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그렇다고요. 제가 이틀에 한 번씩은 꼭 저 형님 전화를 받는데요, 가만히 들어주는 것도 정도가 있는 거예요. 매일매일 어두운 이야기뿐이니까, 충분히 지겹고 과민할 때가 있는 거라고요. 그래서 전화 좀 몇번 끊었다고 이 한밤에 사람을 죽일 듯이,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거냐고요. - P29

그건 너무 덧없다고 내가 말하자, 덧없는 편이 낫다,라는 것이 유도 씨의 대답이었다. 죽어서도 남을 쓸쓸함이라면 덧없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었다.
죽어서도 남을 쓸쓸함이라면,
유도 씨.
유도 씨는, 덧없이 사라질 수 있을까.
에라, 하고,
유라, 혹은 미라, 하고,
- P57

.......떨어져 내린다. 언젠가는 어딘가에 닿을 것이라 희망을 품었다가도 이렇게 떨어져서야 가망이 없다는 낙담뿐이다. 누가 누가 누가 없어요 나와 나와 나와 충돌해줘.
- P78

시끄러운 생물이 인간이라는 점까지 생각해보면 억울해 땅을 칠노릇인 것이다. 도무지 이 몸이란 짐승 역시 먹고사는 것을 제일로여기는 처지, 먹고사는 일로 따지자면 어느 짐승의 먹고사는 일이가장 중요한지는 누구도 간단히 말할 수 없는데도, 자기들만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듯 아무 데나 눈을 흘기는 인간들이 승하는 세계란 단지 시끄럽고 거칠 뿐이니 완파되는 편이 좋을 것이다.
- P115

어쨌든 모두가 돌아갈 무렵엔 우산이 필요하다.
디디는 도도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의팔이나 다리나 머리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비좁은 거실을 가로질렀다.
달칵, 하고 신발장을 열어보았다.
- P179

그대는 이 기록을 눈 속에서 발견할 것이다.
나는 눈에 갇혔다.
그대가 부르고 싶은 대로 나를 부르라. 그 남자, 그 기록, 그 새끼, 그 물건, 그것, 나는 즉 그다. 그는 이미 많은 얼굴을 잃어버린뒤 그 집에 당도했다. 많은 얼굴을 제대로 떠올릴 수 없었고 그 자신의 얼굴 역시 그런 얼굴들 속에 있었다. 겨울이었다.  - P183

그는 상상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텅 빈 납골당으로 들어서는 사람, 눈사람과도 같은거인, 그의 등과 머리에 쌓인 눈, 체온의 냄새. 한발 한발 전진해갈때마다 그는 그에 관한 꿈을 꾸었다. 그에 관한 꿈으로 완전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므로 그는 갈 수 있었고, 살 수 있었다.
하.
후.
하.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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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는 온몸에서 물기가 다 빠져나간 고목처럼 파삭파삭했다.
죽은 막냇동생 이야기를 할 때에도 물기 없이 덤덤했다. 하지만 해동은 아버지가 옥에서 나올 때, 죽을 때, 애간장이 녹도록 울던 고모를 눈으로 본 것 같은 착각 속에 살아왔다. 고모의 무표정은 그런 것들이 다 녹아 있는 것이었다. 하염없이 울고, 시도 때도 없이울고, 멍하니 넋이 나가고, 오랜 시간 멍했던 것들이 다 지나간 뒤에 찾아온 굳은살 같은 얼굴이었다.
- P58

"원래부터, 그게 아주 대단한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인쇄기를숨겼다가 발각된 정도라면 뭐, 큰일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그 시골에서 무슨 대단한 일을 하신 건 아닐 테니까요. 안골의이성준이건 눈티재의 이성준이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냥 사촌형이라는 작자가, 누워 계신 고모님 앞에서 말하는 꼴이 하도 아니꼬워서, 제가 속이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사내들 하는 짓이 뭐그런 것이지요."
- P232

그것을 두고 간 자도 차지한 자도똑같이 욕하는 목소리였다. 적산, 적이 남겨두고 간 자산이라는 표현에는 불을 지르고 싶은 적의와 한입에 삼키고 싶은 상반된 욕망이 뒤섞여 듣기만 해도 잠잠하던 피마저 들끓게 했다.
- P67

그런데 왜 나만? 다른 사람들은 이런 고민 따위 조금도 하지않고 잘사는데, 왜 나만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버지에이어서 나까지, 내 일도 아닌 것의 대가를 왜 내가. 나만, 치러야하는 것인지.
- P235

막걸리로 흐려진 눈을 애써 껌벅거리며, 해동은 진형을 보았다.
형제자매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는 편안해 보였다. 부숭부숭한 어머니와 억센 형제자매들은 진형의 깊은 뿌리였다. 해동이 가지지못한 그 건강하고 단단한 뿌리들을 해동에게 나누어줄 것이다.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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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은 자기들을 친밀하게 만들어주는 따뜻함을 절실히 필요로 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불신 때문에 그따뜻함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멀어지고 있다. 이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이웃 사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페스트를 옮길 수 있고 방심한 틈을 타 감염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 P231

리외는 으레 그러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것은 랑베르 자신의 문제이고 랑베르는 행복을 선택한 것이며 자신은 그에게 반대할 논거가없다고 말했다. 자신이 느끼기에 그는 이런 문제에 대해 무엇이 옳고그른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
- P237

그러는 사이에 내가 이 세상을 위해 더이상 쓸모가 없다는 사실과,
죽이는 것을 단념한 그 순간부터 결정적으로 추방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역사는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가겠죠. 그리고 내가 그 사람들을 평가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이성적인 살인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자질이 필요한데, 나에게는 그 자질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이것을 우월성이라고 할 수는 없죠. 하지만 이제 나는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기로 했어요.. 겸손을 배운 거죠. - P295

"통행증을 보여주면 방파제까지 갈 수 있을 거예요. 페스트 속에서만 사는 건 너무 어리석은 짓이에요. 물론 인간이라면 희생자들을 위해 싸워야죠. 하지만 뭔가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투쟁은 해서 뭐하겠어요?"
- P298

그러나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이 결국 이런 것이라면, 희망하는 것을 다 잃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 기억에 남는 것만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라면, 그 삶은 얼마나괴로운 삶일까. 타루가 경험한 삶이 아마 그런 삶이리라. 그래서 그는환상 없는 삶이 얼마나 황량한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희망이 없으면 마음의 평화도 있을 수 없다. 타루는 인간이 인간을 단죄할 권리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남을 단죄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없으며, 심지어 희생자도 때로는 사형집행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분열과 모순 속에서 살았고 희망이라곤 전혀 경험하지못했던 것이다. 그가 성스러움을 추구하고 인간에 대한 봉사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고 한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 P340

공포가 끝나면서 페스트도 끝이 났고, 그렇게 부둥켜안은 팔들은심오한 의미에서 페스트가 사실은 유배와 이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 P348

그것들을 바라보며 의사 리외는 침묵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페스트에 걸렸던 사람들에 대해 우호적으로 증언하기 위해, 적어도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폭력에 대한 기억을 남기기 위해, 그리고 재앙 중에 배운 것, 즉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것만이라도 말하기 위해 지금 여기서 끝맺으려고 하는 이야기를 글로 쓰기로 결심했다.
-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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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말이 옳아요. 랑베르, 절대적으로 옳아요. 당신이 지금 하려는일을 나는 결코 막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하려는 일은 내가 봐도 정당하고 좋은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것만은 말해주고 싶어요. 이 모든 것은 영웅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건 성실성의 문제예요. 비웃을지 모르지만,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성실성이 대체 뭔가요?" 랑베르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를 예로 들면, 성실성은 내 직분을 완수하는 거예요."
- P194

 페스트 발생 초기만 해도 그들은 잃어버린 사람을 뚜렷이 기억하고 그리워했다. 그러나 사랑하는사람의 얼굴과 웃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이 행복해했던 어떤 날,
이런 것들은 모두 분명하게 기억났지만, 그들이 그 사람을 다시 그려보는 바로 그 순간에, 또 이제는 그렇게도 먼 곳이 되어버린 그 장소에서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결론적으로그 시기에 그들은 기억력은 있었지만 상상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페스트가 둘째 단계로 접어들자 기억조차 희미해졌다. 얼굴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같은 이야기이지만, 얼굴에 살이 없어져 마음속에서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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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1-06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로나19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도 성실성이겠지요.
정부의 방침에 성실히 따라주는 의료진과 국민들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경제적 상황이 안 좋다 보니 정부에 항의하는 업주들의 시위가 생기기도 해요.
영업을 할 수 없으니 이해가 되어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 책을 저는 홍신문화사 걸로 오래전 읽었는데 좋은 글 뽑아 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바람돌이 2021-01-06 13:32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지금 상황과 비교하면서 보게 되더라구요. 예전에 읽었다면 지금처럼 실감하면서 읽지는 못했을것 같아요. 여러가지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일을 까뮈는 이렇게 써내려간걸 보면서 문학의 힘을 다시 느끼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 시민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여서 그들은 자신들만 생각했다. 다시 말해, 재앙을 믿지않는다는 점에서 그들은 인본주의자들이었다. 재앙은 인간의 척도로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들은 재앙을 비현실적인 것, 곧 지나가버릴 악몽에 불과한 것으로 여긴다. 재앙이 지나가버릴 때도 있지만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악몽에서 악몽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사라지는쪽은 사람들, 누구보다도 인본주의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미리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민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못한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자기들에게는 여전히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생각은 재앙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 사업을 했고, 여행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갖고 있었다. 미래와 여행, 토론을 금지하는 페스트를 그들이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유롭다고 믿었지만,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 P51

당시 용기와 의지, 인내심이 얼마나 급격히 허물어졌던지, 그들은그 수렁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해방의 날은 결코 생각하지 않고 더이상 미래도 바라보지 않은 채, 말하자면 항상 두 눈을 내리깔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고통을 숨기고 방어자세를 취하면서 싸움을 포기하는 그런 신중한 방법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하고 싶었던 의기소침한 상태는 편할 수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앞으로 다가을 재회를 상상하면서 페스트를 잊을 수 있는 수많은 순간들을 사실상포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심연과 정상上 중간에 좌초되어 매일같이 정처 없이 헤매고 메마른 추억 속에 버림받은 채, 산다기보다는 차라리 떠다니면서 고통의 대지 속에 뿌리박지 않고는 힘을얻을 수 없는, 방황하는 유령처럼 살았다.
- P91

그러나,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인데, 아무리 불안하고 고통스러워도, 또 텅 빈 마음을 견뎌내기가 아무리 어려워도, 초기에는 그래도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사실 냉정을 잃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시민들의생각은 자기들이 기다리는 사람에게로 완전히 기울어 있었다. 모두가하나같이 고뇌에 빠져 있는 가운데, 그들은 사랑의 이기적인 성격 덕분에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었고, 페스트를 생각할 때도 페스트 때문에 이별이 끝도 없이 계속될까봐 염려스럽다는 정도였다. 그래서 전염병이 한창일 때도 그들은 건전한 여유 같은 것을 누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침착함으로 착각했다. 절망감 때문에 공포심을 느끼지 않게 되었으니 불행에도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 P95

문이다. 그러면서도 질병은 곧 멈출 것이고 자기들은 물론 가족들도그 병에 걸리지 않을 거라는 기대도 여전했다. 따라서 뭔가를 반드시해야 한다는 생각은 아직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에게 페스트는 예기치 않게 찾아온 것처럼 언젠가는 떠날 불쾌한 방문객에 불과했다. 그들은 공포에 사로잡히긴 했지만 절망하지는 않았다.  - P113

초기에는 이번 질병도 다른 질병들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종교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자 향락을 떠올린 것이다. 낮 동안 사람들의 얼굴에 어려 있던 모든 불안은 뜨겁고 먼지투성이인 황혼녘이 되면 일종의 격렬한 흥분으로, 모든 시민을 흥분시키는 서투른 자유로 귀착되고 만다.
나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게 어떻단 말인가! 나 같은 인간에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죽음은 그들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하나의 사건이다.
- P145

인간은 악하지 않고 오히려 선한 존재지만, 사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간은 많이 알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는데, 그것을 미덕이나 악덕이라고 부른다.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자기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스스로 허용하는 무지의 악덕이다. 살인자의 영혼은 맹목적이며, 통찰력을 최대로 발휘하지 않으면 진정한 선도 아름다운 사랑도없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타루의 주도로 만들어진 보건대가 아무리만족스러워도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또 이런 이유 때문에 서술자는 의지와 영웅심을 침이 마를 정도로 과도하게 찬양하지는 않을 것이며, 적절한 정도로만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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