응원했다. 극적인 과정을 통해 시사IN이 창간되는 과정을 지켜보았고, 더러는 함께 하였다. 하지만 첫 깃발만 세웠을 뿐 독자들의 염원에 대해서 시사IN은 아직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즉, 시사IN은 아직 빚을 갚지 못한 상태다.

4. 김용철 변호사는 다소 진보적이고 정론지라 평가되는 신문사를 떠돌고 있었다. 하지만 제보를 실어주는 용감한 신문사는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때 김 변호사와 그의 친구들의 시선에 시사IN이 들어왔다. 언론에 크게 실망한 김용철 변호사는 처음에는 시사IN을 특별히 보지 않았지만, 시사IN이 창간되는 과정을 듣고 제보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삼성의 압력으로 벼랑 끝까지 갔다가 독자들에 의해 구조된 시사IN의 특종으로 인해 삼성 문제는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언론사는 일제히 보도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87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된다. 뜻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삼성문제의 시작으로 보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삼성문제의 끝으로 보고 말았다. 삼성문제는 삼성쇄신안이라는 조삼모사로 일단락이 되어 쇠고기에 가려졌는데, 이 국면이 당장 어떻게 될지 바람 앞의 촛불이다.


시사인이 세 번째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 시사저널 투쟁을 첫 번째 이야기, 시사인 창간을 두 번째 이야기라고 한다면, 시사인 제2 창간은 세 번째 이야기쯤 될 것이다. 세 번째 이야기에는 '독자'가 들어가는데, 독자 대표로 회의에 참여하고 있다.
전쟁이라는 것은 냉혹한 현실이다. 전쟁의 한 줄기를 전선이라고 하는데, 전선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생 살점과 무수한 피가 희생되어야 한다. 시사저널 기자들이 거리로 나오고 독자들이 호응하면서 '전선'이 성립됐다. 기자들은 위험과 생계를 희생했고, 독자들은 십시일반으로 시간과 약간의 돈을 할애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전선은 아직 미약하게나마 유지되고 있다. 전선에서 구를 만큼 굴렀다는 내가 다시 전선으로 뛰어든 이유는 거창하게 말하면, 87법칙의 결계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서다.

천착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시대정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천착해서, 그 문제가 87법칙에 빠지지 않기 위해 바둥거려야 하지 않을까?

내가 시사IN의 세 번째 이야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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