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아는 영국인들이 배우자를 아내가 아닌 여자〉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다. 〈아내는 대서양 건너편 백인 여자들에게만해당되는 말이었다. <여자>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군인들이그 자신은 셋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인간들에게는 오직 한 사람과의 결혼만을 허락하는 그들의 신에게 노여움을 사지 않기위해 쓰는 말이었다.
- P39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며, 이것은 희고 저것은검다>고 부르고 싶어 하는 욕구를 에피아는 도무지 이해할 수없었다. 그녀의 마을에서는 모든 것이 모든 것이었다.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의 무게를 견뎠다.

「내가 살아서 내 딸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걸 듣게 되다니 약한 게 뭔지 알고 싶니? 약한 건 사람을 자기 소유물처럼다루는 거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소유라는 것을 아는게 강한거고 - P66

그들은 거기서, 숲 지대에서 그렇게 살았다. 먹거나 먹히면서, 포획하거나 포획되면서, 보호받기 위해 결혼하면서 퀘이는영원히 쿠조의 마을에 가지 못할 터였다. 그는 약해지지 않을터였다. 그는 노예 사업에 몸담았고 희생이 필요했다.
- P112

네스는 그 목소리들을 듣지 않는 법을 터득했다. 그녀는 에시가 자신에게 말하던 트위어를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일자로굳게 다물린 어머니의 입술, 네스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사랑의 말들을 내보내던 그 입술만 남을 때까지 마음을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이제 트위어 구절이나 단어 들은 짝이안 맞거나 균형을 잃은 잘못된 상태로 떠올랐다.
- P1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읽는다. 이것은 질병과도 같다. 나는 손에잡히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모든 것을 읽는다.
신문, 교재, 벽보, 길에서 주운 종이 쪼가리, 요리조리법, 어린이책, 인쇄된 모든 것들을.
나는 네 살이다. 전쟁이 막 시작됐다.
- P9

뭔가 읽을 것이 있을 때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나는 계속 읽고, 그러고 나면 울면서 잠든 밤사이에 문장들이 태어난다. 문장들은 내 곁을 맴돌다, 속삭이고 리듬과 운율을 갖추고, 노래를 부르며 시가 된다.

어제, 모든 것은 더 아름다웠다.
나무들 사이의 음악
내 머리카락 사이의 바람
그리고 네가 내민 손안의
태양.
- P34

처음에는 하나의 언어밖에 없었다. 사물들, 어떤 것들, 감정들, 색깔들, 꿈들, 편지들, 책들, 신문들이 이 언어였다.
나는 다른 언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떤인간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단어를 발음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 P49

나는 프랑스어로 말할 때 실수를 하고, 사전들의 도움을 빈번히 받아야만 프랑스어로 글을 쓸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프랑스어 또한 적의 언어라고 부른다. 내가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이 가장 심각한 이유다. 이 언어가 나의모국어를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 P53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면서 소련은 이 나라들의 경제 발전만 저해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와 민족 정체성까지 말살시키려고 했다.
내가 아는 한, 어떤 반체제 러시아 작가도 이 문제를 언급하거나 다루지 않았다. 자신들의 폭군을견뎌야 했던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러니까 그뿐 아니라 외국의 지배, 즉 그들의 지배까지 견뎌야 했던 ‘중요하지 않은 작은 나라들‘에대해서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 P61

우리는 아이들을 포함해 열 명 남짓의 사람들로구성된 무리다. 나의 어린 딸은 아이 아빠의 품에안겨 잠들어 있고 나는 두 개의 가방을 들고 있다.
둘 중 한 가방에는 젖병과 기저귀, 아기에게 갈아입힐 옷이 있고 다른 가방에는 사전들이 들어 있다.  - P69

내 나라를 떠나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되었을까? 더 어렵고, 더 가난했겠지만, 내 생각에는 또 덜 외롭고, 덜 고통스러웠을 것 같다. 어쩌면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서건 어떤 언어로든지 나는 글을 썼으리라는 사실이다.
- P82

사막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회적 사막, 문화적사막, 혁명과 탈주의 날들 속에서 느꼈던 열광이사라지고 침묵과 공백, 우리가 중요한, 어쩌면 역사적인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했던 나날들에 대한 노스탤지어,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뒤따른다.
- P89

나는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어를 쓰는 작가들처럼은 프랑스어로 글을 결코 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쓸 것이다.
이 언어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운명에 의해, 우연에 의해, 상황에 의해 나에게 주어진 언어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그것은 나에게 강제된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한 문맹의 도전. - P1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때는 내게도 작은 로망이 있었다.

연애 편지를 잘 썼으면 참 좋겠다라는.....

문과 출신임에도 감수성만은 이과쪽을 닮았으며, 툭툭 던지는 말투를 구사하는 100% 경상도 가시내였던 나는 연애를 하고 있음에도  연애편지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고, 낯간지러운 말들에는 알러지 반응까지 있었다.

그런 나에게도 연애편지를 쓸 수 밖에 없던 시기가 있었으니 애인이 군대를 가버린것이었다.

모든 군바리의 애인의 필수 임무라는 그 편지질을 내가 해야 하다니....

어쨌든 나는 참으로 정성스럽게 연애편지를 썼다. 한달에 한번쯤이었지만....

나중에 애인이 그랬다. "야 니 편지 다 남자편진줄 알더라. 솔직히 내가 내용을 봐도 그게 그냥 남자친구가 쓴거라고 생각해도 하나도 안 이상하다"

멋없게 쓴 편지봉투와 더 멋없는 주소를 쓴 나의 글씨를 보고 주변 사람들이 다 남자가 보낸 편지라고 생각했으며, 심지어 애인놈은 내 편지를 한마디로 웃기기만 한 내용이라고 했다. 연애편지가 아니라 무뚝뚝한 친구의 안부편지 정도랄까?

그에 반해 애인은 그야말로 문과감성 100%의 남자.

보내 오는 답장은 어떻게나 감성 충만하게 연애 편지의 정석을 그대로 밟는지, 어디 연애편지 대회라도 내보내야 할까 심각하게 생각할 정도여서 나를 열등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심지어 글씨도 엄청나게 잘쓴다. ㅠ.ㅠ

애인이 제대를 하고 난 이후에야 나는 연애편지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애인은 지금 뭐하냐고?

지금 내 눈앞에서 소파와 혼연일체가 되어 가끔 방귀도 뀌어주면서 핸드폰과 한몸이 되어있다.

 

그러니까 내게 이 책은 오래전에 잊어버리고 마음 깊은 어딘가에 쿡 쑤셔넣어버렸던 연애편지 감수성을 되살리고 있다.

아니 되살리는 정도가 아니라 미미님의 표현대로 드잡이질 당해서 끌려갔다는 표현이 더 적당하겠다.

노년의 학자가 자신의 첫사랑에게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 연애편지, 평생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그래서 마지막 온힘을 다한 사랑의 노래가 이 책이다.

 

이제 막 소년에서 청년으로 첫 발을 내딛은 롤란트.

아버지의 세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에서 이제 막 다른 세계로 진입한 불안한 청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식도, 면역도, 심지어 자신의 마음조차도 무엇도 모르는 롤란트에게 교수의 아름답고 다정한 부인은 "당신은 너무 오랫동안 소년이었어요. 이제 어른이 된 거예요."(144p)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는 여전히 소년이었다.

사랑이 무너진 순간에도, 마지막 연애편지를 쓰는 그 순간까지도....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나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 내가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그 시기의 사랑은 그저 맹목이고 혼란이고 알 수 없는 것, 그러나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휘둘림 아니었을까?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심장이 찔린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내 자신이 스스로의 열정을 동원해 감각을 고양시킬 수는 있었지만, 내가 한 인간에게, 선생님에게 사로잡힌것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나의 의무인 동시에 기쁨이었습니다.- P46

 

 한 눈에 반한 첫사랑. 그 운명을 순간을 이토록 절절하게 표현하면서 소설은 주인공 롤란트의 흔들리는 감정, 혼란스러운 성장을 따라간다.

사실 이 책의 줄거리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조금만 지나면 롤란트에게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교수의 변덕으로 보이는 행동이지만, 독자의 눈으로 보면 교수의 마음과 혼란이 무엇에 기인하는지 다 보인다.

롤란트를 혼란스럽게 하는 교수의 비밀스러운 잠적이 무엇일지 짐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심지어 내게는 교수 부인의 그 미묘한 감정까지도 손에 잡힐 듯 그려졌다.

교수와 교수부인 그리고 롤란트의 삼각관계 중 모두의 감정이 이해 되었고, 안타까웠다.

 

결국 이야기로만 본다면 이 소설은  뻔하디 뻔한 삼각관계일 뿐이다.

하지만 그 뻔한 이야기를 평생의 속울음을 담은 절절한 고백으로, 연애편지로 승화시키는 것은 순전히 작가인 츠바이크의 필력이다.

동성애자인 교수의 갈등과 절망, 이룰 수 없는 아니 말할 수 조차 없는 사랑앞에 선 인간의 비통함에 울컥하고,

불안하면서도 폭풍같은 저돌성,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아니 몰라서 돌진하기만 하는, 그러다가 벽에 가로막혀 절망하는 청춘의 혼란.

관조적인 자세로 그들을 바라보면서 모든 것을 알고 느끼지만 절대 말하고 싶지 않은, 어쩌면 빼앗는 것으로 교수와 롤란트에게 복수하고도 싶었던 교수 부인의 이중적인 감정들.

이 모든 감정들이 너무 생생해서 독자는 그저 끌려갈 뿐이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oolcat329 2021-04-04 07:3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그저 끌려갈 수밖에 없어요. 세 인물 저마다의 감정 다 이해하고 싶어 몰입해서 읽게 되더라구요.

근데 군대애인하고 당연히(ㅋㅋ)헤어지시고 연애편지 잘 썼던 추억의 구남친으로 남았겠구나...했는데, 결국 끝까지 가셨군요~~^^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바람돌이 2021-04-04 09:50   좋아요 5 | URL
맞아요. 끌려가는거... ㅎㅎ 만약 롤란트가 실제 내 옆의 누군가였다면 이리저리 흔들리는 녀석을 한심해 할수도 있을텐데 누군가의 복잡한 내면을 들여다본다는건 또 다른 이해를 가져오네요. 그래허 소설으루읽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ㅎㅎ

남편이 군대를 좀 늦은 나이에 갔어요. 그 때는 이미 너무 오래 사겨서 그놈의 정때문에 참.... ㅠㅠ

bookholic 2021-04-04 08: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문과감성이 없으셨다고 하는데, 지금 글들은 문과감성이 가득 하시고, 거기에 예능감각까지 더해져서 글이 찰지고 재미있습니다...^^

바람돌이 2021-04-04 09:59   좋아요 5 | URL
오늘의 저를 만든 것은 바로 알라딘의 서재지인들님입니다. 알리디너님들의 글을 보면허 자괴감에 시달리는 날이 얼마였던지.... 알라딤 처음 시작할 때 제 글은 지 인생의 흑역사입니다. 뭐 그렇다고 지금이 명문은 아니지만요. ㅎㅎ

미미 2021-04-04 10: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읽다가 몇번이나 소름이..몇번이나 웃음터지고요ㅋㅋㅋㅋㅋ아 이 리뷰는 거의 <감정과 혼란>책 뒷편에 실어도 좋을 듯한 수준입니다! 고무신 거꾸로 신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평생의 반려로 고정출연 시키신것도 감동이예요! 👍👍😍

바람돌이 2021-04-04 21:00   좋아요 4 | URL
최고의 찬사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책 뒤에는 츠바이크의 유서가 있어서 도대체 제 리뷰는 안 어울릴거라는.... ㅎㅎ 평생 반려는 방금도 제가 해준 봉골레 파스타를 맛나게 먹고 뿌듯하게 소파와 또 혼연일체가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저 쌓인 빨래는 언제 갤건지.... ㅠ.ㅠ

scott 2021-04-04 10: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옹님의 감정의 혼란 번외편이네요 ㅎㅎ 미미님 말씀처럼 이책을 읽은 독자의 후기 편에 실려도 좋을 ㅎㅎ 바람돌이님은 순정파이셨어 ^ㅎ^

바람돌이 2021-04-04 21:01   좋아요 4 | URL
순정파의 숨은 뜻 중에 맹하다는 것도 있다죠. 네 제가 맹했습니다. 조금만 더 약았어야 했어요. ㅎㅎ

새파랑 2021-04-04 10: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 롤란트의 감정, 기쁨과 슬픔에 너무 몰입해서 읽다보니 반전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좋았던듯. 책을 다 읽고나서 세인물 모두의 감정과 행동을 다시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연애편지라는데 공감합니다^^

바람돌이 2021-04-04 21:02   좋아요 2 | URL
아 저는 옛날 옛적에 로맨스 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 그런가 그냥 전개과정은 다 보이더라구요. 결론이 다르고 필력이 다른 거 빼면 장르소설에서는 거의 클리세수준이거든요. ㅎㅎ

희선 2021-04-05 00: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남편분이 됐지만, 예전에 바람돌이 님이 보낸 편지 받고 기뻐했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겠지만, 사회에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있기도 했군요 지금은 예전과 달라졌다지만, 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1-04-05 10:16   좋아요 2 | URL
군바리가 뭐든 안 기뻤겠습니까? ㅎㅎ 좀 다른 사랑 하나도 포용못하는 사회 너무 잔인하지 않나요? 그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말입니다. 월요일 좋은 출발 하세요. ^^ 희선님 댓글로 저는 이미 좋은 출발 하고 있습니다. ^^

syo 2021-04-05 11: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 내 눈앞에서 소파와 혼연일체가 되어 가끔 방귀도 뀌어주면서 핸드폰과 한몸이 되어있다.˝ 이런 증언은 왜 세상 모든 곳에서 들리는 걸까요!

심지어 일생을 문과감성 1%도 없이 살던 三새끼조차 그 혼연일체의 경지에는 틀림없이 도착하였습니다.
시작은 달라도 끝은 같은 곳.....
중년의 남성들이 가는 곳....

바람돌이 2021-04-05 11:52   좋아요 1 | URL
글쎄말예요. 왜일까요? 우리집은 저와 딸들이 다 남편과 잘 놀아주는데도 말입니다.
역시 몸이 무거워져서 자꾸 중력이 끌어당기는게 아닐까라고 요즘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읽고 있던 메트로 폴리스를 딱 한 챕터 남겨두고 이 두꺼운 책을 읽느라 머리가 딱딱해져 가고 있던 나에게 잠시 휴식을 주고자 집어든 책.
딱 30페이지 정도만 읽고 메트로폴리스로 돌아가야지 했지만, 폭풍같은 강렬한 감정들에 휘둘려서 도저히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감정을 극단까지 같이 휘몰아버리는 슈바이크의 필력.
어떻게 이렇게 쓰지?






우리는 무수히 많은 순간들을 경험하지만, 우리의 완전한 세계가 고양되는 순간, (스탕달 Stendhal이 기술한 바와 같이) 모든 진액을 빨아들인 꽃들이 순식간에 한데 모여 결정(結晶)을이루는 바로 그 순간은, 언제나 단 한순간, 오직 한 번 뿐입니다. 그것은 생명이 탄생하는 시간처럼 마술적이며, 체험된 비밀로 삶의 따뜻한 내면에 꼭꼭 숨어있기에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어떤 정신의 대수학도 그 한 순간을 계산할 수 없고, 어떤 예감의 연금술을 가지고도 추측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독자적인 감정을 통해서도 그 순간을 붙잡기란매우 어려운 것이겠지요..
- P17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베를린의 기세등등한 탐욕은 나의 남성성의 흥분과 너무도 닮아 있었습니다. 그 도시와 나, 이 둘은 프로테스탄트적인 실서에 순응적인 문화와 제약에 갇힌 소시민성을 순식간에 박차고 나와 힘과 가능성의새로운 황홀함 속으로 급속히 빠져들었습니다.
- P23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심장이 찔린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내 자신이 스스로의 열정을 동원해 감각을 고양시킬 수는 있었지만, 내가 한 인간에게, 선생님에게 사로잡힌것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나의 의무인 동시에 기쁨이었습니다.
- P46

고귀한 남성의 우울은 늘 젊은이의 정신을 강하게 붙드는 법입니다. 자신의 심연 아래를 응시하는 미켈란젤로의 사상과 처절하게 내면을 향해 꾹 다문 베토벤의 입, 이렇듯 세계 고뇌를 가린 비극적인 가면들은 모차르트의 은빛 멜로디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물 주위에 밝게 퍼지는 빛보다 더 강력하게 청년을 감동시킵니다. - P86

사실, 청춘은 그 자체로 아름다워서아름다움을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청춘의 힘은 활력이 지나치게 넘쳐흘러서 비극적인 것으로 치닫기도 하고,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피를 달콤하게 흠뻑 빨아들이기까지 합니다. 또, 그런 이유로 정신적 고뇌 속에서도 청춘은 위험을받아들이고 형제 같은 마음으로 내민 손을 잡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 P87

 즉 나 자신이 아니라, 선생님이 내 입을 빌려 말하듯 그대로 따라 했다는 사실을. 그렇게 나는 그의 존재의 울림, 그의 언어의 반향(反響)이 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벌써 40년 전 있었던 일입니다만, 지금도 강의에 몰입하다보면 어느 순간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입술을 빌린 다른 이가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나는 나의 입술에 유일하게 숨결을 불어준 그의 음성, 존경하는 고인의 음성을 아직까지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열정의 날개를 타고 날아오를 때면 항상 나는 그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의 그 시간이 지금의 나를결정지어 버렸던 것입니다.
- P103

"당신은 너무 오랫동안 소년이었어요. 이제 어른이 된 거예요.
식탁으로 와서 식사해요. 비극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그냥 오해일 뿐이고 진실은 곧 밝혀질 거예요."
- P144

여기, 한 인간이 그의 삶을 자신의 가슴에서 한 조각 한 조각떼어냈습니다. 그 순간 소년이었던 나는 이 세상의 감정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다는 것을 처음으로 똑똑히 응시할 수있었습니다.
- P182

그리하여 한 인간이 인생에 단 한차례, 한 인간만을 위해 말하고는 영원히 침묵한 것입니다. 마치 죽어가면서 딱 한 번 쉰목소리로 소리쳐 노래 부른다고 알려진 백조의 전설처럼...  - P195


댓글(6)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1-04-03 06: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이책의 감정에 공감이 되니까 정말 몰입이 되더라구요 ㅎㅎ 책에 거의 밑줄^^

바람돌이 2021-04-03 10:45   좋아요 3 | URL
몰입이 될수 밖에 없게 썼더라구요. 심지어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하더군요. ㅎㅎ

blanca 2021-04-03 07: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읽어봐야겠네요.

바람돌이 2021-04-03 10:46   좋아요 3 | URL
순식간에 읽을 수 있습니다. ㅎㅎ

미미 2021-04-03 11: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이렇게 쓰지?공감 ×100! 마치 ˝소설은 이렇게 쓰는 거야˝ 라고 말하듯 심장을 후벼파는 재능♡ 바람돌이님도 이야기 끝날때까지 드잡이 당하신거 맞죠?ㅋㅋ

바람돌이 2021-04-03 21:10   좋아요 2 | URL
드잡이!!
이 소설을 읽는 동안의 자세에 대한 완벽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
 

집은 무덤이었다. 우리의 두려움이나 고통은 모두 폐허 아래 묻혀버렸다. 부활은 없을 것이다. 깨어 있는 시간 동안 맨덜리를 생각할 때면 그렇게 끔찍하지 않았다. 두려움이라고는 없이 살았던 곳,
그런 모습을 그리기 때문이었다. 여름의 장미 정원, 해 질 녘에 노래하던 새들, 밤나무 아래에서의 차 한잔, 아래쪽 풀밭에서 전해지던 파도 소리….
- P9

우리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과거는 아직도 너무나 가깝다. 뒤로 밀쳐놓고 잊어버리려 했던 것들이 다시 떠오른다.
두려움, 근거 없는 공포를 가라앉히려 안간힘을 쓰면서 느끼는 (이제는 다행히도 진정되었지만) 내밀한 불안감 같은 것이 어느새 삶의 동반자가 되었다. 전에도 그랬듯이 말이다.
- P10

하지만 내 삶의 멜로드라마는 이미 충분했고 그래서 현재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받을 수만있다면 나는 내 오감까지도 기꺼이 포기할 작정이다. 행복은 획득하는 소유물이 아닌, 생각의 문제이고 마음의 상태이다. 물론 지금의 우리에게도 절망의 순간은 찾아온다. 하지만 시계로 잴 수 없는 시간이 영원으로 치달을 때 나는 그의 미소를 보면서 우리가함께 있다는 것, 함께 걸어간다는 것, 어떤 의견 차이도 우리 사이의 장벽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 비밀도 없다. 모든 것을 공유한다.
- P11

환상은 부드럽고 다정하다. 그 덕분에 우리는 슬픔과 후회를 이길 힘을 얻고 스스로 선택한 유배 생활의 고통을 누그러뜨린다.
- P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