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향연.파이돈 - 개정신판 세상을 움직이는 책 34
플라톤 지음, 박병덕 옮김 / 육문사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인문학의 위기론'이 새로운 대응을 낳고 있다.  '인문학 위기론'의 출처인 대학에서는 비인기인문학과들이 통폐합의 수난을 겪고 있다. 반면 상아탑을 나선 공간에서 '인문학'은 새롭게 싹을 틔우고 있다. 백발의 은퇴한 교사가 고전 강의를 듣기도 하고, 점심 시간에 여고동창들과 자식 자랑,며느라 뒷담화에 열을 올리던 아주머니들이 노트에 열심히 필기를 한다. 거기에 '희망의 인문학'의 새로운 버전으로 노숙자나 빈곤층을 위한 강의들로 계속 해서 이어지고 있다.  이윤의 노예처럼 그려지던 '전문경영인'들 역시 고액의 '인문학' 강좌를 열심히 따라다닌다. '인문학'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자기를 새롭게 배치하려는 노력은 일단 가상하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면 여기에는 무언가 뒤틀림이 느껴진다. 특히 수천만원을 호가한다는 CEO들을 위한 인문학은 더욱 그렇다. 인터넷에서 본 몇 몇 사진들은 중세 시대 철학의 굴욕을 비유하는'신학의 시녀' 보다 오히려 더 굴욕적이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의 시녀'가 된 '철학'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렇게 '철학'은 허약하지 않다.) 별 다섯개 짜리 특급 호텔 리셉션장에는 고급 양복을 입은 CEO들이 눈을 반짝이며 앉아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 대학 교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에 감탄하며 '현묘의 도'를 깨달은 듯 한 고개짓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고급-아니 고가의- 인문학 강좌에 앉은 자들은 결코 '현묘의 도'를 깨달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경영인들을 너무 평가절하한다고 생각치는 말기 바란다. 그들 대부분은 좋은 대학과 좋은 대학원을 나왔을 것이다. 국제수지 그래프를 읽는 눈은 누구보다 빠를 것이고, 수많은 성공심리학이 가르쳐준 '인간심리'에 대해서는 박사 학위자들보다 나을 것이다. 나는 모든 '경영인'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훌륭한 경영인들은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좋은 일자리와 그들의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좋은 직장 안에서 노동자들은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며 자신의 꿈을 이루어나간다. 평등한 노사관계가 보장된 곳이라면 공장의 최고 주인은 아니어도 동등한 주인정도로는 대접을 받을 수있을게다.(인문학의 배운 CEO들이 강좌가 끝나고 그런 태도로 돌변해주길 기대한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인문학이 대중과 소통하려는 노력과 그에 대한 대중들의 뜨거운 반응을 욕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번 강조하겠지만 그런 방식은 칭찬받아야 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의 주인공 소크라테스도 좋아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방법론은 '대화' 였다. '대화' 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상대방'을 직접적으로 상정하고 이야기 하는 방식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다른 말로 하면 '소통'이다.전문적인 철학 담론을 논하며 담론의 철옹성 안에서 박는 방식은 이미 소크라테스의 것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의 소통은 '시장'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시장과 남대문 시장은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크라테스의 교육이 결코 '아카데미아'에서만 머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대개의 모든 그리스인들이 그랬듯이 그들은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토론하기를 좋아하며, 소통을 좋아하는 정치적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강좌'에서 깨달음을 얻은 듯한 눈빛을 보며 '인문학의 부활'보다  '인문학'이 위기시대에 과연 어떻게 소비되는가를  생각한다. 이것은 당연히 '인문학'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소비되는 것이 가장 '인문학적'인가에 대한 질문과 같은 것이다.

대개의 '인문학 강좌'들이 고전을 다룬다. 동양 철학하면 '논어','노자'들을 이야기할 것이고, 서양하면 '소크라테스-플라톤' 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 책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플라톤의 '대화'편 중 가장 널리 읽히는 책이다.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내가 학력고사가 끝나고 고등학교 겨울 방학때, 이 책을 읽었을때- 완전히 대학생 필독서 목록때문에 봤다. 왠지 고딩이 아닌 성인으로서 대학생이라면 이정도는 하는 생각에- 나는 이 책이 '소크라테스'가 쓴 줄 알았다.(요즘은 중학생들도 이 책을 읽으니 나보다 훨씬 앞서가는 녀석들이다.영어도 잘하고...무서운 놈들!!) 

소크라테스가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왠만한 '철학 입문서'를 읽어본 사람들은 다 알것이다. 후대 사람이긴 하지만 역으로 인용하자면 철학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에게서 일어났다. (니체는 이런 전환이 '이론적 인간'의 출현이라는 점에서 뜨악하게 바라본다.) 철학의 중심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겨온 것이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인간은 '신의 섭리 하에 있는 인간'이다. 우리는 '시녀가 된 철학'의 시대를 지나 데카르트 쯤 와야지 '생각함으로 인해 존재하는 인간'을 만난다. 소크라테스라면 과연 가장 '인문학적'인-나는 여기서 이것을 거의 철학과 같은 개념으로 쓰고 있다만- '인문학의 용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했을 까?  CEO들에게 자신과 후배들이 남긴 몇 마디 명언들을 기억시켜 주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돈벌이로 복잡해진 머리를-비단CEO뿐만이 아니라- 잠시 세척하는 시간을 주는 것으로 사용되길 원했을까? 명언이 필요하면 포털 사이트 검색을 해보면 될 터이고, 고급스럽게 머리를 세척하려면 유명한 미용실에 가서 누우면 될 터인데...그럼에도 사람들은 '인문학' 강좌를 듣고, 감동하고,그리고 한 일주일 쯤 지나면 '강좌'에 갔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잊어버린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변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먼저 당신 자신을 돌보시오. 당신이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덕과 지혜를 추구하시오, 국가의 이익을 돌보기보다는 국가 자체를 돌보시오. 이것이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준수해야할 순서요."

'당신 자신을 돌보시오' 라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명언으로 알려진 신전에 새겨진 신탁, '너 자신을 알라.'의 다른 버전이다. '자신을 돌보라'는 것은 무엇인가? 내 몸이 건강하고 쾌락을 유지하라는 것만을 뜻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너,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언지 생각하라'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무지'로 자신만의 해답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이제 '상대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자' 로 남는다. 그리고 '단순히 사는 삶'이 아니라 '잘 사는 삶'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에게 잘사는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와 하나 되는 삶, 정의를 실천하는 용기 있는 삶, 중용과 절제의 삶이다. BMW 7시리지를 타고 강좌를 빠져나가며 소크라테스의 감흥에 고개를 끄덕여봐야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면 '단순히 사는 삶'일 뿐이다. 그리고 거기에 대개는 자본의 구조가 은폐해주는 사적 이익들이 숨어있다. 대신 '삶'의 방향을 바꿀 어떤 계기라도 얻게 된다면 비싼 돈 주고 수업들은 보람이 있을 것이다.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게 '돈'이었다면 그걸 써서 얻었다고 뭐라하지는 않는게 좋을 듯 싶다.

물론 오늘 날의 시각으로 보자면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철학이 성에 꽉 찰리는 만무하다. 그들의 자연철학은 요즘 시각에서는 실소를 머금게 한다. 하지만 그들이 철저히 이성의 추론으로 거기에 도달했다는 점에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 추론의 결과들이 때로는 신화적인 보편성을 얻을 수도 있어 보인다. 영화 같은데는 여전히 그런 장치들이 제법 잘 활용된다. 또한 신화적 틀에 잡혀 있는 인간관이나 영혼관같은 것들도 마찬가지다.(예전에 소비에트에서 나왔던 철학입문서 같은데서는 그들이 유물론을 배격했다는 이유로 귀족철학의 대변자,유심론자라는 식으로 매도당했다. 그런 세속적인 해석방식은 당시부터 지겨웠다.) 거기에 소크라테스의 신적인 절대성에 대한 합일 같은 개념들은 '신이 사리진 시대'의 눈으로 보면 70년대 헤어스타일을 보는 듯 하다. 그가 상정하고 있는 '절대적 선'이나 '절대적 덕'의 개념들은 신이라는 논리적 소실점이 있다면 가능하지만, '신'을 괄호 치고 나면 과연 그 '선'과 '덕'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남길 수 밖에 없다. 하기야 이런 주제들은 철학사의 근본적인 숙제들이니까 소크라테스씨에게 모두 물어볼 필요는 없다. 

내가 생각할 때 고전의 가르침은 사실 '깨달음'의 즐거움보다는 '뱀의 독'처럼 쓰다는데 있어보인다. <향연>에서 알키비아데스가 반어를 섞어가며 소크라테스를 칭송하는 대목에 나오는 말이있다. 

... 뱀에 물린 고통을 맛본 사람은 뱀에 물려 본 일이 있는 사람 이외에는 그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그런데 나는 독사의 이빨보다도 더 심한 고통을 주는 어떤 것에 물렸습니다. 그것도 제일 아픈 곳을 말입니다. 즉 심장을, 아니 영혼을 물렸어요.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나를 문 것은 바로 철학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과도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알키비아데스의 말을 어떻게 해석하든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는 철학의 즐거움이 또한 고통을 동반한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독사의 이빨'이 '자신'을 물어뜯는 치열함이 없다면-그것은 끝없는 자기 성찰,각성, 수련.그리고 실천을 동반한다-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우리가 심장이 없는 사람을 허수아비라고 부르듯이, 철학의 심장을 얻으려는 '분투'(쓰고 보니 이 말이 얼마나 힘든 말인가?)가 없는 '인문학'은 허수아비에게 악세서리를 하나 더 달아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프라다 가방을 매고, 아가타 귀고리를 하고 있어도 허수아비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고전을 읽을 수록 구양수가 말란 '다상량' 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多聞  多讀 多想量(다문 다독 다상량)

다독은 다상량에 비해 얼마나 쉬운 일인가? 요즘 내겐 진짜 명상이 필요하다.

생각의 꼬리를 놓치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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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8-12-24 10:40   좋아요 0 | URL
저는 박종현님이 옮기신 책으로 읽었는데요, 희랍어의 원래 뜻을 보면서 읽을 수 있어서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고전의 참 의미는 그 시대로 돌아가서 그 시대의 마음으로 읽는 데서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고전을 어떻게 현대화할지는 그 시대의 마음으로 읽고나서 생각할 문제겠지요, 이 책에 나오는 문장과 단어들의 논리와 그것이 어떻게 증명되는 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문학 강의란.. 정말 허수아비에 달린 프라다 가방이겠죠. (아, 안녕하세요:> )

드팀전 2008-12-24 17:29   좋아요 0 | URL
^^ 안녕하세요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피에르 아도 지음, 이세진 옮김 / 이레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피에르 아도의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는 흥겨운 책이다. 귀에 익은 발라드처럼 주선율이 확실하다. 화성들이 다채롭다. 미리 겁먹는 사람들을 위해 말하지만,  피에르 아도가 만든 이 책에서 독자들이 구절양장 그리스 산길에서 미아가 될 일은 없다. 물론 너무 방심하면 자기 화장실 안에서도 길을 잊곤 하는 것이 인간인지라 장담은 못하겠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할 정도로 피에르 아도는 그가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하고 싶었던 바를 명백하게-반복적으로, 수많은 증거들을 들어서- 이야기 한다. 

우선 이 책은 거스리의 <희랍철학 입문>같이 그리스 철학의 주요개념을 풀어놓고 있는 책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시작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플라톤의 '이데아'가 뭔지, 스토아 학파의 '아파테이아'가 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앟는다. 이런 개념들이 책 속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개념들을 설명하는 것이 이 책의 주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래 묵은 그리스인들이 자기의 용어로 만든 개념들에 아픈 상흔이 있었다면, 이 책은 '치유의 반창고'가 충분히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주 선율, 즉 주목적은 무엇인가?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는 소크라테스 이전 부터 중세의 스콜라 철학까지를 주로 이야기 한다. 각 철학 학파들의 세계관, 자연관, 윤리관, 철학적 훈련등이 다루진다. 하지만 각 철학 사조의 차이점 보다는 고대 철학이 가진고 있는 공통된 점을  부각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그 공통점은 '삶의 양식'으로서의 고대 철학이다. 즉 '철학은 삶이어야 한다.' 라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생활양식으로서의 철학'이 오뎅탕의 대나무 꼬치이다. 그리고 피타고라스,소크라테스,플라톤, 에피쿠로스 뭐 이런 멤버들이 꼬치에 대롱대롱 끼워진 형형색색의 오뎅들이 되신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오뎅 심장을 관통하는 '막대기 자체'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이 책의 핵심이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철학을 한다는 것은 삶을 제대로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피에르 아도는 '철학'과 '철학담론' 을 구분한다. 우리가 '철학'시간에 배우는 모든 철학사조들은 '철학담론'이다. 이것은 '철학들'이라고 이야기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앞에 있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수많은 대중 철학서의 첫장 제목 같기도 한 이말. 저자는 '철학'을 '실천하는 삶' 이라고 말한다. 특히 고대철학기에는 이런 '철학'과 '철학담론'이 구분되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이것이 분리되기 시작하는 것은 중세 시대- 초기 그리스도교의 영향이 빠져나가고 난 이후- 그리스도교가 갑자기 부상하면서 부터이다. 아도는 이런 취지에서 현대의 철학들,철학자들이 '이론화 경향'에 목숨거는 것에 대히 눈을 흘긴다. 고대 철학자들은 이성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삶을 추론해 냈다. 그리고 그것을 담론화하며 이와 함께 그들의 추론이 만들어낸 철학대로 살아나가려고 했다. 즉 이렇게 담론과 실천이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철학'이라는 말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극단적인예가 '소피스트'들이다. 그들은 말의 철학을 했을 뿐이다.

이쯤 되면 아도의 입장이 명백해졌다. 그렇다면 이제 두 가지를 더 첨부해 주어야 세속적인 이분법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을 듯 하다. 하나는 아도가 '실천의 철학'을 말한다고 '담론'을 필요없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결국 추론적 사고들을 정리하고, 논리화시키고, 정교화시켜서, 토론하여 교육하는 것이다. 아도는 '영성의 훈련'이라는 말로 고대 철학의 특징을 말한다. 현대 이론이 고담준론화 되어 있기 때문에 '거대 이론'이나 '담론' 이라는 말만 들어도 적대시 하는 태도는 기실 전혀 '철학'적이지 못하다. '담론'과 '실천'은 새의 날개처럼 우리들이 '더 나은 인간'이 되게 하는 철학의 목적에 기여한다.  다음으로 '실천'에 대한 부분이다. 이 '실천'이라는 것은 가끔 '행위'와 혼동되기도 한다. 아무래도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가져다 준 사이드 이펙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도가 말하는 '실천'은 거리에 뛰쳐 나가 구호를 외치는 '실천' 을 말하지 않는다. 또 '아는 것을 실천하자' 라는 의미의 '물리적 차원'의 실천만을 뜻하지도 않는다. 오해를 살 수 있는 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해 보자.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실천적인 삶이 필연적으로 타인들을 향하는 것은 아니다. 행동으로써 발생하는 결과들을 노리는 생각들만이 '실천적인' 것은 아니다. 정신적 활동과 자기 내에 목적을 지니며 그 자체의 관점으로 개진하는 성찰들이 그 보다 훨씬 더 실천적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철학은 '정리적 생활양식'이었다. 그외에도 고대 철학에서는 '높은 곳에서 바라보기'와 같은 정관적인 태도가 장려된다. 이 들이 궁극적으로 이런 '거리두기'를 통해서 다다르고 싶었던 것은 무었인가? 이 점이 중요하다. 그것은 어떤 이에게는 '선'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신'이었으며, 어떤 이에게는 '궁극적 쾌락'이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감찰'로서의 자기 윤리학의 덕목이다. 즉 궁극적인 선에 다다가기 위한 개인의 절제와 금욕, 자기 훈련을 목적에 둔 '내먼적 실천형식'이다. 그리고 이들이 누구인지도 중요하다. 이들은 그리스 인이다. 그리스 인들은 '현재지향적' 이었으며 또 '실용적'이었다. 그들은 폴리스를 중심으로 누구보다도 더 '정치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들 철학자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바는 '타인과의 대화'이다. 플라톤의 거의 모든 저서가 대화로 이루어져있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스텔레스의 '실천'을 세속적으로 '내면으로의 소거' '타인과 세계에 대한 외면'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관적 태도'는 마치 현실의 지평을 떠나서, 관념의 즐거움만을 택하라는 것 처럼 해석하는 보수주의적 태도가 있다. 마치 '순수예술'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열정처럼 그것이 현재의 기득권에 아무런 해를 주지 않고,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충분히 열린 마음으로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면의 성찰' 만을 무 가운데 자르 듯 뚝 잘라서 강조한다. 이것은 코끼리의 다리를 잘라서 '이것이 코끼리의 실체다' 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무뢰한 짓이다. 세속적으로 말해서도 마찬가지다. '내면의 성찰' ,'영성의 훈련'을 위해서 소크라테스는 거의 거지처럼 살았다. 좀 극단적인 견유주의자 디오니게스는 노숙자였다. 유물론적인 에피쿠로스(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였다. 고병권이 번역하여 나와 있다.) 역시 '쾌락'을 '감각적 쾌락'과 '궁극적 쾌락'으로 나누고 후자를 쫓기 위해 금욕을 실천했다. 금욕이 덕목이었던, 스토아 학파는 말할 것도 없다. 거의 모든 그리스 철학은 '내면적 성찰'을 위해 '자기 절제'와 '금욕'을 요구 했다. 그런데 '타인에 대한 관계성'도 없고, '자기 절제'와 '금욕'도 없이, 쓸 것 다 쓰고, 누릴 것 다 누리며 현재의 감각적 세계의 모든 혜택을 배불리 누리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론'만을 빼먹어 쓰는 짓은 졸렬하고 무지한 짓이 아닐 수 없다. 그건 '철학'도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똥떵어리'일 뿐이다. 

피에르 아도의 말을 인용해 보자

철학의 실천은 개별적인 철학사조들의 대립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 우리의 '세계 내 존재','타인과의 존재'를 의식하려는 노력이며, 메를로 퐁키가 말한 것 처럼 '세계를 보는 법을 다시 배우고" 보편적 시각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 시각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개별성을 초월하고 타자의 입장에 설 수 있다.

고대의 철학적 삶은 항상 타인에 대한 관심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겠다.  

(프리드먼을 인용하여) 현대의 현자는 그토록 많은 심미주의자들이 혐오감을 보이며 외면했던 인간들의 하수구를 외면하지 않는다.

피에르 아도식으로 말해서 우리 시대의 '철학자'란 누굴까 잠시 생각해봤다. 단지 어떤 담론을 만들고 그에 대한 학자적 양심을 거는 수준을 말하는것이 아니다.(지금까지 이야기했는데 아직도 철학자를 그렇게만 말한다면, 내가 글을 친절하게 이해시키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내면적 성찰'을 거쳐 '존재' 자체와 '삶'을 일치되게 만든 분들이다. 결국 우리 시대의 선생이라고 할 만한 분들, 장일순 선생, 전우익 선생, 권정생 선생....그리고 자연의 법을 거르지 않고 그에 맞춰 자연적 농법을 실천하는 농부들.. 이런 분들이 고담준론의 철학책 한 권 제대로 쓰지 않았지만 철학자들이 아닐까 싶다.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하자. <고대철학>이 읽기 좋다는 이야기다. 이 책을 읽다보면 왠지 '동양 철학'과 유사한 점을 느끼게 된다. 피에르 아도가 윤리학을 중심으로 그리스 철학을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책 말미에 아도는 '보편적 스토아주의'라는 개념을 꺼낸다. 즉'고대 그리스 철학'에 담긴 생각들이 지역성과 시간성을 넘는 보편성을 띤 것이 아닐까 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보편적 스토아주의'라고 하는 것에 대해 긴 설명을 하진 않지만 이것은 고대 인도, 중국의 철학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우리는 서양 철학을 공부하다 학문적으로 동양학을 배운 학자보다 오히려 더 유리하다. 한국인의 삶은 알게 모르게 이런 동양철학의 전통하에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고대 그리스 철학이 모두 올바른 삶이란 무엇인가를 위해 '죽음'에 대해 성찰하고 논리적 추론을 만드는 과정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에피쿠로스학파의 경우 '죽음'을 '무'이라고 설명한다.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자면 '죽음' 이후는 '삶의 영역'이 아닌 '비시간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궁극적으로 '현재의 생에 대한 집중'을 요구하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 역시 '삶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삶은 흘러간다' 는 식으로 '현재에 대한 집중'을 요구했다. 이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내면에 대한 집중'과도 같은 말이다.

우리는 이런 태도를 익히 알고 있는 공자의 대화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논어> 선진편에는 계로와 공자와의 대화가 나온다.

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사람을 섬기지 못하며서 어찌 귀신을 섬기리요'라고 답한다. 이어 계로가 죽음에 대해 묻자 공자는 '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리오' 라고 답한다.

또한 '그리스 철학'이 '영성훈련'과 '공동체의 안정'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동시에 이루어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대학의 가장 유명한 구절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가끔 보수주의자들이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수신도 못하는 주제에'라고 하지만 그들은 <대학>이 이 개념들을 순차적으로만 배치한 것이 아닌 것을 모른다. 그리스 철학 역시 개인의 의식을 감찰하는 것과 이것이 더불어 사는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하는 지에 대해 동시에 고민했다.

이 외에도 고대 철학 내내 강조되는 '높은 곳에 자기두기' ,'금욕', '감각적 세계에 대한 부정' 같은 개념들은 노자와 장자의 철학을 끊임없이 연상시킨다. 우리들은 알게든 모르게든 중국 고대철학의 세계관에 친숙하다. 그런 차원으로 보자면 서양 학자를 흥분시켰던 '고대 그리스 철학'과 '동양 철학'의 유사성 같은 것들이 책을 더욱 편안하게 만날 수 있는 문화적 자원이 된다.

이럭 저럭 피에르 아도의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야기 한 듯 하다. 사족 같지만 피에르 아도는 말년 푸코의 '그리스로의 회귀'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보냈다. 이것은 이 책의 서문에도 잠깐 언급된다. 푸코의 '자기 배려'라는 개념이 자신의 '영성 훈련'이라는 개념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프레데리크 그로가 쓴 <미셸 푸코 진실의 용기>에 보면 아도의 푸코 비판의 핵심이 나온다. 아도는 푸코가 "자신의 윤리적 모델을 실존의 미학으로 규정하면서 너무 단순한 자기 양성을, 다시 말해 20세기 말의 새로운 댄디즘 버전'을 제안했다고 비판한다.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의 행간에도 나오듯이 아도는 고대인들의 자기 변형이 자기 퇴각이 아니라 자기 극복과 보편화를 중요시 하고 궁극적인 '일자'에 대한 합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푸코가 자기 수양을 말하면서 결국 개인이 지향할 세계와 공동체 전체를 놓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미셸 푸코 진실의 용기>의 공저자인 장프랑소와 프라도 역시 고대 철학사 입장에서 만 본다면 푸코의 텍스트 축소와 생략이 지적될 만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피에르 아도 역시 고대 철학의 과학적 양상을 축소하고 고대 철학을 주로 윤리적 소명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지점을 염두해 두면서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본다면 더 넓은 바다로 나가기 위해 필요한 장비를 하나 더 갖춘 마음으로 길을 나서는 든든한 기분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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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8-10-28 16:53   좋아요 0 | URL
흥미진진한 리뷰에 힘을 얻어 도전해 봄직한 책입니다
다음달 주문에는 추천해 주신 사막이 들어갈 예정이에요

드팀전 2008-10-28 17:48   좋아요 0 | URL
<사막>은 6-7년전에 봤습니다. 그 맘 때 제가 책 선물로 많이 주었던 것이 <사막>과 <눈먼자들의 도시>였습니다. 주제 사라마구 책은 이후에 입소문을 통해 인기를 얻어서 왠지 기분이 좋았습니다. <사막>도 품절 상태다가 이번 노벨상 수상으로 다시 인기를 얻지 않을까 싶네요. 사막 위에 나타난 청색 인간들인가...하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피에르 아도의 책도 좋습니다.

로쟈 2008-10-29 00:19   좋아요 0 | URL
아도가 <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이란 책도 쓴 게 있더군요(영역돼 있습니다). 한번 소개된 책의 반응이 좋아야 계속 나올 텐데요...

드팀전 2008-10-29 11:56   좋아요 0 | URL
영역...^^...우리말 번역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2008-11-24 1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8-11-25 09:21   좋아요 1 | URL
아..그러시군요. <반고흐효과>도 잘 읽었습니다.곧 아도의 책을 또 만날 수 있게되나요
 
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
H.D.F. 키토 지음, 박재욱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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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인은 극단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스인이 중용을 말할 때면, 조율된 현에 대한 생각이 그의 머리에서 결코 떠나지 않았다. 중용은 긴장의 부재와 정열의 결핍이 아니라, 참되고 맑은 음을 만드는 올바른 긴장을 뜻한다.  ..<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p375)

키토의 <The Greeks>는 1951년에 출간된 그리스 입문서이다. 

반 백년이 흐른 시점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입을 타고 있으니 이 분야에서는 '고전'이라고 해도 크게 나무랄 사람은 없을 듯 싶다. 말장난처럼 들리겠지만 이 책은 '그리스 고전을 읽기 위한 고전적 입문서' 인 셈이다. 앞에 인용했던 글은 이 책의 맨 마지막을 장식하는 말이다. 아름다운 글이다. 지난 여름 뜨거운 흥분의 물결이 가라앉은 시점에 다시금 큰 울림을 갖을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지금도 그대로 적용된다. 미국의 금융위기를 '신자유주의의 종말' 내지는 '퇴출'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는-그 마음의 간절함이야 알겠지만- 후쿠야마가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언한 것 만큼이나 경솔하다.

<The Greeks>(우리말 긴 제목보다 이 원제목이 더 강렬하다.)는 고대 그리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철학사를 논하는 책은 아니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에 대한 사회문화사책이며 역사책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논하는 것은 그리스적 의미에서 '철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철학'책이라 말해도 좋다. 키토는 이 얇은 책을 통해 고대 그리스인들이 어떤 세계를 살았고, 어떤 사고관을 가지고 살았는지를 밝히려고 한다.

책은 모두 12장으로 되어 있다. 해당 주제별로 크게 모아본다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4장 까지는 고대 그리스의 기초를 만든 그 '이전'의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의 핵심부분은 5장 -9장로 보여진다. 5장의 주제가 '폴리스는 ...이다' 이고 9장의 주제가 '폴리스의 몰락을 가져온 원인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키토의 <The Greeks>에서 가장 중요한 한 단어를 꼽을 수 있다. 그것은 '폴리스' 이다. 다른 말로 하면 키토는 '그리스인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폴리스를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후 10장에서는 앞선 과정을 통해 살펴본 그리스인들의 세계관을 몇 가지로 정리한다. 11장과 12장은 부수적인 이야기들이다. 그렇지만 또 가장 논쟁이 많이 되기도 하는 주제들이다. 신들에 대한 해석문제, 여성, 노예 등과 그리스 시민과의 관계 같은 것들 말이다.

키토는 독자들에게 그리스를 바라볼 때 조금 더 '다양성'을 갖고 바라봐주길 요구한다. 가끔 우리는 현재의 다양성과 복잡성이라는 사슬에 묶여 과거는 이보다 더 단순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광학기술의 발전처럼 현대의 연구가 발전할 수 록 이런 것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냐 아니면 '상식'이라는 함정 속에서 생을 마감하느냐의 차이이다.

 키토는 책 첫머리에서 부터 서구 역사의 시작처럼 느껴지는 고전 그리스가 '새로운 창조'의 시간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오히려 작가는 '새로운 르네상스'였다고 말한다. 북방의 헬레네스 문화와 남방의 크레타 문명이 가장 극적으로 융화되어 꽃을 피운 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리스 문화의 절정기라는 것이다.BC 5세기의 페리클레스의 시대가 그런 시기였다. 이런 그리스 문화의 혼종성은 그리스 예술의 위대성과도 연결된다. 이오니아와 도리스 기둥으로 기억되는 지적긴장감과 예술적 쾌락이 균형과 조화를 완벽하게 이루어낸 것이다. 흔히들 그리스 미학을 규정하는 '대칭' '균형' 같은 개념들이 이런 하이브라이드의 결과인 셈이다. 그리스인들의 변증법적인 조화의 미덕은 호메로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일리아드>는 통일성과 인과성, 도덕법칙의 존재를 밝힌 책이다. 물론 <일리아드>중 단 하나의 단어를 찾아야 한다면 그것은 '아르테'이다. 호메로스는 '아르테'를 향한 삶의 열정과 '숙명'이라는 이름의 생의 비극적 틀 사이의 긴장감을 아름다운 글로 남겨놓은 것이다.

키토가 요구하는 '다양성'의 시각에는 '그리스인들'에 대한 '다양한 시각'도 함께 들어 있다. 그는 '그리스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종류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탈근대적인 감각의 개인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탈근대적 칼럼들에 영향을 받은 개인에 대한 강조가 아무런 철학적 맥락 없이 쓰이고 있다. '집단주의'에 대한 반대로서의 '가벼운'개인에 대한 존중말이다.) 저자는 그리스인들이 개별 행위의 특수성과 동시에 보편성을 동시에 중요시 했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남아 있는 그리스 비극들 모두를 생각해 보면 이는 더 설명이 필요 없다. 그리스 비극은 낭만적인 우울감만 주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 공동체적인, 다른 말로 하면 정치적 비극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인의 '개인성과 보편성의 결합'이라는 주제로 넘어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 둘이 상호관계를 맺는 장소를 이해해야 한다. 그곳이 바로 '폴리스'이다. 저자 역시 '폴리스'라는 말을 '도시국가'로 번역하는 것이 나쁜 번역이라고 말한다.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의 피에르 아도는 아예 '도시'라고 번역한다. '폴리스'는 -다른 고대 그리스어들과 마찬가지로- 현대에 적절한 번역이 없다. 그러므로 그냥 '폴리스'라고 쓰는 것이 가장 옮은 듯 하다. 폴리스는 기본적으로 작은 공동체이다. 플라톤은 이상적인 폴리스의 숫자를 시민 5 천명이라고 말했고, 이포다마스는 총 인구기준 10만명이라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 몇 몇 폴리스를 제외하고는 이 것보다 작았다. 왜 작아야하는가? 이것은 나중에 폴리스 멸망원인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선 폴리스는 친족공동체, 부족 공동체의 한 형식이 발전한 것이다. 그 안에는 물론 귀족들부터 노예까지 다양한 계층이 존재했다. 물론 중심은 시민이었다. 그들은 농업을 가장 중요시했으며 자급자족 경제를 유지했다. 요즘 만날 수 있는 다양한 '탈주형 공동체'들의 원형은 '폴리스'에 있다. '폴리스'는 정체를 유지하기 위한 각 내부 관계를 파악하기 용이했고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직접 참여가 가능했다. 즉 모두가 책임지는 공동체 말이다.

키토는 '폴리스'가 형성되는 몇 가지 지리적,역사적 요인들을 설명한다. 그렇지만 키토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폴리스 형성의 원인'은 '그들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정의를 실현하려는 소망, 덕을 고양하려는 소망을  '폴리스'를 통해 이루어 내길 원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폴리스'는 직접투표를 하고, 도편 추방을 했던, 단순한 '정치체제'가 아니다. 폴리스는 정치적, 문화적,도덕적 삶을 포함하여 공공의 삶 전체였다. 더 단순하게 도식화하자면 '그리스인은 폴리스다' 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을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으로 남겨 놓은 이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이 말은 곧 '인간은 폴리스에 산다' 와 같은 문장이다.

책의 중반부 7장쯤에 가면 고전기 그리스의 성쇠가 등장한다. 작은 폴리스였던 아테네가 성장해 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대학교 때 본 <플루타크 영웅전>을 다시 찾아보고 싶게끔 만든다.당시에 나는 낯선 그리스 이름들 때문이었는지, 사마천의 <사기열전>이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지금 다시 보면 또 다른 것들이 읽히리라.) 아테네가 그리스의 패자가 되는 것은 페르시아 전쟁에서의 승리 이후이다. 그리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 '대 아네테 제국'을 꾸려나간다. 그렇지만 '통일 국가'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이유는 역시 '폴리스'에 있다. 그리스인들은 폴리스의 독립성을 깨고 싶지 않았다. 만약 대규모의 통일국가가 된다면 이것은 '폴리스'의 정체성과는 병립할 수 없는 적대적 모순관계가 발생한다. 직접 참여는 대의제에 자리를 양보해야 할 것이고, 이는 시민들의 자기통치보다는 참주등을 통한 지배-복종을 뜻하는 것이기때문이다.

키토는 실제 작동하는 폴리스를 근대적인 구분을 통해 말하는데, 이게 아주 적절하기도 하다. '아테네는 아마추어 국가다'라고 말이다. 잠시 생각해보자. 이 말은 짧지만 정확한 표현이고,또 함축적이다. 그리고 그 비극적 결말까지도 암시하고 있다.(이외에도 키토는 본인이 살던 영국을 배경으로 하긴 하지만 위트있는 표현을 자주 보여준다.) 플라톤이 '철인정치'를 말하고 아테네의 당시 상태를 비판 했던 것은 '폴리스'가 내재한 기본적인 모순들에 대한 비판인 셈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개선과 선을 추구하고, 도덕적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폴리스'가 무지한 사람들-소크라테스적 의미의-에 의해 그 기능이 부여받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문제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그리스인들의 '정체성'을 향한 열망은 시대의 움직임에 떠밀려 간다. 그리고 '폴리스'의 소박한 꿈은 그 자체 모순을 맞딱드리는 순간 붕괴 일로는 걷는다. 직접적인 계기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승리한 스파르타는 과두정을 실시하고 총독통치를 시행한다. 그리고 머지 않아 위대한 알렉산더의 마케네가 들이닥친다. 키토는 아테네가 패하는 계기를 내적인 원인에서 찾고 있다. 그는 고전 그리스 전성기 BC5 세기 페리클레스 시대와 BC 4세기의 데모스테네스의 시대를 비교한다. 그리스는 페리클레스 시대 이후로 잦은 전쟁을 통해 진정한 삶의 방식에 대한 물리적, 정신적 힘의 우월성을 잃기 시작했다. 특히 BC 4세기쯤에 이르면 '폴리스'는 정치적 무력증과 무관심에 빠져든다. 기토는 이 점을 시대적 대전환이라고 파악한다. 즉 삶에 대한 상이한 태도가 출현을 한 것이다. 즉 고전기의 그리스는 이제 지난 과거가 된 것이다. 저자는 희극 소재를 먼저 예로 든다. 과거 건강한 '폴리스'의 시대에는 희극도 그냥 장난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때가 되면 희극은 사적인 문제들에 대한 농담거리고 전락한다. 또한 정치에서 '전문가 그룹'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일종의 용병지휘관 들이다. 아테네는 전통적으로 시민개병의 전통하에 있었다. 그것이 또 폴리스의 삶이었다. 그렇지만 전쟁은 점점 더 많은 전략과 기술을 요하고 이에 따라 용병들이 자리를 잡는다. 이것은 비단 군사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런 변화는 '폴리스' 자체의 기반을 흔드는 것이기도 하다. '폴리스'에서 건강한 시민과 강건한 군인은 하나였다. 이것은 전쟁에서의 '효율성'과 '전문화'가 '폴리스' 와 양립할 수 없다는 반증이다.

철학사조의 변화를 살펴봐도 폴리스의 붕괴를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이점은 원인과 결과의 위치를 두고 다른 접근을 할 수도 있을 법하다. 테모스테네스의 시대는 견유학파와 키레네학파가 두각을 나타낸다. 이들은 '선에 대한 질문'을 한다. 과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절대선'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상정해 놓은데 반해 이들은 상대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이는 과거 '폴리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다. 과거 '폴리스'는 '절대선'을 상정해 두고 그에 대한 열정과 노력을 노래했다. 반면 새로운 시대는 세계관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들은 이제 '폴리스'라는 개념대신에 '코스모폴리스'라는 제국의 시대에 어울리는 윤리관을 갖는다. 지혜로움을 사랑하는 이들이 이룬 공동체는 지역적 한계를 넘어 인류라는 공동체로 대체되는 것이다.

키토는 그리스적인 것에 대해 책 말미에 정리한다. 풍부한 내용이지만 관심을 자극하는 차원에서 몇 가지 단어만을 열거하자. '사물의 전체성에 대한 감각', '건전한 균형', '이성에 대한 굳은 믿음', '실용적인 단순성', 규칙성과 균형에 대한 강한 감각' '수학의 발견' '변하지 않는 실재와 정신의 위대함' 등이다.

<The Greeks>가 나온 것은 앞서 말했듯이 이미 50년을 넘겼다. 키토가 이 책을 낸 이후에 더 많은 인류학적 발견과 그리스에 대한 학문적 성과들이 축적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키토의 책 중 어떤 부분은 미흡하거나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 상당히 있을 것이다. 경제적 토대로서의 노예문제나 여성들의 문제 등에 대해서 키토는 비교적 친그리스적인 태도를 취한다. 가끔은 현대와 비교하면서 그리스에 면죄부를 주기도 한다. 이 지점들은 다분히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제들이다. 맑스주의 미학자인 하우저같은 이들은 그리스 예술과 민주주의가 노예들의 물적 기반 위에 있음을-물론 그가 상부구조의 자율성을 외면한 것은 아니지만- 상기시킨다. 키토는 이보다는 오히려 삶에 그리스인들의 청빈한 태도와 여가에 대한 욕구등을 강조한다. 그 외에도 키토의 시각들에는 그리스에 대한 많은 애정과 서구 우월주의와도 같은 성격들이 간간히 들어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역자의 말처럼 그리스 전문가의 그리스에 대한 깊은 애정의 흠결정도로 봐줄 수 있을 만한 수준이다. 그런 꼬투리로 이 책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역시나 품격 낮은 짓이다. 

'그리스' 하면 무너진 신전의 모래기둥이 떠오르고, '철학의 고향' 같아서 딱딱한 부리의 앞머리를 만지는 느낌을 갖는 이들에게 키토는 말한다.

"그리스인은 남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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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은 없다 - 마거릿 대처의 생애와 정치
박지향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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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거릿 대처의 생애와 정치에 대해 읽은 것은 사실 다른 목적에서이다. 실은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의 문화정치>를 읽기 위한 정지작업이다. 스튜어트 홀의 책을 사두고 서가에서 잠시 대기시켜놓고 있었던 어느날, 우연히 동아TV에서 하는 <세기의 위대한 여성-대처>편을 보게되었다. 프로그램을 보다가 문득 '대처리즘'에 대해  상식적인 몇 가지 외에 별반 아는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다 아는 '작은 정부, 민영화, 노조 탄압, 포클랜드 전쟁' 정도가 내가 떠올리는 단어들의 전부였다. 결국 그 프로그램은 책 읽기의 순서를 살짝 바꾸었다.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의 문화정치>- 원제목은 The Hard to Road to Renewal: Thatcherism and the Crisis of the Left-를 읽고 뭔가 새롭게 하려면 '대처리즘' 을 꼴보기 싫다고 통과시켜버려서는 곤란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실 나는 시간에 덜 쫓긴다면 프리드먼이나 하이에크가 쓴 주요 저작들도 보고 싶다. 당신같은 좌파 끄트머리가 왠 하이에크냐구 ? ^^  웃어야지 뭔 말이 필요하겠냐.)

'대처리즘'의 그림자 처럼 따라다니는 말이' 뉴 라이트'다.(한국의 뉴라이트도 결국 그 연원을 거기서 찾을 수 있다.) 또한 '대처리즘'을 '신자유주의'의 킥 오프 사인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나는 가끔 '신자유주의 절망론'을 겪는 사람들 중에 의외로 '신자유주의'가 마른 하늘에 날벼락 치듯 뚝 하고 떨어져서 앞으로도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공포의 괴물처럼 생각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아니면 그 반대로 '신자유주의'에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공개화형 시키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을 보거나 말이다. 나는 두가지 생각 모두에 동의할 수 없다. 그건 대중적인 경제학 책 몇 권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처는 '대안은 없다'라고 말했지만, 불행히도 그 담론 역시 시대의 산물이고 역사와 함께 변해가는 무엇일 뿐이다. 좌파 학자인 마샬 버먼이 자주 인용하는 마르크스의 말을 떠올려보자. .... "모든 굳어진 것들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 미국발 금융 위기를 두고 신자유주의의 몰락이니 뭐니 호들갑이다. 나는 그렇게 금융자본주의가 쉽사리 꼬리를 내릴 것이라고 생각치는 않는다. 하지만 단 한가지 'There is no alternative' 라는 지배담론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희망의 단초쯤은 주리라고 생각한다.

대처리즘이 착종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전후 영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합의의 정치'시대가 있었기때문이다. 그 시대는 경제 사상으로 보자면 '케인즈주의의 시대' 이고 정치적으로 보자면 '변혁의 시대'였다. 대처가 이 시대에 축적된 모순들을 일거에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것이 '대처리즘'이고 '신자유주의'의 시작이다.

대처리즘의 핵심은 '시장 자유주의'와 '복고적 도덕주의' 이다. 그녀는 영국에서 사회주의의 잔재를 없애는 것에 정치인생을 걸었다.세계의 제국이던 영국이 전후 2등 국가가 된 것은 전적으로 노동당의 사회주의적 정책과 그에 기본적으로 동의를 해 준 보수당의 태도때문이라는 것이다. 사회주의적 잔재를 없애는 데 대처가 쓴 처방은 '자유방임주의'였다. 이를 통해 대처는 너덜 너덜 해진 '유니언 잭'을 다시 당당히 세우고자 했다. 대처는 기본적으로 금욕적인 사람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자수성가한 사람이였고, '확신의 정치가'였다. 대처가 사회이념적으로 '빅토리아 시대로 돌아가자'라고 외쳤던 것은 근면,성실, 자존과 같은 영국적 보수가치를 회복하는 것 만이 국가의 보호아래 타락와 우유부단함으로 추락하고 있는 영국을 살리는 길이었다고 본 것이다. 

 그녀는 급진적인 보수이념을 가지고 영국 재건에 나선다. 그녀가 주창했던 것들은 '대처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이제 상식책에도 나올 만큼 유명한 것들이다. 그리고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MB정권 하에서 하나씩 보여지고 있어서 신문을 펴기만 하면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너무 똑같은 것들이어서 따로 적기가 귀찮을 정도다.

대처는 일단 시장의 복원을 외친다. 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국가는 그런 기회만 제공하면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작은 정부를 지향했고  이어서 규모의 민영화 작업이 벌어진다.  물론 국영기업의 방만한 경영과 비효율성은 어떤 형태로든 관리되어야 한다. 대처는 과감한 매각과 통폐합을 감행한다. (이 과정에서 실업자수는 대폭으로 증가한다.) 대처는 흔히 말하는 기본적인 공공재의 개념조차 무너뜨릴 만큼 과감한 민영화를 시도했다. 수돗물의 민영화도 대처시대에 나온말이다. 철도 민영화는 대처 시기에 토대를 닦고 메이어 시대에 이루어졌다. 대처에게 '노조'는 '무찔러야할 적'이었다. 대처 집권기에 중대한 싸움이었던 광산노조와의 싸움에서 대처는 '철의 여인'의 이미지를 확실히 보여준다. 그녀는 기마경찰까지 동원해서 광산노조를 제압한다. 사석에서 '어떻게 세금을 내는 국민에게 기마경찰을 보낼 수 있소이까? 라는 질문에 대처는 더 당당히 '다음번에는 탱크를 보내려고 했습니다.'라고 맞선 일화는 유명하다. 대처는 대학 교수들과 공영방송 BBC를 무척이나 싫어했다고 한다. 객관성의 이름으로 자신의 정책에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MB정권이 한국의 공영방송에 대해 갖고 있는 시각과 유사하다.)

대처의 혁명적 목표는 단지 시장에 있지 않다는 것을 저자는 말한다. 대처는 기본적으로 의식혁명까지를 염두에 두었다. 좌편향적인 영국의 전통을 우향우 시키는 것말이다. 대처는 여기에 대중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섞는다. 임대 주택의 판매, 민영화한 공기업 주식에 대한 참여, 소득세의 감면등을 통해 '계급'의 개념을 '소비'의 개념으로 바꾸어 버린다. 즉 모두가 쁘띠 브루주아가 되게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동계급 중 다수가 주식을 소유하고, 경기 회복과 더불어 생활수준이 나아진다. 대처 임기 말기에는 전통적인 계급 투표가 상당시 약화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여전히 비율상으로는 계급투표율이 높기는 하지만 유의미한 변화인 것은 사실이다.

이 책에는 대처의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언급을 한다. 개인적으로 대처가 임기말로 갈 수록 제왕적이고 독선적인 성격상의 특성을 보였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결국 대처를 보수당 내부에서 내치게된 결과를 낳았다는 것 등을 말한다. 또한 소득세의 감면등으로 상징되는-현재 종부세 인하를 떠올리는- 대처의 경제정책들이 빈부격차가 벌어지게 되었다는 점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이 지점에 시선을 하나만 꼽아 넣어도 책 몇 권이 나올만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비판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이 극심한 빈부격차의 발생 아니던가? 저자는 물론 간략하게 이부분을 짚고 넘어간다. (처음부터 이 저자의 이념적 지향을 알고 있기때문에 길게 말할 필요는 없을 성 싶다.) 이런 부분들은 자주 등장한다. 포틀랜드 전쟁 부분을 살펴보자. 포클랜드 전쟁은 보수당 내에서도 반대하는 이가 많았던 사건이다. (우리나라 독도의 주권문제와는 엄청나게 다르다.) 아르헨티나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으로 영국 함대가 출동한다. 이 섬은 영국에서 1만3천 KM떨어져 있고 아르헨티나로부터는 480KM 떨어져 있는 영국인들도 잘 모르는 그런 섬이었다. 영국 정부는 전통적으로 그 섬의 영국계 주민들에게 아르헨티나와의 동화책을 권장하기도 했다. 영국 정부의 군비절감 목적으로 남대서양 함선이 물러남에 따라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국내 정치적 목적의 침공을 감행한다. 외교적 채널을 더 가동해보자는 일각의 의견은 뒤로 하고 대처는 함대를 급파하고  압도적인 승리를 챙취한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그것은 '영웅적인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평가한다. 그 전쟁에서 255명이 죽고 777명이 부상당했다.또 아르헨티나 측은 650명이 죽었다. 대처의 '영웅적인 행동' 때문에 말이다. '철의 여인' '전사 여왕' 대처를 만들기 위해서 그들이 죽었어야 할 지는 의문으로 남겨두자. 저자는  결과적으로 대처의 '가장 멋진 순간'으로 평가한다. 과연 그것이 '가장 멋진 순간'일 수 있을까? 

책의 저자는 마지막에 '우리에게 대처는 언제나타날 것인가?' 라며 한국판 대처의 출현을 염원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대처는 필요하지 않다. 대처의 영국과 현재의 한국은 억지로 짜맞추고 싶겠지만 두 나라는 논의의 출발점부터가 다르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지난 시절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한다.마치 대처가 '합의의 시대'를 척결해야할 사회주의 시대라고 말하며 칼을 간 건 처럼 말이다. 당시 영국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케인즈-베버리지 모델이 공론으로 모아져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상황인가? 노조 가입률이 10%수준인 나라가 노조가 정치를 좌우하는 나라라고 말한 과거 영국과 비교될 수 있을까? 계급 정당의 역사가 수백년이 된 나라와 이제 꼬리를 감추며 계급정당임을 말할 수 있는 나라가 동일선상에서 비교될 수 있을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주의 종주국'과 아직도 식민지의 영향력이 잔존하는 나라가 같은 나라일까? 거기에 또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대처가 주장하는 '도덕' 조차 없다. 아마 한국의 보수주의자가 먼자 도래를 기대해야 할 것은 '대처'라기 보다는 '도덕'일지도 모른다.

 대처가 실업자 수의 폭동임계점 수준까지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변혁을 위한 성장통이라고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그 사회에 축적되어 있는 사회안전망의 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사회적 안전망은 멸치잡은 그물처럼 촘촘한 것은 기대하지도 않는다.최소한 고래정도는 막아야 하지 않아야 그물 아닌가? 그런데 한국의 앞바다에는 널널한 그물 피해 떠다니는 고래들이 물반 고래반이라고 한다. 대처가 '이제는 개인이 개인을 구제해야한다' 라고 말할 때 한국은 해방 이후 부터 계속 '개인이 개인이나 가족이 구제'해 왔다. 오죽하면 아이들까지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고 노래하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대처'를 염원하는 것은 도대체 앞뒤를 제고 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하기사 대처 역시 '살놈 살고 죽는 놈이야 어쩔 수 있나' 하는 식이었으니 별로 신경쓰일게 없을 것이다. 그런 걸 '시장 자유주의'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야만적 자본주의' 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다. 

 언젠가는 우리 역사에도 대처같은 이가 필요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역설적이게도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진정 더 필요한 것은 먼 훗날 말을 타고 나올 대처 같은 이가 비판해야할  '대처의 적들' 아니겠는가? 비루한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실업자들을 구제하고, 비정규직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고,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억압을 제도적으로 방어하고, 노인이나 장애인들에게 삶을 이어갈 복지서비스를 제공하고, 시장이라는 무한경쟁에 진입하지 못하거나 낙오한 사람들을 품어낼 수 있는 그런 지도자 말이다.   

이 책에서 -아마 스튜어트 홀도 그런 의미였겠지만- 내가 읽고 싶었던 것은 대처리즘 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 한국이 처한 현실이 흘러가는 방향을 미루어 짐작하고 그에 대한 좌파진영의 대처를 생각해보기 위해서이다. 대처가 적들을 어떻게 자신의 상승요인으로 활용하는지, 그리고  선거 과정에서의 전술, 대중 정서의 어떤 맥락들을 짚어내는지 하는 점들은 한국의 진보진영도 타산지석해야할 부분이 많다. 한가지 책에서 좀 아쉬운 것은 포틀랜드나 광부노조파업,인두세,유럽연합 문제등에 대해 좀 더 깊은 이야기까지 들어갔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대처리즘의 몇 가지 기본 아이템을 반복하는 것보다는 그런 고찰들이 더 책을 풍부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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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0-08 16:54   좋아요 0 | URL
박지향의 대처 전기를 드디어 읽으셨군요.스튜어트 홀의 책이 어려울 것 같아서 제가 대신 읽은 것은 레이건과 대처의 시대 때의 역사 쓰기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하비 케이<과거의 힘_ 역사의식,기억과 상상력>이었습니다.그다지 두툼하지 않은 책이니 한 번 참고해 보세요.

드팀전 2008-10-08 17:27   좋아요 0 | URL
네...강유원의 소개로 알게된 책이었습니다.관련 페이퍼도 한 장 올렸더랫지요.책에 관련된 건 아니었구요..지금도 보관함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아요.감사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09 16:40   좋아요 0 | URL
강유원 씨가 교수가 되기 전에 추천하던가요? 개인적으로도 아는 분인지요?

드팀전 2008-10-09 18:23   좋아요 0 | URL
전 강유원씨의 얼굴도 잘 모릅니다.^^ 지금 교수인가요? 그 분이 <미디어 오늘>에 고정적으로 글을 올리는데 책소개를 겸해서 말이지요. 그 기사에서 본 책이 노이에님이 말하신 하비 케어의 <과거의 힘>이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10 15:20   좋아요 0 | URL
예...한동안 회사원으로 지내다가 교수자리가 나서 이제 제도권으로 갔다네요.하비 케이의 그 책에 나오는 레이건의 사고방식에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더군요.얼마전 대처도 칠레의 피노체트 구명운동 나서고 그랬죠.얼마 안 있어서 피노체트는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지만...
 
죽음과 소녀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김명환.김엘리사 옮김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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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군부의 최종 승인을 필요로 한다."  

뜬금없이 '왠 반동적인 발언인가?' 하는 의심의 눈동자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한 쪽에서는 군대를 없애자고 퍼포먼스를 하는 마당에 말이다. 그리고 '군정종식' 을 외치던 YS,DJ 도 대통령 한 번씩 다 해먹은 이 시대 이 땅에서 말이다.

먼저 이 말을 해명하기 위해 두 가지 전제를 이야기 해야 겠다. 첫째, 여기서 말하는 '혁명'은 요즘 유행하는 '문화혁명'이나 신비주의적인 '의식혁명'을 뜻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혁명은 가끔 모든 혁명적 좌절을 '영속혁명'의 대의 아래서 '성공'으로 치장하는 신학적인 측면이 있다. 이것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대의를 잊지 않기 위한 전술로 효과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여기서 '혁명'은 고전적 의미의 '정치 권력'의 전복이나 소유와 관련있는 '클래식한 의미의 혁명'이다. 두번 째로 이 말이 귀에 거슬리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산층 진보'의 '이데올로기적 과격성'을 잠시 덮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들 중 한 명이다. 추락의 낭떨어지에서 줄타기를 하는 다른 모든 중산층들 처럼. 그러므로 굳이 이를 폄하 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단 '중산층 진보'가 자신을 '이데올로기적 공중부양'으로 정치시키는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의외로 모니터 상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실재보다 훨씬 당당하게 급진 좌파적이며 아나키스트적인 흥분을 많이 목격하곤 한다. 자기주장이 담는 내적 모순에 대한 이론적 성찰은 별로 관심이 없다. 이런 '흥분파'는 한 줌의 '군부' 가 어찌 '혁명'의 위대한 기치를 좌우할 수 있느냐고 분개할 것이다. 하지만 '자기정초적 흥분' 만 정돈하고 본다면 이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결국 군부가 마지막 도장을 찍어 주어야 한다. 군부가 혁명 성패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귀에 거슬리게 들리지만...) 그렇기 때문에 혁명 세력들은 외부 무력에 상응하는 자체적인 무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러시아 혁명이다. 아니면 최소한 군부가 혁명적 시기에 중립 내지는 유보적 입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치명적으로 실패한 예가 바로 살바도르 아엔데의 칠레다. (칠레의 역사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지 않겠다.)

아리엘 도르프만에게 '슬픈 칠레'는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다. 이 책에 실린 그의 작품들은 탯줄을 통해 다시 그 역사적인 칠레와 연결된다. 여정은 칠레라는 한 나라에 머물지 않고 역사와 그 안의 사람들이라는 보편성 으로 승격된다. 대충 여기까지만 들어봐도 이 책이 요즘말로 'COOL' 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프라다를 입은 악마'도 등장하지 않고 '쇼퍼홀릭'들도 나오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TV화면을 통해 이미지로 소비되는 -수잔 손택식으로 말하자면- 고통받는 타인의 모습들이 모두 주인공이다. 첫번재 희곡 <과부들>에서는 남편과 자식을 군부에 빼앗기고 찍소리도 못하는 과부들이 나온다. <죽음과 소녀>는 성고문 피해자가 등장한다. <경계선 너머>에서는 하루 아침에 이산가족이 되는 노부부가 나오고 <연옥>은 입에 담기 힘든 범죄를 저지른 남녀가 무간지옥에서 들려주는 귀곡성이 흘러나온다.

나태한 현실을 고발하는 '리얼리즘'을 '진보'와 등치시키는 사람들은 -요즘도 그런 사람이 있겠냐만은-이런 읽을 거리에 관심을 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반쪽이다. 이 책은 '자연주의'로서의 '리얼리즘'이 아니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말은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와 형식 사이의 전통적인 미학관을 보여준다.

"실제 인간의 고통에서 나온 것이므로 역사적인것이지만 동시에 직접적인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것을 명하는 재현의 미학적,문법적 법칙을 따른다." 

이 희곡집에 등장하는 네 편의 희곡은 역사의 핏빛 강물 위에 떠 있다. 특히 아픈 역사로 점철된 한국민에게는 아리엘 도르프만의 글들이 한 자 한 자 우리들의 언어로 씌진 듯 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등장인물들이 많은 <과부들>은 아프카니스탄의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흙냄새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훨씬더 비의적이다. 검은 강물 사이로 떠오르는 사라진 사람들과 연속적인 사건들은 마치 스릴러를 보는 긴박감을 준다. 그러면서 인물들 사이의 다층적인 입장과 갈등들이 오래되 고성을 타고오르는 덩쿨처럼 뒤섞인다. 강물에 떠오른  한 구의 시체를 두고 그 안에서 모두 실종된 자기 가족의 얼굴을 읽어내는 장면은 묵뚝한 슬픔이 가진 보편성으로 독자까지 끌어들인다. 이 작품은 결국 한 편의 연극을 위한 대본임에도 읽고 나면 말없는 강물의 묵묵함처럼 대하드라마를 본 듯 한 느낌을 준다.

네 편의 희곡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또 가장 강한 인상을 주는 작품은 역시 <죽음과 소녀>이다. <과부들>이 '쿠르릉 쿠르릉' 거리는 어두운 강물 소리를 계속 귓전에 남기면서 진행된다면 이 작품은 계속 슈베르트의 현악 사중주의 제1 주제로 양 쪽 귀를 괴롭힌다. (그의 작품이 상당히 청각적이라는 사실을 이 글을 쓰면서 다시금 깨닫는다. <경계선 너머>는 포성으로 <연옥>은 소리가 없는 '무음'으로 청각적이다.) 이 작품<죽음과 소녀>는 94년에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에이리언의 여전사 시고니 위버를 기용하여 <진실>이란 제목으로 영화화했다. 영화 첫 장면과 끝장면에 공연장에서 슈베르트를 듣고 있는 시고니 위버가 나온다.

이 작품은 현실적이다. '진실과 화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그것은 정녕 가능한 것인가?' 라는 질문 말이다. 그냥 '정의로운 사람들과 그들의 역사가 나쁜 놈들 입에서 진실을 말하게 하면 된다.' 라는 단순함으로는 이런 딜레마들을 헤쳐나갈 수 없다. 과거사 위원회로 뽑힌 운동경력이 있는 남편과 남편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고문의 후유증을 안고 사는 여자, 그리고 정말 고문 협력자였는지, 아니면 아니었는지 끝까지 모호하게 남겨진 의사. 이들 세 명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는 '진실'과 '정의' 그리고 '현실' 을 둘러싼 다층적인 양상을 목도하게 한다. 아내의 '사적복수론'과 그를 설득하려는 남편의 '역사 처벌론'은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대목들이다. 독자들은 아내에 대해 심정적으로 동조할 수 있다. 그러나 남편의 현실적 논리는 결코 외면할 수 없다. 마치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이 던지는 문제를 다시 재현하는 듯 하다. 결국 이들은 절충안을 찾는다.   아리엘 도르프만은 그리고 독자에게 묻는다.

"우리가 과거의 수인이 되지 않고 어떻게 과거를 살아 있게 할 것인가.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진실을 희생시키는 것은 정당한가? ...그리고 가장 큰 고통을 받은 사람들에게 우리 모두는 얼마나 죄죄를 짓고 있는가?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것 중 가장 큰 딜레마는 ,민주적 안정을 만들어내는 국민적 합의를 깨지 않고 어떻게 이런 쟁점들과 씨름할 것인가? "

나는 아리엘 도르프만이 <죽음과 소녀>에서 던지는 질문들에 대해 "그래. 이게 '정의야' 이렇게 하면 해결 돼. 나머지는 부차적이야" 라고 1분쯤 생각하고 답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명품족'만큼이나 혐오한다. 아니면 천재성에 질투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죽음과 소녀>에서의 문제 의식은 <연옥>으로 이어진다. <연옥>은 처음에 읽다보면 '뭐야..이게 어찌 되는거야' 라고 운전대를 어디로 잡아야하는지  갈팡질팡하게 만든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처럼은 아니지만 시공간도 모호하고 이름도 부여받지 못한 남녀가 서로 비켜가면서 이야기하는 부분들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건이 무엇인지를 앞선 작품들처럼 한 번에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점점 <연옥>은 정신병동의 하얀빛 처럼 환한 매력을 선보인다. 그리고 책을 다 덮고 나면 가장 긴 여운을 남기는 작품으로 <연옥>을 꼽을 수 밖에 없다. <연옥>은 정치사적 상흔을 다루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아리엘 도르프만이 지속적으로 부여 잡고 있는 '진실과 화해 그리고 치유'에 대한 이야기를 사이코드라마와도 같은 형식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서로를 치유하는 목적이라는 측면에서 본 사이코 드라마이다.)    

<연옥>의 배경은 말 그대로 '연옥'이다. 처음에는 이 배경조차 이해가 되지 않아서 허발질을 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배경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저 하얀 방이라고만 무대를 설정한다. 남녀는 일종의 '무간도'와도 같은 '연옥'에 와있는 것이다. 작가가 후기에 그곳이 단테적인 연옥이 아니라 불교적인 공간이라고 말한 것은 이 장소가 '윤회'를 준비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회'에 앞서 남녀가 해야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이 작가가 평소 즐겨찾는 주제를 풀어나갈 자리로 본 것이다. 주인공들은 서로를 심문하는 위치에서 '스스로의 정화'를 요구한다. '정화'되지 못하면 끝없이 이 '중음'의 공간에서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남자:  딱 하나 알고 싶은 게 있어. 윤회는 끝이 날까?

여자: 네가 그녀를 치유할 수 있다면, 그럴거야.

 극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위치가 서로 뫼비우스띠처럼 얽힌다. 단순히 한 사람의 심문자가 피심문자가 되는 성질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의 상처로서 심문자가 되기도 그 반대역을 맡기도 한다. 이들은 서로가 연속되는 연할 속에서도 서로를 감추며, 속인다.

여자" 나는 너의 담당 사건이야. 너의 유일한 담당 사건이지, 내가 돌아가면, 너도 돌아가는 거야.내가 지워지면, 그들이 너도 지워버릴 걸.맞지?

 작가는 극의 끝으로 다가가면서 그들의 인격너머에 있는 그곳가지 서로 닿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중적인 심문/재판은 연기를 하는 자들의 인격을 붕괴시키고 그들의 자아를 가린 베일을 찢어버리는 방법이다."

나는 인간은 결코 그 지점까지 닿을 수 없다라고 생각한다. 자아의 베일을 벗는 다는 것은 그걸 작동하는 또 하나의 역할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곳은 '공백'이다. 어떻게 '공백'을 언어로 밣혀낼 수 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자신에게나 타자에게 그것을 요구할 수 있으나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작업이다. 어쨋거나 작가는 그것보다는 조금 더 현실적인 이유에서 이 극을 진행시켜 나간다. 그에게는 '소통'의 일종의 희망이다. '폭력과 공포와 배신으로 오염된' 세상에서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첫 단초는 '소통'으로 부터 찾아야 한다는 낙관적인 믿음이다. 그러면서 이 작품이 갖는 의미를 질문이라고 말한다.

"어제 우리에게 가해진 경악할 일들이 우리가 내일 다른 사람에게 저지르는 공포를 불러오는 이 때, 내가 희망하는 바는 적어도 이 희곡이 비난과 분노의 순환을 감히 어떻게 깨고 넘어설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이 책의 매력적인 점 중에 하나는 각 편 마다 작품 속 인물들이 태어나는 산고와 작품에 나타난  작가의 문제 의식들을 작가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간혹 '이런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구나' 하는 지점을 작가의 입을 통해 만날 때는 정답을 맞추고 우쭐해진 소년같아진다. 그러나 내가 더 크게 위안을 받을 때는 가끔은 현실의 언어난수표 속에서 내가 언어로 형상화하지 못했거나, 차마 이해받지 못할 두려움에 말하지 못하는 질문들에 작가가 촉수를 뻗어있을 때, 나는 가끔 그럴 때 '외롭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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