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그릇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9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병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점과선>으로 마쓰모토 세이초를 처음 만났다.

한 마디로 굉장한 책이었다.
철도역의 기차시간표를 활용한 트릭의 절묘함이라니!

1958년에 나온 책이니 오래 된 책 특유의 고전적인 분위기와 함께 사건의 전개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정통 추리소설의 재미를 한껏 누렸다고나 할까?

어릴때 셜록홈즈를 처음 읽을때의 두근거림을 다시 느끼는 행운을 누렸다.

 

한껏 기대감을 고양시킨 상태에서 나에게 선택된 세이초의 두번째 책은 가장 최근에 출판된 <모래그릇> 1961년작이다.

소설의 분위기는 <점과 선>의 분위기와 거의 비슷하다.

세이초라는 작가가 당대 일본 현실을 그대로 배경으로 가져오는 것이니 당시 사회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지 않는 이상 기본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는게 당연하겠다.

주인공은 다르지만 사건을 풀어가는 경찰의 분위기도 비슷하다.

 

도쿄 새벽 기차역에서 처참하게 죽은 시체가 발견된다.

전 날 근처 작은 술집에서 죽은 사람으로 추정되는 이와 어떤 사람이 술을 마셨고, 죽은 쪽 사람의 지방사투리가 심했다는 것 외에는 어떤 단서도 없다.

죽은 이의 신원도 알 수 없고, 목격자도 없으며 증거가 될만한 그 무엇도 없다.

 

이제 어떻게 할까?
현실에서는 미결사건으로 남을 가능성이 대부분일테고, 이 책에서도 역시 미결사건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베테랑 형사인 이마니시는 이 사건에 계속 끌리게 되고 수사본부가 해산하고 난 뒤에도 끝까지 이 사건을 물고 늘어진다.

<점과 선>에서도 그러했고 이 책 <모래그릇>에서도 마찬가지인건

사건을 해결하려 노력하는 주인공 경찰들을 보고 있노라면 일본의 전통 장인정신의 체현자들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이 두 작품에 나오는 경찰들은 모두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1950년대쯤이 배경이 되는 일본 드라마 같은 걸 보면 흔히 나올 전형적인 가장이자 직장인의 모습이랄까?

다만 이들이 특별한 지점은 아주 끈질기다는 것이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이 맞는 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일본끝까지라도 몸을 움직이고 범인의 생각을 짐작하기 위해 범인이 갔을 것으로 예상되는 코스를 직접 체험하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몸에의 체득과 함께 이루어진다.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봤겠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과 생각의 틈사이에는 번뜩이는 한 순간이 준비되어 있다.

그 순간을 대면하는건 그야말로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이지만......

장인의 경지를 보이는 주인공 경찰들을 보다보면 작가인 마쓰모토 세이초가 이렇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가 평생 쓴 작품의 숫자는 너무 엄청나서 현실적으로 어떻게 가능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평생을 무언가 하나에 자신의 모든 혼을 쏟아넣는 장인의 반열에 작가 자신이 올라 있으리라....

 

그러나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모래그릇>은 결론적으로 <점과 선>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흥미로웠고 끝까지 독자를 데리고 가는 몰입도도 있었지만 그것의 강도는 그리 크지 않았다.

틈사이 번뜩이는 순간을 내놓기에는 조금은 뜬금없거나 너무 많거나.... 기본적으로 추리소설은 철저하게 논리와 논리를 연결짓고 유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이 절묘한 어느 한 지점에 신의 한 순간이 결합함으로써 전체 논리가 완성되어 지는 것이다.

결국 모래그릇이 모자란 부분은 바로 이 지점, 논리의 연결부분이다.

지나치게 자주 그 부분을 번뜩이는 깨달음으로 메꾸는 것은 억지스럽다고 얘기할 수 밖에 없게된다.

 

이제 내게 마쓰모토 세이초는 양쪽 두 지점을 선보였다.

다시 만나기 어려운 뛰어난 작가와 그냥저냥 괜찮은 추리소설 작가

이후 내가 다시 만나게 될 마쓰모토 세이초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내가 바라는 것은 다만 <점과 선>이 작가의 최고작이 아니기를 빈다는 것이다.

어떤 작가의 책 중에서 가장 처음 읽은 것보다 더 좋은 책을 발견하지 못하는 건 정말 안타까움이다.

특히 나처럼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을 경우 그 작가의 책에 흥미가 떨어질때까지는 전작주의를 추구하는 독서 스타일을 가진 이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아 안타깝다는 표현보다는 예전에 유행하던 안습이다라는 표현이 이럴 때 정말 딱이라는 생각이 드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내게도 그런 작가가 몇몇있다.

예를 들면 로맹가리의 책을 이것저것 읽었지만 제일 먼저 읽었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 필적하는 책을 더 이상 만나지 못했다던지, 주제 사라마구의 책 역시 가장 먼저 읽은 <눈먼자들의 도시>가 가장 좋았다던지....

아!  미야베 미유키도 처음 읽었던 <모방범>이 가장 좋았다.

 

이 경우 문제는 가장 훌륭한 책을 요령없이 제일 먼저 읽어버린 내가 문제일수도 있구나.....

아직은 마쓰모토 세이초를 손에서 놓지는 않을 것이다.

<점과 선>과 <모래그릇>중간의 어느 지점정도라면 이 작가는 여전히 내게 매력적일테니....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13-11-07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오랜만에 뵈어요. 두 공주님도 잘 있겠지요?
저도 최근에 이 책을 읽었거든요. 마쓰모토 세이초와의 첫 만남이었는데 제가 일본문학 작품을 읽고 푹 빠져본 경험이 없어서 기대를 하고 읽기 시작한게 아니었는데 역시 기대만큼이 아니어서 좀 실망했지요. 말씀하신 것처럼 논리적인 추리에 의해서 사건이 하나 하나 해결되어 나간다기 보다 우연히 떠오르는 무엇에 의한 부분이 너무 많고 갑자기 등장하는 실마리가 좀 엉뚱했고요. 모래그릇이라는 제목을 무엇을 의미했을까, 그것도 명쾌하게 저에게 와닿지 않아서 읽고나서 뿌듯함이 적었어요.

바람돌이 2013-11-08 10:14   좋아요 0 | URL
hnine님도 잘 지내셨죠? 예전처럼 알라딘에 들어오는게 열심 모드가 되지는 않네요. ㅎㅎ
이렇게 가끔 와도 인사 건네주는 분들이 계셔서 너무 감사해요.
이 책은 그저 그랬는데 이 작가의 <점과 선>은 정말 좋았어요. 아마 앞으로 한 2권 정도 더 읽어보고 계속 이 작가를 읽든지 그만두든지 하겠죠. ^^
그래도 늘 읽고싶은 작가가 넘쳐나서 행복하기도 해요. ^^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처음으로 읽었다.

왠만한 사람은 다 읽었는데 나는 안 읽은 책

내게는 하루키의 책들이 그렇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얼마나 굉장한 유행을 일으켰는가말이다.

그런데 왜 안읽었냐고?

그냥 별로 안땡겨서라는 말 외에는 이유도 없다.

살짝 유행에 편승해본다.

1권짜리인데다 내용도 뭐 그리 무거울것 같지도 않고.....첫 책으로 고르기에 별로 부담스럽지 않은 책이다.

 

하루키에 대한 첫 느낌은?
뭔가 있을듯한 묘한 분위기로 독자를 현혹시키는데 아주 재능이 있는 작가쯤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은 심심할 정도로 단순하다.

그럼에도 책이 심심하지 않다 느껴지는 것은 추리소설의 기법들을 절묘하게 배치한 덕분인듯...

완벽한 공감의 공동체를 만들었던 고등학교 친구들의 느닷없는 절교

공감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철저하게 자기안에 갇힌 다자키에게 어느날 다가온 하이다라는 청년

그리고 하이다가 말해주는 사람들의 색채를 볼 수 있는 신비한 사람의 이야기와 어느날 사라져버린 하이다

다자키로 하여금 순례를 시작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사라의 등장, 하지만 사라 역시 보여주는 것이 전부가 아닌 뭔가 비밀을 간직한 여인이다.

거기에 알 수없는 이유로 자살한 시로까지 명확한 인물은 누구도 없다.

어쩌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라는 명명이 보여주듯 다자키 자체가 모호한 인물이다.

이런 모호함들이 은근히 이야기의 힘을 만들어내고 독자를 유혹한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면 하루키는 인물을 창조해내는 능력이 탁월한 작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건의 힘이 아니라 인물과 인물간의 디테일함이 독서를 이끌어가고 있으니말이다.

 

다자키 쓰쿠루는 자신만이 색채가 없다 생각하지만 하나의 색채로 명명될 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을까?

어떤 색채를 가지는가는 결국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그들 사이의 소통에서 이루어지는 것.

그러므로 인간의 색채는 언제든지 다양하게 변모할 수 있는 것일게다.

다자키가 순례를 통해 자신에게 다른 색을 입혀나갔듯이......

 

처음 만난 하루키,

와! 하는 함성은 없지만 그래그래 고개를 끄덕여본다.

거꾸로 그의 책을 거슬러 올라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그 순례가 끝까지 거슬러올라갈지 중도에 벗어던질지는 가봐야 아는 거겠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실 2013-11-05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반가워요~~~~~ 얼마만이어요^^
전 이 책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 쉬우면서도 친구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도 만들어주었고^^
다자키...평범하면서도 참 매력적인 인물이었지요.

바람돌이 2013-11-05 16:25   좋아요 0 | URL
세실님도 안녕하시죠? 이젠 글도 좀 써고 자주 와야지 했는데 맘만큼 안되네요. ㅠ.ㅠ
다자키라는 인물이 본인은 아무런 특색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본인의 존재만으로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이들 꼭 친구들 중에 하나쯤 있잖아요. ^^ 인물은 매력적이고, 하지만 왜 그렇게 열광하는가까지는 잘 모르겠고 그래요. ^^
 
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거리는 흐른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움직인다. 움직이는 사람들은 거리 그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다. 밝게 빛나는 쇼윈도와 반대 방향에서 밀려오는 사람들에게만 신경을 집중한다. 그들은 민감한 센서를 장착한 로봇들처럼 여러 방향에서 흘러오면서도 서로 부딪치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그러나 거리의 존재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들은 거리의 거주자이며 따라서 거리 그 자체에 관심이 있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주시하게 된다. 담장 위의 길고양이가 오직 다른 길고양이만을 바라보듯, 그들은 단박에 서로를 알아본다. 이것이 거리의 삶을 시작한 제이가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다. (78페이지)

 

 소설은 충격적인 프롤로그로부터 시작한다. 사람을 토막냈다가 살려내는 마술을 부리는 마술사가 나오고, 그것을 보고 자신의 내시를 토막내고는 살려내보라하는 황제가 나오고, 그리고 누구도 관심가지지 않는 토막났다가 살아난 마술의 또하나의 주인공 어린 조수가 나온다. 마술사는 황제의 행동에 놀라 마술에 사용했던 밧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버린다. 그리고 상황은 종료된다. 하지만 이야기 어디에도 그 어린 조수가 어찌 됐는지는 누구도 얘기해주지 않는다.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는 관심가져주지 않는 어린 조수의 이야기, 그것이 제이의 이야기이다.

 

  제이의 삶은 거리에서 시작되었다. 버스터미널의 화장실에서 어린 소녀가 혼자 낳은 아이, 어쩌면 태어나자마자 죽을 수 있었던..... 버스터미널은 머무는 이의 장소가 아니라 떠나가고 떠나오는 자들이 흘러가고 흘러드는 곳이다. 작가가 얘기하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거리는 흐름의 장소이지 멈춤과 성찰의 장소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제이의 삶이 그렇게 거리에서 거리로 흘러갔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제이에게 멈춤의 공간이 전혀 없었던 곳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삶이 그러하듯이 그 공간들마저도 잠시 스쳐 가는 곳이지 거주의 장소가 되어주지는 못한다. 장소가 그렇듯이 사람 역시 그러하다. 동규와 목란이 약간의 예외랄까? 제이에게는 모두가 스치는 사람일뿐이다. 그런데 이런 삶을 제이가 만든 것일까? 아니 제이는 그저 떠밀려다녔을 뿐이다. 선택의 기회는 없었다. 그저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살아졌고, 그렇게 내처졌다. 제이의  삶은 일상의 안정과 머물 장소를 소유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있는지 모르고, 알고싶지 않고, 알아도 잊고싶은 비루함일뿐이기 때문에......

 

  거리의 아이들에게는 그들만의 세계와 그들만의 룰이 있다. 그들의 도덕과 생각은 사회의 통념과 다르다. 누구도 그들에게  안락한 머뭄의 공간을 제공하지 않았기에 어쩌면 사회의 통념을 따르라고 하는게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거리 안쪽의 세상은 그들에게 자신들이 과시하듯 자랑스레 생각하는 이념들 - 안락한 생활, 보장된 미래, 가족의 따뜻함, 어른의 보호- 그 어느것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리의 아이들은 그들을 내친 사회가 그들을 내친 방식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완벽하게 일방적이고 완벽하게 폭력적인 그 오랜 과정들을 말이다. 사람들은 거리에 나온 제이가 처음 만난 가출한 아이들의 생활에 경악한다. 무자비한 폭력과 즉각적인 응징과 본드와 섹스와 매춘, 그리고 기생하는 삶....... "아니 어떻게 이럴수가....과장이겠지? 가출한 아이들이 이렇게 산다고? 설마......" 그러나 정말 몰랐을까? 진짜? 당신의 머리속을 구석구석 파헤쳐봐. 알잖아. 그냥 외면한 거잖아.

 

  이 책은 읽는 시간은 갑갑한 우울의 시간이다. 

  소통의 불가능성을 인지한다는 것은 슬픔이다.

   제이와 아이들의 8.15 대폭주는 스펙트클한 슬픔의 폭발이다. 거리의 아이들은 분노를 표현하고 소리지르고 내달린다. 그러나 어른들은 절대로 이들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러므로 인정하지도 못한다. 슬픔을 인정하면 그들의 분노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의 영역에 속해있다.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을 바꿔봐! 좀 더 건설적인 방식으로 너의 에너지를 표출해봐!'라고 말하는 순간 더이상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그저 나는 꼰대가 되는 것이다.

 

목란이 얘기한다." 내일 죽는다면 오늘은 오토바이를 탈거예요."

나는 말한다. "너는 내일 죽지 않을거야. 그게 문제야"라고.....

그래서 제이와 목란은 제이와 목란일 뿐이다.

 나는 나일 뿐이고....그들에게 나의 시각은 꼰대의 시각을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의 슬픔은 나에 의해서  치유될 수 없는 슬픔이다. 

 

제이는 모든 사물의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정작 제이의 목소리는, 거리의 아이들의 목소리는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제목은 나의 목소리를 제발 들어줘라고 해석해야 할지도.....

소설속 에필로그에서 제이의 얘기를 전했던 여인이나 제이의 얘기를 썼던 소설가(혹시 작가 김영하 자신일지도 모르는)에게는 제이의 목소리가 들렸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의 생각에 동의하지 못하면서도 그의 책을 계속 손에 잡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작가 김훈이 던지는 질문들과 대답들에 늘  

"아니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도대체 당신이 바라보는 세계는 왜 이렇게 팍팍한걸까요? 비루하고도 비루한자들의 속내를 이렇게 파헤쳐서 도대체 무얼 말하려는건가요?"
이렇게 내 마음은 다시 그에게 질문들을 던졌던듯 하다. 

김훈이 말한다.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시급한 현안문제다.(161쪽) 

그래 인간이란 아니 밥그릇에 목을 매야 하는 인간의 삶은 비루하다.
온갖 비루하고 치사한 삶들을 취재하고 다니면서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는 그저 전달하고 기록할 뿐인 것을 자책하는 그러나 거기서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기자 문정수.
운동권의 삶에서 가장 치명적인 행위, 즉 동지를 팔고 해망으로 도망치듯 떠난 장철수
크레인에 짓이긴 딸의 죽음앞에서 오열하지도 못하고 결국 그 보상금으로 고향을 떠나는 방천석
아들이 기르던 개에 물려죽고 그 보상금으로 해망에서 농사를 짓고 질긴 삶을 연명하는 오금자
베트남에서 시집와 가출, 그리고 물밑을 헤매며 고철들을 주워모으는 후에  
소방관으로서 작업중 보석을 훔쳐 새로운 삶을 꿈꾸는 그러나 여전히 비루한 박옥출
어느 삶도 비루하지 않은 것이 없고 구차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어느 한켠에도 작가는 이들의 삶에 연민의 눈길도 안따까움의 손길도 건네지 않는다.
그저 깎아치는듯한 짧은 문장들로 그들의 삶을 그릴 뿐이다.
사는게 원래 그렇게 혐오스러운거야.
이 세상에 희망이란게 어디있어라고 묻듯이..... 

그런 작가의 자책은 외부로 향해 있지 않다.
자신의 내면을 향해 끊임없이 묻는 듯하다. 도대체 왜 이 세상이 살만한거냐고, 혐오스럽지 않냐고...
김훈의 문장은 그런 자책과 한 몸이 되어 비수가 된다.
별것 아닌 문장들이 칼이 되어 내 몸을 스친다.
저 모든 비루한 삶들이 어느덧 내 안의 비루함이 되어 나를 향하는 칼날들의 느낌. 
그래 그 지점에서 작가의 질문과 자책은 나의 것이 되어 나를 향한다.
그의 말에 전혀 동의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에 대한 씁쓸함, 그것이 계속 그의 책을 들게 하는 이유였구나.... 
내 삶도 그렇게 비루하고, 치사하고, 던적스러웠구나
또한 앞으로도 그러하겠구나.... 

그럼 원래 인간이란게, 인간의 삶이란게 그렇게 생겨먹은거라고 자위할까?
그런 자위로 나를 이끌었다면 아마도 김훈의 책은 애저녁에 던져졌을 것이다.
오히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내안의 나를 응시하게 한다. 

그 다음은?
노목희는 시간너머로 떠난다.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장철수는 후에의 결혼 빚을 갚아주고 망가진 몸을 이끌고 고향 창야로 돌아간다. 그를 기다리는 삶 역시 녹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그들의 삶을 계속한다.
그저 삶이 계속된다.
나의 그 다음은?
그 다음이 어떤 자각에 이를지는 온전히 책을 읽는 독자의 몫이다.
김훈의 응시의 방향이 그 자신의 몫이듯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기가 어디쯤일까?
팔레스타인? 터키? 아니면 유럽이나 남미의 어디쯤?
어딘들 어떠랴?
이곳은 세상 갇힌 자들이 있는 모든 곳인것을..... 

세상의 어떤 말로도 표현될 수 없는, 그래서 세상의 모든 말로 칭해지는 내 사랑!
그는 감옥에 있고 그녀는 어느 때인가 감옥을 나와 세상속에 있다.
익숙한 길을 걸으며 그와의 한때를 추억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하며,
또 때로는 사랑하는 이들과 또 다시 이별하기도 한다.
그러한 모든 일상은 감옥속 그에게 보내는 사랑노래!
그리고 때로는 머리를 안고 위로하고 싶은 그에게 그녀가 보내는 그녀의 손그림!
아마도 감옥속에서 유일하게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 매달려 그를 어루만지리라..... 
그녀의 편지는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그리고 그녀의 손길은 위로가 된다.

편지 뒷면에 쓰여진 그의 메모들은 어떤 의미일까?
밖을 나간다 하더라도 더 큰 감옥에 불과할 세상!
그럼에도 그 세상에 대한 냉철하면서 뜨거운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그래서 무엇과 어떻게 싸워야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혁명가의 가슴일까? 

세상의 모든 갇힌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그리고 갇힌자들을 기다리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을! 

 --------------------------------------------
책을 보기 전에 다소 음침하게 보이던 표지가 이렇게 멋져보이다니...
세상의 모든 아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비에르를 보여주는 정말 멋진 표지다.
거기다가 소설 속 모든 문장에 밑줄을 긋고 싶은 소설이라니....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10-31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1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딩 2021-02-27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읽으셨네요 ㅎㅎㅎ 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