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미성숙이 나를 왜 매혹하는가, 그것은 순수하고 젊고 금지된 요정의 아름다움이 주는 명쾌함 때문이라기보다 많은 것이 약속되지만 거의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음으로 인해 생기는 틈새를 무한한 완전성들이 메꾸어준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코 가질 수 없는 분홍 잿빛의 위대함이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p 359-360)  

나보코프, 흐흐흐, 당신은 정말 웃긴 사람이야. 내가 만약 단 한 단어로 당신을 타임캡슐 속에 봉인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을 그런 기억으로 담아 둘 것 같다. 물론 웃긴다는 말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 재미있다는 뜻일 수도 있고, '나 원 별것도 아닌게' 하는 식의 싸늘한 미소일 수도 있어. 하지만 당신이 만드는 그것은 이항적인 구분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 그래서 마치 3월 봄바람과도 같아. 3월의 봄바람을 아나? 그것은 따뜻한가?  그렇다면 차가운가? .아니.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아. 그냥 3월의 봄바람만큼의 웃음이지. 당신이 만드는 웃음은 어느 초등학교 교실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해. 선생님이 칠판에 무언가 잔뜩 쓰고 아이들에게 질문을 하지. 한 아이가 자신있게 손을 들어, 그런데  소년은 순간적으로 어떤 의심이 들었나봐. 그 의심은 올라가려던 팔을 무의식적으로 잡아당기지.그래서 엄마가 새로 준 점퍼의 팔굽있는 부분이 제대로 펴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접히지. 당신이 그래. 나는 그 어쩡쩡한 점퍼의 주름과 양눈가에 자신감과 의혹 사이를 진자운동하는 아이의 눈망울을 보듯 당신이 만든 웃음을 바라본다. 당신의 문장안에는 정말 다양한 종류의 웃음이 담겨있어. 미학적이게 웃긴다고 하면 그건 분명 당신의 문장을 두고 하는 말일게야. 물론 당신이 만든 험버트도 아주 흥겹지. 사랑에 조바심난 노친네, 롤리타의 젊은친구들까지 견제하느라 얼마나 애간장이 타겠어. 그리고 또 미성년자 약취유인범과도 변별점을 찾으며 롤리타와 그걸 하려고 하니 얼마나 애써야했겠어. 흐흐흐(아.. 늑대같은 웃음은 아니야? 나는 미성숙한  여자애들은 좋아하지 않아.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말이야..) 

어쨋거나 당신이 웃긴건 사실이고,이건 당신을 저평가하는 말은 결코 아니야. 솔직히 고백하건데 나는 뒤늦게 당신을 만났지만 당신에게 완전히 넘어가고 말았어. 지난 해에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기뻐한,당신이 이국의 언어로 쓴 첫번째 소설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과 당신의 자서전인 <말하라 기억이여>도 한달음에 읽고 싶어졌어. 물론 조금 시간은 필요할 거야. 오뉴월에 바람난 개처럼 이것 저것 들추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그렇지. 내 이런 습성도 좀 고쳐질만도 한데 나이가 들어도 결코 바뀌지가 않는다. 하지만 내일 모레까지 논문을 내야하는 것도 아니고 이번주말까지 맡은부분의 발제를 해야하는 것도 아니니 뭐가 어떻겠어?  봄바람의 향기가 더 짙어질때 당신을 다시 펴보던 코 끝에 입김이 어는 시절에 당신을 다시 집어들던...아무도 개의치 않을텐데. 흐흐. 나는 가끔 책을 읽을때 가장 '자유'로와져서 보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해. 당신이 글을 쓸 때 그랬을 것 처럼 말이지. 

당신의 소설은 묘한 아이러니에 처해졌어. 당신은 '예술은 예술일 뿐'인 사람이잖아. 그런데 당신의 명성을 알린 책<롤리타>는 이제 미디어적인 용어가 되어 버렸어. 어린이 성범죄와 관련된 기사에는 그래서 가끔 당신의 이름이 오르기도 해. 부고기사들 사이에서 오타난 상주의 이름을 보는 것 같지. 흐흐흐. 당신의 <롤리타>는 말이지. 대중들 사이에서 '도덕주의' 법정에 소환된 피고의 모습이었나봐. 물론 초기에 비평들에서 역시 이 부분은 문제가 되었다더군. 당신의 이 작품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그 때도 수입이 되니 마니, 어디까지가 삭제되었니 무삭제판이니 하는 말이 있었다니까. 물론 당신에게도 책임이 있긴 하지. 사실 강한 주제잖아. 그리고 또 당신의 표현수위도 말이지. 어린 의붓딸에 빠진 홀아비 '험버트 험버트' - 당신은 그를 여러형태로 불러, 나는 그가 스스로를 이렇게 부를 때가 가장 좋아-의 사랑과 관능, 그리고 절제와 욕망 사이의 팽팽한 긴장들을 도대체 어느 누가 당신처렴 표현할 수 있겠어. 당신의 문장 한 줄 한 줄을 큰 소리로 읽고 싶을 정도야. 만약 사랑의 대상이 반인륜적이라는 부분을 제체놓고 본다면 당신은 최고의 연애술사야. 선수란 말이지. 거기에 선수들의 허당짓들까지도 짐짓 아닌척 하면서 슬슬 풀어내는 것까지 더하면 당신은 진짜 프로야. 거기에 보는 이들을 좀 가지고 놀기도 하지. 마치 장날의 약장수가 사설을 풀면서 쪼르르 앉아 있는 아이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 처럼 말이지. 인정해야겠군. 나야 말로 당신이란 약장사에 정신줄 놓고 따라가다 해지는 줄 몰랐던 그 꼬맹이라고 말이지.  

물론 당신의 소설에는 천안삼거리 능수버들의 흥겨움과 구절양장 꼬부랑길을 걷는 재미만 있는 것은 아니야. 당신의 <롤리타>는 말이지...음...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말하자면 험버트만큼이나 지적이지. 소설이 시작하면 당신의 험버트는 이미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죽어있어. 그리고 롤리타- 빌어먹을, 리처드 실러부인이라며...나중에 알았잖아. 당신은 하여간 늘 이런식이지만-도 딴나라사람되어 버린 거지. 당신은 험버트가 남긴 장문의 배심원 증언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지? 최소한 사형은 스스로도 너무 과다하다고 믿는 지적인 구대륙의 이 용열한 백인의 자기변명서말이지. 모르지. 지적이며 상냥하고 예의를 아는 신사였으니 유럽식 자존심으로 진실만을 이야기할지도...당신은 군데 군데 당신이 만든 퍼즐을 풀어갈 조각들을 숨겨놓지. 나는 사실 처음부터 당신이 그런 게임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까치가 날아가며서 떨어뜨린 감처럼 등장하는 험버트와 롤리타 주변 인물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지. 물론 그렇다고 당신이 떨어뜨려 놓은 모든 흔적들을 다 수렴해서 하나로 꿰지는 못했어. 이게 무슨 범인 밝히는 추리소설도 아니잖아. 흐흐흐  하여간 당신이 복수의 일념으로 퀼티를 만난 것은 잘한 일이야. 당신의 복수장면은 아주 그럴싸했어. 왠지 내게 그 장면을 영화로 만들라면 '뮤지컬' 처럼 해보고 싶더군. 팀버튼 식의 세트나 의상으로 무대설정을 하고 말이지. 조금 시기는 빠르지만 로버트 레드포드의 <위대한 개츠비>같은 분위기로 당신과 롤리타의 이야기를 풀어가다가 퀄티와의 대면장면에서 갑자기 <가위손>이 되버리면 어떻게 될까? 영화는 박살나고 평론가들의 몰매를 맞겠지만 '허...' 하는 바람빠지는 웃음을 만드는데는 공헌을 할꺼야. 험버트와 퀄티의 대결을 역자는 '반사실주의'와 '사실주의'의 대결이라고 해석을 했더라구...당신이 작품 전체를 통해서 소설/반소설 사이의 여러가지 예들을 보여주고 있기때문에 그런 해결의 돌파구로 그 장면을 해석하는 것이 결코 낯설지는 않아. 그래도 당신은 옛날 사람이 되나서 그런지 여전히 실체와의 결별을 선언하지는 않는듯해. 비록 사실주의와의 결별은 선언했겠지만. 요즘 애들은 좀 더 애니메이션적이고 사이버하다구. 당신의 포스트모던한 방식에 영향을 받은 요즘 사람들의 영화는 이미 그런 '자기증명의 과정'조차 불필요하다고 본다구.  

어쨋거나 험버트의 전체주의적 시선만 계속봐서 목이 좀 아프기는해. 왜 그런거 있잖아. 한 쪽 방향으로 목이 돌아가서 뻣뻣해진 거. 시선고정.험버트와 당신의 시선고정이 만든 디스크야.흐흐. 그 시선이 전체주의적이지만 모든 것을 관통시키고 고정시키지 않아서 다행이야. 전지적 주체와  유동성의 주인공이 동인인물이 된다는 것이 흥겹지. 그 사이의 떨림이 재미있었다니까.^^  결국 그런 시선이 결코 압제적일 수 없는 것은 환상이라는 빈공간이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소설 속에서 험버트는 이런 말을 하지. 

 "내가 미친 듯이 소유했던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이 창조해 낸 것이었다. 또 다른 환상적인 롤리타, 아마도 실제보다 더 리얼한 롤리타. 실제의 그녀와 겹치고 둘러싸며 나와 그녀 사이에서 둥둥 떠다니며 의지도 의식도 없는 소녀, 정말 그건 그녀 자신만의 삶이 아니었다."

나는 이 소설의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모두 이 문장과 어떤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선생님, 정말 '소설' 을 잘 쓰신거에요. 정말 '소설'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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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철학
프리도 릭켄 지음, 김성진 옮김 / 서광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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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드팀전): 안녕하십니까? 

A.(드팀전 @) : 안팎으로 부는 바람이 날카로와서 그다지 안녕치는 못합니다. 배를 바닥에 깔고 있자니 답답하고 고개를 들자니 모래바람에 눈을 뜨기 어렵군요. 

Q: 음...(그냥 인사치레로 한 말인데 '안녕합니다' 하면 되지..) 그렇군요. 요즘 직장인들을 대표한다는 사자성어 '복지부동'을 실천하고 계시군요. 

A: 예,'복지부동' 하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살아가려면 바람의 움직임을 잘 살펴야 하는데 그렇게 영민하지는 못해서요. 고성능안테나를 올리지는 못하고 바닥에 머리 박은 김에 모래 위에 개미들이 어떻게 사는지 살펴보고 있어요. 꼬물 꼬물 다니는 녀석들의 움직임을 보는 것도 새로운 발견입디다. 

Q: (이거 완전 똘아니야?. 농담따먹으며 뭔 인터뷰를 하겠다고) 예 예.. 후에 개미 연구 성과물이 나오면 그 이야기는 그 때 다시 한 번 하기로 하구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먼저 요즘 난데 없이 지중해쪽으로 가셨습니다. 여권이나 비자도 없이 말이지요. 최근 그리스에 관심을 가지신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A: 음...글쎄요. 일종의 '오래된 미래' 의 자기 발견정도 아닐까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걸어왔던 길이잖아요. 예를 들자면, 몇 년전 부터 산티아고 순례가 여행객들의 필수코스로 들어가잖아요. 그러니까 산티아고 길 옆에 사는 농부인 셈입니다.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와서 열심히 가는 걸 보아만 온거죠. 그러면서 한동안 '뭐 한다고 저런데..' 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농한기도 되고  할 일도 없고 그런 참에 '저기 가면 뭐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겨서 그냥 뒷꽁무니를 따라가는 그런 형상입니다. 

Q: 네...그래도 무언가 좀 더 특별한 계기나 결정적인 이유가 있을 듯 한데요. 

A: 앞서 말했듯이 큰 계기는 따로 없구요...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적은 있습니다. 학문을 하는데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직업으로서의 학문' 다른 하나는 '교양으로서의 학문' 말이지요. 30대 초반쯤에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아마 그 때 공부를 계속 했으면 유학가서 '예술사회학'이나 '문화연구' 같은 걸 했을 것 같아요. 어쨋거나 그 길은 제가 가지 않았던 길이었구요. 그러니까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일단은 포기한 거지요. 결국 남는 건 '교양으로서의 학문'입니다. 전자에 비해 학문적인 객관성이나 엄정함,체계성 같은 것은 덜할 수 밖에 없어요.대신 잡식성의 즐거움은 있습니다. 억지로 딱딱한 걸 먹어서 배탈날 일도 없구요, 적당히 자기가 조절하면서 씹어낼 수 있으니까 좋구요. 가끔은 목마를 때 레몬에이드도 한잔 마실 수 있구요. 제 현재 위치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세부적인 철학 용어 하나를 가지고 그 의미와 해석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훈련도 필요하고 ,물론 그 역할도 중요하지만 제게 그건 '학문하는 전문가' 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저런 것들을 깨치고 느껴서 자기 안에서 어떻게 통합해내고 또 나를 변형해내고...결국엔 그게 세상을 어떻게 변형해 낼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거에요. 예를 들어 어떤 철학자 하나 열심히 읽고 그 세론들을 분석하며 연구소에서만 왕 노릇하며 대접받는다면 그거는 '포름알데히드 철학'을 통해서 자기자리 보전하려는 생계 수단인거죠. 별거 아니에요. 농사꾼이 '쟁기'로 생계를 유지하는 거고, 대학 교수는 '학문'을 쟁기삼아 먹고 사는 거죠. 중요한 것은 그 '쟁기'가 아니라 '쟁기'를 쓰는 사람이니까요. 쟁기를 날렵하게 갈았다고 그가 최고의 수확을 거두는 것도 아니고 하늘과 땅의 섭리를 아는 농사꾼도 아니라는거지요. 사람들은 가끔 착각을 해요. 전문적인 용어의 엄밀성을 따지며 상대방의 '야코'를 죽이면 자기가 위대한 인간이 된 줄 압니다. 그런데 그거 그냥 '좋은 쟁기'만 열심히 닦아대다 보면 하는 거에요. 앞서 말했듯이 '좋은 농부'는 '쟁기'만 갈지 않지요.  

학문이라는 쟁기 가는데 청춘을 다 보낸 이들도 사실 불쌍하긴 해요.대학이라는 바닥은 자칭 '달마대사'같은 노인들이 엉덩이까지 파묻고 있어서 뚫기도 쉽지 않지요...간접적으로 들어본 바에 의하면 그 바닥이 아주 상종못할치들이 많지요. 배운 건 많으니 말들은 많고 지기는 죽기보다 싫고...하여간 한국의 학문구조가 그래서 제가 공부를 안한 걸 수도 있어요...핑계치고 약하지만. 어쨋거나불우한 강사들을 여럿 알아서 그런지 ^^  

Q: 그러니까 '교양인'으로서 이론적 엄정함과 학제적인 틀에 신경을 덜 쓰며 사는게 좋다는 말이시군요. 그런데 '그리스철학'에 기본적인 공부를 하신 적은 있나요? 

A: 기본적인 공부라여 그저 대학교 철학사 수업수준이지요. 소크라테스를 읽었던 것도 그 때였던것 같구요. 딱히 그리스라고 더 애정을 가진 적은 없었습니다. 저는 사회과학을 공부한 사람이었구 그 쪽에 매력을 느꼇지만 철학을 제대로 공부한 적은 없어요. 물론 늘 관심은 갖고 있고 파편적으로 얻어들은 것들은 있지만 말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비판이론' 쪽이 가장 흥미로왔습니다. 아무래도 학부과정에서 대학교수님들의 영향이 컸겠지만 말입니다. 그 쪽 분들이 강의도 잘하시고 사회참여적이셨거든요. 대학 다닐때도 제 관심은 마르크스와 그의 후예들 정도 였습니다. 지금도 전 마르크스와 그 후예들의 분석이 이 사회를 읽어내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해요. 그런면에서 잡탕 마르크스파 손들어보라고 하면 저기 보이지 않는 한쪽 구석에서 쑥스럽게 손을 들지도 모릅니다. 잡탕 마르크스파와 그 후예들 하면 사실 안걸리는 사람이 몇 없을지도 모른다구요...흐흐 .그렇지만 그건 중요한 여러 가지 중에 하나일뿐 .. 어쨋거나 이런 저런 책을 보다보면 자꾸 그리스가 걸리더라구요. 니체나 아도르노 같은 이들도 그리스에 대해 일가견이 있었구요...푸코 같은 이들은 후반부에 '그리스의 회귀기'가 오기도 하잖아요. 하여간 어딜 가든지 걸리는 인간들이 몇 있는데 예를 들자면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니체도 꼭 넣고 싶어요. 이런 사람들의 원저작들도 사실 그다지 많이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원저작을 읽는다고 바로 뭔 그림이 나오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관계성 속에서 파악되지 못하면 사실 별 의미가 없는 어려운 내용만 가득한 책으로 끝날 수 도 있잖아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바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들어가지 않는 이유입니다. 물론 그 기간동안 이런 책만 읽지는 않아요. 직업적 학문을 할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도 없구요...긴 시간을 잣대로 삼아서 하면 곧바로 플라톤의 <국가>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읽지 않는다고 부담스러울 필요가 없는거지요. 예를 들자면 이 두 책을 가운데 두고 멀리서부터 포위해 들어가는 식으로 읽는거에요. 그러려다 보니 대학교재같은 책들도 읽고 또 읽다가 다른 지류를 타고 잠시 세기도 하고...뭐 그렇죠. 그런데 이렇게 우회하다보면 의외로 재미있는 것들이 많이 걸려요.  그리스 미술 관련된 책도 좀 읽어야 겠다 싶구...펠로폰네소스전쟁사도 그렇고..완역본이 이제 곧 나올 3대 비극작가의 작품들도 다 읽고 싶고...호머와 베르길리우스도 마저 읽어야겠구.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철학자들의 유물론도 상당히 흥미롭고 에피쿠로스의 철학도 그런 의미에서 매력적이구...하여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즐거움이 큽니다. 

Q: 시간도 없고 지면도 한정적이고 보는 사람도 지겨우니 좀 짧게 대답해 주실것을 부탁드리구요..이 책 <그리스 철학>은 어떻게 보셨어요? 

A: 한마디로 하면 '대학교재용 그리스 철학입문서' 정도가 좋을 것 같아요. 다루는 범위도 밀레토스학파부터 해서 플라티노스의 신플라톤학파 까지 다루니 고대 그리스 철학 전범위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봐야겠네요. 책 구성은 크게 4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 이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헬레니즘. 이렇게 말이지요. 책의 분량으로 구분해서 그런겁니다. 즉 각 파트가 4분의 1분량쯤으로 보시면 됩니다. 이렇게 보면 당연히 이 책에서 가장 큰 비중으로 거론하고 있는 곳이 어딘지 아시겟지요. 대부분 입문서가 그렇듯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책의 절반쯤에 해당하는 겁니다. 

Q: 책의 구성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납득이 갈 만하구요. '대학교재용' 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네요.긍정적인 의미인가요? 

A: 말 그대로입니다. '대학교재용' 이라는 의미는 군더더기 없이 핵심적인 내용만 건조한 문체로 씌였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선생님 아래서 읽는다면 훨씬 풍요로와 질 수 있는 내용입니다. 요즘 인기가 있는 '철학 소설류'와 비교하면 브라보 콘과 죠스바를 떠올리시면 되겟네요. 이 책의 장점은 다른 사족을 붙이지 않는 대신 압축적으로 각 시대와 철학자들의 사상을 요약하고 있다는 겁니다. 대신 이런 개념이 태동하게 되는 사회적 관계니 역사적 배경이니 하는 것은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많이들 보는 거스리의 <희랍 철학 입문>은 그런 면에서 조금 더 친철한 강의록이지요. 거스리의 경우에는 서문부터 그리스철학에 접근하는 태도부터 설명을 시작하니까요. 친철한 대신 분석적이고 개념적인 면에서는 아무래도 대중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서로 보완적으로 보면 좋을 책인 듯 싶어요. 물론 입문서들 안에서만 비교하면 말이지요. 시기적으로도 거스리의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끝나기 때문에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 

Q: 다른 장점들이 있나요? 

A: 이 책을 처음에 펼쳐보면 각 챕터들마다 넘버링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넘버링을 해놨을까 처음에는 궁금했는데요...읽다보면 이 넘버링이 상당히 유용합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이런 식입니다.  

(214)스토아 학파는 크세노크라테스(128)을 본받아 철학을 물리학,윤리학, 논리학으로 나눈다....이런한 로고스의 개념과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 개념(33) 과의 유사성은 분명하다.  

214번 챕터의 문장 일부이다. 스토아 학파의 개괄을 그리는 장인데.....플라톤 후기학파인 크세노크라테스를 살펴보려면 128번 챕터를 보면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 개념은 33번 챕터에 소개되어 있다. 이런 식의 서술은 각 철학학파 사이에서도 발견되기도 하고 또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같은 경우는 앞선 개념들을 재설명하는데도 이용된다. 

186번 챕터 중 일부--'아레테'의 사용범위는 도덕적 언어의 영역에만 제한되지 않는다.도구들이나 수공 기술자,그리고 신체기관들도 인간 자체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아레테'를 가질 수 있다. 이 개념은 능력의 개념과 연관된다.(168) 

168번 챕터 중 일부- <영혼론>에서 발췌....형상은 실제의 활동을 위한 능력이다. 영혼은 한 살아 있는 생명체의 형상이며 그것은 도끼의 기능 수행 능력과 그리고 눈의 시각 능력에 비교된다.아리스토텔레스는 합성체인 우시아,형상,질료를 서로 구별한다. 그리고 형상은 현실태와 동일시 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형상은 제 1의 현실태이며,이것은 제2의 현실태와 구별된다....결국 형상 또는 제 1현실태는 식물이나 동물에 있어서 그들의 제2현실태인 자신의 생명활동을 수행하는 잠재적 늘력이다.  

Q: 아무래도 압축된 여러개념이 폭풍우처럼 몰아치고 있을때 그 때 그 때 네비게이션을 들여다 볼 수 있으면 좋긴 하겠네요. 앞서 본 이야기들도 정신없이 몰아부치는 개념들 앞에서는 잊어버리곤 하는거니까요. 그 외에 다른 장점은 뭐 없나요? 

A: 한 철학자나 학파의 시작은 대개 생애나 구성과정에 대한 이야기로 출발하는데요...여기에는 후세의 연구가들의 해석에 따라 좀 다르게 읽히는 부분들이 있지요. 프리도 릭켄은 짧지만 이런 후대 분석가들의 해석을 소개합니다. 예를 들어 철학의 시작이라는 밀레토스학파 부분을 보지요. 도대체 밀레토스와 함께 무엇이 시작된거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새로운가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저자는 몇 가지 상이한 접근을 소개하지요. 버넷의 경우 밀레토스인들의 신화와의 단절을 강조합니다. 반편 콘퍼드는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이 실험을 알지 못한 검증할 수 없는 것으로 그저 언어의 추상성에서만 신화와 구별된다고 합니다. 이 둘 사이에 예거는 이오니아인들이 합리적이고 경험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신학적 동기를 무시할 수 없다고 합니다.예거는 이 시기를 그리스인들의 철학적 신학기라고 명명하지요. 이런 식입니다. 그리스 철학의 출발을 가지고도 다른 해석이 가능하듯이...뒤에 나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체계에 대해서도 강조점에 따라 다른 부분이 있지요. 길게는 아니지만 이런 걸 언급해주는 것은 넓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측면에서 좋아 보입니다.

Q: <그리스철학>을 보면서 특히 좀 어렵게 느껴진 부분이 있었다면? 

A: 어느 한 부분이 쉬웠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구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쪽이 좀 어렵더군요. 특히 인식론부분에서요. 아무래도 인식론쪽에 대한 기초가 좀 부족해서 그런 것 같기도하구요. 언어를 중심으로 논리 함수 안에서 존재론을 탐색해나가는 방식이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물론 가장 크게 어려운 것은 '그리스 사유' 전체를 유지하는 공통된 가치들입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과 우리와 다른 것은 물론이고,그들의 사유방식와 사유의 토대가 현재와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그런 차이와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본다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일은 아니었습니다. 이건 그리스 철학을 읽는 내내 따라 다닐 문제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플라톤의 '국가'가 지금같은 체계를 갖춘 국가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그럼 뭐냐? '폴리스'다. 그럼 '폴리스'는 편의상 '도시국가냐?' 그렇다. 편의상 그렇게 하자.  그럼 '도시국가'는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토대와 어떤 가치 위에 서 있느냐? ....우리가 생각하는 작은 규모의 도시냐? ....그런데 이게 아니라는 거지요. 이런 개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이라는 개념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절제'라는 개념에도 그렇습니다. 거의 모든 단어들이 지금과는 다른 뉘앙스를 갖고 있다는 것 때문에 일종의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대륙 위의 문장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결국 '내가 아는 것이 그들이 아는 것인가?" 라는 생각마저 들게끔 말이지요. 어쨋거나 누적된 현대적 이성과도 거리를 두면서 또 오래된 미래의 이성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점이 녹록치 않은 작업입니다. 

Q: 시간도 많이 되었고, 대단한 내용은 없지만 할 말은 다 한것 같지요.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묻고 끝내겠습니다. 리뷰를 이따구 방식으로 작성하신 이유를 한번 물어보고 싶고요.제 출연료는 줍니까? 

A: 음...제가 출연료를 요구해야하는거 아닌가요?  

Q: 음..그렇게 되나요? 그럼 서로 없던 이야기로 하구요..앞의 질문, 리뷰를 이딴 장난질로 처리한 이유나 들어봅시다.  

A: 딱히...뭐 매번 똑같이 쓰는 것도 지루하구요. 리뷰 형식도 가끔 바꿔주면 좋잖아요. 그리고 <그리스철학> 이란는 엄청난 내용을 어떻게 써야 할지 답도 없구. 책의 구성만 쓰기도 그렇고, 각 장을 정리할 수 도 없구,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야 앞으로도 또 울궈먹을테니까 그 때 그 때 하면 되고....하여간 궁여지책이자 지루함을 달래는 방식이었어요. 널리 이해 부탁해요. 

Q: (그럼 그렇지...쯔) 네...알겠습니다. 오늘 시간 내주셔서 고맙구요. 앞으로는 이딴 짓은 좀 자제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A: 네...이런 진부한 방식말고 색다른 형식실험을 모색해 볼께요. 능력된다면...감사합니다.(너 죽었어...사람불러 놓고 이따구로 인터뷰질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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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인가 현대의 지성 84
강정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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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소크라테스가 남겼다는 유명한 말, "악법도 법이다." 의 딜레마는 사실 오래전에 해소되었다.  최소한 감각적으로는 그렇다. "악법은 법이 아니다. 그리고 나쁜 법은 고치면 된다." 대학 1학년 때부터 불법 시위에 대한 주요 신문의 논설에 수시로 인용되던 문구가 소크라테스가 남겼다는 저 말이다. 나는 '법대로 하자' 라는 말에 대해서도 좀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그 말은 '법의 구성적 성격' 을 외면하고 현재 있는 실정법을 최고의 가치로 놓는 견해에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말의 함의에는 '우리사회에서는 법대로 되지 않는게 정상이다' 라는 인식론이 깔려있다.다들 말은 안하지만 법에 대해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법치주의'의 실종이라는 비이성적 상황이 정상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법은 공동선을 구현하고 구성원들의 이해를 조절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법은 일종의 젤리같은 것이다.어떤 완전한 형태를 갖고 있지만 또한 유동적이다. 내게는 '법실증주의'보다는 '법구성론'이 훨씬 매력적인 주제이다. 이 말이 법규정을 임의적으로 해석하고 마음대로 공동 규약을 위반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학자는 한국사회에서 실종된 '법치주의'에 대한 소시민의 반동이 작은 형태의 위반을 일상화한다고 말한다. 즉 높은 놈들은 몇 백억원을 해먹고도 잠시 카메라 앞에 포즈 취하고 풀려나는 마당이니 내가 좀 위반한다고 뭐 그리 대수인가 하는 식이다. 앞서 말한 '법치주의의 실종' 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가치인 '법치주의'를 완성하고 또 그 너머에서 '법의 구성적 과정'과 법의 사각 지대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강정인의 <소크라테스,악법도 법인가?> 중에서 소크라테스와 관련된 논문은 권창은 교수의 논문과 함께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에 실린 듯 하다.(이 책을 살펴보지 않아서 정확하진 않다.) 강정인의 이 책은 '소크라테스'문제 만을 다루고 있진 않다. 그 뒤에는 '시민불복종'의 문제, '진보와 보수'의 문제, 정치 불참의 의미,북한에 대한 내재적 접근과 외재적 접근의 장단점 등 정치학계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여러 주제들을 거론한다. 책의 제목이 <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인가?>여서 이 책이 온전히 소크라테스에게만 바쳐진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단 첫 주제는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의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디쯤에 '악법도 법이다' 라는 문구가 나오는지 찾아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결론은 하나다. 액면 그래도 '악법도 법이다' 라는 문장은 소크라테스의 책 어느 한 구석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자기의 벌어진 입으로 '악법도 법이거든' 이라고 말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는 거다.(행여 그 문장을 그대로 찾아낸다면 서양철학사가들이 깜짝 놀랄만한 세계적인 발견이 될 것이다. 그러니 유명해지고 싶으면 어서 찾아보자)  이 문구는 소크라테스의 격언이라고 해서 교과서는 물론이고 인터넷에서도 유령처럼 배회한다. 서양철학사가 김주일 교수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번역 과정의 오류에서부터 기인한다. '악법=법'이라는 번역을 국내에 통용 시킨 것은 일본의 법철학자 오다카 도모오다. 1937년에 개정한 <법철학>에서 소크라테스를 전거에 두면서 '악법도 법이기 때문에 응히 지켜야하며..' 라고 쓰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한번 굳어진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더우기 그것이 지배 이데올로그들로 활용하기 좋다면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후광을 뒤에 업고 싶은 정당성 없는 정권들은 반정부세력들의 실정법 위반에 대한 대중 이데올로그로 이 말을 적극 사용한다. 물론 신민 만들기에 앞장서는 국정 교과서가 소년 소녀들에게 이 말을 유포한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자...일단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은 아니다는 건 정리되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은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똑같이 그런 말을 하진 않았어도 그런 해석이 가능한 말을 한 건 아닌가요? " 빙고...그렇다. 좋은 질문이다. 이러면 이제 이야기가 좀 더 길어진다. 강정인 교수는 <소크라테스,악법도 법인가?>에서 이 좋은 질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들려준다. 중요한 것은 '악법도 법이다'는 식의 극단적 법실증주의는 전체 맥락에 대한 여러 해석 중 한가지의 해석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금과옥조' 라고 믿는 격언은 정언명제가 아니라 소크라테스라는 텍스트의 전체적 맥락에서 논쟁이 분분한 주제라는 것이다.  

모순은 소크라테스의 저서(물론 플라톤이 썻다) <변명>과 <크리톤>에서 도출된다.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소크라테스의 모순에 대해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변명>에서 아테네인들을 꾸짖고,철학 포기 요구를 거부하고, 불복종의 가치를 내뱉던 양반이 <크리톤>에서는 인간적으로 도망 한 번 가주시오..라고 부탁하는 친구 크리톤의 말을 나무라면서 인격화된 '법률'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법이행'의 중요성을 말씀하신다. 이어 꿔온 닭을 갚아주라는 신에 대한 채무이행을 부탁하시고 독배 원샷을 하신다. 뭥미? 뭐 어쩌라는 것이여? 단도직입적으로 묻것소? 법을 따르라는 말이요, 법에 개겨보라는 말이여?   

내가 <변명>과 <크리톤>의 모순을 해결한 방식은-물론 이것도 여러 가능성 있는 해석 중 하나이다- 강정인이 요약한 바에 따르면 절충론 중에서 그린버그와 아렌트의 해석방식이다. 소제목으로 보면 이해가 쉽다. '변명과 크리톤간의 모순을 일응 인정하되' '소크라테스의 자신에 대한 약속을 중심으로 일관되게 해석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법률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철학의 삶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철학적 삶이 선한 삶이라는 점을 아테네 시민들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입증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철학을 위해 죽는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두려워했을까? 그의 저서를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는 영혼의 불멸을 믿었고 죽음 이후에 현인들과 저승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만큼 큰 즐거움이 없을거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좀 심심하고 너무 상식적이지 않은가? 

재미있는 해석들이 몇 가지 있는데 물론 그중에는 음모론에 해당하는 것들도 있다.그로토같은 이들의 주장인데, 후학인 플라톤이 아테네인들로 부터 폐기처분되어 버릴 위기에 놓은 소크라테스의 신원을 복원하는 차원에서 <크리톤>의 방향을 잡았다는 것이다.즉 <변명>과의 모순은 그런 집필 의도때문에 발생하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모르겠으나 에피소드정도로 읽히지 않을까 싶다. 콩클턴의 해석은 수용자의 입장에 맞춰 이야기해온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을 토대로 <크리톤>을 '크리톤의 문제' 로 이야기한다. 뭔 말인고 하니. 소크라테스의 습성은 대화수준의 상대에 맞춰 이야기를 끌어간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급의 학자는 아니며 그저 스폰서나 다중지성정도에 해당한다. 콩클턴은 '고차원적 무법'과 '저차원적 무법'을 구분하여 <크리톤>이 '저차원적 무법'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즉 법철학의 근본 이념까지 가지 않고 법의 준수여부문제에 대해 그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콩글턴의 경우 소크라테스의 고차원적 법철학은 <크리톤>이나 <변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정치가>에 소개된다고 말한다.(어찌되었거나 주인공은 모두 소크라테스고 저자는 플라톤이니)  그 외에도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과 '부정의를 행하는 것'을  나누고 '악을 악으로 행하지 말라'는 문구를 통해 해석하는 알렌의 방식, 정의와 법률을 구분하여 불복종의 전거를 구하는 맥러플린, 정치와 철학의 간극문제로 해석하여 이의 해소를 도모하는 유벤의 방식등이 요약설명된다. 

이어 등장하는 존롤즈의 <시민불복종의 정당화>문제는 따로 길게 언급하지 않겠다. 존 롤즈가 시민불복종의 문제를 지극히 자유민주주의의 개념틀 안으로 축소시킨다는 지적은 해야겠다. 또한 시민불복종을 비폭력의 문제로 협애와 시키면서 폭력과 시민불복종이 양립할 수 없다고 본 점도 '폭력/비폭력'문제에 대한 지극히 좁은 스펙트럼임을 지적한다.물론 존 롤즈가 시민불복종의 가치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시민불복종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내실화하는데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또한 시민불복종이 발생하는 귀책 사유는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권위와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에게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2부에 해당하는 '보수와 진보'의 문제는 사실 조금 시의가 지난 논의이긴 하다. 그렇지만 지금도 심심치 않게 '보수와 진보'에 대한 자기정초를 위한 질문이 나오고 있다는 점을 본다면 유효성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본다. 재미있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강정인은 '보수와 진보'의 개념에서 '진보'는 통칭 보수세력이든 진보세력이든 모두 가지고 있는 점이라고 본다. 그래서 그는 '보수'의 대립항으로 통칭되는 '진보'보다 조금 더 넓은 개념의 '혁신'이란 용어를 꺼낸다. 그렇다면 '진보/혁신'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몇 가지 예들이 등장하는데 일단 '혁신'을 '진보'보다 느슨하고 넓은 개념으로 설정한다. 차하순의 말을 재인용하면 이렇다. '진보는 역사의 진전 방향에 대한 일정한 인식은 물론, 역사가 어떠한 방향으로 진전되어야 한다는 가치판단을 전제한다.' 일종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 같다. 아무래도 글이 집필된 시기가 90년대 초반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현재적인 의미의 '진보' 개념은 이보다 좀 더 다층적인게 아닌가 싶다. 강정인은 현상 유지 개념을 통해 '진보/혁신'을 설명한다. 단순히 현상 유지와 현상 타파의 축 위에서 사회,정치적 이념이나 운동을 구분하는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보수 대 혁신'의 구별이 정당하고, 혁신적인 이념이나 운동의 일부만이 진보적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다.'  요즘 말로 하면 '반이명박' 전선의 깃발 아래에 있는 모든 세력이 스스로 진보라고 말하지만 강정인의 표현을 빌자면 '혁신'이라는 것이 오히려 적당할 듯 하다. 강정인은 이런 틀 안에서 '역사 안에서의 구원'을 찾는 대신에 '역사로부터의 구원'을 찾는 진보적 행위 역시 진보로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 말은 개인적으로 지식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포스트 담론에 대해 성찰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버크와 보수주의 정치철학'은 정말 보수주의자들이 읽어보아야할 내용이다. 실제로 버크의 주장을 들어보면 우리나라의 양심적 세력들은 대개가 '보수주의자'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알라딘에 가장 많은 축을 구성하는 역시 진보라고 이름붙이든 혁신이라고 이름붙이던 나는 '양심적 보수세력'이라고 본다. 물론 버크의 주장에서 시대한계적인 요인들은 제외하고 봐야 한다. 귀족제의 옹호같은 것을 가지고 현재적 의미의 '버크 읽기'에서 욕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다. 버크는 계몽주의적 진보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 또한 변화와 개혁에 대해서도 무조건 거부하지도 않았다. 사회가 잘 보존되기 위해서는 변화와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방식에 있어서 버크는 온건한 길,체제 내적인 길을 선호했다. 프랑스 혁명의 혼동상태를 직접 경험한 그로서는 어찌보면 나올수 있을 법한 주장이다. 이런 말을 들어보자. "개혁자는 국가의 결함에 접근함에 있어서 마치 '아버지의 상처를 치료하는 심정"으로 곧 '경건한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마치 사서삼경에 나오는 말 같지 않은가. 문제는 주체의 위치에 있다. 그 지점에서 흔히 말하는 '좌파'와의 차이가 발생한다. 하지만 다분히 식상한 도덕적 담론처럼 보이는 이 말은 실천영역에서 좌파나 우파를 막론하고 모두 고개를 끄덕일만한 대목처럼 보인다. 

요약된 버크의 사상을 읽다보면 결국 한가지 답에 도달한다. "대한민국 정치판에는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자는 없다." 라는 것 말이다. 결국 우리 사회에 '보수주의자'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은 대개가 '철학 없는 보수세력'일 가능성이 높다.흔히들 이런 사람들은 '수구'라고 말한다. 조금 세련된 옷을 입으면 '뉴라이트'가 된다. 정치학자 김홍명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보수주의는)자생적인 역사를 지닌 하나의 정치적 입장, 세계관이 아니라 주위 환경에 시각을 맞춘 막연한 기질 혹은 심적 태도의 성격으로 나타나고 있다. '철학없는' 이란 말을 길게 설명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양심적 보수세력의 존재가 가끔 '좌빨'이니 '용공'이니라고 비난을 받는다. 이런 구도가 해체되고 '양심적 보수세력'이 자신의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날이 되어야 한국정치의 가능성은 열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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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아버지 1937~1974
조동환.조해준 지음 / 새만화책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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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가끔 거울을 볼 때 묘한 이물감이 든다. 거울 속에 '내'가 아닌 중년으로 향하고 있는 '전-중년'의 아저씨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 때마다 아랫배를 슬쩍 쓸어본다. 익숙해져 가는 부피감과 무게감.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물체가 담고 있는 가속도에 부딪힌 듯 가슴이 뻑뻑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거울을 봐도 여전히 '그' 가 낯설다. 아무래도 최근 몇 년 사이에 많이 늙은 것 같다. 혼자서 거울 속에 비친 사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도 많이 늙었구나. 흐흐" 미용실에 앉아 있는 30분이 귀찮아서 계속 기르고 있는 머리칼은 이제 은빛이 제법 많이 보인다. 지저분하게 구렛나루쪽으로 내려온 흰머리칼들을 빙빙 돌려본다. 아내는 빨리 안씻고 뭐하냐고 지청구다.  

그래 "씻어야지. 그리고 또 출근하고.."  어푸 어푸 어푸.... 

소년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버지가 들어선다. 아무리 스스로 소년이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현실의 감각적 경험은 내게 '아버지'의 이름을 더 요구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된다는 건 좋은 일이면서도  슬픈, 모순적인 일이다. 내 머리칼이 하얗게 변하는 것 만큼 아이는 새로운 세계의 언어를 하나씩 배운다. 이제 아이와 함께 '대화'라는 것을 제법 길게 할 수 있다. 내가 요즘 제일 궁금한 것은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어떻게 어울려 생활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매일 저녁 퇴근하면 가장 먼저 아이에게 "오늘 어린이 집에서 뭐하고 놀았어?" 하고 묻는다. 아이는 가끔 길게 설명해줄 때도 있고 아닐때도 있다. 이미 아이의 세계에는 내가 침범하지 못하는 그의 세계가 생긴 거다.  

아이가 생겨서 가장 좋았던 점 중 하나는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진 시간들을 연역적으로 재구성해보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사진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 온전한 기억에 남아 있는 최초의 시간은 내다섯살 즈음이다. 수동펌프를 공동으로 사용하는 달셋집에서 아버지와 엄마와 살던 시간. 동생을 낳으러 엄마가 병원에 가고 할머니와 기다렸던 때가 아주 희미하게 기억난다. 그 이전의 시간은 내 기억 속에는 없다. 그건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시간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나는 아이가 처음 걸었을 때 아버지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말 못하는 아이가 심하게 아팠을 때 어머니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사는 모습도 사람도 다르지만 세대를 넘나들며 공유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결국 나는 아이를 통해서 내 잊혀진 시간의 조각을 채워넣는다. 그 때마다 나는 왠지 내 삶이 어떤 형태로든 완전성을 갖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생각은 이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모들의 삶까지 이어진다. 그 분들이 20대였을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었을까? 어떤 고민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을까? 

<놀라운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들' 의 지난 이야기다. 이 책의 주인공이자 아버지인 조동환 선생이 막내 아들인 화가 조해준의 도움을 받아 복원한 지난 시간의 이야기이다.(사회학자 조희연교수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일제 시대 징용간 아버지를 따라 북해도에 간 이야기, 그 곳에서 학교 생활, 아버지의 죽음, 부산에서 주경야독 하던 시절의 이야기, 교직 생활시의 에피소드, 그 외에 시골에서 살면서 친척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들었더 이야기들이 한 컷의 만화 속에 꾸며진다. 그림 한 컷은 가끔 민화가 되기도 하고 사진이 되기도 한다. 투시도법을 이용하여 설계도가 될 때도 있고 영화의 스토리보드 그림판이 되기도 한다. 이 그림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겪었던 삶의 한 부분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이 직면했던 역사의 소용돌이와 그것을 뚫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게된다. 일단 그들에 비해 평온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경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저 고비들에서 쓰러지지 않고 살아내었는가 하는 점에서 말이다. 물론 그 시절을 통과했다고 모두 영웅이고 훈장을 받아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한 개인을 뒤흔들어 놓고도 남는 광풍을 견디어 내었다는 것에 작은 경의를 표하는것이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다. 특히 그들이 역사의 마도로스를 자임하면서 이리 저리로 키를 옮겨대던 권력자들이 아닌 이상은 말이다.  거대한 흐름을 피하지는 못하지만 그 안에서 가족의 안위와 생의 희망을 위해 주체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그런 민초들의 모습은 결코 '나라 이 꼴로 만든 노인네들의 회고담'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조동환 선생의 이야기에서 나는 북해도 시절과 부산 시절 이야기가 마음을 끈다. 전자는 유년 시절의 기억이고 후자는 청년시절의 기억이다. 아무래도 북해도 시절은 우리 역사의 아픔에 대한 선험적 정보들을 가지고 있기 대문에 더 절절하게 느껴진다. 아이 엄마가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몇 날 며칠을 기차를 타고 또 배로 갈아타고 그러면서 아버지를 찾아 북해도까지 간다. 지금처럼 편안한 여행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온가족이 함께 산다는 희망을 안고 그 탄광마을까지 도착하는 여정은 요즘 같으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다큐멘터리 주제가 될 법도 하다. 탄광마을에 도착한 아들은 마을 공동목욕탕에서 아버지의 품에 안겨 목욕을 한다. 그 따뜻한 온기를 70이 넘은 아들은 아직도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해도에서 돌아가시고 만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골을 안고 아들은 다시 그 먼길을 돌아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런 이야기를 현재에 살고 우리가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어디 드라마같은 곳에서 나오는 이야기 아니던가... 한 사람의 삶을 뒤적이면 사실 그 안에는 TV속 드라마보다 더 많은 드라마들이 숨어 있다. 부산 시절 이야기가 재미있었던 것은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지명이 수시로 나오기 때문이다. 조동환 선생은 내가 한 때 자취를 했던 부산 교대(아마 위치는 좀 옮겨진 듯 하다) 미술과를 나오셨다. 밤에 미군 부대 하역일을 도왔기 때문에 초량 근처의 산복도로쯤에 산 것 같다. 조동환선생의 기억에 의하면 거기서 전철을 타고 동래까지 오고 갔단다. 지금은 도심으로 변한 곳이지만 그 때는 온통 산이고 논이었을 것이다. 부산 시절 조동환 선생의 고생기를 보면 어른들이 '우리 때 어떻게 공부했는지 아니' 라는 말이 그냥 빈말은 아니다. 지금 아이들은 교육에 대한 필요성보다는 '사교육 과잉'의 왜곡된 교육열에 바짝 타들어가고 있지만 말이다.이런 사교육 시스템에 좀 혁명적으로 바뀌어서 현재의 아이들이 "우리 땐 어떻게 공부했는지 알아?' 라고 그 후세들에게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놀라운 아버지>를 보고 나면 누구나 자신의 가족들을 붙잡고 인터뷰를 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내 아버지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자주 해주시는 편이었다. 내가 첫사랑에 질질거리고 있을 때 동네 놀이터에서 아버지의 첫사랑 실패 경험을 이야기 해주시기도 했다. 가정형편상 -아마 그 아주머니는 좀 사는 집이었나 보다- 연애질은 사치라고 생각한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끊었나 보다. 물론 마음은 아팠겠지만 일단 가족들과의 생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외에도 내가 아버지에게 들은 당신의 작은 이야기들이 꽤 있다. 내가 아쉬운 것은 이것들을 어떤 형태로든 정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매번 마음만 정리해야지 정리해야지 하면서 귀찮음을 핑계로 늘 다음을 외친다. 올해 아버지는 고희다. 더 늦기 전에 그 분의 삶을 어떤 형태로든 정리하고 기록에 남기고 싶다. 아들로서 그 정도는 해드리고 싶다. 나도 궁금하다 어떤 이야기들이 더 나올지...그래서 <놀라운 아버지> 아닌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가장 잘 모르는 것이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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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 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문학과 예술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장호연 옮김 / 마티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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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빔밥, 자장면, 팥빙수의 공통점은?  

그렇다. 비벼먹는 음식이다. 나는 이 음식들을 먹을 때 몇 번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같은 소리를 듣는다. " 왜 비빔밥을 그렇게 대충 비벼? " " 왜 팥빙수를 거의 안 비비고 드세요? "  나는 통상적으로 잘 비벼먹어야 한다고 알려진것들을 잘 비벼먹지 않는다. 성격이 별나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내 나름대로하는 답은 여러번 섞기 귀찮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진짜 정답이 아니다.  진짜 잘 섞지 않는 내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다분히 아도르노적이다. 비빕밥이나 팥빙수를 잘 섞으면 그 맛은 비교적 균질적이다. 그것은 변증법적인 합의의 총체성이며- 위대한 비관주의자의 말을 빌자면- '동일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번 숟가락을 통해 입으로 들어가는 맛이 비슷하다.  나는 그게 좀 재미가 없다. 대충 섞으면 어떤 부분은 고추장이 많고 어떤 부분은 밥이 많다.  어떨때는 좀 짜고 어떨 때는 좀 싱겁다. 한 그릇의 비빕밥 안에 다양한 맛을 느끼게 된다. 이게 '동일성 부정'의 철학이다. 팥빙수는 더 하다. 잘 안 섞고 숟가락 가는데로 퍼 먹으면 어떨 때는 얼음맛이, 어떨 때는 과일 맛이 더 많이 난다. 이게 아도르노 미학이 폭로한 대량문화의 획일성을 피하고 사이드가 말하는 주체의 개인적 즐거움을 즐기는 방식이다. (웃자고 한 소리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에 전체적으로 아도르노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있다.말년의 양식'이라는 말도 아도르노의 표현에서 빌어온 것이다. 그는 말년을 '파국'의 개념으로 말했다. 책에 여러번 인용되며 또 대미를 장식하는 글이 이것이다. 

"객관은 파열된 풍경이고, 주관은 그 속에서 활활 타올라 홀로 생명을 부여받는 빛이다. 그는 이들의 조화로운 종합을 끌어내지 않는다. 분열의 원동력으로서 그는 이들을 시간 속에 풀어헤쳐 둔다. 아마도 영원히 이들을 그 상태로 보존해 두기 위함이다. 예술의 역사에서 말년의 작품은 파국이다"   

(와우...! )

대게 도덕책 좀 읽었다는 사람들이 바라는 말년은 일종의 '구루' 또는 '현자'이다. 세상사의 이치를 깨닫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어디에도 얾매이지 않는 초연한 사람이다. 대게는 공기마저 답답한 병실에서 생을 마감하지만 말이다. 하여간 도덕적 환상의 지지물로서 그런 '현명한 늙은이'에 대한 이미지가 존재한다. 그런데 이 책에 등장하는 말년성은 이를 거부한다. 죽어가면서까지 쓸쓸한 독을 뿜는다. 그리스 서사극의 주인공들처럼 비장하지 않은가. 하여간 그들은 맹독성 동물이다. 또한 세속적이면서 초인적이다. 

사이드는 질문한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더 현명해지고, 예술가들이 경력의 말년에 이르러 얻게 되는 독특한 특징의 인식과 형식이 과연 존재할까? " 

 대게의 흐리멍텅한 대답은 '그렇게 되도록 수양해야지요' 라는 것이다. 알란파슨스 프로젝트의 'old & wise' 가 되고 싶은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적은 치매이다.)  현실의 나이브함 속에 자리한- 지젝식으로 말하자면- '대상a' 로서의 말년성은 분리수거된다.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에서 사이드가 말하는 '말년'은 결코 연대기적 의미도 아니다. 예술가의 어떤 작품은 -예를 들자면 모차르트의 <코지판 투테>,브리튼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연대기적으로 말기에 위치해 있지 않으면서도 이미 '말년성'을 보인다. 희곡가 장 주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같은 이들은 삶의 어느 시기에서-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젊은- 이미 '말년'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이드는 이탈리아의 도시인 베네치아에서도 '말년의 파국성'이 느껴진다고 분석한다. 그렇다면 이제 눈먼 장님이라도 사이드의 '말년성'이 결코 생물학적 연대기의 끝을 뜻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이드는 이제 그가 이 책 전체에서 입증할 질문이자 답을 던진다.  

"하지만 예술적 말년성이 조화와 해결의 징표가 아니라 비타협,난국,풀리지 않는 모순을 드러낸다면 어떨까?" 

사이드의 '말년성'은 바로 이것이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화해불가능성'이며,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있지 않는 '초월성'이다.'찟겨나가고','옆에 내던져지고 포기되는' 속에서 즉 '예술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현실에 저항하면서 발생한다.' (여기서 현실은 미학적 현실이다.) 역자의 서문에는 사이드의 말년성을 몇 가지로 정리한다. '망명과 주관/ 비극적 & 유희적인 면/ 화해하지 않음/시대착오성' 이다. 아도르노는 망명의 형식을 '파국'이라고 설명한다. 그에게 말년성은 용인되고 정상적인 것을 넘어 살아남는 개념이다. 또한 말년성은 누구든 실제로는 넘어설 수 없다는 생각을 담고 있기도하다. <신음악철학>에서 아도르노는 베토벤 말년 작품의 혁신성을 '부정성,화해불가능성'으로 이해하여 쇤베르크까지 그 연장선 속에서 위치시킨다. 그리고 이는 아도르노 본인에게도 해당된다. 사이드는 베토벤이나 바흐처럼 아도르노 역시 말년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시킨다. 즉 개념의 틀을 제공해준 선생이 다시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는 아도르노를 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도르노를 읽으면서 우리는 그가 스스로를 더 작은 부분들로 해체하는 격노한 기계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아도르노는 이들로부터(20세기의 형식들) 초연하게 거리를 두면서도 한편으로는 공모관계에 있었던,비시의적이게도 19세기 후반 낭만주의 이념에 사로잡혀 이들에게 실망하거나 각성한 인물이었다."  

내가 이 책 전반에 아도르노의 향기가 배어있다고 한 부분은 기본적으로 이 책에서 말하는 '말년성'이 일종의 '통합불가능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년성을 끌어내며 자주 등장하는 '부정', '부조화','비총체성' 등은 아도르노에게 핵심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에서 깜짝 발견한 그리스의 시인 콘스탄티노스 카바피가 '오딧세이아'를 인용한 싯구절도 호르크하이머와의 작업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카바피의 '이타카'라는 시는 비록 부분 인용이었지만 두꺼운 오딧세이아를 10행 정도로 요약한 놀랄만한 것이다.) 아도르노의 '총제성'에 대한 부정은 유명하다. 헤겔의 긍정의 변증법을 부정하는 책이 바로 <부정 변증법>이다. 쉽게 말하자면 헤겔의 '정반합'(헤겔은 이렇게 말한적이 없지만)의 '합'은 결국 '동일성'의 체계로 다시 화합시키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이런 개념화에 발생하는 폭력적인 면을 발견해내고 개면화되지 않는 '비동일성'의 측면을 부각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아도르노를 '포스트모던의 시초'라고 보기도 한다. 대중산업으로서의 문화에 그가 부정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런 '동일화'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사회를 균질화시키는 역할을 해대고 있기때문이다. 아도르노의 문제는 옮바른 지적에도 불구하고 대중문화의 자발성이란 측면을 간과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엘리트주의 -실제로 아도르노는 출신면에서 엘리트라 할 만하다-라는 욕을 먹기도 한다. (사이드는 아도르노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아도르노식 '관리사회'에서 훨씬 더 자유롭다.) 

사이드와 아도르노가 평가를 달리하는 인물 중에 하나가 R 슈트라우스이다. 글렌 굴드는 R슈트라우스에 대해 매력적인 평가를 했다.( 글렌 굴드의 R 슈트라우스 피아노소나타 느린 악장은 재발견이라고 할 만큼 아름답다.) R 슈트라우스에 대한 평가는 사실 '크게 판을 벌인 사업가처럼' 이라는 아도르노적인 평가가 일반적이다. 사이드는 R 슈트라우스가 '현실에서 퇴각', 즉 복고주의라는 방식을 통해서 당시 화성혁신으로 대표되는 '총체성의 바그너'에 저항하는 특징을 읽어낸다. 바그너의 오페라가 담고 있는 세계관은 분열적이기는 하지만 헤겔식의 역사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이드는 이를 '과거의 과거성'이라고 말한다. 이는 바흐와 굴드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등장하는 '인벤션'(창안)의 개념과도 연결이 가능하다. 이 둘의 관계에 대해 사이드는 아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바흐와 굴드 모두가 시대착오적이며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이다. '가장 앞서간 통주저음의 대가이자 구시대적인 다성음악가' 로서의 바흐는 재발견되어야하는 주체성의 자율적 공간을 스스로에게 할당해 놓았다. 그리고 이런 '인벤션'(창안)의 가치를 제대로 읽어내고 해석의 자율적 공간 안에 다시 위치시켜놓은 것이 바로 글렌 굴드이다. 사이드는 여기서 글렌 굴드에게 '지적 비르투오소'라는 왕관을 씌워준다. 이 말은 브루주아 문화의 결과로 태어난 존재적 한계와 그에 대한 반작용적 존재로서의 자리이다. 굴드에게는 그저 뛰어난 실력의 연주자로서의 만족이 아니라 연주와 미학적 행위가 '작곡가'에 이어지는 단계로까지 발전한다. 사이드가 높이 평가하는 부분은 그가 새로운 기술의 발견을 통해 미학적 지평을 확산했다는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작업을 '지적 비평 전통'하에 놓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인 연주자가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여 담론을 만들어내는 지식인들의 영역'에 그를 위치시키는 것이다. 짧으면서도 명쾌한해설이다. 물론 이런 굴드 역시 시대착오적이며 긴장감을 해소시키지 않는 말년성의 특징을 내포한 존재로 이해된다. 

이 책에는 이외에도 모차르트의 <코피 판 투테>에 대한 '반도덕적 해석'의 흥겨움을 보여준다. 재미와 즐거움이 또한 하나의 저항 양식이 될 수 있음을 상징하는 대목이다.  모차르트의 '농담'과 베토벤의 '근엄'을 대비하여 '가변적 주체'와 '고정된 정체성'의 예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베토벤의 '계몽성' (베토벤은 열혈 계몽주의자였다. 박홍규의 <베토벤평전>은 지나칠 정도로 정치적인 베토벤에 시선을 꼽는다.) 은  모차르트의 후기 오페라들에서 불편해질 수 밖에 없다. 사이드는 '코지판 투테'의 내러티브와 별 비중없지만 극의 모티브가 된 돈 알폰소에 집중한다. 그를 동시대에 살았던 사드에 비유하기도 한다.(사이드는 푸코를 인용하지만 <계몽의 변증법>에도 사드가 등장한다.) 모차르트는 이 오페라에서 이동과 불안정,방탕함과 조작의 상징들을 동원했다. 그리고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부주의하고 무의미해보이는 이야기'들을 결합해내었다고 사이드는 말한다. 그리고 하울러 그 불편함이 주는 불길한 비전에 주목할 것을 유의하라고 말한다.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는 사실 예술의 역사 속에서 '말년성' 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또한 이 유고집을 내게된 저자 사이드의 말년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도르노가 개념의 틀을 제공하고 주인공으로 등장했듯이 사이드는 이 책의 서술자이면서 빙의된 형태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러기 위해서 등장한 또 하나의 '분열적 인간'이 바로 '장 주네'이다. 그는 '계속적으로 투쟁 중인 다른 정체성과의 동일시를 통해 황홀경을 느끼려는' 인생이 말년적인 인간이다. 이 사람의 과거 행각과 사이드가 직접 만난 이미지는 처음부터 모종의 긴장감을 형성한다. 사이드는 장 주네의 팔레스타인과의 관계를 그의 말년 작품을 통해서 읽어낸다.그러면서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이자 팔레스타인으로서 서방세계의 정치관과 자신의 철학을 은연중에 빗대어 설명한다. 가장 사적인 글이면서 지적인 유명인사들의 티테이블 엿듣는 재미를 건네준다. 행동하는 지성으로 온갖 총애를 받는 사르트르에게 '비겁한 자'라는 평가를 내리는 대목은 '말년성'의 특징인 '배반'의 쾌감을 준다. 또한 선비같은 아도르노와 시골장돌뱅이의 이미지가 남아있는 주제를 비교하는 대목도 흥겹다. 장 주네를 표현하는 이런 차이를 표현하면서도 '말년성'의 의미를 이해하게 도와준다. 

주네에게 악마든 신이든 절대자는 인간의 정체성이나 인격화된 신으로는 인식될 수 없고, 오직 모든 것이 말해지고 행해진 뒤에도 가라앉지 않는 것, 포섭되거나 길들여지지 않는 것으로만 인식된다. 그와 같은 힘은 어쨌든 거기에 몸담은 사람들을 통해 표현되고 배려되어야 하는데 그럴 경우 자체적으로 노출되거나 인격화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 주네의 최종적이면서 가장 완고한 역설이다.  

이 외에 내가 처음 들어보는 작가인 람페두사,3대 비극작가인 에우리피데스 (그의 <바카소스의 여인들>이 분석대상이 되는데 이 텍스트는 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의 도입부에 '디오니스소적 폭력/아폴로의 과잉폭력'이라는 대립구도 속에도 등장한다.) 그리고 토마스 만, 브리튼, 비스콘티가 '말년성'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 또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마지막 세사람이 모두 '베네치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소설 <베네치아의 죽음>과 관련되어있다. 비스콘티의 영화때문에 이제는 말러도 넣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사이드는 이들을 엮어낸 '베네치아'라는 도시마저 '말년성의 형식'으로 분석한다.(내가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곳 중에 하나다.) 사이드는 베네치아가 '영광과 부패,창조성과 타락의 역사' 를 아무렇지 않게 결합하고 있는 도시라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은 도시가 또 어디있겠나 싶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두번째 대목이다. 이 도시가 항상 '외부자'에 의해 씌여지며 그렇기에 이미 '어떤 이미지를 바탕으로 하고,이것이 다시 텍스트에 의해 강화된다'는 점이다.즉 베네치아는 항상 이미 보고 이미 읽은 것일 뿐만 아니라 이미 씌어진 것이다. 우리는 주관과 객관이 혼재하고, 동양과 서양이 섞이며, 존재와 비존재가 혼합되어 버린 도시의 그림을 얻게된다. 비코가 말하는 '인게니움' (인벤션과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인 듯 하다.) 인간의 역사를 인간의 마음이 작용한 산물로 파악하는 능력.즉 풍부한 상상력의 도화지를 펼쳐주는 창안적 발산의 공간으로서, '말년성'과 혼연일체되어 있는 베네치아를 만나게 된다.   

나는 문득 어느 벽 앞에 당도했다. 벽에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여기서 너의 미래가 시작된다>  

                                                                             -옥타비오 빠스 '불면의 기록'중에서'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인가? 죽음이 또다른 미래의 시작이라는 건가? 아니다. 사이드는 살아서도 그 벽을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그 말년성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길을 갈수 있다고 했다.그것이 그의 사후에 나온 이 책이다.  

자..이제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의 리뷰를 끝내자. 식습관과 관련된 가벼운 이야기로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나는 앞으로도 비빕밥,자장면, 팥빙수를 잘 섞어 먹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내 나이 30을 넘던 어느날, 나도 모르게 알게 된 내 습관이다.   

후기) ... 이 책을 내가 분명히 좋아할 거라고 보내준 친구에게 감사한다. 음...좋았다. 나 역시 이 책을 상당히 좋아할 친구에게 보냈다. ...그리고 이 책은 거짓말 안보태고 정말 한달음에 읽을만큼 재미있다. 물론 한가지 개념을 가지고 주구장창 끌어가는 것이 답답할 수도 있고 반면에 일관적이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만약 앞의 생각이라면 '바리에이션'은 원래 싫어하는 사람이겠거니 한다.(당근 바흐의 비수면용 수면음악도, 모차르트의 '반짝 반짝 작은별'도,.베토벤의 애인 이름같지만 그렇지 않은 디아벨리로 모두 싫어할 것 같다.) 이 책은 조금은 이런 서양 예술에 관심이 있어야지 볼 수 있다.  'R 슈트라우스가 새해되면 신년 음악회 매번 하는 그 사람이지' 하면 좀 곤란하다. 최소한 옛날에 MBC 9시 뉴스 타이틀 음악이지 정도로 구분은 되어야...아 몰라.정말. 스탠리 큐브릭의 유인원 뼈다귀 던지는 그 장면...그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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