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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평점 :
10개의 단편 연작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을 읽는건 힘겨웠다.
시대적 배경을 정확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대충 짐작해보건대 1920년대에서 1970년대쯤이 될 것 같다.
캐나다라고 하는 나라의 이미지는 바로 붙어있는 미국과는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펼쳐지는 캐나다의 시골마을의 모습은 미국의 어디라고 해도 음 그렇구나 싶겠다.
아! 저 시절엔 캐나다도 별 수 없었구나, 여성이 온전한 인간으로서 자리를 차지할 수 없는건 똑같았구나 싶어진다.
소녀에서 중년의 여인이 될때까지 주인공 로즈의 삶은 참으로 안타까운 연민을 자아낸다.
이 소설 속 로즈는 너무 현실적인 캐릭터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이 훈계란 이름의 '장엄한 매질'로 당연시되고 정당화되는 시골마을.
아 이건 너무 익숙하잖아.
내가 어린 시절도 아이들은 잘못하면 맞는 것이 당연했다.
얻어 맞고도 반항도 못하고 밥상머리에 앉아 주는 밥을 꾸역꾸역 먹던 기억 하나쯤은 내 나이쯤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페이지쯤 가지고 있을 거다.
하지만 폭력은 그것이 어떻게 포장되든 그저 폭력이다.
아이가 자라는 과정에 몸에 새겨진 자존감의 상처이고, 자신감을 잃게 하는 트라우마다.
로즈가 당한 매질의 폭력은 더 큰 폭력과 대비된다.
딸을 학대하고 강간할 것이다라는 짐작만으로 - 그것도 근거없이 부풀려진 소문만으로- 마을의 노인을 찾아가 죽을때까지 때리는 3남자의 사적 폭력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일상적인 폭력의 행사가 장엄한 매질로 정당화 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이런 끔직한 범죄를 만들어낸다.
더 끔찍한 것은 이런 범죄적 폭력이 일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로즈가 다니는 학교는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며 언제든 강간의 위협이 상존하는 곳이다.
그저 잘 피해다니고 조심하라고 할 뿐 보호는 없다.
한 명의 소년과 은밀한 만남을 약속했던 마을의 다른 소녀는 집이 빈날 약속한 소년을 기다리지만 실제 찾아오는 것은 3명의 소년이다.
그들은 그것을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유희일 뿐이다.
그들은 강간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으며, 멀쩡해보이는 어른으로 자라 잘, 아주 잘 살아간다.
이렇게 자란 로즈가 자존감 충만한 어른으로 자라기는 쉽지 않다.
사랑받고 싶다는 열망은 자신을 사랑한다고 열렬하게 고백하는 부자 청년 패트릭과의 결혼으로 이어지지만, 이 결혼은 시작부터 파경을 예고하고 있다.
패트릭은 자신이 만든 이미지를 사랑할 뿐이고, 로즈를 <코페투아왕과 거지소녀>의 거지소녀로 비유한다.
그는 로즈의 환경을 이해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할 수도 없으며 그저 시궁창같은 환경에서 로즈를 구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즈는 그런 패트릭을 사랑할 수 없지만, 한번도 제대로 사랑받아보지 못한 이 소녀는 혼란을 거듭하다가 결국 사랑받고 싶다는 열망에만 사로잡혀 패트릭과 결혼을 하는 것이다.
로즈가 결혼을 승락하는 이 장면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자아와 인정욕구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로즈의 극도의 분열 상태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다.
패트릭과는 10년만에 이혼하지만 로즈의 이런 분열은 책의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된다.
결혼 중 불륜의 대상이었던 친구의 남편 클리퍼드와의 사랑은 로즈는 절박했지만 클리퍼드에게는 그저 조금 심각한 장난질일뿐이었다.
그래서 사랑할만한 사람을 만났을 때도 로즈는 결코 자신이 일생동안 받은 상처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일생에 걸친 자존감의 상처가 사람을 어떻게 삶의 고비 고비마다 단단한 방어막으로 숨어 들게 만드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소설 속 로즈는 그런 상처로 가득한 여자고 인간이다.
소설의 말미쯤 되면 그래도 이혼도 했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결국 찾아 사회적 성취도 어느 정도는 이루었으니 뭔가 자각하고 깨어있는 로즈를 기대했지만 그런 로즈는 끝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은 이게 현실이다.
우리 삶에서 극적인 반전은 그리 흔한게 아니다.
상처받은 마음은 상처받은 대로 끝까지 안고가는게 실제 현실이다.
로맨스 소설처럼 타인에 의해 상처가 깨끗이 치유되고 이제 불행 끝 행복시작이란건 그야말로 로맨스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