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블로이드판    |  tabloid size   

일반신문의 2분의 1의 크기.

 

업계지(業界紙)와 학교신문, 신문형식의 사내보(社內報) ·기관지(機關紙) 등에 이 크기가 많다. 4 ·6전지로 판을 앉힐 경우에는 4 ·6배배판, 즉 254mm×374mm, B열본판지로 판을 앉힐 경우에는 B4, 즉 250mm×353mm의 판형이다.

 

출처 : 두산앤싸이버
http://www.encyber.com/search_w/ctdetail.php?gs=ws&gd=&cd=&d=&k=&inqr=&indme=&p=1&q=타블로이드판&masterno=153853&contentno=153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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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국판    |  新菊版   

책자의 판형(版型)의 하나로서, 152×224mm의 크기.

 

4·6판(版)이라고도 한다. 원지(原紙) 치수와 함께 판형의 기준이 되고 있는 것으로, A5판(148×210mm)보다 약간 큰 치수이다. 그러므로 국판은 A5판과 비슷한 판형이기는 하나 같지는 않다. 세로결 국판전지를 16절로 하여 판을 앉힌다. 주로 학술서적에 많이 쓰이는 판형이다.

 

출처 : 두산앤싸이버
http://www.encyber.com/search_w/ctdetail.php?gs=ws&gd=&cd=&d=&k=&inqr=&indme=&p=1&q=신국판&masterno=216896&contentno=216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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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 외(지은이), 피터 탤랙(엮은이), 김희봉(옮긴이) | 사이언스북스, 538쪽


 

『사이언스북』 초록

최초로 수를 세다

스와질랜드 (기원전 35000년)


오늘날의 수에도 세 막대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로마 숫자의 I, II, III은 셈 막대에 새겨진 금 모양 그대로이고, 한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씩 더하면서 세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서,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곧 한 자리 숫자들을 무리 지어서 5진법, 10진법, 12진법, 20진법, 60진법과 같은 좀더 편리한 수 체계가 만들어졌다. 이것들은 대개 손가락으로 셈을 하다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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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의 천문학

이집트 기원전3000~1000, 바빌로니아 기원전 2000~1000, 중국 기원전 2000~1050


과학은 천문학으로 시작했다. 우리의 선조들은 하늘을 쳐다보고 변하는 않는 것들을 찾아냈다. 하늘에는 4,000개쯤 되는 눈에 잘 띄는 별들이 기억하기 좋은 배열로 늘어서서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별들 사이로 떠돌이별(행성) 일곱 개가 돌아다닌다. 해와 달은 둥글고, 황도를 따라 움직인다.

달의 모양은 밤마다 변한다. 그러나 29.5305882일마다 달은 원래 모양으로 돌아온다. 이 일정한 간격에 맞춰 한 달이 정의되었고, 옛사람들은 틀림없이 이것 때문에 셈을 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태양도 일정한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 지평선에서 해가 뜨고 지는 위치와, 정오에 태양이 도달하는 고도는 항상 똑같은 방식으로 변한다. 이 변화는 온도, 밤낮의 길이, 동식물의 행동 변화와 일치한다. 곧 1년이 정의되었고, 계절이 나눠졌다. 한겨울, 봄, 한여름에 큰 축제가 벌여졌다. 영국 남부의 스톤헨지와 같은 유적들이 하지에 해가 떠오르는 방향을 가리키도록 건조되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들은 밑면의 네 변이 정확하게 동서와 남북의 축을 향하도록 지어졌다. 게다가 피라미드 중선(中線)의 축은 시리우스, 투반(용자리 알파별-옮긴이)과 같은 별들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한 해의 달수와 날수 말고도 자신들의 종교에 맞는 달력을 만들려던 당시의 천문학자들은 여러 가지 숫자들을 맞추느라 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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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음악

피타고라스 기원전 580~500


지구가 둥글다는 주장도 그가 처음 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최초로 이 주장을 한 사람은 그의 학파에 소속된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200년쯤 번성한 일종의 비밀 종교 단체였다. 지구가 둥글다는 주장을 근거로 피타고라스가 내놓은 것은 북쪽으로 갈수록 북극성이 더 높아 보인다는 것, 베가 수평선을 넘어갈 때 선체가 먼저 사라지고 돛이 나중에 사라진다는 것, 월식 때 달이 드리워진 지구의 그림자가 항상 둥글다는 것이었다.

                                                                                       14


천문 관측

히파르쿠스 기원전 190~120년


히파르쿠스는 고대의 가장 위대한 천문 관측가로, 그리스의 수학적 천문학을 단순한 기술에서 탈피시켜 예측의 과학을 바꿔 놓았다. 그는 1년의 길이를 측정하여 365일 5시간 55분이라 했고, 사계절의 길이는 서로 달라서 봄이 94.5일, 여름이 92.5일, 가을이 88.125일, 겨울이 90.125일이라고 했다. 그 다음에는 기하학을 사용하여(이 과정에서 삼각법을 개발했다)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는 1월 4일쯤에 가장 가깝고 7월 4일쯤에 가장 멀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의 측정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는 한 달의 길이에서 잘 드러난다. 그가 잰 한 달의 길이는 29일 12시간 44분 2.5초로, 정확한 값보다 겨우 1초 짧을 뿐이다.

히파르쿠스는 그리스와 바빌론의 천문학적 전통을 결합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

히파르쿠스는 별의 위치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원전 134년에 전갈자리에서 새로운 별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처음으로 자세한 별의 목록을 만들었다. 그는 맨눈으로 볼 수 있는 850개의 위치를 자세히 기록했다. 별을 밝기에 따라 1등급에서 6등급으로 나눈 것은 대단한 혁신이었고, 이 분류법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26


지구 중심의 우주관

클라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 (90~168년)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이자 지리학자이며 수학자이기도 한 클라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의 학설은 기독교의 교리가 되었고, 그의 『알마게스트』(현대의 번역판은 500쪽이 넘는다)는 1,400년 동안 권위를 유지했다. 그는 단순히 하늘이 둥글게 보인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정확히 공 모양이라고 무뚝뚝하게 선언했다. 밤하늘은 완벽한 반구이기 때문에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에서 지구가 있어야 할 가장 자연스러운 장소이다. 게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는 돌지 않는다. 지구가 돈다면 새와 구름은 날아가 버릴 테니까.

『알마게스트』는 300년 전 히파르쿠스의 저작에서 많은 부분을 물려받아서 지구의 적도면과 공전 궤도면 사이의 각도 측정을 다루고 있고, 지구에서 달과 태양까지의 거리 추정도 함께 별의 목록을 담고 있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는 44개 별자리에 이름을 붙였고, 우리는 아직도 이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오리온자리, 사자자리 등).

프톨레마이오스의 가장 큰 공헌은 행성 운동에 관한 수학 이론이다. 다행히도 모든 행성들이 거의 원 궤도로 태양 주위를 돌고 있고, 따라서 지구 중심 체계로도 정확하게 행성의 위치를 예측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프톨레마이오스의 행성들은 완전히 둥근 원(주전원)을 그리며 일정하게 돌고, 이 원의 중심이 또 다른 완전한 원을 따라 도는데, 이 원의 중심이 지구라는 것이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는 행성의 궤도가 실제로는 타원이기 때문에 생기는 속도와 운동의 변이를 고려하기 위해 ‘평균점(equant point)' 따위의 복잡하고 어설픈 개념들을 도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는 수학적으로 뛰어난 저작이어서, 티코 브라헤 시대까지 유럽의 모든 천문학자들은 하늘에 실제로 공이 있어서 천체들이 거기에 붙어서 돈다고 생각했다.

                                                                                       30


몸의 신비

갈레노스 (130~201년)


갈레노스는 오늘날 터키의 에게 해 바닷가에 가까운 페르가몬에서 자랐고, 히포크라테스의 의학적 사고 및 헤로필루스와 에라시스트라투스의 해부학과 생리학, 그리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좋은 의사가 되려면 자연 과학뿐만 아니라 엄밀한 의학 연구의 바탕이 되는 논리학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풍부한 저술에는 의학에 관한 광범하고 합리적인 철학이 담겨 있다. 갈레노스의 의학에서는 생명에 필요한 네 가지 체액(humour)이 몸속에 있는데, 노란 담즙, 점액, 피, 검은 담즙이 그것이다. 이것이 변용되어 네 가지 원소(불, 공기, 물, 흙), 네 가지 성질(온, 습, 냉, 건), 인생의 네 단계(유년, 청년, 장년, 노년), 사계절 등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질병은 식사나 기후 따위에 의해 체액의 균형이 무너져서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되어서, 피를 흘려 내보내는 치료법(사혈)이 행해졌다. 그리고 세 종류의 기운 또는 생기가 몸을 지배하는데, 이것들은 각각 심장, 간, 뇌와 같은 주요 기관에서 만들어진다.

갈레노스의 위대함은 그의 이론이 아니라 관찰에 있었다. 그는 열성적인 실험가였고, 공개 해부학 강연과 해부 시범도 했다. 그러나 인체 해부가 금지되어 있어서 그는 연구를 위해 동물을 써야 했다. 그가 동물에서 알아낸 것 모두가 인체와 똑같지는 않아서, 그의 책에는 틀린부분도 가끔씩 있다. 그러나 갈레노스의 소화, 신경 자극, 척수, 혈액의 생성, 호흡, 심장 박동, 맥박의 이해에 중요한 공헌을 했고, 그는 이것들을 최초로 진단에 이용했다.

                                                                                       32

영(零)

브라마굽타(598~665)


오늘날 사용하는 영은 인도에서 온 것이다. 7세기 인도 수학자들은 그들이 사용하던 십진법 체계에서 ‘숫자가 없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예를 들어 305, 35, 350 같은 수들의 혼돈을 피하기 위해서) 이것이 점으로 표시되었고, 나중에 영이라는 기호로 발전했다. 인도의 석판에서 이 기호를 사용한 확실한 기록은 876년에 처음 나타났지만, 영을 수 체계의 일부로 받아들일까 말까 망설인 흔적이 이전의 기록에 분명히 보인다. 이것보다 200년 전에 인도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브라마굽타가 영이 포함된 산술 연산을 정의하려고 시도했다. 덧셈과 뺄셈은 문제될 것이 없고, 영을 곱하면 어떤 수든 영이 된다. 그러나 나눗셈은 조금 문제가 있다. 그는 영을 영으로 나누면 영이 된다고 잘못 적었으며, 0/2와 0/3 같은 분수는 답을 얻지 않고 그대로 썼는데, 0/2 같은 분수는 영으로 간주하고 덧셈을 했다.

200년쯤 뒤에 자이나교 수학자인 마하비라는 어떤 수를 영으로 나눠도 그 수가 변하지 않는다고 잘못 말했지만, 영의 제곱근은 영이라고 바르게 적었다. 12세기 인도의 대표적인 수학자 브흐스카라는 영으로 나누면 ‘비시누 신처럼 무한한’ 값이 나온다고 썼다. 이런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십진법은 서쪽으로 페르시아와 아랍 제국을 거쳐 유럽까지 전파되었고, 동쪽의 중국으로도 전파되었다. 그 후 19세기 후반에 독일 수학자 게오르크 칸토어가 나타나고서야 오늘날처럼 무한소와 무한대의 수학에서 영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34


태양 중심의 우주관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에 폴란드의 토툰에서 태어났다. 1496년에 그는 이탈리아로 가서 법학과 의학을 공부했고, 천문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15세기 말의 지구 중심 우주관에는 문제가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달력이 잘 맞지 않았다. 게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평균점’은 ‘부자연스럽게’ 복잡하다고 여겨졌고, 그의 달 궤도에 따르면 달의 겉보기 크기가 한 동안 크게 변해야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분명했다. 행성의 운동에 관한 그의 전체적인 접근도 잘 맞지 않았다. 각 행성들의 궤도 주기가 태양년과 관계된다는 것도 문제였다.

1503년에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로 가서 프롬보르크(현재 독일의 프라우엔베르크)의 성당에서 삼촌을 도와 사제가 되었으며, 성직자로서의 일이 한가해 천문학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는 평균점을 없애고 태양의 위치를 다시 정해서 체계를 혁신했다. 태양은 운행하는 일곱 천체 중의 하나가 아니라 전체의 중심이 되었다. 지구는 중심의 지위를 잃고 태양 주위를 도는 세 번째 행성이 되었고, 달은 태양을 무시하고 지구 주위를 돌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의 공전 궤도를 기준으로, 행성을 안쪽의 내행성과 바깥쪽의 외행성으로 나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서는 임의적이던 행성의 순서도 코페르니쿠스가 바로잡았다. 태양에서 행성까지의 거리와 궤도 주기를 계산할 수 있게 되어서, 그것들이 조화로운 관계에 있음이 밝혀졌다. 화성, 목성, 토성의 역행은 지구의 운동으로 쉽게 설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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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자석

윌리엄 길버트 (1544~1603)


작은 막대자석이 늘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현상은 모든 고대 문명에 잘 알려져 있었고, 13세기에는 자침을 물에 띄워 원시적인 형태의 나침반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독특한 현상에 대한 설명은, 우주의 움직이지 않는 천구가 우리에게 온갖 좋은 영향과 나쁜 영향을 준다는 그리스의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자석이 마치 하늘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천구의 축을 따라 정렬한다는 것이었다.

이 이상한 생각을 잠재우고 자석의 과학을 세운 것은 영국의 의사 윌리엄 길버트가 1600년에 쓴 『자석에 대하여』였다. 그는 지구 자체가 거대한 자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보통 자석 재료로 작은 공 모양의 영구 자석을 만들어서 이 공(‘테렐라’라고 불렀다)의 표면에 올려놓은 자침이 지구 표면의 자석과 똑같이 움직인다는 것을 보였다. 놀랍게도 테렐라 위의 실험용 자침은 지구의 적도에서 남극이나 북극을 향해 이동할 때 지침이 기우는 현상을 그대로 재현했다. 길버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남극과 북극은 바로 자연이 내린, 힘과 영광의 높은 권좌이다.”

길버트는 철학적 사변보다 관찰을 중시한 최초의 진정한 실험가였고, 그의 연구는 실험적 방법의 옹호자로 가장 잘 알려진 프랜시스 베이컨보다 여러 해 앞선 것이었다. 하늘이 아니라 지구가 자석을 지배하는 힘임을 보여준 길버트의 입증은 자력뿐만 아니라 물리적 세계상 전체에 걸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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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의 운동 법칙

요하네스 케플러 (1571~1603)


루터파였던 케플러는 1598년에 그라츠를 떠나 프라하로 가서 티코 브라헤를 도와 일했고, 1601년에는 그의 뒤를 이어 왕실 수학자가 되었다. 티코 브라헤는 탁월한 관측천문학자였으며, 케플러는 티코 브라헤가 남긴 화성 관측 자료를 해석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티코 브라헤의 정확한 데이터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모형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화성이 타원 궤도를 돌고 태양이 타원의 한 ‘초점’임을 깨달았다. 2,000년 동안 천문학을 옥죄던 원형의 멍에가 마침내 벗겨진 것이다. 케플러의 첫 번째 법칙은 두 번째 법칙(첫 번째보다 먼저 발견되었다)과 함께 1609년에 그가 쓴 『새로운 천문학』에 발표되었다. 두 번째 법칙은 행성과 태양을 잇느 SRKTKDDML 선이 항상 일정한 면적을 쓸고 지나간다는 것으로, 행성이 태양에 가까워지면 빨라지는 이유를 설명한다. 케플러는 천체들의 조화에 매료되었다. 세 번째 법칙은 행성이 공전 궤도를 한 바퀴 도는 주기의 제곱이 태양까지 평균 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으로, 1619년에 출판된 그의 신비적인 저작 『우주 속의 조화』 속에 숨겨진 채 발표되었다.

케플러는 행성의 운동을 지배하는 힘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태양과 행성 사이에 자력이 작용한다고(틀리게) 제안했다.

                                                                                       52


로그

존 네이피어 (1550~1617)


로그라는 아이디어의 핵심에는 산술급수(0,1,2,3,4,5…… 등)와 기하급수(1,2,4,8,16,32,64…… 등)의 관계가 있다. 여기에서 4×16=64와 같은 곱셈은 밑 2를 이용하여 처럼 쓸 수 있으며, 따라서 이 곱셈은 제곱수의 덧셈인 2+4=6과 같이 간단하게 쓸 수 있다. 수가 커질수록 이 단순한 방법은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여기에다 네이피어는 모든 수를 밑의 거듭제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예를 들면, 10은 대략 과 같다.

네이피어는 처음에 작성한 표들을 실은 『경이로운 로그 규칙에 대한 설명』에서 단순한 밑을 쓰는 것보다 좀 더 복잡한 아이디어를 사용했고, 항해사들을 위한 삼각법 계산을 간단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계산이 한 시간이나 걸리고, 그 결과가 또 한 시간씩 틀린다면 어떻게 될까? 다행히도 네이피어의 로그는 오차를 몇 분 수준으로 줄였다. 네이피어를 크게 칭송한 사람들 중 하나가 헨리 브리그스였는데,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 최초의 설리번 기하학 교수였다. 두 사람은 밑이 10인 로그 표를 만들면 훨씬 더 실용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상용 로그이다. 그러나 네이피어가 1617년에 죽어서, 그 표를 만드는 일은 브리그스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현대에는 계산기가 로그표와 계산자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56


혈액 순환

윌리엄 하비 (1578~1657)


하비의 시대는 그리스 의사 갈레노스의 가르침이 여전히 받아들여졌고, 하비는 동물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생기’가 혈액에 들어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그대로 믿었다. 하지만 하비가 과학 혁명의 위대한 실험으로 혈액 순환을 발견한 것은 고대의 철학적 배경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전통적 견해에 대한 하비의 확신은 그가 심장, 동맥, 간, 정맥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안 다음부터흔들리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지식에서는 완전히 별개인 두 체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가 알아낸 것이다. 그는 또한 혈액이 폐를 통과한다는 것과 정맥에 한 방향으로만 가는 밸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은 정맥의 피가 심장을 향해서만 흐른다는 뜻이다. 하비는 이러한 발견과 여러 가지 동물 실험으로, 심장은 단방향 밸브를 가진 근육이며, 이 근육이 수축하여 피를 바깥으로 내보낸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심장이 반 시간 안에 몸속에 있는 모든 혈액을 내뿜을 것이라는 자신의 계산 결과에 어리둥절했다. 피는 다 어디로 가며, 어디에서 새로운 피가 공급되는가? 똑같은 피가 동맥에서 정맥으로 흘러서 다시 심장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닐까? 그는 단순하고 우아한 실험으로 이 가설을 시험했고, 1628년에 논의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결론을 72쪽밖에 되지 않는 작은 책으로 발표했다. 이 책의 짧은 제목은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대하여』였다.

하비는 세심한 관찰로도 가장 가는 동맥에서 정맥으로 피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 후 1661년에 마르첼로 말피지가 단순한 단일 렌즈 현미경으로 개구리의 폐에서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찾아냈다. 그는 모세혈관에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고, 이것으로 혈액 순환의 고리가 완성되었다.

                                                                                       58


낙하하는 물체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


아리스토텔레스는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떨어진다고 가르쳤다. 갈릴레오는 이것이 깃털과 같이 가볍고 표면적이 넓은 물체가 공기 저항을 받아 느려지는 것에서 잘못 이끌어 낸 결론임을 밝혔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경사면에서 공을 굴려 이 낙하 과정을 느린 움직임으로 보여 줬고, 사람의 맥박과 커다란 물통에서 새는 물의 양으로 그 짧은 경과 시간을 측정했다. 이 실험에서 그는 진공에서 모든 물체가 무게나 성분에 관계없이 똑같은 비율로 가속된다고 추론했다.

게다가 갈릴레오는 수평으로 움직이는 모든 물체는 다른 힘이 운동을 방해하지 않는 한 계속 같은 속도로 달린다는 것을 알아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체의 운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힘을 계속 가해야 한다고 믿었다. 어쨌든, 탁자 위에서 일정한 속도로 밀던 나무토막을 놓으면 금방 멈추지 않는가? 그러나 갈릴레오는 이 상식적 생각이 숨겨진 힘, 즉 탁자와 나무토막의 마찰력을 무시한 것임을 밝혔다. 오늘날 우리는 물체가 수평 운동을 계속하려는 경향을 ‘관성’이라고 부르며, 이것은 뉴턴이 세 가지 운동 법칙에서 고안한 개념이다.

                                                                                       60


보일의 『회의적인 화학자』

로버트 보일 (1627~1691)


보일의 회의론이 공격하는 주요 목표는 아리스토텔레스, 파라셀수스, 얀 밥티스타 반 헬몬트의 화학 이론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파는 물, 불, 공기, 흙의 네 가지 원소가 만물을 구성한다는 생각을 고수했다. 16세기의 파라셀수스는 만물이 황, 수은, 소금의 세 가지 원질(principle)로 이루어진다고 하여 플라톤의 사중주에 장단을 맞췄다. 이것은 금속이 황과 수은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전의 연금술 이론을 다듬은 것이었다. 보일은 파라셀수스와 반 헬몬트의 추종자들(이른바 스파기리스트(spagyrist)라고 부린 사람들)을 ‘저속한 키미스트’라고 폄하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대안적 체계를 제시하지 않았고, 네 가지 이상의(아마 다섯 가지 이상의) 원소가 있다고만 언급했다. “원초적이고 단순하거나 전혀 섞이지 않은 것으로, 다른 것들로 구성되어 있거나 다른 원소의 성분이 아닌 이것들의 즉각적인 조합으로 모든 혼합물이 구성된다”고 그가 자랑스럽게 늘어놓은 원소의 정의는 그 자체만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에서 그리 멀리 가지 못했다.

보일은 이런 원소가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공헌은 ‘특정한 물질이 어떤 다른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지’ 실험을 통해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고, 이런 태도는 그의 상징인 ‘공기 펌프’를 사용한 기체의 성질 연구에서 잘 드러난다.

                                                                                       70


지층

니콜라우스 스테노 (1638~1686


그가 화석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후원자의 요청으로 상어 머리를 조사하다가, 상어의 이빨이 ‘혀돌’이라고 알려진 화석과 닮은 것을 안 뒤부터였다. 그는 이것이 실제로 화석화된 상어 이빨이라고 바른 결론을 내렸다.

1669년에 출판된 『고체 속의 자연 고형물 연구 입문』에서 그가 내세운 목표는 ‘자연적인 과정으로 형성된 일정한 형태의 물체에 대해, 그 물체 자체에서 그것이 형성된 과정을 보여주는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 목표는 당시에 ‘화석’이라고 알려진 다양한 유기물과 무기물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스테노는 석영 결정이 침전에 의해 마치 실험실의 수정처럼 자란다는 것을 밝혔다. 여기에 비해 조개(화석화된 것이든 아니든)는 ‘생명에 의한’ 것이라는 증거가 형태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바위 안에서 자라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화석 조개가 생물의 잔재라고 합당하게 말하기 위해, 스테노는 왜 해수면보다 높은 대륙의 바위에서 조개 화석이 나오는지 설명해야 했다. 그는 투스카니에서의 현장 연구를 통해 지층은 원래 바다 밑바닥에서 모래와 자갈이 그 속에 든 조개와 함께 수펴으로 침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삐딱하게 누운 지층이 지구의 역사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스테노는 또한 수평으로 침전된 두 시기의 지층을 기술했는데, 첫 번째는 생명이 나타나기 전에 쌓인 화석이 없는 낮은 지츠이고, 두 번째는 생명이 나타난 뒤에 쌓인 화석이 풍부한 높은 지층이다. 이렇게 해서 지구와 생명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화석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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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간의 거리

지오바니 도메니코 카시니 (1625~1712)


1543년에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 중심의 우주 개념을 도입하자, 행성에서 태양까지의 거리 비를 계산하기가 쉬워졌다. 1600년대 초반에 요하네스 케플러가 조화의 법칙, 즉 행성이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의 제곱은 그 행성에서 태양까지 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을 밝힌 뒤에는 그 거리를 구하기가 더 쉬워졌다. 그러나 지오바니 도메니코 카시니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태양계의 절대 크기는 기원전 280년에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쿠스가 내놓은 부정확한 값이 전부였다. 그는 태양이 달보다 20배는 더 멀다고 말했다. 카시니는 루이 16세의 명을 받아 파리 천문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671년에는 태양, 지구, 달이 한 줄로 늘어섰고, 화성이 지구에 가장 가까이 다가왔다. 카시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장 리셰를 남아프리카 북동쪽 해안의 카이엔으로 보냈다. 카시니는 파리에서, 리셰는 카이엔에서 동시에 먼 항성들을 기준으로 화성의 각도를 측정했다. 두 관측 지점 사이의 거리가 1만 킬로미터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카시니는 삼각법을 이용하여 지구와 호성 간의 거리를 계산했다. 케플러의 조화 법칙을 이용하여, 그는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가 1억 3800만 킬로미터라는 값을 얻었는데, 이 값은 정확한 값보다 겨우 7퍼센트 작을 뿐이다.

천문학자들은 삼각법을 이용하여, 지구에서 본 행성 또는 태양 원반 양쪽 끝의 각도를 가지고 행성들과 태양의 크기를 계산했다. 이렇게 해서 태양은 지구보다 110배나 더 크다는 것이 알려졌다.

아이작 뉴턴의 중력 이론이 담긴 『프린키피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가 출판되자, 태양은 지구보다 33만 배나 무겁다는 것이 알려졌다. 태양의 크기와 질량에 대한 지식은 천체물리학의 주춧돌이 되었다.

                                                                                       74


미생물

안토니 반 레벤후크 (1632~1723)


그는 물 속에 들끓는 적충류(원생동물), 인간의 정자, 모세혈고나 속의 혈류, 근육, 신경, 뼈, 이빨, 머리카락 등의 세부적인 조직, 적혈구와 식물의 세포, 67가지 곤충들(벼룩의 기생충처럼 아주 작은 것도 포함)의 세밀한 구조를 기술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그의 발견은 1683년에 자기의 입에서 나온 박테리아를 본 것이다. 박테리아는 그 후로도 100년이 넘게 다른 과학자들이 관찰하지 못했다.

또한 그는 생명이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생각을 반박하기 위해 동물의 생식을 연구했다. 이탈리아의 의사 프란체스코 레디가 구더기는 부패한 물질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파리가 낳은 알에서 나온다는 것을 1668년에 이미 밝혔지만, 이 연구는 무시되었다. 레벤후크는 정액이 부패해서 정자가 생긴다는 주장에도 반대했다. 그는 더 나아가 수정은 정자가 난자를 뚫고 들어가기 때문에 일어나며, 난자는 정자에게 영양분을 제공할 뿐이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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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프린키피아』

아이작 뉴턴 (1642~1727)


『프린키피아』는 뉴턴의 지성이 로버트 후크의 지성과 맞붙은 또 하나의 격렬한 다툼에서 나온 열매이다. 뉴턴은 「빛과 색의 이론」이라는 논문을 써서 흰빛은 ‘서로 다르게 굴절되는 여러 빛이 섞인 것’임을 밝혔고, 이 논문은 그의 또 다른 걸작 『광학』의 토대가 되었다. 그런데 후크가 이 논문에 대해 1672년에 왕립협회에 그저그런 논문이라고 보고했다. 뉴턴은 1684년에 후크가 무심코 행성의 운동 법칙이 증명되었다고 한 말을 전해 듣고 그것이 반격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1685년부터 그는 열병처럼 연구에 몰두했고, 자신의 계산을 당시의 최신 천문 관측 결과와 비교했다.

『프린키피아』는 지성에 적용되는 갈릴레오의 역학과, 케플러가 관측에서 추론한 천상의 역학을 통합했다. 역제곱 법칙에 대한 그전까지의 이 원심력이 어떻게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이 겪는 원심력만이 언급되었다. 역제곱 법칙에 대한 그전까지의 뉴턴의 연구에서는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이 겪는 원심력만이 언급되었다. 하지만 『프린키피아』에서는 이 원심력이 어떻게 태양과 지구 사이에(직접 닿지 않은 채로) 작용하는 중력의 끄는 힘과 균형을 이루는지 밝히고, 행성의 운동이 타원인 이유를 보여 주었다.

뉴턴은 자신의 비상한 발견을 출판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이 연구를 발표할 만큼 확신하지 못했고, 조금의 비판에 대해서도 매우 민감하게 생각했다. 애드먼드 핼 리가 온갖 좋은 말로 설득한 뒤에야 뉴턴은 이 원고를 출판업자에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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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분(微積分)

이안 스튜어트


아이작 뉴턴이 물체의 운동은 그 물체에 작용하는 힘과 그 물체의 가속도 사이의 수학적 관계로 설명된다는 극적인 발견을 했을 때, 수학자와 물리학자는 서로 다른 교훈을 얻었다. 가속도는 미묘한 개념이다. 사실 이것은 두 번째 수준의 변화율, 다시 말해서 변화율의 변화율이다. 물체의 속도는 일반 수준의 변화율이다. 이것은 어떤 기준점에서 물체까지 거리의 변화율이다. 자동차가 시속 100킬로미터로 일정하게 달린다면, 이 자동차는 한 시간에 100킬로미터씩 출발점에서 멀어진다. 가속도는 속도의 변화율이다. 자동차의 속도가 시속 100킬로미터에서 110킬로미터로 커지면, 이 자동차는 특정한 값만큼 가속된다. 이 값은 처음과 마지막 속도뿐만 아니라, 변화가 얼마나 빨리 또는 천천히 일어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속도가 시속 10킬로미터만큼 커지는 데 한 시간이 걸린다면 가속도는 아주 작다. 10초만에 속도가 이만큼 변한다면 가속도는 매우 크다.

따라서 가속도는 변화율의 변화율이다. 거리는 줄자를 가지고 쉽게 잴 수 있다. 그러나 거리의 변화율의 변화율은 재기가 매우 어렵다. 운동 법칙이 그렇게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았고, 뉴턴 같은 천재를 기다려야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속도와 거리에 명시적인 관계가 있었다면, 역사적으로 우리는 훨씬 더 쉽게 운동 법칙을 알아냈을 것이다.

변화율의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뉴턴이(그리고 독일의 수학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가 독자적으로) 새로운 수학 분야인 미분적분학을 발명했다. 이것은(은유적으로, 그리고 말 그대로) 지구의 얼굴을 바꿔놓았다. 그러나 이 발견을 본 사람들의 생각은 저마다 달랐다. 물리학자들은 변화율로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자연 현상과 법칙들을 찾았고, 이렇게 해서 열, 소리, 빛, 유체역학, 탄성, 전기, 자기 등 많은 것을 찾아냈다. 기본 입자에 관한 현대의 가장 난해한 이론도 결국은 본질적으로 같은 수학을 사용하고 있다(물로 SRM 해석이나 암묵적인 세계관은 조금 다르다). 반면에 수학자는 완전히 다른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변화율’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운동하는 물체의 속도를 알려면 먼저 그 물체가 어디에 있는지 측정하고,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난 뒤 그 물체가 어디에 있는지 또 측정해서, 이동한 거리를 경과 시간으로 나눠야 한다. 그러나 물체가 가속되고 있으면, 결과는 어떤 시간 간격을 사용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이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에 대해서는 물리학자와 수학자의 직관이 일치했다. 시간 간격을 될 수 있는 대로 작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0의 간격을 사용한다면 모든 것이 훌륭하게 돌아가겠지만, 불행하게도 이렇게는 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이동거리와 시간이 둘 다 0이 되고 0/0이라는 변화율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간격이 0이 아닐 때의 주요 문제는 아무리 작은 간격을 사용해도 언제나 그것보다 더 작은 간격을 사용해서 더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0이 아니면서 가능한 최소 시간 간격을 사용하는 것이지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수이건 그 수가 0이 아니면 그 절반도 0이 아니기 때문이다. 간격을 무한히 작게, 즉 ‘무한소’로 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잘 돌아갈 것이다. 불행히도 무한소라는 개념에는 까다로운 논리적 역설이 숨어 있다. 특히 우리가 수를 일상적인 뜻으로만 사용한다면 무한소 따위는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거의 200년 동안, 인간은 미분적분학에 대해 매우 어정쩡한 위치에 있었다.

미분적분학 이야기에는 수학의 두 가지 큰 줄기가 다 나타난다. 이것은 자연의 원리를 계산할 수 있는 도구를 과학자들에게 주고, 또한 이것으 수학자들이 자기 만족을 위해 매달릴 새로운 문제를 제공한다. 이것은 수학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으로, 순수 수학과 응용 수학으로도 불린다. 이 경우에는 물리학자들의 생각이 더 힘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미분적분학이 잘 들어맞는다면, 그것이 왜 그런지 굳이 따질 필요가 있는가? 오늘날 자신을 실용주의자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똑같은 것을 느낀다. 그들이 여러 가지 면에서 옳다는 것을 나느 주저없이 인정한다. 다리를 설계하느 기술자들이 자신들의 방법이 궁극적으로 옳다고 입증하는 난해하고 세밀한 논증에 대해서 모른다고 해도, 그들은 표준적인 수학적 방법에 따라 다리를 설계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방법이 왜 옳은지 아무도 모른다면, 나는 그 다리를 건너기가 꺼림칙할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적인 수준에서는, 누군가가 실용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고 궁극적으로 왜 그것이 잘 돌아가는지 탐구해야 한다. 이것이 수학자들이 하는 일이며, 그들은 이런 일을 즐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부산물을 즐긴다.

                                                                                       81


π

요한 하인리히 람베르트 (1728~1777)


π의 저의는 아주 간단하지만(원둘레와 지름의 비), 그 값을 정확하게 계산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π는 3보다 조금 커서 고대 문명에서는 25/8 또는 3.125(바빌로니아), 256/81 또는 3.16(이집트) 등 다양한 근사값이 사용되었다. 그중에서도 10의 제곱근인 3.162는 기발한 근사값이지만, 원과는 전혀 무관한 값이다.

π값을 계산하는 최초의 방법은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것으로, 그는 원을 정구십육각형으로 계산했다. 이렇게해서 얻은 값은 3.1418이었다. 다른 사람은 이 방법을 확장하여 정다각형의 변을 약 1600개로 늘려서 π값을 소숫점 아래 35번째 자리까지 계산했다. 그 이후로 여러 가지 근사법이 나왔다. 1853년에 윌리엄 섕스라는 영국 사람이 15년에 걸친 노력 끝에 π값을 소숫점 아래 707자리까지 계산했지만, 528번째 자리부터 틀렸다는 것이 나중에 알려졌다.

1768년에 요한 람베르트는 π가 무리수임을 증명했다. π는 두 자연수의 비로 나타낼 수 없고, 소수의 배열이 반복되지도 않는다. 1882년에는 페르디난트 린더만이 π는 ‘초월수’임을 밝혔다. 이 값은 어떤 대수 방정식의 해도 되지 않으며, 컴퍼스와 자만으로는 원과 같은 넓이의 정사각형을 그릴 수 없다는 뜻이다. π값의 계산은 컴퓨터의 도움으로 더욱 정확해졌다. 1949년에는 70시간의 컴퓨터 계산으로 소숫점 아래 2,037자리까지 계산했다. 가장 최근의 계산은 1997년의 것으로, π값을 소숫점 아래 51,539,600자리까지 계산했다. 여전히 숫자의 배열에는 규칙성이 없지만, 0123456789라는 배열이 여섯 번 나온다.

                                                                               80 ~ 81









핼리 혜성

에드먼드 핼리 1656~1742


아이작 뉴턴은 1687년에 그의 유명한 『프린키피아』에서, 혜성의 정확한 위치를 두 달 간격으로 세 번 측정하면 그 혜성의 경로를 계산할 수 있음을 보였다. 그는 이 방법으로 1680년에 나타난 큰 혜성의 경로를 계산했다. 그러나 이 방법은 혜성의 궤적이 포물선이라고 가정할 때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혜성이 무한대의 거리로부터 와서 태양을 통과한 다음에 다시 무한히 먼 곳으로 사라진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뉴턴은 23개 이상의 혜성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지만 너무 바빠지고 싫증이 나서 혜성의 궤적을 계산하는 길고 고된 작업을 하지 못했다. 그의 자료는 친구이자 런던 출신의 왕립협회 서기인 에드먼드 핼리에게 넘어갔다.

1696년에 체스터 조폐국의 부국장으로 임명되기 직전에 핼리는 왕립협회에서 1607, 1618, 1682년에 나타난 혜성이 그릴 수 있는 궤적을 계산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1607년과 1682년의 것이 같은 혜성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옥스퍼드 대학교 기하학 교수가 된 핼리는 1705년에 그의 유명한 『혜성 천문학 개관』을 출판했다. 여기에서 그는 혜성 24개의 운동을 추적했고, 모두를 포물선으로 가정했다. 그는 이번에는 1531년의 혜성이 1607년 및 1682년의 혜성과 비슷한 궤적을 그렸음을 알아냈다. 이 혜성이 나타나는 주기는 대략 76년이었다. 핼리는 이렇게 썼다. “따라서 나는 이 혜성이 1758년에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감히 예측한다.” 이 예측은 적중하여, 그 해 크리스마스 밤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이 혜성은 ‘핼리 혜성’이라 불렀다. 핼리 혜성이 되돌아오는 것은 뉴턴의 중력 법칙이 최소한 우리의 태양계 범위에서 잘 맞다는 것을 보여준다.

                                                                      84


수소와 물

헨리 캐번디시 (1731~1810)


물이 원소라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뿌리를 내려서, 물이 사실은 화합물이라고 알려졌을 때 과학자들은 불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물을 구성하는 원소인 산소와 수소가 분리된 다음에는 이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화성 기체’로서 수소(hydrogen)는 17세기 영국 화학자 로버트 보일이 알아냈지만, 틀림없이 보일 이전에도 아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카를 빌헬름 셸레는 1770년에 이 인화성 기체를 만들었고, 이것이 순수한 열소일 거라 생각했다. 헨리 캐번디시도 4년 전에 똑같은 (잘못된)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이 ‘인화성 기체’는 놀라운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1774년에 조지프 프리스틀리의 친구 존 월턴는 이 기체를 공기와 섞어서 구리 플라스크 속에 밀봉하여 발화시킨 다음에, 플라스크 벽에 ‘이슬’이 맺힌 것을 보았다. 프랑스에서는 프리스틀리의 맞수인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의 동료 피에르 조셉 마케르가 인화성 기체를 태운 다음, 불 위에 있던 도자기 판에 ‘물 같은 액체의 방울이 묻어 있는 것’을 보았다. 영국에서 제임스 와트와 프리스틀리가 이 실험을 재현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실험에 네 번이나 반복된 다음인 1781년에 실험을 한 캐번디시가 수소의 정식 발견자로 인정된 것이다. 게다가 라부아지에의 산소 이론에 반대하고 ‘열소론’을 깊이 믿은 캐번디시가 이 발견을 바르게 해석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캐번디시는 이전의 누구보다도 더 철저하게 이 반응을 연구했다. 그는 프리스틀리의 ‘열소를 제거한 기체(산소)’가 부피가 두 배인 ‘인화성 기체(수소)’와 결합한다는 것을 보였고, 그렇게 해서 생긴 물질의 성분비를 밝혔다.

캐번디시는 3년에 걸쳐 실험을 개선한 다음에야 왕립협회에 이 발견을 보고했고, 그 동안 라부아지에도 이 실험을 재현해서 자기가 먼저라고 주장했다. 라부아지에는 물이 벌겋게 단 포신을 통과하면 산소와 수소로 분리된다는 것을 밝혔다. 이때 산소는 금방 철과 결합하여 녹이 슬게 한다. 그래서 라부아지에는 물을 만든다는 뜻으로 ‘인화성 기체’의 이름을 이드로젠(hydrogene)이라고 했다.

                                                                                       98


지구 순환(1785)

제임스 허턴(1726~1797)


1785년에 허턴은 무한한 지구 순환에 대해 이론적이면서도 고전적인 뉴턴 철학을 담은 『지구의 이론』(1795년에 ‘증명과 도표’를 보태서 증보판을 냈다)을 출판한 다음, 당대에 비추어 비평했다. 그의 이론은 1802년에 친구인 수학자 존 플레이페어의 손길로 다듬어져서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같은 스코틀랜드인 친구 찰스 라이엘과 (나중에) 찰스 다윈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허턴은 자연적인 지각 변동이 파괴적이기는 하지만 동식물과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비옥한 토양을 만드는 데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주장대로 이 과정이 한 방향으로만 일어난다면 모든 땅이 바다가 될 것이고, 생명은 끝장이 날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현명한 조물주는 땅이 회복되어 생명이 보존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두었을 것이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탐구는 끊임없이 땅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밝혀 줄 것이다.

화석 지층은 바다 밑바닥에서 형성되지만 그 지층을 구성하는 조각들은 육지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분리된 조각들을 묶어 단단한 바위로 만드는 어떤 연속적인 과정이 있어야 한다. 허턴이 보기에 이 과정에 열과 압력이 있어야 하고, 따라서 이것은 지구 중심에 불이 있음을 암시했으므로, 지진, 화산, 광맥도 불로 설명이 됐다. 전체적으로 끊임없이 ‘일정한’ 순환이 일어나서, 땅의 조각을 재료로 새로운 땅덩어리가 계속 만들어진다. 따라서 지구는 ‘시작의 흔적도 없고 끝날 전망도 없이’ 계속된다.

                                                                               100


백신의 탄생(1796)

에드워드 제너(1749~1823)


“그런데 왜 생각만 하는가? 왜 실험을 하지 않는가?” 스코틀랜드의의사 존 헌터는 그의 제자 에드워드 제너에게 1775년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그래서 1796년 5월 14일 제너는 우두에 걸린, 사라 넬스라는 우유 짜는 여자의 종기에서 고름을 짜 내어 제임스 핍스라는 여덟 살 먹은 아이에게 접종했다. 두창(천연두라고 하지만, 두창이 옳은 용어이다)에 걸리면 얼굴이 흉해지고 목숨까지 위험하지만, 우두는 소가 걸리는 가벼운 병이다. 제너의 경험에 따르면 우두에 감염되었던 사람은 두창에 걸리지 않는다. 제너는 이 면역성을 우두의 종기로부터 직접 접종할 수 없을까 하고 생각했다.

핍스는 가벼운 열병을 앓으면서 물집이 약간 잡혔지만 완전히 나았다. 여섯 주 후에 제너는 이 아이에게 두창을 접종했다. 핍스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1798년에 제너는 23명의 환자에게 두창 백신(vacca는 라틴 어로 소를 뜻한다) 접종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 방법은 금방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두창의 고름을 직접 접종하는 아시아의 전통적인 방법(콘스탄티노플 주재 영국 영사의 부인 레이디 메리 위틀리 몬태규가 18세기 초에 도입했다)보다 훨씬 안전한 방법이 되었다.

한편 의사들은 두창과 우두가 별개의 질병인지 독성만 다른 같은 질병인지를 두고 논쟁했다. 오늘날 우리는 두 가지가 서로 다른 병임을 알고 있지만, 독성이 약한 것에 대한 면역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50년 뒤에 세균설을 연구한 루이 파스퇴르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닭 콜레라를 일으키는 병균을 배지에서 약독화시킬 수 있음을 알아냈고, 약독화시킨 균을 주사한 닭은 이 병에 걸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약독화된 탄저균과 광견병 바이러스를 만들어 1880년대 초에 일련의 극적인 동물 실험으로 백신으로서의 성공을 보여주었다. 감염성 질병을 일으키는 병원균을 약독화시키는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백신 개발의 목표이다.

세계보건기구는 14년에 걸쳐 대대적으로 예방 접종을 실시하여, 마침내 1980년에 두창이 완전히 박멸되었다고 선언했다.

                                                                               102


비교해부학(1796)

조르주 퀴비에(1769~1832)


……

과학으로서의 비교해부학은 퀴비에와, 동시대의 스코틀랜드 의사 존 헌터(1728~1793)에 의해 정립됨으로써, 불완전하고 뒤섞인 화석 조각으로 멸종된 동물을 ‘해부학적으로 가장 적합한 형태로’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재구성은 척추동물의 골격 구조가 모두 비슷하다는 인식 덕분에 가능했다. 퀴비에는 놀랍고 혁신적인 방법으로 화석 포유류를 재구성해서 종의 절멸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화석의 탁본을 분석해서, 1796년에 멸종된 남아프리카의 메가테리움(Megatherium)이 거대한 나무늘보였음을 밝혔다. 그는 파리 분지의 제3기 지층에서 나온 화석으로 가장 오래된 원시 포유류를 재구성했는데, 여기에는 멸종된 유대목(주머니를 가진 동물) 포유류와 맥(tapir)을 닮은 팔레오테리움(Palaettherium, 1804)도 있었다. 그는 척추동물의 공통점을 잘 알았지만 진화론은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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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폭발(1798)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1766~1834)


영국의 계몽 사상은 프랑스처럼 혁명으로 발전하지 않고, 점점 늘어나는 빈민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인류의 완전성을 옹호한 정치철학자 윌리엄 고드윈과 콩도르세 후작의 낙관론은 성직자 생활을 그만둔 토머스 맬서스의 저작에 발목을 잡혔다. 그가 1798년에 쓴 『인구론(인구의 원리에 관한 논고)』는 아귀다툼이 인류를 포함한 모든 동식물의 숙명이라고 보았다. 본질적으로 사회 과학과 정치 과학을 다룬 맬서스의 저작은 인간 사회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시도였다.

맬서스는 두 가지 중심적인 가정(식량은 인간의 삶에 필수적이고, 성적 욕구는 항상 일정하다)을 가지고 몇 가지 으스스한 결론에 도달했다. 인구 증가는 식량 증산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에(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인구를 조절하지 않는 한 결국 대규모 기근이 올 것이다. 그가 생각해 낸 인구 조절 수단은 영아 사망, 전염병, 기근, 매춘이었고, 그의 비관론을 놓고 볼 때 이런 유쾌하지 못한 발상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맬서스의 책은 처음에 익명으로 출판되어 열광적인 지지와 가혹한 비판을 함께 받았다. 그 다음 판에서는 저자의 이름을 밝히고 이전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더 많은 증거를 제시했다. 그 동안 맬서스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논의를 더 확장하여 윤리적 제한(만혼과 금욕)이 인구 증가를 막는 더 좋은 대책이 될 수 있다고 했다. 1805년에 그는 새로 생긴 인도 하일리베리의 동인도 대학교에서 영국 최초의 정치경제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정치가들은 그의 사상을 받아들여 1834년에 실업자, 노인, 병자 들에게 공적 자금으로 구호금을 지급하는 구빈법 수정 조항을 만들었다. 그의 논고는 찰스 다윈과 앨프레드 러셀 월리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 두 사람은 맬서스의 생존 경쟁에서 자연 선택이라는 진화의 메커니즘을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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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볼트의 탐험(1799)

프리드리히 빌헬름 하인리히 알렉산더 폰 훔볼트(1768~1859)


……

훔볼트는 남아메리카와 멕시코에 대한 과학적 탐사를 계속하여 마침내 미국까지 탐사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수많은 식물학과 지질학 표본을 수집했고, 콜롬비아와 에콰도르의 화산을 탐사했다. 또한 유성우를 관찰했고, 극지방과 적도 사이의 자기장 기울기를 측정했으며, 당시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알려진 에콰도르의 침보라소 화산에도 올라갔다. 이 업적은 등산 장비의 도움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으며(그는 의식을 잃었고 입술과 잇몸에서 피가 흘렀다), 조셉 루이 게이뤼삭이 1804년에 열기구로 비행하기 전까지 이것은 인간이 올라간 최고의 높이였다.

전대미문의 대규모 탐험으로 훔볼트는 남아메리카를 과학적 탐사의 장으로 만들었고, 찰스 다윈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다윈은 “나는 어렸을 때 훔볼트의 『아메리카 적도 지역 여행기』를 읽고 또 읽었다. 이 책은 나의 일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훔볼트는 생태적 환경을 거기에 적응한 동식물에 연결시킨 최초의 사람이었다. 200년이나 앞서 현대의 생태학을 예견한 그는 자연을 전지구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세계 지도에서 온도와 기압이 같은 곳을 연결해서 등온선과 등압선을 그리는 것도 그가 고안한 것이다. 그는 과학에 이것들로 그가 과학에 남긴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수많은 공헌들이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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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파동성(1800)

토머스 영(1773~1829)


자연철학자들은 빛의 성질을 밝혀내기 위해 수백 년 동안 노력했다. 1675년에 아이작 뉴턴은 왕립협회 강연에서 빛이 입자의 흐름이라고 제안했다. 그의 경쟁자 크리스티안 호이겐스가 빛은 온 우주에 퍼져 있는 에테르라는 매질 속에 전달되는 파동이라고 주장하면서 뉴턴의 입자설을 반박했다. 호이겐스는 1678년에 「빛에 관한 논고」를 썼지만 발표하기를 주저하여 1690년이 되어서야 발표했다. 그 동안 주도권은 입자설로 넘어갔고, 그것은 주로 뉴턴의 명성 때문이었다.

1800년에 박식한 영국인 토머스 영(로제타석을 해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은 일련의 실험으로 호이겐스의 파동설을 되살렸다. 영은 판지에 뚫은 얇은 두 틈새로 빛을 통과시켜 화면에 비췄다. 화면에 닿은 빛은 밝고 어두운 무늬를 만들었는데, 그는 이것을 간섭 때문이라고 보았다. 밝은 부분은 두 틈새를 통과한 파동의 마루들끼리 겹쳐져서 더 밝아진 것이고, 어두운 부분은 마루와 골이 겹쳐져서 상쇄된 것이다. 뉴턴의 입자설로는 이 무늬를 쉽게 설명하지 못하므로, 이것은 빛이 파동이라는 증거였다.

파동설은 1800년대 초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고, 마침내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의 전자기파 이론에 통합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초의 양자 혁명에 의해, 이 이론도 빛을 절반만 설명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905년에 광전 효과를 설명할 때 빛이 광자라는 입자들의 흐름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입자라고 알려진 전자가 때때로 파동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빛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파동과 입자의 두 모형이 함께 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1920년 윌리엄 브래그 경이 비꼬아 말한 것처럼. “빛은 월․수․금에는 파동으로 행동하고 화․목․토에는 입자로 행동하며, 일요일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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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원소(1807)

험프리 데이비(1778~1829)


중력은 보편적이지만, 화학적 친화력은 선택적이다. 어떤 물질들은 서로 반응하고, 또 어떤 물질들은 반응하지 않는다. 새로운 용어와 라부아지에의 연소 이론이 나온 지 얼마 안 된 1800년의 호학은 친화력을 단순한 힘으로 알기 쉽게 설명할 화학의 뉴턴을 기다려야 할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알렉산드로 볼타가 젖은 마분지를 끼운 두 종류의 금속 판 사이에 전류가 흐른다고 발표했다. 그 다음에 영국의 브리스톨 대학교에서 일하던 콘월 출신의 젊은이 험프리 데이비가 접촉만으로는 전류가 흐를 수 없으므로, 전기를 일으키려면 화학 반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801년에 런던의 왕립 연구소 강사로 임명된 데이비는 많은 청중들을 매료시켜 수강료만으로 연구소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처음에 그는 피혁 처리와 농학을 연구했지만, 1806년부터는 ‘순수한’ 연구를 했다. 그는 커다란 볼타 전지에 연결된 전선을 물에 넣어서 전선 근처에 산소와 그 두 배쯤 되는 수소가 부글거린다는 것을 관찰했다. 데이비는 물의 구성이 그렇기 때문에 부피비가 1:2이고 다른 부산물은 없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는 금, 은, 마노로 된 장치를 이용해서 자신의 추측을 확인했고, 전기의 화학적 친화력은 한 가지 힘의 다른 모습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다시 농학을 연구하다가 다음 해에는 전류를 이용해서 다른 물질을 분해해 보았고, 부식성이 있는 잿물과 소다도 시험해 보았다. 잿물과 불꽃 방전으로 그는 가볍고 반응성이 매우 큰 ‘포타젠(potagen)'을 얻었는데, 이것은 연금술사들이 오랫동안 찾았던, 모든 물질을 녹인다는 ’만물 용해액(alkahest)'와 비슷했다. 그는 기쁨에 들떠 춤을 추며 실험실 주위를 돌았다. 물에 뜨는 가벼운 금속으로 실험했을 때 폭발하는 것을 보고 그는 이것이 금속임을 알았고, ‘포타슘(칼슘)’이라고 이름을 고쳤다.(포타슘, 포타젠이라는 이름은 ‘잿물’이라는 뜻의 potash에서 나왔다-옮긴이주) 그는 소다에서 소듐(나트륨)과 비슷한 것을 얻었고, 나중에 여기에서 칼슘을 비롯한 몇 가지 금속을 분리했다. 그 후 왼스 야코브 베르셀리우스와, 데이비의 조수 마이클 페러데이 같은 좀 더 체계적인 화학자들은 친화력이 전기일 것이라는 데이비의 뉴턴적 통찰을 발전시켜서 화학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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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론(1808)

존 돌턴(1766~1844)


물질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작은 입자인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에서 유래했지만, 이것은 19세기까지만 해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0년대 후반까지도 보이지 않는 대상의 존재를 불만스럽게 반박하는 저명한 과학자들이 있었다. 독일의 물리학자 에른스트 마흐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누가 원자를 보았는가?”

존 돌턴은 원자의 존재를 추론하기 위해 그것을 굳이 볼 필요가 없었다. 그는 단지 아주 단순한 질문을 했다. 물은 왜 산소와 수소를 언제나 똑같은 비율로 가지는가? 이산화탄소가 만들어질 때에는 왜 언제나 똑같은 비율의 산소와 탄소가 필요한가? 그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1808년에 『화학철학의 새로운 체계』제1권에 발표했다. 그는 원자(원소, 즉 탄소, 수소, 산소 등)가 작은(보이지 않는) 공 모양의 물체로서 일정한 질량을 가진다고 말했다. 각각의 화학 원소는 각각의 원자를 가지며, 원자들이 일정한 비율로 결합하여 분자(돌턴은 분자를 ‘합성 원자’라고 불렀다)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것은 개념의 혁명으로, 화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이 체계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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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의 주기율

피터 앳킨스


주기율의 왕국으로 가 보자. 이곳은 상상의 나라이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실제와 가깝다. 이곳은 화학 원소의 왕국이며, 모든 것이 이 원소들로 만들어진다. 이곳은 그리 큰 나라가 아니어서 겨우 100개 남짓ㅎ나 지역(원소)으로 나눠지지만, 물질로 만들어진 실제 세계의 모든 것이 여기에서 나온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100가지 원소에서 모든 행성, 암석, 동물, 식물이 만들어진다. 원소는 공기, 바다, 지구 그 자체의 기초이다. 우리는 원소 위에 서 있고 원소를 먹으며, 우리 자신이 원소이다. 우리의 뇌도 원소로 만ㄷ르어져 있으므로, 우리의 생각조차 어떤 의미에서는 원소의 성질이며, 따라서 원소도 이 왕국의 국민이다.

이 왕국은 지역들이 아무렇게나 뒤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지역의 성질이 이웃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도록 고도로 조직화되어 있다. 선명한 경계는 거의 없고, 경치는 대개 서서히 변한다. 초원은 완만한 골짜기와 섞이고, 골짜기는 점점 깊어져서 끝 모를 심연으로 변한다. 이것이 우리가 이 왕국을 탐험할 때 가져야 할 비유적인 이미지이다.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원칙은, 물질 세계가 100개 남짓한 원소로 만들어질 뿐 아니라 이 원소들이 패턴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실제의 세계는 엄청난 복잡성과 헤아릴 수 없는 매혹으로 가득하다. 생명이 없는 돌과 바위, 강과 바다, 공기와 바람조차 끝없는 놀라움을 준다. 여기에 생명까지 보태면 놀라움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장대한 문학 작품도 따지고 보면 수십 개도 채 안 되는 문자들이 이리저리 조합되어 만들어지듯이, 이 놀라운 자연물들도 겨우 100개 남짓한 원소들이 이리저리 얽히면서 만들어진다. 초기의 화학자들은 조잡한 실험 기술만으로도 인간이 지닌 이서의 놀라운 능력으로(이 힘은 이때도 지금처럼 강력했다) 세계를 화학 원소로 환원시킬 수 있음을 발견했다. 이렇게 환원시킨다고 해도 매혹은 사라지지 않고, 사물을 이해했다는 짜릿한 기쁨이 선물로 따라온다. 이해는 우리의 기쁨을 늘려줄 뿐이다.

그 다음에 거대한 성취가 뒤따랐다. 이 원소들은 물질이지만, 그리고 이것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지만, 화학자들은 외관은 껍질을 뚫고 들어가 친화력의 결합과 친족적 연관성의 왕국을 보았다. 화학자들의 실험과 연구에 의해 바다 밑에서 육지가 솟아올랐고, 그 육지 위에 원소들의 아름다운 풍경이 드러났다. 계속된 연구에서 이 풍경이 단지 산과 골자기가 아무렇게나 놓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주기성을 띤다는 것이 알려졌다. 이것이 가장 놀라운 발견이다. 그런데 물질은 왜 주기성을 띠는가?

과학의 발전에서 자주 볼 수 있듯이, 실제의 이면에 숨어 있는 단순한 개념이 드러나면 갑작스럽게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원자(그리고 원자의 구조를 설명하는 인간 정신의 위대한 발명인 양자역학)가 열려지자 이 왕국의 뼈대가 드러났다. 단순한 원리들(특히 수수께끼 같은 배타 원리)에 의해 이 왕국의 주기성은 원자의 전자 구조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알려졌다.

이 왕국의 구조와, 이 구조로 가능한 모습들이 완전히 이해되었다. 이 왕국을 지배하는 심오한 흐름을 지금 다 보여줄 수는 없지만, 이 흐름은 우리에게 알려졌다. 우리는 이 왕국을 이해했지만, 그 신비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영역의 성질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일정한 범위 안에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원소와 화합물의 물리적, 화학적 성질을 예측할 수 있다. 이 왕국(주기율표)의 화학을 통합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온 세계의 교실과 연구실의 벽에 걸려 있는 주기율표는 화학을 익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며, 이 표의 배열을 이해하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결과가 나온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이것은 모순과 충돌의 왕국이다. 물질의 특정한 성질은 여러 영향들이 경쟁한 결과이다. 이 영향들은 대개 섬세한 균형을 이루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경험이 쌓여도 어떤 원소가 연구해 볼 만한 새롭고 흥미로운 성질을 가질지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단순한 알파벳의 조합이 위대한 문학이 되어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원소의 왕국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알파벳과 달리 이 왕국의 하부 구조에는 다양한 성분들이 있다. 이 성분들의 여러 가지 성질이 예측하기 힘든 방식으로 균형을 이루기 때문에, 이 왕국은 언제나 끝없는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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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득 형질(1809)

장 바티스트 피에르 앙투안드 모네 라마르크(1744~1829)


라마르크는 대부분의 다른 동료들과 달리, 오늘날 우리가 진화라고 부르는 것을 연성 유전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65세가되던 1809년에 『동물 철학』을 써서 우주 만물에 관한 그의 길고 체계적인 연구의 모든 요소를 집대성했다. 그가 이전에 썼던 화학, 기상학, 지질학, 무척추동물 등에 관한 논문은 이 책이 어떤 책이 될지를 미리 보여 주었다. 라마르크는 그 모든 연구를 토대로,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원숙한 필치로 설명했다. 라마르크는 동물이 버주앵(besoin)이라는 성질을 가진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요구’ 또는 ‘필요’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가 든 가장 유명한 예는 기린의 목으로, 나무 꼭대기의 잎을 뜯어 먹어야 한다는 ‘필요’ 때문에 목이 점점 길어졌고, 세대가 계속됨에 따라 기린의 특징적인 형질이 나타나서 생태적 틈새를 메웠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생물도 변한다는 라마르크의 견해는 당시의 지질학자와 생물학자들을 거북하게 했고 (‘생물학’이라는 말도 그가 만들어낸 것이다.) 다윈의 다른 설명을 내놓은 다음에야 받아들여졌다. 라마르크의 이론은 충분히 강력해서, 생물이 긴 시간의 산물이 아니라 특별한 창조에 의한 것이라고 믿은 많은 박물학자들이 그의 생각을 반박하려고 노력했다. 자연 선택이 더 설득력 있는 메커니즘을 제공했지만, 다윈 자신도 연성 유전 개념에 의지했고, 그런 의미에서 다윈도 ‘라마르크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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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문자의 해독(1822)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1790~1832)


1799년에 나폴레옹의 병사들이 이집트의 로제타에서 글씨가 새겨진 판을 하나 발견했는데, 이 판은 이집트의 신성 문자(히에로그리프)가 문자가 아니라 이집트의 이집트의 지혜를 담은 신비로운 상징이라는 그때까지의 신화를 무너뜨렸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세 가지 문자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그림 같은 신성 문자와 그것을 간략하게 만든 신관 문자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민중 문자이다. 기원전 600년쯤에는 민중 문자만 사용되었고, 이것은 15세기까지 쓰였다. 이 세 가지 문자가 고대 이집트 어의 표기에 사용되었고, 콥트 어의 선조인 이 언어는 17세기까지 사용되어서 유럽의 학자들이 기록할 수 있었다. 알려지지 않은 문자를 해독하는 중요한 단서는 그 문자를 사용하는 언어인데, 신성 문자에 대해 콥트 어가 이런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1799년부터 이집트에 대한 관심이 달아올랐고, 민중 문자를 해독하려는 진지한 시도가 있었다. 여기에 로제타석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로제타석은 그리스 어와 민중 문자 그리고 신성 문자로 적혀 있어서, 학자들은 민중 문자의 뜻을 그리스 어 문헌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학자들은 민중 문자의 많은 기호들이 한 글자를 이루는 음성 문자임을 알아냈다. 왕의 이름은 이 기호들을 알아내는 출발점이 되었고, 일단 출발점이 확보되자 나머지는 금방 해독되었다.

영국의 학자 토머스 영은 몇 단계 더 나아가서 민중 문자와 신성 문자의 몇 가지 유사성을 밝혔고, 그 문자들은 신성 문자에서도 이름의 발음을 나타낸다고 추론했다. 그러나 핵심적인 돌파구를 연 사람은 프랑의 언어학 천재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이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름이 사용된 그리스 문자와 신성 문자를 제대로 연결시켰고, 여기에 힘입어 알려진 왕들의 이름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드디어 신성 문자가 완전히 상징으로 되어 있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부정하고 로제타석의 글도 대부분 발음을 표시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1824년에 그는 확인된 기호들에 대한 충분한 언어 자료를 확보하여 설득력 있는 해독 결과를 발표했다.

                                                                               136


알과 배아(1826)

카를 에른스트 폰 베어(1792~1876)


사람의 임신 기간이 아홉 달이나 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포유류 새끼는 거의 성숙한 다음에 태어나기 때문에, 발생의 초기 단계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컷이 내는 유체(정액)가 암컷 안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새로운 배아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17세기에 윌리엄 하비는 모든 생명이 알에서 나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도전했다. 하비 이후에 생물학자들은 실제로 많은 생물이 단세포로 된 알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알을 낳아 몸 밖에서 부화하는 조류, 어류, 곤충류에 비해 포유류의 알은 관찰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포유류는 예외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포유류의 알은 마침내 독일의 생물학자 카를 에른스트 폰 베어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는 학과장의 집에서 기르던 개에서 최초로 알을 발견했고, 나중에 다른 포유류 동물들에서도 이 발견을 확인했다. 이것으로 마침내 생명의 힘을 가진 유체에서 생명이 시작된다는 생각이 거부되었다. 모든 동물은 난세포에서 발생을 시작한다. 이 발견은 생명이 세포로 만들어지고 세포는 세포에서만 만들어진다는 세포설의 주춧돌이 되었다. 또는 이것은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의 발생에 대한 현대적 이해에 크게 기여했다.

게다가 폰 베어는 현대 발생학의 초석을 놓았다. 그는 여러 가지 무척추동물에 관해 배아에서 태어날 때까지의 발생 단계를 설명했다. 그는 나중에 성체의 기관이 될 주요 세포(배엽이라고 한다)도 서술했다. 그는 또한 ‘전성설’을 반박하고 ‘후성설’을 지지했다. 다시 말해 발생은 이미 성숙한 작은 개체가 배아 속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것이 복잡하게 발전하는 과정이라는 것이었다. 베어 이후에 생물학에서 전성설은 살아남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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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1830)

찰스 라이엘(1797~1875)


라이엘의 이름은 지구과학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옥스퍼드 대학교를 나온 스코틀랜드 출신 변호사 라이엘은 지질학의 ‘다윈’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요 이론이 아니라 자신이 쓴 책으로 유명해졌다.

1830년과 1833년에 세 권으로 처음 출판된 『지질학의 원리』는 15,000부 이상 팔렸고 11판(1872년)까지 나왔다. 명료하고 매혹적인 문체로 쓴 ‘초보자를 위한 지질학 지침’인 제1권은 다윈이 1831년 12월 27일에 비글 호의 항해에 가져간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라이엘의 이름은 ‘과거는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라는 격언 또는 ‘제일설’의 원리와 함께 나온다. 그는 조르주 퀴비에의 천변지이설을 반대하고 제임스 허턴의 뉴턴적 접근을 따랐는데, 이것은 자연 현상이 관찰 가능한 요인, 즉 현재 또는 ‘실제’ 원인에 의해서만 합당하게 설명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라이엘의 말에 따르면, 책 제목에서 ‘원리’는 ‘지구 표면에 일어난 이전의 변화를 현재 작용하고 있는 원인으로 설명하는 시도’이다.

……

                                                                               146


도플러 효과(1842)

크리스티안 요한 도플러(1803~1853)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요한 도플러는 증기 트럭에 탄 관악대가 지나갈 때 소리가 트럭의 속도에 비례해서 작아지는 것을 듣고 특별한 원리를 생각해 내어, 그것을 1842년에 처음으로 발표했다.

이 효과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겪는다.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면서 우리를 향해 달려오면 소리의 파동이 구급차의 속도에 의해 짜부러지고(높은 진동수), 반대로 구급차가 우리에게서 멀어지면 파동이 퍼진다(진동수가 낮아진다). 이 원리는 빛과 같은 전자기파에도 적용된다. 태양의 자전에 따라 지구에서 멀어지는 서쪽 가장자리에서는 빛의 파장이 길어져서 스펙트럼이 빨간색 쪽으로 치우치고, 지구로 접근하는 동쪽 가장자리에서는 빛의 파장이 길어져서 스펙트럼이 파란색 쪽으로 치우친다. 도플러 효과의 측정에 따르면, 태양보다 무거운 별은 대개 태양보다 100배 이상 빨리 돈다.

1868년에 윌리엄 허긴스는 자신의 천체 분광기로 별이 시선 방햐으로 후퇴하거나 접근하는 ‘동경’ 속도를 측정했다. 1887년에는 별의 관측으로 지구의 공전 속도를 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별의 동경 속도를 시선에 수직 방향 속도(수십 년에 걸쳐 하늘에서 이동을 관측하여 얻은)와 합쳐서 우주 공간에서의 실제 속도도 얻을 수 있었다. 이 측정에 의해 태양이 2억 년 주기로 우리 은하계의 핵 주위에서 궤도 운동한다는 것이 알려졌다. 또한 은하계 중심으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별의 궤도 운동 속도가 달라지는 것을 통해 우리 은하계의 중심부가 둥글고 질량이 크며 불룩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929년에 허블은 멀리 있는 별빛이 빨간색 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보고 우주가 팽창한다고 추론했다. 이것은 공간 자체가 늘어나면서 생기는 2차 도플러 효과이다. 오늘날에는 태양이 아닌 다른 별에 속한 행성을 찾을 때도 도플러의 원리를 이용해서 행성의 질량과 궤도 반지름을 알아낸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목성 크기의 행성이 60개쯤 발견되었다.

                                                                               156


열역학 법칙(1847)

벤저민 톰슨(럼퍼드 백작, 1753~1814)

사다 카르노(1796~1823)

제임스 프레스콧 줄(1818~1889)

루돌프 클라지우스(1822~1888)


열역학 제1법칙에 따르면, 일과 열은 둘 다 에너지를 운반하는 방법이다. 이것들이 아무리 많이 이동해도 전체 에너지는 변하지 않는다. 19세기 초에는 열을 유체라고 생각하여 ‘열소’라고 불렀고, 열소는 생성되거나 파괴됮 않으면서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흐른다고 생각했다. 많은 관찰자들이 열소 이론을 의심했고, 그 주의 한 사람이 럼퍼드 백작은 포신을 깎을 때 엄청난 열이 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열역학 제1법칙을 발견하는 영예는 1847년에 일이 얼마나 많은 양의 열로 바뀌는지 세심하게 측정한 영국의 자연철학자 제임스 프레스콧 줄에게 돌아갔다.

열역학 제2법칙은 줄보다 훨씬 전에 프랑스의 젊은 공병 장교 사디 카르노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는 물레방아와의 유비를 사용해서, 온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열소를 흐르게 함으로써 증기 기관을 만들 수 있다고 추론했다. 따라서 열의 양뿐만 아니라 온도도 문제가 되었다.루돌프 클라지우스는 유명한 1850년의 논문에서 잊혀진 카르노의 연구를 되살렸고, 열을 절대 온도로 나눈 양에 ‘엔트로피’라는 이름을 붙였다. 고온의 열은 엔트로피가 낮다. 열이 낮은 온도로 내려오면 이 과정에서 일을 얼마나 했는지에 관계없이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클라지우스는 열역학의 두 법칙을 이렇게 요약했다. “우주의 에너지는 일정하고, 우주의 엔트로피는 최대를 향한다.” 오늘날 우리는 엔트로피를 무질서로 이해한다. 그래서 연료가 타면 연료 속의 고도로 조직화된 형태의 에너지가 고온의 열로 변하고, 결국 이 열은 상온으로 떨어진다. 이렇게 해서 열은 가장 높은 엔트로피 상태가 되며, 이런 식으로 우주의 엔트로피는 영원히 증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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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와 물 펌프(1854)

존 스노(1813~1858)


아시아에서 온 콜레라는 1832년에 영국을 휩쓴 다음 사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동식물이 부패할 때 나오는 나쁜 기운 때문에 생기는 '불결병‘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콜레라가 전염병이어서 사람과 사람의 접촉으로 옮을 수 있으므로, 격리를 통해 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콜레라의 원인과 전염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던 중에 다시 이 병이 덮쳤고, 마취 의사 존 스노는 이것을 기회로 역학(疫學)을 현대적인 과학으로 만들었다.

런던에서만 한 달에 7,000명이 죽은 1848년의 기록을 기초로, 스노는 콜레라가 폐가 아니라 장에 감염되기 때문에 공기 속의 독으로 퍼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소책자를 썼다. 이 병은 오염된 하수가 식수용 강물로 흘러들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컸다. 1854년에 런던의 소호에서 콜레라가 발생하자 그는 이 생각을 극적으로 증명할 수 있었다. 그는 병이 도는 곳 근처에 살았으므로, 금방 그 지역의 식수원인 브로드 스트리트(현재의 브로드윅 스트리트)에 있는 펌프를 의심했다. 그는 콜레라 사망자의 수를 지도에 표시해서, 사망자가 브로드 스트리트를 중심으로 450미터 안쪽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펌프의 손잡이를 뽑아버리면 병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고, 슬제로 그렇게 되었다.

브로드 스트리트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거의 모든 희생자들이 그 펌프로 푼 물을 마셨다는 것이 밝혀졌다. 게다가 이 펌프로 푼 물을 마신 방문자들도 콜레라에 걸렸고, 전용 우물이 있는 근처의 교도소에서는 사망자가 거의 없었으며, 물 대신 공짜 술을 마신 양조장 노동자들은 모두 건강했다. 그 다음에 스노는 런던 전역을 조사해서, 콜레라가 수인성 전염병이라는 자기의 주장을 간단한 통계 기법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이 업적의 중요성은 1884년에 로베르트 코흐가 콜레라 균을 확인한 뒤에야 제대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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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안데르탈인(1856)

헤르만 샤프하우젠(1816~1893)


1856년에 독일 뒤셀도로프의 네안더 계곡 위에서 인간과 비슷한 뼈가 발견되었다. 처음에 이 뼈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나중에는 우리 인간이 스스로를 보는 관점을 바꿨다. 서구에서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서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를 신봉했지만, 19세기 초의 과학적 발견은 점점 더 성서와 어긋났다. 네안데르탈인 같은 인류의 화석이 돌 도구와 멸종한 빙하기의 동물인 매머드, 거대한 사슴, 털 많은 코뿔소 등과 함께 발견되었다. 인간은 그때까지의 생각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우리의 조상은 성서가 말하는 것과 분명히 달랐다.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을 처음으로 기술한 독일의 해부학자 헤르만 샤프하우젠은 불쑥 튀어난 이마와 두껍고 굽은 뼈를 로마 시대 이전 ‘야만족’의 특징이라 설명하고 말았다. 이 화석이 멸종된 인류의 뼈임이 알려진 것은 1863년이 되어서였다.

아일랜드 골웨이 대학교의 지질학 교수인 윌리엄 킹은 이 화석 인류를 호모 네안데르탈리스(Homoneanderthalis)라고 명명했고, 비록 멸종했지만 이것은 인류의 친척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처음으로 인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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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1859)

찰스 로버트 다윈(1809~1882)


이제까지 씌어진 책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저작 중 하나인 다윈의 『종의 기원』은 두 가지 주요 이론으로 되어 있다. 첫째,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 종은 먼저 존재하던 종에서 진화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종이 서로 다른 곳에서 유래했고 그 형태가 변하지 않았다는 기독교의 교리와 모순되었다. 둘째, 진화를 일으키는 힘은 자연 선택이다. 집단에서 어떤 개체들은 다른 개체들보다 자손을 많이 남긴다. 자손은 그 부모의 속성을 물려받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다음 세대에서는 번식에 성공한 개체의 후손이 점점 더 많아진다.

번식에 성공해서 후손을 남긴 개체는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개체일 경향이 크다. 따라서 자연 선택은 살아가는 데 가장 적합하게 생물을 진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자연 선택에서는 적응을 자연 안에서 설명한다.

냉혹한 자연 속에서 공작의 꼬리와 수사슴의 뿔처럼 먹고사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이성을 유혹하는 데에만 도움이 되는 것도 존재한다. 다윈은 자연 선택의 특수한 경우인 성 선택만을 다룬 책을 나중에 따로 출간했다. 개체(대개 수컷)들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짝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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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인류

리처드 리키


인류학자들은 오랫동안 언어, 기술적 능력, 도덕적 판단 능력 등 호모 사피엔스의 특별한 능력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러나 인류학에서 최근에 일어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이러한 특별한 성질에도 불구하고 인류와 아프리카의 유인원이 매우 비슷하다는 인식이다.

1859년에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진화의 의미를 인류에게까지 확장하는 것을 피했다. 나중의 판은 다음과 같은 신중한 문장이 추가되었다. “인류의 기원과 역사도 조명될 것이다.” 그는 이 한마디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많은 공을 들여, 20년이 넘게 지난 1871년에 『인류의 기원과 성 선택』을 다음 책으로 출간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민감한 주제였던 이 문제를 다루면서, 그는 인류학의 이론적 구조에 두 기둥을 세웠다. 첫째는 인류가 처음으로 진화한 곳에 대한 추측이고(처음에는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결국 그가 옳았다), 둘째는 진화의 방식 또는 형태에 관한 것이었다. 다윈이 제안한 진화 방식은 최근까지도 인류학을 지배했지만, 결국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다윈은 인류의 고향이 아프리카였다고 말했다. 그의 추론은 단순했다.


세계를 큰 지역들로 나눠 볼 때, 포유류는 같은 지역에서 밀접한 관계를 가진 여러 종으로 진화했다. 따라서 아프리카에는 고릴라나 침팬지와 매우 가까운 (멸종한) 유인원이 살았다. 고릴라나 침팬지는 인류와 가장 가까운 종이므로, 인류의 조상은 다른 곳보다 아프리카에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다윈이 이 글을 쓸 당시에는 고인류의 화석이 아무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결론은 완전히 이론적인 것이었다. 당시에 알려진 유일한 고인류는 유럽에서 출토된 네안데르탈인뿐이었고, 이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비교적 늦은 시기의 존재였다.

인류학자들은 다윈의 이 제안을 매우 싫어했는데, 그 이유에는 식민지인 아프리카에 대한 경멸감도 있었다. 검은 대륙은 호모 사피엔스처럼 고귀한 종의 고향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20세기 시작 전후에 유럽과 아시아에서 고인류의 화석이 계속 출토되자 아프리카 기원설에 더 많은 비난설이 쏟아졌고, 이런 분위기가 수십 년을 지배했다. 1931년에 나의 아버지(루이스 리키)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지적인 스승에게 동아프리카에서 인류의 기원을 탐사하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아프리카가 아니라 아시아를 탐사해야 한다는 맹렬한 압력에 부딪혔다. 아프리카가 인류의 고향이라는 아버지의 확신은 한편으로 다윈의 견해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심할 바 없이 당신이 케냐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케임브리지 학자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동아프리카를 인류 초기의 진화 역사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최근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수많은 인류 화석을 보면 아프리카에 대한 인류학자들의 편견이 이상하게 여겨진다. 이것은 과학자들도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이끌릴 때가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류의 기원과 성 선택』에서 다윈의 두 번째 결론은 인간의 주요 특성(직립, 기술, 큰 뇌)이 조화롭게 진화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손과 팔이 자유롭고 두 발로 단단히 서는 것이 인간에게 유리하다면……인류의 조상에게도 점점 더 곧추서거나 두 발로 서는 것이 유리하지 않다고 말할 이유가 없다. 그들이 사지로 몸무게를 지탱하거나 나무에 오르는 것에 특별히 최적화되었다면, 손과 팔은 무기를 만들거나 돌과 창을 던져 목표물을 맞출 정도로 정교하게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서 다윈은 인류가 서서 걷게 된 것이 석제 무기 제작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더 나아가 거의 단검 같은 유인원의 송곳니에 비해 인간이 가진 짧고 보잘것없는 송곳니를 가지게 된 이유까지 이러한 진화에서 찾았다. 그는 『인류의 기원과 성 선택』에서 이렇게 썼다.


인류의 오랜 조상은……틀림없이 긴 송곳니를 가지고 있었지만, 적이나 맞수와 싸울 때 돌이나 막대 또는 다른 무기를 사용하게 되면서 턱과 이빨을 점점 쓰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턱과 이빨의 크기가 줄어들었다.


무기를 휘두르면서 두 발로 걷는 이 동물은 점점 더 강한 사회적 관계를 발전시켰고, 여기에는 더 많은 지적 능력이 필요했다고 다윈은 논했다. 우리의 조상들이 점점 더 똑똑해지면서 기술과 사회도 점점 더 복잡해져 갔고, 이것은 다시 큰 지적 능력을 필요로 했다. 이런 방식으로 진화는 각각의 속성이 서로를 북돋우면서 진행되었다. 여러 방면의 진화가 서로 얽혀 있다는 가설은 인류의 기원에 대한 아주 명료한 시나리오였고, 이것은 인류학 발전의 중심이 되었다.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최초의 인류는 단지 두 발로 걷는 유인원 이상이었고, 우리가 가치를 부여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몇몇 속성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이 된다. 이 이미지는 워낙 강력하고 그럴듯해서 인류학자들은 오랫동안 설득력 있는 가설을  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는 과학을 넘어선 것이다. 인간과 유인원의 진화적 변이가 오래전에 아주 급작스럽게 일어났다면, 인간과 자연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생겼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본질적으로 여느 동물과 다르다고 확신하는 사람에게는 이 견해가 편안하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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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새(1860)

리처드 오언(1804~1892)

토머스 헨리 헉슬리(1825~1895)


영국의 생물학자 토머스 헨리 헉슬리는 이 시조새(Archaeopteryx, '고대의 새‘라는 뜻)는 조류와 파충류의 특성이 섞여 있어서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탁월한 예라는 것을 깨달았다. 같은 곳에서 시조새를 닮은 작은 두 발 공룡이 발견되자, 이 결론은 한층 더 신빙성을 얻었다. 헉슬리는 서로 다른 종류의 동물이 해부 및 생리학적으로 달라 보여도 그것들을 연결하는 데 본질적인 문제는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공통의 조상이 발견되기만 하면 다른 틈도 메워질 수 있으며, 오언의 발생학적 증거가 이 이론을 지지한다고 보았다.(당시에는 배아의 발생이 종의 진화 과정을 빠르게 재현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에는 중국의 랴오닝에서도 깃털 달린 공룡이 발견되었고,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새를 육식 공룡과 같은 부류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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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실 효과(1863)

존 틴들(1820~1893)


그는 색깔도 없이 보이지도 않는 기체들의 이상한 성질에서 놀라운 결론을 끌어냈다. 수증기는 지구 대기에 매우 흔하기 때문에, 이렇게 효율적인 열 흡수체는 지구 표면의 기후 조절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수증기가 없으면 지구는 급속히 엄청난 냉각 상태에 빠질 것이라고 했다. 틴들은 더 나아가 수증기와 이산화탄소가 기후 변화를 일으키는 과정을 설명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온실 효과이다. (1896년에 스웨덴의 화학자 스반테 아레니우스는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가 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있기 때문에, 이산화탄소의 양이 조금만 줄어도 빙하기가 올 것이라고 추측했다.)

틴들은 또한 하늘이 왜 파란지 설명했다. 즉 대기 중의 큰 분자들에 의해 햇빛 중에서 유독 푸른빛만 많이 흩어지기 때문이다. 해가 질 때 노을이 붉은 이유도 같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해가 지평선에 가까이 있으면, 햇빛은 평소보다 대기층을 훨씬 길게 통과해서 관찰자들의 눈에 온다. 빛이 대기를 통과하는 동안 다른 색은 모두 산란되어 흩어지고 빨간빛만 도달한다. 이것을 ‘틴들 현상’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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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웰의 방정식(1864)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1831~1879)


스코틀랜드의 물리학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전기와 자기를 통합했고, 통합된 전자기에서 빛이 나온다는 것을 알아냈다. 당시에 전기와 자기의 연관성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19세기 초에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는 전류에 의해 나침반의 바늘이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고, 마이클 패러데이는 반대 효과(움직이는 자석이 고리 모양의 전선에 전류를 흘린다)를 발견했다. 패러데이는 이 모든 것을 자석과 전하에서 나오는 전기장과 자기장의 힘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860년대에 맥스웰은 이 아이디어를 이용하여 두 힘을 완전히 설명하는 방정식 체계를 고안하여, 전자기라는 단일한 힘을 장(마당)으로 통합했다.

이 방정식에서 그가 발견한 해의 하나가 바로 파동이다. 파동은 흔들리는 전자기장으로 구성되고, 1초에 3억 미터라는 엄청난 속도로 진공을 여행한다. 빛을 전자기로 설명할 수 있다는 발견은 공짜로 얻은 산물이었다. 그 이전인 1676년에 덴마크의 천문학자 올라우스 뢰머가 최초로 빛의 속도로 쟀다. 그는 목성이 지구에 가까워질 때 그 위성인 이오의 속도가 계산된 속도보다 조금 빨라지고, 목성이 지구에서 멀어질 때에는 이오의 속도가 조금 느려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은 빛이 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하면 설명할 수 있다. 뢰머의 결과는 초당 2억 미터보다 조금 큰 값이었고, 나중에 측정을 거쳐 약 3억 미터로 수정됐다. 맥스웰에게는 결론이 뻔히 보였다. 빛은 전자기파이다. 그의 방정식은 빛이 왜 물이나 유리 같은 투명한 매질 속에서 느려지는지도 보여주었다.

다른 과학자들은 모두 이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888년 하인리히 헤르츠가 빛보다 훨씬 긴 파장을 가진 전자기파를 발견했다. 이것은 맥스웰의 이론에서 예측된 것이고,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라디오파 또는 더 일반적인 전파라고 부른다. 라디오파, 초단파, 밀리미터파, 적외선, 가시광선, 자외선, X선, 감마선이 전체 스펙트럼을 이루는데, 이 모든 것이 맥스웰의 통일적인 전자기 이론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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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델의 유전법칙(1865)

그레고어 멘델(1822~1884)


후손은 분명히 부모를 닮는다. 이 사실만으로도 어떤 생물학적 유전의 메커니즘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유전에 대한 현대적 이해는 정원에 심은 완두콩의 교배 실험에서 시작되었다. 이 실험을 한 사람은 브륀 수도원에서 일하던 오스트리아의 수도사 그레고어 멘델이다.

멘델은 서로 완전히 구별되는 두 완두콩(꽃잎이 하나는 보라색이고 다른 하나는 흰색이었다)을 가지고 시작했다. 멘델이 이것들을 교배시켜서 나온 완두콩은 모두 보라색 꽃을 피웠다. 멘델은 이 완두콩을 자기들끼리 또 교배시켰고, 이번에는 보라색 꽃과 흰색 꽃이 3:1의 비율로 나타났다. 그는 꽃의 색이 두 종류의 ‘인자’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라고 이 결과를 설명했다. 완두콩은 부모로부터 인자를 각각 한 가지씩 물려받는다. 보라색 인자가 흰색 인자에 비해 ‘우성’이기 때문에, 첫 세대에는 모두 보라색 꽃만 나타난다. 그러나 다음 세대에서는 객체의 1/4이 흰색 인자들만 물려받아서 흰색 꽃이 나타나는 것이다. 멘델의 발견은 1865년에 이름없는 학술지에 발표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유전에 멘델의 인자와 비슷한 한 쌍의 유전자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실패하고 멘델만 유전을 발견했을까? 한 가지 이유는 그가 확률론을 이용하여(예를 들어 3:1의 비율을 설명하기 위해)정량적으로 연구했기 때문이다. 또한 멘델이 보라색과 흰색 꽃처럼 확연히 구별되는 특성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키처 연속적으로 변하는 성질에 대해 연구했다. 자식의 키는 부모 키의 중간쯤이 되는 경향이 있어서, 이것으로는 유전 법칙을 확인하기 어렵다.

멘델의 이론은 유전의 일반 이론이 아니라 완두콩의 특정한 성질에만 해당된다고 여겨져서 35년 동안 거의 잊혀졌다. 그 후 1900년에 세 생물학자(휘고 드 브리스, 카를 코렌스, 에리히 체르마크 폰 자이제네그)가 제각각 멘델의 법칙을 재발견했지만, 모두들 이기심을 버리고 멘델에게 유전 법칙 발견의 영예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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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너마이트(1867)

알프레드 베른하르트 노벨(1833~1896)


알프레드 노벨은 스웨덴의 과학자 겸 발명가 집안 출신이고, 그의 아버지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폭약 공장을 운영했다. 1863년에 두 사람은 이탈리아의 화학자 아스카니오 소브레로가 1847년에 최초로 만든 니트로글리세린이라는 폭발성 기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농축된 질산과 황산의 혼합물에 글리세롤(글리세린)을 첨가했다. 어떤 조건에서 글리세롤 분자가 질화되어, 글리세롤 분자의 세 탄소에 각각 한 개씩의 아질산가()가 붙는다. 이 물질은 분자를 산화시키는 힘이 있어서, 엄청난 기체와 에너지를 내뿜으며 물질 전체가 폭발적으로 분해될 수 있다.

니트로 글리세린은 강력한 폭약이지만,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었다. 이 물질을 생산하기 위해 노벨이 스웨덴에 세운 공장이 폭발해서, 동생 에밀을 포함해서 다섯 사람이 죽었다. 스웨덴 정부는 공장 재건을 허가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니트로글리세린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연구를 거룻배 위에서 했다. 그는 다공질의 암석을 곱게 빻아서 만든 규조토에 흡수시킨 니트로글리세린이 안전하게 다룰 수 있을뿐더러 기폭 장치가 있어야만 폭발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노벨은 1863년에 뇌산수은으로 만든 기폭 장치에 대한 특허를 받았다.) 그의 새로운 폭약은 기름이 새지 않는 종이로 싸서 막대 모양으로 만든 것으로, ‘다이너마이트’라는 이름으로 1867년에 특허를 받았다. 노벨은 젤리그나이트도 발명했는데, 이것도 니트로글리세린으로 만들었지만 니트로셀룰로오스와 질화칼륨이 들어간 것이었다. 이것은 훨씬 강력하면서도 안전하게 저장할 수 있는 폭약이었다.

다이너마이트와 젤리그나이트는 채석, 철도 공사, 터널 굴착에 사용하기에 좋아서, 노벨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그는 유산을 노벨상의 기금으로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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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전이(1873)

요하네스 디데릭 반 데르 발스(1837~1923)


수많은 입자들(기체, 액체, 고체 속의 원자 또는 분자, 금속 속의 전자 등)의 움직임을 기술하는 것은 통계학의 문제이다. 19세기 이후에, 기체 입자들이 뉴턴의 법칙을 따르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미시적’ 관점과 기체 전체의 온도, 압력, 부피의 관계를 경험적인 기체 방법으로 서술하는 ‘거시적 관점’을 서로 연결하려는 시도가 계속된다.

온도는 기체 입자들이 가지는 운동 에너지의 척도이다. 압력은 기체를 가두는 통의 벽에 입자가 충돌하기 때문에 생긴다. 1860년대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기체 속에서 무작위로 뽑은 입자가 특정한 속도를 가질 확률을 계산했다. 여기에서 기체의 기본적 특성이 결정되엇고, 기체의 다른 성질들도 여기에서 나왔다. 1872년에 루트비히 볼츠만은 무작위로 움직이는 입자가 왜 이런 ‘확률 분포’를 가져야 하는지 보여 주었다.

이러한 기체 운동론에서는 기체 입자가 무한히 작고 입자끼리 아주 멀리 떠러옂 있어서 서로의 존재가 상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가정한다. 이것은 기체의 밀도가 높을 때에는 잘 맞지만 높은 밀도의 기체에는 잘 맞지 않는다.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요하네스 디데릭 반 데리 발스는 1873년에 완성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이 이론을 높은 밀도의 기쳉도 맞게 수정하는 과업을 스스로 떠맡았다. 기체 입자가 작지만 약간의 부피를 가지고 짧은 거리에서 서로 끌어당긴다는 가정을 받아들인 다음에 그는 온도, 압력, 부피의 관계를 나타내는 간단한 상태 방정식을 유도했다. 그러나 압력이 부피(밀도)에 따라 부드럽게 변할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이 방정식에서는 어떤 ‘임계 온도’ 아래에서 입자들이 두 가지 안정된 상태를 받아들이는데, 하나는 밀도가 매우 높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다. 밀도가 높은 상태는 액체에 해당하고, 압축 또는 팽창에 의해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상전이’가 일어난 다. 이것이 응축 또는 증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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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설(1878)

루이 파스퇴르(1822~1895)


수람들은 수백 년 동안 전염병은 공기 중의 독 때문에 생긴다고 믿었다. 몇몇 사람들은 미생물이 병원균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것이 완전히 밝혀진 것은 1787년 프랑스의 화학자 루이 파스퇴르에 의해서였다. 그는 여러 가지 뛰어난 실험으로 발효, 부패, 감염이 모두 미생물 때문임을 보여주었다. 미생물은 이런 발효, 부패 등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의 연구는 즉각 실용적으로 큰 성공을 가져왔다. 그는 누에고치의 작은 기생충을 발견하여 프랑스의 비단 산업을 구했고, 포도주가 시어지는 것을 막는 멸균법(저온살균법이라 부른다)을 도입하여 프랑스의 포도주 산업을 촉진했으며, 동물의 탄저병과 사람의 광견병 예방 주사가 효과가 있음을 입증했다.

파스퇴르는 일반적으로 미생물이 질병을 일으킨다는 것을 밝혔고, 독일의 유명한 의사 로베르트 코흐는 어떤 미생물이 어떤 질병을 일으키는지 보여 주었다. 코흐는 여러 가지 유형의 미생물을 구분하는 배양 기술과 현미경 사진술 등의 기법을 개발하면서, 1880년대 초에는 결핵과 콜레라를 일으키는 병원균을 확인했다. 그는 또한 어떤 빌병이 특정 미생물에 의한 것이라고 확정하는 기준을 만들었다. 이 기준은, 그 미생물이 항상 그 병을 일으켜야 하고, 감염된 동물에서 그 미생물을 분리하여 순수 배양할 수 있어야 하며, 배양된 미생물이 실험 동물에게 같은 병을 일으켜야 하고 감염된 조직에서 같은 미생물이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전에 야코브 헨레도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지만, 실제로 이 기준을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여 준 사람은 코흐였다. 오늘날에는 이 기준을 ‘코흐의 가설’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멸균 수술을 통해 파스퇴르의 세균서이 더 널리 받아들여졌다. 영국의 의사 조지프 리스터는 부패와 감염에 대한 자신의 연구에서, 부상자의 패혈증이 박테리아 감염 때문임을 알아냈다. 1867년에 그는 자신의 수술 도구와 붕대를 유명한 소독제인 석탄산에 적셔서 사용했고, 3년 뒤에는 석탄산 분무기를 도입했다. 미생물이 완전히 제거된 환경에서 실시하는 무균 수술도 곧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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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성 면역(1882)

엘리(일리야 일리치) 메치니코프(1845~1916)


1882년에 시칠리아 메시나에서 의사로 있던 러시아 출신의 동물학자 엘리 메치니코프는 현미경으로 투명한 불가사리의 유충에서 외부 물질을 탐식하는 운동성 세포를 보았다. 그는 이것을 식세포(phagocyte, 그리스어로 ‘먹는 세포’라는 뜻이다)라고 불렀다. 그는 거의 20년 전에도 회충의 세포에서 비슷한 과정을 본 적이 있어서, 식세포를 원생동물과 같은 단세포 생물의 소화 메커니즘과 비교했다. 다윈 이론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그는 단순한 생물과 복잡한 생물이 발생과 기본적인 생명 과정을 공유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서로 관계가 있음을 입증하고 싶어 했다.

메치니코프는 식세포가 단순한 생물에서는 소화에 직접 참여하지만 복잡한 생물에서는 박테리아 같은 외부 치입자에 대항할 것이라고 추론했다. 그는 이 '면역 세포 이론‘의 증거를 정리해서 불가리아 세포의 활동을 동물(사람을 포함)의 피 속에 있는 백혈구에 비유했다. 현미경 연구에 의해, 백혈구는 부상이나 감염에 의한 염증 부위에 모여서 해로운 박테리아를 공격하고 잡아먹는다는 것이 알려졌다. 식세포가 면역의 기본이라는 메치니코프의 주장은 계속 반대에 부딪혔다. 대부분의 세균학자들은 백혈구가 병균을 잡아먹는 것은 감염을 몸속에 더 퍼뜨릴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혈청 또는 체액 이론은 완전히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생화학적인 ’항독소 혈청‘의 발견 덕분에 신빙성이 있다고 인정받앗다.

메치니코프는 반대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고된 싸움을 해야 했는데, 심지어 극작가까지 그를 공격했다. 조지 버나드 쇼의 『의사의 딜레마』(1906)에서, 거만한 의사 컬렌조 리전은 환자에게 되풀이하여 “식세포를 자극하라!”고 재촉해서 불필요한 시술로 호주머니를 채운다. 그러나 백혈구의 면역 기능은 마침내 사실로 인정되었고, 메치니코프는 1908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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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형성(1885)

에두아르트 쥐스(1831~1914)


……

스윋스의 알프스에서 아르놀드 에셔는 엄청난 규모의 습곡과 바위층이 밑으로 미려 들어간 평평한 단층의 존재를 기록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로저스 형제가 애팔레치아 산맥에서 단단히 접힌 단층 바위를 기술했다.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에서는 세밀한 지질도를 작성해서 바위가 수 킬로미터나 이동한 습곡과 단층이 있다는 거을 알아냈다. 1896년에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지층이 130킬로미터나 이동한 단층도 발견했다.

이 모든 것은 지각의 수평 이동일 보일뿐더러, 수평 이동이 워낙 커서 땅을 밀어 올려 산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암시했다. 이것은 혁명적인 생각이어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메커니즘이 없다는 이유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거의 100년이 지나서야 이것을 설명하는 이론이 나왔는데, 대륙들이 충돌해서 산맥의 띠를 만든다는 ‘판구조론’이 바로 그것이다. 쥐스의 이론은 형성 시기에 따라 산맥의 띠를 연결했다는 점에서 크게 성공했다. 예를 들어 애팔레치아 산맥과 스코틀랜드-스칸디나비아 능선은 마치 대서양이 없는 것처럼 연결되어 칼레도니아 산계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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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선(1895)

빌헬름 콘라트 뢰트켄(1845~1923)


1895년 11월에 독일의 물리학자 빌헬름 뢰트겐은 음극선관으로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여분의 형광막을 실험과 관계없는 곳의 탁자 위에 두었다. 그런데 그가 음극선관을 켜자 버려둔 형광막이 빛을 내는 것이었다. 뢰트겐은 당시까지의 과학에서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 새로운 것이 음극선관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것이 나무, 유리, 고무, 알루미늄 등 온갖 물질을 투과한다는 것을 알았고, 음극선관에 손을 갖다 대어 뼈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까지 확인했다.

뢰트겐선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단단한 물질을 둟고 볼 수 있다는 것은 마법처럼 느껴졌고,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흑마술(black magic)로 여겼다. 그래서 이것을 음탕한 목적에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납을 덧댄 X선 차단 속옷이 발명되기도 했다.

의사들은 인체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을 재빨리 이용했고, X선으로 여러 가지 질병을 치료하는 실험을 했다. 그러나 X선의 위험이 드러나서, 강한 X선을 쬐고 나면 화상을 입거나 머리카락이 빠졌다. 1904년에 미국의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의 조수 클래런스 댈리는 심각한 화상을 입은 뒤에 암으로 숨졌다. X선은 요즘도 종양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하지만, 쬐는 양을 주의 깊게 통제한다.

한편 과학자들은 X선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X선은 빛과 마찬가지로 직선으로 달리지만, 거울에 반사되거나 장애물 주위에서 꺾이지 않는다. X선은 에테르를 매질로 하는 파동인가? 아니면 총알과 같은 입자인가? 이 문제는 1912년이 되어서야 해결되었는데, 그 해에 막스 폰 라우에는 X선을 결정에 투과시키면 산란되어 회절 무늬가 생긴다는 것을 밝혔다. 이것은 X선이 빛과 같은 전자기파임을 증명한 것이다. 물론 X선은 보통의 빛과 달리 파장이 매우 짧아서, 그 길이는 결정 속에 늘어선 원자들 사이의 간격과 비슷하다. X선 회절은 물질의 결정 구조를 알아내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고, 산업에 이용될 뿐만 아니라 DNA와 같은 생체 분자의 구조를 밝히는 데도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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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1895)

지크문트 프로이트(1856~1939)


『꿈의 해석』(1900)과 『성 이론에 관한 세 편의 논문』에서, 정상적 또는 비정상의 모든 성장 과정에서 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프로이트는 성이 우리의 삶 전체에 스며들어 있어서, 남성이건 여성이건(그는 여성에 대해서는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성 정체성 확립의 복잡한 과정을 겪으며, 성인이 된 이후에 삶에도 이것이 영구적으로 영향을 준다고 주장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무의식과 세 부분으로 나뉜 정신 구조(이드, 자아, 초자아) 같은 그의 개념은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조금씩 다듬어진 것들이다. 그는 환자가 의식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설명하는 자유 연상이 ;환자들에게 가장 좋다고 믿었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이론이 인류학, 종교,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는 것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방법이 단순한 치료를 넘어서 심리학적 이해에 중요한 도구라고 생각했다. 정신 분석은 반세기 동안 특히 미국에서 정신의학을 지배했다. 지금은 이 충격이 잦아들었지만, 대중적인 수준에서 우리는 여전히 프로이트의 영향권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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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능(1896)

앙투앙 앙리 베크렐(1852~1908)


X선은 1890년대를 놀라게 한 최초의 소식일 뿐이었다. 금방 새로운 선(線)이 또 발견되어, 이제까지 과학에서 알려지지 않은 더 심오한 것이라고 알려졌다.

프랑스의 물리학자 앙투안 앙레 베크렐은 X선이 형광에 의해 방출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형광 물질을 한 가지씩 검은 종이에 싸서 사진 건판 위에 올려 실외에 두었다.햇빛 때문에 이 물질에서 형광과 함께 X선이 나오면, X선이 종이를 투과해서 건판을 검게 만들 것을 기대한 것이다. 1896년 2월에 황산우라늄칼륨에서 기대했던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나중에 어느 흐린 날에 똑같은 것을 밖에 두었다가 현상해 보니, 마찬가지로 건판이 검게 변해 있었다. 형광에서 X선이 나올 것이라는 베크렐의 추측은 틀렸고, 우라늄이 자체적으로 투과성 선을 방출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이 다른 원소들에서도 나타났다. 1898년에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는 두 가지 새로운 방사성 원소를 발견했는데, 플로늄과 라듐이 그것이었다. 특히 라듐은 엄청난 방사성 에너지를 내뿜기 때문에 이 물질을 물통에 넣으면 물이 금방 끓어오를 정도이다. 이런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더 충격적인 일이 또 있었다. 어니스트 러더포드와 프레더릭 소디가 방사능은 일종의 연금술이라는 것을 밝혔다.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된 원소가 다른 원소로 바뀐다는 것이다.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핵물리학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이 현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물리학자들은 방사선에 세 종류가 있다는 것을 밝혔다. 알파선은 전자가 없는 헬륨 핵이다. 베타선은 매우 에너지가 큰 전자이고, 감마선은 에너지가 큰 전자기파이다. 방사선은 처음에 치료용으로 사용되었지만 방사선성 질환과 암을 일으킨다는 것이 알려진 뒤로는 금지되었다. 그러니 지금은 몸속을 촬영하거나 암 세포를 죽이는 데 사용된다. 또한 방사능은 아주 오래된 암석이나 유적의 연대 측정에서부터 우주선의 동력, 과일의 부패 방지까지 다양하게 이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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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피린(1897)

펠릭스 호프만(1868~1946)

아르투어 아이헨그륀


동물과 사람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실험은 인상적이지 않았고, 또한 오늘날의 엄격한 기준을 절대로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부작용도 많았다(위를 자극하고, 너무 많은 양을 투여하면 호흡 장애가 왔다) 그렇지만 현대적인 약품 관리 규정이 도입되기 전에 이 약이 약장의 터줏대감이 된 것은 큰 다행이었다. 아스피린은 통증과 염증 및 열을 완화시키기 때문에 관절염과 만성 통증 질환을 앓는 사람들에게는 신의 선물이었다. 이 약의 화학적 구조가 조지프 리스터의 수술용 소독제인 석탄산과 비슷했기 때문에, 의사들은 이것을 ‘체내 소독제’라고 생각했고, 류머티즘열을 앓는 젊은 환자가 이 약에 양성 반응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이 생각을 뒷받침했다.

요즘의 의료 전문가들은 상용 진통제로서 아스피린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 약의 작용이 프로스타글란딘이라는 천연 호르몬을 억제한다는 것을 밝힌 존 베인은 1982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현재 아스피린은 심장마비의 치료에 사용하며, 소량을 투여하여 동맥경화를 예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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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1897)

조지프 좀 톤슨(1856~1940)


세계를 구성하는 첫 번째 조각은 1897년에 음극선과 안에서 발견되었다. 19세기 물리학자들이 좋아했고 텔레비전의 기초인 음극선관은 매우 단순한 장치이다. 공기를 뽑아낸 유리관의 한쪽 끝에는 뜨거운 금속 전극이 붙어 있다. 여기에 높은 전압을 걸면 전극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나오고, 이것이 유리관의 반대쪽 벽에 칠해진 형광 물질을 때려 밝은 빛을 낸다. 19세기에 사람들은 음극선관에 나타난 이상한 현상을 보고 무서워하기도 했다.

물리학자들은 수십 년 동안 음극선으로 실험을 했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가지 공통적인 견해는 이것이 에테르(공간을 채우고 있다고 생각된 가설적인 매질) 속에서 전달되는 파동이라는 것이었다. 조지프 존 톰슨은 반대의 견해를 지지했는데,그것은 음극선이 ‘높은 에너지로 전극에서 발사된 전하 입자’라는 것이었다.

톰슨은 음극선의 경로가 자석에 의해 휜다는 것을 알았고, 이것이 금속 요익에 접히면 전하를 남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음극선이 자기장과 전기장 속에서 얼마나 많이 휘는지 관찰하여, 어떤 금속에서 나온 것이든 모든 입자가 똑같은 전하 대 질량 비를 가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런 관찰을 한 것은 한 사람뿐이 아니었지만, 톰슨은 여기에서 훨씬 많은 것을 얻어냈다. 그는 이 ‘입자’가 전기의 보편적 운반자이나자 물질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성분이라고 제안했다.

톰슨은 원자가, 양전하의 공 속에 엄청난 수의 전자가 들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모형은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어니스트 러더포드가 원자 핵을 발견하기 이전에 이미 폐기되었다.

어니스트 러더포드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 전자가 유일한 입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전자는 여전히 세계의 모든 것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성분이다. 전자는 모든 화학 결합을 이루고 물질들을 서로 묶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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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리아 기생충(1897)

로널드 로스(1857~1932)


모든 전염병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감염된 거은 말라리아(이탈리아세 mal aria는 ‘나쁜 공기’라는 뜻이다)이다. 그러나 이 병(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의 진정한 원인은 19세기에 와서야 밝혀졌다. 그 시초로, 알퐁스 라브랑이 1880년에 단세포 생물 또는 ‘원생생물’인 말라리아의 원충(Plasmodium)을 발견한 것이다. 그 후 1894년에 패트릭 맨슨이 이 병이 모기에 의해 옮는다고 제안했고, 1897년에 인도에서 의료 담당 관리로 일하던 로널드 로스는 마침내 학질모기의 위벽에서 말라리아 원충의 생활사에서 중간 단계인 유충을 발견했다. 로스는 다음 1년 동안 모기를 수집하고 키우고 해부하는 일을 계속해서, 이 기생충이 모기의 침샘에서 성숙한 포자로 자라는 것을 추적했다. 성숙한 포자는 침샘에 숨어서 암컷 모기가 사람을 물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동정심 없는 고용주 때문에 로스의 연구가 방해를 받았다. 그는 사람의 말라리아가 드문 곳으로 전출되어, 하는 수 없이 새의 말라리아 기생충에 대한 기초 연구를 했다. 이탈리아에서 바티스타 그라시는 인간이 말라리아에 전염되는 전체 과정을 연구해서 로스의 공을 훔쳤다. 보기 흉한 선취권 다툼이 이어졌고, 약간의 논란 속에서 로스는 1902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열대의학이 독립적인 분야가 될 수 있는 지적 기초를 확립해서, 열대에서 일어나는 다른 기생충-매개체 연구를 촉진했다.

로스는 모기를 박멸하여 말라리아를 퇴치하는 방법을 개발한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2차 세계대전 중에 DDT라는 세균제가 도입됨으로써 이 노력에 큰 성과가 있었다. 1955년 세계보건기구는 말라리아 정복이 가능한 목표라고 판단했지만, 이 목표는 쉽게 달성되지 않았다. 모기가 DDT에 대해 내성을 얻었고, 이 살충제는 환경에 해롭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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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1898)

마르티누스 바이예린크(1851~1931)


세균설의 창시자들은 박테리아 외에도 병을 일으키는 생물이 더 잇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루이 파스퇴르는 광견병을 일으키는 병원균을 찾지 못해서 이 병균이 너무 작아 현미경으로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1895년에 네덜란드의 식물학자 마르티누스 바이예린크는 담뱃잎을 얼룩덜룩하게 만드는 담배 모자이크 병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병든 담뱃잎을 찧어서 만든 수액을 가장 미세한 세라믹 여과기에 걸러도 그 여과액이 여전히 건강한 담배를 감염시킨다는 것을 알았다. 무엇이 감염을 일으키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것은 따로 배양할 수 없었고, 화학 처리나 열 처리로 죽일 수도 없었다. 그러나 크게 불어나는 것으로 보아 독소도 아니었다. 그는 그 여과액으로 건강한 개체를 감염시킬 수 있었고, 그렇게 감염시킨 개체로 또 다른 개체를 감염시킬 수도 있었다. 그는 병을 일으키는 것을 ‘바이러스’라고 이름지었고(라틴어로 ‘독'이라는 뜻), 살아 있는 세포 속에서만 자라고 증식한다는 것을 보였다. 스스로도 이상한 결론이라고 인정했지만, 그는 여기에 매달려서 1898년에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같은 해에 프리드리히 로에플러와 파울 프로슈가 동물의 구제역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그 후 1901년에 황열병이 인간의 바이러스 질병으로 최초로 인지되었고, 1909년에 페이턴 라우스는 닭의 종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처음으로 발견했다(사람의 암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1960년대까지도 분리되지 않았다.)

박테리아를 파괴하는 바이러스도 발견되었다. 박테리아가 죽이는 바이러스는 프레더릭 퉈트(1915년)와 펠릭스 데렐(1917년)에 의해 발견되었다. 지저분한 선취권 다툼이 있엇지만, 이른바 ‘박테리오파지’는 장티푸스와 콜레라 같은 전염병 치료에 혁신을 알리는 소식으로 받아들여졌다. 파지 요법은 1925년에 싱클레어 루이스가 쓴 소설 『애로스미스』에도 등장하지만 효능이 입증되지는 않았고, 페니실린이 널리 사용되면서 잊혀졌다. 그러나 박테리오파지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어 유전자가 어떻게 활성화 또는 비활성화되는지 밝혀냈고, 박테리아에 외부 유전자를 집어 넣는 수단으로서 분자생물학에 근본적인 통찰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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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1900)

막스 플랑크(1858~1947)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9155)


양자론은 뜨거운 상자에서 나왔다. 1900년에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불에 달군 부지깽이 같은 물체가 왜 빨간색에서 흰색까지 여러 가지 파장으로 나오는 빛의 정확한 양까지 계산하려고 했다.

그가 계산에 사용한 이상적인 뜨거운 물체는 구멍 뚫린 검은 상자였다. 그는 일반 수준의 고전 물리학을 사용하여 상자에서 나오는 빛을 거의 설명할 수 있었지만, 완전히 정확하게 하지는 못했다. 실제의 실험에서는 긴 파장 쪽에서 플랑크 방정식의 예측보다 조금 더 많은 빛이 나왔다. 플랑크는 이것을 수정하려면 이상한 가정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너지가 상자에서 연속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덩어리로 또는 ‘양자’로 나온다고 생각해야 했다.

플랑크는 1900년 12월 14일에 이 결과를 발표했지만, 당시에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190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빛은 실제로 덩어리로 나온다는 것을 밝히고,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광자 또는 빛알이라고 부른다.

아인슈타인은 이 개념을 가지고 금속 속의 전자가 어떻게 빛을 맞아 떨어져 나오는지 설명했다. 필립 레너드는 1902년에 전자의 에너지가 빛의 밝기와 관계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빛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고전적인 파동이라면, 밝은 빛을 쬘 때 에너지가 더 큰 전자가 나오야 한다. 그러나 빛이 띄엄띄엄한 알갱이, 즉 광자로 되어 있다면, 밝은 빛은 광자가 많다는 것을 뜻한다. 이때 금속에서 튀어나오는 전자는 광자 하나와 부딪쳐서 나오고, 따라서 전자가 얻어맞는 세기는 주위에 광자가 얼마나 많은가와 관계없다는 것을 아인슈타인이 밝혀냈다.

광양자라는 개념이 받아들여지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렸지만, 결국 양자론은 세계를 정복했다. 물리학자들은 이제 모든 것이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양으로 나온다고 생각한다. 에너지뿐만 아니라 전하, 운동량, 스핀, 심지어 시간과 공간까지도 띄엄띄엄한 양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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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형(1901)

카를 란트슈타이너(1868~1943)


윌리엄 하비가 1628년에 혈액 순환을 발견한 뒤에,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은 약을 정맥에 직접 주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였고, 영국 왕립협회의 또 다른 초기 회원인 존 윌킨스와 리처드 로어는 개의 피를 뽑아서 다른 개에게 수혈하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의 장 바티스트 드니스는 양의 피를 아픈 소년에게 수혈해서 성공했지만, 같은 처치를 받은 다음 환자가 죽고 말았다. 드니스는 살인죄로 기소되었다가 결국 무죄로 풀려났지만, 이 방법은 유럽에서 사라져서 그 뒤 150년 동안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런던 가이스 병원의 제임스 블런들이 서로 다른 종들끼리의 수혈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보였다. 그는 여러 환자에게 사람의 피를 수혈했고, 수혈은 공인된 치료법이 되었다. 그러나 많은 환자들이 심각한 반응을 보였는데, 일부는 치명적이었으며, 따라서 수혈은 대개 최후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수혈을 안전하게 만든 것은 오스트리아의 의사 카를 란트슈타이너였다. 그는 1900년에 사람의 혈청 표본이 적혈구를 엉기게 하지만 모든 사람의 피가 다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알아냈다. 1901년에는 그는 공혈자의 적혈구 표면에 있는 ‘항원’ 분자에 대해 수혈자의 혈청 속에 든 ‘항체’ 분자가 반응하기 때문이라고 이 현상을 설명했다. 항체는 외부 물질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단백질이다. 그는 A와 B의 두 가지 항원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어떤 사람은 A만을 가지고, 또 어떤 사람은 B만을 가지며, 둘 다 가진 사람도 있고 하나도 없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해서 A, B, AB, O의 네 가지 혈액형이 등장했다.

수혈은 특정한 혈액형끼리만 가능하고, 그렇지 않은 혈액형끼리 수혈하면 항체에 의해 ‘이물질’로 간주되어 파괴되므로 위험한 결과를 부른다. 1910년에는 ABO식 혈액형이 멘델의 법칙에 따라 유전된다는 것이 알려져서 친자 확인에 이용되기도 했고, 오랜 옛날 인류의 이주를 추적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으며, 유전 질환의 표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 뒤로 여러 종류의 혈액형 체계가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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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1903)

쥘리앙 푸앵카레(1854~1912)


과학 혁명의 한 가지 신조는, 세계는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리계에 대한 올바른 수학적 표현이 주어지면, 과학자들은 계의 과거와 미래를 알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태엽 장치 우주라는 관념은 심각한 의심을 받게 되었다. 파리 소르본 대학교의 수리물리학 교수 앙리 푸앙카레는 태양, 지구, 달만으로 단순화한 태양계의 운동(이른바 삼체 문제)를 연구했다. 그는 1903년에 뉴턴의 중력 법칙과 운동 법칙을 따르는 단순한 동역학적 계조차도 너무 복잡해서 원칙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였다. 초기 조건이 조금만 변해도 나중에 엄청난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 카오스 이론의 기본적인 착상이다.

1961년에 에드워드 로렌츠는 기후의 컴퓨터 모형에서 카오스처럼 움직이는 수학적 체계를 우연히 발견했다. 이것은 초기 조건이 조금만 변해도 상황이 크게 달라져서 장기 기상 예측이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것인데, 이런 현상을 ‘나비 효과’라고 부른다. 베노이트 만델브로트는 1970년대에 이 연구를 프랙털 기하학으로 확장했다. 고전 물리학에서 행성의 타원 궤도를 ‘끌개’라고 부르는데, 카오스 계에서는 끌개가 프랙털의 모양을 가지므로 프랙털 기하학은 카오스적 운동과 연결된다.

컴퓨터가 등장하자, 수학자들은 이것을 실험실로 이용하고 그림판으로도 이용해서, 그전보다 실제 세계를 훨씬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실제 세계는 대개 카오스적인 양상을 보인다. 이 말은 무작위로 움직인다는 뜻이 아니라, 운동의 형태가 이제까지의 예상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이다. 프랙털과 카오스 이론은 이제 인공지능, 셀형 오토마톤, 유전 알고리듬 등과 함께 복잡계 이론이라는 더 넓은 분야의 한 부분이 되었다. 또한 컴퓨터 모의실험은 회오리 바람과 주식 시장의 변동처럼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현상들에 대한 통찰도 제공한다. 카오스적인 계는 미래가 결정되어 있지만 예측은 불가능하다. 미래는 되어 봐야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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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 검사(1904)

알프레드 비네(1857~1911)


오늘날 지능 검사는 응용 심리학자들의 일상적인 도구이기도 하고, 또 식을 줄 모르는 논쟁의 대상이기도 하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지능을 측정하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지능을 정의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등장하여 반응 속도, 감각적 분별력, 단기 기억과 같은 여러 가지 능력의 차이로 지능을 정의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이런 형태의 연구는 실패했고, 프랑스 사람 알프레드 비네의 단순한 통찰에 자리를 넘겨주었다.

비네는 법률가 수업을 받았지만 심리학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1890년에 지능을 이론적으로 더 잘 정의하려고 노력했고, 1904년과 1905년에 프랑tm 교육 체계에사용할 실용적인 방법을 개발했다. 그는 어린이들이 자라면서 점점 더 어려운 일을 할 수 있게 되더라도 모든 어린이들의 능력이 똑같은 속도로 발달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길고 힘든 관찰 끝에 그는 어린이를 연령별로 나눠서 등급을 매기는 간단한 시험(짧은 문장을 반복하거나 주어진 수를 세는 따위의 문제)을 고안했다. 즉 어린이들에게 이 시험을 보게 해서 어떤 수준에서 틀리기 시작하는지 알아내어, 어린이의 ‘정신 연령(50~70퍼센트의 어린이들이 비슷하게 해내는 정도의 전형적인 연령)’을 판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신 연령이 실제의 연령보다 높은 어린이를 지능이 높다고 보고, 그 반대인 어린이를 지능이 낮다고 봤다.

따라서 지능은 관찰 가능한 행동 차이에 의해 정의되기 시작했고, 지능을 그러한 차이의 원인으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더 실제적인 시험과 관리 방법 등이 개발되었다. 비네의 방법은 지능이 낮은 어린이를 ‘지진아’로 보는 시각을 강화했고, 이런 용어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지능지수 또는 IQ를 만들어낸 사람은 비네가 아니다. IQ는 그가 죽은 뒤에 독일의 심리학자 빌헬름 슈테른이 제안한 것으로, 정신 연령과 실제 연령의 비에 100을 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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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반사(1904)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1849~1936)


러시아의 생리학자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는 처음에 소화 계통의 기능을 연구했다. 그는 특히 침과 위액의 흐름을 조절하는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개의 위장에 바깥으로 직접 통하는 관을 인위적으로 달아서, 단순히 음식을 보거나 심지어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침이나 위액이 나오는 것을 관찰했다. 그 후로 여러 해 동안 그는 ‘심리적 자극’을 열심히 탐구했다. 그는 개가 먹이와 직접 관련된 자극뿐만 아니라 먹이와 관련있다고 학습된 자극들(종 소리나 불빛)에 대해서도 소화액을 분비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을 그는 ‘조건 반사’라고 불렀다.

그는 연구를 계속하여 조건 반사를 일으키는 최선의 방법과 이 효과를 없애는 방법을 찾았고, 자신의 발견을 찰스 셰링턴의 ‘반사궁’ 연구로 설명했다. 반사궁이란, 무릎을 치면 다리가 올라가는 것처럼 감각 신호가 바로 척수의 운동 신경으로 가는 것을 말한다. 소화에 관한 이 연구로 파블로프는 1904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발견을 인간에까지 확장하여, 개성과 심리 장애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학습과 행동을 본유적이거나 훈련으로 강화된 물리적 반사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리학적 심리학은 곧 존 B. 왓슨, 에드워드 손다이크, B. F. 스키너에 의해 응용되어 ‘행동주의’이론을 낳았다. 행동주의는 내적 성찰보다는 객관적 탐사를 기초로 하는 심리학의 한 분야이다. 파블로프의 연구 중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유산은 공포와 불안 같은 흔한 신경증이 잘못 형성된 조건 반사 때문이라는 주장으로, 이것은 20세기 후반의 많은 정신과 의사들에게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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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 상대성 이론(1905)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


1905년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을 허물었다. 그가 한 일은 두 사실을 하나로 묶은 것이었다. 첫째는 서로 다른 속도로 달리는 사람들에게도 물리 법칙은 똑같이 보인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들이 똑같은 실험을 하면 똑같은 결과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과 어긋나지 않는다. 우리는 태양 주위를 도는 우리의 운동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하며, 또한 공중의 비행기 안에서도 편안히 걸을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사실은 조금 낯설다. 날아가는 우주선이 빛을 내면, 이 우주선이 정지해 있을 때보다 빛의 속도가 더 빨라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어디에서 온 빛인지 누가 재는지에 관계없이, 빛의 속도는 항상 똑같다.

이 두 가지를 함께 고려할 때,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절대적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 했다. 길이와 시간은 누가 재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가 볼 때, 날아가는 우주선에 탄 사람들은 바짝 찌부러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로렌츠 수축’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은 부자연스럽게 천천히 움직이는데,d lrjt을 ‘시간 지연’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주선에 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반대로 우리가 찌부러진 채 천천히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모든 운동은 상대적이고, ‘특별한 기준계는 없다’.

속도가 광속에 가까워지면 시간 지연과 로렌츠 수축이 극단적으로 커진다. 광속은 이론상 더 이상 빨라질 수 없는 궁극적인 제한 속도이다. 물리학자들은 가속기 속에서 이 제한 속도에 가깝게 날아다니는 입자들을 매일 만나며, 천문학자들은 은하들이 빠른 속도로 멀어질 때 그 속의 모든 일이 천천히 일어나는 것을 본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에너지에 적용하여, 가장 유명한 공식인 를 발견했다. 이것은 물질 속에 에너지가 숨어 있다는 뜻이다. 물질 속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숨어 있고, 그 크기는 물질의 질량에 광속의 제곱을 곱한 것과 같다. 물질 1킬로그램 안에는 1,000억 개의 솥을 끓일 수 있는 에너지가 들어 있다. 이 정도의 에너지라면 도시 하나를 완전히 파괴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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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에서 아인슈타인까지

마틴 리스


뉴턴 이후 두 세기가 넘게 지나서, 아인슈타인이 ‘일반 상대성 이론’이라 불리는 중력 이론을 내놓았다. 이 이론에 따르면, 행성은 태양 때문에 흰 시공간 속에서 가장 곧은 경로를 따라가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뉴턴 물리학을 ‘뒤집어 엎었다’고 보통 말하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뉴턴 법칙은 여전히 태양계의 운행을 매우 정밀하게 설명하며(가장 잘 알려진 오류는 수성 궤도의 근일점이 아주 조금씩 틀린다는 것인데,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해결되었다). 달이나 행성으로 보내는 우주선의 비행 경로를 계산하기에 가장 적합한 도구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뉴턴 이론과 달리) 속도가 광속에 가까울 때, 그런 정도의 빠른 속도를 일으킬 만큼 엄청난 중력이 있을 때, 그리고 빛 자체에 대한 중력의 효과를 고려할 때 사용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인슈타인이 중력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했다는 것이다. 뉴턴에게는, 왜 모든 입자가 같은 가속도로 같은 궤적을 그리며 떨어지는지, 왜 모든 물체에서 중력과 관성의 비율이 정확히 똑같은지가 수수께끼였지만(예를 들어 전기력에서는 ‘전하’와 ‘질량’이 비례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이것이 질량과 에너지에 의해 흰 시공간 속에서 모든 물체가 ‘곧은’ 경로를 따라가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라고 설명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개념의 돌파구가 되었고, 이것은 어떤 실험에 촉발되어 나온 것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의 깊은 통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더욱 놀랍다.

아인슈타인은 ‘뉴턴이 틀렸다고 증명’하지 않았다. 그는 더 심오하고 범위가 넓은 이론 속에 뉴턴 이론을 통합한 것이다. 이 이론의 이름을 ‘상대성 이론’이라고 하기보다 ‘불변성 이론’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이렇게 불렀다면 이것의 문화적인 의미에 대한 오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업적은 빛의 속도가 관찰자의 운동에 관계없이 어떤 ‘국지적’ 측정에서도 같다는 놀라운 상황을 함의하는 방정식을 발견한 것이다.

경험은 우리의 직관과 상식을 형성한다. 우리는 직접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물리 법칙을 몸에 익히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무에서 나무로 자신 있게 건너 뛰는 원숭이는 뉴턴 법칙을 ‘체화’하고 있다. 그러나 우주 바깥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아주 다른 환경이다. 거리가 엄청나게 멀거나, 속도가 매우 빠르거나, 중력이 매우 강할 때 우리의 상식이 깨진다고 놀랄 필요는 없다.

우주를 빠르게 날아다니는(기본적인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지만 현재의 기술적 제약을 받지 않는) 지적인 생명체는 상대성에 따른 이상한 결과에 맞춰서 그들의 직관을 확장할 것이다. 빛의 속도는 아주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는 것이 알려졌다. 빛의 속도에 가까이 갈 수는 있지만 절대로 넘어서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이 ‘우주론적 제한 속도’ 때문에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여행할 수 있는 거리에 한계가 생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주선이 빛의 속도에 근접할 정도로 가속되면 시계가 느려지기(그리고 우주선 속의 시간이 ‘지연’된다)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100광년 떨어진 별로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면, 여러분은 아직 젊다고 느끼겠지만 지구에서는 2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을 것이다. 우주선은 빛보다 빠르게 달릴 수 없지만(지구에 남은 사람이 측정할 때), 우주선의 속도가 광속에 가까워질수록 당신은 나이를 덜 먹는다.

이 효과들은 우리의 경험이 단지 느린 속도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반직관적으로 보인다. 여객기 속도는 광속의 100만분의 1도 안 되므로 알아볼 정도로 시간 지연이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매일 비행기를 타도 평생 겪는 시간 지연의 양은 1,000분의 1초도 안 된다. 그렇게 미미한 효과도 요즘은 측정할 수 있다. 10억분의 1초 범위의 정확도를 가진 원자 시계로 잰 비행기의 시간 지연은 아인슈타인의 예측과 일치한다.

비슷한 ‘시간 지연’은 중력에 의해서도 일어난다. 거대한 질량에 가까이 있으면 시계가 천ㅊ너히 간다. 지구에서는 이 효과를 거의 알 수 없는데, 우리는 매우 ‘느린’ 속도만을 사용하는 데다 중력도 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랍도록 정확한 측지 위성 체계(GPS)에서는 궤도 운동의 효과와 함께 이러한 시간 지연 효과도 보정해 주어야 한다.

어떤 천체를 벗어나는 데 필요한 속도를 통해 그 천체의 중력이 얼마나 클지 대략 알 수 있다. 지구를 벗어나는 데는 초속 11.2킬로미터의 속도가 필요하다. 이 속도는 광속(초속 30킬로미터)에 비해 아주 작지만, 이른바 ‘정지 질량 에너지(아인슈타인의 에 따라)’의 경우 10억분의 1만을 이용할 수 있는 화학 연료로 이런 속도에 도달해야 하는 로켓 공학자들에게는 무거운 짐이다. 태양 표면에서 벗어날 때의 탈출 속도는 초속 600킬로미터인데, 이것도 광속의 1,500분의 1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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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민(1906)

프레더릭 가울랜드 홉킨스(1861~1947)


괴혈병에 걸려 잇몸, 피부, 관절에 피를 흘리는 선원들만 봐도, 바다를 누비는 해적의 괴로운 생활을 알 수 있다. 1747년에 스코틀랜드의 의사이자 한때 영국 해군의 군의관 조수였던 제임스 린드는 괴혈병을 감귤로 치료할 수 있음을 보였다. 1758년에 그는 감귤류 과일을 식품 목로에 넣어야 한다고 해군에 추천했다. 이 충고를 따르자 괴혈병이 예방되었다. 19세기 후반까지 다른 ‘식품 부족에 의한 질병’은 알려지지 않았다가 각기병과 현미, 구루병과 대구 간유 사이의 관계가 알려졌다. 그러나 이런 질병을 과학적으로 조사한 사람은 영국의 생화학자 프레더릭 가울랜드 홉킨스가 처음이었다.

1900년에 홉킨스는 단백질을 만드는 필수 아미노산의 하나인 트립토판이 체내에서는 만들어지지 않으므로 음식으로 공급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보였다. 그래서 그는 정제된 아미노산, 탄수화물, 지방, 염류 등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영양소가 들어 있다고 하는 ‘합성 식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 연구로 1906년에 합성 식품이 적절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연구실로 돌아와서 합성 식품과 약간의 우유로 기른 생쥐의 성장과 건강을 연구했다. 그의 실험은 용의주도했고, 통제가 잘못되었다든가 소화 흡수가 불완전했다는 따위의 오류는 없었다. 이 실험에서 그가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홉킨스가 자신의 결과를 발표한 1912년에, 캐시미어 펑크는 이 성분을 ‘비타민(활성 아민(vital amine)이라는 뜻)’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화학적으로 아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모든 비타민이 아민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자 vitamine의 마지막 철자인 e가 빠졌다). 비타민이 하나씩 확인되고 분리되자, 몇 가지 비타민은 화학적으로 다른 물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은 각각의 비타민이 새로운 문자를 부여했다. 괴혈병은 비타민 C(아스코르브산)의 부족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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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내부(1906)

리처드 딕슨 올댐(1858~1936)

안드리야 모호로비치치(1857~1936)


파국적인 지진은 지구 내부에 억눌린 힘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일깨워 준다. 국지적인 지진 자체는 피해를 입히지 않지만, 거기에서 생기는 충격파가 지구 전체에 메아리치면서 건물을 무너뜨리고 산사태를 일으킨다. 중국에서 잦은 지진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서기 132년에 최초로 지진을 탐사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755년에 리스본이 파괴된 이후로 유럽의 과학자들도 지진을 이해하고 예측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진 연구의 부산물로 지구의 내부 구조가 드러나게 되었다.

1897년 인도에서 아삼 지진이 일어난 후에, 영국의 탐사 지질학자 리처드 딕슨 올댐은 1880년에 존밀른이 만든 새로운 지진계에서 두 종류의 내부 지진파를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압축파(P파)와 전단파(S파)가 존재한다는 것은 1829년에 프랑스의 수학자 시메옹 드니 푸아송이 예측했다. 1906년에 올댐은 P파가, 지구 내부가 비교적 균일하다고 생각할 때 기대되는 것보다 조금 늦게 지구 반대편에 도달한다는 것을 보였다. 그는 지구 내부의 단단한 핵(지름이 거의 7,000킬로미터에 이른다) 때문에 P파가 느려진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후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크로아티아의 지질학자 안드리야 모호로비치치가 P파와 S파의 속도가 아주 조금씩 변한다는 것을 알아내어, 지각에도 층이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즉 얇은 외부 지각(평균 두께 30킬로미터) 밑에 밀도가 높고 뜨거운 맨틀(두께 2,900킬로미터)이 있고, 그 사이에 모호로비치치 불연속면이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이 불연속면의 깊이가 대륙에서는 10~80킬로미터 사이에서 변하고 대야에서는 7킬로미터쯤이라는 것이 알려져 있다. 1960년대에는 이 불연속면까지 구멍을 뚫어서 그 아래 층을 연구하는 ‘모홀’ 굴착 계획이 세워졌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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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석의 나이(1907)

버트럼 볼트우드(1870~1927)


1907년에 미국의 화학자 버트럼 볼트우드는 코네티컷 주의 글래스턴버리에서 나온 광석에서 방사성 동위원소인 우라늄의 납과 비율을 측정해서, 이 광석이 4억 1000만 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계산했다(나중에 2억 6500만 년으로 수정했다.) 그는 어니스트 러더포드의 연구를 발전시켜 우라늄이 많이 든 암석에는 납과 헬륨도 많이 들어 있다는 것을 보였다. 볼트우드는 우라늄이 붕괴하여 차례로 여러 가지 방사성 동위 원소로 바뀌다가 마지막에 생기는 것이 안정된 납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화성암의 형성 연대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최초의 방법이 되었다.

200년 전에 아일랜드 아마의 대주교 제임스 어셔 같은 학자들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문헌에 따라 기원전 404년에 천지창조가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널리 받아들여져서 역사적 사실로 성서에도 인쇄되었고, 1925년에는 진화론에 반대한 악명 높은 스코프스 원숭이 재판에서도 인용되었다.

그러나 18세기 말에는 지구의 나이를 계산하려는 과학적인 시도가 있었다. 조르주 뷔퐁은 지구가 식는 속도를 근거로 지구의 나이를 75,000년이라고 추정했고, 제임스 허턴은 지질학적 과정이 워낙 느리게 일어나므로 6,000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을 보였다. 한 세기 뒤에 찰스 라에일과 찰스 다윈은 지구가 수억 년은 되었다고 생각했다. 물리학자 윌리엄 톰슨(캘빈 경)은 이러한 지질학적 추정을 비난했다. 그는 암석의 녹는점을 근거로, 지구가 녹은 상태에서 식으려면 열이 확산되는 데 2000만 년이 필요하다고 추정했다. 방사는ㅇ 때문에 지구 내부에서 계속 열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던 그는 지구의 나이를 엄청나게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현재 우리는 지구가 45억 7000만 년 전에 형성되었고, 그 후 45억 1000만~44억 5000만 년에 외계의 물질이 계속 날아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암석은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지르콘 알갱이로, 2001년 1월에 우라늄-납 분석법에 의해 추정된 연대가 무려 44억 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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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운동(1908)

로버트 브라운(1773~1858)

루드비히 에두아르트 볼츠만(1844~1906)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

장 바티스트 페랭(1870~9142)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원자론을 편의적인 작업 가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물리적인 궁극적 실체가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은 신념의 문제로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만물의 궁극적 근본이 원자가 아니라 에너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은 열이 분자의 운동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미친 met이 요동하는 미시적 세계라는 상을 지지하기 위해 브라운 운동을 언급했다.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았던 이 현상은 식물학자 로버트 브라운의 이름을 딴 것으로, 그는 1827년에 꽃가루 입자들이 물속에서 끊임없이 요동하는 것을 현미경으로 발견했다. 이 운동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두고 수십 년 동안 논쟁이 벌어졌다. 생명력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고, 심지어 이것이 열역학 제2법칙을 어기는 영구 운동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볼츠만은 분자들이 꽃가루에 끊임없이 부딪치기 때문에 이런 운동이 일어나며, 분자는 너무 작아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꽃가루가 움직이는 방향을 바꾸기에 충분한 운동량을 가진다고 보았다. 분자의 운동은 무작위적이기 때문에 물에 떠 있는 꽃가루는 불규칙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계속 떠밀린다는 것이다. 1905년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 생각을 엄밀한 이론적 설명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꽃가루의 속도를 따지는 시간에 따라 출발점에서 평균적으로 얼마나 멀리 가는지 계산했다. 꽃가루는 방향을 끊임없이 마구잡이로 바꾸지만, 결국 서서히 물속을 이동할 것이다. 그는 이것이 확산, 즉 두 물질이 서로 섞이는 과정의 원인임을 알았고, 여기에서 ‘원자의 실제 크기를 재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실험가들은 즉각 액체 상부에 떠 있는 꽃가루의 운동을 정확하게 측정하려고 노력했다. 1908년 말에 프랑스의 물리학자 장 페랭이, 아인슈타인의 거의 모든 예측과 계산된 물 분자의 크기가 맞다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내 원자론이 입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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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탄환(1910)

파울 에를리히(1854~1915)


신체의 세포는 건드리지 않고 특정 질병의 원인인 미생물만 죽이는 약을 생각해 보자. 독일의 의사 파울 에를리히는 이런 ‘마법의 탄환’을 찾아내려고 했다. 그는 작물 산업에서 사용하는 새로운 합성 색소가 특정한 세포 구조만을 물들인다는 것을 알았다. 1880년대에 그는 새로 발견된 결핵균을 그런 방법으로 염색해 보았다. 그리고 1890년대에는 이 생각을 발전시켜 항원과 항체의 반응이 본질적으로 화학적이며 ‘곁사슬’ 구조가 마치 열쇠와 자물쇠처럼 맞는다는 것과 연결시켰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항체가 박테리아를 겨냥하듯이 어떤 염료가 특정 미생물만을 선택적으로 파괴할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는 수면병을 일으키는 기생충인 트리파노소마(Trypanosoma)에 대한 비소 유기 화합물의 효과를 연구했다. 그러나 1905년에 매독을 일으키는 스피로헤타(Treponema pallidum)가 발견되자, 방향을 바꾸어 자신의 연구팀과 함께 이 병의 치료법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606가지나 되는 비소 화합물을 조사하고 나서야 숙주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스피로헤타만 죽이는 물질을 발견했다. 에를리히는 1910년 4월19일에 독일 비스바덴에서 열린 국제 의학 회의에서 이것을 발표했다.

초기에 엄청난 공급 부족을 겪은 이 약은 ‘아르스페나민(arsphenamine)'이라고 불리다가 곧 상품명인 ’살바르산(Salvarsan)'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 약을 부주의하게 투여했다가 여러 번의 신고가 있었다. 나중에 더 안전하게 개선된 네오살바르산이 나와서, 화학 요법이라는 분야를 열면서 감염성 또는 악성 질병에 대응하는 합성 화학 물질의 연구를 촉발시켰다. 1935년에는 술포나미드(sulphonamide)라는 새로운 항균제가 나왔고, 에를리히의 꿈처럼 마법적이지는 않지만 2차 세계대전 뒤에는 의사들이 항생제와 더불어 점점 더 강력한 항암제를 처방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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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1910)

토머스 헌트 모건(1866~1954)

앨프레드 헨리 스터티번트(1891~1970)

캐빈 브리지스(1889~1938)

허먼 조지프 멀러(1890~1970)


자식은 부모에게 무엇을 물려받길래 부모와 닮을까? 생물학자들은 이 유전 물질의 범위를 조금씩 좁혀나가서 처음에는 세포, 다음에는 세포의 하위 구조로 내려갔다가 마침내 분자 수준까지 이르렀다. 19세기 후반에는 세포핵 속에서 때때로 보이는 막대처럼 생긴 염색체가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물질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미경 관찰에 의해, 염색체는 부모 세포에서 분열한 다음에 자식 세포에서 다시 결합하여 멘델의 유전 법칙과도 잘 어울린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 다음의 발전은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의 ‘파리 방’에서 이루어졌다. 토머스 헌트 모건이 이 실험실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그의 학생인 앨프레드 스터티번트, 캘빈 브리지스, 허먼 멀러도 모건만큼이나 중요한 발견을 했다. 그들은 생물의 특성이 염색체 속의 유전자라는 단위로 부모에서 자식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보였다. 모건의 첫 번째 업적은 1910년에 나왔다. 그는 초파리의 돌연변이인 하얀 눈이 특정한 염색체(X염색체)의 비정상적인 유전자에 의해 전달된다는 것을 보였다. 1911년에 학부생이던 스터티번트는 초파리의 여러 가지 특성이 어느 유전자에 의해 전달되는지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그는 이런 특성을 가진 초파리들을 엄청난 수로 교배시켜 연구했다. 이런 방법으로 스터티번트는 최초의 ‘유전자 지도’를 만들었고, 그때 이후로 유전학 연구는 특정 형질을 발현하는 유전자를 확인하여 염색체 속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했다.

1927년에 멀러는 X선을 쬐어 유전자에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이 방법으로 유전학 연구를 위해 여러 종류의 돌연변이 파리를 만들 수 있게 되어, 돌연변이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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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전도(1911)

하이케 카메를링 오네스(1853~1926)


아문젠과 스콧이 지구의 가장 추운 곳을 헤매고 있을 때, 물리학자들은 훨씬 더 추운 영역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절대 영도에는 도달할 수 없다.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 수는 있지만, 거기에 닿을 수는 없다. 그런데 추운 나라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하이케 카메를링 오네스는 놀라운 발견을 했다. 1908년에 이 네덜란드의 물리학자는 최초로 헬륨을 액화시켰다. 그는 헬륨을 절대 온도 4도(또는 섭씨 영하 269도)로 냉각해서 액체로 만들었다. 그러나 아문젠이 남극에 도달한 것과 같은 해인 1911년 5월에, 카메를링 오네스는 아주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그는 두 사람의 동료와 함께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교의 실험실에서 차가운 금속의 전기 저항을 측정하고 있었다. 그들이 수은을 절대 온도 4.2도까지 냉각하자, 저항이 갑자기 0이 되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저항이 0이라면, 둥근 전선 속에서 전류는 영원히 흐를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카메를링 오네스는 금방 이것이 금속의 새로운 형태라고 추측했고, ‘초전도’라고 불렀다. 이것은 새로운 양자론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았지만, 완전한 설명은 1957년이 되어서야 나왔다. 존 바딘,리언 쿠퍼, 로버트 슈리퍼가 전자들이 뭉쳐서 양자역학의 이상한 성질 때문에 주위의 금속을 무시한다는 것을 밝혔다.

냉각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만 없으면 초전도체를 사용할 경우,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고, 기차나 자동차가 바닥에서 뜬 채 달리게 할 수 있으며, 훨씬 더 빠르고 작은 컴퓨터와 전기 모니터를 만들 수 있다. 실온 또는 더 높은 온도에서 작동하는 초전도체를 찾기만 하면 이 모든 일을 쉽게 이룰 수 있다. 1986년에 게오르크 벨드노르츠와 알렉스 뮐러는 섭씨 영하 238도에서 초전도 현상을 보이는 세라믹 물질을 발견했고, 그 이후로 섭씨 영하 100도 근처에서 작동하는 세라믹 초전도체도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온 초전도체가 작동하는 원리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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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이동(1912)

알프레트 로타르 베게너(1880~1930)


대서양 해안의 지도가 그려짖자, 아메리카의 해안선이 유럽과 아프리카의 해안선에 잘 맞아 보엿고, 이미 1720년대에 프랜시스 베이컨은 두 해안선이 조각 퍼즐처럼 잘 맞는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증거는 20세기가 되어서야 제시되었다. 1911년에 독일의 기상학자이자 극지방 탐험가인 알프레트 로타르 베게너는 다양한 증거를 들어 대륙이 이동한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베게너는 1908년에 그린란드 탐험에서 돌아와 마르부르크 대학교의 기상학 및 항해천문학 교수가 되었다. 고대의 기후에 관심을 가진 그는 같은 종의 식물 화석이 인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스트리아 대륙의 흩어져 있는 것에 의문을 느꼈다. 에두아르트 쥐스 같은 지질학자들은 남쪽에 모인 대륙을 ‘곤드와나 대륙’이라고 부르고, 대륙들 사이의 ‘다리’ 또는 땅의 수축과 확장 등으로 이것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북극권의 스피츠베르겐 석탄층에 열대 식물의 화석이 있는 것과, 남아프리카의 적도 부근에 빙하의 흔적이 있는 것도 설명해야 했다.

베게너는 1911년에 해답을 찾았지만 다음 해까지 발표하지 않았다. 그의 이론은 모든 대륙이 한때 판게아(Pangea, 그리스 어의 pan gaia(모든 땅)에서 유래함) 초대륙에 모여 있었고, 판탈라사(Panthalassa, Pan thalassa(모든 바다))라는 대양이 그 주위를 감쌌다는 것이다. 그리고 판게아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다가 오늘날의 대륙으로 갈라졌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대륙이 이동하는 원인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는 대양의 바닥이 ‘고무처럼 늘어났거나’ 원심력 또는 달의 중력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했다. 이 이론은 수많은 지질학적 문제를 해결했지만, 적합한 원인(판 구조)은 베게너가 죽은 후 한참 뒤인 1960년대에야 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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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 모형(1913)

어니스트 러더포드(1871~1962)


“당신이 화장지에 대고 쏜 지름 15인치 대포알이 되돌아와서 당신을 때린다고 생각해 보라.” 이것은 러더포드가, 핵이 포함된 원자 모형을 만들기 전에 관찰한 현상을 설명한 말이다.

1907년에 러더포드의 한 학생이 알파 입자를 얇은 금박에 쏘는 실험을 했다. 알파 입자는 방사선 중에서 무거운 종류여서, 대부분 얇은 금박을 뚫고 지나가리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중 몇 개가 되돌아왔다. 당시의 생각대로 금박 속의 원자가, 퍼져 있는 양전하에 전자가 드문드문 들어 있는 형태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러더포드는 양전하가 원자의 중심에 핵을 이루며 몰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대부분의 알파 입자는 핵을 만나지 않고 지나가지만, 재수 없는 입자 몇 개는 핵에 부딪혀 되돌아올 것이다. 러더포드는 작고 단단한 핵 주위로 작은 전자가 돌아다니는 원자 모형을 개발했다.

이것은 원자의 상을 다시 그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913년에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는 여기에서 훨씬 더 급진적인 이론으로 나아갔다. 그는 러더포드의 아이디어를 새로운 양자론과 결합했다. 보어의 모형에서, 전자는 어떤 고정된 에너지를 가지고 핵 주위를 돈다. 이것은 원자가 왜 안정되어 있는지 설명한다. 즉 전자는 에너지를 잃고 핵으로 추락할 수 없다. 전자는 오로지, 이른바 바닥상태까지만 내려갈 수 있다.

이러한 고정된 전자 궤도는 원자가 왜 스펙트럼 선이라는 단일한 색의 빛만을 방출하는지 설명한다. 전자가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이동할 때 남은 에너지가 광자의 에너지로 나오기 때문에, 항상 똑같은 에너지가 똑같은 빛으로 방출된다. 이러한 불가사의한 양자 규칙은 우리의 몸을 비롯한 단단한 물질 세계뿐만 아니라 금방 날아가 버리는 빛의 영역까지 지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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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전달 물질(1914)

헨리 핼릿 데일(1875~1968)

조지 바거(1878~1939)

오토 뢰비(1873~1961)


신경계의 각 부분들은 어떻게 자기들끼리 교신하는가? 이것은 해묵은 숙제였다. 생각과 행동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견해는 말초 신경에서 자극이 전달되는 속도를 측정한 19세기 생리학자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들의 수수께끼 중 하나는 찰스 셰링턴이 ‘시냅스’라고 이름 지은 신경의 끝 부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전기 모형을 받아들였지만, 영국의 헨리 데일리와 독일의 오토 뢰비는 화학적인 설명을 찾았다. 데일은 화학자 조지 바거와 함께 체내에서 생리학적인 활성 화학 물질을 조사하여,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하스타민과, 조산 때 자궁 수축을 일으키는 맥각 등을 연구했다. 1914년에 그들은 맥각병 곰팡이에서 아세틸콜린을 분리하여, 이것이 부교감 신겨계(자율 신경계의 한 종류로 혈압, 소화, 발한 등의 불수의적인 신경 기능을 조절한다)에서 비슷한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을 보였다. 1920년대에 행한 여러 가지 고전적 실험에서, 데읽솨 그의 동료들은 아세틸콜린이 신경의 끝부분에서(수의근의 신경 끝에서도) 나온다는 것을 밝혔다.

독자적으로 연구한 뢰비는 분리된 심장을 사용하여, 신경이 연결된 상태와 연결되지 않은 상태 모두에서 신경을 자극할 경우, 분리된 심장에 어떤 물질이 전달되어 교감(자극) 또는 부교감(억제) 신경을 자극하여 심장 박동수를 조절하는지 보였다. 여기에서 데일과 뢰비는 신경 자극이 시냅스 사이에서 화학적으로 전달된다는 것을 알아냈고, 이 업적으로 그들은 1936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여기에서 아세틸콜린과 노르아드레날린이 두 가지 기본적인 신경 전달 물질이었지만, 그 이후에 세로토닌, 도파민이 발견되었다. 양귀비와 비슷한 효능을 지닌 엔도르핀도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신경 섬유의 통증 작용을 억제하여 고통을 둔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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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상대성 이론(1915)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


이미 시간과 공간에서 한발 비켜선 아인슈타인은, 우주를 비틀어서 환상적인 새로운 모습으로 만들었다. 뉴턴의 중력 법칙에 따르면, 힘은 어떤 거리에서든 즉각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빛보다 빠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인슈타인은 이 모순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는 떨어지는 사람은 자기 무게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했고, 따라서 가속도와 중력은 어떤 의미에서 동등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 생각을 바탕으로 1915년에 물리학의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이론에 도달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의 세계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휘어져 있다. 지구, 태양, 심지어 이 책까지, 이 모든 물질은 평평한 시공간에 움푹 패인 웅덩이를 만든다. 이렇게 해서 울퉁불퉁해진 시공간을 물체가 이동하면, 우리는 물체의 경로가 곡선을 따르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이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이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빛도 중력에 의해 휘어야 한다. 아서 에딩턴이 1919년에 태양의 중력에 의해 별빛이 휘는 것을 관찰했다고 선언했을 때, 일반 상대성 이론은 과학자의 정신과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훨씬 더 놀라운 일이 있다. 충분한 양의 물질이 강하게 압착되면, 공간이 극단적으로 늘어나서 파국이 찾아온다. 그러한 무한한 깊은 우물이 시공간 연속체에 나타나고, 중력이 너무 커서 아무것도 여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블랙홀이다. 천문학자들은 이제 우주에 이런 괴물들이 많이 흩어져 있고, 우리 은하의 중심부에도 거대한 블랙홀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다른 이상한 효과를 찾기 위해 새로운 실험이 진행 중이다. 이것은 거대한 지하의 탐지기로 중력파를 찾는 것인데, 중력파는 블랙홀의 형성 같은 파국적인 사건에 의해 생겨나는 시공간의 물결이다. 머지않아 그레버티 프로브의 B라는 우주선(중력 탐지용 우주선-옮긴이)이 발사되어, 지구의 회전에 의해 시공간이 마치 숟가락으로 휘저은 꿀처럼 끌리는 것을 관찰할 것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우주 전체의 형성과 진화도 설명할 수 있다. 나중에 적합한 관측이 이루어지면 일반 상대성 이론 방정식 속의 단순한 상수가 우주의 확장이 가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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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다윈주의(1918)

로널드 에일머 피셔(1890~1962)

존 버던 샌더슨 홀데인(1892~1964)

슈얼 라이트(1889~1988)


찰스 다윈이 1859년에 자연 선택에 기초한 진화론을 내놓은 다음에, 진화론 자체는 금방 널리 받아들여졌으나 자연 선택은 거의 거부되었다. 자연 선택은 너무 많은 문제점을 가진 것으로 보였고, 특히 유전이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한 가정이 문제였다. 1859년 당시에는 생물학적 유전이 아직 수수께끼였으나 멘델의 유전 이론이 1900년에 재발견되자 자연 선택이 가진 문제는 해결될 것 같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초기의 멘델주의자들은 모두 철저한 진화론 반대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난점은 멘델의 이론이 성(性)과 같이 단절적인 특성에만 적용되는 반면에, 진화는 주로 키와 같이 연속적으로 변하는 특성에 적용되는 것으로 보였다. 프랜시스 골턴 이후로 연속적으로 변하는 특성에 대해서 수리생물학자들이 당시까지 알려진 모든 사실을 멘델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보인 것은 1910년대가 되어서였다. 그러고 나자 그들은 자연 선택이 멘델 이론과 잘 어울린다는 것을 보일 수 있었다. 이 일은 주로 1910년대와 1920년대에 영국의 생물학자 R.A. 피셔와 J.B.S. 홀데인, 미국의 생물학자 슈얼 라이트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돌이켜 보면 멘델 이론이 다윈의 자연 선택을 구원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멘델 이론과 다윈 이론을 결합한 것을 두고 신다윈주의, 종합적 진화론, 현대적 종합 등으로 부른다.

1930년 이후에 신다윈주의는 생물학의 모든 분야로 퍼졌다. 예를 들면 1942년에, 독일에서 이주하여 미국에서 연구하던 생물학자 에른스트 마이어가 새로운 종의 출현을 설명하는 이론을 내놓았다. 그는 종이 지역적으로 분리될 때 새로운 종이 생긴다고 제시했다. 지역적으로 분리된 개체군들이 서로 다른 종으로 진화한다는 것이다. 마이어의 ‘지리학적’ 종 분화 이론은 많은 증거들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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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 예보(1920)

빌헬름 프리만 코렌 비애르크네스(1862~1951)

야코프 올 본네비 비애르크네스(1897~1975)


빌헬름 비애르크네스는 1862년에 노르웨이의 크리스티아니아(현재의 오슬로)에서 태어났다. 수학 교수의 아들인 그는 기상 현상에 매혹되었고, 기상을 수학적 모형으로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현재의 기후에 대한 충분한 자료를 그 모형에 넣으면 기상을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통찰로 그는 현대 기상학의 아버지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비애르크네스는 상당한 장애물을 만났다. 통상적인 유체역학(기체나 액체처럼 흐르는 물질의 이론)은 유체(이 경우에는 수증기를 머금은 공기 또는 바닷물)의 밀도가 압력에 의해서만 변한다고 가정했기 때문에, 날씨를 기술할 수 없었다. 사실 유체의 밀도는 온도와 조성에 따라 달라지고, 이 변수들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1904년에 비애르크네스는 유체역학과 열역학을 결합하여 기압의 실제 변이를 고려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을 내놓았다. 여기에서 나온 수학적 모형으로 그는 오늘날 수리 기상 예측이라고 부르는 분야를 창시했다. 그러나 그의 방정식은 손으로 풀기에는 너무 어려워서, 훨씬 나중에 컴퓨터가 충분히 발전된 다음에야 이 방정식을 시간에 맞춰 풀 수 있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인 1920년에 비애르크네스는 아들 야코프와 함께 지구의 중위도 지역에서 찬 공기 덩어리와 더운 공기 덩어리가 만나 사이클론이 형성되는 현상을 설명했다. 그들은 공기 덩어리들의 경계면을 기술하기 위해 ‘한랭 전선’과 ‘온난 전선’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전쟁 용어에서 따온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의 기상 활동이 이러한 경계면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최초로 알아냈다. 이 이론은 ‘극전선 이론’으로 알려졌고, 모든 현대적인 기상 예보의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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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일생(1920)

아서 스탠리 에딩턴(1882~1944)

한스 베테(1906)

카를 폰바이츠체커(1912)

아이너 헤이드스브룽(1873~1967)

헨리 러셀(1877~1957)


별의 왜 빛날까?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이것은 엄청난 수수께끼였다. 방사성 연대 측정에 따르면지구가 20억 년쯤 되었으므로, 별의 나이도 대략 비슷할 것이라 여겼다. 따라서 별로 떨어지는 먼지와 혜성이 연료를 공급하고 내부의 석탄이 타거나 별 자체가 수축하면서 위체 에너지를 운동 에너지로 바꾼다는 따위의 단순한 아이디어로는, 별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빛을 내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1920년에 아서 에딩턴은 여기에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별의 중심부 같은 고온과 고압에서는 수소가 천천히 헬륨으로 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태양은 일종의 수소 폭탄이고, 자체의 중력 때문에 두껑이 닫혀 있는 것이다. 태양의 70퍼센트가 수소이므로, 현재의 비율로 빛을 낸다면 태양에는 앞으로 100억 년 동안 태울 연료가 있는 셈이다. 헬륨 원자는 그것을 만드는 데 드는 수소 원자 네 개보다 가볍기 때문에, 융합 과정에서 여분의 질량이 아인슈타인의 에 따라 에너지로(빛의 형태로) 변하낟. 정;확한 변환 과정은 한스 베테와 칼 폰 바이츠제커에 의해 1938년에 각각 계산되었고, 1950년대 중반에는 별에서 무거운 원소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알려졌다.

이제 별의 일생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1910년대에 아이너 헤어드스브룽과 헨리 러셀이 각각 독자적으로 연구하여 별의 절대 밝기와 표면 온도의 관계를 알기 쉽게 보여 주는 그래프를 작성했다. 이 ‘H-R 도표’는 천문학에서 가장 유용한 그래프가 되었다. 대부분의 별은 이 그래프에서 대각선을 따라 늘어서 있고, 이 대각선은 차갑고 어두운 별에서 밝은 별을 향해 간다.

이러한 ‘왜성’과 함께 10배에서 100배까지 큰 ‘거성’ 집단도 있다. 오늘날 천문학자들은 이 대각선에 분포하는 별들은 모두 똑같은 수소-헬륨 변환 과정을 통해 빛을 내기 때문에 안정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수소가 다 소모되면 별은 중심부로 무너져서 가열되고, 그 다음에는 헬륨이 탄소 같은 무거운 원소로 바뀐다. 이렇게 해서 별은 적색 거성으로 변한다. 대부분의 별은 결국 백색 왜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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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슐린(1921)

프레더릭 밴팅(1891~1941)

찰스 베스트(1899~1978)


당뇨병의 증상은 서기 2세기의 아레테우스에 으해 처음 기록되었고, 17세기에는 토머스 윌리스에 의해 오줌이 단맛이 난다는 것이 알려졌다. 1775년경에 매슈 도브슨이 혈액 속에서 당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당뇨병이 이전에 생각되던 것처럼 간(肝)만의 문제가 아니라 몸 전체에 영향을 준다는 뜻이다. 1840년대에 클로드 버나드는 당의 대사 소화를 연구해서, 신체 ‘내부의 분비액’이 이 과정에 영향을 준다고 goTeki. 이것이 내분비학의 시초가 되었고, 1905년에는 에른스트 스탈링이 이러한 화학적 전령 물질을 ‘호르몬’이라고 했다.

버나드의 연구를 기초로, 1899년에 요제프 폰 메링과 오스카 민코프슼니는 개에서 췌장을 제거하면 몇 주 안에 개가 당뇨병으로 죽는다는 것을 확인해서, 이 병이 췌장의 결합과 관계있다는 것을 보였다. 그러나 췌장 조직의 추출물로 당뇨병을 치료하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 추출물에는 췌장의 ‘랑게르한스섬’이라는 세포가 들어가는데, 당뇨병 환자들은 이것이 손상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여기에서 당을 조절하는 물질을 분비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캐나다의 의사 프레더릭 벤팅은 이전의 연구자들이 슬패한 이유가 췌장액에서 이 분비물의 비활성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921년에 그는 미국의 생리학자 찰스 베스트와 함께, 개의 췌장관을 묶어서 췌장을 위축시키고 랑게르한스섬만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 다음에 그들은 당뇨병으로 거의 다 죽어가는 개에게 랑게르한스섬의 추출물을 투여했다. 개는 몇 시간 안에 건강한 상태로 돌아왔다.

벤팅과 베스트는 존 매클라우드와 함께, 실험실에서 안전한 의료용 ‘아일레틴(isletin, 나중에 ’인슐린‘이라고 불림)’을 만드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여기에 생화학자 제임스 콜립도 합류해서 거의 랑게르한스섬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어미 뱃속의 송아지 췌장에서 인슐린을 정제하는 일을 맡았다. 임상 실험이 성공하자, 제약회사 엘리 릴리가 1923년부터 대규모 생산을 시작했다. 1980년대부터는 인간의 인슐린을 유전공학적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이 업적으로 1923년에 벤팅과 메클라우드만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게 된 것은 기억할 만한 오류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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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의 다양성(1923)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바빌로프(1887~1943)


일생을 곡물 연구에 바친니콜라이 바빌로프가 스탈린의 사라토프 감옥에서 굶어 죽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한 운명의 장난이다.

바빌로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응용 생물학 및 신종 곡물 연구소장으로 일하는 동안 100번이 넘는 탐사 여행을 통해 64개국에서 곡물을 수집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20만 점이 넘는 씨앗 표본을 수집했는데, 그중에서 4만 점은 여러 종류의 밀이었다. 그는 1923년에 소련 안에 115개의 실험장을 설치하고 씨앗을 뿌렸다. 그는 곡물의 원산지는 그 곡물이 가장 다양한 곳이라는 ‘중심 기원설’을 내놓았다. 곡물의 다양성은 지리적 기원보다 사람의 영향을 더 많이 받지만, 이 이론은 현대의 곡물 수집과 보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0년대의 녹색 혁명 이후로 야생 곡물과 전통적으로 경작되던 곡물이 사라지는 것은 식량 부족에 대한 경고로 인식되었다. 바빌로프의 선견지명은 로마의 국제 식물 유전 자원 연구소의 지원으로 추진된 지속적인 곡물 씨앗 수집 전략에서 드러났다. 이 씨앗들은 종자 은행에서 저장되거나 바빌로프 다양성 센터에 보관되었다.

1930년대에 그는 트라핌 데니소비치 리센코의 비열한 모함으로 숙청당했다. 리센코는 한때 바빌로프의 제자였는데, 유전에 대한 그의 라마르크적 견해는 유전자가 생명체의 운명에 독재를 행사한다는 바빌로프의 멘델 유전학보다 공산주의 교조와 더 잘 어울렸다. 리센코는 바빌로프가 반국가적 행위를 했다고 스탈린에게 고발했고, 바빌로프는 1940년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바빌로프는 1950년대에 복권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바빌로프 식물 산업 연구소가 세워졌는데, 여기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곡물 종자 수집소가 있다. 전세계에 있는 이러한 수집소는 변화하는 환경에서 빠르게 증가하는 인구를 먹여살리기 위한 새로운 곡물을 만들어 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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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지능 발달(1924)

장 피아제(1896~1980)


장 피아제는 스위스의 심리학자로, 그의 생각은 어린이의 발달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자기 아이들을 관찰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어린아이들이 나이별로 잘 하지 못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고, 거기에서 패턴을 찾기 시작했다. 이것은 알프레드 비네의 방법과 반대였다. 비네는 특정한 일을 어떤 나이부터 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가졌는데, 피아제는 젊을 때 파리에서 비네의 공동 연구자인 테오도르 시몽과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피아제는 아이들이 때때로 퇴행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예를 들어 한 아이가 “I went"라고 잘 말하다가 갑자기 ”I goed"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는 이것이 아이가 언어에 대해 새롭게 이해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낱말은 따로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고, 언어에는 규칙이 있다. “I went"는 표준 규칙이 아니라 예외로 익혀야 한다. 또한 아이들은 예를 들어 컵에 든 물을 모양이 다른 컵에 옮겨도 양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짧고 뚱뚱한 잔보다 길고 날씬한 잔에 맥주를 줄 때 더 좋아하는 것을 보면, 어른들도 이것을 항상 잘 배우지는 못하는 것 같다.

아이들은 ‘스키마’를 익히면서 지능을 키워 간다. 스키마는 세계를 점점 더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게 하는 구조 또는 규칙 체계이다. 아이들은 완전히 자기의 감각-운동 경험을 중심으로 한 관점에서 여러 단계의 ‘조절’과 ‘적응’ 단계를 거쳐, 세상의 나머지 부분이 객관적인 원리에 따라 돌아간다는 것을 인식하는 관점으로 발전한다.

피아제의 저작은 조밀하고 철학적이다. 그의 『어린이의 언어와 사고』(1924년) 같은 고전적인 연구들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와서야 영어권 국가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소수의 어린이를 관찰g나 결과로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유도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의 통찰은 교육의 이론과 실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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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와 규칙

스티븐 핑거


‘bleeded'와 ’singed' 같은 문법적 오류는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아이의 마음을 대변한다. 실수는 창조적인 행위여서, 아이들은 짧은 경험 속에서 실수를 통해 패턴을 발견하고, 어른들이 이것들을 임의적인 예외로 취급한다는 것을 모르는 채 순진한 논리로 응용해서 말한다. 소설가 바버라 바인은 다음과 같이 아이답지 않은 아이를 묘사했다. “그는 ‘adult'가 아니라 ’grownup'이라 불리며, 과거 시제도 절대로 틀리게 쓰지 않아서 rode를 rided라고 하거나 ate를 eated라고 하지 않는다.”

불규칙 동사에 대한 아이들의 오류에 대해서는 언어와 정신의 본질에 관련해서도 논의되었다. 신경학자 에릭 레네버그는 노엄 촘스키와 함께 언어가 본유적이라고 주장할 때 아이들의 말 실수를 지적했고, 심리학자 데이비드 러멀하트와 제임스 매클렐랜드는 유전적 신경망으로도 언어를 습득할 수 있다고 처음 주장할 때 아이들의 문법적 오류를 비교 대상으로 삼았다. 심리학 교과서에서는 아이들이 인지적인 깔끔함과 단순함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실수를 한다고 설명한다. 성인의 학습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문법적 오류를 인간이 지닌 예외적인 경우를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습관의 전형적인 사례로 언급한다.

아이들이 어떻게 규칙을 배워서 말에 적용(사실은 지나치게 적용)하는가는 말과 규칙이라는 주제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이 오류의 단순함은 함정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아이들이 문법적 실수를 저지르기 시작하는지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왜 아이들이 다시는 실수를 하지 않게 되는지는 더 설명하기 힘들다.

규칙을 지나치게 적용하는 실수는 언어 창조의 열린 전조여서, 아이들이 낱말들을 엮어 문장을 만들기 시작하자마자 이런 실수를 하기 시작한다. 18개월쯤 될 때부터 아이들은 “아가 봐”, "또 줘“ 따위의 두 낱말짜리 문장을 말하기 시작한다. 어떤 것들은 단순히 부모에게 들은 대로 따라하는 것이지만, 어떤 것들은 아이들이 스스로 지어낸 것이다. 공원에서 놀고 싶은 아이는 ”더 밖으로“라고 말한다. 손에 묻은 지저분한 것을 엄마가 씻어 주면 ”더러워 없어!“라고 말한다. 내가 가장 깜찍하게 생각하는 것은, 도넛을 먹고 싶다는 표현을 알아듣지 못하는 부모에게 아이가 ”동그란 토스트!“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아이들은 점점 더 길고 복잡한 문장을 만들어가며, -ing, -ed, -s 따위의 형태소나 조동사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두 살에서 세 살 사이의 어느 때에, 아이들은 불규칙 동사에 -ed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부모들은 모르고 지나가기도 하지만, 모든 아이들이 이런 시기를 거친다.

제니퍼 갱어와 나는 과거 시제 규칙을 비롯해서 최소한 몇 가지 언어에 대한 발달 시기는 성장 시계의 지배를 받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즉 아이들은 일정 연령에 머리카락이 자라고 이가 나고 가슴이 발달하는 것과 같은 양상으로 특정 연령에 특정한 문법 규칙을 터득하리라는 생각이었다. 성장 시계가 부분적으로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다면, 일란성 쌍둥이는 유전자의 반만 같은 이란성 쌍둥이보다 훨씬 더 언어 발달 시기가 일치해야 한다. 우리는 수백 명의 쌍둥이 엄마들의 도움으로 쌍둥이들이 하루하루 새로 배운 단어와 단어 조합을 목록으로 만들었다. 이 목록을 살펴보면 단어의 습득과 두 단어를 처음 결합하는 시기는 이란성보다 일란성 쌍둥이가 훨씬 더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결과는 아이들이 singed라고 말하는 정신적 사건들 중 최소한 일부는 유전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처음으로 과거 시제를 잘못 사용하는 시기는 그렇지 않다. 쌍둥이 중 하나가 singed와 같은 오류를 저지르기 시작한 다음에, 나머지 하나가 똑같은 오류를 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일란성과 이란성이 차이가 없다. 이 차이(똑같은 유전자를 물려받고 똑같은 환경에서 말을 배우는 아이들이 처음으로 과거 시제 오류를 범하는 시기의 차이는 평균 34일이다)는 유아의 발달에서 순전한 우연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시, 소설, 텔레비전 프로그램, 부모의 홈페이지 등에 나오는 아이들의 말 실수는 과학에서 가장 심하게 억힌 자연과 양육의 매듭을 푸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아이가 ‘It bleeded' 또는 ’It singed'라고 말할 때에는 학습의 흔적이 문장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모든 단어 하나하나가 학습된 것이고, 과거 시제를 나타내는 접미사 -ed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오류는 불규칙 변화 형태인 bled와 sang을 배우는 과정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학습은 내부적인 학습 회로 없이는 불가능하고, 이러한 오류들은 학습 회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암시한다. 아이들은 날 때부터 walk와 walked 사이의 미세한 발음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 그들은 이것을 우연히 생긴 말하는 습관의 차이로 돌리지 않고 그 의미로 찾는다. 그들은 시간을 과거와 비과거로 나눠서, 희미하게 발음되는 단어의 끝을 시간의 절반에 할당한다. 그들은 기억 속에서 경쟁하는 형태가 있으며 한 규칙을 막는 경향을 타고나는 것이 틀림없다. 부모에게 유용한 피드백을 얻지 못할 때에는 아이들이 규칙을 막는 원리를 익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규칙 사용은(처음 사용할 때에는 아니겠지만) 부분적으로 유전자의 안내를 따를 것이다. 그들은 실험가가 만들거나 스스로 만든 수많은 단어들에서 자발적으로 새로운 규칙을 얻는데, 불규치;r 동사의 경우는 규칙을 발견하기가 너무 어렵다. 아이들은 말의 구조에서 규칙 동사와 불규칙 동사를 구별하면서 그들의 문법 체계의 논리에 적절하게 배치한다.

나는 심리학의 다른 영역에서도 본성과 교육의 교류가 비슷한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모든 것은 학습되지만, 논리적으로 학습하는 체계는 타고난다는 것이다. 찰스 다윈이 인간의 언어를 ‘기술을 배우려는 본능적 경향’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본성과 교육 사이의 교류를 파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을 전적으로 본능이라고 할 수는 없다. 모든 언어는 습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보통의 다른 기술과 크게 다르다. 아이들의 옹알이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은 말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을 담그거나, 빵을 굽거나, 글을 쓰려는 본능적 경향을 가진 아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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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웅 아이(1925)

레이먼드 아서 다트(1893~1988)


다윈은 인류의 가원을 아프리카라고 생각했지만, 에른스트 헤켈은 아시아가 인류의 고향이라고 생각했고, 외젠 뒤부아가 1890년대에 자바 원인을 발견한 뒤로 아시아 기원설이 널리 인정되었다. 그러나 1925년에 남아프리카에 있던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해부학 교수 레이먼드 다트가 두개골 화석을 기술해서 다윈의 이론을 지지했다.

다트는 1차 세계대전 때 위생병으로 복무한 다음에 런던 유니버시티 대학의 해부학 교수가 되었으나, 곧 남아프리카에 새로 생긴 위트워터스랜드 대학교로 부임했다. 교육에 사용할 표본이 없어서, 그는 학생들에게 약간의 상금을 걸고 흥미로운 뼈를 제출하게 했다. 1924년에 조세핀 샐러머스가 원숭이 두개골 화석을 가지고 왔다. 여기에 흥미를 느낀 다트는 그에게 같은 곳에 다른 화석이 있었는지 물었고, 그는 보츠와나의 타웅 석회석 체석장에서 화석이 나오면 다트에게 보내겠다는 약속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트가 결혼식을 위해 예복을 입을 때 상자 하나가 도착했다. 유혹을 참지 못한 그는 상자를 열어 보았고, 얼굴뼈, 이빨과 턱뼈를 포함한 머리뼈가 천연석에 주형이 떠져 있는 것을 보았다. 1925년에 다트는 남부의 작은 원숭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Australopithecus afficanus)에 대해 발표했다. 처음에는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필트다운인(人)’을 ‘미싱 링크’라고 옹호하던 아서 케이트가 다트의 표본은 어린 원숭이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다트는 지지를 얻기 위해 1930년에 런던으로 갔으나 데이비슨 블랙의 북경 원인 표본에 압도되고 말았다. 다트는 낙담해서 여러 해 동안 타웅 아이를 포기했다. 다트를 믿어 주는 사람은 남아프리카에서 일하던 의사 로버트 브룸뿐이었다. 결국 1936년에 브룸은 스테르크폰테인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화석을 또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에 이처드 리키와 그의 아버지가 아프리카에서 많은 발견을 한 뒤에야 다트의 타웅 아이가 최종적으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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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동-입자 이중성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1901~1976)

에르빈 슈뢰딩거(1887~1961)

루이-빅토르 드 브로이(1892~1987)


양자역학은 예측 가능한 태엽 장치 우주에 혼란을 일으켜 아주 미묘하게 작동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우리는 빛이 파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빛은 무렬과 똑같이 간섭 무늬를 만든다. 그러나 막스 플랑크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빛이 광자 또는 빛알이라는 조각으로 날아다닌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빛은 어떻게 때때로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할 수 있는가? 이것을 비롯한 초기 양자론의 여러 가지 불일치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미시 세계를 완전하게 기술할 수 있는 이론에 매달렸고, 두 사람이 성공했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눈으로 보기를 포기했다. 대신에 그는 1925년에 관측 가능한 것들에 관련된 공식을 만들었다. 다음 해에 에르빈 슈뢰딩거는 다른 방식으로 이것을 해냈다. 그는 루이 드 브로이가 제시한 대로 전자 같은 물질 입자도 파동이라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슈뢰딩거의 파동 방정식은 ‘물질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두 이론은 똑같은 이상한 세계를 표현하는 다른 방법임이 알려졌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모든 것것은 파동이면서 입자이고, 또한 파동도 입자도 아니다. 양자적인 존재는 불확정성의 얼룩으로 번질 수 있어서 두 장소에 동시에 있을 수 있고, 심지어 자기 자신과 간섭을 일으킬 수도 있다. 따라서 어떤 현상에는 원인이 없을 수도 있다. 불안정한 핵은 어느 때고 붕괴할 수 있다. 우리는 시간마다 붕괴가 일어날 확률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불쾌한 세계일 수 있지만, 어쨌든 잘 맞는다. 양자론은 원자, 핵, 분자의 일반적인 성질을 설명하고, 초전도체, 보즈-아인슈타인의 응축, 백색 왜성, 중성자별 같은 이상한 성질들도 설명한다. 머지 않아 양자 컴퓨터가 나와서 비트가 동시에 0이기도 하고 1이기도 하면서 엄청난 속도로 계산을 하는 시대가 곧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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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실린(1928)

알렉산더 플레밍(1881~1955)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루이 파스퇴르의 이 격언은 알렉산더 플레밍이 항생제 페니실린을 우연히 발견한 것을 잘 설명한다. 그의 정신은 확실히 준비되어 있었다. 1921년에 플레밍은 콧물 배양액에서 박테리아를 녹이는 물질을 발견했다. 그가 ‘라이소자임’이라고 이름 붙인 이 물질은 의료용으로 쓸 만큼 정제할 수 없었지만, 병을 일으키는 세균에 대항하는 기능은 어떤 물질보다 좋았다.

7년 뒤인 1928년에 플레밍은 푸른곰팡이(Penicillium notatum)가 배양된 배지에서는 자라지 못한다는 것을 우연히 알았다. 푸른곰팡이가 자라는 곳 근처의 포도상구균 군락은 투명한 물처럼 되어 있었다. 분명히 푸른곰팡이가 포도상구균에 독성을 띠는 어떤 물질(플레밍은 이것을 페니실린이라고 불렀다)을 만들어낸 것이다. 푸른곰팡이를 묽게 탄 액체는 몇 가지 박테리아(포도상구균, 연쇄상구균, 폐렴 구균)의 성장을 방해하면서도 건강한 조직을 건드리거나 백혈구의 방어 기능을 저해하지 않았다. 페니실린은 비록 효과가 뛰어나고 안전해 보였지만, 만들기 어렵고 불안정해서 실험실을 벗어날 수 없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병리학자 하워드 플로리와 독일에서 망명한 생화학자 언스트 체인은 페니실린을 항생제로 전환했다. 플레밍과 마찬가지로 플로리도 라이소자임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이것이 박테리아 세포벽의 탄수화물 사슬을 녹이는 효소의 일종임을 입증한 후, 곰팡이나 박테리아에 의해 만들어지면서 다른 박테리아나 곰팡이를 죽이는 모든 물질을 연구하기로 작정했다. 1940년에 플로리와 체인은 영국의 화학자 노먼 히틀리의 도움을 받아 동물 실험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농축 페니실린(약 100밀리그램)을 얻었고, 1941년에는 첫 번째 인체 실험까지 마쳤다. 결과는 놀라웠다. 1941년에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을 때, 그들은 페니실린 대량 생산 경쟁에 돌입했다. 곧 새로운 발효 방법이 개발되어 이 놀라운 약이 시장에 선보였다. 플레밍, 플로리, 체인은 1945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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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한계(1931)

쿠르트 괴델(1906~1978)


수학은 항상 인간이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정확하고 논리적인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면 수학 전체를 형식 논리의 기초 위에 세워서 완벽하게 엄밀한 것으로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에 수학자들은 가장 근본적인 수학 체계(산수)에 형식 논리를 적용하여 수 개념 자체를 포함한 모든 수학 분야의 기초를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가장 장대한 시도가 버트런트 러셀과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기념비적인 저작 『수학의 원리』(1910~1913)였다. 그리고 1900년에 다비트 힐베스트는 산수는 완전하고 자기 총족적임을 증명하여 모든 수학적 명제들이 애매함 없이 옳거나 틀리다는 것을 누군가가 보여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1931년에 오스트리아의 수학자 쿠르트 괴델은 이 두 야망에 결정타르 날렸다. 괴델은 결혼한 직후인 193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빈 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미국으로(러시아와 일본을 거쳐) 이주해서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로 왔다. 1931년 논문은 두 가지 고전적인 결과를 증명했는데, 요즘은 이것을 ‘불완전성 정리’라고 부른다. 첫 번째 정리는 모든 공리 체계는(산수처럼 가장 기본적인 체계조차) 그 체계 안에 진위를 판단할 수 없는 명제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런 명제는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문장과 비슷해서 그 진위를 결정할 수 없다. 두 번째 정리는 산수 등의 모든 논리 체계도 마찬가지로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이런 체계는 외부의 도움 없이 내적인 자기 완결성을 증명할 수 없다.

불완전하다고 해서 곧바로 수학이 무효라는 뜻은 물론 아니다. 오늘날 수학자들은 컴퓨터(본질적으로 산술 기계)에 관심을 돌려 어떤 것을 철학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보다 어떤 문제를 풀 수 있는가에 매달린다. 그러나 컴퓨터가 모든 수학적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한, 수학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창조적 활동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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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성자(1932)

제임스 채드윅(1891~1974)


1920년대에 물리학자들은 모든 것이 전자와 양성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주도적인 이론에서는 가벼운 전자가 작고 무거운 핵 주위를 돌아다니는 것이 원자이고, 핵은 양성자와 전자가 모여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1930년대 초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물리학자들은 알파 입자를 가벼운 원소인 베릴륨에 쬐면 다른 형태의 방사선이 나오고, 이 방사선은 다른 원소에서 양성자를 아주 잘 떼낸다는 것을 알았다. 1932년에 영국의 물리학자 제임스 채드윅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이 실험을 반복하여, 알파 입자가 다른 입자를 때려서 내보낸다고 하면 이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때 베릴륨에서 떨어져 나오는 입자는 대략 양성자와 질량이 같고 전하는 없다. 이 중성 입자가 다른 원소에 부딪쳐서 양성자를 떼내는 것이다. 한동안 채드윅은 ‘중성자’가 기본 입자가 아니라 양성자와 전자가 한데 묶여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34년에는 중성자가 양성자와 전자를 합친 것보다 조금 더 무겁다는 것이 실험으로 밝혀졌다. 물리학자들은 물질을 구성한느 새로운 입자를 받아들여야 했다. 원자의 핵은 양성자와 전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된 것이다. 화학적으로 똑같지만 무게가 다른 여러 가지 동위원소(원소의 변종)들은 양성자의 수가 같지만 중성자 수가 다른 것이다.

이 발견을 계기로 1930년대에는 핵물리학이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중성자는 원자력 발전소와 원자 폭탄의 연쇄 핵반응을 일으키는 열쇠이다. 핵이 분열할 때 중성자는 산탄처럼 튀어나와 다른 핵을 때려 또 깨뜨린다. 중성자는 평화적인 목적으로도 사용된다. 전기적으로 중성인 이 입자는 원자를 둘러싼 전하의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물질의 구조를 알아내는 탐침으로도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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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본능(1935)

카를 폰 프리슈(1886~1982)

콘라트 자카리아스 로렌츠(1903~1989)

니콜라스 틴베르헨(1907~1988)


동물의 본능에 대한 연구는 생물학에서 비교적 최근에 시작됐다. 몸의 모든 부분에 대한 해부학적 연구는 수백 년 전부터 있었고, 거기에 필요한 기술이 개발되고 나서는 미소(微少)해부학과 분자적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행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하나는 의인화였다. 동기에 따라 행동을 설명하는 것은 인간에게만 엄밀하게 작용할 수 있다(예를 들어 “왜 그 길로 가니?”에 대해 “집에 가려고”). 동물의 내적 동기는 관찰이 불가능하며,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다른 문제는 행동이라는 것 자체가 불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다리나 손 또는 눈을 정의하는 것처럼 행동을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1930년대에 오스트리아의 카를 폰 프리슈와 콘라드 로렌츠, 네덜란드의 니콜라스 틴베르헨은 각각 따로, 의인화를 피하면서 다른 과학에 공통으로 사용되는 객관적 관찰과 실험에 따라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카를 폰 프리슈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꿀벌이 춤을 통해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이다. 꿀벌은 먹이가 있는 방향과 거리, 품질 등을 붕붕거리는 춤을 통해 동료에게 전달하는데, 프리슈는 먹이의 위치를 바꿔 가며 세심한 관찰과 실험으로 꿀벌의 언어를 해독했다.

로렌츠와 틴베르헨의 업적은 한 가지 위대한 발견에 한정되지 않으며, 그들은 제각기 여러 가지 모범적인 실험을 수행했다. 로렌츠는 주로 길든 짐승을 가까이에서 관찰했다. 그는 ‘각인’을 연구했는데, 이것은 어린 동물이 어떤 대상을 따르는 현상으로, 주로 그 어미가 대상이지만 적절한 시기에 끼어들면 어린 동물이 로렌츠를 따르게 할 수도 있었다. 틴베르헨은 주로 야생 동물을 자연 상태에서 연구했다. 그는 동물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연구하는 방법의 대가였다. 특히 새가 어미에게 먹이를 달라고 조를 때의 자극을 확인하기 위해 모형 갈매기 부리를 사용한 실험은 매우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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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트르산 회로(1937)

한스 아돌프 크렙스(1900~1981)


동물이 음식을 ‘태워서’ 에너지를 얻는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18세기 후반에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동물이 ‘호흡’을 통해서 이산화탄소와 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밝혔다. 19세기에 독일의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는 지방, 당분, 탄수화물의 섭취량을 측정하고 배설물을 수분, 이산화탄소, 요소의 양으로 측정했다. 그러나 섭취와 배설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폰 리비히의 생각을 간단히 요약하면, 식물은 유기물을 만들지만 동물은 유기물을 만들 수 없고 단지 분해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점차 동물도 복잡한 분자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몸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단순히 들어오고 나가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19세기의 많은 생화학자들이 이 ‘중간 대사’ 과정을 연구했고, 한스 크렙스의 스승인 오토 바르부르크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바르부르크의 압력계는 여러 조건과 화학 물질에 처리된 조직에서 나온 배설물을 소량으로 수집할 수 있는 간단한 실험 도구였다.

크렙스는 바르부르크 압력계를 사용하여 수많은 대사 경로를 연구했는데, 처음에는 독일에서 연구하다가 나중에는 나치에 쫓겨나 영국에서 연구했다. 그리하여 1930년대 말에는 여러 가지 세심한 실험으로 시트르산과 그 분해 과정이 대사에서 핵심적인 역학을 한다는 것을 밝혔다. 그는 계속된 연구를 통해 동물의 대사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분자들도 같은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알아냈다. 시트르산 회로(‘크렙스 회로’라고도 한다)은 반대로 이루어질 수도 있어서, 이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의 동화 및 이화 작용 모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크렙스는 이 과정에서 역할을 하는 효소 하나를 발견한 프리츠 리프만과 함께 1953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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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의 강화(1938)

버러스 프레더릭 스키너(1904~1990)


스키너는 우리 행동의 많은 면이 ‘형성’되고 ‘강화’된다는 생각을 엄밀한 법칙으로 확립했다. 그는 엄격한 행동주의자였다. 그는 행동의 심리학적, 생리학적, 신경학적 기초를 다루지 않고, 개체의 활동과 그 결과 간의 관계만 다루었다. 그는 주로 생쥐와 비둘기를 실험에서 사용했고, 비둘기를 ‘폭탄 투하기’로 훈련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사례는 매우 유명하다. 도한 그는 ‘스키너 상자’를 발명했는데, 이것은 생쥐나 비둘기가 상자 속의 단추를 쪼거나 레버를 누르면 여러 가지 조합으로 불빛이 켜지거나 꺼지게 하고, 음식을 조금 주거나 전기 충격을 가할 수도 있는 장치이다.

그는 어떤 행동을 정해 놓고 동물이 이것과 비슷하게 행동하면 상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주어서(각각 ‘양’과 ‘음’의 ‘강화’) 동물에게 그 행동을 학습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행동의 강화에 대한 복잡하고 때로는 반직관적인 법칙을 밝혔다. 예를 들어, 부분적인 강화를 통해(즉, 가끔씩만 상을 받아서) 학습된 행동은 상이 더 이상 주어지지 않을 때 그 행동 습관이(지속적인 강화에 의해 학습된 행동보다) 더 오래 지속된다. 이것을 ‘부분 강화 소거 효과’라고 한다.

스키너의 ‘조작적 조건화’ 방법은 1938년의 『유기체의 행동』에 소개된 것으로, 파블로프의 이른바 ‘고전적 조건화’와다르다. 스키너는 유기체가 우선적으로 선택적 상과 벌을 통해 새로운 행동을 습득하고,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자극에 대해 이미 학습된 방식으로 반응한다고 했다. 파블로프의 개는 종 소리에 침을 흘리도록 배웠고, 스키너의 비둘기는 단추를 복잡한 방식으로 쪼아서 음식을 얻도록 학습되었다. 그의 생각은 매우 영향력이 커서, 여러 가지 학습 상황에서 유용성이 입증된 그의 방법과 함께 일상적인 사고에까지 스며들었다. 나중에 그는 인간의 언어도 경험에 의해 형성되고 강화된다고 주장해서 언어가 본유적이라고 주장한 노엄 촘스키와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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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T(1938)

파울 헤르만 뮐러(1899~1965)


살충제 DDT(디클로로디페닐트리클로로에탄)는 J. R. 가이기 회사에서 일하던 파울 뮐러에 의해 1939년에 발견되었다. 그는 이 물질이 모기, 이, 콜로라도 딱정벌레 등 여러 가지 해충을 죽인다는 것을 보였다. 게다가 DDT는 (겉보기에는) 사람에게 독성이 없고 값싸고 만들기도 쉬웠다. 지난 30년 동안 DDT는 300만 톤이 생산되었다.

DDT는 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의 심각한 발진티푸스 유행을 막는 데 사용되어 크게 성공했다. 발진티푸스는 이가 옮기는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전쟁 때에는 언제나 기승을 부렸다. 대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이것을 박멸할 수 없었다. 1944년 1월에 DDT가 100만 명 이사의 사람들에게 사용되었고, 발진티푸스는 그로부터 3주 안에 줄어들기 시작했다. DDT는 말라리아를 옮기는 여러 가지 모기를 없애는 데에도 효과적이었다. 집파리도 DDT에 약하다고 알려져서, 파라티푸스와 이형 이질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뮐러는 DDT가 공중 보건에 기여한 공로로 1948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1962년에 라이첼 카슨이 그녀의 혁명적인 저작 『침묵의 봄』에서 DDT에 경종을 울렸다. “DDT는 환경의 희생을 요구한다. DDT의 화학적 안정성은 바람직한 성질이라고 생각되었지만, 그것 때문에 DDT가 토양과 물에 매우 오래 잔류한다.” 카슨은 모든 야생 생물이 이 물질의 독성에 노출되어 있다고 썼다. 지금은 DDT가 인간의 조직에도 축적되어 질병을 일으킨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DDT는 1972년에 미국을 비롯한 여러 선진국에서 금지되었지만, 개발도상국에서는 여전히 말라리아 퇴치에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곤충들이 이제는 DDT에 내성을 가지도록 진화되어, 좀 더 안전하고 효율적인 대체 약품을 찾으려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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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의 힘(1942)

오토 한(1879~1968)

프리츠 슈트라스만(1902~1980)

리제 마이트너(1878~1968)

오토 로베르트 프리슈(1904~1979)

엔리코 페르미(1901~1954)


2체 세계대전이 터지기 몇 달 전에, 물리학자들은 원자핵에서 에너지를 끌어들이는 방법을 발견했다. 독일의 물리학자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이 우라늄에 중성자를 쏘자, 몇몇 원자들이 바륨으로 변했는데, 바륨은 우라늄보다 훨씬 가벼운 원소이다. 1939년 초에 리제 마이트너와 오토 프리슈는 우라늄 핵이 둘로 쪼개져야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이 핵반응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나온다는 것을 밝혔다.

거기에서는 뭔가 다른 것도 방출되었다. 물리학자들은 우라늄 핵이 쪼개질 때 중성자 두세 개가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이 중성자는 다른 우라늄을 쪼갤 수 있고, 거기에서는 또 중성자가 나온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쇄 반응에 의해 우라늄 덩어리 전체에서 에너지가 나올 수 있다.

전쟁 중에 연합국은 히틀러의 독일이 핵분열을 이용해서 무서운 폭탄을 만들 것을 두려워했고, 폭탄을 먼저 만들기 위해 엄청난 자원을 쏟아부었다. 페르미의 반응로는 플루토늄을 만들기 위해 설계된 것으로, 플루토늄은 핵분열이 일어날 수 있는 인공 원소이다.

최초의 원자 폭탄은 플루토늄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1945년 7월 16일에 뉴멕시코 주의 트리니티에서 폭발해서 TNT 18,000톤의 위력을 내뿜었다. 그리고 그 해 8월, 리틀 보이(작은 소년)와 팻 맨(뚱보)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폭탄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터져 수만 명이 죽었다.

오늘날 핵분열 원자로는 전세계 전력량의 약 1/5을 생산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들은 핵 폐기물 처리의 안전성과 비용, 1986년의 체르노빌 참사와 같은 사고 위험 때문에 전력을 원자력 발전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화석 연료를 태울 때 생길 수 있는 기후 변화의 우려 때문에 원자력 발전이 좀 더 인기를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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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신경망(1943)

워런 매컬럭(1898~1972)

월터 피츠(1924~)


인간의 두뇌와 달리 일반 컴퓨터는 프로그램된 명령에만 따르고 경험을 통해 배우지 못한다. 그러나 인공 신경망은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을 흉내낸다.

뇌 속의 정보는 ‘시냅스’라는 연결을 통해 수십억 개의 신경 세포 ‘뉴런’에 전달된다. 뉴런은 매우 많은 가지를 쳐서 수천 개의 다른 뉴런과 시냅스로 연결되기 때문에, 실제의 신경망은 엄청나게 복자하고 대단한 계산 능력을 가진다.

인공 뉴런은 미국에서 1943년에 신경생물학자 워런 맥컬럭과 논리학자 월터 피츠의 공동 연구로 개발되었다. 이 분야는 1970년대에 값싼 현대적인 컴퓨터가 나오기 전까지는 매우 더디게 발전했다. 뉴런과 비슷한 각 처리 단위의 특성은 프로그램화될 수 있고, 이 단위는 지정된 망 구조에 따라 서로 연결된다. 전형적인 인공 신경망에는 입력층과 출력층, 그리고 ‘숨겨진’ 층이 하나 더 있다. 단순한 네트워크에서는 신호가 한 방향으로만 가고, 특정한 입력은 패턴 인식을 통해 특정한 출력을 만들어 낸다. 음성 인식처럼 복잡한 일을 하는 네트워크는 신호가 반대 방향으로 흘러서 충돌 사이의 되먹임이 가능한 설계를 이용한다. 이 경우에 네트워크의 연결 패턴은 평형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변하며, 마지막에 도달한 패턴이 주어진 문제에 대한 답이 된다.

인공 신경망은 매우 적응성이 높다. 우리가 낯선 사람을 만나도 ‘얼굴’이라는 범주로 분류하듯이, 인공 신경망은 대표적인 사례를 일반화할 수 있다. 이것은 복잡하게 변하는 데이터에서 패턴을 찾을 때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공 신경망을 의술에 응용하면 심전도 데이터로 심장병을 진단하거나 조직 사진으로 암을 진단할 수도 있다. 그리고 뇌에 대한 기초 연구에 인공 신경망을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공 신경망으로 ‘의식’을 구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철학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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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론(1944)

요한 폰 노이만(1903~1957)

오스카 모르겐슈테른(1902~1977)


인간은 서로 교류하면서 사회를 이루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은 타인의 판단에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핵 미사일의 스위치를 누를까 말까 하는 문제는 선제 공격 가능성과, 이쪽에서 선제 공격을 할 때 당할 보복 정도 등에 따라 달라진다.

게임 이론은 이런 문제에서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본질적인 것만을 남겨서, 인간들이 분쟁과 거래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유형에서 핵심적인 요소를 파악하려고 한다. 요한 폰 노이만과 오스카 모르겐슈테른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고등 학문 연구소에서 게임 이론의 기초를 만들었다. 1944년에 출간된 고전적인 책에서 그들은 전략, 비용, 보상의 관점에서 상대방이 잃은 만큼만 따는 게임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이런 게임에서 전략은 참가자의 최소 보상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수립된다.

그러나 참가자들은 서로 이익을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죄수의 디레마’ 게임에서, 참가자는 상대방과 협력하거나 배신할 수 있다. 두 참가자가 협동할 때 상호 이익은 최대가 된다. 그러나 한쪽이 협력할 때 다른 쪽이 배신하면 배신자가 일방적으로 큰 이익을 얻는다. 단판 승부에서 이러한 ‘배신’이 합리적인 전략이다. 그러나 게임이 반복되어 협력적이었다면, 같이 협력해도 위험하지 않다. 여러 명이 참여하고 잠재적인 경쟁자에 대한 정보가 들쭉날쭉하면, 반복되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은 복잡한 변동을 나타내며,직관과 반사되는 결과도 자주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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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론    |  theory of games   

경쟁 주체가 상대편의 대처행동을 고려하면서 자기의 이익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행동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이론.


한 집단, 특히 기업에 있어서 어떤 행동의 결과가 게임(놀이)에서와 같이 참여자 자신의 행동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다른 참여자의 행동에 의해서도 결정되는 상황하에서, 자기 자신에 최대의 이익이 되도록 행동하는 것을 분석하는 수리적 접근법(數理的接近法)이다.


게임이론이란 상충적(相衝的)이고 경쟁적(競爭的)인 조건에서의 경쟁자간의 경쟁상태를 모형화하여 참여자의 행동을 분석함으로써 최적전략(最適戰略)을 선택하는 것을 이론화하려는 것이다.


게임이론은 1944년 J.폰 노이만과 O.모르겐슈테른의 공저 《게임이론과 경제행동 Theory of Games and Economic Behavior》에서 이론적 기초가 마련되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잠수함 전투에 이 이론을 이용한 미국의 물리학자인 P.모스에 의해서 더욱 발전되었다.


게임이론은 주로 군사학에서 적용되어 왔으나, 경제학 ·경영학 ·정치학 ·심리학 분야 등에도 널리 적용되고 있다. 게임이론에 있어서는 게임 당사자를 경쟁자라 하고, 경쟁자가 취하는 대체적 행동(代替的行動)을 전략(戰略)이라 하며, 어떤 전략을 선택했을 때 게임의 결과로서 경쟁자가 얻는 것을 이익 또는 성과(成果)라고 한다.


어떤 경쟁자가 어떤 전략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므로 각 경쟁자는 상대방이 어떤 전략을 선택하더라도 자기의 이익(성과)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전략을 선택하게 된다.


게임은 경쟁자의 수에 따라 2인 게임(예:장기 ·바둑), 다수 게임(예:포커 등으로 흔히 n인 게임이라 한다)으로 분류된다.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게임의 형태는 2인 영합(零合) 게임(zero-sum game)인데, 영합이라는 말은 서로 상반되는 이해를 가지는 2인 게임의 경우, 한쪽의 이익은 상대방의 손실을 가져오게 되어 두 경쟁자의 득실(得失)을 합하면 항상 영(zero)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경쟁자가 취하는 전략의 수가 유한(有限) 개수의 경우를 유한게임이라 하고 무한인 경우를 연속(連續)게임이라 하는데, 유한 영합 2인 게임이 이론적으로 가장 널리 전개된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노벨 경제학상 ‘협조적 게임이론’ 정립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로버트 오먼과 토머스 셸링은 일찍부터 “게임이론에 노벨상이 돌아간다면 마땅히 받을 학자”라는 평가를 받아온 대가들이다. 이들의 수상으로 게임이론은 1994년에 이어 2번이나 노벨 경제학상을 받게 됐다. 94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미국의 존 내시는 영화 ‘뷰티풀 마인드’로 유명한 수학자이다. 존 내시는 ‘비협조적 게임이론’을 주창해 노벨상을 받은 반면 이번에는 오먼으로 대표되는 ‘협조적 게임이론’의 손을 들어줬다는 점이 다르다.



게임이론이란 경쟁 주체가 상대편의 대처 행동을 고려하면서 자기의 이익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수단을 선택하는 행동에 대해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이론을 가리킨다. 이 이론은 다시 경쟁 참가자들이 서로 구속력 있는 계약을 통해 협력을 할 수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에 따라 협조적이냐 비협조적이냐로 나뉜다.



오먼의 공로는 협조적 게임이론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이론화했다는 점이다. 오먼은 체포된 공범이 자백을 하는 것이 유리한지 아닌지에 대해 선택의 갈등을 겪게 된다는 존 내시의 ‘죄수의 딜레마’를 예로 들어 협조적 게임이론을 설명한다. 두 죄수가 서로에게 유리한 선택을 하기로 약속하고 그것을 어기면 더 큰 벌을 받기로 구속력 있는 계약을 맺게 된다면 두 경쟁자 사이에 협력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정당간의 연정은 협조적 게임이론의 정치적 사례에 해당된다.



서울대 김완진 교수는 “오먼은 게임이론의 1인자”라고 평가했다. 서강대 왕규호 교수도 “94년 게임이론 분야에서 노벨상이 나왔을 때 학계는 오먼이 수상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고 말했다.



공동수상자인 셸링은 게임이론을 군사분야나 에너지·환경 정책, 테러 등으로까지 대상 분야를 확대 적용해 왔다. 김교수는 “셸링은 순수 게임이론보다는 응용 게임이론 전문가”라며 “정치학이나 행정학에서 더 유명하다”고 말했다. 셸링은 게임이론에서는 경쟁 참가자들이 어떤 선택을 하게되는 상황을 ‘균형(equilibrium)’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문화적 특성이나 관습 등 수학적으로 계량화하기 힘든 문화적 특성 변수를 포함한 ‘초점균형(focal point equilibrium)’을 이론화했다. 예컨대 남녀가 데이트할 때 서로 희망하는 장소가 다를 경우 가부장적 사회라면 남자쪽으로, 여권이 강한 곳이라면 여자쪽으로 선택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셸링은 게임이론이 적용되는 상황에서 참가자들이 모두 알고 있는 ‘공통지식(Common Knowledge)’이란 무엇인가, 공통지식은 게임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라는 이론을 정립했다”고 평가했다.



출처 : 경향신문 2005년 10월 10일



꿀벌의 교신(1945)

카를 폰 프리슈(1886~1982)


꿀벌의 교신과 감각의 복잡성은 비교행동학(동물의 행동에 관한 과학적인 연구)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카를 폰 프리슈에 의해 처음으로 밝혀졌다. 1919년에 그는, 1788년에 언스트 스피츠너가 처음 기술했듯이, 벌의 몸의 움직임으로 교신한다는 것을 입증했고, 1945년에는 일벌이 동료들에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추는 복잡한 춤을 해석했다. 1927년에 출판되고 1955년에 영어로 번역된 『춤추는 벌』에서 그는 먹이를 찾은 꿀벌이 벌집으로 돌아올 때 ‘둥글게’ 또는 ‘8자로’ 춤추는 것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벌집과 태양의 각도에 따라 춤추는 속도와 방향, 배의 움직임 등을 달리하여 다른 벌에게 꽃가루와 꿀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와 방향을 알려준다.

인간의 입장에서 동물의 행동을 생각하면 동물이 느끼는 세계를 왜곡하기 쉽다. 감각적 능력이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꿀벌의 경우에는 이럴 가능성이 가장 크다. 프리슈는 색종이 위에 놓인 먹이를 찾아 가도록 벌을 훈련시키는 등의 정교한 실험과 끈기 있는 관찰로, 꿀벌이 자외선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지금은 꿀벌이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꽃잎의 무늬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그는 벌의 후각과 미각도 연구했고, 1949년에는 꿀벌이 하늘에서 오는 빛의 편광을 이용하기 때문에 흐린 날에도 태양을 기준으로 비행할 수 있다는 것도 밝혀냈다.

1973년에 카를 폰 프리슈는 또 다른 비교행동학의 창시자 니콜라스 티베르헨, 콘라드 로렌츠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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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1946)

앨런 매시슨 튜링(1912~1954)

요한 폰 노이만(1903~1957)


1890년에 미국의 기술자 허먼 홀러리스는 그 해에 실시된 미국 인구 조사 자료를 처리하기 위한 전기 기계를 고안했다. 홀러리스의 천공 카드 체계는 큰 성공을 거두어서 사무 기계와 데이터 처리 산업의 대들보가 되었다. 1940년대에 기계 부품과 전기 구동 스위치로 구성된, 프로그램 가능한 컴퓨터의 생산은 대규모 자동 계산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과학 및 군사용으로 사용하기에는 기술이 너무 더디게 발전했다.

컴퓨터가 완전한 전자 기계로 된 것은 진공관이 발전한 덕분이다. 최초의 프로그램 가능한 범용 컴퓨터는 J.W. 모클리와 J.P. 에커트가 펜실베니아 대학교의 무어 전기공학 학교에 설치한 애니악(ENIAX, 전자 수치 적분기 겸 계산기)이었다. 원래 전시에 신속하게 탄도표를 계산하기 위해 특별히 만든 이 기계는 1946년이 되어서야 완성되었다. 이것보다 3년 전에 영국은 전쟁 목적으로 콜로서스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특별히 설계된 것으로서 프로그램 가능한 전자 컴퓨터였다. 콜로서스의 이론적 배경은 1936년에 수학자 앨런 튜링에 의해 마련되었다. 그는 어떤 문제든 기계로 수행할 수 있는 유명한 수의 명령으로 표현할 수 있기만 하면 기계적으로 풀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튜링은 프린스턴 대학교의 대학원생으로 있을 때 컴퓨터 이론의 또 다른 선구자 요한 폰 노이만을 만났다. 두 사람은 2차 세계대전 중에 연합국 쪽에서 암호 해독 작업을 위해 같이 일했다. 사실 폰 노이만의 희망은 애니악이 원자 폭탄을 만드는 데 필요한 계산을 하는 것이었다. 18,000개의 진공관으로 구성된 애니악은 1초에 5,000번의 계산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로그램을 바꾸려면 일일이 손으로 스위치와 배선을 바꿔야 했다. 폰 노이만은 이 기계를 개선하기 싲가했고, 1945년에 쓴 논문에서 제어 장치, 연산 장치, 기억 장치, 입출력 장치를 따로 가진 현대적인 범용 프로그램 저장 컴퓨터를 설명했다. 애니악은 1955년 오후 11시 45분에 마지막으로 스위치가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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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링 기계

다니엘 힐리스


컴퓨터는 인간의 사고와 아주 비슷해 보이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유일한 이성적 존재라는 우리의 지위를 컴퓨터가 위협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컴퓨터의 한계에 대한 수학적 증명에서 위안을 얻으려는 사람도 있다. 고대의 역사에도 비슷한 논란이 있었다. 한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이 중요하게 여겨졌고, 우리가 중심에 있다는 상상이 인간 가치의 상징이라고 생각되었다. 우리가 전혀 중심에 있지 않다는 발견(지구는 태양 주위를 도는 여러 행성 중의 하나일 뿐이다)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고, 천문학이 주는 철학적 암시가 뜨거운 논쟁이 되었다. 인간의 유일한 지위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이는 진화론에 대해서도 비슷한 논쟁이 있었다. 이러한 과거의 철학적 위기 상황의 뿌리에는 인간 가치의 근원에 대한 잘못된 판단이 있었다. 나는 컴퓨터의 한계에 대한 현대의 철학적 논의도 대부분이 비슷한 오판에 근거한다고 본다.

컴퓨터 이론의 중심 개념은 ‘보편 컴퓨터’이다. 이것은 모든 계산 장치를 흉내낼 수 있는 컴퓨터를 말한다. 범용 컴퓨터도 보편 컴퓨터의 일종이며,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보는 대부분의 컴퓨터가 보편 컴퓨터이다. 적절한 소프트웨어와 충분한 시간과 기억 장치만 있으면, 모든 보편 컴퓨터는 어떤 형태의 컴퓨터든 똑같이 흉내내거나, (우리가 아는) 정보를 처리하는 모든 장치를 흉내낼 수 있다.

이 보편성의 원리의 한 가지 결론은 두 컴퓨터의 중요한 차이점이 단지 속도와 크기와 기억 용량의 차이뿐이라는 것이다. 컴퓨터는 연결된 입출력 장치가 있을 수 있지만 이런 주변 장치는 컴퓨터의 크기, 값, 몸체의 색깔과 마찬가지로 컴퓨터의 특성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면에서, 모든 컴퓨터(그리고 모든 보편 계산 장치)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보편 컴퓨터의 개념은 1938년에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에 의해 고안되고 설명되었다. 튜링은 다른 많은 컴퓨터 선구자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기계를 만드는 데 관심을 가졌고, 범용 계산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튜링은 이 가상의 구조물을 ‘보편 기계’라고 불렀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컴퓨터’라는 말이 ‘계산하는 사람’을 뜻했기 때문이다.

튜링 기계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두루마리 종이에다 계산을 하는 수학자를 생각하자. 두루마리가 무한히 길어서 쓸 곳이 모자랄 걱정은 없다고 하자. 튜링은 영리한 수학자가 할 수 있는 계산은 어떤 것이든, 멍청하지만 세심한 사무원의 규칙에 따라 두루마리에 정보를 읽고 쓰기만 하면 풀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사실 그는 사람인 사무원을 유한 상태 기계로 바꿀 수 있다고 한다. 유한 상태 기계는 두루마리에서 한 번에 한 가지 기호만을 읽을 수 있으므로, 두루마리를 한 줄에 기호가 하나씩 적힌 종이 테이프토 생각하는 것이 좋다. (유한 상태 기계는 가능한 상태가 유한하고, 허용된 입력이 이 상태를 허용된 출력으로 바꾸어 내보낸다. 출력은 기계의 상태에 의해서만 결정되고, 기계의 상태는 사건이 일어난 이력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오늘날 우리는 유한 상태와 무한히 긴 테이프를 합쳐서 ‘튜링 기계’라고 부른다. 테이프는 현대적인 컴퓨터의 기억 장치와 거의 비슷한 역할을 한다. 유한 상태 기계가 하는 일은 정해진 단순한 규칙에 따라 테이프에서 기호를 읽거나 써서 테이프를 앞이나 뒤로 움직이는 것이 전부이다. 튜링은 모든 계산 가능한 문제는 튜링 기계의 테이프에 기호를 써서 풀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테이프에는 문제 자체뿐만 아니라 문제를 푸는 방법도 기호를 써 넣을 수 있다. 튜링 기계는 해답이 테이프에 적힐 때까지 테이프를 앞뒤로 옮기면서 기호를 읽거나 쓴다.

나로서는 튜링이 말하는 특정한 구조를 생각하기가 매우 힘들다. 나에게는 테이프 대신에 기억 장치를 가진 통상적인 컴퓨터가 더 이해하기 쉬운 보편 기계의 예이다. 예를 들어 나는 일반 컴퓨터로 튜링 기계를 모사하도록 프로그램하는 것이 반대의 과정보다 알기 쉽다. 내가 놀라워하는 것은 튜링 기계의 가상적인 구조보다는, 단 한 종류의 보편 계산 기계만 존재한다는 그의 가설이다. 우리가 아는 한, 물리적인 우주에 만들어진 어떤 기계도 튜링 기계보다 더 뛰어난 계산 능력을 가질 수 없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물리적 계산 장치로 풀 수 있는 어떠한 계산도, 충분한 시간과 기억 장치만 있으면 어떤 보편 컴퓨터로든 풀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적절하게 프로그램된 보편 컴퓨터가 인간의 뇌 기능을 모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놀라운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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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합성(1946)

멜빈 캘빈(1911~1997)


과학을 되돌아볼 때, 너무나 우아하고 단순해서 도리어 중요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 기념비적인 실험이 있다. 이런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미국의 화학자 멜빈 캘빈이 광합성에서 탄소 고정의 주요 단계들을 보여준 실험이다. 이 과정은 지구상의 모든 고등 생물의 먹이 사슬을 떠받치고 대기에서 끊임없이 이산화탄소를 제거해서 지구의 기후를 유지한다.

녹색 식물이 햇빛을 쬐면 이산화탄소를 흡수한다는 것은 1779년에 양 잉겐호우스에 의해 알려졌다. 그 후로 두 세기 동안 녹색 식물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로 포도당과 녹말 등 복잡한 탄소 기반 분자들을 만들어 성장에 이용한다는 사실을 비롯해서 광합성의 핵심적인 요소가 많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산화탄소를 당으로 전환하는 복잡한 생화학적 순환 과정을 자세히 밝혀낸 사람은 러시아계 이민 2세인 멜빈 캘빈이었다.

캘빈이 1946년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분교에 있는 로렌스 방사선 연구소장으로 임명된 것은 방사성 동위원소인 탄소 14를 쉽게 사용할 수 있게 된 때와 일치했다. 캘빈은 이것을 이용해서 녹색 식물의 엽록체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반응에서 탄소 원자를 추적할 수 있음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는 방사성 탄소 14를 녹조류인 클로렐라가 든 플라스크에 넣은 다음, 몇 초 정도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시간 간격으로 반응을 중단시켰다. 간격이 길어짐에 따라 방사성 탄소 14가 점점 더 많은 화합물에 나타나서, 캘빈은 이것을 보고 탄소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알아냈다.

이 반응은 캘빈과 공동 연구자 앤드루 벤슨의 이름을 따서 캘빈-벤슨 회로라고 이름지어졌고, 캘빈은 이 발견으로 1961년에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그 후로 캘빈은 화학 연료 대신에 불모지의 관목으로(태양 에너지의 광합성으로) 만든 식물성 탄화수소를 쓸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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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1947)

월러드 프랭크 리비(1908~1980)


1947년에 월러드 프랭크 리비는 뼈, 나무, 작물 등 엄청나게 큰 시대적 변이를 보이는 유기물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을 개발했다. 최근에는 가속기를 이용한 질량 분석으로 이 기술이 크게 발전하여 지질학, 인류학, 고고학, 고생물학 등에 필수적인 도구가 되었다.

요즘은 유명한 토리노의 성의(聖衣)처럼 귀중한 것도 아주 적은 양의 표본만 있으면 연대를 알 수 있다. 1988년에 실시된 이 성의에 대한 연대 측정 결과는 성의의 재료인 아마포가 1325년쯤에(오차범위±33년) 수확된 것으로 드러나서, 이 유물은 흔히 믿는 것처럼 예수의 시신을 쌌던 천이 아니라 중세의 위조품임이 확인되었다.

미국의 물리학자 리비는 2차 세계대전 때 맨허턴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원자 폭탄을 개발하기 위해 우라늄 동위원소를 분리하는 일을 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 시카고 대학교의 핵 연구소로 옮겨간 그는 1960년에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탄소 14가 우주선(宇宙線)이 대기 중의 질소에 작용하여 생긴다는 것이 1939년에 밝혀졌다. 따라서 이 동위원소는 그것이 포함된 이산화탄소가 생명체 속에 들어가므로, 실제로 모든 유기물로 확산된다. 생물이 죽고 나면 더 이상 탄소 14가 공급되지 않고, 그때부터는 체내의 탄소 14가 자연적으로 붕괴하여 안정된 동위원소인 탄소 12로 바뀐다. 붕괴 속도가 알려져 있기 때문에, 두 탄소의 비율을 재면 죽은 지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방사성 탄소의 반감기는 5,730년으로 비교적 짧아서, 이 방법으로는 대략 4만 년까지의 연대만을 측정할 수 있다. 우주선에도 벼닝가 있는 것이 알려져서, 방사성 탄소로 측정된 연대에 약간의 수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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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이론(1948)

클로드 엘우드 섀넌(1916~2001)


우리는 정보 고속도로를 달리며 정보의 홍수 속에 빠져서 최신 정보 기술을 끌어안고 산다. 그러나 정보 시대의 주춧돌을 놓은 사람이 미국의 수학자 클로드 섀넌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매우 드물다. 그는 1948년 통신에 관한 수학적 이론을 발표했고, 지금은 이것은 정보 이론이라고 부른다.

섀넌은 정보에 정확한 수학적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통신의 근본 문제는 한 지점에서 보낸 메시지를 다른 지점에서 정확하게 또는 근사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라는 통찰을 가지고 초기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메시지의 정보 내용이 이진수 0과 1(비트)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것은 여러 개의 ‘예-아니오’ 상황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모든 통신 채널은 초당 전송되는 비트 수로 성능을 표시하는데, 이것이 바로 섀넌이 말한 ‘채널 용량’이다. 그는 정보가 잘못 전달될 가능성을 비트의 손실, 비트의 왜곡, 다른 비트의 추가 등으로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지금은 통신의 상한선을 정할 수 있으며, 중복도, 잡음, 엔트로피(정보량의 척도로서) 등도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다. 이것으로 공학자들은 먼 우주에서의 통신을 비롯해서 인터넷, 콤팩트 디스크 플레이어, 휴대 전화 등 모든 형태에 대한 메시지 전송 속도와 신뢰성을 개선할 수 있었다.

섀넌의 연구는 즉각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고, 정보 이론은 생물학, 언어학, 심리학, 경제학, 물리학, 심지어 예술과 문헌에도 영향을 주었다. 1953년도 《포천》에 따르면, “정보 이론을 알차게 이용하면,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공식을 입증하는 원자력 발전이나 원자 폭탄의 물리적 실험보다 훨씬 더 평시의 인류 번영과 전시의 안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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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식 거부 반응(1949)

피터 브라이언 메더워(1915~1987)

프랭크 맥팔레인 버닛(1899~1985)


장기나 조직을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는 것은 100년이 넘게 꿈으로 남아 있었다. 20세기 초에 알렉시 카렐과 찰스 거스리가 개발한 봉합 기술 덕분에 간, 심장, 비장 같은 장기 이식이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장기를 이식하면 거부 반응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되면 환자는 죽을 수밖에 없다.

이식 거부 반응이 일어나는 과정을 규명하고 그것을 억제하는 일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영국의 동물학자 피터 메더워는 독일군의 런던 야간 공습 때 화상을 입은 사람들을 치료했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동물에 대한 정교한 피부 이식 실험을 했다. 그는 이런 경험에서, 이식 거부 반응은 받는 쪽의 면역 체계가 이식된 조직을 공격하기 때문에 생기는 직접적인 결과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식받는 쪽의 면역 체계는 이식된 조직의 항원을 침입자로 규정하고 이 조직을 목표로 항체를 만들어내므로, 이 조직은 백혈구 세포에 의해 파괴된다. 이식 거부 반응의 효과는 1950년에 미국에서 시행된, 인간에 대한 최초의 간 이식 수술이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8개월 뒤에 의료진은 왜 간이 기능을 못 하는지 알게 되었다. 환자의 면역 체계에서 공격당해서 간이 조그맣게 쪼그라들었던 것이다.

이식 거부 반응에 대한 메더워의 연구는 세포 또는 조직들이 ‘자기’라고 인식하는 능력은 배아 발생때부터 획득한다고(‘후천성 면역’) 제안한 오스트레일리아의 생물학자 프랭크 맥팔레인 버닛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1950년대 초에 메더워는 쥐를 배아 시절에 공여자의 세포에 노출시키면 피부 이식에서 거부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후천성 면역 내성’). 따라서 이식에 성공하려면 성체에서 내성을 유도하거나 면역을 억제해야 한다. 1962년에 로이 칼른은 면역 억제제를 써서 간 이식 환자의 수명을 연장시켰으나, 진정한 돌파구는 1970년대 후반에 강력한 면역 억제제인 사이클로스포린이 도입된 다음에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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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약 유전자(1951)

바버라 매클린톡(1902~1992)


바버라 매클린톡은 1927년에 미국의 코넬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에 옥수수의 유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유전학자들이 ‘모델’ 생물로 초파리를 이용했지만, 코넬 대학교에서는 옥수수를 선호했다. 옥수수 알의 색깔이 유전의 흔적을 분명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염색체도 커서 유전자를 현미경으로 연구하기에 편리했다. 또한 옥수수는 천천히 성숙하기 때문에 유전학 실험을 할 시간이 충분했다.

1931년에 매클린톡은 배아 세포를 만드는 유전자 교환(‘감수 분열’이라고 한다)에서 염색체 물질의 교환도 같이 일어난다는 것을 밝혔다. 이 실험은 염색체와 유전의 관계를 확실히 했기 때문에, 유전학의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매클린톡은 ‘도약 유전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41년에 그녀는 뉴욕 주의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로 옮겼는데, 이곳은 나중에 분자생물학의 개척자들이 모인 유명한 곳이 되었다. 그녀는 옥수수의 알과 잎에 이상한 색의 점과 얼룩이 생기는 것을 보고, 색깔 유전자를 조절하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해 했다. 그녀는 염색체 사이를 돌아다니는 유전 요소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유전자가 들어오면 유전자가 켜지거나 꺼진다는 것이다. 유전체는 생각보다 유연했다.

1951년에 매클린톡은 이 연구를 유전학계에 발표했을 때 남들의 멍한 시선과 무관심을 감내해야 했다. 심지어 그녀가 살짝 돌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매클린톡의 이동하는 유전 요소가 여러 생물에서 발견되어 ‘트랜스포손(transposon)'이라 불렸다. 매클린톡은 1983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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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세포의 성장(1952)

리타 레비-몬탈리치(1909~)

스탠리 코언(1922~)


2차 세계대전 중의 이탈리아 가정 실험실은 뛰어난 여성 과학자가 유대인 박해의 공포 속에서 지내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노벨상을 받게 될 연구를 할 만한 이상적인 장소도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토리노 대학교 의학과를 졸업한 리타 레비-몬탈리치는 그 일을 해냈고, 지금은 신경 세포의 성장에 관한 연구로 유명해졌다.

성장하는 말초 신경이 축색돌기라는 긴 돌기를 뻗어서, 화학 신호나 성장 인자로 근육 따위의 특정한 조직이 만들어지도록 조절하는 과정은 1940년대까지 완전히 수수께끼였다. 레비-몬탈리치는 비밀리에 실험을 하면서 때로는 부엌 도구까지 동원해 가며, 닭의 배아에서 다리를 자르면 말초 신경 세포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입증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워싱턴의 대학교 빅터 햄버거 연구실에서 이 실험을 계속했다. 그녀의 중요한 발견은, 신경 세포의 죽음과 성장 및 특화는 배아 발생에서 일어나고, 살아남는 신경 세포의 수는 대상 조직의 크기와 관계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배아에서 다리를 제거하면, 발달하는 다리에 신경 세포를 공급하는 배근신경절 세포가 많이 죽는다.

1952년에 레비-몬탈리치는 생쥐의 종양을 닭의 배아에 이식하면 종양 근처에서 신경 성장을 촉진하는 물질이 나와서 신경 세포의 배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 물질(‘신경 성장 인자’라고 불린다)은 1954년에 스탠리 코언이 분리하여 화학적으로 분석했다. 코언과 레비-몬탈리치는 1986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신경 성장 인자는 이른바 ‘신경 활성 인자’의 일종으로, 이 물질은 각각 세포 표면의 특정한 수용기에 작용한다. 이 인자는 손상된 성인의 신경계를 회복시키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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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기원(1953)스탠리 로이드 밀러(1930~)

해럴드 클레이터 유리(1893~1981)


생명은 생명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첫 번째 생명은 어떻게 나타났을까? 러시아의 생물학자 엘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오파린은 1924년에 생명을 구성하는 기본 물질들이 단순한 화학 물질에서 나올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 아이디어는 미국의 대기 화학자 해럴드 유리에 의해 더욱 발전했다. 해럴드 유리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던 원시 지구의 대기는 산소가 없고 암모니아, 메탄, 수증기, 수소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즉 이 원시 대기 속의 기체 분자들이 번개에 의한 전기 방전과 자외선 덕분에 단순한 생물학적 분자(아미노산과 당처럼, 현재의 생명에 필수적인 분자들)로 바뀔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이론으로만 남아서 아무도 실험을 해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1953년에 학생이던 스탠리 밀러가 해럴드 유리에게 이 실험으로 학위 논문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벌써 관심을 다른 곳에 두고 있었지만, 밀러가 자기 실험실에서 연구하게 했다.

밀러는 불과 몇 달 만에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단순한 기체 분자로 이루어진 실험관 ‘대기’에서 여러 가지 생물학적 분자들을 만들었다. 이 실험은 과학적 세계관에 그때까지 남아 있던 종교적인 면을 건드렸기 때문에 상당한 반발을 샀다. 밀러 이전에는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여전히 화학 물질에서 생물학적 분자를 만드는 단계에는 초자연적인 힘이 개입해야 한다고 믿었다. 밀러는 자연적인 과정으로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입증했고,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을 깨는 데 일조했다.

그때 이후로 생명의 기원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밀러의 기본적인 실험 설정을 따랐고, 이런 방법으로 생명을 구성하는 모든 기본 단위들이 합성되었다. 그러나 이 연구는 아직 미완성이다. 우리는 생물의(밀러의 실험에서 만들어진) 구성 단위들이 어떻게 스스로 번식할 수 있는 체계로 조립되는지 알아야 한다. 아직 아무도 이 문제를 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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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나선(1953)

프랜시스 해리 콤프턴 크릭(1916~)

제임스 듀이 왓슨(1928~)


디옥시리보핵산(DNA)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분자이고, 이렇게 된 것은 DNA의 구조가 밝혀진 다음부터의 일이다. 분자의 구조를 안다고 해서 그 분자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DNA의 경우에는 구조만으로도 많은 것이 알려졌다. 미국의 젊은이 제임스 왓슨은 1951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도착해서 박사 과정 학생인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DNA의 구조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DNA가 생물학적 유전을 담당하는 분자라는 것이 알려진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이 연구가 첨단의 주제였다.

왓슨과 크릭은 한 가지 화학적 실마리와 X선 회절법으로 DNA의 구조를 추론했다. DNA는 구조를 직접 보기에 너무 작고, X선 회절법은 아주 작은 것의 구조를 밝혀내는 간접적인 방법이다. 화학적인 실마리는 에르빈 샤르가프가 알아낸 규칙에서 왔다. DNA는 네 가지 기본 단위를 가지며, 이것은 문자 A, C, G, T로 나타낸다. 샤르가프는 C의 양이 G와 같고, A의 양이 T와 같다는 것을 알아냈다. 여기에서 왓슨과 크릭은 DNA가 두 가닥으로 되어 있으며 한쪽 가닥에 있는 C는 반대쪽 가닥의 G에 연결되고 A는 T와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X선 회절법을 통해 그들은 DNA 가닥이 나선형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DNA는 이중 나선이었던 것이다.

왓슨과 크릭이 1953년 《네이처》에 발표한 DNA의 구조만으로도, 즉각 어떻게 이 분자가 복제되고(가닥이 풀리면서 각각의 가닥을 원본으로 하여 새로운 가닥이 만들어진다) 어떻게 생물학적 정보를 담을 수 있는지(A, C, G, T의 배열이 기호로 사용된다) 알 수 있었다. 그 다음 10년 동안 생물학자들은 이 ‘암호’를 풀어서 현대 분자유전학의 기초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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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나선



사람들은 대개 1등만 기억할 뿐, 2등은 쉽게 잊혀지는 것이 세상사다. 심지어 역사에 남을 위대한 업적을 쌓고도 역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비운의 주인공들도 적지 않다.


생명의 비밀상자라는 디옥시리보핵산(DNA)의 실체 규명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 영국의 여성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그 예다. 1962년 제임스 왓슨, 프랜시스 크릭, 모리스 윌킨스 등 3인은 DNA 이중나선(二重螺旋) 구조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난소암으로 37세에 사망한 프랭클린이 이 위대한 발견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어디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영국 킹스칼리지에서 연구하던 그녀는 DNA 구조를 보여주는 X선 사진을 찍는 데 성공하지만 확증이 없다는 이유로 결론을 유보하고 다른 연구에 몰두했다. 하지만 동료 윌킨스가 그녀의 허락없이 사진을 분석하고, 이를 미국 케임브리지의 왓슨과 크릭에게 보낸다. 이들은 곧바로 연구에 돌입, 1953년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발표했다.


DNA 구조발견의 뒷이야기는 훗날 베스트셀러가 된 왓슨의 ‘이중나선’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왓슨은 프랭클린이 훌륭한 과학자지만 해석하지도 못하는 자료를 독점했으며 고집 세고 촌스러운 여성으로 폄하해 여성계의 분노를 샀다. 하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프랭클린이 재평가받는 계기가 된 것도 바로 왓슨의 책 때문이었다. 왓슨은 “우리는 그녀의 데이터를 훔친 게 아니라 생각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어쨌든 3인이 이중나선 규명에 성공한 것은 그들의 천재성보다는 끊임없는 토론과 정보교환을 통해 과학적 직관과 통찰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우리 과학자들이 DNA 이중나선 구조의 변화 과정을 입체적으로 규명하는 데 성공, DNA 연구에 새 장을 열었다. DNA의 ‘아름다운’ 이중나선 구조는 그 모습 자체가 교훈적이다. 그것은 유아독존에서 벗어나 서로 대화와 토론, 비판과 견제를 통해 꽈배기처럼 의견을 모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창조적 사고의 원천임을 보여주는 듯하다.


〈경향신문 칼럼 ‘여적’2005.10.20〉



디지털의 강

리처드 도킨스


인간의 유전 체계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에 보편적인 것으로, 그 핵심은 디지털이다. 인간의 유전체에서 ‘정크(junk)' DNA, 즉 사용되지 않는 DNA의 자리에 신약 성서 한 권을 한 자씩 모두 부호화해서 넣을 수도 있다. 우리 몸의 모든 세포는 엄청난 용량의 데이터 테이프 46개를 똑같이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작동하는 여러 개의 판독기로 디지털 문자들을 읽어들인다. 모든 세포에서 이 테이프(염색체)들은 똑같은 정보를 담고 있지만, 세포 속의 서로 다른 판독기가 저마다의 목적에 따라 데이터베이스의 다른 부분을 탐색한다. 이것이 근육 세포와 간 세포가 다른 이유이다. 여기에는 영혼이 내는 생명의 힘도 없고, 고동 치고 끓어오르고 싹트는 신비의 액체도 없다. 생명은 단지 디지털 정보의 바이트들일 뿐이다.

유전자는 순수한 정보이며, 정보는 의미의 왜곡이나 손실 없이 암호화하고 기록하고 해독할 수 있다. 순수한 정보는 복사할 수 있으며, 이것은 디지털 정보이기 때문에, 복사의 신뢰성이 매우 뛰어나다. DNA 복제의 정확성은 현대 기술자들의 수준과 맞먹는다. DNA의 정보는 세대를 통해서 계속 복사되어 내려가며, 변이가 일어나기에 충분할 정도로만 가끔씩 틀리게 복사된다. 이렇게 나타난 변이들 중에서 개체의 생존에 기여하는 것이 있으면, 그 기여를 통해 더 많이 살아남은 개체들이 이 DNA 메시지를 또 복사해서 퍼뜨릴 것이므로, 개체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부호의 조합들만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된다. 다윈주의는 이제 순수 디지털 부호들끼리의 생존 경쟁을 문제로 삼는다.

생각해 보면 다른 방법으로는 생명이 가능하지 않다. 물론 아날로그 유전 체계를 상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아날로그 정보를 여러 세대에 걸쳐 복사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다. 이것은 ‘귓속말 이어가기’이다. 전화 증폭 시스템, 복사한 테이프, 복사한 것을 또 복사한 문서 등의 아날로그 신호는 품질 저하의 누적을 막을 수 없으며, 이것의 복사는 한정된 세대 이상 계속될 수 없다. 반면에 유전자는 1,000만 세대를 내려가도 스스로 똑같이 복사할 수 있으며, 품질 저하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다윈주의가 작동하는 것은 오로지(단절적인 돌연변이를 제외하고, 이것도 자연 선택에 의해 사라지거나 보존된다) 복사가 완벽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오직 디지털 체계만이 장구한 지질학적 시대에 걸쳐 진화를 유지할 수 있다. 이중 나선의 해인 1953년은 신비적이고 모호한 생명관에 종지부를 찍은 해일뿐더러, 다윈주의자들은 그들의 주제가 마침내 디지털로 바뀐 해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순수한 정보의 강이 지질학적 시간을 통해 도도히 흐르면서 30억 개의 지류로 나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러면 낯익은 생명의 모습은 어떻게 되는가? 몸과 손발, 눈과 뇌와 수염, 잎과 가지와 뿌리는 어떻게 되는가? 나의 신체와 팔다리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동물, 식물, 원생생물)는 디지털이 흐르는 강의 둑일 뿐인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암시했듯이, 뭔가가 더 있다. 유전자는 단순히 스스로를 복사해서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일만 하지는 않는다. 유전자는 실제로 몸속에서 시간을 보내며, 유전자는 자신이 머무는 몸의 형태와 행동을 계속 다듬어 간다.

예를 들어 북극곰의 몸은 단순히 디지털의 강의 양쪽 둑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곰의 몸은 엄청나게 복잡한 곰만 한 크기의 기계이다. 북극곰의 모든 유전자는 좋은 동반자로 오랜 세월을 서로 부대끼면서 함께 지내 왔다. 그러나 유전자들이 그 집합 속의 모든 구성원과 함께 지내온 것은 아니다. 유전자들은 그 집합체 속에서 계속 동반자를 바꾼다. 이 집합체는 유전자가 잠재적으로 만날 수 있는 모든 유전자(세계에 존재하는 3,000만 가지의 다른 집합체에 소속된 것은 제외하고)의 집합으로 정의된다. 실제의 만남은 언제나 북극곰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 속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이 몸은 단순히 DNA가 머물기만 하는 곳이 아니다.

우선, 세포의 수는 상상을 초월하며 하나하나가 유전자의 완전한 집합을 가지고 있다. 한 마리의 북극곰은 90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포들을 한 줄로 늘어세우면 달에도 갔다 올 수 있다. 이 세포들은 근육 세포, 신경 세포, 뼈 세포, 피부 세포 등 200여 종류로 나뉘며, 이 종류는 모든 동물에 공통적이다. 세포들은 같은 종류끼리 뭉쳐서 근육 조직, 뼈 조직 등 다양한 조직을 이룬다. 모든 세포는 모든 종류의 세포를 만들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유전자는 오로지 그 조직에 해당하는 유전자만 활성화된다. 세포들의 모양과 크기가 다양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특정한 종류의 세포 속에서 켜진 유전자가 그 세포들을 특정한 모양의 조직으로 성장하게 한다는 것이다. 뼈는 형태가 없는 딱딱한 덩어리가 아니라, 속이 성긴 몸통과 돌기 그리고 관절면이 있다. 세포들은 그 속에 든 유전자의 켜짐과 꺼짐에 따라 이웃 세포들 사이에서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렇게 해서 세포의 조직이 귓바퀴를 만들고, 심장 판막이 되고, 눈의 수정체도 되고 괄약근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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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임약(1954)

그레고리 핀커스(1903~1967)

장 민줴(1908~1991)

존 록(1890~1984)


20세기 초반에 생물학자들은 포유류의 생식에 관련된 복잡한 호르몬 조절을 밝혀냈다. 한편 스테로이드를 치료제로 이용함에 따라 코티손의 대량 생산 기반이 갖춰졌다. 과학자들은 여성의 생리 주기를 새롭게 이해해서, 성 호르몬의 경구 투여로 생리 불순, 생리통, 불임에 대한 치료법을 마련했다. 그러나 동물의 난소에서 정제한 호르몬은 비싸고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프로게스테론 같은 성 호르몬을 싸고 신뢰성 있게 합성할 수 있어야 했다.

1943년 러셀 마커는 멕시코에서 자라는 야생 양에서 스테로이드성 물질인 디오스게닌을 추출하여 실험실에서 프로게스테론(합성된 변종의 이름은 ‘프로게스토겐’)으로 변환했다. 이 물질의 단점은 먹어서 효과를 보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1951년에 루이스 미라몬테스는 칼 제라시의 지도로 마커의 프로게스토겐을 노르에시스테론(미국에서는 ‘노르에신론’으로 알려졌다)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은 먹었을 때의 효과가 인간의 프로게스테론보다 훨씬 컸다. 1년 뒤에 프랭크 콜턴이 비슷한 화합물인 노르에시노드렐을 개발했다. 두 물질 모두 칠시되어 여성 질환 치료에 사용되었다.

1951년에 미국의 생물학자 그레고리 핀커스와 그의 동료들은 새로 합성된 프로게스토겐이 배란을 억제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여성 운동가 마거릿 생어는 이 연구가 무엇을 뜻하는지 재빨리 알아차렸다. 부호 캐서린 맥코믹의 후원으로 생어는 핀커스, 장 민줴, 존 록이 효율적인 호르몬 피임약 개발을 위한 많은 연구비를 지원해주도록 주선했다. 1950년대에 리오 페드라스, 푸에르토리코의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대규모 임상 실험이 수행되었다. 1960년 5월에 미국 식품 의약청은 노르에시노드렐을 에노비드(Enovid)라는 식품명의 경구 피임약으로 허가했다. 1965년에는 섹스 혁명이 널리 퍼져 650만 명 이상의 미국 여성들이 피임약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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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잡이 우주(1956)

리 정다오(1926~)

양 전닝(1922~)


우리는 왜 사물을 일반화하려고 할까? 그것은, 무관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어떤 일에서 위치나 방향 따위를 바꿔도 그 일이 똑같은 방식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어떤 자동차가 북쪽으로 갈 대 시속 170킬로미터까지 달린다면, 동쪽으로 달려도 똑같은 속도를 낼 수 있다고 우리는 기대한다. 비슷하게, 세계가 거울 대칭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상식적이다. 다시 말해 내가 동전을 시계 방향으로 돌릴 수 있으면, 반대 방향으로도 돌릴 수 있다.

그런데 이 거울이 깨지는 수도 있다. 리 정다오와 양 전닝은 1956년에 어떤 이원자 입자들 사이의 반응에서 자연의 근본적인 힘 중 하나인 약한 핵력(중성자 붕괴와 관련있다)이 마치 거울 대칭성이 깨지는 것처럼 작용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 반응에서 튀어나오는 중성미자는 언제나 ‘왼손잡이’이다. 즉 중성미자는 마치 시계 반대 방향으로 감긴 코르크 따개처럼 진행 방향을 따라 왼쪽으로 자전(스핀)한다. 여기에 놀란 물리학자들은 자연계의 다른 대칭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들은 곧 약한 핵력이 다른 오래된 규칙도 어긴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은 물질과 반물질에 대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용한다. 기대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다.

자연이 물질과 반물질을 차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기에 있을 수 없다. 태초에 우주에 있는 모든 물질은 오래전에 반물질을 만나 빛의 소나기로 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폭발의 가마솥에서 일어난 끊임없는 아원자 입자들의 충돌에서 물질이 반물질보다 아주 조금 더 만들어졌다면, 반물질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도 약간의 물질이 남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 찌꺼기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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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의 화학적 원리(1956)

조지 월드(1906~1997)


빛의 덩어리(광자 또는 빛알이라고 부른다)가 눈에 들어와서 망막을 때리면, 빛 에너지가 복잡한 단계를 거쳐 전기 신호로 변환되며, 이 신호는 망막에서 시신경을 타고 뇌로 전달된다. 이 과정의 첫 부분에서 망막의 빛 수용기인 간상체와 원추체 세포 속에 든 색소가 관여한다.

1956년에 시각의 기초적인 화학적 구조가 폴란드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조지 월드에 의해 밝혀졌다. 1차 세계대전 동안에 영양 부족에 의해 눈이 멀 수도 있다는 것이 알려졌고, 이것은 비타민 A가 시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암시했다. 1933년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구하던 월드는 망막에서 비타민 A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비타민 A는 망막에 사용되어 로돕신과 거기에 관련된 시각 색소를 형성한다. 이것들은 항상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옵신이라는 무색의 단백질로서 간상체 또는 원추체 세포에 원반 모양의 막을 내뻗으며, 다른 하나는 옵신에 깊숙이 연결된 레티날이라 불리는 비타민 A이다.

빛의 쬐면 레티날이 빛 에너지를 흡수해서 ‘꼬인’ 상태에서 ‘곧은’ 상태로 변한다. 이것이 분자의 옵신 부분을 활성 효소로 바꿔서, 복잡한 반응을 거쳐 빛 수용기 세포와 시신경 세포 사이에 신경 전달 물질을 내놓는다.

빛을 죄면 옵신이 재빨리 레티날을 내놓는다. 이 레티날 중 일부는 파괴되어 회수되지 않기 때문에, 저장된 비타민으로 보충해야 한다. 사람은 비타민 A를 만들지 못하지만, 식물은 카로틴의 일부로 이것을 만든다. 이것은 당근이 눈에 좋은 이유와, 신선한 야채를 먹지 못하면 비타민 A가 부족해지고 눈이 멀게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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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본능(1957)

노엄 chatm키(1928~)


정치적인 활동으로도 유명한 미국인 노엄 촘스키는 언어에 대해, 심리학과 언어학에 중요한 함축성을 지니는 견해를 소개했다. B. F. 스키너와 같은 행동주의(경험적인 사례를 축적함으로써 말을 배운다는 견해)와 반대와, 촘스키는 사람이 말을 배우는 능력을 타고난다고 주장했다.

1957년 『통사 구조』의 출간을 시작으로 그는 ‘생성 언어학’이라 불리는 학문을 시작했다. 이 학문의 참여자들은 우리는 규칙에 따라 말을 이해하고 만들며, 가장 기본적인 이 규칙들은 인간의 모든 언어에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영어와 중국어는 엄청나게 다르지만 공통의 ‘심층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유아들이 어떤 언어든 배울 수 있는 이유이다. 언어들이 크게 달라 보이는 것은 ‘표층 구조’ 때문이다.

촘스키의 ‘생성 문법’은 어떻게 우리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을 이해하고 만들어낼 수 있으며, 모르는 단어가 들어 있는 문장에서도 부분적으로 뜻을 알 수 있는지, 그리고 ‘fteggrup'나 ’nganga' 따위의 말은 지어낸 단어라는 걸 알아낼 수 이쓴지 설명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우리는 영어에서 바른 문장 구조를 인지할 수 있을뿐더러, 다음과 같은 무의미한 문장에서도 부분들 사이의 관계를  알 수 있다.

“Blotherasts argle contornaceously bethwart mungled chardwicks and fintipled mesterlinks."

촘스키는 소리가 결합되고 변하는 방식이 이른바 ‘불규칙’ 동사에서도 어형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설명하는 규칙 체계를 제안했다. 그의 연구는 많은 논쟁을 일으켰고, 특히 언어의 기초는 학습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타고난다는 주장은 스키너와 같은 행동주의자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았다. 인간의 뇌는 기능별로 분화된 영역을 가지고 있지만, 말에 구조를 부여하는 ‘언어 기관’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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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두바이 계곡(1959)

루이스 리키(1903~1972)

메리 리키(1913~1996)


1959년에 루이스 리키와 그의 두 번째 부인 메리는 탕가니카(현재의 탄자니아) 올두바이 계곡에서 175만 년 된 진잔트로수스(현재는 파란트로푸스(Paranthropus)) 보이세이(Zinjanthropus boisei)의 두개골을 발견했다. 루이스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프랑스 어와 키쿠유 어를 전공했지만, 인류학도 공부해서 탕가니아로 가는 대영 박물관 탐사대에 참가했다. 인간의 조상은 아프리카에서 발견될 것이라는 다윈의 예측을 믿은 루이스는 동아프리카에서 30년 넘게 인간과 관련된 화석을 찾아, 마침내 그가 ‘호두까기 인류’라는 별명을 붙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계의 건장한 유골을 발견했다. 메리도 고고학에 관심을 가져서 런던 유니버시티 대학에서 강의를 듣다가 1935년에 루이스의 올두바이 탐사에 참가했다.

그들이 1959년에 한 발견은 레이먼드 다트가 1924년에 주장한 타웅 아이의 두개골(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와, 나중에 로버트 브룸이 남아프리카의 동굴에서 발견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계 유골들(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와 파란트로푸스 로부스투스)의 중요성을 높였다. 1950년대의 브룸은 250만~300만 년 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가 1.2미터의 키에 인간처럼 완전히 직립 보행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중요한 것은, 리키가 동아프리카에서 발견한 것이 퇴적층 속에 있었기 때문에 같이 묻힌 동물 화석으로 상대적인 연대를 알 수 있었고, 나중에는 그 지층 속에 든 화산재와 용암에 대한 방사성 연대 측정으로도 연대를 알 수 있었다는 점이다. 브룸이 올두바이에서 발견한 파란트로푸스 보이세이는 칼륨-아르곤 동위원소법에 의해 최초의 인류이이 확실해졌다. 그리고 1960년에 올두바이 발굴에서 다른 인류의 유골과 함께 원시적인 석기들도 발견되었다.

메리는 1976년에 탄자니아의 라에톨리 탐사를 지휘했고, 여기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의 발자국(375만 년 전)이 발견되어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완전히 서서 걸었다는 블룸의 주장이 입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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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플릭 한계(1961)

레너드 헤이플릭(1920~)


오랫동안 생물학자들은 세포가 불멸이고, 세포가 죽는 것은 유기체의 일부이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이 생각은 프랑스의 의사 알렉시 카렐의 연구에서 나온 것으로, 그는 병아리의 심장에서 분리된 세포의 배양체가 몸 밖에서 얼마나 오래 살아남는지 관찰했다. 카렐은 1944년에 죽었지만 세포는 그때까지 살아있었으며, 2년 뒤에 폐기되었다.

그러나 1961년에 미국의 생물학자 레너드 헤이플릭은 카렐이 틀렸고 세포의 수명은 유한하다고 제안했다. 그는 인간의 여러 가지 세포를 배양해서, 세포는 항상 50회가량 분열한 뒤에 죽는다는 것을 보였다. 실험을 시작할 때 세포가 오래된 것이면 분열할 수 있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나중의 연구에서 세포가 분열할 수 있는 횟수는 생물의 수명과 관계있음이 밝혀졌다. 수명이 3년 반쯤 되는 생쥐의 세포는 14~28회쯤 분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명이 175년인 갈라파고스거북은 90~120회나 된다. 이 ‘헤이플릭 한계’에 따르면 인간의 잠재적 수명은 120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세포의 손상이 누적되어 이만큼 오래 살지 못한다. 세포가 분열할 때마다 염색체의 끝부분(‘텔로미어’라고 부른다)이 짧아진다. 연구자들은 세포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즉 인간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텔로미어가 짧아지는 것을 막는 방법을 찾고 있다. (1996년에 다 자란 양을 복제한 돌리는 예상보다 텔로미어가 더 짧았다.)

그렇다면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유일하게 죽지 않는 세포는 암 세포로, 이것은 끊임없이 증식한다. 건강한 상태에서 유전자가 손상된 세포를 죽여 없애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는데, 이 과정을 세포 사멸(apoptosis)이라고 부른다. 연구자들은 뇌졸중과 같은 상태에서 조직 손상을 막기 위해 세포 사멸을 기초로 하는 여러 가지 치료법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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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뇌와 우뇌(1962)

로저 월콧 스페리(1913~1994)


인간의 뇌는 대칭적인 형태인데, 오랫동안 두 반구가 거의 같은 기능을 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1962년부터 미국의 신경과학자 로저 스페리는 뛰어난 연구를 통해 어떤 기능은 뇌의 어느 한쪽에서 더 많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는 이 업적으로 1981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양쪽 반구는 두 개의 신경 섬유 띠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를 ‘뇌량’이라고 한다. 로널드 마이어와 로저 스페리는 이 연결 섬유들의 역할을 알아보기 위해 동물의 뇌량을 전달하고 눈에서 맞은편 뇌로 가는 신경 섬유를 잘라 시각 입력을 제한했다. 한쪽 눈에 어떤 모양을 보여주면 일정한 반응을 하도록 훈련된 동물의 다른 쪽 눈에 그 모양을 보여주자, 훈련된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명백히, 뇌량은 시각 정보를 한쪽 반구에서 맞은편 반구로 전달하는 데 필요하다.

이 연구를 사람에게 확장하여, 스페리와 그의 동료들은 발작이 맞은편 뇌로 전달되지 않도록 양쪽 반구를 연결하는 섬유를 절단한 간질 환자들을 조사했다. 겉보기에 이 환자들은 정상적으로 행동하여, 이전까지 연구자들은 두 반구가 독립적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페리는 뇌량이 인간과 동물에서 비슷한 역할을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정신적 능력은 어느 한쪽에서 더 잘 수행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뇌의 양쪽 반구는 실제로 많은 기능을 공통적으로 수행하지만, 좌뇌는 언어에 특화되어 있고 우뇌는 기하학적 도형을 마음속에서 회전시키는 등의 시간 및 공간 지각에 특화되어 있다. 이것은 의식의 본질과 ‘자아’에 대한 우리의 개념에 심오한 철학적 함축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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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 좋은 학생, 비밀은 ‘정수리’


머리가 좋은 학생일수록 뇌의 정수리 부분(두정엽)이 많이 활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대 이건호 교수(생명과학부) 연구팀은 기능적 자기공명 영상기술(fMRI)을 이용, 사람의 지능 발현에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는 뇌 부위가 대뇌피질의 일부분인 ‘후두정엽’이라는 사실을 규명했다고 8일 밝혔다.

일반적으로 지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진 좌(왼쪽)·우 뇌 영역(사진 위)과 지능지수가 높은 학생들에게 활성화되는 좌(왼쪽)·우 뇌 영역(아래).



그동안 생물학적으로 뇌에서 지능을 담당하는 영역은 전두엽(이마의 옆면)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 연구 결과 실제로 지능지수의 차이가 많이 나타나는 부위는 후두정엽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처음 밝혀졌다. 이런 결과는 뇌영상분야의 국제 학술지인 ‘뉴로이미지’ 인터넷판에 게재됐다.

연구팀은 지능지수가 상위 1% 이내에 속하는 한국과학영재학교 등 특목고 학생 25명과 보통 지능을 가진 인문계·실업계 고교생 25명 등 50명을 대상으로 다양한 지능 과제를 수행토록 하면서 이들의 뇌 활동을 영상기술로 분석했다. 그 결과 지능이 높은 집단은 어려운 과제를 수행할 때 양쪽 뇌의 정수리 부분인 후두정엽 부위의 활동이 매우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후두정엽 부위의 활성도는 개인의 지능지수와 매우 높은 상관성을 가진다는 점을 함께 규명했다.

사람의 지능은 크게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유동성 지능’과 교육·문화적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결정성 지능’으로 구분된다. 이교수는 “추론 능력을 기반으로 한 유동성 지능은 나이가 들수록 떨어지는 경향이 있어 학창 시절에 어려운 과제를 많이 수행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후두정엽 부위를 개발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할지는 향후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 결과를 영재 교육 및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 등에 응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경향신문 9.8〉



복종의 심리학(1962)

스탠리 밀그램(1933~1984)


권위에 대한 복종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입된다. 우리는 부모에게 복종하고, 선생에게 복종하고, 상사에게 복종하며, 법에 복종한다. 사실 복종은 모든 인간 사회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종과 순응의 경향이, 품고 있는 법을 잘 지키는 독일 시민들이 저지른 2차 세계대전 때의 끔찍한 일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의 행동은 우리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는 성품을 보여주는가?

1961~1962년에 미국의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은 보통 사람이 부도덕한 명령을 받았을 때의 반응을 뛰어난 실험으로 관찰했다. 지원자들은 처벌에 의한 학습을 연구하는 실험에 참가했는데, 물론 그것은 꾸며낸 상황이었다. 지원자는 교사 역할을 하며, 교실에 들어가면 다른 사람(학생)이 의자에 묶은 채 손목에 전극을 달고 있다. 교사가 단어의 쌍을 읽어주면 학생은 기억을 해야 하고, 틀릴 때마다 점점 더 강한 전기 충격이 가해진다. 물론 실제로 전기 충격을 주는 것은 아니고, 학생은 고통스러운 척하는 연기자이다.

끔찍하게도 첫 실험에서 40명의 교사들 중 25명이 ‘위험:심각한 충격’이라고 표시된 가장 높은 수준(450볼트)까지 전압을 올렸다. 겁이 난 교사는 자주 감독관에게 몇 번이고 “내가 책임져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교사는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들은 다음에는 금방 쉽게 가혹한 벌을 주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실험하는 동안 신경이 곤두서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줄곧 실험을 그만두자고 애원했다. 그리고 추가 실험에서 교사가 학생과 같은 방에 있거나 감독관과 다른 방에 있으면 덜 복종적이며, 여성과 남성은 복종의 정도에 차이가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많은 사람들이 무고한 희생자에게 비인간적이고 무정하게 대하도록 지시를 받아도 권위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것은 복종이 의식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는 예이다. 여기에서 해묵은 질문이 또 떠오른다. 개인의 권리와 사회의 권위 사이의 올바른 균형점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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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의 진화(1964)

윌리엄 도널드 (빌) 해밀턴(1936~2000)


다윈의 관점에서 볼 때 동물이 어떻게 다른 동물을 돕도록 진화할 수 있는가? 자연 선택은 가장 많은 후손을 남기는 개체를 선호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동물이 다른 동물을 돕는다면, 돕는 동물은 후손을 많이 남기지 못하고 도움을 받은 동물은 많은 후손을 남길 것이다. 자연 선택에 따르면, 이타적 행위를 하거나 협동하는 생물은 진화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동물들은 서로 돕는다. 개미, 벌, 말벌이 극적인 예이다. 꿀벌은 한 번 침을 쏘고 나면 꽁무니가 찢어져서 적에게 독을 주입하고 난 뒤에 자기는 죽는다. 죽은 벌과 같은 벌집에 살던 동교들은 이 자살 행위의 덕을 본다. 이것과 같은 ‘이타적’ 행위는 다윈주의에서 오래된 수수께끼였다.

이 수수께끼는 1964년에 빌 해밀턴에 의해 풀렸다. 당시에 박사 과정을 갓 시작한 학생이었던 영국의 생물학자 빌 해밀턴은, 유기적인 친척을 위해 희생한다면 자기에게도 득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희생하는 개체가 가진 유전자는 형제와 자매에게도 들어 있을 것이다. 희생의 대가보다 더 많은 이득이 수혜자에게 돌아간다면, 자연 선택에 따라 그러한 희생을 할 줄 아는 생물이 번성할 것이다.

해밀턴의 이론은 동물이 언제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지 매우 잘 예측한다. 이 이론은 독특한 유전 체계를 가진 개미, 벌, 말벌 같은 곤충에 멋지게 들어맞는다. 개미는 그 자식보다 자매들끼리 더 많은 유전자를 공유하며, 이것이 이들의 발달된 사회적 행동을 설명한다. 해밀턴의 이론은 사회적 행위에 대한 모든 현대적 연구의 기초를 제공했다. 이 이론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에드워드 윌슨이 사회생물학 논쟁을 일으킨 후부터 인간이 행동에까지 적용되었다.(물론 이것이 해밀턴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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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구조론(1967)

드러먼드 호일 매슈스(1931~1999)

프레더릭 존 빈(1939~1988)

댄 피터 매켄지(1942~)


1925년부터 1927년까지 독일의 해양 탐사선 SS 메테오르 호는 바다 밑바닥을 초음파로 탐지하면서 대서양을 열십자로 샅샅이 누비고 다녔다. 여기에서 대서양 중앙 해저 산맥이 발견되었는데, 대양 전체에 걸쳐 뻗어 있는 이 해저 산맥의 중요성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서야 알려졌다.

미국의 지질학자 모리스 유잉은 해양 지진 탐지 기술을 처음으로 개발하여 해양 지각(두께 7킬로미터)이 대륙 지각(20~80킬로미터)보다 훨씬 얇다는 것을 보였다. 1953년에 유잉과 미국의 해양학자 브루스 히즌은 대양의 중앙 해저 산맥이 지구 전체에 걸쳐 뻗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나중에는 대서양 중앙 해저 산맥의 중심부가 움푹 들어가 있다는 것도 알아냈다. 이 균열은 해양에서 일어나는 매우 큰 지진 및 화산 활동과 일치하며, 해저 산맥이 양쪽으로 잡아당겨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들을 전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동료인 해리 헨스의 연구를 기다려야 했다. 이 미국의 지질학자는 태평양 밑바닥을 연구하여 바다 밑바닥이 늘어난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1962년에 그는 뜨거운 맨틀에 대류가 이렁나 용암이 솟아올라서 해양 중앙 해저 산맥이 형성됐다고 주장했다. 즉 용암이 해저 산맥 중심의 균열에서 밀려나와서 온 방향으로 퍼져 나가면서 바다 밑바닥을 새로운 물질로 덮었다는 것이다. 바다 밑바닥은 해저 산맥에서 멀면 멀수록 더 오래전에 형성되었다.

1963년에 영국의 두 지질학자 드러먼드 매슈스와 프레더릭 빈은 중앙 해저 산맥의 양쪽에서 용암의 자화 방향이 정확히 대칭을 이루면서 변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오래전에 일어났던 지자기 역전이 그대로 기록된 것이었다. 이 대칭성으로 바타 밑바닥이 퍼져 나간다는 헤스의 이론이 확인되었다. 마지막으로 1967년에 영국의 지구물리학자 댄 매켄지가 대륙 이동설과, 바다 밑바닥이 퍼져 나간다는 이론을 종합해서 판구조론을 만들었다. 이 이론은 지구의 지각이 거대한 판으로 나뉘어 움직인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화산과 지진은 판의 경계에서 일어나고, 판이 충돌하는 곳에서 산맥이 형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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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의 공생(1967)

린 마굴리스(1938~)


인간의 몸에 있는 모든 세포는 20억 년 전에 단순한 두 세포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어떤 세포의 후손이다. 우리의 세포에는 아직도 이 역사적 사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세포의 유전자는 두 곳에 위치한다. 유전자는 대부분 세포핵에 있다. 그러나 소수의 유전자가 핵 밖의 미토콘드리아에 들어 있다. 왜 우리의 세포에는 두 곳에 유전자가 있는가?

미국의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는 1967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미토콘드리아는 원래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박테리아 세포였다고 주장했다. 아주 오래전에 큰 세포가 작은 세포를 삼켰는데, 아마 잡아먹으려고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작은 세포가 큰 세포 안에서 살아남았고, 두 세포는 이렇게 결합해서 성공적인 팀이 되었다. 작은 세포는 음식을 산소로 태워서 에너지를 얻는 일(이것이 현대의 세포에서 미토콘드리아가 하는 일이다)을 잘 했고, 큰 세포는 음식을 얻는 일을 잘 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 동반자는 오늘날 우리 몸의 세포와 같은 형태로 진화했다. 미토콘드리아는 여전히 박테리아처럼 보이고, 미토콘드리아 속에 남아 있는 얼마 안 되는 유전자도 박테리아의 유전자와 비슷하다. 녹색 식물에서 광합성을 담당하는 구조인 엽록체도 이것과 비슷한 공생적 진화를 겪었다.

사람의 세포처럼 미토콘드리아의 유전자와 핵의 유전자를 모두 갖춘 것을 ‘진핵’ 세포라고 한다. 박테리아처럼 핵과 미토콘드리아의 구분이 없는 세포를 ‘원핵’ 세포라고 한다. 원핵 세포는 지구에서 생명이 시작된 40억 년 전부터 번성했고, 20억 년 전에 진핵 세포가 진화했다. 현대의 모든 식물과 동물은 진핵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마굴리스에 의해 확인된 공생적 흡수는 지구상에 복잡한 생명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거대한 돌파구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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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다섯 계(1969)

로버트 하딩 위터커(1920~1980)


“동물, 식물, 아니면 광물입니까?” 이 질문은 생물은 동물 아니면 식물이라는 것을 함의하며, 오래전에는 생물학자들도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생물학자들은 예를 들어 버섯처럼 이 분류에 맞지 않는 것도 만났지만, 이런 것까지 동물이나 식물에 억지로 끼워넣었다. 버섯은 균류이고, 최근까지 생물학자들은 균류를 식물로 분류했다. 좀 더 정확히 하면 ‘광합성을 하지 않는 식물’이다.

그 다음에는 미생물이 있다. 생물학자들은 17세기 이후부터 점점 더 많은 유형의 미생물을 발견했고 이것도 착실하게 동물-식물의 틀에 끼워맞췄다. 어떤 미생물은 광합성을 할 수 있었고, 이것들은 조류(藻類)로 정의되어 식물에 편입되었다. 다른 미생물은 동물과 더 비슷해 보였고, 이것들은 원생동물로 정의되어 동물에 편입되었다. 19세기에 생물학자들은 박테리아(훨씬 더 작은 미생물)를 발견했는데, 아무도 이것을 동물이나 식물로 분류할 수 없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생물학자들은 모든 생물을 동물과 식물로 나눌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이 낡은 생각은 1969년에 미국의 생태학자 로버트 위터커가 생물을 다섯 가지 계로 나누자고 제안한 다음에야 완전히 힘을 잃었다. 그는 생물을 동물, 식물, 균류, 원생생물, 박테리아로 나눴다. 동물, 식물, 균류, 원생생물은 ‘진핵’ 생물이다. 다시 말해 이것들은 뚜렷이 구별되는 핵을 가진 세포로(원생생물의 경우에는 한 세포만으로) 구성된다. 균류는 식물과 아무 상관이 없고, 차라리 동물과 더 관계가 있을 것이다.

계속된 연구에서 워터커의 분류도 수정되었다. 어떤 생물학자들은 원생생물을 하나 이상의 계로 나눠야 한다고 보았지만, 가장 중요한 발전은 칼 우스가 원핵 생물을 두 종류(원시 원핵 생물과 박테리아)로 나눈 것이다. 이렇게 해서 원핵 생물, 박테리아, 진핵 생물(여기에 워터커 체계의 나머지 네 종류가 모두 들어간다)의 ‘세 영역’ 체계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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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 자기인식(1971)

닐스 카이 예르네(1911~1994)


우리 몸은 질병에 대해 어떻게 스스로를 보호하는가? 이 물음에 대답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닐스 예르네이다. 그는 1911년에 런던에서 태어난 덴마크 인으로, 코펜하겐에서 의학 공부를 한 다음에 1955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으로 가서, 면역학에서 핵심적인 개념을 만들었다.

몸을 감염시켜 지켜줘는 항체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같은 침입자가 몸속에 들어왔을 때에만 만들어진다고 오랫동안 믿어져 왔다. 항체는 침입자의 표면에 있는 항원 분자에 달라붙어 면역 체계의 세포들이 이것을 찾아 파괴하도록 만든다. 닐스는 몸이 이미 필요한 모든 항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수백만 가지의 항체 주에서 항원에 잘 달라붙는 것 한 가지가 선택된 다음에, 이 항체가 엄청난 수로 불어나서 감염에 대처하기에 충분한 항체 집단이 만들어진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면역학자 프랭크 맥팔레인 버닛은 더 나아가 항체는 특정 면역 세포에 붙고, 정확하게 항체에 달라붙은 항체가 면역 세포에 붙으면 그 항체를 증식시키라는 신호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 이론을 ‘복제 선택’이라고 한다.

그러나 면역 체계는 어떻게 ‘아군(자기 몸의 조직)’과 ‘적군(박테리아, 바이러스, 이식된 조직)’을 구별하는가? 1971년에 닐스는 가슴에 ‘가슴샘’이 면역 체계의 피아 구별을 조절한다고 제안했다. 가슴샘에서, '적군‘을 공격하는 항체를 만드는 세포들은 증식되고, ’아군‘을 공격하는 항체를 만드는 세포는 억제된다. 닐스의 생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3년 뒤에 그가 제안한 ’네트워크 이론‘이다. 이것은 면역 체계의 모든 다른 세포들이 어떻게 균형을 이룰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이것 덕분에 면역 체계는 평상시에 조용히 있고, 몸에 위협이 올 때 재빨리 반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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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 가설(1972)

제임스 러블록(1919~)


지구가 거대한 생명체라는 생각은 기원전 400년의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20세기까지도 과학적 신뢰성을 얻지 못했다. 영국의 독자적인 과학자 제임스 러블록은 1960년대에 나사(NASA, 미국 항공 우주국)에 고용되어 화성에 생명이 있을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해, 마치 다른 행성에 대해 하는 것처럼(대기 분석을 통해) 지구의 생명을 연구했다. 그는 지구의 대기가 아주 있기 어려운 상태로 균형을 유지하며, 이 균형은 지질화학적 과정(암석의 침식 따위)과 생명체들의 활동(광합성 식물에 의한 이산화탄소 제거와 산소 생성 따위)에 의해 유지된다고 지적했다. 많은 논란이 된 그의 ‘가이아 가설’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의 이름을 딴 것으로, 지구상의 생물학적 과정과 물리학적 과정이 함께 작동하여 생명이 계속 유지될 조건을 만들고 조절한다고 주장한다.

1972년에 제안된 이 이론은 과학적 엄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이유로 주류 학자들에게 거부되었다. 그러나 1981년에 러블록은 ‘데이지 세계’를 만들어 내어 이것을 지지했다. 데이지 세계란 검고 흰 데이지가 있는 세계에 대한 컴퓨터 모의실험으로, 이 꽃들은 햇빛을 흡수하거나 반사한다. 데이지는 지표의 온도가 변함에 따라 흰 꽃과 검은 꽃의 비율을 조절하여 지구의 온도 평형을 유지한다. 나중에 생물 다양성이 매우 큰 복잡한 모형에서는 이 체계의 안정성이 더 향상되었다.

현재 러블록의 가이아 가설은 기후, 생태계, 식량 생산, 건강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인간의 산업이 만들어내는 지구 대기 변화와 특히 관련이 많다. 온실 기체가 없으면 지구 표면의 온도는 영하 19도로 내려가겠지만, 온실 기체가 조절되지 않아서 현재보다 많아지면 지구는 화성과 비슷하게 될 것이다. 가이아의 온실 기체를 안정하게 유지하는 것은 21세기의 거대한 과학적, 정치적 도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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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존 구멍(1974)

마리오 몰리나(1943~)

프랭크 셔우드 롤런드(1927~)


대기 중에는 오존이 워낙 적어서 겨우 3밀리미터 두께의 층을 형성한다. 그러나 오존(산소 원자 3개로 이루어진 분자)은 우리의 환경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존은 태양에서 오는 자외선을 땅에 닿기 전에 흡수하는데, 자외선이 흡수되지 않는다면 생물의 섬세한 분자들이 파괴될 것이다. 오존층이 없다면 육지에는 생명이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974년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 분교의 마리오 몰리나와 셔우드 롤런드는 에어컨, 냉장고, 스프레이 통 등에 널리 쓰이는 염화불화탄소(CFC)가, 대기 주에서 자연적으로 오존이 생성되어 오존층에 보충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오존층을 파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들의 선언은 많은 논란을 가져왔으나 실질적인 조치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1985년에 영국 남극 탐사 협회의 소속의 과학자 조지프 파먼이 남극 하늘에서 거대한 오존층의 구멍을 발견했고, 그 원인이 인간이 만들어내는 CFC 때문이라고 했다. 이 논쟁은 남반구에서 특히 거세게 일어났다. 오존 구멍이 생기면 해싳을 너무 많이 쬐게 되어 피부암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몰리나와 롤런드를 비롯한 많은 연구자들은 정부에 CFC 사용을 금지하라고 촉구하면서, CFC 대신에 사용할 수 있고 손상이 적은 다른 화학 물질을 쉽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노력은 20년이 지나서야 결실을 맺었다. 전대미문의 국제적인 연대로, 국제 연합(UN)은 CFC를 비롯한 몇 가지 유해 물질의 사용 금지를 협의했다. 그 합의는 몬트리올 협약이라는 이름으로 1996년부터 발효되었다. 그러나 CFC는 공기 중에 오래 머무르기 때문에 오존 구멍은 여러 해 동안 메워지지 않을 것이며, 어쩌면 한 세기가 지나도 회복되지 않을지 모른다. 1995년에 롤런드와 몰리나는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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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종

재레드 다이아몬드


우리는 왜 이렇게 유별나게 진화했을까? 이 질문은 포유류 중에서 가장 가까운 친척인 대형 영장류(긴팔원숭이나 소형 영장류와 구별되는)와 우리를 비교할 때 더 민감해진다. 인류와 가장 가까운 것은 아프리카의 침팬지와 보노보인데, 그들과 우리는 유전 물질(DNA)의 차이가 1.6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만큼 가까운 것에는 고릴라(우리와 유전적 차이가 2.3퍼센트이다)와 동아시아의 오랑우탄(3.6퍼센트)이 있다. 우리의 조상은 ‘겨우’ 700만 년 전에 침팬지와 보노보의 조상들과 갈라졌고, 900만 년 전에 고릴라의 조상과 갈라졌으며, 1,400만 년 전에 오랑우탄의 조상과 갈라졌다.

사람의 수명과 비교하면 이것이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진화적인 시간 규모로 보면 이 정도는 눈깜짝할 시간에 불과하다. 생명은 30억 년 이상 지구상에 존재했고, 단단한 껍질을 가진 복잡하고 큰 동물은 적어도 5억 년 전부터 번성했다. 이렇게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우리의 친척인 대형 영장류의 조상이 다르게 진화했기 때문에, 둘 사이의 중요한 차이는 겨우 몇 가지에 불과하다. 물론 이 몇 가지 중요한 차이(특히 직립과 큰 두뇌)가 우리의 행동 차이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서는 자세 및 뇌 크기와 함께, 인간과 대형 영장류의 조상이 크게 달라지게 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측면은 성(性)이다. 오랑우탄은 대개 독신으로 지내다가 짝짓기를 할 때만 암수가 합치고, 수컷은 새끼를 돌보지 않는다. 고릴라는 수컷이 암컷 몇 마리를 거느리고 몇 년 간격으로(암컷이 새끼의 젖을 떼고 생리를 다시 시작해서 임신할 대까지) 짝짓기를 한다. 침팬지와 보노보는 무리를 지어 살면서 특별히 지속되는 암수 관계가 없을뿐더러, 큰 뇌는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분명히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리는 말을 하고, 책을 읽고, 텔레비전을 보고, 먹을거리를 사거나 기르고, 모든 대륙을 점유하고, 우리 자신과 다른 종을 울타리 안에 보존하면서 다른 대부분의 동물과 식물을 없앤다. 대형 영장류는 말을 할 줄 모르고, 밀림의 과일을 따 먹고, 구세계의 열대 지방에서만 살고, 다른 동물을 우리에 가두거나 다른 종의 존재를 위협하지 않는다. 인간성의 이러한 특징을 형성하는 데 우리의 이상한 서이 어떤 역할을 했을까?

성적으로 유별나다는 점은 인간과 대형 영장류 사이에 나타나는 다른 차이점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직립과 큰 뇌 외에(어쩌면 궁극적으로 이런 성질의 산물이겠지만) 털이 적다는 것, 도구의 사용, 언어의 발달, 기술과 문자 등이 이런 차이에 든다. 이런 차이들 중 일부가 우리의 유별난 성적 차이를 진화시키는 데 기여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연관은 분명하지 않다. 예를 들어 털이 없는 것이 성교와 폐경이 불, 언어, 기술, 문자의 사용에 있어서 직립과 큰 뇌보다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인간의 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진화의 문제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다윈은 그의 위대한 저서 『종의 기원』에서 생물이 진화한다는 증거를 대개 해부학에서 가져왔다. 그는 대부분의 동물과 식물의 구조가 진화한다고 추론했다. 다시 말해 생물은 세대가 거듭되면서 변화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진화의 주된 힘은 자연 선택이라고 추론했다. 자연 선택이라는 말로 다윈이 뜻한 것은, 동물과 식물이 해부학적으로 다양하게 적응하고, 특정 형태로 적응한 개체가 다른 개체보다 더 많은 생존과 번식의 기회를 가지게 되어, 세대가 내려감에 따라 그러한 적응 형태를 물려받은 개체가 집단 안에서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나중에 생물학자들은 해부학에 관한 다윈의 추론을 생리학과 생화학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동물이나 식물의 생리학적, 생화학적 특성도 환경 조건에 반응하여 특정한 생활 방식에 적응하고 진화한다.

진화생물학자들은 동물의 사회 체계도 진화하고 적응한다는 것을 보였다. 서로 매우 가까운 동물들 중에서도, 어떤 종은 혼자 살고 어떤 종은 작은 집단을 이루며, 어떤 종은 큰 집단을 이루고 산다. 그러나 사회적 행동은 생존과 번식의 결과이다. 그 종의 식량 공급원이 모여 있는지 흩어져 있는지, 그리고 포식자의 공격 위협이 있는지에 다라, 혼자 살거나 떼를 지어 사는 것이 생존과 번식에 다르게 작용한다. 성에 대해서도 비슷한 조건이 적용된다. 종의 식량 공급원과 포식자에 대한 노출, 기타 생물학적 특성에 따라 어떤 특성이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거나 불리해질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성에 대한 문제는 재정의할 수 있다. 마지막 700만 년 동안에, 우리는 가장 가까운 친척인 침팬지에 비해 성적 신체 구조는 조금, 성적 생리는 많이, 성적 행동은 더 많이 달라졌다. 이 차이는 인간과 침팬지가 겪은 환경과 생활 방식의 차이를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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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랙털(1975)

베노이트 만델브로트(1924~)


1975년에 베노이트 만델브로트는 그의 기념비적인 저작 『자연의 프랙털 기하학』을 프랑스 어로 출판했다. 이 책은 그가 20년 동안 연구한 방대한 수학적 관심을 정합적인 틀로 정리한 것이다. 그는 ‘프랙털’이라는 말을 라틴 어 프랙투스(fractus), 즉 ‘부서진’이라는 말에서 따왔는데, 이것은 그가 컴퓨터로 만들어낸 기하학적 풍경의 조각나고 불규칙한 성질을 강조하는 말이다.

프랙털의 핵심적인 특성은 규모가 달라져도 자기 유사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 부분을 확대하면 전체의 모습과 흡사하다. 지도에서 영국의 해안선을 보면 매우 구불구불하다. 이것을 계속 확대해 들어가면 우리는 해안선을 점점 더 자세히 보게 되지만, 각각의 비율에서 구불구불한 정도는 똑같이 유지되며 해안선의 형태도 똑같아 보인다. 프랙털에서 자기 유사성은 수학적 규칙들 또는 ‘알고리듬’에 의해 생성된다. 우리는 이것을 그래프를 그리는 데 쓰지 않고 수열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데, 알고리듬에 들어간 수열은 다음 수열을 발생시킨다. 1910년대에 프랑스의 수학자 가스통 쥘리아와 피에르 파투는 이렇게 해서, 완전히 무질서해 보이지만 무한히 커지지는 않는 수열을 얻었다. 만델브로트가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전가지는 이것이 마구잡이가 아니라 세밀하고 복잡한 형태를 이룬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프랙털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이것이 분수 차원을 가진다는 것이다. 영국의 해안선 길이는 얼마나 정확히 재는가에 따라 달라지며, 이론적으로 계속해서 확대해 나갈 수 있다면 전체 길이는 계속 길어져서 무한대로 갈 것이고, 그러면서도 육지의 넓이는 그대로일 것이다. 구불구불한 정도는 해안선의 ‘프랙털 차원’을 정의하며, 해안선의 차원은 1보다 크고 2보다 작은 어떤 값이다. 이 새로운 기하학은 주위의 도처에 있다. 프랙털과 자기 유사성은 식물의 구조, 구름의 형성, 주가의 등락, 은하 집단의 분포에 나타나며, 물론 해안선에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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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클론 항체(1975)

세사르 밀슈타인(1927~)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몸에 들어오면, 항체 분자가 침입자의 표면에 있는 항원이라는 특정한 분자에 달라붙어서 파괴할 수 있도록 표시한다. 연구자들은 오래전부터 항체를 여러 가지로 응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특정한 항원에 대해 여러 가지 B 림프구가 복잡한 항체의 혼합물을 만들기 때문에, 항체를 순수한 형태로 얻을 수 없었다.

1975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영국 의학 협회에서 게오르게스 쾰러와 함께 일하던 세사르 밀슈타인은 순수한 단클론 항체를 만드는 방법을 발견했다. 다발성 골수종에 걸리면 한 종류의 림프구가 통제를 받지 않고 분열해서 단클론 항체를 만든다. 밀슈타인은 림프구를 척수암 세포와 융합시켜 영구히 살게 하면 이 합성 세포를 배양해서 원하는 형태의 단클론 항체를 대량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단클론 항체는 몸속의 단백질을 뒤져서 해당되는 항원에 달라붙는다. 밀슈타인의 획기적인 발견 이후로, 단클론 항체를 사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개발되었다. 예를 들어 HIV(인간 면역 결핍 바이러스)에 표식을 다는 항체를 이용하여 에이즈(AIDS) 감염 여부를 검사할 수 있다. 암의 항원에 반응하는 단클론 항체는 이미 유방암에 응용되고 있으며, 건강한 조직을 손상시키지 않고 종양에만 항암제를 투여하는 ‘유도 미사일’ 같은 역할을 한다. 비슷한 기술로 종양의 분포를 알아낼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항체가 염료 또는 방사성 ‘표지’와 연결되어서, 항원과 결합하여 종양의 윤곽을 자세히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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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색지도 정리(1976)

케니스 어펠(1932~)

볼프강 하켄(1928~)


1852년에 새로 설립된 런던 유니버시티 대학의 첫 번째 수학 교수로 취임한 아우구스투스 드 모그간은 한 학생에게 어떤 추측을 증명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겉보기엔 그리 대단치 않아 보인 이 추측은, 지도를 그릴 때 인접한 두 나라를 항상 다른 색으로 표시하는 데에는 네 가지 색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드 모르간은 이 문제에 흥미를 느꼈고, 이거시은 당시의 저명한 수학 학술지의 주목받는 주제가 되었다.

지도 작성이 네 가지 색으로 충분한지 알기 위해서는, 가능한 수많은 지도 형태를 분류하는 기준이 필요했다. 1879년에 앨프레드 브레이 켐프라는 런던의 변호사 겸 수학자는 《네이처》에 한 가지 증명을 발표했고, 왕립협회는 이것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그러나 10년쯤 지나서 그의 방법에 허점이 발견되었고, 이 문제는 20세기로 넘어와서 위상수학의 고전적인 주제가 되었다. 위상수학은 공간과 그 영역의 구성을 연구하며, 영역의 형태가 크기보다는 관계를 중시한다. 따라서 관심은 지도에 그려진 영역의 모양에서 구성(한 영역이 다른 영역과 어떻게 경계선을 공유하는가)으로 넘어갔다.

네 가지 색이면 충분하다는 추측은 결국 컴퓨터의 도움으로 4색 정리가 되었다. 1976년에 케니스 어펠과 볼프강 하켄은 1,200시간 동안 컴퓨터를 돌리고 손으로 한 계산을 700쪽이나 덧붙여서 최초로 아무도 읽을 수 없는 수학적 증명을 내놓았다. 분석된 구성의 수가 워낙 많아서 수학자들은 이 증명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했지만, 결국 계산 결과보다는 사용된 알고리듬을 검토해서 이 증명을 인정했다. 그 후로 알고리듬 자체는 더 개선되었지만, 수학에서 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식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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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지 생물(1977)

티에르트 반 안델(1923~)


잠수함 앨빈 호를 타고 태평양 갈라파고스 섬 동쪽에서 해저로 2,500미터를 잠수하여 해양 중앙 해저 해저 산맥을 탐사한 티에르트 반 안델은 해저 열수 분출공을 최초로 본 사람이다. 온천에 대한 연구로 100만 달러의 연구비를 받은 그는 이러한 분출공을 찾았다고 해서 놀라지는 않았지만, 거기에 동물이 산다는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황 화합물을 산화시키면서 에너지를 얻어(광합성이 아니라 ‘화학 합성’) 살아가는 생물의 공동체를 발견한 것은 달에 처음 간 사람이 발견한 그 어떤 것보다 과학적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네덜란드 출신의 해양학자로 미국에서 일한 반 안델은 자신이 과학자로서 생애 최고의 순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행운의 사나이라고 자부한다. 그때에는 바로 1977년 2월 17일 오전 11시 15분이다.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닐 암스트롱으로, 그는 1969SUS 6월 20일 일요일 밤 9시 28분에 달에 첫 발을 디뎠다. 반 안델은 해저의 수온이 조금씩 증가하는 것(0.01도씩)을 앨빈 호로 원격 감지하면서 열수공을 찾아 들어갔다.

중앙 해저 산맥에서 차가운 물이, 새로 생긴 뜨거운 해저의 바위 속으로 뚫고 들어갔다가 뜨겁게 가열되어 온천으로 솟아나온다. 이 물은 주위의 바위에서 화학 물질을 휩쓸고 나와서 여러 가지 화학 물질을 머금으며, 온도가 350도에 이르기도 한다. 이것이 바닷물과 섞이면서 망간과 철이 석출된다. 황을 먹는 박테리아(1밀리미터에 100만 마리가 넘는다)에 의한 호학 합성은, 지구를 지배하는 광합성에 의한 생태계와 완전히 다른 독특한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거대한 관 모양의 벌레(리프티아(Riftia), 키가 2미터이다)와 어마어마한 크기의 조개(칼립토제니아(Calyptogenia)와 바티모디올루스(Bathymodiolus)는 길이가 150미터가 넘는다)는 내부 공생하는 화학 합성 박테리아의 숙주가 되고, 게와 물고기의 먹이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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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키 암호(1977)

로널드 리베스트(1947~)

아디 샤미르(1952~)

레너드 애들먼(1945~)


암호로 교신할 때에는 암호화 키와 해독 키를 비밀로 해야 한다. 문제는 송신자가 암호화된 메시지뿐만 아니라 해독 키까지 다른 메시지로 또는 사람을 통해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1942년에 영국은 노회한 U보트에서 암호책을 발견한 뒤에 독일 해군의 ‘비밀’ 전문을 모두 해독할 수 있었다. 보안을 유지하는 한 가지 가능한 방법은, 송신자와 수신자 모두가 암호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1976년에 스탠퍼드 대학교의 화이트필드 디피, 마틴 헬먼, 랠프 머클은 두 키를 모두 비밀로 하면서도 암호화된 메시지를 배포하는 수학적 방법을 개발했다(유일한 단점은 불편하다는 것이다. 송신자가 암호화하고, 수신자가 암호화하고, 송신자가 해독하고 마지막으로 수신자가 해독한다.) 그들의 두 번째 발견은 더 놀랍다. 이 반직관적인 아이디어느 ssnrn나 자물쇠를 잠글 수 있지만 열쇠를 가진 사람만이 자물쇠를 열 수 있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강제로 열 수 없는 수학적 자물쇠가 필요하다.

1977년에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의 로널드 리베스트, 아디 샤미르, 레너드 애들먼으로 구성된 또 다른 3인조가 매우 큰 소수를 이러한 자물쇠로 쓸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 컴퓨터로 두 소수를 곱하는 것은 매우 쉽지만, 곱해진 수에서 원래의 두 소수를 알아내는 것은 훨씬 어렵다. 그 해에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이 129자리 공개키 암호에서 원래의 두 소수를 찾는 대회를 열었는데, 이것을 풀었다고 나서는 사람이 나오는 데 17년이 걸렸다. 오늘날 RSA(세 사람 이름의 약자) 공개키 암호는 엄청나게 큰 수를 쓰기 때문에 이것을 풀려면 지구상의 모든 컴퓨터를 써서 우주의 나이에 해당하는 세월 동안 계산해도 풀 수 없다.

그러면 공개 암호키의 숨겨진 역사는? 제임스 엘리스가 GCHQ(영국의 통신 정보 기관)에서 일하던 중 1969년에 공개키 암호 개념을 발견했고, 1965년에 제임스 엘리스, 클리포드 콕스, 맬컴 윌리엄슨이 그 근본적인 원리를 완전히 알아냈다. 불행하게도 그때 정부는 이것을 기밀에서 해제하지 않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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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의 멸종(1980)

루이스 월터 앨버레즈(1911~1988)

월터 앨버레즈(1940~)


1970년대 후반에 미국의 과학자 월터 앨버레즈는 그의 아버지인 루이스 앨버레즈, 프랭크 아사로, 헬렌 마이클과 함께 이탈리아의 구비오에서 희귀한 원소인 이리듐이 많이 든 얇은 점토층을 발견했다. 이 층은 백악기와 제3기의 경계(K-T 경계)에 있었는데, 이 시기는 6000만 년 전에 공룡이 대량으로 절멸한 때이다. 루이스는 이리듐이 외계에서 왔다고 생각했다. 이것에서 이 연구팀은 운석 또는 혜성이 지구와 충돌해서 이리듐이 많은 지층을 만들고 공룡을 멸종시켰을 거라는 추측을 1980년에 발표했는데, 이것은 국제적인 뉴스가 되었다.

이 주장의 결정적인 약점은 긔 시기에 생긴, 그 정도의 파국을 일으킬 만한 크기의 충돌공이 지구상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K-T 경계에는 공룡뿐만 아니라 암모나이트 같은 해양 생물을 비롯하여 당시에 살았던 생물 종의 40퍼센트가 멸종했다. 10년이 지나서 마침내 카리브 지역에서 여기에 맞는 충돌공이 확인되었고, 정교한 지진 측정에 의해 조사되었다.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 있는 이 충돌공 위에는 1킬로미터에 이르는 새로운 퇴적층이 덮여 있었다.

충돌한 물체는 지름이 10킬로미터쯤이고 초속 30킬로미터로 충돌해서 지름 100킬로미터에 깊이 15킬로미터인 충돌공을 만들었다. 이 충격으로 둘레가 8킬로미터 높이로 솟았고, 수소 폭탄 1억 개의 위력 때문에 바위 5만 세제곱킬로미터가 하늘로 날아올라 먼지, 기체, 녹은 바위 조각, 작은 다이아몬드가 되었으며, 하늘이 어두워졌고, 전세계적으로 산불이 일어났다. 솟아오른 가장자리가 무너지면서 엄청난 지진이 일어났고, 거대한 조수력 파동이 진앙에서 15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거대한 충돌공의 경계를 형성했다. 그리고 8억 톤이나 되는 황이 대기로 뿜어져 나와 산성비가 내려 식물들이 목두 죽어서, 전세계의 먹이 사슬이 뿌리까지 파괴되었다. 지구의 역사에는 이 거대한 충돌에 의해 단절이 생겼고, 이런 일은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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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헬런스 화산의 폭발(1980)

미국 지질학 연구소


1980년 3월에 미국 지질학회의 연구원들은 워싱턴 주 세인트 헬런스 화산이 폭발할 것을 예고하는 지진을 탐지했다. 작은 화산재 폭발로 산 정상의 눈이 벗겨졌다. 4월에는 북쪽 사면에서 폭이 2킬로미터에 가까운 곳이 솟구치기 시작해서, 계속 솟아올랐다(하루에 1미터씩). 5월 초에는 이 융기가 땅에서 150미터나 솟았고, 솟은 부분은 분명히 불안정했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8시 32분, 산의 북쪽 사면이 붕괴하기 시작해서 거대한 산사태로 변했다. 직접적인 원인은 강도 5.1의 지진이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화산 아래에서 뜨거운 마그마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몇 초 뒤에, 사태가 난 곳에서 뜨거운 화산재가 대량으로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뜨거운 화산재가 초음속으로 날면서 공중으로 수천 미터를 솟아서 600킬로미터에 심어진 다 자란 더글라스 전나무 수백만 그루를 평평하게 날려버렸다. 바위, 얼음 조각, 흙먼지 등이 산사태를 이루며 초속 75미터로 쏟아져 내렸고, 100미터 깊이의 회색 진흙으로 뒤덮인 작은 산이 생겼다.

이 사건은 호산 폭발에서 인명 피해의 주요 원인(바위에 맞은 부상, 화상, 뜨거운 기체를 들이마셔서 생기는 폐의 손상)에 대한 최초의 현대적인 자료를 제공했다. 당시에 구조되어 나중에 사망한 사람들은 거의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 이것은 1902년에 발생한 프랑스 마르티니크의 펄레이 화산 폭발에서 29,000명 중 단 두 사람만이 살아남은 이유를 말해주었다.

연구자들은 세인트 헬런스 화산에 생긴 작은 고원을 자세히 분석해서 그와 비슷한 화산 지형이 만들어지는 원인을 알아냈다. 이 폭발에서 실시간 지구물리학적 측정이 강조되었다.(특히 지진 활동과 땅의 변형에서). 그래서 직접적인 피해가 예상된 지역의 주민들을 대피시켜서 수많은 인명을 구했다(전부 57명이 죽었다). 그러나 주민을 대피시켜야 한다는 과학자들의 예측은 1985년에 콜롬비아의 네바도 델 루이스에서 25,000명이 죽은 재앙이 일어난 뒤에야 재난 당국에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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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의 불가사의(1982)

알랭 아스페(1947~)


실재란 무엇인가? 상식에 따르면, 물체는 우리가 지켜볼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항상 거기에 있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상당히 편치 않은 견해를 취한다. 세계는 불확정한 가능서으로 되어 있어서, 측정을 할 때에만 그러한 가능성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보리스 포돌스키, 네이선 로젠은 양자적 세계상이 터무니 없다고 생각해서 1935년에 이것을 증명할 사고 실험을 고안했다. 어떤 반응에서 두 입자가 튀어나오면, 이 두 입자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한 입자를 측정하면 다른 입자의 성질까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측정하기 전의 입자에는 성질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한 입자에 대해서 측정을 하면 나머지 한 입자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건, 순간적으로 그 입자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유령 같은 원격 작용’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각 입자는 독립적이고 실제적인 성질을 가져야 하지 않는가?

1965년에 영국의 물리학자 존 스튜어트 벨은 입자가 항상 실제적인 성질을 가진다는 여느 이론에서보다 양자론에서 상관 관계가 더 크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이것을 실험으로 측정하면 양자론과 실재론 중 어느 쪽이 바른 이론인지 알아볼 수 있다. 이것을 검증하는 정교한 실험이 마침내 1982년에 오르세이 파리 대학교에서 알랭 아스페와 그 동료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들은 칼슘 원자에서 방출되는 광자 쌍의 편광을 관찰했는데, 관측된 상관 관계는 실재론을 허용하기에 너무 높아서 양자론을 지지했다. 실재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철학자들이 다리를 뻗을 수 있는 많은 공간을 남겨두어, 양자역학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양자 불확정성이 측정에 의해 실재하는 값으로 바뀌는 일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가? 측정에서 가능한 모든 결과가 여러 개의 평행 우주에서 실현되는가? 세계는 ‘비국소적’ 연결로 묶여 있는가? 아니면 양자역학은 실재 자체가 아니라 단지 측정과 실험에 대해서만 말해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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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다양성(1982)

테리 어원(1940~)


종은 지구의 생물 다양성의 표준 단위이다. 인간은 생물 종의 한 예이고, 고릴라, 참나무, 종달새도 마찬가지이다. 종이란 서로 교배할 수 있고 다른 집단과는 교배가 불가능한 개체들의 집합이다. 지구에 있는 전체 종의 수는 생태계가 얼마나 다양한지 말해주는 척도이다. 얼마나 많은 종이 있는가?

이제까지 발견된 종을 근거로 하면 지구상에 대략 150만 종이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종이 매우 많기 때문에, 이것은 전체 생물 다양성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다. 1982년에 미국 스미소니언 연구소의 테리 어원은 매우 그럴듯한 방법으로, 발견되지 않은 종에 대한 추정값을 얻었다. 동물 중에서 종 수가 가장 많은 집단은 딱정벌레인데, 어윈은 알려지지 않은 딱정벌레의 대부분이 열대 우림의 30미터 이상 되는 나무 위에서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서식한다고 추론했다. 그는 특별한 방법(‘곤충 폭탄’으로 알려져 있다)으로 그런 나무 하나에 있는 모든 곤충을 털어서 그중 딱정벌레에 속하는 종을 모두 셌는데, 한 나무에만 새로운 종이 160개나 있었다. 이 새로운 종은 그 나무에만 있는 것이고, 열대에는 5만 종의 나무가 있다고 추정되므로, 그는 이것을 곱해서 나무 위에 사는 딱정벌레의 종이 800만 개라고 추정했다. 이 값을 좀 더 확장하면 지구 전체 3000만 종의 절지동물이 있고, 모든 생물을 합치면 5000만 종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윈의 추정은 나무 한 그루에 대한 집중적인 조사에 바탕을 둔 것이므로, 물론 불확실성이 크다. 전문가드들은 지구상에 1000만~1억 종이 있다고 추정한다. 어쨌든 어윈의 연구는, 존재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종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만큼 우리가 지구의 생물 다양성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으며, 더 나아가 지구상의 모든 종의 수가 얼마나 될지에 대해 합리적인 값까지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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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 바이러스(1983)

로버트 갤로(1937~)

뤽 몽테뉴(1932~)


1982년에 이상하고 새로운 질병이 생의학 연구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젊은 동성애 남성들이 캘리포니아와 뉴욕에서 희귀한 형태의 폐렴에 걸렸다. 금방 비슷한 질병이 계속 나타나 미국에서 750명, 유럽에서 100명 이상, 아프리카에서도 수많은 환자가 발생했다. 모든 환자들이 T4 림프구(면역 체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세포)가 현저하게 줄어드는 현상을 보였고, 이것 때문에 정상인에게는 무해한 감염이나 카포시 육종 같은 희귀한 암이 환자들을 괴롭혔다. 미국 질병 통제 센터에서는 이 병의 이름을 에이즈(AIDS, 후천성 면역 결핍증)라고 했다.

그러나 AIDS의 원인은 무엇인가? 해답은 두 연구자(메릴랜드 주 베세즈더의 미국 국립 보건 연구소의 로버트 갤로, 파리 파스퇴르 연구소의 뤽 몽테뉴)에게서 나왔고, 그들은 1983년에 HIV(인간 면역 결핍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갤로가 발견한 바이러스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실제로 프랑스 쪽의 연구에 영향을 받았는지 아니면 독자적인 발견인지), 공식적으로는 두 사람을 모두 발견자로 인정하고 있다. 이 발견을 계기로 HIV 감염 검사가 도입되었고, 때 맞춰 AIDS를 급성 질병에서 만성 질병으로 바꾸는 치료약도 개발되어서, HIV의 발견은 이 병의 치료에 중요한 돌파구가 되었다.

HIV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1950년대 아프리카에서 원래의 바이러스가 원숭이로부터 인간으로 옮아오면서 생겼다고 생각한다. HIV는 인간이 발견한 최초의 역전사 바이러스이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유전 정보가 반대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HIV 바이러스의 유전 물질은 DNA(디옥시리보핵산)가 아니라 RNA(리보핵산)이다. 이것은 여러 가지 백혈구 세포를 감염시키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T림프구이다. 이것이 AIDS의 비밀이다. HIV는 면역을 담당하는 중요한 요소들을 공격해서 면역 체계를 약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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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끈(1984)

마이클 보리스 그린(1946~)

존 슈워츠(1941~)


모든 존재는 현을 뜯을 때 나는 음정일 뿐이다. 이것은 신비주의도 아니고 음악학도 아니다. 이것은 물질 세계에 대한 이론이다. 끈 이론에 따르면, 아원자 입자는 입자가 아니라 무한히 작은 1차원의 고리이다. 이 ‘초끈’은 마치 바이올린의 현처럼 진동할 수 있다. 실제 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끈은 양성자 크기의 1억분의 1 또 1억분의 1만큼 작고, 끈이 놓여 있는 공간은 우리가 사는 3차원에다 여섯 차원이 더 있는데, 이 여분의 차원들은 모두 일반적인 세 차원의 수직이면서 우리가 볼 수 없을 정도로 작게 말려 있다. 진동의 음정이 끈의 성질을 결정한다. 어떤 음정은 전자이고, 또 어떤 음정은 쿼크이며, 또 다른 음정은 중성미자 등등이 된다.

1984년에 물리학자 마이클 그린과 존 슈워츠는 초끈 이론이 자연을 통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전자기력과 핵력은 한 가지 ‘초힘’의 다른 면일 뿐이고, 중력도 끈의 진동으로 설명된다. 모든 힘과 입자는 한 가지 기본적 실체의 현현일 뿐이고, 우주를 지배하는 모든 상수들도 이 이론에서 나온다. 끈 이론은 전자가 왜 그렇게 가벼운지, 쿼크의 종류가 왜 그만큼인지, 중성미자가 왜 전자기력에 대해 아무 반응을 하지 않는지 등을 모두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장애가 있다. 끈 이론에서는 계산이 너무 어려워서 실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예측이 나오지 않았고, 따라서 이 이론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또 어떤 물리학자들은 진정한 만물 이론이라면 시간과 공간까지 설명해야 한다면서, 끈 이론이 시간과 공간을 가정하고 있는 것에 반대한다. 끈 이론에는 여러 가지 변종이 있는데, 에드 위턴을 비롯한 몇몇 이론가들은 이것들이 모두 한 가지 이론의 여러 측면들일 뿐임을 보였다. M 이론이라는 그 이론은 아직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최종 이론으로서, 이제까지의 이론들보다 훨씬 더 이상한 이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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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DNA(1984)

스반트 퐈보(1955~)


고대의 DNA를 처음으로 채취한 것은 1984년에 쾌거(quagga)의 말린 피부에서였다. 이 동물은 남아프리카 얼룩말의 일종으로 100년 전에 사냥 때문에 멸종했다. 마이클 크라이턴의 『쥐라기 공원』에서처럼 공룡의 뼈나 호박 속의 곤충에서 화석 DNA를 복원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100만 년이나 된 DNA를 추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DNA를 복제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했고, 이 실험에서 나타난 DNA와 비슷한 것들은 모두 오염 물질이었다.

복잡한 세포의 분자는 죽은 직후에 급속으로 냉동하거나 수분을 제거하지 않으면 금방 파괴되는데, 냉동이나 수분 제거는 자연적으로 일어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추출 기술과 증식 기술을 정밀하게 이용하여 수만 년 된 DNA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있다. 뮌헨 대학교의 스반트 퐈보의 연구팀은 이 분야의 첨단을 달리고 있었다.

퐈보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분교의 고(故) 앨런 윌슨의 제자이며, 윌슨은 쾌거의 DNA를 추출해서 쾌거가 얼룩말의 아종쯤 된다는 것을 밝힌 사람이다. 1987년에 윌슨의 연구팀은 현대 인류의 기원을 설명하는 ‘아르피카의 이브’ 가설을 발표했다. 전세계에 퍼져 있는 현대 인류의 DNA는 모두 2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 살았던 한 집단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현재 퐈보의 연구팀은 고대의 DNA를 가지고 최근의 인류 진화를 자세히 밝히는 일을 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쪽 알프스의 외치라는 곳에서 발견된 5,200년 된 ‘냉동 인간’을 미토콘드리아 DNA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것과 놀랍도록 비슷할뿐더러, 상당한 유전적 안정성을 보였다. 그리고 3~4만 년 된 네안데르탈인 3명의 DNA 표본은 현대 유럽 사람들의 DNA보다 자기들끼리 더 비슷해서, 네안데르탈인은 현대인의 유전자 풀에 기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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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적 지문(1984)

알렉 제프리스(1950~)


우리의 몸은 DNA에 적힌 암호 또는 유전잗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필요한 유전자보다 훨씬 더 많은 DNA를 몸에 지니고 있다. 나머지 98~99퍼센트의 기능은 불확실하며, 이것을 ‘암호화되지 않은’ DNA 또는 ‘정코(junk)' DNA라고 부른다.

암호화되지 않은 영역의 DNA는 여러 가지 짧은 배열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DNA 암호는 A, T, C, G로 나타내는 네 가지 분자에 의해 기록되며, 반복되는 DNA에는 GCAGGAGG와 같은 8자 단위의 문자열이 수십 번 반복된다. 이렇게 반복되는 DNA 영역은 개인에 따라 크게 차이가 있어서, 여덟 글자 단위가 10번 반복되는 사람, 20번 반복되는 사람, 100번 반복되는 사람 등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반복되는 DNA에 돌연변이가 잘 일어나기 때문인데, 아마 정상적인 경우보다 1만 배 이상 자주 일어날 것이다. 진화적인 시간 동안 반복의 길이는 빠르게 변해 간다. 따라서 반복되는 DNA 영역은 사람마다 독특한 형태를 가지게 된다.

영국 레스터 대학의 알렉 제프리스는 1980년대에 반복되는 DNA 영역 중에서 변화가 매우 큰 부분을 발견했다. 그는 이것을 친자 확인이나 범인 색출, 사형수 중에서 무고한 사람을 찾아내는 일 등의 법의학적 문제의 해결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영국에서는 국립 DNA 데이터베이스가 현재 1주일에 500rjus씩 용의자를 확인해 주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이미 유전자 감식으로 사형에 직면한 사람 70명(8명 중 1명꼴)이 무죄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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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성 돌연변이(1988)

존 케언스(1922~)


1988년에 하버드 대학교의 분자생물학자 존 케언스는 박테리아가 환경적인 스트레스에 직면했을 때 어떤 돌연변이를 일으킬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실험을 했다. 이러한 ‘목적성 돌연변이’는 돌연변이가 무작위로 일어난다고 말하느 진화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획득 형질이 유전된다는 19세기 라마르크의 이론을 되돌아보게 한다.

케언스의 실험에서는 필수 아미노산인 트립토판이 없는 배양액으로 박테리아를 키운다. 박테리아는 항상 돌연변이를 일으키지만, 이 경우에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훨씬 높은 확률로 트립토판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도록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이 결과는, 마치 어떤 돌연변이가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지 박테리아가 미리 아는 것처럼 보인다. 논란이 많은 케언스의 연구 이후로, 연구자들은 목적성 돌연변이를 설명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탐색했다.

케언스가 내놓은 한 가지 제안은 연구자들이 자기들에게 도움이 되는 돌연변이를 더 많이 찾아서 세능ㄴ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자들이 속임수를 쓴다는 뜻은 아니다. 스트레스(박테리아에게 굶주림은 매우 큰 스트레스이다)를 받으면 박테리아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돌연변이를 일으킨 박테리아는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셀 수 없게 되고, 따라서 ‘도움이 되는’ 돌연변이를 일으킨 개체만 셈이 포함된다. ‘초(超) 돌연변이’에 대한 증거는 많이 있고, 과학자들은 돌연변이를 촉진하는 유전자까지 발견했다. 그러나 초돌연변이가 일반적인 현상인지 박테리아에만 있는 현상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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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유전자(1991)

로빈 러벨-배지(1953~)

피터 굿펠로(1951~)


남성과 여성의 염색체 차이는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대개 여성은 X 염색체 2개를 가지고(XX), 남성은 X와 T 염색체를 가진다(XY). 그러나 한 사람에게서 남성과 여성의 특성이 한꺼번에 낱아나는 경우도 있고, XT 여성과 XX 남성도 있다. 이런 사람에 대한 연구에서 성 결정에 참여하는 유전자가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결정되지 않았거나 ‘잘못된’ 성을 가지는 것은 이 유전자가 하나 또는 둘 다에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성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SRY(성 결정 영역) 유전자로, 이것은 고환의 형성을 조절한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의 데이비드 페이지는 최초로 Y 염색체의 유전자 지도를 만들어서 SRY 유전자를 규명하기 위한 발판을 만들었다. 그 다음에는 1990년대 초에 두 영국인 과학자(로빈 러벨-배지와 피터 굿펠로)가 인간과 생쥐의 유전자 지도에서 SRY 유전자의 위치를 알아냈다. SRY 유전자에 의해 부호화된 단백질은 세포 속의 DNA를 결합하여 그 성질을 바꿈으로써 배아에 극적인 결과를 일으킨다. 임신 후 12주쯤에 성기 부분에 음경과 고환으로 발전하면서 남성 호르몬이 뇌에 작용하기 시작하고, 몸도 남성의 모습을 띠기 시작한다. 다른 유전자들과 달리 SRY 유전자는 인간의 남성들끼리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고, 다른 종의 수컷끼리는 현격하게 다르다. 또 이것은 인간이 진화하는 20만 년 동안 별로 변하지 않는가에 따라 남성 또는 여성으로 만들어진다. 러벨-배지와 그의 동료들은 1991년에 암컷 생쥐의 배아에 SRY 유전자를 주입하여 이것을 입증했다. 이 암컷 생쥐는 성이 바뀌어서 고환이 생겼고, 수컷의 다른 성질도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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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 인간

콘라트 스핀들러(1939~)


1991년에 이탈리아 티롤 남부 외츠탈러 알프스에세 하이킹을 하던 두 독일인이 발견한 냉동 인간은 선사 시대의 평범한 생활을 보여주는 독특하고 귀중한 ‘타임 캡슐’이다. 이 냉동 인간은 전세계 연구팀들의 집중적인 조사를 받았는데, 초기 연구의 많은 부분을 인스브뤼크 대학교의 콘라트 스핀들러가 맡았다.

기원전 3300년쯤의 인류로 추정되는 이 냉동 인간은 이제까지 발견된 것들 중ㅇ에서 가장 온전한 인간의 시체이다. 옷과 장비가 함께 발견되었고, 냉동 상태였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후기 구석기 시대의 여러 가지 물건들을 볼 수 있었다. 가죽 옷, 염소 가죽, 곰과 사슴 가죽, 엮어 놓은 짚, 개암나무와 낙엽송으로 만든 틀에 가죽을 씌운 배낭, 주목으로 만든 활, 가막살 나무와 층층나무로 만든 화살, 자작나무 껍질을 엮어 만든 망태, 주목으로 자루를 만들어 끼운 구리 도끼가 있었다.

바싹 마른 채 온전하게 보존된 냉동 인간의 몸은 이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는 피부가 검고, 40대 중후반에 키는 1.6미터였다. 그의 DNA는 북유럽과의 연관성을 말해주지만, 같이 나온 식물 재료들로 보아 이탈리아 쪽 알프스 계곡에서 남하한 것으로 보인다. 앞니가 많이 닳은 것으로 보아, 거칠게 빻은 낟알을 먹었거나 이빨을 일상적인 도구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내장은 매우 온전한 상태였고, 다만 폐가 연기 때문에 검게 되었는데, 아마 모닥불 때문인 듯하고, 동맥경화가 일어나 있었다. 그의 마지막 식사는 고기(틀림없이 야생 염소였을 것이다), 밀, 풀, 자두였다.

발가락 하나가 작아서 오래전에 동상에 걸린 흔적이 있고, 늑골 여덟 개가 부러졌지만 죽을 당시에는 다 나았거나 낫는 중이었을 것이다. 척추 부위와 다리에 수직, 수평으로 짧게 새겨진 파란 문신은 치료의 흔적인 듯하고, 아마 관절염을 완화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어쩌면 당시에 행해지던 침술의 일종일 수도 있다. 손톱에는 한때 사지가 마비되었던 흔적이 나타난다. 이것이 그가 악천후에 산에서 쓰러져 얼어 죽은 원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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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마의 마지막 정리(1994)

페이드 드 페르마(1601~1665)

앤드루 와일스(1953~)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드 페르마가 만들어낸 수수께끼는 400년 동안이나 풀리지 않아서, 수학사에서 가장 오래된 미해결 문제였다. 페르마는 생전에 거의 아무것도 발표하지 않았고,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수학자 집단과 편지만 주고받았다. 사실 이 수수께끼도 그의 아들 사뮈엘이 찾아내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페르마가 죽은 지 5년이 지난 1670년에 사뮈엘은 아버지가 남긴 수학적 아이디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페르마는 우연히 떠오른 그 수수께끼에 대한 생각을 디오판투스의 『산술』이라는 책의 여백에 적어 놓았다. “나는 진정 놀랄 만한 증명을 알아냈지만 여백이 모자라 적지 않는다.”

페르마가 말한 정리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확장한 것이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만족하는 세 수, 즉 예를 들어 과 같은 관계를 가지는 세 수의 조합은 무한히 많다. 페르마는 이 관계가 세제곱이나 그 이상의 거듭제곱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단순하게 하하나 해보면 그가 옳은 것 같지만, 이것을 증명하는 일은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내로라는 수학자들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려고 대들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1993년에 컴퓨터가 400만 거듭제곱까지는 페르마의 정리가 옳다는 것을 보였다. 하지만 이것이 항상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한편 수학자들은 이 정리의 진위가 엉뚱하게도 공간의 성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1993년에 영국의 수학자 앤드루 와일스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아이작 뉴턴 연구소에서 연속 강의를 시작했고, 이 정리를 증명하면서 강의를 끝냈다. 불행하게도 한 해 동안의 확인 작업 끝에, 그의 견고한 증명에서 작은 결함이 발견되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로 옮아가서 자신의 증명을 새롭게 손질했고, 1995년에 《수학의 연보》에 「모듈러 타원 곡선과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발표했고, 이것으로 수수께끼가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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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제양 돌리(1996)

이언 윌머트(1944~)


1996년 7월 5일에 에든버러 근처의 로슬린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아주 특별한 양이 태어났다. ‘돌리’는 검은 얼굴의 여섯 살배기 암양의 젖샘에서 얻은 단 한 개의 세포에서 복제되었다. 1년 전에는 다른 복제양 두 마리(메건과 모러그)가 양의 배아 세포에서 복제되었다. 돌리가 특별한 것은 체세포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돌리는 부모에게서 반반씩 유전자를 받은 것이 아니라, 젖샘 세포를 제공한 암양의 유전적 쌍둥이인 것이다.

복제는 정확한 사본을 만드는 것을 뜻하며, 이것은 실제로 새로운 일은 아니다. 이언 월머트와 그의 연구팀은 여러 해 동안 DNA 분자, 박테리아, 식물에 이어 개구리까지 복제해 왔다. 돌리의 실험에서 놀라운 것은 공여된 세포핵의 유전자를 재프로그래밍했다는 것이다. 우리 몸의 세포는 유전적 정보의 정확한 사본을 하나씩 갖고 있지만, 활성화되는 유전자는 세포의 종류마다 다르다. 돌리를 만들었다는 것은 젖샘 세포의 유전자 패턴을 배아 상태로 되돌렸다는 것인데, 이것은 이전까지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졌다. 돌리는 이후로 원숭이, 양, 소, 염소, 생쥐, 돼지가 모두 복제되었다.

복제에 의한 번식은 세포 하나에서 온전한 동물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경솔하게 인간에게 적용하면 윤리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복제는 정자가 없어서 아버지가 될 수 없는 사람에게 정자 대신에 체세포로 아버지가 되게 해줄 수 있다. 또한 멸종 위기의 종을 보존하고 새로운 의약을 만들기 위해 유전공학적으로 여러 마리의 동물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한편, 치료를 위한 복제에서는 공여된 세포로부터 완전한 동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포의 조직만을 만든다. 이 방법을 이용하면, 백혈병 환자에게 척수를 제공할 수 있으며, 뇌졸중, 파킨슨 씨 병 등을 신경질환을 앓는 사람에게 치료용 뉴런을 제공할 수도 있다. 이제까지의 발전도 아직은 껍데기를 살짝 건드린 정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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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물(1998)

미국 항공 우주국(책임연구자 : 앨런 바이더)


물은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하다. 액체 상태의 따뜻한 물이 있다는 것은 생명 발생에 필수 조건으로 여겨진다. 다행히도 지구에는 물이 풍부하다. 지각 운동으로 산이 만들어지지 않고 침식만 계속되어 지구가 평평해진다면, 표면 전체가 2.8킬로미터 깊이의 물로 뒤덮일 것이다.

우주에서 명백히 물이 있는 곳은 두 종류이다. 수성, 금성, 지구, 달, 화성, 소행성 띠는 만들어질 때부터 상당한 양의 물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방사능에 의한 가열로 온도가 800도까지 올라갔다면, 바위가 ‘쪼개져서’ 물이 나왔을 것이다. 혜성은 질량의 반 이상이 얼음이다. 따라서 혜성이 충돌할 때도 행성의 표면에 물이 공급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금성과 화성은 과거에 표면에 젖어 있었다. 금성의 경우에, 고온과 자외선 때문에 물이 수산기(OH)와 수소(H)로 분해되었고, 이것들은 서서히 행성의 중력을 벗어나 탈출했다. 화성도 많은 양의 물을 잃었고, 또 상당한 양은 지표 아래의 영구 동토층에 들어 있을 것이다.

1998년에 미국의 우주선 루나 프로스펙터 호는 달에서 100킬로미터 높이의 궤도를 돌고 있었다. 달의 남극과 북극을 지날 때마다 우주선의 중성자 검출기에는 느린 중성자가 탐지되었다. 이것은 우주선(宇宙線)이 수소 원자에 부딪칠 때 생기는 것이며, l수소가 있을 때 가장 그럴듯한 곳은 물 분자라고 생각되었다. 달의 극지방 근처의 크레이터는 영원한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온도가 워낙 낮아 근처에서 물이 나온다면 금방 얼어붙을 것이다. 루나 프로스펙터 호는 달의 극지방에서 대략 1100만~3억 3000만 톤의 물을 발견했다. 만약에 달을 식민지화한다면 이 물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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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의 유전체 지도(2000)

인간 유전체 컨소시엄(HGSC) / 셀레라 지노믹스


1985년에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로버트 신셰이머는 인간 유전체의 서열을 모두 밝힌다면 인간이 달에 간 것과 맞먹는 생물학적 업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00년 6월 26일, 인간 유전체의 ‘작업 초안’이 예정보다 몇 년 빨리 완성되었다고 발표되었다. 이것은 생명 과학에서 시도된 가장 큰 프로젝트였고,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중국의 개인 기업과 공공 부문에 종사하는 수천 명의 과학자들이 참여했다.

모든 생물의 모든 세포는 DNA의 화학적 암호로 적힌 설명서의 사본(유전체)를 가지고 있다. DNA 암호에는 A, C, G, T의 네 가지 글자가 있다. 이 초안은 인간 유전체에 적힌 30억 글자 가운데 90퍼센트의 배열을 밝혀놓은 것이다.

유전체는 23쌍의 염색체에 나눠져 있으며, 염색체는 세포핵 속에 있는 구조물이고 현미경으로 관찰이 가능하다. 그래서 각 염색체 속의 DNA를 좀 더 다루기 쉬운 조각으로 자른 다음, 화학적 분석을 통해 배열을 읽어냈다. 그들은 강력한 컴퓨터로 겹치는 조각을 집어내고 이것을 잘라서 전체 유전체 배열을 구성했다. 기술이 워낙 빨리 발전해서 처음 10억 글자를 해독하는 데 4년이 걸렸지만 두 번째 10억 글자를 해독하는 데는 4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유전체 지도가 있으면 유전자를 찾는 일이 훨씬 쉬워진다. 유전자는 단백질을 만드는 지시가 담긴 DNA의 부분으로, 이것은 세포의 모든 것을 관장하 으뜸 분자이다.k 유전자의 개수는 3만 개 정도로 보이는데, 이것은 전체 유전체의 2퍼센트에 해당한다. 헌팅턴 씨 병, 낭포성 섬유증, 유전성 유방암 따위의 유전병을 일으키는 유전자 1,100개가 이미 확인되었다. 지금도 계속 많은 것이 발견되고 있으며, 암, 심장병, 당뇨병, 천식 따위의 일반적인 질병과 관계있는 유전자에 대한 연구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유전자의 배열 자체가 인간의 진화 역사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이다.

(이 프로젝트로 인해 생물학과 컴퓨터 공학이 상호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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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기고 나서(역자 후기)

- 과학의 여러 풍경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책이다. 『사이언스 북』이라는 다소 오만한 제목의 이 책은 이름값을 할 만큼 과학의 전체적인 모습을 충실하게 보여준다.

풍성한 그림과 사진드링 펼쳐 보이는 과학의 여러 풍경을 감상하기만 해도 좋고,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 쪽이나 넘겨서 읽어봐도 좋다. 처음부터 하나씩 찬찬히 봐도 좋고, 각 글의 마지막에 나와 있는 연결쪽들을 따라가며 RH리에 꼬리를 물며 읽어봐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개별적인 장면들을 어느 정도 음미하고 나서, 전체적인 관점에서 과학적 발견들 사이의 흐름을 찾아본다면 더 훌륭한 공부가 될 것이다. 「들어가는 말」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과학 전체를 담기에는 여기에 선택된 250개의 장면들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볼 수도 있으므로, 여기에 어떤 항목을 더 보태야 할지 스스로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은 공부이다.

아름다운 그림과 사진들을 감상하면서 책에 정을 들인 다음에는, 하나씩 내용을 자세히 읽어 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여기에 선정된 과학 장면들은 개별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상당히 포괄적인 단위들이므로, 본문 한쪽 한쪽이 매우 압축된 내용을 요약해서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물론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세부적인 것에 구애받지 말고 술술 읽어 나가야겠지만, 눈을 부릅뜨고 자세히 읽으려고 들면 사실과 설명들로 촘촘하게 포화된 글들을 도처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각각의 장면을 어느 정도 눈에 익히고 나면, 그것들이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살펴볼 차례이다. 이런 시도에서 독자들의 관점과 수준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좋은 책을 고르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지식 수준에 관계없이 누구나 읽을 수 있으면서 독자의 관점과 수준에 따라 저마다 다른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책을 나는 으뜸으로 여긴다. 물론 이런 기준을 제시할 때 내가 염두에 두는 책의 유형은 따로 있지만, 이 책처럼 독자들이 개입할 여지를 둔 열린 구조의 책도 앞에서 말한 좋은 책의 기준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책이 각 장면들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정교한 의도 하에 구성된 선집(選集)이기 때문이다. 이런 책에서 독자들은 읽는 관점에 따라 저자들의 미처 의도하지 못한 것까지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과학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이라는 면에서 옮긴이가 이 글을 읽을 독자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만, 이 책을 읽어내는 몇 가지 가능한 방법을 살펴보자.

수를 세고 별을 쳐다보기 시작한 문명 이전의 시대에서 출발하여 바빌론과 이집트를 지나고,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과학의 불은 아랍으로 건너간다. 그러면 대략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체계를 기점으로 유럽에서 본격적인 과학적 발견이 시작된다. 고대에는 천문학과 수학, 생물학과 의학이 주요 관심사였다면, 과학의 도약 시기에 와서는 물리학과 화학이 주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이 학문들이 모두 나란히 발전하면서 지구과학, 심리학, 고고학, 고인류학의 성과들로 나타난다. 시대별로 보면, 과학적 발견이 거의 전무하던 중세가 끝나면서 코페르니쿠스가 활약한 16세기 유럽에서 몇 가지 발견이 이루어졌다. 이어지는 17세기와 18세기에는 수의 발견이 15가지가 있었고, 19세기에는 50가지가 넘는 중요한 발견들이 나왔으며, 드디어 20세기에는 140가지가 넘는 폭발적인 개화가 나타났다. 이런 수치는 과학적 사건 선택에 들어간 필진의 기준과 편견을 반영하겠지만, 그 자체가 상당한 과학사적 함의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과학 발전의 전체 모습은 서서히 도움닫기를 시작해서 가속적으로 달리다가 20세기를 기점으로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전형적인 이륙 형태를 보인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서구적 잣대에서 나온 편견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다. 대부분의 항목들이 근대 이후의 서구에 몰려 있고, 중국과 아랍과 인도의 고대 과학을 거의 무시한 것은 이 책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균형을 갖춘 거대한 과학사는 씌어진 적이 없으므로, 이 책이 그런 일을 시도하지 않은 것을 탓하기보다는 그러한 불균형을 아프게 의식하면서 스스로 균형점을 찾아가는 시도를 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로마와 서구 중세의 중요한 과학적 발견이 거의 없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 책에는 중세 암흑기에 발견된 것은 하나도 없고, 로마에서는 의학에 관련된 항목만 두 가지가 나와 있다. 하지만 의학은 모든 문명에서 독립적으로 발달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두 항목도 나중에 서양 의학의 씨앗이 되었다는 것 말고는 특기할 만한 발견이라 할 수 없다. 이 항목들의 공헌자들이 로마 병사를 치료하던 군의관이나 검투사 훈련소의 의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쩌면 로마는 스파르타 이상으로 군국적인 나라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어쨌든 서구 과학의 이륙 과정에서 중요한 인물과 사건을 꼽으라면 코페르니쿠스, 뉴턴, 다윈의 진화론, 19세기 화학자들의 원자론,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의 탄생, DNA의 발견 등을 들 수 있겠다. 20세기 초반은 물리학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을 기점으로 활짝 꽃을 피운 물리학은 결국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원자 폭탄 투하로 과학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전세계인에게 그야말로 충격적으로 보여주었다. 전쟁이 과학 기술을 몰고 가는 중요한 동인이라는 것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 동의할 것이다. 이 책의 한 부분에는 빅터 바데가 2차 세계대전 중에 공습 경보로 실시된 등화관제 덕분에, 아주 캄캄한 밤하는ㄹ에서 케페이드 변광성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280쪽, 『우주에서 우리의 위치』 참조). 이 일은 전쟁이 역설적으로 과학에 기여한 경우여서 참 흥미롭다.

20세기 초반이 물리학의 시대라면, 20세기 후반은 생물학의 시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9세기에 화학자들이 발전시킨 원자론은 20세기에 들어서 물리학에서 확인되고, 한편으로 19세기에 생물학에서 진화론이 등장하고 생물의 기본 구성 단위가 세포라는 것이 밝혀지고, 또 멘델이 유전학의 기초를 확립하고 양자역학과 현대적인 측정 기술의 발달로 DNA의 구조가 밝혀짐으로써 분자생물학이 탄생하는 등 최소한 서너 가지의 거대한 흐름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20세기 후반엔 분자생물학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동 통신과 컴퓨터를 빼고는 오늘날의 삶을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페러데이와 맥스웰이 이룩한 전기와 자기의 통합에 이어 양자역학과 반도체로 이어지는 발전도 주목해 보아야겠다. 물론 이런 흐름 말고도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하고 풍부한 이야기들을 이 책에서 읽어낼 수 있다.

과학사 전체를 보여주는 야심찬 기획물을 내 손으로 옮기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뛰어난 저자들이 집필한 책을 혼자서 옮기는 것이 즐겁기도 하고 벅차기도 했다. 수많은 사실들과 고유명사들을 일일이 확인하는 일은 사이언스북스 편집부가 많이 도와주었다는 점을 밝힌다. 방대한 내용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용어와 고유 명사에 표준이 아예 없거나 여러 가지일 때도 있었는데, 이런 경우에는 옮긴이와 편집부가 외부 자문과 문헌을 통해 어느 정도 일정한 기준을 잡아 적합한 용어와 기술 방식을 선택하여 일관성 및 시의성을 최대한 배려했다. 아무쪼록 이 한 권의 책이 많은 독자들게 오래도록 곁에 두고 즐길 책이 되기를 바란다.

끝으로, 평생 동안 수많은 양서를 펴 내시고 과학 대중화를 위해 사이언스북스를 이끌어 오신 민음사 박맹호 대표님의 고희를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2002년 12월

김희봉.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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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 (지은이), 홍영남 (옮긴이) | 을유문화사,  431쪽
 

 

이기적 유전자


진화란 자기 복제자(유늘날의 유전자)가 오류를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생겨난 일이다.                                  - 45


DNA의 지령은 자연 선택에 의해 조립되어 온 것이므로 물론 ‘건축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 52


유전자는 인체의 제조를 간접적으로 제어하는데, 그 영향은 엄밀히 일방 통행이다. 이것은 획득 형질이 유전되지 않음을 뜻한다. 생애에 수많은 지식과 지혜를 얻었더라도, 유전적 수단으로는 그 중 한 가지도 자식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각각 새로운 세대는 무(無)에서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몸은 유전자를 불변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유전자가 이용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 53

유전자는 인체의 제조를 간접적으로 제어하는데, 그 영향은 엄밀히 일방 통행이다. 이것은 획득 형질이 유전되지 않음을 뜻한다. 생애에 수많은 지식과 지혜를 얻었더라도, 유전적 수단으로는 그 중 한 가지도 자식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각각 새로운 세대는 무(無)에서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몸은 유전자를 불변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유전자가 이용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 53


일반적으로 이런 종류의 유해한 과오(돌연변이)가 중요한 것은 때때로 이것이 함께 있어야만 작용하는 유전 물질 조각에 긴말한 ‘연관’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 64



이것과 관련된 가장 근접한 예의 하나는 ‘의태’라고 알려진 현상이다. 어떤 종류의 나비는 구역질 나는 맛이 있다. 그것들은 보통 선명하고 눈에 띄는 색깔을 하고 있어서 새들은 그 ‘경고’ 표지를 기억하여 그런 종류의 나비를 피한다. 바면에 맛이 나쁘지 않은 다른 종류의 나비는 잡혀 먹히게 된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나비들은 나쁜 맛의 나비를 흉내낸다. 즉 나쁜 맛의 나비를 닮은 색깔과 형태(맛은 닮지 않은)를 가지고 태어난다. 박물학자들도 종종 그것들에게 감쪽같이 속는 경우가 있으며 새들도 속는다. 정말 나쁜 맛의 나비를 한 번 맛본 새는 비슷하게 보이는 나비를 모두 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 중에는 의태종도 포함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의태의 유전자는 자연 선택상 유리하게 된다. 이것이 의태가 진화하는 이유이다.                                                                     - 65



유전 단위를 실제로 불가분의 독립 입자로서 다룰 수 있음을 제시한 것은 멘델GreGor Mendel의 위대한 업적이었다. …… 나는 불가분의 입자성이라는 이러한 이상에 극도로 가까워질 수 있는 단위로서 유전자를 정의하였다.……

유전자는 할아버지․할머니로부터 손자, 손녀에 이르기까지 다른 유전자와 섞이지 않고 그대로 중간 세대를 통과하여 여행한다. 유전자가 끊임없이 혼합된다면 우리가 현재 이해하고 있는 자연 선택은 불가능하다. 우연히도 다윈의 생애에 이러한 사실이 증명되었다. 당시에는 유전이 혼합 과정일 것이라고 가정했기 때문에 다윈을 곤혹스럽게 했다. 멘델의 발견은 이미 출판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이 다윈을 도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윈은 그것을 몰랐다. 사람들이 그것을 읽은 것은 다윈과 멘델이 죽고 난 후 몇 년이 지나서였다. 멘델은 아마도 자신이 발견한 사실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그것을 깨달았다면 그는 다윈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을까?                 - 67, 68



유전자는 생존 중에 그 대립 유전자와 직접 경쟁하고 있다. 유전자 풀 내의 대립 유전자는 다음 세대의 염색체상의 한 자리를 놓고, 이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대립 유전자를 희생하여 유전자 풀 속에서 자기의 생존 기회를 증가하도록 행동하는 유전자는 어느 것이든, 동의 반복적인 의미에서 오래 살아남는 경향이 있다. 유전자는 이기주의의 기본 단위인 것이다.                                       - 72


훌륭한 조정 선수의 자질 중 하나는 팀워크, 즉 크루의 나머지 선수들과 협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것은 강한 근육만큼이나 중요하다. 나비의 예에서 말한 대로 자연 선택은 역위와 다른 염색체 일부의 대규모 이동에 의하여, 무의식적으로 하나의 유전자 복합체를 ‘편집’해 잘 협조하는 유전자를 모아서 긴밀하게 결합한 집단으로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유능한 육식 동물의 몸에는 여러 가지 특성이 필요하다. 그 중에는 고기를 자르는 이빨, 고기를 소화하기에 적합한 소화관,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특성이 있다. 한편 유능한 초식 동물은 풀을 씹기 위한 평평한 어금니와 특별한 소화 기구를 가진 매우 긴 창자를 필요로 한다. 초식 동물의 유전자 풀 속에서 육식용의 날카로운 이빨을 그 소유자에게 제공하는 새로운 유전자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육식이라는 착상이 나빠서가 아니다. 적합한 소화관과 기타 육식 생활에 필요한 모든 특성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고기를 효율적으로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육식용의 예리한 이빨에 관한 유전자가 본래 열등한 유전자는 아니다. 그것은 초식성을 위한 유전자가 우세한 유전자 풀 속에 있을 때에만 열등한 유전자이다.                                                       - 76


진화는 유전자 풀 속에서 어떤 유전자는 수를 늘리고, 어떤 유전자는 수를 줄이는 과정이다.                                                                  - 84



우리의 관점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안드로메다 사람이 지구상의 일을 조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그들은 컴퓨터가 시시각각 하는 일을 직접 제어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들은 컴퓨터가 만들어진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 정보가 그들에게 전해지려면 200년이나 걸리기 때문이다. 그 컴퓨터의 의사 결정과 행동은 전적으로 독립적인 것이었다. 컴퓨터는 주인에게서 일반적인 방침의 지시를 받는 것까지도 불가능했다. 넘을 수 없는 200년이란 벽 때문에 그 지령은 모두 미리 만들어져 있어야 했다.

……

안드로메다 사람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일상적 의사 결정을 내리기 위해거 지구상에 컴퓨터를 만들어야 했던 것처럼, 우리의 유저자도 뇌를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유전자는 암호화된 지령을 보낸 안드로메다 사람에 상당할 뿐만 아니라 그 지령 자체이기도 하다. 유전자가 우리를 인형 끈으로 직접 조종하지 못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즉 시간 지연 때문이다.

유전자는 단백질 합성을 제어하는 일을 통해 작용한다. 이것은 세계를 조종하는 강력한 방법인데 그 속도는 매우 느리다. 배embryo를 만드는 데는 인내를 갖고 몇 개월 동안 단백질(합성)의 끈을 조작해야만 한다. 반면에 행동의 특징으로 중요한 점은 빠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수 개월이라는 시간 단위가 아닌 몇 초 또는 몇 분의 1초라는 시간 단위로 작용한다. 이 세상에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부엉이가 머리 위를 휙 지나가고 키 큰 풀숲이 부스럭거리며 포획물이 있는 곳을 알리면 1/1000초 단위로 신경계가 흥분하여 근육이 떨리고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기도 하고 또는 잃기도 한다. 유전자는 그처럼 신속한 반응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 유전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안드로메다 사람처럼 자기의 이익을 위해 신속히 작동하는 컴퓨터를 조립하여 ‘예측’할 수 있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가능성들에 대처하기 위한 규칙과 ‘충고’를 사전에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미리 최선의 대책을 강구해 두는 것뿐이다.

                                                                      - 99, 100


매우 예측 불가능한 환경에서 예측해야만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전자가 취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학습 능력을 만드는 것이다. 이 경우 프로그램은 생존 기계에게 다음과 같은 지령을 행할 것이다. “여기에 달콤한 것, 오르가슴, 따스한 기후, 방실거리는 아이 등과 같은 보상이라고 정의되는 사물의 목록이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의 고통, 구역질, 공복, 울고 있는 아이 등에 해당되는 싫은 사물의 목록이 있다. 만약 당신이 무엇인가를 하고 그 후에 싫은 사물 중의 하나가 생기면 다시 그것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좋은 사물 중의 하나가 생기면 그것을 반복하는 것이 좋다.”

……

우리의 예에서 유전자는 입 속의 단맛이나 오르가슴은 사탕의 섭취나 교미가 유전자의 생존에 적합하다는 의미에서 ‘좋은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 예에 따르면 사카린과 수음의 가능성은 제대로 예측되지 않으며, 오늘날의 환경에서 사탕의 과다 섭취도 제대로 예측되지 않고 있다.                                                          - 103


의식에 의해 제기되는 철학적 문제가 무엇이든 의식이란 실행상의 결정권을 갖는 생존 기계가 궁극적 주인인 유전자로부터 해방된다고 하는 진화 경향의 극치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뇌는 생존 기계의 일을 매일 관리할 뿐만 아니라 미래를 예언하고 그것에 따라 행위하는 능력도 있다. 또 뇌는 유전자의 독재에 반항하는 힘까지 갖추고 있다. 예를 들어 가급적 많은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 것이 그에 해당된다. 그러나 앞으로 이야기 될 부분에서 알 수 있겠지만 인간은 이 점에서 대단히 특수한 경우에 속한다.

……

유전자는 일차적 방침 결정자이고 뇌는 집행자이다. 그러나 뇌가 다시 고도로 발달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실제의 방침 결정을 맡게 되었다. 이때에 학습이나 시뮬레이션과 같은 책략을 쓰게 된 것이다. 어떤 종도 아직까지는 이 시점에 도달하지 않았으나 이 경향이 계속 진행되면, 그 논리의 귀결은 결국 유전자가 생존 기계에 단 하나의 종합적인 방침을 지령하게 될 것이다.                                                   - 107



유전자 풀은 유전자의 장기적인 환경이다. ‘우수한’ 유전자란 맹목적으로 선택되어 유전자 풀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관찰된 사실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동어 반복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유전자가 우수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첫 시도로서 유전자가 우수하다는 것은 유능한 생존 기계, 즉 몸을 만드는 능력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진술에 단서를 붙여 두지 않을 수 없다. 유전자 풀은 하나의 진화적으로 안정된 유전자 세트이다. 어떠한 새로운 유전자에 의해서도 침입될 수 없는 유전자 풀로 정의된다. 돌연변이나 재조합이나 이입에 의해 생기는 새로운 유전자는 대부분이 자연 선택에 의해 벌을 받아 즉시 도태되고 진화적으로 안정된 유전자 세트는 복원된다. 때때로 어떤 새로운 유전자가 그 세트에 침입하는 데 성공하여 유전자 풀 내에 퍼져 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불안정한 과도기를 거쳐 드디어 하나의 새로운 진화적으로 안정된 조합을 이룬다. 작은 진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 145, 146



가령 내가 한입의 음식물을 가지고 동생과 경합하고 있고 게다가 동생은 나보다 훨씬 어리므로 그 음식물에 의해 동생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내가 그것에 의해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크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도 그 음식물을 동생에게 양보하는 편이 나의 유전자를 위해서도 유리할 것이다. 연상의 형제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경우와 같은 근거에서 어린 형제에 대해 이타적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 209



한배 자식 중 한마리가 특히 작은 경우가 있다. 대개 이런 새끼는 다른 형제들처럼 힘차게 먹이를 다투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이미 어미에게 있어 이와 같은 자식은 죽게 놔두는 것이 실제로 유리하게 되는 조건을 살펴본 바 있다. 직관적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제대로 자라지 못한 놈은 최후까지 살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가정할지 모른다. 그러나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으로는 반드시 이와 같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없다. 제대로 자라지 못한 작은 자식의 여명은 소형화․쇠약화로 짧아져서 부모의 투자나 그에게 주는 이익이 동량의 투자에 의해 다른 아이들이 획득할 수 있는 이익의 1/2 이하로 되면 그는 스스로 기꺼이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하는 것이 자기의 유전자에게 가장 크게 공헌할 수 있기 때문이다.                     - 211, 212



지난 1년 사이에 내가 배운 가장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스페인의 알바레스, 아리아스 드 레이나, 그리고 세구라가 보고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뻐꾸기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을 가진 양모가 침입자인 뻐꾸기 알이나 2세를 검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를 조사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련의 실험 중에서 그들은 뻐꾸기의 알과 2세를 까치 둥지에 넣어 본 적이 있었다. 이때에 뻐꾸기와의 명확한 비교를 위해 제비를 비롯하여 다른 종의 알이나 2세를 까치 둥지에 넣었다. 한 번은 아기 제비 한 마리를 까치 둥지에 넣어 보았다. 다음날 그들은 둥지 아래 지면에 까치 알이 하나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알이 깨지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그것을 주워서 다시 둥지에 넣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관찰해 보았다. 그들이 본 것은 정말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아기제비가 아기뻐꾸기와 똑같은 동작으로 까치의 알을 내버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떨어진 알을 또 한 번 둥지에 넣어 보았다. 전과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었다. 아기제비 역시 알을 등에 업고 작은 날개로 알의 균형을 잡으면서 뒷걸음으로 둥지의 벽을 기어올라가 알을 밖으로 떨어뜨림으로써 뻐꾸기와 같은 방법을 이용한 것이다.

……

무서운 생각일지는 몰라도 제비의 자식 상호간에는 다음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닐까. 맨 처음 태어난 2세는 다음에 부화되는 동생들과 부모의 투자를 놓고 결국은 경쟁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는 생애의 첫번째 일로서 우선 다른 알을 둥지에서 내던지는 것이 이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218 ~ 220



동형 배우자가 융합할 경우, 새로운 개체에 기여하는 두 배우자의 유전자가 동수인 것은 물론 두 배우자가 기여하는 음식물의 비축량도 같다. 정자와 난자의 경우도 유전자의 기여수는 같다. 그러나 음식물 비축에 대해서는 난자의 기여도가 정자를 훨씬 능가한다. 실제로 정자의 기여는 전혀 없고 다만 정자는 유전자를 가급적 빨리 난자로 운반하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임신 시점에서 수컷이 자식에 대해 투자한 자원량은 공평한 분담량, 즉 50%보다 훨씬 적다. 개개의 정자는 아주 작아서 수컷은 매일 수백만 개의 정자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수컷이 서로 다른 암컷들을 이용하여 단시간 내에 많은 수의 2세를 만드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개개의 배가 수정할 때 어미로부터 충분한 먹이를 받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 때문에 암컷이 만들 수 있는 아이의 수는 일정한 한도가 있는 반면에 수컷이 만들 수 있는 아이의 수에는 사실상 한계가 없다. 수컷이 암컷을 상대로 한 착취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 231, 232



자연 선택은 새로운 암컷을 취한 직후, 잠재적인 의붓자식은 모두 죽여버리는 방법을 취하는 수컷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이것은 소위 ‘Bruce 효과’로 설명될 수 있다. 이 효과는 쥐에서 알려진 것으로 수컷이 분비하는 어떤 화학 물질을 임신중의 암컷이 맡으면 유산을 일으킬 수 있다는 현상이다. 암컷이 유산을 하는 경우는 이전의 배우자의 것과는 다른 냄새를 맡았을 때에 한정된다. 수컷의 쥐는 이 방법으로 잠재적인 의붓자식을 죽이고 새로운 암컷이 자신의 정적 접근에 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아드리는 이 Bruce 효과를 개체군 조절의 매커니즘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자에서도 유사한 예가 알려져 있는데 한 무리 속에 새로운 수사자들이 끼게 되면 그들은 거기에 있는 자식을 모두 죽여버리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 녀석들이 자기들의 자식이 아니기 때문인 듯하다.                                                                  - 240



구애 의식에 있어서 수컷은 종종 적지 않은 혼전(婚前) 투자를 하는 경우가 있다. 수컷이 집을 완성할 때까지 암컷은 교미를 거절하는 수도 있고, 수컷이 암컷에게 충분히 먹이를 줘야만 할 때도 있다. 암컷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큰 이익인 동시에 또한 이것은 가정의 행복을 우선으로 하는 수컷을 선택하는 전략의 또 다른 설명이라고 생각된다. 암컷은 교미에 응하기 전에 수컷으로 하여금 2세에 대해 많은 투자를 하도록 하여 그 때문에 ‘교미 후’의 수컷이 처자를 버린다 해도 결국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생각은 재미있는 발상이다. 수줍어하는 암컷이 결국 자기와 교미에 응하기를 기다리는 수컷은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셈이 된다. 즉 수컷은 다른 암컷과의 교미 기회를 포기하고 있으며, 구애 때문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수컷은 특정의 암컷이 최종적으로 교미에 응할 때까지는 필연적으로 암컷에게 몹시 ‘속박’당할 것이다. 다른 암컷도 교미에 응하기에 앞서 이 암컷과 같은 방법으로 지연 전술을 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수컷은 이 암컷을 버리려고 하는 유혹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 244



암컷이 가정의 행복 전략을 실제로 행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지적한 대로 수컷이 집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거나 또는 최소한도로 수컷이 집짓기를 돕지 않을 때는 그 수컷과의 교미를 거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실제로 일부일처제형의 조류에서는 집이 완성될 때까지 교미하지 않는다. 그 결과 수컷은 수정하는 순간에 이미 자신의 값싼 정자보다 더 많은 투자를 자식에게 한 것이 된다.

신랑 후보자에게 집짓기를 요구하는 것은 수컷을 붙잡아 두기 위한 암컷의 수단으로서 확실히 유효하다. 수컷에 대해 많은 대가를 치르게 하는 일을 가령 그 대가가 아직 낳지도 않은 자식에게 이익이 되는 형태로 되지는 않더라도, 이론적으로는 같은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생각될지 모른다. 집단 내 모든 암컷이 수컷과의 교미에 동의하기에 앞서 어떤 곤란하고 대가 높은 행위, 예를 들어 용을 잡아온다던가 어떤 산에 오른다던가 하는 행위를 요구한다면 이 때문에 암컷들은 수컷이 교미 후에 암컷을 버리려고 하는 유혹에 빠지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배우자를 버리고 다른 암컷을 찾아 유전자를 더 퍼뜨리고 싶다는 유혹을 가진 어떤 수컷이라도 한 마리의 용을 더 잡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면 틀림없이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구혼자에게 용 잡기나 성배(聖杯) 찾기 같은 것을 마구잡이로 요구하는 암컷은 없다. 그 이유는 수컷에게 무의미한 사랑의 노력을 요구하는 로맨틱한 암컷보다는 암컷과 자식을 위해 필요한 일을 수컷에게 요구한 암컷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용 잡기나 헬레스폰트Hellespont 해협을 수영해 건너는 것에 비하면 집짓기는 확실히 로맨틱하지는 않으나 암컷에게 수컷을 붙잡아 두기 위해서는 훨씬 필요한 것이다.

                                                                      - 249, 250



그러나 실제로 암컷보다도 수컷이 자식의 보호에 많은 노력을 쏟는 동물도 있다. 이와 같이 아비가 자식 때문에 헌신하는 예는 새와 포유류에서는 극히 드물지만 어류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이것은 도대체 왜 그럴까? 이것은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으로서는 하나의 난제이고 나도 오랫동안 이 문제로 고심해 왔다. 그러나 최근 카라일(T.R.Carlisle)이 그 해답을 가르쳐 주었다.

“대부분의 어류는 교미를 하는 대신에 그냥 생식 세포를 물 속에 방출한다. 수정은 배우자의 체내에서 일어나지 않고 물 속에서 이루어진다. 유성생식이 처음 출현했을 때에도 아마 이것과 비슷했을 것이다. 새, 포유류, 그리고 파충류 같은 육상동물은 이런 형태로 체외 수정을 할 수 없다. 그들의 생식 세포는 매우 건조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컷의 운동 능력을 가진 정자가 암컷의 젖에 있는 체내로 주입된다.” 이상은 다만 사실의 확인일 뿐이다. 칼라일의 아이디어는 이제부터다. “교미 후 육상 동물의 암컷은 얼마 동안 체내에 배를 가지고 있게 된다. 만일 암컷이 교미 직후에 수정란을 낳는다고 해도 수컷에게는 여전히 도망쳐서 암컷을 트라이버스의 ‘가혹한 속박’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다. 수컷에게는 암컷의 선택을 봉쇄하고 먼저 도망칠 결단을 내릴 기회가 필연적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아이를 내버려 확실히 죽게 할 것인가, 아니면 머물러서 양육을 할 것인가의 결단을 모두 암컷에게 떠밀어 버린다. 그러므로 육상 동물의 자식 보호에는 아비보다 어미에게 기회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물고기를 비롯한 다른 수생 동물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수컷이 암컷의 체내에 정자를 주입하지 않는다면 암컷이 ‘자식을 품고’ 혼자 남아 있을 필요가 없게 된다. 수정이 막 끝난 알을 상대에게 맡기고 급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암수 모두에게 가능하다. 그러나 이때에 종종 수컷이 버림받는 이유는 어느 쪽이 먼저 생식 세포를 방출하는가를 가지고 진화적인 다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생식 세포를 방출한 개체는 수정된 배를 상대에게 떠맡길 수 있는 점에서 유리하지만 동시에 배우자가 자칫하면 뒤따라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범하게 된다. 이 점에서는 정자가 난자보다 가벼워서 확산이 쉽다는 것만을 고려해 봐도 수컷 쪽의 위험이 크다. 암컷은 수컷이 아직 준비가 되자 않은 상태에서 알을 빨리 방출했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다. 알은 비교적 크고 무거워서 잠시 동안은 한 덩어리가 되어 거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고기의 암컷은 먼저 산란하는 ‘위험’을 무릅쓸 가능성이 있다. 물고기의 수컷은 이런 위험을 무릅쓸 수가 없다. 왜냐하면 수컷이 서둘러 정자를 방출해 버리면 암컷이 방출하기 전에 정자가 흩어져 버리게 될 것이고, 그러면 암컷은 산란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알을 낳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확산 문제 때문에 수컷은 우선 암컷이 산란하기를 기다려 그 후 알에 정자를 뿌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덕분에 암컷은 실로 귀중한 몇 초간을 얻을 수 있다. 그 사이에 몸을 감추고 난자를 수컷에게 떠맡겨서 수컷을 트라이버스의 딜레마에 빠뜨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론은 수컷에 의한 자식의 보호가 왜 물 속에서는 일반적인 것으로 보이고 건조한 육상에서는 보기 드문 일인지를 솜씨 좋게 설명하고 있다.

                                                                      - 252 ~ 254



수컷이 서로 경쟁하여 암컷으로부터 훌륭한 수컷임을 지명받으려고 하는 사회에 있어서 어미가 자기의 유전자에 대해 할 수 있는 최선책의 하나는 자식을 매력적이고 훌륭한 수컷으로 성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성체가 됐을 때에 집단 속에서 대부분의 짝짓기를 독점하는 소수의 행운을 잡은 수컷의 일원에 들어갈 수 있는 자식을 만들어 내면 암컷이 획득할 수 있는 손자 수는 엄청나게 많아질 것이다. 이 결과 다음과 같은 일이 생긴다. 즉 암컷의 눈으로 볼 때에 수컷이 갖춰야 할 가장 바람직한 성질의 하나는 단적으로 성적 매력을 들 수 있다. 특히 매력적인 수컷과 교미한 암컷이 낳은 자식은 다음 세대의 암컷들에 대해서도 매력적인 수컷이 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이 자식들은 어미에게 많은 손자를 갖도록 할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암컷도 큰 몸체와 같은 분명히 유익한 성질을 기준으로 하여 수컷을 선별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일단 그 종이 암컷들 사이에서 매력적인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면 그 성질은 단순히 매력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연 선택에 있어서 유리함을 계속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풍조 수컷의 꼬리와 같은 사치스러움은 어떤 종류의 불안정하고 너무 빠른 과정을 거쳐 진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옛날 풍조의 암컷은 보통보다 조금 긴 꼬리를 가진 수컷을 바람직한 성질의 소유자로 보고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마도 튼튼하고 건강한 체격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수컷의 꼬리가 짧은 것은 비타민 부족의 표시였는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일부러 짧은 꼬리 그 자체가 유전된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주의하라. 단순히 짧은 꼬리가 어떤 유전적 열세의 하나의 지표로 되어 있다고 가정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풍조의 선조였던 종의 암컷은 평균보다 긴 꼬리를 가진 수컷을 선택적으로 찾아다녔다고 가정하자. 수컷의 꼬리의 평균 길이는 위에서 살펴본 암컷의 선택에 의해 길어졌음에 틀림없다. 암컷이 따르는 규칙은 단순하다. 모든 수컷 중에서 가장 긴 꼬리를 가진 개체를 선택하면 된다. 너무 긴 꼬리가 수컷에게는 실제로 부담이 된다고 할지라도 이 규칙을 따르지 않는 암컷은 불리하게 된다. 왜냐하면 꼬리가 긴 자식을 낳을 수 없었던 암컷들은 자식이 매력적이라는 평판을 들을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여성의 의상이나 미국의 자동차 디자인과 같이 보다 긴 꼬리를 가지는 경향은 이렇게 시작되어 자기 스스로 세력을 늘린 것이다. 꼬리가 너무 기괴할 만한 길이에 달해 결국 그 때문에 성적 매력이라는 유리함을 압도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이 경향이 멈추게 됐다.        - 256, 257



성적으로 매력적이고 화려한 색체를 나타내는 것은 수컷 쪽이고, 반면에 좀 단조로운 색체를 나타내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암컷 쪽이다. 암수 어느 개체도 포식자에게 먹히기 싫어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면 두 성 모두 단조로운 색체를 나타내는 방향으로 어떤 진화적 압력을 받고 있을 것이다. 선명한 색체는 배우자뿐만 아니라 포식자도 유인하기 때문이다. 유전자의 말로 말하면 단조로운 색체를 나타내게 하는 유전자보다 선명한 색체를 나타내는 유전자가 포식자의 뱃속에서 생을 마칠 가능성이 높다.

한편 다음 세대에 전해질 가능성이라면 아마도 단조로운 색체를 띠게 하는 유전자가 선명한 색체를 띠게 하는 유전자보다 덜할지도 모른다. 색이 단조로운 개체는 배우자를 유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두 가지의 서로 대립하는 선택력을 볼 수 있다. 즉 포식자는 유전자 풀에서 선명한 색체의 유전자를 제거하는 경향이 있고, 성적 파트너는 단조로운 색체를 띠게 하는 유전자를 제거하는 경향을 보인다. 많은 경우와 같이 유능한 생존 기계는 대립하는 선택력의 타협의 산물로 생각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수컷으로서의 최적 타협점이 암컷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수컷이 큰 위험을 걸고 큰 벌이를 노리는 도박꾼의 존재라고 보는 우리의 견해와도 완전히 일치된다. 암컷이 만드는 난자 1개에 대응하여 수컷이 만드는 정자는 막대한 수에 달하므로 개체군 속의 정자의 수는 난자를 훨씬 웃돈다. 따라서 임의의 난자 1개가 성적 융합을 이룰 가능성은 정자보다 훨씬 높다. 난자는 상대적으로 귀중한 자원이기 때문에 암컷은 수컷의 경우만큼 성적 매력이 강하지 못해도 난자의 수정을 보증할 수 있다. 한 마리의 수컷이 수많은 암컷에게 자식을 낳게 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려한 꼬리가 포식자를 유인하거나 덤불에 걸리거나 해서 단명하더라도 수컷은 죽을 때까지 막대한 수의 자식을 볼지도 모른다. 그런데 성적 매력이 없는 단조로운 색체의 수컷은 암컷만큼 오래 살지는 몰라도 자식을 거의 갖지 못하고 자기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만약 세계를 손에 넣어도 불멸의 유전자를 잃어버리면 수컷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262, 263



사실 대부분의 인간 사회는 일부일처제를 취하고 있다.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도 부모의 투자는 크고 뚜렷이 불균형하지 않다. 확실히 어머니는 아이를 위해 아버지보다 더 직접적인 일을 한다. 그러나 아버지도 아이에게 주는 물질적 자원을 얻기 위해 보다 간접적인 의미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난혼 사회도 있고 하렘제에 기초한 사회도 많다. 이 놀랄 만한 다양성은 인간의 생활양식이 유전자가 아닌 오히려 문화에 의해 주로 결정됨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진화론적 입장에서 예상하는 대로 남성에게는 일반적으로 난혼 경향이 있고 여성에게는 일부일처제의 경향이 있을 수 있다. 특별한 사회에 있어서 이 두 가지 경향 중 어느 것이 우세한지는 문화적 상황의 세부적인 것에 의존한다. 이것은 다른 동물 종들에 있어서 그것이 바로 생테적 세부 사항에 의존하는 것과 같다.                                                - 266


만일 동물이 무리를 지어 함께 산다면 그들 유전자는 이 연합에 의해 그들이 투입한 것보다 더 큰 이익을 얻는다고 볼 수 있다. 무리를 짓는 하이에나는 단독으로 먹이를 잡는 것보다 훨씬 큰 먹이를 포획할 수 있다. 물론 먹이를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지만 떼지어 사냥하는 것은 개개의 이기적 개체에게 유리하다. 어떤 종의 거미들이 협력하여 거대한 공동의 망을 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황제펭귄은 서로 몸을 맞대서 열을 보존하면 혼자 있을 때보다 비바람에 내놓은 몸의 표면적이 적어지기 때문에 모든 개체가 이익을 얻게 된다. 다른 개체의 뒤에서 비스듬히 헤엄치는 물고기는 앞의 개체가 만든 물결 덕분에 유체역학적으로 유리할 것이다. 이것은 물고기가 떼지어 헤엄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공기의 파동을 이용한 같은 요령이 경륜 선수에게도 적용되며 새가 V자형 편대로 비행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무리의 선두에 서는 것은 불리하므로 이것을 피하려고 하는 경쟁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새들은 힘든 리더 역할을 교대로 떠맡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이 장의 끝부분에서 논의하게 될 자연성의 호혜적 이타주의의 한 형태이다.

                                                                              - 270


톰슨가젤의 높이뛰기 위장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아드리는 그 행위가 명백히 자살적인 이타적 행위로 보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룹 선택에 의해서만 설명된다고 단언할 정도였다. 이 예는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보다 더 어려운 문제이다.

……

자하비 이론은 다음과 같다. 그의 수평 사고의 결정적 생각은 높이뛰기 위장이 다른 영양에 대한 신호와는 전혀 관계없이 실제로 포식자를 향하여 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그것을 본 다른 영양이 행동에 영향을 받는 경우는 있어도 그것은 부수적일 뿐, 어쨌든 그것은 무엇보다도 포식자에 대한 신호로서 선택된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자! 나는 이처럼 높이 뛴다. 이렇게 활기차고 건강한 나를 잡는다는 것은 네게는 무리다. 나만큼 높이 뛸 수 없는 것들을 쫓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인간의 형태와는 다르게 포식자는 쉽게 잡힐 만한 먹이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높게 허세 부리는 뛰기를 가능케 하는 유전자는 포식자에게 쉽게 먹히지 않는다. 특히 많은 포식성 포유류는 늙은 개체와 건강치 못한 개체를 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높이 뛰는 개체는 그리 늙지도 않고, 또 건강하다는 사실을 과장된 방법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그 과시는 이타주의와는 관계가 멀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이기적 행위이다. 자신을 과시하려는 목적 때문에 포식자에게 다른 개체를 쫓도록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누가 제일 높이 뛰는가를 확인하는 경쟁이다. 이 경쟁의 패자는 포식자의 먹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 276, 277


수렵과 채집 생활보다 정착해서 먹이를 양식하는 것이 훨씬 높은 효율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사회성 곤충은 인간보다 훨씬 이전에 발견했다.

예컨대 아메리카 대륙의 개미종과 아프리카의 흰개미들은 매우 독립적으로 균원(fungus garden, 菌園)을 만드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남미 우산개미parasol ant의 종족이다. 이들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한 군체당 개미수가 200만을 넘는 예도 발견되었다. 그들의 군체는 지하에 퍼지는 통로와 길다란 방의 거대한 복합체로서 그 깊이는 3미터 또는 그 이상에 달하기 때무에 파내는 흙의 양은 40톤이나 된다. 지하의 방에는 균원이 있으며, 식물의 잎을 세분하여 특수한 퇴비 못자리를 만들고 개미들은 일부러 거기에 특수한 종류의 균류를 뿌린다. 일개미는 즉시 먹이가 될 만한 것을 구하러 나가는 것이 아니고 퇴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잎을 수집하러 나간다. 우산개미의 군집이 잎을 수집할 때의 ‘식욕’은 놀랄 만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큰 경제 피해를 주는 해충이기도 하다. 수집된 잎은 그들 자신의 먹이가 아닌 그들이 키우는 균류의 먹이가 된다. 얼마 후 그들은 그 륜류를 수확하여 자신도 먹고 아기들에게도 먹인다. 개미의 위보다 균류가 높은 효율로 잎을 분해한다. 그런 조치가 개미에게 이익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편 균류 쪽에서도 물론 수확하는 동시에 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 포자의 분산이라는 매커니즘보다 개미의 도움이 효율적으로 균류를 증식시킬 수도 있다. 게다가 개미들은 균원의 ‘김매기’까지 해주어 다른 종의 균류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개미에게 지배되는 균류는 이익을 얻는 셈이 된다. 개미와 균류 사이에는 일종의 상호 이타주의적 관계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계통적으로 서로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각종의 흰개미들 사이에서 매우 닮은 균류 재배 시스템이 독립적으로 진화하고 있는 점도 놀랄 만한 일이다.

……

개미류는 지배용의 식물뿐만 아니라 가축도 소유하고 있다. 예를 들면 진딧물이 그것이다. 진딧물류는 식물의 즙을 흡입하기 위해 고도로 특수화된 곤충이다. 그들은 식물의 즙을 매우 효율적으로 빨아내기 때문에 자기들이 소화시키고도 남을 만큼의 양을 빨아낸다. 또한 영양가를 조금만 흡수하고 난 나머지 액체는 분비한다. 당분을 많이 포함한 ‘꿀방울’이 몸의 후미에서 대량으로 흘러 넘쳐 나오며, 자기의 체중을 넘는 정도의 꿀방울을 매시간 분비할 때도 있다. 꿀방울은 마치 비처럼 지상에서 떨어진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하느님이 주신 양식인 ‘만나manna'는 사실 이 꿀방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데 개미 중에는 그 꿀방울이 진딧물의 몸에서 이탈하는 순간에 즉시 그것을 탈취해 버리는 종류가 있다. 그들은 더듬이와 다리로 진딧물의 궁둥이를 비벼서 ‘꿀을 짠다.’ 진딧물도 개미에게 반응한다. 개미가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작은 꿀방울을 뱃속으로 되돌리는 예도 있다. 어떤 종의 진딧물은 개미를 쉽게 유인하기 위해서 개미의 안면과 닮은 외관과 감촉을 가진 엉덩이가 진화됐다. 이 상호 관계로 진딧물이 얻은 것은 분명히 천적으로부터의 보호이다. 인간에게 사육되고 있는 젖소처럼 그들도 보호받는 생활을 하고 있고 개미로부터 사육되고 있는 종들은 정상적인 자기 방어 매커니즘을 잃어버렸다. 개미가 자기들의 지하 짐 속에서 진딧물의 알을 돌봐 주는 예도 있다. 이 경우 개미는 진딧물의 애벌레에 먹이를 주고, 마침내 그들이 성장하면 그들을 보호받을 수 있는 풀밭에서 풀을 뜯도록 조심스럽게 운반한다.                                                               - 290 ~ 292



청소어는 특별한 세로줄 무늬를 가지고 있고 또한 특별한 춤으로 과시 행동을 한다. 이것이 바로 청소어라는 표지인 것이다. 대형어는 세로줄 무늬에 춤을 추면서 접근하는 작은 물고기에 대해 포식을 억제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그 대신에 그와 같은 작은 물고기와 우연히 만나면 그들은 황홀한 경지에 빠져들어 청소어가 그들의 몸 안팎을 자유로이 출입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기성이라는 유전자의 본성으로 말하면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냉혹한 사기꾼이 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사실 대형어에게 안전하게 접근하기 위해 청소어와 똑같은 외양을 가지고 게다가 똑같은 식의 춤을 추는 소형 어류가 있다. 이 사기꾼은 대형어가 청소를 기대하며 황홀한 경지에 빠지면 그 지느러미에서 살점을 뜯어 물고 줄행랑치곤 한다. 이런 사기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청소어와 그 불청객들의 관계는 대체로 우호적이고 안정적이다. 청소꾼이란 직업은 산호초의 생물 군락의 일상 생활 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청소어는 각각 자기의 영역을 가지고 있으며 대형어들은 거기에 줄을 서서 마치 이발소의 손님처럼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 301



밈의 예에는 곡조나 사상, 표어, 의복과 양식, 단지 만드는 법, 또는 아치 건조법 등이 있다. 유전자가 유전자 풀 내에서 번식하는 데 정자나 난자를 운반체로 하여 몸에서 몸으로 뛰어넘는 것과 같이 밈이 밈 풀 내에서 번식할 때에는 넓은 의미로 모방이라고 할 수 있는 과정을 매개로 하여 뇌에서 뇌로 건너다니는 것이다. 만약 과학자가 좋은 생각을 듣거나 읽거나 하면 그는 동료나 학생에게 그것을 전할 것이다. 그는 논문이나 강연에서도 그것을 언급할 것이다. 이처럼 그 생각을 잘 이해하면 뇌에서 뇌로 퍼져 자기 복제한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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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밈은 비유로서가 아닌 엄밀한 의미에서 살아 있는 구조로 간주해야 한다. 당신이 내 머리에 번식력이 있는 밈을 심어놓는다는 것은 문자대로 당신이 내 뇌에 기생한다고 하는 것이다. 바이러스가 숙주 세포의 유전 기구에 기생하는 것과 유사한 방법으로 나의 뇌는 그 밈의 번식용의 운반체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예컨대 ‘사후에 생명이 있다는 믿음’이라는 밈은 신경계의 하나의 구조로서 수백만 번 전 세계 사람들 속에 육체적으로 실현되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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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환경 속에서 신의 관념이 안정성과 침투력을 주는 것은 도대체 그 관념이 갖는 어떤 성질 때문일까? 밈 풀 속에서 신의 밈이 나타내는 생존가는 그것이 갖는 강력한 심리적 매력의 결과이다. 실존을 둘러싼 심원하고 마음을 괴롭히는 여러 의문에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한 해답을 주고 있다. 그것은 현세의 불공정이 내세에서 바로 고쳐진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불완전함에 대해서는 ‘영원한 신의 팔’이 구원해 준다고 한다. 이러한 심리적 상태는 마치 의사가 처방하는 위약(僞藥)과 같아서 상상에 빠져드는 데 효력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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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으로 생물학적 현상을 유전자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되는 이유는 유전자가 자기 복제자이기 때문이다. 분자의 자기 복제를 가능케 하는 조건은 원시 수프에서 그 일을 맡고 있다. 그리하여 30억년 전부터 이 지상에서 언급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자기 복제자는 DNA였다. 그러나 DNA가 영원히 그 전매권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종류의 자기 복제자가 자기의 사본을 만들 조건이 생기기만 하면, 바로 그 새로이 나타난 자기 복제자가 세력을 확장해 그 자체의 새로운 종류의 진화를 시작하게 된다. 일단 새롭게 시작된 진화가 확장해 그 자체의 새로운 종류의 진화를 시작하게 된다. 일단 새롭게 시작된 진화가 이미 낡은 유형이 된 진화를 따라야만 할 필연성은 없다. 유전자를 단위로 하는 낡은 진화는 뇌를 만들어 내는 것에 의해 수프를 마련해 주었고, 그 수프 속에서 최초의 밈이 생겨났다. 일단 자기 복제 능력이 있는 밈이 등장하면 그들은 낡은 유형의 진화보다 훨씬 빠른 독자적 유형의 진화를 시작한다. 우리 생물학자는 유전자에 의한 진화의 사고방식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사실 그것이 가능한 여러 종류의 진화 중 일례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칫하면 잊어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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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의미에서 모방은 밈이 자기 복제를 가능케 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자기 복제가 가능한 모든 유전자가 성공을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어떤 밈은 풀 속에서 다른 밈보다 성공적일 수도 있다. 이것은 자연 선택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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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 속에 있는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의 선율 사본은 내 수명 동안만 존재할 것이다. 내 수중에 있는 <스코틀랜드 학생 가곡집>에 인쇄된 같은 선율의 사본도 올드랭사인 사본에 비하여 그리 오래 사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같은 선율의 사본은 종이에 인쇄되고 사람들의 머리 속에 남아 앞으로 수백 년이라도 계속 보존할 것으로 여겨진다. 유전자의 경우와 같이 여기서도 특정한 사본의 수명보다 다산성인 것이 훨씬 중요하다.

……

유전자의 경우와 같이 밈 속에도 급격한 증식에 의해 아주 단기적인 성공을 달성하면서 밈 풀 속에 오랫동안 머물지 못하는 것도 있다. 유행가나 필요 이상으로 뾰족한 스파이크힐 등이 그에 해당된다. 한편 유대교의 율법과 같이 수천 년에 걸쳐 계속되는 것도 있는데 보이는 보통 기록된 언어가 가지고 있는 특출한 잠재적 영속성 때문이다.

……

본래의 밈은 변형되어 독자에게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입자의 성질처럼 전부냐 아니냐 하는 성질을 가진 유전자 전달과는 전혀 닮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이제 베토벤의 제9교향곡 중에 충분히 뛰어나고 외우기 쉬운 한 악구가 있다고 하자. 더욱이 그것은 미칠 듯이 주입시키는 유럽의 한 방송국이 시그널 뮤직으로 사용할 정도로 뛰어나게 외우기 쉬운 악구라고 한다면, 그 악구는 위 사정에 적합한 범위에서 하나의 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실질적으로 원래의 그 교향곡을 즐기는 나의 능력은 저하되고 말았다.

……

이 책의 전체를 통하여 나는 유전자를 의식을 가진 목적 지향적인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해 왔다. 그러나 유전자는 맹목적인 자연 선택의 작용에 의해 마치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존재인 것처럼 만들어져 있다. 또한 목적 의식을 전제로 유전자를 설명하는 편이 이해가 빠를 듯하다. 예컨대 “유전자는 장래의 유전자 풀 속에서 자기의 사본 수를 늘리려고 노력하고 있다”라고 표현할 경우, 실제의 의미는 “우리가 자연계에서 볼 수 있는 유전자가 나타내는 효과는 장래의 유전자 풀 속에서 자기의 수를 증가시키려고 행동할 것 같은 유전자다”라는 것을 뜻한다. 자기의 생존을 위해 목적 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능동적인 존재로서 유전자를 생각하는 것이 편리했던 것처럼 밈에 관해서도 똑같이 생각하면 편리할지 모른다.

……

일반적으로 밈은 적절하게 짝을 이룬 다수의 염색체 형태로 존재하는 오늘날의 유전자와는 별로 닮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옛 원시 수프 속을 무질서하게 제멋대로 떠 있던 초기의 자기 복제 분자를 닮았다.

……

인간의 뇌는 밈이 살고 있는 컴퓨터이다. 거기서는 시간이 아마도 저장 용량보다 중요한 제한 요인이며, 심한 경쟁의 대상일 것이다. 인간의 뇌와 그 제어 하에 있는 몸이 동시에 하나 또는 몇 종류 이상의 일을 해치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밈이 한 인간의 뇌의 집중력을 독점하고 있다면 ‘경쟁자’의 밈이 희생되는 것은 틀림없다. 밈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방송 시간, 광고 게시판의 공간, 신문 기사의 길이, 그리고 도서관의 서가 공간 등과 같은 상품을 대상으로 경쟁하고 있다.

……

하나의 특별한 예를 들어보자. 사람에게 종교 의식을 강요하기 위해 유효했던 교의의 하나는 지옥불이라는 협박이다. 많은 아아들 그리고 일부 어른들까지도 종교 율법을 따르지 않으면 사후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중세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심리적 고통을 겪게 하는 매우 간악한 설득 기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술은 효과적이다. 아마도 그것은 심층 심리학적인 교화 기술의 훈련을 받은 성직자가 의도적으로 그러한 기술을 만들어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성직자들이 그렇게까지 머리가 좋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자체는 의식을 갖지 않는 밈들이 성공하는 유전자가 나타내는 것과 같은 준잔인성이라는 특성을 가진 덕분에 스스로의 생존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이 더 그럴듯하게 다가온다. 지옥불이라는 관념은 아주 단순히 그 자체가 가지는 강렬한 심리적 충격 때문에 자기를 영속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신의 밈과 연관된 것은 양쪽이 서로 강하게 화합하여 밈 풀 속에서 서로의 생존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적인 밈 복합체의 또 하나의 성분에는 믿음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증거가 없어도―증거를 무시하고라도―맹신한다는 것이다. 불신의 도마(Thomas :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 이야기는 우리가 도마를 숭배하도록 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그와 비교 대조함으로써 우리가 다른 사도들을 숭배하도록 하기 위한 이야기다. 도마는 증거를 요구했다. 어떤 종류의 밈에게는 증거를 찾는 것만큼 치명적인 것은 없다. 다른 사도들은 아주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증거가 필요하지 않았고 그들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추켜세웠다. 맹신이라는 밈은 이성적인 물음을 꺾어버리는 단순한 무의식적 수단을 행사하여 자기의 영속을 확보하는 것이다.

맹신은 어떤 것도 정당화할 수 있다. 만약 사람이 다른 신을 믿고 있거나 또는 같은 신을 믿는데 의식이 다르다면 다만 그것만으로도 맹신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있다. 십자가에 매단다, 화형을 한다, 십자군의 검으로 찌른다, 베이루트 노상에서 사살한다, 벨파스트의 술집에서 폭탄을 날린다, 무엇인든 닥치는 대로 정당화시킬 수 있다. 맹신이라는 밈들은 각기 독특한 잔인한 방법을 가지고 스스로 번식해 가고 있다. 애국적 맹신이든 정치적 맹신이든 종교적 맹신이든 똑같다.

……

밈과 유전자는 종종 서로 보강하지만 때로는 서로 대립하기도 한다. 예컨대 독신주의의 습관 같은 것은유전적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성 곤충에서 볼 수 있는 매우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독신주의를 발현시키는 유전자는 유전자 풀 속에서 실패하게 돼 있다. 그러나 여전히 독신주의의 밈은 밈 풀 속에서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

나는 상호 적응하는 유전자 복합체의 진화와 같은 방식으로 밈의 복합체가 진화한다고 추측하고 있다. 선택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자기가 취하고 있는 문화적 환경을 이용하는 밈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이 문화적 환경은 같은 식으로 선택을 받고 있는 밈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밈 풀이 진화적으로 안정된 세트로서의 특성을 나타내게 되어 새로운 밈은 쉽게 침입할 수 없게 될 것이다.

……

만일 우리가 세계 문화에 무언가 기여할 수 있다면, 예컨대 좋은 의견을 내거나, 음악을 작곡하거나, 점화 플러그를 발명하거나, 시를 쓰거나 하면 그것들은 우리의 유전자가 공통의 유전자 풀 속에 용해되어버린 후에도 온전히 생존할지도 모른다. 윌리엄스가 지적한 대로 소크라테스의 유전자 중에서 현재 세계에 살아남아 있는 것이 과연 하나라도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누가 그런 것에 관심을 두고 있을 것인가. 소크라테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코페르니쿠스 그리고 마르코니 등등의 밈 복합체는 아직도 건재하고 있지 않은가.

……

종교, 음악, 그리고 제식 춤 등에는 생물학적인 생존가가 있는지 몰라도 그것에 관해 판에 박힌 생물학적 생존가를 찾을 필요는 없다. 유전자가 그 생존기계에 재빠른 모방 능력을 가진 뇌를 제공하게 되면 밈들은 자동적으로 세력을 얻는다. 모방에 유전적 유리함이 있다면 확실히 도움이 되겠지만 그런 유리함의 존재를 가정할 필요는 없다.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뇌에 모방 능력이 있어야 된다는 것뿐이다. 그런 다음에 밈은 그 능력을 완전무결하게 이용하면서 진화해 나갈 것이다.

……

이기적 존재인 유전자는(그리고 독자가 이 장의 사변을 인정한다면 밈에게도) 선견 능력이 없다. 그들은 의식을 갖지 않는 맹목적인 자기 복제자인 것이다.

……

유전자이든 밈이든 무지한 자기 복제자라는 것은 눈앞의 이기적 이익을 포기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이익이 되는 경우에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보다는 ‘비둘기파의 공동행위’를 취하는 것이 모두에게 유리한데도 자연 선택은 반드시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 쪽으로 유리하게 작용해 나간다.

……

우리에게는 우리를 낳아 준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하거나 더 필요하다면 우리를 교화시킨 이기적 밈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자연계에는 안주할 여지가 없고 세계의 전 역사를 통해 과거에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교육하는 방법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유전자 기계로서 조립되어 밈 기계로서 교화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들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들의 전제에 반항할 수 있다.

                                                                              - 308 ~ 322



만일 두꺼운 껍질이 정말로 달팽이에게 유리하다면 도대체 그들은 왜 두꺼운 껍질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 답은 아마도 경제적인 것에 있을 것이다. 껍질을 만드는 것은 달팽이에게 지출을 요하는 일이다. 그것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애서 얻은 먹이에서 추출해야만 하는 칼슘과 다른 화학 물질을 필요로 한다. 이 모든 자원이 만일 껍질을 만들기 위해 소비되지 않을 경우 더 많은 2세를 만드는 등, 다른 유익한 것에 소비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여분의 두꺼운 껍질을 만들기 위해 다량의 자원을 소비하는 달팽이는 자기 자신의 몸을 위한 안전을 확보한 셈이다.                                           - 379



우리 자신의 유전자들의 서로 협력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로의 같은 출구―알이나 정자―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인간과 같은 한 개의 생물체에 들어 있는 어떤 유전자도 만일 정자 또는 난자라고 하는 재래의 경로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을 퍼뜨리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방법을 택하여 협력을 덜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몸 속의 다른 유전자들과는 다른 일련의 장래 결과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볼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감수 분열을 왜곡하는 유전자의 실례를 보았다. 아마도 정자 내지는 알이라는 ‘적절한 통로’를 완전히 부수고 옆길을 개척한 유전자도 있을지 모른다.                                  - 386



감기가 들거나 기침이 나면 보통 우리는 그 증후를 바이러스 활동에 의한 귀찮은 부산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몇몇 경우 그 증후는 한 사람의 숙주에서 다른 숙주로 이동하기 위한 방편으로 바이러스에 의해 의도적으로 꾸민 일일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 바이러스는 단순히 공기 중으로 호흡을 통해 뿜어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에게 재채기나 기침을 하도록 해서 힘차게 토해내도록 한다. 광견병 바이러스는 어떤 동물이 다른 동물을 물었을 때에 타액에 섞여서 감염된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개는 흉포하게 무는 개가 되어 입에서 거품을 내게 된다. 또한 이 개는 불길하게도 보통 개의 행동 반경인 1마일 이내의 행동권 범위를 훨씬 뛰어넘어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바이러스를 광범위하게 퍼뜨리게 된다. 잘 알고 있듯이 물을 무서워하는 증후도 개가 입에서 거품을―이에 동반하여 바이러스 그 자체를―뿌리는 것을 조장하고 있음을 시사하기까지 한다.

                                                                              - 388



양부모가 속아서 뻐꾸기의 알을 품는 것이라고 강조하기는 쉽다. 알을 채집하는 사람들 역시 뻐꾸기의 알이 논종다리 알이나 개개비 알과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많이 속곤한다.(암 뻐꾸기는 품종마다 각각 다른 숙주 종에 전문화되어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번식기 후기에 거의 둥지에서 날아갈 수 있기 직전에 아기뻐꾸기에 대해 양부모가 취하는 행동이다. 뻐꾸기는 보통 양부모보다 훨씬 체구가 크다. 나는 지금 바위종다리hedge sparrow의 어미새 사진을 보고 있는데, 그 괴물과 같은 양자에 비하여 양부모가 너무 작기 때문에 먹이를 주기 위해서는 그 놈의 등에 올라타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우리는 숙주에게 별로 동정이 가지 않는다. 그 어리석음, 즉 잘 속는데 놀란다. 틀림없이 아무리 바보 같은 동물일지라도 그러한 자식을 보고 어딘가 이상한 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아기뻐꾸기는 오히려 그 숙주를 그냥 ‘속임’ 이상의 그 무엇, 즉 단순히 정체를 숨기는 어떤 시늉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숙주의 신경계에 상습적인 마약과 같은 형태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은 비록 마약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까지도 쉽게 공감할 수 있다. 남자는 여성의 육체 사진에 흥분하여 발기까지도 한다. 그는 결코 인쇄된 종이 위의 잉크를 보고 있음에 불과한 것을 알고 있으나 그의 신경계는 진짜 여성에게 반응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반응하고 만다.

우리는 비록 그 상대와의 관계가 장기적으로 누구의 이익도 안됨을 판단할 경우일지라도 특정 이성의 매력에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물에 대한 참기 어려운 매력도 마찬가지다. 바위종다리는 장기적으로 본 자기의 최선의 이익에 대해서 분명한 자각이 없다. 따라서 그 신경계가 특정한 종류의 자극을 참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는 것은 훨씬 간단하기까지 하다.

아기뻐꾸기의 벌린 입에 먹이를 넣어 주고 가는 다른 종의 어미새를 쉽게 볼 수 있다! 이 새는 자기 자식에게 줄 먹이를 물고 집으로 오는 도중이었을지 모른다. 갑자기 눈에 띄는 전혀 다른 종류의 새 둥지 속에 있는 아기뻐꾸기의 특별히 크게 벌린 빨간 입을 발견하게 된다. 이 새는 남의 둥지를 향해 방향을 바꿔 자기 자식에게 주려고 했던 먹이를 뻐꾸기의 입 속에다 넣어 준다.

이와 같은 ‘불가항력설irresistibility theory'은 양모가 ’마약 중독자‘처럼 행동하여 아기뻐꾸기가 그 중독자의 “비행”이라고 말한 초기 독일 조류학자들의 견해와 일치한다.

                                                                              - 392



문제의 전체를 정리하는 하나의 방법은 ‘자기 복제자’와 ‘운반자behicle'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자연 선택의 근본적인 단위로 생존에 성공 또는 실패하는 기본적인 것, 그리고 때때로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를 수반하면서 동일한 사본의 계보를 형성하는 기본 단위를 자기 복제자라고 한다. DNA 분자는 자기 복제자이다. 자기 복제자는 일반적으로 뒤에서 기술하는 이유에 의해 거대한 공동체적 생존기계, 즉 운반자 속에서 집단화한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운반자는 우리 자신과 같은 개체의 몸이다. 그러나 몸은 자기 복제자가 아니다. 그것은 운반자인 것이다. 이 점은 지금까지 오해되어 왔기 때문에 특히 강조해 둔다. 운반자 그 자신은 스스로를 복제하지 못한다. 운반자는 자기를 구성하는 자기 복제자들을 증식하도록 작용한다. 자기 복제자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또한 세계를 지각하지도 못하며 먹이를 잡거나 또는 포식자로부터 도망치지도 않는다. 자기 복제자는 그와 같은 모든 것을 하는 운반자를 만든다.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해서 생물학자는 그 관심을 운반자의 수준에 집중하는 것이 편리하다. 그러나 다른 목적에서 생물학자는 자기 복제자의 수준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편리하다. 유전자와 생물 개체는 다윈의 드라마에서 같은 주역의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가 아니다. 양자는 서로 다르고 보완적이며, 많은 점에서 똑같이 중요한 역할, 즉 자기 복제자라는 역할과 운반자라는 역할을 배당받는다.                               

                                                                              - 399



왜 세포는 집단을 이루는가, 왜 쿵쿵거리며 움직이는 로봇이 됐는가?

……

세포가 클럽을 만드는 이점은 몸의 크기에 그치지 않는다. 클럽 속의 세포는 특수화되어 이에 따라 각각의 특이한 임무를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된다. 특수화된 세포는 클럽 중의 다른 세포들을 위해 봉사하고 동시에 다른 전문 세포들의 능률적인 일에서 이익도 얻는다. 만일 많은 세포가 있으면 어떤 세포는 먹이를 발견하는 감지기로서 특수화하고, 다른 세포는 메시지를 전하는 신경으로서, 또 다른 세포는 촉수를 이용해 움직이고 잡는 근육 세포로, 먹이를 분배하는 분비 세포로, 더 나아가 그 소화된 액을 흡수하는 세포로 특수화될 수 있다.

……

코끼리 한 마리의 몸에 얼마나 많은 세포가 있는가에 상관없이 그 생애를 단일 세포인 수정란에서 시작했다. 이 수정란이 좁은 병목이고, 이것이 배 발생의 과정을 통해 몇 조의 세포로 불어나서 한 마리의 코끼리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세포가 얼마나 많은 특수화된 세포로 이루어져 성체 코끼리가 달릴 수 있게 하는, 상상도 못할 상세한 일에 협조하든지 간에 이들 모든 세포의 노력은 오직 단일 세포(정자 또는 알)의 생산이라는 최종 목표로 수렴된다. 코끼리는 그 시작에 있어서 단일 세포, 즉 수정란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 목표 또는 최종 산물을 의미하는 그 목적도 다음 세대의 수정란이라는 단일 세포들의 생산에 있다. 코끼리의 폭넓고 거대한 생활사는 처음과 끝 모두에 좁은 병목이 있다. 이 병목은 모든 다세포 동물과 거의 모든 식물의 생활사의 특징이다.    - 405, 406



모든 생명의 근본적인 단위인 원동력은 자기 복제자이다. 우주에서 자신의 사본을 만들 수 있는 자는 어떤 것이든지 자기 복제자이다. 자기 복제자는 최초로 우연히 작은 입자들이 마구 부딪혀서 출현한다. 자기 복제자가 일단 존재하게 되면 그것은 스스로의 복제를 한없이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복제 과정도 완전하지 않으며 자기 복제자들의 집단은 서로가 다른 몇 개의 변이를 품게 된다. 이 같은 변이의 어떤 것은 자기 복제의 능력을 잃어서 그들 자신이 소멸할 때 그 변종도 아울러 소멸하고 만다. 다른 변이는 아직 복제를 할 수는 있으나 효율이 나쁠 수 있다. 또 다른 변종은 새로운 묘법을 획득하여 자기의 조상이나 동시대의 다른 변종보다 훨씬 효율이 좋게 자기 복제를 한다. 집단 중에서 우세하게 되는 것은 그들의 자손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계는 가장 강하고 재주 있는 자기 복제자로 채워져 나가게 된다.

……

어떤 자기 복제자가 이 세상에서 성공할 것인지의 여부는 그 세계가 어떤 세계―이미 존재하는 조건―인가에 달려 있다. 이런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자기 복제자와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일 것이다. 영국인과 독일인 조정 선수의 예와 마찬가지로 서로가 이익을 주고받는 자기 복제자끼리는 서로의 존재하에서 우위를 점하게 될 것이다.

……

생물 물질의 개별 운반자 속에 이처럼 포장해 넣는 것은 현저히 뚜렷한 모습이기 때문에, 생물학자가 이 세상에 등장하여 생물에 관한 물음을 시작했을 때 그들의 물음은 대부분 운반자, 즉 생물 개체에 관한 것이었다. 생물학자의 의식에 의하면 생물 개체가 먼저 등장하였고, 자기 복제자(현재로는 유전자로 알려짐)는 생물 개체가 쓰는 장치의 일부로 인정됐다. 생물학을 다시 올바른 길로 돌려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중요성에서도 자기 복제자가 앞선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명심하기 위해서도 의식적인 정신적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스스로를 명심시키는 하나의 방법은 오늘에 있어서까지도 한 유전자의 표현형 효과가 반드시 모두 그것이 위치하는 개체의 몸 속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말해 사실상 유전자는 개체의 체벽을 통과하여 바깥 세계에 있는 대상을 조작한다. 대상의 일부는 생명이 없는 것이고, 또 어떤 것은 다른 생물이며, 어떤 것은 매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아주 작은 상상력만 있다면 방사상으로 뻗은 확장된 표현형의 힘의 그물눈 중심에 위치하는 유전자를 볼 수 있다. 세계 속에 있는 하나의 대상물은 여러 생물 개체 속에 위치하는 여러 유전자로부터 오는 영향력의 그물이 집중하는 중심인 것이다. 유전자의 긴 팔에는 뚜렷한 경계가 없다. 모든 세계에는 멀리 또는 가깝게 유전자와 표현형 효과를 연계하는 인과의 화살이 종횡으로 교차하고 있다.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실제적으로 중요하지만, 필연이라 하기에는 이론상 불충분한 사실을 하나 추가해 두자. 그것은 이들 인과의 화살이 뭉쳐져 왔다는 사실이다. 이미 자기 복제자는 바닷속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거대한 군체(개체의 몸) 속에 포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표현형 효과의 결과는 세계 전체에 균일하게 분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개의 경우 그 동일 개체에 응결해 왔다. 그러나 이 지구에서는 그렇게도 낯익은 그 개체가 존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주의 어떤 장소이든 생명이 생기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유일한 실체는 불멸의 자기 복제자뿐이다     

                                                                      - 414 ~ 416.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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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지은이) | 민음사, 636쪽

한국작가시리즈3 - 洙映寸鐵

김수영 산문 모음



駱駝過飮 



Y여, 내가 어째서 그렇게 과음을 하였는지 모르겠다. 예수교 신자도 아닌 내가 무슨 독실한 신앙심에서 성탄제를 축하하기 위하여 술을 마신 것도 아니겠고, 단순한 고독과 울분에서 마신 것도 아니다. 어쨌든 근 두달 동안이나 술을 마시지 않다가 별안간에 마신 과음이 나의 마음과 몸을 완전히 허탈한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나는 지금 낙타산이, 멀리 겨울의 햇빛을 받고 알을 낳는 암탉모양으로 유순하게 앉아있는 것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이는 다방의 창 앞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Y여, 어저께는 자네집 아틀리에에서 춤을 추고 미친 지랄을 하고 나서 어떻게 걸어나왔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어떤 자동차 운전수하고 싸움을 한 모양이다. 눈자위와 이마와 손에 상처가 나고 의복이 말이 아니다.

오늘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가 누워있는 곳은 나의 집이 아니라 동대문 안에 있는 고모의 집이었고 목도리도 모자도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기억이 전혀 없다. 머리가 무거웁고 오장이 뒤집힐 듯 메스꺼워서 오정이 지나고 한참 후에까지 누워있었다.

옷이 이렇게 전부 흙투성이가 되었으니 중앙지대의 번화한 다방에는 나갈 용기가 아니 나고 나가기도 싫고 몸도 피곤하여 여기 이 외떨어진 다방에나 잠시 앉았다가 집으로 들어갈 작정이다.

인제는 궁둥이를 붙이고 있는 데가 내 고장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를 가서 어떻게 앉아있어도 쓸쓸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몹시 쓸쓸하다

B양의 생각이 난다. B양이 어저께 무슨 까닭으로 참석하지 않았는지? 그러고보니 나는 어제 억병이 된 취중에도 B양을 보러 갔던가?그렇다면 이렇게* 이 외떨어진 다방에 고독하게 앉아서 넋없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B양에 대한 그리움이 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B양의 눈맵시, 그리고 그 유닉하게 생긴 입에 칠한 루즈가 주마등과 같이 나의 가슴을 스쳐간다.

Y여, 그리고 자네의 애인인 림양이 춤을 추다 말고 나와서 외투와 핸드백을 집어들고 B를 부르러 간 것도 아주 먼 옛날에 일어난 일같이 술이 완전히 깨지 않은 이 머리 안에서 마치 안개 속에 숨은 불빛같이 애절하게 꺼졌다가는 사라진다.

나는 지금 무엇에 홀린 사람모양으로 이 목적 없는 글을 쓰고 있다.

이 무서운 고독의 절정 위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겠나?

자네의 모습이며 림양의 모습이며 B양의 모습이 연황색 혹은 연옥색 대리석으로 조각을 하여놓은 것처럼 신선하고 아름답고 부드러워 보인다.

이 아름다움으로 사람에게 느끼는 아름다운 냄새를 나는 어떻게 처리하여야 좋을지 모르겠다.

사람에게 환멸과 절망을 느낄수록 사람이 더 그리워지고 끊임없는 열렬한 애정이 솟아오르기만 하는 것이 이상하다.

갈 데가 없으니 다방에라도 가서, 여기가 세상을 내어다보는 유일한 나의 창이거니 생각하고 앉아있는 것인데,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은 언제나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있는 난로 가장자리는 아니고, 몸이 좀 춥더라도 구석쪽 외떨어진 자리를 오히려 택하여 앉기를 즐겨하는 나다. 이렇게 앉아서 고드름이 얼어붙은 창을 어린아이같이 내다보는 것이다.

창을 내다보며 공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무기체와 같이 그냥 앉아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앉아있는 창밖에는 희고 노란 빛을 띤 낙타산이 바라보인다.***

지금 내 몸은 전부가 공상의 덩어리가 되어있다. 내가 나의 작은 머리를 작용시켜서 공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전신이 그대로 공상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거추장스러운 말을 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 사실인즉 미안하지만 자네는 이 마음을 알아줄 것이다.

목적이 없는 글이니 목적이 없는 정서를 써보아도 좋을 것이라고 나는 스스로 자인한다.

어느 거리, 어느 다방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계집아이들.

붉은 양단저고리에 비로오드 검정치마를 아껴가며 입고 있는 계집아이들. 내가 이 아이들을 볼 때는 무심하고 범연하게 보고 있지만 이 아이들이 생각에 잠겨있는 지금의 나를 볼 때는 여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걸세.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공연히 엄숙한 마음이 드네. 그리고 그들이 스치고 가는 치맛바람에서 나는 온 인간의 비애를 느끼고 가슴이 뜨거워지네.

술이 깨어날 때 기진맥진한 이 경지가 나는 세상에서 둘도 없이 좋으이.

이것은 내가 <안다는> 것보다도 <느끼는> 것에 굶주린 탓이라고 믿네. 즉 생활에 굶주린 탓이고 애정에 기갈을 느끼고 있는 탓이야.

그러나 나는 이 고독의 귀결을 자네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려네.

거기에는 너무 참혹한 귀결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아!

내 자신에게 고백하기도 무서워. 이를테면 죽음이 아니면 못된 약의 중독 따위일 것이니까.

자네는 나를 「잊어버린 주말」에 나오는 레이 미란드 같다고 놀리지만 정말 자네 말대로 되어가는 것같애.

운명이란 우스운 것이야.

나도 모르게 내가 빠지는 것이고, 또 내가 빠져있는 것이고 한 것이 운명이야.

실로 운명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야. 그것은 말할수없이 가벼운 것이고 연약한 것이야.

Y여, 자네의 집에서 열린 간밤의 성탄제 잔치는 화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단아하고 구수한 것이었어.

나는 이대로 죽어도 원이 없을 것 같으이. 이것은 결코 단순한 비관이 아닐세.

낙타산에 붙어있던 햇빛이 없어지고 하늘은 금시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이 무거우이.

Y여, 나의 가슴에도 언제 눈이 오나?

새해에는 나의 가슴에도 눈이 올까?

서러운 눈이 올까?

머릿속은 방망이로 얻어맞는 것같이 지끈지끈 아프고 늑골 옆에서는 철철거리며 개울물 내려가는 소리가 나네.

이렇게 고통스러운 순간이 다닥칠 때 나라는 동물은 비로소 생명을 느낄 수 있고 설움의 물결이 이 동물의 가슴을 휘감아 둘 때 암흑에 가까운 낙타산의 원경이 황금빛을 띠고 번쩍거리네.

나는 확실히 미치지 않은 미친 사람일세 그려.

아름다움으로 병든 미친 사람일세.




원주 

* 뼈가 말신말신하도록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아니된 것도 B양이 오지 않은 외로움에 못이겨 무의식중에 저지른 일종의 발악이었던가.

** 아무튼 나는 내 자신이 우습다. 한없이 우습기만 하다.

*** 낙타산은 나와는 인연이 두터운 곳이다. 낙타산 밑에서 사귄 소녀가 있었다. 나는 그 소녀를 따라서 지금으로부터 약 십오년 전에 동경으로 갔었다. 내가 동경으로 가서 얼마 아니 되어 그 여자는 서울로 다시 돌아왔고, 내가 오랜 방랑을 끝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그는 미국으로 가버렸다. 지금 그 여자는 미국 태평양 연안의 어느 대도시에서 결혼생활을 하고 있으며, 영원히 이곳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편지가 그의 오빠에게로 왔다 한다. 나와 그 여자의 오빠는 죽마지우이다.


<1953. 12>










治癒될 기세도 없이





없는 사람이 잘 살아보겠다고 하는 운동을 노골적으로 억압하는 정부의 처사가 상식화되어가고 있는 사태처럼 요즈음 우리들을 다시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국민들이 무엇보다도 염려하는, 앞으로 다가올 경제위기를 가장 자신 있게 막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씩씩한 정치가들이 국회 안에는 산더미같이 와글거리고 있는데 바깥의 현실은, 비근한 예가 慶北敎組나 京紡파업문제 같은 것만 하더라도 당국의 태도는 여전히 <빨갱이>에 대하는 태도나 조금도 다름이 없다. 우리는 이것을 <過政>의 태도라고 볼 수가 없고, 마치 새로 설 新政府의 서곡이나 부지공사처럼밖에 느껴지지 않는 것은 웬일일까. 국무총리를 新派가 잡든 舊派가 잡든 우리들의 관심은 그런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들의 총신경은 진정한 민주운동을 누가 어떠한 구실로 어느 정도까지 다시 탄압하기 시작하느냐의 여부에 쏘려있다. 우리들은 오랫동안 억압 밑에서 살아온 민중이라 억압의 기미에 대해서는 지극히 민감한 것도 사실이지만 반면에 지극히 비굴한 것도 사실이다. 이와같이 자칫하면 과거의 타성에서 수그러지기 쉬운 국민의 혁명적 사기를 북돋아주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러한 운동에 원수가 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나의 생각에는 교조운동같은 것이 서푼어치 가치도 안 되는 청리선출보다 훨씬 더 중요하면 중요했지 못한 것은 아닌데 이천만의 늠름한 대변인들은 지금 명분이 서지 않는 감투싸움에만 바쁘다. 이런 말을 하는 나는 교조원도 교원도 아니지만 혁명에 대한 인식착오로 <과정>의 피해자의 한 사람이 된 것만은 그들과 동일하다. 4월혁명 후에 나는 세 번이나 신문사로부터 졸시를 퇴짜를 맞았다. 한 편은 <과정>의 사이비 혁명행정을 야유한 것이고, 한 편은 민주당과 혁신당을 야유한 것이고, 나머지 한 편ㅇ느 청탁을 받아가지고 쓴 동시인데, 이것은 李承晩이를 다시 잡아오라는 내용이 아이들에게 읽히기에 온당하지 않다는 이유에서 통과가 안됐다. 그런데 이 동시를 각하한 H신문사는 社是로서 李起鵬이까지는 욕을 해도 좋지만 이승만이는 욕을 해서는 안 된다는 內規가 있다는 말을 그후 어느 글쓰는 선배한테 듣고 알았다.

여하튼 詩作 15년 간에, 그것도 두 달 사이에 세 편의 시를 퇴짜를 맞아본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도 검열에 통과가 안됐다면 싸우기라도 해보겠지만 아는 친구들이 허다하게 있는 신문사에서 멱국을 먹었으니 하소연할 데도 없다. 아무튼 정치하는 놈들이 살인귀나 강도같이 보이는 나의 偏心症은 아직 손톱눈만큼도 치유될 기세가 없으니 초조하기만 하다.

金利錫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평소부터 죽음에는 동요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같이 생각했는데 건방진 생각이었다. 利錫형이 죽고 그후 기관지염으로 몸이 성치 않아서 기침을 자주 하고 있으려니까 나도 그를 따라가는 것같은 생각이 들고 아직도 죽음에 대한 수양이 모자라는구나 하는 절실한 부끄러운 경험을 했다. 이럴 때면 어쩌다 주워읽는 토막글까지도 어찌나 그렇게 내가 생각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만 읽혀지는지! 馬海松씨의 「살고 있다며」라는 수필을 무심코 읽어보고 깜짝 놀랐고, 한편 또 여간 반갑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利錫형이 舊자유신문사 건너편 화ㄱ집에서 결혼잔치를 할 때에 주례역할을 해준 것이 이 馬영감이었다. 그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가 죽은 뒤에 朴女史를 만나러 가서 빈 방에서 앨범을 뒤적거리다가 보니 그때의 사진이 있었다. 馬선생의 왼편에는 崔貞熙여사가 앉아있고 바른편에 노신랑신부가 앉아있고 그 뒤에 元應瑞 朴南秀 金鎭壽 千寬宇 石榮鶴 朴淵禧 黃廉秀 李明成(白水社 주인) 金洙映 등등의 돌팔이들이 제법 의젓하게 서있었다. 약 7년밖에는 안 될 것이다. 우리집 큰놈이 국민학교에 들어갈 임시였으니까 많아야 7년밖에는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이 상당히 오래된 것같이 생각된다. 모두 다 바쁜 탓도 있고, 세상이 그동안에 많이 변한 탓도 있지만 이러한 착각의 원인은 사실은 朴여사와 그가 중년결혼을 한 탓이라고 생각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의 결혼은 그때보다 적어도 한 10년쯤 전에 한 것같은 착각이 든다. 이러한 착각은 나만의 착각은 아닌 것같다. 利錫도 아마 이런 착각 속에서 살았으리라고 믿어진다.

그러니까 7년 전부터 그는(친구들의 말을 빌리자면) 급작스럽게 변했다. 그가 변하기 시작한 7년 전 그때부터 그는 그전처럼 심하게 술을 마시지 않았고 옷차림이 깨끗해지고 몸이 나기 시작했다. 그의 들러리의 朴淵禧 金鎭壽 金耀燮 그리고 나같은 술깡패들은 利錫이가 갑자기 사람이 변하고 매력이 없어졌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변한 것은 利錫이뿐이 아니었다. 모두다 그전처럼 폭음을 하지 않게 되었고 제각기의 생활에 바빠졌다. 그러나 유독 利錫이만이 지탄의 대상이 된 것은 전날의 주정 때문이다. 주정은 나도 심하고 金鎭壽의 주정도 유명했지만 利錫의 주정도 굉장했다. 주정을 하다가 얻어맞고 다친 큰 사건이 내가 아는 것만 해도 한 너댓번가량 된다. 한번은 이마가 터져서 병원에서 꿰매고 나온 채로 명동의 길바닥 위에 드러누워있는 것을 내가 우리집으로 데리고 간 일이 있었고, 그후 코를 얻어맞아서 콧날이 부러져가지고 고생을 한 일도 있었고, 넓적다리를 다쳤다고 절뚝거리고 다니는 것도 보았다. 이런 주정이 살림을 하자마자 없어졌다. 그는 마당에다 장미를 가꾸기 시작했고 신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집에는 꼭 시간을 대어서 들어갔고 술은 마셔도 과음은 하는 일이 없고, 계절마다 멋있는 색깔의 넥카이를 갈아 매고 나와서 멋쩍은 듯이 픽 웃어 보이고는 했다. 나는 넥타이같은 것에 신경을 쓰는 따위의 취미는 벌써 무시하고 사는 지 오래이지만 利錫이 풀빛 단색 넥타이를 매고 나오는 것을 보면 어쩐지 무슨 향수같은 것이 느껴져서 공연히 다정하게 느껴지고는 했다. 신경을 쓰는 것은 넥타이뿐이 아니었다. 모자도 나중에는 베레모를 쓰고 나왔고, 털스웨터도 구제품시장에서 발굴해옴직한 씨의 옷차림은 얼핏 보면 얼빠진 것 같기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모두가 신경을 쓰고 있는 것들이었다. 나중에는 베레모도 집어치우고 등산모로 바꾸었지만, 나는 그가 소설가가 아닌 것처럼 보았다. 좀 나쁘게 말하자면 그는 《文學界》나 《群像》의 사진에 나오는 고급 소설가들을 본따려고 은근히 애를 쓰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는 그런 정도로 나르시스적이었다.

옷뿐이 아니었다. 산보를 하 과일을 깎아 먹으러 들르는 가게도 그가 들어가는 가게는 보통 가게와는 달랐다. 분위기가 되어있는 가게야만 했다. 그는 결혼을 하기 전에 한동안 마포에서 나하고 한 동네서 산 일이 있었지만 그렇게 고생을 할 때에도 그는 미식을 하는 취미를 버리지 않았다. 마포 전차종점에 오래된 설렁탕집이 있었는데 그는 나하고 같이 들어올 때면 곧잘 이 집에를 들러서 그가 좋아하는 우설을 먹으면서 중아침을 했다. 이러한 의식주에 대한 그의 취미벽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모든 것에 실속과 취미가 맞아떨어져야 했다. 그와 함께 문학산보를 하는 동안에 나는 나중에는 길을 가다가도 그가 좋아함직한 음식점이나 과일가게를 그보다도 먼저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러한 취미들도 나쁘게 말하자면 로스트 제너레이션 시대의 유물같은 인상을 주어서 나는 무슨 복습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따라다녔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平壤이 있었던 모양이고, 이 평양에 대한 향수가 그의 취미에까지도 그러한 구태를 버리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평양을 몹시도 못잊어 했다. 혹시 책가게같은 데를 들러서 古書를 찾다가 평양시가지 사진이라도 나오면 싫증이 날 정도로 지나치게 지루한 설명을 했다. 이런 때면 평양의 옛친구들의 얘기에서부터 아버지가 돈을 번 이야기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평양기담은 정말 장편소설에 가까운 찬란한 연대기였다. 그러나 利錫은 그가 두고 온 처자의 이야기는 좀처럼 하지 않았다. 또 李仲燮의 이야기도 자세히 들어본 일이 없다. 黃廉秀의 말에 의하면 중섭을 위해서 제일 헌신을 많이 한 사람이 利錫이었다고 하는데, 그러고보면 利錫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과 중섭이 이야기만은 아무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利錫형을 내가 처음 본 것은 환도 후에 文學藝術社가 미도파 건너편의 漢稷부인이 하던 술집 2층에 있을 때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朴泰鎭의 소개로 元應瑞씨를 찾아갔을 때 문학예술의 편집실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 풀이 죽은 회색빛 라글란 오바에 거무죽죽한 회색 중절모를 쓰고 창문턱 앞 의자에 혼자 앉아있었다. 나는 첫눈에, 저치도 나만큼 가난하고 나만큼 고독하고 나만큼 울분이 많고 나만큼 뗑깡이 심한 치겠구나 하고 느꼈다. 그후 얼마 있다가 자유시장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는데 그는 어떻게 나를 알았던지 다짜고짜로 내 팔을 끌고 술집으로 데리고 가서 소주를 마구 마시더니, 내가 안내한 찻집에 가서는 내 입에다 미친 듯이 입을 맞추면서 창가에 늘어놓은 화분의 화초를 모조리 뿌리째 뽑아내꼰졌다. 그후 우리들은 만나면 꼭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면 꼭 해갈을 했다.

그러나 그의 주정과는 반대로 그의 소설은 너무나 차분하고 조용한 것이 조금도 과격한 데가 없었다. 지금 죽고 난 뒤의 그의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고운 사람이었구나 하는 감회가 제일 크다. 고운 얼굴의 선, 고운 인정, 고운 옷맵시, 고운 취미, 고운 교우관계, 고운 연애, 고운 향수, 고운 문학―이렇게 쳐가면 곱지 않은 것은 괴팍한 그 주정벽밖에 없는데 그것도 원인은 지나치게 고운 데서 나온 게 아닌가―그의 모든 것은 이 고운 순정이라는 한마디로 통일될 수 있을 것같이 생각된다. 이처럼 그의 문학도 곱고 차분한 것이기는 했지만 내가 보기에 너무 야심이 없는 것같았다. 혹은 나는 그의 문학에서 감동을 받기 전에 너무 빨리 그의 인간미를 흡수하고 소화해버렸기 때문에 그의 문학을 정당하게 느낄 수 있는 위치를 오래 전에 상실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우리들은 피차가 자기들의 문학을 지나치게 멸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자학벽은 우리들의 공통적인 단점이었고, 그는 뇌일혈로 죽었다고 하지만 더 깊은 원인은 이 자학병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떼어버릴 수가 없다.) 그의 첫 창작집 「失碑銘」이 나온 것이 그가 마포에 있을 때인데 그가 준 책을 다 읽어보고도 늘 그의 사상이 더 궁금했고, 이쪽이야기보다도 저쪽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는데, 그의 단편집은 그러한 나의 개인적인 호기심을 하나도 풀어주지 않았다. 어떻게 그쪽에서 나왔나? 그와 술을 마실 때나 그의 작품을 읽을 때나 내가 알고 싶은 가장 안타까운 문제가 이것이었는데 그는 가족이나 중섭이 얘기를 하지 않은 것처럼 이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나보다도 더 겁이 많았다. 술이 취하면 나는 이북노래를 부르는 악벽이 있는데 그런 때면 利錫은 반드시 이튿날 정색을 하고 나에게 훈계를 했다. 내가 보기에는 利錫은 너무 소심했다. 그리고 그는 선천적으로 소시민적인 작가였다. 그가 동경하는 것은 예술이지 사상이 아니었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정복준이(井伏鱒二) 구보전만태랑(久保田萬太郞) 같은 계열의 작가의 격조있는 잔잔한 세계였다. 이런 작가는 移種을 하기가 힘이 든다. 그의 배양토는 <피양>이었는데 이 뿌리의 흙을 모조리 다 털고 나와보니 다시 새 흙에 뿌리를 박기까지가 퍽 힘이 들었다. 그리고 겨우 새 흙에서 물이 오를만하게 되자 그는 죽어버렸다.

그가 쓴 신문소설은 그야말로 생활상 하는수없이 쓴 것이었다. 그는 취직을 하기를 막무가내로 싫어했다. 『작가가 취직을 하는 것은 작가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지』 하면서 그는 취직한 친구들을 은근히 경멸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문소설로도 겨우 인정을 받기 시작하게 되자 이렇게 되고 말았다. 한국일보와 계약이 된 「대원군」을 쓰느라고 그는오랫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직접 지방으로 조사를 하러 다니기까지 했다. 최근에는 石榮鶴이하고 친하게 지냈고 이런 지방 유람에는 둘이서 같이 다니는 적이 많았다. 죽기 일주일 전에 향주라는 데를 가보자고 石하고 같이 우리집에를 들렀는데 비가 온 끝이라 강을 건너지 못해서 북한산성에 가서 놀다 왔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이 향주라는 곳도 「대원군」과 관계가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신문소설을 써도 그의 생활은 여전히 옹색해 보였다. 우리나라의 글쓰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그는 <신문소설>이 없으면 없는대로 불안했고 있으면 있는대로 자기 글을 못 쓰니까 불안했다. 월남 후 14년을 그는 내내 고생만 하다가 죽은 셈이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작가를 기를만한 자격이 없다. 이중섭 차근호 김이석이 무엇 때문에 어떻게 죽었나 보아라. 나는 김이석의 죽음을 목도하고 친구로서보다도, 이남태생의 한 주민으로서 부끄러움과 슬픔이 더 크다.

利錫도 좀더 오래 살았더라면 사상적인 작가는 못되었더라도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좀더 깊이 있는 고운 작품을 더 많이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할 수 있는 말보다 할 수 없는 말이 더 많았을 것이다. 바로 그의 추도문을 쓰는 이 글에서 내가 그에 대해서 할 수 없는 말이 할 수 있는 말보다 더 많은 것처럼.


附記―재주가 워낙 서투른 데다가 자서전이나 傳記物類는 성격적으로 좋아하지 않아서 잡지사의 청탁을 일단 거절했다가 다시 하는수없이 쓰게 되었다. 그러나 붓을 들고보니 고인에 대해서는 의외로 쓰고 싶은 일이 많은 것을 깨달았고 시간만 있으면 좀더 요령있게 자세히 가다듬어 쓰고 싶었는데 마감기일도 벌써 넘고 해서 미흡한대로 하는수없이 내놓게 되었다. 혹시 고인을 욕되게나 하지 않았나 두려웁다. 이런 글은 왜곡된 점이 있어도 너무 골자만 골라 써도 독자에게 뜻하지 않은 그릇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1964>

養鷄 辨明




날더러 양계를 한다니 내 솜씨에 무슨 양계를 하겠습니까. 우리집 여편네가 하는 거지요. 내가 취직도 하지 않고 수입도 비정기적이고 하니 하는수없이 여편네가 시작한 거지요. 그걸 세상은 내가 양계를 하는줄 알게 되고 나도 어느틈에 정말 내가 양계를 하느니 하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이걸 시작한 게 한 8년 가까이 되나봅니다. 성북동에서 이곳 마포 서강 강변으로 이사를 온 것이 그렇게 되니까요. 먼저 우리들은 돼지를 기르면서 닭을 한 열 마리가량 치고 있었지요. 몇 마리 되지 않는 닭이었지만 마당 한귀퉁이에 선 돼지우리간 옆에 집을 짓고 망을 쳐 주었지요. 그놈이 한 마리도 죽지 않고 잘 자랐어요. 겨울에는 망사간막이 위에서 자는 닭 등에 아침이면 눈이 소북이 쌓여있었습니다. 그래도 알을 잘 낳았어요. 하루 8,9개는 꼭 낳은 것같아요. 그런데 돼지는 되지 않았어요. 경험이 없어서 여편네가 가을돼지를 사지 않았겠어요. 돼지는 봄에 사서 가을에 파는 거라는데 우리는 가을에 사가지고 한겨울 동안 먹이를 길어 나르느라고 죽을 고생을 하고 봄에 팔았지요. 이익금이 (지금 돈으로) 4백원가량 되었던가요. 그래서 그때부터 돼지는 단념하고 닭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내가 닭띠가 돼서 그런지 나는 닭이 싫지 않았습니다. 먼첨에는 100마리쯤 길렀지요. 부화장에서 병아리를 사다가 안방 아랫목에서 상자 속에 구공탄을 피워 넣고 병아리 참고서를 펴보면서 기르는데 생각한 것보다 훨씬 힘이 들더군요. 그래도 되지 않은 원고벌이보다는 한결 마음이 편하지요. 나는 난생처음으로 직업을 가진 것같은 자홀감을 느꼈습니다. 아시다시피 병아리에는 白痢병이 제일 고질입니다. 흰 설사똥을 싸다가 똥구멍이 막혀 죽어버립니다. 사람으로 치면 이질같은 것인데 병아리의 경우에는 유전성에다가 전염성이 겸해있고, 똥을 밟던 발로 모이를 밟고 다니는 동물이라 만연도가 아주 빠릅니다. 심할 대면 하룻밤에 10마리도 더 넘어 죽어 나갑니다. 약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한번 걸린 놈은 약이 소용이 없습니다. 이 백리병이 끝나면 콕시즘이란 병이 또 옵니다. 이 병은 피똥을 깔기다가 죽는 병입니다. 이것은 유전성을 아니지만, 역시 전염성이라 백리만큼 애를 먹입니다. 그뿐이겠습니까. 또 압사라는 게 있습니다. 이것은 병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눌려 죽는 것입니다. 구공탄불이 꺼지거나 화력이 약해지거나 해서 갑자기 온도가 내려가게 되면 병아리들은 서로 한군데로 몰키게 되고 눈깜짝할 동안에 희생자가 늘비하게 생깁니다. 기막힌 일이지요. 그러넫  이런 사고가 날 때마다 경험없는 우리 부부는 네가 잘못했느니 내가 잘못했느니 하고 언성을 높이고 싸움을 합니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이지요.

그래도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게 자라나는 병아리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가는줄 모릅니다. 병아리는 희망입니다. 이 노란 병아리들의 보드러운 털빛이 하얗게 변색을 하는 것은 성장하는 모습입니다. 여편네도 기분이 좋고 나도 기분이 좋습니다. 이런 때의 기분은 백만장자도 부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생은 병아리를 기르는 기술상의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모이를 대는 일이 또 있습니다. 나날이 늘어가는 사료의 공급을 하는 일이 병보다도 더 무섭습니다. 『인제 석달만 더 고생합시다. 닭이 알만 낳게 되면 당신도 그 지긋지긋한 원고료벌이 하지 않아도 살 수 있게 돼요. 조금만 더 고생하세요.』 하는 여편네의 격려말에 나는 용기백배해서 진지한 원고를 또 씁니다. 그러나 원고료가 제때에 그렇게 잘 들어옵니까. 사료가 끊어졌다, 돈이 없다, 원고료는 며칠 더 기다리란다, 닭은 꾹꾹거린다, 사람은 굶어도 닭은 굶길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여편네가 돈을 융통하러 나간다…… 이런 소란이 끊일 사이가 없습니다. 난리이지요. 우리네 사는 게 다 난리인 것처럼 난리이지요.

닭을 길러보기 전에는 교외같은 데의 양계장을 보면 그것처럼 평화롭고 부러운 것이 없었는데 지금은 정반대입니다. 양계는 저주받은 사람의 직업입니다. 인간의 마지막 가는 직업으로서 양계는 원고료벌이에 못지않은 고역입니다. 이제는 오히려 이 고역에 매력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는 양계를 통해서 노동의 엄숙함과 그 즐거움을 경험했습니다. 내가 양계를 시작한 지 2년인가 3년 후에 나는 老母에게 병아리 천 마리를 길러드린 일이 있습니다. 생전 孝라고는 해본 일이 없는 자책지심에서 효자의 흉내라도 한 번 내보아야지 될 것 같았습니다. 그때도 돈 때문에 병아리를 철늦게 구입해왔고, 공교롭게도 장마철에 병아리들이 콕시즘을 치르게 됐습니다. 콕시즘이란 병은 습기나 냉기와는 상극입니다. 이 병은 날이 궂기만 해도 만연도가 빨라지는 병으로서 뉴캣슬과 지프스와 함께 양계의 3대 병역 중의 하나에 들어가는 무서운 병입니다. 양계가들은 이 병의 발병기가 장마철과 더블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3월 초순쯤 해서 일찌감치 병아리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나는 콕시즘이란 병이 얼마큼 무서운 병이라는 것을 실제로 체험해 보지는 못했습니다. 게다가 나는 천 마리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병아리를 처음으로 시작해보는 것입니다. 어설픈 효의 욕심이 시킨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노모도 물론 양계를 업으로 하기는 처음입니다. 그때까지 시내에서 가게를 하시던 노모는 남 볼 상도 흉하고 세금도 많다고 하시면서 교외로 나가서 불경이나 읽으면서 한적하게 살기를 원했고,이런저런 궁리를 한 끝에 내가 권하는 양계를 해보기로 했던 것입니다. 창동에다 양계장을 새로 짓고, 병아리는 40일 동안만 내가 길러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나는 내 일보다도 더 힘이 났습니다. 판에 박은 듯한 난관을 치러가면서 40일 동안을 길러내고 보니 약 1할의 사망률을 낸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40일이 지난 병아리는 어른 주먹보다도 더 크게 자랐습니다. 이 병아리의 대군을 밧테리째 트럭에 싣고 우리들은 개선장군모양으로 창동의 신축양계장으로 입성했습니다. 그러나 새로 진 鷄舍는 미비한 점이 많았고, 비가 오자 지붕이 새는 곳이 많았습니다. 짚을 깔고 보온을 철저히 하느라고 집안식구들이 총동원이 되어서 밤잠도 못 자고 분투했지만 아침이면 3,40마리의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양계장에서 닭이 죽어갈 때는 상가집보다도 더 우울합니다. 약을 사러 다니는 일에만 꼭 한 사람이 붙어있었습니다. 닭약은 수용자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대개는 제약회사들이 부정기적으로 이것을 생산해 내놓습니다. 꼭 약이 필요할 때 사료상이나 도매집이나 약회사에 약이 절품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입니다. 이럴 대에 약을 구하러 다니는 심고란 이루 말로서 다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노모와 둘이서 약 20일 동안을 눈코뜰새 없이 싸웠습니다. 어머니는 나보다 더 강했습니다. 나는 곧잘 신경질을 냈지만 노모는 한번도 신경질을 내지 않았습니다. 내가 계사바닥을 삽으로 긁다가 팔이 아파서 쉴 때도 노모는 여전히 일을 계속하면서 내 삽이 불편할 것이라고 당신 삽과 바꾸어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여유가 있어 보였습니다.

장마를 치르고 나니 겨우 남은 것이 7백마리밖에는 안됩니다. 그래도 그나마라도 건진 것이 다행이라고 노모는 기뻐했고 나의 수고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이 7백마리로 시작한, 수지가 안 맞는 양계를 노모는 오늘날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집을 보고 어떤 친구는 양계 가족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근 10년 경영에 한 해도 재미를 보지 못한 한국의 양계는 한국의 원고료벌이에 못지않게 비참합니다. 이 비참한 양계를 왜 집어치우지 못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해에는 특히 사료값 앙등으로 극심한 경영난에 빠졌습니다. 군색한 원고료벌이의 보탬이 되기는커녕 원고료를 다 쓸어넣어도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이 비참한 양계를 왜 집어치우지 못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양계일을 보느라도 둔 담양에서 올라온 머슴아이가 우리집에서 야간중학교를 마치고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작년에 야간대학에를 들어갔는데 이 아이의 인건비가 안 나옵니다. 새학기에 수업료를 또 내주어야겠는데 이것이 난감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얼마전에는 모이를 사러 조합에 갔다가 모이 두 가마니를 실어놓은 것을 오줌을 누러 간 사이에 자전거째 도둑을 맞았다고 커다란 대학생놈이 꺼이꺼이 울고 들어왔습니다. 집안이 온통 배 파선한 집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집에도 양계를 하니까 돈이 있는줄 알고 또 얼마전에는 도둑까지 들었습니다. 잠을 자다가 떠들썩하는 소리가 나서 일어나보니 여편네가 도둑이 들었다고 고함을 치고 있습니다. 도둑이 어디 들었느냐고 물으니 만용이(만용이란 닭시중을 하는 앞서 말한 대학생) 방쪽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나는 아랫배에 힘을 잔뜩 주고 여편네와 함께 계사 끝에 떨어져있는 만용이방쪽으로 기어갔습니다. 어둠을 뚫고 맞지도 않는 신짝을 끌고 가보니 만용이는 도둑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도둑이라는 사람은 나이 50이 넘은 사나이였습니다. 헙수룩한 양복을 입고 외투는 입지 않고 만용의 방 밖에 서서, 무슨 동네에서 말이라도 온 사람처럼 태연하게 서있었습니다. 『당신 뭐요?』하고 나는 위세를 보이느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나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도둑의 얼굴이 너무 온순하고 너무 맥이 풀려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무말이 없습니다. 『여보 당신 어디 사는 사람이오? 이 밤중에 남의 집엔 무엇하러 들어왔오?』 말이 없습니다. 『닭 훔치러 들어왔오?』 말이 없습니다. 여편네가 고반소에 신고해야겠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래도 말이 없습니다. 나는 버럭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흉기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아래위를 훑어보았으나 그런 기색도 없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거 보세요, 이런 야밤에……』 하고 존댓말을 썼습니다. 그제서야 사나이는 『백번 죽여주십쇼, 잘못했습니다!』하고 비는 것이었습니다. 말투가 퍽 술이 취한 듯했으나 얼굴로 보아서는 싯뻘건 얼굴이 술이 취해 그런지 추위에 달아 그런지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즉각적으로 이 사람이 밤길을 잃은 醉漢을 가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집이 어디요?』 쑥스러운 질문이었습니다.

『우이동입니다.』

『우이동 사는 사람이 왜 이리로 왔오?』

『모릅니다…… 여기서 좀 잘 수가 없나요?』이 말을 듣자 나는 어이가 없어졌습니다. 『여보, 술 취한 척하지 말고, 어서 가시오.』 도둑은 발길을 돌이켰습니다. 그리고 두어서너 발자죽 걸어나가더니 다시 뒤를 돌아다보고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하고 태연스럽게 물어보았습니다.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나는 도둑의 이 말이 무슨 상징적인 의미 같이 생각되어서 아직까지도 귀에 선하고, 기가 막히고도 우스운 생각이 듭니다. 도둑은 철조망을 넘어왔던 것입니다.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이 말은 사람이 보지 않을 제는 거리김없이 넘어왔지만 사람이 보는 앞에서 다시 넘어나가기는 겸연쩍다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구태여 갖다붙이자면 내가 양계를 집어치우지 못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장면을 바꾸어 생각한다면, 도둑은 나고 나는 만용입니다. 철조망을 넘어온 나는 만용이에게 『백번 죽여주십쇼, 백번 죽여주십쇼.』 하고 노상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하고 떼를 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1964>

장마 풍경





장마가 지면 강물이 내려가는 모양이 장관이다. 황갈색으로 변색한 강물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내려가는 것을 보면 사자떼들이 고개를 저으면서 달려내려가는 것같다. 높아진 수위는 사자의 등떼기처럼 늠실거린다. 군데군데 하얀 거품이 이는 것은 숨가쁜 사자의 입거품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보면 이것은 수천마리의 사자의 떼가 아니라 한 마리의 사자같이 보이기도 한다. 한 마리의 사자. 그러면 저 거센 물결들은 사자의 휘날리는 머리털이라고도 느껴진다. 그런가하면 그 사자는 머리쪽과 궁둥이쪽이 서로 늘어나서 동서로 잡아다닌 엿가락처럼 자꾸자꾸 늘어나기만 하고, 그 신장되는 등 위를 물결이 흘러내려가는 것 같다. 혹은 뛰어가는 사자는, 꿈속에서 달려가는 것처럼 열심히 달려가기는 하지만 밤낮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계속되는 연상을 주는 강물은 삼라만상의 요술을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지만, 나는 어느덧 연상에도 금욕주의자가 되었는지 너무 복잡한 연상은 삼가기로 하고 있고, 그저 장마철에 신이 나게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 사자가 달려가는 것같다는 정도의 상식적 연상으로 자제하고 있다.

<사람은 바빠야 한다>는 철학을 나는 범속한 철학이라고 보지 않는다. 풍경을 볼 때도 바쁘게 보는 풍경이 좋다. 일을 하다가 잠깐 쉬는 동안에 보는 풍경. 그리고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일을 계속하게 하는 풍경.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일을 하면서 보는 풍경인 동시에 풍경 속에서 일을 하는 것이다. 수양버들이 늘어진 연못가의 기름진 푸른 잔디 그늘에서 피크닉을 나온 부인이 부지런히 뜨개질을 하고 있는 영화의 장면 같은 것은 나에게는 평범한 풍경이면서도 결코 평범한 풍경이 아니다. 풍경을 보는 것도 좋지만 풍경을 사는 것은 더 좋다.

연극은 관객의 참여가 없이는 안 된다는 말을 흔히들 한다. 그러나 영화는 연극에 비하면 참여의 면에서 훨씬 소극적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풍경을 보는 것은 영화에 속하고 풍경을 사는 것은 연극에 속한다는 생각이 든다. 연극도 서구평론가들이 쓴 것을 보면, 요즘 우리나라의 시민회관이나 국립극장의 무대같은 액자무대는 참여를 할 수 있는 연극무대가 아니고, 셰익스피어시대의 삼면이 다 터진 애프론식 무대가 정말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무대라고 한다. 그러니까 현대연극은 우선 무대조건부터 개선해야 하며 서양에서는 이미 개량무대가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연극평론가들이 참여 참여 하는 것은 어떤 무대를 가리키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풍경에 사는 것이 더 좋다는 말을 하면서도 나는 어쩌면 이들 우리나라의 연극평론가들과 똑같은 과오를 내가 범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도 없으면서 일이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혖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대조건도 구비되지 않은 무대에서 참여를 하라는 그들이나, 일도 없는 사회에서 풍경에 살라는 나나 조금도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돈 생기는 일이 없을 뿐이지 그렇지 않은 일은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런 생각을 요즘 집의 아이놈의 글을 알으켜 주면서 생각했다. 여편네가 하도 머리가 나쁘다고 어린놈을 윽살리는 것이 불쾌해서 만사를 제외하고 학기말 시험을 보는 중학교 1학년 놈을 도와주기 시작한 것이 2주일 동안을 계속해보았다. 돈벌이를 위한 일이 아닌 이렇게 순수한 일을 해보니 힘도 들지만 원고료벌이에 못지 않게 신이 났다. 아이놈이 시험이라도 잘 보고 오는 날이면 詩를 썼을 때에 못지않은 흐뭇한 감이 든다.

아무 일도 안하느니보다는 도둑질이라도 하는 게 낫다는 유명한 말이 있지만, 하여간 바쁘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우선 풍경을 뜻있게 보기 위해서만이라도 참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왕이면 나만 바쁜 것이 아니라 모두 다 바쁜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나만 바쁘다는 것은 이런 세상에서는 미안한 일이 되고, 어떤 때에는 수치스러운 일이 되기까지도 한다. 그러나 모두 다 바쁘다는 것은 사랑을 낳는다.

장마철의 한강물을 보고 성난 사자같은 연상을 하는 것도 너무나 살벌하고 고갈한 환경이 시키는 반사작용이라고 생각하면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떻게 또 생각하면 세상사람들은 모두 다 너무 바쁘고 나만이 너무 한가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도 든다.

토끼





동물은 어떤것이든 직업적으로 기르게 되면 애정은 거의 전멸하고 만다. 양계를 생업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얻은 경험이지만, 같은 닭이라도 착취의 대상으로 기르고 있는 우리집 닭보다는 남의집 마당에 두어서너 마리씩 한가롭게 기르고 있는 닭이 마치 공작처럼 귀해 보인다.

닭을 기르는 집에는 반드시 토끼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소독용으로 토끼를 몇 마리 길러 보았는데 이것도 어느덧 기업의식이 침입을 하고나서부터는 닭을 보는거나 마찬가지 기분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풀을뜯어다 먹이고 짚을 갈아주고 하는 일도 어느덧 싫증이 나고 해서, 자연히 나대신 닭일 보는 아이놈이 시중을 들게 되었다. 그렇게 되니 토끼에서 나오는 소산은 그놈의 공책값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것에 재미를 붙이고 한참동안을 닭보다도 더 열심히 기르더니 월동이 어려워서 그랬던지 바빠서 그랬던지 그놈은 토끼를 모조리 팔아버리고 말았다. 한 3,4년 전 일일 게다 그후부터 우리집에는 토끼가 없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말 외양간 냄새가 여간 좋지 않았다. 토끼장 냄새는 그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 냄새가 평화스러운 감을 주는 것이 싫지 않다. 혹시 시골의 노모의 양계장에 내려가면 토끼축사에서 병든 닭들이 한데 놀고 있는 것을 보는데,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무슨 우애의 철학이나 세계평화의 산 표본을 보는 것같다. 肝病이나 소화불량이나 감기에 걸린 닭들도 이 토끼칸 안에만 들어가면 멀쩡해진다는 것이 노모의 자랑거리이다. 토끼오줌이 닭병에 약이 된다는 사람도 있고 안 된다는 사람도 있어, 그 가부는 전문가에게 물어보지 않는한 확정한 것은 모르겠지만, 좌우간 닭과 토끼는 상극은 아닌 것같다. 그런데 닭하고 토끼하고가 의좋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의식의 심부에는 어떤 미신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닭띠이고 나의 아내가 바로 토끼띠이니까 말이다. 물론 우리들 부부는 결혼의 式典까지도 거부한 아파쉬적 취미인들이라 궁합을 맞춰보고 같이 된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들의 궁합이 더 신기해보인다면 신기해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런 소감을 아내에게는 한번도 말한 일이 없다.

아내는 요즈음 양계가 수지가 안 맞는다고 다시 토끼를 길러보자고 한다.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것이다. 몇해 전엔가 메추리가 유행했을 때, 친구들 중에 이 메추리가 利가 많으니 해보라고 권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나는 굳이 듣지 않았다. 그러자 얼마 후에 메추리하던 사람들이 모조리 망하자, 이것을 권하던 친구들은 나를 보고 선견지명이 있다고 칭찬들을 했다. 나는 당시에 새와 열대어와 메추리 같은 것을 나에게 권장하던 사람들을 사람같이 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칭찬을 해도 조금도 반가웁지가 않았다. 이런 말을 한 사람 가운데에는 문학을 하는 사람도 끼어있었지만, 나는 그들의 문학까지도 경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에 비하면 토끼는 하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토끼도(닭에 못지않게) 기르기가 힘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무슨 일이든 얼마가 남느냐보다도 얼마나 힘이 드느냐를 먼저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아내는 아직도 나의 이 <力耕主義>에는 그리 신뢰를 두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1965>

모기와 개미





우선 지식인의 규정부터 해야 한다. 지식인이라는 것은 인류의 문제를 자기의 문제처럼 생각하고, 인류의 고민을 자기의 고민처럼 고민하는 사람이다. 우선 일본만 보더라도 이런 지식인들이 많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 지식인이 없지는 않는데 그 존재가 지극히 미약하다. 지식인의 존재가 미약하다는 것은 그들의 발언이 민중의 귀에 닿지 않는다는 말이다. 닿는다 해도 기껏 모기소리정도로 들릴까 말까 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식인의 소리가 모기소리만큼밖에 안 들리는 사회란 여론의 지도자가 없는 사회다. 혹은 왜곡된 여론만이 있는 사회다. 우리나라의 소위 4대신문의 사설이란 것은 이런 왜곡된 가짜여론을 매일 조석으로 제조해내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씌어지고 있다. 이것을 진정한 여론이라고, 민주주의사회의 여론이라고 생각하는 지식인들이 더도 말고 우리나라의 문학하는 사람들 중에서만도 허다하게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내가 말하는 지식인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우리나라는 문학하는 사람들 중에 지식인이 가물에 콩나기만큼 있기 때문에, 문학가가 아직도 사회적인 멸시를 받고 그나마 여론을 조성하는 자리에서는 대학교수보다도 볼품이 없고, 우리의 시와 소설은 아직껏 후진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요즘 잡지사가 그전보다 좀 깨었다고 하는 것이, 외국말을 아는, 외국에 다녀온 문인들을 골라서 글을 씌우고 싶어하는 경향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것도 구역질이 나는 경향이다. 역시 탈을 바꾸어 쓴 후진성이다.

도대체가 우리나라는 번역문학이 없다. 짤막한 단편소설 하나 제대로 번역된 것을 구경하기가 힘이 든다. 요즘 나는 부끄러운 말이지만 200자 한 장에 20원도 못 받는 덤핑출판사의 번역일을 해주고 있다. 이 덤핑출판사의 사장이라는 젊은 청년과 나와의 거래의 경위를 간단히 말해둘 필요가 있다. 이 청년은 나다니엘 호오손의 유명한 소설 「주홍글씨」를 20원씩에 해달라고 통신사 친구의 소개를 받아가지고 와서 지극히 겸손하게 자기의 사업의 군색한 사정을 말하면서 부탁한다. 나는 그의 사정을 이해해주는 듯한 거룩한 순교자의 표정으로 그의 청탁을 승낙했지만, 사실은 原書 이외에 일본말 번역과 한국말 번역책까지 가지고 온지라 여차직하면 <베끼는> 정도의 수고와 속도로 해치울 수 있을줄 알고 승낙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그게 그렇지 않다. 우리말 번역은 乙酉文化社에서 나온 저명한 영문학자인 최모씨가 번역한 것인데 이것이 깜짤 놀랄 정도로 오역투성이다. 게다가 적당히 생략한 데가 많아서, 청년이 900매로 예산을 해온 것이 천 3백매도 SJADFM 것같다. 다음 찾아온 청년사장을 보고, 원고매수가 예정보다 퍽 초과된다는 것과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퍽 어렵다는 것을 말하면서 20원씩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말하자, 이 청년은 지극히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장시간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끝에, 그러면 헤밍웨이의 소설을 자기의 출판사에서 몇 년 전에 출판한 게 있는데 그것은 번역도 어지간히 된 것이니까 그것을 약간 수정―원고지에 쓸 것도 없이 교정보는 식으로 책의 여백에 고쳐넣을 정도면 된다는 것이다―해서 내 이름으로 내고 전부 합해서 4만원에 하자는 것이다. 청년은 그렇게 하면 「주홍글씨」와 한데 묶어 내 이름으로 내면 유리할 거라는 것이다. 나도 그 청년의 말이 그럴 듯하게 생각되고 이왕 시작한 일이고 착수금까지 받은 것이라, 그러면 그렇게 하자고 승낙을 할 수밖에. 그런데 나중에ㅐ 그가 갖고 온 헤밍웨이의, 200자 원고지로 천 4백매가 착실하게 되는 전쟁소설의 번역책을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과 비교해가면서 읽어보니, 도무지 말이 안 되는 번역, 주인공인 대위가 메스홀에서 동료들과 농담을 하는데 군목을 보고 하는 대화 중에, 『신부 기분 잡쳤어. 신부 계집 때문에 기분 잡쳤어』 식의 말투를 예사로 쓰고 있다. 이것은 전후 문맥을 소개해야지만 이 오역이 얼마나 중대하고 창피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만, 좌우간 이것은 아버지를 보고 『아범 기분 잡쳤어, 아범 계집 때문에 기분 잡쳤어』 정도에 해당하는, 농담이 아닌 무례한 욕지거리로 화해버린 오역이다. 그에 비하면 을유문화사의 정모씨의 번역은 월등 나은 번역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번역에도 <미소했다>라는 식의 오역이 튀어나오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후에 청년사장이 또 찾아와서 한참동안 또 옥신각신을 한 끝에 이 정모씨의 얘기가 나와서, <미소했다>라는 어처구니없는 오역이 있더라는 말을 했더니, 이 청년은 의아스러운 얼굴로 『그럼 선생님이 하시면 어떻게 번역을 하시겠습니까』 하고 자못 정중하게 묻는다. 나는 이 <미소했다>가 얼마큼 중대한 오역인가를 그에 지지 않게 정중한 표정으로 설명해주지 않을 수 없지만, 이런 때면 정말 온몸에 맥이 풀리고 슬퍼지고 고문을 받는 것보다도 더 괴로운 심정이 든다. 그래도 당신같은 몰이해한 출판사의 일은 못하겠다고 큰 소리를 칠만한 용기가 안 나온다. 물론 안 나온다. 이것이 우리의 생활현실이다. 좀더 사족을 붙여 말하자면 이 청년사장과의 거래의 결말은, 헤밍웨이의 소설을 원고로 다시 새로 스기로 하고 「주홍글씨」까지 합해서 총 2천 8백매에 5만원으로 낙착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혹을 떼러 갔다가 혹을 하나 더 붙여오고 그 두 개가 된 혹을 또 떼러 갔다가 또 혹을 그 위에 하나 더 붙여온 셈이 되었다. 이제 출판사 사장하고의 거래는 완전히 그의 K․O승이다. 이렇게 되면 나의 전술은 간교해지는 수밖에 없다. 에라 모르겠다, 최모의 번역을 군데군데 어벌정 고쳐가며 베끼는 수밖에 없다, 이런 불쌍한 생각까지를 예사로 하게 된다. 이러니 나는 내가 욕하는 최모씨나 정모씨보다 더 나쁘면 나빳지 조금도 나을 게 없다. 아직은 모른다. 과연 정모씨의 번역을 베끼게 될지 어떨지 일을 시작해봐야 안다. 그러나 벌써 그런 생각을 먹었다는 것만으로 내가 실제 그의 번역을 베끼지 않게 된다 하더라도 반은 죄를 진 셈이다. 필경 나도 누구를 지식인이 아니라고 욕을 할만한 권한이 점점 희박해져가는 처지에 이쏙, 그런 절망적인 처지에 이길 가망이 도저히 없느,S 도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소련의 현대시인 쏠제니친의 시에 나오는 개미와 같은 낡은 생리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감명적인 시라고 생각되어서 최근에 《思想界》지에 번역되어 나온 것을 그대로 옮겨서 소개한다.


아무 생각 없이 나는 작은 나무쪽을 불 속에 던져넣었는데, 그것은 개미들이 오밀조밀 집을 짓고 있던 통나무쪽이었다.

통나무껍질이 딱딱 소리를 내면서 타기 시작할 때 개미들은 절망 속을 기어 허위적거렸다. 껍질로 기어나와 날름대는 불꽃 속에서 타죽어가고 있었다. 얼른 통나무의 한 쪽을 들어올려 부벼대었다. 많은 개미들이 도명쳐 모래밭을 횡단, 낮은 솔잎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불기운을 피해 아주 달아나버리지 않았다. 일단 절박한 위헙을 극복하자마자 개미들은 다시 타고 있는 통나무 주위로 기어들었다. 마치 어떤 힘이, 개미들을 그들이 포기해버린 고향으로 다시 되돌려보낸 듯이 많은 개미떼가 불타는 통나무로 다시 기어오르기까지 했다. 기어코 타 죽을 때까지 개미들은 그 불붙는 집을 방황하는 것이었다.

― 「개미와 불」

<1966. 3>

生活의 克服

― 담배갑의 메모





나는 수첩을 갖고 다니기가 싫어서 담배갑 뚜껑에 메모를 해두는 버릇을 지키고 있는 지가 벌써 오래된다. 어떤 때는 그런 담배갑이 양복호주머니 속에나 책상 위의 꽃바구니 속에 수두룩하게 고일 때도 있다. 어쩌다 몇 달 전의 그런 메모가 호주머니같은 데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발견되고, 찢어버리기 전에 또 혹시나 하고 다시한번 훑어보는 수도 있는데, 남의 비밀같이 정이 안 가는 이런 메모의 암호로 그당시의 생활이 홀연히 눈앞에 떠오르고는 한다. 잡지사의 원고료의 액수와 날짜, 사야 할 책이름. 아이들의 학비 낼 날짜와 액스, 전화번호, 약 이름과 약방 이름, 외상술값…… 이런 자질구레한 숫자와 암호 속에 우리들의 생활의 전부가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담배갑의 보이지 않는 메모가 내 머릿속에도 거의 언제나 들어있다. 요즘의 그 위에 써있는 메모는 미국시인 데오도어 뢰스케의 시의 짤막한 인용구다―<너무 많은 實在性은 현기증이, 체증이 될 수 있다―너무 밀접한 직접성은 극도의 피로가 될 수 있다.> 이것은 詩誌에 줄 시론을 번역하다 얻은 말인데, 이 말이 나에게 주는 교훈은, 나의 시적 사고의 문맥의 전후관계를 자세히 속새하지 않고는 그 진의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대체로 시의 경험이 낮은 시기에는, 우리들은 시를 <찾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수가 많으나, 시의 어느정도의 훈련과 지혜를 갖게 되면, 시를 <기다리는> 자세로 성숙해간다는 나의 체험이 건방진 것이 되지 않기를 조심하면서, 나는 이런 일종의 수동적 태세를 의식적으로 시험해보고 있다. 여기에서 <너무 많은 실재성>과 <너무 밀접한 직접성>은, 그러니까 시를 찾아다니는 결과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한 번 내 자신에게 경고를 주는 의미에서 이런 메모를 해놓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작상의 교훈은 곧 인생 전반의 교훈으로도 통하는 것이다. 너무 욕심을 많이 부리면 도리어 역효과가 나는 수가 많으니 제반사에 너무 밀착하지 말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이런 초월철학은 대단한 진리도 아니지만 나대로의 履行의 전후관계에서 보면 한없이 신선하고 발랄하고 힘의 원천이 된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이 평범한 진리보다도 이것을 적어두고 있는, 파지가 다 된 담배갑일 것이다. 하다못해 고리타분한 李太白의 시 「山中與幽人對酌」 같은 것도 이런 담배갑의 이행에서 보면 뜻박의 새로운 맛을 준다.


그대와 내가 만나자

산꽃들도 바나가와 피네

한잔 들게 한잔 주게

또 한잔 해지는줄 모르고

나는 이미 취해서

풀밭에서 한참 자려고 하니

그대는 마음대로 갔다가

내일아침 거문고나 안고 오게


이 시에서 나의 가슴을 찌른 구절은 <풀밭에서 한잠 자려고 하니/ 그대는 마음대로 갔다가>의 <마음대로>다, 이런 여유―아아 잠시 생각해보자―이런 여유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런데 나중에 原詩와 대조를 해보니, 원시의 그 대목이 <我醉欲眠卿且去/明朝有意……>로 되어있으니까, 엄격히 말하자면 <마음대로>는 원시에는 없는 것으로서 역자가 문장상의 윤기로 붙인 것이다. 그러니 이런 오역은 좋은 오역이다. 이것이 오역이라는 것을 아 뒤에 나는 오히려 太白의 이 시가 더 좋아졌고, <마음대로>가 더 좋아졌고, 여유의 진리에 대한 지혜를 더 함축있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요전에 어떤 시 쓰는 선배의 집에 갔는데, 그 선배는 큰아이가 중학교 시험에 낙제를 했다는 얘기를 하는 끝에, 이런 말을 하면서 입맛을 다시었다. 『내가 시험에 떨어지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자식이 떨어지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이 아파요.』 자식은 자기의 몸보다도 더 사랑스러운 것이 부모의 상정이다. 자식의 미련을 청산하기란 자기의 미련을 청산하기보다도 몇 배나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러니 이 미련도 꺾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머릿속의 담배갑의 메모를 빌려서 나는 요즘 조금씩 이런 연습도 하고 있다. 우선 새학기부터는 아이들에게 <공부해라,. 공부해라>하는 말부터 하지 않기로 하자. 이를 깨물고 자식과 나 사이에 거리를 두자. 아직 이 연습을 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결과는 좋을 것 같다. 이런 回心의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나는 사랑을 배우기 시작하는 단계에 있다.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그와 나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무서운 장해물부터 우선 없애야 한다. 그 장애물은 무엇인가.


지금 나를 태우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욕심, 욕심, 욕심.

― 뢰스케의 詩에서


욕심이다. 이 욕심을 없앨 때 내 시에도 進境이 있을 것이다. 딴 사람의 시같이 될 것이다. 딴 사람―참 좋은 말이다. 나는 이 말에 입을 맞춘다.

벌써 오랜 옛날에, 나의 머릿속의 담배에 오랜동안 적어놓은 일이 있던 공자인가 맹자인가의 글의 한 구절이 또 생각이 난다. 이런 뜻의 유명한 처세훈이다―<슬퍼하되 상처를 입지 말고, 즐거워하되 음탕에 흐르지 말라.> 마음의 여유는 육신의 여유다. 욕심을 제거하려는 연습은 긍정의 연습이다.>

우리집에는 올겨울에 처음으로 마루에 난로를 놓았고, 몇십년만에 처음으로 나는 무명 조선바지를 해입었고, 조그만 통의 커피도 한병 마련해놓고 있다. 이만한 여유를 부끄럽게 여기는 否定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은 나의 경우에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모순의 고민을 시간에 대한 해석으로 해결해보는 것도 순간적이나마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여유가 고민으로 생각되는 것은 우리들이 이것을 <고정된> 사실로 보기 때문이다. 이것을 흘러가는 순간에서 포착할 때 이것은 고민이 아니다. 모든 사물을 외부에서 보지 말고 내부로부터 볼 때, 모든 사태는 행동이 되고, 내가 되고, 기쁨이 된다. 모든 사물과 현상을 시―동기―로부터 본다―이것이 나의 새봄의 담배갑에 적은 새 메모다. 나의 <마음대로>의 새 오역이다.

<白羊>에서 가장 오랜 신세를 지다가 뒤늦게 <아리랑>으로 옮겨와서 최근에 <파고다>로 또 옮겨온 메모의 배경의 정다운 역사. 그리고 펜에서 만년필로 변했다가, 만년필에서 볼펜으로 변한 메모의 도구의 정다운 역사. 그것은 과거는 되찾아지기 전에 우선 부정되어야 한다는, 이 역시 너무나 평범한 발전의 원칙에 따른 돌음길. 부정은 끝났다―나의 메모와 메모의 배경과 도구를 돌이켜볼 때, 나의 내부의 저변에서 모기소리처럼, 그러나 뚜렷하게 들려오는 소리. 이 소리의 음미.

그러나 우리들의 앞에는 모든 냉전의 해소라는 커다란 숙제가, 우리들의 생애를 초월한 숙제가 가로놓여있다. 냉전―우리들의 미래상을 내다볼 수 있는 눈을 주지 않는, 우리들의 주위의 모든 사물을 얼어붙게 하는 모든 형태의 냉전―나와 나 사이의 모든 형태의 냉전―이것이 다름아닌 비평적 지성을 사생아로 만드는 냉전. <파고다>여, 전진하라.

<1966. 4>



解氷





목욕통에 얼어붙었던 물이 윗덮개가 조용히 풀리기 시작한다. 위의 3분가량에 흥건히 물이 괴어있고, 얼음의 근심은 소리없이 밑으로 가라앉아버렸다. 아직도 마당 위에 얼어붙은 먼지에 쌓인 얼음들은 요지부동이지만, 직경 2미터도 안 되는 목욕솥의 해빙이 알려주는 봄의 전조는 새싹을 보는 것보다도 더 반갑다. 새싹이 틀 때 봄을 느끼는 것은 이미 늦은 감이 들고, 가을의 낙엽을 보고 셸리처럼 지나치게 일찍이 봄을 예고하는 것은 너무 詩的이어서 싫고, 그저 남보다 조금 먼저 凡人처럼 봄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워 좋다.

새싹이 솟고 꽃봉오리가 트는 것도 소리가 없지만, 그보다 더한 침묵의 극치가 해빙의 동작 속에 담겨있다. 몸이 저리도록 반가운 침묵. 그것은 지긋지긋하게 조용한 동작 속에 사랑을 영위하는, 동작과 침묵이 일치되는 최고의 동작이다.

가라앉은 얼음을 겨우내 굳어온 근심이라고 생각할 때, 이 불행의 잠수행위는 희열에 찬 풍자까지도 풍겨주고, 어지러운 현실의 걱정이야 어찌되었든 우선 까닭모를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수돗가에 씻어놓은 저녁쌀이 튀어나올 듯이 하얗게 보이고, 마루에 올라와 난로가에서 손을 부벼보면 손의 두께까지도 제법 두툼하게 느껴진다.

피가 녹는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얼음이 녹는 것이 아니라 피가 녹는 것이다. 그리고 목욕솥 속의 얼음만이 아닌 한강의 얼음과 바다의 피가 녹는 것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거대한 사랑의 행위의 유일한 방법이 침묵이라고 단정한다.

우리의 38선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빙산의 하나다. 이 강파른 철덩어리를 녹이려면 얼마만한 깊은 사랑의 불의 조용한 침잠이 필요한다. 그것은 내가 느낀 목욕솥의 용해보다도 더 조용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조용함을 상상할 수 없겠는가. 이것이 다가오는 봄의 나의 촉수요 採針이다. 이 봄의 과제 앞에서 나는 나를 잊어버린다. 제일 먼저 녹는 얼음이고 싶고,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철이고 싶다. 제일 먼저 녹는 철이고 싶고,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얼음이고 싶다.

<1968. 2>



이일 저일





구공탄냄새를 맡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과정이 참말로 신비스럽다. 언제 어떻게 맡는지 알 수 없다. 소리가 나지 않는 것으로는 해면에 물 스며들 듯하지만 그 완만한 속도는 무엇에 비해야 좋을지. 정말 느리다. 날이 하도 궂어서 여편네가 아침에 구공탄을 넣고 나간 것은 아는데, 그리고 방도 따끈따끈한 것은 지금 바로 이렇게 느끼고 있으니까 아는데, 내가 구공탄내를 맡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통 알 수가 없다. 후각이 둔한 탓인지 머리가 고민으로 만성 마비증에 걸린 탓인지, 이렇게 안 맡아질 수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방귀냄새같은 것을 맡는 것을 보면 후각도 의심을 받을만한 여지가 없는데 구공탄냄새만은 통 맡아지지 않는다.

결국은 구공탄냄새를 맡아서가 아니라 염려와 공포에 못이겨서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그것과 바람이 통할 수 있는 맞은편 쪽의 마당으로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그것과 바람이 통할 수 있는 맞은편 쪽의 마당으로 통한 큰 문짝까지도 열어제쳐놓는다. 그래도 구공탄냄새는 맡아지지 않는다. 다시 자리에 누워본다. 태풍이 열어제친 두 문 사이로 마구 질주한다. 춥지만 다시 일어나기가 귀찮아서 그대로 누워있다. 구태여 묘사하자면 내가 누워있는 방은 여편네와 여덟살짜리 애놈이 단둘이 자고 있는 방이다. 아니 단둘이 자면 꽉차는 방이다. 서쪽으로 머리를 둘 때, 바른편에는 조그만 탁자가 있고 왼쪽에는 노란 칠을 한 빼닫이가 달린 옷장. 아궁이는 바른쪽 탁자의 바로 뒷벽에 붙어 있다. 그러니까 탁자 밑이 바로 아랫목. 나는 지금 이 아랫목의 탁자 밑에 놓아둔 담뱃갑 뒤의 짙은 어둠 속을 응시하고 누워있다.

구공탄냄새는 여전히 맡아지지 않는다. 다소 초조해진다. 벌떡 일어나 앉는다. 몇 번째 되풀이한 심호흡을 또한번 해본다. 골치가 아픈가 하고 생각해본다. 골치도 아픈지 안 아픈지 모르겠다. 이건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지난 겨울에 집안 식구 넷이 흠빡 개스중독이 됐을 때도 경위는 이와 똑같았다. 구공탄냄새가 나는지도 모르고 골치가 아픈 것을 겨우 깨달은 뒤에도 감기가 가서 그런줄만 알고 이틀밤을 그대로 지냈다. 사흘째 되던 밤에 아이들이 자다가 깨어나서 토하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그 원인이 구공탄냄새인줄은 몰랐다. 중학교에 다니는 큰놈이 먼첨 토했는데, 저희 어멈은 내가 낮에 그놈을 너무 심하게 때려주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나를 책망했고 나도 그런줄만 알았지 구공탄냄새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결국 여편네하고 한참동안 싸우고 난 뒤에, 의사를 부르러 가려고 방문을 열고 나가자니 마루와 부엌 겸 쓰는 문간 안 현관이 개스로 꽉차있다.

이런 지독한 경험을 했는데도 구공탄냄새는 용이하게 맡아지지 않고 골치가 아픈지 안 아픈지도 모르겠다. 구공탄냄새가 완연히 코에 맡아질 때에는 이미 늦었고 골치가 아프기 시작하면 벌써 상당한 분량의 개스를 마신 게 된다.

그런데 오늘의 경우도 그렇지만, 구공탄냄새를 맡았다는 것보다도, 번연히 알고 말았다는 것, 주의를 하면서 맡았다는 것, 혹은 극도로 신경을 날카롭게 하고 경계를 해가면서 맡았다는 것이 어처구니없고 더 분하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글이 쓰기 싫은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글을 막 쓰는지 모르겠다. 쓰고 싶은 글을 써보지도 못한 주제에, 또 제법 글다운 글을 써보지도 못한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주제넘은 소리이지만, 오늘도 나는 타골의 훌륭한 글을 읽으면서 겁이 버쩍버쩍 난다. 매문(賣文)을 하지 않으려고 주의를 하면서 매문을 한다. 그것은 구공탄냄새를 안 맡으려고 경계를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맡게 되는 것과 똑같다.

이 글은 쓰기 시작할 때는 사실은 구공탄냄새를 빌어서 우리나라가 아직도 부정과 부패의 뿌리를 뽑지 못하고 있는 실정을 야유하고 싶었다. 그러나 요즘의 나의 심정은 우선 내 자신의 문제가 더 급하다. 내 영혼의 문제가 더 급하다.

타골의 「장난감」이라는 시가 있다. 좀 길지만 역해보자.


아이야, 너는 땅바닥에 앉아서 정말 행복스럽구나, 아침나절을 줄곧 나무때기를 가지고 놀면서!

나는 네가 그런 조그만 나무때기를 갖고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나느 나의 계산에 바쁘다, 시간으로 계산을 메꾸어버리기 때문에.

아마도 너는 나를 보고 생각할 것이다. 『너의 아침을 저렇게 보잘 것 없는 일에 보내다니 참말로 바보같은 장난이로군!』 하고.

아이야, 나는 나무때기와 진흙에 열중하는 법을 잊어버렸단다.

나는 값비싼 장난감을 찾고 있다, 그리고 금덩어리와 은덩어리를 모으고 있다.

너는 눈에 띄는 어떤 물건으로도 즐거운 장난을 만들어낸다. 나는 도저히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에 나의 시간과 힘을 다 써버린다.

나는 나의 가냘픈 쪽배로 욕망의 대해(大海)를 건너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자기도 역시 유희를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타골의 이런 시를 읽으면 한참동안 눈이 시리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런 쉬운 말로 이런 고운 시를 쓸 수 있으니. 이런 쉬운 말로 이런 심오한 경고를 할 수 있으니. 사회비평이나 문명비평도 좀더 이렇게 따뜻하게 하고 싶다. 그것이 더 가슴에 온다. 세상이 날이 갈수록 소란하고 살벌해만지는 것을 보면, 이제는 소리를 지르는 데는 지쳤다. 기발한 것도 싫고 너무 독창성에만 위주하는 것도 싫고 그저 진실하기만 하면 될 것 같다. 진실을 추구하다 타골의 시보다 더 따분한 시를 쓰게 되어도 좋을 것 같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나도 모르는 나의 정신의 구공탄 중독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다. 무서운 것은 구공탄중독보다도 나의 정신 속에 얼마만큼 구공탄개스가 스며있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 더 무섭다. 그것은 웬만큼 정신을 차리고 경계를 해도 더욱 알 수 없을 것 같으니 더욱 무섭다.

얼마 전에 우리집에 이상한 사건이 벌어졌다. 방 안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누가 밖에서 주인을 찾는다. 나가보니 수도국원이다. 수도세를 받으러 온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미터 검사원이다. 나를 불러놓고 가족이 몇 명이며 세든 사람이 몇가구나 있느냐고 물어보는데, 그 묻는 품이 이상해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미터가 이번달에 상당히 돌아갔다고 한다. 나는 여름철이라 빨래와 목물이 잦아서 그렇게 되었거니 정도로 생각하고, 얼마나 돌아갔길래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액수로 환산해서 2천 6백원이라고 한다. 그 전달까지 우리는 매달 백원밖에는 내지 않았다. 국원은 나를 계량기가 묻힌 곳까지 데리고 가서 미터뚜껑을 열고 속을 보여주면서, 심지어는 누수로 그렇게 된 게 아니라는 증명까지도 해보이면서 자기의 검사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니 국원과 나는 자연히 언성이 높아졌고, 나는 기계를 신용할 수 없다는 기계불신론으로 기울어졌고, 국원은 악착같이 기계가 사람보다 정확하다고 기계 절대주의를 내세웠다. 나는 결국 수도국에 직접 문의를 해볼 작정을 하고 싸움은 결말이 나지 않은 채 헤어져 버렸는데, 수도국에 가기도 전에 그 이유는 너무나 수월히 판명되었다. 이것은 그전에 다니던 검사원의 잘못이었다. 그 종래의 검사원이 지난 겨울 이래 미터를 들여다보지 않고 기계적으로 사용량을 매달 똑같이 먹여놓았던 것이다. 그 동안에 우리집에는 세든 사람들이 4가구가량 붙어있었다. 그러니까 이 2천 6백원은 그 동안에 누적된 사용량의 요금이었다. 그리고 이 새 국원은 자기들의 직무상의 책임과 체면을 생각해서도 선임자의 과실을 이쪽에 알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이튿날 나는 그 국원이 집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사정을 해보려고 불러서 막걸리까지 같이 나누면서 화해를 했지만, 화해를 하고 나서도 나는 화가 가시지 않았고, 사람보다 기계를 신용한다는 그의 말을 귀에서 닦아내려고 술김에 이발소로 뛰어들어가서 삭발을 하고 말았다.

『여보, 백원씩 내던 수도요금이 별안간 2천 6백원이 되다니 이게 인간의 상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일이오. 밤낮을 노상 수도를 틀어놓고 있어도 그 금액은 안 나오리다』 하고 항의하는 말에, 국원은 종시일관 『그래도 미터에 그렇게 나와 있는 걸 어떻게 합니까. 사람보다 기계가 정확한걸요』 하면서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구공탄 얘기가 이 수도국원과 어떤 연관의 아라베스크를 그리고 있는지 좀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지만 오늘은 이만해두자.

讀者의 不信任





필자도 시를 쓰는 사람의 한 사람으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뱉기가 될까보아 대단히 마음 괴로운 일이지만, 우리나라의 詩(비록 시작품뿐만이 아니지만)는 과거에 있어서 매월 빠지지 않고 줄기차게 나오는 문학지나 기타 월간지에 개재된 작품 중의 거의 90프로(상당히 돋보아서)가 詩가 아닌 작품들이었다.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이런 현상은 日本은 물론 구라파 선진문화국가에도 예사로 있는 일

이라고 보면 그뿐이겠지만 시를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이보다 더 큰 슬픈

이야기가 없고 이보다도 더 분격할 이야기가 없고 이보다도 더 중대한 범죄가 없다.

요즈음 문학계의 문제(기타 예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만)는, 정치적인 분란이 위주가 되는 바람에 제 3 제 4의 문제가 되고 있고, 앞으로도 정치적 경제적 문제같은 것보다 더 현실적인 難題의 처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니만큼 좀처럼 이 방면에 대한 고려를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쉽사리 올 것 같지 않지만, 그만큼 걱정스러움이 더 간절한 것도 사실이다.

일전에 4월 이후의 새로운 현상에 대한 잡담이 나온 자리에서 어느 문학지 기자가 하는 말이, 요즈음 통 잡지가 팔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것이 <나쯔가레>가 원인이 되고 있기도 하지만 학생들이 정치에 몰두하여 문학잡지 같은 것은 보지 않게 된 바람에 그런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필자는 이 말을 듣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이 만약에 사실이라면 우리나라의 문학지는 오늘날과 같은 비상시에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말이 되고 따라서 그들이 문학을 애호하는 것은 (적어도 문학지를 구매한다는 것은) 평화시절에만 국한될 閑事에 불과하다는 말도 된다.

그러나 진정한 문학의 본질은 결코 閑時에만 받아들일 수 있는 애완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오늘날과 같은 개혁적인 시기에 처해 있을수록 그 가치가 더 한층 발효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이와 같은 현상은(그것이 만약에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문학계 전반에 대한 기막힌 모욕이요, 경멸이라고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혁명이란 이념에 있는 것이요, 민족이나 인류의 이념을 앞장서서 지향하는 것이 문학일진대, 오늘날처럼 이념이나 영혼이 필요한 시기에 젊은 독자들에게 버림을 받는 문학인이 문학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실을 고백하잠녀 나는 그 기자의 말을 듣고 내심으로는 오히려 통쾌한 감이 들었고, 우리나라 문학계도 이제야 비로소 응당 받아야 할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하고 쾌재를 부르짖었다.

젊은층의 전면적인 불신임을 받아야 할 것은 정치계에만 限한 일이 아니라 문학계도 마찬가지이고, 이러한 각성의 시기는 빨리 오면 빨리 올수록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복지사회란 경제적인 조건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의 탐구가 상식이 되는 사회이어야만 하는데, 이러한 영혼의 탐구는 경제적 조건이 해결된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마치 소학생들이 숙제시간표 만드는 식으로 시간적 절차를 둘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영혼의 개발은 호흡이나 마찬가지다. 호흡이 계속되는 한 영혼의 개발은 계속되어야 하고, 호흡이 빨라지거나 거세지거나 하게 되면 영혼의 개발도 그만큼 더 빨라지고 거세져야만 할 일이지 중단되어서는 안 될 것이고 중단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시는 필자가 보기에는 벅찬 호흡이 요구하는 벅찬 영혼의 호소에 호응함에 있어서 완전히 낙제점을 받고 보기좋게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허다한 혁명시가 나오지 않았느냐고. 필자는 여기에 대해서 너무 창피해서 대답하지 못하겠다.

필자가 여기에서 말하는 영혼이란, 唯心主義者들이 고집하는 협소한 영혼이 아니라 좀더 폭이 넓은 영혼―다시 말하자면 현대시가 취급할 수 있는 변이하는 20세기 사회의 제현상을 포함내지 網總할 수 있는 영혼이다. 나는 <유심주의자>들의 협소한 영혼이라고 말했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의 문학계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이 <유심주의자>라는 말은 합당하지 않고 그것은 오히려 <逃避子>라거나 혹은 <기만적인 유심주의자>라고 부르는 편이 옳을 게다. 이러한 도피자나 기만적인 범죄자(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를 혁명을 수행하는 학생들이 누구보다도 잘 간파하고 있는 것같이 생각되기 때문에(혹은 간파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필자는 여기에 대해서 구체적인 언급은 보류하기로 한다. 또한 이밖에 4월 이후의 혁명시가 어째서 진심으로부터 독자들의 환영을 못받고 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도 여기에서는 보류하겠다.

다만 필자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4월 이후의 우리나라 시작품에 대해서 젊은층들이 영혼의 교류를 느끼지 못하고 이를 거부하였다면 그것은 사실에 있어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또한 때늦은 감은 있지만 진정으로 반가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학계는 이러한 철저한 불신임 속에서 다시 백지로 환원됨으로써만 새로운 시대의 작품의 생산을 기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견실한 독자가 없이는 견실한 작품이 나올 수 없는 것이 문학현상의 철칙이기 때문이다.

젊은 독자들일수록 아무리 거센 호흡 속에서도 영혼의 개발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이런 뜻에서 문학인들은 젊은 독자들의 다급한 영혼의 돌진 속에서 호흡을 꺾이거나 휴식하지 말아야 하겠다.

문학혁명은 독자들 입장에서도 필자의 입장에서도 먼 장래의 태평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1960>



아직도 안심하긴 빠르다

―4․19 1周年





4․19당시나 지금이나 우두머리에 앉아있는 놈들에 대한 증오심은 매일반이다. 다만 그 당시까지의 반역은 음성적이었던 것이 이제는 까놓고 하게 되었다는 차가 있을 뿐인데, 요나마의 변화(이것도 사실은 상당한 변화지만)도 張정권이 갖다준 것은 물론 아닌데 張勉들은 줄곧 저희들이 한 것처럼 생색을 내더니 요즈음에 와서는 <반공법>이니 <보안법 보강>이니 하고 배짱을 부릴 만큼 건방져졌다.

그러나 하여간 세상은 바꿔졌다. 무엇이 바꿔졌느냐 하면 나라와 역사를 움직여 가는 힘이 정부에 있지 않고 민중에게 있다는 자각이 강해져가고 있고 이러한 감정이 의외로 급속도로 발전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4․19당시의 생각으로는 이러한 역사의 추진력의 선봉으로서 일반지식인들이 상당한 역할을 할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어그러진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가 없다. 교육자, 문학․예술인, 저널리스트들 중에서 과거에 호강을 했던 치들은 고사하고라도, 그래도 양식이 있다고 지목되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에 국가의 운명에 냉담한 친구들이 상당히 많은 것은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직까지도 아이들한테 자기가 쓴 시집을 반 강매하고 있는 고등학교 교사들, 파리에 갈 노잣돈을 버느라고 기관지마다 찾아다니면서 레알리즘 그림을 그리는 추상화가, 여당 덕분에 박사학위를 따고 <반공법> 공청회 연사로는 초청을 받고도 꽁무니를 빼는 대학교수, 곗돈을 붓느라고 아이들한테 과외공부를 시키는 국민학교 교원들, <보안법 보강>을 감행한다는데 반대데모도 한 번 못하는 문인들, 이런 사람들은 혁신계 정치가나 교원노조나 대구의 데모를 아직도 빨갱이처럼 백안시하고 있다.

그러니 그 이상의 지도층에 있는 부유한 자들이나 그들의 심부름을 하는 순경 나부랭이들의 골통 속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지―오늘이라도 늦지 않으니 썩은 자들이여, 咸錫憲씨의 잡지의 글이라도 한 번 읽어보고 얼굴이 뜨거워지지 않는가 시험해보아라. 그래도 가슴속에 뭉클해지는 것이 없거든 죽어버려라!

필자는 생업으로 양계를 하고 있는 지가 오래 되는데 뉴우카슬 예방주사에 커미숀을 내지 않고 맞혀보기는 이번 봄이 처음이다. 여편네는 너무나 기뻐서 눈물을 흘리더라. 백성들은 요만한 善政에도 이렇게 감사한다. 참으로 우리들은 너무나 선정에 굶주렸다. 그러나 아직도 안심하기는 빠르다. 모이값이 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모이값은 나라꼴이 되어가는 형편을 제어보는 가장 정확한 나의 저울눈이 될 수 있는데 이것이 지금같아서는 형편없이 불안하니 걱정이다. 또 이 모이값이 떨어지려면 미국에서 도입농산물자가 들어와야 한다는데, 언제까지 우리들은 미국놈들의 턱밑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나? 여하튼 이만한 불평이라도 아직까지는 마음놓고 할 수 있으니 다행이지만 일주일이나 열흘 후에는 또 어떻게 될는지 아직까지도 아직까지도 안심하기는 빠르다.

<1961>

創作自由의 조건





李政權 때의 일이다. 펜 클럽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분들을 모시고 조그마한 환영회를 갖게 된 장소에서 각국의 언론자유의 실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끝에 모 여류시인한테 나는 『한국에 언론자유가 있다고 봅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여자 허, 웃으면서 『이만하면 있다고 볼 수 있지요』 하는 태연스러운 대답에 나는 내심 어찌 분개를 하였던지 다른 말을 다 잊어버려도 그 말만은 3,4년이 지난 오늘까지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시를 쓰는 사람, 문학을 하는 사람의 처지로서는 <이만하면>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언론자유에 있어서는 <이만하면>이란 中間辭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언론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의 둘 중의 하나가 있을 뿐 <이만하면 언론자유가 있다고> 본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그 자신이 시인도 문학자도 아니라는 말밖에는 아니된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소설가, 평론가, 시인이 내가 접한 한도 내에서만도 우리나라에 적지 않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문학의 후진성 운운의 문제를 넘어서 더 큰 근본문제이다.

시고 소설이고 평론이고 모든 창작활동은 감정과 꿈을 다루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과 꿈은 현실상의 척도나 규범을 넘어선 것이다. 말하자면 현실상으로는 38선이 있지만 감정이나 꿈에 있어서는 38선이란 타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이 너무나 초보적인 창작활동의 원칙을 올바르게 이행해보지 못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문학을 해본 일이 없고 우리나라에는 과거 십수년 동안 문학작품이 없었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문학작품이 없는 곳에 문학자가 어디 있었겠으며 문학자가 없는 곳에 무슨 문학단체가 있었겠는가. 아마 있었다면 문학단체의 이름을 도용한 반공단체는 있었을 것이지만, 이 반공단체라는 것조차 사실에 있어서는 반공을 판 돈벌이 단체이거나, 문학과 반공을 <이중으로> 팔아먹은 돈벌이 단체에 불과하였다.

4월 이후의 都下 각 신문에 신물이 나도록 되풀이된 이런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왜 또다시 꺼내느냐고 꾸짖을 분도 있을지 모르지만, 문제는 이 4월 이후다. 4월 이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자유문협이 거꾸러졌다. 한국문협이 거세를 당했다. 전후문학가협회가 새로 나왔다. 시인협회가 성명서를 발표하고 회원숙청을 했다 등등을 가지고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무엇이 달라져야 할 것인가부터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달라져야 할 것인가? 언론자유다. 1에도 언론자유요, 2에도 언론자유요, 3에도 언론자유다. 창작의 자유는 백퍼센트의 언론자유가 없이는 도저히 되지 않는다. 창작에 있어서는 1퍼센테이지가 결한 언론자유는 언론자유가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다. 李정권 하에서는 8할의 창작의 자유가 있었지만 張정권 하에서는 9할의 자유가 있으니 얼마나 나아졌느냐고 말하고 싶은 국회의원이 있을 성싶다. 아니 국회의원뿐 아니라 필자 자신 역시 그러한 망상과 유혹에 빠지기 쉬운 요즈음이다. 솔직히 말해서 간첩방지주간이나 五列이니 國是니 할 때마다 나는 옛이나 다름이 없이 가슴이 뜨끔뜨끔하고, 또 내가 무슨 잘못된 글이나 쓰지 않았나 하고 한결같이 염려가 된다. 간첩이 오고 있으니까 간첩방지선전도 하는 것이겠지만 문제는 간첩방지선전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선전의 압력과 동일한 압력이 창작활동 위에까지 부당하게 뻗칠 것 <같은 불안>이 아직까지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다. <보장된 자유>란 무엇인가? 이러한 불안을 없애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의 제거의 책임은 누구보다도 위정자한테 있다.

지난날 같으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중립이나 평화통일을 학생들이 논할 수 있는 새시대는 왔지만 아직도 창작의 자유의 완전한 보장은 전도요원하다.

문학하는 사람들이 왜 이다지도 무기력하냐는 비난이 요즈음 자자한 것 같지만 책임은 결코 문학하는 사람에게만 있지 않다.필자부터도 쓸데없이 몸을 다치기는 싫다. 정말 공산주의자라면 자기의 신념을 위해서 자업자득하는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도 않은데 섣불리 몸을 다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창작상에 있어서는 객관적으로 볼 때 그야말로 <불온사상>을 가진 것 <같이> 보여지는 수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오해의 결과가 사직당국의 심판으로 <저촉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가지고 온다 하더라도 문제는 그 판결의 유죄․무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만일>에의 考慮가 끼치는 창작과정상의 감정이나 꿈의 위축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축현상이 우리나라의 현사회에서는 혁명 후도 여전히 그전이나 조금도 다름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죄악이다.

필자는 앞으로 문학자들이나 각 문학단체가 규학하여 사회에 대한 통일된 의견을 표시할 수 있는 움직임을 가질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기를 희망하고 있는 사람의 한 사람이지만, 그러한 단체는 우선 이 <완전한 언론자유>에의 戰取가 지고목표이며, 도 이 지고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서도 전체 문학인은 하루바삐 단결해야 할 줄로 안다.


제 精神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근대의 자아 발달사의 견지에서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요점으로 해서 생각할 때는 극히 쉬운 문제이고, 고대 희랍을 촛불을 대낮에 켜고 다니면서 <사람>을 찾은 철학자의 견지에서 全人에 요점을 두고 생각할 때는 한없이 어려운 영원한 문제가 된다. 한쪽을 대체로 정치적이며 세속적이며 상식적인 것으로 볼 때, 또 한쪽은 정신적이며 철학적인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本欄[靑脈 66.5]의 요청은 아무래도 진단적인 서술에보다는 처방적인 답변의 시사에 강점을 두고 있는 것 같고, 다분히 작금의 우리의 주위의 사회현상의 전후관계를 염두에 둔 고발성을 띠운 답변의 시사를 바라는 것 같다.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나는 이 제목을, <제 詩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로 바꾸어 생각해보아도 좋을 것 같다. 범위를 詩壇에 국한시켜 위선 생각해보자. 우리 시단에 詩人다운 시인이 있는가. 이렇게 말하면 <시인다운 시인>의 해석에 으레 구구한 반발이 뒤따라 오겠지만, 간단히 말해서 정의와 자유를 평화를 사랑하고 인류의 운명에 적극 관심을 가진, 이 시대의 지성을 갖춘, 시정신의 새로운 육성을 발할 수 있는 사람을 오늘날 우리 사회가 요청하는 <시인다운 시인>이라고 생각하면서, 금년도에 접해온 시 작품들을 한 번 생각해볼 때 내가 본 전망은 매우 희망적이다. 좀더 전문적인 말을 하자면 우리 시단의 경우, 시의 현실참여니 하는 문제가 시를 제작하는 사람의 의식에 오른 지는 오래이고, 그런 경향에서 노력하는 사람들의 수도 적지 않았는데 이런 경향의 작품이 작품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도의 예술성의 보증이 약했다는 것이 커다란 약점이며 숙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약점을 훌륭하게 극복하고 있는 젊은 작품들이 작품에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국한된 조그만 시단 안의 경사만이 아닐 것이다.


四월이 오면

곰나루서 피 터진 東學의 함성,

光化門서 목 터진 四月의 勝利여.


江山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 엎었으면

이 군스러운 부패와 享樂의 不夜城

갈아 엎었으면

갈아 엎은 漢江沿岸에다

보리를 뿌리면

비단처럼 물결 칠, 아 푸른 보리밭

― 申東曄 「4월은 갈아 엎는 달」에서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이것을 이번에는 좀 범위를 넓혀서 시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로 바꾸어 생각해보자. 시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4월 19일이 아직도 공휴일이 안 된 채로, 달력 위에서 까만 활자대로 아직도 우리를 흘겨보고 있을 리가 없다. 그 까만 19는 아직도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 국민을 믿지 못하고 있고, 우리의 지성을 말살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것이 통행금지 시간을 해제하지 못하고 있고, 윤비의 국장을 다음 선거의 득표를 위한 쇼오로 만들었고, 부정 공무원의 처단조차도 선거의 투표를 계산에 넣고, 노동조합을 질식상태에 있고, 언론자유는 이불 속에서도 활개를 못치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도 더 위험한 일은 지식층들의 피로다. 이것은 우리나라뿐이 아닌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보면 그뿐이겟지만 좌우간 비어홀이나 고급 술집의 대학교수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목석같은 나이가 나를 울린다>를 부르면 좋아하지만, 언론자유 운운하면 세련되지 않은 촌닭이라고 핀잔을 맞는 것이 상식이다. 얼마 전에 모신문의 부정부패 캠페인의 설문을 받은 명사 궁ㄴ데에 바로 며칠 전에 그 집에 가서 한 개에 4천8백원짜리 쿠션을 10여개나 꼬매주고 왔다고 여편네가 나에게 말하던 그 노 경제학자가 있는 것을 보고 낙담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남의 일이 아니다. 남의 일로 낙담을 했다고 간단하게 처리될 수 없는 심각한 병상이 우리 주위와 내 자신의 생활 속에 뿌리깊이 박혀 있다. 나의 주위에서만 보더라도 글을 쓰는 사람들 가운데 6부니 7부니 8부니 하고 돈놀이를 하는 사람이 있다. 나 자신만 하더라도 여편네더러 되도록 그런 짓은 하지 말라고 구두선처럼 뇌까리고 있기는 하지만 할 수 없다. 계를 드는 여편네를 막을 수가 없고, 돈을 빌려쓰지 않을 수가 없고, 딱한 경우에 돈을 꾸어주지 않을 수가 없고, 돈을 꾸어주면 이자를 받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버렸다.

우리들 중에 누가 죄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인간은 神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다. 그러나 건강한 개인도 그렇고 건강한 사회도 그렇고 적어도 자기의 죄에 대해서 몸부림은 쳐야 한다. 몸부림은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민감하고 세차고 진지하게 몸부림을 쳐야 하는 것이 지식인이다. 진지하게라는 말은 가볍게 쓸 수 없는 말이다. 나의 연상에서는 진지한 침묵으로 통한다. 가장 진지한 시는 가장 큰 침묵으로 승화되는 시다. 시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보더라도 지금의 가장 진지한 시의 행위는 형무소에 갇혀있는 수인의 행동이 극치가 될 것이다. 아니면 폐인이나 광인. 아니면 바보. 그러나 이 글의 주문의 취지는 英雄待望論이 아닐 것이다.

앞에서 시사한 유망한 젊은 시인들의 작품과도 유관한 말이지만 우리 사회의문화정도는 아직도 영웅주의의 잔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재원의 「立春에 묶여온 개나리」나 신동엽의 「발」이나 「4월은 갈아 엎는 달」의 因數에는 영웅 대망론의 냄새가 아직도 빠지지 않고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아직도 우리의 진정한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나의 직관적인 추측으로는, 표면상의 지식인들의 피곤에도 불구하고 역시 이들의 내면에는 개인의 책임에 대한 각성과 합리주의에 대한 이행이 은연중에 강행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결국 모든 문제는 <나>의 문제로 귀착된다.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따라서 나는 내 정신을 갖고 살고 있는가로 귀착된다. 그리고 이 문제는 나를 무한히 신나게 한다. 나는 나의 최근작을 열애한다. 나의 서가의 페이퍼 홀더 속에는 최근에 쓴 아직 미발표 중의 초고가 세 편이나 있다. 「식모」「풀의 影像」「엔카운터誌」라는 제목이 붙은 시들―아직은 사실은 부정을 탈 것 같아서 제목도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이 중의 「엔카운터誌」 한 편만으로도 나는 이병철이나 서갑호보다 더 큰 부자다. 사실은 앞서 말한 김재원의 「입춘에 묶여온 개나리」를 읽고 나서 나는 한참동안 어리둥절해 있었다. 젊은 세대들의 성장에 놀랐다기보다도 이 작품에 놀랐다. 나는 무서워지기까지도 하고 질투조차도 느꼈다. 그래서 그달치의 「詩壇月評」에 감히 붓이 들어지지 않았다. 그런 私心이 가시기 전에는 비평이란 쓰여지는 법이 아니다. 그러다가 그 장벽을 뚫고 나온 것이 「엔카운터誌」다. 나는 비로소 그를 비평할 수 있는 차원을 획득했다. 그리고 나는 여유 있게 그의 시를 칭찬할 수 있었다. 이것은 내가 「立春에 묶여온 개나리」의 작자보다 우수하다거나 앞서있다거나 하는 말이 아니다.

<제 정신>을 갖고 산다는 것은, 어떤 정지된 상태로서의 <남>을 생각할 수도 없고, 정지된 <나>를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제 정신을 갖고 사는> <남>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것이 <제 정신을 가진> 비평의 객체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창조생활(넓은 의미의 창조생활)을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창조생활은 유동적인 것이고 발전적인 것이다. 여기에는 순간을 다투는 어떤 윤리가 있다. 이것이 현대의 양심이다. 「입춘에 묶여온 개나리」와 나와의 관계만 하더라도 이 윤리의 밀도를 말하고 싶은 것이 나의 목적이었다. 「엔카운터誌」를 쓰지 못하고 「입춘에 묶여온 개나리」의 월평을 썼더라면 나는 私心ㅌ이 가시지 않은 글을, 따라서 邪心 있는 글을 썼을 것이다. 개운치 않은 칭찬을 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죽이거나 다치거나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엔카운터誌」의 고민을 뚫고 나옴으로써 나는 그를 살리고 나를 살리고 그를 <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보고 나를 <내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이란 끊임없는 창조의 향상을 하면서 순간 속에 진리와 美의 全身의 이행을 위탁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두지만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이란 어느 특정된 인물이 될 수도 없고, 어떤 특정된 시간이 될 수도 없다. 우리는 일순간도 마음을 못 놓는다. 흔히 인용되는 예를 들자면 우리는 「시지프의 신화」에 나오는 육중한 바윗돌을 밀고 낭떠러지를 기어올라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自覺人의 세계의 대열 속에 미약한 한국의 발랄한 젊은 세대가 한 사람이라도 더 끼이게 된다는 것은 우리들의 오늘날의 그지없는 기쁨이다. 끝으로 《現代》지 4월호에 게재된 「立春에 묶여온 개나리」의 전문을 감상해보기로 하자.


開花는 강 건너 春分의 겨드랑이에 球根으로 꽂혀있는데 바퀴와 발자국으로 寧日 없는 鐘路바닥에 난데없는 개나리의 行列.

한겨울 溫室에서, 公約하는 햇볕에 마음도 없는 몸을 내맡겼다가, 太陽이 住所를 잊어버린 마을의 울타리에 늘어져 있다가,

副業에 궁한 어느 中年사내, 다음 季節을 豫感할 줄 아는 어느 中年사내의 등에 업힌 채 鐘路거리를 묶여가는 것이다.

뿌리에 바싹 베개를 베고 新婦처럼 눈을 감은 우리의 冬眠은 아직도 아랫목에서 밤이 긴 날씨, 새벽도 오기 전에 목청을 터뜨린 닭 때문에 마음을 풀었다가……

닭은 무슨 못견딜 짓눌림에 그 깊은 時間의 테로리즘 밑에서 목청을 질렀을까.

엉킨 未亡人의 繡실처럼 길을 잃은 세상에, 잠을 깬 개구리와 지렁이의 입김이 氣化하는 아지랑이가 되어, 암내에 참지 못해 請婚할 제 나이를 두고도 손으로 찍어낸 花甁의 執權의 앞손이 되기 위해, 알몸으로 都心地에 뛰어나온 스님처럼, 업혀서 亡身길 눈 뜨고 갈까.

금방이라도 눈이 밟힐 것같이 눈이 와야 어울릴, 손금만 가지고 握手하는 남의 동네를, 우선 옷 벗을 철을 기다리는 時代女性들의 目禮를 받으며 우리 아버지가 때없이 한데 묶어 세상에 업어다놓은 나와 내 兄弟같은 얼굴로 行列을 이루어 끌려가는 것이다. 溫度에 속은 罪 뿐, 입술 노란 개나리떼.


이것은 제 정신을 갖고 쓴 시다. 이 정도의 제 정신을 갖고 지은 집이나, 제 정신을 갖고 경영하는 극장이나, 제 정신을 갖고 방송하는 방송국이나, 제 정신을 갖고 제작하는 신문이나 잡지나, 제 정신을 갖고 가르치는 교육자를 생각해볼 때 그것은 양식을 가진 건물이며 극장이며 방송국이며 신문이며 잡지이며 교육자를 연상할 수 있는데, 아직은 시단의 경우처럼 제나름의 양식을 가진 것이 지극히 드물다. 균형과 색조의 조화가 없는 부정의 건물이 너무 많이 신축되고, 서부영화나 그것을 본딴 국산영화로 관객을 타락시키는 극장이 너무 많이 장을 치고, 약광고의 선전에 미친 방송국이 너무 많고, 신문과 잡지는 보수주의와 상업주의의 탈을 벗지 못하고, 교육자는 <6학년 담임 헌장>이라는 기괴한 운동까지 벌이게 되었다.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이에 대한 처방전인 나의 답변은, 아직도 과격하고 아직도 수감 중에 있다.

<1966. 5>

文壇推薦制 廢止論





시나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것이 곧 그것을 쓰는 사람의 사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나 소설 그 자체의 형식은 그것을 쓰는 사람의 생활의 방식과 직결되는 것이고, 후자는 전자의 敷衍이 되고 전자는 후자의 부연이 되는 법이다. 사카린 밀수업자의 붓에서 「두이노의 悲歌」가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진달래꽃」을 쓴 素月은 자기반의 부유한 아이들을 10여명씩 모아놓고 高價의 과외공부를 가르치는 국민학교 6학년 선생이나 중학교 3학년의 담임선생은 될 수 없다.

이런 예는 좀 투박한 비유이지만 오랫동안을 두고 시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문학잡지의 신인들에 대한 추천제도만 하더라도 이제는 좀 차분하게 가라앉아서 추천하는 사람이나 추천을 받는 사람이나 다같이 근본적인 반성을 해볼 시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것은 크게 보면 우리 문학의 앞으로의 성격을 좌우하는 중대한 영향력을 가진 문제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무릇 모든 예술을 지향하는 사람은 허구많은 직업 중에서 유독 예술을 업으로 택한 이유는―자기 나름의 독특한 개성을 살려보기 위해서 독특한 생활방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독특한 시를 쓰려면 독특한 생활의 방식(즉 인식의 방법)이 선행되어야 하고, 시나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문단에 등장을 하는 방식 역시 이러한 생활의 방식에서 제외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남의 흉내를 내지 않고 남이 흉내를 낼 수 없는 시를 쓰려는 눈과 열정을 가진 사람이면, 자기가 문단에 등장하고 세상에 자기의 예술을 소개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그것이 독자적인 방법이냐 아니냐쯤은 한 번쯤은 생각하고 나옴직한 문제이다. 필자는 일제시대 말기에 淸水金一이라는 희극배우의 무대를 본 일이 있는데, 그는 좀처럼 종래의 배우들이 출입하는 무대 옆구리에서 등장하는 법이 없고 천장에서 들것을 타고 내려오거나 무대의 밑바닥에서 우산을 받고 기발하게 솟아 올라오거나 하면서 관객을 놀래고 웃기고 했다. 이것은 서푼짜리 희극 배우의, 관객의 허점을 노리는 값싼 흥행의식이라고만 볼 수 없는 예술의 본질과 숙명에 유관한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喜劇의 驚愕感이나 기발성과 예술의 본질과의 관계라든가 문학이나 문학가의 흥행성의 문제를 논할 여유는 없지만, 예술가나 예술이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가장 크나큰 관심을 두고 있듯이, 어떻게 나오느냐 하는 문제도 필연적으로 중대한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성급한 규정을 내리자면 예술가는 되도록 비참하게 나와야 한다. 되도록 굵고 억세고 날카롭고 모진 가시 면류관을 쓰고 나와야 한다.

이런 비참한 가시 면류관의 대명사가 《現代文學》지의 추천시인이 될 수 있는가. 《現代文學》지의, 혹은 《詩文學》지의 씨도 먹지 않은 薦者들의 추천사를 통해서 배출되는 추천시인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두부 가시로 만든 면류관이다. 이런 두부 가시의 면류관을 쓰고 나오는 문인들을 향해서, 혹은 <신인문학상> 당선이나 <신춘문예> 당선 등의 비누 가시관을 쓰고 나오는 소설가나 시인들을 향해서 세상에서는 <멀지 않아 문인 주소록이 전화번호부처럼 비대해질지 모르겠다>느니 <문인들의 홍수>를 막기 위해서 <문단에도 혁명적인 산아제한이 시급하다>느니 하는 비판을 기회있을 때마다 퍼붓고 있지만, 그런 시비의 타당성의 여부의 정도는 고사하고, 우선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서 생각해볼 때 적어도 그런 시비가 나올 수 이쓴ㄴ 여지가 있다는 것은 부끄럽기 짝이없는 일이다.

우리 문단의 추천제도의 폐해의 원인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그 주장이 여러 가지일 것이고, 찬반의 정도나 대책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주장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추천제를 공박하는 세속적인 원인으로서 우선 가장 큰 것이라고 필자에게 느껴지는 것은, 문인들의 수가, 특히 시인들의 수가 왜 이렇게 많으냐는 것이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하자면 무슨 말인지도 알 수 없는, 詩다웁지도 않은 시를 쓴답시고 하는 어중이떠중이들이 왜 이렇게 많으냐는 말이다. 가뜩이나 어지러운 세상에 가장 순수하고 진지한 역할을 담당해야 할 문인들의 사회에서까지 신용할 수 없는 제품을 무작정 대량생산하는 제도가 있으니 이건 정말 어지럽고 불쾌해서 못살겠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종잡아 생각해보면 문인들의 수에 비해서 좋은 작품이 많지 않다(혹은 없다)는 말이 되고, 이런 허술한 문인들을 시인이나 소설가의 레텔을 붙여서 내놓는 추천제도의 권위는 말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추천제도의 추천자나 응모자의 편에 주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추천자는 이렇게 말한다. 『추천제도가 추천자의 수많은 亞流를 낳고 있다든가, 혹은 추천자의 개인적인 문학의 명성이나 문단의 세력을 구축 내지 유지하기 윟새서 추천작가들을 이용한다거나, 혹은 추천제도를 주재하는 잡지사의 그의 주간의 문단세력을 구축․확장 내지 유지하는 데 추천작가나 시인들을 이용한다거나 하는 폐습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나마 추천제도라도 있으니까 신진들에게 선을 보일 정도의 기회라도 줄 수 있지, 이것마저 없으면 신진양성을 사보타지한다는 죄명으로 기성문인들이 모조리 테러를 맞을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신진작가나 신인들이 늘어나는 것은 추천제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아시다시피 폭발적인 인구팽창이 시키는 것이다. 비근한 예가 일본에서는 전국의 시 동인지의 수가 5백을 넘는다고 하지 않는가. 또한 우리들이 추천하는 시인들의 작품이 질이 낮아간다는 비난에 대해서도 우리들은 일가견을 갖고 있다. 자고로 어느 나라의 어느 시대를 치고 우수한 동시대의 시인이 십명을 넘는 일이 없었다. 보통 한 시대에 한 두어서너명의 시인이 있으면 족하다. 나머지것들은 들러리나 비료의 역할이나 하면 된다. 지금 우리나라에 5백명의 시인이 있다고 해도 이건 큰일나는 일이다. 희극으로서도 큰일나는 희극이다. 그러나 이 5백명이 서발막대기로 휘저어놓은 것같은, 죽도 밥도 아닌 졸렬한 시를 매달 써내놓는다고 해도 그 피해는 이 서발막대기를 마구 휘둘러서 사람을 죽이는 깡패나 밀수업자가 되느니보다는 낫다. 잡지사의 시 고료가 좀 허실이 날 정도이고, 그 대신 우리같은 가난한 추천자의 담배값 정도는 벌어주게 되니 피장파장 아닌가.』

이러한 추천자의 주장에 대한 필자의 의견은 이렇다.

『나도 신문사의 신춘문예의 심사원의 말석을 더럽히고 있는 몸이라 큰 소리는 할 수 없지만 귀하의 말 중에서 가장 실감이 나는 것은 귀하가―담배값밖에 안 된다고 하지만―추천료에 유혹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오. 이것은 지극히 한심스러운 일이지만 사실이오. 그리고 이보다도 더 한심스러운 일은 심사원의 권위―아무리 低落한 권위라 할지라도―에 대한 매력이오. 이것도 지극히 유치한 일이지만 사실이오. 매력이란 말이 그야말로 유치하다면 유희나 장난 정도로 고쳐둡시다. 귀하는 매력도 아니고 유희도 아니고 장난도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타성이오. 오늘날 추천제도가 욕을 먹고 있는 것은 이 타성 때문이오. 추천제도를 끌고나가는 문학잡지사의 타성이고, 그 문학잡지사의 추천제도를 모방하는 ABC의 문학잡지사와 XYZ의 詩誌의 타성이고, 이런 타성에 끌려가는 추천자 甲 乙 丙 丁의 타성이고, 이런 추천제에 응모하는 시를 생활할 줄 모르는 풋내기 문학청년들의 타성이오. 귀하는 일본의 시 동인지가 5백종이 넘는다고 하지만 이것은 일본의 문학지의 추천제를 통해 나온 사람들은 아닐 것이오.

아세아의 폭발적인 인구증대와 급속도의 현대화와 거기에 따르는 자아의 각성에 유래되는 詩作하는 사람들의 증가의 현상은 귀하의 말마따나 그다지 우려할 만한 일은 아니오. 오히려 환영해야 할 일이오. 서구의 어느 비평가가 말했듯이 앞으로 먼 후일에는 모든 세계의 인류가 詩를 쓰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오. 또한 헷세가 그의 시에서 읊으고 있듯이, 시가 필요하지 않은 낙원이 도래하고 모든 사람들이 착한 시인의 생활을 하고 오늘날의 시가 무효가 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르오. 그리고 오늘날 詩作하는 인구가 많아지는 것을 그런 세상의 출현의 전조로 보려면 못 보는 것도 아니오. 오히려 그런 세상의 출현의 전조로 보기 위해서 이런 시비가 나오고 잇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오.

시를 쓰는 인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시작품의 年産量이 앙등하면 할수록 시의 세계에 있어서는 질이 문제되는 것이오. 이것은 물ㄹ폰 귀하도 인정하고 남음이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오. 그런데 귀하의 추천제도를―그것이 천대 일이 되든 만대 일이 되든 간에―비료가 많아질수록 좋은 꽃이 더 많이 더 화려하게 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소.

나의 이의점이 여기에 있소. 서두에서 잠깐 시사한 것처럼 시나 소설 그 자체의 형식(나아가는 가치)은 그것을 쓰는 사람의 생활의 방식과 직결되는 것이오. 나의 이상으로는 개성있는 시인의 대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매너리즘에 빠진 오늘날과 같은 치욕적인 추천제도에는 도저히 응해지지 않을 것이오. 오늘날의 문단의 추천제는 「007」의 영화를 보려고 새벽 여덟시부터 매표구 앞에 줄을 지어 늘어선 관객들을 연상케 하는 치욕적인 것이오. 이런 치욕을 치욕으로 직관할 수 없는 일만 편의 시 중에서 귀하는 한떨기의 芳香馥郁한 꽃이라도 피면 족하다는 것이고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오.」

이러한 추천자와 나의 논쟁의 귀결은 이제 지극히 평범한, 詩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로 지극히 따분하게 되돌아온 것 같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는 시가 여태까지 추천제를 통과해온 무수한 시작품이나 <신춘문예>나 <신인문학상>에 당선된 수많은 작품들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은 독자들도 짐작이 갈 것이고, 여태까지의 기성인들의 어떠한 작품과도 비슷하지 않은 작품이라는 것도 짐작이 갈 것이다. 시는 그러한 것이다.

<1967. 2>

<不穩>性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





지난 2월 27일자 [조선일보]의 「實驗的인 문학과 政治的 自由」라는 拙論에서, 본인은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고, <모든 살아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로서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거이기 때문>이라고 명확하게 문화의 본질로서의 不穩性을 밝혀두었는데도 불구하고 李御寧씨는 이 불온성을 정치적인 불온성으로만 고의적으로 좁혀 규정하면서 본인의 지론을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전체주의의 동조자 정도의 것으로 몰아버리고 있다.

前衛的인 문화가 불온하다고 할 때, 우리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재즈음악, 비트族, 그리고 60년대의 무수한 앤티예술들이다. 우리들은 재즈음악이 소련에 도입된 초기에 얼마나 불온시 당했던가를 알고 있고, 추상미술에 대한 흐루시초프의 유명한 발언을 알고 있다. 그리고 또한 암스트롱이나 베니 굿맨을 비롯한 전위적인 재즈 맨들이 모던 재즈의 초창기에 자유국가라는 미국에서 얼마나 이단자 취급을 받고 구박을 받았는가를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재즈의 전위적 불온성이 새로운 음악의 꿈의 추구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예는 재즈에만 한한 것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베토벤이 그랬고, 소크라테스가 그랬고, 세잔느가 그랬고, 고호가 그랬고, 키에르케고르가 그랬고, 마르크스가 그랬고, 아이젠하워가 해석하는 샤르트르가 그랬고, 에디슨이 그랬다.

이러한 불온성은 예술과 문화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고 인류의 문화사와 예술사가 바로 이 불온의 수난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이런 간단한 문화의 이치를 李御寧씨 같은 평론가가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의 오해를 고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내가 그의 글에 답변을 하려고 붓을 든 주요한 이유는 나의 개인적인 신변방어에 있지 않다. 그의 중상 속에는 나의 개인적인 것이 아닌, 어떤 섹트的인 위험한 의도까지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고, 그러한, 실제로 있지도 않은 위험세력의 설정이 일반독자에게 주는 영향은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것이다.

그는 <문학은 권력이나 정치이념의 시녀가 아니다>의 서두부터 <문학 작품을 문학작품으로 읽으려 하지 않는 태도, 그것이 바로 문학을 가장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형편이다>라고 비난하고 있는데, 이런 비난은 누구의 어떤 발언이나 作品이나 태도에 근거를 두고 한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중대한 말을 실제적인 예시도 없이 마구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혹시 그는 내가 말한 나의 발표할 수 없는 詩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내가 발표할 수 없다고 한 나의 작품은 나로서는 조금도 불온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작품이다.

다만 그것은, 불온하다는 의혹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발표를 꺼리고 있는 것이지, 나의 문학적 이성으로는 추호도 불온하지 않다. 그러니까 李御寧씨는, 내가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어서 발표하지 못하고 있는 작품을 <불온하다>고 낙인을 찍으려면, 우선 그 작품을 보고나서 말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나의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을 보지도 않고 <불온하다>로 비약을 해서 단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논법은 문학자의 논법이 아니라, 그가 말하는 <機關員>의 논법이다. 아니, 요즘에는 기관원도 똑똑한 기관원은 이런 비과학적인 억측은 하지 않는다.

李御寧씨의 이번의 d나에 대한 반론은 거의 전부가 이런 식의 모함으로 충만되어 있고 이것을 일일이 가려낼 만한 의미를 나는 느끼지 않는다. 다만 나의 창작의 자유의 고발의 실제적인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 그것만을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설명해두고자 한다. 비근한 예가, 지금 말한 李御寧씨의 규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나의 소위 <不穩詩>다.

지금 말한 것처럼 李御寧씨는 내가 발표하지 못하고 있는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온한> 작품이라고 규정을 내리고 있지만, 나의 생각으로는 발표를 하면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어서 발표는 못하고 있지만, 결코 불온한 작품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나의 자유의 고발의 한계는 이런 불온하지도 않은 작품을 불온하다고 오해를 받을까보아 무서워서 발표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것을 따져보자는 것이다.

李御寧씨는 이에 대한 책임이 작가나 시인 자신에게 있다고 한다. 아니 이들에게만―이들의 역량이 부족해서―있다고 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가장 중요한 장해세력이 우선 대제도의 에이전트들의 획일주의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나는 지적했다.

그런데 李御寧씨는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을 기관원도 단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불온하다>고 단정을 내림으로써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이 불온하지 않게 통할 수 있는 문화풍토를 조성하자는 나의 설명을 거꾸로 되잡아서,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이 바로 <불온한 작품>이니 그런 문화풍토가 조성되면 문학이 말살된다고 기관원이 무색할 정도의 망상을 하고 있다. 이런 망상은 문학이론으로서는 一考의 가치도 없다.

<1968>

詩人의 精神은 未知





시의 정신과 방법? 시 쓰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시의 정신과 방법을 아는가? 그것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식의 愚를 범하는 일이다. 시인은 자기의 시에 대해서 장님이다. 그리고 이 장님이라는 것을 어느 의미에서는 자랑으로 삼고 있다.

도대체가 시인은 자기의 시를 규정하고 정리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그에게 논꼽재기만한 플러스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의 시의 현시점을 이탈하고 사는 사람이고 또 이탈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다. 어제의 시나 오늘의 시는 그에게는 문제가 안된다. 그의 모든 관심은 내일의 시에 있다. 그런데 이 내일의 시는 未知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정신은 언제나 미지다. 고기가 물에 들어가야지만 살 수 있듯이 시인의 미지는 시인의 바다다. 그가 속세에서 愚人視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기정사실은 그의 적이다. 기정사실의 정리도 그의 적이다.

그의 눈에는, 소설가란 생일을 잘 차려먹기 위해서 이레를 굶는 무서운 금욕주의자다. 무서운 인내가다. 결과로서의 소설의 발언이 시의 발언과 일치되는 점도 있지만 피차의 과정이 너무나 현격하다. 그 결과를 수긍하다가도 그 과정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파스테르나크는, 현대의 상황을 대변하려면 시만 가지고는 모자란다 해서 소설을 쓰고 희곡까지 썼지만, 그의 희곡이라는 것이 따분하다. 「유리 지바고」도 그의 초기의 단편만 못하다. 그런데 그의 단편은 아시다시피 백일몽이다. 『나의 「지바고」는 왕년의 모든 詩보다도 나에게 귀중한 것이다』라고 한 노후의 그의 말을 나는 신용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죽는 날까지 시집만 내고 죽은 프로스트가 좀더 순수하다. 파스테르나크의 초기단편이나 딜란 토마스의 단편을 읽으면서 부러운 것은, 그들이 그런 잠꼬대를 써도 용납해주는 사회다. 그런 사회의 문화다. 나는 여기서는 오해를 살까보아 그런 일을 못하겠다. 여기에는 알지 못하겠는 글이 너무 많고, 그 알지 못하겠는 글이 모두 인찌끼다. 알지 못하겠는 글이 모두 인찌끼인 사회에서는 싫어도 아는 글을 써야 한다. 아는 글만을 써야 한다. 진정한 시인은 죽은 후에 나온다? 그것도 그럴싸한 말이다. 그러나 나에게 그만한 인내가 없다. 나는 詩作의 출발부터 시인을 포기했다. 나에게서 시인이 없어졌을 때 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는 출발부터가 매우 순수하지 않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나는 고백은 싫다.

그렇지만 <詩 一篇>이라고 명기한 시청탁서를 받을 때마다 나는 격노한다. 왜 내가 시밖에 못 쓰는줄 아는가? 불쌍한 한국문단아!

요즈음 S잡지사의 권유로 「詩月評」이라는 걸 써보았는데, 그 바람에 시는 통 못썼다. 시인은 심판ㅇ르 받는 편이 훨씬 행복하다. 시인이 심판을 하게 되면 불필요한 번민을 하게 된다(남에게 얻어먹은 욕은 즉석에서 철회할 수 있지만, 남에게 한 욕은 철회하기가 매우 힘든다) 또한 사기를 한다. 심판을 하자면 올가미를 씌워야 하는데 이 올가미에 자신까지 걸려들기는 싫다. 자기가 걸려드는 올가미는 시를 다칠까보아 싫고 자기가 걸려들지 않는 올가미는 비평이 거짓말이 되니까 싫다. 나의 월평이 게재된 같은 잡지에 소설평을 담당한 H씨의 글에 이런 말이 나와있다. <……특히나 요새처럼 작가의 정치색을 가장 날카롭게 작품 속에 구체화시키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 있을 때 이러한 유행을 의식적으로 회피한다는 것은 어쩌면 성실한 작가의 자세라고 봐야 옳을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나는 <앗차!> 했다. 지금 말한 것처럼 H씨의 소설평이 실린, 같은 잡지에 나의 시월평이 그분의 글과 나란히 게재되어 있다. 이달뿐이 아니라 지난달 호에도 어깨를 나란히 해서 나는 시월평을 쓰고 그분은 소설월평을 썼다. 그는 소설월평을 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난달에도 이달에도 시의 현실참여를 주장해왔고 내달에도 그것을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아까와 같은 그분의 글을, 내가 쓴 글을 읽은 끝에 마을가는 기분으로 읽던 중에 발견한 것이다. 그러지않아도 나는 연 3회를 현실참여의 월평을 써온 끝이라 또 다음호에 똑같은 논지를 내세우는 것이 변화가 너무 없는 것 같아서 좀 의아한 생각을 품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재빨리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이 그런 말을 암시해 놓았다. <……이러한 유행을 회피하는 것은 어쩌면 성실한 작가의 자세……> 그렇다. 얼마전에 에케르만의 「괴테와의 대화」를 읽으면서 나는 그런 다짐을 비밀리에 하고 있었다. 그때가 벌써 S잡지사의 월평을 시작하고 있던 때였다. 나는 그러니까 그 비평을 시작할 때부터 내 비상구는 만들어놓고 쓴 셈이다. 이번의 H씨의 글은 나의 사기를 재확인해준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이 密告 안에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시인은 밤낮 달아나고 있어야 하는데 비평가는 필요에 따라서는 적어도 4,5개월쯤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어야 한다. 혹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 같이 보여야 한다.

시인은 영원한 배반자다. 寸秒의 배반자다.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이렇게 무한히 배반하는 배반자. 배반을 배반하는 배반자…… 이렇게 무한히 배반하는 배반자다.

시인의 정신과 방법? 나는 그대를 속이고 있다. 술을 마실 때도, 산보를 할 때도, 교섭을 할 때도 무엇을 속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속이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나는 그대를 속이고 dLT다. 그대는 영리한 사람인 경우에는 눈치를 챈다. 나를 신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리한 그대는 내가 속이는 순간만 알고 있고, 내가 속이지 않는 순간이 dLT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한 그대를 구출하는 길은 그대가 시인이 되는 길밖에는 없다. 시인은 모든 면에서 백치가 될 수 있지만, 단 하나 시인을 발견하는 일에서만은 백치가 아니다. 시인을 발견하는 것은 시인이다. 시인의 자격은 시인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밖의 모든 책임을 시인으로부터 경감하라!

<1964. 9>

진정한 현대성의 지향

―朴泰鎭의 詩世界





泰鎭의 詩는 일견 특색이 없다. 일부러 意表에 오르지 않는 것을 쓰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다소의 괴벽스런 影像의 포우즈도 있지만 희박한 인상을 준다. 그의 시에는 <인생><내일><어저께><오후><시절><계절><기대><과거> 같은 시간용어나 준시간용어가 자주 나온다. 그리고 이러한 용어들이 구성하는 人生論的인 서정이 역시 시간 위에 溶解되고 있다. 그의 詩가 일견 특색이 없어보이는 것은 다분히 이런 음악적인 경향에서 오는 것이다. 이런 경향에서 볼 때 그의 詩에 나오는 용어들은 <憐憫><感情><孤獨><象徵> 등의 抽象語뿐만 아니라 <雪景><眼球><風化><戱畵><旅裝> 등의 具象語까지도 현대적인 潤色 속에서 지독하게 抽象化되고 있다.


이 눈 속에 地球를 생각하며 가을이 오듯이

그 후미진 곳을 향하여 落影하는 象徵들

眼球의 一角이 쑤시고

充血하는 곳

나의 故鄕이라고 하자

―「眼球」에서


이 「眼球」의 인용 구절처럼 그의 추상은 잘못하면 의미를 건질 수 없을 만큼 난삽해지며, 그의 초기의 작품은 대개가 이런 종료의 모호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밖에 그의 詩를 난삽하게 만드는 요소로서 나르시스적인 감상이 있다. 그는 외적 정경을 서술할 때에도 이 나르시스의 그늘을 버리지 못한다.


오늘은 異邦의 直線車道를 건너며

나의 姿勢를 의심해 보았는데

―「공원길」에서


테므즈江 물은 자꾸 이야기를 띄워가는데

나는 흐르지 않는데

―「론든 부릿지에서」에서


마르지 않은 물줄기를 찾아

펠소나를 씻노라면

테므즈江은 나의 이야기를 싣고 간다.

―「同上」에서


걸음 걸음 나의 過去를 밟으며 暫時 나는

나의 부릿지를 생각해본다.

―「同上」에서



이러한 감상벽은 최근에 와서는 조화와 체념과 관조로 자리를 바꾸고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의 내적 투쟁은 지드의 경우처럼 대부분 이 나르시스를 극복하기 위한 일이 바치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詩를 난삽하게 만드는 그밖의 요소로서 聯間과 行間과 行中의 연결에 부자연한 중단벽이 있고 우리말 사전에는 없는 난말의 亂用 등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묘사에 적합하지 않은 시적 기질이 산문의 의미를 성급하게 전달해보려는 무리에서 오는 수가 많다. 이것은 영상의 난삽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다. 시를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씩 겪어야 할 난관이지만 그의 경우는 좀 집요한 편이다. 이것을 구하는 길은 의미의 구출이다. 아무리 부자연한 중단이 많고 불가해한 낱말이 있어도 그것을 커버할 만한 의미의 연결이 서 있을 때는 성공이다. 「歷史가 알 리 없는……」「아름다운 空白」「어지빠른」「自問하는 마음」(이상의 작품은 모두 詩集 「變貌」 속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등의 그런 의미에서 성공한 작품들이다. 이 중에서도 그의 본질이 가장 잘 나타나 dLT는 것이 「歷史가 알 리 없는……」이다.


歷史가 알 리 없는……

나의 초조한 걸음을

나의 지지한 작은 일들을

歷史가 알 리 없는

西大門 근방은 먼지가 많다.

그러기에 하늘은 멀리만 보이고

이미지가 不毛하던 이유를

人生만이 알 수 있다고 하자

꿈없는 길이 새문안을 향하여


특색없는 굴르는 乘合길을

다만 나와 더불어 희미한 길을

나는 꿈을 부어줄 수 있을까

歷史가 알 리 없는 나의

삶의 자취는 나의 어저께


낡은 나와 생각들이 남을 수 없는

車道와 步道 사이에서 언젠가 無智가 죄로 소박맞은 女人이 울던

이 길은 사랑도 미움도 어지빠른데

순간마다 변하는 구름길이 더욱 길다.

歷史가 알아줄 리 없는 나의

응달진 過去에 謝過는 없다.


길은 都市를 안고 경사지며

나는 형적없이 경사진 나이에 기대어

오늘의 일을 한줌 모아 펴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못하는 일 나의 人生이라고 하자

그러나 비가 내리며

내 이마를 소리없이 적실 그리고

소리없이 젖을 街路樹의 리듬을

나는 진정 알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그의 여러 발음들이 본질적인 현대성을 바탕으로 하고 유니크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나 있는 현대성은 육체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시를 쓰기 전에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시단에서 가장 아쉬운 것이 이것이다. 진정한 현대성은 생활과 육체 속에 지각되어 있는 것이고, 그 때문에 그 가치는 현대를 넘어선 영원과 접한다. 이 시의 모티브는 <나의 초조한 걸음을 / 나의 지지한 작은 일들을 歷史가 알 리 없는>의 현대적 자각에 있지만 귀결은 <소리없이 젖을 街路樹의 리듬을 / 나는 진정 알고 있다>의 영원한 인식으로 통하고 있다. 이만하면 그의 흘음(吃音 ; 말을 더듬음-승주(昇注))들을 그의 애교로 보아도 될 것 같다. 이를테면 다음의 구절 같은 것은 그의 서투른 솜씨가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곳인데,


계단에 모든 것을 기대 선

두 다리는 언젠가

몽마르뜨르 긴 층층계에서 떨은 적이

론든 밤거리에 굳어버린 적이

실상 다급한 것은 없다.

바람은 일고 자고

―「아름다운 空白」에서


이런 구절들은 구조상으로는 「歷史가 알 리 없는……」에서의 <낡은 나와 생각들이 남을 수 없는>의 연(聯)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숙명적인 난삽의 고개를 넘어서 <응달진 과거에 사과는 없다>의 청징(淸澄)한 힘에 도달하려고 애를 쓴다. 이런 고지식한 분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웃을 수 있고 신용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싸움에 20년 가까이 종사하고 있다.

그의 시에는 대부분의 하이칼라한 현대어 사이에 유표난 동양어(東洋語)들이 섞여있다. 시집 「變貌」 안에서만 보더라도 <關東의 曲><散調><大門><落水><落淚><冠岳><落潮> 등이 눈에 뜨인다. 이런 습성은 그가 초기때부터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며, 자기 자신도 억제할 수 없는 습성인 것 같다. 이런 말들이 그의 詩의 배경에 흡수되지 않는 것은, 좀 과장해서 말하면 徐廷柱가 <역사><궤도><욕구><계단> 같은 현대어를(詩作品에서) 사용할 때의 느껴지는 대조감 같은 것을 준다.


바람의 아들과 딸은 콧노래로 關東의 曲을 뜯으며

바람에 부벼 여원 以來

성에 차지 않은 쟈즈를

바람에 묻어 띄워보내는

喜悲의 얼굴은 다시

바람의 散調

―「雪景」에서


어떻게보면 모더니티의 피로에서 오는 타성같이도 보이지만 그의 작품을 오래 접해보면 이런 어휘의 패배가 그의 숨은 순진을 보여주는 것 같은 감을 받는다. 그의 최근의 작품에는 이런 어휘가 풍기는 향수를 생활현실에의 접근을 통해서 폭을 넓혀보려는 기미가 보인다.

현대적인 착잡한 분장 속에 일관되어온 그의 시의 본질은 인생의 감회다. 그러나 여지까지의 그것은 한국에 사는 이방인으로서의 인생의 감회다. 만약에 그가 「武矯洞」(新東亞 10)의 세계를 성공적으로 발전시킬 때 그는 한국인으로서의 人生詩를 새로운 吃音으로 노래할 수 있는 독보적인 세계를 획득할 것이다. <眼球의 一角이 쑤시고 / 充血하는 곳 / 나의 故鄕…> 속으로 紳士詩의 옷을 벗고 들어오라면 그는 화를 낼 것인가? 泰鎭과 나와의 교우는 그가 시를 발표하기 전부터 시작되어 왔다.

그가 <…시의 난해성이 여태의 의미로 그칠 리 만무하고 또한 우리 시인들의 시 경험을 자극하는 레알리떼가 불투명하다 치고 그러나 여태와 같은 의미에서 불투명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현대시의 난해성은 또한 새로운 의미에서 난해할 것이 아닐까>(그의 詩月評 「難解詩에 대한 最終是非」 思想界 11에서)라고 말할 때 나는 그가 말하려는 의도를 알 수 있다. 그는 <새로움>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새로움>의 추구에서 그는 우리 시단의 누구보다도 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교양의 근거를 갖고 있다. 다만 그러한 立證이 작품을 통해서 뚜렷하게 서지 않는 것은 위에서 말한 그의 吃音이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이 吃音의 여운과 싸우고 있다. 이러한 여운이 가신 진정한 오늘의 난해시가 어떤 것이냐? 그는 이 해답을 앞으로의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모든 한국시의 카메라의 셔터는 灼熱하는 선진국을 보기 위해 구멍을 훨씬 오무려야 하지만 그의 셔터만은 어두운 한국의 시를 1965년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구멍을 좀더 크게 크게 열어야 할 것이다.

<1965. 2>

演劇하다가 詩로 전향

―나의 처녀작





나는 아직도 나의 신변얘기나 문학경력 같은 지난날의 일을 써낼 만한 자신이 없다. 그러한 내력얘기를 거침없이 쓰기에는, 나의 수치심도 수치심이려니와, 세상은 나에게 있어서 아직도 암흑이다. 나의 처녀작의 얘기를 쓰려면 해방 후의 혼란기로 소급해야 하는데 그 시대는 더욱이 나에게 있어선 텐더 포인트다. 당시의 나의 자세는 좌익도 아니고 우익도 아닌 그야말로 완전 중립이었지만, 우정관계가 주로 작용해서, 그리고 그보다도 줏대가 약한 탓으로 본의 아닌 우경 좌경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항층 지독한 치욕의 시대였던 것 같다.

소위 처녀작이라는 것을 발표하게 된 것이 해방 후 2년쯤 되어서일까? 아무튼 趙演鉉이가 주관한 《藝術部落》이라는 동인지에 나온 「廟廷의 노래」라는 것이, 인쇄로 되어 나온 나의 최초의 작품이다. 그때 나는 연극을 집어치우고 혼자 시를 쓰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발표할 기회가 전혀 없었고, 《예술부락》에 작품을 내게 된 것도 그 동인지가 해방 후에 최초로 나온 문학동인지였다는 것, 따라서 내가 붙잡을 수 있었던 최초의 발표의 기회였었다는 것 이외에 별다른 의미가 없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演鉉에게 한 20편 가까운 시편을 주었고, 그것이 대체로 소위 모던한 작품들이었는데, 하필이면 고색창연한 「廟廷의 노래」가 뽑혀서 실려졌다. 이 작품은 東廟에서 이미지를 따온 것이다. 동대문 밖에 있는 동묘는 내가 철이 나기 전부터 어른들을 따라서 명절 때마다 참묘를 다닌 나의 어린시절의 성지였다. 그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거대한 關公의 立像은 나의 어린 영혼에 이상한 외경과 공포를 주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그 공포가 퍽 좋아서 어른들을 따라서 두 손을 높이 치켜들고 무수히 절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廟廷의 노래」는 어찌된 셈인지 무슨 불길한 곡성같은 것이 배음으로 흐르고 있다. 상당히 엑센트릭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지금도 일부의 평은 나의 작품을 능변이라고 핀잔을 주고 있지만, 「廟廷의 노래」야말로 내가 생각해도 얼굴이 뜨뜻해질 만큼 유창한 능변이다. 그후 나는 이 작품을 나의 마음의 작품목록에서 지워버리고, 물론 보관해둔 스크랩도 없기 때문에 망신을 위한 참고로도 내보일 수가 없지만, 좋게 생각하면 <의미가 없는> 시를 썼다는 증거는 될 것 같다.

그후 이 작품이 게재된 《예술부락》의 창간호는, 朴寅煥이가 낸 <茉莉書舍>라는 해방후 최초의 멋쟁이 서점의 진열장 안에서 푸대접을 받았고, 거기에 드나드는 모더니스트 시인들의 묵살의 대상이 되고, 역시 거기에 드나들게 된 내 자신의 자학의 재료가 되었다. 「廟廷의 노래」와 같은 무렵에 쓴 내딴으로의 모던한 작품들이 「廟廷의 노래」보다 잘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廟廷의 노래」가 《예술부락》에 실려지지만 않았더라도―「廟廷의 노래」가 아닌 다른 작품이 《예술부락》에 실려지거나, 「廟廷의 노래」가 《예술부락》이 아닌 다른 잡지에 실려졌더라도―나는 그 당시에 寅煥으로부터 좀더 <낡았다>는 수모는 덜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나중에 생각하면 바보같은 콤플렉스 때문에 시달림도 좀 덜 받을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후 나는 茉莉書舍를 통해서 朴一英 金秉旭 같은 좋은 詩友를 만나게 되었고, 寅煥이 茉莉書舍를 그만둔 후에 金璟麟 林虎權 梁秉植 그리고 寅煥과 함께 「새로운 都市와 市民들의 合唱」이라는 詞華集을 내게 되어서 지금도 나의 처녀작이라면 이 시화집 속에 수록된 작품들이 나의 처녀작인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실질적인 처녀작은 여기에 수록된 「아메리칸 타임誌」와 「孔子의 生活難」도 아니고, 「廟廷의 노래」도 아니다.

「새로운 都市와 市民들의 合唱」에 수록된 「아메리칸 타임誌」와 「孔子의 生活難」은 이 시화집에 수록하기 위해서 급작스럽게 粗製濫造한 히야까시같은 작품이고, 그 이전에 나는 「아메리칸 타임誌」라는 같은 제목의 작품을 일본말로 쓴 것이 있었다. 그 당시에 우리집은 충무로 4가에서 <有名屋>이라는 빈대떡집을 하고 있었는데 치질수술을 하고 중환자처럼 자리보전을 하고 가게 뒷방에 누워있는 나는 벽지 위에다 「아메리칸 타임誌」라는 일본말 시를 서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자주 우리집엘 찾아온 秉旭이가 어느날 찾아와서 이 시를 보고 놀라운 작품이라고 하면서 村野四郞에게 보내서 일본 시잡지에 발표하자고까지 칭찬을 해주었다. 秉旭이가 경상도 기질의 과찬벽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눈물이 날 지경으로 감격했던 것 같다. 그후 寅煥이가 「새로운 都市와 市民들의 合唱」을 계획했을 때 秉旭도 처음에는 한몫 끼일 작정을 하고 있었는데, 璟麟이와의 헤게머니 다툼으로 秉旭은 빠지게 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寅煥의 모더니즘을 벌써부터 불신하고 있던 나는 秉旭이까지 빠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나도 그만둘까 하다가 겨우 두 편을 내주었다. 秉旭은 이때 내가 일본말로 쓴 「아메리칸 타임誌」를 우리말로 고쳐서 내주라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에 대한 반발로 히야까시적인 내용의 작품을 히야까시쪼로 내준 것 같다. 혹은 秉旭이가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라, 내가 미리 秉旭의 추측을 앞질러서 그의 허점을 찌르려고 황당무계한 내용에 「아메리칸 타임誌」라는 같은 제목을 붙여서 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좌우간 나는 이 시화집에 실린 두 편의 작품도 그후 곧 나의 마음의 작품목록으로부터 깨끗이 지워버렸다.

이 일본말로 쓴 「아메리칸 타임誌」라는, 내딴으로의 리얼리스틱한 우수한(?) 작품 이전에 또 하나의 리얼리스틱한 우수한 작품으로 「거리」라는 작품을 나는 썼다. 이것은 치질 앓기 전에 동대문안에 있는 고모집에 기식하고 있을 때 쓴 것이다. 이때 秉旭은 대구에서 오라오기만 하면 나를 찾아왔고 기식하고 있는 나의 또 기식자가 되었다. 그는 현대시를 쓰려면 우선 육체의 단련부터 필요하다고 하면서 나에게 권투를 가르쳐주려고까지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어리석었던 시절이었고, 또한 상당히 즐겁고도 괴로운 시절이었다. 나는 현대시를 쓴다고 자처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상당히 로맨틱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거리」도 그러한 로맨틱한 작품이다.


…………

馬車馬야 뺑긋거리고 웃어라간지럽고 둥글고 안타까운 이 全體의 속에서

마치 힘처럼 소리치려는 깃발―

별별 여자가 지나다닌다

화려한 여자가 나는 좋구나

내일 아침에는 夫婦가 되자

집은 산너머가 좋지 않으냐

오는 밤마다 두 사람 같이

貴族처럼 이 거리 걸을 것이다

오오 거리는 모든 나의 설움이다


지금 겨우 기억하고 있는 것은 끝머리의 요 몇 줄 정도다.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처녀시집이라면 처녀시집이라고 할 수 있는 8년 전인가에 나온 시집이 이 작품과 「꽃」이라는 《民生報》에 실렸던 작품을 넣고 싶었는데 기어코 게재지를 얻지 못해 넣지를 못했다. 「거리」는 나의 유일한 연애시이며 나의 마지막 낭만시이며 동시에 나의 실질적인 처녀작이다. 나는 남대문시장 앞을 걷다가 이 이미지를 얻었는데, 秉旭은 이 시를 읽고 이런 작품을 열 편만 쓰면 시인으로서의 확고한 기반을 가질 수 있다고 격려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秉旭에 대해서는 愛憎同時倂發症에 걸려있었고, 이런 그의 말을 신용하면서도 경멸했기 때문에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아메리칸 타임誌」를 통해서 반격 내지는 배반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거리」를, 秉旭의 말을 듣고 起林은 여기에 나오는 <貴族>이란 말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 이것을 다른 말로 고치자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며칠을 두고 고민한 끝에 기어코 고치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지금도 나는 가끔 이 <貴族>이란 말을 고치지 않은 것이 나의 시적 자기증명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하고 무심히 생각해볼 때가 있다. 起林은 이것은 <영웅>으로 고치면 어떠냐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영웅―나는 그가 말하는 영웅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작품에서 <貴族>을 <영웅>으로 고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모독이었다. 앞으로 나의 운명이 바뀌어지면 바뀌어졌지 그 말은 고치기 싫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나의 체질과 고집이 내가 좌익이 되는 것을 방해했다.

그러고 보면 나의 시적 위치는 상당히 전통적이고 완고하기까지도 하다. 「거리」는 이러한 나의 장점과 단점이 정직하게 반영되어있는 작품이고, 현대시는 못되지만 「廟廷의 노래」에 비해서 그 나름의 수준에는 도달한 작품이다.

그러나 현대시로서의 진정한 자질을 갖춘 처녀작이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볼 때 나는 얼른 생각이 안 난다. 요즘 나는 리오넬 트릴링의 「快樂의 運命」이란 논문을 번역하면서, 트릴링의 수준으로 본다면 나의 현대시의 출발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나 하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얼른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10여 년 전에 쓴 「屛風」과 「瀑布」다. 「屛風」은 죽음을 노래한 詩이고, 「瀑布」는 懶惰와 안정을 배격한 시다. 트릴링은 쾌락의 부르죠아적 원칙을 배격하고 고통과 불쾌와 죽음을 현대성의 자각의 요인으로 들고 있으니까 그의 주장에 따른다면 나의 현대시의 출발은 「屛風」 정도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고, 나의 진정한 詩歷은 불과 10년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트릴링도 떠나서 다시 나대로 또한번 생각해보면, 나의 처녀작은 지난 6월 2일에 쓴 아직도 발표되지 않은 「미역국」이라는 최근작같기도 하고, 또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아직도 나는 진정한 처녀작을 쓰지 못한 것 같다. 야단이다.

<1965. 9>

作品 속에 담은 祖國의 試鍊

---폴랜드의 作家 셴키에비치





19세기 말엽에서 20세기 초두에 걸친 폴랜드의 작가 쎈키에비치를 말하려면 우선 폴랜드의 역사의 윤곽부터 말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폴랜드 국민은 10세기에 신화시대로부터 기독교시대로 들어갔으며, 따라서 그 시대서부터 폴랜드 국민의 역사적 생활이 시작한다. 이웃나라와의 격렬한 싸움을 겪어가면서 그들은 자기들의 생존을 보존해왔고, 그동안에 폴랜드의 영토는 엘베강에서 도니에블강에까지 오, 볼틱 海에서 黑海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로마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 폴랜드 문명의 특징을 유럽 문명의 그것과 똑같은 것으로 만들었다. 허기는 비잔틴문화의 영향이 바로 폴랜드의 접경까지 밀려든 일도 있기는 하지만 역시 이 나라의 문화의 특징은 기독교적인 것이다. 이런 특수한 地勢 때문에 이 나라의 문명은 진보를 보았고, 그 때문에 또한 이 나라는 전쟁을 겪고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13세기 이후 폴랜드는 韃靼人(달단인)의 침략을 막아왔고, 이러한 폴랜드의 노력으로 그 침략이 유럽에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처럼 유럽의 방어자로서 그 침략이 유럽에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처럼 유럽의 방어자로서 폴랜드는 <기독교의 방패>라는 명예스러운 칭호를 얻게 되었다---그당시 이 말은 <문명의 방패>와 똑같은 의미로 통할 수 있는 것이었다. 16세기 말엽에 리토아니아와 王朝의 연결로 동맹을 맺고 그 후 1569년에 자발적으로 영구적인 합병을 했다. 그러는 동안에 폴랜드의 세력은 증대되고 국왕의 광대한 지배는 16세기에 전 유럽을 뒤흔든 동란을 무사히 막아낼 수 있게 했다. 국내적으로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기 때문에 잔인한 종교적 박해라든가,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다른 나라들이 겪은 특수한 싸움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러한 폴랜드의 융성을 시기하고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의 세 이웃나라는 동맹을 맺고 폴랜드의 독립을 박탈하려고 책동하기 시작했다. 그후 세 나라는 전쟁으로 폴랜드 정복에 성공하고 1773년에 1795년까지 폴랜드의 3국 분할을 이루어놓았다. 이리하여 1795년에 폴랜드는 3차에 걸친 분할을 겪은 뒤에 드디어 독립국가로서의 존재가 완전히 말살되었다. 나라는 멸망했었지만 국민들은 살아 있었다. 러시아와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하는 전쟁에는 언제나 폴랜드 병사들이 참가했다. 나폴레옹 휘하의 폴랜드 군대의 용맹성에 의해서 그들은 불멸의 월계관을 차지했다. 그들이 피를 흘리고 싸운 보상으로 1807년에 와르소 大公國이 건설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후일 재생하는 폴랜드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애처롭게도 나폴레옹 1세의 몰락과 함께 그들의 희망은 수포로 돌아갔다. 1815년에 원회의는 舊폴랜드의 일부에 소위 協議王國이라는 것을 만들고, 러시아 황제를 왕으로 하는 자치적 왕국을 세웠다. 러시아 황제의 지배는 폭정이었고, 그 후 수많은 반란이 일어났지만 번번이 러시아의 강력한 무력으로 탄압되고 실패에 돌아갔다. 1830년, 1863년, 1905년의 봉기는 적에게 막대한 손해를 입혔지만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지는 못했다. 그리고 폴랜드가 독립국가로 다시 재생한 것은 1918년, 즉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였다. 그후 1934년에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1939년 9월에 독일군의 폴랜드 침입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지게 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이다. 폴랜드는 다시 소비에트와 독일에게 전 국토를 분할당했고, 1941년의 독일과 소비에트의 개전으로 독일이 전국을 점령하게 되었다. 그 후 1945년 1월에야 폴랜드는 독일의 패망으로 다시 독립을 하게 되었고, 1952년에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그 후 친소 사회주의 경제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문화의 면에서 폴랜드를 볼 때 이 나라는 그러한 불우한 국가적 운명 속에서도 거대한 인물을 수많이 배출했다. 위선 15세기 중엽에 태양의 주위를 회전하는 지구의 운행에 관한 이론을 발견한 유명한 세기적인 천문학자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가 폴랜드사람이며, 최근에는 방사성 물질을 발견하고 노벨물리상을 탄 유명한 여류 물리학자 퀴리부인이 폴랜드사람이다. 또한 1919년에 폴랜드의 수상으로 취임한 저명한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파데레브스키가 있다.

퀴리부인의 자서전에도 나오지만 자유를 빼앗긴 폴랜드 국민은 아이들에게 자기나라의 말도 가르치지를 못했고, 祈禱도 아이들이 자기나라의 말로 드리면 피가 흐르도록 매를 맞았다. 국민들은 자기들의 땅을 소유할 권리가 없었다. 이러한 저주받은 구속된 기간 동안에 폴랜드 국민은 정부도 없고 군대도 갖지 못햇다. 이러한 절망에 빠진 폴랜드 국민에게 정신적 支柱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미술과 음악과 문학이었다. 폴랜드의 시인은 고대의 예언자처럼 미래에 있어서의 국민의 재생을 예언하고, 자유를 잃고 기진맥진한 동포의 영혼을 격려하고 그들이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기도를 드렸다. 미키에비치(1798~1855), (폴랜드의 대국민 시인)과 슬로바키와 크라신스키와 같은 시인들의 걸작, 작곡가 쇼팽의 작품, 위대한 화가 그로트거와 매티고의 그림, 이러한 것들은 압박당한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폴랜드와 정복해야 할 敵에 대한 것을 열렬하게 호소했던 것이다.

헨리크 셴키에비치(1846~1916)는 1863년의 실패한 반란 후에 폴랜드 사회가 전반적으로 절망과 피폐에 싸여있을 때에 청년기에 도달한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여지껏 사람들이 의지하고 있던 희망은 꺼져버렸다. 그리고 이제 그들에게 생기를 주기 위해서는 비범한 영웅적인 先例와 正義의 승리같은 것이 사람들의 앞에 제시될 필요가 있었다.

이 점에서 헨리크 셴키에비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더구나 모국에 대한 의무라고 생각되는 일을 가장 성공적인 방법으로 성취시켰다. 매력적인 처녀작 「황무지에의 탈출」(1872년), 최초의 단편집「늙은 머슴」(1875년), 「음악가 양코」(1881년), 「정복자 발테크」와 「등대수」(1882년) 등이 그것이다. 그는 1883년에 당시 그가 편집하고 있던 일간신문 스로워를 통해서, 그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동포의 <정신적 要塞를 강화하기 위해서> 위대한 歷史詩 「三部作」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 「三부작」은, 「불과 칼을 들고」(1884년)와 「홍수」(1886년)와 「판 미카엘」(1887~1889년)로서 각각 출판되었다. 그후 1891년에 가련한 심리적 장편소설 「無信仰」을 발표하고 1895년에 교훈적인 소설 「폴랜드 가족」을 발표하고, 유명한 역사소설로서 로마시대의 폭군 네로를 취재로 한 「쿼 바디스」는 1896년에 완성되었다.

「三部作」은 17세기 중엽의 폴랜드의 敍事詩的 묘사로서, 스웨덴과 전쟁을 할 때 달단인과 코자크들이 침입해온 시대의 얘기다. 적은 사방에서 국내로 몰려들었다 수도는 그들에게 점령을 당하고 국왕은 간신히 피신을 했다. 이 불바다 속에서, 이 불행과 재앙의 도가니 속에서 단 하나의 要塞, 야스나 구라(빛나는 언덕이라는 뜻)의 교회만이 정복을 당하지 않고 공격에 견딜 수 있었다. 거대한 대포는 탄알을 성벽에다 대고 퍼부었고, 연이어 공격에 공격을 가했지만 모두다 허사였다. 그리고 이것을 방어하며 싸우는 용사들을 항복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야스나 구라의 용감한 방어전의 모습에 감동을 받고 폴랜드 국민들은 각기 힘을 얻기 시작했다. 그들은 적을 쫓아내기 위해서 무기를 들고 다시 새로운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적은 드디어 격퇴되어 폴랜드의 국경 밖으로 도망쳐나가고 야스나 구라는 무사하게 되었다. (이런 「3부작」의, 17세기 당시의 적에 대한 폴랜드 국민의 전투의 모습의 묘사는 역사가에 따라서 의견이 구구하지만 그의 문학적 가치에 대해서는 비평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이것이 「3부작」의 최후의 장면이다. 이 소설은 세계문학의 걸작 중의 하나에 드는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작품이다. 1900년에 나온 「십자가의 騎士」는 국경 근처에서 폴랜드를 공격한 독일 敎團과의 전투를 그린 것이다. 이 이야기는 15세기 때의 것이고, 폴랜드가 <십자가의 기사> 교단의 힘을 결정적으로 분쇄한 유명한 구룽왈트 싸움의 묘사로 끝을 맺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책과 영화를 통해서 널리 알려지고 있는 「쿼 바디스」는 로마의 폭군 네로시대에 있어서의 초기 기독교도들의 순교를 그린 작품으로, 이것은 1896년에 출판되자마자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 일대 선풍을 일으킨 것이다. 그후 1905년에 셴키에비치는 노벨문학상을 타게 되었다.

이상 열거한 전작품에 공통되는 관념은 무엇인가. 또한 압박당한 시대에 있어서 폴랜드에 대해서 어떤 목적을 갖고 있었나. 거기에는 투쟁이 있고, 正義에 대한 박해가 있고, 그리고 최후에는 정의의 승리가 있다. 적국의 검열관들의 엄중한 감시 밑에서 러시아와 프러시아의 압박에 대해서 공공연한 불만을 털어놓는 일은 폴랜드 작가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이 셴키에비치가 그의 눈을 과거로 돌린 이유이었다. 폴랜드에서도 구속받은 백년 동안에 수많은 네로가 있었다. 로마의 네로를 빌어서 그는 이러한 네로들을 암시하고 규탄했다. 셴키에비치의 고전적 작품은 폴랜드 국민의 정신에 영향을 주고 영광된 과거를 기억하게 하고, 미래를 의심하지 않게 하고, 그리고 믿음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셴키에비치의 문학과 투쟁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도 절실히 요청된다.

오늘날 우리들이 처해있는 현실을 어떤 문학적 수법으로 어떻게 어디까지 싸워야 할 것이냐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 셴키에비치의 시대에 비해서 오늘날의 상황이 급속도로 복잡하고 미묘하고 보다더 불행해진 것도 사실이며, 어찌보면 그의 역사적 방법이 낡은 감이 없지도 않지만 그의 정신은 아직까지도 유효한 것이며 조금도 낡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그의 위대한 투지와 역량에 접할 때, 우리들은 새삼스럽게 한없이 압도될 뿐이다.

<1966. 1>

 

     



詩여, 침을 뱉어라*

―힘으로서의 詩의 存在





나의 시에 대한 思惟는 아직도 그것을 공개할만한 명확한 것이 못된다. 그리고 그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나의 모호성은 詩作을 위한 나의 정신구조의 上部 중에서도 가장 첨단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없이는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유일한 도구를 상실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교회당의 뾰죽탑을 생각해볼 때, 시의 探針은 그 끝에 달린 십자가의 십자의 상반부의 창끝이고, 십자가의 하반부에서 까마아득한 주춧돌 밑까지의 건축의 실체의 부분이 우리들의 의식에서 아무리 정연하게 정비되어있다 하더라도, 詩作上으로 그러한 明晳의 개진은 아무런 보탬이 못되고,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논하는 사람이 아니며,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그는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시를 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에 대한 답변을 하기 전에 이 물음이 포괄하고 있는 원주가 바로 우리들의 오늘의 세미나의 논제인, 시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의 문제와 동심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를 쓴다는 것―즉 노래―이 시의 형식으로서의 예술성과 동의어가 되고, 시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으로서의 현실성과 동의어가 된다는 것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은 나는 20여 년의 시작생활을 경험하고 나서도 아직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되지만,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음시를 못쓰게 된다. 다음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직까지의 시에 대한 思辨을 모조리 파산을 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나의 모호성을 용서해준다면―<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이번에는 시를 논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 나는 이미 <시를 쓴다>는 것이 시의 형식을 대표한다고 시사한 것만큼, <詩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전제를 한 폭이 된다. 내가 시를 논하게 된 것은―속칭 <詩評>이나 <詩論>을 쓰게 된 것은―극히 최근에 속하는 일이고, 이런 의미를 <시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으로서 <시를 논한다>는 본질적인 의미에 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태여 그것을 第一義的인 본질적인 의미 속에 포함시켜 생각해보려고 하는 것은 논지의 진행상의 편의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구태여 말하자면 그것은 산문의 의미이고, 모험의 의미이다.

詩에 있어서의 모험이란 말은 세계의 開陣, 하이데거가 말한 <大地의 은폐>의 반대되는 말이다. 엘리오트의 문맥 속에서는 그것은 의미 對 음악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엘리오트도 그의 온건하고 주밀한 논문 「詩의 音樂」의 끝머리에서 <詩는 언제나 끊임없는 모험 앞에 서있다>라는 말로 <意味>의 토를 달고 있다. 나의 시론이나 시평이 전부가 모험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들은 통해서 상당한 부분에서 모험의 의미를 연습해보았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로, 나는 시단의 일부의 사람들로부터 참여시의 옹허자라는 달갑지않은, 분에 넘치는 호칭을 받고 있다.

산문이란, 세계의 개진이다. 이 말은 사랑의 留保로서의 <노래>의 매력만큼 매력적인 말이다. 시에 있어서의 산문의 확대작업은 <노래>의 유보성에 대해서는 侵攻적이고 의식적이다. 우리들은 시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생각할 때, 내용과 형식의 동일성을 공간적으로 상상해서, 내용이 반 형식이 반이라는 식으로 도식화해서 생각해서는 아니된다. <노래>의 유보성, 즉 예술성이 무의식적이고 穩性的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반이 아니다. 예술성의 편에서는 하나의 시작품은 자기의 전부이고, 산문의 편, 즉 현실성의 편에서도 하나의 작품은 자기의 전부이다. 시의 본질은 이러한 개진과 은폐의, 세계와 대지의 양극의 긴장 위에 서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詩의 예술성이 무의식적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가 시인이라는 것을 모른다. 자기의시의 기교에 정통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詩의 기교라는 것이 그것을 의식할 때는 진정한 기교가 못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자기의 시인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거울이 아닌 자기의 육안으로 사람이 자기의 전신을 바라볼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가 보는 것은 남들이고, 소재이고, 현실이고, 신문이다. 그것이 그의 의식이다. 현대시에 있어서는 이 의식이 더욱더 精銳化―때에 따라서는 신경질적으로까지―되어 있다. 이러한 의식이 없거나 혹은 지극히 우발적이거나 수면 중에 있는 시인이 우리들의 주변에는 허다하게 있지만 이런 사람들을 나는 현대적인 시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현대에 있어서는 시뿐만이 아니라 소설까지도, 모험의 발견으로서 자기형성의 차원에서 그의 <새로움>을 제시하는 것이 문학자의 의무로 되어 있다. 지극히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 말이지만, 나는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만큼 많은 신문을 도입하고 있고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유가 없다.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되지만,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말은 사실은 <내용>이 하는 말이 아니라, <형식>이 하는 혼잣말이다. 이 말은 밖에 대고 해서는 아니될 말이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다>는 <형식>을 정복할 수 있고, 그때에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간신히 성립된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계속해서 지껄여야 한다. 이것을 계속해서 지껄이는 것이 이를테면 38선을 뚫는 길인 것이다. 낙수물로 바위를 뚫을 수 있듯이, 이런 시인의 헛소리가 헛소리가 아닐 때가 온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하고 외우다 보니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 그것이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고 시의 기적이다. 이런 기적이 한 편의 시를 이루고, 그러한 시의 축적이 진정한 민족의 역사의 기점이 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는 참여시의 효용성을 신용하는 사람의 한 사람이다.


나는 아까 서두에서 시에 대한 나의 사유가 아직도 명확한 것이 못되고, 그러한 모호성은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도구로서 유용한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호성의 탐색이 급기야는 참여시의 효용성의 주장에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도 <여직까지 없었던 세계가 펼쳐지는 충격.을 못주고 있다. 이 시론은 아직도 시로서의 충격을 못주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직까지의 자유의 서술이 자유의 서술로 그치고, 자유의 이행을 하지 못한 데에 있다. 모험은, 자유의 서술도 자유의 주장도 아닌 자유의 이행이다. 자유의 이행에는 전후좌우의 설명이 필요없다. 그것은 援軍이다. 원군은 비겁하다. 자유는 고독한 것이다. 그처럼, 시는 고독하고 장엄한 것이다. 내가 지금―바로 지금 이 순간에―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자아 보아라, 당신도, 당신도, 당신도, 나도 새로운 문학에의 용기가 없다. 이러고서도 정치적 금기에만 다치지 않는 한, 얼마든지 <새로운> 문학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정치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다.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다.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형식>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의 성립의 사회조건의 중요성을 로버트 그레이브스는 다음과 같은 평범한 말로 강조하고 있다―『사회생활이 지나치게 주밀하게 조직되어서, 詩人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게 되면, 그때는 이미 중대한 일이 모두 다 종식되는 때다. 개미나 벌이나, 혹은 흰개미들이라도 지구의 지배권을 물려받는 편이 낫다. 국민들이 그들의 <過激派>를 처형하거나 추방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나쁜 일이다. 하지만, 사람이 고립된 단독의 자신이 되는 자유에 도달할 수 있는 間隙이나 구멍을 사회기구 속에 남겨놓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더 나쁜 일이다―설사 그 사람이 다만 奇人이나 집시나 범죄자나 바보얼간이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인용문에 나오는 기인이나, 집시나, 바보 멍텅구리는 <내용>과 <형식>을 논한 나의 문맥 속에서는 물론 후자 즉 <형식>에 속한다. 그리고 나의 판단으로는 아무리 너그럽게 보아도 우리의 주변에서는 기인이나 바보얼간이들이, 자유당때하고만 비교해보더라도 완전히 소탕되어있다. 부산은 어떨지 모르지만, 서울의 내가 다니는 주점은 문인들이 많이 모이기로 이름난 집인데도 벌써 주정꾼다운 주정꾼 구경을 못한 지가 까마득하게 오래된다. 주정은커녕 막걸리를 먹으러 나오는 글쓰는 친구들의 얼굴에 메콩강변의 진주를 발견하기보다도 더 힘이 든다. 이러한 <근대화>의 해독은 문학주점에만 한할 일이 아니다.

그레이브스는 오늘날의 <서방측의 자유세계>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없는 것을 개탄하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그(서방측의 자유세계의) 시민들의 대부분은 群居하고, 인습에 사로잡혀 있고, 순종하고, 그 때문에 자기의 장래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을 싫어하고, 만약에 노예제도가 아직도 성행한다면 기꺼이 노예가 되는 것도 싫어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종교적 정치적, 혹은 知的一致를 시민들에게 강효하지 않는 의미에서, 이 세계가 自由를 보유하는 한 거기에 따르는 혼란은 허용되어야 한다……』 이 인용문에서 우리들이 명심해야 할 점은 <혼란은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자유당때의 무기력과 무능을 누구보다도 저주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지만, 요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도 자유는 없었지만, <혼란>은 지금처럼 이렇게 처절하게 압제를 받지 않은 것이 신통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혼란>이 없는 시멘트회사나 발전소의 건설은, 시멘트회사나 발전소가 없는 혼란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러한 자유와 사랑의 동의어로서의 <혼란>의 향수가 문화의 세계에서 싹트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미미한 징조에 불과한 것이라 하더라도 지극히 중대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본질적 근원을 발효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진정한 시의 임무인 것이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자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도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이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나가는 것이다.

이 시론도 이제 온몸으로 밀고나갈 수 있는 순간이 와있다. <막상 詩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시인은 <詩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라는 나의 명제의 이행이 여기 있다. 시도 시인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 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

<1968. 4>


* 1968년 4월 釜山에서 펜클럽 주최로 행한 문학 세미나에서의 발표 원고


反詩論




문학에는 숙명적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곡예사적 일면이 있다. 이것은, 신이 날 때면 신이 나면서도 싫을 때는 무지무지한 자기혐오를 불러일으킨다. 곡예사란 말에서 연상되는 것이 불란서의 시인 레이몽끄노의 재기발랄한 시다. 얼마전에 죽은 꼭또의 문학도 그렇다. 빨리 죽는 게 좋은데 이렇게 살고 있다. 나이를 먹으면 주접이 붙는다. 분별이란 것이 그것이다. 술을 먹을 때도 몸을 아끼며 먹는다.

그리고 젊었을 때와 다른 것이, 젊은 사람들과 대할 때면 완연히 체면 같은 것을 의식해서 말도 함부로 하지 않게 되고 주정도 자연히 삼가게 된다. 이쯤 되면 거지가 되거나 농부가 되거나 죽거나 해야 할텐데 그것을 못한다. 나이가 먹으면서 거지가 안 된다는 것은 생활이 안정되어가고 있다는 말이 된다.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불안을 느끼지 않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남을 판단한다. 하다못해 술친구들까지도 자기하고 생활정도가 비슷한 사이를 좋아하게 된다.

그렇지만 恒産이 恒心이라고, 생활에 과히 불안을 느끼지 않으면 정신의 불필요한 소모가 없어진다. 도시 마음을 쓸 데가 없는 것 같다. 약간의 사치를 하는 것도 싫지 않고, 남이 하는 사치도 자기의 사치보다 더 즐거웁게 생각된다. 하늘은 둥글고 땅도 둥글고 사람도 둥글고 역사도 둥글고 돈도 둥글다. 그리고 詩까지도 둥글다.

그런데 이런 둥근 詩 중에서도, 하기는 이땅에서는 발표할 수 없는 것이 튀어나오는 때가 있다. 최근에 쓴 [라디오界]라는 제목의 시가 그것이다. 이런 작품도 느닷없이 맨 작품으로 내놓기보다도 설명을 붙여서 산문 속에 넌지시 끼어 내는 편이 낫겠지만 詩란 그런 것이 아니다. 위험을 미리 짐작하고 거기에 보호색을 입혀서 내놓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이고 아예 발표하지 않고 썩혀두는 편이 훨씬 낫다.

그리고 그전에는 이런 발표할 수 없는 작품을 쓰게 되면 화가 나고 분하면서도 오히려 흐뭇한 감을 느꼈는데, 요즘에 와선 그런 자존심도 없어졌다. 후일에 언제이고 발표할 날이 있겠지 두고 보자, 하는 따위의 앙심도 없어지고, 영원히 발표할 날이 없다 해도 조금도 섭섭하지 않은 기분이다. 아니 오히려 발표될 수 없어서 잘되었다는 안도감까지도 든다.

그런데 아주 발표하지 못하는 경우보다도 더 기분나쁜 경우가 있다. 그것은 수정을 해서 내놓는 경우다. 죽는 것보다도 못한 것이 병신이 되는 것이다. 나의 친척에 아들 다섯을 다 병신을 둔 사람이 있다. 이이는 검사노릇을 하다가 4․19 후에 그만두고, 그래도 먹을 것은 있고 몸도 별로 약한 편이 아니었는데, 얼마전에 60도 다 못 채우고 갑자기 죽어버렸다. 미친 자식을 두고 속을 썩인 분수로는 오래 산 셈이다. 그래도 글을 수정해내는 것은 미친 자식을 둔 것보다는 나을는지.

그렇지만 화가 난다. 최근에 某신문의 칼럼에 보낸 원고가 수정을 당했다. 2백자 원고지 5장 중에서 4,5군데를 고쳤다. 음담의 혐의를 받고 불명예스러운 협상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고치자고 항복을 했을 때는, 나중에 나의 보관용 스크랩으로 두는 것만은 초고대로 고쳐놓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며칠 후에 신문에 난 것을 오려놓고 보니, 다시 원상대로 정정을 할 기운이 나지 않는다. 겨우 두어서너 군데만 고치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러고보니 오히려 수정을 해준 대목이 초고보다 더 낫게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 이상스러웠다.

이왕 강간을 당하고 순결을 잃은 몸인데, 하는 심사도 있지만, 요는 내 글보다도 내 글이 자유롭게 내놓여질 수 있는 세상이 정작 문제이지 내 글은 문제가 아니라는 심정이고, 그러고보면 내 글보다 훌륭한 얼마나 많은 글이 파묻혀있겠는가 하는 수치감이 들고, 이런 쪽지글에 신경을 쓰고 보관을 하려고 스크랩을 하는 것부터가 무거운 자책감이 든다. 언론의 자유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천재의 출현을 매장하는 하늘과 땅 사이만한 죄를 범하고 있다. 그리고 A윤리위원회에서 Z윤리위원회까지의 모든 윤리기관을 포함한 획일주의자가 멀쩡한 자식을 인위적으로 병신을 만들고 있다. 이런 풍토에서는 곡예사가 재롱만을 부리지 않고 사기를 하게 된다.

또 나는 흥분하고 말았다. 흥분도 상품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도 사기다. 그러나 이것만은 그만두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죽느니만도 못하다. 그러나 상품으로서의 흥분을 의식하면서 흥분하는 익살광대짓도 있지만 좌우간 피로하다.

이럴 때를 나는 至日로 정하고 있다. 지일에는 겨울이면 죽을 쑤어 먹듯이 나는 술을 마시고 창녀를 산다. 아니면 어머니가 계신 농장으로 나간다. 창녀와 자는 날은 그 이튿날 새벽에 사람 없는 고요한 거리를 걸어나오는 맛이 희한하고, 계집보다도 새벽의 산책이 몇백배나 더 좋다. 해방 후에 한번도 외국이라곤 가본 일이 없는 20여 년의 답답한 세월은 훌륭한 일종의 감금생활이다.

누가 예술가의 가난을 자발적 가난이라고 부른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나의 경우야말로 자발적 감금생활, 혹은 적극적 감금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한적한 새벽거리에서 잠시나마 이방인의 자유의 감각을 맛본다. 더군다나 계집을 정복하고 나오는 새벽의 부푼 기분은 세상에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다.

이것은 탕아만이 아는 기분이다. 한 계집을 정복한 마음은 만 계집을 굴복시킨 마음이다. 자본주의의 사회에서는 거리에서 여자를 빼놓으면 아무것도 볼 게 없다. 머리가 훨씬 단순해지고 성스러워지기까지도 한다. 커피를 마시고 싶은 것도, 해장을 하고 싶은 것도 연기하고 발 내키는 대로 한적한 골목을 찾아서 헤맨다. 이럴 때 등굣길에 나온 여학생 아이들을 만나면 부끄러울 것 같지만, 천만에! 오히려 이런 때가 그들을 가장 있는 그대로 순결하게 바라볼 수 있는 순간이다. 격의없는 애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순간. 때묻지 않은 순간. 가식 없는 순간.

그런데 이런 至日의 중요한 휴식의 기회도 요즘에 와서는 놀라울 정도로 이용하는 도수가 적어졌다. 역시 뭐니뭐니해도 생활이 안정된 탓일 거라. 여유가 생기니까 이상하게도 여유가 없을 때보다도 덜 가지고 매력도 없어진다. 포옹의 매력도 그렇고 산책의 매력도 그렇다. 여유가 생기면 둔해진단 말이 맞는다. 그리고 둔해지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들고 둔해지는 것을 좋다고 생각하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들고, 자꾸 이런 식으로 무한대로 좋다는 생각이 드니 할 수 없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술을 마신 끝에, 간혹 좋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짓을 하고 부푼 마음으로 일찌감치 새벽거리로 뛰어나왔다가 혼이 났다. 아직 행인은 얼마 안 되고 행길은 쓸쓸한데, 노란 돌격모를 슨 도로 청소부의 한떼가 보도에 일렬로 늘어서서 빗자루로 길을 쓸고 있다. 나는 종로거리에서 자라나다시피한 사람이지만 이렇게 용감한 청소부는 처음 보았다.

어찌나 급격하게 일사천리로 쓸고 나가는지 무서울 정도였다. 나는 새벽에 직장에 출근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 처음 보는 풍경인 만큼 더욱 놀랐는지는 몰라도 아마 이 꼴을 자주 보는 사람도, 경기장에 들어온 관중을 무시하듯 행인을 무시하는 이들의 태도에 습관이 되려면 몇 달을 착실히 걸려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낮에도 간혹 버스정류장 부근같은 데에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마구 먼지를 퍼붓는 열성적인 소제부를 보기는 했지만 이런 처참한 광적인 청소부의 표정은 처음 보았다. 나는 먼지를 받으면서도 한참동안 먼발치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저들은 자기 일의 열성의 도를 넘어서, 행인들에 대한 평소의 원한과 고질화된 시기심까지가 한데 섞여서 폭발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일종의 복수행위인가. 복수행위라면 소주에 유독소를 넣어서 파는 것도 복수행위이고, 백화점 점원들이 정가의 두 배를 얹어서 돈 있는 손님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것도 합법적인 복수행위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내가 어느틈에 시대에 뒤떨어져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 복수행위를 예사로 생각하고 있는 듯한 행인들의 얼굴. 이들은 입에 손을 대고 지나가기는 하지만 별로 불쾌한 얼굴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입에 손을 대고 지나가기는 하지만 별로 불쾌한 얼굴도 하지 않는다. 불쾌한 얼굴을 지을만한 여유가 없느지도 모른다.

이들에게는 청소부에 못지않은 바쁜 직장의 아침 일이 기다리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좌우간 나는 청소부의 폭동보다도 행인들의 무료한 얼굴에 한층 더 가슴이 섬찍해졌다. 그리고 <거지가 돼야 한다. 거지가 안되고는 청소부의 심정도 행인들의 표정도 밑바닥까지 꿰뚫어 볼 수는 없다>고 새삼스럽게 생각하면서 재빨리 구세주같이 다가온 버스에 올라탔다.

지일의 또 하나의 탈출구는 노모를 모시고 돼지를 기르고 있는 동생들이 있는 농장에 나가보는 일이다.

흙은 모든 나의 마음의 때를 씻겨준다. 흙에 비하면 나의 문학까지도 범죄에 속한다. 붓을 드는 손보다도 삽을 드는 손이 한결 다정하다. 낚시질도 등산도 하지 않는 나에게는 이 아우의 농장이 자연으로의 문을 열어주는 유일한 성당이다. 여기의 자연은 바라보는 자연이 아니라 싸우는 자연이 돼서 더 건실하고 성스럽다. 아니 진실하니, 성스러우니 하고 말할 여유조차도 없다. 노상 바쁘고, 노상 소란하고, 노상 실패의 계속이고, 한시도 마음을 놓은 틈이 없다.

그들의 농장의 얼굴은 늙은 어머니의 시꺼멓게 갈라진 손이다. 이 손을 지금 40이 넘은 아우가 닮아가고 있다. 그전에 비하면, 이렇게 내 개인의 집안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쓸 만큼 된 것도 여유가 생겼다면 여유가 생긴 것이고 불순해졌다면 그만큼 불순해진 것이다. 소설을 쓸 수 있을만큼 불순해진 것이다. 그래도 여직껏 詩를 긁적거리게 하고 있는 것은 어머니가 농사를 짓는 이외에 불교를 믿고 있다는 것이 또한 무언중에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아무리 곤란해도 거르지 않고 이어온 제사. 그리고 제대로 담근 식혜와 제대로 만든 전여. 절에 갖다줄 돈이 있으면 반찬이나 해잡수시라고 노상 타박을 하다가도 文仁葬의 식장 같은 데서 향불을 입으로 끄는 무식한 선배들을 보면 노모의 노후의 그나마의 마지막 사치를 그다지 탓하고 싶은 마음도 안난다. 결국 내 자신의 되지 않은 문학행위도 따지고보면 노모가 절에 다니는 거나 조금도 다를 게 없다. 어머니는 절에도 다니지만 아직도 땀을 흘리고 일을 하는데 나는 땀도 안 흘리고 오히려 불공 돈의 몇갑절의 술값만 낭비하고 있다. 언제 어머니의 손만한 문학을 하고 있을는지 아득하다.


이제는 애를 써서 책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 책을 안 읽는다는 것은 거짓말이지만, 책이 선두가 아니다. 작품이 선두다. 詩라는 선취자가 없으면 그 뒤의 사색의 행렬이 따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떤 고생을 하든지간에 시가 나와야 한다. 그리고 책이 그 뒤의 정리를 하고 나의 詩의 위치를 선사해준다. 정신에 여유가 생기면, 정신이 살이 찌면 목의 심줄에 경화증이 생긴다.

이런 때는 고생이란 고생을 다 써먹을 때다―말하자면 수단으로서의 고생을 더 써먹었을 때다. 하는 수 없이 경화증에 걸린 채로 詩를 썼다. 배부른 詩다. 이것이 「라디오界」라는 작품이었다. 그후 「먼지」「性」「美人」 등의 3편을 썼는데 아직도 경화증은 풀리지 않고 있다. 만성 경화증인 모양이다. 이대로 나가면 부르좌의 손색없는 시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전에는 무엇을 쓸 때 옆에서 식구들이 누구든지 부스럭거리기만 해도 신경질을 부렸는데 요즘은 그다지 마음에 걸리지도 않고, 오히려 훼방을 좀 놀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것이 약이 되고 작품에 뜻하지 않은 구명대의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잡음은 인간적이다. 그것은 너그러운 폭을 준다. 잘못하면 몰살을 당할 우려가 있지만, 잡음에 몰살을 당할 만한 연약한 詩는 낳지 않아도 후회가 안 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서재가 없다. 일부러 서재로 쓰던 방을 내놓고 안방에 와서 일을 한다. 그저에는 잡음 중에도 옆에서 밥을 먹거나 무엇을 씹는 소리가 가장 싫었는데, 요즘에는 그것에도 면역이 된 셈이다. 정 방해가 될 때면 일손을 멈추고 잡담을 한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詩는 地理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을 몹시 신봉하던 때가 있었는데 근자에는 그 신조를 무시하고 쓴 詩가 여러편 있다. 요즘의 강적은 하이데거의 「릴케論」이다. 이 논문의 일역판을 거의 안보고 외울만큼 샅샅이 진단해보았다. 여기서도 빠져나갈 구멍은 있을 텐데 아직은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뚫고 나가고 난 뒤보다는 뚫고 나가기 전이 더 아슬아슬하고 재미있다.

아무리 해도, 자기의 몸을 자기가 못 보듯이, 자기의 詩는 자긱 모른다. 다만 초연할 수는 있다. 너그럽게 보는 것은 과신과도 다르고 자학과도 다르다. 그렇게 너그럽게 자기의 詩를 보고 세상을 보는 것도 좋다. 이런 너그러움은 詩를 못 쓰는 한이 있어도 지켜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바로 새로운 詩를 개척해나가는 무한한 寶庫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性」이라는 작품은 아내와 그 일을 하고난 이튿날 그것에 대해서 쓴 것인데 성묘사를 주제로 한 작품으로는 처음이다. 이 작품을 쓰고 나서 도봉산 밑의 농장에 가서 부삽을 쥐어보았다. 먼첨에는 부삽을 쥔 손이 약간 섬찍했지만 부끄럽지는 않았다. 부끄럽지는 않다는 확신을 가지면서 나는 더욱 더 날쌔게 부삽질을 할 수 있었다. 장미나무 옆의 철망 앞으로 크고작은 農具들이 보랏빛 산너머로 지는 겨울의 석양빛을 받고 정답게 빛나고 있다. 기름을 칠한 듯이 길이 들은 연장들은 마냥 다정하면서도 마냥 어렵게 보인다.

그것은 프로스트의 詩에 나오는 외경에 찬 세계다. 그러나 나는 쁘띠 부르的인 <性>을 생각하면서 부삽의 세계에 그다지 압도당하지 않을 만한 자신을 갖는다. 그리고 여전히 부삽질을 하면서 이것이 농부의 흉내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죽고 나서 저승에 가서 심판을 받게 되면 내 아우보다 꾸지람을 더 많이 들을 것은 물론 뻔하다. 그것은 각오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섣불리 농부의 흉내를 내고 죄의 감형을 기대하는 것 같은 태도는 더욱 불순하다. 나는 농부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삽질을 한다. 진짜 농부는 부삽질을 하는 게 아니다. 그는 자기의 노동을 모르고 있다. 내가 나의 시를 모르듯이 그는 그의 노동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美人」은 가장 최근에 슨 작품인데 이것은 전부 7행밖에 안되는 短詩다. 낭독회의 청탁으로, 되도록 짧은 작품을 달라는 요청에 따라서 쓴 것이다. 詩는 청탁을 받고 스지 않기로 엄하게 규칙을 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규칙을 깨뜨린 것이다. 터치도 매우 가볍다. 여편네의 친구되는 미모의 레이디하고 같이 成吉思汗式이라나 하는 철판에 구워 먹는 불고기를 먹고 와서 쓴 것이다.

여편네의 친구들 중에는 상류사회의 레이디나 매담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졸작 「美人」의 주인공은 그중 세련된 교양 있는 미인이라고 해서 같이 회식을 하러 갔다. 과연 미인이다. 나는 미인을 경멸하는 좋지 못한 습성이 뿌리깊이 박혀 있는데, 이 Y여사는 여간 인상이 좋지 않다. 여유 위에 여유를 넓히려고 활짝 열어놓은 마음의 창문이 때아닌 훈기가 불어들어온 셈이다. 우리들은 화식집 2층의 아늑한 방에 앉아 조용히 세상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Y여사는 내가 피운 담배연기가 자욱해지자 살며시 북창문을 열어준다. 그것을 보고 내가 일어나서 창문을 조금 더 열어놓았다. 그때에는 물론 담배연기가 미안해서 더 열어놓았다. 집에 와서 그날밤에 나는 그들창문을 열던 생각이 문득 나고 그것이 실마리가 돼서 7행의 短詩를 단숨에 썼다.

이 작품을 쓰고 나서, 나는 노상 그러하듯이 運算을 해본다. 그리고 내가 창을 연 것은 담배연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천사같은 훈기를 내보내려고 연 것이라는 걸 알았다. 됐다! 이 작품은 합격이다. 창문―담배․연기―바람 그렇다, 바람. 내 머리에는 릴케의 유명한 「올페우스에 바치는 頌歌」의 제 3장이 떠오른다.


참다운 노래가 나오는 것은 다른 입김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입김. 神의 안을 불고 가는 입김.

바람.


또한 하이데거의 「릴케론」 속에 인용된,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독일의 사상가이며 문학자. 1744~1803)의 「인류의 역사철학적 고찰」에서 따온 다음의 문고가 密語처럼 울린다.


우리들의 입의 입김은 다른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 세계가 繪畫가 되고, 우리들의 사상과 감정의 기본형이 된다. 인간이 일찍이 지상에서 생각하고, 바라고, 행한 인간적인 일, 또한 앞으로 행하게 될 인간적인 일, 이러한 모든 일은 한 줄기의 나풀거리는 산들바람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런 神的인 입김이 우리들의 신변에서 일지 않고 마법의 음색처럼 우리들의 입술 위에 감돌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필경 모두가 아직도 숲속을 뛰어다니는 동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름다운 Y여사와의 화식이 천한 것이 되지 않고, 나의 평소의 율법을 깨뜨린 것이 되지도 않고, 그녀에게 조그마한―아니 티끌만치도―결례도 되지 않았다는 또하나의 확실한 증거로서, 역시 「올페우스에 바치는 頌歌」의 제 3장의, 방금 인용한 것의 바로 앞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詩句의 복습은 한없이 즐거운 것이 아닐 수 없다.


노래는 욕망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급기야는 손에 넣을 수 있는 事物에 대한 哀乞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노래는 存在다. 神으로서는 손쉬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언제 存在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들은 언제

神의 명령으로 大地와 星座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겠는가?

젊은이들이여, 그것은 뜨거운 첫사랑을 하면서 그대의 다문 입에

정열적인 목소리가 복받쳐오를 때가 아니다. 배워라


그대의 격한 노래를 잊어버리는 법을. 그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이다.



내가 읊은 「美人」이 릴케의 「天使」만큼은 되지 못했을망정 , 그다지 천한 미인은 아니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과신일까. 좌우간 나는 미인의 훈기를 내보내려고 창문을 연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내보낸 것은 담배연기뿐이 아니라 약간의 바람도 섞여있었을 것이다. 바람이 없이는 어떻게 연기인들 나가겠는가.

그전에는 산문 중의 인용문도 너무 파퓰러한 것은 피했다. 여기에 인용한 릴케의 詩句 같은 것도 옛날 같으면 막무가내로 인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가 파퓰러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간에 남의 글을 인용하기가 싫었다. 그것이 요즘에 와서는 파퓰러하고 안하고간에 필요에 따라서는 마구 인용을 한다. 그리고 그전에 비해서 요즘의 나는 훨씬 덜 소피스트케이티디해졌다고 생각한다. 「먼지」 같은 작품은 내 자신도 상당히 난해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난해와 소피스트케이션의 구별을 분명히 가릴 수 있게 되었다. 필요에 따라서 소피스트케이션의 욕을 먹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쓸 작정이다.


파퓰러하다면, 原罪說처럼 정통적이고 파퓰러한 典據趣味가 없는데, 이런 데까지 서슴지 않고 소급해 올라갈 만한 용기가 생겼다. 나의 릴케는 내려오면서 만난 릴케가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부근을 향해 더듬어 올라가는 릴케다. 그러니까 상당히 반어적인 릴케가 된 셈이다. 그 증거로 나의 「美人」의, 검정 미니스커트에 까만 망사 나이롱양말을 신은 스타일이 얼마나 반어적인 것인지 살펴보기 위해서, 부끄럽지만 졸시 「美人」의 전문을 인용해보자.


美人을 보고 좋다고들 하지만

美人은 자기 얼굴이 싫을 거야

그렇지 않고야 미인일까


美人이면 미인일수록 그럴 것이니

미인과 앉은 방에선

무심코

따놓은 방문이나 창문이

담배연기만 내보내려는 것은

아니렷다


이 詩의 맨 끝의 <―아니렷다>가 反語이고, 동시에 이 시 전체가 반어가 돼야 한다. Y여사가 미인이 아니라는 의미의 반어가 아니라, 천사같이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반어이고, 담배연기가 <神的>인 <薇風>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반어다. 그리고 나의 이런 일련의 배부른 詩는 도봉산 밑의 豚舍 옆의 날카롭게 닳은 부삽날의 반어가 돼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의 詩에서는 남과 북이 서로 통일된다.

우리 시단의 참여시의 후진성은, 이미 가슴 속에서 통일된 남북의 통일선언을 소리높이 외치지 못하고 있는 데에 있다. 이것은 우리의 참여시의 종점이 아니라 시발점이다. 나는 천 년 후의 우주탐험을 그린 미래의 과학소설의 서평같은 것을 외국잡지에서 읽을 때처럼 불안할 때가 없다. 이런 때처럼 우리들의 문화적 쇄국주의가 저주스러울 때가 없다. 이런 미래의 꿈을 그린 산문이 시를 폐멸시키고 말 시대가 불원간 올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우주비행을 소재로 한, 우리들은 감히 상상조차 못할 만한 거대한 스케일의 과학시가 벌써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지구를 고발하는 우주인의 詩. 우주인의 손에는 지구에서 갖고 온 찝찝한 빵이 한 조각 들려있다. 이 찝찝한 빵에서 그는 지구인들의 눈물을 느낀다. 이 눈물은 성서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최초의 눈물과도 통한다. 우리의 詩의 과거는 성서와 불경과 그 이전에까지도 곧잘 소급되지만, 미래는 기껏 남북통일에서 그치고 있다. 그 후에 무엇이 올 것이냐를 모른다. 그러니까 편협한 민족주의의 둘레바퀴 속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우리의 미래에도 과학을 놓아야 한다.

그리고 미래의 과학시대의 율리시즈를 생각해야 한다. 나는 아까 <이제는 애를 써서 책을 읽으려고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말을 했지만, 이것도 결과적으로는 반어가 되고 말았다. 때로는 책도 선두에 세우고 가야 한다. 아직 늙기는 빠르다. 종로의 새벽거리의 청소부의 狂態와 그 옆을 태연하게 지나가는 행인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이제는 꿰뚫려 보인다. 간신히 바늘구멍은 터진 셈이다. 또 한 번 Y부인을 만나서 점심을 같이 하게 되면, 그리고 그녀가 나의 담배연기를 내보내려고 북창문을 열게 되면, 이번에도 나는 신사처럼 마주 그 문을 열면서 제 2의 「美人」을 쓸 구상이나 할 것인가. 아니다, 그때는 좀 달라야 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적어도 때늦은 릴케式의 운산만이라도 홀가분하게 졸업해야 할 것이다.


歸納과 演繹, 內包와 外延, 庇護와 무비호, 유심론과 유물론, 과거와 미래, 남과 북, 시와 반시의 대극의 긴장, 무한한 순환, 圓周의 확대, 곡예와 곡예의 혈투, 뮤리엘 스파크와 스프트니크의 싸움, 릴케와 브레흐트의 싸움, 앨비와 보즈네센스키의 싸움, 더 큰 싸움, 더 큰 싸움, 더, 더, 더 큰 싸움……반시론의 반어.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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