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은 '계급'을 '안' 쓴 게 아니라 '못' 쓴 거다

요즘 실크세대, 88만원 세대, 박권일, 변희재, 우석훈에 관한 이야기가 신문지면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들이 써 놓은 글을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았는데, 출판계 선배들이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석훈, 박권일, 변희재의 칼럼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각자 평가받는 몫은 다르겠지만 공통적으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조선일보의 지적 물타기에 기여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노 지식인은박권일이 "계급문제를 쓸 경우 책이 안 팔릴 수도 있기 때문에 계급적인 문제에 세대론의 '당의(糖衣)'를 입혔다"라는 말을 강도 높게 비판하며 그들은 계급론을 안 쓴 것이 아니라 못 쓴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박권일 스스로 <88만원 세대>의 약한 고리라고 자아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어떤 자아비판인지 들djqhwk.

세대론에 집중하다보니 세대 내부의 양극화, 20대와 50대에서 쌍봉형으로 나타나는 불안정노동과 같은 주요 문제들이, 언급되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아쉽다. 그래도 새로운 형태의 계급모순들을 세대모순의 형태로 형상화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 88세대론 <조선> 독우물에 빠지다 일부

박권일은 세대론에 집중하다 보니 계급의 문제를 소홀히 다루었고, 남은 문제들이 미제 상태로 있었다고 평가하는데 그것으로는 모자라다. <88만원 세대> 자체가 새롭게 강화시킨 문제들이 있다. 계급 문제는 인간이 잉여물을 생산하는 순간부터 존재했던 근본문제다. 때문에 어느 나라이든 계급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 미군정, 이승만 정권, 6.25, 군부독재, 이명박 정부 등으로 계승되면서 계급문제의 싹이 잘려 버렸다. 계급문제를 언급하는 순간 '빨갱이'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특히 전쟁상황은 진정한 의미의 분서갱유가 이루어져서 우리들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을 기다려야 했다. 계급문제를 겨우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 지식인은 서태지와 촛불 등을 거론하며 그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한 지식인들의 헛발질이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들을 망쳐놨다고 개탄했다. 서태지는 87과 가장 가까운 문화적 현상으로 평론가들이 찬사해 마지 않았던 서태지 열풍(대단했다)가 지금 이루어놓은 게 뭔가가 그의 반문이다. 촛불도 다르지 않다. 촛불의 역사적 한계가 분명하고 메시지의 한계가 분명한데도 지식인들은 찬양조로 반응하다 보니 촛불이 주는 신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88만원 세대> 공전의 히트를 뒤로 읽어 보면

<88만원 세대>가 던져준 질문과 사회적 의미, 그리고 판매고(이것 또한 빠뜨릴 수 없다)에 대한 찬사는 귀가 닳도록 들었다. 그래서 이 현상을 뒤로, 혹은 거꾸로 읽어 보려고 한다. 나 역시 88만원 세대에 열광했고, 우석훈에게 열광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둔다.

1. <88만원 세대>가 사회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시대, 아니 우리 세대조차 대표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즉 <88만원 세대>에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지향할 담론들을 담아내고 있지 않다. 계급이라는 본질적인 문제에 닿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전략,전술도 없다. (그래서 변희재 같은 사람조차 빈틈으로 들어왔을 정도로) 우리 당사자들의 주된 전략은 바로 '연대'다.

"똑똑하고 덕이 높은 녀석들은 적장끼리도 친구가 된다. 하지만 같잖은 놈들은 같은 팀끼리도 죽을 때까지 아귀다툼을 한다" - 파스칼의 팡세 일부(글자만 거칠게 다듬음)

세대론은 전략적인 면에서 태생적인 한계를 드러낸다. 인간의 삶 자체가 투쟁이라면 투쟁의 성과는 '연대'를 위해서 얻어진다. 거대한 적을 앞에 두고 서로 연대하면서 극복하는 것이 싸움의 도다. '계급'은 거대한 적을 상대할 뿐이지만, '세대'는 많은 적들을 만들어 낸다. 세대끼리도 싸울 수밖에 없고 그들 사이에 연대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2. 386, 88만원 세대라는 말은 정명을 얻지 못했다. 노 지식인의 비판이 다시 등장하는데, 386이라는 말은 80년대에 학생들이 열정적으로 싸워 왔던 역사를 제대로 담아 내지 못한다. 더구나 세대론으로 포장된 수사다. 88만원 세대는 여기다가 '돈'이 덧붙는다. 그는 지식인들이 너무 대중의 눈치만 보면서 용어 선택도 '문자메시지'에너 나올 것 같은 것들을 쓴다고 비판했다.

<실크세대>라는 말도 우연히 이슬처럼 사라질 뿐이다

변희재에 대해서는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다. 앞서 지적한 386과 88의 용어적 결함을 극단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만 덧붙인다. 이것은 차라리 박권일의 평을 빌리는 게 좋을 듯하다.

(변희재는) TV 탤런트 분석서 <스타비평>이 데뷔작이며 2000년대 초반 '안티조선' 논객으로 활동하다 2000년대 중반부터 '안티포털 운동가'로, 요즘엔 <조선일보> 논객으로 활약중인 인사다.

실크세대라는 말이 얼마나 어이 없는 이름이냐면 실크세대와 실크의 의미만 놓고 보면 알 수 있다. (실크세대라는 말의 정의는 변희재의 칼럼에서 그대로 쓴다)

실크세대: 70년대 이하 생들로 386세대들과 달리 인터넷과 대중문화를 기반으로 전 세계를 연결하는 새로운 실크로드를 열어나가는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를 말한다.

실크 :
명주실 또는 명주실로 짠 피륙.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실크에서 어떻게 실크로드라는 말이 연결될 수 있을까. 실크로드 시이오 동아리 사람들에게나 통할 용어임이 분명해졌다. 그냥 자기들끼리 쓰는 용어를 88만원 세대를 대체한다 어쩐다 하는 것은 그야말로 '흰소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실크로드'라는 말의 기원에 대해서도 적절치 못하다. 실크로드는 내륙 아시아를 횡단하여 중국과 서아시아ㆍ지중해 연안 지방을 연결하였던 고대의 무역로로서 고대 중국의 특산물인 명주를 서방의 여러 나라에 가져 간 데서 온 말이다. 중국의 한무제 때 대신(大臣) 장건(張騫)을 시켜 서역의 길을 개척하면서 생긴 말이다. 우리는 흔히 '비단길'로 알려져 있지만, '비단'은 그야말로 구실에 불과했다.
한(漢)나라 때, 신강(新疆)의 이리(伊犁) 일대에 오손(吾孫)과 대원(大宛)이라는 작은 두 나라가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좋은 말들이 생산되었다. 당시 한나라 사람들은 이곳에서 태어난 좋은 말을 '서극천마(西極天馬)'라고 불렀다. 실크로드는 한무제가 서역의 말을 좋아하므로 대신들이 말을 얻으러 가기 위해 만든 길이다. 당시 중국에 말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한무제 개인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서역이라는 장대한 길을 뚫고 수많은 사람들이 젊음을 바쳤다.
우리나라의 '세대론'에 갖다 붙이기에는 썩 반갑지 않은 말이다. 우리나라 세대들은 모두 한무제의 욕망에 봉사한 그 길의 이름을 써야 한단 말인가. 실크세대를 고안한 사람의 인문학적 수준이 얼마나 천박한지 가장 잘 표현해주는 말이 바로 '실크세대'이다.


촛불에서 길을 잃은 사람의 회상

촛불집회가 한창 뜨거웠을 때 나는 일주일에 3~4일 정도 광화문에 '출첵'했다. 시민기자, 블로거기자로 현장을 기록했고, 많은 학생, 어르신을 만나 기사를 작성했다. 하지만 10여 차례 현장에 다니면서 회의가 밀려 왔다. 내가 하는 행위가 옳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촛불에서 해야 할 일은 길거리 한가운데에서 사람들과 강행군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는 이것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 회의감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그 회의의 대강을 체감하게 된 것은 나의 독서 지향점이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부터다. 나는 촛불에 다닐 때만 해도 우석훈, 장하준의 책을 즐겨 읽었다. 이것은 이명박이 '경제'라는 화두를 천박하게 사용하는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촛불현장에서의 회의가 우석훈, 장하준에 대한 회의와도 연결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연찮은 기회에 셰익스피어를 읽게 되었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싶어서 몸이 달았다.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자본론을 읽는 집단을 알게 되었고 3개월 넘게 자본론을 읽고 있다. (1-하권을 읽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 시사IN 신년강좌에서 만난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의 책을 열심히 읽고 있다.
위 책의 공통점은 고전이거나 근본적인 화두를 던지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나는 알려진 사람도 아니고 그저 성실하게 사회를 읽으려고 하고 책으로부터 지적 교신을 얻으려는 장삼이사에 불과하다.

장삼이사조차도 '근본적인 것'이 지금 시대에 꼭 필요한 가치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명망 있는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근본적인 문제는 추구하지 못하고 자꾸 대중의 눈치를 보는 비겁함을 보이는 것이 실망스럽다. 지식인의 죽음이라고 말은 하지만, 지식인의 죽음을 실제로 목격하는 장삼이사의 비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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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6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9-02-06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할 때 추천을 안 하셨군요 ㅋㅋ
정말 오랜만입니다. 아침에 댓글을 보고 하루 종일 기분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2009-02-11 1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회와 과학만 발전하면 좋은 텐데, 범죄의 기술 또한 발전하는 세상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범죄인 유괴의 기술이 발달하고 있어서 몹시 속이 상하다.

 

과자나 장난감 등을 이용해 호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옛날 방식이다.

요즘 유괴범들은 이렇게 접근하지 않는다. 예상 가능한 방식이어서, 평소 아이들에게 경각심을 높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의 여린 감정을 흔들며 접근할 때에는 아이들이 무방비 상태에 빠질 수 있다.

도움을 요청하거나 권위를 이용하는 방법이나. 약자로 가장해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하거나, 짐을 들어 달라고 할 수 있다.

어처구니 없는 것은 아이들의 꽃같은 여린 마음과 남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역으로 이용해서 유괴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에게 꽃 같은 착한 마음을 품지 말고 남을 항상 경계하라고 가르쳐야 할까.

 

 

<어린이안전365>(책읽는곰)에서는 유괴범들의 수법을 조사해서 패턴을 제시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 마치 공인된 설문기관인 것처럼 속이는 방법, 게임 등을 이용해 아이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방법, 어느 것을 살펴봐도 가공할 만한 수법이다.

 

이 책에서는 세 가지 원칙들은 떠올려 보라고 제시한다.

 

 

 

책을 읽으면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갖게 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사회가 좀 더 여유를 갖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사는 모습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가 이렇게 험악해진다면 아이들이 유괴를 당하는 일은 더욱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올 7월에 태어나는 아이를 기다리는 마음이 참으로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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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09-02-03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유괘가 아니라 유괴가 아닌가요? 브리핑 제목 읽다가 유쾌로 읽어서 난감했음.
아이들의 맘을 이런 식으로 악용하는 부분은 정말 문제가 많네요. 승주나무님이 아이에게 현명하게 지도해주실거라 생각해요. 저도 옥찌들에게 곰돌이처럼 말해줘야겠어요.

승주나무 2009-02-03 23:05   좋아요 0 | URL
아핫~ 그렇군요.
Arch 님 말 듣고 글자 고치면서 하나 발견했어요. 제목을 수정하고 엔터를 치면 바로 처리가 되더군요. 이런 거 난 왜 몰랐지 ㅋㅋ

Arch 2009-02-04 11:01   좋아요 0 | URL
어어, 나도 몰랐는걸요. 제 덕분에 아주 신선한 알라딘 기술을 배우셨으니 두턱은 쏘셔야...^^ 사실 쏘는 것보다 승주나무님이 조금만 덜 바쁘셔서 자주 뵙기를 간곡히 바라옵니다.

승주나무 2009-02-04 15:51   좋아요 0 | URL
네~ 아치 님^^ 저도 좀 덜 바빠질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ㅎ

하늘바람 2009-02-03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현실적이고 꼭 필요한 책이네요. 음 하지만 이런 내용으로 책이 나오는게 참 슬프네요

승주나무 2009-02-04 15:52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이 책이 잘 팔린다면 그건 무척 슬픈 현실이죠...

바람돌이 2009-02-04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가진 부모는 여기에다 플러스 알파까지 걱정된답니다. 에휴~~ 세상이 좀 더 평등해지고 사회적 약자에게 제대로 된 배려가 있는 것만이 해결책이 될건데 왜 그걸 모를까요? 모르는게 아니라 모르는 척 하는거겠지요?

연두부 2009-02-04 11:06   좋아요 0 | URL
딸가진 부모 마음....미투

승주나무 2009-02-04 15:52   좋아요 0 | URL
딸뿐 아니라 아들도 마음을 놓을 순 없습니다. 실제 범죄의 피해를 보는 아이들은 여자 아이들이 더 많은 것 같지만...
 

성공한 법관의 법복을 입는 법


▲ 2월 2일자 한겨레 1면에 법조인의 두 목소리가 한데 모였다. 촛불 집회를 처벌하는 집시법 조항에 대한 위헌 제청을 낸 박재영 판사의 사직서 제출 소식이다. 하지만 왼쪽의 변호사 개업광고가 더 눈에 띈다. 광우병에 대해 보도한 PD수첩에 대한 기소를 포기하고 검사복을 벗은 임수빈 검사의 변호사 개업 인사다. (사진 : 독설닷컴)


80년대 민주화 투쟁현장을 누볐던 선배들이 잊을 수 없는 검사의 이름이 있다.
바로 '임채진' 검사였다. 당시 공안검사로 이름을 날리던 임채진 검사가 휘두르는 서슬 퍼런 칼날에 날아간 젊음이 지천에 깔렸다.
그래서 '임채진이'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 임채진 검사는 삼성 떡값 파문에서도 등장하는데, 김용철 변호사에게 버젓이 떡값을 요구했다는 폭로가 무섭게 울렸지만,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안전히 검찰총장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4대 권력기관장 중에서 유일하게 유임된 사람이 바로 임채진 검찰총장이다.

법복을 입은 임채진 검찰총장이 바로 이 시대, 난세의 전형적인 성공케이스다.
난세에 소신을 지키며 법복을 입고 있기는 어렵지만,
법복으로 몸과 마음의 눈을 가리고 안락한 삶을 살아가기는 쉽다.
우리나라가 '이 모양'이 된 이유는 난세에 법복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보다,
난세에 법복으로 눈을 가린 사람이 월등히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법복을 벗음으로써 법복의 가치를 지켜낸 사람들

실로 공안의 시대다.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폭압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공안검사들이 득세하였는데, 검찰의 최근 인사를 살펴보면 공안통들이 대거 권부에 진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안이 떠드는 곳에 말이 다닐 수 없고, 피가 마르지 않는다.





이런 삭막한 시대에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소중한 두 명의 법관을 만날 수 있었다.
탄탄대로를 달려가던 서울대 법대 출신의 엘리트 검사가 광우병 쇠고기의 문제를 제기한 PD수첩을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며 사표를 썼다. (임수빈 검사(오른쪽))
한 판사는 자신은 정부와 같이 가야 하는 공직자로서 현 정부에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법복을 벗기로 했다고 한다. (박재영 판사(왼쪽))
법관들은 참으로 멋진 표현수단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법복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역사가나 문학가보다 더 멋지게 시대를 표현할 수 있으니까 소설가 지망생인 나로서는 이들의 표현수단이 무척 부럽다.

박 판사는 지난해 10월 촛불집회 주도 혐의로 기소된 안진걸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조직팀장의 신청을 받아들여 “집시법 10조는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지며 이들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는 헌법 21조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위헌적 조항”이라며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 심판을 제청했다. 집시법 10조에 대한 헌법소원은 그동안 여러 차례 있었지만, 재판 중에 판사가 피고인의 신청을 받아들여 위헌법률 심판을 제청하기는 처음이었다. 박 판사의 제청으로 촛불집회 관련 일부 재판이 중단됐고, 헌법재판소는 오는 3월 야간 옥외집회 금지 조항의 위헌 여부를 두고 공개변론을 열게 됐다.


인생을 건 판결을 내려야 하는 이림 판사의 선택은?

서울중앙지법 형사2단독 법정에 세간의 이목이 모아지고 있다. 조중동에 광고를 게재한 기업들에게 윤리적 언론관을 설득하며 광고를 내릴 것을 요청한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언소주)의 '조중동 지면광고 불매운동'(조중동 광고불매)에 대한 재판이 2월 19일 제1심 판결을 앞두고 있다.

검사는 애초에 무리한 공소권을 사용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일례로 카페 게시글에 'ㅎㅎㅎ'라는 의성어를 쓴 일이나 카페 메인에 태극기를 디자인했다는 내용이 공소사실에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업무방해'의 범위가 매우 추상적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고발기업의 명단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몇몇 기업들은 증인으로 참석해 업무방해가 아니라고 주장하기까지 했고,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반론을 펼쳤고, 대부분의 기업들이 고발을 취하하는 등 공소유지의 명분이 없어진 상황에서 검찰은 살인 초범의 형량인 징역 3년을 구형하는 등 언뜻 살펴보아도 상식에 어긋나는 기소였다.

이 사건의 최후 판단을 하는 사람은 이림 부장판사인데, 개인적으로 나는 그 분이 법관을 계속 하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번 재판을 살펴보면서 이림 판사는 무척 합리적인 성품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정부와 너무나 다른 컬러를 가지고 있는 판사라는 점이 걸리기는 하지만 이림 판사가 명철보신(明哲保身)하고 위행언손(危行言遜)해서 재판부를 지켜주기를 바란다.

언소주 재판 관련해서 이림 판사의 성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하나 있다. 검사와 조선일보의 증인이 짜고 신문사항을 공유한 사건이다.(난생 처음 참석한 재판정, "버젓한 법정모독" 씁쓸..) 변호사가 검사의 신문사항과 증인의 답변서를 들고 이림 판사에게 제출했을 때 검사의 신문사항 '가나다'와 증인의 답변지의 '가나다'가 정확히 일치했다. 이 때 이림 판사가 한 조치들은 박수를 받을 만했다.

변호인단은 검사와 증인의 행위가 형사소송법 위반이므로 증인을 배제하거나 증인이 증언한 부분을 속기록에서 삭제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미국과 달리 형법 및 기타 형사특별법에 법정모독죄는 없다. 증인신문사항을 증인과 공유하였다고 하여 처벌하는 규정이 없어 죄형법정주의상 처벌은 불가능하고, 다만 허위의 사실을 증언하면 위증죄로 처벌받을 뿐이다.

때문에 이림 판사는 검사의 해명을 배제한 채 증인에게 검사로부터 신문사항을 미리 받았는지를 물었고 증인에게 거짓말하면 위증의 벌을 받을 수 있음을 여러번 경고했다. 증언에 관해서 기록을 삭제하도록 요구한 변호인의 주장에 대해서 증언의 내용은 자신이 판단하겠다라고 말한 것은 형사소송법상 자유심증의 원칙, 즉 판사가 여러가지 제반사정을 종합한 후에 경험칙과 논리칙에 입각하여 자유로이 위 증언의 신빙성을 판단하겠다라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만약 증인이 위증을 했다손 치더라도 속기록을 삭제해서는 안 된다. 추후에 증거자료를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림 판사는 변호인단에게 '속기록을 삭제하는 경우는 없다'고 말했는데, 그 말이 얼마나 깊은 뜻을 가지고 있는지 당시는 알지 못했다. 현장에서 이림 판사의 조치를 지켜보고 있었을 때는 재판장이 변호인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아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재판장의 조치는 최고로 현명한 선택이었고 그 과정 자체도 깊은 사려가 배어 있었다. 언소주는 이림 판사를 만남으로써 어쩌면 행운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이야기를 접한 법조계의 지인분은 "재판장은 충분히 재판의 공정성을 보장할 수 있는 분이니, 인내심을 가지고 재판을 지켜볼 만하다"고 평가했고, 다른 분 역시 "분명히 올바른 판결이 내려질 것이란 확신이 든다"고 말했다.

이림 판사에게는 세 가지 길이 있을 수 있다.
첫째, 재판을 정권과 조중동이 원하는 대로 판결하는 것.
둘째, 정권과 조중동, 그리고 시민들 모두 크게 원망하지 않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은 판결.
셋째, 시민들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

언론운동을 하는 시민의 입장에서 나는 세 번째 판결을 내려주기를 바라지만,
이림 판사의 재판 과정을 조용히 지켜본 한 인간의 입장으로는 두 번째 판결을 내려주었으면 좋겠다.
세 번째의 길을 간다는 것은 앞선 두 법관처럼 법복을 벗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글 속에서 재판이라는 공적 판단을 넘어서는 말들을 쏟아내서 공정성을 스스로 상실해 버렸지만,
이림 판사가 재판부에 꼭 필요하다는 생각은 지금도 갖고 있다.

마음속으로 존경을 하게 된 이림 판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첫 번째 판단은 제발 해주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첫 번째 판단을 내리면 이림 판사 본인으로서는 정권에서 승승장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원히 민주의식을 얻지 못한다면 그냥 묻힐 수도 있다.
하지만 언론 운동의 역사와 현대사를 거론하면서 영구히 역사에 이름이 남게 된다.
이림 판사가 언론운동을 좌절시킨 장본인이라는 기록을 만나게 된다면 나는 인간적으로 감화를 느낀 최초의 판사를 잃어 버리는 것은 물론 평생 씁쓸한 마음을 가슴에 담아두어야 할 것이다. 이림 판사는, 아니 이림 판사의 성품은 그런 비판을 받아서는 안 된다. 세 번째 판단을 한다면 전혀 반대의 기록으로 남겠지만, 그것은 내가 바랄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림 판사의 고뇌에 힘을 보태고 싶다. 

 

 

[파일:1]

 


 

 

자유토론 추천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2253714

 

정치토론 추천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01&articleId=2192614

 

사회토론 추천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0&articleId=559673

 

언론토론 추천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03&articleId=52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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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부 2009-02-04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주나무님 이글 퍼가도 되나요?

승주나무 2009-02-04 11:09   좋아요 0 | URL
네.. 퍼가는 거 환영입니다^^
 
 전출처 : 승주나무 > 삼국지 백번보다 사마천 한번 읽는 게 낫다

'김영수'의 문을 열고 사마천으로 들어가다

사마천과의 만남이 무척 운명적이었듯, 김영수 선생과의 만남 역시 갑작스러웠다. 이미 EBS에서 <사기와 21세기>라는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진행했던 터라 소문을 들었을 만도 한데 나는 사마천의 국내 전공자가 없다는 사실에 무척 목이 말라 있었다.
"삼국지를 10번은 읽어야 세상사를 논할 수 있다"는 저잣거리의 수사를 품에 안고 살기를 20여년 '사마천'이라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의 역사서 <사기열전>으로 한문공부를 시작했다. 충격적인 인물을 여태 모르고 있었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삼국지 따위를 버리고 사마천에 빠져들었다. 특히 지금도 흉노열전과 화식열전, 골계열전은 무척 현대적이며 세련미가 있다. 2,000년도 전의 인물인데 말이다.
이런 매력적인 인물에 미친 사람이 이렇게 없을까. 사마천 연구자가 우리나라만큼 빈약한 곳이 또 있을까. 국내의 사마천 책은 번역서가 대부분이다. 김영수 선생에 의하면 그것도 사기열전에만 편중돼 있어서 사마천이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고 한다. 김영수 선생의 책 <난세에 답하다>를 보면서 평소 즐겨 읽던 사마천의 새로운 관점들을 알 수 있어서 무척 즐거웠는데, 오마이뉴스 스튜디오에서 생중계로 진행한 김영수 작가와의 대화에서는 책에서 읽지 못한 사마천의 심도 있는 해석방법과 현대에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마구 얻어갔다. 좋은 작가와 만나면 좀처럼 자리를 뜨지 않는 성미에다가 출판사와의 남다른 친분(?) 때문에 김영수 작가와 밤늦게까지 사마천에 관한 이야기를 할 기회를 얻어서 무척 즐거웠다.

김영수 선생은 현장 찬미가이다. 박사 과정을 포기하고 중국에 들어갈 결심을 하고부터 지금까지 100여 차례 중국을 돌며 사마천의 흔적을 취재했다. 그의 정성이 얼마나 깊었던지 사마천의 고향인 중국 섬서성 한성시 서촌은 성생에게 명예촌민이자 한성시홍보대사로 위촉할 정도였다. 사마천을 사기를 저술하면서 한나라 당대사 이전의 역사, 특히 춘추와 전국시대의 역사는 <전국책>과 <국어>의 내용을 원용했지만 시민기자로서 가장 존경스럽고 아름다운 부분은 그의 취재정신이다. 영웅의 후손을 만나보거나 고향으로 직접 찾아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서 역사에 기록하는 등 <사기>에는 사마천의 취재기가 곳곳에 배어 있다. 김영수 선생은 중국을 직접 오가며 취재를 하고 나면 사마천의 문장들이 더욱 깊게 다가오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난세에 답하다>에는 김영수 선생이 직접 보고 들은 취재기가 많이 수록돼 있는데 창의적인 역사의 서술은 면밀한 자료조사와 현장 취재에서 나온다는 것을 나는 사마천과 김영수 선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 국내에서 유일하게 사마천 연구를 왕성하게 하고 있는 김영수 작가의 강연회에는 고른 연령대의 독자들이 자리를 채웠다. 생중계 시작할 때는 독자들도 작가도 잔뜩 긴장을 했지만 이야기보따리가 풀리며 김영수 작가의 표정처럼 모두들 원만한 분위기가 되었다.


<사기>에 최초로 아로새긴 비밀

김영수 선생의 남다른 독법에 감탄을 자아낸 부분이 있었다. 그야말로 들으면서 무릎을 탁 쳤다. 지금 사기 본기와 세가, 열전을 펼쳐보며 확인작업을 하고 있는데 세 편명의 첫머리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사기본기의 첫머리는 <오제본기>, 세가는 <오태백세가>, 사기열전은 <백이숙제열전>이다. 모두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양보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중국사의 성군 요왕은 아들이 아니라 신하인 순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이른바 '선양'을 하게 되는데, 선양은 중국사에서 매우 고귀한 가치이다. 선양과 세습은 성인이 바라보면 매한가지이지만 범인의 관점에서는 하늘과 땅의 차이다. <오태백세가>는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오랑캐 나라로 도망간 오태백의 이야기를 다룬다. <백이숙제열전>은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해 수양산에서 굶어죽은 고죽국의 왕족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다. 세 편을 뒤적거리며 '양보'라는 가치가 빛을 드러낸다. 김영수 선생은 이 밖에도 사마천의 사기는 무척 신비스러운 안배가 숨어 있다고 한다.
꿈보다 해몽이 더 마음에 드는 경우도 있었다. 김영수 선생은 골계열전을 사기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편명 중에 하나로 꼽는데, 그것은 바로 '유머'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노벨상 수상자들과 하버드 학생들의 공통점은 유머를 구사할 줄 안다는 데 있다. 창조적 정신과 드높은 교양은 유머를 통해서 나오는데, 유머가 없는 사람일수록 진취적이지 못하다.

몇 년 전 블레어 영국 총리가 '부시의 푸들'이라는 별명으로 곤욕을 치르던 시기에 공교롭게 부시와 블레어가 공동 기자회견을 하게 되었다. 짓궂은 기자가 부시에게 "블레어가 당신의 푸들이라고 하는 말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물어다. 블레어가 옆에서 끼어들며 "Yes라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렇게 된다면..." 기자들이 웃었다. 부시는 정색하며 "블레어 총리는 나의 소중한 친구이지 절대로 푸들이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기자회견장은 순간 멍한 분위기가 되었다. 국가 지도자가 무능한 것은 그런 대로 참을 만한 일이지만, 국가 지도자가 유머가 없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개그콘서트>라도 보면서 억지 유머라도 키웠으면 얼마나 좋을까. 골계열전에서 사마천은 두 번이나 찬평을 하는데 시경이나 서경 등의 육예뿐만 아니라 골계미 넘치는 은밀한 말 속에도 이치에 맞는 것이 있어 이것으로 얽힌 것을 풀 수 있으니 위대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김영수 선생은 이를 이렇게 해석했다.

세상사가 예의범절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무언가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유머다.

김영수 선생이 극찬을 아끼지 않은 편명은 열전의 맨 마지막 편인 <화식열전>이다. 사마천이 넣을까 말까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배치다. 아니나다를까 <화식열전>으로 인해 사마천은 후대 사가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 했는데, 그 중 가장 심하게 평가한 사람은 <한서>를 엮은 반고다. 사리사욕의 문제를 역사책에 다뤘다고 '탐욕'이라는 글자까지 써서 비난했다는 것이다. 김영수 선생은 <화식열전>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혀를 내둘렀다. <화식열전>은 경제와 사람의 함수관계를 가장 정확히 지적했다는 것이 김영수 선생의 평가다. 그것은 화식열전의 한 구절을 꺼내봐도 알 수 있다.

"천금을 가진 부잣집 자식은 저잣거리에서 죽지 않는다."(화식열전, 중국속담)


▲ 중국 섬서성 한성시에 세워진 사마천상 영상자료를 설명하는 김영수 선생. 무엇이 그에게 평생토록 사마천 연구에 매진하도록 만들었을까?



현 정부, 국민, 재벌 CEO에 대한 따끔한 지적들

"우리 스스로가 왕조를 극복해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현대사의 비극을 운위할 수 있을까요?"

김영수 선생이 뭇 사람들에게 내리는 정직한 진단이다. 역사 민주화에 한해서 우리는 중국만도 못하다고 비판했다. 중국은 당 태종이라는 왕호를 버리고 이세민이라는 실명을 쓴 지 오래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세종 대왕을 '이도'라고 부르지 못하고, 정조 대왕을 '이산'이라고 부르지 못한다. 그나마 '이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드라마 때문일 것이다. 김영수 선생은 간신에 관한 책을 두 권이나 출간했지만, 정작 우리나라 간신에 관한 책을 내려고 했을 때 선뜻 나서는 출판사가 없었다고 술회했다. 그것은 우리가 역사에 대한 민주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조선시대의 인물계보에 관한 역사를 추적하던 한 학자가 괴한에게 린치를 당했다. 감히 자신의 조상의 뒷조사를 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는 이것이 우리나라의 현주소라고 씁쓸하게 말문을 이어갔다.

그는 정직이 학문의 전부라고까지 말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특정 후보에게 몰표를 주고, 뉴타운 총선에서 특정 정당에게 몰표를 주면서도 자신이 뽑은 사람들을 욕하는 모순과 이중성이 어떤 무게 있는 비판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하고 토로했다. 그는 한국인들이 못된 이중심리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리더의 자질을 기대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리더를 보필하고자 하는 생각이 없고, 리더의 리더십에만 편승하려는 무척 이기적인 사고방식이 현재 한국인들의 정서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이 리더십의 경전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리더십과 동시에 펠로우십(fellowship)을 꺼내들고 있기 때문이다. 펠로우십의 가장 전형적인 인물은 '포숙아'다. 관중을 처형하려는 제환공의 마음을 바꾸어 재상으로 기용하게 하여 제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 놓은 것은 관중의 리더십이 아니라 포숙아의 펠로우십이 조화를 이루었기에 가능했다.

현 정부의 정직하지 못함도 아울러 꺼내들었다. 정치인을 내각에 임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명해놓고 이달곤 국회의원을 행안부 장관으로 내정한 것은 상상치도 못할 거짓이라고 경악했다. 청와대와 여권의 해명은 더욱 말문이 막힌다. 국회의원을 했지만 평생 연구자로 있었기 때문에 이달곤 국회의원을 정치인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김영수 선생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이어진 술자리에서 말과 언로에 대한 진귀한 답변을 들은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진국이다. 말이 통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말의 격을 세우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 CEO들의 학습 태도를 지적하며 말의 저급화를 지적했다. CEO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고 나면 꼭 마지막에 '요약'을 해달라는 게 그들의 습관이라는 것이다. 파워포인트 같은 단순명쾌한 요약자료에 익숙해진 그들은 오의()라는 말과는 너무나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CEO들뿐이랴. 솔직히 나는 <난세에 답하다>가 너무 대중적이고 쉽게 쓰여진 것에 불만을 토로했는데, 책에 대한 리뷰를 분석한 편집자에 의하면 "책이 너무 어려운데 좀더 쉬운 개설서를 써달라"는 문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우리 자신의 허물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누군가 나서주기를 바라고 뭔가 좋게 바뀌기를 바라기만 하는 무책임함이 대한민국을 유령처럼 떠다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때의 비감함이란.


▲ <난세에 답하다>는 현대사회가 새겨들어둘 만한 키워드만을 뽑아 사마천의 사기를 풀어쓴 이야기책이다. 사마천에 대해서 좀 더 심도 있는 담론을 원하는 욕심 많은 독자라면 김영수 작가의 <역사의 등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창해)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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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9-02-02 0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저도 대학 다닐때 사마천의 <사기>를 좋아라했어요. 대학 다닐때만 열전을 두 번 읽었던 듯 합니다. 그 때 저도 삼국지보다는 사기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승주나무 2009-02-03 23:06   좋아요 0 | URL
사기를 볼 때마다 참 느껴지는 바가 많았어요. 사람의 이야기를 희구하던 시대였는데 영웅들의 인생무상도 맛이 좋았습니다.
 



워낭소리
(Old Partner, 2008)
감독 : 이충렬


워낭소리는 시간의 시작과 끝

이 영화를 보고 싶어서 글을 남긴다.
얼마 전에 회사 동료가 시사회 갔다 온 이야기를 한다. <워낭소리>를 나는 <원앙소리>로 알아듣고 무슨 새 영화인가 했다. 알고 보니 새 영화가 아니라 소 영화였다는 것. 며칠 동안 개봉관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했지만 좀체 찾을 수 없던 터라 이번에 입소문을 통해 개봉관을 늘린다는 소식이 반갑기 그지 없다. 설에 제주에 내려갔을 때는 그런 영화가 있는지조차 잘 몰랐는데, 이 영화가 지방에까지 확대되었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에서 입소문은 참 무서운 것이니까.


소와 땅과 사람이 시간을 타고 흘러가는 시작과 끝이 바로 워낭소리다. 워낭이란 마소의 귀에서 턱 밑으로 늘여 단 방울이나 마소의 턱 아래에 늘어뜨린 쇠고리를 말하는데 소의 마음을 대신 표현하는 장치이다. 노인이 30년지기 늙은소의 워낭을 직접 풀어줌으로써 소리의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울림은 더욱 커진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도를 통해 본 적이 있었는데, 이 정도라면 '울림'이 아니라 '떨림'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우리에게는 잔잔하게 어제와 오늘을 성찰하는 기회가 참으로 필요했다.


숨비소리는 자연에 가장 가까운 인간의 소리

‘숨비소리’란 잠수하던 해녀가 바다 위로 떠오를 때 참던 숨을 내쉬는 휘파람 같은 소리를 일컫는 방언을 말한다.
제주의 해녀들에게 오래된 불문율이 있다. 아무리 넓고 파도가 센 바다라고 해도 해녀는 이를 맨몸으로 상대해야 한다. 일체의 장비를 들고 채취를 할 수 없다. 때문에 폐활량만이 생산량을 결정한다. 짧은 순간 깊고 위험한 바닷속에서 온갖 욕망과 사명감이 해녀를 부둥켜 안고 사연이 절박할수록 소리도 따라간다.


 

▲ 이성은 사진집 <숨비소리>의 한 컷

이성은의 사진집 <숨비소리>에서는 할머니 해녀의 숨비소리를 절묘하게 포착하며 아래와 같은 설명을 붙여 놓았다.

"물안경을 쓴 할머니가 물 위로 떠올라 숨을 내쉬는 순간이다. 그 한숨은 이 노련한 해녀에게만 시원한 것이 아니다. 그 모습을 보는 우리도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된다. 물위로 솟아오를 때까지 참아야 했던 숨을 몰아쉬며, 그 유명한 휘파람, 즉 우도사람들이 "숨비소리"라고 부르는 그 숨을 토해내는 할머니의 얼굴은 그냥 그대로 살아있는 화석이다. 사진의 요약과 함축과 포착의 모든 기법이나 기교를 부질없는 솜씨로 만드는 순간이다. 수경의 유리 숙에 반영되는 그 깊은 주름의 얼굴은 한 점의 '데드마스크'처럼, 아찔한 순간 속에서, 죽어가면서 영원히 살아나고, 살아나면서 영원히 죽어간다."

숨비소리는 자연에 가장 가까운 인간의 소리이지만, 그 본질은 '투쟁'이다. 바다와의 사투이며 자기 자신과의 사투이다. 차라리 신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숨비소리>를 주제로 한 작품들은 많이 발표되었는데, 나도 이를 주제로 무엇인가를 하나 꼭 만들고 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우리 엄마가 수십 년 동안 나를 키워내며 매일같이 내던 소리도 바로 숨비소리였으니까.

덧 : 태명을 '소리'라고 지었는데, 성과 함께 붙이니 듣기 좋지 않다며 마눌님은 마뜩찮은 눈치다. 이름도 아닌데....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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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1-30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태명은 뿡뿡이 같은 것도 귀엽던데요. 이번주말에 워낭소리 보러갈 예정입니다. 제법 손님이 든다고 하더라구요. 다행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잘 되었으면 합니다.

승주나무 2009-02-01 00:52   좋아요 0 | URL
휘모리 님~ 안녕하세요. 이번 다큐영화는 정말 잘 돼야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보고 많은 흔적을 남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는 반성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드팀전 2009-01-30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숨비소리'...아..그거군요.아..그거였어요.
(이런 제길...다큐영화 '해녀'가 준비중이군요.)

카메라의 찰칵하는 셔터소리와 '파아'하는 숨소리가 동시에 들립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어떤 영원함이 포옹하고 있는 무언가가 느껴집니다.
제가 최근에 본 페이퍼 중 가장 좋네요. 바람구두의 시 한편과 함께

워낭소리 이충렬감독은 원래 소가 아니라 '아버지'를 찍으려고 했답니다. 그러다가 경북 봉화에서 주인공 할아버지와 소를 소개받은 거지요. 이충렬 감독은 아버지의 DNA와 소의 DNA에 어떤 공통점을 본다고 합니다. 그래보이지요.^^ 승주나무님도 곧 아빠가 되실터이니..
저희 첫째아이의 태명은 '아침'이었고..지금 뱃속에 있는 아이는 '보리'입니다.



승주나무 2009-02-01 00:54   좋아요 0 | URL
드팀전 님의 칭찬을 들으니 무척 기분이 좋아져서 신나는 하루였습니다.
바람구두 님의 시는 어디 가면 볼 수 있을까요. 저도 바람구두 님의 글을 좋아합니다. 요즘은 더욱 부드럽고 친숙한 문체가 돋보이더군요^^

Mephistopheles 2009-01-30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낭소리는 저번에 '바시르와 왈츠를' 보러 갔을 때 극장에 꽂혀있는 선전지를 보고 봐야지..했던 영화였었는데..이게 볼 수 있는 시간이 있을진 모르겠더군요..^^

승주나무 2009-02-01 00:54   좋아요 0 | URL
바시르와 왈츠를.. 정말 좋았습니다. 영화에 대한 페이퍼를 곧 보실 수 있을 듯~~

2009-01-31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9-02-01 00:54   좋아요 0 | URL
정말 간만이에요. 예전에는 제가 설 인사를 드렸던 기억이 나는데..

어떤 다른 삶인지 카페에 마주앉아서 들어보고 싶어요. 지난번처럼^^

올레길 2011-09-15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할머님의 호오이 호오이~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