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선거이야기 - 1948 제헌선거에서 2007 대선까지
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08 총선의 을씨년스러운 풍경

 

2007년 대선에 이어 2008년 총선도 최고로 재미없는 선거로 갈 것 같다. 표를 까보든 말든 이미 결론은 나왔다는 자조의 목소리가 들린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참여율이다. 14, 15, 16대 총선의 투표율은 각각 71.9, 63.9, 57.2%P로 뚜렷한 하강구도를 보이고 있다. MBC가 코리아리서치센터에 의뢰해 전국 19세 이상 성인 남녀 천명을 대상으로 4월 2일 하루 동안 조사한 전화설문(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 3,1%p, 응답률은 16.8%)에 의하면 이번 총선에서 "꼭 투표하겠다"는 응답이 60.5%로 저조했다. MBC는 지난 17대 총선 때는 선거 2주일 전 조사에서 꼭 투표하겠다는 답이 75.2%, 실제 투표율은 60.6%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번 투표율은 50%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4월3일 보도, MBC뉴스데스크) 정치인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이 투표율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역사적으로 장기집권에 대한 반감과 '뉴 페이스'에 대한 갈망을 표심으로 표현해 왔는데, 경제인 출신이라는 신선한 이력과 서울시장 취임이라는 금상첨화를 얻어 이명박 대통령은 가장 쉽게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앉아도 되고 누워도 된다'는 2002년 대선 당시의 이회창 측의 장담은 이명박에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무엇보다도 선거는 역사의 과정을 한땀한땀 채워가는 축제인데 마치 한판 대결로 세상이 다 끝날 것처럼 올인하는 정서는 입후보자나 유권자 모두에게 독이 되고 있다. 참고로 내가 투표할 선거구인 '강서갑'에 출마한 한나라당 구상찬 의원의 명함 앞면에는 큰 글씨로 이런 공약이 적혀 있다. "화곡 뉴타운 4년안에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조급증도 이러한 조급증이 없다. '정몽준 성희롱 의혹 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정몽준 의원의 공약은 '사당 뉴타운 개발'이었다. 성희롱 피해를 본 기자의 질문은 "오세훈 시장은 사당 뉴타운을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었는데, 이 질문 직후에 정몽준 의원이 매우 엉뚱한 행동을 한 것은 그만큼 당혹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유권자들은 이번 선거에서도 정치인들이 파놓은 '말의 함정'에 빠져들지 않을지 걱정이다. 결국 남는 것은 '허언'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정치에 대한 불신은 더욱 높아지고 이것이 투표 참여율 하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계속 만들어가고 있다.

얼마 전 정치학계의 스승인 최장집 선생은 노회찬 의원을 지지방문한 자리에서 "노 의원이 당선되는 일이 앞으로의 한국 정치 발전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 절대로 필요한 사안이 됐어요. 한 사람의 의원이 당선되는 의미를 넘어서."라고 말했다. 매우 절박하고 매우 씁쓸하다. 이렇게까지 진보세력이 구석으로 몰렸는가.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역사 = 저자 서중석 선생의 인생
 

서중석 선생은 한국현대사 분야에서 매우 귀중한 인물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1948년에 태어난 점부터 의미심장한데, 신군부 시절인 1979년부터 1988년까지 10년간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다가 현재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로 교편생활을 하고 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을 하다가 현재는 고문으로 있는데, <대한민국 선거야이기>(역사비평사)는 2007년 봄부터 5회에서 걸쳐서 역사문제연구소 주최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5회에 걸쳐서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이화 선생은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웅진지식하우스)의 추천사에서 그를 '현대사를 바르게 쓴 역사학자'로 평가하면서 금기가 많은 현대사를 자기의 뚜렷한 주관에 따라 많은 연구 업적을 남겼다고 소개했다. 책 속에서도 그러한 분위기가 쉽게 읽히는데, 내가 볼 때 그는 '대중역사서의 표준문체'에 도달한 듯하다. 사관이 조선왕조실록 기록하듯 엄중한 것이 아니라 소설가가 자전적 이야기를 글감으로 삼듯, 그의 역사서는 '자전적 역사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저자의 사진(184쪽)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역사를 관통하는 과정 속에서 직접 경험했던 감상과 느낌을 스스럼없이 덧붙이면서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엄밀성 또한 놓치지 않으니 말이다. 이이화 선생은 앞의 추천사에서 "이승만,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의 역대 독재정권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도 감성으로 접근치 않고 객관적 공정성을 살리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하여 저자는 위리 정치사가 이렇게 추잡하고 막가면서 엮어졌다는 자학사관에 빠지지 않고, 우리 사회가 일정하게 발전해왔다는 긍정사관에 충실하였다"고 말했다.

이러한 지적 토대와 확신이 어디서 생기는지 궁금했는데, 그의 열정적인 사회 활동이 바로 그 열쇠가 아닌가 한다. 그는 역사교육연대 상임대표이고 한중일 공동역사교과서 제작작업에 한국 대표로 활약했다. 한창 '새역모'의 '역사교과서 문제'가 시끌시끌할 때였다. 뿐만 아니라 '제주 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며 잊혀진 '제주 4ㆍ3'의 현대사적 의미를 고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 보리출판사에서 출간된 <동백꽃 지다>에서 그는  '제주 4ㆍ3항쟁의 역사적 의미'라는 논문을 통해 이 문제의 역사적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했다.

<대한민국 선거이야기>라는 책을 통해 저자는 한국의 선거에 대해 일반인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결코 상식이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반대로 선거는 한국 사회를 바꿔놓는 데 대단히 역동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증명했다. 한국현대사에 몹시도 취약하다고 느끼는 사람이나 현대사가 더럽고 치사해서 보기도 싫다는 사람이라면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와 이 책 <대한민국 선거이야기>를 권한다. 

 

김대중의 머리, 김영삼의 뚝심, 조봉암의 가슴이라면..
 

장 자크 루소는 선거제도의 모순에 실망했던지 선거를 가리켜 "4년이나 5년에 한번씩 투표할 때만 주인과 자유인이 되고 선거만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가는 제도"라고 폄하했을 정도다. 한국의 오늘날도 사정은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어떻게 선거가 역사를 그것도 건강한 방향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일까?

선거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를 대표하는 표현 수단이며, 구성원들의 모든 심리가 고루 반영된 '권력 나누기 게임'이라 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정치사에서는 구성원들의 욕구가 골고루 반영되지 못했다. 이승만 12년, 박정희 18년, 신군부 약 10년 도합 약 40년의 시간 동안 권력을 좀처럼 놓지 않으려는 세력들의 전횡에 시달려온 민심은 지역이기주의와 경제지상주의까지 보태져 정치문화다운 모습을 좀처럼 보여주지 못했다. 서중석 선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말하는 근거는 유권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독재자들의 전횡을 40년으로 단축시켰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마치 선발투수가 6이닝을 3실점으로 막아낸 것처럼, 실점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퀄러티 스타트'를 한 것과 같다. 집권에 대한 욕망이 있다면 유권자들은 견제심리가 있고, 반대 세력들 역시 절박한 심리가 있다. 이들의 심리와 각 시대가 놓인 상황이나 조건이 '틈'을 만들어내는데, 그 틈 속에서 역설적이기도 하고 매우 희망적이기도 한 '역사적 사건'들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971년도 국회의원 선거에서 혼쭐이 나는데, 온갖 회유와 책략에도 불구하고 민심은 변화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전체 의석 204석 중 공화당(박정희)은 113석, 신민당은 89석으로 개헌 저지선을 20석이나 상회했어요. 이제는 쿠데타 빼놓고 다른 방법으로는 장기집권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어요. 신민당은 임시국회도 단독으로 소집할 수 있게 됐스니다. 장관을 출석시켜 따질 수도 있게 됐어요. 역사상 최초의 균형국회가 탄생한 겁니다."(166~167쪽)

 
이런 변수 외에도 역사과정 속에서 중요한 변수는 역시 '인물'이다. 인물이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민심을 대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평가하는 역사적인 정치인을 세 명만 거론하면 조봉암, 김대중, 김영삼을 들 수 있다. 조봉암은 이승만의 집권 야욕과 자유당의 횡보에 맞서 민의에 충실한 정치인이었다. 제헌국회에서 초대 농림부장관을 맡아 토지개혁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이승만의 극단적 반공정책에 정면으로 맞서 대항할 만큼 배포가 대단한 인물이었다. 대선 과정을 통해서 국민보도연맹원 집단할살 같은 당시의 금기어를 건드리기도 하고, 이승만의 북진통일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평화통일을 주창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선거 국면이라는 공간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위협을 느낀 이승만은 '진보당 사건'을 조작해 간첩 혐의로 조봉암을 사형시켜 버리고 만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들의 정치적 전성기는 바로 '40대 기수론'을 들고 일어섰을 때의 시절이 아닐까 한다. 각각 박정희와 전두환 신군부의 서릿발에 맞서 선거판을 흔들고 대중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들이 활약했던 당시에는 유권자들이 투표할 맛이 났을 것 같다. 그들이 지나간 이후로 그만큼 뚜렷한 색채와 의기를 가진 정치인들이 등장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정치판의 흥행을 떨어뜨린 주요인이 되었다. 

 
<대한민국 선거이야기>는 현대사와 겹치는 부분이 많지만 하나의 독자적인 분야로 구분해도 좋을 만큼 특징이 있다. 저자는 단지 선거의 결과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선거의 당사자들이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또는 집권야욕을 깨뜨리기 위해 땀흘리고 뛰었던 열정적인 흔적들을 살펴보라고 강조한다. 역사와 마찬가지로 정치사 역시 부침이 있고 때로는 도도하고 때로는 격정적인 흐름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기도 하는 만큼 정치에 대한 무조건적인 불신은 '정치적 자해'에 다름 아니다. 어차피 죽을 때까지 정치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 흐름 속에서 시대적 요구를 포착하고 실책을 빨리 찾아내 대처하는 것이 관건이다. 정치는 승부이기 때문에 후보든 유권자든 경쟁력이 없으면 패배할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선거의 진정한 주인공인 유권자에 대한 이야기보다 정치세력에 대한 이야기에 편중돼 있다는 점이다. 하다 못해 투표율 비교 등을 통해 명백한 당대의 민심을 확인시켜 주었으면 좋을 텐데, 민심에 관한 기록은 추상적이기 그지 없다. 이 책의 소비자들은 대체로 선거에 입후보하기보다는 선거판을 관조하고 선택을 하는 유권자이기 때문에 유권자로서 영감을 얻을 수 있도록 배려가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책을 붙잡고 하루만에 다 읽었는데,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단지 선거의 역사인데도 이렇게 흥미진진할 수 있을까?'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b 2008-04-10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메일링리스트에 실려왔더군요. 여전히 다작하십니다. ㅎㅎ 축하드려요~

승주나무 2008-04-10 17:10   좋아요 0 | URL
ㅎㅎ 그 기질이 어디 가나요^^

Jade 2008-04-14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승주님,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이예요 ㅎㅎ 축하!

승주나무 2008-04-14 12:24   좋아요 0 | URL
ㅋㅋㅋ
감사합니다.
이 글 하나로 완전 신세 폈네요^^ 고맙고맙~

넷게릴라 2008-04-15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텍스트만큼 뛰어난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정말 성의있게 읽으신 흔적이 가득합니다.

승주나무 2008-04-15 15:19   좋아요 0 | URL
넷게릴라 님~! 정말 과찬이십니다.
성의있게 쓰려고 노력은 했는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노아 2008-04-15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주의 마이 리뷰군요! 축하해요. 인터뷰 하기 전에 힘을 실어주는 것 같아요^^

승주나무 2008-04-15 15:1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서중석 선생이 선뜻 허락을 해주셔서 정말 기뻤습니다. 나중에 정리해서 올릴게요~~

순오기 2008-04-16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운 이름이라 얼른 읽어봤어요. 리뷰당선 축하하고요, 리뷰를 통해 무딘 머리를 깨우치니 감사합니다!

승주나무 2008-04-16 11:38   좋아요 0 | URL
반가운 이름이라 말해주시니 정말 기쁘네요^^ 감사합니다.
저도 리뷰를 쓰면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파란흙 2008-04-17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처럼 흥미진진했단 말이지요? 축하드립니다. 요즘 연이어~^^

승주나무 2008-04-18 00:12   좋아요 0 | URL
흥미진진하다 뿐입니까?
'흥미진진'하니까 생각나네요. 누가 津 자를 잘못 읽어서 '흥미율율'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한동안 유행이 되더라구요~
흥미율율합니다. 더욱 흥미율율한 인터뷰를 해서 올려드릴게요 ^^
 
입시 공화국의 종말 - 인재와 시험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대한민국이 산다
김덕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교육부의 유아기적 사고방식

 

대한민국에서 '교육'은 항상 '문제'라는 단어의 수식을 받는다. 교육은 항상 문제이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화법으로 문제를 지적했고, 그만큼 많은 해법이 쏟아졌다. 해법이라는 것은 문제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고 할 때 제시가 가능하다. 문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것은 죄다 '헛발질'일 뿐이다. 문제를 모를 때는 차라리 방치하는 게 낫다. 헛발질을 자꾸 하다 보면 실타래가 자꾸 엉켜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이 바로 무수히 엉킨 실타래와 같다. 최근 이 실타래에 한 줄이 더 엉키는 일이 발생했는데, 교육부가 천명한 이른바  ‘기초학력 미달 제로플랜’이다. 교육부는 진단평가를 정례화하고 뒤처지는 학생과 학교를 지원해 지역·학교·학생별 학력차를 줄이겠다고 했는데, 올해 10월 초6·중3·고1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를, 초등 3학년을 대상으로 국가수준 기초학력 진단평가를 실시한다. 매년 3월에는 초4~중3학년을 대상으로 교과학습 진단평가가 시행되니 초6·중3학년은 1년에 두 번 시험을 치르는 꼴이 된다. 교육부의 관점에서 보면 '학력'은 '성적'과 동의어다. 일제고사를 실시해서 성적이 처지는 녀석들이나 그런 학교는 '학교 끝나고 남으라'는 식인데, 이보다는 대한민국의 모든 학교를 한줄로 세워서 관리하기 편하게 만들려는 속셈이 아닌지 의심이 된다.

대개 어떤 문제에 직면한 사람들은 두 가지 경우로 반응한다. '문제'를 중시하는 경우와 '해법'을 중시하는 경우이다. '해법'을 중시하는 경우는 한 가지 문제만을 연상하는 1:1관계가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한 가지 문제에 대해서만 해법을 제시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초중고등학교의 객관식 풀이 능력을 잘 모르니까 이번 기회에 통제하기 쉽게 1등부터 100등까지 '해쳐모여'를 시키려는 교육부의 처사가 그것이다. 반면 '문제'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의 다발'이라는 것을 안다. 때문에 이들은 교육부의 '기초학력 미달 제로플랜'과 '일제고사'는 오히려 정부보다 보습학원이 절실히 원했던 자료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즉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이다. <입시공화국의 종말>(인물과사상사)의 저자인 김덕영 씨는 객관식을 유아기 시절에 뗐어야 할 사고방식이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유아가 먹어도 되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배우듯이, 정답과 오답이라는 흑백논리를 강요해 사고를 단순화시킨다는 것이다. (272쪽) 나이가 들면 서서히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면서 주관적인 세계관을 정립하는 단계, 즉 성숙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교육부 역시 유아기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력'이라는 것은 단지 '객관식'을 틀렸다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 테니 말이다.

 

 

'다른 눈으로(with other eye's)' 바라본다는 것

 

교육부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에서 교육문제와 관계 있는 사람들 역시 '해법'과 '문제'라는 두 가지 특징을 보인다. 정치인이나 정부는 당연히 '해법'을 제시하고 있지만, 교육 전문가나 학자들은 '문제'적 관점에서 교육을 바라본다.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교육 관련 서적들은 <대한민국에 교육은 없다>(철수와영희, 2008.3월)와 <서울대학교 학생선발 지침>(포럼, 2008.2월), 그리고 <입시공화국의 종말>(인물과사상사, 2007.6월)이다. 제목이 말해주듯이 이 책들은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이들의 관점으로 보면 아직은 대한민국에서 '교육 해법'은 너무나 먼 이야기인 듯하다.

<입시공화국의 종말>은 '다른 눈으로(with other eye's)' 교육의 문제점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 차별성이 있다. <순이삼촌>의 작가 현기영 씨는 어느 해인가 4ㆍ3 강연에서 "제주도 안에서는 제주를 쓸 수 없다. 그래서 도망쳤다"고 말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나는 그것이 '다른 눈으로(with other eye's)'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눈으로(with other eye's)'란 독일의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cal anthropology)과 사회학의 대가인 헬무트 플레스너가 사용한 개념이라고 하는데, 그는 바로 '다른 눈으로(with other eye's)' 독일을 보니까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것이 잘 보인다고 말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단지 밖에 가 있다고 해서 '다른 눈(other eye)'이 생기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치열하게 성찰하고 지치도록 고민하고 발만 동동 구르다가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끝내 '끊어진 고리'를 찾았을 때 쓰는 말로 해석된다. 단지 밖에서 배운 것에 불과하다면 미국의 경제학(주로 한물 간 시카고 학파)을 배우고 와서 신자유주의 이론만 앵무새처럼 읊어대는 수많은 학자들의 눈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실제로 저자약력을 살펴보면 김덕영은 독일에서 사회학·철학·역사·과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공부하였는데 독일의 학풍과 교육 시스템에 큰 충격을 받은 듯하다.

 

"독일의 위대한 학자들의 저서를 원서로 읽으며 자신만만했던 김덕영은 그러나 입학하는 순간부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에서 공부했던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저자약력)

 

본문에서는 독일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일화가 소개되는데, 단지 세 줄에 지나지 않는 칸트의 사상에 대해서 한 학기 동안 리포트를 준비해서 교수와 직접 토론을 하라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독일은 담당 교수가 학생과 과제를 가지고 직접 토론을 하며 면밀히 검토한 끝에 세심히 코멘트를 달아주고 원고를 돌려주는 방식이다) 글쓴이에게 잊지 못할 가르침이 되었던 담당교수의 코멘트 전문을 싣는다.

 

"칸트 윤리학의 기본적인 의도와 논리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난 후에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면 된다. 대학의 기초적인 지적 훈련 과정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221쪽)

 

이런 이유로 독일의 대학에서는 학문의 엄밀성과 명증성을 유지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대학의 모습은 부끄럽기 그지없다. 교수는 공천장을 받아들고 끝내 강의를 제끼고 말았으며, 대학생들은 시시콜콜한 연예담을 예사로 늘어놓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칸트며 플라톤, 게오르그 짐멜을 거론하던 고등학생의 기억은 온데간데 없다.

역시 한 걸음 물러서서 보면 더욱 명쾌하게 보이나 보다. 서문부터 던지는 질문이 거침없다. "한국이 세계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높은 교육열 때문이라고 하는 주장을 십분 받아들인다면, 한국의 교육은 앞으로도 경제성장과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왜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사라진 마을은 출산율 저하로 또는 이농으로 걱정하면서, 아이들의 웃음이 사라진 놀이터는 걱정하지 않는가?", "왜 한국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당연시하는 대학의 서열화를 외국인들은, 그것도 이른바 선진국의 국민들이 모르고 있을까?" 서두에서 던진 질문들은 본문에서 세세히 다뤄진다. 그러나 이 질문들이 귀결되는 지점은 한 가지이다. 바로 '인간 존중 교육'이다.

 

'인간 존중 교육'을 위하여

 

글쓴이가 '인간 존중 교육'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교육의 밑바탕을 이루어야 하며, 서로 부딪힐 때는 당연히 인간 존중을 교육의 위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은 책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인간 존중 교육'이라는 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교육은 '반 인간 교육이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글쓴이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축구 선진국에선 정장기에 있는 유소년 선수들의 경우 훈련 시간이 많아야 하루 2~3시간인데 반해, 한국에선-2002년 일산백병원이 축구 선수 13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최대 7시간, 평균 4.57시간이나 된다. 한국의 축구는 한마디로 성적 지상주의를 추구하는 학원 축구인 셈이다."
(동아일보 2004.6.15일자 "'축구 꿈나무'의 눈물", 34쪽에서 재인용)

 

어디 학원축구뿐이랴. 개성적이며 아름다운 몸을 가꾸는 복장은 청소년들의 성장하는 정신과 함께 몸의 논리를 구현할진대 군대나 감옥, 수도원, 공장에서나 어울릴 법한 '유니폼'은 다름아닌 감시의 의미일 뿐이다. (30쪽) 지난 2002년에 "나도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다"며 자살한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은 "어른인 아빠는 (이틀 동안) 20시간 일하고 28시간 쉬는데, 어린이인 나는 27시간 30분 공부하고 20시간 30분을 쉰다. 왜 어른보다 어린이가 자유 시간이 적은지 이해할 수 없다."며 절규했다. 학원은 학생의 일상생활을 실질적으로 통제하는데 기숙학원이나 자물쇠반에서 이루어지는 행태들은 산업혁명 당시 중노동을 견디다 버려지는 유럽의 애띤 소년 노동자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만약 교육의 현장에서 '인간의 얼굴'이 조금씩 회복된다면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즉 한국 사회는 이제 '국가(사회)의 개인들'에서 '개인들의 국가(사회)'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십분 발휘할 수 있을 때 사회적 역량이 생기는 것이지, 지금처럼 한줄로 늘어놓고 훈시를 하듯 일방적으로 정책을 주입시키는 것은 '글로벌한 자살한위'나 다름없다.

 

대체로 신선한 관점이며 타당한 주장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다른 눈으로(with other eye's)' 바라본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현지의 입장'에 대해서 너무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로스쿨의 전면적인 지방대 배분이라든가 논술시험을 담당교사가 출제하는 방법, 객관식의 폐지, 모든 시험을 토론과 논술로 치르자는 결론적 주장은 장기적 과제는 될 수 있지만, 당장 밟을 수 있는 땅은 아니다. 예컨대 담당교사의 시험 출제라든지 모든 시험을 토론이나 논술로 출제하자는 주장은 출제 이전에 담당교사의 역량이나 교사 교육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대목에서 학자와 정치인의 커다란 차이를 발견하게 되는데, 나는 무척이나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이 지점에서부터 끊어진 고리는 분명히 적임자가 생겨날 것이라고 믿는다. 당연히 정치인은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백꽃 지다 - 강요배가 그린 제주 4.3
강요배 지음, 김종민 증언 정리 / 보리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죽은 어미 위에서 젖 빨던 그 아이 잊을 수 없어"
[서평] 강요배가 그린 제주 4·3 <동백꽃 지다>




<제주4.3 60주년을 기념해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가 보리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당사자 34명의 증언을 제주 4.3 전문가 김종민 씨가 정리해서 그림과 함께 생생하게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200-2"의 역사적인 의미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열렸다. 이때 총 의석수는 200석이었으나 2표의 무효로 인해 제헌의회는 198명의 국회의원으로 출범했다. 이 "-2"라는 숫자는 현대사에서 그리 조명을 받지 못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대한민국 정체성에 상처가 된다는 점이었고,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정치인생의 오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 당시에는 이 두 가지가 사실상 동의어였다. 이승만은 현대사에서 '굴종'이라는 선례를 남기며 권력을 누렸다. 자주독립을 위해 가산과 전 인생을 반납한 독립운동가와 그 자제들, 일제에 협조하여 가산을 지키고 권세를 누렸던 친일파와 그 자제들의 운명은 이승만이 미 군정에 굴종하며 친일 세력을 대거 재임용함에 따라 갈리고 말았다. 이와 같이 현대사는 '굴종'이라는 유혹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재벌의 편법, 탈법이 일반화되고 정치인과 공직자의 일상적인 부패상은 이 '굴종의 현대사'를 더욱 빛내고 있는 셈이다.

제주 북제주 갑ㆍ을 2개 선거구의 무효는 이러한 '굴종'에 이의를 단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었다.(이듬해 5월 10일 이 두 개의 상처(?)는 신속하게 다른 '굴종'들로 채워졌다) 이 "-2"라는 역사적 메시지를 던진 죄로 당시 제주 인구 30만 명의 1/10인 약 3만명이 죽었다. (제주 4ㆍ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2003년 통과)) 선거철마다 주요 정당이 제주에서 경선을 시작하는 것은 비단 제주가 국토 하단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선거의 향배를 예측하는 캐스팅보드 역할을 오랫동안 자처한 제주의 민심은 그 기원이 대단히 오래 되었다. 예컨대 17대 대통령선거 당시 이명박 후보와 정동영 후보의 전국 투표율은 48.7% 대 26.1%였다. 이 차이는 22.6%로 두 후보 사이에 한 명의 유력한 대선 후보가 들어갈 틈이 있을 정도였다. 제주의 투표율은 어땠을까? 이명박 후보 38.3% 대 정동영 후보 32.4%로 불과 6% 미만의 차이였다. 그나마 정치색이 덜하다는 서울도 53.1% 대 24.4%로 더블스코어 이상의 결과가 나왔던 때다. 제주도의 이 묘한 정치적 균형감각은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제주 4.3을 말해주는 '세 가지 마음'

 

제주 4.3을 감성적으로 표현한다면, 이를 관통하는 세 개의 마음이 존재한다. 첫째, 5·10 남한 단독선거가 제주도의 거부로 절름발이가 되자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몹시 격분한 것으로 전해진다. 1949년 1월 12일 열린 국무회의 의결사항은 '제주도 특별소탕경찰대 1,000명 파견에 관한 건'이었는데, 이 문건에서 대통령의 유시 내용은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拔根塞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였다. 그보다 한달 전인 1948년 12월에 서북청년단 총회에 직접 참석해 연설을 하고 서북청년단원들을 제주도로 파견하였고, 그 단원들이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볼 때 제주도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감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제주 4.3 전 영역에 걸쳐 가장 처참한 집단 학살과 초토화 작전이 자행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3개월만인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이 대통령령 31호로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한 즈음이다. 제주도에 내려온 서북청년단원이 "이승만 대통령의 허락 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라고 증언하는 바와 같이 제주 4.3의 일차적 책임은 이승만에게 있다.

둘째는 서북청년단의 '증오심'이다. 일명 '서청'으로 불리는 서북청년단은 북한에서의 사회개혁 당시 식민지 시대의 경제적, 정치적 기득권을 상실하여 남하한 세력들이 1946년 11월 30일 서울에서 결성한 극우반공단체였다. 따라서 이들은 공산주의자라고 의심되는자에게는 무조건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자신들의 터전을 없애버린 세력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품은 서청과 남로당의 적극적인 활동지인 제주도의 만남은 처참한 홀로코스트를 낳았다.

셋째는 제주도민의 공분이다. 제주도는 이승만의 반공국시 때문에 피해를 많이 본 지역으로 속하는데, 혹자는 제주 4.3이 '빨갱이들의 선동과 주민들의 동조'로 보고 <4.3특별위원회>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하지만, 본질적인 것은 제주도민이 미군정과 당국의 행태에 공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제주도민의 특이한 이력을 살펴야 한다.  

제주도가 척박하고 고립된 땅이라고해서 그 정신마저도 고립된 것은 아니다. 제주는 예부터 최후의 유배지로 꼽혔는데, 유배 온 양반들은 제주의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전수하는 일을 낙으로 삼았다. 때문에 유난히 제주도에는 유풍과 학식이 생활상에 고루 반영돼 있다. 일례로 국어학자 이기문은 일조각에서 발행한 <속담사전>에서 해방 이후의 중요한 업적으로 <제주도 속담 1,2>(진성기 편저)를 소개하며 사전편찬에 도움받은 바가 적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나 역시 어머니로부터 수십 년 동안 '해태(懈怠)하지 말라'는 훈계를 들었는데, 이는 '해이하거나 태만하지 말라'는 일반에서는 보기 드문 한자어이다.

해방 이후 미군정이 늦게 상륙한 이유도 있지만, 제주도민들은 그야말로 해방감을 가장 깊이 맛본 사람들이었다. 이때 남한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친일파에 대한 청산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고,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치안과 정책을 수행하였다.

제주 4.3의 남상이 될 만한 사건은 1947년 3월 1일 제주 지역 곳곳에서 개벽 이래 최대 인파인 3만명 정도가 참여한 '3.1절 기념 제주도 대회'였다. 3만명이 운집한 것도 대단하지만 주민 6명이 죽고 8명이 크게 다친 '3.1절 발포 사건' 직후 이에 항의해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인 166개 기관ㆍ단체가 파업에 가세한 '민관 총파업'이 제주도민의 인식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현대사가 서중식 교수는 <동백꽃 지다>(보리)의 부록 논문에서 "제주도는 밭이 99%인데다 땅이 척박하여 소출이 적은 관계로 육지에 비해 계급 갈등의 소지가 미약했고 혈연 공동체적 요소와 사회경제적 성격으로 인해 도민들이 쉽게 단결할 수 있는 바탕이 됐다"고 기록했다. 이 책의 자료2 <제주 4.3항쟁 일지>에 의하면 3.1절 발포 사건 이후 단행된 민관 총파업을 두고 경무부(지금의 경찰청) 최경진 차장이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익 색채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는데(161쪽) 이는 단선적인 사고가 아닐 수 없다. 단지 제주인들은 부패하고 굴종스러운 기득권의 부조리한 정책에 이의를 제기할 정도로 의식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이러한 마음들의 충돌은 제주 4.3이라는 필연적인 비극을 만들어낸 동력으로 작용했다.

 




강요배의 그림책 <동백꽃 지다>가 나왔다
 

올해로 제주 4.3 60주년을 맞는다. 그에 걸맞게 다채로운 행사가 제주에서 펼쳐진다. 출판에 업을 두는 사람으로서 나는 강요배 화백의 그림책 <동백꽃 지다>(보리)가 나왔다는 데 대해서 기쁨을 감출 수 없다. 책을 보자마자 밤새 삽화와 증언을 살폈다. 대학시절 익숙하게 보았던 그림들이 한 책으로 묶인 점이 좋고, '제주 4.3전문가 김종민' 씨가 발품을 팔아서 '당사자'들의 증언을 채록했다는 점도 좋다. 이 책은 1998년 학고재에서 낸 <동백꽃 지다>를 다시 낸 것인데, <동백꽃 지다>는 강요백 화백이 1989년부터 3년 동안 '제주 4.3항쟁'을 다룬 그림 50점을 1992년 발표한 전시회의 제목이다.



<머리에 총을 맞고 죽은 어미 위에 엎드려 젖을 빨고 있는 아이가 4.3의 처참함과 제주인의 처절한 생명력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현기영의 자전 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실천문학사)에서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올라가고"라는 말로 제주인의 이 같은 정신을 압축해서 표현했다>


 <난리통에는 어린아이와 부녀자 등 노약자가 최대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먹을 것이 없으니 젖이 빈 것은 당연하다. 빈 젖을 빨지도 못하고 아파하는 아이의 모습과 고개를 숙인 어미의 모습이 처절하게 다가온다>

강요배 화백은 '기행'으로 더 유명한데, 재미있는 예화가 하나 있다. 바람과 풍랑이 잦은 제주도에서도 격렬한 비바람이 휘몰아치던 밤에 강요배는 붓과 캔버스만 들고 열 번도 넘게 바다에 다녀왔다고 한다. 그것은 파도와 비바람의 모습을 화폭에 담기 위해서다. 현재 '민족 미술인 협회' 회장과 '제주 4.3 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소재는 종이, 펜, 먹, 캔버스를 가리지 않았으며 증언의 내용이나 분위기에 따라 다르게 선택했다. 역시 제주 민중의 일상사와 당시의 처지를 당사자들의 관점에서 생생하게 그렸다. 그래서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특히 119쪽의 '젖먹이'와 133쪽의 '빈젖'은 당시의 처참한 일상을 고스란히 설명해 준다. '젖먹이'에 대한 증언은 김석보 씨(조천읍 북촌리)의 1998년 증언에 담겨 있다.

"사람들이 동요해 흩어지기 시작하자, 군인들이 사람들 머리 위로 총을 난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댓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중엔 한 부인도 있었는데, 업혀 있던 아기가 그 죽은 어머니 위에 엎어져 젖을 빨더군요. 그날 그곳에 있었던 북촌리 사람들은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겁니다." (118쪽)
 

제주어에 '속솜하다'는 말이 있다. 이는 '침묵하거나 아주 작게 말하다'는 뜻이다. 나는 제주 4.3이 발발한지 30년, 한 세대 정도 지난 1978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4.3이라는 것을 알고 최초로 어머니에게 물었던 게 스무 살이 되었을 때니까 일이 벌어진 지 50년이 지난 때다. 어른들은 그 당시의 일을 입에 담는 것을 철저히 금기시했고 그것을 내면화했다. 4.3의 기억은 제주 사람들의 일상습관을 바꿔버렸다. 어머니와 이모가 우연히 대화를 하는 것을 들었다. 별로 비밀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속솜하게 말했다. 이 장면이 두고두고 이상했다.

 비단 어머니와 이모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제주 4.3에 속솜했다. 과거사의 진실을 밝히자고 열변을 토했던 참여정부도 역시 제주 4.3의 거대한 뿌리는 만지지 못했다. <나의 서양 미술사 순례>를 써서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가르쳐준 '재일 조선인 2세'이자 도쿄 케이자이 대학교 현대법학부 교수인 서경식 씨는 '추천하는 말'에서 "'4.3'은 알지 못해도 되는 사건이 아니며 알 필요가 없는 사건도 아니다. 4.3은 '알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무섭고 부끄러운 그런 사건인 것인다. 우리들은 자신이 무엇을 알지 못하는가를 알아야만 한다. 평화와 사람다움을 위하여"(9쪽)라고 말했다. 1987년 대한민국에 절차적 민주화, 형식적 민주화가 실현된 것에 머무른 것처럼 제주 4.3 역시 단지 '특별법'이 통과되었을 뿐 그것의 역사적 의미나 이 사건이 주는 메시지를 알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4.3 특별위원회 폐지'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도는 것이다. 단지 제주인만의 문제, 피해의식적인 문제, 감성적인 문제, 빨갱이 문제에만 한정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좀더 성숙한 관심으로 세심하게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환갑이 다 되었으니 '철'이 들 만도 되지 않았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한민국에 교육은 없다 - 왜 교육이 우리를 미치게 하는가?
이득재 지음 / 철수와영희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불편하고 슬프지만 부정할 수 없다

 

이 책을 읽고 저자 ‘이득재’가 누군인지 찾아봤다. 대구 가톨릭대학교 교수이며 문화연대 문화교육센터 공동 소장, 계간지 『문화과확』의 편집위원이다. 책 제목 <대한민국에 교육은 없다>와 같이 그의 글은 ‘도전적’이다. 이렇게 단언적이고 도전적인 말을 하는 저자라면 분명히 그 맥락과 내력이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미 언론지면을 통해서 ‘이득재 식 논평’들을 만들어오고 있었다. 2005년 계간지 <문화과학> 가을호가 대표적이다. 그는 현재 여론의 삼성비판을 대표하는 ‘삼성공화국’이라는 수사가 오히려 삼성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 어떤 이름이 어울린단 말인가? 그는 삼성‘참주정’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기반으로 하는 공화정과 달리,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자의에 따라 권력이 행사되는 것이 참주정”이다. “그러므로 삼성 공화국을 응당 삼성참주정이라 바꿔 불러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X-파일 사건으로 나라가 발칵 뒤집혔던 시국이었으니 삼성에 대한 국민적 실망감과 격앙된 감정이야 이루 다 말할 수 없겠지만, 3년 가까이가 지난 오늘 ‘대한민국 교육’을 화두로 들고 온 그가 궁금했다. 나는 그의 글을 읽는 것이 몹시도 불편하고 그 안에 그려진 현실이 서글펐지만, 불행히도 이를 부정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의 교육을 없앤 사람은 ‘대한민국 사람들’

선생님, 학부모, 학원(사교육) 관계자, 대학교수, 대학총장, 교육관료, 정치인, 대통령, 기업인…….

이 목록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정답은 ‘학생’이다. 이때의 학생은 ‘미래의 주인’이라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게 쓰인다. 장애인, 노약자, 사회적 소수자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초중고등학생은 그들 나름대로, 대학생은 역시 그들 나름대로 ‘관리자’들이 쳐놓은 그물을 따라 무리지어 가고 있는 곳은 교육이 없는 대한민국이다. 학생들이 비교육적인 시스템에서 점점 오염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저자의 비판을 재구성해 봤다. 

“우선 학생들은 ‘교육’이 아니라 ‘사육’된다.(7쪽) 그들은 어디서든 자신이 상품화되어서 잘 팔려야 한다는 사실을 주입받는다. 마치 한우 1등급처럼 학생들도 1등급에 목매달게 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진다.(44쪽) 그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데도 없다.  학습의 결정권은 학교나 국가 등 상급자들에게 있고, 그들은 선택하는 대신 ‘선발’될 수 있을 뿐이다.(29쪽) 이 모든 질서는 ‘대학입시’에서 나왔다.  대학입시에서 낙오돼 폐기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유일한 이유 때문에 학생들은 공부에 매달린다.(71쪽) 교사들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양성되기 때문에 이러한 일은 항상 반복된다.(77쪽) 학생들은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친구를 사귀는 방법 대신 친구를 짓밟고 누르는 방식을 먼저 익히고 그것을 내면화하게 된다.(94쪽) 대학에 가서도 일한 문제는 달라지지 않는다. 비싼 수업료를 벌기 위해 ‘알바’하는 데 모든 시간을 빼앗겨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다.(126) 결국 돈 많은 1등급 자제들이 의사, 변호사 등 사회의 지도층이 되지만, 이들의 소득세 탈루 비율은 55%나 되며 교수가 된 이들은 제자의 논문과 돈을 삥땅치는 일을 부끄럽지 않게 여기는 사회가 만들어진다.(63쪽)

글쓴이는 “오늘날 많은 학생들이 현재의 학교가 자신에게 내일이 아니라 어제를 준비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토플러의 말을 인용하며 무용지식에 불과한 입시제도를 혁명적으로 폐지해야 하며, 현실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을 축출해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학자들이 학문의 대중화를 위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며, 교사들도 국가를 대신에 학생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주의에 저항하여 학생이 당당한 주체로 살아갈 수 있도록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단지 앵무새처럼 뻔한 정보를 선생님이나 시험지 앞에서 재현하는 정도로 점수를 주는 정보 전달 방식이 아니라 정보를 스스로 가공해 지식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쓴이가 제시하는 ‘수영’의 예가 흥미롭게 와 닿는다. 즉, 헤엄치는 인간의 신체와 물결 사이에는 일치가 아니라 불일치가 존재하는데, 교육은 물결과 자신의 몸을 일치시키거나 기존의 수영 방법을 재현시키려는 몹시도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한 방식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물이라는 대상과 대면하면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지 물결을 해쳐나가는 해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해답은 직접 부딪치면서 본인이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 교사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자신만의 영법을 개발해야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교육은 학생에게 ‘눈 깔아’ 하고 명령하며 학생의 ‘문제제기’를 원천 봉쇄한다. 오직 시험문제를 맞혀야 한다는 생각, 즉 정지된 ‘물결의 모습’이나 전에 누군가 물결을 헤쳐 갔던 방법을 가르치며 이것을 그대로 따라하라고 한다. 학생이 물에 빠지는 것은 자명한 이치 아닌가?

 

댓글(5) 먼댓글(1)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오늘의 개념글 2
    from 일체유심조 2008-03-25 10:51 
    하다 보니 1 회로 끝내서는 안 되겠다는 긴박감이 생겨 이유를 붙여가며 포스팅을 늘리고 있다.'이유를 붙여가며' 하는 일들은 사실 호킨스라면 자신의 은밀한 즐거움을 위하여 하는 짓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는...
 
 
드팀전 2008-03-25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족주의는 야만이다>를 쓴 그 이득재씨 같군요.^^ 가국체제라고 해서 한국의 근대가족주의와 국가주의의 결합방식을 비판했던 걸로 기억납니다.분석의 틀이 들뢰즈의 철학이었는데-너무 대입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말이지요. ..'수영'이야기나 '주름'에 대한 예들도 그런 느낌이 드는군요.
리뷰만으로 보면 그의 분석과 대안은 교육을 바꾸는게 아니라 교육을 구성하는 더 거시적인 체계를 바꾸어야 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듯 합니다.리뷰 잘 봤습니다.

승주나무 2008-03-25 09:42   좋아요 0 | URL
네~ 드팀전 님.. 이득재 씨의 이 책에서 방점은 대안제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곳곳에 대안제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대한민국의 현재 교육을 형성하는 구조의 모습을 낱낱이 까발리고 나서 거기서부터 뭔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읽힙니다. 5월10일 경에 이득재 씨 등을 모시고 간담회를 계획하고 있는데 혹시 관심 있으시면 나중에 댓글 남겨드리죠^^;;

2008-03-26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26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08-10-23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시원에서 중국 동포는 불타죽고, 이건희는 멀쩡하게 풀려나는 걸 보며 자라는 아이들에게, 옳은 교육에 대한 열망을 바라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닐까요? 아이들은 오로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을지 무섭습니다.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 그 많던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지음, 김정화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장면1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한 아프리카 지역의 원주민과 미군이 무더기로 몰살당하는 위기 상황을 맞아 해결책을 고심하던 당국은 바이러스의 치료약을 만들 수 있는 숙주원숭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이용해 생존한 환자들을 구해낼 수 있었다. (영화 <아웃브레이크>의 줄거리)

#장면2

2차 세계대전은 암호와의 전쟁이었다. 일본군의 암호 해독능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고심하던 미군은  절대 깨지지 않는 암호 ‘윈드토커'를 만드는데 성공하고, 이를 수행하기 위한 나바호족 암호병과 그들을 보호할 특수부대원들을 사이판 전투에 투입시켜 작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영화 <윈드토커>의 줄거리)

#장면3
2007년 7월 분당 샘물교회 신도들이 탈레반에 납치되었을 때 아랍 문화를 이해하는 아랍어 전공자를 찾지 못한 당국은 외교협상에 매우 불리한 조건에 처할 수밖에 없었으며 조속한 시기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엄청난 비난에 휩싸였다.


언어는 근육처럼 수축, 팽창하고 못 쓰게 되기도 한다.

한 언어의 어휘는 세상을 이해하고 지역 생태계 내에서 생존하기 위해 한 문화가 이야기하고 분류하는 사물들의 목록이다. (109쪽) 때문에 언어 자체가 아니라 언중(言衆)들의 전체 삶의 모습을 살펴야 하며, 이것이 바로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이제이북)아 바라보는 생태학적 사회관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언어의 소멸현상을 추상화시켜 위기의식을 조장하는 언어학자들의 주장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언어를 써야 한다거나 경제성장을 위해서 경쟁력 있는 언어를 일제히 사용하자는 정치인들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언어는 의미가 아니라 철저히 기능이며 언중은 절대로 추상적이지 않다. 이기적이고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이고 사회적인 존재가 언중이다. 만약 그들에게 당신은 왜 자랑스러운 자신의 언어를 버리느냐고 따져묻는다면 그것은 어처구니 없는 질문이 될 수밖에 없다. 언어를 받아들이는 것은 언중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먼저 언중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마치 생물학 책이나 경제학 책, 환경학 책, 사회학 책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면 옳게 보고 있는 것이다. 언어는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사용하고 전달해줄 수 있는 사회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18쪽) 하지만 일반적인 언어학자들이나 언어 사용자들은 '문법'과 '사전'을 먼저 생각한다. 저자들은 언어에 있는 문법과 사전은 다분히 인위적인 환경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다양한 측면 중 한 부분만 반영할 뿐, 끊임없이 변화하는 언어의 본성을 담아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298쪽) 언어는 일상이기 때문에 마치 근육과 같다. 쓰지 않으면 지방으로 쌓였다가 당뇨병에 걸려서 잘려나가는 것이다. 오늘날 언어의 소멸은 잘려나간 지방덩어리를 떠오르게 한다. 여기서 두 가지 논점이 생긴다. 첫째는 그것이 잘려나가는 것을 막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며, 둘째는 그것이 잘려나가서는 안 된다면 어떻게 하면 이를 막을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언어를 지켜낸다는 것은

#장면1은 신종 바이러스라는 대 재앙이 찾아왔을 때 백신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숙주를 찾아내는 상황이다. 인류의 재앙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상정해야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것을 오늘날의 불치병에 대한 치료약재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 현대 과학문명이 풀지 못한 문제의 해결책이 엉뚱하게도 산간오지에서는 전통적인 처방으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러한 일은 적지 않았다. #장면3으로 옮겨오면 좀더 의미심장해진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일이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은 군대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군대란 단 한번의 전쟁에 소용이 되는 것이니 그만큼 불필요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를 지켜주기 때문에 필요 불가결하다" 이것을 현실에 적용한다면, 이명박 정부는 그 잘난 '영어'만을 몰입할 것이 아니라 '만국어'에 몰입시킬 것을 제안한다. 세계의 모든 언어와 문화에 능숙하다는 것은 엄청난 경쟁력이다. 지구촌은 어떤 나라가 어떤 나라와 엮일지 아무도 모른다. 이에 대한 비용을 들여서 대비를 하는 나라가 결정적인 순간에 이득을 독차지한다. 우리 국민 수십명이 탈레반에 포로로 잡히고 처형까지 될 것을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고 김선일 씨 피살 사건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비를 적절히 했다면 반복적인 피해를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세계를 '스캔'한다. 한국인들이 세계를 바라본 저마다의 '스캔파일'은 일정한 성격을 가진 파일로 압축이 된다. 세계의 곳곳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저마다의 관점으로 세계를 스캔할 것이고 이 파일들을 온전히 모으면 그것은 지구가 지구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보가 온전히 담기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스캔파일들이 자꾸만 삭제된다는 데 있다. 원인 불명의 바이러스가나 심각한 상황이 찾아왔을 때 인류는 스캔파일 더미에서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꼭 필요한 상황에서 그 파일이 소멸되었다면 우리는 그만큼 힘들게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자꾸 파일이 삭제되는가? 아마도 가장 서열이 높은 언어는 잘 보이는 곳에 배치되고 그렇지 않은 언어들은 내팽개쳐지다가 끝내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 언어의 서열은 누가 결정하는가? 당연하지 않은가. 언어를 사용하는 언중들의 정치경제적 힘의 논리에 따라 가치판단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주변적이냐 도회적이냐를 결정짓는 것은 결국 언어 자체가 아니라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경제적, 사회적 차이이다. (219쪽)

역사를 헛된 피로 물들게 한 유럽이나 중국 등 소위 '세계의 중심'이라는 나라들이 타 언어에 대해서 가한 정신분열적 행태를 살펴보았을 때(257쪽), 만약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인간에게 두 개 이상의 언어는 어울리지 않다. 지구상에 남아 있는 수천 개의 언어가 너무 과분하다. 우리는 그것을 관리할 수준이 되는지 냉정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나의 언어는 과거의 시대를 살다 간 사람들의 경험세계라고 했을 때, 그 사람들이 만약 세계의 모든 언어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고 가설을 세워 보자. 그들은 언어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을까?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들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제야 우리 이외의 많은 언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 개별 언어의 운명을 걱정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는지는 회의적이다. 따라서 나의 결론은 '언어의 소멸 방지'로는 절대로 갈 수 없고, 기껏 해야 '그냥 살던 대로 살자' 정도밖에 이야기할 수 없다. 사실 그것만 달성하는 것도 엄청난 변혁이다. 언어 사용자들의 삶의 수준을 보존해주고, 가정과 학교를 통해서 언어가 자라나는 길을 보살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언어정책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인 배려, 환경보호적 관점, 인권과 권리의 보장, 모국어나 공식적 언어로의 격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소생의 기미가 없는 언어들은 포기하더라도, 가능성 있는 언어가 살아왔던 대로 살아가게 해주는 것만 해도 엄청난 비용이 든다. 언어를 존중한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언어생활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말이다. 언어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쓰임'이지 세력이 아니다. 나에게 언어의 사전적, 문법적, 추상적 관점 외에 생물학적, 환경적, 물리적, 사회적 관점들을 환기해준 무척 고마운 책이다.




댓글(1) 먼댓글(1)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누가 말을 짓는가?(말이 사는 힘을 가지려면…!)
    from 깨몽 누리방 2012-02-09 12:07 
    말을 만드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국어학자입니까? 아닙니다! 말을 만드는 이는 바로 그 말을 쓰는 뭇사람들입니다. 물론 그 가운데에 좀 앞선 이들이 길을 잡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도 말글사는 이[언어대중]들과 함께 갈 때 얘기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것이 좋으니 앞으로는 이것을 쓰시오’하듯이 말을 던져놓는 것은 뭇사람들을 깔보는 권위주의입니다. 그런데 국립국어원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저는 결코 국립국어원을 적(敵)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깨몽 2012-02-09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옳은 말씀입니다.
사투리는 우리말 뿌리를 되짚을 수 있는 좋은 유산이라 봅니다.(저는 가끔, '우리말이 보석이라면 사투리는 원석'이라 견주고 있습니다.)
그런 사투리를 엉터리 표준말 뜻매김으로 다 죽여놓았습니다.
제가 보기로는 일제가 우리말을 죽인 것보다 국립국어원이 우리말을 죽인 것이 더 심하지 않나 싶습니다.(물론 거기에 세월 흐름도 한 몫해서...)
특히 입말을 깔보지 않고 그것이 우리말글이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생각입니다.(물론 편하게 쓰다보니 낮잡아 쓰는 말들도 많지만, 그것도 역시 말이 가지는 여러가지 속내 가운데 하나겠지요...)
http://2dreamy.wordpress.com/2011/12/25/우리말을-살리려면-사투리부터-살려야/
http://2dreamy.wordpress.com/2011/12/17/고을말을-깔보고-죽이는-표준말-잣대-어느-우스개/
http://2dreamy.wordpress.com/2012/01/21/5월을-사투리-살려-쓰는-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