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탁 톡톡 음매~ 젖소가 편지를 쓴대요 어린이중앙 그림마을 1
도린 크로닌 글, 베시 루윈 그림, 이상희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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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을 받고 한 번 읽어주자 마자 아이는 데굴 데굴 구른다.
줄곧 이 책을 들고 엄마 탁탁 톡톡 음매~~ 책 읽어줘라며 조른다.
저 탁탁 톡톡 음매~~라는 의성어가 아이들에게 제일 먼저 다가가는 것 같다.
의성어 하나가 그림책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완전히 실감하게 된다.

만화체에 가까운 그림체
재미난 의성어는 아이들에게 이 책을 좋아하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인 것 같다.
하지만 내용은 그리 만만치 않다.

우연히 헛간에 버려진 타자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된 젖소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농부 브라운씨에게 전달한다.
"헛간이 너무 추워요. 전기담요를 마련해 주세요"
젖소가 타자를 치다니 브라운씨는 절대 안돼 하면서 무시해버린다.
그런데 세상에 젖소가 파업을 벌인다.
우유없음.
더더욱 놀랍게도 닭들까지도 파업에 참여한다.
달걀없음.
이 상황에 놀란 브라운씨는 상황파악을 못하고 강경대응.
하지만 현명한 젖소들의 협상제안으로 협상은 타결된다.
타자기를 돌려주고 전기담요를 교환한다는 식으로...
그리고 협상의 중재자로 오리가 등장한다.
이제 젖소들과 닭들은 더 이상 밤에 춥게 지내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러면 브라운씨는 타자기를 돌려받을 수 있게 되었을까?
놀랍게도 오리들이 각성했다.
이제 농장은 탁탁 톡톡 꽥꽥~~~하는 소리로 요란하다.
오리들의 요구는?
그 기발한 요구는 책을 볼 사람들을 위해서 남겨두자.

직접적으로 너의 생각과 요구를 정확하게 제대로 말할 줄 알아라고 하는 건 얼마나 무미건조한가?
심각하고 너무나 중요한 주제를 이렇게 재미나게 표현할수 있다는게 너무 놀랍다.

그런데 큰일났다.
이 책을 본 이후 우리집 딸래미가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편지의 내용이 주로 엄마 사랑해요류가 다였다.
근데 오늘 두 개의 편지는 명백한 요구사항을 쓴거다. 
물론 타자기가 없으니 손으로 쓴 편지 하나와 내 핸드폰 문자로 날아온 편지다.

첫째, 핸드폰 문자 - 엄마 일어나 언제까지 잘거야 이 잠꾸러기야
둘째 손으로쓴 편지 - 엄마 컴퓨터 더하고 싶어

배운걸 바로 써먹는 딸래미를 기특하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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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7-01-08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이 책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죠? 저도 자주 읽어준 책이어요. ^^ (앞으로 또 어떤 편지들을 내밀지 흥미진진해지는데요? -.-)

sooninara 2007-01-08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운것은 써 먹자...좋은걸요.
우리아이들은 핸드폰 문자 못 보내는데...대단하네요.
아영엄마와 같이 저도 앞으로의 편지가 기대가 되네요. 요구사항이 엄청 많아질듯..

바람돌이 2007-01-08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오늘 받은 편지는요. "못난이 공주아니야 엄마에게, 권예린 공주가"라는 편지였습니다. ^^
수니나라님/아이들이 기계에 익숙해지는 과정은 정말 경이롭습니다. 배우겠다고 생각하면 순식간이네요. 핸드폰 가지고 노는걸 워낙에 좋아하는지라 요즘은 저도 모르는 핸드폰의 기능들을 찾아낸답니다.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해요.

울보 2007-01-08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로 요즘 아이들 너무너무 빠르다니꺼요,,

바람돌이 2007-01-08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울보님. 어떤 면들은 정말 따라잡기도 힘들정도라니까요? ^^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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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유대인 학살이냐? 아우슈비츠냐?라고 어떤 사람은 빈정거린다.
그것은 기막히게 또 정신대냐? 그 과거에 좋지도 않은 얘길 뭐하러 자꾸 하냐?는 말과 너무나 똑같다.
후자의 말은 내가 재직하던 학교의 모 교장에게서 직접 들었던 말이다.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 귀막고 눈먼 인간들에게 묻고 싶다.
제대로 들어봐준적이 한 번이라도 있냐고?

쁘리모 레비는 우리에게 전혀 익숙치 않은 이름이다.
이탈리아 사회에 정착해 섞여 산지가 워낙 오래되어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건 쌍커풀이 있냐 없냐의 차이정도밖에 안된다고 생각하던 청년이 그다.
그 차이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이탈리아 북부에 진격한 독일군은 바로 그 사소한 차이 때문에 이 젊은이를 아우슈비츠로 끌고 간다.
아우슈비츠라는 逆유토피아에서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자에 속했다.
더더욱 운좋게도 돌아갈 곳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많은 유대인과는 달리 그는 정든 고향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후의 그의 삶은 자신이 겪은 것을 증언하기 위한 삶이었다.
그것은 복수도 아니었고 원한도 아니었다.
그의 고민은 늘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데 가있었다.
그는 독일인을 이해하고 싶어했다.
이해하지 못하면 미워할수도 벌을 줄 수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인간의 내면, 문화 속 어디에서 그런 잔혹함이 터져 나올수 있는지를 알고싶어했다.
그것만이 진정한 아우슈비츠의 끝을 낼수 있는 길이라 믿었기에....

하지만 끝내 그는 그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다.
아우슈비츠는 사실 그 이전 제국주의 국가들이 모든 식민지에서 행하던 폭력의 반복이었다.
다만 유럽밖을 대상으로 하던 폭력이 유럽 내부로 향해졌다는 차이일뿐....
또한 그러한 제국주의적 침략과 인간말살은 지금도 계속되어지고 있다.
따라서 아우슈비츠는 끝나고 싶어도 끝날수가 없는 것이다.
거기다가 아우슈비츠라는 개념은 이제 오히려 새로운 폭력의 상징이 되기까지 한다.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모든 폭력에 대해 정치적 면죄부를 부여하는 말도 안되는 역할까지 담당하면서...

폭력의 가해자에게 보편적인 인간평등의 개념은 구호일뿐이다.
그러나 피해자들에게는 다르다.
인간이하의 극한을 경험한 사람들은 오히려 바로 그 개념을 구원할 역사적 책임까지 떠맡아버린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인간이하로 떨어졌다 살아남은 경험은 평생의 악몽이 되어 그를 따라다닌다.
인간이하를 감내하고 저항을 외면함으로써 살아남은 자의 수치심. 죄의식.....

이런 피해자들에게는 어쩌면 그 악몽의 기억이 오히려 원히 생생한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밥을 먹고 사랑을 하고 술을 먹고 하는 일상이 오히려 꿈결같아 두렵지 않을까?
인간이 다른 인간을 그렇게 학살하고 있을때에도 어떻게 다른 한편에서는 일상이 유지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
그런 의문속에서 사는 이들의 삶이 늘 위태로울 것은 뻔한 일이다.

끝내 도달하지 못했던 질문의 대답.
단순히 학살에 가담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냈던 국민국가 전체의 문제점을 제대로 찾아내는 것.
그리고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방관과 무지 역시 역사적 책임을 져야하는 죄악임을 인지하는것.
그 어느것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시대.
몇몇 전범의 처벌과 재판으로 모든 속죄가 이루어졌다고 착각하는 시대.
그것을 자신의 면죄부로 활용해버리는 사람들의 무신경함.
그럼으로써 태연하게 똑같은 죄악을 되풀이하는 시대
저자인 서경식씨가 쁘리모 레비를 통해 보여주고자하는 우리 시대의 초상이 아닐까?

나는 가끔 내가 대한민국인이라는게 부끄럽다.
피해자에서 어느 순간 가해자로 돌변한 내 나라 사람들을 볼때...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공공연한 무시와 학대는 또 아우슈비츠냐? 또 정신대냐?라고 묻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증언에 눈돌리고 공감하지 않는 사회의 무서움이다.
서경식씨는 글은 그러한 사회에 제발 들어달라고 애원하는 듯하다.
제대로 정말 제대로 들어보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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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7-01-08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대로 정말....제대로 들어보도록 하겠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어쩌면...맨날 하던 얘기가 아니니까 '뉴스'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수많이 킬해버린 많은 사연들도 제대로 들어보고 제대로 전해야했을텐데...우리는 늘 후끈 달아오른 오늘 얘기에만 관심을 둡니다. '들어라, 제발 들어라!'라는 님의 목소리를 제대로 각인해놓아야될텐데...^^;;

바람돌이 2007-01-08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세기를 증언의 시대라고 하는데 그만큼 폭력이 심했다는 거겠지요. 우리가 그런 증언들에 좀 더 진지하게 귀기울이고 생각한다면 그런 폭력들이 좀 나아질 수도 있지 않을가 생각해봤습니다.

글샘 2007-02-11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오랜만에 제값주고 샀습니다.^^ 느긋하게 읽어봐야겠습니다.

바람돌이 2007-02-11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경식씨의 글은 천천히 음미하며 사색하며 읽기에 딱 좋은 것 같아요. 많은 고민을 던져준 책이었습니다.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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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가 비교 불가능한 '유일무비'의 사건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아우슈비츠'는 '비교가능'한 사건이다. 비교 후에 도출된 대답은 그것이 과거 인간 또는 인간사회의 제도가 보여줄 수 있었던 냉혹함과 잔인함의 극한적 실례라는 것이다.
비교하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누가 어떤 동기로 비교하는가일 것이다. 내가 '아우슈비츠'와 한국의 감옥을 상상하면서 관계지은 것은 '아우슈비츠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는 식의 언사로 나찌의 범죄를 상대화하려는 시도에 가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지만 한국의 감옥이 아우슈비츠보다 낫다는 등의 말을 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거기에서 감금되어 고문당하고 있는 당사자에게 '유일무비'하기 때문이다.-138쪽

저항의 의지조차도 전면적으로 파괴된 굴욕의 기억. 자신은 '카인'이라는 자기 고발. 증인으로 자신이 적격한지를 둘러싼 의혹(하지만 궁극적으로 '진정한 증인'은 죽은 자이며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자기 자신도 인간이라는, 수치심을 느껴야 할 종족의 일원이라는 생각..... 이렇게 몇겹으로 쌓인 수치의 감각이 자신의 몸을 갉아먹어가자 쁘리모 레비는 자신의 몸은 '심연의 바닥'에 내던진 것일까?-179쪽

왜 아우슈비츠의 생존자가 '인간이라는 수치'에 시달려야 했을까? 수치스러움을 모르는 가해자와 수치까지도 피해자가 고스란히 받아서 시달려야 하는, 이 부조리한 전도가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그가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교의를 실천하는 고덕한 성인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은 인간 이하'라는 사상에 희생된 까닭에, 그 사상을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대치해야 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독일인'도 물론 '인간'에서 예외는 아니다. 한 번 파괴된 '인간'이라는 척도를 재건하려고 하는 한, '인간'이 저지른 죄는 어김없이 그들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181쪽

나는 '아우슈비츠'가 단순하게 우리에 대한 도덕적 경종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근대에 기인하며, 지금도 현실 그 자체에 내재한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는 '일부 인간은 인간이하'라고 하는 사상, '인간은 비인간이다'라는 원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는 한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192쪽

아렌트는 그 후에 쓴 <집단의 책임>이라는 논문에서 '죄'와 '책임'의 개념을 명확히 구별한다. 그녀는 "우리 전부에게 죄가 있다"라는 호소가 현실에서는 실제 죄를 지은 자를 무죄방면하는 데 일조할 뿐이었다고 말한다. '죄'는 법적 개념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과 관련된다." 그와 다르게 정치 공동체의 성원이라면 누구나 짊어져야할 , 정치적 의미에서의 '집단적 책임'이 있다. 바꿔 말하면 '독일인'이라는 집단 중에서 '죄'를 지은 개인은 있지만 '독일인' 전체에 '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독일인 전체의 죄'라는 생각은 오히려 죄를 지은 개인을 은닉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독일 국민이라면 누구나 독일이라는 정치 공동체의 행위에 '집단적 책임'이 있는 것이다. -211쪽

증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증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편'의 사람들이 그것을 거부하고 있을 뿐이다. 그로테스크한 것은 '이쪽'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는 '인간'이라는 이념이 보편적으로 공유된 단순 명쾌한 세계가 아니다. 단절되고 금이 간 세계다. 여기에서 '인간'이라는 말은 단절을 숨기는 미사여구일 뿐이다. 그렇더라도 단절 속에서 온몸으로 떨쳐 일어난 증인들이 '인간'의 재건을 위해서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이편'의 사람들은 보신이나 자기애때문에, 천박함과 나약함 때문에, 상상력의 빈곤함과 공감대의 결여 때문에 증인들의 모습을 바로 보지않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장 아메리도 쁘리모 레비도 자살했다. 김학순 할머니는 1997년 12월 16일 이 세상을 떠났다. 폭력의 세기를 증언한 산증인들은 전 세계에서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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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의 시의 숲을 거닐다 - 시에서 배우는 삶과 사랑
천양희 지음 / 샘터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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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소설이나 수필같은 산문과는 달라서
시집 한 권을 다 읽고 그 중에 나의 마음을 울린 시가 단 한편이라도 있다면 그 시집은 내게 최고의 책이 된다.
어려운 말로 뭐라 하는 평론가의 말이 그다지 맘에 들어오지 않는 분야가 시이다.
시란 그야말로 인간의 마음을 위로하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며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을 두드리는 글이기 때문일게다.

그런 시의 숲속에서 사는 이는 가난해도 고통스러워도 행복할 것이다.
천양희씨는 시의 숲에서 건진 아름다움들을 시인의 이야기와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담담히 풀어내고 있다.
물레에서 실이 자아져 나오듯이 술술 풀려나오는 시들의 이야기는
그 물레를 젓는 이의 노동을 잊게 한다.
그저 쉽게 마음 편하게 시의 숲으로 이 실을 따라 가만 가만 따라오세요라는 속삭임이 들리는 듯하다.

그 수많은 시인들은 어떻게 그렇게 하나같이 삶이 고통스러웠을까?
삶의 고통을 알지 못하면 시인이 될 수 없는걸까?
고통속에서 탄생한 시만이 다른 이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는 것일까?
사람 하나의 마음을 사로잡는게 온 우주의 진리를 깨닫는만큼의 어려움이라는 것을 안다면
평범하고 안이한 삶에서는 다른 이의 마음을 휘어잡는 글이 나오기 힘든거겠지....
그래서 시인은 그냥 되는게 아닌가보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삶을 고민하고 싸우고 살아간 자만이 그런 영광을 누릴 자격을 갖게 되는 거겠지...

나같은 범인은 그저 그런 시인들의 시 한자락을 만난 것으로 고마울 따름이다.
시의 숲에서 시인을 만나고
삶의 고민들을 만나고
잊지 말아야 할 것들. 싸워야 할 것들. 보듬어 안아야 할 것들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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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순의 천일야화 1~6권 박스 세트
양영순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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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순이라면 자동적으로 누들누드가 떠오른다.
너무 기발해서 쇼킹할 정도였던 그의 첫 작품이 너무 대단해서일까?
그 뒤에 나온 작품들은 다 그냥 그만 그만했다.
결국에는 굳이 찾아읽고 싶은 생각이 슬며시 사라지는....

그런 양영순이 아라비안 나이트를 모티브로 <천일야화>를 냈다.
좀 궁금해졌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그 방대한 이야기들을 양영순은 어떻게 버무려냈으려나?
아라비안 나이트의 그 에로틱한 분위기를 양영순이라면 제대로 살려낼수 있지 않을까?
누들누드의 그 작가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런 맙소사!!!
작가는 나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렸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무슨.....
딱 초반의 기본적인 설정만 빌려왔을뿐 완전히 새로운 창작이다.
세라자드의 아니 양영순의 이야기속에서 새롭게 창조된 천일야화는 완전히 새로운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라비안 나이트 원작이 내포하고 있는 주제의식과는 묘하게 만나고 있다.
인생의 아이러니!
인간의 탐욕이 낳은 불행과 고통!
신과 인간과 마신이 넘나들며 이루어내는 슬픈 군상들.....
운명의 연쇄속에서 빠져나올 수없는 존재의 슬픔....

1,2권에서는 뭐 그런대로 볼만은 하군 하는 수준이었다면
마지막 4,5,6권의 에피소드들이 압권이었다.
주나이드라는 마신과 인간사이에서 태어난 자의 운명은 인생의 아이러니를 너무나도 절실하게 표현함으로써 내내 마음이 아픈 이야기였다.
마지막 자신은 전혀 모르는 존재의 간절한 염원에 의해 자신의 생이 유지되고 있다는 에피소드 역시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였다.
뒤로 갈수록 에피소드들은 슬프고도 마음을 울린다.
어디에도 해피엔딩은 없다.
주인공인 세라자드와 왕의 운명 역시 해피엔딩은 없다.
어쩌면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비극으로 결말짓는 것이 그런 결말을 예고한 것이겟지만
그럼에도 원작의 해피엔딩을 알고있던 나는 적어도 세라자드만은 행복해지기를 바랫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건 이 책의 전체 구성으로 보아 틀린 결말일것이다.
마지막 세라자드의 변신 역시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니겠는가?

누들누드라는 단편만화의 부문에서 우리나라 만화계에 하나의 큰 획을 그었던 작가 양영순이
이제 장편만화의 영역에서도 자신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앞으로가 더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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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오 2007-01-06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만화 살까말까 엄청 고민했었는데... 결국 쿠폰 줄 때 못지르니 이제는 너무 비싸군요.. 저랑 취향이 비슷한 님.. 어떠세요? 제게 권할만 하신가요? ^^;;

마노아 2007-01-06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펌푸질! 마구마구 땡기는군요!!!

바람돌이 2007-01-07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지금도 3천원 쿠폰 주는데요? 그래도 비싸긴 하군요. 사실 저는 대여점에서 빌려본지라.... 마지막 4권부터 6권은 정말 좋아요. 저는 옆지기님이랑 두분이서 같이 봐도 좋을 것 같은데... 역시 책값이...ㅠ.ㅠ
마노아님/재밌어요. 이렇게 좋은 만화는 사서 봐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자금 압박이 장난 아닙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