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은 힘이 아니고안전이나 안도감도 아니고, 어떤 사람에게는 힘, 안전, 안도감의 정반대 것일 수도 있다. 예민하게 깨어 있다보면 자극이 계속 쌓여 고조되기 마련인데 그런 스트레스를 해소할 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걸으면서 책을 읽는것은 알지 않으려고 일부러 하는 행동이다. 경계하지 않으려고 경계하는 것이다. - P102

 빛나지 않는 사람들 집단을 생각해보라. 아니면 공동체나 국가나 아니면 소국가가 오랜 세월 동안 어두운 정신의 물리적 에너지적 상태에 빠져 있고 개인적 · 공동체적시련의 세월과 역사를 겪으며 슬픔과 두려움과 분노 등의묵직한 감정을 지고 살게끔 조건 지어졌다고 생각해보라.
이 사람들은 빛나는 단추 같은 사람이 자기들 환경에 들어와서 환한 빛을 비춘다면 고깝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환경 자체가 사람들의 비관주의를 지지하며 같이 저항한다.
사방이 어둠에 묻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내가 사는 곳에서는 그랬다. - P135

미쳤다는 증거지, 내가 말했다. 머리를 들고 가겠다는 말이야? 여기가 아무리 황량해 보여도 어딘가에서 적어도 한 사람은 보고 있을 수 있는데? 누군가가 봤다면 소문이 더 퍼질 거고 날조가 더 늘어날 거고 네 정신이 망가졌다는 증거가 늘어날 거야. 하지만 그 순간에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 P152

반대자가 만행을 저지르면 ‘아, 하느님 맙소사, 나와 같은 관점에속한다는 이유로 내가 이런 행위를 지지한 꼴인가?‘ 하며 충격에빠지게 되지만, 다른 쪽에서 또 끔찍한 일을 저지르면 그런생각을 했던 것도 잊게 됐다. 또다시 충격을 받고 또 생각이 바뀌었다. 복수에 복수가 거듭됐다. 평화운동에 참여하고, 공동체 간의 대화를 추진하고, 다 함께 행진을 하고, 선하고 진정한 시민의식을 북돋고 하다가, 평화운동과 선하고 진정한 시민의식에 어떤 분파가 개입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면, 운동을 접고 희망도 버리고 잠정적 해결책도 팽개치고 익숙하고 믿을 수 있고 필연적인 원래의 관점으로 돌아갔다. 그 시대에는 어디든 다 닫혀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폐쇄적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 공동체도, 저쪽 공동체도.... - P168

그 여자들은 우리 지역 최초의페미니스트 집단인데 아주, 아주 상도를 벗어난 사람들로확실하게 취급된다. 일단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상도를벗어난다. ‘여성‘이라는 말도 가까스로 상도를 벗어나지 않는 정도인데, ‘문제‘ 등과 같은 일반적인 단어와 결합해 어감을 좀 부드럽게 해보아야 페미니스트와 여성이 합해지는순간 끝난 거다. 우리 지역에서는 이 문제 여성들에 대해 심하게 말한다. 뒤에서만 하는 게 아니라 대놓고 한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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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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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 버틀러의 1979년작이다. 미국에서 유색인종의 투표권에 대한 여러 제한이 공식적으로 폐진된 것이 1965년이다. 하지만 차별의 역사에서 법적 권리의 확보는 평등으로 나아가는 첫 발걸음에 불과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노예제가 폐지된지 100년만에야 흑인들이 제대로 된 투표권을 가지게 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1979년 흑인여성작가 옥타비아 버틀러가 소설 <킨>을 발표했다.

 

1979년의 미국은 어땠을까? 흑인 여성작가가 SF장르의 소설을 쓰고 출판을 하는 것이 그리 녹록한 사회였을까?

지금도 SF장르는 백인남성의 전유물인것처럼 다른 인종과 다른 성의 진입이 쉽지 않은 장르이고 여성작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정말 최근의 일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의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서 보듯이 미국의 인종차별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것도 아주 야만적인 형태로. 작가 역시 이런 상황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나는 루퍼스에게 최악의 수호자였다. 흑인을 열등한 인간으로보는 사회에서 흑인으로서 그를 지켜야 했고, 여자를 영원히 자라지 못하는 어린아이로 여기는 사회에서 여자로서 그를 지켜야 했다. 내 몸 하나 지키기도 벅찬 곳에서 말이다. - P124 

 

1817년으로 타임슬립한 주인공 다나의 독백은 아마도 작가의 독백일 것이고, 그것이 1817년 노예제 하의 미국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소설 속에 흑인 노예의 아이들이 노예매매 시장을 재현하며 놀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들은 서로에게 값을 매기며 왜 내가 그정도 가격밖에 안되냐를 따지며 놀고 있다. 이 장면을 보던 다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눈을 감고, 마음의 눈으로 노예상인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다시 보았다. "그래서 수월하다는 사실이 무섭게 느껴졌구나. 이제 이유를 알았어."
"무슨 말이야?"
"수월함 말이야. 우리나, 아이들이나… 노예제도를 받아들이도록 훈련시키기가 얼마나 수월한지 전에는 몰랐어."  - P191

 

억압을 당하는 사람이 그 억압을 제대로 인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억압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작가는 소설을 통해 노예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고발하고 있다. 노예제는 그저 채찍질이나 힘겨운 노동이나 감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몸과 정신 삶에 대한 결정권을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존엄을 전혀 지킬 수 없는 그래서 자신을 스스로조차도 존중할 수 없을 때 그것이 노예의 삶이고 노예제라는 것을 고발한다.

 

또한 눈에 분명히 보이는 악인 노예제를 비판함에 있어서도 당사자와 관찰자가 얼마나 인식이 다를 수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소설 속에는 중요 남성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절대악은 주변인물로 언급될 뿐이다. 하지만 나름 합리적인 백인 농장주인, 다나가 생명을 구해주고 특별한 유대관계를 맺는 백인 농장주인의 아들이자 이후 농장주인이 되는 루퍼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다나의 남편인 백인 남성 캐빈까지 노예제에 대해서 다양한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여러 층위의 인물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 중 누구도 노예제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왜 아직도 목숨을 구해준 보답으로 나를 죽일 뻔한 남자의 노예로 남아 있을까? 왜 그러고도 또 채찍질을 당했을까? 그리고 왜……… 왜 나는 지금 이렇게 겁을 먹었을까. 왜 조만간 다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릴 만큼 겁이날까? -  P342

 

오직 다나만이 노예제가 외부의 온갖 억압과 부당한 대우를 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까지 노예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자각하고,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저항한다. 1979년에 다나라는 여성을 창조한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는 뛰어난 소설가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이론가, 페미니스트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만약 이 소설이 1817년을 그대로 배경으로 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했다면  당대에 뛰어난 사회소설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오래도록 살아남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야기의 완성을 위해 작가가 소재로 쓰고 있는 것이 타임슬립이다. 세상에 타임슬립이라니..... 지금이야 영화고 드라마고 소설이고 너무도 흔해빠져서 식상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지만 1970년대에도 그랬을까? 타임슬립이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것도  필립 K. 딕의 1964년작 <화성의 타임슬립>이 처음이라고 한다. 소설에서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면 19세기 마크트웨인까지 거슬러 간다지만 이 시대에 그리 흔한 소재는 아니였을 것이다.

 

작가적 재능이라고는 일도 없는 내가 타임슬립을 상상하면 뻔하다. "로또 번호를 알아가야겠네, 아 너무 빠른 시대로 가면 주택복권 번호를 알아봐야 되나? 아! 로또나 주택복권이냐 그것이 문제로구나!" 딱 여기까지가 나의 상상이다. 조선시대나 구석기 시대 동굴로 갈지도 모르는데 그건 상상이 안된다. 어쨌든 지금의 타입슬립 소재의 드라마 영화 소설 등등은 클리셰화되어 나의 저 로또나 주택복권 번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물욕에 빠진 나와 달리 잃어버린 옛사랑이나 과거의 원한이나 과거에 미제사건이나 걸치고 있는 옷은 다 다르지만 그것도 결국 복권에 다름 아니다. 타임슬립이란 소재가 소비되는 방식이 대부분 그러하다.

 

그러나 작가의 머리속에는 그런 클리셰가 하나도 없었나보다. 주인공 다나를 그것도 흑인 여성인 다나를 노예제의 한복판으로 데리고 가버린 걸 보니말이다. 이제 소재는 소설의 이야기적 흥미를 극대화시키고, 미국 노예제사회를 리얼하게 보여주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이 소설에서 타임슬립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그것은 공포이며 안타까움이고 ,소설의 극적 긴장을 고조시켜 주인공 다나의 감정으로 독자를 몰입시키는 장치이다. 또한 2개의 시대를  연결하면서 과거 세계와 지금의 세계의 사회문제를 말 그대로 리얼하게 파헤치는 리얼리즘 소설로 만들어주는 장치이다.

 

 그래서 소설 <킨>은 SF라는 장르에 갇힐 수 없다. 리얼리즘 소설로서도 빛나는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1979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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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열여덟살 때, 나는 일촉즉발인사회에서 자랐고 이곳에서는 신체 폭력이 없는 한, 명백한언어적 모욕이 가해지지 않는 한, 눈앞에서 조롱당하지 않는 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게 기본 원칙이었으니, 그러니 일어나지 않은 일에 피해를 당했다고 할 수도없었다. 열여덟살 때 나는 개인공간 침해라는 게 뭔지 몰랐다. 불편한 느낌은 있었다. 직감이나 어떤 상황 또는 사람에대한 반감은 있었지만 직감과 반감이 중요하다는 것은 몰랐고 누군가가 접근하는 것을 꺼리거나 거부할 권리가 나에게 있다는 것도 몰랐다. - P17

이때 이곳에서 폭탄과 총과 죽음과 부상을 포함한 정치적 문제가 불거지면 사람들은 보통 "저쪽 편이 했어" 또는
"우리 편이 했어" 또는 "저쪽 종교가 했어" 또는 "우리 종교가 했어" 또는 "저들이 했어" 또는 "우리가 했어"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국가 수호자들이 했어‘ 또는 ‘국가 반대자들이 했어‘라는 의미다. - P40

......친구들은 이웃의 말이 말도 안된다고 콧방귀를 뀌는 대신 열을 내며 반박했는데, 그때가 피해망상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칼날 위에 선 시대, 원시적인 시대, 모두가 모두를 의심하는 시대였다. 여기에서는 누군가와 기분좋게 잡담을 나누고 나서 마음 편하게 즐거운 대화 나눴다.
생각하면서 돌아가다가도 머릿속에서 대화를 다시 돌려보다보면 "이것‘이나 저것‘을 말한 것이 슬슬 걱정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나 ‘저것‘ 이 논란의 여지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 P48

 여기에서는 놀이에 빠지거나틈을 보였다가 망신을 당하는 일이 엄청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생각을 읽으려 했다. 그러지 않으면 일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진심을 말하지 않는 한편 누가 자기 생각을 읽으려 하면 그 사람에게 가장 위쪽 마음 상태만 드러내고 진짜생각이 무엇인지는 의식의 수풀 안에 감춘다.  - P61

화요일에 같이 가겠다고 말했고 그래서 그 화요일,
내가 셋째 형부와 같이 저수지 공원에서 달리기를 하고 난뒤에 해 지는 걸 보러 가기로 했다. 물론 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는 않을 거였는데 해넘이가 사람들에게 말해도되는 주제인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보통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안했다. 아무 말도 안하는 게 내가 나를지키는 방식이었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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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루퍼스에게 최악의 수호자였다. 흑인을 열등한 인간으로보는 사회에서 흑인으로서 그를 지켜야 했고, 여자를 영원히자라지 못하는 어린아이로 여기는 사회에서 여자로서 그를 지켜야 했다. 내 몸 하나 지키기도 벅찬 곳에서 말이다.  - P124

어떻게 케빈과 내가 이 시대에 수월하게 끼어들어갔는지 알것 같았다. 우리는 정말로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쇼를 바라보는 관찰자였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일어나는 역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배우였다.
집에 갈 날을 기다리는 동안에 그들과 비슷한 척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 P184

"그래, 한 번도 너무 많지. 하지만 내가 상상한 모습은 아니야, 감독관도 없고,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일을 시키지도 않고…….
나는 케빈의 말을 잘랐다. "제대로 된 숙소도 없고, 흙바닥에서 자야하고, 음식은 부족해서 쉴 시간에 텃밭을 가꾸고 세라가 눈감아줄 때 부엌채에서 뭐라도 훔치지 않으면 모조리몸져누울 지경이지. 권리는 하나도 없고 언제든, 아무 이유도없이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가족에게서 떨어져 팔려나갈 수있어. 케빈, 사람들을 때려야만 잔인한 건 아니야."
- P189

"당신은 이 모든 경험을 관찰자로 겪어낼 수 있을지도 몰라.
나도 이해해, 대부분 시간에는 나도 여전히 관찰자니까. 그건보호막이야. 1976년이 1819년에 대한 방패이자 완충재가 되어주는 거야. 하지만 가끔은, 저 아이들의 놀이를 볼 때 같은순간에는 나도 거리를 유지 못 하겠어. 1819년에 완전히 끌려들어가버리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래도뭔가 하기는 해야 해. 난 그걸 알아."
- P190

나는 눈을 감고, 마음의 눈으로 노예상인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다시 보았다. "그래서 수월하다는 사실이 무섭게 느껴졌구나. 이제 이유를 알았어."
"무슨 말이야?"
"수월함 말이야. 우리나, 아이들이나… 노예제도를 받아들이도록 훈련시키기가 얼마나 수월한지 전에는 몰랐어."
- P191

내가 받은 교육이나 미래의 지식들은 탈출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 해리엇 터브먼이라는문맹의 도망노예가 이 카운티에 열아홉 번을 드나들면서300명의 도망자를 자유로 이끌 것이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왜 아직도 목숨을 구해준 보답으로 나를 죽일 뻔한 남자의 노예로 남아 있을까? 왜 그러고도 또 채찍질을 당했을까?
그리고 왜……… 왜 나는 지금 이렇게 겁을 먹었을까. 왜 조만간다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릴 만큼 겁이날까?
- P342

나는 내가 용기를 잃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전에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그는 이웃들에게, 순찰대원들에게, 어쩌면 이 지역에 존재하는 경찰 조직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나에게 무슨 일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고, 나는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다. 전혀 없었다.
-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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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08-12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다 읽으셨어요? 빠름빠름빠름~~ ^^;
저 이 책 보관함에 있는데 아는 분의 리뷰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때요? 추천하시렵니까?ㅎㅎ

바람돌이 2020-08-12 09:52   좋아요 1 | URL
책이 어렵거나 막히는데 없이 술술 넘어가요. ㅎㅎ 저는 지금 이 작가의 책을 더 찾아서 읽어야겠다 하고 있으니까 추천입니다. 타임슬립이라는 소재는 사실 너무 식상할정도로 많잖아요. 근데 이 책은 보통의 타임스립이라는 소재가 쓰이는 방식을 전혀 따르지 않고 리얼리티의 강화에 써먹다는게 신선했어요. 흑인 여성이 보는 노예제의 문제. 뻔히 알만한 주제지만 그걸 풀어가는 이야기의 방식이 흥미진진했습니다. ^^
 


이 책의 저자는 오스트리아의 사회학자이다. 따라서 저자가 예로 드는 사회적 현상 대부분은 유럽과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그 사례의 내용들이 오늘의 한국에 갖다놔도 별로 어색함이 없다. 이건 글로벌화의 영향도 있을테지만 더 중요하게는 유럽 사회와 한국의 사회적 경제적 위치가 비슷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제기하는 핵심 담론들은 큰 위화감없이 현재 한국사회의 문제로 읽어도 무방했다.

이 대목에서 세계를 균질화시키는 신자유주의 아니 자본의 힘에 또다시 짓눌리는 느낌이다. 자본의 세계화만큼 그에 대한 저항도 세계화 될 수 있을것인가를 생각하면 잠시 암담하다. 그러나 암담하다고 생각과 행동을 멈출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세상의 변화를 믿는 철없는 낭만주의자라는 내 포지션을 지키고 싶으니까..... 물론 이 말은 전혀 과학적이지 못할뿐만 아니라 몽상적이기까지 함을 모르는바는 아니다. 며칠전 휴가여행에서 함께 했던 친구들에게도 엄청 질타받았던 바이기도 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런 희망이라도 갖지 않으면 삶이 너무 암담하지 않은가? 끊임없이 책을 읽고싶은 이 욕망도 어쩌면 이 암담한 세상에 매몰되고싶지 않은 발버둥일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일을 하라! 열정페이도 마다하지 말고. 그러면 너는 성공해서 부와 성공을 이룰 것이다.

수많은 책들이, 유명인사들이 부르짖는다. 그 첨병에는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오프라 윈프리같은 유명인사들이 포진해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면서 외면하고 있다. 젛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실제로 얼마되지 않으며, 좋아하는 일을 해도 성공하는 사람은 극소수라는걸. 왜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말의 끝은 남과 다른 신화 창조적 부와 성공이어야 하나?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면서 그 일의 노동조건과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투쟁과 연대가 더 좋은 사회를 만들고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길이라는건 왜 말하지 않는가? 사실은 모두가 답을 알고 있다. 자본의 입장에서 유리한 것은 수많은 개미들이 죽어라고 경쟁하는 것임을. 그래서 오늘도 신화는 만들어지고 널리 널리 울려퍼진다. 청년들이여. 연대하지 말고 경쟁하라! 그래서 성공하라!

같은 의미에서 이제 실업은 사회나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실패로 귀결된다. 이런 이데올로기의 능력이 얼마나 탁월한지 개인 실업자들 조차도 다른 실업자와의 동일시를 거부하고 나와 타인을 구분함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지키려고 한다. 이 대목에서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OECD 상위 국가들의 중산층 신화를 생각해보게 된다. 실제의 처지와 관계없이 많은 사람이 나는 중산층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능력이 없어 실업자가 되는 저들과는 다르다는 생각, 이런 심리적 허구적 중산층의식 역시 나와 타인을 구별짓고 실업자간의 연대를 무시하며 이 차별적 사회의 근간을 굳건히 받쳐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이주민은 설 자리가 없다. 생각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청년문제 실업자문제에서 그러하듯이... 제주에 예멘 난민들이 들어왔을 때 우리 사회가 보인 극도의 히스테릭한 반응들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최대한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선을 그었다. 그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 나라로 전 세계의 난민이 몰려오고, 그들은 모두 잠재적 범죄자일 것이며, 결국 우리의 세금을 도둑질하는 악이 될것이란 상상이 그 히스테리의 근저에 있지 않았을까? 최대가 아니라 이 책의 저자가 제시하듯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는 무엇인가에서 출발한다면 좀 더 이성적이기라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난민문제가 어렵다는걸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유럽의 극우세력이 하는 주장을 우리는 반 이상의 국민이 주장한다는 것이 너무 서글펐을뿐....

성, 젠더의 문제에 대한 접근에서도 여성의 입장에서의 접근뿐만이 아니라 남성의 입장에서의 접근이 흥미롭다. 미국의 총기사건은 대부분 남성 그것도 중산층 백인 남성이 절대 다수란다. 자신의 억압된 남성다움을 폭력으로 폭발시키는 양상에 주목하면서 남성성을 강요하는 문화에 대해 고민을 던져준다. 이것은 또한 성범죄, 왕따문제, 시기피해 등에 있어 피해자에게 오히려 책임을 묻는 사회현상과도 당연히 관련되어 있다. 이런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사회는 어느 정도 공정하고 나만 잘하면 부당한 일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공정한 세상 가설‘이 있다고 한다. 당연히 지배층에 가까울수록 이 가설을 믿는 경향이 강하다. 자신의 성공이 공정하다고 가정해야 자신이 도덕성이 훼손되지 않을테고 성공 역시 정당한 것이 될테니 당연한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을 부정적으로 보며 나와 선을 긋고, 사회 정의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무화시킨다. 우리 사회에서 지금 미투참가자들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을 보라. 피해 예방에 애쓸것이 아니라 가해 예방에 애쓸 일이다.


이 책의 가장 독특한 시각 중 하나는 이른바 진보적인 사람들의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것이다. 유기농 식품의 섭취 및 재배, 공정무역상품 구매, 친환경 여행 상품의 구매, 지속 가능한 환경을 위한 제품의 구매 등 소비 영역에서의 이 변화들은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가질까? 물론 이런 행동들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런 행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소비행위에서 도덕적 우월성을 가지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거리두기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뒤집어 생각해보자. 비싼 유기농 제품을 살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친환경이고 뭐고 도대체 해외 여행을 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말이다. 진정 환경을 위한다면 아예 여행을 안가는게 맞다. 이런 말의 의미는 앞에서 말한 소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소비에서 도덕적 우월감을 가지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결국은 계급의 문제다.

근대사회에서는 계급의 문제가 자본과 노동의 문제로 비교적 단순하게 나타났다. 누구의 눈에도 극명하게 계급 차별이 보였으니까. 하지만 이 시대 계급문제는 노골성과 은폐가 교묘히 결합되어있다. 특히나 유럽이나 우리나라처럼 살만한 나라들에서는 누구나가 중산층이며 상류층으로 역전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끊임없이 주입하고 있다. 그러므로 타인의 부당함은 나의 부당함이 될 수 없다. 거기에 나와 타자의 구별과 차별, 거리두기가 있르며 이 선을 넘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희망은 멀고도 멀것이다.

최근의 새로운 부동산법을 둘러싸고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진통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온국민이 잠재적 부동산 투기자이고 과반의 국민이 실제적 부동산 투기자인 나라에서 어떤 부동산정책도 결국 보수화되어버리지 않을까라는 의문이다. 부동산을 통한 중산층 상류층으로의 신화달성! 그 속에 내집마련이 환상이 되어버리는 빈곤층이나 이제 출발하는 청년들이 설 곳이 생길 수 있을까?

묵직한 주제에 비해서 책의 내용은 어렵지않다. 제목 때문에 얼마전에 읽은 선량한 차별주의자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일상적 미시적 차별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다면 이 책은 조금 더 거시적이고 이론적인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함께 읽을 수 있어 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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