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갈 때 꼭꼭 약속해 - 교통안전과 학교생활 안전 어린이안전 365 2
박은경 글, 김남균 그림, 한국생활안전연합 감수 / 책읽는곰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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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가위에 손 잘릴 뻔했던 이야기

 
7월말에 출산을 앞두고 있는 예비아빠다. 아이에 관한 책들을 많이는 보지 못하지만 줏어듣는 게 많아진다.
특히 우려되는 게 아이들의 안전사고다. 아이 때는 멋모르고 놀았지만 지금 생각하니 집이나 학교는 흉기덩어리 같다.
책상 모서리나 문지방, 책이나 숟가락 하나같이 흉기가 아닌 것이 없다.

사내아이라서 그런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때 끔찍한 사건사고가 많았다.
아직도 그 감각이 생생히 살아있는 유치원 때 사건인데, 2단짜리 여닫이문에 손을 집어넣었는데 친구가 문을 확 닫는 바람에 손이 크게 다친 적이 있다. 어린 마음에 손에서 팔까지 피가 낭자했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아직도 문득문득 생각난다.
초등학교 때도 이에 못지 않은 사건들이 많았다. 

 
▲ 날카로운 도구를 가지고 배우는 과목 때 유독 사고가 많이 난다. 가위나 펜은 특히 위험한 도구다. 

그 중 가장 큰 피해(?)를 입힌 것은 가위에 손이 잘릴 뻔한 사건이다. 친구가 내 가위를 가지고 엿장수 놀이를 했는데, 가위가 필요한 나는 친구에게 가위를 달라고 손을 건넸다. 엿장수처럼 두 손으로 가위질을 싹둑싹둑하던 친구는 내 손을 보지 못하고 손에다 가위질을 해버렸다. 손이 2cm쯤 잘렸고 피가 흥건했다. 어린이라 악력이 세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지만 손이 잘린 것 같은 공포심에 질렸던 하루였다. 
 

▲ 남자아이들은 돌멩이로 곧잘 장난을 친다. 돌멩이싸움을 하기도 하는데, 그러다가 머리나 어깨 등에 맞으면 큰 사고로 이어진다.


방과후에 친구들과 돌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내 친구가 무심코 던진 돌이 눈 바로 아래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때리는 바람에 피가 났던 적이 있다.
어른들이 했다면 하나같이 범죄에 가깝겠지만 아이들은 무심코 이런 일들을 저지른다. 나쁜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는 행동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아이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의 손길


어린이 안전을 위한 공익그림책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누구나 할 것이다. 책은 그림도 별로 없고 딱딱하기 때문에 재미있게 아이들과 놀 수 있는 안전 가이드북 같은 게 있다면 엄마들이 가장 큰 위안을 받을 것이다.
<책읽는곰> 출판사와 <한국생활안전연합>이 공동으로 펴낸 <어린이안전365> 시리즈의 두 번째 권인 <학교에 갈 때 꼭꼭 약속해>(박은경 글, 김남균 그림)은 어린이의 동선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각종 사고사례를 묶어서 예쁜 그림으로 표현한 어린이책이다. 집에서 학교에 가는 길까지의 길목과 학교생활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각종 사건사고가 사소한 실수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골목길에서 운전을 하다가 고양이처럼 아이들이 휙 튀어나와 급브레이크를 밟아야 했던 경험이나, 길을 가다가 멈추면 자신의 움직임에 맞춰서 걸어오던 사람이나 자전거가 방향을 잡지 못해서 사고가 날 수 있다는 내용은 실제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내용이다.
그 외에 횡단보도에서 손을 들고 건넌다든지 차가 멈추는 것을 보면서 길을 건넌다든지, 횡단보도 오른쪽에서 길을 건너면 사고위험이 훨씬 줄어든다는 세부적인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그림은 스케치북에서 갓 그려낸 연필화에 파스텔을 입혀서 친근하다. 컴퓨터그래팩으로 기교를 부리지 않고 쓱싹쓱싹 그린 그림이 아이들에게 접근성을 높여준다.

길 건널 때 조심해라, 친구들이랑 싸우지 마라, 학교에서 장난 심하게 치지 마라 같이 추상적이고 따분한 충고만을 일삼던 부모님들은 이 책을 통해 아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위험에 직면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 아이와 차분하게 학교생활과 일상생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 본다면 안전사고를 훨씬 줄일 수 있을 것이다. 


※ <학교에 갈 때 꼭꼭 약속해>는 그림책 전문 출판사 <책읽는곰>과 <한국생활안전연합>의 합작품이다. 자주 일어나는 어린이 안전사고 중에서 대표적인 사례와 예방법 등을 예쁜 그림으로 사실적으로 그려 부모님들의 걱정을 조금을 덜어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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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신정근 지음 / 사계절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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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10종의 서로 다른 <논어> 책을 보았고 100번 정도 읽었다. 그래도 필요한 구절을 곧잘 꺼내 쓰지는 못한다. 내가 읽는 논어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남회근 선생의 알기 쉬운 논어강의(상,하)>(씨앗을뿌리는사람)과 <주주금석 논어>(현음사)인데, 전자는 논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와 중국 대륙의 역사를 한 노인의 이야기로 녹여내는 맛이 좋았다. 2권의 매우 지나치게 두꺼운 분량이지만(가격도 그에 대비하여 세지만) 내가 들인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았다. 후자는 문장 해석상에서 많이 도움을 얻은 책인데 한문학 교수의 자문을 듣고 구입해 지금까지 읽고 있다.


<논어>를 자꾸 읽게 되는 이유는 읽을수록 맛이 나고 생각해볼 여지가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사귐’도 마찬가지로, 한 번 보면 더 만날 필요도 없는 사람보다는 만날수록 재미있는 사람에게 더 끌리는 법이다.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사계절)은 하이퍼텍스트와 오픈텍스트의 웹2.0 정신을 동양고전에 시도한 재미있는 책이다. 하이퍼텍스트란 구절과 구절이 연결돼 있어서 비교해 볼 수 있다는 뜻이고, 오픈텍스트는 해석의 여지를 애초에 넓게 열어둔다는 뜻이다. 국문, 원문, 음을 병기하고 주요 구절마다 논술제시문과 논제를 도입한 다용도의 구성방식과 유가, 도가 등을 섭렵한 작가의 성실함은 어떤 독자든 이 책 한 권으로 논어에 다가감에 무리가 없도록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이 책에 매력을 느낀 이유는 전통적 해석 방법에 대한 마르지 않는 비판정신이다.

한문은 '문리'라고 해서 반복적으로 읽고 암송하면서 그 뜻을 통째로 외우게 되고, 그 범례가 '문법'을 앞서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런지 옛 사람들의 번역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병폐가 많았다. 논어의 편명을 앞자리 두 개를 따서 쓰는 부분에 대해서도 대체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한학자 선생님께 들은 바에 의하면 사학(斯學, 유학을 사학이라고 부른다)을 하는 사람들은 선인이나 스승, 선배의 저작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금기하고 있기 때문에 좀처럼 부딪치는 해석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논어책 한 권을 읽으면서 참신한 해석 4~5개 정도 얻으면 만족할 만한 수준이지만,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는 각 장마다 4~5개 정도의 참신한 해석을 만나게 되었다. 그 중에서 내가 10년 넘게 잘못 알고 있던 부분이 깨질 때의 시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즐겁다.

시대마다 고전이 다시 번역되어야 한다는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만, 그 시대의 색채가 오롯이 담긴 번역일 때 이 말은 유효하다. 이런 저에서 우리는 2009년에 어울리는 논어책을 한권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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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9-03-26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번! 그래서 네가 뼈대 있어 보였구나.ㅋ
이런 책은 나도 읽어보고 싶네!

승주나무 2009-03-27 21:53   좋아요 0 | URL
읽을 때마다 달라요.. 함 읽어보시면 꼭 좋을 듯~
쉽게 쓰여져서 잘 맞으실 거에요~

2009-03-27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4-02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바로 보관함에 넣어봅니다.
어서 신선한 해석을 만나고 싶네요 ^^
 
기술과 명예를 가진 자들의 레드 예리코 작전 - 태양의 딸을 찾아서 HGS 비밀결사대 1
조슈아 몰 지음, 강미경 옮김 / 서해문집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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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드 예리코>의 활동 무대. 중국 본토와 남중국해, 영국, 이탈리아 피렌체에 걸쳐 있다.


세계 무대와 2천년을 넘나드는 장대한 스케일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악당들이 노리는 물질인 '태양의 딸'과 그것을 얻기 위한 열쇠인 '자이롤라베'는 기원전 326년 알렉사드로스 대왕의 인도 원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33년 과학자와 탐험가를 주축으로 결성된 폐쇄적인 HGS(명예로운 전문가 동업조합)은 자신들의 기술과 지식으로 세계에 보탬이 되고자 하였지만, 3개의 분파로 갈라지고 분파들이 악당들과 몸을 섞으면서 오히려 더욱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제 '태양의 딸'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자들과, 그 음모를 막으려는 자들로 나눠지고 이 작전에 긴밀하게 간여한 더그와 레베카의 부모님과 삼촌은 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물론 이러한 구성은 작가에 의해서 나온 것이지만 세세한 정보들은 분명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연구에 의해서 나왔다는 사실을 몇 페이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전혀 새로운 형식의 소설을 접하며 들뜬 마음으로 책장을 건너며 중간중간에 밀봉된 '기밀사항'을 긴장된 마음으로 뜯어보았다. 그리고 전투함의 구조라든지 기구의 사용법을 익히며 마치 내가 그 모험에 동참한 듯한 착각을 느꼈다.

고집스럽고 호불호가 분명하지만 쾌활하고 모험을 즐기는 두 남매 더그와 레베카는 실종된 부모님을 찾기 위해 삼촌을 찾아가는데 부모님의 실종에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뒤늦게 사실을 알아채게 되고, 자신들이 그 비밀의 한가운데로 가고 있다는 사실 역시 뒤늦게 알게 된다. 하지만 HGS 출신의 부모님들의 피를 물려받은 남매 답게 모헙을 피하지 않으며 스스로 해결방법을 찾아 예기치 못한 순간들과 적들을 물리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엉뚱한 꼬마과학자 더그가 발휘하는 기지는 번번이 나를 놀라게 만든다. 



<레드 예리코>의 3대 미덕

나는 다빈치 코드를 읽지 않았다. 해리 포터 시리즈, 다빈치 코드 등 영국적 상상력과 위트가 풍부한 소설들을 읽기에는 나의 독서 목록표가 너무 완고해서 그런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우연히 <레드 예리코 작전>이라는 책을 만났다. 이 책을 읽고 내가 영국 소설들을 너무 만만하게 보지 않았나 하는 죄책감까지 들었다. 영국인들의 상상력에 경의를 표한다.

<레드 예리코>는 우선 성실하다. 어떻게 구상하고 어떻게 디자인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텍스트의 흐름에 맞게 신문기사와 방의 구조도, 장치의 사용방법 등을 면밀히 기록해 놓았다. 특히 선박에 대한 정보 등 전문적인 분야에서 공부를 많이 한 듯하다.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데뷔작으로 영국의 권위 있는 <부커상>을 수상하면서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된 아룬다티 로이는 그 후로 단 한권의 소설도 발표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핵실험, 대형댐 건설 프로젝트, 다국적 기업의 행태를 고발하는 정치칼럼을 쓰면서 댐에 관한 기술서, 토목공학에 관한 실무적인 책들을 수없이 공부하며 정치칼럼가로서 다시 한번 태어난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기술이나 물리 등에 대해서 소홀히 생각하거나 가볍게 생각하기 쉬운데, 작가가 그런 지식을 갖고 있고 열정적으로 그런 지식을 흡수한다는 것은 분명 뛰어난 자질임이 분명하다. 나는 이렇게 많은 참고문헌이 소용된 소설책은 처음 본다. (책의 말미에 보면 이 책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참고문헌의 목록이 가득 채워져 있다)

레드 예리코의 구성은 더그와 레베카라는 똑똑하고 까칠하며 고집스러운 남매가 실종된 부모님을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예기치 못한 모험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전개가 급격하기 때문에 긴장감을 늦출 수 없지만, 두 아이의 일기장과 스케치를 통해서 장면들을 환기해 준다. 소설의 내래이션인 셈이다. 소설이 흘러가면서 캐릭터들은 성장을 거듭한다. 성장을 거듭할수록 적들도 더 강해진다. 전형적인 게임의 원리이지만, 생각하는 캐릭터라는 점에서 생동감 있다. 레베카의 캐릭터는 더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지만 이 책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캐릭터 부분도 흥미를 줄 것이다.

캐릭터들의 생생한 대화와 행동은 이 작품의 맛을 더해준다. 특히 악당에 대한 묘사에서 작가는 경지에 이룬 것 같다. 그 중에서 악당 성팟에 대한 묘사는 얼굴을 찡그릴 정도로 '못됐다'. 성팟은 자신의 요새 주위를 호위하는 무장 경비병을 300명 거느리고 있는데, 그들의 얼굴에 직접 V자 표시를 새겨 넣었다. 그 표시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 같은 것인데 이 표시를 한 이유는 누군가 부하들을 자청하며 요새로 숨어드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다. 만약 성팟의 부하로 변신해 침입하고자 한다면 우선 V자 표시를 해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성팟이 직접 한 것이기 때문에 부하를 가장하는 것이란 불가능하다. 이처럼 <레드 예리코>에 묘사된 악당은 용의주도하면서도 끔찍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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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위버 - 소설로 읽는 유쾌한 철학 오디세이
잭 보웬 지음, 박이문.하정임 옮김 / 다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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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철학책을 읽게 되는 계절

대학 입학 때부터 철학책을 즐겨 읽었는데, 지난 십여 년의 구비구비마다 철학책을 읽게 되는 계절이 있다.
국문학과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여의치 않아 공대에 들어갔지만 문학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문학의 자양분을 얻었다. 문학에는 글을 읽는 행위와 이야기로 나누는 행위, 그리고 직접 글을 쓰는 행위가 있는데 글을 쓰고 싶었던 나는 내 글을 쓰기에 철학이 너무 빈곤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철학의 긴 여정이 그 때부터 시작된다. 윌 듀런트의 <철학이야기>와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철학의 초심자에게 좋은 도우미가 돼 주었다. 러셀이나 코플스톤 같은 철학사를 여행하면서 서양철학(근대철학까지)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는데, 서양철학을 보면서 허무함이 몰려왔다. 나는 동양사람인데 서양철학으로서 대부분의 자양분을 얻어야 한다면 올바른 철학여정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미처 공맹과 노장, 그리고 한비자나 '자' 자 들어가는 동양철학으로 물흐르듯 넘어갔다.
기형도나 안도현 시인 등과 결별한 시점도 이 즈음일 것이다.
군 생활 동안 공백이 생겼다. 하지만 나는 조그마한 불법을 저지름으로써 철학과의 관계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모두 잠든 심야에 근무가 없는 날에는 화장실 불빛 밑에서 <에티카>를 다시 읽고 플라톤을 읽었다. 운 좋게 행정병으로 선발된 것도 있지만 부대 분위기가 독서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어느 정도 '짬밥'이 찼을 때는 주말마다 사무실로 가서 하루 종일 독서에 빠져들곤 했다. <소피의 세계>를 만난 것도 그 즈음이다.
그러다가 전역 후에 철학을 꽤 오래 잊고 지냈던 것 같다. 사회 현안에 깊이 천착하고 싶어서 대중 교양서를 많이 읽었다. 우석훈이나 장하준, 박노자 같은 사람을 통해서 내가 연결돼 있는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서 읽어낼 감수성을 익혔다.

하지만 지금은 이 책들을 뒤로 하고 다시 철학책을 읽고 있다. 아무래도 변덕이 있는 것도 이유겠지만 십여 년간 독서의 방향타를 다듬어 왔고, 사회와 함께 책을 읽는 훈련을 해오면서 내가 어떤 책을 읽고 행동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지금 필요한 책은 철학책과 고전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회문제를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살펴본 바로는 수십 년 동안 엉켜 있는 모순의 실타래가 있다. 그것은 당대의 지성만으로는 도저히 풀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마을의 큰 선비는 다른 마을의 큰 선비와 벗하고, 한 나라의 큰 선비는 다른 나라의 큰 선비와 벗하며, 천하의 큰 선비는 역시 천하의 큰 선비와 벗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옛 현인들을 논하고, 그의 시를 음미하며, 그가 쓴 책들을 낱낱이 살펴본다면 그를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으랴. 때문에 그의 시대를 논하고 먼 옛 현인까지도 벗삼는 것이리라.
"一鄕之善士斯友一鄕之善士, 一國之善士斯友一國之善士, 天下之善士斯友天下之善士.
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 頌其詩, 讀其書, 不知其人, 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 萬章章句 下-8


맹자의 위 구절을 요즘 자주 들여다 본다. 마치 <드래곤볼>의 손오공이 원기옥을 모으며 세상의 모든 생물들에게 힘을 조금씩 모으듯 우리가 쌓아온 지혜의 우물에서 자꾸 물을 긷고 싶다.
인류가 정성스럽게 쌓아온 지성의 보고를 최대한 이용해 낡은 시대의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과 새로운 인간형, 새로운 사상이 요구된다는 것을 직관으로 느낀다. 나는 이런 패러다임을 창시할 정도는 아니지만 리더십(ledership)이 아니라 펠로우십(fellowship)으로 새로운 패러다임 작업에 참여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
박이문 교수는 이 차이가 대표적인 철학사 서술 방식의 차이라고 말한다. 즉 역사 중심적인 철학사와 문제 중심적인 철학사가 분리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익숙하게 읽었던 철학사는 물론 역사 중심적인 철학사다. 철학과에서 교육을 받을 때도 역사 중심적인 철학 교수법을 세례를 받았는데, 그들은 철학자가 제시한 철학을 현재 나의 문제, 나의 시대의 당면문제로 전환해서 재구성하는 것을 나의 책임으로 돌렸던 것 같다. 실제로 나는 당시 내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철학자들의 메시지로 풀려고 노력하였으나 그 작업은 일반 독자가 하기에는 너무나 단단했다. 오랜 세월동안 누적되고 얽힌 당면문제가 철학자의 몇몇 사상으로 단숨에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철학 교육자들의 상상력 부재를 증명하였던 셈이다.

사춘기를 넘어 이만큼 성장한 철학소설 <드림위버>

<드림위버>뿐만 아니라 철학사 전체에서 유의미한 변화가 감지된다. 이것이 비록 철학의 최신 흐름이 아니라 외서가 국내에 소개되는 순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지만, 철학사상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당대, 현실의 문제 나의 주변의 문제로 철학사의 관심사가 전환되는 것은 철학사의 하나의 진전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독일에서 60만부 판매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의 <세계 철학사>는 현재적 가치에 충실하면서, '현재적 물음'이라는 것이 사실은 영원한 질문의 다른 표정이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드림위버>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소피의 세계>는 비유의 힘이 강하다. 이 무기를 통해 기본 명제로 달려갈 수 있지만 그 명제가 나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소피의 세계>의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를 보면, 소피가 철학 선생을 만났을 때나, 힐데와 소피가 만났을 때 느끼는 낯섦은 그것을 뜻하며, 그것을 지켜보는 주위의 반응은 걱정스럽다. 그들의 의식 속에 소피의 고뇌를 해석할 언어가 없기 때문에 '마약'이나 '연애'를 유력한 원인으로 생각한다. <드림위버>는 바로 <소피의 세계>를 비롯한 기존 철학사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기존의 철학사는 보학(譜學), 즉 자신들의 족보를 밝히는 작업에 치중하다 보니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물질화, 비문화화, 비인간화, 소외화에 대해서 별다른 메시지를 던지고 있지 않다. 대중들은 직면한 문제와 철학의 관심사가 멀어지는 순간 철학을 배부른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이에 브릿지 역할을 하는 것이 <드림위버>를 비롯한 새로운 철학, 즉 당면문제 중심의 철학 서술작업이다.
 
이와 관련된 철학 담론 중에서 흥미로운 주제는 바로 '철학사=철학' 담론이다. 철학사가들은 자신들이 하는 작업이 역사가 아니라 '철학' 그 자체라고 주장했다. 새로운 시대의 관점에서 철학사를 살펴보기 때문에 현재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이들이 현재성을 불어넣기 위해 한 작업이라고는 과거의 철학사를 현대어로 번역한 수준에 불과하다. 박이문 교수도 "철학사는 과거 철학자들의 철학적 사유에 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역시 하나의 역사라는 점에서 철학적 지식에 불과하지 그 자체가 곧 철학적 사유는 아니다"고 규정했다.
그 외에도 내가 철학을 보면서 가장 중시하는 '사랑의 방향'을 이야기할 수 있다. 역사적 철학은 자신의 애정을 선대 철학자들에게 쏟는다. 철학자의 중요한 메시지를 전승하기 위해서는 평생을 철학자들에게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당면 문제에 관심을 갖는 철학자들은 당대인에 대한 애정으로 넘친다. 비로소 자신과 같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당대인들의 문제를 공감하며 그것을 철학으로 표현한다. 내가 철학서를 고를 때 이 기준은 무척 중요하다.

이제 <드림위버>의 이야기를 해보자. '이안'이라는 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학자인 학구적인 배경에서 태어난 아이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적 담론에 쉽게 빨려들어갈 수 있다. 이런 캐릭터가 그러하듯이, 그는 늙수그레한 지성을 가지고 당면문제에 대해서 엄밀히 따져보고 가공의 노인과 함께 새로운 문제에 대해서 토론하고, 꿈에서 깨어나면 현실에서는 부모님과 그 문제를 환기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로 만들어내는 방식이 <드림위버> 서술의 큰 틀이다. 철학을 잘 이해하고 잘 이해할 수 있는 '숙련된 조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설정은 차라리 솔직하고 전략적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이 책을 보는 대중들과 어느 정도 거리감을 주기는 하지만 철학적 주제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필요한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세계의 지성은 총 155명인데 단지 철학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리처드 도킨스 같은 과학자(실은 과학철학자)나 헤르만 헤세 같은 문학자, 칼 융 같은 심리학자, 유클리드 같은 수학자가 등장한다. 이것은 철학의 주제가 철학자에서 철학자로 계승된 이전의 방식을 넘어서는 '철학의 다양성'을 확보한 진전으로 볼 수 있다. 하루에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다 보면 오래 전 느끼다 만 '법열'(法悅)이 생기는데 나의 생각이 자라는 느낌은 언제든지 기분이 좋다. 때문에 박이문 선생이 <드림위버>의 추천사에서 밝힌 평가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한다.

철학의 본질이 사유에 있고, 사유의 본질이 어떤 특정한 대답의 발견에 앞서 어떤 문제를 끝없이 추구하는 열린 과정에 있다는 점을 전제할 때, 이 책은 <소피의 세계>보다 성숙하고 철학적 방법이다. - <드림위버> 추천사


※ 리더스가이드라는 사이트에서 현재 <드림위버>에 대한 서평이벤트를 하고 있네요. 묵직해서 가격에 부담을 느끼신다면 신청을 해도 될 듯. 서평을 쓰면 책을 보내주니까요^^

<드림위버> 서평이벤트 바로가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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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9-03-24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철학. 하면 찔림과 그리움이 한번에 밀려옵니다. 철학 소설이나 너무나 궁금하네요

승주나무 2009-03-25 13:44   좋아요 0 | URL
이 철학소설은 거창하게 철학자들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정수만을 이야기에 녹입니다. 철학자들의 이름과 개념은 옆에 붙은 주석을 통해 알 수 있어요. 주석은 귀찮으면 그냥 통과해도 무방합니다.

마늘빵 2009-03-24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이거 읽으셨군요. 저도 지금 읽고 있는 거 덮고나면 읽으려고 대기 중인데.

승주나무 2009-03-25 13:44   좋아요 0 | URL
네.. 아프락사스 님이 떠오르던 책이더라구요~
 
맛살라 인디아 - 현직 외교관의 생생한 인도 보고서
김승호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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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유명한 인물은 마하트마 간디이지만 최근에 '아룬다티 로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
아룬다티 로이는 1997년 첫 소설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작품으로 노벨상과 같은 급이라는 영국의 '부커상'을 수상하며 일약 신데렐라가 된 인물이다.

하지만 그 작품을 끝으로 문학적인 글쓰기와는 결별한다. 이후로 댐 건설에 관한 아주 실무적으로 기술적인 글에 천착하더니 인도 정부를 비판하는 정치 칼럼을 지속적으로 게재하는 공격적인 작업을 한다. 한국에는 《6월이여 오라》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녹색평론사 펴냄)이 일로 아룬다티 로이는 중산층의 총아에서 공적으로 전락하지만 그의 공격적인 글쓰기는 계속되고 있다.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 비크람 세트(Bikram Sett),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i) 등과 같은 영문학 작가들이 영국 최고 문학상인 부커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적으로 그 명성을 인정받고 있다. 
- 맛살라 인디아 91쪽

인도의 외교관으로서 기업들과 자주 대면하는 저자는 으레 겉할기 정보로 가득 찬 안내서의 내용을 탈피하기 위해서 인도에서의 경험을 분석적이고 체계적으로 풀어내면서도 개인적 경험이 녹아들어가게 썼다. 그래서 신뢰가 갔다.

특히 이 책은 인도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들을 조율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알다시피 인도는 신성장 엔진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중국과 같이 양극화의 수렁에 깊게 빠져 있다. 그리고 아직도 카스트 제도가 엄존하는 현실이 있고, 폭탄테러 등 무시무시한 사건들이 자주 일어난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면밀히 관찰하며 '현재진행형'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디라 간디 전 수상은 1984년 소위 ‘푸른별 작전’으로 불리던 시크교 분리주의자들에 대한 강경 진압이 화근이 되어 암살당했다. 어머니인 인디라 간디의 뒤를 이어 국민회의당을 이끌던 라지브 간디 수상에 대한 폭탄 테러는 인도 평화유지군 파견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스리랑크 분리독립주의 무장단체 ‘타밀 타이거’의 소행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도에서 정치,종교,인종적 갈등으로 인해 테러나 암살은 그 뿌리가 깊다. (맛살라 인디아 본문)

인도 정치 상황에 대한 저자의 진단은 담담하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게 읽는 맛을 높여 준다.

그러나 심각한 불협화음을 안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인도의 국정 운영은 실제로는 민주 행정의 기본 틀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연립정부라는 특성을 활용하여 자신의 선거구와 소외된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절충과 타협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가능한 최선의 공통분모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느림과 인내의 미학은 그래서 이전투구의 정치판에서 인도의 토양에 맞는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 최근 미국 CNN은 '인도가 중국을 추월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특집에서 인도의 손을 들어 주었는데, 그 요지는 민주국가로서 견제와 절충이라는 합리적 틀을 갖춘 인도가 장기적으로는 일방적이고 탄력성이 없는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를 추월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물론 미국 저널리즘이 보도하는 내용을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저자가 학자나 문학가가 아니라는 한계도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팩트를 중심으로 하고 오랜 경험과 인도에 대한 남다른 애정에서 오는 연구를 통해 지면을 채우고 있다는 점에서 인도에 대한 개론서로서 부족함이 없다고 할 것이다. 단, 인도를 여행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은 인도 여행서가 따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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