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배달의 실상을 경험하면서, 지역뿐만 아니라 서울에도 무료배포소 사업이 활발히 전개되어야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추천도 해주세용~

 

6개월만에 배달사고만 7~8회



새벽 두시 경에 밀린 쓰레기를 버리러 밖에 나갔다가(낙향한 아내가 돌아오는 관계로) 드디어 배달원을 만났습니다.
배달원을 탓할 일은 아니지만, 우리 동네 지부에 앙금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제가 올 2월말에 이사를 왔는데,
그 사이에 7번 넘는 배달사고가 터졌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신문을 가지고 가는데 신문이 없을 때의 기분이란 -_-
가판에서도 여러 번 사보았습니다.
아예 경향을 끊을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부에 5번 넘게 전화를 해서 죄송하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본사에도 2~3번 정도 전화를 해서 본사 직원이 직접 신문을 배달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언론소비자운동한다는 사람이 조선일보나 구독하다니


집에 들어갈 때마다, 막말로 '쪽팔립니다'
조선일보 주머니가 문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나 말고 우리 집에서 경향신문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지부에 요청을 해 보았으나 난감하다는 말만 합니다.
그때 조선일부 지부에서 경향신문을 배달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오늘 배달원을 만나서 직접 부탁을 해보았습니다.
"아저씨 우리 경향신문 바구니로 바꿔주시면 안 돼요?"
아저씨의 대답에 쓰러집니다.

"세계, 국민, 경향 다 망해서 조선일보에서 다 하는 거에요. 바구니가 있을 리가 없죠."

조선에서 경향을 배달한다는 소식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지역도 아닌 서울에서 경향, 세계, 국민 등 중소신문의 지국이 망해간다는 것은 배달원으로부터 처음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조선일보가 경향, 세계, 국민 등의 신문 배포를 대행해주면서 비용을 받으니 결국 경향신문을 구독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일보를 구독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지요.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이하 '언소주', http://cafe.daum.net/stopcjd)에서는 수도권 외의 지역을 중심으로 겨레향 정론매체 취약지역을 중심으로 무료배포소 사업을 전개하고 있지만, 어제 사건 이후로는 등잔밑을 더 자세히 살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서울의 변두리이긴 하지만 화곡동 관할 지국이 망했다면 반드시 다른 자치구도 사정이 좋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향 관계자는 본사의 지국관리나 영업이 체계도 없고 두서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조선일보에게 경향신문을 받아보는 심정을 아십니까.
이거는 조선일보를 구독하는 것도 경향신문을 구독하는 것도 아닙니다.
조선일보의 약탈적이고 반사회적인 행위에 의분하면서 매달 일정액을 지불하는 처지를 아십니까.

경향신문 여러분 이 어이없는 현실을 바로잡아주시고,
그 전에 우리 집 신문주머니를 얼른 바꿔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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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룸 2008-09-18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선 완죤 공감. 다만 신문 주머니를 집에 있는 개인 주머니로 바꾸는 '적극적 바꿈'도 가능할 듯 하여 댓글 달아봅니다^^'

마늘빵 2008-09-18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집은 주머니 없이 오는데... 어디서 오려나요.

Koni 2008-09-18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었네요. ㅠ_ㅠ

하양물감 2008-09-19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집도 주머니는 안주던데요..(^^) 그나저나 저도 배달사고 한번. (이제 2달 조금 더 받아보는 중인데) 그런데요......자동이체를 신청해놨는데, 신문대금도 안 빼가던데요?? 전화를 해서 돈좀 빼가시오...해야하나...

순오기 2008-09-21 09:42   좋아요 0 | URL
3개월은 서비스 기간이잖아요.
돈 받을때 되면 알아서 척~ 빼갈걸요.^^

승주나무 2008-09-23 13:14   좋아요 0 | URL
결국 신문주머니를 걷어갔네요^^

순오기 2008-09-21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동아에서 경향도 돌리지요.ㅜㅜ
어서어서 경향 구독자가 많아져야 손해보지 않는 지국운영자들이 생길텐데~
 
엄마를 인터뷰하다

slow news가 요청되는 시대

slow와 news를 함께 쓰는 것은 언어도단이자 모순이다.
속도경쟁을 부추기는 기성의 언론들에게는 슬로우 뉴스를 기대할 수 없다. 사건이 생긴 날 저녁에 이미 뉴스의 생명이 기울어지며, 다음 날 저녁이 되면 그 뉴스는 완전히 사망한다. 
하지만 그것은 과도한 속도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관성일 뿐 뉴스란 반드시 ‘속보’라는 이미지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뉴스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성찰부재'이다. 시사IN의 1주년 기념식에 초대가수로 무대에 선 정태춘 씨는 신문을 끊은지 한참 됐다고 했다. 신문은 태교에도 안 좋기로 소문이 났고, 예술가나 학자에게도 필요악일 뿐이다. 그래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꼭 신문을 통해서 알아야 하느냐는 자조도 나온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각인된 신문은 '사기' 그 자체다. 신문은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는 척하면서도 실은 하나도 새롭지 않을 때가 많다. 신문을 한달 정도 보다 보면 지겨워서 덮어버리고 싶을 때가 많다. 신문을 놓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관성' 때문이다. 미국의 양심인 노엄 촘스키는 신문을 정의하며 "가치관과 신념, 행동규범을 간섭하면서 사회의 제도적 구조 속으로 대중들을 통합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고를 갖지 못하고 대충 현실에 영합하며 살도록 조장하는 게 신문이라는 이야기다. 예술가 같은 초감수성자들이나 지식인들이 신문을 멀리하는 이유로 충분하다.

신문을 통해 대중을 선동하고 물건을 팔아먹을 수 있다는 말은 그만큼 신문이 대중화돼 있다는 말이며 대중과 가깝다는 말이다. 때문에 관점만 달리한다면 얼마든지 대중에게 성찰적인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책을 읽을 여유가 되지 않는(사실 이것은 거짓말이지만) 사람에게는 좀 느린 속도로 걷는 뉴스가 정신건강에 좋을 것이다. 문제는 느린 뉴스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해주느냐이다. 실로 슬로우 뉴스가 요청되는 시대다.


슬로우 뉴스slow news 운동

걷기를 즐겨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걷는 것이 뛰는 것보다 속도는 느리지만 섬광같은 영감이 지나가는 속도는 뛰는 데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래서 누군가는 “걷기는 온몸으로 하는 기도요, 두 발로 추구하는 선(禪)”이라고 말했다.

슬로우 푸드는 우리 몸에 붙어서 우리 몸이 되지만,
패스트 푸드는 생김새만 음식이지 몸에 붙었다 이내 쓸려나가버리거나 몸을 괴롭히기만 한다. 슬로우를 회복하는 것은 우리 인식의 섬광과 자생적 진화를 회복할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속도가 빨라지고 기술이 발전되면서 사람들의 인식 수준은 점점 외부 사물에 의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인식의 진화는 그만큼 더뎌지고 있다. 다만 인식을 독점한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점점 불균형해져만 간다.

슬로우 뉴스는 기존의 뉴스 개념을 거부한다. 시간 개념을 완전히 거스르지는 않지만, 집착하지는 않는다.
슬로우 뉴스는 당장 클릭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곱씹으며 찬찬히 생각해볼 수 있게 한, 인터넷 기반과는 매우 이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정서는 속도가 아니라 슬로우에 더 반응하며, 속도에 환멸을 느낀 많은 사람들은 느린 것을 갈망하리라는 것을 믿는다.
이미 유통되고 있는 살아가는 이야기나 생활글, 책에 관한 글들은 슬로우 뉴스의 조건을 만족시킨다.



30년 동안 기자질을 해온 서명숙이라는 여성의 글을 읽으면서 나부터 슬로우 뉴스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제주 걷기 여행>은 저널리스트의 탈 저널리즘적 도전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이런 조용한 일탈에서 변화는 시작된다. 나는 기성 기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사를 써왔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속도경쟁을 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앞으로도 속보가 나의 기사에서 사라지는 날은 없겠지만, 조용히 반 속보적인 기사를 선보이려 한다.

만약 그것이 정말 가치 있는 행보라면 먼저 그 일을 하고 있거나 함께 하는 사람이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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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9-18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 소식을 보고 저도 이 책을 보관함에 담아놓았습니다. 멋진 행보입니다...

승주나무 2008-09-24 17:52   좋아요 0 | URL
드팀전이 응원해주셔서 힘이 나네요. 더 굼벵이가 되보도록 하겠습니다^^

2008-09-24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8-09-24 17:51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어쩐지 쌩스투가 들어왔더군요..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슬로우뉴스 첫 번째 기획으로 특별한 인터뷰를 선보인다. 인터뷰어는 당신의 '아들'이며, 인터뷰이는 아들의 '엄마'다. 지금까지 해본 인터뷰 중에서 가장 의미 있지만, 부끄러운 인터뷰가 될 것 같다. 나도 모르는 나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의 가장 오랜 증언자라면 가장 중요한 인터뷰이가 되어야 하건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인터뷰'란 '나'보다는 '우리' 혹은 '남들'에게 더 의미 있는 행위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오래도록 나에게 여운을 남길 나와 엄마를 위한 인터뷰를 슬로우 뉴스의 첫 번째 기획으로 삼은 이유다. - 기자 주


해녀 일을 하는 제주 토박이 고순자 씨(63세)는 자식 셋을 키운 평범한 어머니다. 1남4녀의 넷째 딸로 태어났지만 제주 4.3으로 부모를 잃어 어려서부터 받을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하고 그 대신 엄격한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19세에 해녀 일을 시작해 26세에 시집을 갔고, 남의 집 살이 13년 만에 집을 장만했으며, 작년에 남편과 사별했다. 인터뷰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아들이 추석에 맞춰 낙향한 13~14일 이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성산포 집과 슈퍼 가는 길목, 부둣가 해녀의 집 등지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이제까지 어떤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최초로 응한 인터뷰는 바로 아들과의 인터뷰다. 자식 키우면서 가장 기쁠 때가 언제인지 묻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아들의 생환'이라고 말했다. 어렵게 얻은 막내아들은 태어난지 3개월 만에 급성폐렴과 임파성 결핵 등 생사를 위협하는 굵직한 병마만도 대여섯 차례나 맞았다. 장기입원 등 수술을 한 것은 두 자리가 훌쩍 넘어갔다. 대학 시절 폐종양 수술을 마지막으로 병마의 기나긴 위협이 한풀 꺾였다. 이런 까닭으로 그는 아기가 자신의 눈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 항상 두려워했다고 한다. 금방 하늘나라로 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 잠자다가 내일 없어져버리지 않을까 하다가 다음날 잠에서 깨면 살아있을 때가 가장 기쁘고 뿌듯한 순간이었다"고 술회했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


▲ 어머니가 45년 동안 입고 다녔던 고무 해녀복. 해녀복은 오래 입으면 5~6년 입는데, 이 옷은 6년도 넘은 옷이다. 제주 해녀들은 모두 검은 고무옷을 입고 바다에 다닌다.


45년 해녀 인생

- 해녀 일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소라공장에서 7년 일하고 23세에 육지(제주도에서는 한반도 대륙을 '육지'라고 부른다)에서 몇 년 살다 왔지만 대체로 19세경부터다. 할머니는 가정살림하면서 해녀 일을 해도 늦지 않는다면서 그 일을 못하게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 비해서 시작이 늦었다.

- 아기를 배고 나서 물에 들면 위험하지 않나? 해녀병 같은 것은 없나? (여느 해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뇌선'이라는 약을 달고 다닌다. 식품영양사인 작은딸은 약 자체가 고 카페인이기 때문에 당장 끊으라고 성화다)
"큰 아이 가졌을 때가 한겨울이었는데 바다에 들어가니 손발이 춥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애를 가지면 바다에 잘 안 들어갔지만, 그때야 그럴 여유가 있었겠나."

- 해녀 일을 너무 오래하는 거 아닌가. 환갑도 지난 나이인데.
"나는 젊은 축에 속한다. 보통 70이 넘도록 하고 80까지 하는 분도 있다. 해녀들은 노인정책의 중요한 모델이다. 60세 이상 노인들은 복지비가 많이 들어가는데 해녀들은 노력하는 것에 따라서 80까지 일을 할 수 있으니 경제활동을 남보다 더 많이 하고 복지비도 그만큼 적게 들어간다. 제주도가 해녀를 관광사업화하면서 보일러비며 각종 공과금 혜택을 주고 물질을 하러 오가는 때 photo time 같은 것을 하며 지원금도 주고 있는 것은 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이다. 옛날에는 해녀를 천대했지만 가장 정년이 긴 것이 해녀 아닌가. 이렇게 따지면 나도 아직 많이 남았다."

- 한달에 몇일이나 쉬나.
"물에 들어가는 날은 한달에 보름 정도다. 옛날에는 한달 30일을 물에 들어갔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지금은 파도가 세면 장사를 나간다. 장사는 18일이다."

- 물에 가는 거 15일하고 장사가는 거 18일을 더하면 33일 아닌가?
"물에 가는 날은 장사를 빠지고 물에 가기 때문에 그렇다. 어떨 때는 한달에 하루도 안 논다. 노는 날은 물에 안 가는 날이다. 물에도 가지 않고 장사도 나가지 않는 날은 조개 파러 간다. 조개 파러 가는 날이 노는 날이다." (웃음)



▲한달 내내 물에 들거나 장사를 하다가 쉬는 날에도 바다에 조개파러 다닌다는 해녀 엄마. 악천후에도 제주의 해녀들은 바다에 가서 일을 한다.  그래서 나는 제주의 여자들을 존경한다.


네가 아프면 내가 웃음을 잃는다

- 제일 속썩인 자식은 누구였나?
"제일 속썩였다기보다는 가장 걱정스러웠던 자식이 막내였다. 아픈 건 어쩔 수 없지. 태어나서 3개월때부터 급성폐렴으로 아프기 시작했다. 100일도 되기 전서부터 아프기 시작한 것이 15~16년 병을 바꿔가며 앓았다. 마지막 수술을 했던 것이 대학교 때니까 20살이었다. 그때는 의료보험도 없을 때니 돈도 적잖이 들었고. 당시에는 대학도 돈 없어 못 보낼 때라 이웃들이 '당신 아들은 나중에 대학 안 보내줘도 섭섭하지 않겠다'고 놀리기도 했다."

- 자식 키우면서 가장 기쁠 때는
"막내가 수술로 살아나고 소아마비처럼 다리를 절뚝이지 않도록 수술이 성공했을 때. 3살 때 유리창에서 떨어져서 동맥이 잘려나갈 때가 있었는데 그때 신경을 상해서 왼쪽 다리와 오른쪽 다리 크기가 현저하게 차이가 났다.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해 수술을 받게 되었다. 의사는 30%밖에 성공확률이 없다고 했다. 칼을 대야 하는 곳도 3군데나 됐다. 다행히 60% 정도 성공을 해서 지금은 정상인처럼 걷고 군대도 다녀 왔다."

- 아픈 자식을 너무 편애해서 다른 자식들이 원망하지는 않았나?
"솔직히 딸들에게는 미안하다. 하지만 아픈 자식에게 정이 많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만약 막내가 건강하고 딸들 중 하나가 아팠다면 정을 그쪽으로 쏟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네가 아프면 내가 웃음을 잃고, 내가 아프면 네가 웃음을 잃는다는 사실이다."

- 아픈 아들이 장애인 취급을 받았다고 하던데.
"군청(당시 남제주군청)에서 해마다 장애인봉투가 날아왔다. 신경을 잃어서 절뚝거리고 다니니까 신고가 들어갔나 보지. 작은딸이 화가 단단히 나서 '내 동생이 왜 장애인이냐'며 봉투를 박박 찢어버리기도 했다. 친척들은 나를 위로하는 뜻에서 옛날에는 아들이 군인가면 집안이 울고불고 난리도 아닌데 군인 안 가게 되서 그래도 낫지 않느냐고 말했다. 결국 아들은 건강하게 자라서 현역으로 전역했다."

- 마지막으로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건강' 한마디뿐이다. 건강을 잃으면 다 잃은 거 아닌가. 특히 막내아들은 병이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기 때문에 술이나 담배는 절대적으로 해로우니 주의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서울에 있다는 핑계로 친구들의 대소사에 신경쓰지 않고 명절 때 고향 내려와도 한번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친구들을 잘 살펴주기를 바란다.


▲ 20여년 동안 엄마를 죽도록 고생시키고 본인도 죽다 살아난 아들(승주나무, 왼쪽)과 평생 자식 뒷바라지에 인생이 기울어버린 엄마.


동네에서 항상 회자되는 말이 있다. 당시 이웃에 살던 아무개는 사소한 병이었는데도 부모가 챙기지 않고 약만 쓰다가 끝내 숨지고 말았다. 내가 살아나리라고 생각한 동네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엄마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지옥 입구에서 되살아났다. 나의 생명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함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엄마와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내게 던져진 '삶의 물음'에 대답하려면 한 사람의 생을 갖고는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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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슬로우 뉴스(slow news) 운동
    from 승주나무의 책가지 2008-09-17 23:53 
    slow news가 요청되는 시대 slow와 news를 함께 쓰는 것은 언어도단이자 모순이다. 속도경쟁을 부추기는 기성의 언론들에게는 슬로우 뉴스를 기대할 수 없다. 사건이 생긴 날 저녁에 이미 뉴스의 생명이 기울어지며, 다음 날 저녁이 되면 그 뉴스는 완전히 사망한다.  하지만 그것은 과도한 속도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관성일 뿐 뉴스란 반드시 ‘속보’라는 이미지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뉴스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성찰부재'이
 
 
마노아 2008-09-17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주나무님이 어머니를 많이 닮았네요. 한 사람의 생으로 모두 답할 수 없는 아름다운 생의 주인공이셨군요. 인터뷰 잘 보았어요. 추천 버튼 더 누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감동이에요.

승주나무 2008-09-18 00:00   좋아요 0 | URL
히히..속살을 드러낸 것 같아서 심히 부끄럽사옵니다. 어떻게 하다가 이런 기획이 떠올랐는지^^;;

웽스북스 2008-09-18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승주나무님... 이 인터뷰 정말 좋아요
승주나무님 이렇게 귀한 삶을 살고 있는 줄 몰랐네요

승주나무 2008-09-18 10:24   좋아요 0 | URL
세상에 귀하지 않은 삶이 어딨겠어요.
"아우슈비츠에서 역사상 가장 유머가 빛났다"는 말이 생각나요.
제가 삶에 대한 지나친 낙관을 가지는 것은 이러한 사정 때문이지요^^

순오기 2008-09-18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니의 정성으로 우리가 승주나무님을 만날 수 있었군요. 위대한 모성에 경배합니다!

승주나무 2008-09-18 10:24   좋아요 0 | URL
네..어머니의 정성으로 제가 순오기 님을 만날 수 있었던 거지요^^

드팀전 2008-09-18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주나무님이 '일신우일신' 하고 계신 모습이 보이네요..^^
김동춘 교수가 예전에 수업시간에 '우리 가족이 겪은 한국전쟁' 이란 제목으로 인터뷰 리포트를 내라한 적이 있었다는군요.
이런 인터뷰들이 갖는 세계와의 관계성을 포착한다면...그게 바로 '살아있는 역사책' 아니겠습니까.
승주나무님은 고향 제주와 관련된 어떤 일에서 빛을 보실 것 같아요.^^
전 고향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ㅋㅋ

승주나무 2008-09-18 10:26   좋아요 0 | URL
아~ 일신우일신..제 양파 껍질은 그 수가 무수히 많아서 얼마나 더 벗어야 사람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 인터뷰는 길에서 얻은 소중한 깨우침에서 나왔으니 공유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런데 고향이 없다니..혹시 니북에서 오셨나요^^?

드팀전 2008-09-19 09:19   좋아요 0 | URL
ㅋㅋㅋ...껍질이 이미 양파에요...양파 안먹어보셨남.

메르헨 2008-09-18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웃음으로 글을 대합니다...^^
어머니께 진심으로...박수를 드리고 싶어요.^^

소나무집 2008-09-18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감동입니다.
다정한 모자지간이 정말 아름다워요.
어머님이 제주도 사투리를 쓰면서 말씀하셨을 것 같은데
표준말로 번역(?)을 해놓으셔서 제주도라는 실감이 좀 안 나네요.
제 시댁이 제주도라서 우리 어머니의 말투가 막 떠올랐거든요.
전 기자도 뭣도 아니지만 우리 엄마를 인터뷰해보고 싶은 마음이 물씬물씬입니다.

울보 2008-09-22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님 너무 멋져요
그냥 엄마라는 이름으로도 멋진데,
 








설, 단오, 추석은 우리나라의 3대 명절로 꼽힙니다. 어릴 때 많이 놀아서 그런지 '명절'이라는 생각만 했지, 각자 어떤 의미가 있고 무엇을 하는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윷놀이는 언제 하고, 연날리기나 씨름 같은 것은 언제 하는지 정확히 모를 때가 많습니다. 이번에 추석 특집으로 온고지신 우리문화그림책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책읽는곰)이 나옴으로써 설, 단오, 추석에 대한 어린이 그림책이 모두 만들어졌습니다. 이 책들의 내용을 토대로 각각의 명절이 어떤 의미이고,  어떤 놀이를 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홀수가 좋아요

1월1일, 3월3일, 5월5일, 7월7일, 9월9일

우리 조상들이 좋아한 숫자입니다. 홀수는 모든 것이 활발하게 살아나는 기운, 곧 '양기'를 뜻하는 데 좋은 기운의 숫자가 두 개나 겹쳤으니 그 날을 길일로 삼은 것이지요. 1월1일부터 순서대로 설날, 삼짇날, 단오, 칠석, 중양절이라고 합니다.

설날의 '설'은 아직 익숙하지 않고 낯설다는 뜻이죠. 새로운 날이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처음은 익숙하지 않은 법이지요. 영어로 1월을 january라고 하잖아요. 고대 로마신화에 나오는 문(門)의 수호신을 야누스라고 하는데, 흔히 두 얼굴을 가진 이중적인 모습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죠. 야누스의 묵은해의 얼굴과 새해의 얼굴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해서 1월을 상징하는 신이 되었습니다. 1월1일은 다른 말로 '정월초하루'라고도 합니다.
5월5일은 여름이 시작될 무렵에 돌아오는 태양의 축제로, 오랫동안 우리 겨레의 가장 큼 명절이었습니다. 양의 기운 그 자체인 태양의 날이니까 오죽하겠어요.


명절놀이 - 명절에 맞게 놀아보자


윷놀이는 설에 가장 많이 하는 놀이입니다. 나무 막대기 넷을 던져서 몇 개가 뒤집히고 누웠는지에 따라 도개걸윳모를 매기고 그 만큼 윷판을 움직이는 데 도에서부터 돼지, 개, 양, 소, 말을 뜻한다고 해요. 뒤로 갈수록 걷는 속도가 빨라지니 도개걸윷모가 된 것이죠. 윷놀이를 하다 보면 윷을 던지는 사람과 말을 움직이는 사람 간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윷을 던진 사람은 말을 겹쳐서 가고 싶은데, 윷을 옮기는 사람은 위험하니 앞선 말을 빨리 움직이자며 시비를 겁니다. 이런 실랑이들이 모두 재밌습니다.


연날리기는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까지 했다고 합니다. 연날리기는 다른 나라에서도 많이 하지만, 연싸움을 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해요. 연싸움에서 이기려면 연줄을 튼튼하게 하는 것은 물론, 연줄에 날카로운 사금파리 같은 것을 발라서 상대방 연줄을 끊어놓는 게 관건이죠. 하지만 연싸움에서 이기려면 무엇보다 연이 훨훨 높이 잘 날아야 합니다. 연을 만들 때 균형을 잘 맞추지 못하면 바람을 제대로 탈 수 없으니 주의하세요.




단옷날에는 씨름을 많이 했습니다. 씨름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다양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힘 쓰는 일이 좀 많겠어요. 전쟁도 해야 하고 논밭도 일궈야 하고. 원시시대에도 맹수(猛獸)나 기타 종족에게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오로지 자기의 힘과 체력으로 싸워서 이겨야만 했으니 씨름은 가장 원초적이며 인간적인 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씨름에 대한 기록은 고구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잦은 전쟁에 시달린 조선시대에는 시험과목이 되기도 했습니다. 씨름은 개인과 개인 간의 겨루기를 떠나 마을 대항전의 성격이 강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추석에는 역시 강강수월래죠. 강강술래의 유래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논란이 있어서 정설이라고 할 수 있는 게 따로 없을 지경입니다. 임진왜란 때 전투를 하면서 만들어졌다는 설에서부터 남편들 고깃배 타고 바다에 가면 아낙네들이 만선을 기원하며 췄다는 설도 있고, 도둑을 잡으려고 하던 행위라는 설도 있죠. 설도 좋지만, 보름달을 보면 싱글벙글 입가에 웃음이 나잖아요. 모두가 손을 맞잡으면 보름달처럼 동그란 모양이 될 테니 동그란 달을 보며 동그란 표정으로 동그란 원을 그리는 놀이라고 생각하면 딱인 것 같습니다.


가마싸움은 주로 서당 다니는 학동들이 많이 했습니다. 나무로 만든 가마에 바퀴를 달아 서로 부딪쳐서 부서지는 편이 지는 놀이인데, 이긴 편 서당에서 그 해 과거 시험에 붙는 사람이 많이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의 목숨걸고 다투곤 했습니다^^

명절의 먹거리와 풍습

우리나라 사람들은 첫째도 조상, 둘째도 조상이었습니다. 햇과일이 나오면 조상에게 가장 먼저 바치고, 추수 전에도 풍작이 나도록 음식을 제대로 차려놓고 기원을 하곤 했습니다.



연이(<연이네 설맞이>의 주인공)네는 가래떡을 빚었네요. 떡국은 가래떡을 짧게 썰어서 만든 음식입니다. 먼저 쌀가루를 반죽하여 찐 뒤에 떡메로 쳐서 차지게 하고 양초 가락처럼 길게 비벼 가래떡을 만들어 가래떡을 말려 꾸덕꾸덕해지면 타원 모양으로 얇게 썰어서 떡국을 끓입니다. 가래떡의 흰색은 새해 첫날의 밝음을 나타내고 둥그런 모양은 해의 모양을 나타낸 거라고 합니다. 그나저나 연이가 가래떡으로 '무엇'(?)을 만들었네요^^



추석에는 온 식구가 밝은 달을 보며 송편을 빚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제까지 방 안에서만 빚었는데, 다음부터는 유리창이라도 열어놓고 빚어야겠네요. 송편 속에는 콩이나 팥, 밤, 대추 같은 소를 넣어서 맛을 내는데 모두 그 해에 새로 거둔 곡식들입니다. 송편을 예쁘게 빚으면 잘 생긴 짝을 만나고 밉게 빚으면 못생긴 짝을 만난다고 해서 처녀 총각들은 또 송편을 목숨걸고 예쁘게 빚었다고 합니다. 그 분들은 모두 시집 장가를 잘 가셨겠죠^^



연이네 옆집에 사는 덕이네가 달걀 꾸러미를 갚았습니다. 지난 봄 햇병아리를 내느라 꾸었던 달걀인데, 묵은해에 진 빚은 섣달그믈이 가기 전에 갚아야 한다고 합니다. 참 좋은 풍습이죠.



한가위를 전후해 잘 익은 벼, 수수, 조 등 햇곡식의 이삭을 한줌 베어다가 묶어 기둥에 걸어 두는데 이것을 올게심니라 합니다. 내년에도 풍년이 들게 해달라고 비는 거지요. 올게심니를 할 때에는 이웃을 불러 술과 음식을 대접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경제사정도 좋지 않고 분위기도 어수선해서 명절 분위기는 잘 나지 않지만, 아이들에게까지 그런 기분을 전해주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어릴 때 그랬지만, 아이들은 명절날을 그야말로 손꼽아 기다렸을 테니까요. 신문을 보니 노인정이나 요양원 같은 데에서 이런 명절은 처음 본다며 혀를 내두른다고 합니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음식이 있으면 이웃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언제 한번 풍족한 적이 있겠습니까마는, 마음만은 넉넉했죠. 옛날보다 사람들의 '욕심'이 과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조금만 더 마음을 넉넉하게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과 명절 그림책을 가지고 이야기꽃을 피워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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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 2008-09-12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이책 모두 가지고 있는데 류가 너무너무 재미있어하는 그림책들이예요,,

승주나무 2008-09-17 13:18   좋아요 0 | URL
울보 님~ 안녕하세요. 추석에 고향 갔다 와서 이제야 댓글 남겨요^^
반갑습니다~

순오기 2008-09-12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은데요. 어느분이 제가 이런 페이퍼 올릴거라고 기다렸다는데~ 귀찮아서 관뒀거든요.^^승주나무님이 올린거로 대신할까봐요.ㅋㅋ

승주나무 2008-09-17 13:18   좋아요 0 | URL
그래도 순오기 님 판 페이퍼가 더 좋은데 ㅋㅋ
저를 수제자로^^
 


▲ 충남의 아파트를 돌며 시사IN 창간호를 열심히 알려준 빛의 잉칼 님의 두 공주님

시사IN 창간과 함께 한 달 동안 전국의 독자들과 알리기에 나섰는데,
소녀들의 참여가 두드러졌습니다.
충남에 사시는 독자분은 두 따님과 함께 창간호와 기념품을 곱게 포장하고
아파트마다 돌아다니며 배포를 해주셨습니다.
두 공주님은 롤러브레이드를 타고 다니며 씽씽 날라다녔습니다.
두 공주님의 아버지인 빛의 잉칼 님이 이 과정을 사진에 고스란히 담아주셔서 가끔 찾아보며 혼자 미소를 짓습니다.

또 한 소녀가 있습니다.
천안여고 2학년생인 그는 아이디 'sunbi'로 활동하며 배포운동은 한 부분을 맡아 주었습니다.
배포 신청자를 받는데 그가 300부를 보내달라는 겁니다. 300부면 박스 두 개가 넘는 분량인데, 여고생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부담이 많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150부만 싸서 보냈는데, 며칠 후에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학교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 돌리는 데만 동이 나 버렸어요. 왜 이렇게 조금 보내셨어요?"
문자로 야단을 맞았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나머지 150부를 또 보냈습니다.
그 소녀는 혼자서 천안여고 교무실과 각 교실, 천안시 중앙도서관 앞과 백화점 등 천안시 일대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다 돌렸습니다.
장정도 하지 못할 일을 혼자 해낸 것이죠. 특히 선생님의 주선으로 학급 친구들 앞에서 시사저널 사태와 언론의 자유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설명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예사 인물은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죠.


오랫동안 그 일을 잊어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그에게서 메일 한 통이 날아왔습니다.

"작년 수능날 안일님이 제게 문자 보내주셨었죠ㅋㅋ
그 때는 2학년이었고 이제 정말 3학년, 85일 후에는 수능도 보겠네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00대학교 자유전공학부에 특기자전형으로 지원하거든요.
자기소개서에 시사인 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증빙자료를 포함해야 한다고 해서 애를 먹고 있습니다.
사진이라도 찍어둘걸 후회가 되네요.
천안시 중앙도서관 앞과 백화점 앞에서 배포했었는데
혼자 했었기 때문에,,,,;;
그리고 시민들 반응이 시원찮아서
사진을 남길만한 여유가 없었지요."


자발적 구독운동은 온라인을 통해 활성화되었기 때문에 실명을 쓰지 않고 아이디를 썼다는 점에서 그의 신분을 증명할 길이 없고, 게다가 그는 혼자서 300부를 다 배포했기 때문에 사진을 찍을 틈도 없었죠. 그렇다고 셀카를 찍을 수도 없고. 그의 선행을 어떻게 증명할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온 게 '확인서'입니다.


 

자발적 구독운동은 온라인을 통해 활성화되었기 때문에 실명을 쓰지 않고 아이디를 썼다는 점에서 그의 신분을 증명할 길이 없고, 게다가 그는 혼자서 300부를 다 배포했기 때문에 사진을 찍을 틈도 없었죠. 그렇다고 셀카를 찍을 수도 없고.
그의 선행을 어떻게 증명할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온 게 '확인서'입니다.

확인서에는 그간 시사모가 했던 일과 창간과정에서 자발적 구독운동을 했던 일, 그 중에서 sunbi 님이 했던 역할 등을 기록하고 이 의미를 밝혔습니다.
확인서는 썼지만 그래도 두 가지 어려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사인을 해줄 것인가, 그리고 확인서의 효력이 있을 것인가.

모든 고민을 키핑하고 일단 막무가내로 시사인 편집국에 쳐들어가 고재열기자의 사인을 끝내 받아냈죠.
그리고 우체국에 가서 익일특급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이번 미션이 쉽지는 않았고, 논란도 있을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 시민운동을 대입을 위한 도구로 쓴다고 비판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절박한 상황에 처하는 것이 아닐까요.
궁극적으로는 '언론'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중심으로 모여든 사람들이기에 서로 돕고 공유하면서 가치를 더욱 키워나가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당시 활동했던 내용을 재탕삼탕 자꾸 떠벌리는 것도 이런 가치를 더욱 강화하는 방편입니다.
옳은 일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옳은 일을 옳은 일이라고 평가해주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번에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의 선행을 증명하고 싶은 욕심이 앞선 것은 사실입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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