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사도 - 도킨스가 들려주는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 이야기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무정부적, 혁명적, 정력적, 악마적, 디오니소스적 열정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가득하고, 창조하려는 엄청난 충동으로 넘치는 삶, 그것이 바로 성장과 행복을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의 삶이다

- <온들의 교장 샌더슨의 연설> 중 일부

 

이 책은 내가 읽은 도킨스의 두 번째 책이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이기적 유전자'를 1교시라고 한다면, 이 책은 '쉬는 시간'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확장된 표현형'이나 '눈먼 시계공', 혹은 '조상 이야기' 같은 책으로 넘어갔어야 했다. 그렇지만 소개글에 '대중을 향한 글'이었다는 문구가 '꽂혀서' 이 책을 다음 책으로 선정했다.

 

도킨스가 그리는 다윈 같은 사람은 너무나 수줍음이 많아서, 메모나 서한문을 보지 않고서는 그 사상의 큰그림을 보여주지 않는다. 도킨스는 다윈의 충실한 탐구자로, 시대와 과학수준의 간극을 메워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가 여기저기 기고했던 글들을 일별하는 것으로 그의 '칼럼니스트'의 면모를 볼 수 있게 된다. '대중적 과학자의 대중을 향한 글쓰기'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의 오래된 경서인 '대학(大學)'에 주자 서문을 보면, 옛 선현들이 학문을 하는 원리가 기록돼 있다. 즉 몸소 행하고 나머지를 학문에 정진하며(本之人君躬行心得之餘), 서민들이 일상에서 몸소 행하는 정도를 넘어가지 않는다(不待求之民生日用彛倫之外). 그래서 당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얻어듣지 않을 수 없고, 얻어들은 사람은 자신의 직분에 맞게 소화시킨다. 도킨스가 일상으로 파고든 이유는 그가 믿는 과학관에 잘 설명되어 있다.

 

과학은 무엇이 윤리적인지 판단할 방법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은 개인과 사회가 판단할 문제이다. 하지만 과학은 제기되는 질문들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으며, 판단을 흐리는 오해들을 말끔히 제거할 수 있다. - 본문 중에서

 

그가 볼 때 아직도 세상에는 비과학적 생각이 비과학적 경로를 통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때의 비과학적이라는 말은 전혀 근거가 없거나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뜻한다. 그는 자신의 준거틀을 바탕으로 부딪히는 문제들마다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다. 그가 논쟁에 익숙한 것은 이 때문이며, 다소 도발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즐거운 삶의 비밀은 위험을 무릅쓰며 사는 데 있다 - 니체(본문 중에서)

 

그것은 그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장점이자 단점이 되고 있다. 그러니까 어떤 경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그의 호감도는 '극단적'이고 '명확'하게 구분될 것이다.

 

그가 지니고 있는 또 하나의 신념은 '경직성 걷어내기'이다. 대중적 글쓰기 자체도 그렇고, 대중과 잦은 대면을 시도하는 것 역시 그러한데, 그것은 그의 글에도 여실히 드러나 있다. 시사적인 문제에 대해서 지면을 아끼지 않으며, 그가 사용하는 '독특한 유머'는 순전히 그의 의도 안에 있는 내용물이다. 어느 날 인터넷에 자신이 제안한 단어인 '밈'이 얼마나 인기를 얻고 있는지 검색해본 적도 있다. 거기서 '바이러스 교회'라는 신흥 종교에서 '성 다윈'을 따르는 '성 도킨스'로 우상화되어 있는(사실은 비꼬는) 말을 보고 흠칫했다고 술회한다.

뿐만 아니라 '상상의 동료'나, '마음 근육', '애정 어린 냉소'와 같은 독특하면서도 와닿는 언어 사용법은 그의 유쾌한 성향을 잘 보여준다. 유쾌한 문구를 하나만 들어보기로 하자.

 

125년이 지났으므로, 우리가 지금 접하고 있는 이론이 그가 원래 제시한 이론을 수정한 것이라고 예상하기만 하면 된다. 현대의 다윈주의는 다윈주의에 바이스만주의와 피셔주의와 해밀턴주의를 더한 것이다(거기에 기무라주의와 몇몇 다른 주의들을 덧붙인 것이라고도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다윈의 글을 읽을 때면, 나는 그의 말이 대단히 현대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끊임없이 놀란다. 그는 유전학의 모든 중요한 주제들에서는 심하게 잘못된 견해들을 내놓았지만, 그 외의 거의 모든 것에서는 정답에 도달하는 기이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아마 지금의 우리는 신 다윈주의자이겠지만, ‘신’이라는 접두어를 아주 약하게 발음하도록 하자. - 본문 중에서

 

이 책은 주지하듯이 신문에 냈던 칼럼, 책에 대한 서평, 추도사, 서한문 등 저술가가 일상에서 '글을 써야 할' 모든 지면의 흔적이 담겨 있다. 특히 종교와 권위, 전통과 같은 오래된 문제, 묻어두고 싶은 이야기들을 들춰내 지속적으로 따져 묻는(지면을 아끼지 않으면서) 부분은 가히 '도발적'이라 할 만하다. 뿐만 아니라 '배심제'에 대한 불만도 잔뜩 담아냈다. 토니 블레어 수상이나 찰스 왕세자에 대한 풍자도 삼가지 않으며, 자신의 라이벌인 스티븐 제이 굴드에 대해서는 '공정하고 애정어린 비판'을 가한다. 어느 면을 보더라도 우리는 글 속에서 아련한 애정과 열정, 과학의 공정성에 대한 진한 믿음을 볼 수 있다. 과학을 체화해낸 이 용감한 대변인은 언제, 어느 곳에 가더라도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리라는 믿음이 들 정도이다.

 

저자 서문과 편집자 서문, 역자 서문을 설레설레 읽었는데, 다 읽고 나서 보니 마지막 '딸에게 보내는 편지'가 이 책을 종합하는 부분이라 생각했다. 그 생각에 도달한 자신이 즐겁고 자랑스러웠지만, 머리말에 그런 내용이 있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무의식'이 결정적인 힌트를 준 모양이다. 이 책을 처음 잡은 사람은 앞의 머리말도 좋지만, 맨 마지막의 편을 머리말로 활용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뭐니뭐니해도 내가 도킨스에 가장 감사하는 이유는, '이기적 유전자'를 맨 처음 읽고 나서부터 지금가지 '종의 기원'이나 '대담'과 같이 나랑은 전혀 관계 없을 것 같은 '생물학'(또는 사회생물학)에 흠뻑 빠질 수 있게 한 그의 '대중적 글쓰기' 덕분이었다. 이 '밈'은 국내외의 학자들을 심히 자극시킨 모양이다. 아니면 이렇게 많은 종류의 '생물학' 서적에 내가 '즐거운 비명'을 지를 수 있었겠는가.

 

브로노프스키의 말처럼 21세기는 과연 '생물학의 시대'이다. 수학-물리학-생물학으로 이어지는 과학 정신의 '핵심과목(?)'은 타당하고 장구한 서사를 이루고 있으며, '말과 글'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언어 수단을 '생물학' 또는 '과학'에 초점을 맞춰, 그 거리가 가까워질 수 있도록 매일같이 고심하고 있는 그는 분명 선각자이거나 선각적 지식인이다. 맹자가 그려낸 '선각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깨닫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나중에 깨달은 사람을 일깨우는[覺後覺] 의미의 '선각자' 말이다.

 

하늘이 이 사람(선각자)을 세상에 나게 한 것은 ‘먼저 안[先知]’ 이로 하여금 ‘나중에 안[後知] 이’를 일깨우기 위함이며, ‘먼저 깨달은[先覺]’ 이로 하여금 ‘나중에 깨달은[後覺] 이’를 일깨우게 하기 위함이다.

天之生此民也 使先知覺後知 使先覺覺後覺也 《맹자》, <만장 상,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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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5 1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6-09-26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감사함다^^
 

논문조작, 검색신공으로 밝혀냈다
2006-01-26 14:18 | VIEW : 19,659


아릉아릉=아릉~(브릭) ?
도깨비뉴스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출처를 찾습니다’ 코너와 기타 다른 코너들을 통해 인터넷에 떠도는 기이하거나 신기한 사진들의 출처를 찾아드렸던 ‘아릉아릉’입니다.

온 국민을 실망과 좌절에 이르게 한 ‘황우석 교수팀의 줄기세포’ 문제가 현재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난자윤리와 관련한 각종 문제로 시작되었던 황우석 파문은 연말이 다가오자 ‘논문의 진실성’에까지 그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온갖 음모론과 언론플레이가 난무하고, 황교수를 지지하는 국민들과 이를 비난하는 국민들 사이에는 걱정스러울 만큼 국론분열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또한 과학계를 넘어서 정치사회적인 문제로까지 확대되어 심각한 국가이익의 손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최초 문제 제기
작년 12월 5일 새벽 5시 28분 브릭(생물학연구정보센터, http://bric.postech.ac.kr)에 anonymous라는 누리꾼이 ‘황교수팀 2005년 사이언스 논문 조작 의혹’을 최초로 제기하였습니다. 12월 6일 00시 19분에는 ‘아릉~’이라는 다른 누리꾼이 ‘DNA fingerprinting 데이타’에 대한 의혹을 또다시 제기하게 됩니다. 아릉~은 그날 밤을 새면서 관련 전공자들과 밤샘 토론을 하였습니다. 12월 7일 22시 46분에는 직접 작성한 12페이지짜리의 구체적인 자료를 가지고 다시 그 문제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 날 이후 황우석 교수팀의 줄기세포 문제는 ‘논문 내용의 진실성’에 촛점이 맞추어진 채 해가 바뀌면서까지 치열한 진위 공방을 벌였으며 현재는 조작 주체와 관련 공범들은 누구이며 그 배후 사정은 무엇인가에 대해 검찰이 수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쯤이면 짐작하시겠지만 도깨비뉴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릉아릉’과 브릭의 ‘아릉~’은 동일인입니다. ‘아릉아릉’을 줄여서 ‘아릉~’이라고 닉을 쓰게 되었습니다. ‘아릉~’ 역시 ‘음모론’의 깃털 정도로 지목된 현상황에서 본인에 대한 잘못된 정보들에 대해 나름대로 해명을 하기 위해 기자들의 손이 아닌 직접 글을 적는 것이 가능한 도깨비뉴스를 통해 밝히고자 합니다. 지금부터 제가 브릭을 찾아가게 되었던 이유와 그간의 전개 과정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브릭을 찾게된 계기
저는 지방의 한 국립대에서 생명과학 계열의 박사과정에 재학중입니다. 2005년 사이언스 논문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12월 5일 오후 1시 44분 ‘프레시안’이 보도한 내용이 각종 포털사이트에 실리면서 접하게 되었습니다. 난자윤리 문제가 그토록 오랫동안 문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그 문제에 깊이 있는 관심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때까지 줄기세포 분야에서 두 번이나 세계적인 업적을 내놓아 국가의 위상을 드높였던 ‘황교수팀’이 본연의 연구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이토록 휘둘리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혼란스러웠을 뿐입니다. 또한 모 방송사 프로그램과 해당 방송사를 ‘무릎’ 꿇리도록 한 국민들의 놀라운 힘에 놀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브릭의 anonymous가 제기했던 ‘논문 사진 조작’ 문제는 난자윤리 문제와는 달리 ‘논문’으로 능력의 대부분을 말하는 과학도로서 눈과 귀를 의심하게 만든 실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때까지도 황교수팀의 논문은 전공분야가 아니었기에 내용을 보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학과사무실에 비치해 둔 사이언스 논문의 표지를 보면서 자랑스러워했을 뿐입니다. 2005년 논문을 ‘부록(Supporting Online Material)’까지 자세히 살펴보게 된 것은 12월 5일이 처음이었습니다. 먼저 언론에서 얘기한 ‘사진 조작’이 실제 있었는지 하나하나 확인해 보았습니다. 믿기 힘들었지만 사실이더군요. 줄기세포가 제 전공분야는 아니지만 그 논문에 실린 많은 데이타들을 만들기 위한 기술들 중에는 저와 관련된 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자연스레 눈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DNA fingerprinting 데이타였습니다.


본격적인 문제 제기

본인의 경험과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 바로 보이더군요. 이거 이상하다 싶어서 부록의 내용들도 하나하나 살펴보았습니다. 모두 100건에 달하는 그림들을 일일이 비교하면서 살펴본 결과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기사소재가 나온 ‘브릭’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게시물 이후 무섭게 글들이 올라오더군요. 하루종일 그 게시판에 상주하면서 올라오는 글들을 살펴보았습니다. Anonymous가 제기한 2쌍 이외에 또 다른 사진도 찾아져서 결국 5쌍으로 늘어났습니다.

제가 가진 의문에 대해, 제가 제기할 문제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싶었습니다. 결국 12월 6일 00시 19분에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글을 올린 후 전공자들과 밤을 새면서 토론하였습니다.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들도 많이 계셨는데, 아무래도 글로만 설명하려니까 이해시키기 힘들었습니다. 12월 7일 오후에 문제 제기가 가능한 DNA fingerprinting 자료들을 편집한 뒤 아래한글 파일로 만들었습니다. 문서작성과 간단한 이미지 편집은 10년 넘도록 아래한글을 사용해 왔기에 그다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힘든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날 밤 다시 한번 밤샘 토론을 벌이고자 자료를 올리고 토론을 하게 되었지요. 이 문제제기에 의해 ‘논문 진실성 문제’라는 새로운 화두는 일파만파로 번져나갔고, 더불어 ‘사진 조작’의 증거들이 브릭을 넘어 다른 사이트에서도 계속해서 올라오게 됩니다. 그런 것은 누가 시키는 것도, 누가 배후에 있는 것도 아닌 누리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진 것이지요. 제가 anonymous의 문제제기를 통해 브릭으로 이끌려갔듯이 말입니다. 그곳이 바로 사이엔지(http://www.scieng.net)와 디시 과갤(http://www.dcinside.com)입니다. 자연스레 그곳으로도 발길이 옮겨졌습니다. 일부는 일본의 2ch과 미국의 과학자들이 조작 사진을 발견하게 되고, 이것이 다시 디시 과갤을 통해 공개되었습니다. 브릭 게시판의 경우 첨부파일을 올릴 수 없기 때문에 주로 디시 과갤을 통해 황교수팀의 다른 사진 조작은 물론 미즈메디 자체 논문에서 발견된 조작사진들을 올리거나 혹은 정리해서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였습니다.


‘아릉~’은 ‘특정집단’의 사주를 받고 있다?
브릭, 디시 과갤, 사이엔지 등의 누리꾼들은 논문 조작과 관련한 ‘사실’을 지속적으로 찾아내고 제시하면서 논문의 진실성에 대한 토론을 해 나갔던 데 비해 황교수팀과 이를 지지하는 측에서는 지극히 비상식적인 언론플레이와 각종 음모론을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애초부터 잘못된 방식입니다. 그런 것은 혼탁한 정치판에서나 통용될 방식이라고 봅니다. ‘논문의 진실성’을 논하는데 음모론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특정 개인이나 특정 집단을 무릎 꿇리기 위해 ‘겁’을 주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이 제기하는 수많은 음모론은 오히려 그들 스스로를 편협한 사고의 틀에 가두는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객관적인 상황판단이나 놓여진 사실을 무시한 채 제기하는 음모론은 한번 빠지게 되면 그 속에서 파생되는 새로운 의문들로 인해 더 이상 결론을 얻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그러다 다음 음모론, 또 다음 음모론... 진정으로 황교수팀을 생각하고 황교수팀을 도울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폐기했어야 할 방식이었습니다.

일부에서는 ‘아릉~’은 깃털이고 배후가 따로 있거나 ‘단체’가 일을 벌이고 있다는 의문을 제기합니다만 사실이 아닙니다. 물론 자료의 양이나 이미지 편집, 글 내용의 다양성 등이 그런 오해를 가져올 수 있겠으나, 아래한글, 워드, 그래픽 프로그램, 웹문서 작성 등은 오랜 경험이 있었기에 비교적 쉽게 해 낼 수 있었고, ‘방대한 정보’의 경우 도깨비뉴스에서 보여주는 ‘검색신공’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혼자 했습니다. DNA fingerprinting 데이타에 대한 의혹은 혼자 한 것이 맞고, 그 이후 추가로 나온 사진 조작 문제들은 브릭, 디시 과갤, 사이엔지, 일본 2ch, 미국과학자 들의 공동작업(?)에 의한 것입니다. 아, 그리고, 저 남성입니다.


도깨비뉴스를 찾지 않았던 이유
도깨비뉴스도 황교수팀과 관련한 큼지막한 이슈들로 그 당시 많은 글들이 올라왔습니다만, 전문성이나 내용의 깊이에 있어서 원하는 논의를 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또한 찾아오시는 독자분들의 댓글 역시 격한 감정만을 쏟아내는 글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진득한 논의를 하기가 힘들었지요. 브릭을 찾아서, 브릭에서 논의를 전개하게 된 이유일 수도 있으나 이것은 사이트 특성이기 때문에 제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요.


같지만 같지 않은 게시판, 댓글 문화
현재 대부분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채용하고 있는 ‘게시판’과 ‘댓글’ 문화는 인터넷 강국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의 독특한 문화현상이며, 세계 어느 나라도 갖추지 못한, 훌륭하고 아름다운 인터넷의 소중한 ‘문화자원’입니다. 우리나라만큼 게시판의 종류와 기능이 다양하고 각 게시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곳은 전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게시판’ 문화를 통해 다양한 이슈에 대해 무제한에 가까운 논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고, ‘댓글’ 문화를 통해서는 그 이슈에 대한 실시간적인 반응들을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댓글’ 문화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채용하고 활성화시킨 곳은 디시인사이드(1999년)와 웃긴대학(2000년)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부작용도 아시다시피 만만치 않습니다. 광고, 도배, 그리고 최근 그 심각성이 도를 지나친 악플러 문제... 이번 황교수팀의 줄기세포 파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게시판과 댓글을 통해 쏟아지는 엄청난 정보들 중에서 실제 의미 있는 것은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대다수 포털사이트들이 보여준 댓글들의 수준은 극악에 가까웠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불쾌하게 받아들이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결과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게시판과 댓글’이라는 시스템은 동일하지만 그 곳에 담기는 내용에 따라 ‘옥’이 될 수도 있고 한낱 ‘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댓글 문화에 대한 자정 노력을 강력히 시도하겠다는 포털사이트들의 보도가 있더군요. 사실 어떤 식으로 제재를 하던, 시스템을 일부 바꾸던 도배질과 악플러들은 양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근본적으로는 누리꾼들의 인식이 바뀌어야겠지만 모든 누리꾼들에게 그러한 상식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에 게시판과 댓글에 상주하면서 의견을 개진하는 다른 누리꾼들이 적절히 통제하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것은 ‘게시판 관리자’와는 별도로 여러분들의 몫이지요. 며칠 전 서프라이즈에서도 똑같은 경험을 한 바 있는데, 댓글을 통해 나름대로 처음으로 ‘해명’을 시도했으나 한 누리꾼의 끊임없는 도배로 인해서 그곳을 나와버렸던 적이 있습니다.


‘아릉아릉’으로 활동하다
도깨비뉴스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출처를 찾습니다’ 코너를 통해서였습니다. 제가 다른 인터넷 사이트에서도 ‘상담자’ 역할 비슷하게 댓글을 많이 달고는 합니다. 물론 예전에는 고정닉 없이 그때그때 달랐었지요. 곤란에 빠진 경우나 궁금한 것이 있을 경우 그 해답에 대해 해당 URL을 알려주는 댓글을 달아주었습니다.

2005년 8월 25일 출처를 찾습니다 코너에 ‘캥거루 물고가는 뱀?’이라는 글이 올라왔는데, 이 글에서 CJ맨과 더불어 정확한 출처를 찾아준 Python이 저인데, 이때부터 이 코너를 쭈욱 찾아오고 있습니다.
http://www.dkbnews.com/bbs/view.php?id=findorigin&page=3&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53

주로 신기하거나 기이한 사진들을 도깨비뉴스 편집자분들이 찾지 못해서 따로 모아두는 곳인데, 제 ‘취미’에 딱 맞는 코너더군요. 이후 몇번 다른 글에 유동적인 닉으로 댓글을 달다가 ‘아릉아릉’이라는, 여동생이 키우는 고양이들이 내는 의성어를 고정닉으로 해서 활동하게 되었고, 독자분들이 ‘검색의 신’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시더군요. 현재는 모 방송사의 작가들에게 프로그램 소스를 제공하고 있는데, 요즘은 좀 뜸하네요... *^^*

도깨비뉴스를 만든 김현국 이사는 PC 통신시절 하이텔에서 pctools라는 아이디로 유머작가로 맹활약하신,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분인데, Central Point Software의 대표적인 도스 프로그램인 PC tools와 동일한 아이디를 사용하셨지요. 엽기발랄한 인터넷 사건 사고들을 모아서 사이트를 만드셨기 때문에 예전에도 가끔씩 찾아오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다 덜컥 ‘출처를 찾습니다’ 코너 덕분에 고정적으로 활동하게 되었지요.


검색신공, 나도 할 수 있다!
많은 도깨비 분들이 검색에 특별한 비법이 있느냐, 놀랍다 이런 말씀들을 하시는데 ‘검색’에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 실망스런 대답인가요? *^^*

우선 주제를 비교적 정확하게 잡아내야 합니다.
출처불명의 사진이 주어졌을 때 일단 사진에 붙여진 ‘제목’, 함께 주어진 ‘글내용’을 잘 파악해 둡니다. 사진 속에 들어 있는 숨어있는 ‘힌트’들도 잘 살펴봅니다. 힌트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는데, 글, 숫자, 기타 특이한 사항들을 파악해 두면 나중에 도움이 됩니다. 또 한가지 들자면 사진이 언제 촬영되었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검색엔진이든 특정 게시판에 들어가서 찾든 방대한 인터넷에는 수많은 같은 사진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사진촬영시기를 알아야 보다 정확한 출처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래픽 프로그램이나 기타 플러그인을 이용하면 쉽게 사진의 정보(Exif 정보)를 통해 사진이 언제 인터넷에 등장하게 되었는지 유추할 수 있습니다.

도깨비에 올라오는 사진들은 국내의 대표적인 유머관련 사이트나 포털사이트 등에 반드시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웃긴대학, 오늘의 유머, 개그맨, 디시 인사이드가 대표적이지요. 그리고, 포털의 경우 다음 아고라, 네이버 붐, 엠파스 유행게시판, 야후 재미존 등에 사진 자료들이 풍부하게 있습니다. 간혹 외국의 사진도 올라오는데 그건 조금 다른 기술이 필요하겠지요. *^^*


검색 엔진으로는 구글, 네이버, 엠파스, 야후, 네이트 순으로 찾아봅니다. 검색 엔진마다 각각 특징이 있고, 검색 방법에 따라 특정 카테고리만을 선택해서 할 수도 있는데, 때로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지요. 블로그, 커뮤니티, 이미지, 웹문서, 뉴스 등 다양한 카테고리가 있는데, 사진의 성격에 따라 적절히 취사 선택해야 합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사진을 보면 대략 어느 사이트에 올라온 것일까 짐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100% 그런 것은 아닌데, 이것은 웃대 스타일, 이것은 디시 스타일... 뭐 이런 식입니다. 아마 사이트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성향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결과라고 봅니다. 그리고, 한번에 바로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일단 Exif 정보가 살아 있는 것을 찾는 것이 중요한데 검색엔진에서 그런 것을 찾기만 하면 비교적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쉬운 경우 키워드 몇 개만으로 5분 정도면 찾을 수 있고, 웬만큼 막막한 사진이 아니라면 대개 20-30분만 집중하면 찾을 수 있습니다. 관심이 가는 사진이라면 유사한 주제의 다른 사진들도 함께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지요.

한가지 편견을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은 아무리 처음 본 사진이라도 일단은 이 사진이 ‘합성은 아니다’라는 믿음을 갖고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 사진 속 숨은 힌트를 놓칠 수 있답니다. 합성사진의 경우 검색엔진에서 찾아보면 아무리 재미있어 보여도 많이 퍼져 있지 않습니다. 진짜일 경우에만 쫘~~악 나오는 편이지요. ‘캥거루 물고가는 뱀?’이라는 주제에서도 많은 댓글에 ‘합성이네’라고 단정해 버리시는 분이 많던데, 재미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을 사진을 보자마자 갖게 되셨다면 출처 찾는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사진에 담긴 힌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댓글’입니다. 꼭 최초 출처가 아니더라도 ‘댓글’에는 사진의 정체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단서가 담긴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댓글에서 모든 걸 알아버리기도 하지요.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서 구사하면 70-80% 정도는 찾아낼 수 있습니다. 간혹 ‘단계별 후룸라이드 유형’과 같은 시리즈 사진일 경우 일일이 순서대로 찾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필요한 주제도 있지만... 이 사진의 경우 황교수 지지 사이트에서 ‘아릉~’이가 이런짓 하고 있더라면서 돌려보고 있더군요.


검색신공과 황교수팀 문제가 무슨 관계?
무거운 주제로 시작했는데 뜬금 없이 검색에 관한 얘기가 나와서 뜨악하셨을 텐데, 이런 능력(?)이 황교수팀의 문제를 바라보고 풀어나가는데 개인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팀이다, 배후가 있다라는 터무니없는 억측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하구요. 무슨 말인가 하면, 많은 논문들의 사진들을 서로 비교해서 찾아내고, 학술 관련 자료나 언론에 나오는 수많은 자료들을 정리하고 추적하면서 문제를 풀어나가고 의견을 개진하는데 위의 검색신공 능력이 도움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애초에 ‘팀’이니 ‘배후’니 이딴 것은 없다는 얘기죠. 또한 논문에 관한 최초 제보자는 anonymous라는,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분이고, 아릉아릉(아릉~)은 그 뒤를 따라간 많은 누리꾼 중에 한 명이라는 사실!

황교수팀과 관련한 많은 다른 얘기도 있지만 이 글의 주제는 아릉아릉=아릉~이고 아릉~이 의혹 받고 있는 것들에 대한 해명이기에 여기서 마칠까 합니다.

도깨비뉴스 독자 = 아릉아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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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선생의 강의를 꼭 들어보고 싶습니다. '감옥'에서 '강의'까지, 맑고 밝고 세심한 눈이 문장 곳곳에 배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유용한 정보, 이 책을 미처 구입하실 수 없더라도 신영복 선생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강의'의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주소는 : http://shinyoungbok.pe.kr/

신영복『강의』에서 발췌


저자 서문


내가 본격적으로 동양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무래도 감옥에 들어간 이후입니다. 감옥에서는, 특히 독방에 앉아서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인 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감옥의 독방이 그런 공간입니다. 우선 나 자신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유년 시절에서부터 내가 자라면서 받은 교육을 되돌아보게되고 우리 사회가 지향했던 가치에 대해서 반성하게 됩니다.

                                                                      16


내가 동양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러한 사회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분단과 군사 독재에 저항하면서 열정을 쏟았던 학생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그것도 무기징역이라는 긴 세월을 앞에 두고 앉아서 나 자신의 정신적 영역을 간추려보는 지점에 동양고전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17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방(獄房)에 앉아서 생각한 것이 동양고전을 다시 읽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것에 대한 공부를 해야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건 훨씬 더 현실적인 이유였습니다만 당시 교도소 규정은 재소자가 책을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게 되어 있었지요. 물론 경전과 사전은 권수에서 제외되긴 합니다만, 집에서 보내주는 책은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다 읽은 책을 반납해야 그 다음 책을 넣어주는 식이었어요. 멀리 서울에 계시는 부모님으로부터 책 수발을 받는 나로서는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책에 비해 동양고전은 한 권을 가지고도 오래 읽을 수 있는 책이지요.

                                                                      17


노촌 선생님으로부터 내가 배우고 깨달은 것이 동양고전에 국한된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생각하면 노촌 선생님과 한방에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바깥에 있었더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노촌 선생님은 삶은 어쩌면 우리의 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조선 봉건 사회, 일제 식민지 사회, 전쟁, 북한 사회주의 사회, 20여 년의 감옥 사회 그리고 1980년대 이후의 자본주의 사회를 두루 살아오신 분입니다. 한 개인의 삶에 그 시대의 양(量)이 얼마만큼 들어가 있는가 하는 것이 그 삶의 정직성을 판별하는 기준이라고 한다면 노촌 선생님은 참으로 정직한 삶을 사신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촌 선생님의 삶은 어느 것 하나 당대의 절절한 애환이 깃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지마 그중의 한 가지를 예로 들자면 노촌 선생님을 검거한 형사가 일제 때 노촌 선생님을 검거했던 바로 그 형사였던 사실이지요.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친일파들이 오히려 반민특위를 역습하여 해체시켰던 해방 정국의 실상을 이보다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도 없지요.

                                                                      18 ~ 19


5천 년 동안 단절되지 않고 전승되어 내려오는 문명이 세계에는 없습니다. 이집트만 하더라도 고대 문자 해독이 불가능합니다. 해독에 필요한 모든 자료가 파괴되었기 때문이 피라미드가 파라오의 무덤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는 기록이 없습니다. 전승과 해독에 있어서 세계 유일의 문헌입니다. 그 규모가 엄청날 수밖에 없지요. 고전을 읽겠다는 것은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격입니다.

                                                                      20


먼저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에 이르는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회 변혁기의 사상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사회 변혁기는 사회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담론(談論)이 주류를 이룹니다. 주(周) 왕실을 정점으로 하는 고대의 종법(宗法) 질서가 무너지면서 시작된 춘추전국시대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국가적 목표 아래 군사력, 경제력, 사회 조직에 이르기까지 국력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무한 경쟁 시대입니다. 주 왕실은 지도력을 잃고 대신 중원을 호령하는 패국(覇國)이 등장하게 됩니다. 수십 개의 도시국가가 춘추시대에는 12제후국으로, 전국시대는 다시 7국으로 그리고 드디어 진(秦)나라로 통일되는 역사의 격동기입니다. 이 시기는 흔히 축의 시대(axial era)라고 하여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상의 백화제방(百花齊放) 시대입니다. 처음으로 고대국가가 건설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최대한의 담론이 쏟아져 나왔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석가도 이 시대의 사상가임은 물론입니다. 한마디로 사회와 인간에 대한 근본 담론의 시대 그리고 거대 담론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21 ~ 22


우리가 걸어놓는 화두는 ‘관계론(關係論)입니다.

‘관계론’에 대해서는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From substance-centered Paradigm to Relation-conterde One, 『경주문화엑스포 국제학술회의 논문집』라는 글에서 기본적인 문제 제기를 해두기도 했습니다. 이 서론 부분에서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存在論)’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재성(實在性)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이 자기증식(自己增殖)을 운동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

근대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자본의 운동 원리가 관철되는 체계입니다. 근대사회의 사회론(社會論)이란 이러한 존재론적 세계 인식을 전제한 다음 개별 존재들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關係網)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에 존재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지는 않습니다만, 어쨌든 배타적 독립성이나 개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관계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이 관계론적 구성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여러 주제를 가지고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23 ~ 24


여러분이 영어 공부를 시작한 지가 최소한 10년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어 논문을 쓰거나 영시(英詩)를 짓고 감상할 정도가 되기는 어렵지 않나요? 그러나 과거 우리 할아버지 세대는 4,5년이면 뛰어난 문장력과 시작(詩作) 수준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과학적 방법이나 첩경(捷徑)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우직하게 암기하는 것이 오히려 가장 확실한 성과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지요. 나는 여러분이 마음에 드는 고준 구문을 선택해서 암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

우리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받은 영어 교과서는 I am a boy. You are a girl.로 시작되거나 심지어는 I am a dog. I bark.로 시작되는 교과서도 있었지요. 저의 할아버님께서는 누님들의 영어 교과서를 가져오라고 해서 그 뜻을 물어보시고는 길게 탄식하셨지요. 천지현황(天地玄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는 천지와 우주의 원리를 천명하는 교과서와는 그 정신세계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천지현황과 “나는 개입니다. 나는 짖습니다.”의 차이는 큽니다. 아무리 언어를 배우기 위한 어학 교재라고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26 ~ 27


서양 문화의 기본적 구도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 명제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흄과 칸트의 견해입니다. 서양 근대 문명은 유럽 고대의 과학 정신과 기독교의 결합이라는 것이지요. 과학과 종교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학은 진리를 추구하고 기독교 신앙은 선(善)을 추구합니다. 과학 정신은 외부 세계를 탐구하고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종교적 신앙은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며 사회의 갈등을 조정합니다. 서양 문명은 과학과 종교가 기능적으로 잘 조화된 구조이며 이처럼 조화된 구조가 바로 동아시아에 앞서 현대화를 실현한 저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서양 문명은 이 두 개의 축이 서로 모순되고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 결함이라는 것입니다. 과학과 종교가 서로 모순된 구조라는 것이지요. 과학은 비종교적이며 종교 또한 비과학적이라는 사실입니다.

                                                                      30


서구 문명의 구성 원리에 대한 반성이 주목하는 것이 바로 동양적 구성 원리입니다. 서구 문명이 도덕적 근거를 비종교적인 인문주의(人文主義)에 두었더라면 그러한 모순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성이지요. 동양의 역사는 과학과 모순이 없으며 동양 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 등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문주의적인 가치들로 채워졍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고전 강독에서 확인해야 할 부분입니다.

                                                                      32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해서는 안 되며(不忍人之心),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溫故知新)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에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34


서양에서는 철학을 Philosophy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智)에 대한 애(愛)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양의 도(道)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beaten pass)입니다. 도(道)자의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착(辵)과 수(首)의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착(辵)은 머리카락 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입니다. 수(首)는 물론 사람의 머리 즉 생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도의 어원에 대한 논의도 많습니다. 도(道)는 도(導)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 경우의 도(導)는 이민족의 머리를 손에 지니고 재액(災厄)을 막으며 선도(先導)하여 적지(適地)로 나아가는 의미라고 합니다. 대단히 무서운 글자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도(道)가 도덕적 의미로 사용된 예는 『서경(書痙)』에 와서야 처음 그 용례가 발견되고 있으며, 도의 의미를 철학을 의미하는 이른바 존재에 대한 인식 방식이나 나아가 형이상학적 의미로 발전시킨 것은 장주(莊周) 일파의 철학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원이나 용례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도는 그것이 철학이든 도덕이든 어느 경우에나 도로와 길의 의미입니다. 도는 길처럼 일상적인 경험의 축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서양의 철학과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로댕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을 기억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이 조각은 턱을 고이고 앉아서 묵상하는 자세입니다. 이러한 묵상적인 자세가 상징하고 있는 철학적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진리란 일상적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고독한 사색에 의해 터득되는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란 이미 기성의 형태로 우리의 삶의 저편에 또는 높은 차원에 마치 밤하늘의 아득한 별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그것을 사랑하고 관조하는 구도 속에서 진리는 존재합니다.

이것은 매우 큰 차이입니다.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도재이(道在邇),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과학적 체곙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36 ~ 37


장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서로 조화 통일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조화 통일됨으로써 장이 되고 그래서 최고의 어떤 질서가 됩니다. ‘관계들의 총화’(the ensemble of relations)입니다. 중요한 것은 장을 구성하는 개개의 부분은 부분이며 동시에 총체성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이 집합(集合)과 장(場)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장은 ‘부분적 총체들의 복합체’(the complex of partial totalities)이며 개개의 부분이 곧 총체인 구조입니다.

                                                                      38


동양적 가치는 어떤 추상적인 가치나 초월적 존재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맺고 잇는 관계 속에서 구하는 그런 구조입니다. 동양 사상의 핵심적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인(仁)이 바로 그러한 내용입니다. 인이 무엇인지는 한마디로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논어』에서 그것을 묻는 제자에 따라 공자는 각각 다른 답변을 주고 있습니다만, 인(仁)은 기본적로 인(人)+인(人) 즉 이인(二人)의 의미입니다. 즉 인간관계입니다. 인간을 인간(人間), 즉 인과 인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혹시 여러분 중에 간(間)에다 초점을 두는 ‘사이존재’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존재에 중심을 두는 개념입니다. 동양적 구성 원리로서의 관계론에서는 ‘관계가 존재’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사이존재’와 ‘관계’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지요.

                                                                      41


동양 사상은 가치를 인간의 외부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종교적이고, 개인의 내부에 두는 것이 아니냐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 아닙니다. 동양학의 인간주의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인간을 배타적 존재로 상정하거나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는 인본주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어떤 질서와 장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전체입니다.

                                                                      42 ~ 43


노장(老莊)을 중심으로 하는 도가는 기본적으로 자연주의입니다. 자연을 최고, 최량의 질서로 상정하고 있다는 것은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자연이 가장 안정적인 시스템이라는 것은 생명의 역사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고 지구과학의 역사가 임상학적으로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자는 자연을 최고의 자리에 두는 것이지요.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것이지요.(人法지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 대하여 무위무욕(無爲無欲)할 것을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만과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는 유가의 인본주의를 견제하고 그 좌절을 위로하는 종교적 역할을 도가가 맡고 있는 셈입니다.

……

사상이란 다른 사상과의 모순 관계에 있을 때 비로소 사상으로서의 체계가 완성됩니다.

                                                                      44


21세기를 시작하면서 많은 미래 담론들의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에 대한 객관적 전망이 아니라 자기의 입장에서 각자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한 소망이 전망의 형식을 띠고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래 담론은 대부분이 20세기의 지배 구조를 그대로 가져가겠다는 저의를 내면에 감추고 있습니다.

                                                                      45


고전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어쩌면 오늘날처럼 속도가 요구되는 환경에서 너무나 한가롭고 우원(迂遠)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가 쌓아가고 있는 모순과 위기는 근본 담론을 더욱 절실하게 요구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입니다.

                                                                      47

제2장 오래된 시(詩)와 언(言)



원래 『시경』에 실려 있느 ㄴ시들은 가시(歌詩)였다고 합니다. 악가(樂歌)지요. 시(辭)+노래(調)+춤(容)이었다고 전합니다.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정의(情意)가 언(言)이 되고 언(言)이 부족하여 가(歌)가 되고 가(歌)가 부족하여 무(舞)가 더해진다고 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말로도 부족하고 노래로도 부족해서 춤까지 더해 그 깊은 정한의 일단이나마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악곡(樂曲)은 없어지고 가사(歌詞)만 남은 것입니다.

                                                                      55


『시경』의 시는 약 3천여 년 전의 세계 최고(最古)의 시입니다. 은말(殷末) 주초(周初)인 기원전 12세기 말부터 춘추(春秋) 중엽인 기원전 6세기까지 약 600년간의 시(詩)와 가(歌)를 모아 기원전 6세기경에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경』은 중국 사상과 문화의 모태가 되고 있습니다. 『시경』은 제후국 간의 외교 언어로 소통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공통 언어가 성립되고 나아가 중국의 문화적 통일성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라의 기강이 어지러워지고 민중적인 정신이 피폐해지면 고문운동(古文運動),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 등 문예 혁신 운동을 벌여 민중 정서에 다가서기를 호소합니다.

                                                                      56


만리장서은 동쪽 산해관에서 사쪽 가욕관에 이르는 장성입니다만,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은 산해관의 망루에서 1km 정도 떨어진 발해만의 노룡두인데 이곳에 맹강사당(孟姜祠堂)이 있습니다. 맹강녀(孟姜女)의 한 많은 죽음을 기리는 사당입니다. 맹강녀의 전설은 이렇습니다. 진시황 때 맹강녀의 남편 범희양이 축성(築城) 노역에 징용되었습니다. 오랫동안 편지 한 장 없는 남편을 찾아 겨울옷을 입히려고 이곳에 도착했으나 남편은 이미 죽어 시골(屍骨)마저 찾을 길 없었지요. 당시 축성 노역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이 죽으면 시골은 성채 속에 묻어버리는 것이 관행이었다고 합니다. 맹강녀가 성벽 앞에 옷을 바치고 며칠을 엎드려 대성통곡하자 드디어 성채가 무너지고 시골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맹강녀는 시골을 거두어 묻고 나서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것이지요. 맹강녀 전설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성채가 무너지고 시골이 나오다니 전설은 전설입니다.

그러나 사실과 전설 가운데서 어느 것이 더 진실한가를 우리는 물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사실보다 전설 쪽이 더 진실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학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의 내면을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어떤 혼(魂)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61 ~ 62


모시(毛詩)에서는 “위정자(爲政者)는 이로써 백성을 풍화(風化)하고 백성은 위정자를 풍자(諷刺)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초상지풍초필언(草上之風草必偃)’,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는 것이지요. 민요의 수집과 『시경』의 편찬은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한다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백성들 편에서는 노래로써 위정자들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풀은 눕지 않을 수 없지만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선다는 의지를 보이지요. ‘초상지풍 초필언’ 구절 다음에 ‘수지풍중초부립(誰知風中草復立)’을 대구로 넣어 “누가 알랴,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는 것을”이라고 풍자하고 있는 것이지요.

                                                                      62 ~ 63


「박달나무 베며」(伐檀)는 고도의 문학성과 저항성을 잘 조화시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차 영차 박달나무 찍어내어 물가로 옮기세.

아! 황하는 맑고 물결은 잔잔한데

심지도 거두지도 않으면서 어찌 곡식은 많은 몫을 차지하는가.

애써 사냥도 않건만 어찌하여 뜨락엔 담비가 걸렸는가.

여보시오 군자님들 공밥일랑 먹지 마소.


『중국역대시가선집』의 서문에서 밝혔습니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지금까지 우리나라에는 중국 시가의 전통이 잘못 소개되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조선 사회의 지배 계층인 양반의 시각과 계급적 입장에 의하여 시가 선별적으로 소개되어왔다는 데 가장 큰 원인이 있습니다. 『시경』에는 위에서 소개한 것과 같은 저항시의 노동가요가 대단히 많이 실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풍여월이 시의 본령처럼 잘못 인식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편향된 여과 장치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전통과 선입견 때문에 우리는 매우 귀중한 정신세계가 왜곡되어왔다고 생각합니다. 시의 세계와 시적 정서, 나아가 시적 관점은 최고의 정신적 경지라고 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63 ~ 64


시적 관점은 우선 대상을 여러 시각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동서남북의 각각 다른 지점에서 바라보게 하고 춘하추동의 각각 다른 시간에서 그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결코 즉물적(卽物的)이지 않습니다. 시의 관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로운 관점은 사물과 사물의 연관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한마디로 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위한 관계망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를 읽고 시적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64 ~ 65


오늘의 현대시는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 한둘이 아니지요. 시인이 자신의 문학적 감수성을 기초로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감수성이 주로 도시 정서에 국한되어 있는 협소한 것이라는 것도 문제이지요. 시인은 마땅히 당대 감수성의 절정에 도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 경험 세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방 정국에서 대단한 문명을 떨친 임화(林和)라는 시인이 있었지요. 「네거리 순이」, 「적기가」 등 많은 시가 애송되었습니다만, 임화는 항상 두보 시집을 가지고 다녔다고 전해지지요. 임화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인들 대부분은 문학적으로 호흡하는 세계가 매우 넓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5 ~ 66


『서경』은 2제(요,순)3왕(우와, 탕왕, 문왕 또는 무왕)의 주고받은 언(言), 즉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유가의 경전이 되기 전에는 그냥 『서』 또는 『상서(尙書)』라고 했습니다. 중국에는 고대부터 사관에 좌우(左右) 2사가 있었는데 좌사(左史)는 왕의 언(言)을 기록하고 우사(右史)는 왕의 행(行)을 기록했스빈다. 이것이 각각 『상서』와 『춘추』가 되었다고 합니다. 천자의 언행을 기록하는 이러한 전통은 매우 오래된 것입니다. 그리고 동양 문화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사후의 지옥을 설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구속력이 강한 규제 장치가 되고 있습니다. “죽백(竹帛)에 드리우다”라는 말은 청사(靑史)에 길이 남는다는 뜻입니다. 자손 대대로 그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것은 대단한 영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67


사마천은 『사기』에서 『서경』을 평하여 정(政)에 장(長)하다고 하였지요. 『서경』에는 수많은 정치적 사례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에 정통하게 되면 정치력을 높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서경』, 『춘추』와 같은 기록 문화는 후대의 임금들이 참고할 수 있는 사례집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 어떠한 제도보다도 강력한 규제 장치로 작용하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처럼 기록으로 남기는 문화 전통은 농경민족의 전통이라고 합니다. 농경민족은 유한 공간에서 반복적 경험을 쌓아 문화를 만들어냅니다. 땅이라는 유한한 공간에서 무궁한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 과거의 경험이 다시 반복되는 구조를 터득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과거에 대한 기록은 매우 중요한 문화적 내용이 됩니다.

                                                                      68


중국의 전통에 이러한 기록의 문화가 있다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지만 이러한 기록이 보전되고 부단히 읽히는 것도 매우 드문 일입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난 후에 서적을 불사르고 학자들을 매장하는 문화적 탄압, 이른바 분서갱유를 하게 되지만 그는 무엇보다 천하 통일 사업의 일환으로 중국의 문자를 통일합니다. 이 문자의 통일은 엄청난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고대 문자와 고대 기록의 해독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위치우위는 그의 『세계문명기행』에서 시저가 이집트를 점령하고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도서관과 『이집트사』를 포함ㅎ나 장서 70만 권을 소각한 사실, 그리고 그로부터 400여 년 후 로마 황제가 이교(異敎)를 금지하면서 유일하게 고대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던 이집트 제사장들을 추방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 사회의 고대 문자 해독 능력이 인멸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사에 있어서의 기록의 의미는 훨씬 더 커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몇천 년 전의 기록이 마치 며칠 전에 띄운 편지처럼 읽혀지고 있는 유일한 문명이라는 것이지요.

                                                                      68 ~ 69


周公曰 嗚呼 君子 所其無逸

先知稼穡之艱難 乃逸 則知小人之依

相小人 厥父母 勤勞稼穡

厥子 乃不知稼穡之艱難 乃逸 乃諺 旣誕

否則 侮厥父母曰 昔之人 無聞知 - 周書, 「無逸」


군자는 무일(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稼穡)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는지(小人之依)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

1957년과 1980년대에 대대적으로 실시되었던 하방운동(下放運動)의 사상적 근거가 바로 이 무일 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하방 운동은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당 간부, 정부 관료들을 농촌이나 공장에 내려보내 노동에 종사하게 하고 군 간부들을 병사들과 같은 내무반에서 생활하게 함으로써 현장을 체험하게 하는 운동이었지요. 간부들의 주관주의(主觀主義)와 관료주의(官僚主義)를 배격하는 지식인 개조 운동으로, 문화혁명 기간 동안 1천만 명이 넘는 인원이 하방 운동에 동원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무일」편은 주공의 사상이나 주나라 시대의 정서를 읽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편을 통해 가색(稼穡)의 어려움, 즉 농사일이라는 노동 체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생산 노동과 유리된 신세대 문화의 비생산적 정서와 소비주의를 재조명하는 예시문으로 읽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한마디로 무일은 불편함이고 불편은 고통이고 불행일 뿐이지요.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8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70 ~ 72


개국 초기의 권력관계가 매우 복잡했습니다. 무왕이 동생 주공을 노(魯)나라에 봉했지만 아직 나라가 안정되지 않을 때여서 주공은 아들인 백금(伯禽)을 대신 임지로 보내고 자기는 남아서 계속 무왕을 보좌해야 했습니다. 당시 72제후국 중 희(姬)씨가 55개국으로 압도적으로 장악했지만 여(呂)씨가 17국으로 만만치 않은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어요. 원래 주나라는 서쪽에 있던 산간(山間)의 제후국이었는데 남하(南下)하여 위수(渭水) 평야로 이동하고 문왕(文王) 때에 태공망 여상(呂尙)을 얻어 강대해졌다고 하는데 그것이 곧 강족(姜族)과 주족(周族)의 연합이었음은 물론입니다. 17세기 제후국을 장악한 여씨가 바로 여상의 강족입니다. 여상은 문왕과 연합하여 그 세력을 확장하고 결국 무왕 때에 이르러 온나라를 무너뜨린 것이지요. 이 여상이 바로 강태공(姜太公)입니다. 문왕을 만나기까지 곧은 낚시를 강물에 던져두고 세월을 낚고 있었다는 강태공이지요. 병법과 지략에 뛰어난 전략가로서 육도삼략(六韜三略)의 저자이며 무왕의 장인이기도 합니다. 강력한 정치 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력을 변방인 산동성으로 거세시킨 것도 모두 주공의 정치적 수완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뿐만 아니라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한 후 마지막 임금 주(紂)의 아들 무경녹부를 후(侯)로 책봉하여 은나라 유민(遺民)을 그에게 복속시켰습니다. 은나라 유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왕은 그의 두 동생 관숙선과 채숙도를 무경에서 사부로 붙였는데 무왕이 죽자 무경과 두 동생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주공은 성왕의 명을 받들어 동생인 관숙선을 죽이고 채숙도를 추방합니다. 그리고 은나라 유민을 모아 주(紂)의 형인 미자(微子)를 따르게 하고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 부근인 송(宋)에 나라를 세우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미자는 송의 시조가 됩니다. 송은 은나라를 계승한 주나라의 제후국이 된 것이지요. 이 송나라와 인접한 나라가 공자의 나라인 노나라이며 이 노가 바로 주공이 봉해진 제후국입니다.

                                                                      72 ~ 73


레닌은 『우리는 어떤 유산을 거부해야 하는가?』라는 저서에서 역사 공부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계승할 것인지를 준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을 피력했지요. 나는 이 「무일」편에서는 오히려 우리가 역사를 읽으면서 무엇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고전 독법은 물론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당시 사회의 문제의식으로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떠한 시대나 어떠한 곳에서도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는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일」이 바로 그러한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나는 이 「무일」편이 무엇보다 먼저 효율성과 소비문화를 반성하는 화두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능력 있고 편안한 것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을 반성하는 경구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노르웨이의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정어리를 저장하는 탱크 속에 반드시 천적인 메기를 넣는 것이 관습이라고 합니다. 천적을 만난 불편함이 정어리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무일」편을 통해 불편함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씹어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75 ~ 76


‘석지인무문지’(昔之人 無聞知)에서 노인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업신여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세태였음을 느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IMF 사태 이후 구조 조정 과정에서 퇴직 연령이 낮아지면서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물론 변화의 속도가 빠를수록 과거의 지식이 빨리 폐기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노인들의 위상이 급속히 추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것은 사회가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조로화(早老化)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낭비이면서 역사 경험의 낭비입니다. 물론 ‘도시 유목민’이 정보화 사회의 미래상이라는 전망이 없지 않습니다. 농본 문화에서 유목 문화로 전환되는 과정이 현대라는 것이지요. 노인 퇴출은 그러한 전환기의 부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유목 문화에서는 과거의 경험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동일한 공간에서 반복적 경험을 쌓아가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단히 새로운 초원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노인들의 경험 문화는 주변화되고 청년들의 전위문화(前衛文化)가 주류로 자리잡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류의 정신사는 어느 시대에나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미래를 모색해가게 마련입니다. 농본 사회에 있어서 노인의 존재는 그 마을에 도서관이 하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어요. 노인들의 지혜와 희생이 역사의 곳곳에 묻혀 있습니다. 할머니 가설(Grandmother Hypothesis)이 그렇습니다. 할머니들은 자기의 자녀가 아니라 자기의 자녀가 낳은 자녀 즉 손자손녀를 돌보고 자녀 양육에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을 전수함으로써 가족 집단을 번창시켰다는 것이지요.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약 3만 년 전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크로마뇽인)는 그 이전의 네안데르탈인에 비하여 노인층의 비율이 급증한 시기는 바로 폭발적인 인구 증가가 있었던 시기였으며 인류가 장신구를 사용하고 동굴벽화를 그리고 장례 행위를 시작할 때와 일치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나이 든 세대의 경험과 역할이 현생인류의 양적 팽창과 질적 발전을 가져온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할머니 역할은 그 사회적 의미에 있어서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지요.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76 ~ 77


新沐者는 必彈冠이오 新浴者는 必振衣라 하니


滄浪之水가 淸兮어든 可以濯吾纓이오

滄浪之水가 濁兮어든 可以濯吾足이로다


나는 굴원의 이 시를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 오래된 주제에 대한 굴원의 결론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입니다. 비타협적 엘리트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같이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굳이 이야기한다면 대중노선을 지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감옥에서 만난 노선배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좌경적이라는 의미는 ‘신목자 필탄관(新沐者 必彈冠) 신욕자 필진의(新浴者 必振衣)’처럼 비타협적인 원칙의 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경적이라는 의미는 맑은 물에는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는 발을 씻는다는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오래된 과제를 마주하는 느낌입니다.

                                                                      81 ~ 82


중국 역사에서는 남과 북이 싸우면 언제나 남쪽이 집니다. 중국의 전쟁사는 언제나 남의 패배와 북의 승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기후가 온화하고 물산이 풍부한 남방인들의 기질이 험난한 풍토에 단련된 북방의 강인한 기세를 당하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싸움에 지는 것을 패배라고 하고 그것을 ‘敗北’라고 씁니다. 북(北)에게 졌다(敗)고 쓰는 것이지요.

                                                                      83


제3장 『주역』의 관계론


『주역』에 담겨 있는 사상이란 말하자면 손때묻은 오래된 그릇입니다. 수천년 수만년에 걸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낸 틀입니다. 그 반복적 경험의 누적에서 이끌어낸 법칙성 같은 것입니다.

                                                                      87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敬畏)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神)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점을 치는 마음이 그런 겸손함으로 통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ㅗ. 그래서 점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

『서경』「홍범(洪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의난(疑難)이 있을 경우 임금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묻고, 그 다음 조정 대신에게 묻고 그 다음 백성들에게 묻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의난이 풀리지 않고 판단할 수 없는 경우에 비로소 복서(卜筮)에게 묻는다, 즉 점을 친다고 하였습니다. 임금 자신을 비롯하여 조정 대신,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지혜를 다한 다음에 최후로 점을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괘와 백성들의 의견과 조정 대신 그리고 임금의 뜻이 일치하는 경우를 대동(大同)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대학의 축제인 대동제(大同祭)가 바로 여기서 연유하는 것이지요. 하나 되자는 것이 대동제의 목적이지요.

『주역』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구성된 지혜이고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기초로 미래를 판단하는 준거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역』은 귀납지(歸納知)이면서 동시에 연역지(演繹知)입니다. 『주역』이 점치는 책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의 누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어내고 이 법칙으로써 다시 사안을 판단하는 판단 형식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 형식이 관계론적이라는 것에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중국 역사를 사상사적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크게 구분합니다. 공자 이전 2500년과 공자 이후 2500년이지요.

공자 이전은 2500년은 점복(占卜)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 이후의 시기는 『주역』의 텍스트(經)에 대한 해석(傳)의 시대입니다.

                                                                      89 ~ 91


나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집터보다 집이 크면 그 터의 기氣가 건물에 눌립니다. 고층 빌딩은 지기地氣를 받지 못하는 건축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 땅에 건물을 너무 많이 쌓아놓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뉴욕이나 도쿄 역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터와 집의 관계뿐만 아니라 집과 사람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집이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집에 눌립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보다 조금 작은 듯한 집이 좋다고 하지요.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 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30 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70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되겠지요.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한 나라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잘못된 사람이 차지하고 앉아서 나라를 파국으로 치닫게 한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능력과 적성에 아랑곳없이 너나 할 것 없이 ‘큰 자리’나 ‘높은 자리’를 선호하는 세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70%의 자리’가 득위得位의 비결입니다.

                                                                      101 ~ 102


아무튼 『주역』에서는 중간을 매우 좋은 자리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가장 힘 있는 자리로 칩니다. 막상 가장 위에 있는 제6효인 상효는 물러난 사람에 비유합니다. 그래서 음효가 음의 자리에 양효가 양의 자리에 있는 것을 정正이라고 하면서도, 가운데 효 즉 중中이 득위했는가 득위하지 못했는가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따라서 음 2효와 양 5효는 중이면서 득위했기 때문에 이를 중정中正이라 합니다.

중정은 매우 높은 덕목으로 칩니다. 아마 여러분은 ‘중정’이란 현판이나 붓글씨를 많이 보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중정이지만 양 5효를 더욱 중요하게 봅니다. 음 2효가 하괘를 주도하는 효임에 비하여 양 5효는 상하 괘 전체의 성격을 주도하는 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주역』 사상에서는 위보다 응을 더 중요한 개념으로 칩니다. 이를테면 ‘위’의 개념이 개체 단위의 관계론이라면 ‘응’의 개념은 개체와 개체가 이루어내는 관계론입니다. 이를테면 개체 간의 관계론이지요. 그런 점에서 위가 개인적 관점이라면 응은 사회적 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보다는 상위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위失位도 구咎요 불응不應도 구咎이다. 그러나 실위이더라도 응이면 무구無咎이다”라고 합니다.

                                                                      103 ~ 104


효가 처하는 위치 즉 아래위에 있는 효와의 관계에 따라서 그 명칭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르는 이름마저 달라지는 것이지요. 당연히 그 성격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음효 위에 있는 양효 즉 양재음상陽在陰上인 경우를 거據라고 하고 그 의미는 공제控制입니다.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음효가 양효 아래에 있는 경우는 승承이라 합니다. 즉 음재양하陰在陽下인 경우를 승이라 하고 그 의미는 순종입니다. 그리고 같은 음효라 하더라도 그것이 양효 위에 있을 때 즉 음재양상陰在陽上일 때 승乘이라 호칭하고 그 의미를 반상反常 즉 역逆으로 읽습니다.

                                                                      105 ~ 106


『주역』의 이러한 관계론적 사상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가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공자학파의 철학적 성과라고 설명되기도 합니다. 공자학파가 십익을 이루어놓음으로써 복서미신의 책이 비로소 철학적 내용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장의 서두에서 이야기했습니다만, 점占은 상相이나 명命처럼 이미 결정되어 있는 운명을 엿보려는 것이 아니라 의난疑難을 당하여 선택과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역』이 복서卜筮라고 하더라도 단순한 미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점이라고 하는 것 역시 그 본질에 있어서는 어떤 현상과 상황을 우리들의 일상적 관점과는 다른 논리로 재해석하고 조명하는 인식 체계입니다. 그것 역시 사물과 변화에 대한 판단 형식의 일종이며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철학적 구조를 띠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역』 사상에 담겨 있는 관계론의 철학적 내용을 특정 학파의 철학적 성과라고 할 수 없는 것이지요.

                                                                      106 ~ 107


  태괘는 주역 64괘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괘라고 합니다. 하늘의 마음과 땅의 마음이 화합하여 서로 교통하는 괘입니다.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는 모양은 물론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자연의 형상과는 역전된 모양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태화泰和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하늘의 기운은 위로 향하고 땅의 기운은 아래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만난다는 이치입니다. 서로 다가가는 마음입니다.

                                                                      109


천지가 뒤바뀐 모양을 태화의 의미로 풀이하는 까닭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주나라는 이미 이야기했듯이 쿠데타로 건국된 나라입니다.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세운 나라입니다. 그래서 지천태괘를 태화의 괘로 풀이하는 것은 역성혁명을 합리화하기 위한 풀이라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혁명의 괘로 풀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혁명은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태화의 근본임에 틀림없습니다. 혁명은 한 사회의 억압 구조를 철폐하는 것입니다. 억압당한 역량을 해방하고 재갈 물린 목소리를 열어줍니다. 그것은 한 사회의 잠재적인 역량을 해방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혁명은 흔히 혼란과 파괴의 대명사로 통합니다. 여러분은 지천태라는 뒤집힌 형국, 즉 혁명의 의미가 어떻게 태화의 근본일 수 있을까 다소 납득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혁명을 치르지 않은 나라가 진정한 발전을 이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혁명을 치르지 않은 사회가 두고두고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있는 예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바로 그 현장이기도 하지요. 지천태괘를 이러한 혁명의 관점으로 읽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110 ~ 111


 九三 无平不陂 无往不復 艱貞无咎 勿恤其孚 于食有福

   평탄하기만 하고 기울지 않는 평지는 없으며 지나가기만 하고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어렵지만 마음을 곧게 가지고 그 믿음을 근심하지 마라. 식복이 있으리라.

                                                                      113


지천태괘가 가장 좋은 괘이고 반대로 천지비괘는 가장 좋지 않은 괘인 것은 위에서 본 대로입니다. 그러나 태괘와 비괘의 내용을 검토하면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 즉 태괘의 전반부는 매우 순조롭고 상승적인 반면에 후반부는 쇠락 국면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비괘는 전반부가 간난艱難의 국면임에 비하여 후반부가 오히려 순조롭고 상승 국면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태괘의 후반과 비괘의 전반이 같은 성격임을 알 수 있습니다.



     

   태괘는 선길후흉先吉後凶임에 비하여 비괘는 선흉후길先凶後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동양적 사고에서는 선흉후길이 선호됩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가 그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태괘가 흉하고 비괘가 길하다는 길흉 도치의 독법도 가능한 것이지요. 『주역』은 이처럼 어떤 괘를 그 괘만으로 규정하는 법이 없고 또 어떤 괘를 불변의 성격으로 규정하는 법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존재론적 관점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대성괘 역시 다른 대성괘와의 관계에 의하여 재해석되는 중첩적 구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119 ~ 120


   사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IMF 사태’ 때 내심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IMF 사태는 우리의 취약한 경제구조를 직시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지요. 식량 자급률이 27%에 못 미치는 반면 철광석, 원면, 섬유, 에너지 등은 거의 100%를 수입하는 구조입니다. 경제의 거품을 걷어내고 취약한 구조의 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이전 소위 문민정부 출범 때에도 그러한 기회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만 불 소득이라는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거품과 허위의식을 청산하고 4, 5천 불에서 다시 시작하는 용단이 필요했지요. 그러나 그때나 IMF 때나 미봉책으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물론 우리가 주체적 결정권을 갖지 못하는 종속성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세계 경제구조의 중하위권에 편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모든 책임을 그쪽으로 돌리는 것도 문제가 있지요. 그러한 인식 능력과 의지력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더 근본적인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124


   미제괘에서 중요하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제5효가 음효라는 사실을 이 괘가 형통하다는 근거로 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5효는 양효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괘의 전체적 성격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자리입니다. 그래서 중中이라 합니다. 대체로 군주의 자리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 중의 자리에 음효가 있는 것을 높게 평가한다는 사실입니다. 미제괘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많은 경우에, 중에 음효가 오는 경우를 길형吉亨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단전의 해석에 근거하여 동양 사상에서는 지地와 음陰의 가치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주장이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 중에 음과 양을 합하여 지칭할 때 양음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음양이라 하여 음을 앞에 세우는 것도 그러한 예의 한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동양 사상은 기본적으로 땅의 사상이며 모성의 문화라는 것이지요. 빈부라 하여 빈을 앞세우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126


  최후의 괘가 완성 괘가 아니라 미완성 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깊은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변화와 모든 운동의 완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연과 역사와 삶의 궁극적 완성이란 무엇이며 그러한 완성태完成態가 과연 존재하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태백산 줄기를 흘러내린 물이 남한강과 북한강으로 나뉘어 흐르다가 다시 만나 굽이굽이 흐르는 한강은 무엇을 완성하기 위하여 서해로 흘러드는지,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무엇을 완성하려고 바람 서리 견디며 서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실패로 끝나는 미완성과 실패가 없는 완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보편적 상황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

                                                                      128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

 나는 이 미제괘에서 우리들의 삶과 사회의 메커니즘을 다시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바쁘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노동이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될 뿐 아니라 생산 과정에서 소외되어 있는 현실을 생각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면 우리는 생산물의 분배에 주목하기보다는 생산 과정 그 자체를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는 과제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화수미제괘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냈습니다. 『주역』 강의가 아니더라도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였습니다.

                                                                      129


 『주역』 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역易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통通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進新)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久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주역』에서는 위에서 본 것과 같은 철학적 구도 이외에 매우 현실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이 일관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절제節制 사상입니다. 일례로 건위천괘乾爲天卦의 상구 효사에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즉 하늘 끝까지 날아오른 용은 후회한다는 경계警戒입니다. 초로 만들어진 날개를 달고 있는 이카루스가 너무 높이 날아오르자 태양열에 녹아서 추락하는 것과 같습니다. 앞에서 『주역』은 변화의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변화를 사전에 읽어냄으로써 대응할 수 있고, 또 변화 그 자체를 조직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절제란 바로 이 변화의 조직, 구성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절제와 겸손이란 자기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법이 로마 이외에는 통하지 않는 것을 잊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130 ~ 131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 있을 때 자신의 영정影幀에 쓴 시입니다.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로구나.

                                                                      132 ~ 133


제4장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공자의 시대는 기원전 500년 춘추전국시대입니다. 5천 년 중국 역사에서 꼭 중간으로, 중국 사상의 황금기인 소위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입니다.


   이 시기는 사회에 관한 근본적 담론이 가장 활발하게 개진된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사회 경제사적 성격을 이해하고 『논어』를 읽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경제사적 의미에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크게 보아 춘추전국시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춘추전국시대는 철기鐵器의 발명으로 특징지어지는 기원전 5세기 제2의 ‘농업혁명기’에 해당됩니다. 이 시기는 철기시대 특유의 광범하고도 혁명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경牛耕으로 황무지가 개간되고 심경深耕으로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급증하는 등 토지 생산력이 높아지면서 토지에 대한 관념이 변화합니다.


   농업생산력의 증대는 수공업, 상업의 발달로 이어집니다. 여불위呂不韋 같은 대상인이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전쟁 방식도 변했습니다. 네다섯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청동 창칼로 무장한 귀족들이 싸우는 차전車戰이 평민 병사의 보병전步兵戰 중심으로 변화했습니다. 부국강병에 의한 패권 경쟁이 국가 경영의 목표가 되고 침략과 병합이 자행됩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적 가치가 붕괴되고 오직 부국강병이란 하나의 가치로 획일화되는 시기입니다. 신자유주의와 무한 경쟁으로 질주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패권주의적 경쟁과 다르지 않습니다.


   둘째, 춘추전국시대는 사회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함께 구舊사회질서가 붕괴되는 사회 변동기입니다. 천자天子를 정점으로 하는 제후諸侯(특정국 제후가 공公)―대부大夫(상위 대부가 경卿)―사士(가신家臣)―서인庶人이라고 하는 사회의 위계질서가 재편되는 시기입니다.


   위계질서의 재편은 먼저 제후와 대부의 강성强盛으로 나타납니다. 천자의 토지 소유권이 제후와 대부에게 넘어가는, 토지 소유권의 하이下移 현상이 광범하게 일어납니다. 이러한 변화는 주 왕실의 물적 토대의 약화로 이어집니다.

                                                                      137 ~ 139


춘추전국시대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백화제방의 시기입니다. 주 왕실이 무너지면서 왕실 관학을 담당하던 관료들이 민간으로 분산되어 지식인(士君子) 계층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 계층은 민간인 신분으로 강학講學 활동을 하거나 학파의 출현을 주도하게 됩니다. 공자학파 역시 춘추 말엽에 활동하던 여러 민간 학파 중의 한 갈래로 분류됩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급격한 사회 경제적 변동기에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적 정책 목표 아래 군사력, 경제력, 사회 조직에 이르기까지 국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모든 노력이 경쟁적으로 경주되는 시기입니다. 패권 경쟁을 위한 정치 기구의 확충과 전문적 지식에 대한 요구가 커짐에 따라 정신노동의 상품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입니다. 이른바 제자백가의 시대이고 백화제방의 시대입니다.

                                                                      139 ~ 140


우리가 이 지점에서 합의해야 하는 것은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時制라는 사실입니다. 공자의 사상이 서주西周 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하여 비민주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공자의 인간 이해를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의 인권 사상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관을 이유로 들어 그를 반인권적이고 비민주적인 사상가로 매도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전 독법은 그 시제를 혼동하지 않음으로써 인人에 대한 담론이든 민民에 대한 담론이든 그것을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141


 학습은 그 자체가 기쁨일 수도 있지만 대체로 사회적 신분 상승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르지 않습니다. 당시의 학습이 적어도 수능 시험을 위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간과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노예제 사회에서는 학습이 의미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수기修己는 물론이며 치인治人도 학습의 대상이 아닙니다. 엄격한 위계질서 속에서 학습이 갖는 의미는 거의 없습니다. 학습에 대한 언급이 『논어』 첫 구절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사회 변동기임을 짐작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물론 “기쁘지 않으랴”라고 공자 자신의 개인적 심경의 일단을 표현하는 지극히 사적인 형식으로 개진되고 있습니다만, 학습에 대한 언급은 사회 재편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비슷한 예가 다음 구절에도 있습니다. ‘붕’朋의 개념입니다. 붕은 친우親友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친우라는 것은 수평적 인간관계입니다. 계급사회에는 없는 개념입니다. 같은 계급 내에서는 물론 존재할 수 있습니다만 멀리서 벗이 온다는 것은 새로운 인간관계가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분제를 뛰어넘은 교우交友에 의미를 두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붕은 수평적 인간관계이며 또 뜻을 같이하거나 적어도 공감대가 있는 인간관계를 의미합니다. 공자의 학숙에는, 초기에는 천사賤士의 자제가 찾아왔으며 후기에는 중사中士의 자제도 입학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보더라도 붕의 개념이 등장한다는 것 역시 사회 재편기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2 ~ 143


‘습’을 복습復習의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습’의 뜻은 그 글자의 모양이 나타내고 있듯이 ‘실천’實踐의 의미입니다. 부리가 하얀(白) 어린 새가 날갯짓(羽)을 하는 모양입니다. 복습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할 때 기쁜 것이지요. 『논어』에는 이곳 이외에도 ‘습’을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할 곳이 더러 있습니다. 같은 「학이」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143 ~ 144


나는 이 구절을 “전傳하기만 하고 행하지 않고(不習) 있지는 않은가?”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언言 행行이 따르지 않는 사람이 당시에도 하나의 사회적 유형으로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어쨌든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의 습은 실천의 의미로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시時의 의미도 ‘때때로’가 아니라 여러 조건이 성숙한 ‘적절한 시기’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 실천의 시점이 적절한 때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時는 often이 아니라 timely의 의미입니다.

                                                                      144 ~ 145


 어느 기자로부터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소개해달라는 질문을 받고 『자본론』資本論과 『논어』를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기자가 매우 의아해했어요. 이 두 책이 너무 이질적인 책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두 책은 다 같이 사회 관계를 중심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동질적인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계급 관계는 생산관계이기 이전에 인간관계입니다. 자본 제도의 핵심은 위계적인 노동 분업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생산자에 대한 지배 체제가 자본 제도의 핵심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론은 물론 변혁 이론의 일환으로 제기된 것이지만 생산자에 대한 지배 권력이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가에 의하여 행해지든, 사회주의 사회의 당 관료에 의해 행해지든 본질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지요. 그리고 제도의 핵심 개념이 바로 인간관계라는 사실이지요.

                                                                      145 ~ 146


 시간에 대한 도착된 관념은 결국 사회 변화에 대한 도착된 의식을 만들어낸다는 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질의 존재 형식인 시간이 실체로 등장하고, 그 실체는 현재와 상관없는 전혀 새로운 것이며, 그것도 미래로부터 다가온다는 사실은 참으로 엄청난 허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허구가 밀레니엄 담론을 지배하는 기본 틀이 되고 있다. 밀레니엄 담론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변화 읽기와 변화에 대한 대응 방식의 기본 틀이 되고 있다.

                                                                      148


君子不器        ―「爲政」

이 구절은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를 논하면서 바로 이 『논어』 구를 부정적으로 읽음으로써 널리 알려진 구절이기도 합니다. 베버의 경우 기器는 한마디로 전문성입니다. 베버가 강조하는 직업윤리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전문성에 대한 거부가 동양 사회의 비합리성으로 통한다는 것이 베버의 논리입니다. ‘군자불기’君子不器를 전문성과 직업적 윤리의 거부로 이해했습니다. 분업을 거부하였고, 뷰로크라시(官僚性)를 거부하였고, 이윤 추구를 위한 경제학적 훈련(training in economics for the pursuit of profit)을 거부하였다고 이해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동양 사회가 비합리적이며 근대사회 형성에서 낙후될 수밖에 없는 원인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150 ~ 151


 공자의 전기前期 유가 사상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들은 ‘군자불기’ 역시 노예주 귀족들의 사상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한 개의 기器나 ‘부분적이고 하찮은 기예’(末葉小道)는 소인들의 것이라는 점을 들어 비판하고 있는 것이지요. ‘군자불기’가 이처럼 비록 군자학君子學으로 거론된 것이라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담론을 통하여 오늘날의 전문성 담론을 비판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강조되고 있는 전문성 담론이 바로 2천 년 전의 노예 계급의 그것으로 회귀하는 것임을 반증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152


형刑과 예禮를 인간관계라는 관점에서 조명해보는 것입니다. 법가 강의 때 다시 설명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사회의 지배 계층은 예로 다스리고 피지배 계층은 형으로 다스리는 것이 주나라 이래의 사법司法 원칙이었습니다. 형불상대부刑不上大夫 예불하서인禮不下庶人이지요.

……

  물론 사회의 기본적 질서가 붕괴된 상황에서 인간관계의 아름다움이란 한낱 환상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형벌에 의한 사회질서의 확립이 더욱 시급한 당면 과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과 예는 그 접근 방법에 있어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인간관계의 개념으로 재조명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란 바로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형은 인간관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가두는 것이며 반대로 예는 인간관계를 열어놓음으로써 그것이 최대한으로 발휘될 수 있는 가능성을 키우는 구조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전에 춘추전국시대를 법가가 통일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통일 제국인 진秦나라가 단명으로 끝납니다. 이러한 사실을 들어 법가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 통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견해라 할 수 있습니다. 진한秦漢은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진秦의 시기는 통일과 건국의 과정이며 한漢의 시기는 이를 계승하여 통일 제국을 다스려 나가는 수성守城의 시기라고 보아야 마땅합니다. 따라서 법치와 덕치의 비교는 그 시대의 상황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54 ~ 155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의 『타락론』墮落論에 의하면 사회적 위기의 지표로 ‘집단적 타락 증후군’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집단적 타락 증후군도 여러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만, 우선 이 교통법규 위반 사례와 같이 모든 사람이 범죄자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그중의 하나입니다. 적발된 사람만 재수 없는 사람이 되는 그러한 상황입니다. 또 한 가지는 유명인의 부정이나 추락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는 마음 대신에 고소함을 느끼는 단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부정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거나 추락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기보다는 한마디로 고소하다는 것이지요. 타인의 부정과 추락에 대하여, 그것도 사회 유명인의 그것에 대하여 오히려 쾌감을 느끼는 단계가 집단적 타락 증후군이라는 것이지요. 타인의 부정이 오히려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부정의 연쇄를 끊을 수 있는 전략적 지점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 본질에 대하여 수많은 논의가 있습니다만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자체가 붕괴된 상태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155 ~ 156


현대는 미의 기준이나 소위 미모가 획일적이지 않은 것이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미인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고 반대로 스스로 미인이 아니라는 자의식을 가진 사람도 상대적으로 매우 적어졌습니다. 미인의 사회적 의미가 상대적으로 작아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반미인론을 펼칠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미를 상품화하는 문화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인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과장되기도 합니다. 특히 심각한 것은, 상품미학에 이르면 미의 내용은 의미가 없어지고 형식만 남게 됩니다. 디자인과 패션이 미의 본령이 되고 그 상품이 가지고 있는 유용성은 주목되지 않습니다.

……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熟知性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이것은 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소위 상품미학의 특징입니다. 오로지 팔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 상품이고 팔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상품입니다. 따라서 광고 카피가 약속하는 그 상품의 유용성이 소비 단계에서 허구로 드러납니다. 바로 이 허구가 드러나는 지점에서 디자인이 바뀌는 것이지요. 그리고 디자인의 부단한 변화로서의 패션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결국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는 것이 상품미학의 핵심이 되는 것이지요. 아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아니라 모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되어버리는 거꾸로 된 의식이 자리 잡는 것이지요.

                                                                      158 ~ 159


동양학에서는 어떤 개념을 설명하는 경우 그 개념 자체를 상술詳述하거나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보다는 그와 대비되는 개념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그 뜻이 드러나게 하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한시漢詩의 대련對聯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대비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일반적 의미에서 개념은 차이를 규정하는 것에 의하여 성립됩니다. 소위 독특獨特의 의미는 그 독특한 의미를 읽는 것과 동시에 그와 다른 것을 함께 읽기 때문에 그것이 독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과의 차이에 대한 인식입니다. 정체성(identity) 역시 결과적으로는 타자他者와의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비로소 드러나는 것입니다. 데리다J. Derrida의 표현에 의하면 관계 맺기와 차이 짓기, 즉 디페랑스differance(差延)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쉬르F. Saussure의 언어학이 그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차이란 두 실체 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차이를 형성하는 두 개의 독립 항목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소쉬르에 의하면 언어의 경우에는 이러한 독립 항목이 전제되지 않는 것이지요. 모든 것에 대한 차이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 언어입니다. 언어는 차이가 본질이 되는 역설을 낳게 되는 것이지요. 동양적 표현 방식에 있어서의 대비의 방식은 이러한 언어와 개념의 한계를 우회하고 뛰어넘는 탁월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0 ~ 161


이 분리된 대상을 더욱 정치精緻하게 개념화하는 방식은 전체와의 거리를 더욱 확대할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심화 과정에서 대상 그 자체가 관념화된다는 사실이지요. 이에 비하여 대비의 방식은 분리된 대상을 다시 관계망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대상 그 자체의 관념화를 어느 정도 저지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동양학에서 대체로 대비의 방식을 선호하는 까닭은 동양학 그 자체가 관계론적 구조를 띠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162


 나는 이 강의의 서론 부분에서 중국이 추구하는 21세기의 구성 원리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문명을 가장 앞서서 실험하고 있는 현장이 바로 중국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의 자부심에 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자본주의를 소화하고 있는 대륙적 소화력에 대하여 이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러한 강력한 시스템이 작동해왔던 것이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면 불학佛學이 되고, 마르크시즘도 중국에 유입되면 마오이즘이 되는 강력한 대륙적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현대 중국은 자본주의를 소화하고 있는 중이며 동시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구성 원리를 준비하고 있는 현장이라는 것이지요.

                                                                      163 ~ 164


  화和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타자를 흡수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를 강화하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타자란 없으며 모든 타자와 대상은 사실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입니다. 문명과 문명, 국가와 국가 간의 모든 차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됨으로써 비로소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며 나아가 진정한 문화의 질적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명제가 바로 이러한 논리라고 생각하지요.

   우리는 이러한 화동 담론이 우리의 통일론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북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서로 다른 체제로 대립하고 있고 또 지금까지 흡수합병이든 적화통일이든 기본적으로 동同의 논리에 따른 통일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통일론을 동의 논리가 아닌 화의 논리로 바꾼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입니다. 화의 논리는 무엇보다 먼저 공존과 평화의 논리로 통일 과정을 이끌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165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는 중국과 같은 대륙적 소화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불교, 유학, 마르크시즘, 자본주의 등 어느 경우든 더욱 교조화되는 경향을 보여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동의 논리에 대한 비판적 관점과 화의 논리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물론 보다 종합적이고 심도 있는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화동 담론을 고담준론으로 이끌어가고 말았습니다만 『논어』의 이 구절을 일상적 의미로 읽더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자기 흉내를 내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지요.

                                                                      165


루쉰魯迅이 의사 되기를 포기하고 문학으로 진로를 바꾼 이유가 그렇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에 루쉰은 건장한 중국 청년이 러시아의 첩자라는 혐의를 받고 일본인들에게 뭇매를 맞는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러일전쟁 당시의 일이었습니다. 건장하지만 우매한 조국 청년의 모습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고 의사의 길을 포기하였지요. 우매한 대중의 각성이 더욱 시급한 중국의 과제라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무쇠 방에 갇혀 죽어가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중국인의 각성을 위하여 치열한 일생을 살아갑니다.

                                                                      167


子曰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里仁」


 부귀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그것을 누리지 않으며,

   빈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이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해석상의 이견이 있는 부분은 ‘불이기도득지’不以其道得之입니다. “그 도로써 얻지 않은 것”이란 뜻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우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부귀는 쉽게 이해가 가지만 빈천의 경우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닌 빈천이 과연 어떤 것인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지요. 특히 도로써 얻은 빈천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더욱 막연합니다. 그래서 다산茶山은 이 경우의 득得을 탈피의 의미로 해석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벗어날 수 없는 한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대부분의 해석이 이를 따릅니다.

                                                                      176


일반적으로 학은 배움(learning)이나 이론적 탐구라는 의미로 통용됩니다. 그런데 사를 생각(thought) 또는 사색思索으로 읽을 경우 학과 사가 대를 이루지 못합니다. 다 같이 정신 영역에 관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사는 생각이나 사색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리라고 한다면 경험적 사고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자의 구성도 ‘전田+심心’입니다. 밭의 마음입니다. 밭의 마음이 곧 사思입니다. 밭이란 노동하는 곳입니다. 실천의 현장입니다.

                                                                      179


더구나 내게는 이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에 관한 추억이 있습니다. 할아버님께서 언젠가 어린 손자인 나를 앉혀놓고 이 구절을 설명하셨습니다. 한 시간쯤 책을 읽고 나서는 반드시 30분 정도는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책을 덮고 읽은 것을 다시 생각하면서 머릿속에서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어둡지(罔) 않게 된다는 것이 할아버님의 해석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할아버님의 그런 말씀이 생각나서 자주 그렇게 하기도 했습니다. 읽은 것을 다시 생각하면 내용의 핵심을 간추려보게 되기도 하고 또 글 전체의 구성을 이해하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감옥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됩니다. 책을 읽어도 도대체 머리에 남는 것이 없었어요. 심지어 어떤 책을 30∼40페이지쯤 읽고 나서야 그 책은 전에 읽은 것이란 걸 알게 됩니다. 감옥에서 책 읽는 것이란 그저 무릎 위에 책 한 권 달랑 올려놓고 읽는 것입니다. 독서는 독서 이후와 완벽하게 단절된 그저 독서일 뿐입니다. 실천과 유리된 관념의 소요逍遙일 뿐입니다. 책을 덮고 읽은 것을 다시 생각하고 정리해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책을 읽는 것(學)이나 책을 덮고 생각하는 것(思)은 같은 것을 반복하는 의미 이상일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할아버님의 해석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사思를 경험과 실천의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분명한 것은 학과 사를 대對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

반대로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는 특수한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뜻이 됩니다.

                                                                      180 ~ 181


 공자가 이 구절에서 이야기하려고 한 것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입니다.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며 동시에 특수한 경험에 매몰되지 않는 이론적 사고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연과 필연의 변증법적 통일에 관한 인식이기도 합니다. 「학이」편에 ‘학즉불고’學則不固란 구절이 바로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배우면 완고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학學이 협소한 경험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학이란 하나의 사물이나 하나의 현상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 경험에 갇혀서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읽지 못할 때 완고해지는 것입니다.

                                                                      182


우리 집에 전기 공사를 할 때의 일입니다. 나도 전기 수리공을 도우면서 한나절을 같이 일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의 그 전기 수리공과 주고받은 대화 내용입니다. 집에 책이 많은 걸 보고 그 수리공이 내게 학교 선생이냐고 물었어요.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그의 말인즉 선생은 참 좋겠다고 부러워했어요. 그런데 그가 부러워하는 이유가 무척 철학적이었습니다. 그가 부럽다고 하는 이유는 선생에게는 방학이 있다거나 칠판에 쓰는 것이 전기 배선 작업보다 힘이 덜 든다는 것이 아니었어요. “책상에서는 한 가지이지만 실제로 일해보면 열 가지도 넘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어요. 교실보다는 현실이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이지요.


   그가 주장하는 바는 요컨대 이론은 주관적이고 실천은 결코 주관적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관념적일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가 이야기한 것은 어쩌면 단순하다, 복잡하다는 정도의 일상적 대화였습니다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내용은 매우 철학적인 것이지요. 그는 마치 확인 사살하듯이 못 박았어요.

   “머리는 하나지만 손은 손가락이 열 개나 되잖아요.”

   내가 반론을 폈지요.

   “머리는 하나지만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의 대답은 칼로 자르듯 명쾌했습니다.

   “머리카락이요? 그건 아무 소용없어요. 모양이지요. 귀찮기만 하지요.”


   그렇습니다. 생각하면 머리카락이란 이런저런 모양을 내면서 결국 ‘자기’自己를 디자인하고 합리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그 수리공도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183 ~ 184


사람이란 지혜롭기보다는 어리석기가 어렵습니다. 지혜를 드러내기보다는 그것을 숨기고 어리석은 척하기가 더 어렵다는 뜻입니다.

                                                                      185


 세상 사람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당신이 먼저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무야 나무야』 중에서

                                                                      187


   교도소는 거짓말이 많은 곳입니다만 동시에 거짓말이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곳입니다. 같은 감방에서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거짓말이 언젠가는 탄로가 나게 마련입니다. 일단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그 거짓말과 상충되는 말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거짓말을 했을 때 누구누구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를 기억해둬야 합니다. 거짓말이 탄로 나지 않기 위해서는 거짓말과 거짓말이 행해진 환경을 동시에 기억해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이 거짓말에 노출되는 사람의 수가 기하급수로 늘어납니다. 도대체 감당이 불감당이지요. 아무리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여기에 비하여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거짓말의 수명이 상당히 긴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할 필요가 없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실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189 ~ 190


『논어』는 앞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의 보고입니다. 춘추전국시대는 고대국가가 출현하는 시기이며 따라서 당시의 백가百家들은 당연히 사회론에 있어서 쟁명爭鳴을 하였지요. 『논어』는 그러한 담론 중에서 사회의 본질을 인간관계에 두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붕朋이건 예禮건 인仁이건 사회는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가 근본이라는 덕치德治의 논리입니다. 바로 이 점이 다른 사상에 비하여 『논어』가 갖는 진보성의 근거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193


광고 카피의 문장과 표현이 도달하고 있는 그 형식에 있어서의 완성도에 대하여는 누구나 감탄하고 있는 일이지만 광고 내용을 그대로 신뢰하는 소비자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 사史하다(사치스럽다)고 하는 것이지요. 반대로 사회운동 단체의 성명서처럼 도덕성과 정당성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서 주장을 전개하는 형식이 다듬어지지 않은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 언어를 적절히 절제함으로써 훨씬 더 진한 감동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격을 떨어트려놓아 아쉬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지요. 질이 승하여 야野한(거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195


글자 그대로 지는 아는 것, 호는 좋아하는 것, 낙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도 언급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지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낙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화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99 ~ 200


지자는 눈빛도 총명하고 사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며 특히 사물의 변화에 대하여 정확한 판단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자는 일단 앉아 있는 사람으로 형상화됩니다. 지자가 서 있거나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임에 비하여 인자는 한곳에 앉아서 지긋이 눈 감고 있을 듯합니다. 수고롭지 않은 나날을 보낼 것 같은 인상이지요. 이러한 비유가 너무 문학적인 설명입니까? 인자는 한마디로 세상의 무궁한 관계망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지자는 개별적인 사물들 간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엉뚱하게도 지자의 모습과 함께 알튀세르Louis Althusser를 떠올리게 됩니다. 특히 그의 상호결정론(over-determi-nation)을 떠올리게 됩니다. 사물과 사물의 관계에 있어서 일방적이고 결정론적인 인과관계를 지양하고자 하는 그의 정치한 논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반면에 인자는 오히려 노장적老莊的이기까지 합니다. 개별적 관계나 수많은 그물코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세계를 망라하는 그물, 즉 천망天網의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하늘을 망라하는 그물은 성글기 그지없지만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다”(天網恢恢 疎而不漏). 인자는 최대한의 관계성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 ~ 202


  흔히 『논어』가 갖는 최대의 매력은 그 속에 공자의 인간적 풍모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자子는 학자를 뜻하고 가家는 학파를 뜻합니다만, 그 수많은 제자諸子 중에서 공자만큼 인간적 이미지를 남기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논어』라는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공자의 이미지가 미화되었다는 것이지요. 충분히 납득이 가는 주장입니다. 곽말약郭沫若 같은 대학자도 동의하는 것이지요. 공자의 인간적 면모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그의 묘비명이나 예찬문禮讚文을 읽을 것이 아니라 그의 반대자의 견해를 통하여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하지요.


   나는 물론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자 사상은 하나의 사회사상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논어』는 공자 개인의 사상도 아니라고 생각하지요. 『마오어록』이 마오쩌둥 개인의 어록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집단적 사상이듯이 『논어』라는 책은 공자 사후에 공문孔門의 제자들이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공동으로 집필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203 ~ 204


제5장 맹자의 의(義)



  춘추시대의 군주는 지배 영역도 협소하고 전통의 규제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특히 군주 권력이 귀족 세력들의 제어를 받는 제한 군주制限君主였습니다. 이에 비하여 전국시대의 군주는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절대 군주絶對君主였습니다. 춘추시대에 비하여 국가 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전국시대는 수많은 나라가 결국 전국칠웅戰國七雄으로 압축되고 드디어 진秦나라에 의해 천하가 통일되는 과정을 밟습니다. 음모와 하극상이 다반사였으며 배신과 야합이 그치지 않은 난세의 전형이었습니다. 군주는 사방에서 정치 이론에 통달한 학자를 초빙하여 국가 경영에 관한 고견高見을 듣는 것이 상례화되어 조정은 일종의 사교장이었습니다. 맹자도 그중의 한 사람이지만 제자백가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등장한 학자들의 총칭입니다.

……

  많은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공자의 인仁이 맹자에 의해서 의義의 개념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중심 사상이 인에서 의로 이동했다는 것이지요. 인과 의의 차이에 대해서 물론 논의해야 하겠지만 한마디로 의는 인의 사회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예시 문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맹자』의 제1장에서 맹자가 가장 먼저 꺼내는 말이 바로 의義입니다.

                                                                      211 ~ 212


맹자의 글은 매우 논리적인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논어』가 선어禪語와 같은 함축적인 글임에 비하여 『맹자』는 주장과 논리가 정연한 논설문입니다. 서당에서는 『맹자』로써 문리文理를 틔운다고 합니다.

                                                                      213


맹자는 학자와 사상가로서뿐만 아니라 문장가와 문학가로서도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어떠한 고전도 『맹자』만큼 힘차고, 유려하고, 논리 정연하고, 심오한 뜻을 지니고, 현재에도 그 내용이 여전히 타당하며, 사람의 정신을 분발시키는 문장들로 가득한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214


  『맹자』 제1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이야기하지요. 양혜왕은 맹자로부터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고 만 셈이지요. 맹자의 사상과 정책은 결국 당시 패권을 추구하던 군주들에게 채용되지 못했습니다. 맹자 사상이 공자의 인仁을 사회화했다고 하지만 당장의 부국강병을 국가적 목표로 하고 있던 군주들에게 ‘사회적 정의正義’는 너무나 우원迂遠한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활적 경쟁에 내몰리고 있던 군주들에게 정의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양혜왕이 말했던 이利란 오로지 ‘부국강병의 류類’였던 것이지요(王所謂利 蓋富國强兵之類). 오늘날로 말하자면 의義란 국제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는 정책 제안이 아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5


하나의 예를 들어 성선설을 주장한다는 것이 다소 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장의 구성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모든 사람이 불인인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적인 선언을 먼저 하고 선왕의 어진 정치가 바로 이러한 성선性善에서 비롯되었다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왕의 선한 정치가 성선설의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선왕 중에는 포악한 정치를 한 왕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모든 사람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장한 다음 그 근거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보다는 이러한 측은지심이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이 아닌 본성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귀기 위해서가 아니다, 마을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 때문이 아니다 등 사회적으로 습득된 것이 아니라 타고난 본성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일단 수긍할 수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어린아이와 측은지심을 근거로 하여 사단四端으로 나아갑니다. 측은지심으로부터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단을 모두 이끌어낸다는 것은 분명 논리의 비약입니다. 우물의 어린아이 이야기로써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측은지심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인仁을 뺀 나머지 즉 의義, 예禮, 지智라는 세 가지의 단은 우물의 어린아이와는 직접적 연관이 없습니다. 이렇게 논리적인 비약과 무리를 남겨둔 채 서둘러서 인의예지의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는 매우 선언적 주장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장의 목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단의 확충’으로 넘어갑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장에서 맹자가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인의예지의 사단과 이 사단의 확충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맹자의 성선설은 다분히 윤리적 개념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이라는 것이지요.


   맹자의 성선설은 공자의 천명론天命論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천명을 본성으로 받아들이는 구조입니다. 『중용』에도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 나와 있지요. 맹자는 공자의 천명론과 예론禮論을 계승하되 천명을 인간의 본성으로 내재화하여 극기克己에 의한 본성의 회복에서 예禮를 구합니다. 천명→본성→사회적 질서(禮)라는 체계를 만들어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공자의 천명은 맹자의 천성으로 이어지고 다시 송대宋代의 신유학新儒學에 이르러서는 천성이 곧 천리天理라는 주자朱子 성리학性理學으로 계승됩니다.

                                                                      225 ~ 227


우선 사단四端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마치 사지四肢가 있는 것과 같다는 대목(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입니다. 이것은 윤리적 차원의 선언이기는 하지만 “만민萬民은 평등하다”는 주장과 통합니다. 매우 중요한 맹자 사상의 하나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윤리적 차원의 성선설보다 더 중요한 맹자의 사회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27


맹자의 성선설과 맹자의 사회적 관점을 비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공자의 ‘이인위미’里仁爲美를 인용하여 어진(仁)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진 일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인里仁이란 인仁에 거居하는 것이라고 직역했습니다만 인仁을 삶 속에서 실천한다는 의미입니다. 맹자의 성선설이 인간의 본질을 구명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을 앞에서 이야기했는데 이 구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맹자는 그 사람의 사상은 물론이고 그 사람의 본성도 사회적 입장에 따라서 재구성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성을 어떤 순수한 본질로 이해하는 것은 관념적인 것이 아닐 수 없지요. 선善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사회성을 띠고 있는 것이지요.


   이 장은 본성으로서의 성선性善의 문제도 처지와 입장이라는 사회적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230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하여 그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이것은 모든 운동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내부에서 찾는가 하는 세계관의 차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세계는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이며, 그 운동의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문제입니다. 반대로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결국 초월적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초월적 존재를 만든 어떤 존재를 또다시 외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232 ~ 233


지하철은 평균 20분 정도를 승차한다고 합니다. 승객들은 평균 열 정거장 이내에 서로 헤어지는 우연하고도 일시적인 군집群集일 뿐입니다. 나는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맹자가 사단四端의 하나로 수오지심羞惡之心, 즉 치恥를 들었습니다만 나는 이 부끄러움은 관계가 지속적일 때 형성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20분을 초과하지 않는 일시적 군집에서는 형성될 수 없는 정서입니다. 다시 볼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피차 배려하지 않습니다. 소매치기나 폭행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잠시만 지나고 나면 그것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 되는 것이지요.

                                                                      239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 사회商品社會입니다. 상품 사회는 그 사회의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s)가 상품과 상품의 교환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당연히 인간관계가 상품 교환이라는 틀에 담기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교환가치로 표현되고, 인간관계는 상품 교환의 형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는 제도입니다.

                                                                      240


모스크바 지하철에서는 젊은이들이 노인을 깍듯이 예우합니다. 노인이 타면 얼른 일어나 자리로 안내하고, 노인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어쩌다 미처 노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가는 그 자리에서 꾸중을 듣는다고 합니다. 의아해 하는 나에게 들려준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이 지하철을 저 노인들이 만들지 않았느냐!”는 것이었어요. 그것도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서 한 젊은이한테 물어보았지요. 물론 잘 아는 젊은이였지요. 이 지하철을 만든 이가 바로 저 노인들인데 왜 자리를 양보하지 않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들의 답변 또한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어요. “자기가 월급 받으려고 만들었지 우리를 위해서 만든 것은 아니잖아요.” 참으로 충격적인 대답이었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모스크바의 지하철이건 서울의 지하철이건 젊은이들이 만들지는 않았지요. 노인들이 만든 것이 사실입니다. 똑같은 사실관계를 두고 모스크바의 젊은이와 서울의 젊은이가 판이한 대답을 하는 까닭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똑같은 사실관계가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히는 까닭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241


孟子曰 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

   故觀於海者 難爲水 遊於聖人之門者 難爲言

   觀水有術 必觀其瀾 日月有明 容光必照焉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

   君子之志於道也 不成章不達        ―「盡心 上」



이 글에서의 ‘바다’는 큰 깨달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함부로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법이지요. 더구나 작은 것을 업신여긴다는 것은 깨달은 사람이 취할 태도가 못 되지요. ‘난위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경우 언言은 단순한 말의 의미가 아니라 학문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학문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은 모든 언에 대하여 지극히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마땅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바다를 본 사람이나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웬만한 물이나 이론에 대하여 그것을 물이나 이론으로 쳐주기 어렵다고 하는 해석은, 틀린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맹자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불영과불행’不盈科不行도 우리가 특히 명심해야 할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科는 학과學科라고 할 때의 그 과입니다. 원래 의미는 ‘구덩이’입니다.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지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건너뛸 수도 없는 것이지요. 첩경捷徑에 연연하지 말고 우직하게 정도正道를 고집하라는 뜻입니다. 무슨 문제가 발생하고 나면 그제야 “기본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원칙에 충실하라”고 주문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건너뛰었다는 뜻이지요.

                                                                      244 ~ 245


맹자의 사회주의社會主義와 민본주의民本主義는 오늘의 사회적 현실을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맹자는 그 사상이 우원迂遠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패자들에게 수용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수용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맹자의 민본 사상은 패권을 추구하는 당시의 군주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보적인 사상이었습니다.

……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는 노래가 있다. 공자께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서경』 「태갑」편太甲篇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249 ~ 250


제6장 노자의 도와 자연



어느 사회든 지배 담론과 비판 담론이 일정한 길항拮抗 구도를 가지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유가와 노장이라는 두 축은 중국 사상사의 오래된 심층 구조라고 할 수 있으며 『노자』老子는 그 두 개의 축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사상입니다.

                                                                      253


통일의 주역인 법가 사상은 난세亂世를 평정하는 과정에서는 대단한 역동성을 발휘했지만 치세治世의 통치 이데올로기로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적합하지 못하게 됩니다. 전쟁을 치르는 것과 같은 단기전에서는, 법가적 정책이 그 역량을 결집하고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를 가동하는 데 탁월한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국가의 진정한 부국강병을 만들어내는 데는 적합하지 못하게 됩니다. 진정한 부국강병이란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부문의 자생력自生力을 길러내고 꽃피움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255


 이 시대는 또 하나의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극상과 혼란의 시대였지요. 한대漢代의 명교적名敎的 질서가 무너지고, 영원불변한 강상적綱常的 질서가 흔들리는 시기입니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천도天道가 부정되는 시기입니다. 천도와 대일통大一統의 관념이 부정되고, 개방적이고 능동적인 사고로 변화하는 격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대의 명교 체제名敎體制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것이 시대사조로 자리 잡았던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변화된 시대적 상황에서 왕필은 당시의 현학顯學이던 법法·명名·유儒·묵墨·잡가雜家 등은 모두가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추구하는, 그 어미를 버리고 자식을 취하는 기모용자棄母用子의 사상이라는 비판적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이것이 춘추전국시대의 노자의 입장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필은 노자와 마찬가지로 근본적 사유, 즉 철학적 문제의식에 충실했던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왕필은 거대하고 복잡한 명교 체제와 번망繁妄한 한대漢代 경학經學에 대한 반성을 통하여 근본적인 것을 추구함으로써 욕망의 소종래所從來와 명교의 소이연所以然을 밝히는 참된 도道를 추구했던 것이지요. 그것이 곧 무無를 근본으로 하는 이무위본以無爲本의 철학 체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왕필 철학의 기본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숭본식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간단한 것으로 복잡한 것을 정리한다(以簡御繁)는 것이지요. 무無를 본本으로 삼고 유有를 말末로 삼는 귀무론貴無論이 『노자』 독법의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왕필의 노자주가 『노자』를 가장 정확하게 읽고 있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왕필의 시대와 그의 철학적 입장이 『노자』에 대한 가장 올바른 독해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왕필의 『노자』가 금본今本 『노자』이며 왕필의 노자주가 『노자』 해석의 기본이 되고 있는 이유입니다. 왕필은 『노자』를 주註했다기보다는 『노자』를 편집했다고 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로 전승되어오던 『노자』 텍스트를 자신의 입장과 관점에서 정리하고 편집하여 금본 『노자』를 만들어냈다는 것이지요.

                                                                      260 ~ 261


『노자』는 산문散文이라기보다는 운문韻文입니다. 5천여 자에 불과한 매우 함축적인 글이며 서술 내용 역시 담현談玄입니다. 더욱이 노자 사상은 상식과 기존의 고정관념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게 하는 고도의 철학적 주제입니다. 그 위에 간결한 수사법은 여타 철학적 논술에 비하여 월등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의 독법은 방금 이야기한 바와 같이 최대한의 상상력을 동원해야 합니다. 앞으로 예시 문안을 읽으면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261 ~ 262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제1장


상常, 욕欲, 묘妙, 요徼 등의 의미를 분명하게 한 다음 전체 문맥에서 어떤 의미로 읽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장이 전체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인가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이 장의 중심 개념이 무엇인지 한번 찾아보기 바랍니다. 여러 번 읽으면 감이 옵니다. 도道? 명名? 아닙니다. 도와 명은 이 장의 핵심적인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예로 든 것일 뿐입니다. 핵심적인 개념은 무無와 유有입니다. 그리고 더욱더 중요한 것은 무와 유는 같은 것의 두 측면이라는 선언입니다.

                                                                      262 ~ 263


무욕無欲 유욕有欲과 같이 붙여 읽어서 무욕으로서는 묘妙를 보고, 유욕으로서는 요徼를 본다고 해석하는 경우 욕欲을 의지나 입장의 의미로 읽는다면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묘를 보기도 하고 요를 보기도 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현학玄學의 차원이 못 되지요.

                                                                      265


우리가 『노자』 제1장을 읽으면서 명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묘妙와 요徼, 시始와 모母, 그리고 무無와 유有를 대치시키고 있는 『노자』의 서술 방식은 결코 그것들 간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입니다. 그것을 통일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서술 방식입니다. 무와 유는 둘 다 같은 것인데 이름만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더욱 정확히 말하면 무릇 차이란 이름이 있고 없고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267


무와 유가 그로부터 연유하는 것이 바로 현玄입니다. 굳이 현이라고 쓰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도의 본체를 무라고 한다면 무의 의미를 유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도의 본체는 유와 대립하는 상대적인 무가 아니라 절대적인 ‘무’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268


  명名의 경우도 도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언어로 붙인 이름이 참된 이름일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름이란 원래 약속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란 그 실체를 옳게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개미에게 물어보면 ‘개미’라는 이름은 자기 이름이 아니지요. 더구나 ‘개미’라는 이름은, 개미라고 지칭되는 그 곤충(?)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곤충이란 이름도 마찬가지임은 물론입니다. 비상명非常名일 수밖에 없지요. 사람들이 붙인 표지標識일 따름이지요. 사람들끼리의 약속, 즉 기호인 셈이지요. 한마디로 언어의 한계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도를 도라고 이름 붙인 것은 ‘박은 참’(寫眞)이라는 것이지요. ‘참도’(眞道)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은 곳에 노자의 세계가 있는 것이지요. 개념이라는 그릇은 작은 것이지요. 그릇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은 이미 바다가 아닙니다.

                                                                      269


 이처럼 노자의 도道와 명名은 서양의 사유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유는 개념적 사유라는 것이 서양의 논리지요. 개념이 없으면 사유가 불가능한 것이지요. 이것을 노자류老子類로 표현한다면 ‘도비도道非道 비상도非常道 명비명名非名 비상명非常名’이 되는 것이지요. “도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이것이 서양의 사유입니다. 개념이 없으면 존재 자체가 없습니다. 칸트의 인식론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인식 주체인 인간의 선험적 인식 구조에 의하여 구성될 뿐이지요.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노자의 도와 명에 관한 제1장의 선언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만 노자의 경우 이것은 폭력적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어는 존재가 거주할 진정한 집이 못 되는 것이지요.

                                                                      270


노자의 사상 체계에 있어서 대립적인 것은 없습니다. 상호 전화轉化될 수 없는 고정 불변한 것은 없습니다. 세상 만물은 상대적인 것이며 상호 전화하는 것입니다. 존재론적 체계가 아니라 관계론적인 체계입니다.

                                                                      273


우선 현賢을 숭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참으로 노자답다고 하겠습니다. 현이란 무엇입니까? 지혜라고 해도 좋고 지식이라고 해도 좋습니다만 우리가 습득하려고 하는 지식이나 지혜란 한마디로 자연에 대한 2차적인 해석입니다. 자연에 대한 부분적 지식이거나 그 부분적 지식을 재구성한 언어와 논리들입니다. 당연히 자연으로부터 일정하게 괴리된 것이 아닐 수 없지요. 이러한 것을 숭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는 오직 농부만이 일찍 도를 따르게 된다고 합니다(夫唯嗇 是以早服: 제59장). 자연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구하기 어려운 물건(貨)을 귀하게 여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화貨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화는 자기가 만든 농산물이 아니라 공산품工産品이라고 해야 합니다. 당시의 공산품은 직접적 생산품이 아니고, 또 1차적인 필수품도 아니었다고 해야 합니다. 화貨란 경제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상품입니다. 그 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가 속성인 물건이 화입니다. 현賢이 2차적인 재구성이듯이 화도 자연산이나 농산물이 아니라 2차 생산품인 공산품입니다.

……

오늘날은 농산물에 비해 공산품의 가격이 훨씬 비쌉니다. 사람이 만든 것보다 기계가 만든 것이 훨씬 더 비쌉니다. 네팔에서 느낀 것입니다만 수입 전자 제품은 네팔 사람들로서는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고가인 반면에, 엄청난 수고가 담겨 있는 수공예품은 그 값이 거저나 다름없었습니다. 볕바른 좌판에 놓여 있는 수공예품 앞에 앉아서 너무나 낮은 가격에 당사자가 아닌 내가 마음 아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외환 제도나 시장가격이란 고도의 수탈 메커니즘이 아닐 수 없습니다.

                                                                      278 ~ 279


  정치경제학 개념으로 이야기하자면 상부구조보다는 하부구조를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정치학입니다. 한 사회의 물적 토대를 튼튼히 하는 것, 이것이 정치의 근간임은 물론입니다. IMF 사태 때 우리 사회의 허약한 토대가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경제학 강의가 아니기 때문에 길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만 IMF 사태는 한마디로 자립적 토대가 허약하기 때문에 겪은 환란이었지요. 복과 골이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사태였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것은 IMF 극복 방식이 복과 골의 강화를 외면하고 임시 미봉책으로 일관되었다는 사실입니다. IMF 사태 이후에 자주 듣고 있는 구조 개혁이나 구조 조정은 엄밀한 의미에서 구조에 관한 것이 아니지요. 토대의 개혁이 아닌 미봉적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미봉책으로는 같은 돌에 두 번 세 번 넘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280


  노자는 또 지자智者들로 하여금 함부로 무엇을 벌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지자들이 벌이는 일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자가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일들을 지자가 저지르고 있는 것이지요. 현賢을 숭상하고, 난득지화難得之貨를 귀하게 여기게 하고, 욕망 그 자체를 생산해내고, 심지心志를 날카롭게 하는 등 작위적인 일을 벌이는 사람들이 지자들이지요. 자본주의 체제하의 지자들은 특히 그러할 수밖에 없습니다.

                                                                      281 ~ 282


노자 정치학의 압권이 바로 ‘생선 굽는’ 이야기입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治大國若烹小鮮: 제60장)는 것이지요. 생선을 구울 때 생선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집다가 부스러뜨리는 것이 우리들의 고질입니다. 생선의 비유는 일상생활의 비근한 예를 들어서 친근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모습이나 소위 국가와 사회를 경영하는 방식을 반성할 수 있는 정문일침頂門一鍼의 화두가 아닐 수 없습니다.

                                                                      282 ~ 283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제8장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다툰다는 것은 어쨌든 무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목표 설정에 무리가 있거나 아니면 그 경로의 선택이나 진행 방식에 무리가 있는 경우에 다투게 됩니다. 주체적 역량이 미흡하거나 객관적 조건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과도한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에는 그 진행 과정이 순조롭지 못하고 당연히 다투는 형식이 됩니다. 무리無理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지요. 쟁爭이란 그런 점에서 위爲의 다른 표현이고 작위作爲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 못 되는 것을 노자는 ‘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손자병법』에 ‘전국위상全國爲上 파국차지破國次之’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라를 깨트려서 이기는 것(破國)은 최선이 못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

물은 결코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산이 가로막으면 멀리 돌아서 갑니다.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비켜갑니다. 곡류曲流하기도 하고 할수割水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가파른 계곡을 만나 숨 가쁘게 달리기도 하고 아스라한 절벽을 만나면 용사처럼 뛰어내리기도 합니다. 깊은 분지를 만나면 그 큰 공간을 차곡차곡 남김없이 채운 다음 뒷물을 기다려 비로소 나아갑니다. 너른 평지를 만나면 거울 같은 수평을 이루어 유유히 하늘을 담고 구름을 보내기도 합니다.

                                                                      284 ~ 285


『노자』는 지식인 내부의 비판 담론이며, 근본에 있어서 고도의 제왕학帝王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도가道家의 무리는 대개 사관史官에서 나왔으며 이는 인군人君이 나라를 다스리는 술수術數를 기술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소위 ‘무위의 통치’는 군주의 비밀 정치론이라는 것이지요.

                                                                      286


고전 독법의 요체는 일관성입니다. 전체의 의미 맥락에 따라서 읽어야 하고 현대적 의미를 재조명하는 관점에서 읽는 일입니다.

                                                                      290


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제11장

서른 개의 바퀴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그 속이 ‘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

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無)으로 해서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따라서

유有가 이로운 것은 무無가 용用이 되기 때문이다.


수레의 곡轂은 바퀴살이 모이는 통(hub)입니다. 이 곡에 축軸을 끼웁니다. 곡에 축을 끼움으로써 수레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 곡이 비어 있어야 축을 끼울 수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릇의 속이 비어 있기 때문에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기고, 방의 빈 공간이 방으로서의 쓰임이 된다는 것 또한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노자의 관점은 그런 자명한 사실을 이야기하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명한 사실의 배후를 드러내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누구나 수레를 타고, 그릇을 사용하고, 방에서 생활하지만 그것은 수레나 그릇이나 방의 있음(有)에만 눈을 앗기어 막상 그 있음의 배후(無)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지요. 숨어 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즉 유有의 배후로서의 무無를 드러내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고 이 장의 의미입니다.

……

누군가의 기쁨이 누군가의 아픔의 대가라면 그 기쁨만을 취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는 것이지요.

                                                                      292 ~ 293


정치가는 진심으로 백성들을 신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정치적 목표는 백성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그러한 지혜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지요. 백성들의 생각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집단적인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 도달한 결론입니다. 충분한 임상학적 과정을 거친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결론인 셈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백성들에게 과연 독자적인 판단 능력이 있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고 있는 지식인의 경우가 더 회의적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가 가동시키고 있는 막강한 우민화愚民化 메커니즘은 더욱 회의적이게 합니다.

                                                                      292 ~ 293


정치가는 진심으로 백성들을 신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정치적 목표는 백성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그러한 지혜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지요. 백성들의 생각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집단적인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 도달한 결론입니다. 충분한 임상학적 과정을 거친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결론인 셈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백성들에게 과연 독자적인 판단 능력이 있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고 있는 지식인의 경우가 더 회의적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가 가동시키고 있는 막강한 우민화愚民化 메커니즘은 더욱 회의적이게 합니다.

                                                                      296 ~ 297



에이즈만 하더라도 원래 에이즈 바이러스는 침팬지에게 안정적으로 서식하던 바이러스라고 합니다. 그것이 환경의 변화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옮겨오면서 결정적인 질병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지요.

                                                                      298


小國寡民 使有什伯之器而不用 使民重死而不遠徙

   雖有舟輿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使民復結繩而用之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隣國相望 鷄犬之聲相聞 民至老死 不相往來        ―제80장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다. 많은 기계가 있지만 사용하지 않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생명을 소중

   히 여기게 하고 멀리 옮겨다니지 않도록 한다. 배와 수레가 있지만 그것을 탈 일이 없고, 무기가

   있지만 그것을 벌여놓을 필요가 없다. 백성들은 결승문자를 사용하던 문명 이전의 소박한 생활

   을 영위하며, 그 음식을 달게 여기고, 그 의복을 아름답게 여기며, 거처를 편안하게 여기며 풍속

   을 즐거워한다.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볼 정도이고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릴 정

   도로 가까워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내왕하지 않는다.


……

노자 사상은 상당 부분이 법가 사상으로 계승되기도 합니다. ‘상선약수’를 설명하면서 언급했습니다만, 진시황의 분서갱유도 사실은 노자를 계승한 것이라고 평가됩니다. 『노자』는 도교의 기본 교리로 경전화되기도 하고, 불교 사상의 정착과 송대宋代 성리학性理學의 본체론本體論과 인식론認識論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입니다. 그 이외에도 문학, 회화, 예도藝道, 무도舞蹈, 그리고 무위無爲의 관조적 삶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분야에 걸쳐 깊이와 다채多彩를 더했다고 평가됩니다. 한비자韓非子의 통어술統御術, 병가兵家의 허실 전법虛實戰法도 노자의 영향에서 발전했음은 물론입니다.

                                                                      304 ~ 305

제7장 장자의 소요



『장자』는 그 전편에 흐르는 유유자적하고 광활한 관점을 높이 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이론과 사상뿐만 아니라 모든 현실적 존재도 그것은 드높은 차원에서 조감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조감자 자신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존재는 우물 속의 개구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부분이고 찰나라는 것을 드러내는 근본주의적 관점이 장자 사상의 본령입니다. 바로 이 점에 『장자』에 대한 올바른 독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논어』와 『맹자』의 세계는 지극히 상식적인 세계입니다. 이 상식의 세계란 본질에 있어서 기존의 논리를 승인하는 구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그것은 답습의 논리이며, 기득권의 논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당 부분 복고적이기까지 하지요. 장자는 이 상식적 세계와 세속적 가치를 일갈一喝하고 일소一笑하고 초월하고 있습니다. 장자의 이러한 초월적 시각은 대단히 귀중한 것입니다.

다.

                                                                      317


『사기』 「노장신한 열전」老莊申韓列傳에 장자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몽蒙(하남성 상구현商丘縣 동북부) 출신으로 이름은 주周이며, 양혜왕梁惠王·제선왕齊宣王·맹자와 동시대인으로서 박학하였고, 근본은 『노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몽이란 곳은 장자 당시에는 송宋이라는 작은 나라에 속했습니다. 송나라에 대해서는 앞선 『논어』 강의에서 이야기했지요. 은殷나라 유민들의 나라입니다. 송나라는 옛날부터 사전지지四戰之地라고 불릴 정도로 사방으로 적을 맞아 싸우지 않을 수 없었고 수많은 전화戰禍를 입었던 불행한 나라였습니다. 전국시대를 통하여 이 지역만큼 전란의 도가니에 휩싸인 곳도 달리 없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약소국의 비애와 고통, 기아飢餓와 유망流茫 등 이 지역의 백성들이 겪은 모진 역사가 바로 장자 사상의 묘판苗板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자가 칠원리漆園吏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장자는 약소국의 가혹한 현실에서 자신의 사상을 키워낸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부자유와 억압의 극한 상황에서 그의 사상 세계를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렇기에 그가 생각한 1차적 가치는 ‘생명生命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 없는 질서’보다는 ‘생명 있는 무질서’를 존중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반反생명적인, 반자연적인 그리고 반인간적인 모든 구축적(construct) 질서를 해체(deconstruct)하려는 것이 장자 사상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차적으로 정신의 자유입니다. ‘우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319 ~ 320


   아내가 죽었을 때 장자는 술독을 안고 노래했다는 일화가 수긍이 갑니다. 인간의 상대적인 행복은 본성의 자유로운 발휘로써 얻을 수 있지만 절대적인 행복은 사물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절대적 행복과 절대적 자유는 사물의 필연성을 이해하여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장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의 필연성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즉 도道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과의 합일合一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자의 이리화정以理化情입니다. 도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도를 깨닫는 것은 이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요. 정서적 공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지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이해가 못 된다고 해야 합니다. 정서적 공감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입니다. 장자의 이리화정은 가슴으로 느끼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머리보다는 가슴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교실과 책과 시험으로 채워진 학교 시절을 끝내고, 싱싱한 삶의 실체들과 부딪치며 살아가기 시작하면 이 말이 절실하게 가슴에 와닿으리라고 생각합니다.

                                                                      327 ~ 328


爲圃者忿然作色而笑曰

   吾聞之吾師 有機械者 必有機事 有機事者 必有機心

   機心存於胸中 則純白不備 純白不備 則神生不定

   神生不定者 道之所不載也 吾非不知 羞而不爲也        ―「天地」


밭일을 하던 노인은 불끈 낯빛을 붉혔다가 곧 웃음을 띠고 말했다. “내가 스승에게 들은 것이지만 기계라는 것은 반드시 기계로서의 기능(機事)이 있게 마련이네.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機心),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 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네(純白不備).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神生不定) 생명이 자리를 잃으면 도道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네. 내가 (기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네.”

                                                                      328 ~ 329


 1810년대에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을 여러분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영국에서 일어난 기계 파괴 운동입니다. 기계로 말미암아 일터를 잃은 노동자들이 기계 파괴에 나섰던 것이지요. 기계가 사람을 쫓아냈기 때문이었어요. 기계로 인한 실업, 즉 상대적 과잉인구를 문제로 파악한 것이지요.

                                                                      331


  장자가 제기하는 것은 경제학에서 다루는 문제보다는 훨씬 더 근원적인 것입니다. 도道의 문제입니다. 도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그 편리성을 충분히 알고 있지만 채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순백한 생명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용두레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지요. 순백한 생명이 안정되려면 자연과의 조화가 필요한 것은 물론입니다. 우리의 삶은 도와 함께 소요하는 것이어야 하지요. 장자의 체계에 있어서 노동은 삶이며, 삶은 그 자체가 예술이 되어야 하고, 도가 되어야 하고, 도와 함께 소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여러분은 사람과 기계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주관적’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마 여러분은 주관적인 것은 사람이고 기계는 철저하게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기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것이 철저하게 주관적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한 포기 풀이 자라는 것을 보더라도 그 풀은 햇빛과 물과 토양과 잘 어울리며 살아갑니다. 추운 겨울에는 깜깜한 땅속에서 뿌리로만 견디며 봄을 기다릴 줄 압니다. 그러나 기계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일을 못합니다. 남이야 어떻든 철저하게 자기 식대로 합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거나 주변 조건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습니다.

                                                                      332 ~ 333


 장자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기계와 효율성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반성이 효율성 논의에 그치지 않고 근대 문명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계보다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효율성보다는 깨달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를 복원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것은 우리의 현실이 그러한 반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장자가 우려했던 당시의 현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333


齊桓公讀書於堂上 輪扁?輪於堂下

   釋椎鑿而上 問桓公曰 敢問公之所讀者 何言邪

   公曰 聖人之言也

   曰 聖人在乎 公曰 已死矣

   曰 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

   桓公曰 寡人讀書 輪人安得議乎 有說則可 無說則死

   輪扁曰 臣也 以臣之事觀之 斲輪徐則甘而不固 疾則苦而不入

   不徐不疾 得之於手 而應於心 口不能言

   有數存焉於其間 臣不能以喩臣之子 臣之子亦不能受之於臣

   是以行年七十而老斲輪 古之人 與其不可傳也 死矣

   然則 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        ―「天道」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당상堂上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목수 윤편輪扁이 당하堂下에서 수레바

   퀴를 깎고 있다가 망치와 끌을 놓고 당상을 쳐다보며 환공에게 물었다.

   “감히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책은 무슨 말(을 쓴 책)입니까?”

   환공이 대답하였다. “성인聖人의 말씀이다.”

   “그 성인이 지금 살아 계십니까?”

   “벌써 돌아가신 분이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읽고 계신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군요.”

   환공이 말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목수 따위가 감히 시비를 건단 말이냐. 합당한 설명을 한다면 괜찮겠지

   만 그렇지 못하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윤편이 말했다.

   “신은 신의 일(목수 일)로 미루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수레바퀴를 깎을 때 많이 깎으면

   (축軸 즉 굴대가)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굴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정확한 깎음은 손짐작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뿐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

   다. (물론 더 깎고 덜 깎는) 그 중간에 정확한 치수가 있기는 있을 것입니다만, 신이 제 자식에

   게 그것을 말로 깨우쳐줄 수가 없고 제 자식 역시 신으로부터 그것을 전수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흔 살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손수 수레를 깎고 있습니다. 옛사람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전하지 못하고(글로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

   문에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36 ~ 337


목수 장석匠石이 제나라로 가다가 사당 앞에 있는 큰 도토리나무를 보았다. 그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덮을 만하였고, 그 둘레는 백 아름이나 되었으며, 그 높이는 산을 위에서 내려다

   볼 만하였다. …… 구경꾼들이 장터를 이루었지만 장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가버렸다.

   그의 제자가 장석에게 달려가 말했다.

   “제가 도끼를 들고 선생님을 따라다닌 이래로 이처럼 훌륭한 재목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데도 선생님께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장석이 말했다.

   “그런 말 말아라. 쓸데없는 나무다. 그것으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만들면 빨리 썩어버

   리고, 그릇을 만들면 쉬이 깨져버리고, 문짝을 만들면 나무진이 흘러내리고, 기둥을 만들면 곧

   좀이 먹는다. 그것은 재목이 못 될 나무야. 쓸모가 없어서 그토록 오래 살고 있는 것이야.”

   장석이 집에 돌아와 잠을 자는데 그 큰 나무가 꿈에 나타나 말했다.

   “그대는 나를 어디에다 견주려는 것인가? 그대는 나를 좋은 재목에 견주려는 것인가? 아니면

   돌배, 배, 귤, 유자 등 과일나무에 견주려는 것인가? 과일나무는 과일이 열리면 따게 되고, 딸

   적에는 욕을 당하게 된다.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찢어진다. 이들은 자기의 재능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는 것이지. 그래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이다.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세상 만물이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다. 나는 쓸모없기를 바란

   지가 오래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뜻대로 되어 쓸모없음이 나의 큰 쓸모가 된

   것이다. 만약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 커질 수 있었겠는가? 그대와 나는 다 같이 하

   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하여 서로를 하찮은 것이라고 헐뜯을 수 있겠는가? 그대처럼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쓸모없는 사람이 어찌 쓸모없는 나무를 알 수가 있겠는가?”

                                                                      342


 方舟而濟於河 有虛船 來觸舟 雖有惼心之人不怒

   有一人在其上 則呼張歙之 一呼而不聞 再呼而不聞

   於是三呼邪 則必以惡聲隨之

   向也不怒而今也怒 向也虛而今也實

   人能虛己以遊世 其孰能害之        ―「山木」


   「산목」에서 예문을 하나 더 골랐습니다. 축자逐字 해석은 하지 않겠습니다. 전체의 뜻을 중심으로 읽어보기로 하지요.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떠내려와서 자기 배에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비키라고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

   면 두 번 소리치고 두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세 번 소리친다. 세번째는 욕설이 나오게 마련이

   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

   이다.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342 ~ 343


장자의 ‘나비 꿈’은 두 개의 사실과 두 개의 꿈이 서로 중첩되어 있는 매우 함축적인 이야기입니다. 첫째는 장자가 꾸는 꿈이며 둘째는 나비가 꾸는 꿈입니다. 이 두 개의 꿈은 나비와 장자의 실재實在가 서로 침투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9만 리 장공長空을 날고 있는 붕새의 눈으로 보면 장주와 나비는 하나라는 것이지요. 장주와 나비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는 개별적 사물은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커다란 전체의 미미한 조각에 불과한 것이지요. 개별적 사물과 그 개별적 상相을 하나로 아우르는 깨달음이 바로 ‘제물론’齊物論입니다.

                                                                      345


 내가 아는 분 중에 별을 보러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모임의 이름이 ‘별 부스러기 회’입니다. 이름이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존재는 별의 부스러기라는 것이지요. 달이든 별이든 북극성이든 은하계든 그리고 돌멩이 한 개,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별의 부스러기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대폭발 이론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나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이 우주의 모든 물物은 별의 부스러기라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그 이름에서 매우 무한한 관계성을 느낍니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불이성不二性의 세계입니다.


   지금도 재미있게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별 부스러기 회’의 나이 많은 분들이 회의 이름을 따로 만들어 ‘성진회’星塵會로 하였다고 했어요. 기성세대는 이름이 한자로 되어야, 권위는 아니라 하더라도 상당한 실체감을 느끼는가 보다고 했어요. 그런 낡은 정서를 우습다고 했지요.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진회라는 어감에서 느껴지는 실체감이 사실은 불이성의 세계관과 배치되는 것이기도 하고 또 그 정서에 있어서도 동떨어진 것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사실은 나는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별 부스러기 회’보다는 ‘별똥회’가 낫다고 생각했지요. 아마 농촌 정서가 없는 젊은 사람들은 똥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가 보다고 생각했지요. 물론 ‘별 부스러기 회’의 정서도 이해는 가지요. 이를테면 별똥회라고 했을 경우 자칫 혜성 관찰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 같은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부스러기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는 달관의 정서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도 들었을 것입니다. 본론에서 빗나간 이야기였습니다만 크게 보면 관계없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347 ~ 348


 지식이란 의거하는 표준이 있은 연후에 그 정당성이 검증되는 법인데 (문제는) 그 의거해야 하

   는 표준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인위적인 것은 아닌지

   그리고 내가 인위적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자연이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350


장자가 바야흐로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제자들이 장례를 후히 치르고 싶다고 했습니다.

   장자가 그 말을 듣고 말했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을 널(棺)로 삼고, 해와 달을 한 쌍의 옥玉으로 알며, 별을 구슬로 삼고, 세상 만물을 내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있네. 이처럼 내 장례를 위하여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무엇을 또 더한단 말이냐?”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의 시신을 파먹을까 봐 염려됩니다.”

   장자가 대답했습니다.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솔개의 밥이 될 것이고, 땅속에 있으면 땅강아지와 개미의 밥이 될 것이다. (장례를 후히 지내는 것은) 한쪽 것을 빼앗아 다른 쪽에다 주어 편을 드는 것일 뿐이다. 인지人知라는 불공평한 측도로 사물을 공평하게 하려고 한들 그것은 결코 진정한 공평이 될 수 없는 것이다.”

……

『노자』와 『장자』의 차이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것을 하나로 묶어서 이해하는 태도를 갖기 바랍니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를 묶어서 하나의 사회 변동 과정으로 이해하듯이, 『노자』와 『장자』도 하나로 통합하여 서로가 서로를 도와서 완성하게끔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새삼스레 『노자』와 『장자』가 어떻게 서로 보완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과제로 남겨두겠습니다.

                                                                      354 ~ 355


제8장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주류 사상, 비주류 사상이라는 구분과 관련하여 잠시 사상 일반의 사회적 위상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상은 자각적 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정의됩니다. 자각적이라는 의미는 개인을 그 사상의 담당자로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의 개인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연인으로서의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상의 담당자로서의 개인에 대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자각적 체계로서의 사상과 그 사상의 담당자로서의 개인은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기보다는 사상의 사회적 존재 양식의 일환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으로서의 묵자와 순자, 한비자에 대하여 특별한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지요. 사상은 개인에 앞서서 반드시 ‘사상적 과제’가 먼저 존재합니다. ‘누구의’ 사상이기에 앞서 반드시 ‘무엇’에 관한 사상이게 마련입니다.

  

   사상이란 일정한 사회적 조건에서 생성되는 것이지만 그 사회적 조건이 변화하면 사상도 사상사思想史의 장場으로 물러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상을 사회 역사 속에 해소시킬 수 없는 이유가 방금 이야기한 그 자각적 체계 때문입니다. 자각적 체계 때문에 사상 자체로서의 독자성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의미의 독자성은 역시 제한적 의미로 이해하는 태도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상이란 독자성에 앞서 시대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경우든 시대가 사상을 낳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음은 물론입니다.

   

   따라서 학파 간의 차이는 그 시대의 과제를 인식하는 관점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 학파 간의 차별화가 진행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 학파 간의 침투가 진행되는 것이 사상사의 일반적 발전 과정입니다. 여러 시내가 몸을 섞어 강이 되듯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호 침투합니다.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과제를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각 학파가 전개하는 논리적 정합성은 당대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지적 수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학파 간의 차이는 접근로와 강조점이 조금씩 다를 뿐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주류 사상이든 비주류 사상이든 결국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리 합의해두려고 하는 것이지요.

                                                                      362 ~ 363


‘묵’墨이란 우리말로 먹입니다만, 묵자墨子의 묵墨은 죄인의 이마에 먹으로 자자刺字하는 묵형墨刑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가墨家란 형벌을 받은 죄인들의 집단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설령 형벌과 죄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검은색을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검은색은 노역奴役과 노동주의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검은 노동복을 입고 전쟁을 반대하고 허례虛禮와 허식虛飾을 배격하며 근로와 절용節用을 주장하는 하층민이나 공인工人들의 집단이 묵가라는 것입니다.

  

   묵자는 성姓이 적翟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을 묵적墨翟이라고 한 것은 묵형을 받았다는 사실을 표명하는 뜻에서 그것을 성으로 사용했다는 것이지요. 과거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름으로 삼는다는 것은 심상한 것이 아니지요. 나도 오랫동안 수형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런 정서를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만 묵적처럼 형벌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름으로 삼아 공공연히 밝힌다는 것은 그 형벌이 부당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또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언하는 것이지요. 오히려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반체제적 성격을 분명히 선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64 ~ 365


검은색은 이처럼 묵자의 면모를 구체화해줍니다.

  

   둘째로는 근검 절용하며 실천궁행實踐躬行하는 모습입니다. 검소한 실천가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히려 묵가를 비판하는 글 속에서 쉽게 발견되고 있는데 모든 비판자들의 견해가 이 점에 있어서만은 일치하고 있습니다. 맹자에 따르면 “묵가는 보편적 사랑(兼愛)을 주장하여 정수리에서 무릎까지 다 닳아 없어진다 하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가가 주공周公을 모델로 했다면 묵가의 모델은 하나라의 우禹임금입니다. 우임금은 황하의 치수를 담당하여 장딴지와 정강이의 털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신명을 바쳐 일했던 사람입니다. 자기 집 앞을 세 번이나 그냥 지나간 것으로 유명한 임금입니다.

  

   묵가의 검소하고 실천적인 모습은 ‘묵돌부득검’墨칚不得黔이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묵자의 집은 아궁이에 불을 지피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기 때문에 굴뚝에 검댕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자신들의 이상적 모델을 유가 모델보다 더 윗대인 우임금에까지 소급하여 설정함으로써 학파의 권위를 높이려 했다는 견해도 없지 않습니다만, 묵가가 유가와는 그 사회적 기반을 달리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묵자는 일찍이 유학에 입문했으나 비유非儒를 천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가란 예를 번잡하게 하여 귀족들에게 기생하는 무리라는 것이 묵자의 유가관儒家觀입니다. 우임금의 실천궁행을 모델로 삼은 것은 유가가 모델로 삼고 있는 주周나라의 계급 사회가 아닌 하夏나라의 공동체 사회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

『장자』에서도 묵가를 평하여 “살아서는 죽도록 일만 하고 죽어서도 후한 장례 대신 박장薄葬(간소한 장례)에 만족해야 했으니, 그 길은 너무나 각박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묵자는 다른 학파의 사람들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매우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층 민중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며 검소한 삶을 영위하고 신명을 다하여 실천궁행하는 모습이 묵가의 이미지입니다.

                                                                      365 ~ 367


공자와 묵자는 다 같이 춘추전국시대의 사회적 상황을 ‘사회적 위기’로 파악했습니다. 무도無道하고, 불인不仁하고, 불의不義한, 이기적이고 파멸적인 시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공자와 묵자는 현실 인식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묵자는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세 가지의 고통을 받고 있는 바, 주린 자는 먹을 것이 없고, 추운 자는 입을 것이 없고, 일하는 자는 쉴 틈이 없다(有三患 飢者不食 寒者不衣 勞者不息)고 했습니다. 이러한 현실 인식을 보더라도 묵자가 기층 민중의 고통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69 ~ 370


공자는 서주西周 이래의 예악禮樂에 나타난 귀족 중심의 통치 질서를 새로운 지식인(君子)의 자기 수양과 덕치德治의 이념을 통하여 회복(維新)하려고 노력했지요. 이에 반하여 묵자는 종래 귀족 지배 계층의 행동 규범인 예악을 철저히 부정하고 유가의 덕치 이념 대신에 생산에 참여하는 모든 인민의 협동적 연대(兼相愛)와 경제적 상호 이익(交相利)을 통하여 사회를 새롭게 조직하려고 했습니다. 유가와는 달리 숙명론을 배격하고 인간의 실천 의지, 즉 힘(力)을 강조합니다. 실천 의지를 추동推動하기 위한 장치로서 귀鬼와 신神의 존재를 상정하고, 그리고 천자의 절대적 통치권을 주장합니다. 만민 평등의 공리주의公利主義와 현자 독재론賢者獨裁論을 표방합니다. 묵가 학설의 이러한 개혁성과 민중성은 유가 사상과 대항하면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372 ~ 373


聖人以治天下爲事者也 必知亂之所自起 焉能治之 不知亂之所自起 則不能治 譬之 如醫之   攻人之疾者然 必知疾之所自起 焉能攻之 不知疾之所自起 則弗能攻 治亂者 何獨不然        ―「兼愛」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혼란의 원인을 알아야 다스릴 수 있으며 그 원인을 알지 못하면 다스릴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면 고칠 수 없는 것과 같다. 사회의 혼란을 다스리는 것 역시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

强必執弱 富必侮貧 貴必傲賤 詐必欺愚

   凡天下禍纂怨恨 其所以起者 以不相愛生也        ―「兼愛」

……

然則兼相愛 交相利之法 將奈何哉

   子墨子言 視人之國若視其國 視人之家若視其家

   視人之身若視其身        ―「兼愛」

   그렇다면 겸상애와 교리지법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묵자가 말하기를, 그것은 다른 나라를 자기 나라 보듯이 하고, 다른 가家 보기를 자기 가 보듯이 하고, 다른 사람 보기를 자기 보듯이 해야 한다.

                                                                      373 ~ 375


 지금 여기 한 사람이 남의 과수원에 들어가 복숭아를 훔쳤다고 하자. 사람들은 그를 비난할 것이고 위정자는 그를 잡아 벌할 것이다. 왜? 남을 해치고 자기를 이롭게 했기 때문이다. 남의 개, 돼지, 닭을 훔친 사람은 그 불의함이 복숭아를 훔친 사람보다 더 심하다. 왜? 남을 해친 정도가 더 심하기 때문이다. 남을 더욱 많이 해치면 그 불인不仁도 그만큼 심하게 되고 죄도 더 무거워지는 것이다. 남의 마구간에 들어가 말이나 소를 훔친 자는 그 불의함이 개, 돼지나 닭을 훔친 자보다 더욱 심하다. 남을 해친 정도가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남을 해치는 정도가 크면 클수록 불인도 그만큼 심하게 되고 죄도 무거워지는 것이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옷을 뺏거나 창이나 칼을 뺏는 자는 그 불의함이 말이나 소를 훔친 자보다 더 심하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천하의 군자들이 모두 그것의 옳지 못함을 알고 그것을 비난하고 그것을 불의라고 부른다.

                                                                      378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관념 체계에 대하여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국시대는 이름 그대로 하루도 전쟁이 그치지 않는 시대였습니다. 묵자는 전쟁의 모든 희생을 최종적으로 짊어질 수밖에 없는 기층 민중의 대변자답게 전쟁에 대해서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것을 정면에서 반대합니다. 전쟁은 수천수만의 사람을 살인하는 행위이며, 수많은 사람의 생업을 빼앗고, 불행의 구렁으로 떨어트리는 최대의 죄악입니다. 단 한 줌의 의로움도 있을 수 없는 것이 전쟁입니다. 따라서 비공非攻, 즉 침략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사상이지요. 그런 점에서 반전 평화론이야말로 전국시대 최고의 사상이며 최상의 윤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379


今萬乘之國 虛數於千 不勝而入 廣衍數於萬 不勝而辟 然則土地者所有餘也 王民者所不足也 今盡王民之死 嚴上下之患 以爭虛城 則是棄所不足 而重所有餘也 爲政若此 非國之務者也        ―「非攻」

   이제 만승의 나라가 수천의 빈 성을 빼앗았다면 그 수천 개의 성 모두에 입성하기 어렵고, 수만 리에 달하는 넓은 땅을 빼앗았다면 그 넓은 땅을 모두 다스리기가 어렵다. 이처럼 땅은 남아돌고 백성은 부족하다. 이제 백성들의 생명을 바치고 모든 사람들을 도탄에 빠트리면서 하는 일이 고작 빈 성을 뺏는 것이라면 이것이야말로 부족한 것을 버리고 남아도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정치가 이러한 것이라면 그것은 국가가 할 일이 아닌 것이다.

                                                                      380


묵자께서 말씀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고 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을 거울   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공격 전쟁이 이롭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지백과 부차의 일을 거울로 삼지 않는가?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전쟁이야말로 흉물임을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是故 子墨子曰 古者有語曰 君子不鏡於水 而鏡於人 鏡於水 見面之容 鏡於人 則知吉與凶 今以攻戰爲利 則蓋嘗鑒之於智伯之事乎 此其爲不吉而凶 旣可得而之矣: 「非攻」)


마치 묵자가 오늘의 세계를 눈앞에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군사적 패권주의가 당장은 부강의 방책일 수 있지만 그것이 곧 패망의 길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묵자의 준엄한 반전 선언이 살아 있는 언어로 다가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울에 비추지 마라”는 묵자의 금언은 비단 반전의 메시지로만이 아니라 인간적 가치가 실종된 물신주의적 문화와 의식을 반성하는 귀중한 금언으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382


 묵자는 「비공」편의 결론으로 대국이 소국을 공격하면 힘을 합해 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국가들이 서로 교상리交相利의 국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평화 구조야말로 전쟁을 막고, 신의와 명성을 얻고, 천하에 엄청난 이익을 만드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전쟁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구조, 그것이 바로 국가 간의 교상리 구조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묵자는 단지 반전 평화를 주장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평화 구조를 제도화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논의를 진전시키고 있습니다. 다른 사상가들과 구별되는 묵자 특유의 경지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공수」편公輸篇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공수반公輸盤이라는 명장名匠이 초왕楚王에게 초빙되어 운제雲梯라는 공성 기구攻城機具(성을 공격하는 기구)를 제작했습니다. 초나라는 그것을 이용하여 송宋을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묵자가 제나라를 출발하여 열흘 낮 열흘 밤을 달려가서 초나라로 하여금 전쟁을 단념하게 합니다.

   이 「공수」편에는 묵자와 공수반과 초왕이 논전을 벌이는 광경이 소설적 구도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반전 논리도 돋보이지만 전쟁을 막기 위한 묵자의 성실한 태도가 더욱 감동적입니다. 묵자가 반전 논리로 초나라의 침략 의도를 저지할 수 없게 되자 초나라의 공격이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단언합니다. 결국 묵자와 공수반의 도상 전쟁圖上戰爭이 연출됩니다. 일종의 모의 전쟁입니다. 허리띠를 끌러 성을 만들고 나무 조각으로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공수반이 공성 방법을 바꾸어 아홉 번이나 성을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묵자는 아직도 방어술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공방攻防 시범에서 공수반은 패배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내게는 선생을 이기는 방법이 있으나 이 자리에서 밝힐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초왕이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 물음에 대한 답변은 공수반이 아니라 묵자가 했습니다.

“공수반의 말은 나를 이 자리에서 죽이면 송나라를 공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저의 제자들은 금활리禽滑釐 이하 300명이 이미 저의 방성 기구를 가지고 송나라의 성 위에서 초나라 군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록 저를 죽인다 하더라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여 묵자는 기어코 초나라의 송나라 침략을 저지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것입니다만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그 뒤에 이어집니다. 묵자가 돌아가는 길에 송나라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마침 비가 내려서 묵자는 마을 여각閭閣 아래로 들어가 비를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문지기는 묵자를 들이지 않았습니다. 송나라를 위하여 열흘 밤낮을 달려가 초나라의 침략을 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를 박대했습니다.

                                                                      383 ~ 385


止楚攻宋 止楚攻鄭 阻齊罰魯

   墨子過宋天雨 庇其閭中 守閭者不內也

   故曰 治於神者 衆人不知其功 爭於明者 衆人知之        ―「公輸」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저지하였고, 초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저지하였으며,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막았다. 묵자가 송나라를 지날 때 비가 내려서 마을 여각에서 비를 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문지기가 그를 들이지 않았다.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드러내놓고 싸우는 사람은 알아준다.


   미리 아궁이를 고치고 굴뚝을 세워 화재를 예방한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우면서 요란하게 불을 끈 사람은 그 공을 칭찬하는 것이 세상의 인심인 셈이지요. 개선장군에 대한 환호가 그러한 것입니다.

                                                                      385 ~ 386


키예프에는 전승 기념탑이 있습니다. 2차 대전의 승리를 기념하는 탑입니다. 나는 그 탑을 보면서도 그것이 전승 기념탑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나의 뇌리에 전승 기념탑은 미 해병대 병사들이 점령한 고지에 성조기를 세우는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키예프의 전승 기념탑은 언덕 위에 팔 벌리고 서 있는 모상母像이었습니다. 내가 의아해 하자 안내자가 설명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아들이 죽지 않고 돌아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돌아오는 아들을 맞으러 언덕에 서 있는 어머니의 상像이야말로 그 어떠한 것보다도 전승의 의미를 절절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어요.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전쟁과 승리에 대한 나의 생각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가가 여지없이 드러난 것이지요.

                                                                      386 ~ 387


子墨子見染絲者 而歎曰 染於蒼則蒼 染於黃則黃

   所入者變 其色亦變

   五入必而已則 爲五色矣 故染不可不愼也

   非獨染絲然也 國亦有染        ―「所染」


묵자가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했다. 파란 물감에 물들이면 파랗게 되고 노란 물감에 물들이면 노랗게 된다. 넣는 물감이 변하면 그 색도 변한다. 다섯 가지 물감을 넣으면 다섯 가지 색깔이 된다. 그러므로 물드는 것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단 실만 물드는 것이 아니라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

                                                                      388


何謂三表 …… 有本之者 有原之者 有用之者

   於何本之 上本於古者聖王之事

   於何原之 下原察百姓耳目之實

   於何用之 發以爲刑政 觀其中國家百姓人民之利

   此所謂言有三表也        ―「非命 上」

   무엇을 삼표라고 하는가. …… 본本, 원原, 용用이 그것이다. 어디에다 본本할 것인가? 위로 옛 성왕聖王의 일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어디에다 원原할 것인가? 아래로 백성들의 이목(현실)을 살펴야 한다. 어디에다 용用할 것인가? 나라의 법과 행정이 시행(發)되어 그것이 국가, 백성, 인민의 이익에 합치하는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소위 판단(言)의 세 가지 표준이라고 한다.

……

이처럼 묵자 사상의 근본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용·절장節葬·사과 등 근검절약할 것을 주장하여 자연의 질서와 사회적 구조를 함께 온전히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묵자 사상은 인간관계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성을 철학적 토대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철학적 입장에 있어서 어느 학파의 사상보다도 관계론에 철저합니다. 이러한 철학적 입장이 겸애와 교리라는 사회적 가치로 구현되고 다시 이 겸애와 교리가 당대의 사회적 조건에서 반전 평화, 절용이라는 실천적 과제와 통합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공전攻戰과 별애別愛는 존재론적 논리입니다. 자기의 존재를 배타적으로 강화하려는 강철의 논리입니다. 전쟁과 병합은 기본적으로 존재론적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존재론적 구성 원리가 청산되지 않는 한 사회적 혼란은 종식될 수 없다는 것을 묵자는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국國만을 생각하고, 자기의 가家만을 생각하고, 자기의 몸(身)만을 생각하는 것이 존재론적 논리입니다. 이러한 존재론적 논리가 청산되지 않는 한 사회는 무도無道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393 ~ 394


비명이란 하늘이 정한 운명과 숙명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화복禍福은 인간이 자초하는 것이며 결코 하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묵자는 은나라와 하나라의 시詩를 인용하여 “천명天命이란 폭군이 만들어낸 것이다”(命者暴王作之)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폭군이 자의적인 횡포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것이 천명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묵자의 천天은 인격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노자의 도와 같은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395


묵가에 대해서 가장 신랄한 비판을 가한 사람은 맹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는 물론 『맹자』 편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묵가만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닙니다만 주로 묵가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자기 이론의 정체성을 확립해갑니다. 맹자는 묵가의 고결한 가치인 엄격성과 비타협성 그 자체를 비판합니다. 그리고 겸애라는 이상주의적 가치에 대해서도 그것이 인지상정에 어긋나는 것임을 비판합니다.

   『맹자』에 맹자와 제자 도응桃應의 대화가 있습니다. 도응이 질문하였습니다. 순舜이 천자로 있고 고요皐陶가 사법관으로 있는데 천자의 부친인 고수┩앎가 살인을 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하필 순임금과 그 아버지 고수를 예로 든 것은 부자간의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했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맹자의 답변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고수는 당연히 법에 따라 체포되어야 하고, 살인자를 사형에 처하는 것은 선왕의 법이기 때문에 순임금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맹자의 답변입니다. 그러면 순임금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맹자의 대답이 압권입니다. 이 답변이 유가와 묵가의 차이를 확연하게 드러내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순은 임금 자리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몰래 부친을 업고 도망가 멀리 바닷가에 숨어 살면서 부친을 봉양하고 천하를 잊고 즐거운 마음으로 여생을 보내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맹자의 대답입니다. 임금의 사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을 처단한 묵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방식은 효孝라는 이름으로 별애別愛를 두호斗護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논어』에도 유가와 묵가의 차이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섭공葉公과 공자의 대화입니다. 섭공이 공자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고을에 대쪽같이 곧은 사람으로 직궁直躬이 있습니다. 그 아비가 양을 훔치자 그가 그 사실을 관청에 고발했습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우리 고을의 곧은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비록 그런 일이 있더라도) 아비는 자식을 위해, 그리고 자식은 아비를 위해 감추어줍니다. 곧음은 그 가운데 있습니다.”

……

실천 행위는 과도하였으며 절제는 지나치게 엄정하였다. 「비악」非樂과 「절용」을 저술하였다. 사람이 태어나도 찬가를 부르지 않으며 죽어도 상복을 입지 않았다. 묵자는 만인의 사랑과 만인들 간의 이익을 말하고 서로의 투쟁을 반대했으니 그는 실로 분노하지 말 것을 설파한 것이다. 노래하고 싶을 때 노래하지 말고, 울고 싶을 때 울지 말고, 즐거울 때 즐거워하지 말아야 한다면 이런 묵가의 절제는 과연 인간의 본성과 맞는 것인가? 묵가의 원칙은 너무나 각박하다. 세상을 다스리는 왕도王道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묵자와 금활리禽滑釐의 뜻은 좋지만 실천은 잘못된 것이다. 스스로 고행을 자초하여 종아리에 살이 없고 정강이에 터럭이 없는 것으로 서로 경쟁을 벌이게 할 뿐이다. 사회를 어지럽히기에는 최상이요 다스리기에는 최하이다. 묵자는 천하에 참으로 좋은 인물이다. 이런 사람을 얻으려 해도 얻을 수 없다. 자기의 생활이 아무리 마른 나무처럼 되어도 자기의 주장을 버리지 않으니 이는 정말 구세救世의 재사才士라 하겠다.

                                                                      397 ~ 399


제9장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일반적으로 유학儒學은 객관파客觀派와 주관파主觀派로 나누어집니다. 사회질서와 제도를 강조하는 순자 계통이 객관파로 분류되고, 반대로 개인의 행위를 천리天理에 합치시키고자 하는, 다시 말하자면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는 맹자 계통이 주관파로 분류됩니다. 이러한 차이는 후에 기학파氣學派와 이학파理學派로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404


순자가 유가학파로부터 배척당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그의 천론天論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순자의 천天은 물리적 천입니다. 순자의 하늘은 그냥 하늘일 뿐입니다. 인간 세상은 하늘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유가의 정통적 천인 도덕천道德天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요. 순자는 종교적인 천, 인격적인 천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순자의 탁론卓論입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유가의 정통에서 벗어난 것이지요. 정통 유가와 결정적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바로 순자의 천론이고, 순자가 이단인 이유가 바로 천론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05


중요한 것은 인간의 실천적 노력이라는 것이지요. 순자의 ‘능참’은 ‘실천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이를 제어하여 활용할 것을 강조합니다. ‘자연은 만물을 만들었지만 다스리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순자의 인본주의적 관점입니다. 이것은 유가학파의 공통된 입장으로서 문화사관文化史觀, 발전사관發展史觀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하늘만을 하늘같이 바라보거나 하늘을 칭송하는 숙명론(聽天由命)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운명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운명이란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人定勝天)이 바로 순자의 사상 체계입니다. 능참, 즉 주체적 능동성을 발휘하여 인문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인문 세계의 창조와 관련하여 순자는 결국 유가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천론天論, 능참론能參論, 중민론重民論 등 적극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결국 유가적 결론에 귀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순자는 입장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세습 귀족이 아닌 신흥 관료 지주를 대변한다는 사회적 입장에서만 차이를 보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순자 사상은 실제에 있어서 공자나 맹자에 비하여 훨씬 더 현실적이었으며 당시 패자覇者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노장老莊의 입장과는 근본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지요. 인간의 적극 의지와 능동적 실천에 근거하여 인문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연의 질서와 도道로 돌아갈(歸) 것을 설파했던 노장과는 반대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지요. 순자는 결국 원시 유가原始儒家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는 것이지요.

                                                                      408 ~ 409


유가의 정통은 도통道統 계보가 만들어지면서 확정됩니다. 오늘날 대단한 권위로 군림하고 있는 유가의 도통 계보는 당말唐末의 한유韓愈, 이고李╃ 등 유학자들이 불교와 노장 사상을 비판하고 유학을 유신維新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되어 송대의 주자朱子에 이르러 완성됩니다. 도통이란 말도 주자가 장구章句한 『중용』 서문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이렇게 완성된 도통 계보에서 순자가 제외되었던 것이지요. 순자가 유가의 이단으로 규정되는 것은 바로 이 도통 계보에 없기 때문입니다.


   유가의 도통은 이를테면 학문적 전승 계보입니다. 족보 같은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 할아버님으로부터 뜻도 모르고 자주 듣던 ‘요순우탕문무주공’堯舜禹湯文武周公이 알고 보니 바로 도통 계보였어요. 우당탕탕이라고 장난삼아 흉내 내었던 것입니다만, 이 요순우탕문무주공이 공자孔子―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맹자 이후로는 1천 년을 건너뛰어 주렴계周濂溪―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주희朱熹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 도통 계보는 사제지간의 직접적인 전수를 기준으로 하지 않았음은 물론입니다. 불교의 도통 계보는 직접 의발衣鉢을 전수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유가의 도통 계보가 불교의 전통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물론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와 달리 직접적인 학문의 전수가 아니라면 문제는 도통의 기준을 무엇으로 했는가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분명치 않았지만 그것을 완성한 주희에 이르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한마디로 이학理學의 성립 과정을 기준으로 일원화하고 있습니다.


   주희의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이학입니다. 주희는 사서四書의 주석도 이학의 입장에서 일관一貫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理는 매우 복잡한 철학적 주제이지만 쉽게 이야기한다면 바로 천天입니다. 말하자면 이理는 천리天理입니다. 모든 사물에 반드시 내재되어 있으며, 세상을 관통하고 있는 최고의 원리이자 규범이 이理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이며 천리입니다. 순자가 이 천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 도통 계보에서 밀려난 결정적 이유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해야 되는 것은 순자의 천론天論이 갖는 의미가 그만큼 결정적이라는 것이지요.

                                                                      410 ~ 412


 순자가 천론에 이어서 교육론을 전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논리적 수순입니다. 명命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교敎를 배치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함께 읽으려고 하는 성악설性惡說의 위치가 바로 이곳입니다. 천명을 전제하고 성선性善을 전제하는 맹자의 체계에서는 그 선한 본성으로 돌아가고(復), 그 선한 가능성(善端)을 확충(擴而充之)함으로써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성善性과 선단善端을 하늘로부터 이끌어낼 수 없는 순자로서는 당연히 능참能參이라는 적극적 참여가 요구되며, 교육이라는 외적 기능이 요구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논리 속에 순자의 소위 성악설이 위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주장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악설을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매우 피상적이고 도식적인 이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性은 선악 이전의 개념입니다. 선과 악은 사회적 개념입니다. 따라서 성과 선악을 조합하는 개념 구성은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천과 천명을 부정한 순자의 사상 체계에 있어서 본성이라는 개념이 설 자리는 처음부터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성악설은 인성론이 아니라 순자의 사회학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교육론과 예론禮論, 제도론制度論을 전개하기 위한 근거로 구성된 개념이라는 사실입니다. 전국시대의 사회적 혼란의 제거를 실천적 과제로 삼았던 순자가 그의 주장을 개진하는 과정에서 천론에 대한 비판과 함께 성선설의 관념성을 비판하는 것이 바로 성악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12 ~ 413


맹자의 성선설이든 순자의 성악설이든 우리는 본성론 자체를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선악 판단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올바른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회로 자연을 재단하는, 이른바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

 인간의 본성이란 과연 있는 것인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선악 판단 이전의 것입니다.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의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On Human Nature)에 의하면 본성은 선악 판단의 대상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인간의 본성이란 DNA의 운동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윌슨의 주장이 극단적 환원주의還元主義라고 비판되고 있지만, 나는 그의 이론이 본성 문제에 있어서 훨씬 논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DNA로 환원될 수 있으며 이 DNA는 40억 년 전으로부터 어느 시점, 또는 장구한 기간에 걸쳐서 이루어진 물질이라는 것이지요. RNA와 단백질이라는 두 개의 독립적인 반생명권半生命圈에서 성립된 것으로 기막히게 성공적(?)인 화학물질로 규정합니다. 수십억 년에 달하는 지구상의 생명의 역사는 바로 이 DNA의 운동이며 그 일대기입니다. 윌슨에게 있어서 본성이란 이 화학물질의 운동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DNA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생명이며 그런 점에서 곧 본성입니다.


   이 DNA의 운동은 자기自己의 존속이 유일한 목적입니다. 개체의 존속과 개체를 넘어선 존속, 즉 생존과 유전과 번식이 유일한 운동 원리입니다. 윌슨은 아주 재미있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라는 질문에 대하여 명쾌하게 결론을 내립니다. 윌슨의 체계에 있어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명백합니다. 단연 계란이 먼저라는 것이지요. 닭은 계란 속의 DNA가 자기의 존속을 위하여 만들어낸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일 뿐입니다.

……

윌슨의 이론에 의하면 DNA는 비단 닭만 만들어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욕망도 이 DNA의 존속을 위하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식욕과 성욕이 이 DNA의 활동인 것은 물론입니다. 나아가 인간의 정신 활동도 일정한 수의 화학적 및 전기적 반응의 총체적 활동을 일컫는 것에 다름 아니며, 이것은 DNA의 생존을 위한 장치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인간의 이성은 그러한 장치의 다양한 기능 중 하나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성뿐만이 아니라 사랑의 감정, 희생, 정직, 종교, 예술 등 일체의 정신적 영역도 이 DNA로부터 연유하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결혼 제도는 물론이며 사회를 구성하고 국가를 건설하는 모든 사회적 현상도 일단 DNA의 운동으로 환원됩니다.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사회과학을 통합하리라고 예상되기도 합니다.

                                                                      414 ~ 415


맬서스의 인구법칙人口法則도 똑같은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데 비하여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따라서 기아와 빈곤, 전쟁과 질병에 의한 사망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위생 환경을 개선하려고 하거나 질병을 치료하려는 고상하지만 잘못된 애정을 거두어들일 것을 맬서스는 결론으로 내리고 있지요. 빈곤과 기아는 자연법칙이며 이에 개입하는 것은 도로徒勞라는 것이지요. 맬서스의 『인구론』은 사회 개혁의 열망을 잠재우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과학이라는 옷을 입히는 것이었지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라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데올로기를 과학과 법칙으로 디자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순자의 성악설도 그런 점에서 같은 구조입니다. 전국시대의 사회적 혼란의 원인을 분석하고 처방하는 논리의 일환입니다. 순자의 이론 체계는 교육이라는 후천적 훈련과 예禮라는 사회적 제도에 의하여 악한 성性을 교정함으로써 사회의 혼란을 방지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순자는 모든 사람은 인의仁義와 법도法度를 알 수 있는 지知의 바탕을 갖추고 있으며 또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선단善端을 갖추고 있다는 맹자의 주장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에 대한 불신이나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순자는 모든 가치 있는 문화적 소산은 인간 노력의 결정이라고 주장하는 인문 철학자임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416 ~ 417


禮起於何也 曰 人生而有欲 欲而不得 則不能無求 求而無度量分界 則不能不爭 爭則亂 亂

   則窮 先王惡其亂也 故制禮義以分之 以養人之欲 給人之求 使欲必不窮

   乎物 物必不屈於欲 兩者相持而長 是禮之所起也 故 禮者養也       

   ―「禮論」

   예禮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은 나면서부터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다. 욕망이 충

   족되지 못하면 그것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욕망을 추구함

   에 있어서 일정한 제한이 없다면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다툼이 일어

   나면 사회는 혼란하게 되고 혼란하게 되면 사회가 막다른 상황에 처

   하게 된다. 옛 선왕이 이러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예의를 세워서

   분별을 두었다.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物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

   이 예의 기원이다. 그러므로 예란 기르는 것이다.


   순자의 예론은 사회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사회 이론입니다. 첫째 예란 물物을 기르는 것(養)이며, 둘째 그 물로써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툼과 혼란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다툼과 혼란을 방지하되 물질의 생산과 소비에 일정한 한계를 두어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예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경우의 예란 당연히 사회의 제도와 규범입니다. 제도와 규범이 분계分界를 세워서 쟁란爭亂을 안정적으로 방지한다는 것입니다. 순자의 예는 후에 법이 됩니다.


   순자의 가장 큰 공헌이 바로 이 예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새롭게 정의하였기 때문입니다. 순자의 예는 공자의 주례周禮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순자의 예는 전국시대의 예이며, 이 전국시대의 예가 바로 법으로서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에 도덕적인 내용 이외에 강제라는 법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순자의 예론은 전국 말기의 현실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이 등장한 신 지주층과 상인 계층의 이해관계와 그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사활적인 패권 경쟁을 치르고 있는 패자들에게 왕도王道와 인정仁政은 고매하기는 하지만 너무나 우원迂遠한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418 ~ 419


맹자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초도덕적 가치를 지향하고 천명론이라는 종교적 편향을 보였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보수적이었다고 평가됩니다. 이에 반하여 순자는 사회적 통제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천명을 비판하고 관념적 잔재를 떨어버렸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순자 사상은 실제로 유가의 예치禮治 사상으로부터 법가의 법치法治 사상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순자의 제자 중에서 한비와 이사 등과 같은 유명한 법가가 배출되었다는 것도 이러한 성격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순자 사상은 현실 인식과 인간 이해에 있어서 냉정한 태도를 견지하였으며 그러한 냉정함을 바탕으로 전통적 관념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명하게 단절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420


 순자의 예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를 곧 법과 제도의 의미로 발전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론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순자의 인문 철학이 이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란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物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는 대목입니다. 굳이 이 글의 뜻을 부연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의 내용을 물질적 욕망의 충족과 규제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순자는 법학적·경제학적 의미만으로 예를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욕구가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物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은 대단히 탁월한 인문 철학입니다. 순자가 단순한 법치주의자나 제도주의자가 아니라 뛰어난 인문 철학자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순자가 예론과 함께 교육론을 개진하고 있는 까닭이 바로 이러한 인문 철학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421


君子曰 學不可以已 靑取之於藍 而靑於藍 氷水爲之 而寒於水

   木直中繩 輮以爲輪 其曲中規 雖有槁暴 不復挺者 輮使之然也 故木受繩

   則直 金就礪則利 君子 博學而日參省乎己 則知明而行無過矣 故不登高

   山 不知天之高也 不臨深谿 不知地之厚也 不聞先王之遺言 不知學問之大也        ―「勸學」

『순자』 「권학」편勸學篇의 첫 구절입니다. 유명한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출전이기도 하지요.

……

순자의 체계에 있어서 인간 사회의 문화적 소산은 사회 조직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회 조직이 바로 예禮입니다. 그리고 그 예가 곧 제도와 법입니다. 이러한 제도와 법을 준수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과 같이 이러한 제도와 법이 안정적으로 작동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한 것이지요. 더 푸르게 만들기도 하고, 둥글게 만들거나 곧게 만들기도 하고, 날카롭게 벼리기도 하는 것, 이것이 교육입니다.


   순자가 교육론을 전개하는 것은 첫째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모든 인간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욕구 충족이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된다는 성악적 측면이 순자의 교육론의 출발점이 되고 있으며, 성인이나 폭군이나 군자나 소인이나 그 본성은 같은 것이며, 세상의 모든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인간관이 되고 있습니다(凡人之性 堯舜之與桀跖 其性一也 君子之與小人 其性一也 塗之人可以爲禹: 「性惡」).


   인간에게 선단善端은 없지만 인간은 인仁·의義·법法·정正을 알 수 있는 지知와,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교화될 수 있으며 또 교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순자의 교육학이며 사회학입니다. 순자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까닭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423 ~ 424


 대부분의 유가가 치인治人에 앞서서 수기修己를 요구합니다. 이 경우의 치인이 순자의 체계에서는 예禮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순자는 수기보다는 치인을 앞세우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수양에 앞서 제도의 합리성과 사회적 정의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인간의 도덕성은 선천적인 것도 아니며 개인의 수양의 결과물도 아니며 오로지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순자는 개량주의적이기보다는 개혁주의적입니다. 훌륭한 규범과 제도가 사람을 착하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도덕성의 근원을 인간의 본성에서 찾는 맹자가 주정주의主情主義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사회 제도에서 찾는 순자는 주지주의主知主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순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인도人道와 인심人心입니다. 천도天道와 천심天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순자의 도는 천지의 도(天地之道)가 아니라 사람의 도(人之所道)일 뿐입니다. 순자의 이론에는 또한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없습니다. 그는 성인聖人이라면 하늘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군자는 자기의 내부에 있는 것을 공경할 뿐이며, 하늘에 있는 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순자의 이와 같은 인간주의와 인본주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인간주의가 감상적으로 피력되지 않고 냉정하게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424 ~ 425


『순자』의 「악론」편은 음악론이 아니라 예론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순자가 음악을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즐겁고 감동적이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즐겁고 감동적인 예禮, 나아가서 즐겁고 감동적인 법法을 전망하는 것이지요. 즐거움이 지나쳐서 그 도를 이탈하고 혼란하게 되는 것은 물론 경계해야 마땅하지만, 예는 근본에 있어서 즐거운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참으로 이례적인 것입니다. 순자의 예는 그처럼 유연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억할 것입니다. 순자는 예론에서 예는 기르는 것(養)이라고 했습니다. 순자의 예가 곧 법이 되는 것임은 이미 이야기했지요. 따라서 순자는 법이란 무엇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르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의 잠재력을 길러내는 것이며, ‘법’이란 글자 그대로 물(水)이 잘 흘러가도록(去)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426


난세의 징조는 그 옷이 화려하고, 그 모양이 여자 같고, 그 풍속이 음란하고, 그 뜻이 이

   익을 좇고, 그 행실이 잡스러우며, 그 음악이 거칠다. 그 문장이 간사

   하고 화려하며, 양생養生에 절도가 없으며, 죽은 이를 보내는 것이 각

   박하고, 예의를 천하게 여기고, 용맹을 귀하게 여긴다. 가난하면 도둑

   질을 하고, 부자가 되면 남을 해친다. 그러나 태평 시대에는 이와 반

   대이다. (亂世之徵 其服組 其容婦 其俗淫 其志利 其行雜 其聲樂險 其

   文章匿而采 其養生無度 其送死瘠墨 賤禮義而貴勇力 貧則爲盜 富則爲

   賊 治世反是也)

                                                                      428

제10장 법가와 천하 통일



宋人有耕者 田中有株 兎走觸株 折頸而死 因釋其耒而守株 冀復得兎 兎不可復得 而身爲

   宋國笑 今欲以先王之政 治當世之民 皆守株之類也        ―「五蠹」

   송나라 사람이 밭을 갈고 있었다. 밭 가운데 그루터기가 있었는데 토끼가 달리다가 그루

   터기에 부딪혀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 후로 그는 쟁기를 버리고 그루

   터기만 지키면서 다시 토끼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랐지만 토끼는 다시

   얻지 못하고 송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만 되었다. 지금 선왕先王의

   정치로 오늘의 백성들을 다스리고자 하는 것은 모두가 그루터기를 지

   키고 있는 부류와 같다.


   유가, 묵가, 도가는 다 같이 농본적農本的 질서를 이상적 모델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두가 복고적 경향을 띠고 있습니다.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하여 신뢰를 갖기가 쉽지 않은 것이지요. 과거의 이상적인 시대로 돌아갈 것을 주장합니다. 바로 이 글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선왕의 정치로 돌아갈 것을 주장합니다. 여기에 비해 법가는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새로운 대응 방식을 모색해갑니다. 법가의 사관을 미래사관未來史觀 또는 변화사관變化史觀이라 하는 이유입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송나라 농부의 우화인 ‘수주대토’守株待兎는 어제 일어났던 일이 오늘도 또 일어나리라고 기대하는 어리석음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이 우화가 농부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다른 제자백가를 풍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변화하는 현실을 낡은 인식 틀로써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며, 대응 방식도 미래 지향적이지 못하고 과거 회귀적이라는 것이지요.

                                                                      431 ~ 432


 유가나 묵가는,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백성은 임금을 부모와 같이 여겨야 한다고 주

   장한다. 사법관이 형벌을 집행하면 음악을 멈추고, 사형 집행 보고를

   받고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선왕의 정치라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부

   모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자식은 부모를 따르지 않을 수 있

   는 것이다.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

   보다 더할 수는 없다. 눈물을 흘렸다면 그것은 임금이 자기의 인仁은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좋은 정치를 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이다. 해내海內의 모든 사람들이 공자의 인仁을 따르고 그 의義를 칭

   송했지만 제자로서 그를 따른 사람은 겨우 70명에 불과했다. 임금이

   되기 위해서는 권세를 장악해야 하는 것이지 인의를 잡아서는 안 되

   는 것이다. 지금의 학자들은 인의를 행해야 임금이 될 수 있다고 주장

   하고 있는데 이것은 임금이 공자같이 되기를 바라고 백성들이 그 제

   자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내용이 다소 길지만 법가 사상의 요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법가의 논리에 의하면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을 때 의義를 말할 것이 아니라 이利를 말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지요.

법가의 이러한 변화사관은 한비자의 스승인 순자의 후왕 사상後王思想을 계승한 것입니다. 후왕後王이란 선왕先王이 아닌 금왕今王을 의미합니다. 후왕 사상은 과거 모델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는 현실 정치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순자는 “후왕이야말로 천하의 왕이다. 후왕을 버리고 태고太古의 왕을 말하는 것은 자기 임금을 버리고 남의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433 ~ 434


법가 사상 형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람으로 먼저 제齊나라의 관중管仲을 듭니다. 관중은 토지 제도를 개혁하고, 조세租稅·병역兵役·상업과 무역 등에 있어서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합니다. 법가의 개혁적 성격을 가장 앞서서 보여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나라뿐만 아니라 당시의 여러 나라들이 다투어 개혁적 조치를 취했음은 물론입니다. 군제 개혁, 성문법成文法 제정, 법경法經 편찬 등 변법變法과 개혁 정책이 뒤따랐습니다. 이러한 개혁 정책은 예외 없이 중앙집권적 군주 권력을 강화하는 형태로 수렴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개혁의 내용이란 실상 보수적인 기득권 세력을 거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보수 세력의 완고한 저항을 타도하기 위해서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이 요구되었음은 물론이며 이러한 개혁에 의해서 비로소 중앙 권력이 강화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법은 기본적으로 강제력입니다. 그것을 집행할 수 있는 강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법일 수 없는 것이지요. 법가가 형벌을 정책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법가의 정치 형태가 중앙집권적 전제군주 국가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은 필연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38


상앙은 먼저 성문법을 제정하고 문서로 관청에 보관하여 백성들에게 공포해야 한다는 소위 법의 공개성을 주장했습니다.


   나는 법가의 법치法治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공개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법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막연한 생각을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법치란 무엇보다 권력의 자의성恣意性을 제한하고 성문법에 근거하여 통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상앙이 강조한 행제야천行制也天입니다. 법제를 행함에 있어서 사사로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법가의 차별성을 개혁성에서만 찾는 것은 법가의 일면만을 부각시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법의 공개성이야말로 법가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상앙은 핵심적인 것을 놓치지 않은 뛰어난 정치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법 관청을 설치하고 사법 관리를 두어 존비귀천을 불문하고 법을 공정하게 적용한다는 형무등급刑無等級의 원칙을 실시했습니다. 이것은 귀족들이 누리고 있던 특권을 폐지하고 군주의 절대 권력을 뒷받침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상앙은 법에 대한 신뢰와 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신상필벌信賞必罰과 엄벌주의嚴罰主義의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그것은 필부필부匹夫匹婦라 하더라도 반드시 상을 내리고 고관대작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내림으로써 법에 대한 신뢰를 심어주는 것이었으며, 엄벌로써 일벌백계를 삼아 불법과 법외法外를 없앤다는 원칙이었습니다. 형刑으로 형刑을 없애는 이형거형以刑去刑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법가적 방식에 의해서만이 감히 법을 어길 수 없고(民不敢犯) 감히 잘못을 저지를 수 없는(民莫敢爲非) 사회, 즉 무형無刑의 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439 ~ 440


  현재 우리 사회에는 범죄와 불법 행위라는 두 개의 범죄관이 있습니다. 절도, 강도 등은 범죄 행위로 규정되고, 선거사범·경제사범·조세사범 등 상류층의 범죄는 불법 행위로 규정됩니다. 전혀 다른 두 개의 범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소위 범죄와 불법 행위는 그것을 처리하는 방식이나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각도 전혀 다릅니다. 범죄 행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매우 가혹한 것임에 반하여,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더없이 관대합니다.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그 인간 전체를 범죄시하여 범죄인으로 단죄하는 데 반하여,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그 사람과 그 행위를 분리하여 불법적인 행위에 대해서만 불법성을 인정하는 정도입니다. 이것은 주나라 이래의 관행이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역설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법가의 법 지상주의가 인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군주를 위한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폄하하고 과거의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옳은 태도라 할 수 없습니다.

                                                                      443


明主之所導制其臣者 二柄而已矣 二柄者 刑德也

   何謂刑德 曰 殺戮之謂刑 慶賞之謂德 爲人臣者畏誅罰而利慶賞

   故人主自用其刑德 則群臣畏其威而歸其利矣        ―「二柄」

   임금이 신하를 제어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의 수단(자루)이 있을 뿐이다. 두 가지 수단이

   란 형刑과 덕德이다. 형과 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사람을 죽

   이는 것을 형이라 하고, 상을 주는 것을 덕이라 한다. 신하 된 자는 형

   벌을 두려워하고 상 받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임금이 직접 형과 덕

   을 행사하게 되면 뭇 신하들은 그 위세를 두려워하고 그 이로움에 귀

   의한다.


   원문은 소개하지 않습니다만 위의 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세상의 간신들은 그렇지 아니하다. 자기가 미워하는 자에게는 임금의 마음을 얻

   어서 즉 임금을 움직여서 죄를 덮어씌우고, 자기가 좋아하는 자에게

   는 역시 임금의 마음을 얻어서 상을 준다. 상벌이 임금으로부터 나가

   지 않고 신하로부터 나가면 임금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하를 두려워하

   는 것이다. 신하를 따르고 임금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임금이 형덕

   을 잃은 환란이 그와 같다. …… 호랑이가 개를 굴복시킬 수 있는 것

   은 발톱과 이빨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발톱과 이빨을 개에게 내어주

   어 그것을 쓰게 한다면 호랑이는 반대로 개에게 굴복당할 것이다.

                                                                      446


한비자의 사상은 그것이 군주 철학이란 점에서 비판되기도 하지만, 한비자의 군주 철학은 분명한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이야말로 난세를 평정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논리입니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이 주 왕실의 권위가 무너짐으로써 시작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 국가의 혼란 역시 임금의 권위가 무너짐으로써 시작된다는 것이 한비자의 인식입니다. 임금을 정점으로 하는 정치권력을 확고히 하지 않는 한 간특한 무리들을 내쫓을 수 없으며, 칼을 차고 다니며 법을 무시하는 법외자法外者들을 제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혼란과 혼란으로 말미암은 인민의 고통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강력한 중앙을 확립하는 것임을 한비자는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447 ~ 448


  놀라운 것은 『한비자』에서 주장하고 있는 여러 개념이 이렇듯 서로 긴밀하게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 중심에 시종일관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 형태가 자리 잡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춘추전국시대가 법가에 의해 통일되고 이 과정에서 형성된 중앙집권적 전제군주 국가라는 권력 형태는 진秦을 거쳐 한漢으로 이어지고 다시 역대 왕조를 거쳐 20세기 초 신해혁명 때까지 이어짐으로써 2천 년 이상 지속되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448


鄭人有且置履者 先自度其足 而置之其座 至之市 而忘操之 已得履

   乃曰 吾忘持度 反歸取之 及反市罷 遂不得履 人曰 何不試之以足 曰 寧信度 無自信

   也        ―「外儲說左 上」

   정나라에 차치리라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의 발을 본뜨고 그것(度)을 그 자리에 두었다. 시장에 갈 때 탁度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었다. (시장의 신발 가게에 와서) 신발을 손에 들고는 탁을 가지고 오는 것을 깜박 잊었구나 하고 탁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다시 시장에 왔을 때는 장은 이미 파하고 신발은 살 수 없었다. (그 사정을 듣고) 사람들이 말했다. “어째서 발로 신어보지 않았소?” (차치리의 답변은)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지요.”

                                                                      451


「문전」편問田篇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계공堂谿公이 한비자에게 충고합니다.

   “오기吳起와 상앙商? 두 사람은 그 언설이 옳고 그 공로 또한 대단히 컸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오기는 사지가 찢겨 죽었고 상앙은 수레에 매여 찢어져 죽었습니다. 지금 선생이 몸을 온전히 하고 이름을 보전하는 길을 버리고 위태로운 길을 걷고 있는 것이 걱정됩니다.”

   이 충고에 대한 한비자의 대답이 그의 인간적 면모를 엿보게 합니다. 동시에 법가 사상의 진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한비자의 답변은 그 요지가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선왕의 가르침을 버리고 (위험하게도) 법술을 세우고 법도를 만들고자 하는 까닭은 이것이 백성들을 이롭게 하고 모든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지럽고 몽매한 임금(亂主暗上)의 박해를 꺼리지 않고 백성들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지혜로운 처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한 몸의 화복禍福을 생각하여 백성들의 이익을 돌보지 않는 것은 탐욕스럽고 천박한 행동입니다. 선생께서 저를 사랑하여 하시는 말씀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저를 크게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림이든 노래든 글이든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결정적인 것은 인간의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비자의 이러한 인간적 면모가 적어도 내게는 법가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458


  법가의 장단점과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물론이며, 법가의 특징을 규명하는 것이 법가의 개별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개별적 가치나 배타적 성격에 탐닉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관념론적 신조입니다. 다른 것과의 연관 즉 관계론에 대한 혐오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지요. 모든 사상이 갖는 한계란 실상 완성된 체계에 도달할 수 있는 조건이 역사적으로 제약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지요. 바꾸어 말하자면 절대적 진리에 이르지 못하고 언제나 상대적 진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제약의 다른 표현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460


이러한 법치주의의 가장 발전된 형태가 관료제입니다. 관료 제도는 시스템에 의한 통치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료제에 대한 규제 방식으로서의 군주의 술術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술치術治 때문에 법가가 권모술수의 학學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결론을 내리는 데 신중해야 합니다. 그것은 춘추전국시대라는 시대적 성격과 관련된 것입니다. 춘추전국시대란 무도한 시대이며 혼란의 극치를 보이는 시대입니다. 임금을 죽인 것이 36번, 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52번이었습니다. 이러한 하극상과 혼란이 재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법가가 선택한 방법이 바로 관료에 대한 견제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관료는 언제든지 제후나 대부의 지위로 바뀔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료들의 이반離叛을 통제하고 견제하지 못하는 한 전기前期의 모순과 혼란이 반복되지 않을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군주의 술치는 군주의 은밀하고 부정적인 권력이라기보다는 관료제라는 새로운 제도의 작동 원리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법가를 다시 읽는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혁성과 법치주의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원리를 제도화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462


 이사는 기원전 221년, 진왕秦王 정政을 보좌하여 천하 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고 모든 권력을 군주에게 집중시키는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의 기틀을 만들어 나갑니다. 그때까지의 사회 구조였던 봉건적 지방분권 제도를 청산합니다.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고, 법령을 새로 개정했으며, 도량형과 문자를 통일합니다.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통해 사상의 통일을 꾀했던 일도 이사의 주도하에 이루어집니다. 대부분의 대신들은 봉건제를 시행할 것을 건의했지만, 이사는 주나라의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이사는 봉건제에 대하여 철저하게 반대합니다. 비록 왕자나 동족을 제후로 봉하더라도 대를 거듭할수록 혈연이 멀어져 결국은 이반하게 되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전국을 36개의 군郡으로 나누어 군에는 군수郡守·군위郡尉·군감郡監을 두고, 군 아래에 현縣을 두어 현령·현위·현승縣丞을 임명하여 민정民政·군사軍事·감찰監察의 3권을 분담하게 했습니다. 치밀한 제도적 개혁입니다. 이들 지방장관들은 모두 중앙 정부의 통치자인 황제에 의하여 임면되도록 함으로써 황제의 명령은 중국 전역에 신속하게 하달되었습니다. 군현제를 통한 중앙집권 체제의 확립은 중국의 정치 제도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국가 체제가 1911년 신해혁명 때까지 이어진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야말로 초안정 시스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의 통일과 이사를 이야기하면서 빠트릴 수 없는 것이 방금 언급한 분서갱유입니다. 통일 직후 강력하게 추진되는 중앙집권적 개혁 과정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 봉건제 복원을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반동적 움직임에 대하여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사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대로 방치하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분서갱유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야만적인 처사라고 비판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기』에 이사가 진언한 분서焚書 관련 내용을 보면, 책을 불사르되 첫째로 박사관博士官이 주관하는 서적은 제외했습니다. 그리고 의약醫藥 점복占卜 종수種樹 등 과학 기술 서적도 제외했습니다. 사관에게 명하여 진秦의 전적典籍이 아닌 것은 태우고, 민간에서 소유하고 있는 책을 거두어 태우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작 대규모의 분서는 항우가 함양궁을 불사를 때 일어났다고 하는 견해도 없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관부官府 소유의 서적이 서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분서의 규모가 아니라 분서의 이유입니다. 이사의 건의에는 다음과 같은 분서의 이유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첫째 지금의 것은 배우지 않고 옛것만 배워 당세當世를 비난하고 백성들을 미혹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어와서는 군주에게 자신을 과시하고, 나가서는 백성들을 거느리고 비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저잣거리에서 시서詩書를 이야기하거나 옛것으로 지금을 비난하는 자를 모두 멸족시킬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봉건제를 복구하려는 구사회의 저항이 완고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에게 있어서 분서갱유는 이러한 반혁명의 싹을 자르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갱유坑儒에 관한 것입니다만 여기에 대해서도 다른 견해가 많습니다. 우선 땅에 묻힌 사람의 숫자가 460명이라는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별로 많은 숫자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더 중요한 것은 갱유의 발단이 된 것은 불사약을 구하던 방술사方術士인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이 도망한 사건이었습니다. 진시황이 갱유의 영을 내린 이유는 그들이 “나를 비방하고 나의 부덕不德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사御使를 시켜 요괴한 말로 백성들을 미혹케 하는 자들을 조사하게 하자 서로 고발하여 법령을 어긴 자가 460명이었는데, 이들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함양에 생매장함으로써 천하에 알려 후세 사람들을 경계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유학자였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분서갱유라는 표현도 한漢나라 유학자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지요.

                                                                      465 ~ 466


제11장 강의를 마치며



불교 철학의 최고봉은 화엄華嚴 사상입니다. 그런데 『화엄경』의 본래 이름이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입니다. 범어로는 Mahavai plya-buddha-ganda-vyuha-sutra입니다. 이 명칭이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대방광불화엄경’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는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대大는 절대적 대의 개념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개념입니다. 방광方廣은 글자 그대로 넓다는 뜻입니다. 공간적 의미로 풀이됩니다. 따라서 ‘대방광’大方廣은 크고 넓다는 뜻으로 불佛을 수식하는 형용사구가 됩니다. 그리고 불佛은 붓다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대방광불이란 한량없이 크고 넓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붓다를 의미합니다.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이 붓다입니다. 화엄이란 잡화엄식雜華嚴飾에서 나온 말로, 갖가지의 꽃으로 차린다는 뜻입니다. 경經을 수식하는 형용사구입니다. 그러므로 ‘대방광불화엄경’의 의미를 정리한다면 “광대무변한 우주에 편만해 계시는 붓다의 만덕萬德과 갖가지 꽃으로 장엄된 진리의 세계를 설하고 있는 경”이라고 풀이됩니다. 공식적인 풀이라 할 수 있습니다.

                                                                      472 ~ 473


 송대에 이르러 신유학이 등장하게 되는 까닭은 훈고학訓?學 일변도의 한漢나라 유학이 침체를 거듭했기 때문입니다. 한대의 유학은 경(經書)의 자구 해석에 매몰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천적 측면에서도 형식적인 예론禮論의 논의에 치중했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결과적으로 위진 남북조와 수당 시대를 거치면서 불교와 도가가 유가를 압도하게 됩니다. 유학이 당시의 지적 관심과 요구에 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학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개별적 대응을 꾸준히 계속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말唐末 한유韓愈의 노불老佛 비판이 그렇습니다. 한유와 마찬가지로 이고李╃ 역시 불교와 도가를 비판하고 『대학』과 『중용』이라는 새로운 문헌적 근거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송대 신유학의 선구로 평가받습니다. 송대에 접어들면서 경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광범하게 진행됩니다. 그것이 남송의 주희朱憙에 이르러 집대성되는 것은 여러분이 잘 아는 바입니다. 주자는 우주론宇宙論, 인성론人性論, 공부론工夫論 등 광범한 체계를 완성하고 사서四書를 확정하여 유교의 도통道統을 확립합니다.

                                                                      480


우리는 또 다른 통일 국가의 출현과 함께 사회질서를 재건하려는 정치적 성격을 간과해서도 안 됩니다. 요遼나라에게 영토를 빼앗기고 금金나라에게 유린당하여 남송으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송대의 신유학을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자가 곤궁이 극에 이른 어려운 생활 속에서 임종을 앞두고도 『대학』을 장구章句하고 있었을 정도로 극진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당대 사회의 엘리트로서의 사명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문풍에 대한 반성이라기보다는 당면한 정치 사회적 현실에서 느끼는 위기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명의 중심을 자처한 중화사상이 역사적으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불교의 전래와 17세기 이후 서구 사상이 도입되었을 때라고 합니다. 그것은 중국 이외에 문명이 있다는 사실에서 받은 충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민족의 지배 기간인 원사元史와 청사淸史마저도 각각 송宋과 명明을 계승하는 정통 왕조로 규정하는 것이 중국의 중화주의中華主義입니다. 나라가 망하는 것을 ‘망’亡이라 하지 않고 도道가 전해지지 않는 것을 ‘망’이라고 할 정도로 중화주의는 초민족적 세계관이며 문화주의적 세계관이었습니다.


   중국이 불교에서 받은 충격은 이러한 중화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엄청난 것입니다. 사이팔만四夷八蠻이라는 세계 인식은 중국 이외에는 문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며 오만이었습니다. 중국 이외에 다른 문명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화주의적 세계관이 무너지는 충격인 것이지요. 불교 철학은 이러한 점에서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세계관의 변화를 요구할 정도로 대단한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불교 사상은 현실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유학을 대신하여 사회의 이념 형태를 규정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굳건한 지위를 점하게 된 것이지요. 특히 불교 사상은 개인주의적이며 반사회적인 해체 사상을 내장하고 있습니다. 신유학의 등장은 불교의 이러한 해체주의적이고 반사회적인 사상 영향으로부터 사회질서를 지키고 통일 국가를 만들어가야 하는 현실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482 ~ 483


선종은 역사적으로 지방분권적 봉건 구조와 결합됩니다. 중앙의 지시와 간섭을 배제하는 해체적 본성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근본에 있어서 무정부주의입니다. 일체의 제도적 규제를 거부하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선禪은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와 상통하는 무조직無組織, 무경전無經典에 기반을 둔 각覺이요 불심佛心입니다. 선종의 이러한 성격과 구조가 그 후 사원寺院 경제의 몰락과 보시報施 체계體系의 와해, 그리고 만당晩唐의 혹심한 불교 박해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존속하게 되는 저력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한편으로 선종은 민초의 철학인 도가의 전통과도 더욱 밀접하게 상호 결합하게 됩니다. 유有, 무無, 유위有爲, 무위無爲 등의 도가 개념과 습합習合하게 되고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위진 남북조 이래의 탈유가적 사회 상황을 심화하게 됩니다.

                                                                      484 ~ 485


『대학』이 선언하고 있는 것은 개인個人, 가家, 국國, 천하天下(世界)는 서로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개인의 수양과 해탈도 전체 체계를 구성하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수양과 해탈에 가장 근접한 조목이 성의, 정심 그리고 수신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전체 과정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것이며 그것 자체가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는 체계입니다. 나는 이것이 『대학』에서 가장 중요한 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

 8조목 중에서 주자가 가장 의미를 둔 것은 격물과 치지라고 생각합니다.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 즉 “물物에 격格하여 지知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지知란 인식이나 깨달음의 뜻입니다. 그리고 격에 대한 해석도 여러 가지입니다만 격은 관계를 의미합니다. 물과의 관계를 통하여 인식을 얻는다는 것이지요. 실천을 통하여 지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물이란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든 없다고 생각하든 상관없이,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주관적 의지와는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외계外界의 독립적 대상을 의미합니다. 물질과 같은 의미입니다. 인식과 깨달음이 외계의 객관적 사물과의 관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돈오頓悟와 생각의 비약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선종 불교의 주관주의를 배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주자가 주목한 『대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488 ~ 489


송나라는 북방 이적夷狄, 즉 요遼와 금金과의 싸움에서 결국 두 임금과 3천여 명이 포로로 잡혀가는 완벽한 패배를 당하게 됩니다. 구차하게 명맥을 이어서 남송이라고 칭하지만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지키기 어려운 수모를 감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송대의 신유학은 이적과의 분명한 차별성을 보여줌으로써 정치 군사적 패배를 정신적으로 구원하려는 중화주의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이 그중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중국인들의 시선이 내부를 향하게 되었다는 데에서 신유학의 성립 동기를 찾아보려고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일종의 자기반성이 계기가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500


주자의 이론이 성즉리性卽理임에 반하여 심론의 요지는 심즉리心卽理입니다. 신유학이 선종 불교에 대한 비판적 체계라면 양명학은 신유학에 대한 비판의 논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자의 체계가 독서궁리讀書窮理쭭지혜라는 논리임에 반하여 심론은 ‘양지’良知에 직접 호소하는 체계입니다. 바로 이러한 성격이 선종 불교와 마찬가지로 대중화에 성공하게 합니다. 신유학이 선비의 학문에 갇힌 것과는 달리 심론을 주장한 육상산陸象山의 강론에는 수많은 사람이 운집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명대明代의 인구 증가와 사회의 계급적 질서가 급속하게 변화하는 과정에서 심론의 차별 철폐 사상과 평등

사상이 상인 계층의 전폭적 호응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그리고 심론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주체성의 강조입니다. 주체성이 심心이라는 또 하나의 주관적 관념론으로 표상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심론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주체성이라는 적극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상산의 이론을 계승한 왕양명(王守仁)은 성性과 이理를 심心으로 통합해냅니다. 구체적 현실은 심으로 통일된 ‘인식된 세계’이며 그런 점에서 인간과 세계는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왕양명의 체계는 심心=성性=이理이되 그것은 심으로 통일되는 체계라 할 수 있습니다.


   “효친孝親의 마음이 없다면 효도의 이理가 있을 수 없으며, 충성의 마음이 없다면 충성의 이理가 있을 수 없다”(無孝親之心 無孝之理 無忠君之心 無忠之理)는 논리입니다.

                                                                      501 ~ 502


신유학과 양명학의 이론적 지양 과정에서 또 한 가지 우리가 유의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과정에서 미시적 관점보다는 거시적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즉리性卽理와 심즉리心卽理의 논리적 구조를 천착해 들어가기보다는 신유학과 신유학에 대한 심학의 문제 제기라는 일련의 논쟁적 과정을 통하여 사상사의 전개 과정을 읽는 일이지요. 그것은 사상의 일생一生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상의 생성―발전―변화 그리고 소멸의 과정을 추적하는 일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사상사의 전개 과정에서 사회 변화를 읽어내는 일입니다. 사상은 사회 변화를 이끌어내고, 다시 사회적 변화를 정착시키고 제도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사상 고유의 전개 과정을 확인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회적 변화는 사상 투쟁에 의하여 시작되는 것이며 사회적 변화는 사상 체계의 완성으로 일단락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504


동양고전의 독법에 있어서는 고전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보다는 이러한 성찰적 관점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을 얻었다면 마치 강을 건넌 사람이 배를 버리듯이 고전의 모든 언술言述을 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비로소 고전 장구古典章句의 국소적 의미에 갇히지 않고 그러한 관점을 유연하게 구사하여 새로운 인식을 길러내는 창신創新의 장場이 시작되는 지점에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07


이제 강의를 마치면서 새삼스럽게도 다시 가슴의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앞으로 시와 산문을 더 많이 읽으라는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시와 산문을 읽는 것은 바로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가슴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조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사철文史哲과 나란히 시서화詩書畵에 대한 교육을 병행해왔다는 이야기를 강의 초반에 나누었습니다. 이성 훈련과 감성 훈련을 병행했던 것이지요.

……

첫째,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성과 인격은 이를테면 사상의 최고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상은 그 형식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육화肉化된 사상이 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경우에도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은 법제적 정비 수준에 의하여 판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 성원들의 일상적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 실현되는 삶의 형태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말이나 글로써 주장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사상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의 사상이 아닌 것도 얼마든지 주장하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으로서 육화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509 ~ 510


시적 정서와 마찬가지로 서書와 화畵의 영역 역시 풍부한 관계론의 담론을 보여줍니다. “서書는 여如”라고 합니다. 서의 의미는 ‘같다’는 것이지요. 우선 글자와 그 글자가 지시하는 대상이 같다는 뜻입니다. 지시 기호이기 때문에 당연한 이치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자의 경우 서書가 상형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새 을乙’ 자는 모양이 백조입니다. 그러나 같다는 의미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사람과 같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가 오히려 서도書道의 본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미적 정서, 나아가 그 사람의 사상, 그 사람의 인격이 서書에 고스란히 담긴다는 뜻이지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사람과 서의 관계론입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합니다만 그림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림은 우선 ‘그림’이라는 의미에 충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은 ‘그리워함’입니다. 그리움이 있어야 그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린다는 것은 그림의 대상과 그리는 사람이 일체가 되는 행위입니다. 대단히 역동적인 관계성의 표현입니다. 나아가 그림은 우리 사회가 그리워하는 것, 우리 시대가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처럼 시와 문 그리고 서와 화라는 정서적 영역은 우리의 독법인 관계론을 확장하고 다시 그것을 인격화할 수 있는 소중한 영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511 ~ 512


郭橐駝不知何始名 病僂隆然伏行 有類橐駝者 故鄕人號曰駝

   駝聞之曰 甚善 名我固當 因捨其名 亦自謂橐駝云

   其鄕曰 豊樂 鄕在長安西

   駝業種樹 凡長安豪家富人爲觀游 及賣果者 皆爭迎取養視

   駝所種樹 或遷徙無不活且碩茂 蚤實而蕃

   他植木者 雖窺伺傚慕 莫能如也

   有問之對曰 橐駝非能使木壽且孶也 以能順木之天 以致其性焉爾

   凡植木之性 其本欲敍 其培欲平 其土欲故 其築欲密

   旣然已勿動勿慮 去不復顧

   其蒔也若子 其置也若棄 則其天者全 而其性得矣

   故吾不害其長而已 非有能碩而茂之也

   不抑耗其實而已 非有能蚤而蕃之也

   他植木者不然 根拳而土易 其培之也 若不過焉 則不及焉

   苟有能反是者 則又愛之太恩 憂之太勤

   旦視而暮撫 已去而復顧

   而甚者爪其膚以驗其生枯 搖其本以觀其疎密

   而木之性日以離矣

   雖曰愛之 其實害之 雖曰憂之 其實讐之

   故不我若也 吾又何能爲哉


   곽탁타의 본 이름이 무언지 알지 못한다. 곱사병을 앓아 허리를 굽히고 걸어다녔기 때문에 그 모습이 낙타와 비슷한 데가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탁타’라 불렀다. 탁타가 그 별명을 듣고 매우 좋은 이름이다, 내게 꼭 맞는 이름이라고 하면서 자기 이름을 버리고 자기도 탁타라 하였다. 그의 고향은 풍악으로 장안 서쪽에 있었다. 탁타의 직업은 나무 심는 일이었다. 무릇 장안의 모든 권력자와 부자들이 관상수觀賞樹를 돌보게 하거나, 또는 과수원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과수果樹를 돌보게 하려고 다투어 그를 불러 나무를 보살피게 하였다. 탁타가 심은 나무는 옮겨 심더라도 죽는 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잘 자라고 열매도 일찍 맺고 많이 열었다. 다른 식목자들이 탁타의 나무 심는 법을 엿보고 그대로 흉내 내어도 탁타와 같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나는 나무를 오래 살게 하거나 열매가 많이 열게 할 능력이 없다. 나무의 천성을 따라서 그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할 뿐이다. 무릇 나무의 본성이란 그 뿌리는 펴지기를 원하며, 평평하게 흙을 북돋아주기를 원하며, 원래의 흙을 원하며, 단단하게 다져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심고 난 후에는 움직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 일이다. 가고 난 다음 다시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성장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자라게 하거나 무성하게 할 수가 없다. 그 결실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일찍 열매 맺고 많이 열리게 할 수가 없다.


   다른 식목자는 그렇지 않다. 뿌리는 접히게 하고 흙은 바꾼다. 흙 북돋우기도 지나치거나 모자라게 한다. 비록 이렇게는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이 지나치고 그 근심이 너무 심하여, 아침에 와서 보고는 저녁에 와서 또 만지는가 하면 갔다가는 다시 돌아와서 살핀다. 심한 사람은 손톱으로 껍질을 찍어보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사하는가 하면 뿌리를 흔들어보고 잘 다져졌는지 아닌지 알아본다. 이렇게 하는 사이에 나무는 차츰 본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비록 사랑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해치는 일이며, 비록 나무를 염려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원수로 대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다.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514 ~ 515.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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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입대할 때 '수진본 사서집주'(소매에 넣을 수 있도록 인쇄된 논어,맹자,대학,중용-경문만 나와 있음)를 가지고 가지 못한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 덕분에 훈련소에서 '신약'을 볼 수 있었다.

예수가 비유의 지도자라는 것은 그 때 확신했다. 경전은 비유의 잔치가 아닌가. 그래서 문학이고, 지금까지 종교적 힘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자대 배치받고 보름 정도 후에 '수진본'을 소포로 받았을 때 이틀만에 전부 읽어버렸다.

이것은 이 이야기의 주된 글감은 아니다. 사실 군대에서의 책 이야기는 참으로 눈물겹다.

 '장문의 리뷰'에 있는 책들이 그 시절에 만들어진 리뷰들이다. 그러니까 나는 군에서 수많은 불법을 자행했던 것이다. 이등병 시절에는 어쩌자고 플라톤의 '국가'라는 책에 손을 대서 주위의 동료들을 안타깝게 했다. 안타깝게 했다는 말은 다름이 아니라, 아직 날이 풀리지 않은 계절이라 모포를 덮고 잤는데, 모포 안에서 '손전등'을 키고, 책을 읽었다. 지하철에 샀던 천원짜리 손전등이었는데, 그것은 쓸 것이 못 된다. 잘 해야 열흘에서 보름 정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여친이나 가족에게는 항상 '손전등'을 보내줄 것을 강요하였고, 휴가나 외박을 나가면 두 세 개씩 들고 오는 것이 손전등이었다.

(그때 '북라이트'라는 것을 알았다면 내 군생활은 더더욱 축복이었을 것이다. 혹시라도 책 좋아하는 조카가 군대에 가거들랑 돈 아깝다 생각지 말고 괜찮은 '북라이트'를 하나 선물로 주기를 경험으로 권한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화장실'이다. 화장실에서는 손전등이 필요 없었기 때문에 조명 아래서 편안하게 책을 읽었다. 그렇지만, 군에는 불침번이라는 게 있지 않는가. 통합막사이기 때문에 다섯 개의 부대가 같은 막사 안에서 생활을 했는데, 다른 부대 '아저씨'들의 근무 때만 되면 꼭 인원 확인을 철저히 하는 통에, 1-2시간을 넘길 수 없었다. 그보다 기막힌 일은 어느 날 화장실 안에서 '국가'를 3-4시간 동안 읽었던 적이 있었다. 나의 선임은 그때 나를 찾아 통합막사를 온통 뒤졌던 것인데, 내가 밝은 곳에서 책을 읽으려 옆 부대의 화장실을 이용했기 때문에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졸지에 '탈영 혐의'를 쓰게 된 것이다.

다음날 상병장 선임들의 무서운 눈초리와, 직속 선임의 '갈굼'은 피할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상병 즈음 해서 '인트라넷 책마을'을 만나게 된다. 너무 늦게 만난 것이 애통할 지경이었지만, 막힌 세상 속에서 책 하나에 희망을 품고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클럽이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그때부터 나의 독서는 공격적이 되었고,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먼저 책을 읽을 때는 형광펜으로 인상 깊은 부분을 색칠하고, 나중에 읽고 나서 그 부분을 따라가며 '워드'로 '친다' 워드로 치는 시간이 끝나면 그것을 '인쇄'해서 '오탈자'를 확인하며 내용을 정리한다. 그리고 서평을 쓰기 시작하는데, '집필'의 시간은 '발췌'의 정리가 충분히 되었을 때 이루어진다.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 그리고 행정병이라는 특수한 상황 안에서, '책마을'이라는 소통의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한 편이 나올 때, 아니 완성될 때마다 우레와 같은 성원과 댓글들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게 절정에 이를 즈음 해서는 서평 안에 '드라마'도 녹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엔트로피 서평은 나의 가족사를 녹인 것이다) 그렇게 하기를 몇 달, 우리 부대 사람들도 '책마을'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나의 글의 성실한 '독자'가 되어 주었다. 얼마 전에 거기 '촌장' 되는 분께 들은 이야기인데, 나의 부대 후임이 연락을 해서 나의 글을 구할 수 없겠느냐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 후임이 누군지는 짐작이 간다. 인트라넷에서의 '클럽'이라는 것은 워낙 '폭파' 위험이 많아, 나의 군 생활에서도 3-5번은 이사를 해야 할 정도이다. '기무사령부의 불법 커뮤니티 때려잡기' 이벤트는 그 바닥에서도 악명이 높다. 신고한 사람은 포상휴가를 준다고 하니,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우리 '책마을'은 우수 커뮤니티로 선정돼 어느 정도 안전망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책이란 것이 '비판'을 수반하기 때문에 '군대'라는 환경과 몹시 어울리지 못하는 특성이 있다. 그 비판을 우회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훈련도 자동으로 우리는 하게 된 셈이다.

'-밥'을 먹으면서는 환경이 더욱 좋아졌다. 우리 부대가 신 막사로 이전한 것인데, 부대마다 최신식 조명을 탑재한 화장실이 있었다. 거기서 나는 부담없이 3시간 정도씩 독서를 즐겼다. 그리고 '당직' 근무도 역시 '상황실' 지기였기 때문에 '집필'의 집중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때보다 워드 실력이 많이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책을 좀 더 가까이서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것은 내게 참으로 큰 수확이었다. 이 '압축 독서' 아이디어를 제공해준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전 참모님이다. 내가 갓 전입했을 때, 참모님은 '예전 같으면 두꺼운 규정집 하나 띡 던져주고 다 치게 해서 훈련시켰단 말야' 하고 비아냥거렸고, 그 '친다'는 착상이 이렇게 연결된다.

군생활을 '책 생활'로 고스란히 녹을 수 있게 해준 우리 '책마을' 친구들과, 그 무거운 책 소포를 부지런히 부쳐준 어머니께 감사하는 마음 다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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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서재에는 책이 꽉 찼다. 그렇지만, 내 주위에는 지금의 나와 같은 '책꾼'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 시절 흔하던 '정음사 세계문학 전집'도 없었고, '삼성판 사상전집' 같은 것도 없었다.

뭐 있어도, 나의 유년이 그런 책들을 허락하지 않았을 테지만, 생각해보면 나의 환경이 나의 시간을 많이 빼앗은 것 같다. 고등학교 들어갈 때가 되어서야 나는 그리운 마을 '성산포'를 빠져나올 수 있었고, 나의 '철학'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반가운 것은 '이원수 선생'의 소년소녀세계동화집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소년소녀백과사전도 있어서, 그 때의 나는 굉장한 박식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별이 빨개질 수록 늙은 것이고 어두우며, 하얗거나 파랄수록 힘이 센 별이라는 사실이나, 1등성에서 5등성인가 7등성까지 별의 밝기가 있는데, 그 밝기는 등성마다 1.5배(2.5배인가 지금은 헛갈린다)라는 지식들을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걸어다니는 소년소녀 사전'으로 통했다.

그리고 국민학교 3학년 때는 '도서반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때 읽은 동화책 중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인도 동화집'과 '독일 동화집'이다.

인도 동화집은 굉장한 화타지를 주었다. 신비한 일도 많았을 뿐더러, 명재판관 이야기는 어린 그 시절 나에게 공정함과 이성을 가르쳐준 고마운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마녀가 아이를 잡아먹으려고 그 어미의 모습으로 변해서 아이를 빼앗아가려고 했다. 진짜 엄마는 온몸으로 아이를 지키려고 하였고, 결국 명재판관 앞에 끌려가게 되었다. 명재판관은 이런 제의를 한다.

너희들이 아이의 양쪽을 잡고 잡아당겨 보아라. 줄다리기에서 이기는 사람이 진짜 아이의 어머니이며, 진 사람은 가짜 어머니이기 때문에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자, 아이는 고통스러워했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울음소리에 배어 있었다. 진짜 어머니는 아이에게 고통을 줄 수 없어서, 손을 놓고 말았다. 마녀의 승리였다. 하지만 명재판관은 마녀가 가짜 어머니임을 밝혀내고, 진짜 어머니에게 아이를 돌려 주었다. 명재판관의 판결문이다.

진짜 어머니라면 아이가 고통을 받거나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 너는 아이에 대한 정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아무런 고민 없이 아이를 끝까지 잡아당길 수 있었다. 어머니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네가 어머니일 확률은 전혀 없다. 너는 마녀임이 분명하므로 아이는 진짜 어머니에게 돌려주고, 너는 사형에 처하겠다.

독일 동화집은 내게 '공포'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유년 시절 공포의 대명사는 무엇보다 '검은 고양이'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공포'에 불과했다. '유령선'의 공포는 '공포'와 '인생', '교훈'을 한꺼번에 주는 작품이었다.

난파선의 주인공이 몇날며칠간 바다를 헤매면서 발견한 배에는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거기서 배와 입을 만족시키고, 잠을 청했는데, 밤마다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돌아다니는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그 소리와 동작이 언제나 똑같은 것이 주인공은 참 이상했다. 그런데 그 사연을 알게 되자 이해할 수 있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그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아냈고, 육지의 흙을 그 시체의 머리에 뿌렸더니 시체가 살아나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죽을 수 있었다.

예전에 한 신부가 그 배에 탔는데, 선원들이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진심으로 타이르고, 교화를 하다가 죽임을 당한 적이 있다. 신부는 '너희의 지은 죄가 진정 사나운 것이므로, 너희는 머리에 흙이 닿기 전에는 정녕 죽지도 살지도 않은 채로 지내게 될 것이다'라고 하고는, 바다에 빠져 죽었다.

이런 이야기들로 가득한 동화집을 100번도 더 읽었던 것 같다. 유년 시절 나의 '정신'은 순전히 이 동화집의 영향이 컸으며, 아마 내가 지금 '철학'을 지향할 수 있었던 까닭도 그 근원은 이 동화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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