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는 온몸에서 물기가 다 빠져나간 고목처럼 파삭파삭했다.
죽은 막냇동생 이야기를 할 때에도 물기 없이 덤덤했다. 하지만 해동은 아버지가 옥에서 나올 때, 죽을 때, 애간장이 녹도록 울던 고모를 눈으로 본 것 같은 착각 속에 살아왔다. 고모의 무표정은 그런 것들이 다 녹아 있는 것이었다. 하염없이 울고, 시도 때도 없이울고, 멍하니 넋이 나가고, 오랜 시간 멍했던 것들이 다 지나간 뒤에 찾아온 굳은살 같은 얼굴이었다.
- P58

"원래부터, 그게 아주 대단한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인쇄기를숨겼다가 발각된 정도라면 뭐, 큰일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그 시골에서 무슨 대단한 일을 하신 건 아닐 테니까요. 안골의이성준이건 눈티재의 이성준이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냥 사촌형이라는 작자가, 누워 계신 고모님 앞에서 말하는 꼴이 하도 아니꼬워서, 제가 속이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사내들 하는 짓이 뭐그런 것이지요."
- P232

그것을 두고 간 자도 차지한 자도똑같이 욕하는 목소리였다. 적산, 적이 남겨두고 간 자산이라는 표현에는 불을 지르고 싶은 적의와 한입에 삼키고 싶은 상반된 욕망이 뒤섞여 듣기만 해도 잠잠하던 피마저 들끓게 했다.
- P67

그런데 왜 나만? 다른 사람들은 이런 고민 따위 조금도 하지않고 잘사는데, 왜 나만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버지에이어서 나까지, 내 일도 아닌 것의 대가를 왜 내가. 나만, 치러야하는 것인지.
- P235

막걸리로 흐려진 눈을 애써 껌벅거리며, 해동은 진형을 보았다.
형제자매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는 편안해 보였다. 부숭부숭한 어머니와 억센 형제자매들은 진형의 깊은 뿌리였다. 해동이 가지지못한 그 건강하고 단단한 뿌리들을 해동에게 나누어줄 것이다.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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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은 자기들을 친밀하게 만들어주는 따뜻함을 절실히 필요로 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불신 때문에 그따뜻함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멀어지고 있다. 이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이웃 사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페스트를 옮길 수 있고 방심한 틈을 타 감염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 P231

리외는 으레 그러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것은 랑베르 자신의 문제이고 랑베르는 행복을 선택한 것이며 자신은 그에게 반대할 논거가없다고 말했다. 자신이 느끼기에 그는 이런 문제에 대해 무엇이 옳고그른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
- P237

그러는 사이에 내가 이 세상을 위해 더이상 쓸모가 없다는 사실과,
죽이는 것을 단념한 그 순간부터 결정적으로 추방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역사는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가겠죠. 그리고 내가 그 사람들을 평가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이성적인 살인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자질이 필요한데, 나에게는 그 자질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이것을 우월성이라고 할 수는 없죠. 하지만 이제 나는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기로 했어요.. 겸손을 배운 거죠. - P295

"통행증을 보여주면 방파제까지 갈 수 있을 거예요. 페스트 속에서만 사는 건 너무 어리석은 짓이에요. 물론 인간이라면 희생자들을 위해 싸워야죠. 하지만 뭔가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투쟁은 해서 뭐하겠어요?"
- P298

그러나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이 결국 이런 것이라면, 희망하는 것을 다 잃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 기억에 남는 것만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라면, 그 삶은 얼마나괴로운 삶일까. 타루가 경험한 삶이 아마 그런 삶이리라. 그래서 그는환상 없는 삶이 얼마나 황량한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희망이 없으면 마음의 평화도 있을 수 없다. 타루는 인간이 인간을 단죄할 권리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남을 단죄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없으며, 심지어 희생자도 때로는 사형집행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분열과 모순 속에서 살았고 희망이라곤 전혀 경험하지못했던 것이다. 그가 성스러움을 추구하고 인간에 대한 봉사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고 한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 P340

공포가 끝나면서 페스트도 끝이 났고, 그렇게 부둥켜안은 팔들은심오한 의미에서 페스트가 사실은 유배와 이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 P348

그것들을 바라보며 의사 리외는 침묵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페스트에 걸렸던 사람들에 대해 우호적으로 증언하기 위해, 적어도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폭력에 대한 기억을 남기기 위해, 그리고 재앙 중에 배운 것, 즉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것만이라도 말하기 위해 지금 여기서 끝맺으려고 하는 이야기를 글로 쓰기로 결심했다.
-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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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말이 옳아요. 랑베르, 절대적으로 옳아요. 당신이 지금 하려는일을 나는 결코 막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하려는 일은 내가 봐도 정당하고 좋은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것만은 말해주고 싶어요. 이 모든 것은 영웅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건 성실성의 문제예요. 비웃을지 모르지만,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성실성이 대체 뭔가요?" 랑베르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를 예로 들면, 성실성은 내 직분을 완수하는 거예요."
- P194

 페스트 발생 초기만 해도 그들은 잃어버린 사람을 뚜렷이 기억하고 그리워했다. 그러나 사랑하는사람의 얼굴과 웃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이 행복해했던 어떤 날,
이런 것들은 모두 분명하게 기억났지만, 그들이 그 사람을 다시 그려보는 바로 그 순간에, 또 이제는 그렇게도 먼 곳이 되어버린 그 장소에서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결론적으로그 시기에 그들은 기억력은 있었지만 상상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페스트가 둘째 단계로 접어들자 기억조차 희미해졌다. 얼굴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같은 이야기이지만, 얼굴에 살이 없어져 마음속에서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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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1-06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로나19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도 성실성이겠지요.
정부의 방침에 성실히 따라주는 의료진과 국민들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경제적 상황이 안 좋다 보니 정부에 항의하는 업주들의 시위가 생기기도 해요.
영업을 할 수 없으니 이해가 되어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 책을 저는 홍신문화사 걸로 오래전 읽었는데 좋은 글 뽑아 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바람돌이 2021-01-06 13:32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지금 상황과 비교하면서 보게 되더라구요. 예전에 읽었다면 지금처럼 실감하면서 읽지는 못했을것 같아요. 여러가지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일을 까뮈는 이렇게 써내려간걸 보면서 문학의 힘을 다시 느끼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 시민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여서 그들은 자신들만 생각했다. 다시 말해, 재앙을 믿지않는다는 점에서 그들은 인본주의자들이었다. 재앙은 인간의 척도로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들은 재앙을 비현실적인 것, 곧 지나가버릴 악몽에 불과한 것으로 여긴다. 재앙이 지나가버릴 때도 있지만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악몽에서 악몽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사라지는쪽은 사람들, 누구보다도 인본주의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미리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민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못한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자기들에게는 여전히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생각은 재앙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 사업을 했고, 여행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갖고 있었다. 미래와 여행, 토론을 금지하는 페스트를 그들이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유롭다고 믿었지만,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 P51

당시 용기와 의지, 인내심이 얼마나 급격히 허물어졌던지, 그들은그 수렁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해방의 날은 결코 생각하지 않고 더이상 미래도 바라보지 않은 채, 말하자면 항상 두 눈을 내리깔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고통을 숨기고 방어자세를 취하면서 싸움을 포기하는 그런 신중한 방법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하고 싶었던 의기소침한 상태는 편할 수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앞으로 다가을 재회를 상상하면서 페스트를 잊을 수 있는 수많은 순간들을 사실상포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심연과 정상上 중간에 좌초되어 매일같이 정처 없이 헤매고 메마른 추억 속에 버림받은 채, 산다기보다는 차라리 떠다니면서 고통의 대지 속에 뿌리박지 않고는 힘을얻을 수 없는, 방황하는 유령처럼 살았다.
- P91

그러나,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인데, 아무리 불안하고 고통스러워도, 또 텅 빈 마음을 견뎌내기가 아무리 어려워도, 초기에는 그래도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사실 냉정을 잃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시민들의생각은 자기들이 기다리는 사람에게로 완전히 기울어 있었다. 모두가하나같이 고뇌에 빠져 있는 가운데, 그들은 사랑의 이기적인 성격 덕분에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었고, 페스트를 생각할 때도 페스트 때문에 이별이 끝도 없이 계속될까봐 염려스럽다는 정도였다. 그래서 전염병이 한창일 때도 그들은 건전한 여유 같은 것을 누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침착함으로 착각했다. 절망감 때문에 공포심을 느끼지 않게 되었으니 불행에도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 P95

문이다. 그러면서도 질병은 곧 멈출 것이고 자기들은 물론 가족들도그 병에 걸리지 않을 거라는 기대도 여전했다. 따라서 뭔가를 반드시해야 한다는 생각은 아직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에게 페스트는 예기치 않게 찾아온 것처럼 언젠가는 떠날 불쾌한 방문객에 불과했다. 그들은 공포에 사로잡히긴 했지만 절망하지는 않았다.  - P113

초기에는 이번 질병도 다른 질병들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종교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자 향락을 떠올린 것이다. 낮 동안 사람들의 얼굴에 어려 있던 모든 불안은 뜨겁고 먼지투성이인 황혼녘이 되면 일종의 격렬한 흥분으로, 모든 시민을 흥분시키는 서투른 자유로 귀착되고 만다.
나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게 어떻단 말인가! 나 같은 인간에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죽음은 그들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하나의 사건이다.
- P145

인간은 악하지 않고 오히려 선한 존재지만, 사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간은 많이 알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는데, 그것을 미덕이나 악덕이라고 부른다.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자기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스스로 허용하는 무지의 악덕이다. 살인자의 영혼은 맹목적이며, 통찰력을 최대로 발휘하지 않으면 진정한 선도 아름다운 사랑도없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타루의 주도로 만들어진 보건대가 아무리만족스러워도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또 이런 이유 때문에 서술자는 의지와 영웅심을 침이 마를 정도로 과도하게 찬양하지는 않을 것이며, 적절한 정도로만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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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책이지만 너무 진지해서 웃기는 대목은 없더만 거의 마지막 페이지네서 빵 터졌다. 특히나 저 ‘철학적 개념이 있는‘계단이라니...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말에는 프랑스 해체주의철학자 데리다를, 1990년대 들어서는 들뢰즈를 인용하지 않으면 무식한 건축가 취급을 받았다. 『해체주의』, 『천개의 고원』, 『주름] 같은읽어도 뭔 소리인지 알 수 없던 글을 설계에 적용하고자 노력하는 학생이 많았고, 심지어 설계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 건축학과를 졸업한후에 철학과에 입학하는 학생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관념이 실재를 이끌면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해체주의의 대표적인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 Peter Eisenman(1932~)의 경우 주택 설계를 했는데 안방 침실의 방 가운데가 갈라져서 침대가 둘로 나뉜 디자인을 하여 부부가 같은 침대에서 잘 수 없거나, 건물의 모양이 필요 이상으로 기괴하게 복잡해서 복잡한 모양 틈새로 방수가 제대로 안 돼서 시공 후 비가 새는일이 많은 건물이 만들어졌다. 심지어 어떤 계단은 올라가도 막혀 있는 ‘철학적 개념이 있는 계단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 P339

그런데 건축은 어떻게 시간을 뛰어넘어, 시대가 다른 사람 간에도 소통이 가능하도록 해 주는 걸까? 건축 공간이 시간과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소통의 매개체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회화나 음악과는 다르게 건축만이 가지고 있는 소통의 도구는 비어있는 공간이 보이드공간이다 - P25

그런데 밀과 벼는 재배 방식에 차이가 있으며, 이 재배 방식의 차이가가치관의 차이를 가져온다. 일반적으로 벼농사 지역은 집단의식이 강하고, 밀 농사 지역은 개인주의가 강하다.  - P62

이런 이유에서 서양의 건축 공간은내부와 외부가 벽으로 확연히 나뉘는 공간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안에서 밖을 볼 일이 없으니 건축 디자인을 할 때에도 밖에서 건물을바라보는 시점에 더 중점을 두고 디자인하게 된다. 이것이 서양 건축의입면 디자인이 화려하게 된 이유다. 창문의 비율도 중요하고, 각종 조각으로 건축의 입면을 꾸몄다. 실내에 들어가서도 바라볼 경치가 없기때문에 그림과 조각으로 실내를 과도하게 꾸몄다.
- P74

어두운 실내에서 밖을 보면 자연은 밝고 처마 부분은그림자가 져서 어둡게 된다. 이때 녹색과 자줏빛을 채도가 낮은 차분한톤으로 칠하면 그림자 진 상태에서 칙칙해 보이고 자연과 건축의 경계가 명확해진다. 하지만 우리나라 단청 색깔처럼 채도가 높은 밝고 선명한 톤으로 칠하면 단청이 그림자에 들어가 있어도 밝은 바깥 경치와 연결돼 보인다. 나는 이런 경험을 불국사의 어느 처마 밑에서 할 수 있었다. 단청의 색깔만 보더라도 우리 선조들은 자연과 건축물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건축물이 자연에 흡수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모든것은 건물 외부에 있는 객관적인 제3자의 시각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사람의 1인칭 시점에서 디자인적 판단을 내렸음을 알 수 있다.
- P79

강수량의 차이는 농업 품종의 차이를 만들고, 품종의 차이는 농사 방식의 차이를 만들고, 농사 방식의 차이는 가치관의 차이를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건축에서 동서양의 강수량 차이는 건축 디자인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발전시켰고, 건축 공간은 행동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행동 방식은 궁극적으로 사람의 생각에도 영향을 미쳤다. 서양은 밀 농사의 혼자 농사하는 방식에 따라 개인주의 성향이 커졌고, 외부와 단절된창문 없는 벽 중심의 건축으로 바깥과 교류가 적은 성격의 공간으로 발전했다. 건축물 역시 독립된 개별적인 건축물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건축적 개인주의‘가 발전했다. 반면 벼농사는 집단 농사 방식으로 사람 간의 관계가 중요한 가치였으며, 많은 강수량 때문에 사용하게 된 재료인목재를 이용한 기둥 중심의 건축 양식은 외부 자연 환경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활양식으로 발전되었다. 강수량 차이로 인해서 서양은 독립된 개인이 중요한 사회가, 동양은 관계를 중요시하는 사회가 되었다. 두 문화의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조금 더 비교해 보자.
- P80

서양의 문화는 양식이라는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의 반복을 통해서 공간을 만들어 가는 형식이다. 이는 마치 체스에서 각각의 말들이 다른 형태의 규칙과 위계를 가지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양식 혹은 규칙을만들고 규정하기 좋아하는 것이 서양 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반면동양의 나무 기둥과 보를 가지는 구조 양식은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다만 건물은 놓인 대지의 조건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반응하면서 건물의 배치를 변화시켜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유기적이고 상대적인 공간을 연출해 왔다. 물론 여기에도 풍수지리 같은 보이지 않는 규칙은 존재했지만, 그 풍수지리라는 규칙도 물과 산과 사람의 상대적인 관계에관심의 초점이 있다. 이렇듯 동양 건축은 양식보다는 상대적인 관계를중요하게 여겨 왔다.
- P117

15세기에 들어서 삼각돛이 발명되고 난 후 공간이 압축되었고, 16세기에는 해상 무역 길을 통해서 도자기 무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17세기에는 동양의 책이 번역되어서 유럽에 전파되었다. 패러다임은 꾸준히 변화하여 그 결과 18세기 들어서는 조경 디자인에서부터 서양의 패러다임 변화의 결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픽처레스크라는 조경 디자인 양식으로 확립되었다. 픽처레스크란쉽게 설명하면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드는 정원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픽처레스크 정원 디자인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18세기 조경가 험프리 렙턴 Humphrey Repton(1752~1818)은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서 언덕이 될 수도, 평지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원을 디자인할 때,
정원 내에 위치한 개인의 시선에서 자연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렙턴은 보는 이의 위치가 정원 내 구성 요소 간의 관계를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 P186

 픽처레스크 정원을 거니는 사람들은 본인이 여러 다른 위치에서 다른 투시도적 이미지를 바라본 경험들을 바탕으로 정원의 전체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구성했다. 서양 정원 디자인에서 상대적 관계성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된 것이다. 픽처레스크 정원 디자인은 서양 문화에 있어서 경직된 기하학에서 탈피하여 상대성에 가치를 두는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점이 된아주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 P191

결론적으로 서양의 근대 건축은 기술 혁신과 동양 건축 유전자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2세대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시작을 연 사람이미스 반 데어 로에와 르 코르뷔지에라는 건축가다.
- P208

기본적으로 르 코르뷔지에의 근대 건축의 5원칙은 동양의 기둥식구조의 건축 양식이 서양에 전파되어 산업혁명의 새로운 재료인 콘크리트와 함께 만들어진 문화적 변종이라고 볼 수 있다. 누군가는 코르뷔지에의 철근콘크리트 기둥 구조가 철근콘크리트라는 재료를 사용하면 당연히 만들어지는 현상이니 동양 문화의 영향은 아니라고 말할수도 있다. 하지만 철근콘크리트 재료가 반드시 기둥 구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뒤에 나오는 루이스 칸이나 안도 다다오 같은 건축가는 철근콘크리트 재료를 기둥 구조로 사용하지 않고 벽 구조체로만 사용했다. 코르뷔지에가 철근콘크리트라는 재료를 기둥식으로 사용한 아이디어는 그의 창의적인 생각이다. 나는 그 창조적 생각이 만들어지는과정 중에 동양 문화의 영항을 받은 당시 유럽의 문화적 패러다임이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 P244

바라간은 캘리포니아 라호이아에 있는 소크 연구소 현장에서 "이 공간에 나무나 잔디 대신에 돌로 포장된 중정을 만드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소크 연구소의 입면으로 하늘을 갖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바라간은 칸에게 비움을 통해서 진정한 자연을얻으라는 가르침을 준 것이다. - P290

안도는 "건축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의 존재감을 느끼게끔 해 주는중간 장치다. 중정을 바라보면 그 안에서 자연은 매일 매일 다른 면모를 보여 준다. 중정은 집 안에서 펼쳐지는 생명의 핵이며 빛, 바람, 비와 같은 자연의 현상을 전달해 주는 도구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 P307

그의 건축은 20세기의 대표적인 재료인 콘크리트를 사용하는데, 큰 창문과 복잡한 진입동선으로 적극적이면서도 자유롭게 자연과 교류한다는 면에서는 동양적인 성격을, 벽 구조를 가지면서 기하학적으로 구획된 평면과 단면을가지고 있다는 면에서는 서양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안도 다다오는동서양 문화 유전자의 교배를 통해서 새로운 생각을 만들 수 있었다.
- P328

컴퓨터를 이용한 작업의 효율성이 높아진 점은 장점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서 ‘다양성의 소멸‘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다. 과거에는 패션, 건축, 산업 디자인 등 각종 디자인 분야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물건을 만들어 왔다. 패션은 옷감을 가위로 자르고, 바느질했으며, 건축에서는 돌을 쌓고, 나무를 깎고, 콘크리트를 부어서 건축물을 만들어 냈다. 이렇듯 각 분야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제작 방식에 근거해서 서로 전혀 다른, 다양한 결과물을 창조해 낼 수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컴퓨터에서 디자인하고, 스크린상에서컴퓨터로 만든 3차원 그림을 통해 시뮬레이션하고, 그 형태를 CADCAM(Computer Aided Design, Computer Aided Manufacturing)을 이용해서 제작하는 비슷한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다. 또한 매스 미디어의 과다한 노출로 인해 서로 점점 더 베껴 가는 과정을 통해 디자인 분야의 ‘다양성‘이 사라져 가는 추세다. 기술에만 의존하는 창조는시간이 지날수록 다양성이 사라진다. 우리는 그런 현상을 20세기 중반국제주의 양식에서 경험했다. 기술이 이끄는 획일화를 어떠한 방식으로 피하느냐가 이 시대의 중요한 화두다.
- P356

새로운 생각은 시대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크게 두가지 원리가 있다. 첫째는 제약이고, 둘째는 융합이다.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생각이 나오고, 서로 다른 생각이 융합되었을 때 새로운 생각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 둘을 하나로 묶는 공통점이 있다.
모든 창조는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변화와 새로움을 거부했던 문화는 발전을 멈췄다. 그리고 그런 문화는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다면 열린 마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자신의 불완전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신이 완전하다고 느끼는 자는 새로운 것을 만들지 못한다.  - P396

디지털과 융합될 시대는 기술이 너무 압도하기 때문에 개인이사라지고 획일화될 가능성은 더 높다. ‘과연 인간다움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새로운 생각을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인간다움이 어디에서 오는지 살펴보려면 모든 것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구별해 내는 눈이 필요하다. 앞으로사회도 변하고 가치관도 변하고 인간다움도 변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면 우리 자신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P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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