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테오도어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시가 존재할 수 없다고 했지만, 참상 속에 나비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세상을 좋게만들기 위해 애쓰는 우리는 세상의 좋은 것을 맛보면 안 되는것일까? 혁명가들과 활동가들이 줄곧 스스로에게 던시고 있는질문이다. 케이스먼트는 대답한다. 좋은 것을 맛보자. 청옥색 &유황색 나비를 잡으러 다니자. 강에서 수영을 즐기자. 일기를 쓰자. 정의를 위한 투쟁이라는 끝없는 과업에는 휴식의 시간이 필요하다.  - P104

남성성은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인종이나 제국이라는 요소보다 훨씬 중요했다.
는 것, 남성성 개념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재정의가 가능하리라는 것을 케이스먼트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당대의 반응은 분명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는 공무와 성애를통해 권위 스펙트럼의 양극, 곧 제국의 권위와 침실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있었던 동시에 남자라는 생물체를 다양성을 가진 존재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잔혹하면서 더 취약한 존재로, 더 달라질 수 있는 존재로 재창조하고 있었다. 아일랜드는 혁명 이후지금까지 교회와 정부가 주도하는 성(性) 보수주의로 유명세를떨쳐왔다. 케이스먼트가 당대에 벽장 안의 게이였듯 아일랜드에서는 지금도 대부분의 게이가 벽장 안에 숨어 있다. 라고 더블린의 한 레즈비언 시인이 나에게 말하기도 했다.
- P117

리와 패디에게 걸인의 이야기를 들려준 노인이 자기가 어렸을 때 스키베린에서 그런 일을 입에 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고 한 것처럼, 대기근을 입에 담는 사람들은 대기근을 직접 겪은 이들이 아니라 대기근의 참상에 경악한 목격자들이나 대기근을 정당화하려고 애쓰는 위정자들이었다. 대기근의 목격자들이 끊임없이 언급하는 요소 중 하나가 침묵(죽은 사람들의 침동, 죽은 사람들을 묻고 홀로 살아갈 힘이 없었던 사람들의 침묵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유령의 몰골로 길 닦기 또는 돌 깨기 같은 구호사업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의 침묵)이다. 대기근의 역사를 발굴하고자 했년 어느 19세기 역사가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 아일랜드 귀족들로부터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대기근 이후로 몇 년간 거의 모든곳에 만연해 있던 것, 그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섬뜩한 느낌을안겨주었고, 그들로 하여금 이 나라가 겪은 불행을 가장 깊게느끼게 만든 것은 바로 그 지독한 이례적인 침묵이었다는 이야기였다." 트라우마는 침묵의 형태로 대물림된다. 침묵의 소리를 듣는 법을 알게 되기까지 몇 세대가 걸릴 수도 있다.
- P134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불구가 되고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목숨을 구한 사람, 참혹한 죽음의 틈에서 부활한 사람은 누구일까? 항상 같은 길을 도는 떠돌이, 항상 같은 곳을 떠도는 떠돌이는 누구일까? 다리가 불편한데 걸어 다니는 것이일인 사람은 누구일까? 달이 가고 해가 가도, 온갖 해방운동과희망이 흥망성쇠해도, 수백만 명이 해외로 떠나도, 세상은 광란의 발전과 파괴와 변화의 20세기로 바쒸어도, 내내 같은 길을 떠도는 사람은 누구일까? 리와 패디의 걸인이 그 수수께끼의 대답이었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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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11-08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 장소, 환대>를 공부하는 것도 벅찬데, 이것도 공부해야 할 목록에 넣어야 할 것 같군요. ㅋ
 

아일랜드 민족 영웅 중 한명인 로저 케이스먼트의 편지 중
자기가 사는 세계를 벗어나지 않고 내부에서만 바라볼 때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한걸음 떨어져 외부에서 더 잘조이는 일들은 허다하다. 그것이 꼭 여행일 필요는 없지만 독서와 함께 여행은 나 자신을 또는 내가 사는 곳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게해주는 유용한 도구이다. 물론 애초에 자신의 창을 벗어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뭘해도 다 소용없는 이야기지만.....
케이스먼트라고 하는 이 사람이 아일랜드인들의 운명과 민족운동에 눈뜨는 계기는 영국의 관리인으로 콩고에 파견되어 벨기에 국왕 레오폴의 사적 식민지하에 고통받던-고통받던이란 표현은 정말 터무니없이 약한 표현이지만 -콩고인들의 현실을 보면서였다고 한다. 콩고인의 삶에서 유럽인이 아니라 유럽 내 식민지인으로서의 아일랜드를 자각한 것.

때때로 나의 독서와 여행이 내 삶의 양식을 그리 크게 바꾸지 못한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저 나쁜 사람이 되지는 말자라는 것 정도로 괜찮은걸까? 지금 내가 벨기에를 여행한다면 식민지 콩고인들을 처참하게 죽여가며 수확한 고무로 떼돈을 벌고 그 돈으로 건설된 지금의 벨기에 수도 브뤼셀의 도시 모습에 감탄하고 다니는건 아닐까?
어떤 계기에서든지 자신의 삶의 지형을 과감하게 바꾸는 사람들의 용감함을 존경한다. 여행을 통해 전개되는 리베카 솔닛의 사색의 발길이 여전히 흥미롭고도 가슴 한쪽을 찌르는 힘이 있다.



한 때 자이르라고 불리었던 지금의 콩고민주공화국은 벨기에 국왕이었던 레어폴의 개인 식민지였다. 이것에서 그들은 원주민이 당일 고무 채취 할당량을 못채우면 손목을 잘랐고 두 손목이 없으면 그 앞에서 자식의 손목을 잘랐다. 심지어 어린 신생아를 축구공으로 사용했다는 증언까지 있다.

나는 오랜 세월 아일랜드를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내 심장, 내 머리를 고향으로 삼은 모든 감정, 모든 생각으로부터 단절된 채 그저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고, 내가 새 의무를 하나씩 완수할 때마다 내 모습은 영국인이라는 이상에 확실하게 가까워져갔습니다. ] 나는 제국주의자였습니다. 대영제국의 영토를 어떻게든 확장해야 한다. 대영제국의 통치가 세상 만민에게 최선이다.
반대 세력을 쳐부수는 것‘이 정의다,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렇게제국주의의 징고(Imperialist Jingo)가 되어갔습니다. [……] 하지만 결국은 전쟁이 나에게 양심의 가책을 안겨주었습니다. 그곳콩고 밀림에서 레오폴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구제 불능의 아일랜드인이라는 나 자신의 정체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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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장 없는 여행기라니 하다가 초판 작가 서문의 ˝여행은 마음의 발걸음이기도해서, 다른 장소에 가면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 나는 이 여행에서 내 마음의 발걸음도 한번 따라가보고 싶었다˝라는 구절을 되짚어본다. 여행기라기보다는 여행을 연결점으로 한 작가 내면의 사색과 생각의 행로를 그리는 에세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 훌륭한 문장과 생각들이 너무 자주 등장하고, 내가 가보지않아 모르고 역사도 잘 모르는 곳이라 인터넷 검색을 끊임없이 하게 하는 책이라 진도는 더디다. 하지만 그 시간이 또 작가의 말을 한번 더 곱씹게 하는 시간을 주기도 한다.

나는 모르몬교 신도들도 좋아한다. 미국의 서부 이민자들 중에 북쪽 사막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밖에 없다. 아니, 미국의 서부에 정말로 정착한 사람들은 그들밖에 없다. 그곳은 새로운 약속의 땅이라는것, 그곳에 온 자신들은 노예의 사슬을 끊고 탈출한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이 그들의 판타지였던 만큼, 그들의 유타는 1846년 이래 오랫동안 구약의 세계, 옛 세계의 합판을 덧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기에 서부로 온 백인들 중에서 그곳에정착해 그곳을 고향으로 만든 사람들은 그들뿐이었다.
- P19

산에 오르는 건 산 밑을 내려다보기 위해서가 아닐까. 1년 동안 집을 떠나 멀리까지 돌아다닌 적이 있다. 여행이몸의 위치뿐 아니라 기억의 위치, 상상의 위치를 바꾸어놓는다.
는 것, 처음 가본 곳들, 몰랐던 곳들이 주로 망각 속에 묻혀 있는 묘한 연상들과 욕망들을 끄집어내준다는 것, 그러니 여행자가 가장 많이 걷게 되는 길은 마음의 길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실감했다. 여행은 내가 나라고 생각지 않았던 나를 발견할 기회가 되어준다. 나의 무너지는 정체성이 내가 가보고 싶은 땅으로이어지는 것이 여행이기에.
- P32

관광객들이 문화에 미치는 영향이 침입자들이 미친 것처럼 노골적이지는 않다해도 어쨌든 문화에 독특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침입자들과마찬가지다. 관광지에 가는 공식적 이유는 이국적 문화, 상이한문화, 예전의 문화를 구경하는 것이지만, 관광지가 된 곳에서는새로운 경제가 출현하고 결국은 관광객 문화라는 림보가 만들어진다. 관광객이 보러 오는 곳이 관광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곳이 된다. 관광 사회학자 딘 맥캐널(Dean McCannell)은 제3세계관광산업의 산물인 호텔 리조트 단지를 준군사적 점령지(글자6그대로의 침입)에 비유하기도 했다.
- P47

 관광산업이 현지의 문화와 역사를 관광객의 입맛에 맞도록 각색해서 공연하는 연극이라면, 이미 거대하고 점점 더 거대해지는 관광산업은 전 세계를 일련의 연극 무대로 바꾸어놓을 위험이 있다. 관광객의 손은미다스의 손과 정반대라서, 관광객이 찾아다니는 것은 진정성과 이질성이지만, 관광객의 손이 닿은 것은 진정성을 잃고 동질화된다.
- P48

크롬웰 이후에 아일랜드로 건너온 조부모를 둔 그(조나단 스위프트)가 영국인인가 아니면 아일랜드인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결정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확연한 사실이라기보다는 욕망과 정치다. 영국인과 아일랜드인 둘 다였다는 것이 가장 정확한 대답일 듯하다. 나고 자란 곳은 아일랜드였고, 청년기를 보낸 곳은 영국의 문학적, 정치적 동인사회였고, 인생 후반기를 보낸 곳은 고향 아일랜드였다. 어느나라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고 안락과 양심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던 그는 어느 나라에 있든 다른 나라 사람 같은 데가 있었던 것 같다.
- P56

유머는 식인을 아일랜드의 빈곤에 대한 합리적 해법으로 제시함으로써 기득권 세력의 착취 방식들이 본질적으로 식인과 다르지 않음을 까발리는데 있다. 유머를 모르는 사람들은 대개 기성 질서의 수혜자들이었고, 유머는 언제나 그 간극을 간파할 수 있는 사람들의 놀이이자 연장이자 무기였다. 더블린에서 바라본 세상은 비극적, 영웅적, 감상적일 때가 많았지만, 뼈 아프게 웃긴 경우도 있었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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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그곳은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사용했을까.

 근대 건축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보통 사람들의 삶, 그것을 공간적으로 넓히면 근대건축의 사회문화적 의미가 될 터이고, 다시 시간적으로 늘려 현재에 이르면 화석처럼 축적된 장소성이 될 터이다. -5p

 

건축이란 아무리 멋있어도 거기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보아가 아무리 근대건축의 성지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건 건축학도에게나 그렇지, 인간이 살 수 없어 결국 버려진 집일 뿐이다.

근대 건축물들에 관심이 많다. 아니 모든 건축에 관심이 많다. 한옥에도 관심이 많고, 서양식 근대 건축도 좋아한다. 서양의 교회나 왕궁, 민가들... 그러고보니 다 좋아하는구나. 여행 다닐 때 멋진 건물이 있으면 꼭 들어가보고 싶고, 보고싶다.

예전에 강화도 놀러갔을 때는 강화도에 있는 성공회성당이 잠겨 있어서 민폐임에도 불구하고 담당자분한테 전화까지 해서 불러내 내부안내를 받았더랬다.

건축의 어떤 부분이 좋은걸까?

내가 뭐가 좋은지도 잘 모르는 얼치기 건축 매니아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사람이 빠진 건축이야기는 관심이 안간다는거다.

사람이 살고, 사람의 손길이 가고 그들의 이야기가 있는 곳을 좋아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내게는 정말 호기심이 확 땅길 수밖에 없는 책이었다.

책 소개를 읽으면서 근대건축과 근대소설의 콜라보라니.... 아 이렇게 절묘할 수가!

소개 그대로 이 책은 근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100여년 전 경성의 온갖 건축물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건축을 소개하고 있다.

가장 유명한 단편 운수좋은 날의 김첨지의 경우, 그와 그의 가족들이 도시로 올라와 전전했을 공간과 마지막 공간인 행랑채의 모습과 환경을 서술하는 식이다. 실제 소설을 읽을 때보다 더 이 시대 하층민들의 삶의 고통이 진하게 전해져 온다.

근대 건축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라는 저자의 말대로 소설과 공간을 오가는 서술은 아주 흥미진진해서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즐거운 책읽기 시간이었다.

 

이태준의 <복덕방>, 채만식의 <태평천하>, 박태원의 <천변풍경><방란장 주인><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성탄제>,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 현진건의 <피아노>, 이기영의 <고향>, 강경애의 <인간문제>, 김사량의 <천마>, 이 책에 동원된 근대소설들이다.

읽은 책도 있고 제목조차 처음듣는 경우도 있지만 소설이란 것이 당대를 가장 리얼하게 그려낸다는 걸 생각하면 굳이 작품을 읽지 않았더라도 상관없다. 물론 위 작품들을 다 읽었더라면 책을 읽는 재미가 더 커졌으리라는건 분명하지만.....

 

1907년 8월1일 아침, 서 참위 대대는 도수훈련을 한다는 명령에 따라 맨손으로 동대문 훈련원(지금의 국립의료원 훈련원 공원 터)으로 갔다. 그러나 그것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키려는 일본의 속임수였다. 이미 일본군 부대는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채 훈련원을 이중·삼중으로 포위했고, 대한제국 군인들은 졸지에 치욕의 해산식에 참가하게 되었다.(133p)

 

 

이태준의 <복덕방>에 등장하는 서참위는 1907년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 출신이다. 그는 저 치욕의 해산식에 멋도 모르고 참가했다가, 누구는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떠나고, 누구는 의병이 되고, 누구는 황실 근위대에 남을 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복덕방을 시작한다. 이런 서참위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당시 새롭게 떠오르던 도시형 한옥이나, 서구문물이 들어오면서 상류층의 새로운 부의 상징으로 떠오른 문화주택(서구식 벽돌집들이다.)을 만나게 되고, 이런 새로운 주거형태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태가 펼쳐진다.

도시형 한옥을 사서 첩살림을 하는 이, 영감에게서 집을 뜯어내고 연애는 따로 하는 첩, 부모의 재산으로 무위도식하면서 문화적인 삶을 가장하기 위해 문화주택을 사고 그 주택을 완벽하기 위한 아이템으로 피아노를 들이는 젊은 부부(당연히 피아노는 칠줄 모르므로 먼지만 쌓여간다.). 당대 최고의 문화예술 공간이었던 부민관으로 남도소리공연을 들으러 가면서 없는 사람 등이란 등은 다 쳐대는 쪼잔한 영감. 무성영화를 상영하던 우미관에서 활동사진 속 드레스 입은 무용단원이 인사를 하자 그 무용수의 인사를 받기 위해 어정쩡하게 일어나는 갓 쓴 노인들.... 이 시기 다방과 카페가 다르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다방은 차를 파는 곳, 카페는 여급의 술시중을 받으면서 술을 파는 곳이었단다. 카페의 여급들, 시골에서 올라온 공장의 여공들, 한몸 누일 공간이 없어 천변에 토막집을 짓고 살던 사람들....

하 이런 사람의 얘기가 공간과 만나면 그대로 그림처럼 100년전이 떠오른다.

 

 

명월관은 1914 인사동 이완용 저택( 순화궁) 빌려 지점을 내고 집에 있던 태화정의 이름을 따서 태화관(지금의 태화빌딩 자리)이라고 불렀다5 뒤인 3 1일에는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모여 3·1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명월관 광화문 본점은 의문의 대화재로 전소되고 돈의동(지금의 피카디리 1958 자리)으로 자리를 옮겼다.(184p)

 

태화관이 인사동에 있던 청요리집이라는 것만 알고있었는데 그 기원을 보니 기가 찬다. 민족대표 33인의 고민을 이해하기도 하지만 한 건물이 친일파 거물의 저택에서 요리집으로, 독립운동의 기념비적인 장소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김두한과 관련된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종로의 우미관이 무성영화시대 조선인들과 함께 울고 웃던 조선인의 공간이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나운규의 <아리랑>을 상영할 때 변사가 어찌나 민족적 울분을 실감나게 묘사하는지 일제 경찰이 상영을 중지해야 했다는 에피소드에서 이 시기 우리 문화의 한 단면과 사람들의 마음을 짚어보기도 한다.

일제가 문화공연장으로 만들었던 <부민관>건물은 서울시 의회로 남아있지만, 대부분의 이 시절 건물들은 개발의 과정에서 사라져갔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남았다.

 

100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인력거꾼  첨지는 택시운전사나 택배기사로삼청동꼭대기 사글세방의 박준구는 옹색한 고시원의 취업준비생으로여급 영이와 순이는 무슨무슨 방의 도우미로그들의 직업과 공간은다양하게 변했지만 본질적으로는 100 전과 어딘가 닮은 모습으로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 P272

 

 

이 작가분에 대해 관심이 확 생겨 검색해보니 아직 많은 책을 쓴건 아니고 요 2권이 검색된다.

다행히 나의 전작주의에 아주 적당한 숫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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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는 행랑살이나 셋방조차 구하지 못한 빈민들이 수두룩했다. 그들은 날품팔이, 공사장 막일꾼, 행상으로 연명하며 시내와 교외를 가리지 않고 제방, 하천변, 다리 밑, 산림의 공한지, 관유지, 사유지에 움막이나 토막을 짓고 집단으로 거주했다. 움막은 풀이나 짚으로 지붕을 이어 조그맣게 지은 것이고, 토막은 땅을 파고 위에 거적을 얹은 다음 흙을 덮어 추위나 비바람만 가릴 정도의 집이었다.
토막민에 관한 기사는 신문이나 잡지에 심심찮게 나왔다. 상왕십리에 사는 어느 할머니는 반쯤 쓰러진 컴컴한 토막에서 열다섯 살손자와 단둘이 살았다. 살림살이라곤 귀 떨어진 항아리 한 개, 쭈그러진 양철 대야 한 개, 석유 한 상자였다. 다 팔아도 오십 전이 못 된다고 했다. 그런 곳에서 할머니는 양철 쓰레기통을 줍는 손자와 실낱같은 목숨을 이어간다고 했던가. 13 - P49

과연 그랬을까? 명창대회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윤 직원은 경성에서 하는 명창대회라면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날 윤 직원이 명창대회를 보는데 쓴 돈은 95 전이었다. 춘심이를 데리고 정상적으로 봤으면5원은 썼을 것이다. 윤 직원이 별난 취미를 즐기려고 부민관을 오가는데 여러 사람이 손해를 봤다. 있는 사람이 더 무섭다고, 만석꾼에다 은행에 10만 원을 예금한 윤 직원이 쉽게 등쳐먹는 상대는 언제나만만한 약자들이었다.
- P90

그러나 사람 욕심 끝이 없다고, 점점 못마땅한 것이 하나둘 늘었고 그 불만은 고스란히 대복이에게 쏟아졌다. 국악방송이 없는 날이면 윤 직원은 왜 날마다 나오는 소리를 느닷없이 못 나오게 하느냐며대복이를 쥐 잡듯 잡았다. 물론 대복이는 그때마다 열심히 설명했다.
"방송국에서 그날 프로그램을 다르게 정했으니 집에 앉아서 라디오를 아무리 주물러도 남도소리는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요."
"법이라께? 그런 개 같은 놈의 법이 어딨당가? 어떤 놈의 소리가엊저녁까지 들리던 게 오늘 갑자기 안 들리고? 기생이랑 광대가 다급살 맞아 죽었다덩가?"
- P102

활동사진이 조선 대중에게 널리 공개된 것은 1903년 동대문 한성전기회사 기계 창고에서였다. 특별한 주제도 없이 구미 각국의 풍경이나 관광지, 춤 같은 것을 50초 정도 보여준 것에 불과했지만 생전처음 보는 조선인들은 그저 놀랍고 신기할 뿐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설렁탕 한 그릇 값을 내고 보러 가서 화면이 나올 때마다 놀람과충격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기차가 역에 들어오는 장면이 나오면 진짜 기차가 눈앞으로 튀어나오는 줄 착각하고 비명을 질렀고, 드레스입은 여자 무용단원이 인사하는 장면이 나오면 갓 쓰고 도포 입은영감들이 그 절을 받으려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 P119

 북촌에 활동사진 전용관이 생긴 것은1912년 우미관이 처음이었다. 우미관은 벽돌로 지은 2층 건물로 관람석에 긴 나무 의자를 두었는데, 빽빽이 앉으면 1000명까지 들어갔다. 우미관은 조선인 변사만 두고 조선말로 무성영화를 해설하는 상설 영화관으로 운영되었다. 종업원도 모두 조선인이었고, 일본인 주인은 일체 표면에 나서지 않았다. 겉으로만 보면 조선인의, 조선인에의한, 조선인을 위한 영화관이었다.
- P120

1907년 8월1일 아침, 서 참위 대대는 도수훈련을 한다는 명령에 따라 맨손으로 동대문 훈련원(지금의 국립의료원 훈련원 공원 터)으로 갔다. 그러나 그것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키려는 일본의 속임수였다. 이미 일본군 부대는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채 훈련원을 이중·삼중으로 포위했고, 대한제국 군인들은 졸지에 치욕의 해산식에참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 훈련원에 도착하지 않은 대대가 있었다.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 1200여 명, 그들은 박승환 대대장의 자결을도화선으로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꺼내 시가전을 벌이며 봉기했다.
남대문에서 서대문에 이르는 길이 피바다가 될 정도로 치열하고 처절한 싸움이었다. 그때 이충순은 서소문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체포당하기 직전 자결했다.
- P133

나운규의 아리랑>이 상영되었을 때는 변사가 나라 잃은 젊은이의 슬픔을 얼마나 절절하게 해설하는지그 자리에 임검 나간 일본 순사가 변사를 무대에서 끌어내린 적도있었다.
발성영화는 그런 즉흥적 변주의 맛도 짜릿한 긴장감도 없었다. 발성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은 너무 바쁘고 피곤해졌다. 영어, 불어, 독어 등 원어 음향이 쾅쾅 나오는데 일본어 자막은 독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극장에서는 발성영화에 변사 해설을 붙였다. 그 결과는 끔찍했다. 관객의 귀는 동시에 떠들어대는 원어 음향과 해설자 설명으로고막이 먹먹해졌고, 관객의 눈은 영화 장면과 알지도 못하는 일본어자막 사이를 정신없이 오갔다. 그런 모습을 보고 심훈은 조선의 영화팬처럼 가엾은 존재가 없다며 개탄했다.  - P143

그러나 식민 도시 경성의 다방은 낭만적인 문화공간만은 아니었다. 다방은 갈 곳 없는 예술가들이 하루 대부분을 소비하고, 고학력실업자들이 피곤한 얼굴로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벽화와 금붕어‘라는 유행어가 생겨났다.
"벽화는 차 한 잔을 시켜놓고 두세 시간이 넘도록 그림처럼 앉아 있는 사람을 말했고, 금붕어‘는 ‘벽화와 반대로 하루 종일 이 다방 제다방을 돌아다니며 물만 마시는 사람을 일컬었다.  - P156

구한말 서양인을 통해 들어온 커피가 대중에게 선보인 것은호텔 다방에서 커피를 팔기 시작하면서다.
개항 직후 일본인이 인천에 세운 대불호텔, 정동의 손탁호텔,
소공동의 조선호텔 다방이 대표적이었다.
서양식 건물 호텔에서 소비되는 수입품 커피는 상류층의사교생활과 선진적인 서구 문물을 상징했다.
- P160

영이는 안방에 누워 마음속으로 그동안의 원한과 증오를 순이에게 쏟아냈다. 내일 아침 순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없이 비웃어주고 싶었다. 영이는 예전에 자신이 그랬듯 내일 아침에 순이가 사내를 졸라 가족에게 자장면을 시켜줄지 궁금했다. 그때 순이는 자장면을 더럽다며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영이는 내일 보란 듯이 자장면을 맛있게 먹을 작정이었다. 영이는 곁에 누워 있는 부모의 얼굴을살펴보았다. 지금 건넌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뻔히 알면서도부모는 놀라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영이는 갑자기 한기가 들었다.
‘이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영이는 베개를 고쳐 베고 눈을 감았다. 여윈 뺨 위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너마저 집안 식구에게 자장면을 해다 주게 됐니? 너마저, 순이야.
- P177

명월관은 1914년 인사동 이완용 저택(옛 순화궁)을 빌려 지점을 내고, 그 집에 있던 태화정의 이름을 따서 태화관(지금의 태화빌딩 자리)이라고 불렀다. 5년 뒤인 3월 1일에는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모여 3·1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두 달 뒤 명월관 광화문 본점은 의문의 대화재로 전소되고 돈의동(지금의 피카디리 1958 자리)으로 자리를 옮겼다.
- P184

9년 먼저 준공한 <동아일보> 사옥은 대지면적 400평, 건축면적140평, 연면적 470평에, 총공사비 14만 7200원이 들었다. 공사 기간은 1년 3개월이었고, 규모는 지하 1층, 지상 3층이었다. 두 사옥의 규모와 공사비를 비교하면 〈조선일보>의 물량 공세가 압도적이었다. 당시 우스갯소리로 떠돌던 〈조선일보> 방응모는 자가용, <동아일보)송진우는 인력거, 〈조선중앙일보) 여운형은 뚜벅뚜벅"이란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수치였다.
- P192

지주에게 유린을 당한 뒤 버림받고 쫓겨났다. 먼저 당한 간난이가 넋나간 듯 경성으로 흘러와 공장에 들어간 뒤 변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만난 여성 노동운동가를 통해 차츰 사회 현실에 눈을 뜨고 노동자의 자의식을 갖게 되었다. 말 못하던 짐승이 말하는 사람으로 환생한 기분이었다. 스스로 존재 의미와 가치를 깨달은 감격은 삶의 버팀목이 되었다. 간난이는 그 감동의 자존감을 선비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선비는 간난이를 따라 인천 공장에 가기로 약속했지만 아직 간난이가 노동운동을 하는지는 몰랐다. 간난이는 자신이 대동방적에서 쫓겨나기 전에 선비가 학대받던 여성에서 단단한 노동자로 변한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간난이는 두려움보다 설렘이 앞섰다.
- P222

다. 인텔리의 껍데기를 벗겠다며 노동판에 뛰어들면서 박준구는 깨달았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복잡한 존재라는 것을,
인간의 역사에서 기술과 인문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될 수 없다는 것도. 그리고 한참 뒤, 오래전 그토록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시를쓰기 시작했다. 노동이 룸펜의 무기력을 밀어내자 시는 허무가 아니라 희망이 되었다.
- P258

은 농사꾼…. 100년 전에 살았던 그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인력거꾼 김 첨지는 택시운전사나 택배기사로, 삼청동꼭대기 사글세방의 박준구는 옹색한 고시원의 취업준비생으로, 여급 영이와 순이는 무슨무슨 방의 도우미로…. 그들의 직업과 공간은다양하게 변했지만 본질적으로는 100년 전과 어딘가 닮은 모습으로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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