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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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다. 정말. 소설이라는 장르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이 책으로 시작해보기를 권한다. 허구의 그 허술한 바람 구멍에 인생의 암팡진 의미를 꾹꾹 눌러 담을 수 있는 현대작가. 언제나 머리가 혹은 발이 차가워 역시 소설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으로 책을 덮게 만들지 않는 유일한 작가. 그를 위화라고 부르고 싶다. 

한 때 소설을 의도적으로 멀리했었다. 그 어떻게든지 비어져 나오는 보기싫은 뱃살처럼 나에게는 결국 소설은 소설이라는 한계를 자각하게 만드는 그 허술함이 거북했다. 베스트셀러작가이든, 심지어 유수의 고전 작가이든, 작위적인 반전, 입체적이지 못한 인간 군상들이 나는 지금 사실이 아닌 허구를 읽고 있다는 뼈아픈 깨달음을 가지게 하는 것이 진저리가 났었다. 

여러 사람이 권하고 무엇보다 피를 팔아 삶을 꾸려 간다는 남자의 얘기, 학창시절 펄벅의 '대지'를 참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결국 허삼관을 만나게 했다. 이 책 일단 너무 재미있다. 근래들어 시계를 보며 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어질 정도로 소설을 잡았던 기억은 없었는데 조금만 읽다 잔다는 것이 결국 자정을 넘어 억지로 잠을 청해야 했다. 또한 그 결말이 참으로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 수미상관처럼 억지로 처음과 맞물리게 하는 결말도 지겨웠고, 쓰다 지친 작가들의 필력이 마구 드러나는 듯한 느낌도 싫었었는데 그 둘다 여기에서는 저리 가란다. 그냥 눈물이 또르르, 웃음이 또르르 굴러나온다. 그 만큼 결말이 참으로 자연스럽고도 훌륭하다. 

허삼관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리얼리티를 획득한 지점은 바로 굉장히 입체적인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는 전적으로 나쁘지도 전적으로 선하지도 않은 딱 앞에도 뒤에도 옆에도 있는 주변 사람들 중에 하나이다. 사실 허삼관의 장자 일락이가 그의 아내 허옥란이 결혼전 마음주고 몸 준 하소용의 아들이라고 마을사람들과 허삼관 본인, 또 허옥란까지 다 인정해 버린 다음에 허삼관이 일락이를 대하는 태도는 지극히 비열하기도 하고 모질다. 나는 말미정도 가서 일락이가 허삼관 친아들이라는 반전이 일어날 것을 기대했는데 세련되게도 작가는 그런 단순한 반전을 사양한다. 여하튼 허삼관이 지독한 가뭄 기간에 옥수수죽에 질려 피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국수를 사먹기 위해 일락이만 남겨두고 나머지 두 아들과 허옥란을 데리고 가는 대목은 희극적이면서도 슬프다. 남은 일락이는 고구마를 사먹으며 울먹이며 거리를 헤멘다. 그러나 이 부자의 관계는 이런 일락이를 찾아 헤메다 결국 발견하고 국수를 파는 승리반점 앞에서 극적인 화해를 이룬다. 국수를 사먹이기 위해 승리반점 앞으로 아들을 데리고 가 온화한 미소를 짓는 그가 일락이가 간염에 걸려 상하이의 큰 병원으로 가야 하는 처지가 되자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며칠상간으로 계속 피를 팔며 상하이로 가는 모습은 피로 맺어지지 않았다고 단정지은 그 관계가 피보다 더 처절하고 진한 관계로 승화됨을 보여준다. 

허옥란에 대한 그의 태도는 또 어떠한가. 겉으로는 허옥란은 혼전 관계를 가지고 자식까지 낳아 뻐꾸기 둥지에 몰래 알을 숨겨 높는 철면피에 부정한 여자라 충분히 비난받아 마땅하며 그를 자라대가리로 전락시킨 장본인임에 틀림없다는 점에 그도 동의한다. 그럼에도 이런 그의 비자발적인 동의 속에 숨어있는 그녀에 대한 진한 애정과 신뢰는 문화대혁명당시 대자보에 '화냥년'으로 비난받아 사람들에게 삭발까지 당하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아내에게 꼬박꼬박 밥 속에 반찬을 숨겨 가져다 주는 모습에서 비어져 나온다. 또한 가족끼리 그녀를 비판하는 형식(여기에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작가의 신랄한 비판이 희화화되어 있다.)에서 자신이 유부녀 임분방과 관계를 가진 것을 고백함으로써 아내의 부정을 덮어주려는  오버스러운 용기까지 발휘한다. 그는 아내를 사랑했다. 이상적으로 소설적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지난한 삶 속에서 지루하고도 생생하게 아내를 사랑했다.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명제를 더 추상적으로 박제의 틀 안에 가둬버리는, 문학적 이상화의 틀을 위화는 박력있게 부숴 버리고 그 안에 새로운 사랑을 쓴다. 우리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 지지고 볶고 예쁘지 않은 사랑, 그러나 숨쉬는 사랑, 쉬이 스러지지 않는 사랑. 

그의 매혈은 비극적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희극적인 요소가 섞여 희비극의 절묘한 직조물을 보는 것 같다. 마치 인생처럼. 그가 피를 파는 명분은 여러가지이다. 아들 친구의 병원비를 물어주기 위해, 맛있는 것을 가족에게 먹여야 겠기에, 아들들의 상관을 잘 대접하게 위하여, 아들들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공통의 목적은 바로 '자식'의 안위를 위해서이다. 핏줄인  아들들에게 그 피를 팔아 더 나은 내일을 선물하기 위하여 몸이 다 망가져 가더라도 오직 피를 팔기 위해 헤메는 허삼관의 모습은 부성의 상징이다. 멋있지도 사회적으로 성공하지도 못한 사회의 뒤켠에서 이리저리 치여 한없이 초라하고 남루하게 늙어가는 아버지들. 그 아버지들은 대단히 도덕적으로 훌륭하지도 않고 무조건적인 자식에 대한 희생을 목적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지도 않고 그저 누구는 피를 팔고 누구는 때로 상관에게 영혼을 팔고 자존심을 포기하며 오늘도 발 디딜 곳 없이 이리저리 흐느적대며 헤메고 있다.  

인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질곡 있는 서사는 실종되고 단지 방대한 독서량을 전시하고 언어유희에 도착하여 독자를 어렵게 하는 작품을 내놓고 그것이 소설이라고 한다면, 또한 이해하지 못하는 다수에게 내공이 부족하다고 폄하한다면, 그들에게 허삼관이 허옥란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로 대응해도 되지 않을까? 그 말은 마지막 문장에 있다는 ㅋㅋㅋ 너무 과해서 숨겨두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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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복
버트란트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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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의 심리적인 원인은 다양하지만 모두 공통점이 있다. 전형적인 형태의 불행한 인간은 어린 시절에 정상적인 만족을 누리지 못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결국 그는 어느 한 가지 만족을 다른 만족보다 소중하게 여기게 되고,자신이 이룬 성과에 대해서도 자신에게 만족감을 주는 활동과는 상반되는 것이라고 과소평가하면서, 인생을 외골수로 몰아가게 된다.-24쪽

나 자신도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나는 어떤 철학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행동의 절박한 필요에 의해서 그 기분에 벗어난다. 만일 당신의 아이가 아프다면 당신은 불행하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32쪽

모든 종류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올바른 방법은 이성적으로 침착하게, 그러나 매우 집중적으로 그 두려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 두려움에 대하여 친숙한 감정이 생기게 된다.이러한 친밀감이 생기면 마침내 두려움의 칼날은 무뎌지고,모든 문제가 따분한 것이 되고,두려움에서 벗어나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중략) 어떤 문제든지 자신이 떨쳐버리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섬뜩한 마력이 힘을 잃게 될 때까지 보통 때보다 훨씬 강도 높게 그 문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다.-86쪽

사실 질투는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일종의 나쁜 버릇이다. 질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사물 사이의 관계를 통해 보려는 데서 생긴다.-97쪽

어떤 사람이 직접 겪은 한 가지 사실은 그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수많은 문제들에 비해서 그의 마음 속에 훨씬 깊게 각인된다.이로 인해서 이 사람은 잘못된 균형감각을 가지게 되고,일반적인 사실보다 예외적인 사실에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게 된다.(중략) 우리가 남들에게 유익할 거라고 믿는 어떤 행동을 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권력욕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126쪽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신을 해코지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질 만큼 당신에 대하여 골몰하고 있다고 상상하지 마라.-128쪽

다른 사람이 당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은, 당신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에 비해서 훨씬 적다는 점을 깨달으라는 것이다.-133쪽

대중에게 관대한 태도를 기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참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의 수를 늘려서, 그들이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데서 으뜸가는 즐거움을 찾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150쪽

보로의 <<로마니 라이>>를 읽어본 독자는 그 소설의 주인공을 기억할 것이다.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한동안 인생의 허무를 느꼈다. 하지만 찻잔과 차 상자에 쓰인 한자에 흥미를 가지게 된 그는 한문을 배울 목적으로 프랑스어를 배운 다음,프랑스어로 된 한자 문법서의 도움을 받아가며 한자를 해독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인생의 새로운 흥밋거리를 갖게 되었지만, 한자에 대한 지식을 다른 목적을 위해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178쪽

결국 이 여성은 엄청난 양의 자질구레한 일들에 치이게 되고, 얼마 가지 않아 모든 매력을 잃고 지성의 4분의 3을 잃게 된다. 그렇게 살면서도 매력과 지성을 잃지 않는 여자가 있다면 퍽이나 운이 좋은 여자다. (중략) 자녀들과의 관계를 보면, 이 여성은 자녀를 위해서 자신이 치러야 했던 여러가지 희생들이 마음에 남아 있어서 지나친 보상을 요구하게 되기 쉽다. (중략) 여성이 겪어야 하는 부당한 대접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가족들 옆에서 충실하게 의무를 수행한 대가로 가족의 사랑을 잃게 되는 것이다. -204,205쪽

이 세상에서의 삶을 행복하게 영위하려면 반드시 다음과 같은 마음가짐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은 곧 인생의 막을 내릴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최초의 세포로부터 멀고 먼 미지의 미래로 이어지는 생명의 흐름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마음가짐이다. (중략) 미래에 확고한 흔적을 남길 만큼 위대하고 뛰어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일을 통해서 이러한 감정을 만족시킬 수 있지만, 특별한 재능을 갖지 못한 남녀의 경우에는 자녀를 통해서만 이러한 감정을 충족시킬 수 있다. -213쪽

임신 후기와 수유기에는 어렵겠지만, 생후9개월이 넘은 아가가 어머니의 전문적인 활동을 막아서는 거대한 장벽이 되서는 안된다. 사회가 어머니에게 자녀를 위해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유별난 성자가 아닌 다음에야 그 어머니는 자녀에게서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보상을 받고 싶어할 것이다. 헌신적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 어머니는 자녀들에 대하여 유달리 이기적인 경우가 많다. 부모 노릇을 한다는 것은 인생의 중요한 일부분일 뿐인데, 그것을 인생의 전부로 여긴다면 만족을 얻기 어렵고, 또 만족하지 못하는 부모는 욕심 많은 부모가 되기 쉽다.-221,222쪽

위대한 정신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우주의 구석구석으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마음의 창문을 활짝 열어놓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인간적인 한계가 허용하는 것만큼 올바르게 자신과 인생과 세계를 바라볼 것이다. 그는 인간의 생명은 짧고 하잘것없지만, 인간 개개인의 정신에는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이 집약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며, 세계를 반영하는 정신을 가진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세계만큼 위대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에게 늘 따라다니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강렬한 기쁨을 느낄 것이며,표면적인 생활이 갖은 곡절을 겪는다고 해도 깊은 본질에 있어서는 늘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244쪽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인생의 폭을 협소하게 제한해서는 안된다. 인생의 폭이 협소할수록, 우연한 사건이 우리 인생의 모든 의미와 목적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되낟.-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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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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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에는 은하가 대락 1,000억개 있고 각각의 은하에는 저마다 평균 1,000억개의 별이 있다. 우리 은하수 은하에는 약 4,000억개의 별이 있다. 태양은 단지 그 별중의 하나이고, 이 우리 은하계도 수많은 은하단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행성이 별의 형성과정에 동반되는 현상이며, 이러한 행성중 하나인  지구의 나이는 45억년, 빛은 1년이면 10킬로미터를 가는데 이것이 1광년이다. 질식할 것 같다. 이 책은 이런 수많은 거대한 숫자들의 향연으로 인생을 찰나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철저한 문과생이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집어들게 된 것은 다분히 소설가 김연수 덕택이고, 더불어 멋을 내보고자 하는 공명심도 함께였다.

이 책 정말 두껍다. 가독력. 이과생은 모르겠으나, 문과생에게는 정말 힘겹게 하는 독서가 어떤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고등학교 때 물리와 화학을 포기했던 사람들이라면,(나는 대부분의 문과생이 이해를 단념하고 무조건 외워 시험을 봤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30%는 이해하기를 단념해야 한다.  그래도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20대에,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이라면, 10대에 꼭 읽어야 한다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역사,철학,생물학,물리학,화학,수학,사회학, 더 나아가 미래학까지를 아우르는 이러한 방대한 지식의 체계를 단 한권의 책으로 낼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이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의 축복이다. 또한 작금의 현실이 너무 고통스러워 괴로운 사람들 당장 이 책을 집어들라. 자신의 고민과 삶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하찮고 허무한 것인지, 조금은 어려운 독서로 진실로 깨달을 수 있을 테니.

원래 초반이 지겹고 뒤로 갈수록 재미있어지는 것이 책이라는 것의 일반적 모양새라면, 이 책은 초반이 재미있고, 중반이 조금 고통스럽다 후반이 아쉬운 모습이다. 수많은 물리공식들이 마구 뿜어져 나오는 특히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설명되는 부분은 정말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누구는 이론을 만드는데, 누구는 만들어진 이론을 설명까지 해주는데도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다는 비극적인 현실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흥미있었던 부분은 금성과 화성의 얘기. 금성이 차갑고 화성이 뜨거운줄 알았더니 반대였다는 것. 그리고 둘다 생존환경으로는 불가할 정도로 척박한 환경이라는 것.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제목은 알고 붙인 제목이었다는 것, 남자가 차갑고 여자가 뜨겁다.? 

물리학자 푸리에의 집에 방문한 소년 샹폴리옹의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 대목도 참 재미있었다. 상형문자를 오랫동안 해독하지 못했던 것이 표음문자와 상형분자의 혼용부분을 제대로 분석해 내지 못한 것으로 그는 로제타석의 '프톨레마이오스'라는 글자와 오벨리스크에 쓰인 '클레오파트라'를 로마자로 써서 비교함으로써 이집트 상형문자의 첫번째 해독자로 등극한다. 이 해독절차에 대한 설명은 굉장히 쉽고 나도 이 둘을 비교할 수 있는 정도의 상황만 됐으면 가능했겠다는 염치없는 망상마저 품게 한다.

영국의 기상학자 리처드슨이 전쟁과 날씨가 모두 모종의 규칙성을 가지고 있고, 전쟁은 일기의 변화와 마찬가리로 이해와 통제가 가능한 하나의 자연 체계 격렬한 분노는 진화 과정에서 만들어져 아직 우리 머리 깊숙한 곳에 남아 있는 파충류의 뇌, 뇌의 R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설명도 인상깊다. 칼은 인류의 핵전쟁 발발로 인한 공멸의 위기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있으며, 이러한 전쟁 준비와 수행에 투자되는 자본이 우주탐사에 쓰이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그의 인류에 대한 깊은 애정과 전지구적 애정은 제러미 러프킨의 <<유러피안 드림>>과 닮아 있다. 탈가치적으로 수단화되고 있는 과학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따사한 인간애, 인문학적 소양 등은 그가 극렬한 무신론자이고 때로는 자가당착의 오류에 빠지는 모습을 보일지라도 충분히 훌륭하고 경탄할 만한 것이다.

이 책을 낭만적인 엶은 가스 성운으로 휘감는 대목은 유일하지는 않지만,  2000년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대한 그의 지고지순한 애정이다. 고대의 최고 지성들이 수학,물리학,생물학,천문학,문학,지리학,의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을 여기에서 구축할 수 있었다는데 오늘날의 학문도 당시에 이루어진 연구에 아직 바탕으로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도서관이 파괴되고 서구문화는 1,000년의 암흑기로 빠지게 됨을 그는 몹시 안타까워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자료들이 전부 소실됨으로써 낭비해야 했던 수많은 시간들은 단순히 1~2년이 아니라 자그마치 2.000년인 부분도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한 번 읽고 이 책을 한 60% 정도 밖에 이해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연필과 메모장을 준비하지 않고 그저 드러누워 쉽게 읽으려 했던 자세도 반성한다. 중반 넘어가서야 북마크를 군데군데 끼워 두며 진지해지려 노력했지만, 역시나 역부족이었다. 그의 방대한 지식의 양과 그의 인류애적 성찰을 헤아리기에 나의 소견과 자세는 너무나 좁고 초라했다. 적어도 3~4번은 고민하며 읽어야 할 책인 것 같다. 이런 과학책을 읽고 일상에서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었다는 거짓말 같은 진짜 고백으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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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와 책 -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
정혜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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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한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고, 우선 그녀의 현란한 문체에 앞서 다방면에 걸친 독서량과 그 책을 적절하게 일상에 접목시키는 능력에 감탄했었다. 지나치게 자의식이 강하고 그녀의 문체가 거북하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닥 동의하지 않았으나...... 
 

이 책을 보면 그녀의 문장은 지나치게 유려하려 애쓴 기미가 군데군데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순간 순간 거북함이 밀려온다. 쉽게 써도 될 말을 이중 삼중으로 꼬아 길게 늘이는 것, 큰 상관 관계가 없는 상황을 단순히 연결시켜 현란한 비유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등 물론 전적인 나의 의견이므로 이것으로 그녀의 장점인 독서의 깊이와 넓이, 지적 소양 등을 훼손하고 싶은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느낌이 그랬다는 것. 또한 이 책을 읽으라고 추천하는 것인지, 그냥 한 대목이, 문장이 마음에 들어 인용한 것인지를 판단할 근거가 없다는 점도 아쉽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추천도서목록을 작성하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을 듯.

일단 책 표지 및 제본 상태가 참 이쁘다. 이 책을 받아든 순간 나는 그냥 행복했다. 판형도 날씬하고 작고 표지의 아름다운 여인네의 다리와 하늘색 배경은 아기자기한 어여쁨을 발산한다. 
 

그녀의 덕택에 물론 김연수도 강추했지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게 되었다.

나는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 가장 느리게 공전하는 별, 우회와 지연의 행성.'

'우회와 지연의 행성' 아, 정말 너무 마음에 드는 단어들. 우회와 지연. 우회와 지연. 이런 단어가 왜 이제야 나에게 왔지? 사족이지만 토성의 하늘은 연분홍빛이란다! 아. 쓰러진다.

다음은 배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에서.

내가 무언가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을 때면 당시에 겪었던 마음의 상처들이 떠오르고, 내가 죄책감을 느낄 때면 당시의 죄책감이 다시 돌아온다. 내가 오늘날 무언가를 그리워하거나 향수를 느낄 때면 당시의 그리움과 향수가 되살아나곤 한다. 우리 인생의 층위들은 서로 밀집되어 차곡차곡 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중의 것에서 늘 이전의 것을 만나게 된다. 이전의 것은 이미 떨어져 나가거나 제쳐둔 것이 아니며 늘 현재적인 것으로 생동감있게 다가온다.  

내가 요즘 느끼는 바로 '그것'이 '이것'이다. 나중의 것에서 이전의 것을 만나는 것. 그 묘한 지점에서 나는 시간의 흐름 속에 무기력한 인간의 한계를 체감하며 가슴을 두드린다. 나도 더 리더를 읽었는데 이 대목을 기억하지 못하는 반면 저자는 이렇게 오감이 깨인 독서를 하니 훌륭하달 수밖에....누구나 책을 읽을 수는 있지만 그 내용을 잘근잘근 씹어 내 피와 살이 되어 흐르게 하지는 못한다. 물론 그런 무의미한 것 같은 독서 속에 알게 모르게 지적인 성숙이 이루어진다고 자위할 수도 있겠지만. 좀 빈약한 변명으로 들린다. 
 

그리고 '보르헤스' 말년에 눈이 멀어가지나 국립도서관 관장이 된 것을 가장 큰 영예로 여긴 사람. 그.

내게는 수많은 나쁜 일과 몇 개의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임을 예감했습니다. 하지만 항상 그런 모든 것, 특히 나쁜 일이 장기적으로 글로 변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행복은 다른 것으로 변환될 필요가 없으니까요, 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이니까요.

이것도 내가 요즘 생각만 하고 짧은 문장력으로 표현하지 못했던 생각. 글은 삶을 뛰어넘을 수 없기에 작가의 인생은 파란만장할 필요가 있다는 것. 단조롭고 행복하기만 한 삶을 산 작가의 작품은 그 역시 단조로운 서사 구조를 숨기려 동원한 언어유희의 망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쉽다는 점.

'현재란 미래가 과거로 허물어져가는 순간'(보르헤스가 자주 인용했던 브라우닌의 시구)

현재를 '선물'이라는 영어 단어로 그럴 듯하게 포장해 전혀 동의할 수 없었던 재정의에 이처럼 충실한 반기를 들 수 있는 아름다운 표현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고 싶다.

다음은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고독해지는 이유는 타인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는, 즉 우리는 상대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

내가 자주 처하는 상황. 남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남의 판단 안에 나를 가두고. 그래서 삶은 초라해질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이 책은 수많은 인용과 수많은 작가의 직간접 경험이 어우러져 달콤한 변주곡을 들려주는 조금은 어려운 선율 같다. 다만 그 음악에는 너무나 많은 기교가 얽혀 있고 그 기교가 조금은 자의적이라는 생각이 숨어 들어갈 여지가 있다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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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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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추천도서목록에서 조르바는 꼭 현학의 과시처럼 포함되어 있다. 고전이고 다수의 추천을 받는 책들은 제목만으로 내용을 결정지어 버리는 묵은 습관이 있기에 나의 생각은 음. 그리스인 조르바가 젊고 아름다운 그리스 청년인 줄 알았고, 어떤 이상적인 경지에 도달한 신에 가까이 닿은 그런 존재일 거라 상상했다. 

책을 펼쳐봄과 동시에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음을 깨달았다. 그는 육십이 넘은 노인이고, 오히려 젊은 청년은 작중 화자(작가)이고,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철저한 현실주의자이며 욕망과 육체를 묶어 놓는 인습, 관념, 사회적 속박의 고삐를 완전히 풀고 망아지처럼 날뛰는 인간상이었다.  

이러한 인간에 그토록 열광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머리로 지향하는 케케묵은 이상적인 인간상에 대한 진저리와 무조건 욕망과 육체를 하위의 것으로 치부하고 꾹꾹 눌러담아 수단화 하려는 거대담론에 적극적으로 반항할 수 없는 답답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나의 전체적인 감상평은 기대이상은 아니었고, 딱 기대 만큼, 아니면 조금 덜한 정도. 일단 조르바보다 주인공의 나약한 선병질적 기질과 조르바를 지향한다고 하면서 관념론에 기대어 현학적인 어휘를 마구 섞어 대는 것이 진부하게 보였고, 친구의 언급이 지나치게 소설적이었다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이 소설은 충분히 매력적인 면이 있다. 고전은 반드시 고전인 이유가 있다. 절대 시간 낭비가 아니라 서사 구조가 조금 지리하더라구도 꾸욱 참고 읽으면 차를 타고 가다 차창 밖의 수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눈물겹게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 정말 그랬다. 기억하고 싶은 대목들. 

조르바가 늙은 할머니가 토요일이면 이웃집 처녀를 우르르 찾아오는 청년들을 의식해 곱게 단장하는 모습을 철저하게 비웃고 무시하는 대목. 그것으로 할머니는 종말을 맛본다. 여자는 언제까지나 남자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본성을 지녔다는 것을 희화화해서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독자는 포복절도하게 된다. 유언이 조르바를 붙잡고 "나를 끝장낸 건 바로 너다." 라고 했다면 여기에서 배꼽을 쥐어잡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조르바의 여성에 대한 폄하가 조금 거북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이 대목에서는 기탄없이 박수를 칠 수 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조르바의 외할아버지가 항상 갓 도착한 나그네를 탐색하여 찾아내어 대접하고 "말하소!"라고 외치는 부분. 나그네를 따라 간접경험의 길을 떠나는 조부에 대한 회상이 너무나 몽환적이면서도 아름답다.    

조르바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답답한 가슴팍에 시원한 얼음물을 마구 들이부어주는 기분이었지만, 특히 이 말은 꼭 메모해 두고 싶었다. 이 얘기를 심장에 박아 두어야지. 사람이 미워질 때마다. 열어 보아야지.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이자 속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그리고 이 책에서 나는 그 누구보다 오히려 조르바보다 마치 퇴물 기생처럼 묘사되고 있는, 그러나 조르바 앞에서 여자이고 싶어 우스꽝스런 치장으로 다시 여자로 태어나고 미래를 꿈꾸는 가련한 부불리나를 제일 사랑하게 되었다. 크레타의 혁명당시 온 네 나라의 제독을 무릎위에서 가지고 놀았다고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그녀의 허풍이 너무 귀여워 볼을 꼬집어 주고 싶었다. 그녀는 조르바와의 결혼을 꿈꾸다 비참하게 죽는다. 그녀의 죽음을 기회로 그녀의 하찮은 물건들을 어떻게든 훔쳐가려고 전전긍긍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추한 인간 원형의 밑바닥 욕망을 극대화해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려 나의 사소하고 추잡스러운 작은 욕심들을 채우려는 인간의 가장 저급한 모습.    

 

조르바가 추진한 케이블 고가선이 다 무너지면서 그들의 갈탄광 사업은 망한다. 그럼에도 그 지점에서 그들은 마음껏 마시고 춤추며 그 순간 오히려 해방감을 느낀다. 나는 이 결론이 좋다. 리얼리티. 실존 인물이었다는 조르바와의 아름다운 인연은 여기에서 끝이 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번역자의 후기에서 보면 조르바의 딸이 환갑이 넘어 카잔차키스의 무덤을 찾아온 얘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유대는 사후에도 피가 되어 흐르는 것 같다.  
소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철학서를 대한 느낌이었고, 나에게 조르바 같은 인연이 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리게 하였으며, 고전을 읽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게 한 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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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1-11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도 많이 들어 읽은듯한 이 책을 읽기로 이 연말에 문득 결심을 한 것은 누군가 나를 조르바 같은 인간이라고 불렀기 때문인데, 이 리뷰를 읽으니 읽을 힘이 나네요ㅎ (땡투를 드리며 휙)

blanca 2009-11-12 13:40   좋아요 0 | URL
저도 읽었는지 안읽었는지 모르는 책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올해부터 리뷰를 꼭 쓰기로 결심한 거구요. 읽기만 하고 기록을 안남기니 참 허무하더라구요. 조르바 같은 인간은 극찬인데요? 꼭 읽어볼만한 책인 것만은 분명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