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환상문학전집 11
필립 K. 딕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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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장맛비처럼 내린 하루다.  

2019년 지구에도 매일 비가 내린다. 일본 신주쿠의 어느 거리처럼 보이는 '천사의 도시' LA는 오래된 고철의 도시다. 빗방울에 오래된 녹이 묻어내릴 것 같다. 리틀리 스콧 감독의 영화<블레이드 런너>에 대한 이야기다. 



워쇼츠키감독의 <매트릭스>가 나오기 이전까지 SF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 중에 한편이 바로 <블레이드러너>였다. 이 영화의 원작이 바로 그 유명한 필립 K 딕의 소설<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이다. 영화와 소설은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에서는 유사한 부분들이 있지만 결코 같지 않다. 원작자 필립 K 딕의 상상력도 뛰어나지만 거기에 새로운 옷을 입혀 원작을 뛰어넘는 제2의 작품을 만들어낸 리틀리 스콧 감독의 능력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행여 이 작품을 아직 못본 젊은 세대가 있다면 찾아서 봤으면 한다.) 필립 K딕의 원작과 리틀리 스콧 감독의 영화를 단순 비교하면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다. 원작에 없는 내용과 설정들이 새로 영화에 등장하고 또 원작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들이 영화에서는 삭제된다. 예를 들어 영화<블레이드러너>에서 가장 멋진 룻거 하우거와 해리슨 포드의 마지막 옥상씬은 소설에 없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다. 4년이란 운명을 다 채운 리플리컨트 로이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마지막 대사를 빗물 속에 남긴다.  

"난 당신들,인간들은 믿지 못할 것을 보아왔어. 오리온좌 곁에서 불타던 전함, 탄호이저 게이트 근처에서 어둠 속을 가로지르는 C-빔의 불빛들도 보았지. 모든 순간들은 시간 속에서 사라지겠지. 빗 속의 내 눈물처럼..... 이제 가야할 시간이야."  

이런 장면은 리틀리 스콧감독의 독창적인 것이다. 원작에서 안드로이드 로이는 영화의 영웅적 애수를 닮은 죽음을 선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죽음이 그리스 영웅의 죽음을 연상시킨다면 원작에서 그 죽음은 오히려 아킬레우스의 칼에 몸을 베인 이름 없는 트로이 병사처럼 처리된다. 

"릭은 로이 배티를 쏘앗다. 총을 맞자 키 큰 로이 배티의 사체가 철쩍 날 듯이 뛰더니 바닥으로 떨어졌고, 잘 깨지는 재질의 부품을 잔뜩 모아 만든 것 같은 그의 몸이 와르르 부서져 내렸다" 

이 장면만 보면 영화가 물론 더 흥미롭다. 그렇기 때문에 필립 K 딕의 원작은 별 볼일 없는 것일까? 절대 그렇지가 않다. 주제의식에 대한 집중방식과 형상화의 유형이 다를 뿐이다. 영화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추격당하는 리플리컨트의 행위를 통해 직접적으로  질문하고 있다면 소설은 이 문제를 추격자이자 주인공인 데커드라는 대상을 통해 끈덕지게 성찰하고 있다. 소설 속에 마지막 명장면이 없다면 대신 안드로이드 갈란드를 은퇴시키고 나서 벌어지는 사냥꾼 필 레시와 데커드의 장면이 있다. 매우 흥미로우며 철학적인 질문들을 담고 있는 장면들인데 영화 속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일시적 협조관계에 있는 필 레시와 데커드는 상대방도 자기도 안드로이드일지 모른다는 불신 속에 인간/안드로이드에 대한 정체성 질문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둘은 모두 기억이 조작된 안드로이드들은 자기가 안드로이드인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안드로이드라면 처형에 있어서도 사무적이리 무감각한 데커드는 오히려 안드로이드의 특징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안드로이드는 영혼을 가지고 있는가? 기계에 지나지 않는 안드로이드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까? 기계에 부분적으로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인간적인 특징이 아닌가? 이 장면에서는 안드로이드에 대한 정체성 뿐 만이 아니라 주인공인 인간 데커드의 정체성마저도 균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영화와 소설의 차이점은 이외에도 여럿 등장한다. 소설 속에 중요한 장치인 '머서주의'나 '전기동물'같은 것들은 아예 영화 속에 언급되지 않는다. 필립 K딕은 인간/비인간의 정체성부터 시작해서 궁극적으로는 그 질문을 '생명', '생' 과 같은 범주까지 끌고 가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데커드가 안드로이드를 처지하고 도달한 지점은 결국 '생'이라는 주제였다. 일종의 '생의 유일성'과 '생명의 불꽃'에 대한 범신론적 깨달음같은 것이다. 영화에서도 그 문제를 궁극적으로 유인해내기는 하지만 소설에 비해서 슬쩍 묻힌다. 리틀리 스콧의 영화 마지막은 몇 가지 버전이 있는데 디렉터스 컷의 경우 리플리컨드 레이첼과 데커드가 함께 달아나는 씬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레이첼도 도망한 리플리컨트이기 때문에 추격당해야하는 신세이다. 하지만 경찰서 소속의 가프는 선물이라도 되는 듯이 그녀를 놓아준다. 가프의 은빛학이 그녀의 아파트앞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결국 도망치더라도 그 끝은 '죽음'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또다른 질문이 중요한 토론 쟁점이 되기도 했다. 데커드는 안드로이드인가? 라는 점말이다. 리틀리 스콧은 열린 대답을 내놓았지만 리플리컨트쪽에 힘을 싣는 인터뷰를 했었다. 인간이든 리플리컨트든 결국 시간의 차이가 존재할 뿐 '죽음'이라는 것을 피해 갈 수 없다. 결국 소설이나 영화는 공히 '죽음' 이라는 것을 통해 '생'의 정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죽는 모든 것은 '생'이다. 그것이 인간이든 안드로이드든 두꺼비든. 하지만 죽지 않는것. 영원한 생명은 이미 '생명'이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가장 비인간적이며 비자연적이다. 영원한 생명만큼 영원한 악몽도 없을 것이다. 

영화말고 소설 속에 나오는 몇 가지 아이디어들은 사회적인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예를 들어 2021년(소설은 2021년 1월 3일 하루동안 일어난 일이다.) 지구는 디스토피아적이다. 미래사회는 배제를 중심으로 한 인간종의 구분이 이루어진 인종주의적 사회다. 이것은 피부색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는 핵전쟁의 낙진으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필립 K딕이 이 소설을 쓴 시점은 1960년대 후반이다. 혁명의 시대이자 또 핵공포의 시대였다. 인류는 이제 4부류로 구분된다. 화성이라는 식민지 개척을 위해 지구를 떠난 사람들,  지구에 남겨진 자들, 그리고 그 중에 낙진피해가 심해져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특수자'들, 그리고 인간은 아니지만 노예인 안드로이드. 화성은 지구를 버리고 지구인은 특수자를 배제한다. 그리고 인간은 안드로이드를 부품으로만 취급한다. 전통적인 의미의 계급적 메타포처럼 보이는 설정이다. 

필립 K딕의 원작에는 시대적인 그림자가 묻이 있는데, 앞서 말한 핵전쟁의 공포같은 것이 1차적이다. 그와 함께 지금의 작가라면 전혀 다르게 그렸을 문제들이 자본의 문제들이 이 소설에서는 시대적 한계로 드러난다. 필립 K 딕의 시대는 일종의 '정치의 시대'였다. 사회의 여러 힘들이 쟁투를 벌이고 있었고 그것의 타도대상이든 조절대상이든 공적인 권력에 대한 가능성이 결코 포기되지 않았던 시대이다. 최소한 그 시대에 자본은 아직 사회적 권력이나 정치권력에 복속되거나 아니면 최소한 조절의 대상이 되던 시절이다. 이 소설에서는 거대자본으로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로젠연합이 등장한다. 이 기업의 기술력은 인간과 구별이 거의 불가능한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곳이다. 당연히 우주식민지 건설에 있어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곳이다. 그런데 이 곳에서 만든 넥서스 6가 문제가 생겼다. 일종의 하자가 생긴건데 이렇게 되면 넥서스 6의 기술은 폐기되게 된다. 기업 입장에서 막대한 피해이자 식민지 건설에서도 거대한 피해를 보게된다. 그런데 그 기술이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파악하러 경찰서 소속 프리랜스 인간사냥꾼 데커드가 달랑 기계 하나 들고 찾아간다. 경찰서장도 넌지시 이 방문의 의미를 이야기하긴 하지만 여전히 단일한 공권력이 이런 전지구적 자본을 견제할 수 있다는 믿음같은 것이 깔려있다. 이런 것을 빼놓고도 데커드 혼자 로젠연합이라는 거대기업에 대응하는 방식은 어쨋거나 개연성이 너무 떨어지는 설정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몇 몇 장치들, 머서주의나 감정이입기 같은 것은 물론 SF적인 상상력이기는 하지만 마치  '이데아와 시뮬라르크'가 미래세계를 배경으로 결합된 것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머서주의라는 것이 결국은 TV 화면앞의 장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데커드는 머서와 오히려 합일을 시도한다.이 기계는 인류의 총체적 소통기계인 셈이다. 자기의 경험과 타자의 경험이 감정이입기와 머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에게 자율적이라는 감정마저도 조절되고 관리될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이런 식의 전개는 디스토피아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1984'식의 통제사회의 다른 버전이다. 비릿한 소통이며 파국적인 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형상화이다. 거기에는 일종의 네크로필리아적인 욕망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Mors certa , vita incerta 

...이 책에서 싫었던 거...너무 친절하게 주인공의 반응과 심리를 '작은 따옴표'로 설명해주려는 장르적인 서술 의지...마지막에 와서 사건을 종결을 위해 기아 변속을 과감히 한 것..책 좀 더 두꺼워지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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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그 은밀한 삶과 치욕스런 죽음 - 불멸의 음반 100 최악의 음반 20
노먼 레브레히트 지음, 장호연 옮김 / 마티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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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에 인켈 오디오가 생겼을 때 나는 석 장의 LP를 샀다. 들국화 1집, WHAM의 <Make it big>, 이문세의 2집이다. 오디오라고 해봐야 컴포넌트 시스템이었지만 얼마나 쓸고 닦았는지 자동차를 산 후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음반의 역사로 보자면 나는 LP시대부터 시작해서 CD 그리고 MP3의 시대까지 살고 있는 셈이다. 다음에 어떤 포맷이 주류를 차지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 음악파일의 형태와 PC를 통한 재생 방식이 아닐까 싶다. 그런 흐름들은 이미 대중음악팬들에게는 익숙한 광경이다. 클래식쪽은 사실 이런 변화에 좀 느리다. 클래식 소비자들의 보수성에 기인하는 것이 가장 클 듯 하다.  기술적으로도 음원압축 방식이 가진 음질문제는 클래식 소비자들의 마음을 아직 편하게만들지는 못했다. 이와중에 여름날 잠시 소나기 그리워하는 반응들도 나타나곤한다. 아날로그나 빈티지에 대한 선호층이 생기는 것 말이다. CD탄생기때부터 아날로그와 디지털사이에는 그런 티격태격이 있었다. 잠정적 결론은 음질이나 음의 풍요로움면에서 아날로그쪽 주장이 승리를 한 것 같다. 그렇다고 CD가 그것때문에 물러날 일은 전혀 없다. CD는 그런 미세함을 양보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여러가지가 있기때문이다. 즉 아날로그로의 퇴행이 주류적 소비방식이 되긴 어려다는 말이다. 결국 앞으로도 소수 매니아들의 소비를 위해 상대적으로 고가의 LP를 찍어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주류 음악시장을 넘볼 수는 없을 것이다. (장비만 좀 된다면 나도 LP쪽으로 좀 가보고 싶다. 내게도 LP의 기억은 소중하니까..) 앞으로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CD포맷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가 정도가 관건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CD의 시대가 그리 오래 갈 것 같지는 않다. 최근에 클래식 음반업계는 구음원 덤핑으로 일부 손해를 만회하려는 추세이다. 과거의 훌륭한 음원들이 저가에 풀리는 것이 반갑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TOP 가격으로 산 음반이 버젯 가격에도 못미치게 나오는 걸 보면 속 쓰리기도 하고 CD도 다됐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 씁슬하다. 

이 책 <클래식, 그 은밀한 삶과 치욕스런 죽음>의 저자가 최근의 'CD덤핑'을 목도했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 책 결론에서 이미 CD의 종언을 선언했기 때문에 덤핑이 비즈니스적으로 당연한 수순임을 저자도 알았을 것이다. 평생을 클래식 음악과 음악평론가로서 살았던  저자는 '눈물의 고별전' 을 앞두고 있는 클래식음반 100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싶었을 것이다. 일종의 '클래식 음반 추도문'으로서 말이다. 살아생전의 영광과 그 마지막을 증명해야하는 마지막 생존자로서의 의무감같은 것이 들만도 하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이 책 <클래식, 그 은밀한 삶과 치욕스런 죽음>이다.  

책은 1920년 빌헬름 캠프가 베토벤의 <바가텔>을 연주하며 실황과 레코딩의 차이를 인식하는 대목부터 시작한다. 이어서 슈나벨과 카루소의 녹음, SP시대와 LP 시대의 도래..위기...CD의 등장..인물들의 흥망성쇠....등등 시간적 서술 속에서 작가는 음악가 개인보다는 레코딩을 중심으로 한 음악 비즈니스와 그 주변인물들에 촛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한다. 이 책에서 주인공은 연주자나 지휘자이기 보다는 음반 프로듀서, 레코딩 엔지니어, 음반사 사장 등이다. LP나 CD 자켓에서 곡명, 작곡가, 지휘자,오케스트라, 독주자..그리고 저 밑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에 대표적인 프로듀서들의 이름을 클래식애호가들은 기억한다.) 물론 중간 중간 연주자나 지휘자들과 이들 사이의 상호협력 또는 갈등 관계의 뒷 이야기들이 숨어있기도 하다.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 중에 어떤 것들은 이미 많이 알려진 것들이다. 그런 내용들은 사실 이런 저런 잡지나 책에 듬성듬성 실려있기때문에 언뜻 언뜻 기억날 뿐 하나로 묶여지지는 않는 내용들이다. 일단 음반을 중심으로 책을 쓰면서 저자는 여기저기 실린 관련 일화들이나 인용들을 꽤나 많이 찾아냈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다. 음악평론가를 하며서 직접 인터뷰한 내용이나 그와의 편지, 또는 사적인 만남등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들도 등장한다. 그렇기때문에 여기에 무슨 역사학의 사료명료성같은 것을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증언들은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독자는 그냥 여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음악관련 인사들의 에피소드나 후일담들을 흥미롭게 '그랫군' 하면서 읽으면 된다. 

이 책에서 SP시대와 LP 초기 시대에는 음반 프로듀서가 주인공이다. 프레드 가이스버그, 월터 레그, 존 컬쇼, 잭 파이퍼들의 이름을 만날 수 있다. 저자는 클래식 메이저 음반사들을 중심으로(EMI,DECCA,DG,RCA,CBS,PHILLIPS) 그들의 태동과 발전,또 상호간의 경쟁구도를 이런 저런 야사를 섞어서 들려주고 있다. 몇 몇 음악잡지나 책이 실린 이야기들도 있겠지만 관계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저자가 얻게된 정보들도 꽤나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다. 물론 여기에 무슨 사료적인 의미의 절대성 같은 것은 없다. 주변사람들의 평가나 반응같은 것들이 주관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흥미롭게 '그랫군' 하면서 읽으면 된다. 특히 이 책에서는 저자 노먼 레브레히트의 영국인 음악가로서의 전통적인 입장이 살짝 묻어 있기도 하다. 클래식 음악팬들은 <그라모폰>지의 취향을 떠올려보면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6대 메이저에서 데카사운드와 조직운영방식에 가장 호감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물론 저자거 대놓고 '나는 데카 매니아요'라고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EMI는 보수적이고 월터 레그의 상술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DG는 결국 후에 음반사의 중심이 되고 지금도 그렇지만 저자 입장에서는 그 출발부터 못마땅하다. DG의 출발에 나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DG의 모기업이 나치 친위대로부터 노예인력을 사들였다고 비난한다.그러면서 도덕적으로 때묻은 회사가 독일 음악의 부흥을 이끄는데 앞장섰다는 점이 영 못마땅하다는 투로 이야기를 흘린다. DG가 전후 아우슈비치에 수용될 뻔한 엘자 실러를 회사 전면에 내세운 이유가 전후 음악가들의 불편한 심기를 은폐하기 위함이었다고 본다. 아이러니 한 것은 DG의 여제가 물러나면서 DG의 실제적 권한의 바톤을 이어받은 것은 나치 복역문제로 시끄러웠던 황제 카랴얀이었다. 미국쪽으로 보자면 RCA는 대형스타와 웅장한 소리를 지향했고 CBS는 자유분방한 민주당의 이미지에 가까왔다. 그가 가장 호의적으로 말하는 곳은 DECCA이다. 그들은 민주적 게이집단이었다. 권위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고 소통을 중시했다. 또한 레코딩 엔지니어들의 진취성도 어느 집단보다 뛰어났다. 훌륭한 음악가들을 포진시켰고 존 컬쇼나 크리스토퍼 래번같은 프로듀서들은 뛰어난 기획력을 보이기도 했다. 실제 아날로그 매니아들 중에는 60년대 데카사운드를 높이 평가하는 층이 꽤있는 걸로 안다.   

저자는 음반산업이 최소한 저 단계에서는 단순한 돈벌이 수단은 아니었다고 본다. 상업적인 측면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당시 음악 비즈니스계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최소한 고급문화의 생산자로서 자부심과 교양같은 것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팝음악의 득세와 음반사의 과잉투자는  결국 LP시장을 붕괴시킨다. 그나마 CD의 출현은 잠시 클래식 음반에게 빛을 주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오히려 음반업계는 새로운 기획보다는 과거의 명연을 다시찍어내는 형태로 빚을 만회하는 형국에 들어서고만다. 저자는 이렇게 된 가장 큰 책임을 '월스트리트'와 '음악관계자들의 방만'에 둔다. 투자자들에게 음반사업의 가장 큰 목적은 자금의 회수와 이윤이다. 어떤 의미있는 기획도, 어떤 훌륭한 연주도 중요치 않다. 최대한 많은 이윤만 창출하면 되는 상품일뿐이다. 즉 그들에게는 '문화생산자'라는 자긍심이나 의미같은 것은 전혀 중요치 않았다. 그러니 진중한 기획보다는 한 방에 뜰만한 음반들이 중심을 이루게 된다. 크로스오버 음악이나, 각종 기능성 음반 기회들이 나오게 된데는 이런 전체적인 압박이 있었던 것이다. 음악관계자들의 문제에서 저자는 특히 두 사람을 지목한다. 황제 카라얀과 일본 소니의 노리오 오가 회장이다. 카라얀과 오가 회장은 둘 다 과시적이고 독단적이 구석이 있었다. 그들은 이미 포화된 상태의 클래식 음반시장에 과잉제작의 광풍을 불러 일으키게 만들었다. 그리고 제작 비용을 급격하게 상승시켜서 자신들 뿐만이 아니라 동종업계까지 힘겹게 만들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일관되게 이 둘의 공모에 탐탁치 않은 시선을 보낸다. 물론 저자는 이외에도 클래식 몰락을 불러 일으킨 몇 가지 추세 또는 원인들을 이야기 한다. CD의 반영구적 특성, 인터넷의 발전, 다른 매체들의 성장, 음악가들의 창의력 부족,소비층의 한정 등등이 그것이다. 

저자는 100년간의 클래식 음반사,음악비지니스계의 뒷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역사는 끝났다'라고 종언을 선언한다. 음반은 사라져도 음악은 남는다는 말로 그 쓸쓸한 퇴장에 송가를 띄운다. 물론 음반이 당장 사라지는 것은 아닐게다. 저자 역시 조금 더 수명연장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그 수명연장도 최소한 대형 메이저 음반사들에게는 별로 기댈 것이 없다. 최근에 음반 카탈로그에 등재되는 대형 음반사들의 목록을 보면 과거 그들이 보유한 '아름다운 시절'의 복각,재출시 음반이거나 아니면 가벼운 성악음반들이 대세다. 몇 몇 보유한 스타들에 기대서 그저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다. 그들의 고비용구조와 투자자들의 도끼눈에 어떤 식으로든 의미있는 실험적인 도전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요즘 클래식음반 애호가들은 마이너레이블에서 음악듣는 즐거움을 찾는다. 하이페리온, 샨도스, 나이브, 알파, 하모니아문디, 낙소스, ECM 그외 정말 국적 불명의 수많은 마이너 레이블들이 레퍼토리나 연주력,음질 면에서 메이저를 앞선지 오래다. 메이저음반사들은 유명 스타군단의 에이전시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상태다.이 마이너 레이블들이 지향하고 도전하는 방식들을 보자면 각기 칼러가 있었던 과거 메이저 음반업계 청년기 시절이 다양성과 진취성이 엿보이는 듯 하다. 이들에게도 경영에 대한 고민은 없지 않겠지만 아직까지는 이들을 대표하는 힘은 메이저 음반 종사자들이 버리고 온 음악에 대한 애정과 깊은 사랑이 아닐까 싶다.  

책의 후반부는 저자가 고른 '불멸의 명반 100'과 '최악의음반 20' 이다. 불멸의 명반은 내가 소장하고 있는 것들이 상당량되고 최악의 음반 20장 중에는 1장이 있더라...유명한 베토벤 3중협주곡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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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동문선 문예신서 142
미셸 푸코 지음, 박정자 옮김 / 동문선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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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코의 1976년 콜레드 주 프랑스강의는 '계보학'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된다. 강의 시작을 알리는 몸 풀기이다. 또한 강의 전체를 지배할 문법에 대한 개괄이다. 푸코는 계보학을 '반과학'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 목적은 과학적이라고 간주되는 담론이 갖는 고유한 권력 효과에 대항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푸코는 첫 날 강의에서 '국부적 앎', '앎들의 봉기' 라는 용어를 쓰면서 비판의 국지적 성격에 대해 강조한다. 계보학의 기획의도를 푸코의 입을 통해 직접 들어보자. 

인식의 과학적 서열화와 그 고유의 권력 효과에 대항하여 국부적 앎들-아마 들뢰즈는 '소수의 앎'이라고 말할 것이다-을 다시 활성화하는 것.  ...  고고학은 국부적 담론성의 분석에 적합한 방법이고, 계보학은 그렇게 묘사된 국부적 담론성에서부터 출발하여 거기서 끄집어 낸 앎들을 작동시키는 전술이다. 

 쉽게 말하면 '당신의 앎이 권력의 자장 안에서 어떻게 틀 지워지고, 상화작용하고 있는지를 파악해야된다.' 는 것이다. '앎'은 결코 '진리' 일 수가 없다.  그렇게 착각되어 지기는 하지만말이다. 특히 푸코에게 타겟은 '계몽사상'이라는 '앎'이다. 푸코와 아도르노가 만나는 지점으로 많이 이야기되는 부분이다. 단순화시켜 보자면 '계몽= 윤리적 선= 진리' 로 가는 구도에 어깃장을 놓는 것이다. 푸코는 강의 중에 이런 작업을 서구 천년의 철학주인인 플라톤주의에 대한 소피스트의 복귀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다분히 푸코에게 가해지던 비판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푸코의 앎과 권력의 문제는 단적으로 우리 고등학교 철학 교과서에 반영된다. 고등학교 철학교과서의-조금도 의심없는 메인스트림은- '소크라테스-플라톤주의'이다. 소피스트는 소크라테스를 비방한, 곡학아세의 이단아이다. 그런데 여기에 "왜?" 라고 "왜 질문을 던지지 않는가?" 하는 것이 푸코식 방법이다.  

푸코는 절대적 진리의 문제보다 '담론과 권력의 문제' 에 중심을 둔다. (푸코에 대한 가장 일반화된 비판이 제기되는 곳이 이 지점이다.) 대신 푸코는 권력-권리-진실의 역학 관계를 묻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한다. 총체적인 진리라든가, 헤겔식의 합의적인 총합 개념을 푸코는 거부한다.

권력의 관계들이 진실의 담론을 생산하기 위해 작동시키는 규칙들은 무엇인가? 

푸코는 자신의 가설과 이론이 일반되는 경향을 스스로 거부함다. 즉 분산된 여러 계보학들에 일관성 있는 이론적 토양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푸코를 구조주의적 틀 안에서 이항적 구도로 환원된다는 비판등은 최소한 그의 바람과는 반대로 작동하고 있는 부분인 것 만은 사실이다. 물론 푸코 텍스트를 독해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자율성이 있지만 푸코로서는 좀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푸코는 일단 자신의 권력 연구의 방법론을 정리한다. 푸코 권력론을 바라보는 핵심은 그가 권력의 문제를 -진실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관계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이 점 또한 푸코 비판에서 흔히 제기되는 문제이다. 여기에 푸코가 <감시와 처벌>등에서 말한  권력의 총체적 규율사회,훈육사회화를 덧 대면 가장 세속화화된 비판의 방식이 부각된다. 즉 푸코는 스스로 이항적인 체계에 빠져들면서 아도르노식의 전체주의 사회처럼 권력의 자장 안에 피할 곳이 없는 공간을 만든다는 것이다. 심지어 메르키오르같은 이는 '신무정부주의자'라고 불렀다. 이런 비판의 핵심은 푸코가 권력의 저항지점을 말살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푸코는 또한 실천적인 지성인으로 감옥문제에 관여했고,싸르트르와 거리에서 사진도 찍었고, 또 그의 입으로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라는 말도 남겼다.  도대체 그는 파리 좌안의 몽상적인 이론가였을 뿐인가 아니면 실천적 지성인이었을까? ) 푸코는 푸코의 앎의 방식에 따라 가장 정합적으로 움직였다. 그의 권력 이론은 그런 점에서 저항을 포기한 적이 없다. 문제는 유토피아를 가정하지 못하면 싸움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오래된 불안과 그에 동반하는 신학이다. 물론 유토피아를 상상하면서 나아가면 존재론적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으며, 나와 내 행동 주변에 천사 가브리엘이 임재함이 주는 충만감이 있을 수 있다.( 지젝이라면 정치적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철회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푸코는 권력 연구의 방법론을 이렇게 제시한다. 

 1) 모세혈관처럼 가는 끄뜨머리에서부터 권력을 포착 2) 권력을 의도나 결정의 차원에서 분석하지 말것 3) 권력을 전면적이고 동질적인 지배의 현상으로 간주하지 말것.-"권력은 개인들에게 면세통과될 뿐 그들 중 누구에게도 달라붙지 않는다." "육체를 관통하는 권력의 민주적,무정부주의적 배급은 없다." 4) 권력에 대해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분석 5) 섬세한 메커니즘 속에서 행사되는 권력은 교육이나 앎의 순환장치의 조직, 또는 그저 단순히 앎의 장치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앎의 장치들은 이데올로기적 구조물도 안고 그것의 동반자도 아니다.    

본격적으로<사회를 보호해야한다>의 강의에서는 권력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전쟁'이라는 역사적 요소를 끌어들인다. 푸코가 하는 일은 먼저 <전쟁론>의 클라우제비치를 뒤집는 방식이다. 클라우제비치는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해 지속되는 정치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푸코는 클라우제비치의 이 말에 앞서 그가 전유했던 다른 개념이 있다는 것을 가설로 설정한다. 즉 클라우제비치가 그 멋진 말을 남긴 건 그 전에 존재하는 다른 종류의 '전쟁-정치'의 관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푸코는 클라우제비치의 말을 "정치는 다른 수단에 의해 지속되는 전쟁이다." 라고 재전유한다. 이것은 역전된 개념을 재역전 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푸코는 '영구적 사회관계로서의 전쟁, 모든 관계와 모든 권력제도들의 소멸할 수 없는 토대로서의 전쟁에 대한 담론' 을 강조한다. 푸코는 "전쟁은 바로 평화의 암호이다." 라고 말한다. 침울한 담론인가? 사람들이 가능한한 멀리해야 하는 담론인가?  그렇다. 최소한 주도적인 철학-법 담론은 이 자격을 박탈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법으로 출발하려면 이런 '영구전쟁담론'은 말살되어야하기 때문이다. 푸코는 자기의 가설이 '빨치산의 담론'이라고 문학적으로 표현한다. 푸코의 정치적 저항성은 이런 두더쥐의 담론일 뿐, 정치적 허무주의나 정치적 저항의 토대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었다.   

푸코는 철학-법 담론의 반대편에 역사-정치담론을 배치한다. 그리고 분석을 영국과 프랑스에 한정하여 이야기 한다. 그는 역사-정치담론의 출발을 1630년경 영국의 청교도 혁명즈음과 17세기 말 프랑스의 루이 14세 말기 프랑스 귀족들의 정치투쟁으로 본다. 

이 때부터 전쟁은 확고하게 역사의 일부분이라는 분명한 형태로 나타났으며 사회를 두 개로 분리시키는 전쟁, '종족간의 전쟁'의 역사가 가시화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푸코는 이런 '종족전쟁'의 원형이 발전된 것을 부르주아 혁명, 계급 투쟁, 인종주의 전쟁까지 확장한다. 물론 맥락적인 차원에서 이런 투쟁들은 개별성을 갖는다. 다만 푸코의 의미는 계보적인 원형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 하다.

  영국-프랑스의 17세기 18세기에 대한 분석은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영국의 경우 프랑스 출산의 기욤이 영국을 정벌하고 종족전쟁의 역사,정복의 역사를 은폐하고자 했던 역사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프랑스의 경우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띤다. 골족과 게르만족의 관계, 갈로로만 시대 형성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석을 소개하며 정복-동화관계에 있어서 훨씬 다양한 스펙트럼이 구성되어 있음을 말한다.(영국-프랑스의 역사에 대해서는 책을 읽는 동안 검색 사이트를 통해 확인하며 넘어가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듯 하다. 최소한 왕조 흐름이라도 말이다.) 

이런 계보적 분석을 통해 결국 푸코가 판독하고자 한 것은 영구적 종족 전쟁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은폐되고 지속되어 왔는가 하는 점이다. 

 푸코의 권력 분석은 먼저 '경제적' 가설과의 결별을 말한다. 자유주의/마르크스주의가 여기에 해당한다. 전자는 권력을 상품. 모든 개인이 무언가 권리를 보유하고 양도하고 이전된다. 후자는  경제적 기능주의가 강하다. 정치권력이 경제에서 존재이유를 찾는방식이 문제가 되며 이 또한 권력을 생산-교환의 방식으로 작동시키고 있다.  
푸코는 '비경제'적 가설에 대해서도 거리를 두거나 확장시킨다. 먼저 권력 억압설이다. 프로이트-라이히의 가설이라고 푸코는 말한다. 푸코의 권력론의 핵심인 '권력은 억압적이기만 한가?' 는 이런 가설에 대한 푸코의 답변이다. 다음으로 권력대치설이다. 이는 니체의 가설로 권력관계의 토대가 힘들의 호전적인 대치로 보는 관점이다. 니체와의 관계에서 푸코의 다른 점 중 하나는 니체가 계몽에 대한 긍정을 예찬한 반면 푸코는 니체보다 훨씬 부정적으로 물고 늘어졌다는 점이다. 푸코는 억압가설과 대치설이 결코 비양립적이지 않다라고 말한다. 푸코는 억압과 전쟁을 관찰하고 이를 수정하여 "권력에서 작동된 메커니즘은 억압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이라는  '생산하는 권력' 이란 개념을 만들어낸다.

 푸코는 과거의 정치사상의 중심인-그리고 여전히 유효한- '계약-압제' 가설에서 가장 먼저 폐기시켜야할 것으로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지목한다. 홉스는 선험적인 권리를 주장하고 이에 대한 양도가 가능하다는 가설을 통해 이를 적용시켰다. 푸코는 '만인에대한 만인의 전쟁'이라는  홉스의 자연상태는 가상적인 것일뿐 실제적인 힘들의 직접관계가 아니라고 말한다.즉 홉스의 전쟁상태는 일종의 '의지의 대립'일뿐이고 , 조정되어야하는 외교의 대상일뿐이다. 
푸코는  홉스가 실제로 제거하고자 했던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했던 정복의 문제였다. <리바이어던>에는 언제나 계약이 있고 신민들의 겁먹은 의지가 있다.  홉스가 모든 전쟁과 모든 정복의 뒤에 계약을 다시 놓고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이론을 보존했던 것은 바로 이 투쟁과 영구 내전의 담론을 교묘하게 회피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홉스의 가장 큰 적은? 전쟁이고 저항이다. 푸코는 권력관계는 법이나 주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지배안에 다시 말해서 역사적으로 널리 펼쳐진 한없이 두텁고 많은 지배관계 안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고, 따라서 역사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앞서 말했지만 이 문제는 푸코 스스로도 주체의 자기실현을 통해 해결하려는 문제였고, 또한 비판이 되기도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푸코의 텍스트 안에는 실천적 의지를 통한 해방의 가능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푸코는 홉스 대신에 조금은 낯선 불랑빌리에라는 프랑스 귀족학자를 분석한다. 불랑빌리가 분석한 프랑스는 왕과의 권력 투쟁에 2개의 전선-즉 귀족/부르주아지가-이 동시에 존재한다. 골족부터 시작되는 계보학적인 권력의 상호관계와 전쟁,지배,동화,재역전의 문제(골족의 멸망한 귀족이 앎을 통해 어떻게 재역전되는지 재미있다.푸코의 저항담론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런 재역전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흥미롭게 따라읽어도 좋은 내용이다.

 그는 불랑빌리에의 현재적 의미를 몇 가지로 정리한다. 

1)전쟁의 우위성 부여 '어떤 형태의 사회건 그 어떤 사회에도 자연법은 없다.' '자연의 평등법칙은 역사의 불평등법칙 앞에서 허약하기 짝이 없다.' '자연의 힘보다 역사의 힘이 훨씬 크다' 상호간에 아무런 지배관계도 없는 개인들 사이의 자유, 그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각기 다른 사람들에 대해 완전히 평등한 그런 자유, 이 자유와 평등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힘이 없고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일 뿐이다. 

2)전쟁이 한 사회체에 자국을 남기는 것은 더 이상 침략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군사제도의 교대를 통해 모든 민간 질서에 전체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푸코의 개념 '내적 제도로서의 전쟁' 

3) 침입과 전투에 의해 표출된 어떤 특정의 힘의 관계가 어떻게 조금씩, 그리고 눈에 띄지 않게 역전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푸코의 개념 '전복의 내적 메커니즘'-->순환론적인 결정론이 아니라 영구적 권력순환 

4)불랭빌리에는 전쟁관계를 모든 사회적 관계 안에 잡아넣었다. 그러나 그의 전쟁은 일반화된 전쟁이다. 그것은 개인들의 전쟁이 아니라 그룹에 대한 그룹의 전쟁이다. 

푸코는 역사-정치담론으로서 '전쟁'의 중요성은 대혁명 이후 축소되었다고 말한다. 
18세기 귀족들이 주체로 부각시킨 '민족'이라는 개념을 부르주아지가 재부활시켰다. 귀족적 반동으로 쓰인 민족은 '왕과의 일체'가 중심적인 핵이었다. 반면 이제부터 민족을 구성하는 것은 왕이 아니고 다른 민족과 싸우기 위해 왕을 세우는 새로운 '민족'개념이 재가동된다. 민족은 국가라는 이름을 얻는다. 이어서 부르주아지는 인민이 되고 국가가 된다. 
  

 이제 푸코는 '권력과 국가'의 문제를 '국가 인종주의' 발전 도상까지 왔다. 17-18세기 신체에 집중된 권력 기술이 18세기 말 신체가 아닌 '생명'을 대상으로 바뀐것이다. 푸코의 권력 개념중에 중요하며 자주 인용되는 '생물정치'(생정치,삶정치 등등으로 번역된다.)란 단어가 나온다.
'생물정치'(바이오 폴리틱스)는 육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종으로서의 인간을 향해 행해지는 권력문제에 관심을 둔다.권력과 앎의 상관관계로 보자면 인구통계학,우생학,공중보건학, 멀리는 사회보장제도가 이런 바이오폴리틱스와 관련을 맺는다. 물론 신체에 작용하는 권력의 기술과 생명에 작용하는 것 사이에는 대립적이지 않는 관계가 설정된다. 푸코는 생물권력이 작동하는 정치제도 안에 인종주의가 개입되고 이는 근대국가에서 행사된다. 도덕주의나 프로파간다의 문화주의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조금 낯선 대목이겠지만 그는 근대 인종주의의 특성은 의식 구조,이데올로기,권력의 거짓등과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권력의 기술하고만 관계한다.즉 이 말은 근대국가는 어느 경계선에서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 안에 이미 인종주의적 맹아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푸코는 나치의 생물권력과 절대군주가 결합된 방식을 '근대국가 기능 안에 새겨진 절대군주의 기제가 도달하는 최종지점'이라고 말한다. 

<사회를 보호해야한다>의 뒷장에는 이 책이 푸코 지적 여정 속에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말해준다. 즉 일종의 휴지기이며 이행기인 상태에서 나온 강의라는 것이다. <감시와 처벌>과 <성의 역사1권: 앎에의 의지>를 탈고한 이후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두 책에서 다루어진 문제들-권력과 앎의 문제, 규율권력-생체권력의 문제 등이 저자의 입을 통해 비교적 친절하게 다루어진다. 푸코가 근대정치사상에 기여한 지점에 관심이 있다면,또한 푸코의 전복적인(이제는 그렇지도 않지만) 접근방식에 관심이 있다면 푸코의 육성으로 그의 생각의 일면을 엿볼 수 있을만한 책이다. 특히 냉전 이후 '일상의 전쟁화'가 코드화된 한국에서 푸코의 접근은  이해되기 쉬운 대목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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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폴라니의 경제사상
J.R.스탠필드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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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그 경관의 일부분이 되어 버린 다수의 사건이-사람들은 이것을 보편적이라고 합니다- 실상은 명확한 역사사 변화의 소산이라는 점을 밝히는 일입니다."  ......미셀 푸코 <자가의 테크놀로지>중에서 

화제가 되었던 TV 광고 카피가 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웃고 넘기자니 실업자 100만 시대에 사는 직장인으로 입맛이 쓰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에서 전가의 보도로 쓰이는 말이 '구조조정' 아니던가? 정규직의 미래는 비정규직이고, 비정규직의 미래는 노숙자가 아니던가?  모두들 공포와 안도의 이중주 속에서 쩔뚝거리며 살고 있다. 20세기 초, 시장자유주의가 초래할 사회시스템의 붕괴를  경고했던 경제학자 칼 폴라니가 지금 한국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모습을 본다면 어떤 쓸쓸한 말을 건넬까 궁금하다.   

신자유주의가 시대의 진리인양 행세하고 있을 때 국내에서는 그에 대한 이론적 방어로 장하준의 '제도주의'가 관심을 끌었다. <사다리걷어차기>,<나쁜 사마리아인>등을 통해 장하준은 피할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여지는 '신자유주의'에 반격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는 일종의 조합주의적 대안을 이야기했다. (장하준의 분석과 조합주의 대안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비판이 있었다.) 그에 대한 비판은 생략하더라도 최소한 그의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은- 새로운 것이 많지는 않지만- 답답한 사람들의 마음에 희색을 돌게했다. 그는 시장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세계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실제로는 보호주의 속에서 성장을 해 놓고 현재의 이해를 위해 '사다리를 걷어차는 식'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비난했다.자본주의의 역사적 성장과정을 예로 들면서 '시장 자본주의'는 영원 불변의 가치가 아닌 역사적이며 상대적이며 또한 말처럼 '진정한 자유방임'인적이 없었음을 지적한다. 장하준의 제도주의적 문제제기 덕분에 국내에서 다시 관심을 끌고 있는 사람이 바로 경제인류학자인 칼 폴라니이다. 그는 시장 자본주의를 인류사적 발전의 도정 위에 올려놓고 그 허구성을 날카롭게 분석한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거대한 변환>도 이런 바람을 타고 오랜만에 국내 재출간을 앞두고 있다. 

칼 폴라니의 개념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배태성(embeddness)'이다.  embed라는 말은 주로 수동형으로 쓰이는 단어인데 '어디 어디에 파묻다' 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제 두가지 질문이 생긴다. '무엇을 어디에 파묻느냐?' 는 주체와 대상의 문제다. 폴라니는 자본주의 역사를 분석하면서 '경제' 는 사회 시스템의 한가지 구성요소임을 강조한다. 결과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랬듯이 '경제'는 '사회' 속에 파묻혀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경제'를 독자적인 것으로 이탈시켜놓은 전통적인 경제학의 형식주의와 시장방임주의자들을 비난한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시장 신화와 그들의 자본주의는 사회 전체의 가치와 존립기반을 붕괴시킨다. 폴라니의 '배태성'을 그대로 전용하면 하면 그들의 자본주의는 편협하고 몰역사적이며,자민족중심적인 즉 이탈된(disembedded) 것이다. 이제 앞서 말한 몹쓸 TV 광고 카피를 폴라니와 연결시켜 보자. 폴라니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재-배태성' (Reimbeddeness)은 이런 말이다.'  

'집 나간 경제, 너도 개고생 그만하고, 남들 개고생도 그만 시키고 이제 사회의 품으로 돌아와라'

그렇다면 사회의 우선성을 요구한 칼 폴라니의 경제 사상에 영향을 준 것들은 무엇일까?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꼽을 수 있다. 폴라니는 <초기 제국에서의 교역과 시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느 누구도 지금까지 인간생활의 물질적 조직을 깊이 꿰뚫어 본 사람은 없었다. 그는 사회 속에서 경제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의 문제를 폭넓게 제기하였던 것이다. 

폴라니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 사회의 시장경제를 통해서 경제에 대한 사회의 우월성과 경제의 '형식주의'에 반하는 '실체주의'의 전거를 확보한다. 모든 그리스 철학의 핵심 과제는 '공동체의 안위'로 귀결된다. 폴라니가 관심을 가진 것은 정보의 평등과 합리적 의사결정이라는 허구적 상황하에서 수요=공급의 일치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경제행위가 제도화되는 방식,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제도가 사회,정치,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폴라니가 '얼치기 시장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한 것은 단지 그것이 경제 행위 한가지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탱하고 있는 사고방식과 그들이 만들어 내는 시장신화와 이기적 개인이라는 근대적 개념들은 한 사회의 시스템 자체를 붕괴 시킬 끔찍한 디스토피아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폴라니는 그런 면에서 형식주의자들과 달리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시장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 외에 폴라니는 마르크스와 오웬에게 영향을 받는다. 특히 그는 오웬이 제기한 '자본주의적 경향성이 갖는 항구적 악의 산출'이라는 문제를 문화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여 수용한다.  폴라니는 마르크스에게도 영향을 받았지만  일정정도 선을 긋는다. 문제는 마르크스의 '경제 결정주의'-정확히 말해서는 폴라니의 시대에 마르크스주의의 주류였던 '제 2 인터내셔널의 경제주의-에 반감때문이다. 폴라니의 방법론이 가진 인류학적 상대주의와 다원적인 경제사관은 마르크스의 '총체성'과 이론적으로도 어느 정도 배치될 수 밖에 없다.  

폴라니는 세칭 말하는 아담 스미스부터 시작되는 수요-공급의 주류경제학에 대항해 '인류학과 비교경제사'를 학문적 방법론으로 채택한다. 그는 시장자유주의자들이 제기하는 '이기적 인간관'에 제동을 걸면서 고대 사회의 경제 연구를 통해 '호혜성','재분배','증여' 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한다. 폴라니의 경제인류학의 연구의 사례들을 여기서 모두 설명하기란 힘들다.결론적으로 역사적 과정을 통해 그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자본주의적 인간'과 '자본주의적 사회'의 출현은 인류 역사에서 근자의 일이며 또한 일반적인 형태도 본성적인 태도도 아니었음을-폴라니는 자민족주의적 경제라고 말한다- 증명한다.  '시장자유주의자'들이 줄곧 외치는 '자본주의=이윤동기=이기적 인간본성'이라는 식의 도식 역시 고대 사회의 경제 연구를 통해 의심받는다. 고대의 어떤 사회에서도 '경제'를 우위에 둔 사회는 없었으며 '공동체'의 안위를 파괴하는 '이기적 개인'이나 제도를 방치한 사회도 없다.  

만약 사회의 실체인 인간과 자연,뿐만 아니라 이를 조직화한 기업이 파괴적인 악마의 맷돌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면...어떤 사회라도 무지막지한 허구적 시스템의 결과 앞에서 잠시도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폴라니는 <거대한 변환>에서 이런 전통 사회의 흐름이 단절되는 19세기의 사회경제를 집중적으로 분석한다.(이 책의 저자인 스탠필드는 폴라니와 달리 17세기론을 주장한다.) 그는 19세기 자본주의 경제의 제도적 특징을 '세력균형','금본위제','자유국가','자기조정적 시장경제' 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자기조정적 시장경제'라는 것이다. 이 말은 시장이 알아서 합리적으로 결정해준다는 시장자유주의자들의 금과옥조이자 신화이다. 폴라니는 결코 시장경제가 인간조건의 자연적 또는 자연발생적 성장의 결과가 아니라고 본다. 또한 자기조정적 시장이라는 것 역시 하나의 이데올로기였으며 이것이 점차 정책에 영향을 미쳐 자유방임주의 정책을 만들게 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결국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설계' 라는 개념이 중요하다. 그에 따르면 다수의 시장만 가지고 시장경제가 형성되지는 않는다. 아담 스미스 이전에도 시장은 많았고 어디에나 있었지만 그것을 '시장경제'라고 하지는 않는다. 폴라니는 시장경제 발생의 '인간설계'의 중요한 요소로 '국가의 개입'을 들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시장자유주의자들은 '국가'를 적대시하며 '최소국가'를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국가의 제도적 지원의 혜택을 누린다. '이현령 비현령 상인윤리'다.   

시장경제가 이렇게 형성되었으면 교환이라는 것이 핵심요소로 나서야한다. 자본주의적 교환은 '상품'이 없으며 불가능하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폴라니의 유명한 개념인 '허구적 상품'이 시장에 당당히 나서는 것이다. 폴라니는 '노동, 토지, 화폐' 를 허구의 상품이라고 말한다. 

노동, 토지와 화폐는 본래 상품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노동은 생활 그 자체와 함께 하고 따라서 그 성질상 판매하기 위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며..인간 활동의 다른 이름이다. 토지는 인간에 의해 생산되지 않는 자연의 다른 이름이다. 실질적 화폐는 결코 생산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며 은행이나 국가재정의 메커니즘을 통해 존재하게 되는 구매력의 표시일 뿐이다. ... 노동, 토지, 화폐에 상품이라는 말을 붙인 것 자체가 완전히 허구적이다. 

물론 폴라니는 이 세가지 요소가 상품처럼 교환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 스탠필드의 설명을 조금 더 들어보자.  

폴라니의 핵심은 시장경제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상품의 허구성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것, 이것은 시장경제의 허구적 또는 신비화된 기초는 자기조정적 시장경제의 신비적 성격으로 나타난다.허구적 전제를 기초로 세워진 시장경제의 모양은 사회조직의 현실적 개념이 아니다. 이는 철저하게 유토피아적 개념인 것이다.  

폴라니의 견해를 정리하면 시장자유주의 경제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실체이긴 하지만 이질적인 녀석이다. 또한 그 출발부터 시작해서 유지양상조차 허구적이다. 그런데 두려운 것은 이 녀석을 그냥 두었을 경우 사회는 총체적 파국상태를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폴라니를 비관주의자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마지막에 중요한 개념이 하나 더 있다. 미셀 푸코는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폴라니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 

인간사회는 자기 파괴적인 메커니즘을 무디게 하는 대항적 방어운동이 없었더라면 멸망했을 것이다. 

폴라니는 '자기조정적 시장'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반동적인 움직임'이 늘 상존한다는 것을 말했다. 자기조정적 시장이 인간본성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기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자연발생적이라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폴라니는 국가의 개임 뿐만이 아니라 역사적 제단계-심지어 제국주의나 민족주의,법인기업들-마저도 그런 방어적 반응의 주체가 되곤 한다고 말한다. 폴라나의 이러한 생각은 '조합주의 복지국가'나 '혼합경제'에 반영된다. 그는 자신의 주장이 좌파 집산주의로 오해받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속류 맑스주의 목적주의적 결정론과 반자유주의에 반대했다. 그와 함께  폴라니는 방어적 반응이 시장경제의 보완물로 작동시키는 '협애한 개입주의'에도 선을 긋는다. 그는 자기조정적 시장경제 해체를 요구하지만 결코 이것이 시장의 소멸을 예고하지는 않았다. 시장메커니즘은 어쨋든 도구성을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장경제가 붕괴되는 자리에 두가지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것은 관리된 경제를 운영하는 두 가지 사회적 실체로서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이다. 폴라니는 이탈된 경제를 복원하여 '관리된 경제'로 돌아섰을 때의 문제를 '자유'의 훼손으로보는 '편협한 자유론'을 공격한다. 

자유주의자에게 자유의 개념은 단지 자유기업의 옹호로 전락하였다.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은 무책임의 경제학을 대표하는 것이다.  

J.M 클라크는 '통제의 경제학은 무책임의 경제학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라는 말로 나쁜 자유에 대항하는 소중한 자유의 의미를 되짚어내었다. 폴라니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 보다 풍부한 자유를 제공해야 할 임무에 성실하는 한 권력이나 계획화가 인간에게 등을 돌리고 인간이 그 덕분에 구축하고 있는 자유를 파괴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이것이 복합사회에 있어서 자유의 의미이다. 

<칼 폴라니의 경제사상>은 폴라니의 경제사상의 출발과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폴라니의 저서들을 중심으로 주된 이야기를 끌어나가고 있지만 조금 더 가시성 높은 설명을 위해서 폴라니 이후 연구자들과 경제인류학자들의 저서들 중 유사한 대목들을 인용한다. 또한 역자의 보론에서는 제도주의학파의 창시자로 알려진 베블렌과 폴라니를 비교하여 제도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경제인류학을 통해 유사한 접근을 시도한 폴라니를 동류항으로 묶고 있다.또한 간략하게나마 베블렌 이후의 제도주의 지류들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는 것도 장점이다.  

이 책에 나오지는 않지만 폴라니의 한계에 대한 부분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그의 방법론이 '고대'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 계보적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 형성과정의 허구성을 지적해 낸 부분은 인정하지만 역사적 존재로 등장한 자본주의 이후의 문제에 대해 치밀하지 못하다는 점, 또는 문헌적 접근을 중심으로 한 결과 결국 실제적 생산-노동의 관계성 속에서 작용-반작용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 또한 자연스러운 반작용 형성과정을 형식적으로 설명하며 동력 형성의 주체 문제는 거론되지 않는다는 점, 국가와 자본을 둘러싼 담론에서 국가의 선험적 중립성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자본주의 외에 대안이 없다', '시장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이다'는 식으로 고개를 박고 있는 사람들에게 폴라니는 충분한 해독제 역할은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관적이게도 '종교적 신념'은 때로는 맹목적이어서 잘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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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 한길컬처북스 23
바트 무어-길버트 지음, 이경원 옮김 / 한길사 / 2001년 2월
평점 :
품절


베르너 헤어조그의 영화 <위대한 피츠카랄도>를 기억하는가? 피츠제랄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보다는 조금 덜 유명하지만 그래도 관뚜겅 열기전에 봐야할 '세계 100대 영화' 같은 강박적인 목조르기를 요구하는 목록에 가끔 들기도 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오페라매니아인 피츠카랄도가 자신의 근거지인- 제국주의 사업현장이다- 아마존 강가에 오페라 하우스를 짓고자 한다. 다들 미친 짓이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무모함마저 번뜩이게 보이는 금발의 백인은 증기선을 타고 오페라하우스를 지으러 간다. 하지만 가는 길에 난관에 부딪힌다. 폭포와 물살이 세서 도저히 원하는 목적까지 뱃길로 갈 수가 없는 것이다.  무모한 예술광은 드디어 사람들이 꿈에서나 상상하던 일을 실행한다. 배를 타고 산을 넘는 것이다. 실제 촬영도 증기선을 끌어서 산을 넘는 장면을 찍는다.마치 다큐멘터리인양 말이다. 영화 호사가들에게 가장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킨 건 실제로 인력을 동원하여 배를 산으로 넘긴 헤어조그의 광기어린 스펙터클이다. 이발소 그림같은 CG가 난무하는 <반지의 제왕>류의 스펙터클과는 완전히 종류가 다르다. 실제로 이 장면은 아마존의 야성과 날 것으로서의 광기가 결합을 하여 눈을 뗄수 없게 한다. 대형 화면에서 봤다면 영화의 줄거리나 해석을 떠나 이 장면이 주는 스텍터클과 살아 있는 장면을 만든 뒷이야기가 주는 아우라로 인해 순간적으로 해석적 감각이 교란되는 경험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위대한 피츠카랄도>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원주민과 피츠카랄도의 첫 대면장면이었다. 서구와 비서구의 시선이 교차하는 긴장을 상당히 멋지게 영상화해내었다. 아마존강의 고요한 흐름과 간헐적으로 울어대는 이름모를 이국의 새들. 그리고 그 어딘가에 숨어 있는 눈동자들. 이런 긴장에 이물감을 던져 넣는 것이 축음기를 통해 나오는 오페라다. 서로 다른 문명이 서로를 맞대고 숲의 리듬과 오페라의 멜로디를 따라  이렇게 치열하게 만나는 장면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바둑 고수들의 대국처럼 서로 한 점의 포석만을 해놓고 장고를 하는 것 같았다. 오페라는 이 영화를 끌어가는 모티브이자 피츠카랄도의 의지이고 또 문명의 상징이다. 그리고 또한 피스카랄도의 실패의 증거이며 끝까지 잃지 않으려는 서구 인본주의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흔히들 영화<쇼생크탈출>의 교도소 오페라씬을 영화 속 최고의 오페라 씬이라고 추천한다. 그렇지만 내게 -그 해석의 정치학을 떠나서- 최고의 오페라씬은 아직까지는 <위대한 피츠카랄도>의 고물 배 위의 오페라씬이다. 실패했지만 시거를 하나 물고 뱃전에서 오페라를 듣는 클라우스 킨스키의 미소는 잊혀지지 않는다.그리고 그의 당당함에 영화의 지배적 의미가 부여될 때 이 영화의 정치성은 '위대한 인간의 휴머니즘'이라는 식민담론이 백인을 미화해내는 정치적 전형을 따라가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인간 승리'라는 유혹적인 반정치의 방식으로 정치의 문제를 반어적으로 각성시키는 셈이다.  

바트무어 길버트의 <탈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를 이야기 하기 전에 글머리가 너무 무거워졌다. 언젠가 '피츠카랄도'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했는데 떡본김에 제사지내는 심정이 되었다. 이 책은 탈식민주의 이론에 대한 전반적인 입문서로서 상당히 잘씌여졌다. 저자의 글쓰기 방식이 평이해서였는지, 역자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돋보여서인지  이런 류의 번역서에서 종종 발견되는 소화불량은 거의 없었다. 이 책이 특히 돋보이는 것은 입문서로서 가져야 할 서술의 방법과 접근태도가 일목요연하다는 것이다. <탈식민주의 저향에서 유희로>의 구성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론에 해당하는 부문에서는 '탈식민주의 이론'의 전반적 경향을 일러둔다. 탈식민주의에 대한 현재적 비평-즉  텍스트화된 자족적 비평과 학문적 정체-를 소개하고 이런 비판의 정당성과 반론의 근거를 이야기한다. 먼저 저자는 현재 '탈식민주의 이론'을 둘러싼 비판적 논의를 이해하기 '탈식민주의 비평'과 '탈식민주의 이론'을 방법론적으로 구분한다. 이 책에서는 후자쪽에 중심을 두고 이후 주요 작업이 이루어진다. 본론에는 '탈식민주의 이론'의 '성삼위'라고 말해도 무방할 세 명의 주인공들의 이론이 소개된다.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 호미 바바이다.(올해 번역 예정된 책 중에 호미 바바의 <민족과 서사>가 있는 것으로 안다.) 이 책에서는 먼저 각 사상가들의 이론이 출발하게 된 계기와 방법론, 그리고 그들 이론의 변천사를 정리한다. 이 세사람은 모두 탈식민주의 이론가로 칭송받지만 '탈식민주의'에 접근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사이드가 '서구/비서구'의 이항대립적 구도를 명확히 전거로 삼고 있다면 스피박은 '하위계층'과 '페미니즘' 문제에 호비바바는 '양가성'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 그렇다보니 서로 비판하며 충돌할 수 있는 대목들이 나온다. 저자는 그런 문제들을 그 때 그 때 상호비교를 통해서 설명한다. 즉 차이를 통해서 그들 이론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좀 더 명쾌하게 이해시키는 것이다. 이 세 명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나면 결론 부문에서 저자는 '탈식민주의 비평'과 '탈식민주의 이론'과의 변증법적 화해를 도모한다. 기본적으로 이 둘 사이의 단절보다는 연속성을 인정하면서 다양성과 차이성의 발현을 해소되지 않는 방식으로 결합시키기를 요구한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대위법적인 화해' 그 중에서도 '무조협주곡'의 화해라는 것에 저자가 긍정적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저자는 먼저 현재 탈식민주의 이론에 대한 항간의 비판으로 식민성 논의에 '고급 이론'의 도입을 통해 '텍스트적 혁명' 즉 지적 유희단계로 나아가는 경향성에 대해 언급한다. 이런 차원에서 탈식민주의 이론의 시작점 또는 분기점으로 보는 것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다. 이 책의 선구적 업적은 사이드의 옹호자나 비판자들 마저도 인정하지 않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는 <오리엔탈리즘>을 기점으로 해서-그래서 저자 입장에서는 이 책을 분기점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탈식민주의 비평' 과 '탈식민주의 이론'으로 구분한다. 그렇다면 '탈식민주의 이론'에 전거가 되기도 하고 또 탈식민주의 이론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가 되기도 하는 '탈식민주의 비평'은 무엇인가? 시간적으로 보자면 물론 <오리엔탈리즘>이전에 존재했던 강력한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 비평전통이다. 이 책은 주로 아프리카 탈식민주의자들을 이야기한다. 물론 다양성과 차이성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책 후반부에 일종의 모델로서 카리브해 비평모델을 설명하기는 한다. 우리에게 가장 유명한 탈식민주의 비평가는 알제리의 파농이다. 그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은 '탈식민주의 비평'의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받으며 또 '탈식민주의이론'이 역사성과 물질성을 수혜받을 수 있는 전거로 자주 제시되곤 한다.  

이 책에서는 '탈식민주의 삼총사'의 이론을 비판하면서 세가지 비평의 잣대가 자주 동원된다. 먼저 탈식민주의 자체 내의 상호비평, 두 번째는 탈식민주의 비평가들의 작업, 마지막으로는 마르크스주의 비평이다. 아마드의 <이론 안에서>는 이 책 전반에 걸쳐서 여러번 거론된다. 물론 이 세가지는 다시 합종연횡의 방식으로 각각의 이론들의 비판과 반비판의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내부 비판과 외부자극이 가능한 것은 궁극적을 '탈식민주의론' 자체가 다루어야 하는 대상이 정치,경제, 문화, 민족, 인종, 역사,정체성, 주체,  등등에 걸쳐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방법론적 접근에 있어서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이 전거로 삼는 이론들의 혼재성도 문제가 된다. 사이드는 푸코와 그람시를 혼합하려고 한다. 스피박은 데리다와 마르크스를 넘나든다. 바바는 푸코와 라캉이 서로 덧붙여진다. 저자는 여기에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이 스스로 끊임없이 또는 모순적인방식으로 자신들의 이론을 수정해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이드의 경우는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사이에서도 차이가 생긴다. 결정론적인 푸코를 받아들였던 사이드는 후기에 가면서 저항의 문제와 저항 주체의 긍정성에 대해 훨씬 우호적으로 나아간다.또한 방법론적으로도 앞의 저서가 서구작가들의 텍스트 분석을 통한 오리엔탈리즘의 입증이었다면 후기 작업에서는 비서구작가의 작품에 더 높은 관심을 보여서 그 상화연관성을 두텁게 한다. 물론 저자는 정치와 문화의 불가분성이나 일체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두 책의 일관성을 강조하는 부분도 잊지 않는다. 스피박은 '하위계층'의 재현을 두고 왔다 갔다 한다. 스스로도 '모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밝힌 스피박이니 오죽하겠는가. 스피박은 사이드에 비해 애초부터 식민담론보다 저항담론에 더 비중을 둔다.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으로 결국 다시 '서구/비서구'의 동질화 반복과정을 택한 것에 비해 사이드가 덜 관심을 둔 이질성과 여성주체 문제를 화두로 꺼내든다. 그녀는 인도라는 상황하에서 '서발턴'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면서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 라는 제목만으로도 전통적 질문을 구성해낼 문제에 달려든다. 스피박은 초기에는 하위계층을 완전한 타자로 설명했으나 후기에는 개입을 통하 발화가능성에 기대기도 한다. 또한 발화자로서 스피박 자신의 위치에 대해 인정하면서 탈식민주의 논의 자체가 반복하게 될 또 다른 형태의 폭력에 대해 경계한다. 스피박은 기본적으로 이질성과 차이를 중요시 여기면서도 '전략적 본질론'이라는 개념을 통해 신식민지적 상황의 해방을 위한 연대의 길을 열어놓는다. 호미 바바는 '혼종성'과 '양가성'이란 개념을 통해서 식민주의 권력의 일방적 관계에 다른 선을 하나 긋는다. 바바는 '모방'이란 것이 일종의 저항의 형태로 반복된다고 말하며 모든 문화의 혼종화 과정에 대해 강조한다. 이것은 파농이 과거에 지적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즉 식민권력자는 결코 전제적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며 대항 권력으로부터 늘 불안해하며 또 스스로도 재구성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식민 권력의 문제를 조금 더 다양한 측면에서 볼 수 있게 해주기도 하며 또한 극단적인 패배주의적 심리상태에 위안이 되기도 한다. 바바의 이런 생각은 물론 식민관계의 물리적 권력의 힘을 간과한다는 지적과 함께 식민권력에 대한 작용과 피지배자에 대한 작용을 동일한 결과로 본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사실 이 책에 나오는 사이드, 스피박, 바바의 이론과 그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들을 정리하는데만도 꽤나 오랜시간이 걸릴 것이다. 또한 그런 담론 투쟁이 담고 있는 의미까지 되짚어서 둘아본다면 그 두배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방법론적으로 저자가 이 담론 투쟁들을 구획하고 있는 방식들을 따라가는 것이 어쩌면 편의적인 발상이긴 하지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몇가지 대립적인 개념들이다. 제국주의/ 신식민주의, 정체성/혼종성, 보편성/특수성, 통일성/이질성, 물질성/비물질성, 경험주의/담론주의. 이 책에 나오는 탈식민주의 논의와 그에 대한 비판은 사실 이런 커다란 개념들의 밑바탕하에서 이것들을 배합하면서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제국주의담론'이 물질성과 경험주의에 강조를 두고 있다고 본다면 탈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은 그런 층위에서 이루어진다. 각론으로 봐도 이와 유사하다. 사이드가 개별 식민국가의 다양한 양상에 대해 보편적인 이론의 문제를 제기한다면 바바나 스피박같은 이들은 탈식민주의 내에서도 차이성에 더 큰 애정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러한 강조는 가끔 또다른 형태의 본질론으로 환원되는 이론적 모순이 발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하위주체'를 강조하며 이론적 구획을 시도하다보면 특정하게 양식화된 하위주체가 발현되고 마는 본질화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만다는 것이다. 바바에게도 그런 문제가 누차 발생한다. 보편적으로 말하자면 의도하지 않았던 특화와 의도하지 않았던 묵살이 발생하게 된다.  

'보편/특수'에 대한 최근의 추세는 물론 절충과 연대이다. 쉽게 말해서 계급과 소수자의 연대같은 이런 나이브한 개념들 말이다. 사실 이 책에 등장하는 비판가들 중에는 이런 인본주의적인 나이브함을 환상을 심어주는 행위라고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도대체 어떤 형태로 연대할 것인지에 대한 지도도 없으면서 헛된 망상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결론에서는 탈식민주의 이론에 대한 절충론적 해법과 문화적 혼종성, 다양성, 역사적 차이의 인정과 또한 연대를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탈식민주의의 다양한 논의에 대해 구하의 입을 통해 긍정적으로 묘사한다.일종의 탈식민주의 버전 인도판 '백화제방 백가쟁명'에 대한 긍정성이다.   

" 이러한 문제틀을 탐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있을 수 없다. 백 송이의 꽃이 만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잡초가 자라나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 한가지 사족을 얹자면 이 책의 저자는 문학 전공자이다. 사이드부터 해서 대개의 탈식민주의이론가들이 문학을 텍스트로 탈식민주의를 분석하고 있다. 입문서가 가진 계열성의 특징을 따라간 것이기도 했겠지만 아무래도 문학의 비중이 높다. 이 책에서 사이드에 대한 '제국주의 담론'측 비판자로 자주 등장하는 존 매켄지의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가 보완물이 될 수도 있을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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