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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다우어 드라이스마 지음, 김승욱 옮김 / 에코리브르 / 2005년 9월
평점 :
삶은 기억의 총합이다. 적어도 마침표 앞에서는 그렇다.
나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나에 대한 기억은 남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지금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기억 안에 온전하게 가둘 수는 없다.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추억들도 사실은 수많은 틈새를 자의적으로 메우고 바랜 지점을 덧칠하여 꺼내 보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 기억은 허술하다. 그리고 방약무인하다. 죽을 때까지 기억하고 싶은 그 사람의 눈매는 흐릿해지고 맨홀에라도 던져 봉인해 버리고 싶은 그때의 수치스러운 장면은 제멋대로 떠올라 밤잠을 설치게 한다. 이 책에 인용되어 있는 체스 노테봄의 "기억은 마음 내키는 곳에 드러눕는 개와 같다"는 표현은 기억에 대한 기가 막힌 형상화다. 우리는 기억을 부릴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삶 전체가 응축되어 기억의 저장고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대면하는 허무함과 당혹감의 핵심일런지도 모른다. 결국 가장 힘이 센 것은 무자비한 시간의 화살촉이 과녁과 어긋난 곳에 꽂히자마자 떨어지는 기억의 부스러기들이고 가장 무력한 것은 그것을 보자마자 생의 뒷덜미를 붙잡히고 마는 우리다.
네덜란드의 심리학자 드라이스마의 이 책은 기억의 오류와 비대칭성, 데자뷰, 죽음을 목전에 두고 목도하게 되는 삶의 파노라마, 삶의 진행에 대한 주관적 속도감 등에 대한 다양한 사례와 학설이 흥미롭게 제시되어 있고 저자가 때때로 조심스럽게 개입하여 그 균형점을 조율하여 주고 있다. 읽는 즐거움과 앎의 즐거움을 함께 가질 수 있다.
갑.자.기. 기억이 되돌아온다.
<내 이름은 김삼순>을 보며 나는 프루스트의 마들렌을 일부러 사서 먹어 보기도 했다. 작은 봉지에서 나온 조가비 모양의 엄지손가락 만한 빵은 기대와는 달리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파티쉐의 환상에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언급되는 어린 시절의 프티트 마들렌은 작은 소품 정도로 동원되었던 듯하다. 프루스트는 차에 케이크를 적셔 먹다 콩브레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되돌아옴을 느꼈고 나는 마들렌을 볼 때마다 건강하고 당찼던 삼순이를 떠올리게 되었다. 후각은 기억 저장에 필수적인 해마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후각은 뇌와 특별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프루스트는 숙모가 그에게 주곤 했던 프티트 마들렌의 향을 음미함으로써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비내음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비가 후두둑 듣고 무언가 끼쳐오는 그 한없는 비릿함과 그리움이 느껴질 때면 스냅 사진처럼 몇 장의 어린 시절 추억들이 되돌아온다. 후각은 그리움을 몰고 오는 감각인 것 같다. 가장 원시적인 감각을 통해 느끼는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순수의 원형인 것인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질긴 상념에 불과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새로운 곳에 왔음에도 예전에 와본 듯한 묘한 느낌에 감싸이는 데쟈뷰에 대한 설명은 지극히 과학적이다. 그건 하나의 환각일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잦은 데쟈뷰 현상의 경험은 병리학적으로 진단되어야 할 수도 있다고 한다. 특정한 형태의 정신분열증과 간질의 전조증상으로 환자들은 흔히 데쟈뷰 현상을 경험한다고 하니 이제 홍차를 찰랑이며 데쟈뷰에 낭만적으로 몸을 맡기는 사치는 자칫 위험할 수도 있겠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나이가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챕터에서는 기억이 시간 감각의 핵심임을 지적한다.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휴가 주간에 시간이 전광석화처럼 휙휙 사라짐을 느낀다. 그런데 막상 직장에 복귀하면 벌써 날짜가 이렇게 됐어? 라고 하며 역설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내가 경험하는 시간은 정작 짧게 느끼고 회고하는 시간은 길게 느끼는 이 역설이 결국 삶의 진행 속도와도 닿아 있다. 첫사랑, 첫키스, 첫직장, 첫출산 등 수많은 처음으로 점철되는 이삼십 대와 중년 이후 노년기의 비교적 단조로운 시간들의 길이는 주관적으로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고여 있는 시간은 경험할 때는 길고 회고할 때는 더없이 짧아진다. 시간을 길게 늘이고 싶다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새로운 것들로 시간을 채우라는 저자의 조언을 기억해 두고 싶다. 새로운 시도들, 관계들이 쪼그라들면서 우리가 기억할 거리들도 덩달아 줄어든다. 기억할 거리들을 질러주는 무모함이 휙휙 지나가 버리는 시간의 뒷덜미를 조금이라도 움켜쥘 수 있는 방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여행도 더 많이 가고 사람도 더 많이 만나고 일도 더 많이 해서 차곡차곡 회상할 꼭지들을 집채처럼 모아두고 싶다. 자서전을 쓴다면 거의가 휘하게 뚫려 있다는 중년 이후의 삶들을 실팍하게 살찌우고 싶다는 치기를 부려 본다.
죽음 앞에서 몇몇이 경험한다는 과거 삶의 파노라마의 향연은 결국 살아가는 일이 기억거리들을 쌓아두는 일이기도 하다는 얘기다. 내가 하는 말, 상대의 눈망울, 상대가 돌려준 말, 그리고 때로는 나의 눈물, 웃음 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차창 풍경처럼 뒤로 밀려나가고 있다. 잘 봐 둘일이다. 아무데나 드러누울지라도 그것은 나의 분신이기도 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