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왕국의 게릴라들 - 삼성은 무엇으로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가
프레시안 엮음, 손문상 그림 / 프레시안북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 민주시민언론연합 등 언론시민단체와 일반 독자들이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 하단에 자비를 털어서 의견광고를 냈다. 민언련에 의하면 2007년 12월 1일부터 2008년 1월 22일까지 삼성은 한겨레에는 단 한 건의 광고도 집행하지 않았고, 경향신문에는 단 두 건에 그쳤다고 한다. 



'광고와 소송'이라는 이름의 맞춤형 언론탄압

나는 3월 3일에 실린 경향신문의 하단 광고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3월 3일뿐만 아니라 최근에 언론을 사랑하는 일반 독자들과 언론단체 명의의 하단광고를 보는 심정은 아프기 그지없다. 나는 동아투위 시절을 잘 모르지만, 그 당시도 일반 시민들이 어려운 살림에 지갑을 털어 의견광고를 내 주었다. 일반독자들이 끝내 의견광고를 내게끔 한 세력이 독재정부에서 재벌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2008년 언론의 환경이 얼마나 황폐해졌고 왜곡됐는지는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이하 ‘민언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12월 1일부터 1월 22일까지 삼성은 한겨레에는 단 한 건의 광고도 집행하지 않았고, 경향신문에는 단 두 건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같은 기간 동안 삼성은 조선일보에 29건, 중앙일보에 19건, 동아일보에 22건의 광고를 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작년 7월 신문발전위원회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05년 기준 <경향신문>의 구독료와 광고 수입 비율은 9.31 대 90.69로 10배 가까이 되고 한겨레 역시 5.5배 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중에서 삼성의 비율은 경향신문이 16.7%, 한겨레가 14.6%이다. (책 233~234쪽)

 

 그 와중에 인터넷 진보매체 프레시안이 삼성으로부터 명예회손 명목으로 10억원의 손해배상소송을 당했다. 명분상으로는 지난 11월 26일 보도됐던 "삼성전자, 수출운임 과다 지급 의혹"이라는 기사로 인해 브랜드 가치가 떨어졌다는 것인데, 이것은 본질적인 이유가 아니다. 본질은 '프레시안 그 자체'다. 프레시안이 경영의 어려움이 닥쳤다고 해서 한달에 소액을 후원한 지 몇 달이 되지 않은 시점이다. 결국 광고로 막을 수 있는 신문사는 광고를 마르게 하고, 그렇지 않은 신문사는 회생 불가능할 금액으로 소송을 걸어 세상의 비판언론을 모두 말려 죽이려는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삼성이다.

 


▲ 경향신문과 현겨레신문에는 최근 언론시민단체와 일반독자들의 의견광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민주언론시민연합(www.ccdm.or.kr)은 사이트를 통해 삼성에게 광고탄압을 받는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을 돕기 위한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사람의 인생을 여럿 바꿔 놓은 삼성

 

삼성은 나의 인생은 바꿔놓았다. 일개 논술강사에 불과했던 나는 2007년 봄에 시사저널 사태를 처음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젊은 치기로 그 전선에 뛰어들었다. 1년 동안 부지런히 뛰어다닌 덕분에 본의 아니게 민언련에서 제9회 민주시민언론상 본상을 공동으로 수상하는 호사까지 누렸지만 언론의 근간을 모두 장악한 삼성의 장악력에 깊은 열패감을 맛보며 언론시민활동을 접어야 했다. 지금은 출판 쪽 일을 하고 있지만, 올해 들어서 <법률사무소 김앤장>과 함께 출판의 영역으로 넘어온 이 책이 무척이나 반갑다. 언론은 삼성 DNA가 모두 퍼져서 변화의 여지가 없지만, 출판 영역은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언론의 독자들은 기득권에 호도되기 쉽지만, 책의 독자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취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가혹한 현재의 규제라면 비자금도 정당하다”는 재벌 신문들이나 경제지들이 같잖은 글이 침범하기 쉽지 않은 것이 출판의 영역이다. 그래서 나는 책의 독자들과 리뷰어들에게 희망을 건다.

 

 

▲ <삼성왕국의 게릴라들>은 X파일 사건에서부터 최근의 삼성비자금 사태까지 삼성이 벌이고 있는 광범위한 불법, 편법, 탈법 의혹을 내부고발자와 경제학자, 입법 정치인과 기자, 노동운동가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각 인물들의 인터뷰는 물론, 새로 만든 만평, 사건개요와 핵심 요지 등을 짜임새 있게 담았다. 새로운 문제제기나 출판의 차별성은 다소 부족하지만, 삼성의 문제점을 한 자리에 압축해 놓았고, 용기 있게 세상에 선보인 점은 분명히 의미 있는 일이다.  



이 책은 삼성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일곱 팀을 다루고 있다. 김용철 변호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상조 교수, 노회찬, 심상정 의원, 이상호 MBC 기자,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이 그들이다. <김앤장>과 마찬가지로 탐사보도의 틀을 출판에 맞췄기 때문에 기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내용도 있고, 시의성을 잃었거나 깊이와 천착에 한계가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지만 도서포털에서 ‘삼성’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했을 때 읽을 만한 몇 안 되는 텍스트가 나왔다는 점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 도대체 몇 권이나 사야 소송 부담액 10억원을 마련할 수 있을지 눈앞이 깜깜하지만..

 

프레시안이여! 2008년뿐만 아니라 2009년, 2010년.. 수십 년이 지나도 내 옆에 네가 있었으면 좋겠다.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너에게 힘내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8-03-17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읽기 두려운 메디컬 스캔들 - 젊은 의사가 고백하는
베르너 바르텐스 지음, 박정아 옮김 / 알마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제주에 사는 촌놈 치고 서울을 많이 다녔다. 서울대 병원에 가기 위해서이다. 내가 서울대 병원을 찾는 이유는 거의 운명적이었던 것 같다. 유아기에 유리창에서 떨어졌을 때 동네의사가 신경이 끊어진 채로 그냥 봉합해 버리는 사건이 있은 후로 우리 어머니는 심상치 않은 병이 났을 때 무조건 서울로 향했다. 다행히 종양을 제거하고 정기검진을 받아야 했는데 문제는 비행기값과 길에서 버리는 시간이 장난이 아니다. 당시 돈으로 십여 만원 쓰고 수 시간 걸려서 찾아가면 검진은 30초만에 끝난다. 뭘 물어보려고 해도 아는 게 있어야 말이지.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제주도에서 올라온 촌놈에게 배려할 머시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병원에 자주 들락거리지 않아도 병원만의 분위기가 있다. 접수를 하고 진료 대기실 앞으로 가면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입구에 A4로 대충 붙여놓은 목록에 내 이름을 확인하면서 안도의 숨을 내쉰다. 의사방에 들어가기 전에 들어오라는 호출을 받으면 긴장이 된다. 그 모습을 지금 떠올려보면 의사들은 눈 앞의 환자를 보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의사들은 '다음 환자'를 보고 있다. 다음 환자가 들어오면 또 다음 환자를 본다. 한번도 눈앞의 환자를 주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파스칼의 한숨이 떠오른다.

"사람은 과거에 항상 집착한다. 그리고 미래만을 바라며 행동한다. 그리하여 영원히 '현재'와 만나지 못한다."

<읽기 두려운 메디컬 스캔들>의 저자는 일종의 내부고발자이다. 의학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학을 따로 전공한 전문의가 현장에서의 경험을 회고하며 병원시스템의 모순을 고발한다. "그래서 어쩌라고?"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의사가 환자에게 살갑게 대할수록 자기 자리가 위협받고 환자를 코 닦은 티슈처럼 팽개칠수록 승진의 확률이 올라가는 처지를 보여줌으로써 의사 정신 자체에 대해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의사들이 반성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병원시스템과 의사들의 잠재의식이 사회적 의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감수성이 괴로울 것이다. 슬프고 화나고 읽는 사람 스스로가 치욕을 느끼게 만드는 실존인물 의사들과 그들의 피해자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여과 없이 회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L.SHIN 2008-03-13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하여 영원히 '현재'와 만나지 못한다"

저 역시 의사들에게 대해 안 좋은 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편견과 경험의 조합적인 감정.
'사람을 위해 의술을 펼치는' 의사가 아닌 '돈 많이 버는 직업'으로써의 의사가 너무
많은 현실에 늘 불만이었습니다. 불친절한 곳에 가서 무슨 병을 치료하겠습니까.
환자의 마음부터 편안히 해주는 것이 이미 의술의 시작이란 것을 모르는 -
친절교육과 인성교육이 가장 시급히 필요한 것이 바로 의료계일겁니다.
그들은 (물론 모두 다 그러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의 몸을 치료하기 전에 자신의 정신부터
검사받고 치료받아야 됩니다.
이런걸 읽으면 인간 혐오증이 더욱 더 짙어지겠지만, 전 읽을겁니다.

리뷰 잘 봤습니다.^^

승주나무 2008-03-14 15:25   좋아요 0 | URL
이제는 자본주의가 모든 영역에 다 얼굴을 들이대고 있지만.. 적어도 인간이 최소한 누려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자본주의가 무참히 헤집지 않았으면 합니다.

법이나 의료서비스 같은 것은 국민이 누릴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공적 서비스이니까요.. 안타깝습니다 ㅡㅡ;
 
신은 위대하지 않다 (양장)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2년생의 지성은 종교적 회의와 철학적 성찰 속에 침잠해야 한다

대학 시절 나의 행보 중 가장 다행스러웠던 것은 두 사람을 만난 일이다. 한 명은 유대교로부터 극렬한 저주를 받고 파문당한 철학자 스피노자이며, 나머지 한 명은 평생을 간질과 주색, 노름, 종교적 회의, 무신론적 유혹에 시달렸던 소설가 도스또옙스끼였다.

스피노자는 철학자답게 인격이 있는 신을 이성 체계의 정점으로 대체했다. 신은 육체를 가지면서 마음에 안 드는 녀석들을 혼내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원인'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 근거를 가지며 모든 유한한 물질의 근거를 제공한 무한한 존재이며 이 질서 안에 편입돼 있다. 우리가 만물과 대면하는 것은 곧 신의 흔적을 접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유대 교회로부터 파면당하고 바루크(Baruch)라는 유대식 이름을 버리게 된 이유다.

도스또옙스끼는 스스로 '어둡고 음습한 공포와 범죄의 세계'를 창작의 기반으로 삼았다고 회고했다.

도스또옙스끼의 작품 속에는 독실한 신자에서부터 무수한 무신론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운명이 얽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종교적 회의에 가장 괴로워한 인물이 바로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이반이다. 도스또옙스끼는 무신론이든 유신론이든 고통스러운 회의의 과정을 통해 달성된 신념만이 진정한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모순들을 숨기지 않고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솔직히 말해라. 대답해. 네가 종국에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평화와 안식을 주겠다는 목적을 갖고 인간의 운명이라는 건물을 짓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그 목적을 위해서는 아주 자그마한 생물, 자그마한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는 바로 그 아이를 불가피하게 괴롭힐 수밖에 없다.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할 그 아이의 눈물을 기초로 건물을 세워야 한단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너는 건물을 짓겠느냐? 사실대로 말해라."
- 이반이 알료사에게, <까라마조프가 형제들>, 315쪽에 재인용



나는 특별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 심취했다. "최고의 지성은 완전무결하고 위대한 신에게 귀의하지 않을 수 없다"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주장에 대해서 적극 동조해 복수의 종교 단체(사이비라는 의혹을 받기도 했었던)에 가입해 활동한 적도 있었다. 지금도 나는 종교가 있느냐는 질문에 머뭇거리며, 내면 속에서는 아직도 유신론과 무신론이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의 관계처럼 오랜 전통 속에서 격렬히 토론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말하기 민망하겠지만, 세계의 지성들이 동경해마지 않는다는 '대학2년생' 시절이라는 게 있다. 초년생 때는 철이 없었고, 졸업생 때는 취업의 압박이 만만치 않다.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생활인이 평생 동안에 아무 걱정 없이 지성에 심취할 수 있는 기간이라고는 고작 대학2년생 1~2년 정도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종교를 가지고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신을 믿든 그렇지 않든 그 시절에는 반드시 '종교적 회의'라는 터널을 지나쳐야만 종교관이 비옥해질 수 있다. 만약 이 터널이 생략된다면 사회적 중추가 되어서 십일조나 갉아먹고 우파의 논리를 뻐꾸기처럼 읊어대는 보수적 종교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 오늘날 이명박 장로를 추종하고 사학법의 취지에 상관없이 그 자체를 빨갱이로 매도하는 종교 지도자들이나 미국의 기독교 세력들, 탈레반의 근본주의자들처럼 빈껍데기 신앙만이 가득한 세월을 살다가 하느님 없는 무덤을 맞이할 수도 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종교적 회의의 터널이 있는 곳을 아는 듯하다. 하지만 열렬한 히친스주의자가 되어 무신론자가 되는 것은 히친스가 바라는 것도 아니며 또다른 종교를 만드는 것일 수 있다. 
 

 

히친스는 무신론의 종파를 세우지 않는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영국 포트머스에서 해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유대계 어머니에게 활달한 기질을 물려받았다. 옥스퍼드 대학 재학 시절엔 트로츠키주의자였다. 졸업 후 좌파 성향의 뉴스테이츠맨지(誌)에 들어갔고 그리스 특파원 등을 거쳐 1981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네이션·배니티 페어 등 유력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며 '키신저 재판' '미국을 만든 사람 토머스 제퍼슨' '왜 조지 오웰이 중요한가' 등 10여 권의 베스트셀러를 썼다. 우아한 영국 억양, 유려한 문체, 명쾌한 논지, 신랄한 기지로 수많은 팬과 동수의 적을 만들었다.

히친스의 책 <신은 위대하지 않다>를 다른 말로 하면 <반신론(反神論)> 정도 되겠는데, 이 말 안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이때의 '반(反)'은 anti를 뜻하는 '반대하다'와 '반성하다'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히친스의 이 책을 <신에게 반대하는 책>으로 읽거나 <나의 신 관념을 반성하는 책>으로 읽거나 큰 차이가 없겠지만,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전에 도킨스에게 내가 말했어요. '여기 1000명이 있다고 치자. 설령 그들 모두를 무신론자로 바꿔놓을 수 있다 쳐도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도킨스가 '아니, 왜?' 하더군요. '그래야 논쟁을 계속 할 수 있으니까'라고 대답했어요. 완승에는 뭔가 빠진 게 있어요. 내가 전적으로 옳다 해도 반대파가 살아남길 바래요. 논쟁은 어느 쪽이 이기냐에 관계 없이 그 자체로 우리를 계몽합니다."
- 2008.1.19, 조선일보 인터뷰
 

 

그러니까 히친스의 관점에서는 <신에게 반대하는 책>으로 서술할지라도, 독자는 <나의 신 관념을 반성하는 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 책을 읽는 하나의 포인트다. 인류가 탄생하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오랜 세월 동안 종교가 비종교에게 박해를 받았던 사례보다 종교가 종교에게 박해를 받았던 사례가 더 많으며, 이보다 종교가 군림한 시간이 더 길었다. 요컨대 종교의 적은 타 종파가 아니라 이성이다.
종교와 이성 사이에는 터널이 하나 가로질러 있는데 그것은 앞서 말했던 비참과 회의의 터널이다. 이 터널을 통해 수많은 지성들이 빛을 밝혀 왔다. 하지만 터널을 통하지 않은 사람들은 무고한 자들을 화형에 처하거나 지독한 독단으로 사람들에게 전혀 감흥을 주지 않아 결국 잊혀졌다. 때문에 나는 종교적 감흥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오늘날의 대부분의 종교지도자들은 비참과 회의의 공포를 받아들이지 못한 겁쟁이라고 규정한다. 이성과 '고통의 관계'를 갖지 못한 모든 종교 관념은 인간의 지성을 유아기 수준에 머무르게 한다.

히친스의 주장에 동조하든 반대하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문제는 그가 던지는 의문과 회의,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이 받아들일 만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성은 끊임없이 질문을 만들어내고, 종교는 끊임없이 답을 만들어 낸다. 질문이 먼저인가, 답이 먼저인가. 그것을 명확히 가리는 것은 쉽지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잘못된 질문에는 잘못된 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L.SHIN 2008-03-09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에요, 승주님.
잘 지내시죠? ^^
요즘 일교차가 심합니다.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승주나무 2008-03-10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ud-S 님 안녕하세요. 저는 요즘 돼지처럼 마니마니 먹어서 감기는 안 걸리겠지만, 그 대신 살덩어리가 ㅠㅠ
님도 건강하시고, 간만에 소식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당~~

2008-03-10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로시 밴드 Dorothy Band 1
홍작가 글 그림 / 미들하우스 / 200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의 만화책 나이테는 중학교 때 아이큐점프에 나오는 드래곤볼 시리즈로 끝났다가
대학 때 잠시 살아났다. 몬스터, 천재 유교수의 생활, 바르세르크 등등
미야자키 하야오 사단의 만화에 감동받으면서
우리는 왜 이런 만화를 만들지 못할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재패니메이션의 나라에서도 한국 작가들의 터치 기술은 정평이 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광에 봉사하는 하청업체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민족감정을 이야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멋과 개성을 살린 만화 유전자가 아이들과 어른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일 뿐이다. 그러니까 <도로시 밴드> 같은 만화가 몹시도 그리웠다는 말이다.

80년생 젊은 작가 홍작가는 도로시를 사랑했고 그래서 도로시의 아픔과 상처의 기억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대신 도로시의 분신들인 친구들이 저마다의 사연과 굴레를 가지고 왔다. 주인공과 주인공의 친구들이 등장하는 모든 작품은 굴레와 매듭을 풀어가는 과정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도로시 친구들의 특징이 참 재밌다. 허수아비(guitar)는 "애드리브의 달인. 뇌가 없어서 곡을 암기하지 못한"단다. 나와 비슷한 캐릭터다. 나는 잊어버리는 것을 건망증이라 부르지 않고 '잊어버리는 기술'이라고 부른다. 좀더 갖다 붙이면 토마스 쿤의 '축적형 지식을 극복한' 창조적 지식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지식이 머리에서 발효된다는 점에서는 기억보다 나는 망각을 선호한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곡 잊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야. 머리가 아닌 어딘가에 남아 있거든. 작은 단어 하나가 삶을 바꾸곤 하는 법이지. (181)  
   

이런. 흠흠.. 내가 너무 허수아비만 편애했나 보다. 강철나무꾼(base)은 "말을 가슴에 담아두지 않는 녀석. 정확한 리듬을 타지만 감정이 없다"고 한다. 사자(drum)은 "엄청난 무술실력을 자랑하지만 무대 위에선 한없이 작아지는 소심남"이다. 설정이 참 재미있다. 이런 병통들이 있으니 인물들이 사랑스럽다.
도로시가 신내림을 받은 이유는 좀 엉뚱하지만, 도로시는 억눌린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는 것만으로 충분히 '신내림'을 받을 만하다.

   
  "버스 손잡이에 껌 붙여논 자식 언놈이야!!
넌 내 정신을 치유불가 상태로 만들어 버렸어!
아침까지만 해도 나쁘지 않았던 나의 하루에 사형선고를 내린 거야!!
그치만 주식이 올랐지! 내릴 곳을 지나쳤어!♩♪" (214~215)
 
   

일상 속에서 온갖 떠오르는 단어를 아무렇게나 조합하듯 도로시는 가사를 거의 '시뿌리'지만, 듣고 보면 속 시원한 구석이 있다.

작품의 기본 구성은 뻔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오즈의 마법사를 섞어 놓은 듯한 스토리 원형에다가 우리나라 현대사의 이야기를 섞어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놓지 않게 만드는 힘은 작가의 세심한 관찰력과 기발한 전개방식이다. 이 이야기가 만약 소설이었다면 이 정도 재미는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구? 이것은 '만화'니까. 만화의 형식으로 소설을 써넣은 '그래픽 노블'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대인 - 유대인은 선택받은 민족인가 고정관념 Q 8
빅토르 퀘페르맹크 지음, 정혜용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큰 솥 주위를 빙빙 돌아라, 독 있는 내장을 집어넣어라…… 도롱뇽의 눈알과 개구리의 발톱, 박쥐의 털과 개 혓바닥, 독사의 혓바닥과 맹사의 가시, 도마뱀의 다리와 올빼미 날개, 무서운 재앙을 일으키는 부적이 되게, 지옥의 국과 같이 펄펄 끓어라……

마녀의 미라와 게걸들린 상어의 밥주머니와 창자, 밤에 캐낸 독 있는 당근의 뿌리, 신을 모독하는 유대인의 간장(肝臟), 터키인의 코, 타타르인의 입술, 창부가 개천에서 낳자마자 목을 매어서 죽인 갓난애의 손가락, 제 새끼 아홉 마리를 먹어 버린 암퇘지의 피를 퍼부어라. 살인자의 교수대에서 흐르는 기름을 불길 속에 집어넣어라.

- 셰익스피어, <맥베스> 중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서 맥베스에게 치명적인 저주를 가하기 위해 넣은 교수대의 기름이나 독사의 혓바닥과 같은 성질의 재료로 묘사되는 바와 같이 유대인은 역사상 가장 오랜 세월 동안 고난을 겪으면서 지독한 저주에 시달렸다. 그보다 가깝게는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영화에서 유대인은 나치의 학살에 대해 시종일관 무기력하게 끌려 다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런 장면이 유대인을 비판하는 근거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른바 ‘무기력한 모습’에 대해서는 나도 할 말이 있다. 나의 고향 제주에서는 1948년을 기점으로 수년 동안 인구의 1/3인 8만명 정도가 ‘무기력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야말로 개처럼 취급되었는데, 어린 시절에는 총 한번 빼앗아보지 못했던 희생자들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해본다면 살아남은 가족의 안위가 달려 있는 상황에서 저항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홀로코스트에 직면한 유대인 역시 이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유대인에 대한 지나친 관념화와 차별, 폭력은 유대인과 이웃하는 사람들의 공포심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치의 히틀러도 유대인에 대해서 피해의식을 가졌던 듯하다. 가까운 예로 ‘제노포비아(xenophobia) 문제’를 들 수 있는데, 이는 러시아와 유럽에서 일기 시작한 외국인 혐오증과 이를 실천하는 조직적 움직임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주로 이민자들과 현지의 저소득층 간의 갈등이 인종문제로 비화된 것이다. 경기침체와 실업문제, 양극화 등의 사회문제의 원인을 이민자들에게 덮어씌우는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 <고정관념Q> 시리즈의 하나인 <유대인 편>을 보면서 나는 유대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상황은 물론, 유대인들이 왜 그렇게 ‘안보’에 목숨을 걸고 ‘적’에 대한 적대감이 분명한가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유대인을 옹호하는 듯한 몇몇 구절이 거슬렸는데, 이것이 나의 독해 부족이라면 다행이지만, 이런 느낌을 받는 사람이 나 한 사람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아쉬운 대목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