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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 하루 - 두려움이라는 병을 이겨내면 선명해지는 것들
이화열 지음 / 앤의서재 / 2021년 2월
평점 :
좋은 에세이를 읽는건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과 같다.
좋은 친구를 만나기가 그리 쉽지 않듯, 좋은 에세이를 만나는 것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젊고 어렸던 시절에는 사람을 가려 만나지 않았다.
내 맘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도 열정적으로 다가갔고, 대화를 통해 공통점을 만들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물론 대부분의 그 노력은 성공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은 다르구나로 끝났지만....
지금은 가려서 만난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에게 나의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늙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의 시간과 정성을 아낌없이 줄 뿐이다.
에세이 역시 그렇게 고른다.
얼마 전에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이란 에세이를 읽었는데, 좋은 에세이였지만 내가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작가의 책임이 아니라 이미 나는 작가가 겪고 있는 시절을 너무 오래 전에 지나와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책과 나와의 만남에도 좋은 글이어야 한다는 것 외에도 만남의 시기가 적절해야 하기도 한다.
그래서 좋은 에세이를 만나면 마치 오래된 좋은 친구를 만난 듯, 얼굴에서 웃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 책의 작가도 그런 관계의 소중함을 얘기한다.
관계의 편안함은 일종의 공기 같다. 나이들수록 친구는 자유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관계는 생물 같아서 결코 노력으로만 얻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에게 편안한 존재로 늙어가는 건 일종의 선물이다. 오랜 세월 한 사람이 겪는 변화는 누구도 점칠 수 없기 때문이다. - P158
나라면 여기에 약간의 말을 추가할 것 같다.
새로이 만난 사람 중에서도 때로는 오래 된 친구같은 편안함을 주는 인연들이 있다는 것을.....
오늘 저녁을 먹고 손에 잡은 이 책을 하루만에 다 읽어버리고는 아깝다는 생각을 한다.
처음 만났지만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편안함과 공감을 느낀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맞아, 이런 마음 알겠어. 그렇지. 아 이런 생각은 멋지네, 나랑 닮은 곳이 많은 거 같네. 아 이런 생각은 못해봤는데 내가 만약 이런 경우를 당한다면 이 말을 꼭 기억해둬야겠어"등등....
살아낸다는 것이 쉬웠던 적은 한번도 없다.
남들 역시 그러함을 안다.
며칠 전 점심을 먹으면서 직장동료가 우리가 공통으로 아는 누군가를 호명하며 "그 사람은 정말 아이들도 잘 크고, 알아서 결혼도 잘하고, 그이가 젊은 동안 재테크 -부동산인듯 - 열심히 해서 돈도 많고.... 진짜 너무 부럽다"라고 한다.
이 사람은 직장동료지만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바로 이런 얘기를 너무 남발하기 때문이다. 재미없다.
직장동료는 그 사람이 아무 걱정도 없이 너무나 편안하게 사는 듯 얘기하며 부러워하지만 실제로 그럴지는 아무도 모른다.
또한 그 부러움을 받고 있는 이가 재테크에 열중하기 위해 희생한 생활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 희생한 부분이 내가 추구하는 삶의 형태일 수 있기에 솔직히 나는 저런 얘기를 들어도 부럽지 않다.
"00씨, 자기는 부동산 재테크 한 적 있어요?"
"아니"
"할 마음은 있어요?"
"난 못하지"
"아 그건 로또를 안 사고 로또 당첨되기를 바라는 거잖아. 왜 부러워해요? 그냥 사는 방법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것 뿐인데? 00씨 먹고 살만하잖아요"(아 난 이런 쓸데없는 돌직구를 한번씩 던지는 바람에 적을 만든다. 이런 식의 대화법은 사실 상대를 변화시키거나 설득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제발 나한테 이런 얘기 좀 하지마라고 하는 일종의 경고다. ㅠ.ㅠ)
각자 즐거움을 연주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인간은 이 부조리한 삶의 희생자일 뿐이다. 유한한 삶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고통에 대한 두려움, 타인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두려움이라는 병의 백신은 자신만의 즐거움을 연주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보르헤스 시의 한 구절처럼 세월의 횡포를 음악과 속삭임. 그리고 상징으로 바꾸기 위해서..... - 저자 서문
그러므로 이 책은 작가 이화열이 자신의 삶을 연주하는 법을 보여주는 책이다.
나에게는 희열을 안겨 준 이 책이 모두에게 맞지는 않을 것이다.
또 모두에게 맞는 책이 좋은 책인 것도 아니다.
다만 작가의 삶의 연주법에서 나의 삶의 연주법을 하나라도 찾아내고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좋을 일이다.
얘기하고 싶지 않은 현실의 인간관계를 벗어나 때로는 이렇게 책을 통해 친구를 구하기도 하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1부에서는 작가의 일상이 펼쳐진다.
사실상 별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일상은 묘사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별것없는 일상은 쓰기 어려우면서도 바로 그 어려움 때문에 작가의 문장과 삶에 대한 태도가 빛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빵 만드는 사람의 기분처럼 빵가게 맛은 매일 똑같은 맛이 아니다. 하지만 단골이라면 어쩔 수 없이 가끔은 망한 트라디시옹을 감수한다. 만약 매일 완벽한 빵을 산다면 완벽한 맛에 대한 경탄은 당연함과 식상함으로 바뀔 터이니. (17쪽)
책의 첫 에세이 속 이 문장에서 나는 이 작가에게 반할 것이라는 예감을 느꼈다.
망한 빵에서 완벽한 내일의 빵에 대한 기대를 끌어올릴 수 있는 건강함이, 맛있는 빵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귀퉁이를 파먹어버리고는 그걸 탓하는 남편에게 "오늘은 진짜 더 맛있어. 얼른 먹어봐"라고 눙치는 감정의 여유가 작가의 마음이 건강함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작가는 자신이 못하는 것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난 정말 크레프를 잘 만들어. 그래서 그걸로 내 아이들을 기쁘게 해주었어라고 자신을 긍정하며, 오십견에 티타늄 이식 수술을 권하는 남편에게 "...내 어깨를 내 마음대로 하지. 그럼 당신 말 듣고 어깨를 자르겠니?"라고 당당하게 나의 생각을 말하는 그녀가 사랑스럽다.(아 참 이분은 나보다 나이가 많으시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가 사랑스럽다.)
1부의 글들에는 일상이니만큼 그녀의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근사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프랑스인과 결혼에 파리에 산다는 점 때문에 독특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호수 벤치에 앉아 구부린 등을 하고 책을 꺼내 읽는 시부모님의 모습은 나의 로망이고, 버스 정류장에서 "조심해. 내일이 바로 여성의 날이야. 성차별이라면 지긋지긋하다고. 물론 여성과 남성의 지각 능력이 다르다는 걸 반론하는 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는 노부인을 나도 만나고 싶기도 하다.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디자이너고 글을 쓴다는 환자에게 "그럼 내가 당신에게 좋은 책의 주제를 준겁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유머감각과, 비극적일 이유가 없다.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지금 방금 나에게 일어난 것 뿐이다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강함이 부럽기도 하다.
인간의 마음의 강함은 이렇게 불행을 받아들일 때 드러난다.
그렇게 그녀는 암에 걸렸고, 이제 그녀의 일상은 병과 함께 전개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책은 투병기가 아니다.
암조차도 일상으로 받아들이면서 병에 걸리지 않았으면 몰랐을 일상이 다르게 펼쳐놓는 감정과 순간들을 여전히 삶의 한 부분으로 소중히 그리고 있다.
그래서 작가의 투병기는 악착같음도 절망도 아닌 그저 삶의 또 다른 전개일 뿐이다.
아직은 모두에게 공평한 것은 결국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것이고, 앞으로도 오래도록 계속될 이 지구의 역사에서 나 하나의 죽음이 다른 죽음과 특별히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된다.
그러면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다. 죽음이 두려움이 아니라 그저 생의 한 부분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병에 걸렸을 때 오히려 삶이 생생해지는 경험은 '개나 소나 하는 운전인데'처럼 누구나 암에 걸릴 수 있고, 내가 예외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면 억울함으로 나의 삶을 소진시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녀를 수술한 의사의 말처럼 수술 이후에는 삶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삶말이다.
병이 주는 고통과 함께 인간을 갉아먹는건 오히려 병에 대한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고통의 순간 그 자체보다 고통의 순간을 미리 예견하며 닥치는 두려움, 남겨지는 자들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내가 두렵다고 아무리 되뇌어도 고통의 순간이 미뤄지는 것은 아니며, 남겨지는 자들은 그런대로 또 살아갈 것이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 두려움에 잠식되지 말고 일상을 살아가는 것, 남겨지는 자들이 아니라 함께 사는 이들로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계속 대하는 것. 그래서 항암투병 때문에 머리를 자른 그녀에게 여기서 머리가 더 빠지면 군인처럼 싹 밀면 되죠라고 미용사와 유쾌한 대화를 나누고, 엄마 어제보다 더 예뻐라는 아이의 말에 기뻐하고, 항암투병이 끝나는 6개월 뒤에 출산하는거야. 이번에는 아이가 아니라, 새로운 자신을이라고 말하는 남편에게서 위로를 받는 그런 일상을 두려움 때문에 날려버는 것은 너무 아깝지 않은가?
일상은 계속되고 그 일상속 소소한 깨달음은 언제나 찾아온다.
그리고 그 깨달음에 사실상 행복의 비밀이 있다.
작가가 인용한 레이먼드 카버의 짧은 시에 작가가 생각하는,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삶의 비밀.
단지 그것이 다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이 생에서 바라던 것을 얻었니?
응.
뭘 원했는데?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것.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랑받았다고 느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