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의 탄생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4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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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이 꺼내놓은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

한국사회를 강타한 문제작 <88만원 세대>(레디앙)를 내주겠다는 출판사를 만나지 못해 원고를 안고 '출판사 삼고초려'를 했던 우석훈이 자신의 경제대안시리즈(4부작) 최종 작품에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꺼내놨다. 천하삼분지계란 후한 말기에 군사 제갈량이 유비에게 설파한 비책이다. 적벽대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유비가 형주. 익주를 얻으므로서 조조의 위국(魏國), 손권의 오국(吳國) , 유비의 촉국(蜀國) 으로 천하가 삼분되어 수십년간 천하는 정족지세(鼎足之勢 : 다리가 세개 달린 화로에 빗대어, 삼국이 균형을 이루어 나간다는 형세를 말함)의 형세를 유지하게 된다. 비록 정사(正史)에서는 조조의 위국과 손권의 오국이 사실상 이파전을 벌였고 유비의 촉나라의 존재감이 유명무실했다는 지적은 있지만, 유비의 촉나라가 의미 있는 균형감을 제공해준 것은 주지하는 바다.
우석훈에 따르면 제1부문은 시장주의를 따라 작동하는 시스템, 우리의 경우는 재벌/대기업 부문을 말한다. 제1부문의 기업들이 독점기업으로 전환되면서 시장의 폐해가 나타났고, 193년 대공황 이후 재정/금융정책 또는 제도로 제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 도래하자 이 문제를 정부 또는 국가라는 '공공 부문'으로 통제하는 흐름이 생겨나게 된다. 이렇게 국가개입이나 공공부문이 주도적으로 시장을 통제하는 일련의 흐름을 제2부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박정희, 전두환 등이 재벌을 휘어잡고 경제정책을 통제하며 '국가독점주의'를 유지하던 시절이 제1부문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의 개입은 선진국들이 쏠쏠한 재미를 본 정책이며 개발도상국들도 국가개입으로 인해 경제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한국의 경제적 성공은 제3세계 국가들의 귀감이 되고 있으나 대체로 '독재'를 통한 경제성장을 하고자 하는 국가들에서 '한국식 경제발전 모델'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점이 우려사항이다.
최근 외국의 사례를 보면 리먼브라더스 등 미국의 대규모 투자기업이 정부의 통제 없이 파생상품을 남용하면서 한창 대박을 터뜨리던 시기는 제1부문이 강성했던 시점이며, 부동산 위기에 이어 파생상품의 위기가 폭발해서 대규모 구제금융 처방으로 국유화되는 최근의 과정은 제2부문의 활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두 개의 부문은 경제시스템의 주된 주체이지만, 우석훈은 두 축만으로는 안정적인 경제시스템을 만들어내지 못하며 결국 신자유주의의 폐해(비정규직의 대규모화, 금융사태 등)와 개발독재의 전횡(경제규모의 수 배에 달하는 부동산 과잉성장(우리나라의 경우 2008년 1월 1일 기준 공시지가는 GDP의 3.6배, <부동산 계급사회>(후마니타스))과 제3세계의 독재 등)을 빈번하게 노출시키며 경제의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제3부문이라는 조정자가 필요한데, 이는 '가공'의 기구가 아니라 3~4만 달러 이상의 국민경제를 실현하고 있는 국가(스위스, 스웨덴, 네덜란드 등)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논증하며 실제 사례를 조목조목 제시하고 있다.

왜 제3부문이 필요한가 - 스위스 성공사례 분석

우석훈을 몇 번 만나고 인터뷰를 해본 바에 의하면 그는 매우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다. 사회적 모순을 가장 먼저 체감하며, 위험한 경제정책이 가져올 폐해의 쓴맛을 가장 먼저 본다. <괴물의 탄생>(개마고원)에서 그는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을 '정신분열증적 국민경제'라고 평가하며 "그야말로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몇 달을 보냈는데, 아마 저의 이런 심정을 공감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고 썼다. (256쪽)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가지고 인터뷰할 때 그는 "전쟁이 일어나면 내가 가장 먼저 희생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쟁이 과연 멀리 있지 않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프랑스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이래 유엔 기후변화협약의 정책분과 의장 등을 맡으며 인생의 4분의 1을 독일, 프랑스, 영국, 스위스에서 지냈는데그 기간 동안 우리나라에 적합한 경제모델의 사례를 면밀히 검토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도 중앙형 시스템이 가장 두드러지는 나라인데, 좌파들이 국가기구를 장악하면서 중앙시스템이 갖고 있는 문제점들을 고스란히 갖게 된 나라가 되었다. 수도가 비대해진 점이 대표적 증거다. 우석훈은 프랑스가 우리나라에게는 대안적 모델 같이 보이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스웨덴의 '대타협 모델' 혹은 '사민주의 모델' 역시 한국에서 현실 가능성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부수립 당시부터 극우 혹은 우파가 정권을 장악해 장기간 국민들을 세뇌한 상황에서 사민주의 모델이 무슨 수로 정권을 장악하겠는가. 김대중과 노무현이 우파 정권에 대해서 정권교체를 이뤄내지 않았느냐고? 인도의 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지도자의 개인적인 카리스마나 화려한 투쟁경력이 기업카르텔의 콧대를 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혹은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잘라말했다. 야당에서 정부 쪽으로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 또는 이른바 좌파라는 사람들이 정권창출의 깃발을 손에 잡는 순간 갖가지 위협, 특히 그 중에서도 어떤 정부건 하룻밤 사이에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악질적인 위협, 즉 '자본이탈'이라는 위협의 볼모가 된다. 브라질의 룰라와 남아공의 만델라가 그러하다. (<9월이여,오라>(녹색평론) 168쪽)
그러면 우파들이 숭앙해 마지않는 '미국식 모델'은 어떤가? 우석훈은 미국식 모델을 한국에 적용한다면 멕시코나 아르헨티나처럼 전형적인 중남미형으로 급속히 양극화되기 쉽다.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면 된다. 미국식 모델의 주된 구호는 '대기업의 고성장을 이룬 후 국민들에게 분배한다'는 것이지만, 언제 한번 고른 분배가 이루어진 적이 있을까? 재벌들은 항상 배고플 뿐이다. 기업의 수익이 극대화되도 직원들의 연봉은 올라가지 않는다.
우석훈이 주목하는 것은 '스위스 모델'이다. 스위스는 이렇다 할 지하자원이 없고 겨울도 6개월이나 되고 유럽에서 가난하기로 유명한 나라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와 사정이 비슷하다. 게다가 세 지역의 언어가 달라 지역분쟁이 적지 않으며 극우파가 득세하고 있는 상황마저 비슷하다. 1971년에야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었을 정도니 말 다한 셈 아닌가.(우리나라는 1948년, <대한민국 선거이야기>(역사비평사))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그저 독일이나 프랑스의 위성경제 정도로 간주되던 스위스가 잘 살게 된 것은 불과 2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스위스의 잠재력은 노동에 대한 전혀 다른 가치관 위에서 경제활동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며, 생태나 환경의 문제가 국민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주일에 이틀 일하는 정규직 체제가 정착된 것도 주요한 특징이다.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나 충전이 필요한 직장인의 경우 봉급을 낮추는 대신 일주일에 이틀만 출근하는 시스템이 현실화된 것이다. 일주일에 5일 동안 이들은 식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독서하고 사색하고 전문성을 강화한다.
대학등록금은 연간 50만원밖에 안 하는데, 그것도 갑자기 올랐다며 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나섰다. 대학진학률 역시 18~20% 정도밖에 안 된다. '학벌'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스위스의 경제 특징들이 일견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목을 조르는 내부 모순들(비정규직, 등록금 1,000만원, 일중독증 등)에 대한 완충장치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는가를 보면 전율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스위스는 직접민주주의의 가치에 기반한 분산형 구조이며 지역공동체 혹은 지자체의 힘으로 만들어낸 제3부문이 경제의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단순히 복지국가의 모델이 아니라 직접민주주의에 기반한 자치의 힘으로 제3부문을 일궈냈다는 게 매우 중요하다.


▲ 우석훈은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파시즘이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극좌와 극우의 격한 대립을 경험했던 우리나라에서는 국민의 환멸과 정치에 대한 반감을 악용한 지도자가 포퓰리즘을 이용해 파시즘을 실현하고 내부모순을 상대국에 대한 적대감(이를테면 일본)을 극대화시켜 전쟁상황을 만들 수도 있고, 전쟁상황 속에서 평소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몰살시키는 일이 상상 속에서만 머무르리라는 법은 없다. 더군다나 이미 우리나라에 한번씩 있었던 일이다. 우석훈이 말하는 공포의 시나리오가 아닌가 싶다. 사진은 1976년 태국 정치파동 당시. 극우 단체가 국경 수비대의 지원에 힘입어 방콕의 타사마트 대학을 점령하고 좌파 여학생을 목매달아 죽이고도 모자라 사체를 의자로 내리찍고 있다. 사진을 찍은 닐 울비치는 이 작품으로 1977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전쟁과 파시즘 얼마나 가까이 왔나 - 괴물과의 혈투

우석훈은 기회가 날 때마다 '전쟁'과 '파시즘'의 발생가능성을 경고해 왔다. <촌놈들의 제국주의>에서는 나치의 독일이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은 경제상황이 급속히 악화된 몇 개월 사이에 일어난 일로, 인접국 프랑스는 독일이 침공해올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경계'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석훈은 '파시즘'의 징후를 분석하며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는 현재를 '파시즘 전 상황'으로 규정했다. 파시즘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체로 대중들이 지도자를 거부하기 어려운 하나 이상의 미덕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명박에게는 반감만을 갖기 때문에 그가 파시즘의 주인공이 되기는 힘들다는 분석이다. 즉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포퓰리즘 단계가 극우파와 결합되면 일반적으로 파시즘이 발동할 조건이 만들어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 정도가 파시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물 정치'와 '지역 정치' 같은 후진적 정치 성향이 대중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파시즘의 위험에 노출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명박에게 환멸을 느낀 대중들을 황홀하게 홀릴 수 있는 지도자가 갑자기 나타나 '시스템'이 아니라 '카리스마'로만 권력을 이어나가려고 한다면 파시즘적 상황이 꿈같은 이야기는 아니다. 17대 대통령선거에서 우리가 목도한 '허경영 신드롬'은 우리가 파시즘 위험도에 노출돼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석훈은 한국에서 파시즘이 일어난다면 '건설자본+성장주의'라는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전개될 수 있으며, 우파나 좌파 모두에게서 나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국의 우파는 시장 절대주의자들이고, 좌파는 공공성 절대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양쪽 모두 극단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우석훈이 '괴물'이라고 부르는 한국의 현상들을 보면 건설자본/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과  극단적인 중앙형 시스템(경기/서울 수도권 인구가 전국 인구의 절반), 토호형 경제를 들었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는 완충장치가 없다는 것이 괴물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승자독식사회이자 패자멸망사회인 한국에서는 게임을 할수록 선수가 줄어들어 나중에는 단 한 명의 게이머만 남는 극단적인 '배틀로얄' 시스템이다. 패자는 일단 게임에서 지면 '사망'에 이르기 때문에 다음 경기는 승자들로만 이루어지며 이런 구조가 반복된다.


▲ 약자들이 점점 죽어가고 있다. 보건복지가족부가 3일 국회 보건복지가족위 소속 한나라당 이애주 의원에게 제출한 국감 자료에 따르면 국내 자살자 수는 2000년 6437명에서 2007년 1만2174명으로 연평균 13%씩 늘었다. (도표 : 경향신문)

우리나라는 현재 약자들이 죽어가는 단계가 매우 발전(?)돼 있다. 우석훈은 '개미지옥'이라고 불렀는데,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다는 점에서 이 비유는 무시무시할 만큼 적절하다고 하겠다. 일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은 당연히 '비정규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이미 1,000만에 육박했다. 이쯤 되면 비정규직뿐만 아니라 정규직 역시 '영혼'을 팔지 않을 수 없다. 직장만 준다면 몸도 마음도 영혼도 다 내다 버릴  수 있다는 정서가 매우 강력한 것이 한국사회다. 반대로 이들을 채용하는 기업들은 '너 말고도 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운동장 한 바퀴야'라며 직원을 기계 다루듯 할 수 있다. 그 아래에는 무시무시한 비공식 경제(informal economy, '지하경제'라고도 부른다)가 도사리고 있는데 '다단계'와 '사채시장' 등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 지하경제의 규모는 2005년 집계 당시 160조 안팎으로 GDP의 20%로 추정됐는데 지금은 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근의 뉴스에 의하면 사채이자는 3,000%에 달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만약 제3부문이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약자들은 지하경제의 먹잇감이 되거나 파시즘 전체주의가 되어 내부모순을 '전쟁' 같은 극단적인 형태로 해소하려 할지도 모른다.


실패에 대한 경쟁력과 완충장치(안전장치)


물론 우석훈은 우리나라에서 제3부문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모델도 몇 가지 제시해 놓았다. 그 부분은 책의 내용을 참조하는 게 좋겠다. (이미 많은 내용을 발설해 버려서) 여기서는 마지막으로 우석훈이 시원하게 제시해놓지 않은 제3부문의 '실패에 대한 경쟁력'을 살펴보는 게 좋겠다. 우석훈은 제3부문이 추구하는 지상가치는 '공공선'이라고 규정하였다. (258쪽) 공공선이란 쉽게 말해서 사라들이 아끼고 사랑해서 없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게 만드는 가치를 말한다. 예컨대 org라는 공공기관의 도메인을 가지고 있는 위키피디아는 제아무리 이해관계자들이 집단적으로 '삭제'를 한다고 하더라도 1시간도 되지 않아 복구된다. 그것은 위키피디아의 키워드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애정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촌놈들의 제국주의>의 말미에서 우석훈은 "평화의 맛을 한번 본 사람은 이를 잊을 수가 없다"고 썼는데, '평화'라는 말을 제3부문으로 고쳐 써도 틀리지 않다.
제1부문과 제2부문은 모두 '절대강자'를 주요한 역할자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를 보면 장수의 목이 날라가면 군대는 와해되고 전멸되는 상황을 볼 수 있는데, 제1부문과 제2부문 역시 절대강자가 사라지면 모든 부문의 구성원들이 위태롭게 된다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제3부문의 경우 직접민주주의와 풀뿌리 자치주의에 기반한 공동체들의 연대이기 때문에 포트폴리오 효과를 누릴 수 있다. 포트폴리오 효과와 실패 경쟁력은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갤리온)의 저자 클레이 서키에게 들을 수 있는데 그 책에서 저자는 오픈 소스(제3부문의 약자공동체와 비교할 수 있다)와 상용 소프트웨어 업계(대기업과 국가 중심의 제1부문, 제2부문과 비교할 수 있다)가 실패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며 얼마나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가를 증명하였다.
클레이 서키에 의하면 오픈소스 프로젝트 중 상당수는 실패하고 그나마 성공작들도 대부분 평범한 수준이지만, 오픈소스는 상용 소프트웨어보다 많은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위력적인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실패를 겪었기 때문에 위협적인 경쟁자이다. 즉 오픈소스의 실패는 공유가 되고 집단학습이 이루어지지만 상용소프트웨어의 실패란 곧 '시장 퇴출'을 의미하므로 상당히 많은 경쟁자들이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제3부문(오픈소스)의 개방적인 사회 시스템 전반은 동등계층의 생산에 의존하므로 어느 기업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실험적이면서도 비용은 훨씬 더 줄일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시스템 자체가 실패로 인한 비용을 낮춰준다는 데 있다. 그리고 새로운 발견과 인식의 증진이 생겼다면 '저작권'이나 '특허'를 걸어서 보호하는 게 아니라 공유하기 때문에 이런 자산은 금방 불어날 수 있다.
이를 우리나라의 상황에 적용한다면 약자들을 위한 '완충장치'가 생기는 셈이며, 우석훈이 말한 '개미지옥'은 '그물 보호대'로 바뀌므로 빠지더라도 곧 나올 수 있고 뒤에 오는 사람에게 이곳에 함정이 있다고 알려줄 수도 있다.
봉준호가 한강에 '괴물'이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듯이, 우석훈은 우리 사회 전체에 '괴물'이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괴물을 어떻게 가두는지에 대한 매우 유력한 해법도 제시했다. 저자의 진단에 대해서 한국사회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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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강만수 장관 ‘금융 혼란’ 자초




▲ 경향신문은 10월2일자 1면에 강만수 장관에 대한 비판기사를 실었다. 금융위기에 대해서 대증적인 요법으로만 대처하는 데다가 세제와 부동산 정책, 실물경제 정책 모두 헛발질만 하고 있다는 것이 기사의 요지다.



경향신문 1면에 또 강만수 기사가 났다.
금융불안에 대해서 달러를 퍼붓는 것 외에는 근본적인 처방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데다가
최근에 발표한 실질경쟁률 목표치는 마치 '받아쓰기'하듯 지수를 정해놓고 발표했다.
정부는 실질 경제 성장률을 올해 4.7%, 2009년 4.8~5.2%, 2010년 5.2~5.6%, 2011년 5.8~6.2%, 2012년에는 6.6~7.0%가 된다고 하는데, 과도하게 7%로 맞춘 듯한 느낌이다.


부동산 정책에 가서는 더욱 가관이다.
그는 지난달 24일 한 토론회에서 "그린벨트는 어떤 나라에도 없는 제도"라며 사실과 다른 발언을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가 하면, 최근에는 "그린벨트는'후손이 걱정해야 할일'"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이른바 '후손 발언'까지 도마위에 오르고 있다.

우석훈은 경제도 좀 알고 행정도 하면서 대운하도 찬성하는 데다가 747까지 확신하는 인재는 강만수밖에 없다며 강만수 건재의 이유를 꼬집었다. 우파는 좌파에 비해서 인재풀이 넓지만, 똑똑하면서 대운하까지 찬성할 수 있는 사람은 몹시 드물다고 한다. 그렇다고 강만수가 똑똑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끈질기다고 해야겠다.  

우석훈은 최근 <괴물의 탄생>(개마고원)을 끝으로 경제대안시리즈를 완결했는데, 거기에는 이른바 '3부문'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국가와 기업이라는 2부문만으로는 성공적인 경제부문을 만들 수 없다는 거다.


스위스의 경우는 소상인연합, 덴마크와 영국은 소규모 자영농을 중심으로 한 농민운동단체, 프랑스는 소규모 가족형 기업들, 북이탈리아는 클러스터라는 조합이 제3부문의 모델이다. 우리나라는 딱히 생각나는 게 노동조합밖에 없지만, 이미 이익단체가 돼 버렸기 때문에 공공성과 분배를 위한 3부문의 개발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로서 경제대안시리즈는 완결되었고, 나도 우석훈의 4권을 다 읽었으니 우석훈 경제대안시리즈 결산 같은 것을 하나 쓸 만도 하다.





▲ 세계사와 경제학사, 경제학의 인물들을 찬찬히 훑어보면서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일괄하며 '제3부문'이라는 대안으로 넘어가다 보면 저자 말처럼 정말로 대학에서 교양강좌를 하나 듣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든다. 찬찬히 한국과 세계의 경제 상황들을 정리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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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우리동네 1000원샵'이라는 글에서 서민경제가 어려워 1,000원짜리 상품이 급증했던 사례를 쓴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슬픈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시장을 보러 까치산시장으로 갔습니다. 과일도 사고 반찬도 사다가, 야채 파는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야채 파는 할머니라면 전봇대 아래 대충 좌판을 깔아 놓고 직접 따온 야채를 파는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 할머니의 야채 가게는 그래도 조그마한 공간이 있었습니다.

배추 하나에 1,000원이어서, 고기에 싸먹고 국도 끓여 먹을 겸 배추 하나를 샀습니다.
할머니는 계산을 마치고 손을 가져가더니 푸른 풋고추를 함줌 쥐어서 비닐봉지에 넣어주시는 겁니다.
참 오랜만에 보았던 시장 인심이었죠.
그것도 서울에서 한줌의 인심을 맛본 게 얼마만입니까.


▲ 시장 할머니가 배추 위에 풋고추를 한 줌 쥐어주었습니다. 오늘 고기 싸먹을 때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맛있게 먹을 생각입니다.

그런데 할머니에게 슬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손님이 많이 오나요?"
라는 물음에
"아이구 말도 마~ 감자 한 알을 사러 오는 사람도 있다니까."

'감자 한 알'이라는 말이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감자 한 알은 원래 규모가 너무 적어 팔지 못합니다.
감자 한 예닐곱 정도는 돼야 봉지에 넣어서 1,000원을 받든 2,000원을 받든 하는데,
감자 한 알은 도대체 얼마에 팔아야 할까요.




2008년 들어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엄청나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MB물가가 허탕치면서 정부는 물가정책에 아예 손을 놓고 있습니다.
강만수 장관은 '유동성을 풀어서 환율을 잡겠다'는 말만 합니다.
환율대란 다음에는 서민경제가 직격탄을 맞을 것입니다.
중소기업은 아마 절반이 망하는 사태가 벌어질지 모릅니다.

6월 이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얼마나 되는지 찾아봤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6월은 7월과 8월에 비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가장 낮은 달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 2008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서울신문 자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듭니다. 혹시 지금의 상황이 그래도 그나마 나은 상황이 아닐까.
1년 후에, 아니 6개월 후에는 아마도 지금 이 순간을 부러워하고 있지 않을까?
주식시장에서는 바닥 아래, 지하 1층, 2층, 3층 이렇게 내려가는 흐름이 있습니다.
요즘같은 장에서는 지금이 지하2층인지 지하3층인지 알 길조차 없습니다.
금융강국인 미국에서도 현재의 상황은 2년 후쯤에 판단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서민경제도 지금이 지하 2층인지 지하3층인지 모르는 상황이 아닐까요.
서민들의 공포심이 '감자 한 알'에 고스란히 배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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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여, 오라 - 아룬다티 로이 정치평론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혜영 옮김 / 녹색평론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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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에게서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보다.

시사IN 55호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보았다. 이른바 '강남 좌파' 이야기. 인터넷 토론 사이트에서 활력을 불어넣는 '강남아줌마', '변호사의 아내', '내과의사' 같은 닉네임을 가진 논객들은 강남 부유층에 속함을 굳이 감추려 들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한다. "생각은 좌파적인데, 생활 수준은 강남 못지 않다"는 게 강남 좌파의 정의이다. (강준만, <한국생활문화사전>)
폴로 셔츠에 CP컴퍼니 재킷, 450만원짜리 까르띠에 시계, 고급일식집과 룸살롱 한 달 접대비만 2억원을 쓰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와 나 사이에 명확한 벽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루에 몇 천원도 안 되는 생활비로 살아가면서도 군복을 입고 광화문에 나가 정부 지지 농성을 벌이는 할아버지들이 더 낯설다.
우리나라에는 돌연변이가 많다. 가난하고 비정규직이면서 비정규직을 대변하는 후보보다는 착취자들을 대변하는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이른바 '계급 배반 투표'도 일종의 돌연변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환경에 의해 억눌린 삶이라는 점에서 한국 사회를 바꾸는 돌연변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한국사회를 바꾸는 돌연변이는 가만히 있어도 기득권 안에 무리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데도, 그곳을 과감하게 박차고 나온 사람을 말한다. 강남 좌파는 우리 사회의 몇 안 되는 돌연변이다. 교수나 자본가, 정치인, 사회 지도층은 대체로 기득권의 이익을 수호하며, 약자들에게는 몹시도 인색하다. 이것이 계급에 복종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삶이다.
기득권 복종자들이 많으면 그 사회는 활력이 떨어진다. 역설적으로 돌연변이들은 기득권에게도 도움이 된다. 기득권이 극단적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있도록 제어해주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기득권과 약자들 사이에 교량 역할까지 할 수 있다. 지난 18대 총선에서 도합 10% 넘는 득표율을 차지해 세상을 놀라게 했던 진보신당 신언직 후보와 민주노동당 김재연 후보는 강남 지역이 고학력층이 많은 만큼 논리적 설득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맹자는 '사람이 항산(恒産, 일정한 벌이)이 있으면 항심(恒心)이 생기게 마련이다'고 했는데, 강남 사람들이야말로 항산이 있으니 당연히 항심이 생길 터이다. 지식과 문화를 쌓아가는 사람은 지식과 문화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자 중의 부자인 재벌들은 하나같이 멍텅구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변화할 역동성의 한 축을 잃은 상태다. 어떻게 재벌들이 이토록 멍청할 수 있을까.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은 유한양행의 유일한 사장 정도뿐인데, 그 정도로는 한국 사회는 끄떡없다. 이 분야에서는 애초에 기대를 접었다. 

 

▲ 연설 중인 아룬다티 로이(위키백과)

인도 부유층에 사랑과 찬사를 받던 작가, 부유층의 주적으로 돌아서다.

한국사회를 바꾸는 '돌연변이'를 언급하며 한국 작가의 예를 들 수 없다는 사실이 참 슬프다. 이번 촛불 국면에서 눈에 띄는 작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계급배반을 할 만큼 돈이 많지도 않고 그들이 보여준 활동량 역시 일반인들을 감화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은 점이 못내 아쉽다. 그래서 인도의 작가를 예로 들고자 한다.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데뷔작으로 영국의 권위 있는 <부커상>을 수상하면서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된 아룬다티 로이는 그 후로 단 한권의 소설도 발표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핵실험, 대형댐 건설 프로젝트, 다국적 기업의 행태를 고발하는 정치칼럼을 써왔다. 한때 인도 중산층이 총애하던 존재에서 이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로이는 인도의 힘있는 이권세력의 아픈 곳만 골라서 찌르며 격분을 사더니 결국은 법정모독죄로 기소되기에 이른다.
그가 사회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1999년 인도 대법원이 중부 인도의 '나르마다' 강에서 반쯤 지어진 상태에서 논란을 빚고 있는 '사르다르 사로바르' 댐에 대해 4년간 계속되어온 법적 건설중단 조치를 무효화하는 결정을 내렸다는 뉴스를 보면서부터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새만금 사업의 판결만큼이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사건 속에서 '나르마다 바차오 안돌란(NBA)'의 열정적인 활동가들을 만나고 나서다. 이 판결은 한 정부가 민주주의라는 그럴듯한 가면을 스고, 국가이익이라는 이름 밑에서 이렇게 교묘한 방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망가뜨리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생각한 로이는 톨스토이 문학집 대신 댐 건축에 관한 책, 관개업에 관한 책, 핵폭탄에 관한 책, 법정 진술에 관한 책들을 섭렵하며 현장의 투사답게 싸웠다.
로이 덕분에 서구의 다국적 기업들은 인도의 댐 건설과 핵폭탄에 투자하기를 꺼려하여 점점 발을 빼게 되었다.

로이에 의하면 인도는 수 세기가 공존하는 나라다. 수천 년 동안 숲에서 한발자국도 떠나보지 않은 사람들이 사는가 하면, 도시에서는 세계 일류의 유행을 몸에 걸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위에 언급한 나르마다 강은 3,500개의 크고 작은 댐을 건립할 예정인데, 30개의 초대형 댐과 수백 개의 대형 댐, 수천 개의 소형 댐이 강을 완전히 분해하면 최소 5천만명 정도가 숲과 강 밖으로 밀려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똥을 싸는 일에서부터 하루 생계를 벌기 위해 남들 앞에서 굽신거리는 일을 배우게 될 것이라고 로이는 말했다. 이 약자들의 운명을 걱정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작가가 있다는 것이 부럽지만, 작가의 힘만으로는 이들을 지키기에 턱이 없어서 위태롭기 그지 없다.

로이는 자신이 약자들의 고통을 끌어안는 '계급 배반'을 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보지 않았으면 모르겠지만, 그것을 본 이상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든 미국이든 로이가 보았던 장면은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그리고 잘 먹고 잘 배워서 똑똑한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런 장면들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한결같이 이런 장면들을 외면하는 사회라면 누가 우리 사회를 책임질 것인가.

아룬다티 로이의 <9월이여, 오라>(녹색평론사)는 사회과학자의 분석력과 작가적 상상력이 환상적으로 조합된 정치평론집이다. 때문에 사회과학자의 분석을 읽을 때 느낄 수 있는 무미건조함도 없고, 문학 작가의 글에서 읽을 수 있는 패배감이나 허무함이 없다. 작가다운 조롱과 해학이 매우 날카롭다. 그가 염원하는 것은 작은 풀벌레와 나무숲을 날아다니는 작은 새 한 마리이다. 9.11이 일어나고 이라크 전쟁이 터진 전장에서 작은 풀벌레가 날아다니는 상상이란 몹시 잔인하기 짝이 없지만, 그만큼 우리가 멀리까지 왔음을 차분히 말해준다. 지적인 작가들의 사회 분석이나 비판보다 한 발짝 정도 나아간 사유에 이르러서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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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10-07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사in의 기사는 저널리스틱한,섹시한 것이었지요...마치 가십기사를 보듯 봤습니다.
왜인가 하면...
'계급은 동일하지 않다.' 라는 명제를 생각해보면 결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지요. 강남에서 진보신당10% 넘었다고 놀라는 분위기에서는 사실 약간 웃음도 낫습니다. 간남에 온통 사모님,사장님만 사신다고 생각했던 걸까요.전 오히려 기사 내용에 한달 접대비로 1억 쓴다는 강남 좌파의 경제규모에 사실 약간 놀랐습니다.저 같은 월급쟁이는 생각해보지 않은 판공비여서.^^

제가 보기에 '강남좌파'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유주의적 우파',어떤 의미에서 클래식한 의미의 '보수주의자'라고 보는 것이 맞는 듯 합니다. 그들이 자신과 선긋고 있는 것이 '천민적인 강남 땅부자'들인 것도 그때문입니다. 즉 어느정도 가진자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지와 사회 공공성은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한다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여러번 걸쳐 이야기하는 거지만, 좌파의 척박성만큼이나 부족한 한국 우파의 얇은 선수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보수주의(사실 수구)들에게 없는 '관용의 정치'인데...^^ 언젠가 그 '관용'이 얼마나 허약하고 취약한 것인지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던것 같군요. .

승주나무 2008-10-10 20:36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 사람들은 강남좌파가 아니라 강남우파라고..
좌파가 워낙 죽을 쑤니까 강남좌파, 심지어는 '한나라당 좌파'라는 말까지 나도는 것 같습니다. ㅎㅎ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 - 새로운 사회와 대중의 탄생
클레이 셔키 지음, 송연석 옮김 / 갤리온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만났던 촛불남매


세계적인 촛불, 세계적인 공간 광화문, 청계천


적절한 동기와 도구가 주어졌을 때 그룹 행동이 갖는 힘은 폭발적이다. 촛불문화제의 적절한 동기는 '쇠고기 협상'이었고, 절적한 도구는 '촛불'이었다. 그리고 이 이면에 흐르는 문맥이 있는데, 그것은 변화이다. 10년 전만 해도 촛불문화제는 폭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갤리온)의 저자 클레이 서키(Clay shirky)는 택시 뒷자리에서 휴대폰을 잃어버린 '에반'의 이야기를 통해 5년이나 10년 전과 지금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설명한다. 에반의 휴대폰을 주은 인물은 사샤. 그는 에반이 휴대폰을 찾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고, 자신이 경찰에 의해 붙잡힐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에바가 홈페이지를 통해 이에 대한 글을 올리자 유저들은 관심을 제공함으로써 에반이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도록 했고, 에반은 그 관심을 잘 이용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일을 맡았다. 이 사건은 유수의 신문사들에게까지 알려져 보도되었고 한 동안 사회의 엄청난 관심을 끌었다. 이것은 지역적 사건이 순식간에 국제적 사건으로 확대될 수 있는지, 그리고 옳은 대의를 위해서라 그룹 동원이 얼마나 쉽고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촛불 이야기에 적용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가녀린 여중생 십여 명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설 때만 해도 50만의 촛불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부의 쇠고기 협상이 부당하며, 우리 아이들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겪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홍수처럼 사람이 늘어났다. 인터넷과 휴대폰 문자로 인해 청계천과 광화문은 단지 서울의 한 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외국인들이 관심을 갖게 된 세계적인 장소가 되었다. 이 국제적인 촛불이 타오른 사건에도 달라진 시대적 상황과 대중들의 역동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새로운 대중은 '조직'이 다르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이유를 자세히 알수록 일을 많이 하게 된다. 이미 할 의향이 있는 일도 더 쉽게 더 많이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면 훨씬 더 많이 할 수 있다. 이것이 인센티브의 법칙이다.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갤리온)) 경제학에서 이견이 없는 몇 안 되는 법칙 중 하나가 바라 사람들이 인센티브에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끌리고 쏠리고 들끌다, 27쪽)
기존의 조직과 새로운 조직 사이에는 '관리비용'이라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거대 기업은 소프트웨어를 만들 그룹이 스스로 형성되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직원들이 노동력을 관리한다. 직원들은 자유와 봉급을 맞바꾸고 직원의 생산물을 감독하고 모니터하는 비용을 부담한다. 조직이 수백, 수천으로 커지면, 그 관리자들까지 관리를 해야 하고, 결국에는 관리자들의 관리자들도 관리해야 한다. 종국에는 그 조직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엄청난 관리비용이 필요하다. 이들에게는 '시간이 돈'인 까닭이다.
조직의 달라진 패러다임을 설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저자 클레이 서키가 직접 경험한 AT&T와의 파트너십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사이트 스페시픽(site specific)라는 작은 웹 디자인 회사에서 기술 책임을 맡고 있던 저자는 AT&T라는 거대 기업과 계약을 맺게 되었다. 그런데 저자의 회사는 대부분 20대 청년이었으나 AT&T의 파견직원은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한 베테랑들이었다.
그들이 논쟁하게 된 것은 프로그래밍 언어의 채택 때문이었는데 저자의 회사는 펄(perl)이라는 언어를 쓰는 데 비해, AT&T는 C++을 고수했다. 그들은 '펄'이 '상업적 지원'을 어디에서 받느냐고 물었지만, 펄은 '필 커뮤니티'로부터 지원을 받을 뿐이다. 그것도 무료로.
대기업의 파견 직원들은 이 사고방식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연히 돈을 지불하고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지원을 받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 커뮤니티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돌아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어려운 질문을 생각해내 comp.lang.perl.misc에 올리자 AT&T와의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답이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대기업의 직원들을 설득하는 것은 결국 실패한 모양이다.
그로부터 10년 후 펄 커뮤니티는 규모를 더욱 키워간 반면 AT&T는 거듭된 대규모 정리해고와 대체 전략 개발에도 불구하고 회사 몸집이 보잘것 없을 정도로 줄었고, 결국 2005년에는 10년 전에 비해 규모가 1/5의 가격으로 매각되고 말았다. 펄 커뮤니티는 오늘도 펄을 사랑하는 수백만 명이 펄로부터 하루를 시작해 펄로 하루를 마감하기 때문에 건재하다.
이렇게 새로운 조직이란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아낌과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됨으로써 시간을 영속하는 것이다.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두 번째 촛불의 길을 열어라

1989년 동독의 라이프치히에서는 시민들과 청년들이 동독에 대한 반체제 시위를 시작했다. 500명이 참여한 시위에서 경찰은 50명을 체포했다. 하지만 시위대는 기세가 꺾이지 않고 매주 시위를 열었다. 처음에는 아주 보잘것없는 규모였다. 때문에 정부로서도 조치를 취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사태를 주시하기만 했다. 솔직히 청계천에서 촛불을 든 여중생의 숫자보다 적은 군중들을 탄압해서 무슨 이익을 보겠는가. 그런데 매주 시위를 진행하면서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시위가 떡잎 단계를 지나 만개를 시작한 것이다. '대중적 기반'이란 시위 참가자 수가 아니라 시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잠재적인 사람들의 수로 측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결국 순식간에 시위대는 수십 수백만으로 불어나 베를린장벽은 허물어졌다. 이것을 정보의 폭포현상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시위대의 숫자로 일희일비를 한 셈이다. 그리고 하루에 한번씩 시위를 하면서 50회를 넘긴 시점에서 피로도가 발생했다. 이것은 몇 가지 법칙을 위배한 셈이다. 앞서 말했던 '용이성의 법칙'을 어겼다. 내가 취재한 바에 의하면 촛불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하루 하루 시위에 가세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한 직장인은 며칠 동안 시위에 참여하느라 직장에서 졸기가 일쑤였다고 했다.
두 번째 실수는 너무 자주 시위를 한 것이다. 로테이션이 되면서 지속성을 갖기 위해서는 라이프치히처럼 일주일에 한 번 정도가 적당했던 것 같다.
집단행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인식의 3단계를 통해야 하는데, 촛불에도 이를 적용할 수 있다.

1단계 : 모두가 무엇인가를 아는 단계
2단계 : 모두가 알고 있음을 모두가 아는 단계
3단계 : 모두가 알고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아는 단계

인식의 3단계에 도달해야만 집단행동이 일어날 수 있다. 시사저널 기자들이 시사인을 창간하는 과정에서 30억원이라는 자본금이 모인 것은 그들이 언론자유를 실천하면서 1년 내내 싸워왔고 독자들이 도왔고, 다른 언론이 지원하면서 인식의 3단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시사인의 경우 집단행동은 '지갑을 열기'였다. 촛불 역시 마찬가지다. 쇠고기 협정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것을 주장하면서 인식은 2단계로 넘어갔다. 매일같이 촛불시위가 진행됐고 경찰들이 진압에 나서며 2단계를 넘어 3단계로 향하고 있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는 불이 났다. 아마 가장 짧은 시기에 인식의 3단계로 도달한 것이 촛불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인식의 3단계가 당장 정부의 입장을 바꾸지는 못한다. 인식의 3단계가 반복되면서 규모가 커지면 정부 역시 자세를 바꾸지 않을 수 없다.
많은 곳에서 두 번째 촛불을 위한 준비작업이 한창이다. 두 번째 촛불이 인식의 3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깊은 성찰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최근의 촛불국면과 광고주압박운동 등 역사적인 대중들의 집단행동에 대해서 파악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클레이 서키의 <끌리고 쏠리고 들끓고>를 숙독해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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