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는 임무를 완수했다. 경비병은 총을 바닥에 놓고, 난간에 나와 그가 다치질 않았기를 바라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실제로 어둠 속에서 라차리는 쓰러지지 않은 듯 보였다.
그랬다. 라차리는 여전히 서 있었고, 말은 그와 가까이 있었다. 그러나 사격 후의 정적 속에서 절망적으로 내뱉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모레토, 네가 날 죽이는구니!"
그 말을 내뱉고 라차리는 서서히 앞으로 고꾸라졌다. 트롱크는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여전히 꼼짝도 않았다. 그러는 동안 요새의 미로를통해 전쟁에 관한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 P122

그날 아침 가시거리에 있는 사막의 삼각지대로 시선을 돌려 바라보던 그는, 이미 자신이 죽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꿈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꿈에는 언제나 부조리하고 혼란스러운 뭔가가 있는 법이라, 모든 건 가짜고 때마침 깨이나게 되리라는 막연한 느낌이 결코 가시지 않는다. 꿈에서의 일들은 정말이지 명확하지도 물질적이지도 않아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들 무리가 행진하는 황량한 평야 같은 건나타날 수가 없다.
- P133

필리모레 대령이 이미 지나치게 시간을 끌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있다. 어떤 나이에 이르면 희망하는 데 큰 수고가 따르고, 더는 스무 살시절의 믿음을 되찾지 못한다. 너무나 오랜 세월을 그는 헛되이 기다렸다. 그의 눈은 지나치게 많은 명령서들을 읽었고, 너무나 오랜 세월 아침마다 변함없이 황량한 그 저주받을 평야를 봐왔다.
그래서 외인들이 나타난 지금, 대령에게는 거기에 분명 (실수만 아니었다면 너무나 좋았을) 어떤 실수가 있다는 확신이 든다. 어딘가 끔찍한 실수가 도사리고 있음이 틀림없다.
- P141

낡은 나무선반에 끈질긴 생명의 탄식이 다시 고개를 드는 시절이다.
아주 오래전 행복했던 한때, 그 나무는 파릇파릇한 열정과 힘으로 충만하고 가지에서는 새싹들이 움트곤 했으리라. 그러다 나무는 벌채되고말았고, 봄이 온 지금 갈라져나간 나무의 온갖 조각들에서 영원히 점점더 작아지는 생명의 고동이 다시 힌번 깨어나는 것이다. 예전에 품었던잎과 꽃들은 이제는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 균열 같은 소음을 만들어낸 뒤, 이듬해까지 잠잠할 것이다.
- P176

그러면 요새여 영원히 안녕, 더 머무는 건 위험할 테니. 너의 간단한수수께끼는 풀렸고, 북쪽의 사막평원은 계속해서 황량하게 남으리라.
결코 적들은 오지 않고, 너의 먼지투성이 성벽을 공격하러 오는 이는아무도 없으리라. 영원히 안녕, 오르티츠 소령이여. 더는 이 초막 같은요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울한 친구여. 당신처럼 다른 많은 이들이너무나 오래 희망을 고집해왔다. 시간은 당신들보다 훨씬 빨랐고, 당신들은 다시 시작할 수 없으리.
- P179

밤에는 유쾌하게 즐겨보려는 결심으로 늦게까지 집밖에 있었다. 매번 젊은이답게 사랑을 찾고 싶은 평범하고 막연한 기대를 품고 외출했지만, 매번 실망하여 돌아왔다. 그래서 그는 혼자 집으로 향하는 길이싫어지기 시작했다. 그에게 집은 외롭고 아무런 변화가 없는 황량한 곳이었다.
- P183

한때 간직했던 희망과 전쟁의 환상, 그리고 북쪽에서 내려올 적에대한 기대가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났다. 도시의 문명사회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는 지금, 그러한 꿈들은 유치한 광기처럼 보였다. 어느 누구도 그러한꿈을 믿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러한 과거를 웃어넘기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요새를 떠나는 것이었다.  - P206

"타타르인들… 타타르인들... 당연히 처음에는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리지. 그러다 그대로 믿게 된다네.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실제로 일어난 일이지."
- P211

었었다. 그 역시 사랑스럽고 순수했었다. 어쩌면 어느 늙고 병든 장교가 발걸음을 멈추고 쓸쓸한 놀라움으로 어린 그를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불쌍한 드로고." 그는 중얼거렸다.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무엇보다 자신이 세상에 혼자이며, 스스로를 제외하고는 다른 어느 누구도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그는 깨달았다.
- P275

그는 그 경계 끝에서 어두워져가는 동심원의 그림자가 자기에게 다.
가오는 걸 느꼈다. 시간문제이리라. 어쩌면 몇 주나 몇 달쯤, 하지만 몇주나 몇 달 역시 죽음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때는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다. 그러니까 삶은 일종의 장난으로 전락한 것이다. 자부심을 내세운 내기를 위해 모든 것을 잃고 만 것이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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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꾼 게야. 틀림없어. 군인들 얘기를 믿게. 어떤 사람은 이 얘기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얘기를 하거든. 하얀 탑들을 보았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연기를 뿜어내는 화산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네. 거기서 안개가 나온다고 말이야. 심지어 오르티츠 대위님도 뭘 보았다고 확신하신다네. 벌써 오 년쯤 된 일이지, 그분 얘기로는, 검고 긴얼룩처럼 생긴 지대가 있는데 숲이 틀림없어 보인다더군."
- P39

어른거리는 석유램프 불빛에서 벗어나 간이침대에 누워 있던 조반니 드로고는, 자신의 삶을 곱씹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바로 이날 밤 - 오, 그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삼 같은 건 달아나버렸을 것이다 - 바로 이날 밤, 그에게서 시간의 돌이킬 수 없는 도주가 시작되었다.
- P60

조반니 드로고는 지금 제3보루 내부에서 자고 있다. 그는 꿈을 꾸며웃고 있다. 마지막으로, 완벽하게 행복한 세계의 달콤한 이미지들이 밤이면 그를 찾아온다. 그기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언젠가그 길이 끝나는 곳에서, 납빛 바다가 잎에 있고 하늘은 온통 흐린 잿빛인 그 아래, 주변에는 집도 사람도 나무도, 심지어 풀 한 포기조차 없이, 태곳적부터 모든 것이 그러한 곳에서 멈춰서게 될 자신을,
- P63

그들의 행운과 모험, 그리고 적어도 각자가 한 번쯤은 경험할 기적같은 시간이, 저 북쪽 사막으로부터 올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더 불분명해지는 이 막막한 우연을 위해, 군인들은 인생의 전성기를 요새에서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 P71

이 모든 일상이 지금은 그의 것이 되었고, 그것들을 포기하는 건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한데 이제 드로고는 요새를 떠나려면 얼마나 안간힘을 써야 하는지, 또 요새의 삶이 하루하루 별반 다르지 않은 나날들을 얼마나 어지러운 속도로 삼키게 될 것인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어제는 그제와 똑같았고, 그는 그날들을 더는 구분할 수 없을 것이었다.
사흘 전 일이든 열이틀 전에 일어난 일이든 똑같이 까마득하게 여겨질터였다. 그렇게 그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 시간은 도피하고 있었다.
- P92

그러니까 경비병이 흥얼거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추위나 처벌에, 사랑에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 적대적이고 거친 산의 소리였다. 얼마나서글픈 오해인가, 드로고는 생각했다. 어쩌면 모든 게 이런 식일지 모른다. 주위에 우리와 비슷한 존재가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얼음과 바위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친구에게 인사를 하려 하지만 팔은 힘없이 떨어지고 미소는 사라져버린다. 우리가 철저히 혼자임을 깨닫게 되므로.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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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 웡은 2017년 일본 매체와 한 인터뷰에서 진격의 거인〉과 홍콩 시위를 이렇게 정의했다. "거인은 인류가 사는 벽을 파괴하려 하고, 인류는 벽을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합니다. 하지만그 벽은 거인이 만든 깃에 불과했죠." 벽 안에 사는 인류는 일국양제 속에서 편안함을 누리는 홍콩 시민을, 거인은 중국 혹은중국 공산당을 상징한다. 홍콩이 일국양제를 파괴하려는 중국공산당과 싸우고 있는데, 알고 보니 일국양제를 만든 게 중국인상황도 애니메이션의 설정과 닮았다. 이처럼 우산혁명은 일국양제라는 벽이 중국에 의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현실을 홍콩인에게 각인시켰다.
- P148

첫날 애드머럴티 역에 내렸을 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건 태어나서 처음 봤어.
막무가내로 시위대를 밀어붙이는 경찰을 붙잡고 울면서 설득하는 사람이 있었지. 경찰에게 ‘당신도 홍콩 사람이다‘라고 하더라고, 홍콩 사람? 홍콩인? 난 한 번도 내가 홍콩인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데 그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더라. 텐트에 있는 내내 ‘홍콩 사람이란 뭘까? 나는 홍콩 사람인가?‘를 고민했어. 어느 날 그곳에서 만난 테레사 언니가 ‘우리가 우리의 홍콩을 지켜야 한다‘라고 말해줬어. 지금 생각하면 별 얘기가 아닌데, 그때는 갑자기 사명감이 생겼던 거야."
- P151

 이제 우리는 사법 정의의 실현으로 비칠수도 있는 송환법 개정에 홍콩 시민들이 반대한 까닭을 알 수있다. 가장 큰 이유는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시민들은 코즈웨이베이서점 납치 사건을 보면서 자신도 언제든지 납치, 불법 구금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송환법 개정은 납치와 구금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일이다. 과연 누가 이런 법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 P190

여기서 기억해야 할 점은 이들은 그저 집회를 주최했을 뿐이라는 점이다. 이번 홍콩 시위의 가장 큰 특징은 지도부가 아예없다는 점이다. 2014년의 경험 탓에 사회적 명망가에 대한 불신이 상당했고, 만약 카리스마적 리더를 세울 경우 그가 부재할때 집회를 이어나갈 결속력이 약해진다는 단점도 있었다. 따라서 2019년의 시위는 그 누구도 지도부를 자처하지 않는 모델을만들어냈다. 이들은 ‘여러 단체와 모임은 상황에 따라 각자 행동하고, 학생 시위대의 자율권을 존중한다‘는 대원칙을 정했다.
- P213

원 할아버지는 그게 위안이 됐는지 입을 열었다.
"홍콩 사람들처럼 기구한 운명을 가진 사람도 없을 거야. 나는 1967년 영국 놈은 물러가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는데, 지금손주는 유니언잭을 들고 영국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고 있으니 말이야."
- P238

원 할아버지는 중국을 조국이라고 생각한다. 원 씨는 중국의지배는 어쩔 수 없는 순리지만 중국이 홍콩에 약속한 것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집을 나간 손자는 자신을 홍콩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고 뭘 할아버지가 골수 친중파인 것은 아니다. 그저 현실에 순응한 사람일 뿐이다. - P238

한마디로 무소불위의 국가보안법이 탄생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국은 기존의 법률이 국가보안법과 충돌할 경우 국가보안법을 우선 적용한다고 부칙에 명시했다. 그렇게 2020년 7월1일,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지 정확히 23년 만에 항인치항, 고도자치, 일국양제가 막을 내렸다. 사방에서 중국이 홍콩을 병합했다는 탄식이 터져나왔다.
- P299

다시 싸움을 시작한 미얀마 사람들이 부럽고 존경스러워.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정부와 싸우잖아. 돌이켜보면 우리는 홍콩 행정부와 싸우지 않았어. 우리는 인구가 홍콩보다 186배나많은 중국을 상대로 싸워야 했지. 네 책의 추천사를 쓰지 못해서 미안해. 이제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신분을 드러내고 말할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이해해줘. 어디에서든 널 다시 만날 수있다면 좋겠어. 그때까지 잘 지내."
"그래 메이야, 너도 잘 지내, 나의 도시 홍콩에게도 인사를전해줘. 길을 가다가 원 씨네 가게 문이 열려 있으면 들어가서탕위엔 한 그릇을 시키고 안부를 전해줘. 나도 너희들이 보고싶다. 언젠가 우리가 모여서 2019년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면, 그 장소는 분명히 홍콩일 거야. 그때까지 무사해줘, 꼭 다시만나자."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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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06-02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홍콩에 딱 한 번 다녀오고 (하지만 짝사랑은 80년대 부터 품고요)
여행 중 bgm은 그 시절의 영화음악이었고요,

그러나 이젠
홍콩 정치 뉴스에 가심이 아픈 나날입니다. .... 꼭 다시 만나자, 홍콩아.

바람돌이 2021-06-02 10:48   좋아요 0 | URL
그래도 다녀오셨네요. 저는 못가봤습니다. 이 책을 끝까지 보고 나면 살짝 그 시절의 홍콩은 이제 끝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목도 리멤버 홍콩인듯하구요. 마음이 많이 아프고, 홍콩인의 마지막 말에 가슴이 많이 아프더라구요.
 

1961년 무렵 홍콩에서 태어난 홍콩 거주민은 전체 인구의절반이 안 됐다. 만약 성인만 따로 분류한다면 홍콩 출신자의비율은 더 줄어들 것이다. 이 말인즉, 홍콩은 그곳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가 아니라 실향민들의 도시였다는 뜻이다. 고향으로돌아가지 못하고 갇혀버린 이들, 혹은 공산당을 피해 고향을 떠난 이들의 땅. 그들의 고향은 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중국이었고,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땅이 되었다.
- P36

국공내전과 중국 공산화의 여파로 수많은 중국인이 홍콩으로 왔다. 과거와 다른 점이라면 중국 공산화 이후의 난민은 단순한 피난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중에는 중국 제일의 상업 도시인 상하이와 닝보 출신의 자본가와 금융 전문가가 많았다. 대륙이 빠르게 공산화되는 가운데 재산은 챙겨오지 못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경험을 홍콩으로 옮겨왔다. 그들은 홍콩에 ‘시장 자본주의 체제‘를 이식했다. 그러자 홍콩 경제에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제조 공장과 은행이 문을 열더니 금융업이 날로발전했다. 오늘날 홍콩이 아시아는 물론 세계의 경제와 금융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된 배경에 바로 이 중국 출신의 자본가들이있다.
- P40

1967년 이전에도 개혁을 논의했지만 늘 자본가의 반대로지지부진했다. 그러나 이제는 자본도 개혁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좌파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전투적 노조운동은 쇠퇴했다. 그리고 이것이 다음에 올 비극을 잉태했다. 앞으로 개혁이 정체되고 사회가 보수화될 때 다시 변화를 추동할 세력이 깡그리 사라졌기 때문이다.
- P55

‘전통문화의 계승자‘라는 홍콩인의 문화적 우월감을 본토의중국인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홍콩인을 수전노로 취급하는데, 사회주의 중국이 수십 년간 망가뜨린 전통을 지켜낸 곳이영국의 식민지인 홍콩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P58

홍콩인은 특유의 사고방식 홍콩 사회에 기여하지 않은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나쁜 버릇 을 공유하고 있다. 영주권 인정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을 통해 그로 인한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1948년 1차 이민 붐 때 넘어온 이들은 주로 유산계급이라 금붙이라도 싸매고 왔다면, 이번에 온 이들은 몸뚱이하나뿐인 노동 계층이었다. 홍콩 시민들은 신계 일대에 거대한슬럼이 생긴 것도, 저소득 계층의 삶이 더욱 궁핍해진 것도, 교통질서가 어지러워지고 거리가 지저분해진 것도 모두 중국 이민자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중국인을 질서를 해치는 이물질로 여겼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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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체험도 공적도구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여로에 오직 하나 데리고 가는 화두다.
저 국경을 허투루 밟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먼 길 떠나며 가슴 깊이 담아가는 바람이다.
- P40

탐응옵은 흔히 잃어버린 군대‘니 ‘잊어버린 군대‘ 따위로 감상을 섞어 불러온 장제스의 국민당 잔당 가운데 제3군이 본부를 차렸던 곳이다. 여기서 미리 짚고 갈 게 하나 있다. 이 국민당 잔당은 몰래 부려먹었던 정부들이 숨기고 감춰왔을 뿐, 한 순간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린 적 없는 아시아 현대사의 첫 반공용병이자 국제마약시장을 폭발적으로 키운 주인공이었다.
- P46

 탐응옵은 겉보기에 여느 타이 마을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한꺼풀만 들쳐보면 이 마을은 중국이다. 사람들은 타이 말을 쓰고 타이 이름을 지녔지만 저마다 가슴속에 중국을 품고 살아간다. "내 주민증에 담긴 이름은 타이지만 내 심장은 중국제다." 자랑스레 중국이름을 앞세우는 기념품가게 주인 쯔우승윈처럼.
- P53

마약군을 잡아 가두기는커녕 오히려 미국 정부가 대놓고 아편을구입한 꼴인 그 희한한 쇼는 결국 던진 놈의 목을 치는 부메랑이 되었다. 그 결과 1975년 베트남전쟁이 끝났을 때 참전 미군 10~15%가 마약에 중독돼 미국 사회를 뒤흔들이 놓았다. 국제마약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진 것도 바로 그 무렵이다.
그 마약이 모두 미국 정부가 부려먹은 반공용병 손에서 나왔다. 그 하나가 국민당 잔당이었고, 다른 하나는 라오스 비밀전쟁에투입한 Among 이었다. 그 두 반공용병의 마약사업을 지원한 게CIA 였다. 그렇게 CIA가 뒤를 받친 마약이 베트남전쟁으로 흘러갔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국제 마약 카르텔의 뿌리가 되었다. - P59

나는 소수민족 현장을 취재할 때마다 늘 이런 게 안타까웠다. 적어도 이름만큼은 본디 내 몸에 붙은, 내가 원하는 대로 불러주는 게예의다. 빨라응을 따앙이라 부르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을까? 따앙을 빨라응이라 불러 어떤 이문이 있을까? 남이 내 이름을 아무렇게나 부르는 걸 원치 않듯이 민족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작아도 민족은 민족이고, 저마다 역사와 정체성을 지녔다. 그 상징이 바로 이름이다.
이 함부로 부르는 이름에 소수민족 문제의 본질이 남겼다. 다수민족이나 주류사회가 소수를 아무렇게나 버릇없이 대했다는 증거고, 그 결과가 충돌로 드러났다. 소수민족 문제를 풀어가는 길도 본디 이름을 되돌려주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옳다는 뜻이다.
- P69

이게 하나의 이상‘, ‘하나의 정체성‘, ‘하나의 공동체‘를 내걸고입만 떼면 통합을 외쳐온 아세안(ASEAN), 그 축인 타이와 버마의진짜 모습이다. 노래 국경은 말치레뿐 시민 없는 아세안의 정체를폭로한 현장이다. 노래 국경은 인본주의를 외쳐온 21세기의 꿈도국경 없는 세상을 외쳐온 세계시민사회의 바람도 모조리 절망 속에파묻어버린 현장이다.
나는 국경선에 막혀 자유를 빼앗긴 채 경계인境界人으로 살아온따앙 사람들, 그 아린 모습을 기록으로 남긴다.
국경선은 인류 최악 발명품이다!
- P75

‘아편과 ‘민족해방‘, 이 화합할 수 없는 두 조건을 달고 다닌 쿤사의 일생은 1990년대 말부터 와주연합군(UWSA)으로 다 물림했다. 세계 최대 마약군벌로 떠오른 와주연합군은 와주 독립을 외치며버마 정부군과 싸워왔다.
버마 타이 국경에는 이렇듯 ‘민족해방‘을 상표 삼은 마약이 굴러다닌다. 앞서 국민당 잔당이 ‘반공‘을 상표 삼았듯이. 이게 바로마약의 정치경제학이다. 외진 두메산골 반힌맥은 그 민족해방전선으로 포장한 국제마약전선의 심장이었다.
- P93

타이에선 아직 카지노가 불법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정부가 카지노 합법화를 만지작거렸으니 시간문제일 듯. 타이 정부가 카지노를 허가한다면 이 골든트라이앵글이 영순위일 게 뻔하고, 머잖아 이동네는 ‘리버베가스River Vegas‘란 이름이 붙지 않을까 싶다.
아마존강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꼽는 생물다양성의 보고가 바로 이 메콩강이다. 여기에 카지노와 온갖 유흥 시설이 들어서야 속이 후련할까? 국경을 넘나드는 온갖 검은 자본과 권력 앞에 이귀한 자연을 통째로 갖다 바치는 게 옳은 일일까?
그저 강한테 미안할 따름이다.
- P121

댐이라는 거대한 도시 정치 산물을 국경 강기슭 사람들이 막아낸다는 건 콘크리트에 달걀 던지기인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이 억지스런 군인정부 아래서 끄루 띠처럼 소리친다는 건 그야말로 사생결단이다. 으름장 따윈 신경 안 쓴다. 강만 생각한다. 하는 데까지 하는 거고, 가는 데까지 가는 거지." 흰 수염, 굵은 눈주름 사이로 한 경계 넘은 전사 모습이 삐져나온다.
- P136

미군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그 라오스 비밀전쟁에서 각종 폭탄 700만 개, 총폭량 200만 톤을 인구 기껏 400만 라오스 시민 머리 위에 퍼부었다.
‘폭탄 700만 개라고?‘ ‘폭탄 200만 톤이라고?‘
이런 건 군사전문가가 아니라면 실감하기 힘든 말이다. 쉽게 말해 라오스 국민 1인당 폭탄 1.75개씩을 뒤집어썼고, 그게 500kg 짜리였다는 뜻이다. 견줘보자. 세계전사에서 최대 융단폭격으로 꼽는한국전쟁 때 미군이 사용한 총폭량이 495,000톤이었고, 1945년 미국이 히로시마에 터트린 핵폭탄이 다이너마이트로 12,500톤쯤 된다. 폭탄 200만 톤, 이제 어렴풋이나마 감이 오시리라.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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