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축독서 두 번째는 도정일-최재천의 '대담'입니다. 이놈의 워드 실력은 치면 칠수록 느는 것이 아니라, 어느 선에 가니까 멈추는 것 같군요. 이것 치느라 한 일주일 다른 책을 못 읽었어요. 도킨스 책으로 후딱 넘어가야겠어요.

압축독서에 참여하시는 방법은요.. 오탈자가 좀 있을 겁니다. 문단 말미에 쪽수를 표시했으므로 댓글로 제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중요하게 읽은 부분이 여러분들 눈에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 궁금합니다.

 

도정일, 최재천 (지은이) | 휴머니스트, 614쪽
 
 
 

도정일·최재천 『대담』




도정일을 취재하러 간 우리끼리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건대 어릴 적 대단한 개구쟁이였을 거라고, 우리는 그 천진난만한 표정을 만들어준 어린 시절의 즐거웠던 사건들에 대해 들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1941년에 태어난 아이였다. 그의 나이를 역사 연표에 넣어보면 아이에게 세상은 그리 좋은 곳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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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터졌을 때, 현대전에서는 시골로 가야 한다는 것이 어머니의 지론이셨어요. 일본에서의 경험이었죠. 일본에서의 경험이었죠. 대도시가 폭격을 당하고 원자폭탄이 터졌으니까. 우리도 원자폭탄이 터질 때 도망가 있었으니까 살았어요. 그래서 아버지의 고향인 경상남도 고성으로 도망쳤죠. 내 기억으로는 도착하자마자 그곳이 점령을 당했어요. 학교 기숙사 사택에 있는데 밤중에 오토바이를 탄 인민군이 학교로 쫙 들어오더군요.

그때도 전쟁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는데, 밤중에 들리는 포탄 소리는 무서웠죠. 쉬익~ 쉬익~ 귀신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난 후 팡~ 팡~ 터지는 소리가 나는데, 그 터지는 소리는 괜찮았지만, 쉬익~ 하는 소리는 견딜 수가 없어서 밤만 되면 뒷산으로 도망쳤어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잡혀갈지 모르겠는데, 인민군들한테 노래도 배우고 아플 때 약 타다 쓰고 했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아마 잔심부름도 꽤 해주엇을 거예요. 옆집에 가면 뭐가 있는데 그거 가져와라 하면 가져가고. 좀 이상한 이야기지만 인민군들이 떠날 때 우는 애들도 있었어요. 어린애들이 무슨 이념 같은 걸 알았겠어요? 그냥 옆에 있던 사람이 떠나니까 운 거죠. 그게 한국전쟁 때 내가 한 부역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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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일이 플라톤과 신화를 공존시킬 수 있었던 힘은 시화 쪽에 있는 듯 보였다. 플라톤과 그리스 신화를 함께 강조하는 것은 모순적이라고 지적하자 그는 그리스 신화의 핵심이 “모순을 공존하게 하는 상상력”이라고 받아쳤다. 모순은 확실히 이성의 편에서 나온 단어다. 이성의 입장에서 이성과 비이성은 모순적인 것으로 공존하기 힘들지만, 비이성의 입장에서 이성의 하나의 사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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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티우로스를 보세요. 그 괴물은 인간이면서 황소죠. 모순의 혼성물이에요. 논리적으로는 정의할 수가 없어요. 괴물이라는 말의 원뜻이 ‘정의할 수 없는 것’이에요. 신화는 그런 것 투성이입니다. 신화적 상상력은 철학이 정의할 수 없어서 쫓아냈던 ‘철학의 타자’입니다. 플라톤은 그래서 시화가 싫었을 거예요. 하지만 20세기 후반의 서구의 사유는 이성의 타자로서의 비이성을 알게 되었어요. 페르세우스가 고르곤을 죽인 후 가져간 두 방울의 피, 한 방울은 약이고 다른 한 방울은 독. 그래서 탄생한 게 ‘파르마코스(pharmakos)'의 공식이죠. 고르곤의 두 방울의 피를 붙여놓으면 파르마코스입니다. 나는 데리다의 사유가 아주 새로운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3,000년 전의 지혜로 돌아간 것뿐이죠. 신화적 상상력은 모순물을 서로 공존시키고, 이야기의 결론을 쉽게 내리지 않으며, 똑같은 소재로 무수한 복사본들을 만들어냅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강조하는 다양성이니 복수성이니 하는 것들은 그리스 신화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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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터운 세계. 그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언급하면서, 미국이 세계를 너무 얇고 투명하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다른 것, 심지어 대립-모순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공존할 수 있도록 세계를 넉넉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것은 우리가 다시 한 번 던진 물음, 즉 인문학적 소양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답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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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인 일이오? 우리는 그런 걸 모르며 움직입니다. 그런 건 역사의 판단이죠. 하지만 판단을 기다리다가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래서 현재 속에서 늘 결단해야 하고, 그 결과가 어떤 효과를 내는지를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순간 순간 최선의 판단을 내릴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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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양반이 내놓은 책 가운데 초기에 나온 책 하나가 《개체군 생물학 입문서(Primer of Population Biology)》예요. 수학적으로 생물학을 설명하는 책이죠. 그런데 수학적으로 그런 것을 분석할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수학 공부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썼느냐? 수학 공부를 다시 한 거예요. 교수가 된 다음에 수학과에 가서 학생들과 같이 앉아서 공부한 거죠. 그러다가 수학과에 있던 학생이 제자로 들어왔는데, 그 제자하고 같이 그 책을 쓴 거예요. 글도 그래요. 원래부터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 가정교사를 두고 글 쓰는 법을 공부해서 오늘날의 과학적 글쓰기의 모범이 된 거예요.

어떻게 보면 무서우면서도 존경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죠. 정교수가 되면 보통 연구를 다 접잖아요. 특히 우리나라는 그런 현상이 심한 편 아닙니까. 그 유명한 스티븐 제이 굴드 보숑. 그 양반도 40대 중반에 연구를 접었어요. 그리고는 남의 연구들을 가져다 버무리는 일만 했죠. 하지만 윌슨은 그 많은 책을 쓰면서도 개미 논문도 계속 내요. 지금도 하고 계세요. 내일이면 의회에 가서 생물 다양성에 대해서 발표해야 되는 양반이 오늘은 개미를 세고 있어요. 그러고는 며칠 있으면 논문이 턱 나오는 거예요. 그런 자세가 진정한 학자의 자세가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저도 그것만큼은 아주 깊게 마음속에 생겼어요. 윌슨 선생님께 섭섭한 점도 많았지만 꼭 배우려고 생각했던 것은 “학자로서 연구를 멈추는 일은 있을 수 없다”바로 그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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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회생물학을 가진 자를 옹호하는 학문이라고 비난하지만, 사실 다윈의 이론처럼 열린 이론이 없어요. 그의 이론을 공부했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에 대해 다 존경심을 가질 수 있게 돈 것 같아요. 지금도 그 세 사람은 제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요.

……

저는 환경운동을 하시는 분들에게도 생태학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해요. 잘 알지 못하면 보호한다는 것이 오히려 파괴하는 것이 되죠. 알아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자연에 대해 점점 더 알게 되면 될수록 저절로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함께 살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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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즐거운 몽상과 끔찍한 현실



제가 있었던 미시간 대학 소사이어티 오브 펠로즈(Society of Fellows)에서는 연구자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부담도 지우지 않았습니다. 연구비 줄 테니 당신이 하고 싶은 거 하라는 거죠. 연구소 설립 당시 이런 방임주의를 걱정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내버려두면 모두 방만해지고 게을러지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웬걸, 내버려둘수록 더 훌륭한 연구가 나온 겁니다. 소사이어티 오브 펠로즈 제도는 1933년 하버드 대학에서 처음 만들어졌는데, 당시 창설자인 로웰(A.Lawrence Lowell) 총장은 “위대한 학자들의 독자적인 연구가 바로 위대한 대학의 정신”이라며 “탁월한 젊은 학자를 길러내는 최상의 전략은 자유”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하버드 소사이어티 오브 펠로즈는 13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수많은 퓰리처상 수상자들을 배출했습니다. 미시간 소사이어티 오브 펠로즈에서 특별연구원으로 지내다가 한국에 왔는데, 연구 환경이 너무 달라 처음에는 적응하느라 무척 고생했어요.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이 논문을 써내라고 밀어붙이는 분위기에 아직도 잘 적응을 못해 사실 좀 우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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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희 분야는 다른 분야와 상황이 달라요. 상상해보세요. 동물을 쫓아가며 하는 연구인데, 작녀에는 분명히 거기 살던 동물이 올해는 없어져서 공치는 때도 있어요. 딱 1년만 공부해서 그 동물에 관한 데이터를 뽑을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까치만 해도 그래요. 처음 2년은 데이터가 비슷하게 나왔어요. 그런데 3년째 겨울이 엄청나게 춥더니, 지난 2년과는 와전히 다른 데이터가 나오는 거예요. 3년치를 놓고 비교해보니, 두 데이터는 비슷한데 하나는 전혀 다르잖아요. 그런데 그 다음 해에는 지나 s2년, 그리고 3년째하고도 또 다른 데이터가 나오는 거예요. 8년째 그 연구를 하고 있는데 그 동안 논문 한 편을 겨우 썼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저처럼 장사 안 되는 기초 과학을 하면 살아남기 참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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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자들으 sdndnfwmd이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라고 믿습니다. 우울증은 공포에 적응하려는 본성이고, 나븐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지요. 그래서 우울해질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능력’이기도 한 겁니다. 공포를 느끼는 능력, 우울함을 느끼는 능력도 중요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생물학자인 제 입장에서는 우리의 정신에 화학적 칼(chemical knife)을 들이대는 약물들의 오남용이 굉장히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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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일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등등 수많은 관계들 속에 살기 때문에 그 관계로부터 오는 정서적 비용을 감당해야 합니다. “인간은 늙고 병들고 죽는다” 같은 한계 조건도 고통의 큰 원천이죠. 이런 인간적 고통의 비용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가 인문학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는 상실의 예술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더 정확히 말하면 ‘상실을 관리하는 예술’이죠. 게다가 슬픔이나 분노, 고통 같은 것은 우리가 행복이라 부르는 것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뭉치로 붙어 다니는 것 같아요. 그것들이 없어지면 행복이니 행복감이니 하는 것도 없어집니다. 인문쟁이 대선배 소크라테스가 지작 그런 말을 했어요. “고통과 쾌락은 하나의 머리를 가진 두 몸뚱어리”라고 말이죠. 하나를 제거하면 다른 하나도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행복약은 ‘삼불’을 제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행복’을 제거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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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통제와 함께 우리가 수시로 복용하는 게 해열제죠. 감기에 걸려 열이 나면 우린 곧바로 해열제를 먹습니다. 그런데 사실 진화적으로 보면 우리 몸에서 열이 난다는 것은 외부에서 진입한 이물질인 병원균을 태워버리기 위해 애써 진화된 적응현상일 수 있다는 겁니다. 지나친 고열은 뇌세포를 파괴할 위험이 있지만 감기 등으로 겪는 대부분의 열을 낮추는 일은 병원균들로 하여금 신나게 날뛸 수 있게 도와주는 격이죠. 우리가 흔히 냉혈동물―사실 변온동물이라고 부르는 게 더 옳습니다만―이라고 알고 있는 도마뱀도 감기에 걸리면 체온이 약간 오릅니다.

환자가 고통스러워하더라도 병을 고치기 위해 약을 투여하는 게 옳은가, 못 고치더라도 환자가 행복하도록 모르핀을 주어야 하는가, 행복해지는 게 우리의 최대 목적이냐 하는 점은 여전히 논쟁거리죠. 요즘 이런 문제들을 새롭게 등장한 학문 분야인 다윈 의학(Darwinian Medicine)에서 아주 활발히 논의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런 흐름에 동참하기 위해 몇 년 전 미시간 대학의 동료였던 네스 교수와 저명한 진화생물학자 윌리엄즈가 공저한 책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를 우리말로 번역해 내놓았습니다. 예상보다 훨씬 큰 호응을 받고 있고 앞으로도 상당히 주목받을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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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는, 혹은 자연선택은, 나의 행복 같은 것 따위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거든요. 자연선택의 목적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나를 행복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다면, 유전자는 “넌 새끼나 많이 만들어라”라고 할 겁니다. 아무리 내가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유전자 입장에서는 내가 자식만 많이 낳으면 그만이에요. 자연선택과 나의 행복은 별 상관이 없죠. 나의 건강에도 자연선택은 별로 관심이 없어요. 평생 비실비실하며 늘 불행히 보여도 자식을 많이 낳게 해주는 유전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만 자시은 거의 못 낳는 유전자가 있다면 어느 유전자가 자연선택을 받아 후세에 남겠습니까? 자연선택은 내가 번식을 잘 하게끔 도와줄 수 있는 수준까지만 나의 건강을 챙겨주는 거예요. 그래서 번식 끝난 노인네들이 자주 병원에 가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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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에 나간 선수가 약물을 복용해서 메달을 따면 어찌 됩니까? 고도 기술의 전자 장비를 몰래 감추고 시험장에 드렁가서 남들보다 나은 성적을 올리면 어찌 됩니까? 약물이나 전자 장비도 기술력인데, 이 경우 개인의 자유다, 기술이 사람의 자기실현을 도왔고 능력을 더 잘 발휘하게 했다, 그러니까 괜찮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성형수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도둑질을 했다고 칩시다. “내 행복을 위해서”라고 그는 말하겠죠. 물론 사회는 그를 감방에 넣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잡히지 않으면 되는데 재수 없게 잡혔어”라고 생각할 수 있거든요. “잡히지만 않으면 되는데”라는 생각은 다시 도둑질의 고도 기술을 개발하게 합니다. 약물을 먹은 선수가 “들키지만 않았으면 되는 건데”라고 생각하는 거나 마찬가지죠. 이것이 기술주의와 행복 이데올로기의 함정입니다.

생명공학 기술은 우생학적 사회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우생학은 사회공학의 영역이었어요. 그런데 지금 닥쳐오고 있는 우생학은 강제적 사회공학이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적 선택의 문제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아기를 가졌는데 어떤 유전적 결함이 발견되었다 칩시다. 부모는 고민하다가 “이 아이는 태어나봤자 불행해진다” 생각하고 “아이의 행복을 위해” 낙태시켜버립니다. 부모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것이 다른 모든 가능성을 압도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유전적 겨람을 가진 개체는 아예 탄생의 기회조차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아인슈타인의 머리를 가진 아이, 기억력이 뛰어난 아이, 혹은 잘 뛰는 아이들을 주문 생산할 수 있다면 누가 그걸 마다할까요? 최 선생님은 이런 공학적 우생학 사회의 도래를 어떻게 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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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좋은 유전자를 타고 나도 유전자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훨씬 많습니다. 유전자는 단백질을 만들어놓은 후에는 별다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

우생학이라는 건 우리만큼 복잡한 생물들에게는 애당초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옥수수를 우생학적으로 개량하는 건 가능하죠. 옥수수의 삶을 증진시키는 게 아니라 옥수수의 낱알을 증진시키는 거니까요. 하나의 특정한 형질을 우생학적으로 개발하는 건 가능합니다. 유전자 성형 시대가 왔다는 것은 좀 과장이 심한 겁니다. 지금의 기술 수준은 아주 뚜렷한 결함 유전자를 치환할 수 있는 정도지, 어느 유전자를 갖고 있으니까 그 애가 미인이나 천재가 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워낙 많은 유전자들이 특정 형질 발현에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 또는 소수의 유전자를 보고 그런 예측을 내릴 수는 없죠. 또 가치 평가의 기준도 시대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어렵게 유전자 성형을 해놓고 나서도 시대가 바뀌어 미의 기준이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바뀐다면 상당히 허망해질 수도 있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유전자 조합을 가지고 있는 아이가 나중에 예상 외로 훨씬 잘 되는 경우도 충분히 상상핦 수 있죠.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진화의 특이성을 생각하면 우생학이라는 것은 정말 ‘愚生學’인 셈이죠.

                                                                      82 ~ 83



그런데 최 선생님께서 “유전자도 중요하지만 환경적 요인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뜻밖입니다. 생물학자가 그렇게 말해도 되나요? 현대 인문학은 어떤 형태의 결정론도 환원론도 거부하려고 합니다. 반면 현대 생물학은 결정론과 환원론의 입장을 오히려 강화시켜왔죠. “인간은 유전자가 결정한다”는 유전자 결정론은 대표적인 생물학적 결정론의 하나입니다. 이 때문에 자연이냐 문화냐, 유전자냐 환경이냐 식의 대립 구도가 나오고 생물학자와 인문학자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도 벌어지곤 했습니다. 아까 최 선생님이 스티븐 핑커 이야기를 하셨는데, 사실은 핑커만 하더라도 진화심리학의 입장에서 문화론이나 후천성 이론에 강하게 반발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백지(tabula rasa)로 태어난다”고 보는 것이 근대 자유주의 사상의 시조이죠. 17세기의 존 로크 등이 그런 사상을 대표합니다. 인간은 백지상태로 태어난다, 그 백지에 무슨 그림이 그려지고 무슨 글자가 씌어지는가는 출생 이후의 문제라는 거죠.

                                                                      83 ~ 84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한 말에 “과학과 기술, 종교와 예술은 삶의 토대다”라는 것이 있어요. 《교육의 목적》이라는 책에서였지요. 사실 그 네 가지 활동영역들은 삶의 토대만이 아니라 인간 문명의 토대를 이룹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두 개, 즉 종교와 예술은 인문학의 영역이고 두 개는 크게 과학의 영역입니다. 인문학 영역들과 곽학기술의 영역들이 함께 문명의 토대를 이룬다면 그 토대들 사이에 접합․교접․대화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세요. 종교․예술․과학․기술은 문명의 토대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인간적 활동의 최고급 알맹이들입니다. 다른 동물종들과 인간종을 구별하게 하는 인간 특유의 활동들이죠. 그러니까 인간의 활동은 인문학적 활동과 과학적 활동으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활동의 성격으로 나누면 이 네 가지 토대들이 다시 성찰적 활동과 창조적 활동으로 구분됩니다. 종교는 철학, 역사와 함께 대표적으로 성찰적 행위의 영역에, 예술․과학․기술은 창조적 행위의 영역에 속합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활동들은 ‘성찰과 창조’라는 두 개의 축 위에 전개됩니다. 문명이란 인간이 이룩한 업적의 총체인데, 그 업적은 쉽게 말하면 성찰과 창조라는 축 위에 서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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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에서는 우리나라가 유일하게 진화론에 대한 반발이 무척 심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심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고 봐야죠.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 비해 기독교가 강하게 뿌리내린 국가라서 그런 것은 아닌가 싶어요. 특히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전한 기독교인들이 당시 미국 동북부 지역에 있던 골수 보수파 기독교인들, 즉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진화론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반발이 굉장히 심했을 거라는 게 제 잠정적인 결론입니다. 그렇긴 해도 저는 몇 년 전부터 요청을 심심찮게 받고 있습니다. 반대해야 할 이론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알기나 하자고 초청하십니다. 이제 우리 기독교계도 열린 마음을 갖게 된 것 같아 매우 반갑습니다. 그건 그렇고, 왜 우리는 이렇게 심하게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경계가 뚜렷해졌는지 저도 참 신기합니다. 미국만 해도 영문학과 학생이 생물학과로 옮겨가는 게 아주 자유롭거든요. 왜 우리는 이렇게까지 경직된 구분을 갖고 있는지 참 이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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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분과들 사이에 높은 울타리를 쌓는 것으로 말하면 한국 대학들이 단연 최고 수준입니다.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전공의 ‘순수성’과 ‘정통성’에 대한 강한 집착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인접 학문끼리도 별 소통이 없습니다. 옆집은 뭐 하나 구경도 하고 기웃거려보는 것은 학문의 시야를 넓히는 데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기웃거리다간 손가락질을 당합니다. 제것에나 신경 쓰지 남의 영역은 왜 기웃거리느냐는 거죠. ‘전문가주의’입니다. 학문의 전문성은 아주 중요하지만, 그게 지나치면 학문이 왜소해지고 무엇보다 오류나 자기도취, 시대착오에 빠집니다. ‘외길을 간다’라는 말은 옆집이 뭐 하는지 한눈팔지 않고 가는 것이 아니라 두루 살피면서도 자기 길을 간다는 소리일 때만 의미가 있죠.

또 다른 설명은 ‘영토 수호’입니다. ‘내 영역’과 ‘남의 영역’을 날카롭게 나눠놓고, 자기 영역을 누가 넘보나 신경을 곤두세우는 거죠. 그게 자기의 학문세계를 지키려는 정신자세에서 나오는 거라면 그런대로 좋습니다. 그러나 학문세계에서 ‘불가침’은 없습니다. 불가침주의는 학문 아닌 밥그릇 싸움으로 치닫습니다. 인문학 내부에서도 이런 영토 싸움이 치열하죠. 영토 싸움은 국문과가 가장 심하다고들 합니다. (하하하) 인문학 내부에서도 그런데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소통에 신경쓸 틈이나 있겠습니까?

                                                                      91 ~ 92



몇 년 전 미국 샌디에이고 대학을 방문했던 한 한국인 교수가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인지과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대학원생들을 모아 놓고 하이데거를 읽고 있더라는 거죠. 요즘 미국 경제학계를 보면 심리학의 통찰을 빌려 인간의 경제 행위를 설명하려는 경향이 대두하고 있습니다. 경영학에서는 ‘서사이론’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 경제학의 전통적인 ‘합리성’ 모형이죠. 그러나 인간의 경제 행위는 합리성 모델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비합리성과 예측 불가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현대 경제학은 행동 예측에서 큰 곤경을 겪어왔죠. 경제학자가 심리학으로 눈을 돌려 다른 영역에서 통찰을 빌리고자 한 것은 이런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94



역사학계의 분쟁을 생물학이 해결해준 사례도 무척 많습니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집에 샐리 헤밍스라는 흑인 하녀가 있었는데, 제퍼슨이 이 하녀와 보통 사이가 아니어서 비밀리에 아들도 두었다는 ‘설’이 미국 역사학계 뒷골목에 오랫동안 퍼져 있었어요. 물론 정통학계는 헛소리라고 일축했죠. 제퍼슨의 고매한 인격에 흠집을 내려는 야담꾼들의 수작이라는 거죠. 유학 시절 내게 미국사 강의를 해주었던 교수 한 분도 그 이야기만 나오면 아니라고 펄펄 뛰었어요. 그런데 어찌 됐는지 아세요? 몇 년 전, 그 하녀의 후손들에게서 DNA를 채취해서 제퍼슨의 현존 후예들에게 얻은 DNA와 비교한 결과 그 흑인 하녀의 후손들이 제퍼슨과 연결된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하녀의 아들 하나가 제퍼슨의 아들이었다는 얘기죠. 그래서 분쟁은 끝납니다. 생물학이 아니었다면 그 인문학적 분쟁은 미국이 없어질 때까지 계속됐을 겁니다.

……

생물학자들이 들으면 우쭐해할 이야기도 있습니다. 20세기 후반 인문학과 dP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영감의 한 원천은 생물학입니다. 생물학의 영향은 점점 더 커질 거예요. 이제부터 생물학 족의 발견들을 참작하지 않는 인문학은 불가능할 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인간과 그의 문화적 성취에 관한 연구가 인문학인데, 지금 ‘인간’이라는 문제에 관한 과학적 발견치고 현대 생물학을 능가할 학문은 없ㅎ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95 ~ 96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해방 이후 대학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서구, 특히 미국 대학들의 학문 편제를 도입하는데 그게 바로 인문학/과학의 분리를 바탕으로 한 근대 편제입니다. 해방 이후 우리는 뭘 진중하게 생각할 틈도 없이 서양의 학문 편제를 받아들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 분리가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더 심화되고 있는 과정입니다. 한 10년 전까지도 우리나라 대학들에는 ‘문리대’라는 이름의 통합 단과대학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인문학과 이학(과학)이 동거하는 둥지였죠. 지금은 내가 알기론 성균관대학에만 ‘문리대’가 있고 다른 데서는 모두 인문대, 자연대 하는 식으로 분리됩니다. 통합은커녕 더 철저한 ‘별거의 완성’이죠. 이 별거를 넘어서려는 취지에서 고안된 것이 ‘학부제’라는 것인데,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나라 대학들에 도입된 학부제는 학부제의 기본 정신과는 별 관계가 없어요.

                                                                                       100



생태학을 하다 보면 동양인인 제가 좀 약이 오릅니다. 세계 생태학대회라는 게 있는데, 그 중심인물들이 다 서양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떠드는 이야기에서는 다 동양사상 냄새가 짙게 납니다. 한국 학자들은 은근히 저놈들이 우리가 다 아는 것을 가지고 잘도 떠든다고 생각하죠.(하하하) 저는 생태학은 특히 동양이 좀 주도권을 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아시아 3국이 생태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난 2002년에 우리 생태학게가 세계생태학대회를 유치했었는데 그때 동양 3국 연합해서 거대한 생태학 연구를 기획해보자는 제안이 나왔죠. 3국 안에 거의 모든 생태계가 다 들어 있거든요. 바다․기후․육지․섬․반도․대륙 등등. 세 나라가 각자 생태학적인 특성을 살려서 공동 연구를 하자는 데 의기투합이 되어 2004년에 드디어 약자로 ‘EAFES'라고 부르는 동아시아생태학연합이 결성되었습니다. 자연만 연구하지 말고 인간과 문화, 환경, 국민성 등도 복합적으로 연구해보자고 제가 제안했죠. 생태학에는 인간생태학이란 분야도 있어서 이모든 걸 다 연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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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어떤 영국 학자가 낸 책을 보니까 과학적 사유가 어째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가능했고 고대 중국에서는 불가능했는지에대한 문제를 다루었더군요. 내용 중에는 문화적 차이를 논한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리스 문화에서는 ‘경쟁’이 중요했고 중국 문화에서는 ‘화합’이 중요했다는 거죠. 일리 있는 소리입니다. ‘화합’의 사회적 가치는 큰 것이지만, 그것이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지배적인 사회적 규범이 되면 사회는 비판과 이견이 설자리가 없는 집단사고의 똥구덩이에 빠집니다. 집단사고에서는 사상의 자유로운 흐름이나 이탈적 탐구가 불가능합니다. 동양 사람들에게 과학적 사유의 능력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사고방식의 차이라는 것이 흔히 거론되지만, 관찰과 검증으로부터 결론을 끌어내는 귀납적 사유방식이 동양인에게는 없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부족했던 것은 과학하기에 필요한 비판․분석․실험․검증․논박의 절차들을 ‘자유롭게’ 허용하는 문화입니다. 이런 절차들을 빼고 과학을 말할 수 없죠. 과학의 결핍은 문화적 결핍과 연결됩니다. 이슬람 문명은 14세기까지 과학부에서 서유럽을 압도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슬람 과학은 사실상 ‘무존재’입니다. 신정(神政) 체제의 정치질서가 오래 계속되면서 과학에 필요한 자유로운 탐구의 절차들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이슬람 같은 강력한 신정 체제를 발전시키지는 않았지만 고학하기가 거의 언제나 정치권력에 종속되었다는 사정은 비슷합니다.

……

정치적 자유가 없거나 제한되는 상황에서도 정치권력이 지원책을 스기만 하면 과학은 가능하다는 게 지금의 중;국,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사고방식입니다. 사실 전체주의나 독재 아래서도 과학은 가능합니다. 과학자들만 따로 모아놓고 일정 수준의 자유와 특혜를 주어 국가 발전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 전체주의/독재의 통치공학이고 ‘과학정책’이니까요. 그렇게 되면 과학은 권력이 양성하는 소수 특권 엘리트들의 전유물이 되고 과학이 사회문화적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권력을 강화합니다. 인간 정신의 자유를 확장하는 것이 과학 정신이고 이 정신이 사회 변화에 기여합니다.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깊이 생각해봐야 할 화두 중 하나가 바로 그 점, 곧 정신의 자유 확장이 과학 정신이란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일일 겁니다. 법 기술보다는 ‘법의 정신’을 먼저 가르쳐야 하는 것이 법학 교육이듯이 말이죠.

                                                                                       104 ~ 106



‘과학적 기술’이라는 말이 재미있군요. 흔히 ‘과학기술’이라고들 말하지만, 사실 지금은 기술이 과학을 압도합니다. 그래서 ‘과학기술’이라기보다는 ‘기술과학’이죠. 기술이 과학을 압도하면 중요한 창조적 돌파구가 나오기 어렵죠. 나는 결코 일방적 서양 예찬자가 아니지만 학생들에게 과학에 관한 한 ‘아르키메데스의 죽음’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로마 군대가 시칠리아로 쳐들어왔을 때 아르키메데스는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무슨 수학 도식을 풀고 있다가 로마 병정의 칼에 맞아 죽습니다. “그 그림에 손대지 말라!”가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고 전해지죠. 그의 무덤에는 원통에 원구를 넣은 석조 구조물과 함께 “원통의 내면적과 원구의 면적 비율은 3대 2다”라는 그의 수학적 발견이 묘비명으로 남아 있어요. 이런 발견은 아무 실용성도 없죠. 그러나 실용을 떠난 이 추상적 사유가 과학과 실용기술의 차이 아닌가요. 화이트헤드는 이 차이를 그리스 문화와 로마 문명의 차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인들 가운데 이처럼 추상적 사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자가 있는 가?”하고 묻습니다.

……

당장 시장에 내다 팔 기술, 돈 벌고 입신양명하는 데 도움이 될 기술만 대단하게 여기는 것이 우리 사회죠. 복제기술의 시장가치는 뭐고 무슨 기술적 우위를 차지하느냐, 생명기술(BT)이 정보기술(IT)에 이어 21세기 시장을 지배할 ‘다음 번 대박’이라는 데 우리도 그 대박을 놓칠 수 없다는 거죠. 고대 이집트 사회는 실용적인 측량술을 발전시켰고, 그‘술’을 가져다 실용성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추상기하학을 발전시킨 것은 그리스이들이빈다. 실용성보다는 기하학적 공리 자체의 진리를 발견하는 데 더 큰 즐거움을 느낀 것이 그리스 정신의 특징이죠. 제 외삼촌 같ㅇ은 분이 “정삼각형의 세 각은 같다”라는 말을 들으면 “그래서? 너 그거 가지고 뭐할 건데?”라고 당장 반문하겠죠. 이게 아직도 우리 사회의 정신 수준입니다. 과학적으로의 생물학보다는 생명공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더 압도적이죠. 기술에 대한 우리 사회의 매혹은 시장가치, 돈, 신분 상승, 입신양명, 실용성의 요구에 사로잡혀 있어요. 지금 학생들의 이학계열 기피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데, 과학에 대한 사회의 태도는 물론이고 연구 인력을 위한 고용 구조 변화 같은 기본 정책이 달라지지 않는 한 젊은 세대의 이과 기피 현상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공계 대학 졸업자들이 모두 ‘벤처’로 내몰리고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불안에 떨며 돈벌이에 나서야만 제구실을 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는 과학이 어렵습니다.


개인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에 문제가 있죠. 한국의 제도 안에서는 개인의 유전적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제도가 거의 없습니다. 생존의 게임 자체가 시험처럼 획일화된 기준으로 기획되어 있기 때문에 신분 상승의 욕망은 그렇게 왜곡된 형태로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얼마 전 저는 연세대 학생들에게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연세대에 가서 토론수어을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저 자신에게도 서울대 학생들이 최고의 학습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선입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연세대 학생들이 서울대 학생들보다 훨씬 월등하게 토론수업을 잘 이끌어가는 것을 보고 충격과 감동을 한꺼번에 받았죠. 다른 학교에 가도 성격은 다르지만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이런 건 게임의 잣대가 단 하나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자연은 매우 다양하고 그 자연에 적응하여 사는 방법 또한 무척이나 다양한데 우리는 단 한 개의 잣대로 모든 걸 가늠하려 합니다. 인간이 만일 지금까지 존재하는 동안 하나의 잣대에 맞추려 했다면 벌써 오래 전에 멸종하고 말았을 겁니다.

                                                                                       107 ~ 109

제2장 생물학적 유전자와 문화적 유전자


고대 서양에서는 철학과 과학이 크게 구분도지 않았죠. 새로운 방법론이 개발되면서 두 갈래로 길이 갈린 것 같아요. 그동안 자연과학은 인간의 기원이라든가 가치라는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죠. 그런데 진화생물학이 등장하면서 이런 문제를 본격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한 겁니다. 결국 과학과 인문학이 다시 만난 다면 그 연결고리에 서 있을 수 있는 학문이 진화론이 아닌가 싶어요. 대부분의 인문학자들이 그렇게 기대하죠. 인문학적인 상상력에 관심을 기울이는 연구자의 상당수도 진화생물학자죠. 확실히 진화론에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날 수 있는 통로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113



진화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이 인문학과 긴밀한 접점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는 나도 동감입니다. 진화심리학의 통찰을 받아들인 미학론이 나오는가 하면, 진화론에 입각한 문화이론도 나오고 있어요. 뇌신경학과 두뇌 연구는 인간의 의식 현상을 설명하는 데 상당히 기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인문학과 생물학의 ‘접점’이 어딘가 하는 거죠. 진화론을 사회이론에 도입한 20세기 초반의 이론들, 대표적으로 ‘사회적 다위니즘’ 같은 것이 실패한 이유는 접점이 잘못 설정되었기 때문입니다.

                                                                                       115



사실 다윈은 그 당시 유전자의 존재에 대해서는 뚜렷한 아이디어가 없었습니다. 유전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또 하나의 혁명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어요. 진화론의 발견과 유전자의 발견 사이에는 100년 정도의 시간차가 있죠. 진화론의 발견만큼이나 유전자의 발견은 생명을 바라보는 시선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사건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유전자 혁명’이라는 말을 써도 좋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아도 20세기 과학사에서 최대의 사건으로 뽑히지 않았나요?

리처드 도킨스가 유행시킨 ‘이기적 유전자’는 사실 돝킨스의 발명품이 아닙니다. 해밀턴(William Hamilton)이라는 과학자가 시작한 작업을 도킨스가 대중화한 것이죠. 결과적으로 도킨스가 해밀턴의 업적을 가로챈 셈이 됩니다. 의도적을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저는 ‘해밀턴 혁명(Hamiltonian Revolution)'이라는 말을 씁니다. 해밀턴은 우리의 사고를 완전히 뒤집어놓았습니다. 해밀턴은 다윈이 생각했던 개체 수준의 관점에서 유전자 수준의 관점으로 생물학의 관점을 이동시킨 아주 중요한 인물이죠.

이제는 생명의 주체가 창조주도 아니고 별도 아니며 윶번자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검증되었습니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힌 제임스 윗슨이 이렇게 말했죠. “예전에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별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우리의 운명이 유전자 안에 있다는 걸.” 생명의 기원이 DNA였는지 RNA였는지 단백질이었는지 논쟁이 한창입니다. 최근에는 RNA 쪽으로 많이 기울고 있죠. 생명의 기원이 단백질이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합니다. DNA든 RNA든 우리가 흔히 유전자라 뭉뚱그리는 그 존재들이 바로 생명의 주체라는 겁니다. 도킨스의 용어를 빌리면, 생명체는 바로 그 유전자의 복제를 위해 만들어진 ‘생존기계’입니다. 이제 인간도 그러한 생명 과정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생각에 도달한 것이죠.

이런 현대 생물학이 인문학자들에게 준 충격은 엄청났을 겁니다. 진화론은 창조론을 정면으로 부정하기 때문에 종교의 입장에서는 진화론이 충격일 수밖에 없었죠. 특히 철학자들이 가장 심한 충격을 받았죠. 대니얼 데넷이라는 철학자는 철저하게 현대 생물학을 받아들여서 인간을 유전자 중심적 시선에서 바라보는 새로운 철학 체계를 만들고 있어요. 하지만 상당수의 철학자들은 현대 생물학, 즉 진화론에 대해 매우 적대적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인문과 자연과학 사이의 거리가 너무 커진 거죠. 생물학자들은 인간을 유전자의 꼭두각싷라고 보는 것이 아닌가, 생물학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인가, 이런 식으로 무수한 오해를 합니다. 특히 사회생물학이나 진화심리학 전공자들은 영락없는 유전자 결정론자로 몰리고 있어요. 현대 생물학의 가장 큰 줄기, 즉 진화론과 유전자의 발견으로 인해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격차가 그 어느 때보다 커져버린 느낌입니다. 인문학의 경우에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논의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된 상태인가요?


과학 하는 사람들은 신화나 종교를 문자적으로 읽으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생물학이 생명의 기원을 과학적으로 밝혀내면 그 순간 신화니 종교니 하는 것들은 쓸모없어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도킨스도 종교를 ‘조직적 착각’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기원에 생물학이 ‘정답’을 준 이상 기원신화나 창조론 같은 데서 틀린 답을 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그런 생각이야말로 대단한 착각입니다. 신화나 종교가 추구하는 것과 과학이 추구하는 것은 서로 차원이 다릅니다. 도킨스는 탁월한 생물학자일지는 모르지만 위험하고 협소한 두 가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생물학이 생명의 기원, 인간의 기원을 밝혀낸다고 해서 인간을 충분히 알게 되는 건 결코 아닙니다. 생며의 기원은 이런 것이고 인간종은 이러저러하게 진화했다고 생물학이 들려주는 설명은 물론 인간에 대한 지식을 확장하는 중요한 과학적 업적이죠. 그러나 인간 진화의 과정을 안다고 해서 그 지식이 곧바로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도 대답하는 건 아니죠. 그건 생물학이 대답할 질문이 아닙니다. 그런데 대체로 진화생물학자들은 진화의 과정에 대한 지식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모든 질문에 답한다고 착각하고 있어요.

또 자연은 자연일 뿐이지 거기 무슨 초자연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초자연적 존재를 상정하는 종교, 초자연적 세력을 등장시키는 신화 같은 것은 이제 아무짝에도 슬모없는 미신이고 착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두 번째 착각입니다. 이런 방식의 신화 비판은 그리스의 이오니아 자연학파가 이미 2,600년 전에 내놓았던 겁니다. 탈레스를 시조로 하는 이오니아 학파는 서양적 과학 정신의 모태입니다. 그 과학적 사유의 전통이 자연세계에 대한 미신을 깬 것은 사실입니다. 또 근대 과학이 교회의 횡포에 항거하고 정치권력과 교회의 결탁, 미신 사회의 폐단 같은 것을 척결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21세기 생물학자가 신화나 종교에 대해서 발언할 때 꼭 2,600년 전 비판을 똑같이 되풀이해야 하는 건 아니죠. 신화를 읽고 종교를 갖는 사람들 중에는 자연 너머에 초자연이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다른 이유들도 있습니다. 생물학이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들, 그러나 인간이 포기할 수 없는 질문들이 있죠.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라고 말할 때, 그 ‘하느님’을 너무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때의 ‘하느님’은 인간이 아직도 해답을 얻지 못한 많은 질문들의 집합일 수 있으니까요.


신화도 그런가요?


도 

신화도 그렇습니다. 신화는 답이 아니라 질문일 때가 많습니다. “피뢰침이 나온 시대에 제우스의 벼락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마르크스는 말했죠. 그러나 현대인은 제우스가 벼락을 때려 악당을 벌했다는 이야기를 사실적 진술로 읽는 것도 아니고 과학적 해답으로 읽는 것도 아닙니다. 제우스 이야기를 질문으로 바꿔보면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세계의 정의가 없다면 인간아, 너희는 그런 세계에 살 수 있겠느냐?” 기원신화도 그렇습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이야기는 생물학자들에게는 농담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강력한 질문들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신 없이도 너희는 생명의 존엄을 알고 서로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창조의 힘을 주었다면 너희는 그 힘으로 무엇을 하겠느냐?” “내 앞에 서지 않고도 인간아, 너는 네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겠느냐?” 이런 것이 신화의 질문입니다.

과학적 설명에도 불구하고 신화나 종교가 없어지지 않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죠. 3,000~4,000년 전 신화가 지금도 히을 가지는 것은 진화의 질문들이 인간이 노상 대면해야 하는 기본적 질문이기 때문에 아무도쉽게 답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 질문들로부터 신과 인간의 관계가 만들어져요. 이때 신은 하늘나라 어딘가에서 놀고먹는 영감탱이가 아니라 인간에게 공존의 정의, 자비와 결속 같은 윤리적 책임을 지우고 그 책임을 환기시키는 존재입니다. 신화는 상징과 은유의 언어이기 때문에 과학의 사실적 언어로 읽으면 안 됩니다. 신화의 상징적 의미는 인간의 삶에 매우 중요하고, 신화의 근본적 질문들은 여전히 해답 없이 열려 있죠. 생물학이 인간의 기원을 제아무리 과학적으로 해명한다 해도 신화가 제기하는 질문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116 ~ 120



이눈학은 확실한 결론보다는 문제를 열어두고 싶어합니다. 과학은 답을 추구하고 인문학은 질문을 추구합니다. 확실성의 추구는 서고 근대 과학의 특징이죠. 유전자 결정론도 확실성에 대한 그런 열정을 연장선에 있어요. 현대 생물학이 인간 존재와 그의 행동에 대한 모든 답을 가진 것처럼 발언하는 순간 인문학은 생물학에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됩니다. 이 점에서 현대 생물학은 현대 물리학이나 수학과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

“객관적 실재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 부분들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 이론입니다. 1931년 괴델의 불완전성 공리가 나올 때까지 수학자들은 ‘수학의 완전성’을 믿고 있었죠. 수학은 완전하고 그 개념 세계에서 모든 진리는 입증될 수 있다, 모든 진리는 수학에 의해 입증된다는 믿음이죠. 이 믿음을 깬 것이 괴델입니다. 수학적으로 진리 진술임에도 불구하고 수학으로 입증할 수 없는 진리도 있다, 그러므로 수학은 불완전하다는 것이 이른바 불완전성 공리입니다. 근대 과학에 대한 현대 과학의 이런 반란이 현대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통찰의 접점을 만듭니다. 수학이, 또는 과학이 입증할 수 없는 진리도 있다. 이건 인문학적으로는 아주 매혹적인 주장입니다.

                                                                                       120 ~ 121


1990년대 초 미국에서는 거의 1년 내내 저녁 뉴스 시간을 달군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느 남자가 젊었을 때 돈도 없고 장래도 불투명하던 시절에 아이를 낳았는데 기를 자신이 없으니까 입양을 시켰어요. 그런데 몇 년이 지나 조금 살 만해지니까 아이를 도로 찾겠다고 나선 겁니다. 이 사건은 법정까지 갔고 법원은 끝내 ‘생물학적 아버지’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법원이 사용한 ‘생물학적 아버지’는 엄밀하게 볼 때 ‘유전적 아버지’라고 했어야 옳은 겁니다. 그 아버지는 그저 유전자만 줬을 뿐 기르는 과정에 전혀 과녕하지 않았는데 생물학적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죠. 비록 유전자를 주지는 못했어도 기르는 동안 그 아이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아버지는 그럼 ‘비생물학적 아버지’인가요? 아니죠. 오랜 유전-환경 논쟁이 여기서 그대로 되풀이되는 겁니다. 한 인간은 유전과 환경의 관계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하죠. 우리의 삶 전체가 사실 생물학의 범주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게 그렇게 이상한 논리입니까? 우리 삶의 어느 부분이라도 죽어 있는, 즉 비생물학적인 부분이 있는 겁니까? 다시 말하면 유전자를 준 아버지는 ‘유전학적 아버지’이고, 기른 아버지는 ‘생태학적 아버지’쯤 되는 거죠.

지금 당장 생물학에서 설명할 수 없는 문제라고 하더라도 설명의 노력조차 시작하지 못할 공간은 없다는 겁니다. 윌슨 교수가 《사회생물학》을 썼을 때, 법학은 인간의 법률적 행위를 연구하는 인간생물학이고, 경제학은 인간의 경제적 행위를 연구하는 인간생물학이라고 선언했었죠. 이에 대해 온갖 인문사회과학자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이 생물학에 포섭되어버리는 거 아니냐고 엄청난 공격을 퍼부었죠. 밥그릇 싸움으로까지 확대된 겁니다. 윌슨 선생님에 따르면 결국 모든 학문은 ‘인간생물학’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거꾸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쓴 《개미제국의 발견》에는 ‘개미 사회의 경제’, ‘개미 사회의 문화’, ‘개미 사회의 정치’ 등의 장들이 있습니다. 개미라는 참으로 대단한 사회적 동물에 대해 경제학․정치학․사회학․문화론 등에 대해 기술해본 겁니다. 그러면 큰 일 나나요? 오히려 많은 분들이 퍽 좋아하십니다. 궁극저그올는 모든 동물종에 대해 우리는 우리 인간을 위해 마련한 모든 학문들을 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저는 그런 싸움을 구태여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생물학자가 동의하진 않겠지만 최재천이라는 생물학자는 비생물학적 차원이라는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125 ~ 126



그런데 역사상 ‘동물성’이라는 개념은 인간과 여타 동물을 구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한 인간집단이 다른 인간집단을 차별하는 데 더 많이 사용되었어요. 히틀러의 눈에 유대인은 인간 이하의 존재였죠. 유대인은 ‘인간의 수치’라는 것이 나치의 생각이었어요. 제국주의 시대의 모든 식민 지배자는 점령지 백성을 ‘동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국주의 일본의 눈에 중국인과 한국인은 ‘더럽고 비천한 존재’이고 멸시의 대상이었죠. 제국주의만이 아닙니다. 모든 신분사회는 천민을 만들어냅니다. 서열의 밑바닥에 있는 천민은 동물적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무존재’입니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을 사회적 무존재로 취급해서 왕따 놓는 버릇은 현대 사회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동성애자를 비롯한 소수자와 약자, 가난뱅이 이주노동자, 기타 등등 소위 ‘사회적 무능력자’들은 아직도 akgs은 나라에서 비정상적인, 그러니까 동물적인 존재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129



리처드 도킨스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진화론자 가운데 하나죠. 그 사람이 쓴 《이기적 유전자》니 《눈먼 시계공》이니 하는 책들은 다윈주의를 ‘이 시대의 이즘’으로 대중화하는 데 공로가 커요. 그런데 그 도킨스조차도 어떤 신문 회견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과학적으로 나는 다윈주의자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나는 반(反) 다윈주의자이다.” 과학적으로는 다윈주의자, 정치적으로는 반 다윈주의자라는 고백은 인간 세계가 생물학적 진화론만으론 설명되지 않는 별개의 차원을 갖고 있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것 아닙니까? 인간사회의 ‘정치적 차원’은 바로 그런 별개의 차원, 혹은 여러 가지 별개의 차원들 가운데 하나죠.

                                                                                       130 ~ 131



우리는 보통 다윈이 자연선택론을 주창하여 생물의 진화를 설명한 생물학자쯤으로만 이룬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2,000년이나 서양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던 이원론의 허구를 일깨우고 다시금 일원론의 지혜를 선사한 혁명적인 사상가였죠. 그래서 우리가 그 사건을 두고 다윈 혁며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지구의 생명은 지극히 낭비적이고 기계적이며 미래지향적이지도 못하고 다분히 비인간적이며 비도덕적인, 더 정확히 말하면 무도덕적인 과정인 자연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진화는 결코 우리 인간을 탄생시키기 위해 존재해준 과정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연선택은 지극히 단순하고 기계적인 과정이지만 우리 인간을 포함한 이 엄청난 생명의 다양성을 탄생시킨, ‘자연이 선택한’가장 강력한 메커니즘이라는 겁니다.

                                                                                       132



진화론은 지극히 간단한 이론이지만 엄청난 응용력을 지닌 이론입니다. 몇 가지 조건만 충족되면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죠. 우리는 한때 다윈의 이론을 자연선택‘설’이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가설(hypothesis)이란 말이죠. 그러나 거의 한 세기 반 동안의 검증을 이겨낸 이제는 엄연한 이론(theory)의 경지에 이른 겁니다.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이론의 단계도 넘어 원리(principle)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134



‘족내 협동’이든 ‘족외 혀동’이든 호혜성 이타주의와 게임 이론을 결합시키면 좀더 쉽게 설명됩니다. 미시간 대학의 정치학자 로버트 액설로드와 해밀턴이 이른바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바탕으로 밝혀낸 ‘팃포탯(tit-for-ata)' 전략이 의외로 훌륭한 설명을 제공했죠. 그 후 많은 학자들이 게임 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기본적으로 타인들과 사회를 구성하고 사는 인간사회에서 어떻게 협동이 일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 활발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페어, 긴티스, 보울즈 등 일군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강한 호혜성(strong reciprocity)'이론은 매우 흥미로운 결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협동체계를 무너뜨려 사회의 질서를 해치는 존재들을 차단하기 위해 약간의 손해도 무릅쓴다는 겁니다. 아주 최근에는 침팬지 연구로 제인 구달 박사와 쌍벽을 이루는 프란스 드 발의 연구진이 똑같은 일을 하고도 남보다 못한 보상을 받던 원숭이가 자기에게 주어진 보상을 거부하는 행동을 관찰하기도 했어요. 부당한 대우에 분노할 줄 안다는 거죠. 사회 정의의 개념입니다. 이 분야의 연구는 요즘 상당히 흥미진진합니다.


※ 포괄적응도 이론

개체의 적응도와 혈연관계에 따라 다소 가치가 감소한 혈연들의 번식 성공도의 총합으로 적응도를 정의하는 이론입니다. 기존의 진화생물학 이론은 개체의 적응도를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개체들이 행동할 것ㄱ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생물계에서 어떻게 이타적인 행동이 진화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포괄적응도는 한 생물 개체의 번식에 의해 개체 적응도와 그 개체와 유전자를 공유한 다른 개체들의 번식을 통한 이득의 간접 적응도를 합산한 값이 됩니다. 따라서 자신을 희생하여 형제를 돕는 행동은 자신의 적응도를 낮추는 일이지만, 형제의 적응도를 높여 자신의 포괄적 적응도를 높일 수 있ms 것이죠. 이론은 개체적응도 개념에서 보면 ‘이타적인’ 유전자가 포괄적응도 개념에서는 ‘이기적인’ 행동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137 ~ 138



보노보 원숭이와 침팬지가 갈라선 것은 인간과 침팬지의 분화 시점보다 훨씬 후인 약 150만 년 전의 사건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침팬지의 경우, 집단 내부에 갈등이 생기면 흔히 폭력이 해결수단이 됩니다. 그런데 보노보 원숭이들이 갈등을 푸는 방식으 다릅니다. 폭력이 아닌 섹스로 문제를 해결한다죠? 집단적인 섹스 파티가 벌어지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참 좋은 해결법이죠. (하하하) 침팬지가 폭력의 메커니즘에 매여 있는 동안 보노보는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향으로 적응하고 진화했다는 설명이 한쪽에 있을 수 있고, 결정론의 경우는 보노보에게는 침팬지에게 없는 일종의 ‘평화 유전자’가 있어서 이 유전자가 비폭력적 행동을 보상하는 쪽으로 작동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143



평화 유전자, 비폭력 유전자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어떤 속성을 대표할 수 있는 유전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유전자가 수많은 형질들을 형성할 뿐 아니라, 하나의 질량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수도 엄청납니다. 즉 한 가지 일만 달랑 하는 유전자란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머리카락 색을 결정하는 유전자도 아직 못 찾았습니다. 과연 몇 개의 유전자가 관여하고 있는지도 아직 찾지 못했죠. 그처럼 간단한 형질을 결정하는 유전자의 존재도 모르는 상황에서 ‘평화 유전자’, ‘폭력 유전자’를 운운하는 것은 너무 앞서가는 이야기입니다.

……

하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가 한 계통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유전자 안에는 그 모든 역사의 기록이 다 들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갈라진 후의 변화 때문에 우리가 서로 달라진 것 못지않게, 갈라지기 전에 함께 갖고 있었던 것 때문에 우리가 많은 면에서 비슷할 수 있다는 거죠. 우리의 DNA 안에는 우리가 침팬지의 한 종이었던 시절의 기록은 물론, 우리가 예전에 물속에서 물고기로 살던 시절의 기록도 담겨 있습니다.

                                                                                       144 ~ 145



“어떤 속성을 대표할 수 있는 유전자는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유전공학은 개체 수준에서 인간의 행동이나 성향, 질병을 설명해줄 유전자를 찾아내는 일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개인들의 어떤 성향, 심지어 기질적 특성까지도 유전자로 설명하려고 들죠. 특정 질병의 유전자를 찾아낼 수 있다는 기대와 전망이 아니라면 유전자 치료학이나 생명공학이 지금처럼 각광을 받을 이유가 없죠. 아침형 인간, 저녁형 인간 어쩌고 하는 분류가 최근 대중 독서계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아침형 인간이 더 성공하니까 성공하려면 아침형으로 바꾸라는 거죠. 이 분류를 따르면 나는 저녁형도 아닌 ‘오밤중형’이라서 성공하기는 다 틀렸습니다. 내가 아는 소설가들 중에서 상당수가 오밤중형입니다. 자정을 넘겨야 정신이 드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최근 어떤 외국 방송 기사를 보니까 이게 다 유전자 탓이라는 겁니다. 영국 사람들은 아침형을 종달새형, 저녁형을 부엉이형이라 부르는데, 종달새냐 부엉이냐는 생활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유전자 탓이라는 겁니다. 저녁 7시만 되면 잠이 쏟아져 견디지 못하는 어떤 미국인 가족이 있어서 유전자 검사를 해본즉 그 가족의 유전자가 그렇다는 겁니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유전자 결정론에 걸려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선택과 행동의 책임을 인간 그 자신에게서 면제시켜 유전자 탓으로 돌리는 데 있습니다. 유전자가 모든 책임을 지면 한 가지 좋은 점이 있긴 합니다. 아무도 감방에 갈 필요가 없게 되죠. 유전자란 놈들만 잡아다 처넣으면 되니까요.

                                                                                       146



다윈은 우리처럼 프로젝트에 떠밀리면서 산 것도 아니고 물려받은 유산도 넉넉해서 직업을 가질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혼자 연구를 했습니다. 그는 당대 빅토리아 사회에 자신의 이론이 가져올 파장에 대해 수없이 고민하고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왠 세월 동안 스스로 남들이 할 만한 질문을 하고 답하는 과정을 거친 덕택에 한 개인이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이론을 남기고 간 것이죠. 하지만 다윈이 혼자 한 직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모순이 발견되곤 합니다. 다윈의 책을 읽다 보면 다윈 스스로 자신이 구성한 이론에 어긋나는 발언을 하기도 해요. 그런 사소한 오류들이 다윈의 손을 떠나자 일파만파로 커져버린 거죠. 다윈은 사람들 앞에서 적극적으로 자기 이론을 방어하는 사람은 아니었거든요. 지극히 수줍음이 많고 남들 앞에 나서는 걸 무척 싫어했죠. 그래서다윈 대신 나서서 진화론을 떠들고 다닌 사람들이 엄청난 실수들을 많이 범한 겁니다.

사회진화론은 그런 ‘어설픈 다윈의 전도사’들의 실수가 낳은 결과였죠. 물론 다윈도 명확하게 결론을 못 내리고 실수를 하기도 했죠. 완전히 해명되지 않았지만 설명을 하고 싶은 유혹은 누구엑나 있습니다. 다윈도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고 싶어 죽겠는데 확실한 데이터가 부족해서 참은 것들이 많았을 겁니다. 그런데 다윈의 책을 읽고 흥분한 사람들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마구 떠들어대는 바람에 첫 단추가 너무 잘못 끼워졌어요. 무지가 종종 용맹을 낳지 않습니까. 사회진화론은 분명히 진화론에 대한 심각한 오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48 ~ 149



인간이 하는 행동 가운데 동물하고 다른 것, 가장 신기한 것 하나가 뭔지 아세요? 바로 강의예요. 이 세상에 자기들 중 동물만 앞에 세워 한 시간씩 떠들게 하고 나머지 동물들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앉아서 듣는 동물은 우리 인간 말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건 엄청나게 신기한 행동입니다. 아주 부자연스러운 또는 비정상적인 행동양식이죠. 하지만 저는 바로 이 강의를 하고 강의를 듣는 행동 덕택에 우리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짧은 시간에 강의를 하는 사람은 그가 몇 년, 아니 몇십 년 동안 연구해온 지식을 몇 마디로 축약해서 한꺼번에 여러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곳에 오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우리는 방송매체를 이용하여 더 널리 알릴 수도 있구요. 아니면 책으로 남겨 시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기도 하죠.

학습능력을 갖춘 동물이라 할지라도 대개 당대에 배워 써먹고 다음 세대는 나름대로 또 홀로 터득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전 세대가 터득한 것을 문자로 다음 세대가 남깁니다. 말하자면 다른 동물들은 세대마다 출발선으로 다시 돌아가서 뛰기 시작하지만 우리는 아예 출발선을 들고 옮기며 사는 동물인 셈입니다. 비교가 안 되는 거죠. 다른 동물들도 배우고 그 배운 것을 소수의 측근들에게 전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강의를 듣는 동물들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좀이 쑤셔서 핸드폰으로 문자 보내고 창밖을 쳐다보면서 딴청을 부리기 쉽거든요. (하하하)

                                                                                       150 ~ 151



그러나 이런 소진화의 단계를 거쳐서 대진화로 넘어가면 문제가 결코 단순한 게 아닙니다.이건 생물학이 가지고 있는 어려움이자 동시에 상당한 매력이기도 합니다. 물리학이나 화학은 기본적으로 환원주의적인 학문이잖아요. 쪼개고 쪼개서 부분을 보고 그 부분들로 전체를 끼워 맞추는 학문이죠. 그런데 생물학은 그렇지 않잖아요. 생물학은 분자에서 단백질로, 단백질에서 조직으로, 조직에서 생명체로 하나의 단계를 밟아 올라갈 때마다 ‘창발성(emergent properties)'이 나타납니다. 그걸 단순히 환원주의적인 것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많은 요소들이 개입되죠. 그 복잡한 단계에서는 사회진화론이 이야기하는 ’진보‘의 개념이 들어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결코 단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 이 개념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에서 똑같이 발음하지만 의미가 다른 동음이의어입니다. 또한 북한에서도 창발성이란 개념이 등장해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흰개미는 역할에 따라 여왕개미, 수개미, 병정개미, 일개미로 발육해 수만 마리식 큰 집단을 이루며 질서 있는 사회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개개의 개미는 집을 지을 만한 지능이 없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흰개미의 집합체는 역할이 서로 다른 개미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거대한 집을 만들어냅니다. 이처럼 하위계층(구성 요소)에는 없는 특성이나 행동이 상위계층(전체 구조)에서 자발적으로 돌연히 출현하는 현상이 창발성입니다. 영어로는 ‘불시에 솟아나는 특성(emergent property)'인 것이죠. 앞의 대담에서 나왔듯이 지난 3세기 동안 서양과학은 환원주의에 의존했습니다. 사물을 간단한 구성요소로 나누어 이해하면, 그것들을 종합해 전체를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러나 복잡성 과학의 창발성 개념은 전체가 그 부분들을 합쳐놓은 것보다 항상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52 ~ 153



복잡성의 영역에 들어오면 ‘진보’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 결코 말할 수없다. 좋은 얘깁니다. 생명체의 진화 못지않게 복잡한 것이 인간의 역사인데, 그 역사라는 것에 진보가 있느냐 없느냐라는 문제는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진보’라는 말이 나오면 사람들은 곧장 마르크시즘을 연상하죠.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진보란 것이 인간 사상계에 등장한 역사는 겨우 200년 안팎입니다. 진보사상을 띄워올린 것은근대 과학과 계몽철학이죠. 과학, 이성, 합리적 기획을 합치면 인간사회는 ‘진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근대 이데올로기죠. 거기에 불행하게도 정치제국주의가 결합합니다.

19세기 서구 제국주의자들 가운데 진보론자 아닌 사람이 없어요. 유럽은 진보의 최첨단에 있고, 세계의 나머지 지역들은 야만이라는 게 제국주의적 세계관입니다. 진보한 문명이 야만을 깨우치고 선도하고지배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므로 유럽에 의한 식민 지배는 지배가 아니라 오히려 구원이라는 것이 제국주의자들의 자기정당화였죠. 이런 정당화 작업을 ‘과학적으로’ 열심히 뒷받침해준 것이 19세기 생물학입니다. 인종차별주의의 ‘과학적’ 기원도 19세기 생물학이죠. 유럽 백인과 아프리카 흑인은 아예 조상이 다르다는 것이 적어도 다윈 이전의 생물학적 주장이었죠.

아프리카 여성과 유럽 백인 여성의 인종적 차이를 밝히느라 양쪽 여성들의 엉덩이 사이즈를 재고 다닌 것이 그 시절의 생물학자들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은 19세기 생물학을 과학 아닌 ‘백인 신화’로 봅니다. 그뿐이 아니에요. 성차별의 ‘과학적’ 원조도 생물학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두뇌 사이즈가 다르다, 고로 남은 생물학적으로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거죠. 생물학의 역사에는 부끄러운 데가 많습니다. 인종주의, 남성우월주의의 원조였던 생물학이 현대에 들어와서 인종주의나 남성우월론의 비과학성을 말하고 진보의 개념 앞에서 몸조심을 하고 있는 걸 보고 있자면 이건 생물학의 진화인가 진보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155 ~ 156



“인간이 계획하면 신이 웃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겸손을 위해서는 늘 기억할 만한 말이죠. 물론 이때의 신은 섭리의 신이 아니라 ‘우연의 신’입니다. 나는 우연성의 신을 부정하지 않아요. 언제 그 신을 우연히 만나면 꼭 술 한잔 나누고 싶어요. 나는 우연의 창조성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연의 신이 웃든 s말든 인간은 죽자사자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그 실현을추구합니다. 내 생각에는 우연성이라는 게 인간 존재의 조건이자 운명적 저주 같아요. 왜 계획하는가? 부족한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역사에는 우연성이 무수히 끼어들지만 역사가 우연의 연속만은 아니죠. 그래서 나는 생물학 혹은 진화론의 우연성 주장을 사회에 곧장 적용해서 일종의 ‘사회철학’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미시세계에 대한 물리학의 ‘불확실성’ 이론 같은 것을 곧바로 인간사회에 적용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진화론이 사회이론이나 인문학에 유용한 통찰을 제공하긴 하지만, 인문사회과학과 생물학 사이에는 진화론으로는 극복되기 어려운 고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우발적 창조성이라는 아이디어를 끌고 들어온 것이 현대 예술”이라고 하시니 저로서는 다윈 선생님 얘길 다시 한 번 안 할 수 없네요. 제가 보기에는 그 모든 걸 가능하게 한 분이 바로 다윈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윈은 절대적인 진리를 상정하고 그 진리의 예표(type)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변형’은 모두 불완전한 것으로 규정하는 플라톤의 본질주의 철학(essentialist philosophy)에서, ‘변이(variation)' 그 자체가 실존하는 존재이며 그것이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상대주의 철학(relativist philosophy)을 정립한 위대한 사상가라는 점을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다윈의 진화론이 물리학의 상대성이론이나 창조적인 현대 예술이 탄생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했다고 믿습니다.

                                                                                       159 ~ 160



제3장 생명복제, 이제 인간만 남은 것인가


현재의 복제기술 자체는 여전히 매우 불안정해서 복제한 배아를 자궁에 착상시키면 유산이나 사산의 확률이 엄청나게 높아집니다. 대리모를 통한 출산도 실제로 사고가 많고 변수도 많아서 성공 확률이 높은 편이 아니에요. 대리모를 통해서 무사히 출산했다고 해도 내부 장기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이렇게 복제이론 자체는 간단하지만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기술은 아직 매우 불안정한 단계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생물학적인 특성 자체에 변수가 많거든요. 그러므로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해도 막상 복제를 시도했을 때 조금이라도 잘못된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성공 확률이 대단히 낮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문제는 확률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걸 두고 바로 생명의 존엄성이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복제 과정에서 실패한 그 많은 세포들은 어찌할 것이며, 산모의 자궁 안에서 자라고 있는 복제된 태아에서 결정적인 결함을 발견하면 또 어떻게 할 것입니까? 거침없이 낙태를 할 건가요? 그거도 가히 낙태의 천국이라 할 만한 대한민국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건가요? 복제인간을 만드는 전 과정에서 거의 완벽하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확신이 서기 전까지는 절대로 인간 복제를 시도할 수 없을 겁니다. 다른 동물의 복제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죠. 그 모든 공정의 품질 관리를 완벽하게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저는 복제인간이 몇십 년  안에 탄생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168 ~ 169



황우석 교수의 말에 따르면 난자 공여자들은 모두 이번 실험 내용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해요. 난치병 치료를 위한 실험이라면 기꺼이 난자를 제공하겠다는 입장들이었다고 합니다. 황우석 교수 연구 팀도 이 문제가 얼마나 민감한 사안인지 알기 때문에 난자를 기증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정신과 테스트까지 실시했다고 하더군요. 이런 과정이 의심 없이 완벽하게 진행되지 않으면 연구뿐 아니라 연구진의 사회적 생명이 위험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저는 이 문제에 관한 한 황우석 교수를 믿고 싶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면 그 내용을 공개하고 바로잡아야죠. 생명윤리가 뒷받침되지 않는 연구는 그 생명이 길지 못하죠.

                                                                                       169



최교수님께서 ‘아슬아슬한 경계’라고 한 것은 영어권에서는 ‘미끄러운 비탈(slippery slope)'이라는 은유로 표현합니다. 미끄러지면 천 길 낭떠러지, 잘 타고 넘어가면 낙원? 이건 아주 무시무시한 은유죠. 동네 뒷산에 올라갔다가 미끄러져서 무릎이 까졌다는 정도의 위기가 아니라 인간이 통째로 망할지도 모른다는 문제가 달린 거라면 아무도 만용을 부릴 수 없죠. 선택과 결정의 문제 앞에서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딜레마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기술 발전 그 자체로는 선택의 고민을 해결할 수 없는 경우를 여기서도 보죠. 지금 같은 기술시대에서도 우리는 무엇이 현명한 선택인지 알지 못합니다.

                                                                                       173



저는 솔직히 황우석 선생 같은 양반이 이 세상에 없었더라면 하고 바랍니다. 우리가 아예 복제과학이라 것을 생각조차 못했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수도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거죠. 과학기술의 발달이 꼭 지금과 같은 형태로 이루어졌어야 할 필요는 절대로 없습니다. 하지만 과학이 뭐 별겁니까? 호기심이 고야이를 죽인다지만 호기심이 가장 많은 동물은 단연 우리 인간이죠. 저는 과학이란 우리 인간의 알고자 하는 욕망과 행동을 체계적으로 구성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앎의 행동’은 우리의 본능이죠. 저는 심지어 기독교도 과학을 부추겼다고 생각합니다. 왜 현대 과학이 동양이 아니라 서양에서 꽃을 피웠느냐 하는 문제에 의견들이 분분한데, 저도 하나 보태렵니다. 하느님은 왜 하필이면 우리에게 ‘지식의 나무’를 일부러 골라내어 그건 절대로 먹지 말라고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을까요? 저는 하느님이 당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 인간에게 과학을 허락하신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멈출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는 방법이 문제일 뿐이죠.

                                                                                       175



저는 명색이 생명과학자이지만 사실 복제 연구 같은 걸 직접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전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동식물들의 행동과 생태를 연구하는 사람이죠, 그렇지만 사뭇 ‘위험한’ 연구를 하고 있는 동료 연구자들의 입장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의 도엉에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저는 제대로 된 과학자라면 모름지기 자신이 하고 있는 연구가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최소한의 인문학적 분석을 할 줄 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는 종종 우리 과학자들을 너무 지나치게 단순한 사람들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도 고민합니다. 우리도 인류에게 좋은 공헌을 하고 싶어합니다. 저는 언제나 자유를 얻는 가장 좋은 바업은 스스로 구석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이 날 구속하기 전에 내가 스스로 나를 구속하고 그걸 남이 인정하면 가장 이상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우리 과학자들이 충분한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76



도 

남녀 양성의 결합과 섞임에서 탄생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복제배아에는 이런 양성원칙이 참여하지 않습니다. 핵이 제거된 난자에 체세포 핵을 집어넣어 생성된 배아는 인간 형성에 필요한 DNA의 절반만 갖고 있습니다. 중대한 정보 결손이죠. 여성 쪽 DNA가 제거된 난자란 결손 난자예요. 복제배아는 인간으로 성장할 잠재력을 다 가진 배아가 아닙니다. 수정란으로 생성되는 ‘배아’와 체세포로 만들어지는 ‘복제배아’ 사에는 미묘하지만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핵이 없는 난자와 체세포 핵만으로 생성되는 세포 덩어리는, 참으로 아픈 이야기지만, 인간배아라고 보기 어려운 데가 있습니다. 이 ‘차이’에 입ㄱ가해서 윤리문제를 조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해결보다는 조정이죠. 현대인이 골치 아픈 윤리적 난문(難問) 앞에 서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윤리적 경험입니다. 이 난문을 뚫고 나가자면 고통이 따르죠. 또 하나, 누가 줄기세포 연구를 하든 연구의 진행과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감시하는 국제적 모니터링 기구를 띄워야 할 겁니다. 우리나라가 이 부분에서도 선도적으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178 ~ 179



도 

오래 산다는 거은 나쁘지 않은 일 같지만, 새로 태어나는 세대가 없다면 늙은이들은 누가 먹여살립니까? 오래 살면서 동시에 생산력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 생산력은 생식력과 떼놓을 수 없습니다.

혜택의 불평등이 제기하는 문제도 심각할 겁니다. 돈 있는 사람은 생명기술의 혜택으로 오래 살고 가난한 사람들은 적당히 살다가 죽으라면 사회는 뒤집어집니다. 수명을 연장할 기회를 얻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 최 교수님 집으로 몰려가 불을 지르겠죠. 너만 오래 잘 먹고 잘 살 거냐, 나도 살고 싶다 하고 말이죠.

                                                                                       181



현대 인문학, 특히 20세기 후반 이후 서양의 이론인문학은 좀 심하게 말해 망한 집입니다. 자기 해체와 파괴의 열정이 너무 지나쳐서 망했고 극단을 추구하다가 난센스에 빠지는 바람에 망했습니다. 20세기 후반 이론인문학의 최대 업적은 제 스스로 자기 집을 열심히 허물어뜨리려 한 겁니다. 일종의 자살충동 같은 데가 있어요. 극단주의도 심각했죠. 이성비판이 이성의 전면 배척으로 나아가면 인문학은 망합니다. 비판과 배척을 분별하지 못하게 되거든요. 지난 몇 년 동안 저는 새로운 인문학의 필요성이라는 문제를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인문학의 방향을 모색하는 데 아주 중요한 것이 인문학과 과학, 특히 생물학과의 대화입니다. 앞서 잠깐 그런 말을 했지만, 지금부터의 인문학은 과학과의 대화에서 많은 자극을 받게 될 겁니다.

                                                                                       183 ~ 186



우리는 과학을 너무 급하게 받아들인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기술이 먼저 들어오고, 과학이 그 뒤를 미처 따르지 못했죠.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비합리성이나 비리 등은 과학적 사고가 결여된 상태에서 문제를 기술적으로 해치우려고 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늘 “과학적인 사고를 하자”고 떠들고 다닙니다. 앞서 말한 자립형 사립고 문제도 마찬가지죠. 교육 전체의 문제는 더하겠죠. 문제가 될 만한 일도 아닌데 첨예하게 대립까지 하는 걸 보면 정말 답답합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부터인가 ‘과학의 대중화’가 아니라 ‘대중의 과학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게 됐습니다. 과학의 대중화를 한다고 노력하다보면 대중의 수준에 맞춰 과학을 설명하는 데만 너무 신경쓰게 돼서 때로 ‘과학의 저질화’를 범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과학은 쉬운 분야가 아닙니다. 쉽다면 왜 이렇게 애써 홍보하려 하겠습니까? 그러니 무작정 쉬운 것처럼 예쁘게 포장하여 건네주면 과학은 온데간데없고 엉뚱한 과학 껍데기의 ‘멋과 맛’만 남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국민 모두가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날이 오는 것이죠. 대중을 과학화하는 겁니다. 어렵더라도.


지금 우리 사회의 ‘주술문화’는 조선시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정치인이나 기업인 할 것 없이 열심히 점치러 다니죠. 대통령에 출마한 사람 중에 조상 묘를 옮기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소리까지 있어요.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귀신도 있고 유령도 있는 세상이 없는 세계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북한에 갔다 와서 말하기를 그 사회에는 귀신이 없다는 거예요. 합리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보면 주술․미신․귀신․유려을 몰아내서 세상을 밝게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근대 계몽철학과 과학이 공유했던 관심이죠. 사회는 가능한 한 합리적으로 조직되고 운영되어야 합니다. 다만 어떤 사회도, 그게 인간의 사회인 한은 완벽하게 합리적일 수 없고 완벽하게 과학적일 수가 없죠.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성만으로 똘똘 뭉쳐진 것이 아니니까요. 일종의 비빔밥 같은 것이 인간이죠.

그 비빔밥에서 이성적 능력이 차지하는 비율은 아주 미미하다고 나는 생각해요. 이성 일변도의 사회를 추구하면 이성의 광기가 뜨게 되고, 그 광기 때문에 불만의 유령들이 출현하게 됩니다. 음침한 토굴과 고성(古城)을 무대로 해서 귀신과 유령들이 등장하는 소위 ‘고딕소설(gothic novel)'이라 것이 영국에서 크게 유행한 것은 18~19세기인데, 이 시기는 계몽철학과 과학이 서양사회에서 열심히 귀신을 몰아내고 있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합리성이나 과학성이 차고 넘쳐서 문제인 것이 아니라 크게 모자라서 문제입니다. 내가 보기에 한국인은 대체로 그 의식과 태도가 쪼개져 있습니다. 이 분열상을 저는 어떤 칼럼에서 두 개의 다른 시간대를 가리키는 세계로 비유한 적이 있어요. 한국인은 두 개의 시계를 차고 있다. 하나는 전근대의 시간에 멈추어선 왕조의 시계이고, 다른 하나는 무섭게 내달리는 현대의 시계다. 어떤 때는 왕조의 시계에 멈춰 행동하고 어떤 때는 현대의 시계에 맞춰 행동한다, 뭐 그런 이야기였어요. 그런데 그 두 시계 어느 쪽도 합리적인 것이 아니죠. 지금 우리 사회는 고도의 경쟁주의 사회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파벌․학벌․연줄․서열․신분 같은 전근대적 비효율의 요인들이 선의의 사회적 경쟁력을 다 갉아먹고 있습니다.

                                                                                       187 ~ 189


“기술은 있지만 과학적 사고가 없다”는 최 선생님 말씀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는데요. 그것은 우리 대학 교육과도 깊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과학적인 질문보다는 기술에 대한 훈련이 지배적인 것은 아닌지요? 어떤 이공계 학생은 자기가 학교에 다니는지 산업체 프로젝트를 하러 다니는지 모르겠다고 하던데요.


학생들의 심정도 이해가 갑니다. 보통 큰 프로젝트 하나를 가져다놓고, 그것을 우산처럼 활짝 펼친 상태에서 각 학생이 우산살 하나를 붙들고 연구하는 형태가 일반적이죠. 그런 연구가 규모도 크고 연구비를 따오기도 훨씬 유리하니까요. 그런 프로젝트라면 교수에게도 업적이 되고, 물론 조교 월급도 나오죠. 이런 것이 쌓이면 나중에 정리해서 논문 내고, 학위도 받고 그러죠.

하지만 전 미국에서 다른 방식으로 공부를 했어요. 그 당시 처음에는 지도교수들에 대한 불만이 있었죠. 좀 챙겨주지 왜 이렇게 내팽개치나 했는데, 지내놓고 보니까 훈련을 잘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귀국해서 우리나라 대학원생들한테 가장 큰 불만을 느꼈던 건, 학위논문 발표장에 들어가서 “왜 그런 주제로 연구를 하게 됐느냐?”, “실험은 왜 저렇게 안 하고 이렇게 했느냐?”고 질문을 했더니 모두 한결같이 고개를 떨군 채 대답을 하지 않았던 점입니다. 그래도 똑같은 질문을 계속 했더니 드디어 명답이 나왔는데, “지도교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했는데요”라는 대답이었어요. 학위라는 게 그 사람이 그 분야의 대가가 되었다고 주는 게 아니잖아요. 홀로 설 수 있다는 자격증을 주는 건데. 제가 보기에 우리 대학들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사람들 중에 진정으로 홀로 설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아요.

                                                                                       190 ~ 191



도정일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에게 따로 강조하시는 것이 있습니까?

저도 대학원 석․박사 과정 연구자들에게 논문과제를 준 일이 없습니다. 무엇을 연구하고 공부할지 문제를 제 힘으로 찾아내고 그 연구의 의의와 중요성을 스스로 정당호할 줄 아는 능력을 기르는 것부터가 훈련입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연구자들이 오로지 지도교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교수가 좋아할 만한 방법론과 이론 등을 들고 올 때입니다. 석사논문까지는 기존의 연구 결과들을 학습하고 거기 의존하는 것이 그런대로 용납되지만, 박사논문의 경우는 독창성이 중요하죠. “그 연구를 왜 하는가, 의의는 무엇인가, 무엇을 발견했는가?” 같은 질문들은 필수적인 거죠. 학부 강의에서도 저는 학생들에게 “대학은 앵무새 우는 언덕이 아니고 복사 전문가를 키우는 곳도 아니다”를 강조합니다. 학생들이 강의 내용을 달달 외워 답안지를 쓰면 그 복사의 공로로 ‘빵점’을 줍니다. 강의 때 나온 이야기나 언급된 예들은 그대로 답안에 재탕해도 ‘F 지옥’에 떨어지죠. 자기 생가과 의견과 판단l 담기고 자기 언어로 쓴 답안, 제 손으로 정리해서 쓴 답안지에 점수를 줍니다. 그런데도 요즘 대학생들은 인터넷에서 퍼온 자료들을 한 자도 바꾸지 않고 고스란히 답지에 옮기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기술복제시대’의 반교육적 폐해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이건 오늘날 대학교육의 문제입니다.

                                                                                       194 ~ 195



우리가 현대에 복원하려고 하는 것, 복원할 가치가 있는 것은 철학으로 대체되기 이전읭 l야기 전통, 곧 신화적 사유와 신화적 상상력의 전통입니다.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하이데거 이후 현대 철학의 숨은 목표는 신화적 사유방식으로 되돌아가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플라톤을 점검하는 일이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197

제4장 인간 기원을 둘러싼 신화와 과학의 격돌



그러나 생물학자, 특히 진화론자라면 이런 설계이론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겠죠. 리처드 도킨스를 보세요. “나는 이 우주의 모든 생명체, 모든 지성, 모든 창조성, 모든 설계가 다윈이 말한 자연선택의 직접적 산물이거나 간접적 산물이라 생각한다. 설계는 진화를 선행하지 않는다. 우주의 근원은 처음부터 설계가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설계가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진화가 온 것이 아니라 그 반대 순서라는 거죠.

현대 생물학의 세계관을 가장 명료하게 요약해준 것이 자크 모노의 1970년대 책 《우연과 피연》인데, 거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신화 강의 때 학생들에게 늘 인용해주는 말이라서 줄줄 욉니다. 잘 아시겠지만 들어보세요. “생물세계(biosphere)에서 일어나는 모든 혁신과 모든 창조의 유일한 기원은 우연이다. 순수한 우연,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맹목적인 그 우연만이 진화라 불리는 거대한 건축물의 뿌리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해볼 만한 여러 가능한 가설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현대 생물학의 중심 개념이다. 오늘날 우연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가설이며, 그 동안의 관찰과 실험에서 ‘사실’로 확인된 것들과 일치하는 유일한 개념이다.”

                                                                                       206 ~ 207



제우스가 어느 섬에 갔다가 개미 떼를 만나고 그 개미들은 인간으로 바꾸어놓았다는 거죠. 그러나 대체로 그리스 신화는 ‘신들의 노예’가 되기 위해 인간이 있게 되었다는 수메르 신화의 인간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건 세계관, 인간관의 큰 차이죠. 수메르의 영향을 받은 것은 히브리 신화예요. 신화는 과학이 아니고 사실의 진술이 아닌데, 유대-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은 ‘신화’라는 말을 히브리-기독교에 갖다 대면 지금도 펄쩍 뜁니다. 아주 최근에도 내 신화론 강의를 수강하던 한 학생이 “유대 역사를 신화로 취급하는 것은 기독교도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수강을 중도에 포기했어요. 이런 사태를 만나면 도킨스 같은 사람이 종교를 야무지게 비판하는 것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208



기독교의 상승은 로마 제국이라는 국제 정치질서와 분리할 수 없죠. 그러나 문화사적 사건들이나 인간이 머리에 떠올리는 생각들을 모두 정치로 환원시켜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인간은 신이 아니다.” 이런 건 정치적 언명이 아니거든요. “인간은 유일한 존재다. 그런데 그 유한자의 머릿속에 어째서 불멸성에 대한 그리움이 들어 있는가?” 이것도 정치적 질문은 아닙니다.

동남아시아에는 “말똥가리가 세계를 만들었다”는 신화가 있고, 북미 원주민 신화에는 “인간은 콩깍지에서 나왔는데 왜 나왔는지 나도 모른다”는 식의 아주 절묘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에스키모 신화에서는 태초에 온 천지가 깜깜했는데 까마귀란 놈이 검은 하늘을 쪼아 구멍을 내고 그 구멍으로빛이 들어오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탁월한 시적 상상력이죠. 인간이 이런저런 신화들을 만들어낸 배후에는 아주 강한 정치적 동기와 이데올로기가 있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힘 자체는 시적 상상력 같아요.

어떤 신화가 다른 신화들을 압도하고 지배적 이야기로 올라서는 데는 정치적 이유 외에 다른 이유도 있어 보입니다. 기독교 서사가 서양을 지배하게 된 것도 그래요. 그 이야기 틀 안에는 인간을 유한성, 어둠, 타락으로부터 이끌어내어 구원의 희망을 갖게 하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서사론 강의를 할 때 저는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수많은 이야기 플롯들 중에서 히브리 신화를 플롯이 가장 강력한 기본 플롯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인간 존재의 모순과 수난, 고통과 해방, 성찰과 희망 같은 걸 풀어내는 이야기 모델로는 히브리-기독교 서사가 엄청 강력한 플롯이죠.

유한자로 태어난 인간이 어째서 불멸성에 대한 그리움을 갖는가도 인간이 가진 모순의 하나입니다. 이 문제는 종교학적 주제이고 인문학적 질문이지만, 생명과학의 대중적 인기에 관계된 문제이기도 합니다. 최 선생님, 이것이 생물학의 화두일 수도 있을까요?


굉장히 재미있는 문제인데요. 저는 학기마다 첫 시간에 들어가서 다짜고짜로 “죽음을 연구하는 학문에 여러분을 환영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제 나름대로 첫 수업을 좀 충격적으로 시작할 요량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그러면 학생들 표정이 ‘어?’ 하며 좀 얼떨떨해해요. 모두들 생물학은 생명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사실 생물학은 죽음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왜냐하면 죽는다는 게 결국 생명을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특성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생명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다 무척 재미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생명에 대한 글을 쓰려면 ‘생명이란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옥스퍼드 사전을 뒤져봤는데 그 정의가 어디 한두 가지라야 말이죠. 몇십 개가 있더라고요. “야, 이것 참 골치 아프구나”했죠. 생물학적으로 생명을 정의하면 재생산을 할 수 있고, 또 무엇 무엇을 할 수 있고 등 아주 많았어요. 저는 뭔가 딱 한 마디만 했으면 좋겠는데, 한참 고민하다가 저의 꼬마가 보는 주니어 옥스퍼드 사전을 펼쳤더니, 그곳에는 고맙게도 정의가 딱 하나만 있더라고요. 어른들 사전에 있는 몇십 개의 정의 중에서 친절하게 딱 하나만 골라 거기다 넣어주었어요. 거기에는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기간, 그것이 생명이다’라고 써 있어요.

……

생물학이라는 학문이 죽음을 연구한다는 게 장난으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생명체가 하나 만들어진 후에 죽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유전자가 하나의 생명체를 꽃피웠는데, 사람 같으면 100조 개의 세포를 만들어서 잘 사는데, 과학적으로 생각할 때 사실 이것을 끝내야 할 이유가 딱히 없습니다. 잘 하고 있는데, 기왕에 만들어놓았는데, 그 생명체로 하여금 계속 유전자를 복제하게 하면 되는데 말이죠. 그런데 왜 유전자는 조금 쓰다가 치워버리고 또 다른 것을 만들고, 또 다른 것을 만들고 해야마 하느냐는 겁니다. 만들어놓은 것을 없애면 자원도 낭비하고, 또 여러 가지 손해가 있을 것 아닙니까. 이건 어떻게 보면 유전자의 선택 문제입니다. 유전자는 하나 만ㄷ르어서 그것을 오래 쓰는 것보다는 자주 바꾸는 작전을 택한 것뿐이죠. 유전자가 죽음을 택했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태어났다가 죽어가는 거죠.

현재 생물학 분야에서는 세포의 죽음을 연구하는 학문이 가장 중요한 학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걸 ‘아포토시스(apoptosis)'라고 하는데, 미국 친구들은 ’에이팝타시스‘라고 부르는 이 현상에 대해 아주 열심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연구해놓으면 노화도 해결할 거고, 암도 해결할 거고,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거든요. 세포의 죽음에 관한 비밀을 알아내면 어떤 세포는 안 죽일 수도 있고 어떤 세포는 일부러 골라 죽일 수도 있죠. 세포가 하나 만들어졌다가 왜 꼭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일이 세포를 만들어내는 것을 설명하는 일보다 더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노폐물이 쌓이니까 죽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할 겁니다. 그런데 노폐물이 왜 쌓여야 되냔 말이죠. 노폐물이 쌓이면 바깥으로 내보내는 메커니즘을 이미 갖고 있는데, 철학과 마찬가지로 생물학도 본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생겨난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210 ~ 213



신에게 시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시다. 그 신은 시간의 세계를 만들고 인간을 그 세계 속에 던져 넣습니다. 여기서 무시간성과 시간성의 관계가 문제입니다. 시간 존재 아닌 신이 시간의 세계를 만들었다면, 그는 그 세계의 바깥에, 거기서 완전히 분리된 곳에 있으면서 시간의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간을 오불관언으로 구경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하지만 히브리-기독교의 신은 자비와 사랑의 신으로 나옵니다. 인간을 만들고 보살피고 사랑하는 신이죠. 시간 존재 아닌 신의 시간 세계의 인간을 보살핀다면 그건 그가 불완전한 시간의 세계에 관심을 갖고 그 세계를 사랑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시간 존재 아닌 신이 시간을 사랑한다? 완전성의 신이 불완전한 세계를 사랑한다? 이건 논리적 모순이죠. 무시간 존재는 시간을 그리워할 필요가 없고 완전한 것은 불완전한 것을 사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히브리-기독교의 신은 시간을 넘어선 존재이면서 동시에 시간 속에 있는 존재 같아 보입니다. “신은 무시간적 존재다”라는 진술과 “신은 시간적 존재다”라는 진술은 서로를 배척합니다. 두 진술이 동시에 맞을 수는 없죠. 하지만 히브리의 신에게는 그 두 모순 진술이 다 맞아야 합니다. 하긴, 이 모순을 껴안아야 하는 것이 어쩌면 신의 고통이고 그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인간을 사랑하기로 한 것이 그의 위대한 능력일지는 모르죠. 어느 경우든 히브리 경전의 신은 인간을 시험에 걸어놓고 “요 녀석, 어느 쪽을 선택하는지 보자”며 덤불 뒤에 숨어서 인간의 노는 꼴을 지켜보는 데 특별한 취미를 가진 존재 같습니다. 족장 아브라함도 그런 시험에 걸리죠.

선악을 아는 분별지(分別知)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선악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선을 선택합니까? 악을 구별하지 못한다면 무한 지식의 추구가 악의 일종이라는 걸 어떻게 알죠? 아담 부부가 분별의 지식을 갖고 있었다면 금단의 열매를 먹지 않았을 거라는 역설도 성립합니다. 게다가 인간의 조상이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었는데도 그 후의 인간들은 더 지혜로워지지 않았고 무한지식을 갖게 된 것도 아닙니다.

                                                                                       215 ~ 216



마틴 가드너가 쓴 책에 《아담과 이브에게는 배꼽이 있었을까》라는 게 있어요. 아담과 이브가 진정 하느님이 만드신 최초의 인간이라면 어머니의 존재를 상징하는 배꼽이 없었어야 한다는 거죠.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아담을 그릴 때도 이게 문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217



어떻게 보면 하느님은 실험을 한 겁니다. 이것은 이렇게도 만들어보고, 저것은 저렇게도 만들어보고. 그런 가운데 인간도 만들었는데, 인간이 완전히 짝사랑하고 있는 것이죠. 딱정벌레를 만들 때 우리 인간도 같이 만들어진 건데. 딱정벌레도 지금 자기들끼리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 인간은 하느님을 쳐다보며 우리는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셨으니 “당신이 우리만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이거 완전히 짝사랑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미국 유학을 해본 사람들은 대개 공유하고 있는 경험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이 우리와 제일 친한 줄 착각합니다. 막상 유학 가서 미국 사람들이 한국이 아프리카 대륙에 있느냐고 하면 까무러치는 거죠. 게다가 미국 사람들이 일본에 대해서는 상당히 자세히 알고 있고, 또 일본 사람들을 무지하게 좋아하는 걸 보면 야속하기까지 하죠. 짝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은 그저 한 번 만들고 끝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진정 사랑하신 동물이 있다면 그건 당연히 딱정벌레일 수밖에 없죠. 그렇게 여러 번 만드셨는데.

                                                                                       218



그런데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라는 말은 후대 사람들이 앞뒤 문맥을 빼고 사용하는 바람에 인간중심주의적 발언처럼 되고 말았는데, 사실 그 말은 인간이 만사를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신들의 모습까지도 인간의 형상으로 그려내는 걸 비판하는 맥락에서 나온 겁니다. 신화가 신인동형(神人同型)으로 신들을 만들어내는 데 대한 조롱이죠. “인간은 자기를 척도로 해서 신을 그려낸다. 그러나 만약 당나귀가 신을 그린다면 당나귀의 모습으로 그릴 것이고 코끼리는 코끼리의 모습으로 신을 그릴 것이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자연철학자 크세노폰이 신화를 비판하면서 한 말이에요.

짝사랑이 저 혼자 누굴 좋아하는 거라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스토킹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그러나 “신은 세상 만물을 인간을 위해 만들었다”가 되면 짝사랑은 위험천만한 것이 되죠. 거기서부터 ‘신의 이름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를 수 있게 되니까요. 중세 기독교의 역사적 악행이 그런 거죠. 종교재판, 대심문, 마녀사냥, 이단 처형 등등 사랑의 신이라면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범죄 행위들이 ‘신의 이름으로’ 자행됩니다. 신이 그런 범죄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면 아마 기가 찼을 겁니다. 그뿐 아니죠. 인간이 자기가 잘못해놓고도‘신의 뜻’으로 돌리는 일이 좀 많았습니까. 인간이 져야 할 책임을 신에게 떠넘기는 거죠.

                                                                                       219 ~ 220



저는 우리 시대의 윤리가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에는 약간의 회의를 갖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나날이 비윤리적이 돼간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 우리 사회가 그 옛날 한밤중에 남의 부락에 쳐들어가 곤히 자는 사람들의 목을 베고 여자들을 마구 겁탈하던 때보다 윤리적으로 더 타락한 삶을 살고 있단 말인가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우리더러 타락했다고 개탄하고, 우리는 우리대로 우리 자식들을 보고 윤리적이지 못하다고 혀를 찹니다. 우리 자식들은 또 그들의 자식들을 보고 똑같은 소리를 하겠죠. 생명과학의 발달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를 지나치게 비윤리적인 존재로 비하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충분히 윤리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까다로운 생명윤리의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220 ~ 221



하나의 개체가 자기 생애 중에서 획득한 어떤 능력을 생식세포에 입력시켰다가 바로 다음 세대로 전해줄 수 있다면 종의 개량은 단시간에 이루어졌겠죠.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라는 종이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지금 같은 고도의 능력을 가진 복잡한 존재로 진화했는가라는 겁니다. 이건 순수한 ‘생물학적 진화’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죠. 인간의 진화에 가속도가 붙은 것은 지난 1만 년, 길게 잡아야 2만 년 전부터입니다. 1~2만 년은 진화의 긴 시간 안에서는 정말 찰나에 불과해요.

그래서 ‘사회적 진화’라는 개념이 들어옵니다. 문명이란 것이 일어나면서부터 인간은 자연 말고도 ‘사회’에 적응해야 했는데, 사회가 복잡해지면 해질수록 거기 적응하는 능력도 고도화한 거란 이야기죠. 이 적응능력은 생물학적으로 전수된 유전자 덕분이라기보다는 문화적으로 전수되고 자극된 능력 때문입니다. 모방․선망․학습․선택․경쟁 등등의 문화적 자극의 결과로 촉진된 능력이죠. 이걸 인문쟁이들은 생물학적 유전이 아니라 문화적 유전이란 의미에서 ‘문화 DNA'라고 부르죠. 그러니까 ’용불용설‘은 개체 차원에서는 맞지 않을지 모르지만 집단 차원에서는 뭔가 설득력 있는 거 아닐까요? 어떤 문화는 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고 어떤 문화는 그러지 못했어요. 이런 차이가 생물학적 차이는 아닐 거 아닙니까? 진화의 개념을 넓혀서 볼 경우에도 생물학은 진화에 목적이 없다고 말합니까?

                                                                                       227



DNA가 처음에 우연하게 태어났는지 어땠는지, 앞서 말씀드린 대로 DNA의 기원에 대해서는 저는 할 말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만 DNA가 생겨난 다음에는 그 목적이 아주 분명하거든요. 그저 복제, 증식, 낳고 만드는 것뿐이에요. 그것을 하기 위해서 존재하죠.

……

‘생물학은 곧 경제학’이라고들 이야기합니다. DNA는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처음에는 발가벗고 돌아다녔는데 장사가 잘 안 된 거죠.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세포예요. 세포를 만들어내고 그 세포가 혼자 돌아다니다가 “아휴, 이것도 안 되겠다., 저 녀석이랑 손을 잡자”고 한 것이죠. 이른바 공생설이죠. 많은 분들은 DNA가 핵 안에만 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식물 같으면 엽록소를 가지고 있는 엽록체 속에, 그리고 동식물 세포 모두에서 에너지 단위를 만들어내는 미토콘드리아 안에도 DNA가 있습니다. 핵 안의 DNA하고 전혀 상관없는 DNA가 따로 있어요.

우리는 보통 남자에게서 반, 여자에게서 반이 합쳐져 만들어지는 핵 안에 있는 DNA만이 세상을 만들어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암컷은 난자 속에 핵 DNA 반과 엽록체 또는 미토콘드리아의 DNA를 가지고 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미토콘드리아의 DNA를 거슬러 올라가서 인류의 기원을 찾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여성으로만 계속 전달된 계보를 찾아가는 거죠.


‘아프리카의 이브’ 말이죠.


예, 아프리칸 이브가 거기서 왔습니다. 이런 공생 과정을 거쳐 서로 다른 박테리아들이 요즘 말로 하면 FTA를 맺고, 그것도 모자라서 세포끼리 다시 모여 다세포 생물을 만들고, 근육도 만들고 심장도 만들고 드디어는 뇌까지 만들어 오늘날 여기까지 온 거죠. 인간의 경우에는 전에는 할 수 없었던 엄청난 일을 뇌가 다 해내고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어디선가 발표를 하면서, 지금 어딘가 DNA 사령부가 있으면 앉아서 쾌재를 부르고 있을 거라고 했더니 종교학자들께서 막 웃으시더라고요. “야! 드디어 성공했다. 우리가 만들어낸 저 뇌(브레인)라는 작품이 이제는 기계를 만들어 우리(DNA)를 복제해주고 있다” 이거죠. 우리는 지금 실험실에서 클로닝(cloning)을 하잖아요. 그 전에는 DNA가 어렵게 생명체를 다시 만들어 거기에서 겨우 하나의 복제품을 생산했는데, 인간이라는 동물에게 기막힌 브레인을 얹어주었더니 이제 실험실에서 마구 복제를 해준다는 겁니다. DNA 사령부가 드디어 대박을 터뜨린 거죠.

                                                                                       228 ~ 229



도 

한때 지구는 공룡들의 무대였죠. 그런데 그 공룡시대가 7,000만 년 전 갑자기 끝납니다. 혜성 충돌 때문이니 화산 대폭발 때문이니 하는 설명들이 있던데, 어떤 생물학자는 한 종의 생명체가 너무 번식해서 지구를 완전히 장악하면 지구는 그놈들을 절멸시킨다고 말하더군요. 인간종도 그 수준에 도달한 거 아닌가요? 게다가 인간에 의한 생태 파괴는 지구의 종 다양성을 대폭 줄이는 일이죠. 이건 DNA가 봤을 때 자기 창고를 거덜내고 생산성을 위협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면 정말이지 DNA 사령부로선 “이거 안 되겠어, 요 인간이란 놈들 구조조정해야겠네”하고 나올 법합니다.

신에게 시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시다. 그 신은 시간의 세계를 만들고 인간을 그 세계 속에 던져 넣습니다. 여기서 무시간성과 시간성의 관계가 문제입니다. 시간 존재 아닌 신이 시간의 세계를 만들었다면, 그는 그 세계의 바깥에, 거기서 완전히 분리된 곳에 있으면서 시간의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간을 오불관언으로 구경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하지만 히브리-기독교의 신은 자비와 사랑의 신으로 나옵니다. 인간을 만들고 보살피고 사랑하는 신이죠. 시간 존재 아닌 신의 시간 세계의 인간을 보살핀다면 그건 그가 불완전한 시간의 세계에 관심을 갖고 그 세계를 사랑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시간 존재 아닌 신이 시간을 사랑한다? 완전성의 신이 불완전한 세계를 사랑한다? 이건 논리적 모순이죠. 무시간 존재는 시간을 그리워할 필요가 없고 완전한 것은 불완전한 것을 사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히브리-기독교의 신은 시간을 넘어선 존재이면서 동시에 시간 속에 있는 존재 같아 보입니다. “신은 무시간적 존재다”라는 진술과 “신은 시간적 존재다”라는 진술은 서로를 배척합니다. 두 진술이 동시에 맞을 수는 없죠. 하지만 히브리의 신에게는 그 두 모순 진술이 다 맞아야 합니다. 하긴, 이 모순을 껴안아야 하는 것이 어쩌면 신의 고통이고 그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인간을 사랑하기로 한 것이 그의 위대한 능력일지는 모르죠. 어느 경우든 히브리 경전의 신은 인간을 시험에 걸어놓고 “요 녀석, 어느 쪽을 선택하는지 보자”며 덤불 뒤에 숨어서 인간의 노는 꼴을 지켜보는 데 특별한 취미를 가진 존재 같습니다. 족장 아브라함도 그런 시험에 걸리죠.

선악을 아는 분별지(分別知)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선악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선을 선택합니까? 악을 구별하지 못한다면 무한 지식의 추구가 악의 일종이라는 걸 어떻게 알죠? 아담 부부가 분별의 지식을 갖고 있었다면 금단의 열매를 먹지 않았을 거라는 역설도 성립합니다. 게다가 인간의 조상이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었는데도 그 후의 인간들은 더 지혜로워지지 않았고 무한지식을 갖게 된 것도 아닙니다.

                                                                                       215 ~ 216



마틴 가드너가 쓴 책에 《아담과 이브에게는 배꼽이 있었을까》라는 게 있어요. 아담과 이브가 진정 하느님이 만드신 최초의 인간이라면 어머니의 존재를 상징하는 배꼽이 없었어야 한다는 거죠.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아담을 그릴 때도 이게 문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217



어떻게 보면 하느님은 실험을 한 겁니다. 이것은 이렇게도 만들어보고, 저것은 저렇게도 만들어보고. 그런 가운데 인간도 만들었는데, 인간이 완전히 짝사랑하고 있는 것이죠. 딱정벌레를 만들 때 우리 인간도 같이 만들어진 건데. 딱정벌레도 지금 자기들끼리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 인간은 하느님을 쳐다보며 우리는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셨으니 “당신이 우리만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이거 완전히 짝사랑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미국 유학을 해본 사람들은 대개 공유하고 있는 경험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이 우리와 제일 친한 줄 착각합니다. 막상 유학 가서 미국 사람들이 한국이 아프리카 대륙에 있느냐고 하면 까무러치는 거죠. 게다가 미국 사람들이 일본에 대해서는 상당히 자세히 알고 있고, 또 일본 사람들을 무지하게 좋아하는 걸 보면 야속하기까지 하죠. 짝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은 그저 한 번 만들고 끝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진정 사랑하신 동물이 있다면 그건 당연히 딱정벌레일 수밖에 없죠. 그렇게 여러 번 만드셨는데.

                                                                                       218



그런데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라는 말은 후대 사람들이 앞뒤 문맥을 빼고 사용하는 바람에 인간중심주의적 발언처럼 되고 말았는데, 사실 그 말은 인간이 만사를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신들의 모습까지도 인간의 형상으로 그려내는 걸 비판하는 맥락에서 나온 겁니다. 신화가 신인동형(神人同型)으로 신들을 만들어내는 데 대한 조롱이죠. “인간은 자기를 척도로 해서 신을 그려낸다. 그러나 만약 당나귀가 신을 그린다면 당나귀의 모습으로 그릴 것이고 코끼리는 코끼리의 모습으로 신을 그릴 것이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자연철학자 크세노폰이 신화를 비판하면서 한 말이에요.

짝사랑이 저 혼자 누굴 좋아하는 거라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스토킹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그러나 “신은 세상 만물을 인간을 위해 만들었다”가 되면 짝사랑은 위험천만한 것이 되죠. 거기서부터 ‘신의 이름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를 수 있게 되니까요. 중세 기독교의 역사적 악행이 그런 거죠. 종교재판, 대심문, 마녀사냥, 이단 처형 등등 사랑의 신이라면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범죄 행위들이 ‘신의 이름으로’ 자행됩니다. 신이 그런 범죄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면 아마 기가 찼을 겁니다. 그뿐 아니죠. 인간이 자기가 잘못해놓고도‘신의 뜻’으로 돌리는 일이 좀 많았습니까. 인간이 져야 할 책임을 신에게 떠넘기는 거죠.

                                                                                       219 ~ 220



저는 우리 시대의 윤리가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에는 약간의 회의를 갖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나날이 비윤리적이 돼간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 우리 사회가 그 옛날 한밤중에 남의 부락에 쳐들어가 곤히 자는 사람들의 목을 베고 여자들을 마구 겁탈하던 때보다 윤리적으로 더 타락한 삶을 살고 있단 말인가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우리더러 타락했다고 개탄하고, 우리는 우리대로 우리 자식들을 보고 윤리적이지 못하다고 혀를 찹니다. 우리 자식들은 또 그들의 자식들을 보고 똑같은 소리를 하겠죠. 생명과학의 발달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를 지나치게 비윤리적인 존재로 비하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충분히 윤리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까다로운 생명윤리의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220 ~ 221



하나의 개체가 자기 생애 중에서 획득한 어떤 능력을 생식세포에 입력시켰다가 바로 다음 세대로 전해줄 수 있다면 종의 개량은 단시간에 이루어졌겠죠.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라는 종이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지금 같은 고도의 능력을 가진 복잡한 존재로 진화했는가라는 겁니다. 이건 순수한 ‘생물학적 진화’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죠. 인간의 진화에 가속도가 붙은 것은 지난 1만 년, 길게 잡아야 2만 년 전부터입니다. 1~2만 년은 진화의 긴 시간 안에서는 정말 찰나에 불과해요.

그래서 ‘사회적 진화’라는 개념이 들어옵니다. 문명이란 것이 일어나면서부터 인간은 자연 말고도 ‘사회’에 적응해야 했는데, 사회가 복잡해지면 해질수록 거기 적응하는 능력도 고도화한 거란 이야기죠. 이 적응능력은 생물학적으로 전수된 유전자 덕분이라기보다는 문화적으로 전수되고 자극된 능력 때문입니다. 모방․선망․학습․선택․경쟁 등등의 문화적 자극의 결과로 촉진된 능력이죠. 이걸 인문쟁이들은 생물학적 유전이 아니라 문화적 유전이란 의미에서 ‘문화 DNA'라고 부르죠. 그러니까 ’용불용설‘은 개체 차원에서는 맞지 않을지 모르지만 집단 차원에서는 뭔가 설득력 있는 거 아닐까요? 어떤 문화는 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고 어떤 문화는 그러지 못했어요. 이런 차이가 생물학적 차이는 아닐 거 아닙니까? 진화의 개념을 넓혀서 볼 경우에도 생물학은 진화에 목적이 없다고 말합니까?

                                                                                       227



DNA가 처음에 우연하게 태어났는지 어땠는지, 앞서 말씀드린 대로 DNA의 기원에 대해서는 저는 할 말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만 DNA가 생겨난 다음에는 그 목적이 아주 분명하거든요. 그저 복제, 증식, 낳고 만드는 것뿐이에요. 그것을 하기 위해서 존재하죠.

……

‘생물학은 곧 경제학’이라고들 이야기합니다. DNA는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처음에는 발가벗고 돌아다녔는데 장사가 잘 안 된 거죠.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세포예요. 세포를 만들어내고 그 세포가 혼자 돌아다니다가 “아휴, 이것도 안 되겠다., 저 녀석이랑 손을 잡자”고 한 것이죠. 이른바 공생설이죠. 많은 분들은 DNA가 핵 안에만 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식물 같으면 엽록소를 가지고 있는 엽록체 속에, 그리고 동식물 세포 모두에서 에너지 단위를 만들어내는 미토콘드리아 안에도 DNA가 있습니다. 핵 안의 DNA하고 전혀 상관없는 DNA가 따로 있어요.

우리는 보통 남자에게서 반, 여자에게서 반이 합쳐져 만들어지는 핵 안에 있는 DNA만이 세상을 만들어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암컷은 난자 속에 핵 DNA 반과 엽록체 또는 미토콘드리아의 DNA를 가지고 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미토콘드리아의 DNA를 거슬러 올라가서 인류의 기원을 찾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여성으로만 계속 전달된 계보를 찾아가는 거죠.


‘아프리카의 이브’ 말이죠.


예, 아프리칸 이브가 거기서 왔습니다. 이런 공생 과정을 거쳐 서로 다른 박테리아들이 요즘 말로 하면 FTA를 맺고, 그것도 모자라서 세포끼리 다시 모여 다세포 생물을 만들고, 근육도 만들고 심장도 만들고 드디어는 뇌까지 만들어 오늘날 여기까지 온 거죠. 인간의 경우에는 전에는 할 수 없었던 엄청난 일을 뇌가 다 해내고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어디선가 발표를 하면서, 지금 어딘가 DNA 사령부가 있으면 앉아서 쾌재를 부르고 있을 거라고 했더니 종교학자들께서 막 웃으시더라고요. “야! 드디어 성공했다. 우리가 만들어낸 저 뇌(브레인)라는 작품이 이제는 기계를 만들어 우리(DNA)를 복제해주고 있다” 이거죠. 우리는 지금 실험실에서 클로닝(cloning)을 하잖아요. 그 전에는 DNA가 어렵게 생명체를 다시 만들어 거기에서 겨우 하나의 복제품을 생산했는데, 인간이라는 동물에게 기막힌 브레인을 얹어주었더니 이제 실험실에서 마구 복제를 해준다는 겁니다. DNA 사령부가 드디어 대박을 터뜨린 거죠.

                                                                                       242

제5장 DNA는 영혼을 복제할 수 있는가


저는 “영혼은 복제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설명을 곁들였어요. “인간의 유전체가 모두 밝혀졌다고는 하지만, 모든 사실을 아는 건 아니다. 지금 밝혀놓은 것은 어느 자리에 어떤 유전자가 앉아 있다는 위치만 찾아낸 것이다.” 그러니까 지도의 얼개를 그려놓는 것에 불과하죠. 그 유전자가 왜 그 자리에 앉게 되었는지, 어떤 경로를 거쳐 앉게 된 것인지, 바이러스를 타고 들어온 건지, 아니면 우리의 초초 조상 때부터 갖고 있었는지, 파충류 시저에 들어와서 그대로 눌러앉은 건지 등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거든요. 이 말은 그 유전자가 무엇을 하는 유전자인지 알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앞으로 그 비밀을 찾아나가려면, 글쎄요, 하나 둘씩 찾아나가겠지만 전체를 이해할 때까지는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몇십년, 아니 몇백 년이 걸릴지도 몰라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아직 인간 자신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정말 심각한 문제가 등장합니다. 유전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한다는 거죠. 과학의 길을 아직 멀었는데 기술이 덤벼들어 선무당 짓을 하니, 이게 큰 문제입니다. 기술이 마냥 과학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좀이 쑤셔서 못 기다립니다. 아직 과학적으로 확실하지 않은 상태더라도 기술은 인류를 구한답시고 이런저런 시도를 할 겁니다. 다른 기술들도 그런 일을 해왔고 요행히 성공한 것들도 있지만, 생명과학을 응용한 기술은 좀 달라야 할 것입니다. 생명을 가지고 실험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게 바로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거니까요.

                                                                                       248 ~ 249



‘나쁜’ 유전자를 버리고 ‘좋은’ 유전자로 갈아 끼운 사람은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 분명 나아진 것이겠죠. 그러나 모두가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모두가 동일한 유전자를 지닌 지극히 취약한 집단을 만들고 마는 겁니다. 이건 정말 위험한 상황입니다. 제 생각에는 복제인간의 출현보다 이게 더 무서운 일인 것 같아요. 나아가서는 인간 사회의 정의(justice)에 관한 부분, 즉 돈 있는 사람은 먼저 갈아치우고 돈 없는 사람은 꿈도 못 꾸는, 여러 가지 사회적인 불평등 문제와 직접적으로 심각하게 연결될 문제일 것 같습니다.

                                                                                       256



선생님께서 쓴 어떤 칼럼으로 보니까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으 늉전적 완벽성이 아니라 결함이다”라는 구절이 있던데, 그것도 그런 얘긴가요?


도 

그렇습니다. 인류사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상당수가 유전적 결함을 가진 사람들이었어요. 도스토예프스키는 간질병 환져였고, 니체는 우울증 환자, 버지니아 울프는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이었죠. 우생학 사회였다면 인류사의 천재들 절반쯤은 아예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을 겁니다. 아인슈타인도 네 살까지 말을 잘 못하는 아이였어요. 자폐증 아이들에게는 놀라운 수학적 능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유전상의 어떤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 결함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 인간적 위대성이죠. 완벽한 유전자 덕분에 특출한 능력을 발휘한다면 그건 인간적 위대성과는 이미 품질이 달라요. 약 먹고 잘 뛰는 단거리 선수 같은 경우죠.

이런 문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만약 한 시대가 우생학적으로 우수하다고 여기는 개체들로만 사회를 구성한다 칩시다. 더 잘나고 우수할 때, 사회가 허드렛일이라고 생각하는 힘들고 더러운 일은 누가 합니까? 보육원에서 아기 똥은 누가 치우고 노인은 누가 돌보며 교통경찰은 누가 하죠? 사회는 한순간에 정지될 거예요. 아무도 더럽고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사회는 할 수 없이 복제기술로 새로운 하층 노예계급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올더스 헉슬 리가 《용감한 신세계》라는 소설에서 그려낸 미래사회에서도 그런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복제 노예계급이 만들어집니다. ‘입실론 인간’이 그거죠. 이런 경우 또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 ‘영혼’ 문제가 있어요. 노예계급 복제인간들에게는 자연인간이 가진 것과 같은 ‘혼’은 절대로 주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입니다. 들고일어날 테니까요.

                                                                                       258 ~ 259



생물학적으로 봤을 때 흥미로운 건, 플라톤에게 몸은 물질적 존재이고 영혼은 빗물질적 존재라는 겁니다. 물질 존재는 변화에 종속되고 빗물질적 존재는 변하지 않습니다. 물질 존재는 노상 변하니까 연속성도 지속성도 없죠. 그래서 몸은 기억이 없다고 플라톤은 생각했어요. 자기 동일성의 지속이 기억인데, 지속이 없으니 기억이 있을 수 없죠. 플라톤에게 영혼은 무엇보다 ‘기억의 주체’입니다. 영혼만이 기억해요. 영혼이 하늘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은 거기가 원래 제 고향이란 걸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화의 기억 없는 혼령들 대신 플라톤은 기억하는 불멸의 영혼을 제시한 거죠. 이건 사실 서양의 사유 전통에 발생한 혁명적 사건입니다.

최 교수님, 현대 생물학이 들으면 참 우수운 이야기 같죠? 몸은 망각의 자루가 아니라 엄청난 기억과 정보를 가진 DNA 조작이라는데 말이죠. 몸은 우리(이 ‘우리’가 누구지?)가 모르는 것도 알고 있잖아요? 인간이 안다는 걸 알고 있는지, 모르고 아는지 모르지만.

                                                                                       263



영혼 같은 건 없다고 말하면 문학은 참 황량해집니다. 홀랑 망할지도 몰라요. 파우스트 이야기에서 독자를 섬뜩하게 하는 건 ‘영혼을 팔아먹었다’는 대목입니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의 캐럴》에 나오는 유명한 노랑이 스크루지는 죽은 동료 말리의 영혼(망령)을 만나고 나서 착한 사람으로 바뀝니다. 사후세계를 상정하지 않는다면 《신곡(神曲)》 같은 기독교 문학의 걸작들도 난센스가 될지 몰라요. 그러나 문학이 영혼이니 망령이니 하는 것을 등장시킬 때는 그런 것이 실체로 꼭 존재한다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팔아먹을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죠. 팔아먹을 수 없고 팔아서도 안 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 때 인간은 제법 그럴듯한 존재가 되잖아요? 훨씬 더 초라해 보이죠. 사람이 생전에 아무 짓이나 하면서 살아도 되는 것은 아니라는 윤리적 책임과 정의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 문학은 종종 사후세계를 등장시킵니다.

이렇게 보면 문학이 혼이니 망령이니 하는 것들을 등장시키는 것은 인간의 자기성찰, 반성, 객관화의 방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죽은 몸에서 빠져나온 혼이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한때는 자신의 것이었던 죽은 몸뚱이를 내려다본다, 문학에서는 이런 장면이 가능한데, 이건 성찰과 객관화의 아주 효과적인 장치죠. 유령이나 귀신, 원혼 등은 영혼과는 좀 다른 개념이지만 억울한 죽음, 이루지 못한 소망, 세계의 악행 같은 이야기들을 푸는 데는 아주 제격이에요.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학은 유령과 망령, 원혼의 이야기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황석영 소설 《손님》은 한국전쟁 때 서로 죽이고 죽은 원혼들이 한참 세월이 지나 화해를 모색하는 이야기입니다. 고골리의 단편소설 <외투>는 현대 러시아 문학이 거기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작품입니다. 거기에도 평생 억눌리며 살다가 죽은 한 지방관리의 망령이 등장합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은 유령 출현 장면으로 시작되죠. 이 유령은 우리 식으로 원혼입니다. 유령의 외출이란 기독교가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인데, 그 기독교 시대 한복판에서도 문학은 유령을 등장시킨 거예요. 유령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인간은 기억상실에 빠집니다.

                                                                                       268 ~ 269



최 교수님께서 “영혼은 DNA다”라고 말했는데, 대담한 선언입니다. 그런데 최 교수님께서 인정하듯 영혼이 DNA라면 영혼도 당연히 유전되어야 하는데 그게 그렇지 않아 보인다는 게 문제입니다. 제가 앞서 영혼과 혼을 구분한 것은 그래서예요. 우리가 혼이라 부르는 것은 문화적으로 전승되지만, 개인의 영혼일 때는 문제가 달라져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게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도 인정해야죠. 신의 경우처럼, 영혼이란 과학적 존재 입증의 대상이 아니라 종교적 믿음의 범주입니다. 입증되지 않으므로 적어도 과학적으로는 그것의 유전 여부를 확언할 수 없죠. 그래서 영혼 문제에 관해서는 이런 수정안을 내놓고 싶습니다. 수정안이라? 우리가 무슨 남북협상을 하는 것도 아닌데 웬 수정안? 하지만 생물학자와 인문학도가 만나 이런 대화를 할 때의 소득이 뭐겠습니까? 생물학적 입장과 인문학적 견해 사이의 가능한 접점을 찾아내자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야 서로 얻는 것이 있고 문제 접근의 길이 열릴 테니까요.

영혼은 복제되지 않고 유전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혼이란 것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고 그 존재를 믿고 싶어하는 성향(disposition) 자체는 인간의 DNA에 들어 있다, 생물학적으로 복제되고 유전되는 것은 이 성향이라는 게 제 수정안입니다. 앞서 저는 ‘영원성에 대한 갈망의 산물이 영혼’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DNA 베이스를 갖는 것은 ‘영원성에 대한 갈망’이죠. 인간의 DNA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이 갈망이지 영혼 자체는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 시간성으로부터의 자유가 영원성입니다.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것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가 ‘시간성으로부터의 자유’예요. 인간은 시간의 노예죠. 아무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고 반역을 시도할 수 없어요. 그러나 그 노예 상태를 거부하고 시간의 제왕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영혼입니다. 우리가 영혼이라는 것에 갖다붙이는 가장 중요한 특성이 자유라는 거죠. 이 자유 속에는 시간성으로부터 자유를 비롯해서 온갖 자유가 다 포함됩니다. 그래서 다시 정리하면 인간에게는 자유 추구의 성향이 DNA 속에 들어 있고, 이것이 영혼이란 것의 생물학적 토대라는 게 됩니다.

                                                                                       276 ~ 277



저는 진화론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쪽입니다. 인간은 혼자서는 도저히 살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원시 인류들에게 가장 절실했던 생존 전략은 뭉치는 일 아니겠어요? 집단을 만들어 함께 외적에 대항하고, 함께 먹을 걸 구하고, 함께 사는 것이 혼자 따로 떨어져 사는 것보다는 생존에 절대적으로 더 유리했을 거예요. 원시 사회의 생존 방식에서 ‘개인’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백치(idiot)'의 그리스 말 어원은 ’이디오테스(idiotes)'인데, 이건 공동체를 떠난 외톨이를 의미합니다. 무리를 벗어난 외톨이란 죽기로 작정한 바보 중의 바보라는 소리입니다. 내 생각에, 영원성에 대한 갈망의 뿌리는 인간이 가진 종교 성향(relitiosity)과도 직결되는 것 같은데, 이 종교 성향이란 것은 무리를 지어야 살 수 있다는 생존 명령이 유전 정보로 되먹임된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집단을 결속시키는 데는 ‘같은 신’을 믿는 것 이상의 효과적인 방법이 없으니까요.

내가 일부 생물학자들의 종교 비판을 수용하지 않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그 비판들은 대부분 틀린 각도에서 제기되고 있어요. 똘똘한 생물학자라면 비과학이라는 이유로 종교를 비판하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인류 사회에서 종교는 왜 없어지지 않는가, 종교의 그 질긴 생명력의 생물학적 베이스는 뭔가, 이런 문제도 당연히 생각해봐야죠. 그래서 나는 단수로서의 ‘신’이든 복수로서의 ‘신들’이든 다 좋아합니다. 신을 빼버리면 인간 이해는 절름발이가 돼버려요.

                                                                                       279 ~ 280



제6장 인간, 거짓말과 기만의 천재



과학적 방법이란 게 확립된 이후에도 과학은 여전히 ‘구라’가 될 수 있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까요. 아인슈타인 이전에 빛은 휘지 않고 시간은 직선적이라는 게 과학의 정설이었어요. 과학의 불안은 정설이 언제나 ‘잠정적으로만’ 정설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 불안의 과학이 위대성이기도 하고요.

                                                                                       286


저도 유구라, 그러니까 유홍준 선생님과 이야기해본 적이 있는데, 그분은 정말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게 다 구라야"라고 밝히고 계속 구라의 길을 가더군요.(하하하) 그런데도 옆에 있는 분들이 전혀 반감을 안 가져요. 그분의 이야기는 재미있구 유익한 구라니까요. 그런데 제가 구라를 치면, 그게 조금만 틀려도 저는 낙마하고 맙니다.


자기 이야기를 구라라고 선언해놓고 푸는 구라, 그레 진짜 구라죠.(하하하) 문학은 그 점에서 ‘구라의 왕’입니다. 이건 허구라고 처음부터 선언하고 시작하거든요. 물론 늘 그랬던 건 아니고요. 19세기 서양 소설을 보면 이건 허구가 아니다, 아무개가 어디어디서 실제로 겪은 이야기라고 위장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로빈슨 크루소》 같은 소설이 그랬죠. 독자들에게 최대한 사실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한 겁니다. 물론 이것도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한 가지 방법이죠. 사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더라, 속았다, 그런데 이상하네, 속았는데도 기분이 좋다는 효과 말입니다. 그런데 20세기에 오면 “이건 지어낸 이야기다. 이걸 사실로 받아들이는 자는 총살한다”는 식으로 시작하는 문학 구라들이 나오죠. 구라의 역사가 이러히게 파란만장해요. 정교하게 사실성을 위장하는 방법과 처음부터 이건 구라라고 선언하고 시작하는 방법, 둘 중 어느 것이 더 낫다 못하다고 판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구라의 기술로 치면 둘 다 고도의 즐거운 마술이니까요.

그런데 문학이나 인문학 구라들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확고한 믿음 같은 게 몇 개 있습니다. “이 구라 속에 진실이 있다”는 말에 대한 믿음, “나는 마음만 먹으면 허위와 진실 양쪽을 모두 말할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나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라는 주장에 대한 믿음이죠. 이 마지막 것이 아무래돟 최고 걸작이 아닌가 싶어요. “나는 거짓말을 통해서만 진실을 말한다”는 소리기도 한데, 이건 문학만이 아니라 인간사 전반을 꿰뚫는 대단한 진실 같아요.


피카소도 이렇게 말했잖아요. “예술이란 우리에게 진실을 일깨워주는 거짓말”이라고. 인문학적 구라의 진실성은 저도 이해하고 인정하고 즐깁니다. 그런데 구라 중에서 위험한 구라가 있어요. 인류의 행복에 기여하는 구라가 아니라 인류를 진짜 오류로 이끄는 구라가 있다는 거죠. 제가 생각하기에 지금까지 가장 위험한 구라를 푼 사람이 프로이트에요. 자기가 인문학적 구라쟁이면서 마치 자연과학적 구라쟁이처럼 행세한 거죠. 그런데 신화는 좀 달라요. 신화도 구라쟁이가 창조한 것이지만 신화 때문에 인류가 크게 잘못된 길로 들어선 적은 없다는 것이죠.

                                                                                       288 ~ 289



인간이 아직 잘못된 신화로 인해서 멸종하지 않은 걸 보면 우리 인간은 그런 충격에 넘어갈 만한 종이 아니다. 독한 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하하) 세상의 충격을 막아낼 수 있는 종이 몇 개 있죠. 개미도 그래요. 개미사회를 보면 불청객 투성이거든요. 개미 행세를 하는 곤충 구라쟁이들이 많아요. 그런 사회악이 많으면 망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거든요. 개미사회의 조직력과 생존력이 워낙 굳건하니까 끄떡없는 거죠. 자연에도 개미사회와 같은 막강한 종들이 있는가 하면 아주 약한 종들도 있어요. 인간 세계도 잘못된 구라가 모두를 잘못 인도하여 절멸로 이르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적은 세계인 것 같습니다.

                                                                                       293



사회심리학자들의 실험 결과를 보면 사람들은 시종일관 자신의 능력, 정직성, 관대함, 자율성을 과대평가한다는 거예요. 자신은 갖가지 무능력과 불안 때문에 너무 힘드니까, 그 심리적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서 자꾸 자신이 잘난 사람이라고 최면을 거는 거죠. 인지부조화 해소이론이라는 것도 있더군요. 사람들은 긍정적인 자아상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면 어떻게든 생각을 바꾸어서 인지부조화를 해소한다는 이론이라고 해요. 어떤 영화를 보니까 “한 번도 자기합리화를 하지 않고 일주일을 보낸 적이 있는가?”라는 대사가 나와요. 아주 공감이 가던데요.


……

트리버즈가 말한 무의식은 정신분석 쪽의 무의식 이론과 아주 닮아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인간만의 재주가 아니다, 동물들도 속임수의 천재라는 것은 다윈의 관찰입니다. 상대를 속여넘긴다는 의미에서의 ‘기만’은 자연계의 공통 현상이란 거죠. 모두가 상대를 속여넘기는 세계에서는 어느 놈이 날 속이는지 얼릉 알아차리는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집니다. 그래서 속임수 탐지능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자연선택이 일어난다는 거죠. 트리버즈의 독창성은 그 다음 부분이에요. 속임수가 성공하려면 자기가 속임수를 쓴다는 사실을 자기 스스로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지금 저 녀석을 속아넘기려 한다’는 자의식이나 자삭 같은 것이 있으면 속임수가 실패하기 십상이죠. 우물쭈물하고 얼굴을 붉히다가 들통나니까요. 그러니까 속임수꾼은 상대를 속이는 동기나 속인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 말하자면 동기를 무의식화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연선택은 그 무의식을 강화하는 쪽으로 움직여왔다는 거죠.

이게 트리버즈가 말하는 속임수꾼 인간의 무의식인데, 이건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을 문화나 이데올로기에 적용해온 사람들의 주장과 아주 잘 통합니다. ‘이데올로기는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라는 거죠. 트리버즈처럼 프로이트에게도 중요했던 것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입니다. 인간의 자기지식이란 것 자체가 이미 무의식에 근거하고 있다는 게 프로이트의 생각이었어요. 오이디푸스는 자기가 누군지 스스로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모르고 있었거든요. 바꿔 말하면 인간의 자기의식 자체가 벌써 자기기만이라는 이야기죠.

                                                                                       299 ~ 300



히브리 경전(기독교의 《구약》)이 씌어지기 시작한 것은 유대 민족이 강성했을 때가 아니라 기원전 6세기 유대의 두 왕국이 차례로 망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론에 잡혀 있을 때입니다. 민족이 고초를 당하고 있던 시기의 산물이죠. 나라 상실의 고통, 노예의 고초가 가장 깊었던 시기에 가장 강력한 신화가 만들어진 겁니다. 유대인의 바빌론 유수 기간은 1세기가 넘어요. 그 기간 동안 유대 지식인들은 이스라엘을 버린 야훼 신을 팽개칠 만도 한데 버리기는커녕 되레 그 절대의 신을 강화하고 그 유일신에 대한 충성과 믿음을 희망의 조건으로 삼게 되죠. 놀라운 이야기예요. 고통 속에서,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강한 신화가 만들어진 겁니다. 유대 신화가 다른 신화들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 거기 아닌가 싶어요. 가령 그리스 신화는 그런 민족적 고통의 산물은 아닙니다. 전지전능한 유일신을 만들 필요가 없었던 거죠.

                                                                                       300 ~ 301



과학도 인문학이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과학도 결국 언어를 사용하는 학문 활동이고, 기본적으로 분석과 종합으로 이뤄진 학문이라고 하는데, 분석은 어떨지 몰라도 종합을 하려면 결국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합니다. 저는 우리나라, 혹은 동양과 과학자들이 세계 과학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걸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산은 바로 언어로 대표되는 인문학적 소양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은 그 어느 분야보다도 거의 완벽하게 영어가 장악한 분야예요. 인문학계에는 아직도 프랑스어와 독일어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과학에서는 이제 거의 존재조차 없어요. 영어로 유창한 설명을 하지 못하면 종합이 불가능합니다. 탁월한 실험을 많이 한 동양의 과학자들은 많아도 궁극에 가서 과학계를 평정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는 겁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어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라고 애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모든 학문, 아니 우리 인생 전체는 인문학에서 시작하여 과학 등 몇 갈래 길을 걸쳐 결국 또다시 인문학으로 끝나는 게 아니겠어요?

                                                                                       302



《구야》은 <창세기>에서부터 거짓말하는 인간들로 넘쳐납니다. 인간의 시조라는 아담과 이브는 거짓말의 시조이기도 하죠. 이스라엘의 족장 아브라함도 그래요. 어느 해 기근이 들고 아브라함 일가는 먹을 것을 구하러 이집트로 갑니다. 이집트 관리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가리키면서 물어요. “이 여자는 누구냐? 네 아내냐?” 아브라함은 아니라고 거짓말합니다. 그래서 사라는 하마터면 이집트 파라오의 첩이 될 뻔하죠. 야곱의 아들놈들은 동생 요셉을 장사꾼에게 팔아먹고 돌아와서 아비에게 거짓말로 둘러댑니다. 이삭의 아내 레베카는 아들과 짜고 이삭을 속입니다. 참 대단한 이야기들이죠. 목적이 좀 다른 데 있긴 했겠지만 《구약》 작성자들이 자기네 조상들의 ‘비행(非行)’을 이처럼 솔직하게 적어놓았다는 건 놀라운 데가 있습니다.

다윈 선생도 이런 이야기에 주목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자연계를 관찰해보니까 동물들의 신호 체계가 온통 기만술(deceit)로 차 있다는 걸 알게 되죠. 그리고 진화론의 위대한 발견 하나가 나옵니다. 거짓말, 기만, 위장은 이미 수십억 년의 진화가 만들어놓은 결과다. 단세포 생명체에서 고등동물에 이르기까지 자연선택이 갈고 닦은 적응, 번식, 생존술의 일부라고 말이죠.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DNA 분자는 구조적으로 동일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기만을 들여다보는 거야말로 인간 자신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절차라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거죠. 이런 대목에서 인문학과 진화론 사이에는 상당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느껴집니다.

                                                                                       304



진화론을 사회이론으로 옮길 때 발생하는 가장 심각한 쟁점의 하나가 바로 그 도덕성 문제입니다. 유전자는 ‘도덕’에 관심이 없거든요. 자기를 퍼뜨리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죠. 부도덕이 아니라 ‘무도덕(amoral)'이죠. 유전자가 공자를 만나면 “뭐 이런 물건이 다 있어? 내 장사 망치는 놈 아냐?” 싶을 겁니다. 하지만 유전자는 도덕선생도 유전자를 퍼뜨리는 일만 잘해준다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든 관심이 없죠. 남자가 여자보다 바람을 더 많이 피는 건 당연하다, ’씨를 퍼뜨려라‘라는 유전자 명령으로 충실하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을 사회생물학자들이 하고 다닌다고 해서 좀 시끌벅적했었죠. 제우스, 카사노바, 클린턴이 맞장구칠 만한 주장이죠. 그런데 왜 남자 바람만 당연하냐, 여자 바람도 당연하다는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당연하다‘를 물고 늘어져서 유전자 명령만이 다가 아니다, 도덕적 명령도 있다 어쩌고 하는 반론들도 제기되었어요.

논란이 된 문제의 핵심은 DNA가 ‘바람피워라’는 문장을 이미 써놓고 있는 거라면 혼외 부정 행위(infidelity)는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행위가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인간에게는 분명 도덕적 성향도 있거든요. 진화론자들의 응답은 이런 것 같아었어요. 그 도덕적 성향이란 것도 진화의 산물이다, 인간 두뇌에는 도덕을 관장하는 부위가 있다는 소리가 있고, 또 한쪽에서는 유전자 자체에 도덕 성향은 없다, 도덕은 문화적으로 배우는 것이라는 소리가 있었던 것으로 기업됩니다.

내가 알기로는 진지한 진화론자들치고 도덕문제를 완전히 폐기처분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아요. 다만 유전적 성향을 이야기할 때는 도덕성이나 도덕적 판단은 일단 유보해놓고 과학적 사실은 사실대로 기술한다는 태도죠. 다윈은 인간이야말로 자연계에서 유일한 도덕적 종이라고 생각했더군요. ‘도덕적 존재’란 “자신의 과거와 미래의 행동 및 행위 동기들을 비교할 줄 아는 자, 어떤 행동과 그 동기에 대해서 찬성하거나 반대할 줄 아는 자”라고 다윈은 정의했어요. 이런 소리도 했더군요. “인간은 도덕문화가 그 최고 단계에 도달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생각을 제어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다.” 이건 다윈의 자기 성찰과도 같은 부분입니다. 《종의 기원》을 써놓고 발표를 망설여야 했던 진화론자의 고민이 비치는 대목이죠. 시대의 도장이 꽝꽝 찍힌 소리 같기도 하고. 인간이 유일한 도덕적 존재라는 다윈의 말에 《도덕적 동물》이란 책을 쓴 로버트 라이트가 이런 토를 달았더군요. “인간은 도덕적 존재다. 그러나 잠재적으로만 도덕적일 뿐 자연적으로 도덕적 동물은 아니다. 인간이 도덕적 존재가 되는 첫걸음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철저하게 비도덕적인 동물인가를 깨닫는 데서 시작된다.”

……

저는 생물학자이고 선생님은 인문학자시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 자리에 물리학자가 함께 있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이 학문 간의 백을 헐어보자는 노력인데, 사실 인문학과 생물학을 대비할 게 아니라 인문과학과 전통적인 기초과학, 즉 물리학을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선생님께서는 저와 대담을 마치신 다음, 좋은 물리학자와 마주 앉아 제2의 대담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생물학은 오히려 인문학과 물리/화학 사이에서 다리를 놓는 존재인 것 같아요. 생물학은 어쩌면 둘 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학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305 ~ 306



사회과학, 사회과학 그러지만 사회과학도 넓게는 인문학입니다. 한국 사회과학계는 이걸 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정치, 경제, 사회 현상과 관계를 연구하는 데 ‘과학적’ 방법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아요. 사회현상의 수리적․정량적 측면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회과학이 인간을 놓치고 인문학적 관점을 놓치면 그걸 왜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봉착해요. 타당하고 적실한 연구 결과도 나오지 않죠. 1970년대 초 국제 정치에서 큰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마오쩌둥의 중국이 미국에게 빗장을 열어준 사건이죠. 키신저가 닉슨의 밀사로 베이징을 비밀 방문했는데, 당시엔 007 첩보영화 이상으로 세계를 들뜨게 한 드라마였어요. 그런데 그 사건이 있기 전, 그러니까 1960년대의 미국 학계에서는 공산 중국이 과연 미국에 문열 열게 될 것인지 어쩔 것인지를 놓고 학계가 진단․분석․예측을 내놓느라 바빴죠. ‘열지 않을 것이다’와 ‘조만간 열게 될 것이다’로 입장들이 갈렸는데, 사회과학 쪽 사람들은 대부분 열지 않을 거라는 쪽으로 기울었고, 오랫동안 중국의 문화와 역사를 공부해온 인문학 계열 학자들은 중국이 곧 문을 열 것이라고 판단했어요. 결과적으로 옳은 판단을 내놓은 건 인문학자들이었죠. 거액의 연구용역비를 받아 ‘과학적’ 방법으로 중국을 분석했다는 사회과학 쪽 연구물들은 1972년 중미관계가 열리면서 쓰레기가 되고 말았죠. 이런 실패가 발생한 건 인간․가치․문화․역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안목이 연구에 투입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회과학 실패담은 엄청 많아요. 월남전 초기에 미 국방부는 어떤 정치학 교수에게 용역을 줘서 미국-월맹 전쟁이 어떻게 결판날 것인지 연구를 시켰죠. 연구비가 무려 100만 달러였어요. 그 정치학자는 '국가차원 비교‘인지 뭔지 하는 방법으로 연구를 진행했는데, 쉽게 말하면 미국과 월맹 두 나라의 국력을 여러 차원에서 비교 분석해서 결과를 예측하는 방법이었어요. 국력의 차원을 비교하면 결론은 뻔하죠. 미국이 코끼리라면 월맹은 두더지, 담비? 수량적으로만 따지자면 작은 놈이 몇 배로 큰 놈과 붙어 이길 순 없죠. 연구 결론도 물론 그렇게 났는데, 웬걸, 몇 년 안 가 미국은 패전하고 철수합니다. 100만 달러짜리 연구가 우스개로 끝나버린 거죠. 연구자는 이 경우에도 인간․정신․명분․의지․정당성 같은 비 수량적 요소들은 고려하지 않고 기계적인 측정 장치만을 벌였던 겁니다.


에드워드 윌슨도 그의 저서 《통섭》에서 머지않은 장래에 사회과학 분과들은 대부분 생물학과 연계하거나 큰 의미의 인문학으로 통합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는 동안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스노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에 따르면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인간 지성이 해낼 가장 위대한 과업은 언제나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대통합, 즉 통섭(統攝)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도 요즘 “21세기는 통섭의 시대”라고 열심히 떠들고 다닙니다. 생물학자인 저는 특히 생명과학대학 또는 생물학대학이라든가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묶는 뭔가 새로운 분과가 생겨서 본격적으로 양쪽이 만나는 제도적인 만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307 ~ 309



생물학 실험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실험용 초파리가 바로 노랑초파리예요. 그런데 그 노랑초파리는 이제 자연에서는 찾을 수 없어요. 실험실이 그들의 자연이 되어버린 거죠. 야생에서는 멸종을 했고 실험실에서만 상당히 오랫동안 살아왔죠. 그러면 그 종은 자연적인 걸까요? 우리 인간의 자연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제 인간의 자연 서식지는 기계문명이 만들어낸 이 새로운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다수의 인간에게 도시문명이 곧 자연이 되어버린 겁니다. 1990년대를 풍미한 미국 TV 드라마 <프렌즈(friends)>를 아시죠? 제 아들이 워낙 열광한 드라마라서 지난 여름에 DVD를 구해 하루종일 어느 해 방영된 1년치를 전부 다 본 적이 있었어요. 제 관찰에 따르면, 그 해 1년 내내 그 드라마는 나무가 단 한 그루도 등장하지 않더군요. 그 친구들이 사는 뉴욕의 아파트 두 방과 동네 카페가 그들의 환경 전부더라구요.

인간 두뇌의 힘으로 변해가는 이 도시환경 자체가 우리의 자연이 되어가고 있는 거예요. 이제 거의 모든 인간은 과학의 도움으로 태어나고 과학 속에서 살다가 과학의 그늘에서 죽어갑니다. 인간의 두뇌가 조작하고 변화시키는 환경은 이제 더 이상 거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연세대 심리학과의 황상민 교수는 요사이 인간본성과 관련해서 리니지 게임의 세계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데, 그분이 함께 연구하면 어떻겠냐고 하기에 얼마 전부터 함께 이마를 맞대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리니지 게임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걸 만들어놓은 사람은 아주 기본적인 세팅만 해준 거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안에 들어와서 게임을 하는 사람들 스스로 나름대로 그들만의 사회와 규범을 만들고 서로 동맹도 맺고 때로 배반하고 그러더라고요. 참 재미있지 않나요? 생물학자인 저에게도 인간의 진화를 연구하는 데 흥미로운 주제가 되겠더군요. 사실 우리 생물학자들 중에서도 온도․습도․고도 등에 의해 규정되는 물리적인 환경만 환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물리적 환경 못지않게 중요한, 현대인에게는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이 생물학적 환경(biological environment)이에요. 제가 혼자 산다면 온도와 습도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어쩌면 지금 저한테 더 중요한 건 제 주위의 사람들과의 경쟁과 화해의 관계라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가 만드는 이 모든 행동이 곧 우리의 자연이라고 봐야죠.

                                                                                       311 ~ 313



제7장 예술과 과학, 진화인가 창조인가



생물학이 가장 설명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이 바로 예술 문제입니다. 도대체 예술이라는 행위가 인간사회에서 어떻게 진화할 수 있었는가. 도무지 쓸모없는 짓 같아 보이는 예술이란 행위가 왜 이렇게 고도로 진화할 수 있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는 어떤 생물학자도 속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했죠. 상당히 오랫동안 고민했지만요. 생물학이 설명하기 어려운 몇 가지 문제들이 있습니다. 인간은 왜 자살하는가, 그리고 왜 인간은 동성애를 하는가. 이런 문제는 여전히 생물학이 속시원히 풀어내지 못한 숙제입니다. 유전적으로나 진화론적으로는 전혀 효용이 없는 행동들이니까요.

                                                                                       323



구석기 동굴벽화가 그려진 동굴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구경하거나 요즘 말로 ‘교육’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간이 아니라는 거죠. 가장 최근에 발견된 프랑스의 쇼베(Chauvet) 동굴은 입구가 너무 좁아서 사람 혼자 간신히 드나들 만한 크기예요. 동굴 내부도 많은 사람이 모이기에는 협소한 공간이죠. 생존을 위한 교육적 필요성에서였다면 여러 사람이 들어와 구경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론은 그러니까 누군가 혼자 들어가 그렸다는 게 되죠. 또 문제가 있습니다. 먹을 수 있는 동물, 해로운 동물이라지만 벽에 그려진 동물들 중ㅇㅇ에서 먹을 수 없는 동물도 있고 (요즘 기준으로) 반드시 해롭다고 할 수 없는 동물도 있거든요. 부엉이 같은 거 말이죠. 그렇다면 구석기 그림쟁이들은 어떤 특별한 임무를 띠고 들어가서 특별한 이유와 목적으로 벽화를 그린 것 같다고 말해야 되죠. 아직 해명되지 않은 문제들입니다. 다만 구조인류학자들이 내놓는 해석들 중에 생각해볼 만한 게 있긴 해요. 동굴벽화는 반드시 먹을거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할 거리’를 위한 그림, 즉 상징기호라는 소리죠.


무엇을 그렸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그렸나가 더 중요하죠. 누가 그렸나가 중요하고. 생물학자 입장에서는 그게 정말 중요합니다. 생태학자가 봐도 정말 고래들의 습성을 치밀하게 알지 않고는 그릴 수 없는 그림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울진의 암각화가 그 대표적인 예죠. 그런 암각화는 생태학자들에게 고래들의 습성을 알려줄 정도로 좋은 생태학적 자료가 됩니다. 그러니 진화생물학자 입장에서는 도대체 누가 미쳤다고 그런 짓을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에요. 육중한 바위에 암각을 하거나 거대한 벽화를 그리기가 쉬운 일도 아니고,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 것인데, 도대체 누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요? 자발적인 것인지 부족의 요구인지도 궁금하고, 예술의 동기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죠. 여하튼 진화생물학자들한테는 또 하나의 풀기 어려운 과제입니다.


동기를 알 수 없을 때를 ‘상징문법의 상실’이라고 말합니다. 쇼베 동굴에 들어갔던 조사단은 벽화의 솜씨가 매우 뛰어나서 마치 구석기의 미켈란젤로를 만나는 것 같았다고 해요. 어떤 여성 연구원은 너무 감동해서 동굴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벽화가 무슨 동물들을 그린 건지 파악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는데, 하필 특정의 동물들을 거기 집합시켜놓았는가, 그걸 알 수 없다는 거죠. 그림은 있는데 그걸 그린 동기와 목적, 의미는 현대인이 알 수 없다는 겁니다. 문법의 상실이죠. 그 문법이 복구되지 않는 한 그림은 읽히지 않는 거죠. 현대인의 코드로는 구석기의 코드를 읽어내지 못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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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발생 원인에 대한 설명은 많습니다. 실용설․제의(祭儀)설․놀이설 같은 것이 있죠. 생물학적 설명으로는 아무래도 자연선택론과 성선택론이 가장 유력한 것 같아요. 그런데 성선택론의 ‘유혹론’과 관계지어서는 이런 질문이 필요해요. 인간이 유혹의 필요성을 느꼈을 대상이 성적 대상만이었겠는가라는 질문이죠. 구석기 인간이 유혹하고 싶었던 게 꼭 번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성적 대상뿐이었을까? 그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최소한 세 가지 다른 대상들을 생각해볼 수 있어요. 신, 죽은 조상, 죽음 같은 거 말입니다. 이런 것들은 성선택과 무관합니다.

구석기인들에게 자연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였을 겁니다. 그 자연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초기 인류의 거의 공통적인 특징이죠. 나약한 인간이 살아남자면 인간에게 먹을 것을 주는 자연 혹은 자연신과 특별한 우호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겠죠. 이게 ‘유혹’입니다. 특히 초기 인류가 제일 두려워한 것은 자연의 변덕입니다. 멀쩡하다가도 날벼락을 때리고 홍수로 물 먹이고 가뭄으로 말라죽게 하니까요. 조상의 경우도 그렇죠. 조상은 죽어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있으면서 현세의 후손들과 통교하고, 자손을 돌보며, 그러다가 수틀리면 골탕먹기도 한다고 여겨지는 존재였으니까요. 그래서 그 조상신들 역시 달래고 유혹해야 할 대상이 되는 거죠. 세 번째가 죽음입니다. 죽음의 방문을 막고, 죽음을 연기하며, 사람이 죽은 다음에도 잘 보살펴주기를 부탁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도 유혹의 대상이 되는 거죠. 동굴벽화에 숨겨진 구석기인의 상징문법을 찾아내자면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해봐야 할 것 같아요.

                                                                                       331 ~ 332



칸트는 ‘무목적성’이라는 말로 예술을 규정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예술은 무슨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소리죠. 이건 아주 강력한 ‘설’이에요. 그러나 사실은 어떤 예술도 그 기원에서는 완벽하게 무목적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실용설․제의설․놀이설 같은 것이 예술기원론으로는 더 설득력이 있고 자연선택설도 내가 보기엔 그런 설명방식들과 상당히 연결되는 것 같아요. 족장이 흔히 제사장을 겸했다는 것은 역사 기록으로도 많이 확인되는 일입니다. 음악과 춤이 제의적 기원을 갖는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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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자들 중에도 놀이만 연구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어요. 고양이를 키워보면 새끼들이 자기들끼리 치고 박고 뒹굴고 실타래를 가지고 놀잖아요. 동물학자들은 이 고양이들의 놀이를 굉장히 중요한 행동으로 보고 연구를 많이 했죠. 어른이 되기 위해 습득해야 하는 기술을 놀이를 통해서 익히는 거죠. 형제들끼리 목덜미도 물어 보고 장차 그들 세계에서의 서열을 매길 때 어떻게 그 싸움을 이겨낼까 예행연습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제가 얼마 전부터 닥스훈트 두 마리를 키우는데, 이 녀석들 하루종일 서로 물어뜯고 열심히 놉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예요. 외동딸이나 외아들만 있는 집이 걱정하는 게 그거잖아요. 형제자매끼리 좀 치고 박고 하면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어야 하는데 혼자 자란 애들은 그런 사회화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거죠.

대부분의 포식동물에게 놀이의 경험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미가 먹이를 잡아다가 일부러 죽이지 않고 새끼들에게 던져주는 행위를 보면 알 수 있죠. 놀이 행위를 부모가 이용하는 거죠. 쥐 한 마리 잡아다 주면 새끼고양이들이 그걸 가지고 한참 동안 물어보고 굴려보면서 논다는 거죠. 먹는 행위보다 놀이 행위가 중요한 때가 있는 거죠. 범고래도 물개를 한 마리 잡으면 집어던졌다가 떨어지면 또 잡아채면서 놀아요. 물개의 기생충을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하는 논문도 있지만, 동물행동학자들이 더 유력하게 보는 학설은 결국은 놀이 행위라는 거죠. 어르신들은 먹을 거 갖고 장난치지 말라고 하시지만. (하하하) 실제로 동물들은 먹을 것 같고 장난하고 싶어한다는 거죠. 놀이 행위는 동물행동학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동물행동학 입장에서 보면 놀이 행위 자체도 상당히 실용적이라는 관점이 성립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요.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를 보면 주사위 놀이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요. 주사위는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없을 때 사람들이 굶주림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고안해낸 놀이라는 겁니다. 고대 중동지역에서는 가뭄이 들어 식량이 모자라게 되면 마을 사람들이 패를 나누어 마을에 남을 자와 떠날 자를 정했다고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족장 아브라함은 지금의 이라크 근방에 사라다가 팔레스티나 쪽으로 이주한 사람인데, 어쩌면 그도 기근 때 마을을 떠나야 했던 난민의 한 사람일지 몰라요. 그런데 헤로도토스의 기록으로는, 주사위를 던져서 떠날 자와 남을 자를 정했다는 겁니다. 더 믿을 건 못 되지만 헤로도토스의 이야기를 보면 주사위 같은 놀이도 그 기원이 놀이를 위한 놀이는 아니었다는 점에서 ‘실용적’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놀이에는 참 이상한 성질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떤 실용적 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나중에는 놀이 그 자체가 목적이 됩니다. 실용성을 떠나는 거죠. 스포츠도 그래요. 달리기나 창던지기, 투원반, 수영, 태권도 할 것 없이 애초에는 어떤 실용적 목적과 가치 때문에 시작되었던 것들이 나중에는 시포츠를 위한 스포츠로 발전하죠. 예술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되는 거죠. 도자기를 보세요. 삶의 도구였던 질그릇과 단지, 항아리들의 삶의 현장을 떠나서 완상의 대상으로 옮겨 앉는 거죠. 사기장이가 도자예술가로 분화․발전하고. 이런 문화적 분화가 생물학 용어로는 예술의 ‘진화’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진화의 정점에서 예술의 유일한 목적은 예술 그 자체입니다. 예술의 진화가 이 단계에 이르면 예술 행위는 자연선택이나 성선택 같은 생물학적 도구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거죠.

                                                                                       339 ~ 341



진화생물학에 이른바 줄달음선택(runaway selection)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번역이 좀 어려운데, 고삐 풀린 선택, 바람난 주체, 포획 불가능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죠. 예를 들어 도저히 실용적이지 못한 예술 행위 같은 것도, 공작 수컷이 걷잡을 수 없이 풍성하고 화려해진 것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별로 대단찮은 것에서 시작했다가 갑자기 고삐가 풀리면서 그 방면으로 확 진화해버리는 거죠. 그 동력은 결정적으로 그것을 선택하는 주체, 즉 암컷의 미에 대한 감각, 미를 인식하고 느끼는 것의 진화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아주 급속도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은 재미있는 풍속을 하나 갖고 있어요. 부족이 다 함께 모여서 남자들이 엄청나게 치장을 하고, 거의 일주일 동안 밤낮 없이 춤을 추고, 그러다가 여자들이 마음에 드는 남자를 선택해서 짝짓기를 하는 거죠. 동물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적나라한 암컷 선택이 일어나는 겁니다. 동물세계에서 이루어지듯 암컷들이 수컷들의 재롱을 보면서 선택하는 거죠. (하하하) 예를 들어 여성들이 키 크고 눈 크고 코 오뚝한 남성들을 좋아하기 시작하면, 100년 후에 가보면 남자들이 거의 다 그렇게 된다는 거죠. 여자들이 다 그런 남성들은 선호하니까 자식들도 그런 애들이 태어나는 겁니다. 진화생물학자 입장에서 보면 키 크고 눈 큰 게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거든요. 특별히 실용적인 의미가 없잖아요. 그런데 줄달음선택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선택의 주체인 암컷이 좋아하기만 하면 그것 때문에 그쪽 방면으로 진화의 과정이 확 질주해버린다는 거예요. 아무런 실용성도 생물학적 가치도 없는 형질도 성 선택자 쪽에서 좋아하면 그렇게 다 진화해버리는 거죠.

                                                                                       342



인간이 거짓말할 수 있는 능력은 진화의 산물일 겁니다. 그 능력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사기꾼이 되고 어떤 사람은 소설가가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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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왜 뜨는지 아니?”“그야 아폴론이 태양마차를 몰고 올라오기 때문이지” 이런 식이죠. 그런데 이런 세계관에 어느 순간부터 불만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세계를 정확히 아는 데는 그런 식의 ‘이야기’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쳐든 거죠. 그래서 신화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자연에서 초자연을 떼어내기 시작합니다. 제우스, 포세이돈, 아폴론 등등을 다 떼어내고 자연을 자연 그 자체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거죠.

신화가 이야기 구름 봉지로 세계를 둘러쌌다면 과학은 그 봉지를 제거하려 한 겁니다. 신화는 인간과 세계를 상상적 관계로 연결하고 과학은 그런 연결을 거부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세계관의 충돌이죠. 신화적 세계관에 대한 대립에서 출발한 것이 과학적 세계관입니다. 신화가 없었으면 과학도 없었을 것이라 말해선 안 되겠지만, 적어도 그리스 문화에서는 신화가 과학적 사유를 자극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358 ~ 359



제8장 동물의 교미와 인간의 섹스


보노보의 경우에는 놀랄 만한 사실들이 많이 밝혀졌어요. 보노보 두 무리가 하나의 무화과나무에 도착했다면, 그 나무를 독점하기 위해서 싸움을 해야 되잖아요. 보노보의 사촌인 침팬지는 그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보노보는 달라요. 한쪽의 암컷이 나와서 다른 쪽의 수컷하고 그 자리에서 섹스를 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마주쳤던 두 무리가 그냥 한꺼번에 올라가서 같이 열매를 따먹는 거예요. 사회적인 갈등을 무마하는 방법으로 섹스를 사용하고 있다는 게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관찰된 것이죠. 대부분의 동물들이 발정기에만 섹스를 한다고 알려졌는데, 보노보는 발정기 때만 섹스를 하는 게 아니에요. 암컷은 매우 자유롭게 여러 수컷과 교대로 섹스를 즐기고, 자위 행위도 많이 합니다. 실제 이런 장면은 수없이 관찰되었습니다. 우리 인간보다 훨씬 섹스를 즐기는 영장류라고 객관적인 판정이 나 있어요.

어떤 면에서는 더 충격적인 사실도 밝혀졌어요. 섹스에서 성위 또는 체위에 관한 문제인데, 인간의 경우에는 마주 보고 성행위를 많이 하잖아요. 하느님이 우리에게 성행위를 하면서도 서로 대화를 할 수 있게끔 허락해주신 체위라고요. 그래서 동물계에서는 이 체위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었죠. 곤충에서도 발견되긴 했지만 곤충종은 인간과는 별개의 차원으로 이해되어서 괜찮은 걸로 쳤죠. 그런데 그 체위가 보노보에게서 본격적으로 발견되었어요. 두 가지 데이터가 있는데, 야생 보노보의 경우에는 약 3분의 1 정도가 마주 보고 성행위를 하지만, 인간이 사육하는 보노보의 경우에는 반 이상이 마주보고 성행위를 합니다.

이 일이 일부 인문학자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는 겁니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성 체위가 어떻게 다른 동물에게서 나타나느냐고. 보노보가 우리 인간에게 성에 대한 질문을 굉장히 많이 던져주었어요. 이런 현상을 보면 좀 우습게 느껴져요. 사실 동물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섹스를 어느 체위에서 하는가는 어떻게 하면 정자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느냐 하는 기능적인 측면에서 봐야 할 문제일 뿐이거든요.


남녀가 마주 본다는 것은 만남의 가장 극적이고 에로틱한 제스처죠. 눈과 눈이 서로 들여다보며 상대방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고 읽어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셔너리 포스처는 그런 대화적 자세라는 점에서 특별히 인간적인 의미 차원을 갖는 거죠. 그런데 체위라는 것은 정자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기교의 문제라고 말해버리면 너무 재미없어지죠. 차라리 하느님이 “너희는 번식 행위를 할 때도 마주 보고 해라, 뒤통수만 보고 하면 안 되느니라”라고 인간에게 가르쳐준 특별한 체위라고 말하는 게 더 재미있죠. 체위를 놓고도 인간은 ‘의미를 창조’합니다. 그런데 지금 보노보 이야기를 들어보면 생물학은 사람들이 “자연에는 없는데 인간에게만 있다”고 생각해왔던 것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리는 데 굉장한 쾌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환상을 깨는 건 인간을 겸손하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저는 명색이 인문쟁이니까 문제를 좀 다른 방식으로 제기하겠습니다. 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살아남기’와 ‘번식’이라는 두 단어로만 설명됩니다. 생존과 번식은 자연의 명령이라는 점에서 ‘필연(necessity)'이고 인간도 동물인 이상 이 필연의 명령 체계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문쟁이들에게는 필연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서 이탈하는 행위들도 중요합니다. 성행위가 번식을 위한 피연적인 행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지금까지 그 외의 번식 방법은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인간은 기묘하게도 그 필연으로부터 벗어나고 이탈하는 데도 특별한 재주를 가진 동물이에요. 그래서 필연과 자유라는 구도가 생겨나요. 성의 경우도 그렇죠. 인간의 성이 종족 번식이라는 목적에만 꼼짝없이 매인 건 아니거든요. 성이 인간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게 번식의 명령에만 묶여 있지 않기 때문이죠. 오히려 번식 이외의 목적을 더 많이 갖고 있어요. 그 ’이외의 목적‘이 말하자면 필연으로부터 이탈하는 영역, 곧 자유의 영역인 셈이죠. 그런데 번식과 관계없는 성행위가 보노보에게서도 발견되었다면, 그건 자유라고 봐야 하나요, 아니면 필연으로 봐야 하나요?


글쎄요, 기본적으로 자유라고 봐야 되겠죠.

                                                                                       371 ~ 373


결론적으로 말하면,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데 이해하기 힘든 문제가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것도 결국 나와 유전자를 섞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상대를 고른답시고 고른 것이라는 겁니다.

                                                                                       379



사람들이 흔히 쓰는 표현 중에 제가 아주 싫어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종족 보존을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저는 안사람하고 섹스를 하면서 단 한 번도 ‘종족 보존을 위해서’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면서 해본 적은 없거든요. 순전히 제가 즐기기 위해서라든가, 아니면 자식을 낳기 위해서지, 호모 사피엔스의 앞날을 위해서라는 거창한 목적으로 섹스를 해본 적언 없다는 거죠. 그 수준을 생각하면서 섹스를 할 수 있는 동물은 없을 겁니다.

                                                                                       381 ~ 383



신성한 행위는 모든 신성한 것들이 그러하듯 비밀스러운 데가 있어야 합니다. 천지만물은 하늘과 땅의 결합에서 생겨났다는 게 동서양의 상당히 일반적인 고대 사유예요. 그 결합을 ‘신성한 결혼(HIEROS GAMOS)'이라고 부릅니다. 남녀의 성적 결합은 하늘과 땅의 결합을 지상에서 재연하는 거고, 그 행위는 신성하니까 비밀스러워야 하는 거죠. 수치는 신성성의 다른 이름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는 성과 관계된 신비의식이 있었는데 그 의식은 반드시 밤에, 동굴 안에서, 비밀리에 남녀 사제 또는 남자 사제와 처녀들 사이에 진행되었어요. 동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는 철저한 비밀에 붙여지죠/ 이것도 생물학적으로 보면 재미있습니다. 동굴은 길고 껌껌해서 자궁 같은 겁니다. 그 자궁 안에서 어떻게 생명이 만들어지는지는 인간이 알 수 없고 알아서도 안 되는 신성한 비밀이라는 생각이 동굴의 신비의식에 있었던 것 같아요.

                                                                                       393



또 한 가지 은밀한 점은 다른 영장류들은 수태 가능성을 광고하는 데 비해 인간의 여인들은 그것을 절대 광고하지 않고 숨기는 쪽으로 진화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남편이라도 아내와 어느 날 어느 순간에 섹스를 해야 아이를 갖게 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죠. 지금은 현대 과학의 힘을 빌려서 주기를 점검한다거나 온도를 잰다거나 해서 알 수 있죠. 회사에 가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자기야 빨리 와! 한 시간 내로 와야 해!” 한다잖아요?

동굴시대에는 그 사실을 알 재간이 없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70여 년 전만 해도 서양의 의사들은 월경을 하는 날 섹스를 해야 아이를 갖는다고 가르치기도 했어요. 여성도 언제 자신이 정확하게 수태할 수 있는 순간인지 모릅니다. 남성의 경우에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 더 답답하겠죠. 인간은 모든 포유동물과 마찬가지로 일부다처제의 성향을 타고난 동물입니다. 남성은 더 많은 여성을 찾아다니려는 동물인데, 그런 일부다처제 성향을 상당히 줄여준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인간 여성의 배란 은폐입니다. 과연 언제부터 인간 여성의 배란 은폐가 시작되었는지 모릅니다. 네안데르탈인 여성도 그랬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배란 시기를 모르는 상황에서 남성이 찾아낸 가장 좋은 전략은 한 여성이라도 잡아놓고 매일 밤 그 여자와 섹스를 하는 것이었죠. 가족과 결혼이 탄생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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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은밀함이 가장 인간적인 특성이겠죠. 만약에 보노보처럼 우리 여성들이 들판에서 허구한 날 자위 행위를 하면서 지나가는 남자들의 손을 잡고 섹스하자고 했으면 사랑소설 같은 건 나오기 어려웠겠죠. 쓸 만한 이야깃거리가 안 될 테니까요. 그런데 성이 은밀해지면서 문학의 재료가 될 수 있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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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자들의 관찰 가운데 흥미로운 게 하나 있더군요. 침팬지의 성문화(?)와 인간 성문화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한 가지 있는데, 그게 뭐냐면 ‘난교(亂交, promiscuity)'의 유무라는 겁니다. 침팬지들의 성행위는 지극히 문란한데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거죠. 침팬지 암컷들은 무리 중의 수컷들과 돌아가며 성행위를 한다죠? 그래야만 새끼가 태어났을 때 수컷들이 “이놈은 내 새끼”라 여기고 해치지 않는다는 게 침팬지의 난교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입니다. 그러니까 새끼의 안전을 위한 전략이고 보험 장치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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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판도라 속의 암컷, 이데올로기 속의 수컷



인문학은 생물학에 유감이 좀 있어요. 생물학이 과학이라고 하지만 과학사 자체가 오류투성이입니다. 문제는 그 오류들이 학문적 오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문화적으로 거의 범죄에 가까운 ‘만행’ 이 될 때입니다. 19세기 생물학은 백인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어요. 제국주의의 요청에 과학이 맞장구친 경우죠. 남녀의 불평등을 ‘과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데도 생물학은 크게 기여했습니다. 19세기 생물학은 이름으로 서구 제국주의와 백인우월주의, 그리고 남성우월주의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해준 크낰는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인문학은 생물학, 특히 19세기 생물학이 저질러놓은 이런 과오와 편견을 100년 넘게 비판해왔어요. 현대 생물학이 인종주의․성풀평등론․남성우월주의․백인중심주의 같은 것들을 교정할 수 있게 해준 것이 큰 다행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생물학 일각에서는 인종 간의 선천적 불평등론, 지능 차이, 남녀 불평등 같은 걸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당수 생물학자들이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는 보수주의 쪽으로 기울어 있어요. 그래서 생물학이 사회적 불평등을 보증한다는 혐의를 받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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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생물학은 여자가 왜 열등한가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려고 했어요. 뇌가 작다, 남자의 뇌하고는 다르다, 게다가 동화세포냐 이화세포냐 등등을 이야기하면서 여성열등론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쪽으로 나아갔어요. 사회적․문화적 편견을 용인하는 데 과학이 큰 도움을 준 거죠. 남의 땅을 빼앗고 그곳 사람들을 짐승처럼 다룬 제국주의는 윤리적으로는 도저히 정당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국주의는 과학, 특히 생물학의 힘을 빌리게 되죠. 잘 아시겠지만, 흑인은 생물학적으로 열등한 인종이니까 우수한 백인종의 지배와 인도 아래 ‘구원’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생물학이 지지하고 나섭니다.


19세기만이 아닙니다.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 모든 면을 다 비교한다면 저는 어쩌면 흑인이 더 우수한 인종으로 등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학문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그만큼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앞으로 흑인들에게도 동일한 배움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상황은 분명히 달라질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스포츠나 공연예술을 함께 비교하면 백인은 사실 명함도 제대로 못 내밀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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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추를 따면 흰 점액이 나오잖습니까? 여자가 그 상추의 점액 같은 걸 먹으면 임신한다는 소리까지 있었어요. 우리나라에도 여자가 뜨물 마시고 아이 밴다는 말이 있었잖아요. 여자가 남자 없이도 수태할 수 있게 되면 남자는 정말로 잉여 존재가 됩니다.

모든 가부장제 사회에는 남자의 잉여성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습니다. 고대 신화가 여성을 잉여 존재로 강등시킨 것은 사실인즉 남성들 자신이 잉여 존재일지 모른다는 공포를 역으로 투사한 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남성들의 ‘거세 공포’죠. 없어도 되는 존재라는 것처럼 두렵고 겁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을 내리누르기 시작합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자기가 아이의 진짜 아버지라는 걸 확실하게 하는 일이 아주 중요했어요. 여자를 옭아매야 할 필요성이 점점 더 커진 거죠.

신화만이 아니에요. 서양적 이성주의의 토대가 그리스 철학인데, 그 철학도 여성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었어요. 그리스 철학에는 “같은 것은 같은 것에서 나온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우월한 것은 우월한 것에서 나오고 열등한 것은 열등한 것에서 나온다,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니까 우월한 것은 남자에게서 나오고 열등한 것은 여성에서 나온다는 주장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적 관찰이 대단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영감탱이 왈, 여자의 피는 남자의 피보다 검다, 검은 것은 열등하다, 치아의 숫자도 여자가 모자란다고 써놨어요.


모자랄 수 있죠.


모자랄 수 있다고 해서 열등성의 증거는 아니죠.……

                                                                                       416 ~ 417



정자는 다량 생산이 가능하잖아요?


네, 보나마나 정자는 헐값에 팔릴 거고 난자는 비쌀 수밖에 없죠. 그런데다가 줄기세포 연구가 계속 진행되면 내 줄기세포로 내 간을 만들 수 있는 세상이 되는데, 그렇다면 언젠가는 내 줄기세포로 내 자궁을 만들 수도 있겠죠. 지금까지는 사실 인공수정을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병원에서 시험관 안에다 아기를 키워준다고 하면 망설여지지만, 병원에서 내 줄기세포를 가지고 내 자궁을 만들어서 그 속에서 내 아이를 키워주겠다고 하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죠. 옆집 여자는 분명히 남편이랑 병원에 가서 자기 자궁을 만들어놓고 거기다 아이를 키우는데, ‘나는 복고파’라면서 아기를 뱃속에 담아 가지고 다닐 여자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거의 없을 거예요. 물론 있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남편의 손을 잡고 병원에 가겠죠.

그럴 때 남성의 위치가 어떻게 될까요? 다행히 가족을, 부부관계를 잘 유지하고 사는 남자라면 자기의 정자를 부인의 난자와 결합시킬 자격을 얻겠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골치 아프게 그래야 하는가라고 생각할 겁니다. 무엇 때문에 애써 지아비를 섬겨야 하는가 물을 겁니다. 그냥 인터넷에 들어가서 마음에 드는 정자를 사서 내 난자에 넣어 내가 키우는 세상! 이런 세상이 그렇게 멀리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421 ~ 422



포유류는 근본적으로 이것이 잘 안 되는 게, 여자가 아이를 갖고 낳는 과정에서 겪는 여러 가지 호르몬 작용으로 남자보다 강한 이른바 모성애라는 것을 갖게 됩니다. 여기에는 생물학적인 근거가 좀 있어요. 출산할 때 가장 크게 관여하는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있는데, 양이 제왕절개 수술로 새끼를 낳으면 wkrl가 낳아놓고도 자기 새끼인 줄을 몰라요. 그러니까 새끼를 낳을 때 옥시토신이 분비되면서 그것이 뇌에 영향을 끼쳐야 하는데, 그 과정이 생략되면 모성애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남편이랑 병원에 들른 지 아홉 달 만에 병원에서 “이제 아이가 다 됐습니다. 가져가세요”라고 전화를 하면 둘이 가서 아이를 데리고 오는 상황을 한번 상상해보죠. 아이를 데려다 뉘어놓고, 그때도 아내가 남편에게 아이에게서 비켜나라고 할까요? 아닐 수도 있다는 거죠. 임신의 경험도 없고, 옥시토신의 세뇌도 없는 상황이라면, 그때도 여자들이 모성을 고집할까요?

저는 이런 상상까지 해봅니다. 분명히 남자도 젖꼭지를 갖고 있거든요. 아마 인간이라는 종에 들어와서 남자가 젖을 먹이지 않게 된 것은 아닐 거예요. 인간 이전의 종에서 수컷에서 젖꼭지는 있되 필요가 없어졌겠지만, 생명공학적으로 연구를 하면 병원에서 아이를 데려다 놓고 나자도 젖을 먹일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좀 상상력을 발휘해서 생각해보는 겁니다. 그런 시대가 오면 자연스럽게 함께 키우게 될 거라는 말이죠.

                                                                                       424 ~ 425



유성생식만이 최선의 생식 방법이 아니라면, 가족의 구성 방식이 달라질 수도 있겠죠. 미래 사회에 일어날 가장 큰 변화는 아마도 ‘가족’이 아닐까 싶어요. 아직은 많은 나라들이 동성 결혼을 금지하거나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도 상당한 변화가 있을 것 같아요.

포유류는 근본적으로 이것이 잘 안 되는 게, 여자가 아이를 갖고 낳는 과정에서 겪는 여러 가지 호르몬 작용으로 남자보다 강한 이른바 모성애라는 것을 갖게 됩니다. 여기에는 생물학적인 근거가 좀 있어요. 출산할 때 가장 크게 관여하는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있는데, 양이 제왕절개 수술로 새끼를 낳으면 wkrl가 낳아놓고도 자기 새끼인 줄을 몰라요. 그러니까 새끼를 낳을 때 옥시토신이 분비되면서 그것이 뇌에 영향을 끼쳐야 하는데, 그 과정이 생략되면 모성애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남편이랑 병원에 들른 지 아홉 달 만에 병원에서 “이제 아이가 다 됐습니다. 가져가세요”라고 전화를 하면 둘이 가서 아이를 데리고 오는 상황을 한번 상상해보죠. 아이를 데려다 뉘어놓고, 그때도 아내가 남편에게 아이에게서 비켜나라고 할까요? 아닐 수도 있다는 거죠. 임신의 경험도 없고, 옥시토신의 세뇌도 없는 상황이라면, 그때도 여자들이 모성을 고집할까요?

저는 이런 상상까지 해봅니다. 분명히 남자도 젖꼭지를 갖고 있거든요. 아마 인간이라는 종에 들어와서 남자가 젖을 먹이지 않게 된 것은 아닐 거예요. 인간 이전의 종에서 수컷에서 젖꼭지는 있되 필요가 없어졌겠지만, 생명공학적으로 연구를 하면 병원에서 아이를 데려다 놓고 나자도 젖을 먹일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좀 상상력을 발휘해서 생각해보는 겁니다. 그런 시대가 오면 자연스럽게 함께 키우게 될 거라는 말이죠.

                                                                                       425



제10장 섹스(sex), 젠더(gender), 섹슈얼리티(sexuality)



생물학적 성이라고 하면 마치 확정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스니다. 식물의 경우를 보죠. 대부분의 식물은 꽃에 암술과 수술을 가지고 있어요. 그렇지만 암수로가 수술을 다 가지고 있으면 양성일까요? 구조적으로는 양성이지만 기능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매 순간 양성으로 기능하는 건 아니거든요.

꽃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식물들은 처음에는 수컷으로 삶을 시작합니다. 수술이 먼저 나와서 꽃가루를 남한테 보내는 일을 하거든요. 꽃가루를 모두 내보내고 나면 수술이 저절로 시들면서 암술이 더 높이 올라오죠. 그 다음에는 벌이 날아와 다른 꽃에서 묻혀온 꽃가루를 암술에 문지르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것이 꽃을 가진 식물, 즉 현화실물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현화식물은 태어나서 성장기를 거치고 사춘기를 넘어선 다음 번식기에 접어들면 우선 수컷이에요. 수컷 짓을 하다가 시간이 가면서 점점 암컷 짓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생물학적 성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수컷이었다가 암컷으로 변해가는 겁니다. 어느 순간에 갑자기 변하는 게 아니라 연속적인 양상을 보입니다.

그래서 1970년대 중반쯤에 식물학자들이 식물의 ‘성의 정도’를 계산하는 연구를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이 식물은 현재 어느 정도 남성이며, 어느 정도 여성이냐를 조사하는 거죠. 어느 한순간을 고정시켜 조사하면 수술이 많이 자라서 암술에게 꽃가루를 보내고 있는 중이지만, 그 와중에 또 다른 벌이 날아와서 암술에다 꽃가루를 몇 개라도 묻히고 날아갑니다. 그러면 그 순간에는 이를테면 95퍼센트 수컷, 5퍼센트 암컷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죠.

동물의 세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산호초에서 사는 물고기가 그래요. 떼를 지어 다니는 산호초 물고기 중에는 그 중 한 마리만 수컷이고 나머지는 전부 암컷인 종들이 있어요. 그 우두머리 수컷이 죽으면 암컷들 중에 가장 큰 암컷인 종들이 있어요. 그 우두머리 수컷이 죽으면 암컷들 중에 가장 큰 암컷이 우두머리가 됩니다. 우두머리가 된 암컷은 하루, 길면 이틀 사이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생리학적 성전환을 합니다. 암컷의 여성 기관이 쇠퇴하고 남성 기관이 급속히 발달하여 순식간에 남성으로 변하죠. 우두머리가 된 암컷은 얼마 안 되어 수컷으로 탈바꿈해서 자신의 무리를 끌고 떼를 지어 다닙니다. 병원에 가지 않고도 저절로 성전환 수술이 일어나는 겁니다. 반대의 현상도 있어요. 예가 매우 드물지만 말이죠. 동물의 경우는 대부분 암컷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수컷이 되고, 식물의 경우에는 수컷으로 시작했다가 암컷이 됩니다.

이런 현상들을 보면서 사실 우리가 생물학적 성이라는 것을 ― 물론 종에 따라 다르지만 ― 그렇게까지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인간을 포함한 포유동물의 경우도 처음 발생할 때 보면, 분명히 염색체를 다르게 갖고 태어났으니까 어떤 아이는 남자가 되고 다른 어떤 아이는 여자가 됩니다. 하지만 엄마 뱃속에서 생식기가 발달하는 순간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으면 모두 암컷의 생식기를 갖게끔 되어 있어요. 그러다가 수컷의 염색체를 가진 개체인 태아에게서 어느 순간 남성 호르몬이 분비되기 시작하면서 암컷의 생식기로 발달하려던 게 갑자기 수컷 생식기로 발달하는 과정으로 넘어가 버리죠. 그런데 그 과정에서 조작이나 변이가 일어나 변화를 못 하게 하면, 그 개체는 수컷 염색체를 가지고 있어도 암컷 생식기를 갖고 태어납니다.

많은 경우에 이런 이상 생식기를 가지고 태어나는 병리학적인 면을 보면, 수컷이 되게끔 해주는 과정이 뭔가 잘못 되어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니까 염색체 수준에서는 분명 수컷인데도 펴현형 수준에서는 암컷이 될 가능성을 인간이면 모두 다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이게 형태학적인 수준입니다.

                                                                                       431 ~ 433



동성애에 대한 일반적인 사회적 편견은 ‘반자연’이라는 데 근거하고 있습니다. 동양식으로 이야기하면 ‘음양의 순리’에 어긋난다는 것이죠. 그래서 비정상이죠. 자연에서 비정상적인 것은 인간의 사회에서도 비정상이라고 간단히 규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생물학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근거하고 있는 자연계 자체의 섹슈얼리티가 아주 다양하고 유연하다고 보는군요? 그렇다면 동성애를 비자연, 비정상, 반자연으로 보는 사회적 편견의 근거가 많은 부분 허물어지는군요.

                                                                                       439



저도 미국에 있을 때 동성애자들을 많이 만나봤어요. 제 안사람이 음대에 다녔는데, 음악대학에 동성애자들이 확실히 많더라고요. 가끔 저희 집에서 파티를 하면 놀러온 안사람의 친구 가운데 거의 절반은 동성애자였어요. 물론 처음 그 사람들을 봤을 때는 상당히 불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렇지도 않아지더라고요. 여자 둘이 끌어안고 키스해도 아무렇지 않게 되더라고요.

음악을 하는 사람들한테 왜 특별히 동성애가 많을까? 음악이라는 예술을 하려는 사람들의 성향 속에 유연한 섹슈얼리티를 가질 수 있는 성향이 원래 있어서인지, 아니면 음악세계에 이미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 허용하는 문화적인 분위기가 있어서 거기에 들어온 사람들이 좀더 자유롭게 자기 성향을 드러내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따로 떼놓고봐도 “야! 저 친구는 정말 그런 성향이 뚜렷하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요. 굉장히 남성적으로 보이는데 동성애자인 사람도 적지 않고요.

동서애자들도 둘이 만나면 한 사람은 남성 역할을 하고, 한 사람은 여성 역할을 하죠. 그런 상황에서 남성 역할을 하던 남성 동성애자가 자기보다 더 남성적인 남성 동성애자를 만나면 여성의 역할을 하게 되죠. 이런 점들을 포괄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게 반드시 유전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행동이라기보다는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 행동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전적인 성향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환경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 다른 많은 복합 행동과 흡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 

미국 쪽에서 나온 연구 중에 동성애자의 가계를 조사한 것이 있어요. 동성애자의 기계에서는 통계적으로 동성애자가 많았다는 거죠. 이건 문화적 영향보다는 유전적 결정론에 더 가깝습니다. 그런가 하면 문화론 쪽에서는 동성애적 성향이 자연적 성향이 아니라 문화적․정치적 선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어요. 자발적이고 의도적인 선택이라는 거죠. 동성애에 대한 억압이 센 사회에서 자신은 동성애자가 아닌데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나 억압을 깨부수기 위해 “나도 이제부터는 동성애자다”라고 선택하고 나선다는 거죠. 정치적 입장 선택이죠. 그런 개인들이 여성 이론가들 중에 좀 있습니다. 남자들의 경우는 잘 모르겠어요. 아직은 안 보여서 그러지 모르겠지만.

                                                                                       442 ~ 443



갈매기 중에 동성애 부부가 있는데, 수컷 동성애 부부는 없어요. 그 이유 중 하나는 암컷 둘이서는 새끼를 캐우는 일은 가능한데, 수컷 동성애자들은 직접 알을 낳을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부부가 되는 아이를 키우기가 어려운 거죠. 갈매기 동성애 부부를 어떻게 찾느냐고요? 둥지의 알을 보면 아랑요. 둥지에 알이 예상 외로 많으면 일단 의심할 수 있죠. 둘이 낳으니까요. 그리고 계속 지켜보면 백발백중 동성애 부부예요. 수컷 하나와 암컷 하나가 가족을 이루어서 키우는 둥지보다 알의 수가 거의 두 배입니다. 필요하면 남자란 언제나 구할 수 있는 존재니까요.

이런 현상을 번식의 관점에서 보면, 생물학적으로 여성이 동성애를 밝히는 경우가 남성이 동성애를 밝히는 경우보다 좀더 쉬운 것 같다는 생각은 듭니다. 남성의 경우 밝히고 나면 너무 많은 걸 잃을 가능성이 있을 것 같네요.

                                                                                       444



……

히브리 신화에서 아담과 이브는 같은 날 창조되지만, 그리스 신화에서 ‘여자’는 시간적으로 남자보다 훨씬 나중에 등장합니다. 신들이 최초의 여자 판도라를 만들어 지상에 내보낼 때 이미 그 지상에는 인간들이 살고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판도라가 신화 서사대로 최초의 여자라면, 남자들은 여자 없이 한참을 살았다는 얘기가 되죠. 이건 논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우스꽝스런 얘깁니다. 그러니까 이때 판도라 이야기를 문자대로 읽어서 여자의 첫 출현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럼 뭐냐? 그건 여성의 탄생 아닌 ‘여성성’이라는 사회문화적 젠더의 탄생에 관한 신화적 처리라고 봐야 해요. 여자는 이런 것이라든가 저런 것이라는 문화적 규정을 가장 분명하게 기록한 것이 판도라 이야기니까요. 이 방식으로 읽어내면 판도라 이야기는 젠더의 탄생에 대한 아주 빼어난 서술로 다가오게 됩니다.

                                                                                       445



수컷하고 암컷하고 짝짓기를 하고 있으면 당장에 “아 저 수컷이 자기 배우자가 있는데 다른 암컷하고 섹스를 하는구나!”라고 여기며 세기 시작한 겁니다. 아, 저 수컷이 두 번째 암컷을, 조금 있다 보니까 또 다른 암컷하고 짝짓기를 하고 있어요. 아, 세 번째 암컷이군. 그러는 동안에 아무도 보지 않는 게 있어요. 그 수컷이 다른 암컷이랑 짝짓기를 하고 있으면 그 대상인 다른 암컷도 지금 분명히 다른 수컷하고 짝짓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암컷의 세계에 많은 수컷들을 상대해도 별 상관없는, 이른바 ‘정비석의 자유 dkaz서’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 숫자가 맞질 않아요. 수컷이 많은 암컷을 상대하면, 암컷 중에서도 분명히 많은 수컷을 상대하는 암컷들이 어느 정도 있어야 짝이 맞는 거죠. 아니면 많은 수컷들은 죄다 다른 수컷들과 바람을 피우고 있거나. 우리가 남자들이 바람을 피운다고 할 때, 집창촌을 찾거나 다른 남성을 찾는 걸 통계에 넣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남자만 바람을 피우고 여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걸로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수컷이 많은 배우자를 상대하는 성향을 자세히 관찰해서 쓴 논문들이 많은데, 암컷의 입장에서 관찰한 논문은 거의 없었습니다. 뒤늦게나마 이런 과점으로 논문을 쓰는 사람들이 나타나쏙, 저도 여기저기 씌어진 작은 논문들을 모으는 작업을 좀 했죠. 1980년대 중반에 그런 작은 논문들을 모아 분석해보니까 의오의 결과가 보이더군요. 수컷 못지않게 암컷도 수많은 수컷을 상대하는 화려하고 기맑힌 수컷 물범은 암컷 100마리 정도를 거느립니다만, 슈퍼 수컷 같은 암컷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한 둥지들이 허다하게 나오는 겁니다. 그런 암컷들은 분명히 여러 수컷들을 상대한 거죠.

그렇다면 암컷이 왜 그런 짓을 할까에 대해 설명해야 합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수컷은 양적으로 문제를 푸는 성향이 있고, 암컷은 질적으로 풀려고 한다” 암컷이 좀더 많은 수컷을 상대해야 할 이유, 그리고 상대하면 득이 될 이유들을 나름대로 쭉 정리해보았더니 열 가지 정도가 나오더라고요. 한 수컷만 상대했을 경우, 그 수컷이 수태할 능력이 없는 수컷이면 암컷은 엄청난 낭패를 보는 거죠. 실제로 인간 사회에서 아이를 못 낳는 여인들이 병원에 가서 원인을 조사해보면, 남자한테 문제가 있는 경우가 여자에게 문제가 있는 경우보다 많습니다. 그런데 결혼제도라는 것에 묶여 있으면, 그 여인은 멀쩡한데도 자식을 못 낳는 거죠.

자연계에서도 그런 위험 부담을 분명하게 줄이려면 하나 이상의 수컷을 상대해야 되는 거죠. 또 흑백이 분명히 가려지지 않은 상황이라도, 어떤 수컷은 수태 능력이 월등하고 어떤 수컷은 좀 떨어질 수도 있죠. 이때 암컷은 여러 수컷을 상대하면서 그 가운데 가장 훌륭한 수컷의 유전자를 받을 수 있는 거죠. 만일 암컷이 수컷들 중에서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면, 암컷이 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수컷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순서대로 짝짓기를 하는 것이죠. 짧은 시간에 여러 수컷들과 짝짓기를 하면 극 수컷들의 정자들이 암컷의 몸 속에서 경쟁을 하잖아요. 이른바 ‘정자 경쟁’또는 ‘정자 전쟁’이라고 하는 방법이죠. 이런 것을 쭉 늘어놓아 보면 결국 암컷이 수태 가능서에 대한 걱정을 하긴 합니다만, 그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질적인 문제입니다. 질적으로 우수한 수컷을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여러 수컷과 짝짓기를 하는 것입니다. 양적인 전략만 진화를 해야 한다는 법은 없죠.

                                                                                       447 ~ 449



몇 년 전에 BBC에서 찍은 다큐멘터리에 ‘미어캣’이라는 아주 재미있는 동물이 등장했어요. 아프리카 초원의 바위 위에 서서 침입자들을 살피는 무척 귀여운 놈들이에요. 디즈니 만화 <라이언 킹>에 나오는 티몬이 바로 그 녀석입니다. 그 미어캣 한 가족의 이야기를 추적한 내용이에요. 그 가족은 오순도순 잘 살다가 어느 날 포식자들에게 대부이 잡아먹히고 말죠. 남매만 살아남아 함께 미지의 세계로 이동해가는 거예요. 온갖 고생을 겪다가 먼 곳으로 이동한 끝에 다른 미어캣 가족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 가족의 수컷이 새로 온 수컷을 굉장히 못마땅해합니다. 하지만 그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장면은 그 가족의 암컷이 다른 데서 온 그 수컷하고 잠자리를 같이하는 장면이에요. 참 신기하죠. 자기가 속해 있는 가족에도 분명히 수컷이 있는데, 그 수컷을 거부하고 어디서 굴러들어온 수컷을 받아들입니다.

동물계를 보면 사실 근친상간을 피하기 위한 메커니즘이 아주 철저하게 발달되어 있어요. 그래서 새들의 경우에는 암컷들이 성장하면 자기 동네를 떠나는 게 철칙입니다. 포유류는 수컷들이 다른 지역으로 나가요. 혹 잡아두어도 그 안에서는 짝짓기를 거의 안 해요. 자기가 태어난 곳을 떠나서 타향살이를 하면 분명히 손해를 많이 볼 텐데도 떠납니다. 근친상간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적응현상이라고 봐야겠죠.

암컷들이 어떤 수컷을 좋아하느냐에 대한 연구는 동물행동학 분야에서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아요. 최근에는 어떻게 해서, 무엇을 보고 좋아하느냐에 대한 연구가 유전자 수준에까지 이르렀거든요. 그 유전자는 이른바 ‘주조직 적합성 복합체(MHC, major histocompatibility complex)'라고 하는 연역 체계를 조절하는 유전자들인데, 이 유전자가 이른바 배우자 선택에 관여한다는 사실을 찾아냈습니다. 나와 같이 태어나 같은 집안에서 자란 남자는 분명히 나와 거의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 크기 때문에, 아무리 같은 방에서 잠을 자도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거죠. 물론 가끔 사고가 나기도 하죠. 이를테면 분명 남매인데 어려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 남매인 사실을 모르고 사랑에 빠지는 경우 같은 것 말입니다. 몇 년 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가을동화>의 설정이 그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대개 자기와 너무 다른 남자는 아니지만, 또 자기와 너무 가까운 남자도 고르지 않는 메커니즘들이 있어요. 암컷들이란 하릴없이 다른 것에 대한 매력을 엄청나게 느끼는 동물들인 것 같아요.

                                                                                       450 ~ 452



제11장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소설인가 과학인가



저는 사실 그동안 정신의학이 크게 발전하지 못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 분야의 이론적 바탕이었던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학문적 취약성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프로이트 이론은 너무나 비과학적인 논리와 방법을 구사하고 었어서 학문이 발전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나라에서는 몇몇 정신과 의사들이 쓴 프로이트에 관한 책들이 많이 팔리고 있는데, 세계 학계에서 프로이트 이론은 오래전에 과학의 영역에서 축출되어 임상에서도 차츰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459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은 세 줄로 요약도리 수 있어요. “내게는 내가 모르는 내가 있다”“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나의 주인은 나의 무의식이다” 이건 과학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나는 언제나 나다”, “나는 언제나 나의 주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단연코 없어요. 나를 이끌고 나를 지배하는 것은 언제난 또렷하고 명징한 언어로 말하는 나의 ‘의식’이라는 게 바로 근대 자아의 환상입니다. 데카르트적 자아죠. 근대 자유주의도 이런 개인주의적 명징성의 자아를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계몽철학자들이 생각한 ‘지식과 판단의 주인’으로서의 ‘주체’라는 것도 그런 명징한 의식의 주체죠. 프로이트가 뒤집어엎은 건 바로 이런 자아의 환상, 명징의식의 이데올로기예요. 내 의식이 나의 주인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나의 무의식이 나의 주인이라는 건 혁명입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죠. 의식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합리적이고 앞뒤가 딱딱 맞고 빈틈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무의식의 세계에서 보면 그 합리적 이야기들은 구멍이나 결락, 틈새, 모순, 생략, 은폐 같은 걸로 가득합니다. 이건 문학 창작이나 비평, 이론에서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통찰이에요. 20세기 후반의 ‘읽기(텍스트 읽기와 해석)’ 이론은 거의 다 이 통찰이에서 나오거나 그 통찰에 힘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문쟁이들이 “프로이트는 죽었다”고 쉽게 말하지 못하는 거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얘길 하셨는데, “아들놈들이 작당해서 아비를 몰아낸 순간에 역사가 시작된다”는 게 프로이트의 ‘역사론’입니다. 역사학자들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소리죠. 그럴 수밖에. 그건 기록이 아니라 시(詩)고 신화니까요. 프로이트가 한 번도 자기 입으로 인정한 적은 없지만, 자기 입으로 인정한 적은 없지만, 이런 역사관은 사실 그리스 신화에서 나온 겁니다. 제우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통치한 역대 신들이 모두 아들놈들한테 쫓겨나거든요. 제우스의 할아비인 우라노스는 아들 코로노스에게 쫓겨나고, 크로노스는 아들인 제우스에게 쫓겨납니다. 신화는 아비에 대한 반역과 모반, 거세의 이야기로 시작돼요. 크로노스는 밤중에 아비 침시로 숨어들어가 아비의 성기를 낫으로 잘라냅니다. 아주 리얼한 거세 장면이죠.

그런데 이건 굉장히 생물학적인 ‘자연의 진실’ 아닌가요? 또 생명의 리듬이고 순환의 질서 아닌가요? 새 것이 낡은 것을 밀어내고 세상을 차지하는 것이 자연의 질서이고 봄의 문법입니다. 이 몰아내기가 아비 ‘거세’이고 ‘아비 살해’예요. 죽이는 것도 거세이고 권력 찬탈도 거세입니다. 아들이 아비를 거세하고 싶은 충동을 가진다는 것은 모두 개인들의 심리에 다 적용할 만한 진실은 아닐지라도, 자연계나 인간계에서 관찰되는 세대 간 갈등과 권력 교체의 진실입니다. 신화에 나오는 아비 거세 이야기도 이런 자연 질서의 모방이라고 봐야 할 거예요. 동양에도 그런 말이 있잖아요.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낸다”고 말입니다. 이 점에서 신화나 프로이트의 역사론은 사실 자연과의 ‘유비’에서 나와서 그 유비를 넘어서는 ‘우의’가 되죠.

                                                                                       465 ~ 466



자연계에서도 교미가 끝나면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 곤충들이 있잖아요? 사마귀 암컷은 수놈을 아작아작 잘도 씹어 먹더군요. 그런데 사실은 그 경우도 새끼들이 아비를 먹는 게 아닌가요? 암컷이 새끼들을 위해 수컷을 먹는 거니까. 사회적 권력관계에서 보면 거세의 대상이 반드시 유전적 아비일 필요는 없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는 갈등의 중심에 ‘성’(여자)이 있고 거세 충동의 대상도 유전적 아비인 것처럼 되어 있지만, 이 구도가 반드시 문자적으로 해석될 필요는 없어요. 라캉은 ‘아비’를 훨씬 추상적인 ‘아비의 이름’으로 확장합니다. ‘아비의 이름’에는 이데올로기도 포함될 수 있어요. 프로이트가 내밀히 겨냥한 최대의 아비도 문화적 아비, 곧 ‘신’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죠. 동물계에서 보면 그게 꼭 아버지일 필요는 없죠. 권력 구조에서 위에 있는 존재를 몰아내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따지면 세대 간의 그런 갈등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식물의 경우에는 자식을 자기 발밑에 두지 않으려는 메커니즘이 강하게 진화했어요. 물론, 식물은 아버지라는 존재가 항상 곁에 있는 것은 아니니까 대부분의 경우에 어머니죠. 물봉선화를 건드리면 펑 하고 터지는 이유가 씨를 멀리 보내야 그놈도 살고 나도 살기 때문이죠. 씨가 내 발 밑에 또르륵 떨어져서 크면, 내 자식이기는 하지만 나를 위협하니까요. 식물은 그런 일을 아주 철저하게 배제하기 위해서 지나가는 동물에게 씨를 붙여 먼 데로 보내버리기도 하죠. 과일이라는 게 결국 다른 동물한테 이것을 먹고 그 안에 있는 씨를 다른 데 가서 배설해달라고 하는 데서 진화했거든요. 식물의 경우에는 애당초 아비 살해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한 메커니즘이 진화된 거죠.

                                                                                       468 ~ 469



조선 왕조를 보세요. 프로이트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들이 참 많아요. 아비와 아들 사이의 갈등을 최고조로 보여주는 것이 영조와 그 아들 사도세자의 경우입니다. 거기선 아들이 아비를 거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 아비가 아들을 거세하죠. 이것도 프로이트가 말한 거세의 동일 국면입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뒤집어놓으면 거세 충동은 아비의 것이기도 합니다. 아들놈들이 언젠가 자기를 거세하려 들 거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거세 공포는 아비의 것이기도 하고 아들의 것이기도 해요. 극작가 오태석이 쓴 <부자유친>이라는 희곡이 있는데,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을 다룬 작품이죠. 거기서 사도세자는 아비를 두고 “저 늙은이를 죽여야지” 어쩌고 하는 살해 충동을 노골적으로 표현합니다.

역사의 뒤안길에 감추어져 있는 인간의 내밀한 충동과 욕망, 무의식을 이해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역사를 넘어서서 역사를 이해하기입니다. 조선 왕조 창건자 이성계를 보세요. 그는 아들 이방원에게 거세당하는데, 사실 순서로 보면 이방원에게 거세 공포를 먼저 준 건 이성계죠. 그는 잘난 아들들을 다 놔두고 여덟째이자 막내인 방석이란 놈을 자기 후계로 지목합니다. 방석보다 순서상 먼저인 형들을 다 물먹인 거죠. 이게 ‘왕자들의 난’의 발단입니다. 그런데 태조는 왜 하필 막내를 후계자로 삼았는가? 막내에게 권력을 승계해야 자신이 그만큼 오래 권좌에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요. 거세당하는 순간을 연기하는 거죠. 장강의 뒷물에 밀리되 좀 천천히 밀리자는 겁니다. 거세 공포는 그래서 양쪽에 다 있었다고 봐야죠. 왕이 장자 등 승계 순위가 빠른 왕자들을 좋아하지 않는 건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내면의 말 못할 진실에 관계된 것이라서 역사가 기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죠. 신화에서도 제우스는 아비를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한 후에 자신도 언젠가 거세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잠을 설칩니다.

권력 승계를 둘러싸고, 또는 아비를 거세한 연후에 형제들 사잉에 일어나는 싸움에 대해서도 프로이트는 그럴듯한 통찰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사회적 적요잉 가능한 정신심리적 가설과 통찰들을 그토록 광범하게 내놓은 사람은 프로이트 말고는 없었어요.


제 생각에는 지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프로이트는 인문학적인 사고 체계에 상당한 변혁을 준 사람인데, 전통적인 인문학적 사고 안에서 새로운 논리 체계를 만들어내려고 했으면 설득력이나 영향력이 지금처럼 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대신 과학의 객관성을 앞세워 엄청난 설득력을 얻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그의 이론은 명백하게 ‘과학적이지 못했던 것’인데도 버젓이 ‘과학적인 것’처럼 설명되었다는 게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떻게 보면 프로이트는 과학을 이용해먹은 사람이에요. 만약 프로이트가 “내가 과학적으로 설명하겠다”고 하지 않았으면 과연 그만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하고 저는 의심해봅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딴에는 객관적 관찰이 가능한 사례들을 열심히 모으고, 가설을 테스트하고, 안 맞으면 내버리거나 수정했어요. 그가 끌고 들어온 사례들이 반드시 과학적인 것은 아니었을 수는 있어도 자기로선 ‘과학적’인 방법을 쓴 겁니다. 그는 사례 수집과 입증이라는 과학적 귀납의 방법을 썼지, 어떤 명제를 던져놓고 거기 사례들을 꿰어 맞춘 건 아닙니다. 끊임없이 이론을 수정했어요.


하지만 프로이트가 세운 가설들은 대부분 검증이 가능한 가설들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의 검정 과정도 상당히 문제가 많습니다. 프로이트가 과학적이라고 주장했던 바로 그 방법이 철저히 비과학적이었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도 그의 이론이 여전히 살아남는 것은, 프로이트의 방법론이 어떤 신화의 특성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해요. 그게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이미 박혀 있고, 그래서 그 생각의 테두리 안에서 또 다른 가설을 세우고, 검증 아닌 검증을 거듭하고 있는 모습이 제게는 신화를 만들고 읽고, 재생산하는 과정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

현대 과학이 명백하게 틀렸다고 증명한 프로이트의 이론을 인문학자가 옹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에요. 하지만 인간세계에는 과학의 방법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미신이 생기는 겁니다. 미신과 신화는 어쩌면 한 뿌리에서 나온 건지도 모르죠. 하지만 미신은 근거가 없다는 이유에서만 배격되는 것이 아니라, 통찰이나 설명력이 없기 때문에 불신당합니다. 신화도 황당하고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일 때가 많아요. 그런데 미신은 비합리적이면서 통찰도 없고, 신화는 비리적이면서도 깊은 통찰을 담을 수 있습니다. 결정적 차이죠. 미신의 비합리성은 진실에 도달하지 않는 반면, 신화의 비합리성은 진실에 도달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신화는 비논리의 방법으로 진실의 문을 연다” 거기다 덧붙여서 “그런데 그 진실은 논리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곳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오직 비논리의 길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요?

……

그런 의미에서 비논리의 왕국을 왜 과학의 영토 안에 세우려 했느냐는 겁니다. 비논리는 과학이기 어렵죠. 우리 두뇌가 비논리적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는 관찰을 할 수 있고, 지금도 하고 있죠. 하지만 그 비논리의 논리를 밝히는 작업 역시 과학의 논리에 입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프로이트한테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예요. 당신은 철저하게 인문학적 상상력이 풍부했던 인문학자이고 엄청난 구라쟁이니까 더 이상 과학이라고 주장하지 말아달라는 거예요. 프로이트여, 이제 제발 과학에서 떠나달라는 말입니다.

                                                                                       470 ~ 474



북미 인디언 신화에서 조물주가 마당에 콩을 심었는데 콩깍지가 쫙 벌어지면서 인간이 튀어나와요. 이건 조물주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죠. 명색이 조물준데, 어째서 콩깍지에서 인간이 나왔는지 자기도 알 수가 없습니다. 완전히 타자이고 우연입니다. 그래서 되레 물어요. “얘, 너는 어디서 왔니?” 이런 것이 비서구적 사유이고 상상력이죠. 기독교적 문명으로서는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는 얘깁니다.

                                                                                       477



앞에서도 이야기가 나온 로버트 트리버즈는 1970년대 사회생물학계의 놀라운 괴물이죠. 그가 말한 인간의 자기기만이라는 가설은 현대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쪽에서 열심히 써낸 무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 이론과 상당히 접맥되는 데가 있는 것 같아요.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무의식적 자기 기만의 장치이기도 하거든요. 그 관점에서 보면 이데올로기치고 인간의 자기중심적 기만이 아닌 게 없습니다. 중국에서는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라고 생각했고, 인도인은 인도를, 그리스인은 그리스를 세계의 중심으로 파악했죠. 아폴론 신전은 세계의 배꼽 위에 세워졌다고 했어요.

                                                                                       481



인간의 자기 이해 방식을 수정하도록 도왔다면 그건 큰 공로가 아닐까요? 인간 이해를 확장시킨 부분도 큽니다. 가족 로망스 이론, 우울과 자기 학대와 애도에 관한 통찰 등등 그가 인간 이해를 확장한 공로는 적은 것이 아닙니다. 예술의 경우에는 프로이트가 도와준 것도 많고 망쳐놓은 것도 많아요. 서구 인문학의 기원 지점, 즉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시공간에서 말하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를 확실히 아는 일’입니다. 이 생각은 근대에까지 이어져서 근대가 되면 확실성의 추구가 더 치열해지죠. 인간이 자기를 알자면 유한한 경험 세계만 알아서는 어림없고, 변하지 않는 객관 존재인 ‘진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인간이 그 진리의 존재를 알 수 있는가? 플라톤은 알 수 있다고 호언했습니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이런 걸 다 엎어놨어요. 인간은 자기를 알 수 없고, 그러므로 확실한 자기 지식이란 건 환상이 되고 맙니다. 이성이 길잡이가 아니라 비이성(무의식)이 인간을 이끌고, 욕망이 인간을 인도한다면 어쩔 것인가? 이렇게 되면 인간의 자기 지식은 ‘욕망의 효과’에 불과해집니다. 객관 진리의 초석 위에 서 있는 확실성이 아니죠. 그 객관 진리라는 것의 자리도 무의식으로 넘겨지는데, 그 무의식은 인간이 알고 통제하고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확실한 건 하나도 없죠.

1차 세계 대전을 지나면서 서구의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이 프로이트에게 빠져드는 것은 확실성에 대한 신념이 다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같은 신을 믿는 서구 국가들이 그 신의 이름으로 살육전을 벌이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야훼 신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또 신을 버린 자들의 경우에는 신 대신 과학이나 이성, 인간, 진보 등을 믿었는데 이런 것들에 대한 신념도 다 무너졌죠. 이 폐허의 초상집을 견디자면 초상난 이유를 설명해줄 안내서가 필요했어요. 프로이트는 자기도 모르게 그 안내서의 하나를 제공한 거예요. 유럽의 자존과 오만을 치유하는 데 기여한 거죠. 이건 인간 전체에도 해당됩니다.

내가 지금 프로이트를 내 나름대로 변호하느라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고 있습니다만, 프로이트의 공로가 길게 봐서 공로일지 어떨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프로이트식의 사유는 한 문명이 늙고 지쳤을 때 보이는 자기 증사상의 일부라는 게 내 생각입니다. 자기 반성은 귀중한 거지만, 프로이트가 촉발한 서구의 자기 반성과 해체 충동은 유럽 문명의 조락과 황혼을 알리는 징후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명이 맥이 빠져 나자빠지기 직전에 일어나는 병적 창조성의 마지막 불꽃같은 거 말입니다. 지금 유럽의 핵심 지역들은 창조의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예요. 병든 문명이 자빠지도록 툭 건드려주는 것도 기여가 아닐까요? 프로이트가 성공했다면 그건 장의사의 성공 같은 거죠. 서구 문명이 그 말기적 피로를 어떻게 수습할지, 어떤 모습으로 다시 자기를 추스러낼 수 있을지 두고 봐야죠. 유럽은 자기를 바꾸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 같고, 미국은 자만과 무감각에 빠져 있습니다.

                                                                                       482 ~ 484



우리 최 교수님한테 ‘뇌’란 놈의 이야기도 좀 들어봅시다. 혼이나 섭리, 이성, 의식, 무의식 같은 걸 거쳐 이제는 유전자 시대로 들어왔습니다. 인문학적 인간 이해와 생물학적 인간론이 뇌과학의 중재를 받아 어떤 조우 지점을 얻을 수 있을까요?


플라톤은 철저하게 이원론(二元論)을 주창한 사람이죠. 하지만 사실 유전자까지 가지 않더라도, 생물학자가 생각하는 의식이나 혼은 모두 뇌에서 나오는 것이잖아요. 하지만 그건 어떻게 보면 지나친 중앙집권화예요. 동물 세계를 보면 모든 동물이 다 뇌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작은 동물들은 뇌 없이 다분히 흐트러진 신경계만 갖추고 있어요. 모든 것을 다 조절하는 중앙 부서인 뇌가 있는 동물들이 아니거든요.

편형동물쯤에 와야 몸 전체에 퍼져 있는 신경들이 은근히 한 곳에 모여드는 하나의 신경 덩어리, 이른바 ‘갱글리아(ganglia)'가 생겨나죠. 그 신경 덩어리가 커지고 커져서 신경계를 중앙 통제하는 것이 하나 생기는데, 이것이 바로 뇌예요. 여기서 모든 일이 다 벌어지는 거죠. 그래서 지금은 모든 것이 다 뇌에서 나온다고 하잖아요. 그야말로 뇌 신봉 시대가 된 것이죠. 옛날에는 사랑을 하면 가슴이 뜨거워진다고 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는데 말이죠.

그런데 뇌 문제도 꽤 재미있어요. 공룡을 연구하는 생물학자 중에는 공룡의 뇌가 두 개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머리쯤에 하나 있고, 엉덩이 있는 데쯤에 하나가 더 있었다는 거예요. 발 끝 또는 꼬리 긑쯤에서 벌어진 일이 위쪽의 뇌까지 오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래서 엉덩이쯤에다가 ‘지방 뇌’를 하나 만들었다고 주장해요. 그러니까 중앙 정부가 있고, 지방 정부가 따로 있어서 조급한 일은 엉덩이 뇌까지만 왔다가 돌아간다는 거죠.

이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뇌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는데 현대 생물학이 모든 것을 다 뇌에다 맡기고 있다는 약간 도발적인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최근 생물학계 안에서도 이런 문제를 제기하고 있어요. 뇌가 모든 일을 다 하는 게 아니라, 저 바깥 신경게 말단이 하는 일이 따로 있을 거라는 거죠. 중앙정부 격인 뇌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자치단체들이 나름대로 조금씩 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쪽으로 연구 방향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런 연구 경향 쪽에 있는 외국 학자들이 이상하게도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게 동양의 기(氣)에 대한 연구예요. 제게 기에 대해서 공동 연구를 하자고 괴롭히는 학자들이 한두 분 있어요. 저도 기에 대한 관심은 아주 많은데, 엄두가 안 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까? 아무리 혼자 틈날 때마다 머리를 쥐어짜봐도 완전히 구름 잡기예요. 만일 제가 이런 일을 한다고 하면 당장 “저 선생, 노망들었구나” 하는 소리를 들을 것 같기도 하고요. 저에게 공동 연구를 요청한 분 중 한 분은 세계적으로 굉장히 유명한 학자예요. 얼마 전 국제 학회에서 그분을 만났죠. 그분이 “아, 내가 네 이름은 들었다. 너는 지금 동양에 있는 것 아니냐. 나는 미국에 앉아 있고. 기를 연구하기가 힘들어서 가끔 중국에 가는데, 중국에는 마땅히 같이 연구할 사람도 없으니 네가 나랑 함께 하자. 돈도 대주고, 뭐든 다 해주겠다”고 하더군요. 생각 좀 해보겠다고 답하고는 그냥 어물쩡거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동양에서의 기는 뇌 혼자서 주물럭거리는 것을 분할해서 몸이 좀 가지고 있는 거라고 믿어요. 굉장히 재미있는 생각입니다. 뭔가 있을 법해요. 그런데 도무지 ‘과학적 방법론’이 나타나질 않는 게 제 문제입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주의적 패러다임으로는 방법이 보이질 않아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면 모를까.

                                                                                       485 ~ 486



같은 문화나 문명권에 속한 사람들은 국가나 인종이 달라도 문화적 유사성 때문에 유대감도 높고, 가치나 태도, 행동의 유사성도 높아요. 아랍 무슬림들은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같은 비아랍 국가 사람들과는 유전적 특성이 다르지만 친화성은 높아요. 같은 종교를 믿기 때문이죠. 서유럽 백인들은 폴란드 사람들한테는 별로 적대감이나 이질감을 안 느끼면서 러시아인들에게는 상당한 이질감을 느낍니다. 폴란드인과 러시아인은 인종적으로 같은 슬라브족인데 말입니다. 이런 건 종교적․문화적 전통을 서로 얼마나 공유하는가 하지 않는가에서 발생하는 차이들이죠. 섹스에 대한 태도도 생물학적 이유보다는 문화적 이유 때문에 큰 차이가 납니다.

                                                                                       487 ~ 488

제12장 다양한 생명체와 문화가 공존하는 세상



아직도 ‘계몽의 시대’에 접어들지 못한 나라들이 많다는 말씀인가요? 거기에 한국도 포함됩니까?


그런 나라들이 많죠. 근대성에 대한 가치 판단을 떠나서 말하면, 이슬람은 근대성 수용 자체를 거부하는 상태이고, 아프리카와 남미 지역 국가들은 근대성을 수용하려고 하면서도 잘 안 되는 나라들입니다. 이슬람 국가들 중에서 정치 근대로서의 민주주의를 하고 있는 나라는 터키 종도가 고작입니다. 이집트가 얼마 전에 정치 민주주의를 한다고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지만, 서구적 기준으로 보면 아직 민주주의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정치 민주주의를 도입한 것은 1948년 대한민국 수립 때부터지만, 50년 동안 껍데기 민주주의만 했어요. 형식과 내용이 제법 갖추어진 근대적 민주주의를 하게 된 것은 겨우 15년밖에 안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 돼요.

계몽주의나 근대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근대성의 정신과 사상은 이제는 서구만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그 근대성이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리자면 100년은 더 걸릴 겁니다. 물론 근대 기획에는 비판받을 부분이 많아요. 그러나 정치적 근대도 이루지 못한 나라에서, 더구나 그 근대를 실현하기 위해 한참 더 버둥거려야 할 나라의 사람들이 근대를 비판하고 나설 때는 신중하고 사려 깊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문주주의 자체를 안 하겠다면 또 모르지만 말이죠.

                                                                                       498 ~ 499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는 이룬 것 아닙니까?


‘어느 정도’죠. 그러나 정치 민주주의는 15년으로는 어림없습니다. 일부 정치인들 중에는 “이제 우리가 민주주의는 이루었다. 다음에 할 것은”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잠꼬대 같은 겁니다. 경제 발전보다 수십 배 더 어려운 것이 정치 발전이고 민주주의예요. 사회 민주화는 제도나 법률의 힘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사회는 수직 서열 사회죠. 이 수직성의 사회를 수평성의 사회로 바꾸고 합리성을 확장하는 일, 이것이 ‘사회적 근대’의 알맹이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아직도 속속들이 수직 서열 사회이고, 사회적 합리성의 수준은 20점 정도입니다. 상당수 한국인의 의식은 아직도 왕조시대의 의식과 정신 상태에 묶여 있어요. 연줄주의를 보세요. 비리와 비효율, 부패의 온상이 연줄주의잖습니까. 아는 사람을 찾고 인연 닿는 사람을 찾지 않으면 일을 하기가 엄청 어려운 것이 우리 사회예요. 연줄이 잘 닿으면 안 될 일도 되죠. 한동안 우리나라를 두고 외국인들은 “되는 일 없고 안 되는 일 없는 나라”라고들 말했어요. ‘끼리끼리 해먹는’ 폐습이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습니다.

연줄주의에는 두 가지가 있죠. 하나는 친족등용주의(nepotism)이고 또 하나는 친구나 친지 등 잘 아는 사람들만 골라 자리에 앉히는 패거리주의(cronyism)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합쳐서 나는 ‘끼리끼리즘(kirikirism)'이라 불러요. 한국의 연줄주의는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거니까 ’끼리끼리즘‘이란 말도 좀 선전해주세요. (하하하) 현 정권에 대해 사람들이 ’코드주의‘를 자주 들먹거리는데, 그런 코드주의가 있다 해도 그건 끼리끼리즘과는 성절이 다를 거예요. 한국인은 변화에 상당히 민감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바뀌지 않는 거대한 관습적 심리 구조와 구시대 이데올로기, 그리고 관행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499 ~ 500



도저히 단일민족일 수가 없는 지형을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우리나라는. 반도는 어차피 대륙에서 섬으로 가기 위해서 지나가는 곳이고, 해양에서 올라가다 보면 거쳐가야 하는 곳이죠. 여하튼 이 반도라는 데는 언제나 흐름이 아주 많죠.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사실 고려 때는 저 멀리 중동 사람들도 왔다 갔다 했다면서요. <처용가>를 부른 사람이 그쪽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러시아에서도 내려왔었고, 몽골에서도 내려왔었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피가 안 섞이려야 안 섞일 수가 없었을 텐데, 우리는 왜 그렇게도 필사적으로 순수혈통을 고집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섬생물지리학에서 아주 중요한 이론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육지로부터의 거리이고, 또 하나는 섬 자체의 크기예요. 섬이 거대하면 거기서 벌어지는 진화의 속도와 모습이 작은 섬에서 벌어지는 진화의 속도나 모습과 아주 딴판이죠. 작은 섬에서는 어차피 불과 몇 마리로 시작했을 것이고, 그 몇 마리의 독특한 형질 때문에 큰 육지에서 벌어지는 일과는 달리 아주 빠른 속도로 변화가 일어날 수 있거든요. 이것이 지난번에 제가 선생님께 드린 《핀치의 부리》라는 책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정작 남미 대륙에서는 핀치의 변화가 별로 많지 않았는데 갈라파고스 섬으로 건너간 몇 마리에서부터 출발하여 그곳 섬 하나하나에 건ㄴ너가서 새로 터를 잡은 것들은 엄청나게 빨리 변화한 거죠. 진화의 속도가 굉장히 빨라진 겁니다.

어쩌면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볼 때 변화가 빠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런데 우리나라도 이제 사람 수로 봐서는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잖아요. 사람 개체군의 크기보다는 우리나라 땅덩어리가 워낙 작기 때문에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큰 변화처럼 보이죠. 미국은 앞서가는 나라이면서도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상당히 보수적이잖아요. 워낙 땅이 넓다 보니 보스턴을 비롯한 뉴잉글랜드 지역에서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도 저 와이오밍 산골에서는 그 변화가 뭔지도 모르고 삽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저도 그런 글을 가끔 씁니다만, 전 국민이 똑같은 신문을 매일 읽는 하나의 똘똘 뭉친 집단 아닙니까. 그러니까 변화가 일어나면 완전히 거국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죠.

                                                                                       504 ~ 505



최근에 일본 도서관 문화를 보러 갔다 온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면 들려준 이야기가 있어요. 일본 국회의사당 옆 도큐 캐피탈 호텔이란 델 투숙했는데 인터넷 노선이 안 들어와 있더라는 거예요. “우리 호텔에는 없으니 옆 건물 어디어디 가서 해라” 하더래요. 도큐 캐피탈 호텔이면 꽤 큰 호텔입니다. 알아보니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와이드밴드 설치율이 한국의 반의반도 안 되더라는 겁니다.

인터넷과 개인 통신은 한국인의 변화 속도를 아주 웅변으로 말해주죠. 일본은 변화에 상당히 저항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동북아에서 서양에 맨 먼저 문을 열어준 것은 일본입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결단은 변화에 대한 수용의 민첩성과는 다른 것 같아요. 기독교는 아직 일본에 뿌리를 못 내렸거든요. 서양의 진출 앞에서 완강히 버틴 것은 오히려 조선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일본은 먼저 열고도 느리게 받아들였고, 한국은 저항해놓고도 빠르게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차이를 생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한국인은 ‘작은 반도’라는 환경적 특성 때문에 변화를 재빨리 받아들이고 변화에 빨리 적응하는 유전형질을 발전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간단한 이야기가 아닌데요. 핀치의 경우를 봐도 섬의 변화가 빠르다는 것은‘빠르다’보다는 육지나 대륙과 비교할 때 ‘다르다’는 것, 즉 속도보다는 성질의 의미가 더 강하다고 봐야할 것 같아요. 왜냐하면 대륙에서는 개체군들이 다 연결되어 있으니까 어느 한 군에서 변화가 일어나도 다른 개체군이 거기에 섞여 변화가 희석되고 마는데, 섬에서는 변화가 한쪽 방향으로 가기 시작하면 그냥 그쪽으로 흘러가버리니까 일정한 시간이 지난 다음에 그 섬으로 이주한 생물과 육지에 있는 생물을 비교하면 굉장히 많이 달라져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갈라파고스 섬도 역시 섬이 여러 개가 모여 있죠. 우리가 핀치를 공부할 때 섬 하나하나를 따로 공부해야 해요. 하지만 일본은 여러 섬들을 다 모아놓은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일본이라는 나라를 이야기하자면 각 섬에서 벌어진 일들을 종합해야 하니까, 예를 들면 큐슈에 어떤 변화가 있어도 혼슈에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전체적으로 우리나라에 비해서 변화가 덜 일어나는 것으로 결론이 나겠죠.

                                                                                       506 ~ 507



아까 최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유전자형이나 표현형과 연결지어보면, 한국인에게 유독 변화에 민감한 유전형질이 생물학적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게 생물학적 특성이 아니라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문화적 유전의 영향이 아닐까 하는 문제가 제기돼요. 가족을 끔찍이 챙기고 가족 중심으로 움직이는 행동 방식은 세계의 다른 전통사회에서도 강한 특성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또한 한국인의 특성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그 가족주의는 생물학적 특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족끼리 뭉치지 않고는 살기 어려운 사회 환경이 만들어낸 특성 아니겠어요? 혈연 전통사회의 산물이 가족주의죠. 그런데 사회 환경과 사회 관계가 더 이상 가족주의를 요구하지 않는 시대가 되어도 그 문화적 구성물로스의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와 가치는 그대로 장구하게 유지되어 ‘현대’한국인의 행동을 지배하는 겁니다. 아까 내가 한국인은 빠르게 변화에 적응하면서도 속으로는 잘 바뀌지 않는다고 한 것은 이런 걸 두고 한 말입니다. 한국인은 변화를 따라갈 때도 가족 단위로 따라갑니다. 함께 뭉쳐서 움직이는 거죠.

                                                                                       509



문화 자체가 적응의 산물이지만 한번 문화가 성숙하고 나면 개체들은 그 문화의 관습과 규범을 따릅니다. 그런데 그 문화가 적응성을 잃어버려 개체는 물론이고 집단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될 때는 어떡하는가? 적응성을 잃어버린 문화 때문에 망한 사회는 역사적으로 아주 많습니다.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지적도 같은 맥락입니다. 문명이 망할 때는 망할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 중에 아주 중요한 것이 생태환경의 파괴라는 게 다이아몬드 교수의 지적입니다. 지금의 경제 세계화 문명도 생태환경을 파괴하는 문명입니다. 그렇다면 그 문명에 재빨리 적응해야 한다. 빨리 바뀌어야 한다는 건 길게 보면 제 무덤 파기죠. 거석문화 때문에 망해버린 이스터 섬 꼴이 나는 겁니다. 이게 현대 문명의 곤경입니다. 문명 자체가 방향을 그르치고 있는데 그 문명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버둥거려야 하는 곤경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한국인이 변화에 빠르다는 건 꼭 자랑거리만은 아닙니다. 변화하되 앞도 좀 내다보고 생각도 해가면서 바뀌는 것이 지혜죠. 지금의 우리 모습은 꼭 눈감고 누가 빨리 뛰는가 내기 경주를 하는 꼴 같아요. 앞에 낭떠러지가 버티고 있는데도 말이죠.

진화론의 ‘적응’이나 진화의 ‘맹목성’ 이론읁 그래서 문제가 됩니다. 생물학적 적응과 진화는 맹목적일 수 있어도 사회적 진화는 맹목적이어서는 안 되죠. 사회생물학의 보수적 경향도 아주 문제입니다. 유전자의 목적은 유전자를 널리, 많이 퍼뜨리는 거죠. 게다가 그 유전자의 영향은 다분히 결정론적이어서 “네가 그런 것은 원래 네 유전자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중세 기독교의 섭리론과 아주 닮아 있습니다.

                                                                                       510 ~ 511



기본적으로 저희 사회생물학 쪽에서는 사회 진화와 생물 진화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무능력해서 자연 진화 상태라면 낙오되어 마땅한 사람을 사회 진화 상태에서는 모두 보호한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왜 자연 진화에서 나쁜 유전자가 깨끗이 없어지지 않고 항상 남아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요. 다시 말해서 자연 진화라고 해서 무능력한 유전자가 항상 낙오되기만 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우성인 대립 유전자와 열성인 대립 유전자를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 열성 유전자가 하나 있지만 표현형상으로는 항상 우성을 보여줍니다. 열성 유전자는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성 형질만 나타난 거죠. 색맹 유전자를 하나 가지고 있어도 색맹이 아니기 때문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지만, 만약 그런 사람 둘이 만나면 표현형으로도 색맹인 사람이 나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을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늘 존재하는 겁니다. 그게 생물 진화에요.

그러나 과연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복지정책들이 정말로 열성 유전자들이 지켜주고 있는 것인지, 사실 한번쯤은 지켜봐야 합니다. 꼭 우리가 지켜주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워요. 왜냐하면 우리가 판단하는 이른바 열성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 예를 들어서 그 사람의 유전자 전체에서 한 부분이 열성이라 해도 다른 부분은 상당히 우성적일 수도 있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열성적인 부분이 두드러지다 보니까 성공하지 못한 사람으로 보일 뿐이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 전체가 다 열등하다는 이야기는 분명히 아닐 겁니다. 그리고 그 열성 유전자 자체도 환경이 변하면 졸지에 우성 유전자로 대접받게 될지도 모르는 거니까요.

                                                                                       512 ~ 513



생물 진화와 사회 진화가 다른가요? 저는 별로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회 진화에는 생물학자가 이야기하는 환경적인 요소인 문화적인 요소가 아무래도 더 많이 작용하겠지만, 그래도 결국 다윈이 말한 자연선택론의 기본 개념에 입각하면 사회라는 문화적 환경이든 숲속이라는 자연적 환경이든, 그 환경에 적응한 개체가 더 많은 유전자를 남기는 거니까요. 그리고 그 유전자를 남길 때 자신이 가장 남기고 싶은 유전자 하나만 달랑 남기는 것이 아니라, 남기고 싶지 않은 유전자도 한꺼번에 모두 남기는 거거든요. 한꺼번에 넘어가기 때문에 결국 나쁜 유전자는 빼내고 좋은 유전자만 넣는 게 불가능하니까 결국 똑같은 메커니즘으로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


만약 우성이라고 생각된 유전자를 강화하는 쪽으로 생명 공학이 발전한다면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고 우려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문제는 사회적으로 어느 것이 우성인가를 누가 결정하느냐는 거예요. 어떤 시대에는 이런 신체적 특징이나 이런 정신적 능력을 가진 친구가 우성 개체로 여겨지지만, 다른 시대나 다른 사회에 가면 우성에 대한 판단 기준이 바뀔 수 있습니다. 인간 사회가 공존이라든가 평등을 주장하는 방향으로 이동해왔다고 봤을 때, 그 공존이나 평등이란 모두 똑같아지자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개체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죠. 한 시대의 가치 체계가 우수한 개인을 어떻게 규정하든 간에, 그 규정에 관계없이 우성 개체로 선정되지 않는 개체들도 살아남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 공존의법칙입니다.

기본적으로 저희 사회생물학 쪽에서는 사회 진화와 생물 진화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무능력해서 자연 진화 상태라면 낙오되어 마땅한 사람을 사회 진화 상태에서는 모두 보호한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왜 자연 진화에서 나쁜 유전자가 깨끗이 없어지지 않고 항상 남아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요. 다시 말해서 자연 진화라고 해서 무능력한 유전자가 항상 낙오되기만 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우성인 대립 유전자와 열성인 대립 유전자를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 열성 유전자가 하나 있지만 표현형상으로는 항상 우성을 보여줍니다. 열성 유전자는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성 형질만 나타난 거죠. 색맹 유전자를 하나 가지고 있어도 색맹이 아니기 때문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지만, 만약 그런 사람 둘이 만나면 표현형으로도 색맹인 사람이 나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을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늘 존재하는 겁니다. 그게 생물 진화에요.

그러나 과연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복지정책들이 정말로 열성 유전자들이 지켜주고 있는 것인지, 사실 한번쯤은 지켜봐야 합니다. 꼭 우리가 지켜주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워요. 왜냐하면 우리가 판단하는 이른바 열성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 예를 들어서 그 사람의 유전자 전체에서 한 부분이 열성이라 해도 다른 부분은 상당히 우성적일 수도 있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열성적인 부분이 두드러지다 보니까 성공하지 못한 사람으로 보일 뿐이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 전체가 다 열등하다는 이야기는 분명히 아닐 겁니다. 그리고 그 열성 유전자 자체도 환경이 변하면 졸지에 우성 유전자로 대접받게 될지도 모르는 거니까요.

                                                                                       514 ~ 515



도 선생님, 비이기성이나 이타성이 인간의 탁월성인가요?


무엇이 인간의 탁월성인가/ 이 질문에 정답을 가졌던 시대는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탁월성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무책임하죠. 중요한 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정답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간이 살아오면서 이루어보려고 했던 어떤 집단적 목표, 역사적․환경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꿈꾸어온 어떤 이상적 수준에 비추어 ‘탁월성’을 생각해보는 일일 겁니다. 나는 두 가지 방법으로 인간의 탁월성을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틀림없이 이기적 동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이기적 성향을 거스를 줄 아는 존재입니다. 이기성과 비이기성 사이에 벌어지는 긴장과 싸움을 감당할 능력, 거기에 인간의 탁월성이 있다는 생각이죠. 두 번째 생각은 인간이 ‘지금 여기’에 매어 있으면서도 그 결박을 넘어 다른 것을, 지금 여기의 ‘너머’를 보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을 넘어 과거와 미래를, ‘여기’를 넘어 다른 곳, 다른 세계, 다른 가능성,‘저기’를 보는 거죠.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른 것들과의 ‘연결’을 시도합니다. 괴테가 가을 숲을 지나다가 읊조린 시 구절이 있죠? “보아라, 이 지상의 것이 아닌 위대함이 저기 있지 않느냐?” 이런 연결의 능력은 아주 위대합니다.

                                                                                       515 ~ 516



미국에 치안 쑤라는 중국 출신 생물학자가 있어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어찌어찌해서 미국에 유학을 가고, 지금은 꽤 명성을 날리는 학자가 된 사람이죠. 그가 최근에 중국을 방문하고 나서 개탄한 글이 있습니다. 중국의 대학과 젊은이들이 눈앞의 물질주의와 출세주의에 빠져 순수 탐구 정신을 잃어버렸다고 말입니다. 중국, 한국 할 것 없이 시장근본주의가 세계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나는 시장근본조주의를 시장전체주의라고 부릅니다. 정치전체주의 못지않게 위험 체계죠. 모든 가치가 시장 가치 하나로 결정되고 재단되니까요. 돈 잘 벌 전망이 서지 않으면 결혼할 생각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최 

번식할 기회가 근원적으로 봉쇄당한 거네요.


그렇죠. 요즘 우리 사회의 출산율 위기 문제를 보세요. 이건 현대 한국인이 유전자를 퍼뜨리는 데 갑자기 흥미를 잃어버려서 생겨난 위기가 아니에요. 퍼뜨리고 싶어도 도저히 형편이 안 되는 겁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을 엄청 어렵게 만들어놓은 사회에서 “아이들을 많이 낳자”는 겁니다. 출산율 저하는 분명 사회적 생산성의 위기입니다. 이 위기는 반생물학적인, 혹은 비생물학적인 사회적 문제입니다. 생물학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군요. “유전자를 퍼뜨려야 하는데 요즘 한국 사람들은 번식을 거부해. 미쳤어”라고 말할까요? 몸은 젊어서 번식력이 왕성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번식 능력을 박탈당하는 상황입니다. 번식하지 말아야 자기가 살아남아요. 생존과 번식이 나란히 가는 것이 아니라 따로 놀죠. 번식과 생존이 모순관계에 놓이는 겁니다. 번식의 기회가 줄면 사회적으로는 다양성의 자원이 줄어듭니다. 앞으로 어떤 변화가 닥칠지 모르는데 지금의 사회가 요구하는 쪽으로만 적응력을 집중하면 이런 일이 벌어져 미래에 대비할 수가 없게 되죠. 우리 사회는 빠른 적응에 성공하기 위해서 긴 적응에는 실패하고 있습니다.

                                                                                       516~ 517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 중에서도 뭔가 새로운 연구를 해보려고 “이런 분야의 연구자는 어디 있을까?‘ 하고 찾아보면 백발백중 한 명도 없는 게 우리 학계의 현실입니다. 학계가 이렇게 얇은 층으로 이뤄져 있는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쪽 구석에 다 몰려 앉아 있잖아요.

현재 선진국들은 막 달려가면서도 늘 더듬이를 높이 치켜들고 세상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대해 알려줄 만한 징후들을 찾아내려고 무척 노력합니다. 일단 그 징후들을 찾아내면 그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해서 사람들을 줄세워가며 준비하죠. 그런데 우리는 몇 초 늦게 그 사실을 체감하고는 “우리도 그 방향으로 가야지!” 하고 눈을 돌리면 마차를 끌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거예요. 상황이 이러니 비전문가를 앞세워서 갈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가다 넘어지고 깨지고 하는 것이죠.

“사회를 다양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게 사실 우리 사회생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러 가는 과정에서 유전자를 너무 앞에 내세워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이해가 아니라 오해를 낳게 된 것이죠. 운명론적인 것으로요.

                                                                                       519



인간이 아직 그 효용을 발견하지 못한 풀이 잡초인데, 사실 잡초의 가치는 당장의 효용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잡초를 만나면 우린 이렇게 말해야 해요. “잡초님, 아직은 우리가 당신을 발견하지 못해 잡초로 대접하지만, 섭섭다 마시고 의연히 지내십시오. 언가 인간이 찾아올 겁니다” 그런데 지금 쓸없으니까 앞으로도 쓸모없을 것이다 싶어 잡초들을 몽땅 뽑아 죽여 없애고 있으니 문제죠. 인간 사회에도 이런 잡초 같은 존재들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쓸모없다 해서 ‘바보’로 여겨지는 존재들 말입니다.

문학은 그런 바보들에게 지극한 애정을 갖고 있어요. 문학이 문학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세상이 구박하고 조롱하는 바보들에게서 정말로 인간다운 인간, 인간의 정수, 똑똑한 자들이 죽었다 깨도 도달하지 못할 높은 차원의 진짜배기 인간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서양 문학에는 ‘성(聖) 바보(Saint Fool)'이라는 인물이 있어요. 바보는 바본데, 알고 보니 성인 반열에 들 만한 바보, 그게 ‘성 바보’입니다.


그런 인물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작품은 뭐가 있나요? 저도 그런 작품들을 읽고 논문에 인용해보고 싶은데요.


얼마든지 구해드릴 수 있어요. 사실은 내 담당의 학부 소설 강의에 ‘바보 연구’라는 게 있습니다. 문학에 나오는 바보들을 만나보게 하는 과정이죠. 세계 문학의 대가들치고 바보 이야기를 쓰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톨스토이는 특히 바보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죠. 《바보 이반》말고도 그가 쓴 이야기들에는 이런저런 바보들이 몇 트럭쯤 등장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백치》를 썼어요. 문학은 바보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그리움을 갖고 있습니다. 작가들은 죽기 전에 꼭 바보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영화에도 바보가 나오는 영화가 꽤 많죠. 요즘도 텔레비전에서 가끔 틀어주는 영화가 있는데, <길> 보셨나요? 거기 나오는 젤소미나(줄리에바 마시나 분)는 불한당 차력사인 잠파노(앤서니 퀸 분)가 끌고다니면서 한없이 착취하다가 내버리는 팔푼이 여자예요. 남자는 한참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여자를 다시 찾아나섭니다. 바보를 잊을 수 없었던 거죠. 물론 찾지 못합니다. 남자가 밤 바다 모래밭에 꿇어앉아 울면서 절규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나요. “젤소미나, 난 네가 있어야 해!”

최 교수님께 꼭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바보 김펠>이라는 단편인데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라고, 1978년 노벨상을 받은 유대계 미국 작가의 작품입니다. 우리도 시골서 자란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게도 대부분 어릴 적 살던 마을의 ‘동네 바보’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잖아요? 김펠도 그런 동네 바봅니다. 동유럽 어느 유대인 마을이 배경이죠. 이 바보가 장가를 드는데, 여자가 결혼 몇 달 만에 애를 낳아요. 물론 김펠의 아이가 아니죠. 김펠이 이 여자하고 사는 동안 아이 여섯이 태어납니다. 그런데 그 중에 김펠의 아이는 하나도 없어요.


그럼 남편이 그 아이들을 다 키워주는 이야기입니까?


그래요. 다 키우죠. 그래서 생물학자들에게 추천하는 겁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수컷이 제 새끼 아닌 놈을 키우나요? 젊은 수컷 사자가 암컷을 거느리게 되면 다른 수컷한테서 낳은 새끼들은 죄다 물어 죽인다면서요?

                                                                                       521~ 523



한국인은 남의 아이를 들여다 키우지 않기로 유명하죠.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국 고아들을 입양하지 않으면 그 아이들이 다 어디로 갈까요? 그래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제 새끼 아닌 것은 다 내쫓거나 물어 죽이는 것이 동물계의 경향이라면, 남의 애를 입양하기를 꺼리는 한국인은 동물계의 자연 성향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인종도 다른 한국 아이들을 입양해서 키우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행태는 어떻게 설명이 될까요? 반자연인가요? 반자연이라면 이기적 유전자의 명령에 어긋나는 건데, 그런 행동은 누가 시킨 거죠? 그것까지도 유전자의 프로그램일까요? 진화의 손익으로 따질 때 그런 행동도 ‘이익’이 되는 건가요?

                                                                                       524



미국에 있을 때 한국 아이를 입양한 사람들을 가끔 만났거든요. 한국 땅에서 태어나서 자란 저로서는 그때 참 신기했죠. 처음에는 미국 사람들이 너무 이상하게 보였어요. “참 미친놈들이구나! 미친 일을 하는구나” 싶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동유럽이 무너지면서 루마니아, 유고 등이 고아원에서, 그것도 에이즈까지 걸려 있는 아이들을 미국 사람들이 입양하는 것을 봤죠. 그들이 그곳에 가서 오랜 기간 정부의 불합리한 행정 체제와 싸우면서, 심지어 어떤 사람은 1년이 넘는 각고의 노력 끝에 아이들을 입양해서 미국 공항에 내리는 장면들이 TV에 나왔어요. 저는 TV를 보면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자기 핏줄도 아닌데.”

우리나라의 경우, 옛날에 형님 댁에 아들이 없으면 동생 집엣 가서 동생의 아들을 한 명 빼앗아 오잖아요. 멍석 밑에 곶감을 적당히 숨겨두고 조금씩 먹으면서 단식투쟁하는 척하며 아이를 달라고 투정해서 빼앗아가지요. 그 행태는 자기랑 어느 정도 피를 나누 아이를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제일 잘난 동생의 자식을 골라갑니다. 입양할 때도 마찬가지로 계산을 다 할 텐데. 그 사람들이 불구의 아이들을 안고 들어오는데, 정말 한마디로 감동적이더군요.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려봤어요. 우리가 남의 자식을 품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 스스로 단일민족이라 생각하는 허구에서 온 게 아닌가? 우리 민족처럼 핏줄이라는 것에 엄청나게 매달려 있는, 순수한 혈통이라는 것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민족이 있을까? 예전에 중학교에서 배운 걸 기억해보면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얘긴지 너무나 분명해집니다. “우리날는 끊임없이 외침을 받았다”고 해놓고 그 다음 장에는 엉뚱하게 “우리는 순수혈통을 지닌 단일민족이다”라고 써놓았는데, 이 두 말이 어떻게 함께 나올 수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우리 피가 순수하지 않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순수를 너무도 갈구했기 때문에 역으로 생겨난 믿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의 순수혈통 신화에 사실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면 조금 문제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527~ 528



타조 같은 동물은 남의 자식을 적극적으로 입양한다고 할 수 있어요. 타조 엄마들은 알을 낳을 때, 그 동네 으뜸 암컷으로부터 입양을 강요당해요. 으뜸 암컷이 알을 낳아놓고 다른 암컷들더러 자기 알들 옆에다 알을 낳으라고 합니다. 그리곤 으뜸 암컷이 혼자 서 그 알들을 다 보살핍니다.

그런데 영국 학자 한 사람이 타조의 행동을 자세히 관찰해보니까, 으뜸 암컷 타조는 자기 알들을 가운데다 놓고 다른 암컷들의 알은 가장자리로 뺑 둘러놓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외부 침입자가 다가올 경우 바깥쪽에 있는 알만 잡아먹히고 자기 알은 살아남죠. 그만큼 자기 알이 없어질 확률이 떨어지는 거죠. 그래서 남의 새끼를 키우는 거옝Y. 또 새끼 타조를 키워서 돌아다니다 보면 암컷끼리 만나요. 그러면 서로 싸우다가 이긴 암컷이 새끼들을 다 데리고 가요. 그런데 거기서도 자세히 관찰해보니까 자기 새끼들은 가까이 데리고 다니고, 빼앗아온 남의 새끼들은 가장자리로 돌려놓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이른바 ‘희석 효과’입니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분명히 이득이 있기 때문에 남의 새끼를 키우는 거죠.

미국에서 양자를 입양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기 자식이 있는데도 입양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 중에 간혹 타조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입양한 아이들이 자기의 진짜 아디들을 지원하게 만드는 행동들을 보인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런 행동은 생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남의 아이를 데려다가 자기 자식보다도 더 열성을 갖고 키우는 행동은, 사실 생물학적으로 설명하기 무지무지 어렵습니다.

                                                                                       530



사회생물학에서 큰 주류를 꼽으라면, 물론 다윈의 이론으로부터 출발하는 게 사회생물학이지만, 그 다음에는 해밀턴의 혈연선택(kin selection) 이론이에요. 그 이론은 “유전자를 공유하는 것들끼리 서로 도우면서 사회 행동이라는 것이 생겨났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유전적으로 서로 관계가 없는 개체들 간에는 어떻게 이타주의적인 행동이 진화했느냐 하는 문제가 남죠. 그래서 나온 것이 트리버즈의 상호호혜(reciprocal altruism) 이론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헌혈을 하고 나서 헌혈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 입이 간질간질한 이유는 “나는 남에게 헌혈할 줄 아는 사람이다”라는 평판을 기대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물론 계산적으로 그렇게 한다는것은 아니지만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내가 남의 자식까지 데려다 키울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사회적 평판을 얻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되는 일이죠. 다민족 국가에서는 훨씬 더 높이 평가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요즘에는 TV에서 장애 아이를 데려다가 키우는 보무들을 많이 보여주더라고요. 우리 사회도 그런 행동들을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홍보하면 입양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겁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의 평판, 사회적인 평가를 높이는 데 굉장한 공헌을 할 겁니다. 그런 효과가 분명히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런 평판이 중요한 이유는 만일 내가 함께 손잡을 사람을 선택할 때 헌혈차를 보면 아예 멀찌감치 돌아가는 사람보다 제 발로 걸어가서 헌혈하는 사람, 그리고 그보다 더, 남의 아이를 입양해서 평생 돌봐주는 사람을 택하고 싶기 때문이죠. 나도 그런 사람을 원하고 남도 내가 그런 사람이면 나를 더 원하겠죠. 이것이 상호호혜 집단입니다.


입양이니 헌혈이니 하는 이타적 행동이 결국은 ‘나’의 액면 가치를 높여주는 거니까 한다고 말하면 이타적 행동도 ‘이기적 계산’에 의한 것이 됩니다. 호혜적 이타성 이론은 동네 목욕탕에 가면 그 진수를 볼 수 있어요. 서로 등 밀어주기 말입니다. “내가 네 등을 밀어주면 너도 내 등을 밀어주겠지”라는 거죠. 나는 열심히 밀어줬는데 상대방이 자기만 씻고 나가버리면 “뭐 저런 인간이 있어?”가 되고 더 심하면 “저건 인간도 아니야!”가 됩니다. 사회적 평판에 일대 손해가 발생하는 거죠. 이게 사람들이 서로 도와줄 때의 일반적 도덕률입니다. 그 도덕률을 따르는 것이 사회적 생존에 더 유리하죠. 그래서 그런 행동을 강화하는 쪽으로 자꾸 프리미엄이 붙고, 이런 피드백이 쌓여서 유전 정보에도 영향을 준 것이라는 소리가 되나요?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있어요. ‘서로 등 밀어주기’는 남탕에서보다는 여탕에서 더 많이 일어납니다. 여탕에 들어가봤느냐? 꼭 들어가봐야 합니까? (하하하) 이런 얘길 왜 하느냐 하면, 육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약자일수록 호혜 성향이 더 높다는 소릴 하고 싶어서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의 경우도 그래요. 남탕에서는 한증막에 같이 앉아 있어도 모르는 사람들끼리 좀체 대화가 트이지 않죠. 그러나 여탕 사우나실에서는 모르는 여자들끼리도 순식간에 이야기꽃이 피거든요. 안 들어가봤지만 다 압니다. (하하하)

인간은 자연 앞에서나 신 앞에서 보잘것없는 ‘약자’입니다. 그 약자가 호혜성의 꾀를 내지 않으면 무슨 수로 강력한 외부 위협에 맞서겠어요? 종교의 경우도 이 방식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리처드 도킨스 등의 생물학자들은 종교를 우습게 알지만, 앞에서 이야기했듯 그건 생물학자로서도 현명한 태도가 아닐 것 같아요. 종교와 과학은 별개입니다. 그러니까 과학을 기준으로 종교를 재단하고 평가하면 안 되죠. 오히려 생물학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어째서 인간 사회에서 종교가 없어지지 않느냐는 문제일 겁니다.

기독교를 보세요. 근대 이성과 과학의 시대를 건너오면서 없어지거나 약화되지 않습니다. 멀쩡히 살아남았죠. 근대성이 채워주지 못하는 구멍, 오히려 근대성 때문에 생겨난 가슴의 공허를 기독교가 채워주었기 때문입니다. ‘과학기술’의 나라 미국에서 지금 기독교 열풍은 섭씨 50도입니다. 10년 전 자료지만, 미국인의 94퍼센트가 자기를 ‘종교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 93퍼센트가 기독교도이고요. 1992년 조사에서는 미국인의 70퍼센트가 사후 세계를 믿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지금도 미국 여러 주에서 진화론이 법정 소송에 걸려 있고, 아주 최근에는 고등학교에서 창조론과 지적 설계론을 진화론과 나란히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들이 강하게 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꾀 많은 생물학자라면 이런 식으로 말해야 하지 않겠어요? 원시 사회나 그보다 더 이전의 인간사회에서 인간은 무리를 짓고 집단을 만들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생존을 위해서는 집단을 만들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생존을 위해서는 집단을 만들고, 집단을 결속시키자면 같은 신을 믿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그러니까 종교는 인간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그래서 인간에게 종교성(relitiosity) 또는 종교적 성향이 이미 그 자체로 트리버즈가 말한 호혜적 이타성 아닙니까?

                                                                                       535~ 537



그래서 어떤 행동을 일으킬 수 있는 유전자 내부의 성향들이 환경과 어떻게 교섭하고 협상하느냐에 따라서 발현의 종류가 엄청나게 달라질 것이란 말이죠?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것, 인간의 자유 의지라고 하는 것이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모르지만) 유전자 때문에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면, 자유 의지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최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이 문제에 대해 새로운 시각에서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전자의 발현 가능성들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다 발휘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환경과 만나느냐에 따라서 발현의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면 바로 여기, 여기가 자유의 영역 아니겠습니까?


예, 그래요. 참 좋은 표현이십니다.


자유 의지를 말하는 인문학의 방법도 좀 많이 달라져야 할 겁니다. 지금까지는 신이 자유 의지를 주었기 때문에, 혹은 개인의 이성적 판단력이 신장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에 역행하는 자기의 의지를 발현할 수 있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는데, 진정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죠. 

선생님 말씀을 듣다 보니 자유를 잃은, 자유 의지를 잃은 생물들이 생각나는군요. 요즘 광우병이나 조류독감의 위력이 엄청나잖아요. 그런데 옛날이라고 가축의 병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요즘은 한 번 병이 나면 전 세계가 다 흔들흔들하잖아요. 광우병은 영국에서 일어났는데 왜 일본까지 걱정을 해야 됩니까? 조류독감이 홍콩에서 일어났는데 왜 브라질이 흠칫합니까?

이게 모두 인간이 소들의 자유 의지를 빼앗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에요. 소들의 다양성이 없어져서 그런 겁니다. 영국의 소나 일본의 소나 우리나라 소나 다 똑같거든요. 가장 젖을 많이 짤 수 있는, 가장 살을 많이 얻을 수 있는 소를 계속 인위적으로 선택해왔기 때문에 결국 전 세계에서 똑같이 소를 키우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병원균이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소를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옛날 같으면 이웃 마을의 소 한 마리가 쓰러져도 우리 집 소는 쓰러질 이유가 없었는데 말이죠.

                                                                                       540~ 541



닭도 마찬가지죠. 홍콩에서 닭들이 병에 걸렸다고 하면 우리나라도 걱정을 해야 해요. 닭은 원래 동남아시아 숲 속에 있는 정글 파울(jungle fowl)이라는 새에서부터 왔어요. 그 닭을 가축화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여러 종류의 닭들이 있었겠죠. 제가 어렸을 때 시골집에서 할머니께서 닭을 키우셨는데, 저는 여덟 살 때쯤에 이미 어떤 닭이 알을 잘 낳는지를 분명히 알았어요. 매일 제가 들어가서 알을 꺼냈으니까요. 할머니가 제 몸보신을 시켜주시려고 “재천아, 닭 한 마리 잡자” 그러시면, 제가 “할머니, 쟤를 잡아요” 하고 알을 제일 못 낳는 닭을 가리켰어요.

이런 식으로 알을 못 낳는 닭을 잡아먹고 잘 낳는 닭만 남겼기 때문에 전 세계에 있는 닭들이 똑같은 알을 낳으며 같은 품종이 되어버린 겁니다. 소와 마차낙지로 닭들도 황우석 선생님의 도움 없이도 이미 복제된 것이나 다름없는 겁니다. 만일 닭들에게 결정적인 병원균이 돌아 전 세계의 닭이 완전히 몰살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걸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정글 파울로 다시 돌아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정글 파울은 지금 거의 멸종 위기에 놓였어요. 정글 파울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 닭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날로 닭 산업은 끝이 납니다. 우리는 메추리알만 먹어야 되는 거죠.

도 선생님 표현을 빌리면, 이런 동물들이 자유 의지를 잃어버린 동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들의 유전자 다양성이 줄어들고 엄청나게 취약한 동물이 된 거죠. 만일 인간도 자꾸 한 방향으로 우리 유전자들을 몰아가면, 스스로를 무척 취약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 얘길 들으니까 지상의 종 다양성을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 절감하게 됩니다. ‘똑같아지면 죽는다’는 거잖아요? 바이러스의 공격 앞에 속수무책이 되는 거죠. 젖 많이 나는 소, 육질 좋은 소, 고기 근수 많이 나가는 돼지, 이렇게 유전자 조작으로 한 방향을 향해 일렬종대로 세우는 종의 형질을 몰아서 바꿔놓으면 인간에게 한동안은 이익이 되겠지만 문제게 생기면 전멸하는 거군요. 지금 우리 교육도 그 꼴 아닙니까? 모두 대학 입시를 향해 아이들을 일렬로 몰아가니까요. 시골 학교에 가보면 대학에 가겠다는 k이가 세 명뿐인 반에서도 교육은 입시 위주로 진행됩니다.

사상이나 표현, 정치 체제 같은 문화적 다양성도 마찬가징비니다. 하나의 문명이나 문화권, 사회 안에서도 별 녀석이 별 소리 다하고 별 생각 다 해보는 다양성이 유지되어야 문화가 창조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적응성도 그렇고, 모두 같아지면 적응성은 그만큼 약화되죠. 가장 강한 문제는 왕성하게 다양성을 유지하는 문화일 겁니다. 유럽 여행자들이 인상 깊게 보고 오는 것 중에 하나가, 같은 유럽 문명권이고 그 밑바닥에 기독교 문명이 흐르고 있는데 가는 곳마다 도시의 성격이나 특성, 분위기가 다르다는 거예요. 건축에서부터 음악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거기 비하면 우리나라 도시들은 너무 똑같아요. 같아지지 않으면 국가에 대한 반역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죠. 다양성이라곤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내가 처음 제주도에 갔을 때 열대성 식물들을 보고 깜짝 놀랐던 생각이 나요. 못 보던 종 다양성을 거기서 본 거죠. 우리는 국토가 좁아 자연계의 다양성이 그리 높지 못합니다. 그러면 도시들이라도 좀 달라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도시들은 모두 단결해서 한목소리로 합창합니다. “같아지자, 그게 애국이다!”

                                                                                       542~ 543



움베르토 에코가 ‘신의 언어’를 추측해본 게 있어요. 신의 언어는 모음이니 자음이니 하는 식으로 변화무쌍하면 안 되니까 결국 하나의 소리, 필시 하나의 모음만으로 되어 있을 거라고 추측했죠. “아아아아” 또는 “우우우우” 식으로 말이죠. 이렇게 되면 그 아이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밥 먹어라”도 “아아아아”, “자빠져 자라”도 “아아아아”일 테니까요. 언어는 소리의 차이가 없으면 의미를 만들지 못합니다. 최소한 억양이나 템포, 휴지의 차이, 고저장단이라도 있어야 의미가 생산됩니다. “아, 아아아”는 “밥 먹자”, “아아, 아아”는 “어서 자라, 이눔아, 책 그만 보고”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신의 언어는 그런 차이도 내서는 안 되니까 인간과의 소통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내 생각에, 신의 언어가 침묵인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사실 신은 노상 “아아아아”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건 인간이 알아들을 소리가 아니니까 결국 소리도 언어도 아닌 침묵이죠. 인도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어요.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벼락신의 언어는 한 가지 소리로만 되어 있습니다. 이건 그 유명한 ‘다다다(DaDaDa)'예요. ’딱딱딱‘ 벼락 치는 소리죠. 이것도 알아듣기 힘듭니다. 별가은 언제 다다다라고만 말하는데, 그래서 절묘한 번역이 필요합니다. 《우파니샤드》에는 그 번역 기술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닭도 마찬가지죠. 홍콩에서 닭들이 병에 걸렸다고 하면 우리나라도 걱정을 해야 해요. 닭은 원래 동남아시아 숲 속에 있는 정글 파울(jungle fowl)이라는 새에서부터 왔어요. 그 닭을 가축화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여러 종류의 닭들이 있었겠죠. 제가 어렸을 때 시골집에서 할머니께서 닭을 키우셨는데, 저는 여덟 살 때쯤에 이미 어떤 닭이 알을 잘 낳는지를 분명히 알았어요. 매일 제가 들어가서 알을 꺼냈으니까요. 할머니가 제 몸보신을 시켜주시려고 “재천아, 닭 한 마리 잡자” 그러시면, 제가 “할머니, 쟤를 잡아요” 하고 알을 제일 못 낳는 닭을 가리켰어요.

이런 식으로 알을 못 낳는 닭을 잡아먹고 잘 낳는 닭만 남겼기 때문에 전 세계에 있는 닭들이 똑같은 알을 낳으며 같은 품종이 되어버린 겁니다. 소와 마차낙지로 닭들도 황우석 선생님의 도움 없이도 이미 복제된 것이나 다름없는 겁니다. 만일 닭들에게 결정적인 병원균이 돌아 전 세계의 닭이 완전히 몰살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걸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정글 파울로 다시 돌아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정글 파울은 지금 거의 멸종 위기에 놓였어요. 정글 파울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 닭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날로 닭 산업은 끝이 납니다. 우리는 메추리알만 먹어야 되는 거죠.

도 선생님 표현을 빌리면, 이런 동물들이 자유 의지를 잃어버린 동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들의 유전자 다양성이 줄어들고 엄청나게 취약한 동물이 된 거죠. 만일 인간도 자꾸 한 방향으로 우리 유전자들을 몰아가면, 스스로를 무척 취약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 얘길 들으니까 지상의 종 다양성을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 절감하게 됩니다. ‘똑같아지면 죽는다’는 거잖아요? 바이러스의 공격 앞에 속수무책이 되는 거죠. 젖 많이 나는 소, 육질 좋은 소, 고기 근수 많이 나가는 돼지, 이렇게 유전자 조작으로 한 방향을 향해 일렬종대로 세우는 종의 형질을 몰아서 바꿔놓으면 인간에게 한동안은 이익이 되겠지만 문제게 생기면 전멸하는 거군요. 지금 우리 교육도 그 꼴 아닙니까? 모두 대학 입시를 향해 아이들을 일렬로 몰아가니까요. 시골 학교에 가보면 대학에 가겠다는 k이가 세 명뿐인 반에서도 교육은 입시 위주로 진행됩니다.

사상이나 표현, 정치 체제 같은 문화적 다양성도 마찬가징비니다. 하나의 문명이나 문화권, 사회 안에서도 별 녀석이 별 소리 다하고 별 생각 다 해보는 다양성이 유지되어야 문화가 창조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적응성도 그렇고, 모두 같아지면 적응성은 그만큼 약화되죠. 가장 강한 문제는 왕성하게 다양성을 유지하는 문화일 겁니다. 유럽 여행자들이 인상 깊게 보고 오는 것 중에 하나가, 같은 유럽 문명권이고 그 밑바닥에 기독교 문명이 흐르고 있는데 가는 곳마다 도시의 성격이나 특성, 분위기가 다르다는 거예요. 건축에서부터 음악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거기 비하면 우리나라 도시들은 너무 똑같아요. 같아지지 않으면 국가에 대한 반역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죠. 다양성이라곤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내가 처음 제주도에 갔을 때 열대성 식물들을 보고 깜짝 놀랐던 생각이 나요. 못 보던 종 다양성을 거기서 본 거죠. 우리는 국토가 좁아 자연계의 다양성이 그리 높지 못합니다. 그러면 도시들이라도 좀 달라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도시들은 모두 단결해서 한목소리로 합창합니다. “같아지자, 그게 애국이다!”

                                                                                       544



그렇다면 선생님, 다양성의 기준으로 봤을 때 ‘하나이고 유일한 신’은 다양성이 없으니까 다신 체계의 신들보다 열등하다고 말해야 합니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에게 다양성의 능력이 없다면 이처럼 다양한 세계를 만들지 못했을 거 아닙니까? 어쩌면 그의 언어를 인간이 알아듣지 못하니까 다양성의 세계를 자기 손으로 만들어 인간의 눈앞에 펼쳐 보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봐라, 이 세계가 내 메시지다. 알겠느냐?” 게다가 그는 인간에게만 최고로 조직적이고 복잡한 언어를 주고 다른 동물에게는 훨씬 간단하고 덜 복잡한 소통 수단만 주었어요. 그러니까 이 세계의 의미를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고 표현하는 일은 인간의 과제가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언어를 주었으니 무한히 표현하고 떠들고 짹짹거려라. 내 귀가 시끄러워 잠을 설칠 만큼”이라는 거죠. 영국 비평가인 존 웨인은 오래전에 꽤 그럴듯한 소리를 한 적이 있어요. “신의 언어와 짐승의 언어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 그것이 시다”라고 말이죠. 실제로 신의 언어와 짐승의 언어는 아주 비슷한 데가 있어요. 송아지는 늘 ‘움메’라고만 말합니다. 지렁이를 보세요. 그 지 선생, 아니 토룡 선생의 언어는 신의 언어처럼 ‘침묵’입니다. 그래서 시인들이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어보려고 귀를 쫑긋쫑긋 세우는 거 아니겠어요?

히브리의 신은 완벽한 통일성과 동일성의 신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그도 모순투성이입니다. 이랬다저랬다 변덕이 심해요. 그래서 오히려 속이 아주 두텁고 깊은 신이죠. 그 자신은 다양성의 세계를 만들 이유가 없는데 만들었거든요. 그것부터가 모순입니다. 그러나 그런 얘긴 이 자리에서 안 하는 것이 좋겠네요.

                                                                                       546~ 547

제13장 21세기형 인간, 호모 심비우스의 번식을 위하여



종 다양성이 중요한 것처럼 인간 세계에서는 문화의 다양성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화 시대예요. 세계화가 세계의 문화 다양성을 보존하고 높이는가, 아니면 위협해서 점점 다양성 없는 세계르 f만드는가, 이게 요즘 문화적으로는 큰 문제이고 관심사입니다. 세계화가 서로 다른 문화들 사잉의 교류를 증진시킨다고들 말하지만, 고유한 문화들이 잡종화하거나 강대국의 지배적인 문화 형식에 압도당해 소멸의 위기를 맞게 할 수도 있죠. 16세기 이후 서양 열강들은 가는 곳마다 그 지역의 고유한 전통 문화들을 깨어버린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기독교가 비난을 면치 못할 겁니다. 다른 문화들을 지나치게 많이 ‘계몽’해버린 역사를 부정하기 어려워 보여요. 종교로서 기독교가 인류에게 미친 좋은 영향은 몇 번이고 거듭해서 칭송해야 할 것입니다만, 다양성을 최대의 연구 주제로 삼고 있는 제게는 수용하기 대단히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도 그렇지만 다른 문화 전통을 쓸어내버리는 데는 이슬람도 마찬가지였어요. 아랍 이외의 이슬람 국가들인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이란 등은 이슬람이 아니었다가 나중에 개종한 국가들이거든요. 그런데 이슬람이 들어간 지역에서는 이전의 토착 문화들이 사라집니다.


아프가니스탄이 바미안 불상들을 없애버린 것처럼요?


그래요. 모두 없애버려요. 기독교는 지금은 많이 조심하고 있지만, 《구약》에 보면 “내 것이 아닌 것은 다 없애버려라”라는 신의 명령이 나와요. 세계화 시대에는 아무래도 토착 고유문화들이 위기에 봉착할 것 같아요. 역사가 바뀌어 지금 이슬람이 그런 위기를 느끼고 있죠. 이러다가 서양 문화에 밀려서 이슬람이고 뭐고 다 없어지는 것 아니냐는 두려움이 커요. 이런 두려움이 이슬람 근본주의에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다양성보다 동질성이 높아지면 세계는 그만큼 문화적으로 궁핍해집니다.


저는 세계화 문제가 지극히 생물학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굉장히 관심이 많아요. 제 안사람이 음악과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이어서 세계화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눕니다. 개인적으로는 참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상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잖아요. 신문에 나는 것처럼 세계화를 반대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반대한다고 멈출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잖아요.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현상이죠. 현상인 세계화는 벌어질 것이고, 결국 ‘어떻게’가 중요한 이슈로 남는 것이죠.

세계화의 그늘에서 말라죽는 대표적인 문화의 꽃이 바로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도 선생님께서도 지적했듯이 현재 전 세계 인구의 90퍼센트는 그저 100개 남짓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나머지 10퍼센트의 사람들이 무려 6,000개 가량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뜻이죠. 사용 인구가 10만 명 이상인 언어는 기껏해야 600개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 한글은 사용 인구로 볼 때 세계 12위의 위용을 지닌다고 해요. 그런데 유네스코에 따르면 지난 500년 동안 인류 언어의 절반이 절멸했다고 합니다. 언어학자들은 이번 세기가 끝나기 전에 현존하는 언어의 절반이 또 사라질 것이랍니다. 영어의 ‘계몽’에 기여하는 바가 큰 것임을 부여할 수 없죠.


북미 인디언의 경우에는 사용자가 이제 단 하나 사람만 남은 언어도 있습니다. 그 영감이 죽으면 그 언어는 영원히 사라지는 거죠. 캐나다 캘거리 대학 언어학과에 국응도라는 한국인 교수가 계셨는데, 이분은 캐나다 인디언 부족들의 소수 언어를 연구하고 보존하느라 평생을 바쳤어요. 소수 언어들이 아주 없어지지 않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그분이 생각해낸 게 있어요. 문법을 만들어서 보존하자, 그러면 사용자가 없어져도 나중에 다시 언어를 되살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죠. 그래서 이 양반이 인디언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 언어의 문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는데, 그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들었어요. 누가 배우려 드렁야죠. 이런 사람은 유네스코가 ‘두터운 세계’상을 줘야 할 인물이예요. 사회생물학계나 행동생태학(그게 그거지만) 쪽에서도 상을 줄 만할 텐데?

문화도 문화지만, 시장의 세계화도 세계를 얇게 만드는 우리 시대의 크나큰 도전입니다. 시장 그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지만요.

                                                                                       551~ 553



시장은 다양성과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시장에 가면 온갖 것이 다 있다는 게 바로 다양성이죠. 그런데 세계화 시대의 시장은 위험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시장이 오히려 다양성을 죽이는 쪽으로 움직이니까요. 시장근본주의는 ‘시장 가치’ 하나만 내세웁니다. 시장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로 모든 가치를 재단하고 줄을 세우는 거죠. 그러니까 시장 가치가 떨어지거나 없다고 여겨지는 가치들은 설자리가 없어집니다. 사람들이 돈 안 되는 건 만들지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으니까요. 애덤 스미스 시대의 시장과 지금의 시장은 성격이 대단히 다릅니다. 시장의 원칙이 교육과 언론을 포함해서 사회의 공영역과 사영역을 모두 휩쓸면 다양성은 죽습니다. 그래서 시장유일주의적 원칙이 다른 모든 활동 영역들을 장악하고 지배하게 내버려둬서는 안 되는 거죠.

                                                                                       554



섬들이 천천히 연결되어야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전부 하나의 대륙으로 뭉쳐져버린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 있던 유전적인 독특함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무너진 거죠. 이 문제를 생물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생물학은 유전학만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생물학에는 유전학과 환경학, 생태학이 한꺼번에 있어야 됩니다. 유전학적인 생물학으로 생각하면 이렇게 변했다고 해도 전 세계의 남녀가 아무나와 결혼하는 게 아니면, 유전자를 광범위하게 섞는 건 분명히 아니겠죠. 그렇지만 환경적인 것은 다 섞이게 되어 있다는 거죠.

                                                                                       556



미국의 관점에서는 투명하고 빈대 숨을 곳 없는 단층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 세계를 관리하고 미국의 이익을 높이는 데 편리하겠죠. 미국을 위협하는 ‘악’이 숨을 곳 없는 세계를 만들자는 게 부시의 전략입니다. 하지만 그런 투명한 일차원의 세계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에요. 투명해서 좋을 것은 회계 장부뿐입니다. 투명성이란 건 절대적 가치가 이니에요. 19세기 미국 청교도들은 아무도 죄 짓는 사람이 없는 투명하고 깨끗한 사회를 만들고 싶어했어요. 그런데 결과가 뭐냐? 하느님 앞에 모두 투명해지면 참 좋은 사회가 될 줄 알았는데, 웬걸, 그렇게 투명성을 요구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전부 위선자가 됐어요. 교회에 나와서는 다들 투명한 척하지만 뒤로는 호박씨를 까는 거죠. 청교도주의의 사회적 실험은 그래서 대실패로 끝납니다. 아무리 투명성을 강조해도 인간의 가슴은 투명해지지 않아요. 한 자도 안 되 가슴이 사실은 깊은 골짜기거든요. 그 가슴의 골짜기는 신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어둡고 컴컴하고깊어서 하느님의 눈으로도 그 안을 볼 수가 없어요. 신조차도 들여다볼 수 없는 세계, 그게 내가 말하는 ‘두터운 세계’입니다. 인간에게는 그런 두터움, 심연(深淵)이 필요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그런 심연을 가질 권리도 없다면 억울하죠. 생물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하죠?


생태학에 은신처이론(refuge theory)이라는 게 있어요.


도 

도망갈 곳에 대한 이론?


이른바 경쟁 이론이 처음 나왔을 때 러시아 학자 가우스(Gause)가 실험을 했는데, 시험관 안에다 짚신벌레 두 종을 오랫동안 같이 키우면 언제나 한 종이 죽었어요. 경쟁력이 더 큰 종이 끝내 다른 종을 몰아내는 거죠. 그게 소위 ‘경쟁 배제의 원리’입니다. 두 종이 생태적인 요구 조건이 비슷한 경우에는 같은 지역에 공존할 수 없다는 거죠. 그래서 종들은 언제나 서로 원하는 것을 달리 하는 방향으로 진화해갑니다. 이른바 ‘니치(niche)'를 달리 하며 존재하는 것이죠.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모든 동식물이 서로 조금씩 달라진 이유는 상대방하고 똑같으면 둘 중 하나가 멸종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공존하기 위해 서로 다른 니치를 갖도록 변화한 겁니다.

가우스는 경쟁 실험을 끝낸 다음 포식 실험을 했어요. 잡아먹는 놈과 잡아먹히는 놈의 관계를 알아보는 실험인데, 이들을 실험관 안에 함께 풀어주면 궁극적으로 잡아먹는 놈이 상대의 마지막 한 놈까지 다 잡아먹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다 글래스 파이버(glass fiber)라는 섬유질을 넣어주면 잡아먹히는 놈들이 그 틈으로 피신하여 살아남아 번식을 합니다. 그러고 나서 나오면 또 잡아먹히죠. 하지만 그놈은 줄어들면 또 섬유질 틈으로 들어가서 번식을 해서 나오고, 다시 줄어들면 또 들어가서 번식해 나오면서 살아가죠. 더 정확히 말하면 섬유질 속에서 어떤 개체들이 계속 번식을 하고 있고, 그들 중 밖으로 나오는 놈들의 상당수는 잡아먹히는 거죠. 그러니까 자연이 이렇게 복잡해져서 가장 좋은 점은 숨을 데가 있다는 사실이죠.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두터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군요.


숨었다가 또 나오고, 숨었다가 또 나오고 하니까 완전히 다 없앨 수가 없어요. 그래서 다양성이 계속 유지되는 것이죠. 지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게 생태학적으로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숨을 곳을 없애고 나면 궁극에는 하나가 되는 거죠. 미국은 경쟁 상대가 없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가진 자가 되었는데, 그들이 요즘 하는 행동을 보면 베풀기보다는 와넌히 막 나가는 식이에요. “누가 감히 나한테” 하면서요. 생물학자인 제가 생가할 때 동물 사회에서는 그런 식의 사회 구조가 유지돈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저도 굉장히 심취해 있는, 저희 분야에서 새롭게 나오 나온 이론 중에 비대칭 이론(skew theory)이라는 게 있어요. 그래서 지난 2003년에 지금은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제자와 함께 상당히 수학적인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 이론은 한마디로 번식이 너무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면 사회가 붕괴한다는 거죠.

힘이 센 으뜸 수컷이 동네에 있는 암컷들을 모두 차지하면 다른 수컷들이 합심해서 그 으뜸 수컷을 죽여버리거나, 아니면 모두 다 떠나버릴 수 있스니다. 그래서 떠나는 수컷들을 따라 암컷들도 가고 나면, 으뜸 수컷 혼자 남게 되는 거죠. 가장 강한 수컷 하나만 남고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사회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죠. 물론 지금은 지구가 하나니까 미국을 놓고 갈 데가 없어서 난리지만. 어느 집단이나 으뜸 수컷이 자기 번식의 일부를 버금 수컷들 몫으로 떼어줍니다. 그 비율을 계산해보면 흥미롭게도 일관성이 있어요. 지나친 독점 체제는 오래 가지 못해요. 불균형은 반드시 깨지는 데 비해, 적절하게 잘 나누어준 으뜸 수컷은 장기 집권을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내가 언제나 공격받을 수 있다거나, 내가 언젠가 무너질 수 있다는 긴장이 사회 전체를 유지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이런 얘길 했습니다. 제가 언젠가 제 개미 논문의 서두에 인용했던 구절인데, “비겁함이 우리를 평화롭게 만든다”고 말입니다. 지금 미국은 누가 감히 나를 무너뜨리랴 하는 상황이지만, 이건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닙니다.

                                                                                       558~ 560



미국은 세계를 선과 악으로 나누고, 악을 제거한다면서 저렇게 난리를 치고 있지만, 사실 서양에 ‘모순대립물의 공존’이라는 세계관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대립적 성질들이 동일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건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전통에서 나온 거고, 신화전통에서는 모순대립물의 공존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게 신화의 특성이죠. ‘모순의 통일성(coincidentia oppositorum)'이 그겁니다. 서로 모순되는 것, 대립하는 것들이 떨어져 있지 않고 한몸으로 존재하는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래서 신화는 논리학이나 철학과는 다른 차원에 있습니다. 철학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신화에서는 생명이거든요.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적 서구 논리학을 결정적으로 결딴낸 건 현대 물리학입니다. 빛은 입자이자 동시에 파장이다, 이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두 성질의 공존이죠.

불행히도 서양은 한동안 이런 신화적 사유의 전통을 망각하고 있었어요. “적대 세력을 완전히 쳐부수어 소멸시킬 수 없다”는 것이 바빌로니아 신화의 세계관입니다 유대 신화도 사실은 이런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기독교 시대로 넘어오면서 바뀌게 돼요. 악은 완전히 쳐부수어야 하고 소멸시켜야 한다, 완전한 승리는 가능하다는 쪽으로 말입니다. 현대 철학은 고대 신화의 지혜를 이제야 새로 발견하고 있어요. 그 지혜가 모순반대물의 동시적 공존, 반대물의 불가소멸(不可消滅)이라는 세계관입니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절멸시킬 수 없다는 거죠. 절멸되지도 않죠. 부시 선생의 세계관은 이런 지혜를 무시하는 편협한 독선적 기독교 보수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562~ 564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반자연적’이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사실 비버는 강물을 막아서 호수를 만들어요. 그리곤 자기가 만든 그 호수에서 살거든요. 그러니까 비버는 우리 인간의 규모로 보면 굉장한 토목 사업을 하는 것과 같아요. 비버가 파괴하는 자연은 엄청납니다. 강물을 막기 위해서 그 근처에 있는 나무들을 거의 다 자르죠. 물론 엄청나게 큰 나무는 못 건드리지만, 자기가 자를 수 있는 수준의 나무는 상당수를 잘라옵니다. 그렇게 막고 나면 물의 흐름이 달라지죠. 그러면 그 아래쪽 강물에서는 전에 잘 살던 생물들이 다 죽고 맙니다. 우리가 댐을 막아서 하천의 생태계를 망가뜨리는 것 못지않아요. 또 개미도 집을 짓는 등 주변 환경을 아주 많이 바꿔버리죠.

그런 점에서 생각하면 자연을 바꾸지 않으면서 사는 생물이 과연 있을까요? 제 생각으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송충이가 이파리를 갉아먹는 것도 자연을 파괴하면서 살고 있는 거잖아요. 만일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모두가 반자연적이죠. 차이가 있다면, 하나는 “그 파괴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느냐” 하는 규모의 차이가 있을 거고, 그 다음에는 파괴의 성격이랄까 방향 같은 차이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어떤 개미의 경우에는 그 피해가 너무 엄청나서 해충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개미도 있거든요. 잎꾼개미(이파리를 잘라다가 버섯을 길러 먹는 개미)들이 주변에 있는 나무들을 파괴하는 수준은 시로 엄청나요. 한 2~3일이면 웬만큼 큰 나무의 나뭇잎을 몽땅 다 떼어내거든요. 나무가 와전히 발가벗는 것이죠. 이건 엄청난 환경 파괴예요.

그런데 그 개미들이 땅 밑에다 거대한 지하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땅을 뒤엎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것이 땅 속의 영양분을 재순환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잎꾼개미 덕택에 그 주변의 땅이 굉장히 비옥해지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거기에서 또 다른 나무가 커나갈 수 있게 됩니다.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 어느 순간에서 보느냐에 따라 엄청나게 자연을 파괴한다고도 볼 수 있고, 반대로 자연에 도움이 된다고도볼 수 있는 거죠.

그렇다면 인간의 경우는 무조건 파괴적일까요? 어쩌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너무 수가 많아져 통제할 수 업는 수준에 이르러서 그런 것일 뿐입ㄴ다. 저는 인간이 파괴만 일삼는 특별한 동물일 것 같은 생각은 안 들어요. 현대인들은 스스로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 같지만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은 사실 극히 최근의 일입니다. 전 우리를 마물의 영장으로 만들어준 혁명적인 사건은 두 가지라고 보는데, 그 중 하나가 농업혁명이고 다른 하나가 산업혁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농경을 시작한 게 언제입니까? 잎꾼개미는 무려 6,000만 년 전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했지만, 우리가 농사를 시작한 때는 불과 1만 년 전입니다. 우리 현생인류가 이 세상에 등장한 것이 줄잡아 20~25만 년 전이라면,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랍시고 거들먹거린 것은 전체 기간 중에서 최근 5퍼센트 정도밖에 안 된다는 얘깁니다. 그 전의 95퍼센트 동안에는 우리도 그저 별볼일없는 털복숭이 원숭이에 지나지 않았던 거죠.

저는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자연과 공새아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된 것 말입니다. 사실 엄밀히 말해 이 세상에서 우리보다 더 대규모로 자연과의 공생을 실천에 옮긴 동물은 없습니다. 우리가 단지 파괴만 한 동물은 아니라는 거죠. 함께할 줄 알았기 때문에 성공했는데, 성공이 지나치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공생의 지혜를 잃어버린 거예요.

                                                                                       568~ 569



전 가끔 ‘종교와 과학’을 토론하는 모임에 가서 이야기를 하다가(저는 교인이 아닙니다. 안사람을 따라 교회를 20년 넘게 다녔지만, 아직 정식으로 세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는 곳에 이르면 이렇게 말합니다. “결국은 종교에 거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라고요. 그 종교가 반드시 기도교여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말하는 종교란 사실 어떤 교(敎)라기보다는 인간의 윤리적인 감성이랄까 도덕적인 성향이에요. 이것이 결국 어떤 형태로든 우리를 구해주지, 제도적으로 뭔가를 하는 것에는 한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571



기업 집단에도 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윤리적 감성을 가진 개인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개체의 차원에서는 모두 그런 윤리적 감성들을 가지고 있고요. 그런데 집단의 단위로 올라가서 어떤 정책을 결정하고 행동해야 할 때가 되면 개체들의 윤리적 능력은 힘이 쫙 빠집니다. 기업은 이윤을 내야 하는 집단입니다. 시카고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유명한 글이 있어요. 제목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이윤 창출이다”라는 거예요. 기업은 이윤을 내야 하는데, 이를테면 사외 이사 최재천이 일어나서 “아니다, 윤리적 책임이 중요하다”고 말하면 다른 이사들이 박수를 칠까요? 주주들이 최 이사를 그냥 놔두겠어요? 경쟁 업체 사람들은 박수를 치겠죠. 내심 “잘됐다, 저러다 망하지, 어서 망해라” 그럴 테니까요.

사호적으로 이 부분이 문젭니다. 기업체, 정당, 사회단체 할 것 없이 주요 사회 조직들이 조직 내부에서 윤리 수준을 정하고, 그것을 관철할 수 있는 윤리위원회 같은 것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요즘 기업 집단들 중에는 그런 식의 윤리위원회를 둔 곳도 있긴 있더군요. 기업 조직들 자체가 자기 윤리성을 확보하고, 그것을 생산․관리․운영․유통의 영역들에 적용하는 쪽으로 사회적 진화가 일어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572



도 

유전자 속에 도덕적 성향이 있다고 하지라도 그것을 내버려두었을 때보다는 그것이 발현될 가능성을 옆에서 사회․문화적으로 자꾸 자극하고 보상을 해주고 모방하도록 하면 효과가 더 크지 않게어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것이 ‘경쟁력’입니다. 자유 경쟁이란 것은 반드시 공정성과 규칙을 전제합니다. 규칙을 지키면서 경쟁하는 것이 진짜 자유 경재이죠. 그럴 때만 경쟁은 ‘탁월성’을 가려내는 ‘선체제(善體制)’가 됩니다. 그런데 이게 한구에 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라”가 돼요. 규칙이고 뭐고 없어요. 그런 식으로 하자면 축구에서 태권도 선수가 축구를 하는 게 가장 좋고, 어떤 팀은 태권도 선수를 넣어도 되고 어떤 팀은 안 된다는 불공정한 규칙을 정해놓으면 더 좋죠. 이런 무규칙 경쟁의 문화가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도 퍼져서 무조건 이겨놓고 보자는 태도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부정적 모방의 효과죠. 정치판의 ‘개판’이 아이들을 다 버려놓고 있어요. 신문 같은 언론 조직들도 자유 경쟁을 떠들 줄만 알았지 경쟁의 공정성과 규칙의 원칙은 지키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경쟁은 ‘악체제(惡體制)’예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 지켜내는 일이 그래서 아주 중요합니다.

                                                                                       577



지금 우리나라 교육은 망가져 있어요.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시험 점수 제1주의의 무규칙 경쟁 체제가 도입돼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친구고 뭐고 다 거꾸려뜨려야 할 적수로 여겨집니다. 대학에 오면 더하죠. 대학은 성찰하는 인간을 기르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해도 되는가?” 같은 질문은 쓰레기통에 들어간 지 오랩니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가?”도 지금 대학에서는 질문이 아니라 잠꼬대죠. 대학이 이런 질문을 포기해야 경쟁력 있는 인재들을 길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업인들과 정치꾼들이 그래요. 그래서는 민주주의고 경제 발전이고 불가능합니다. 국제 경쟁도 어림없죠. 더러 발전을 이룬다 해도 부정, 부패, 비리 같은 것 때문에 사회는 엄청난 고통과 비용을 치러야 합니다. 나는 역대 문민정부가 어째서 이런 부분에 그렇게 둔감한지 영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최 선생님께서는 교육만으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교육 말고 다른 방법이 또 있을까요?


19세기 영국 사회사상가들이 생각해낸 꾀가 하나 있어요. 인간은 어차피 이기적 동물이다, 그러니 이기주의나 자기중심주의를 버리고 남 생각도 할 줄 아는 윤리적 인간이 돼라고 설교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럼 어째야 하느냐? 사람들이 이기적 성향을 욕만 하지 말고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하라, 그런데 이기적 행동의 결과가 가장 이타적인 것이 되게 유도하라는 게 그 비결입니다. 뒤집어놔도 됩니다. 이타적으로 행동했더니 그게 나한테도 최고로 이익이더라, 기업이 윤리적으로 행동했더니 그게 기업 이윤을 최고 수준으로 올려놨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만들면 된다는 소립니다. “가장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가장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역설이 나오게 말이죠. 민주주의 사상과 제도가 18세기 유럽게 막 퍼져나갈 때, 민주주의에 반대해야 하는 유럽 왕들은 자기들 딴에는 열심히 반대하느라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반대가 되레 민주주의의 확산을 도왔다는 역설이 있습니다. 알렉시 드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써놓이 이야기예요.

이런 역설의 효용이 사회적 지혜가 아닐까 싶어요. 역설의 진실을 사회적으로 최대화하는 겁니다. 바보스런 이기주의자는 자기만 챙기는 사람이고, 뛰어난 이기주의자는 자기 이익을 잘 챙기는 방식으로 남도 챙기는 사람이라고 말이죠. 아니, 이래야겠죠. “이기적으로 행동했더니 그게 바로 이타적인 행동이더라.” 이럴 때 ‘나도 살고 남도 살고’라는 생물학적 공생의 관점이 요긴합니다. 그런 것이 바로 공존의 원칙이고 넓은 의미의 호혜주의가 아닌가 싶어요. 19세기 사상가들이 현대 생물학의 발견의 선취한 걸까요?

                                                                                       578~ 581



인문학적으로는 자살이 어떻게 이야기되나요?


사람이 왜 자살하는가? 뒤르켐의 자살론이 유명하지만 너무 평범하고, 마르쿠제가 프로이트를 비틀어서 내놓은 설명이 생물학적으로 봐서도 좀 참고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생명을 끊는 것은 생명의 부정이 아니라 생명의 더 큰 긍정 때문이라는 게 마르쿠제의 주장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을 살지 못하는 조건에 놓이면 죽어버리는데, 이때 부정되는 것은 생명이 아니라 생명의 지속을 어렵게 하는 사회 조건이라는 겁니다. 생명의 가치를 더 크게 긍정하니까 그 가치고 쪼그라들어야 하는 현실을 정면으로 거부한다는 거죠. 이 설명에서는 자살이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본능적 성향에 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살 유전자 같은 것은 없을지 몰라도 생명의 가치를 지키려는 성향이 유전적으로 전해지는 한 자살은 발생할 수 있다는 통찰을 가능하게 하죠.

그런데 아무리 살기 어렵고 절망적이라 해도 사람들이 다 자살하는 건 아니거든요. 살기 어려우면 더 열심히 살려는 것이 또한 인간이에요. 전쟁 때는 자살자 수가 되레 준다고들 하잖아요? 자살로 이끄는 요인이 생물학적인 것인가, 사회적인 것인가, 병리적인 요인인가. 이렇게 각 차원에서 따져봐야 할 것 같아요. 심리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죠. 최 선생님께서는 프로이트를 싫어하지만, 프로이트의 ‘자살 충동’ 개념에도 쓸 만한 데가 있어요. 죽음은 모든 긴장이 해소되거나 최소화하는 곳이라면 죽음은 그런 니르바나에 해당하죠. 그러니까 풀려날 ‘열반’을 갈구하고, 그래서 죽음으로 이끌린다는 게 프로이트의 주장이죠. 낙원으로의 도주인 셈입니다. 프로이트는 이 개념으로 ‘문명 파괴의 충동’도 설명했어요. 문명의 억압이 고도화되면 사람들은 그 문명을 파괴하러 나선다는 겁니다. 학교에 불을 지르는 아이들을 보면 프로이트가 생각나요.

                                                                                       581~ 583



보노보 사회의 성으로 갈등을 푸는 양식을 좀 배워오면 안 될까요? (하하하) 인간사회에서는 늘 갈등이 발생하는데, 그걸 해소할 마땅한 수단이 없으면 시끄러워지는 거죠. 동물 세계로부터 갈등을 풀어내는 방식을 좀 배울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선생님, 그건 위험한 발상입니다. 우리가 휴머니즘, 인문주의에서 논의를 시작했는데, 동물과 우리가 다른 점은 바로 거기에 있잖아요. 동물 세계에서는 항의조차 없이 희생당하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는 거잖아요. 우리는 인간 한 사람에게 고르게 권리를 부여하고 싶은 거고요. 우리가 인간으로서 추구하고자 하는 가장 고귀한 가치관이라는 게 함께 잘 살아보려고 하고, 누구에게도 헛된 죽음이 가서는 안 된다는 거죠. 보노보의 사회는 언뜻 보기에 평화로운 것 같아도 몇몇 개체만이 제대로 된 삶을 살 뿐, 많은 개체들은 고통을 겪는 사회입니다. 동물 사회는 다 그렇죠.


맞습니다. 드디어 우리 최 교수님께서 인문학자적 발언을 서슴없이 하게 되었군요? 생물학자는 이것도 생물학적이고 저것도 생물학적이라고 일관성 있게 말해야 하는데, 인문학에서는 우선 말이 무척 많아요. 통일된 설명 방식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사회가 동물의 사회와는 다른 특징들을 가진다면 그 특징들은 어디서 나오는가, 인간을 위한 좋은 사회란 어떤 것인가, 이런 것이 인문쟁이들의 관심사입니다.

                                                                                       590~ 591



제가 지금까지 했던 저술활동이 상당히 오해를 받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했던 말들은 사실 인간을 질타하고 동물로부터 배우자는 식은 아니거든요. 저는 인간과 동물을 비교만 했고 판단은 대체로 독자에게 맡겼습니다. 사실 우리가 웬만한 건 동물에게 배울 게 없어요. 대부분의 일에서 우리가 동물보다 잘하니까요. 그런데 기원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는 거죠. 기원을 설명하려면 동물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돌고래 사회에서도 서로 나누어 갖지 않으면 나쁜 놈이 되거든요. 어떤 성질 급한 돌고래 수컷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세치기를 해서 돌고래 암컷과 섹스를 하면 사회적 평판이 나빠져서 돌고래 사회에서 매장됩니다. 도덕성이라는 속성이 진화할 수 있는 조건이 동물 사회 안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거죠. 그러니까 인간의 윤리성의 기원을 찾을 때 동물행동학이 필요할 수 있죠.

                                                                                       593



로버트 액설로드와 해밀턴 선생님이 함께 쓴 《협동의 진화》라는 책이죠. 그는 컴퓨터 상에서 세계 여러 학자들과 게임을 벌였는데, 래퍼포트라는 캐나다 학자가 굉장히 단순한 ‘팃포탯’ 게임 전략으로 가장 높은 점수를 땁니다. 팃포탯은 누구라도 우선 협동을 시작하다가 배신을 당하면 그때부터 협동을 멈추는 지극히 단순한 전략인데, 그 단순한 프로그램이 복잡한 다른 모든 프로그램을 이기더라는 거죠.

해밀턴과 액설로드는 지극히 단순한 데서부터 협동이라는 것이 진화할 수 있다는 과정을 설명했어요. 인류의 싸움은 아마 친족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벌어졌을 거예요. 카인과 아벨 이야기도 있잖아요. 처음에는 도저히 협동할 수 없었는데, 친족 간에 싸움을 많이 하는 집단보다는 서로 싸우지 않고 돕는 가족이 더 발전하는 예들이 많아지니까 차츰 바뀌었다는 거죠. 자원이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싸우지 않고 공생을 결정한 친구들이 궁극적으로 더 성공한다는 겁니다. 지구에서 무게로 볼 때 가장 성공한 생물이 현화 식물이고, 숫자로 가장 성공한 생물이 곤충입니다. 두 생물이 서로 꽃가루받이를 통해 공생하고 협동하여 함께 큰 성공을 거둔 겁니다. ‘너 죽고 나 살자’ 식으로 살아남은 생물보다 서로 돕고 산 생물들이 훨씬 더 잘 살아남았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놓고 보면 진화에서 가장 경계해서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진화의 최정점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우리는 지금 진화의 최정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화의 과정 중에 있죠. 생물 전체의 역사 중에서 인류가 태어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진화도 아주 초기 단계, 혹은 중간 단게에 불과한 거죠. 지금은 경쟁이 최고라고 믿지만, 이 단계를 넘어서서 끼리끼리 돕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우리가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596~ 597. 본문 끝.


감사의 글-최재천


대담 내지 저는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이에 쌓여 있는 ‘눈’을 녹여보려고 끈질기게 군불을 지폈습니다. 도정일 선생님께 때론 버르장머리 없이 마구 대들었습니다. 심지어는 선생님의 평생 학문을 무참하게 폄하하는 짓도 감행했습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자연과학을 하며 품어왔던 인문학에 대한 온갖 혐의들을 들먹이며 선생님을 심하게 취조하기도 했습니다. 신화, 문화적 상상력, 인문정신, 정신분석학 등에 대한 자연과학자의 거친 판결문을 낭독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인문학자 특유의 유연성과 열린 마음으로 저를 품어주셨습니다.

……

첫 만남에서였던가, “서로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의 삶의 제1조가 아닐까”라고 하신 도정일 선생님의 말씀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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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1-14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량이 장난이 아니군요... 정말 공을 많이 들이셨겠어요....
압축독서라는게 독서 자체 보다는 독서 효과를 내면서 다른 목적(논술, 정보 획득 같은)에 더 비중이 있는 듯 하네요..(제 느낌상)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분들은 그냥 책을 읽겠죠. (물론 책을 읽지 않더라도 훌륭한 리뷰로 대체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죠) 독서에는 흥미 없으나, 정보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는 적절하지 못한 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저 긴 글을 과연 읽을까요. 그것조차 귀찮아 할 것 같은데요. ^^; 인터넷 검색으로 얻을 수 있는 '빠른 정보'들을 더 탐닉할 것 같네요.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시간'과 '비용'일테니까요.
그리고 글을 요약하는 분에 의하여 책이 재편집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왜곡의 여지가 있다는 점에 있어서 우려스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제공자의 능력, 의도, 사고에 의존한다는 점도 그렇구요.
무엇보다도 승주나무님의 귀한 시간이 많이 뺴앗기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도 드네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 승주님 개인에게는 치열한 독서방법 같네요.. 대단하십니다.

승주나무 2006-01-14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카로운 지적이십니다. 사실 저는 저의 독서법을 정립시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읽기만 하는 것보다는 읽고 남기는 것이 훨씬 많이 남긴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책에 '압축독서'를 적용할 수는 없지만,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책, 그러니까 두어 번 곱씹어볼 만한 책에 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최근 1~2년간 읽었던 책들이 모두 그런 종류의 책이어서요. 일독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책들이요..

라주미힌 님의 지적처럼 이것은 사람들보다는 제 스스로를 향하는 성격이 짙은 것 같군요. 좀 더 공유할 수 있는 형식을 만들어봐야겠습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라주미힌 2006-01-14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이디를 내고 싶은데, 없네요. 큭...

자신만의 노하우를 쌓고 도전하시는 게 참 보기 좋습니다. 지식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얻으려면 그 만한 투자,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승주님의 방식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독서를 외부로 확장시키는 것은 '토론' 이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데... 논박을 하기 위한 준비과정 그리고 타인의 생각으로 자신의 오류를 수정하고 다듬어 가는 것을 거치면 책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만들어 갈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제는 '좋은 상대'를 만나야 된다는 것.

승주나무 2006-01-14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론'과 '대화'(또는 대담)은 생각의 확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는 데 저도 동감합니다. 그리고 그에 덧붙이자면 하나의 커다란 공동 관심사에 매달려서, 그 분야와 관련된 거의 모든 담론을 벌려보는 겁니다. 도 선생 말을 빌면 '두터운 세계'를 위해서 말이죠. 제 후배 녀석이 인지과학과 물리학을 전공하는데, 요즘 저의 기호인 생물학, 특히 사회생물학과 코드가 맞아 이야깃거리와 책거리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알라딘에서 놀면서 조금 아쉬운 부분은 '클럽'이 없다는 것입니다. 블로그와 클럽은 함께 가야 한는 것 같은데 말이죠. '즐찾멤버' 이외에는 모두 큰바다에 있으니, 누가 나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지 찾기란 참 힘이 듭니다.
이번에 개편한다고 하는데, 여러 가지 콘텐츠가 확보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돈도 많이 번다문서요^^

라주미힌 2006-01-14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자주 들락날락 거리는 것은 일하기 싫어서 그렇습니다... ㅋㅋㅋ..
그리고 지금은 집입니다. ;;; 자야하는데, 웬지 주말에는 잠을 자는게 아까워요.. ^^;
직업은 IT 분야에서 개발자 하고 있습니다..

늦었는데, 주무세요~! ㅎㅎ.. 저도 어쩔 수 없이 잘래요..

승주나무 2006-01-14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잘게요. 근데 내일 오전까지 써야 하는 원고가 4꼭지가 있어서.. 그런 상황인데.. 여기서.. 제가 항상 이런 식입니다.
라주미힌 님과 이야기하다 보니, 제 영역을 찾아냈습니다.
알라딘에는 '꾼'들이 꽤 많은 것 같은데..
대개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것 같습니다.

저의 본래 영역은 기원전 5세기경서부터 A.D.5세기를 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서니 전국책이니 국어니, 헤로도토스니 사마천이니 하는 부분을 자꾸 개발한다면 특화된 상품(?)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네요. 희귀하잖아요.
다만 문제는 제가 요즘 생물학, 생태학 저변에 빠져 있다는 것이죠^^
 
 전출처 : 로쟈 > 웰컴 투 벤야민베가스!

생전에 불우했던 천재 비평가 발터 벤야민(1892-1940) 붐이 일고 있다. 그의 미완의 주저 <아케이드 프로젝트>(새물결, 2005)가 ‘드디어’ 번역/출간됐고(최근에 절반이 나온 이 책의 나머지 절반은 11월에 나온다고 한다), 곧 10권짜리 우리말 벤야민 선집도 연말부터는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바야흐로 ‘벤야민의 세기’가 준비되는 것인가?

 

 

 

사실, 이러한 벤야민 붐은 서양이나 일본 등지에서는 진작부터 시작된 것이므로 특별히 한국적인 현상은 아니다. 우리도 이제 그러한 물결에 발을 담글 수 있게 된 것일 뿐. 해서, 자신이 즐겨썼던 말이지만, 그의 ‘사후의 삶’(afterlife)은 더 이상 불우해보이지 않는다. 비록 “수줍음 많고 숫기 없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자신의 바람대로 20세기 독일 최고의 문학비평가로 평가되는 한편, ‘도시맑스주의’의 선구적 이론가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싱긋 미소를 지을 만도 하지 않을까.

 

 

 

입소문이 아니라 본격적인 번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처음 벤야민이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80년 차봉희 교수 편역의 <현대 사회와 예술>, 그리고 1983년 반성완 교수 편역의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이 출간되면서부터이다(1985년엔 베르너 풀트의 전기 <발터 벤야민>(문학과지성사)이 소개되었다). 이제 25년쯤의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인데, 이 시기 ‘벤야민’의 간판 노릇을 한 것은 아마도 그의 가장 유명한 논문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었다. 해서, ‘벤야민=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란 등식이 통용되던 이 시기의 우리에게 벤야민은 친구인 아도르노에게 영감을 준 문학비평가이자 동시에 매체(미디어) 이론가였다.


벤야민 수용사의 두번째 단계는 1992년 벤야민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박설호 교수의 편역으로 <베를린의 유년시절>(솔출판사)이 출간되면서 시작된다(거기에는 벤야민의 박사학위논문인 <독일 낭만주의에서의 예술비평의 개념>이 포함돼 있었다). 이를 통해서 벤야민의 예술론을 더욱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는 마련되었지만, ‘새로운 벤야민’, 즉 도시 이론가 혹은 도시 ‘관상학자’로서의 벤야민의 모습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단계이다(<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는 물론이고, <베를린의 유년시절>에 실린 ‘발터 벤야민 연보’에도 ‘파사젠베르크’, 곧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관한 내용은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전설로만 남아 있다가 뒤늦게 발견되어 독일에서도 지난 1982년에서야 전집에 묶여 출간될 수 있었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우리말로도 소개됨으로써 우리의 벤야민 수용사는 세번째 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근년에 나온 벤야민 관련서들이 조명하고 있는 것도 대부분 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관련되는바, 한마디로 “발터 벤야민, 도시를 산책하다”를 주제로 하고 있다.


어떤 도시들인가? 나폴리, 마르세유, 모스크바, 베를린, 그리고 파리 등이 그가 산책하면서 읽고/쓰고 있는 주요 도시들, 아니 도시-텍스트(city-as-text)들이다. 현대성의 상징인 이 도시-텍스트들을 재료로 하여 그가 계획했던 것, 하지만 미완으로 남겨놓은 것이 텍스트-도시(text-as-city)라는 ‘유례없는’ 텍스트로서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이다. 우리의 책상머리에 놓여 있는 것 말이다. 이렇게 말을 건네면서: “웰컴 투 벤야민베가스!”(Welcome to Benjamin Vegas!)


여기서 나의 몫은 아직 다 둘러보지도 못한 벤야민베가스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벤야민베가스로 떠나기 위한 간단한 로드맵을 제시하는 것이다(나는 ‘가이드’가 아니라 ‘스토커’다). 무작정 떠나보는 것도 여행의 한 가지 방법이긴 하지만, 뭐라도 한 장 들고 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하기 때문이다. 혹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벤야민의 유태인 세 친구의 ‘보고서’를 길잡이 삼아 미리 훑어볼 수도 있겠다.


아도르노가 쓴 <발터 벤야민의 초상>(<프리즘>, 문학동네, 2004)과 한나 아렌트가 쓴 <발터 벤야민>(<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1983), 그리고 게르숌 숄렘이 쓴 <한 우정의 역사: 발터 벤야민을 추억하며>(한길사, 2002)가 그것들이다(아렌트의 글은 벤야민 선집 <일루미네이션>의 영역본 서문으로도 수록돼 있는데, 이 책의 우리말 번역본은 <문학비평과 이론>(문예출판사, 1987)이다). 물론 이들을 참조하는 건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다(참고로 말하자면, 아도르노의 글은 꽤 난해하다. 아도르노와 숄렘은 1955년에 나온 최초의 <벤야민 전집>(2권)을 편집하기도 했으니 벤야민 생전에나 사후에나 ‘최측근들’이라 할 만하다).

 


 

 

 

 

 

내가 나름대로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샬 버먼의 <발터 벤야민 - 도시의 천사>(<맑스주의의 향연>, 이후, 2001)부터이다. 1996년에 영어로 발간된 벤야민 관련서 세 권에 대한 서평 형식으로 씌어진 이 글은 짤막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벤야민의 전기적/사상적 맥락을 잘 짚어주고 있다. 그러면서 1999년에 발간된 영어본 <아케이드 프로젝트>(하버드대출판부)를 예고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벤야민에 대한 버만의 평가: “나치와 자기 자신의 파멸의 느낌이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 때조차 벤야민은 독자들에게 길거리에서 춤추는 법과 현대 세계에 대한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법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결론: “벤야민이 센트럴 파크에서 춤추기에는 너무 늦었지만, 우리가 춤을 추면서 벤야민을 기억하는 것은 그다지 늦지 않았다.”(348쪽)


‘19세기 세계수도로서의 파리’를 베를린보다도 사랑했던 벤야민이 1940년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하지 않고 미국으로의 망명에 성공했더라면 이후에 ‘20세기의 세계수도 뉴욕’도 사랑하게 됐을까? 자본주의적 환락의 도시, 라스베가스는?(라스베가스에 처음 카지노가 들어선 것은 1941년이라고 한다.) 그런 의문은 ‘도시맑스주의’(Metromarxism)란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지리학자 앤리 매리필드도 던지고 있는데, 그가 짐작하기에 “벤야민이 20세기 후반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 그 역시 전(前) 뉴욕 시장인 줄리아니의 보도(步道) 개혁을 혐오했을 것이고, 노숙자와 노점상, 무단횡단자, 그리고 뉴욕의 노변에서 어슬렁거리는 거주자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에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161쪽)


당연한 일이지만, 매리필드의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시울, 2005)의 한 장은 “자본주의 도시를 세속적 계몽이나 혁명 속의 혁명적인 것인 것으로, 또한 신뢰할 만한 빛의 도시로 평가한 최초의 맑스주의자”, 아니 “아마도 20세기 가장 위대한 도시맑스주의자”, 벤야민에게 바쳐지고 있다(유감스럽게도 우리말 번역본은 많은 오역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맑스주의 연구를 통해 도시를 연구했던 엥겔스와는 달리 도시 연구를 통해서 맑스주의를 연구했던 벤야민의 ‘도시맑스주의’를 그의 전기적 맥락 속에서 명쾌하게 해명하고 있다.   


 

 

 

 

 

각각 ‘도시의 천사’ 벤야민, ‘도시맑스주의자’ 벤야민을 화두로 하고 있는 버먼과 매리필드의 글이 말하자면 워밍업이 되겠다. 거기에 이어서 ‘벤야민과 도시’란 주제에 대해서 보다 포괄적이면서도 자세한 안내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건 그램 질로크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 2005)이다. 특히, 서론과 결론은 전체적인 윤곽을 그리는 데 아주 유용한데, 마치 63빌딩의 전망대 같은 역할을 해준다(유감스럽게도 우리말 번역본은 몇 군데 부정확한 대목을 포함하고 있다).


질로크가 셈하고 있는 벤야민의 도시풍경 연작들은 1924년에 씌어진 <나폴리>를 기점으로 <모스크바>(1927), <바이마르>(1928), <마르세유>(1928), <파리, 거울 속의 도시>(1929), <산 지미냐노>(1928), <북해>(노르웨이의 베르겐시에 대한 스케치, 1930) 등을 포함하며 이들은 ‘사유이미지’로 통칭된다. 물론 19세기 파리에 바쳐진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이 ‘사유이미지’의 총결산이다. 질로크는 이러한 도시풍경을 관상학, 현상학, 신화, 역사, 정치, 텍스트라는 6개의 범주, 혹은 키워드로써 갈무리한다. 

 

그가 보기에 벤야민의 도시풍경은 “맑스주의적 전통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벤야민만의 아주 독특한 방식이다. 벤야민은 현대성과 현대적 삶의 중핵으로서의 도시를 사랑했고 또한 혐오했다. 도시는 그에게 매혹의 대상이자 동시에 구원의 대상이었으며, 천국이자 지옥이었다. 질로크의 표현을 빌면, 벤야민은 ‘걸어다니는 모순’이었는바, 현대성의 비판과 구원이라는 벤야민 텍스트의 힘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그러한 모순 속에서이다.  


질로크의 책을 통해서 벤야민 프로젝트의 전체적인 윤곽에 대한 브리핑을 제공받았다면, 이제는 벤야민의 아케이드, ‘벤야민베가스’를 직접 거닐어볼 차례이다. 여기부터는 수잔 벅 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 2004)를 지참하는 게 좋겠다. 그녀는 벤야민의 프로젝트가 나폴리(남쪽)와 모스크바(동쪽), 베를린(북쪽), 파리(서쪽)라는 네 개의 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본다. 나폴리에 관한 짧은 텍스트인 <나폴리>는 아직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 않지만(이에 대한 해설은 질로크와 매리필드를 참조), 모스크바에 관한 텍스트 <모스크바 일기>(그린비, 2005)는 올해초에 소개된바 있다. 베를린 텍스트를 구성하는 것은 <베를린의 유년시절>과 <베를린 연대기> 등이며(전자가 번역돼 있다), 가장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파리 텍스트가 바로 <아케이드 프로젝트>인 것.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말 그대로 ‘수집가’ 벤야민이 마지막 열정을 다 바쳐서 모아놓은 자료들의 거대한 묶음이자 몽타주 재료들이다. 요컨대, 도시 자체이다(그래서 ‘텍스트-도시’이다). 벤야민이 사랑했던 파리의 아케이드는 현대성의 환상(판타스마고리아)이 가장 극적으로 구현된 매혹의 장소이며, 또한 그러한 환상으로부터 우리가 깨어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횡단)해야 하는 공간이다. 벤야민이 보기에 이 도시의 바깥, 현대성의 바깥에서는 현대성에 대한 비판도 구원도 가능하지 않다. 오직 우리를 찌른 창만이 우리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처럼 도시의 ‘경험’만이 우리를 도시의 환상으로부터 구제해줄 수 있다. 이것이 벤야민의 변증법이며, 그가 우리에게 텍스트-도시의 경험을 제안하는 이유이다. 자, 저것이 우리에게 손짓하는 텍스트-도시, 벤야민베가스의 입구이다. 판돈과 배짱이 충분하다면 한번 들어가 보시라! 나의 동행은 여기까지이다...  

 

 

 

 

 

 

 

05. 08. 20-22.

* 이 글은 북매거진 <텍스트>에 기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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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불처럼 또 한 편의 글을 썼네요. 시간을 들여서 심도 있게 동서양의 논구술 역사를 정리해 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논구술의 역사 - 서양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나니.


서양의 지성사는 빛나는 이성을 통해 신화적 세계관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대립과 반발을 통해 구습을 타파하고 혁신적인 사고방식을 자꾸 발굴해냅니다.


대화의 첫 번째 주인공은 소피스트입니다. BC 5세기 무렵부터 BC 4세기에 걸쳐 그리스에서 활약한 지식인들의 호칭으로 이들이 주로 가르친 과목은 ‘변론술’이었습니다. 즉 '일신(一身)을 위해서나 국가를 위해서 선(善)을 도모하고, 언론이나 행위에서도 유능한 사람이 되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죠. 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가르친 것은, 개인이나 국가에 대해 선이란 이런 것이라는 지혜가 아니라, 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선한 자인 체하는 기술만을 가진 데 불과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대화’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에서 시작합니다. 특히 플라톤은 그의 책을 모두 대화 형식으로 썼으니까 논구술의 혼합이죠.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을 차아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착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묻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전문 분야를 들먹이며 지식을 자랑하지만 결국 ‘아직도 그것은 모른다’라고 하는 무지(無知)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결국 진정한 철학이란 ‘물음’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서양에는 예전부터 살롱(salon)이란 문화가 정착되었습니다. 귀족 부인들이 일정한 날짜에 자기 집 객실을 문화계 명사들에게 개방, 식사를 제공하면서, 문학이나 도덕에 관한 자유로운 토론과 작품 낭독 및 비평의 자리를 마련하던 풍습을 말하죠. 사랑 ·정념 ·재능 ·명예 ·야심 등 인간 본성에 관한 문제들을 즐겨 화제로 삼아 생각과 말을 세련시키던 살롱은 점점 인간성과 도덕에 관한 심도 있는 성찰이 주를 이루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모랄리스트라고 합니다. 서양의 토론 문화가 크게 활성화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살롱에서 연유하는 바가 큽니다.


서양에는 오래 전부터 에세이(essay)라는 장르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수필(隨筆)이나 산문(散文)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에세이는 ‘격식을 갖춘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 이해하자면 논문이나 비평에 가깝습니다. 사고를 논리적으로 전개하면서도 창의적인 표현력과 문장력을 자랑합니다. 여전히 서양에서는 ‘에세이’를 시험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서양의 학생들도 ‘논술 시험’을 보는 걸 알았습니다. ‘에세이 시험’이 우리나라로 따지면 ‘논술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만 논술 시험 본다고 불평할 것은 아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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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무자게 많은 글을 써대네요. 이건 좀 고등학생들이 보기 어려울 것 같은데... 어떠세요? 

 

논구술의 역사 - 동양


논구술의 핵심 키워드는 ‘토론’입니다. 동양은 기나긴 왕권 체제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권위주의적일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동양만큼 활발하게 토론문화가 형성된 곳은 없습니다. 동양은 수천 년 동안 토론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춘추전국시대를 지나면서 봉건적 체제는 완전히 무너지고 새로운 정치체제를 만드는 것이 커다란 과제였습니다. 난세에 영웅들이 많이 나온다는 이야기 많이 들어보셨죠.


세상을 구할 방도를 찾아 오랜 시간 고민하고 수련한 군자들이 세상을 주유하며 올바른 군주를 찾습니다. 그들의 머리에서 법가, 유가, 도가 사상이 굳어졌으며, 정치체제는 강력한 중앙집권으로 변모해갑니다. 진(秦)․한(漢) 제국의 탄생에는 그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권모술수와 임기응변에 능한 전략가도 있었고, 정도를 걷는 도덕주의자도 있었습니다.하지만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온몸을 바친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유세의 성패 여부는 군주를 설득해내는 능력에 있습니다. 군주의 비위에 거슬리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구술 실력이 쟁쟁했다고 할 수 있겠죠. 그 당시에도 구술 시험이 있다면 이들이 1등으로 합격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나라로 가볼까요. 논술의 대표적 시험은 ‘과거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시험은 고려 광종은 958년 중국 후주에서 온 쌍기라는 사람이 제의해 처음으로 실시되었는데, 유교사상에 관한 생각과 능력을 지닌 인재를 등용하여 능력 있는 인재를 고루 등용하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때 보는 시험은 경전을 얼마나 잘 외우는지를 보는 것이 생진과(生進科:小科)였습니다. 그런데 주자학이 정식 교과서로 채택되면서 천편일률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과거시험에는 또 다른 종목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가 보는 논술처럼 시제(試題)를 주고 날이 어둡기 전까지 써서 제출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시험의 주제는 주로 국가적 문제에 대한 진단이나 시문(詩文)을 창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치인의 덕목은 현실 문제에 대한 명확한 입장과 서민들의 애환에 대한 세심히 아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시(詩)를 모르는 사람은 정치가의 자질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온갖 고전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논술 성격과 거의 일치합니다.


시험의 마지막 관문은 시무책(時務策)이었습니다. 이는 "당면한 정치 현안에 대한 국가정책(策)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묻는 시험, 곧 국가의 나아갈 바를 묻는 정치적 관문이자, 왕의 정치 파트너를 고르는 방식이었습니다. "지금 가장 시급한 나랏일은 무엇인가"(광해군)", "처음부터 끝까지 잘하는 정치란 어떤 것인가"(중종), "인재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세종), "정벌이냐 화친이냐"(선조) 등의 질문에서 볼 수 있듯, 책문에서 왕은 당대의 문제를 솔직하게 드러내며 절박하게 물었고, 이에 젊은 인재는 정치적 목숨을 걸고 정면으로 답했습니다. 전국시대의 유세가를 떠올리는 대목입니다. 이와 같은 오래된 기원을 안고 있는 시험이 논구술이므로, 여러분들은 이미 논구술 유전자를 타고났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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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논술캠프'를 엽니다. 그에 대한 여는 글로 써봤는데, 고등학생들이 보기에 어렵진 않나요? 해서 올려 봅니다. 좋은 말씀 부탁드려요...^^ 

 

‘나’에서 ‘나’로 돌아오는 논술 여행



‘여행’은 ‘떠남’이자 ‘돌아오는 과정’입니다. 여행을 간 사람이 아주 떠나지는 않으니까요. 3일간의 논술 여행은 똑같은 일상 속에서 별 감흥 없이 지내던 ‘나’에서 잠시 벗어나는 경험이 될 것입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여러분의 인생으로 보면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자신의 인생관과 공부법, 대입 전략, 사고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공부는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와 가슴으로 동시에 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캠프를 끝내고 나서 생활로 돌아가면, 그 때의 나는 전과는 전혀 다른 ‘나’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여행을 통해서 느끼고 배우고 성숙한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전에 한 가지 약속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관습과 타성, 경직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실, 감춰진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것이 새로운 사고방식인지 궁금하시다구요? 그것은 본질과는 상관없이 왜곡된 진실의 이면을 끊임없이 찾아내려는 노력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습니다.


‘선각자(先覺者)’라는 말을 다 아시죠? 이는 ‘남보다 먼저 사물이나 세상일을 깨달은 사람’을 뜻합니다. 이 말은 ‘맹자’에 나옵니다.


하늘이 이 사람(선각자)을 세상에 나게 한 것은 ‘먼저 안[先知]’ 이로 하여금 ‘나중에 안[後知] 이’를 일깨우기 위함이며, ‘먼저 깨달은[先覺]’ 이로 하여금 ‘나중에 깨달은[後覺] 이’를 일깨우게 하기 위함이다.

天之生此民也 使先知覺後知 使先覺覺後覺也 《맹자》, <만장 상, 7장>


위 말에 의하면 ‘선각자’라는 말의 본뜻은 ‘나중에 깨달은 사람을 일깨우는[覺後覺] 이’입니다. 그렇지만 현대에 와서는 ‘먼저’라는 것에 치중하다 보니, 과열경쟁이 벌어지고, 사회양극화가 생깁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은 그보다 적게 번 사람들을 위해, 배움의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은 그보다 못 배운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 ‘진정한 선각자’의 의미입니다.


세상에는 이처럼 ‘가려진 진실’이 많습니다. 이번 캠프는 ‘가려진 진실’에 대해 반성하고, 그 이면을 밝히는 일을 주로 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캠프가 여러분의 참신한 생각을 일깨우는 기회의 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 캠프 운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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