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근대도시는 전근대적인 공간과 근대적인 공간, 그리고 한국인과 일본인의 거주 지역이 구분된 식민지 이중도시 (colonial dual city)‘였다. 도시 곳곳에는 산업화된 한국 음식, 일본 음식, 중국 음식, 서양 음식을 판매하는 공간이 자리 잡았다. - P59
메뉴 중에서 인기가 많았던 음식은 설렁탕이었다. 하지만 일부 양반 출신들과 근대적 취향을 가진 모던보이 (modern boy)와 모던걸(modern girl)은 설렁탕을 먹고 싶어도 직접 음식점에 가서 먹는 것을 꺼렸다. 양반 출신들은 여전히 계층과 남녀 구분을 따졌고, 모던보이와 모던걸은 자신들도 식민지 국민이면서 하층민을 경멸의 대상으로 여겨 설렁탕집 출입을 삼갔다. 서울의 설렁탕집 주인 중에는 이런 ‘별난‘ 고객을 위해 배달 서비스를 하기도 했다. - P60
일본에도 중국 음식점이 많이 있지만 그곳에서 우동을 팔지는 않는다. 중국 대륙과 타이완의 중국 음식점에도 우동이란 메뉴는 없다. 그런데 왜 한국의 중국 음식점에만 우동이란 음식이 있을까? 그 이유는 식민지 시기 중국 음식점에서 국수류의 음식을 일본식 표현으로 우동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 P71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음식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대부분은 제국의 음식이 일방적으로 식민지에 전파되었다는 주장을 많이 펼쳤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음식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 중에는 제국과 식민지의 지배관계가 해체된 후에 오히려 식민지의 음식이 제국으로 이71동하는 사례가 있음을 증명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커리가 그러하고, 일본의 야키니쿠와 가라시멘타이코가 그러하다. - P99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이 멸치를 식재료로 여기지 않은 반면, 일본인은 말린 멸치를 국물 요리의 육수를 만드는 데 주로 사용했다. 김복인은 일본인의 멸치 사용법을 가지고 와서 조선인도 소고기 대신에 찌개나 국에 넣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지금이야 말린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 먹거나 기름에 볶거나 육수를 내어 먹지만, 이런 멸치 식용 방식은해방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해방 이후 멸치 어획량은 날로 증가했지만 일본 수출 길이 원활하지 않았다. 1960년대부터 언론에서 멸치의 영양과 맛과 요리법을 소개하면서 멸치 소비를 장려했다. 멸치는 1970년대 이후 한국 음식의 중요한 식재료가 되었다. - P115
한반도의 식생활 역사에서 1937년부터 1953년은 중일전쟁 - 태평양전쟁 · 한국전쟁으로 인해 식량 부족 문제가 가장 심각했던 때였다. 이시기에 정권을 장악했던 조선총독부, 미국과 소련의 군정, 그리고 남북한의 정부는 식량 부족 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수 없었다. 오히려 통치자들은 식량 공급을 안정시키기 위해 앞선 정권들이 행했던 조치들을그대로 따르는 선택을 자주 했다. 조선총독부가 시행했던 절미운동, 혼식과 분식 장려운동, 대용식운동 같은 정책은 미군정기, 대한민국의이승만과 박정희 통치 시기에도 계속되었다. - P141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는 공짜가 아니었다.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와 협정을 체결할 때, 도입 농산물의 판매액을 한국 통화로 적립하고, 그중 일부는 한국에 있는 미국 원조기관의 비용으로 충당하며, 나머지는한미 간의 합의에 따라 한국의 경제개발과 군사력 지원에 사용하기로약속했다. 미국의 밀 생산 농민들은 페기할 뻔한 남아도는 밀을 한국같은 저개발 국가에 판매하여 수익을 올렸고, 미국 정부는 원조 명분을내세워 한국 정부와 군사적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구축했다. - P146
그러나 1960년대 공장제 식품과 1970년대 히트상품 중 대부분은일본의 공장제 식품을 모방한 것이었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의 외교관계가 회복되기 이전에는 한국의 많은 식품회사가 비합법적인 방법으로일본 식품을 모방했다. 한일수교 이후에는 합법적으로 일본의 제조 기술을 사들여와 한국 시장에 제품을 내놓았다. 1960~1970년대 한국의식품회사는 일본이 미국에서 가져온 공장제 식품을 다시 도입하여 또다른 한국식 식품으로 변형해 식품 시장의 규모를 키웠다. 냉전으로 인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국가 사이의 정치·경제·군사적 경계가 나뉜상태에서 한국의 공장제 식품은 미국→일본 → 한국‘으로 연결된 구도안에서 변신했다. - P149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간편하게 먹는 식품의 개발은 제1차 세계대전때부터 이루어졌지만, 한국의 K-레이션은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으로시작되었다. 같은 시기에 한국 음식의 인스턴트화가 진행되어 1967년8월 삼양식품은 베트남에 라면 10만 개를 수출했다. 베트남에는 군인40들 외에도 한진 · 대한통운·현대건설 같은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었다. 삼양라면을 비롯한 한국의 인스턴트식품은 이 회사의 직원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음식이었다. 이처럼 베트남전쟁이라는 참혹한 사건 이면에한국 정부의 외화 수입 증대, 한국 기업들의 성장, 그리고 공장제 한국식품의 확대라는 아이러니한 장면이 담겨 있다. - P167
미국식 패스트푸드 기업의 국내 진출은 한국 소비자들의 넉넉해진 주머니를 노린 외국 업체들의 노림수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전두환 군사정권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기도 했다. 한국 정부가 세계인이 모이는체육행사에서 낙후된 한국 음식점이 공개되는 것을 꺼려해 미국식 패스트푸드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소비자들은 이 패스트푸드점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미국식 문화를 소비했다. - P196
오늘날 세계 곡물시장은 금융자본이 주도하며 곡물과 식품을 선구매하여 유통을 장악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세게 가 시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기농운동, 슬로푸드운동, 지역 농산물 소비운동 같은 사회운동은 초국가적 곡물 - 식품 유통 대기업을 막아내는 데는 역부족이다. - P245
식민지 타이완의 열대 과일 바나나가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 유입되는 이 흐름은 식민지가 제국에 포섭되어 ‘제국화 되는 한과정이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제국과 식민지 사이의 열대 과일 유통은 세계화의 전조였다. - P250
세계 식품체제에 편입된 농산물 씨앗의 치열한 경쟁에서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다. 세계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농산물 씨앗의 재산권 확보는 식량 주권과 식랑 안보 그 자체이다. 중저가 한정식 음식점의 필수 메뉴인 샐러드에 들어가는 양상추, 잡채 재료로 사용되는 피망. 숙회로 나오는 브로콜리, 이 채소들의 씨앗이 누구 것인지 알아야 하는이유다. - P263
세계화는 냉전의 장벽을 넘어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능하게해주었다. 외국에서 처음 먹어본 이국적인 향신료는 입맛에 맞지 않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귀국 후에도 그 향신료의 맛을 잊지 못해 그런 음식을 파는 곳을 찾아다니거나 만들어보려고 애쓴다. 심지어 외국 여행의 경험이 없는 사람도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맛에 대한 간접 경험을 하고 먹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 식품회사나 외식업체는 이런 소비자들의 새로운 욕구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상품화한다. 청양고추, 미국식 핫소스, 마라는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인적 세계화가만들어낸 ‘지구화된 맛‘ 이다. - P281
"인간은 함께 식사하는 동물이다. 20 여러 사람과 함께 음식점에 가는이유는 서로 인간적 유대관계를 맺거나 지속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함께 식사‘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인류이기를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가정에서는 더욱 자주 함께 식사를 해야 한다.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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