쌈짓돈 된 '벤처기금' 운용 실태 - 10億받아 24일만에 고의부도

[경향신문]2005-06-22 45판 04면 1460자 종합


감사원이 21일 발표한 '벤처 전용 P-CBO(프라이머리 회사채담보부 증권)' 발행 및 운용실태는 이른바 '무늬만 벤처인'들의 심각한 도덕적 해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정부 보증을 배경으로 평균 27억원을 조달한 벤처인 가운데 일부는 이 돈으로 개인 부동산이나 골프장 회원권을 샀으며, 해외로 빼돌리기도 했다. 보증금액 목표 달성에만 급급했던 기술신용보증기금의 준비부족과 사후관리 부실이 그 빌미를 제공했음은 물론이다.

정부는 조만간 기술신보를 통해 3년간 10조원을 보증한다는 내용의 '벤처기업 중소기업 육성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어서 똑같은 상황이 재현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보증을 받은 지 1년 이내에 보증사고가 발생, 기술신보가 30억원 이상 갚아준 기업 97개 가운데 48개 기업은 지원받은 1천9백11억원 가운데 7백56억원을 주식투자 등에 유용했다.

나머지 31개 기업의 대표는 9백16억원을 지원받았지만 부도가 나자 부동산 등을 매각하고 해외로 도피하거나 이민을 가버렸다.

2000년 매출실적이 전혀 없었던 ㄱ사는 2001년 기술신보의 P-CBO 보증으로 1백74억원을 조달했다.

그러나 이 회사의 대표이사는 이 돈으로 10억3천8백만원짜리 부동산과 1억8천만원짜리 골프장 회원권을 사는 등 쌈짓돈처럼 사용했다. 그는 지난 2월 부동산과 골프장 회원권을 매각, 싱가포르로 잠적해 버렸다. 이 때문에 기술신보는 1백47억원을 대신 갚아줘야 했다.

전해 매출 2억7천만원에 불과하지만 차입금이 2백64억원에 달했던 ㄴ사도 기술평가 없이 36억원을 지원받았다. 이 회사의 대표이사는 자신 소유의 다른 회사 3곳 명의로도 33억원을 지원받았다.

그는 7개월 만에 주택 등 부동산 3건(6억6천4백만원)과 골프장 회원권 등 재산을 팔아 미국으로 출국해 버렸다.

그가 빌렸던 69억원의 변제 책임은 고스란히 국민 몫으로 남았다. 감사원 관계자는 "10억원의 보증지원을 받은 지 24일 만에 회사를 부도내고 해외로 달아난 사례도 있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기술신보는 눈뜬 장님을 자처했다. 신용평가에서 투자부적격 등급을 받은 807개 업체 가운데 717개(88.7%)는 아예 기술평가조차 실시하지 않은 것이다. 기술신보는 지난해 도래한 P-CBO 만기에 원리금을 상환하지 못한 369개 기업의 7천5백50억원을 일반보증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도 기술평가를 실시하지 않았다.

사후관리도 문제투성이였다. 기술신보는 P-CBO 보증 기업들에 대한 사후관리업무를 6개 자산운용회사에 맡기고 수수료 1백63억원을 지급했다.

그러나 자산운용회사들은 10억원 이상 보증사고가 발생한 기업 268개 가운데 48개(17.9%)에 대해 부도발생 시점까지 정상업체라고 보고했다. 감사원 관계자는 "한때 일부 벤처인들이 테헤란로 주변 유흥가의 밤을 밝히며 뿌린 돈이 사실은 국민 호주머니에서 나왔던 것"이라며 "허탈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해먹을 위치에서 해먹는 것은 가장 일반적인 악의 유형이다.

이들에게 세계나 세계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가 해먹고 자기 배를 불리는 순간 그것은 세계의 완성이자, 인생의 마지막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해먹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해먹지 못하는 사람만 바보되는 관리 시스템과 분위기이다.

해먹는 것이 이익이 되지 않고, 손해가 된다는 사고는 이 세계에서는 굉장히 낯설다.

 

벤처가 모든 이들을 배부르게 하리라는 단순무식한 논리의 파이프로 혈세가 고스란히 빠져나간 셈이다.

악과 악은 겹쳐 있고, 항상 커넥션이 있다. 다만 그 커넥션의 성격이 다를 뿐이다.

하나의 악이 다른 악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악의 목적'은 달성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중간중간에 섬세하게 놓여진 '악'의 일부만 단속할 수 있었다면,

이와 같은 허무맹랑한 '악의 작품'은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전체적으로 '악'에 전염돼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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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을 나서며 필진으로서 책마을이라는 책 커뮤니티 회원들을 위한 마지막 칼럼이었습니다. 군대의 냄새가 물씬 풍길 것입니다. 저는 군인이자 이론가이기도 했거든요. 지금은 사회인이자 실업자이자 이론가입니다.^^



 


이 글은 아래 저의 칼럼 '군대이야기' 중 60점 과락 이론 부분을 자세하게 다룬 글입니다. [이론가]는 널리 통용되는 이론도 아니고, 저명한 이론가의 이론도 아니지만, 세상을 나름대로의 시선으로 관찰하는 한 방편이라고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이에 관해 좋은 말을 했군요.


이론이 비로소 사람들이 무엇을 볼 수 있는가를 결정한다


만만치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그만한 나름대로 준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억지주장인 이론을 마구 만들어보았습니다.

60점 과락 이론은 '벌'을 주제로 다룬 이론이어서 협소한 면이 없지 않아 있으며, 벌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좀더 넓게 활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그에 관한 직접적인 글을 쓰려고 합니다.


60점 이론은 사실 무관심 지수


60점 이론은 사람과 사람의 무관심을 나타내는 지수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으로 인해서 벌을 받은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것은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예외적인 예로 군인이 휴가를 나와서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건물 위에서는 어떤 사람이 자살을 결심하고 뛰어내렸습니다. 결국 자살자는 죽지 못하고, 걸어가던 군인이 봉변을 당해 세상을 떠났다는 안타까운 실화가 이 이론의 예외가 되겠죠. 또한 뜬금없이 맞은편 도로에서 만취한 운전자가 소풍을 마치고 귀가하던 행복한 가족들을 정면으로 받아서 일가족이 몰사한 더더욱 안타까운 경우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서로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나의 점수 30점과 알 수 없는 상대방의 점수 30점 해서 60점의 균형으로 벌을 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벌이란 군대에서 줄 수 있는 벌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안좋은 경험이 될 수 있겠죠.


만남으로 인해서 도전받는 무관심 지수


군대란 사람과 사람이 자의와는 상관없이 관계를 맺어야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60점의 무관심한 균형은 상대방에 의해서 도전받게 되어 있습니다. 개중에 끝까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은 60점 균형을 유지하며 별 탈 없이 잘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군대란 조직이고 조직 내에서는 함께 해야할 임무도 있고, 함께 한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관심은커녕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으면 다행이겠죠. 때문에 현실적으로 60점 균형이 무너짐에 따라서 이에 대한 대처가 필요합니다.


좀 구체적인 사례들


가혹행위로 벌을 받는 사람들은 그가 한 악행 때문에 처벌받는 것이 아니라, 좀더 정확히 말하면 60점 이론에 의해서 벌을 받는 것입니다. 때로는 악행을 해도 그 분위기가 용인할 때는 온갖 악행이 벌을 받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의 분위기나 앞으로의 시대가 부당함이 해소된 완전무결한 균형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악행의 관습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갈 겁니다. 때문에 어제는 용인되었던 것들이 오늘에 와서 벌로써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이죠. 암.

규정에 의해서 벌을 받는 사람들의 지수를 살펴보면 최고의 점수는 50점에서 더 나아가도 55점을 넘지 않습니다. 그 점수의 대부분은 자기가 자기에게 매길 수 있는 50점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에게 피해를 보았기 때문에 점수를 주지 않습니다. 30점을 기본적인 무관심 지수라 했을 때 상대방이 그에게 벌을 준 것이나 다름 없지요. 때문에 그 사람이 아무리 잘 했다고 생각해도 그는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경우는 당연한 결말이나 이 결과로 가는 과정은 중요합니다. 즉 상대방이 나에게 '점수'를 부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상대방은 우리에게 후한 점수를 줄 수도 있으나, 점수를 아예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이 이론에서 '상대방'에 대한 개념이 다가오십니까.


좀 안타까운 사례들


악행을 해서 그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보다 좀 복잡하고 안타까운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실제로 이 이론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태어났습니다. 좀 잘해보기 위해서 상대방을 다독이고 이끌고 하는 노력이 상대방에서 굴절되어 비쳐졌다면 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과의 관계는 언제나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여기서 피할 수 없는 것은 나의 '일방적인 노력들'이 나를 벌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때의 점수는 악행의 결과보다 오히려 낮은 분포도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불행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악행을 하는 사람보다 자신에게 저조한 점수를 부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의 벌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당신의 후임이 공개적으로 당신의 비난을 하고 다닐 수도 있고, 당신을 아예 무시하거나 반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며, 악의적으로 당신을 비난하는 글을 올려서 당신을 궁지에 빠뜨릴 수도 있습니다.


동양의 경전에는 이런 사람들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친구에게 바른 소리를 하는 것은 옳은 행동이다. 그러나 너무 자주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꺼려야 한다. 인간은 감정에 영향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당신의 본심이 다가가기도 전에 '의'가 먼저 깨질 수가 있다.'<출처, 바가바드기타, 논어 등>


한비자의 대표적인 글에서도 이런 말이 나옵니다. 군주에게 유세하는 어려움을 적은 글(세난說難)인데, 당신이 군주의 행위를 칭찬하며 드날릴 때는 군주는 겉으로는 좋아하면서도 당신을 아첨만 일삼는 무리로 분류할 것이고, 반대로 군주에게 천하의 이치를 모아 곧은 소리로 가르치고자 할 때는 겉으로는 가르침을 달게 받는 척 해도 당신을 경계할 것입니다.


당신은 먼저 당신의 세를 쌓을 필요성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계별로 말을 하고 할 말만을 하도록 하며 진심을 쉽게 드러내면 안 됩니다. 군주에게 좋은 말만 해서도 안 되고, 군주를 너무 자극하는 말을 해서도 안 됩니다. 군주가 당신에게 호감이 갈 수 있도록 말을 잘해야 합니다. 당신은 신비한 존재가 되어야 하며, 군주가 당신을 보면 항상 궁금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사람은 바른 말을 하는 것도 같고, 나를 존경하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렇다고 아첨을 일삼는 무리와는 다른 뭔가가 있다.


이런 확신을 조금씩 심어주었을 때 군주는 점점 당신을 신뢰하게 되고, 군주가 당신을 완전히 믿게 되었다면 당신은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것은 곧 국가의 말이 될 것입니다.


한비자의 말에서 중요한 점은 상대방과의 관계를 단계적으로 정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대개 선임이 이런 딜레마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후임이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지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겉으로는 따르면서도 한켠에서는 불만들이 자꾸만 쌓여져 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여기 있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남아 있는 후임이 당신을 회상하면서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의 가치는 지속적으로 하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가가 무서운 것이고, 후임이나 후배들이 정말로 무서울 때는 바로 그때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은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50점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60점 이론으로 보는 나의 대인관계


어떤 생각이나 행동을 옮길 때 나의 점수를 30에서 40 정도로 하고 상대방의 점수를 20에서 30 정도 끌어올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이 최상의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예전에 60점 이론의 모델들을 간단히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60점 이론의 무게중심은 '상대방'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점수를 어느 정도 끌어들이느냐에 따라서 내 군생활의 대인관계 지수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나에게 어느 정도 의미를 주느냐, 어느 정도의 존재인가에 따라서 우리는 상대방의 점수를 꾀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소유한 점수는 50점이지만, 무관심 지수 30점이라는 이론을 조금만 응용하면 얼마든지 나의 행동에 의해서 상대방의 점수를 유도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만약 당신이 상대방과 굳건한 신뢰를 형성했다고 한다면 당신은 열정을 다해서 그에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당신의 행동에 부담을 느낄 수도 있고, 오해를 할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에 위험한 점수를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당신은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상대방과 어떤 관계를 형성할 것인지 계획이 고려되어 있다면 그 계획에 따라 상대방의 점수대를 형성할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애정을 줄 수 없겠구나, 서로 상처만 받을 뿐이야 싶은 사람도 분명히 있습니다. 특히 이런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애정을 가지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애정을 덜 가지는 것은 편애가 아닙니다. 사람은 만나는 사람에 따라 그를 대우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내가 그의 점수대를 리드할 수 있는 것처럼 그도 나를 리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 나와 그의 관계가 보다 분명해집니다. 나는 내가 만들어가고, 상대방은 자신이 만들어가지만, 그 이외에도 나는 상대방이 만들어가고, 상대방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이 관계입니다.


특히 군이라는 곳에서는 잘못 꼬여서 '벌'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쉽게 감정에 동요되지 않고, 좀더 냉정하게 처신해야만 최악의 경우를 면할 수 있습니다. 좀더 안정된 점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좀 더 적극적으로 하는 모습을 통해 평소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60점 이론의 함정에 빠졌을 때 거기에는 당신의 책임도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군생활 잘하시고, 관계맺기를 통해서 좀더 안전한 내무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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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4-10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 쓰실 때 미리 아웃라인을 작성하고 쓰시나요? 참고자료는 이용하시나요? 이런 글 보면 정말 대단하단 생각이 듭니다.

마태우스 2006-04-10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반부가 이해가 잘 안가서 여러번 읽었다는...^^

승주나무 2006-04-11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 님//제 글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웃라인이라기보다는 경험에서 우러난 글이라서 그렇게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제 이야기를 쓴 거거든요.
안타까운 후임에게 '행동'하다가 사무실에서는 '독재자'가 되었고, 부대에서는 '불량병사'가 되어서 징계까지 받았다는 슬픈 기억이...^^;;;

마태우스 2006-04-11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대는 똑똑한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지요. 님의 징계는 그걸 잘 보여 주네요...

승주나무 2006-04-11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 님//제가 똑똑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오늘날에도 똑똑한 사람은 쓸모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적당히 똑똑하거나 적당히 멍청한 게 관리하기 편하다나^^
그래도 군에서 큰 거 배우고 왔습니다.^^;;
 

이 글을 본다면

아니 벌써 일어나서 알라딘에 충성글을 남기느냐고 할 수도 있으나

그것이 아침이 아니라 한밤중이라면 좀 의아해할 것이다.

더구나 직장인의 사고로 볼 때는 아주 '미친 짓'이 아닐까.

그러나 난 '직장인'이 아니니까.

나의 직업이 이동 중이다.

하면 너무 거창하고, 직장을 잡고 있는 중이다.

한 군데는 전에 있던 데와 좀 비슷하면서도 '정신'이 있는 곳이고,

한 군데는 편안하게 집에서 일할 수 있는 곳이고,

한 군데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곳의 자회사이다.  

재택 첨삭은 2단계 첨삭 테스트지를 제출했고,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곳'은 무슨 면접을 '태평로 본사'에서 본다고..ㅡ,ㅡ

내가 꼭 가고 싶었던 '책 많이 읽어야 하는 조건의 회사'는

두 번이나 이력서와 '현란한 문체의 자기소개서'를 보냈음에도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5번 지원에 4개의 응답. 응답률 80%.. 음.. 이만하면 성공이다.

게다가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숙제 하나 얻어왔으니 완전 돈독이 오른 셈이다.

애초부터 '포트폴리오 전략'을 생각했던 나의 고심은 점점 깊어지고 있다.

지금 '무급 수습'으로 다니고 있는 곳과 일감을 기다리고 있는 곳,

서류 테스트를 간단히 통과하고 2단계 테스트와 면접 테스트를 기다리는 곳,

그리고 '옛 정을 생각한 알바'를 감안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5'이다.

일주일을 5로 쪼갠다고 해도 모자랄 판국이니 어떻게 한담..

아직은 나도 분명한 선택을 하지 않고 있으니,

일단 벌려놓은 일이 어떻게 펼쳐질지 관망한 다음에

투잡이든 2,3,4잡이든 해야 할 것 같다.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자야쥐^^ 자고 일어나면 많은 댓글꽃들이 피어있을까?? 내일은 동갑내기이지만 안지 2년이 넘도록 말을 놓지 못하는 다다음주 결혼한다는 친구와 만나기로 했는데, 퍼뜩 일어날 수 있을까. 한강유람선을 타기로 했고, 갈 때는 '주전부리'를 꼭 챙겨오라고 했는데, 딸기를 가득 싸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고..앗! 완전 '의식의 흐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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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4-09 0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댓글 곷의 첫발을 띄웁니다. 호호 피곤하시겠어요. 그런데 잘되길 바랍니다. 태평로 본사라면 양대 신문사가 아닐가 추측해봅니다.
잘 되길 바랍니다.

마늘빵 2006-04-09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쪽이든 승주나무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됐음 좋겠어욤 ^^

날개 2006-04-09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무지 능력 있으신 분이로군요!^^

승주나무 2006-04-09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 님//어떻게 아셨어요^^
담뽀뽀 님//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프락사스 님//그저 잘 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제가 원하는 방향은 즐겁고 재미있게 되는 것입니다.
날개 님//그냥 자랑을 늘어놔서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현란한 문체에 속지 마시기를..부끄러워요ㅠㅠ

라주미힌 2006-04-09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어... 너무 잘나가시는거 아녜요? ㅎㅎㅎ
쏘세요~

stella.K 2006-04-10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안하게 집에서 일할 수 있는 곳이라...그런 곳에선 일할 사람 더 필요하지 않는답디까? 음~끌리네. =3=3

승주나무 2006-04-10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주미힌 님// 아직은 아니고, 좋은 결과가 나와야 잘 나가게 되는 것이지요^^ 쏘는 것은 좀 기다려봅시다용^^
스텔라 님//집에서 편하게 일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결과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아마 당분간은 돈독 버전으로 가야 할 듯^^
 
데블 - 악의 역사 1, 고대로부터 원시 기독교까지 악의 인격화
제프리 버튼 러셀 지음, 김영범 옮김 / 르네상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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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악'에 주목하는가.

'악'은 음습하고 지저분하고 두려운 존재다. 눈을 부릅뜨고 '악'을 주시한다는 것은 한낮에 '태양'을 주시하는 것만큼이나 내키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누구나 가까이 하기를 싫어한다. 하지만 우리가 악을 이렇게 멀리 하는 사이에 '악'은 그 '공포감'을 십분 활용한다.

나의 악에 대한 생각도 뭇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악에 대한 사고관에 전환을 가져온 것은 대학 시절이었다. 이 책의 초입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저자로 하여금 '악'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서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 세계는 어둡고 음습한 범죄나 추리, 법정이 주를 이룬다. 거기서 드러나는 불안정한 인간의 심리와 여러 가지 악의 유형을 작가는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몬스터'라는 만화책에서 완전무결한 '악'의 상징인 '한스'의 천사같은 생김새는 나로 하여금 '악'에 대해서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군대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신문읽기를 하면서 우리 사회가 '악'에 얼마나 무방비한지를 절감했다. 이렇게 시작한 블로그 스크랩이 벌써  1년째다. '악학(惡學)'이라는 카테고리를 따로 만들어서 세상의 '악'의 이야기들을 모아 왔는데, 벌써 5페이지를 넘었으니 300건 정도의 '악행'이 쌓인 셈이다. 이 이야기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해서 하나의 학문적 영역으로 만들고자 하는 야심이 있었으나, 다행히 이 책의 저자가 20년에 걸쳐 '악'의 전모를 밝혀놓은 역작을 만나게 되었다.

악의 이데아는 없는가

저자에 의하면 '악'은 '즉각적이고 직접적이며 실존적'이다. 즉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이분법으로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 일부분에 내가 '참여'하고 있는 '유착'에 주의를 하라는 말이다.
플라톤은 "거짓말이 악인 이유는 그 말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말 안에 진실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는 말로 악을 '결여'의 개념으로 보고 있다. 선이나 신과 같이 이데아 개념을 적용하기에는 그 완결성에 흠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다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총체적 악'을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근원이 없는 생명은 없다. 만약에 '악'이 완결성을 상실한 '결여'일 뿐이라면 이토록 사람을 옥죄고 세계에 '치밀한 고통'을 안기는 시스템은 허구에 가까울 것이다.

악마는 하느님의 작품이다?

악마가 왜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로 골똘히 고민한 적이 있었다. '악'이 탄생한 목적이 있을까. 그저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서 존재한다면 그 무게감은 현저히 떨어진다.
'악은 필연이다'라는 명제에서 출발한 나는 악이 '설계자의 의도' 또는 '세계를 구성하는 필수 원소'로 보기에 이르렀다.

신의 아들들은 하늘의 판관들이고 주가 거느리는 만신들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이 욕망과 자만심 때문에 죄를 짓는다. 자만심 때문에 죄를 지은 경우에는 하늘에서 내던져졌고, 욕망 때문에 죄를 지은 경우엔 자발적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지만, 그 죄의 대가로 구덩이 속으로 던져졌다. 그들은 지상(계곡 안이나 땅 밑에)에서든 공중에서든 어둠 속에 갇히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꾀어 죄를 짓게 한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유혹자의 대장이다. 때로 모든 죄는 그들에게 귀속되지만, 야훼는 분명히 그들에게 계속해서 악행을 저지를 권한을 준다. <본문 중에서>

악은 '파괴'를 연상케 한다. 그런데 동서양의 '파괴'의 양상을 보면 '완전한 파괴자'와 '완전한 재건자'로 나뉜다. 완전한 파괴자는 그야말로 대상을 '파멸'로 치닫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재건자'는 시바 신과 같이 세상의 모든 것을 파괴한 후 그 위에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이 논리를 기독교에 적용시킨다면 '사탄'(악)은 인간을 하느님의 자비로운 품으로 인도하는 하느님의 목동이라 할 수 있다.

사탄이 유다를 선택해 악마의 영을 유다에게 집어넣은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를 택해 자신의 영을 예수에게 보낸다. 이러한 유비 관계는 더욱 가까워진다. 구원이라는 커다란 계획 안에서 신은 항상 예수가 구세주이고 유다가 배반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가 수난을 당하기 위해서는 유다의 배반이 필요했으므로 신의 입장에서 보면 구원의 과정에서 예수뿐만 아니라 유다도 자기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 중에서>

저자에 의하면 '구약 시대'에는 '원죄'의 개념이 없었다고 한다. '타락'과 '원죄'라는 말은 신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바로 '악마'가 신약성서의 중심에 자리하면서 신의 왕국과 악마의 왕국이 싸움을 벌여 급기야 신의 왕국을 이기게 된다고 설파함으로써 신약성서의 중심개념으로 자리잡게 된다. 세상의 악을 뿌리칠 메시아를 예견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기독교에 가졌던 불만은 악을 보면 화들짝 덮어버리려는 예민함이었다. 기독교에서 악은 배제의 대상이지 '연구'의 대상은 될 수 없다. 그것은 반면에 '음성적인 악'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취약성을 노출시키기도 한다. 이슬람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가 배교(背敎)죄로 기소돼 사형 위기에 처한 압둘 라흐만(41, 아프가니스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종교에 유연성이 없을 때 얼마나 많은 병폐가 생기는지 절감하게 된다.

바보야, '약(弱)한 것'이 '악(惡)'한 것이야!

지하세계는 죽음뿐만이 아니라 다산성과도 연관되고, 신화나 제의 안에서 이 두 가지가 결합되면서 악마는 성과 연관되기도 한다. 디오니소스, 마그나 마터, 키벨레, 미트라, 이시스, 피타고라스주의와 연관된 의례들은 진위가 얼마나 의심스럽든지 간에 이후에 이교도와 마녀의 의식에 규범이 될 만한 요소들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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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서 비록 철학(다이아드)이나 종교(헤카테, 에리니스, 라미아스)로부터 여러 근거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여성의 원리가 악의 원리로 인정된 적은 없다. 라미아스는 셈족의 릴리트와 쉽게 합쳐져, 밤에 나타나 남자를 유혹하거나 영아를 살해하는 음란하고 흉악한 여성성을 가진 영으로 창조되었다. 이 이미지는 중세에 점차로 초자연적인 영역에서 자연적인 영역으로 바뀌어, 결국 마녀라는 개념으로 고착되었다. <본문 중에서>

한 과학자는 남성의 정자가 여성의 난소에 비해 생명 탄생에 기여하는 바가 적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열등감으로 여성에 대한 탄압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과학자는 미래에는 남성 없이 여성만으로도 임신이 가능하여, 남성이 '잉여존재' 로 전락할지도 모르겠다는 예견을 내놓았다. 사실 역사는 '편견'의 역사이다. 특히 권위 있는 자의 편견은 수천 년 동안 철옹성의 지위를 차지한다. '약'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빼니 '악'이 되어버리는 유행가같은, 장난같은 이야기가 현실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세계가 신자유주의 체제로 미친 듯이 흘러갈수록 '악'은 왜곡된다. 노동자들의 생존 투쟁은 '집단이기주의'로 오독되고, 농업포기정책을 추진하며 미국의 시커먼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려는 참여정부는 '구국(救國)의 결단'으로 미화된다.

이제는 언론과 기득권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까지도 '사용자'의 입장에서 '노동투쟁'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에게 지하철 파업이라는 것은 아침 출근을 엉망으로 만들고, 유통 마비로 인해 국가경제에 악영향을 끼치는 괘씸한 행위일 뿐이다. 프랑스 노동계와 고교생, 대학생이 모두 거리로 몰려나와 26세의 사회 초년생을 위해 투쟁하고 '여론 지원'을 보내는 것을 우리 식으로 보면 '거대 집단이기주의'라고 해야 할까. 

'악'을 잘못 이해한 죄로 우리가 겪어야 할 고난은 크다. 특히 악은 조직화가 가능하므로, 공동으로 연계한다면 멀쩡한 개념조차 뒤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와 같이 악의 개념이 혼동된 시대야말로 '악'에 대한 개념을 재조명하는 작업을 하기에 적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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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4-07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벌써 다 보셨군요. 이거 정말 어렵던데. 먼 소린지 모르겠어서 발췌독 하고 있답니다.

승주나무 2006-04-07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다가 짜증이 나서 불평을 좀 늘어놓으려고 했죠. 근데, 쓰다 보니 할 말이 많아지더라고요^^;;

류사 2006-04-07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숙제 끝내신 것, 감축드리옵니다. ^^

승주나무 2006-04-07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아니 류사 님//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다음 숙제는 이미 제출해 놓았는뎁쇼
ㅋㅋ 2권으로 진군해야죠^^;;

stella.K 2006-04-08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류사님이...! 이거 우리끼리 흉도 못 보겠군요.ㅜ.ㅜ
 
데블 - 악의 역사 1, 고대로부터 원시 기독교까지 악의 인격화
제프리 버튼 러셀 지음, 김영범 옮김 / 르네상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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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악은 사람들이 인식하는 대로 존재한다. 그러나 악에 대한 인식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만족스럽게 악을 정의할 수 없다. 제한적이나마 의사소통을 위해서 자의적으로 정의를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악은 애매모호한 개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적인 일관성을 갖지도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범주를 통해 정의하기보다는 즉각적이고 직접적이며 실존적으로 악을 인식해야 한다.-16쪽

지금껏 나는 악을 우리에게 행해진 어떤 것으로 다루어왔다. 하지만 우리는 악을 행하기도 한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악이 미치지 않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처럼 어느 누구도 악을 행하지 않고 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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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악의 문제에 대한 대답의 일부분은 내 안에 들어 있다. 그런데도 나는 대개 악을 외부로부터 다가온다고 이해한다. 스스로 악하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악을 저질렀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인류가 직면한 커다란 위험 가운데 하나는 우리 자신의 악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려는 경향이다.-21쪽

악마를 이해할 때 심층 심리학적인 입장, 특히 융의 견해가 가장 시사적이다. 융은 심리 발달을 개별화의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사람은 처음에 자신에 대한 혼돈스러고 미분화된 생각만을 갖는다. 그 사람은 성장하면서 점차로 선과 악의 입장을 분별한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무의식 속에 어두운 그림자를 키워가며 악을 억압한다. 이러한 억압과정이 너무 지나칠 경우에 그 삶의 그림자는 괴물처럼 되어 결국 폭발해 그 사람을 압도해버린다.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세 번째 단계, 즉 조정의 단계가 있는데, 여기서 선과 악이 모두 인지되고 인식의 차원에서 다시 조정된다. -33쪽

①악마는 객관적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② 악마는 역사적으로 정의될 수 있다. ③ 악마에 대한 역사적 정의는 그 자체로 실존적인 악의 정의와 관련해서 얻어질 수 있다. ④ 악마란 사회 속에서 악으로 이해되는 인격화된 무엇이다. ⑤ 악마라는 개념은 이러한 인격화를 이해하는 전통으로 이루어진다. -53쪽

선과 악처럼 모든 것들이 신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기본 전제다. 그러나 사람들이 신이 선하다고 생각하고 악이 신에게서 기인하지 않기를 원하는 한, 사람들은 신성 안에 대립되는 힘이 들어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대립은 점차 구체화되어 짝이 형성된다. 신의 본성은 여전히 악의 원천이지만, 이제 선한 본성과 악한 본성으로(문자 그대로든 비유적으로든) 짝을 이루게 된다. 선한 본성은 하나님과 관계되고, 악한 본성은 신의 적이 된다. 이러한 짝을 '이중체'라고 한다. -68쪽

우주는 단순히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이고, 신성과 더불어 고동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신의 권위를 그러내는 이 세상에 악의 원리라는 것이 따로 존재할 수는 없다. 악의 원리는 신성한 계열의 일부로, 살아 있는 우주의 일부로만 존재할 수 있다. 죽음, 질병, 거짓, 사기 등 이 모든 것은 자연적인 질서가 파괴된 상태이며 따라서 악이다. -90쪽

플라톤은 전쟁, 살인, 착취, 거짓말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거짓말이 악인 이유는 그 말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말 안에 진실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악은 선의 결핍으로만 존재한다. 마치 스위스 치즈에 나 있는 구멍들이 치즈의 부족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플라톤은 존재론적으로 악이 없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도덕적인 악이 없다고는 주장하지 않았지만, 창조자에게서 악에 대한 책임은 없어진다고 했다. -186쪽

지하세계는 죽음뿐만이 아니라 다산성과도 연관되고, 신화나 제의 안에서 이 두 가지가 결합되면서 악마는 성과 연관되기도 한다. 디오니소스, 마그나 마터, 키벨레, 미트라, 이시스, 피타고라스주의와 연관된 의례들은 진위가 얼마나 의심스럽든지 간에 이후에 이교도와 마녀의 의식에 규범이 될 만한 요소들이 들어 있었다.
............
그리스에서 비록 철학(다이아드)이나 종교(헤카테, 에리니스, 라미아스)로부터 여러 근거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여성의 원리가 악의 원리로 인정된 적은 없다. 라미아스는 셈족의 릴리트와 쉽게 합쳐져, 밤에 나타나 남자를 유혹하거나 영아를 살해하는 음란하고 흉악한 여성성을 가진 영으로 창조되었다. 이 이미지는 중세에 점차로 초자연적인 영역에서 자연적인 영역으로 바뀌어, 결국 마녀라는 개념으로 고착되었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기본 전제는 여자는 천부적으로 남자보다 열등하므로 악의 원리라는 위치까지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고전 시대에 수준 높고 지능적인 마술은 주로 남자의 역할로 여겨지고, 반면에 쉽고 경험으로 하는 마술은 여자들의 분야로 여겨졌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223쪽

이 종말론적인 신정론이 가지고 있는 중대한 문제점은 프라이데이가 로빈슨 크루소를 당황하게 했던 질문과 같은 것이다. 만일 주께서 악마를 멸망시킬 권능을 가지고 있고 그를 멸망시키고자 했다면, 왜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을까? 이 질문은 늘 신학자들을 괴롭혀왔다. 신은 왜 그렇게 엄청난 악을 허락했을까? 신이 다른 영에게 자신의 도움으로 파괴를 허락하고 심지어 권한을 부여했다면, 신은 그 파괴 행위에 대해 책임이 없는가? 신은 궁극적으로 그런 일을 스스로 원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 져야 할 책임을 무마해보려는 히브리인과 예언서 시대의 유대인이 벌인 노력은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 뿐이었다. 마스테마가 하는 것이면 야훼도 한다. -261쪽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예민하게 악마를 직접적으로 의식했다. 악마는 기독교의 본질에 타격을 주지 않으면서 쉽게 내버려질 수 있는 정도의 주변적인 개념은 아니다. 악마는 신약성서의 중심에 자리하면서 신의 왕국과 악마의 왕국이 싸움을 벌여 급기야 ㅅ힌의 왕국을 이기고 있다고 설파하면서 신약성서의 중심을 차지한다. 악마는 기독교의 신론에서 중요한 대안을 형성하기 때문에 신약성서에서 악마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80쪽

악마는 악한 인간들의 왕이기도 하다. 악행을 저지른 자들은 악마의 부하 또는 아들이라고 불린다. 베드로 자신도 예수를 꾀어 예정된 길에서 십자가의 길로 가도록 동요하게 했을 때, 악마라고 불렸다. 이상하게도 예수는 베드로가 수난을 피하려고 하자 악마라고 불렀다. 이들 두 사도의 공통점은 구원이라는 신성한 계획에 자신들의 개인적인 두려움을 개입시킨 것이다. 유다가 가장 일반적으로 악마와 관련되고, 누가는 유다에게 실제로 사탄이 들어갔다고 말한다. 유다는 너무나 가까운 예수의 상대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둘의 관계와 신화에서 너무나 자주 나타나는 이중체들의 관계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알 수 있다. 사탄이 유다를 선택해 악마의 영을 유다에게 집어넣은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를 택해 자신의 영을 예수에게 보낸다. 이러한 유비 관계는 더욱 가까워진다. 구원이라는 커다란 계획 안에서 신은 항상 예수가 구세주이고 유다가 배반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가 수난을 당하기 위해서는 유다의 배반이 필요했으므로 신의 입장에서 보면 구원의 과정에서 예수뿐만 아니라 유다도 자기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01쪽

악마의 이야기는 잔인하지만, 악의 실존적 공포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세계관은 모두 환영에 불과하다. 어둠 속에서 울고 있는 이반의 아이는 창조물 전체만큼이나 가치 있는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창조물 전체와 같다.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어떤 세계관을 가졌든지 간에 그녀의 고통을 과소평가하고, 그러한 고통이 존재하지 않느다고 선언하거나 거기에 정교한 철학적 정당성을 부여하려 한다거나, 더 위대한 선이란 관점-그러한 선에 신의 이름이든 아니면 인간의 이름이 부여되든-에서 그 고통을 설명한다면, 그러한 견해는 그녀의 삶과 모든 사람들의 삶을 공허하고 헛되게 만들 것이다. 악이 현존하고 그 와중에 세상은 끊임없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었다. "이 우주는 무엇으로 존재하든 창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우주에서 말한다. 내가 당신과 함께 사랑할 것이다"라고. -3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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