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라주미힌 > [펌] 물리학자가 바라본 황우석 논란

 


몇 달 전 SCI급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을 발표하는 세미나를 한 적이 있었다. 끝날 무렵에 누군가가 이렇게 질문했다.
“그 계산 결과를 내가 도대체 어떻게 믿을 수 있죠?”

한편으로 생각하자면 남의 계산 결과를 의심하는 것이 상당히 무례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런 질문은 사실 학계에서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만약 내가 거기다 대고 “이미 학술지에 실린 논문인데...” 라고 대답한다면, 웃음거리가 되지는 않더라도 아마 질문자에게 충분한 해명이 되지는 않았을 터이다. “제 계산 노트 보여 드리죠.” 라는 한마디로 상황은 끝났다.


물리학을 전공한 내가 박사과정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은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것이었다. 흔히 교과서라고 불리는 출판서적들은 물론 유명 학술지의 ‘검증된’ 논문조차도 자기가 직접 확인해 보기 전에는 “절대로 믿지 말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였다. 실제로 과학이 발전해 온 역사를 보더라도 이런 의심과 회의야 말로 과학의 성공을 보장해 준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심과 회의는 필연적으로 기존의 권위와 상식에 대한 도전일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 도전받는 권위는 이런 갖가지 도전을 이겨냄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해 낸다. 그래서 귄위에 대한 도전과 의심, 공격과 방어는 매우 자연스러운 과학 활동의 일부분이다.





천하의 아인슈타인도 양자역학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과학자로 남았다. 스스로가 생애 최대의 실수라고 인정했던 우주상수는 근래에 와서야 그 중요성이 다른 이유로 인해 다시 주목받고 있는 실정이다. 현존 최고의 물리학자라는 스티븐 호킹도 블랙홀에서의 정보 상실이라는 자신의 주장이 무수한 공격을 받았지만 아무도 그런 의심과 도전을 ‘흠집내기’라는 식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최근에 그는 자신의 이론을 일부 수정하기에 이른다. 실험과학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비교적 큰 규모로 이루어지는 실험 결과를 놓고서도 저건 잘못된 실험이라는 주장들이 언제나 제기된다. 그 결과가 어느 학술지에 얼마나 비중있게 실렸나 하는 사실 자체는 과학적인 근거와 관련해서는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과학자가 자신의 양심과 과학적 근거에 비추어 납득되지 않으면 의문을 제기하고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그들의 본능에 가깝다. 과학자들은 수년에 걸쳐 그렇게, 어지간해서는 “절대로 믿지 않도록” 철저하게 교육받기 때문이다. 과학이 지금까지 성공한 학문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과학적 방법론이 그 활동의 모든 과정에서 철저하게 관철되기 때문이다.


최근 황우석 교수팀의 인간 배아줄기 세포와 관련된 논란을 보면서 한 가지 매우 안타까운 점은 그 어디에서도 문제해결을 위한 과학적 방법론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사이언스나 네이쳐라는 학술지가 연구결과 혹은 진실의 최종 잣대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과학자들에게는 그저 이름있는 학술지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단지 거기에 실렸다는 이유만으로 그 논문을 믿는 과학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래서 논란의 초기에 황우석 팀에서 ‘사이언스에 실렸으니 검증이 다 되었는데...’라고 주장하는 것은 적어도 과학자의 상식으로 봤을 때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그런 주장을 대한민국 최고의 과학자 집단에서 했다는 사실, 과학계에서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권위에 대한 도전과 의심과 회의를 흠집내기로 몰아가는 태도 등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일반인들의 여론과는 달리 젊은 과학자들이 모이는 인터넷 게시판들(scieng나 kids, 혹은 bric)에서는 황우석 팀의 이런 대응방식에 많은 의혹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정말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윤리를 위해 취재과정에서의 최소한의 윤리를 어겨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논란을 해결하는 과정이 비과학적이거나 심지어 반(反)과학적이어서는 결코 안 된다. 젊은 과학자들은 바로 이 점 때문에 국민 대다수의 여론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왜 황우석 팀은 이 사건을 ‘과학적’으로 해결하지 않는가.


온 국민을 며칠간이나 혼란에 빠뜨린 이번 사건은 전 세계는 물론 인류 전체의 과학 발전에 중대한 획을 그은 위대한 성과에 관한 것임에 반해 그 대응방식에서 ‘과학’ 혹은 ‘과학적 방법론’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더군다나 해당 연구집단이 일반 대중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반면 같은 과학자 집단으로부터는 큰 신뢰를 얻지 못한다는 점이 매우 이례적이다.


혹자는 <피디수첩>이라는 비전문가가 세계적인 과학적 업적을 검증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하지만 이 또한 그리 과학적인 주장이 못된다. 과학적인가 아닌가는 그 주체가 누구인가와는 상관없이 주체가 벌이는 행위가 얼마나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많은 젊은 과학자들은 다소 어설픈 <피디수첩> 제작진들에게 대한민국 최고의 과학자 집단으로서의 황우석 팀이 이번 기회에 과학이란 어떤 것인가를 제대로 ‘한 수 지도’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미 잘 알려진 대로 황우석 팀은 오히려 스스로 합의한 방법론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전혀 과학적이지가 않다. 기존의 방법이 과학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새로운 과학적 방법을 제시하면 된다. 황우석 팀의 뒤이은 언행은 이 땅의 많은 과학자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줄기세포를 다시 시연해 보이겠다는 말은 예컨대 화살을 과녁의 퍼펙트 골드에 한 번 더 꽂아 넣어 보겠다는 말인데, 누구도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과녁에 꽂혀 있는 화살의 지문검사만 하면 그냥 끝날 일이다. 새로운 연구 성과를 내보이는 것으로 검증을 대신한다고 하는 말도 과학과는 거리가 멀다. 앞으로 나올 연구 결과와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배아줄기세포의 진위여부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나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이건 과학의 문제 이전에 상식의 문제다.


황우석 팀은 과학적인 방법론의 정도를 걷기보다는 언론플레이만 한다는 일각의 주장은 같은 과학자의 입장에서 매우 서글픈 일이다. 젊은 과학자들이 찾아낸 사이언스 논문의 동일한 세포사진도 황우석 팀의 주장과는 달리 이미 사이언스에서 검토 중인 게 아니라, 논란이 있고 나서야 황우석 팀에서 정정 이메일을 보낸 것으로 확인되었고, <피디수첩> 때문에 세계최초를 빼앗겼다는 일본의 그 논문은 취재 들어가기 전인 5월말에 벌써 제출된 상태였다. 연구팀의 핵심 관계자들이 과학의 정도를 걷는 대신 연이어 거짓된 주장들을 언론에 계속 내놓는 한 과학자 사회에서의 학자로서의 신뢰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문제의 배아줄기 세포가 진짜라고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그러나 과학은 종교가 아니다. 과학적인 믿음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어야만 한다. 국익에 비추어 본다면 매우 매몰차 보일지 몰라도 과학자들은 매사에 의심하고 회의를 품고 0.1%의 의혹에도 문제제기하도록 그렇게 교육받고 훈련받은 사람들이다. 저자 중 한 명이 논문의 진위에 의혹을 제기한 점, 문제의 배아줄기세포 DNA를 공정한 제3자(사이언스를 포함해서)가 검증했다는 사실이 전혀 없다는 점, 후속 연구와 이 문제는 전혀 별개라는 점은 생명공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다 알 수 있는, 이미 알려진 ‘사실’들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적어도 ‘본능적으로 의심’하는 과학자들에게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행위다. 그리고 이처럼 그다지 심오하지도 않은 뻔한 사실들을 놓고서 ‘과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을 하기가, 또 받아들여지기가 이렇게 어렵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면, 나는 아마 과학자의 길을 걷지는 않았을 게다.


황우석 교수는, 나 또한 존경해 마지않는, 대한민국 최고 과학자 제1호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가 이끄는 연구팀에 의해 대한민국의 과학이 실종되어 버리는 지금의 상황이 나는 너무나 안타깝다. 팀내 안규리 교수는 이번 일로 후배 과학자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많은 염려를 하셨지만, 정작 젊은 과학자들은 전혀 과학적이지 못한 선배 과학자들의 태도와, 의심하고 문제제기하는 과학자로서의 본능과 양심을 사회적으로 거세당한 참담함에 괴로워하고 있다. 이를 짓밟고 성취한 국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과학입국을 꿈꾸는 대한민국을 정말 가치있는 나라로 만들 수 있을까...


과학도로 첫발을 내디딜 때 가슴에 품은 한 구절이 문득 떠오른다.


“진리는 나의 빛이니(VERI TAS LUX ME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실은 나는 이론가다. 나만을 향하는 이론일지는 모르겠지만, 영감이 떠오르면 어떨 때는 시가, 어떨 때는 이론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나중을 위한 일종의 메모이다.

 

빛은 지속적이지는 않지만, 순간 강렬히 빛난다.

빛에는 저장이나 전승, 패거리 등의 집합, 인위적 구성이 불가능하다.

역사와 철학도 나를 향하는 하나의 빛이다.

나는 챙겨둔 지식의 척도로 사물을 보지 않고,

오로지 끊임없이 일신하는 한줄기 빛과 같은 직관으로

현실의 어떤 문제를 향해 빛을 보낸다.

그 때의 철학과 지식은 그 문제와 나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스팩트럼을 뽐내며

여러 사람을 향하여 명멸한다.

누군가 그 빛을 기억하고자 한다면

스스로 강렬한 빛이 되는 수밖에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요즘처럼 '넷'이라는 곳에 회의적인 생각이 드는 때도 없었다. '넷'이 없었을 때는 멱살잡고 싸우더라도 논리가 있었고, 경청이 있었고, 마무리가 있었다. 그렇지만 '넷'의 세계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뱉는 것도 아니고, 싸는 것이다'라는 누군가의 말과 같이 구역질이 난다.

친구들과의 대화 중 나는 이 사태를 '신 전체주의'로 규정했다. 독일이 2차세계대전을 시작하기 전 독일 사회는 국가사회주의가 횡행했고, 실업률이 비상식적으로 떨어져 빈부격차가 심했다. 그들에게는 '상식'보다는 '전설' , '인생 역전', '영웅' 등의 환상적인 기대가 마치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아래 네티즌의 말과 같이 이 문제는 이미 언론의 윤리, 과학의 윤리, 과학은 커녕 상식의 수준도 떠나 있는 것 같다.
짧은 시간 내에는 이렇게 취약한 여론과 언론 환경, 절망적인 관계 등의 분위기가 개선될 것 같지 않다.
아무래도 '넷'이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것 같다.
'우리들의 넷 윤리'는 내게는 세상 어떠한 윤리보다 더 실현 불가능하고 기대 불가능한 일일까. 오늘은 잠보다 절망이 앞선다.


문제는 황박사는 이미 추종자에게 종교 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예수가 행한 기적을 말이 안된다며 증명해보라고 한다면 신도들과는 절대 대화가 통하지 않을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믿음에 관한 문제 즉 종교에 관한 문제이기때문이죠.. 마찬가지로 이글 역시 참 좋은 글이지만.. 이글을 읽고도 황빠들은 아무 감흥이 없습니다. 왜냐면.. "믿으면 되는것을 이런 골치 아픈 고민을 할 이유가 없는것이죠" 즉 황우석은 종교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학으로 접근하고자 하기에 충돌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 과학 갤러리의 한 네티즌

우리가 저명인사를 통해서 재확인하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는 것만큼, 커다란 성과나 인물을 통해 이미지의 편승을 시도하는 심리도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월드컵 4강국이라는 고착된 이미지가 한국 축구에 장애적 요소와 압박으로 작용했듯이, 세계 최초 줄기세포 복제, 개 복제라는 성과는 분명 자랑할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우리들의 이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영원히 4강을 할 수도 없고, 세계 최초의 역사를 계속 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황우석이라는 하나의 종교를 가지게 되었고, 황우석 씨도 그것을 적절히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발언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정략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숫눈) 위를 건너듯이'나 '내가 여자였어도 난자를 제공했을 것이다' 등의 발언은 격정적인 한국인의 심리를 제대로 이용한 고도의 전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황우석 씨와 그 과학적 발견 등 이 주제와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2002년 '정몽준을 대통령으로!' 하고 열광하던 그때와 지금 대상만 바뀐 황우석 열풍, 그리고 3-4년 후. 어떤 분위기일지는 예측할 수 없겠지만, 지금과는 굉장히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알리딘에 남긴 나의 댓글

과학하는 것이 벼슬이 아닙니다. 그리고 Ph.D 이것도 벼슬이 아닙니다.
과학자 소위 전문가들은 머나 먼 옛날 부터 일종의 고급 사회 계층을 형성해 왔습니다. 물론.. 현 사회도 그렇지만 ..

남들 보다 이 분야에 대해 조금 더 많이 배워 조금 더 많이 알 뿐인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자연과학 특히 순수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인문과학과 같이 가야 하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중요성도..
Ph. D 라는 것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죠.

한국내의 인문 과학의 몰락과 현 사회의 패러다임의 부재는 같은 맥락을 취하고 있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정신적인 과학을 바탕으로 해야 순수 과학이 나오고 실용 과학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니까요. 과학자라 불리는 사람들은 과학자 나름데로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어야 겠죠.

그것이 현 사회의 패러다임와 일치하지않을 수도 있고 공통된 부분을 가질 수도 있지만, 이 이데올로기는 권위가 아닙니다.

과학자 소위 전문가라 해서 누구의 위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이죠. "감히 누가 나한테." 라는 권위는 매우 조심해야 하고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과학자의 자존심이 권위를 세우는 것은 절대 아니고 이 권위 자체가 과학자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각자의 유전적인 영향, 환경, 민족성 등등에 영향을 받아 각자의 고유한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여 형성되겠죠. 이러한 각자 개인나름의 독특한 이데올로기는 모두 진리를 추구하는 조그마한 점에 수렴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 이 사실들이 진실이 아니고 또한 진실이라고 해서 모두 사실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실수하는 것 중에 하나가 사실과 진실의 혼돈입니다.


그냥 이번 사태를 바라보면서 Ph.D의 Ph는 역시 소중하다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껴봅니다.
- Bric의 한 네티즌

좋은 전망과 자신감을 갖되 균형감각도 함께 견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윤리와 학술적 검증과 이성과 합리성을 충족시켜가면서도 충분히 국익을 구현하는 연구를 할 수 있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국민적 사랑과 신화 속에 당연히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방기되지 않았는지 성찰해봐야 하는 것이다. 환상적 이익을 보면서 오히려 견리사의(見利思義)의 정신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 경향 언바세바의 네티즌 칼럼 중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라주미힌 2005-12-08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정보의 접근성을 용이하게 해 준 반면에 수 많은 지식, 생각들을 노이즈처럼 여기게 만드는 것 같아요. 가령 검색을 하면 내가 찾는 정보만 찾고, 나머지는 버리듯이 점점 '대화'가 힘들어진다 라는 느낌을 받고 있어요.. 문제는 유사의견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부류들이 덩어리가 되면서 타인의 의견을 압도하고 관철시키려는 폭력성을 드러낸다는 점이죠. 가령 방송국이나 특정사이트를 '방법'하는 형태로... 이게 또 무지 가벼워서 유행처럼 퍼지고 놀이로 정착되는 경향도 있는 것 같고... 백색테러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흐..

승주나무 2005-12-08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생각이 박혀 있는 네티즌이라면 언제나 '짜증나는 퍼즐'을 하듯, 수많은 말의 형상 중에서 '말'을 찾아야 하는 일이 생깁니다.
문맥을 인식해서.. 모든 댓글에 '반말'을 금지시키고, '존댓말' 시스템을 정착시키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봅니다.
그러면
'참 개아들이시군요.'
ㅡㅡ; 똑같나요?
 

 한글 맞춤법의 특징 중 유달리 중요시되는 것은 하나의 형태에 이질적인 의미를 가진 낱말을 무척 싫어한다는 점입니다. ‘부치다’라는 단어처럼 하나의 단어에 여러 가지 뜻이 달려 있을 수도 있지만, 그와 발음이 비슷한 ‘붙이다[부치다]’가 ‘부치다’와 혼용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글맞춤법 제6장(그밖의 것) 중에서도 마지막 손님인 57항에 그에 관한 방침을 명시해 놓았습니다. 언중들이 이 용어들을 혼용하는 이유는 1. 발음이 비슷하고, 2. 두루뭉수리로 써버리거나 3. 사동/피동형태를 모르거나, 의미를 분별하지 못할 때 등의 이유가 있습니다. 맞춤법에 명시된 것이나 일상적으로 쓰는 단어 중 빈번한 것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놀랠 정도로 → 놀랄 정도로

☞ 놀래다 → 놀라다의 사동형(놀라게 하다)



마음으로 바래다 → 마음으로 바라다

☞ 바래다 → 색이 바래다



세 살박이 → 세 살배기

☞ 박이다 → 살이 박이다(굳은살이 생기다)

※ 살이 배기다(백이다) → 살이 박이다



조리다 / 졸이다

조리다

☞ 어육이나 채소 따위를 양념하여 간이 충분히 스며들도록 국물이 적게 바짝 끓이다. (생선을 조리다, 생선조림)


졸이다( 졸게 만들다(사동형) / 초조해하다)

☞ ‘졸다’의 사동형

※ 졸다 : 찌개, 한약 따위의 물이 증발하여 분량이 적어지다. / 겁먹어 기를 펴지 못하다(‘쫄다’는 구어체)



부딪히다 / 부딪치다

무딪히다

☞ ‘부딪다’의 피동형 (~에, ~와 등 다른 사물이나 현상 등에 당하다는 의미)


부딪치다

☞ ‘부딪다’를 강조하여 이르는 말 (내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뚫고 가거나 마주치다 등 나의 행위가 능동적으로 문장에 드러나는 경우)



가름 / 갈음

가름

☞ ‘가르다’의 명사형(분별이나 구분을 뜻함)

예 : 이 일에 대해서는 가름이 잘되지 않는다

※ 판가름

갈음

☞ ‘갈다’의 명사형(대신하다 또는 바꾸다의 뜻)

예 : 저를 도와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로 축사를 갈음합니다.



든/던의 차이


'-든'은 선택적 상황에 대한 표현에 활용된다. 다만 반드시 둘 이상의 대상이 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 : 내가 무엇을 하든 무슨 상관이야!

예 : 네가 그것을 하든 말든. (하던 말던 X)

 

이에 비해 '-던'은 과거의 상황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선택적 상황은 올 수 없습니다.

예 : 공부를 하던 교실이다. (하든 X)


이 외에도 시대와 세대에 따라 문화와 지역에 따라 변천하여 구분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죽음 / 주검, 놀음 / 노름 등이 그 예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늘바람 2006-01-29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져갑니다

승주나무 2006-01-29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니까, 두 번 가져가셨더군요. 좀 더 정진해서 연재 횟수를 늘리도록 하겠습니다.^^
 

[건강]연말 술자리 이것만은 지켜라


2005년 을유년도 한달이 채 안 남았다. 이맘 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한 잔 술로 지난 한 해 동안 이루지 못했던 계획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고 안 좋았던 일들을 털어내려 한다. 그러나 번번이 한 잔으로 시작했던 술은 한 병이 되고 두 병이 돼 연말을 술로 허덕이며 보내기 일쑤다. 물론 적당한 음주는 스트레스를 씻어주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독이 된다.

무엇보다도 간이 가장 큰 타격을 입는다. 간은 각종 영양분의 대사는 물론 뇌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독성물질들을 해독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그 해독능력을 넘어설 만큼 과음을 하게 되면 알코올 분해 과정에서 생긴 아세트알데히드라는 독성에 의해 상처를 받게 된다. 특히 장기간 과음을 하면 혈압이 높아지고 심장과 혈관 질환 등이 발생할 수 있고 남성호르몬 감퇴로 성욕이 줄어들고 발기부전을 유발할 수도 있다.

#몸 축나지 않게 술 마시기

몸무게가 60㎏인 성인의 경우 간에 무리를 주지 않는 알코올 양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하루 80g 정도이다. 이는 소주 2홉들이 1병, 맥주 2,000 포도주 600㎖ 기준 1병, 양주 750㎖ 기준 1/4병에 해당한다. 술을 마시는 횟수는 1주일에 2회를 넘지 않는 것이 좋다. 섭취한 알코올을 해독하고 간이 제 기능을 회복하는데 적어도 2~3일이 걸리기 때문이다.

술자리는 대개 속이 빈 상태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공복에 술을 마시면 알코올 흡수속도가 빨라지고 혈중 알코올 농도도 급격히 상승한다. 뿐만 아니라 직접 위 점막을 자극하므로 급·만성 위염이나 위출혈을 유발할 수도 있다. 따라서 가벼운 식사나 담백한 안주를 먹으면서 술을 마시는 것이 위를 덜 상하게 하는 방법일 수 있다.

술은 되도록 천천히 마시는 것이 좋은데, 소주 한 병을 30분 동안 마시는 것이 소주 두 병을 2시간 동안 마시는 것보다 더 해롭다. 술 마시는 속도를 늦추면 늦출수록 뇌세포에 전달되는 알코올 양이 적어지므로 간이 알코올 성분을 소화시킬 수 있는 충분한 여유를 부릴 수 있다.

술은 섞어 마시면 좋지 않다. 술은 각 종류마다 알코올 농도와 흡수율, 대사 및 배설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섞어 마실 경우 술끼리 상호 반응을 일으켜 더 취하게 만든다. 또 사이다나 콜라 같은 탄산음료수와 섞어 마시는 것도 삼가야 한다. 술과 탄산음료수를 섞어 마시면 술의 쓴맛이 없어지고 알코올 도수가 낮아져 마시기는 쉽지만 이는 위 속의 염산과 작용, 탄산수소가 발생하면서 위 점막을 자극해 위산 분비를 촉진시켜 결국 탄산수 자극으로 위산 과다를 발생시킨다.

#술과 함께 먹는 음식, 내장과 간에 그래도 쌓여

술에 의해 얻어지는 에너지는 축적되지 않으므로 우리 몸의 대사과정에 필요한 모든 에너지를 술에서 얻어지는 에너지로 쓰게 된다. 따라서 함께 먹게 되는 음식은 대부분 지방 형태로 전환되어 주로 내장과 간, 혈액 내에 축적됨으로써 복부비만과 지방간, 고중성지방혈증과 같은 고지혈증을 유발하게 된다.

을지대학병원 가정의학과 최희정 교수는 “술과 함께 먹는 음식이나 안주는 대부분 칼로리가 높으며 늦은 시간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먹고 마시게 되므로 위장질환이나 간질환이 생기기 쉽고 복부비만의 원인이 된다”며 “주 3~4회 음주를 하다보면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되고 충분한 휴식이나 수면을 취할 수 없으므로 생활 리듬이 깨지면서 만성피로를 유발하게 된다”고 조언한다.

#당뇨병, 고혈압, 관절염 환자 특히 조심

만성질환이 있는 환자들은 되도록 술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겠으나, 피치 못할 경우 보다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약물치료를 하지 않는 당뇨환자의 경우 과음과 과식은 혈당 상승으로 이어지며, 혈당강하제를 복용하는 당뇨환자의 경우에는 간에서 글리코겐을 분해하거나 포도당을 생성하는 과정이 저하되므로 저혈당이 발생하기 쉽다.

고혈압이 있는 환자는 다음날 혈압이 상승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으며, 약물치료로 혈압 조절이 잘 되던 환자도 지속적으로 음주를 하는 경우 약물의 용량을 올리거나 다른 약을 추가해야 할 정도로 혈압이 상승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관절염 환자의 경우는 소주 한 병 이상을 마실 경우 65%가 관절에 통증과 함께 부종이 생기고 28%는 아파서 걷기조차 힘들게 된다. 아세트알데히드가 관절로 가는 피의 흐름을 방해하고 그로 인해서 관절염이 더욱 심하게 된다. 특히 장기간 과음을 하게 되면 뼈를 만드는 세포가 파괴되고 칼슘 흡수가 저하되어 관절뿐 아니라 골다공증의 위험도 증가하게 된다.

#숙취 계속되면 지방간, 간경화로 이어져

많은 사람들이 과음한 다음날까지 구토를 하고, 머리가 무겁고 식욕이 떨어지는 것을 한번쯤은 경험한다. 이는 알코올이 대사되는 중에 생긴 산화물인 아세트알데히드라는 독성 물질이 혈액 내에 축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숙취 해소에 가장 좋은 방법은 보리차나 생수를 마셔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는 것과 섭씨 38~39도 정도의 온수욕을 하거나 땀이 날 정도의 운동을 통해 알코올 대사산물을 빨리 몸밖으로 배출시키는 것이다.

따뜻한 물에서 목욕을 하면 혈액 순환이 좋아지므로 해독 작용을 하는 간의 기능이 활발해진다. 그리고 그 이후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어 숙면을 취할 수만 있다면 더욱 좋다. 간장은 잠을 자는 동안에 가장 활발하게 술 찌꺼기를 처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음 후에 사우나를 찾아서 섭씨 40도 이상의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으며 오히려 해로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술을 많이 마시게 되면 탈수 현상이 생기게 될 가능성이 있는데 특히 사우나를 하거나 너무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게 되면 알코올 배출이 조금 빠를 수는 있겠지만 과도하게 땀을 흘림으로써 탈수 상태가 더 심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출처 : 경향신문〈이준규 의학전문기자·보건학박사 jklee@kyunghyang.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