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덴바덴에서의 여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3
레오니드 치프킨 지음, 이장욱 옮김 / 민음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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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짧은 소리로 '쎄울.." 이라고 외쳤던 것이 27년 전 일이다.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시간이 아무리 빠르다고 하더라도 27년 전이라니.갓 태어난 아기가 애아빠될 시간이다.하기야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 '88 올림픽 굴렁쇠 소년' 기억나며고 물어보면 '잘 모른다'는 대답을 많이 듣는다.지금 대학생들이 한 두 살 먹었을 때 올림픽이 열렸으니 '호돌이'를, '굴렁쇠'를 알 턱이 없다.그들은 가끔 TV자료 화면에서 '서울 올림픽'을 봤다고 말한다.

뜬금 없이 사마란치와 서울 올림픽을 떠올린 곳은 그가 '쎄울'을 외쳤던 곳이 '바덴바덴'이기 때문이다.이 책의 주인공인 전설적인 토스토예프스키가 향하는 곳이기도 하다.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에는 서로 다른 두 여행이 교차한다.이 두 여행은 서로 만날 수 없다.시간과 공간이 다르기 때문이다.한 여행은 바덴바덴을 행하고 또 다른 여행은 100년쯤 후에 샹테페테르부르크를 향한다.

러시아를 떠날 수 없었던 의사 치프킨이 '나'가 되어 소설 속의 화자로 등장한다.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흔적을 찾는 여행자이다.소설은 화자인 '나'의 이야기와 실제 회고록에 도움을 받아 재구성된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을 재구성한다.소설가가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또 소설의 대상이 소설가인 셈이다.작가 치프킨은 영원한 동토의 빙하 속에서 신비롭게 잠들어 있는 거장 토스토예프스키에게 훈기를 불어 넣는다.그의 훈기를 받은 토스토예프스키는 '못말리는' '어처구니없는' 또한 '슬프고도 아픈' 한 피조물이 되어 책 장 사이를 넘어 다닌다.살아난 토스토예프스키는 도박장을 뛰어 다니고 아내에게 돈을 구걸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질투로 반쯤 실성을 하고 유형지에서 겪은 모멸감에 치를 떤다.그 뿐이 아니다.세상으로 인정받기 위해 평론가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고 또 그들의 무관심에 발끈하여 팔짝 팔짝 뛰어다닌다.때로는 자기를 학대하고 때로는 자기의 자만심에 뿌듯해 한다.

나는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이런 인물들이 좋다.분열적인 자아를 갖고 있는 사람들 말이다. 뭐라 한가지 잣대로 잡아 넣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들 말이다.물론 '명명백백' 정도만을 걷는 인물들을 만나면 그에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다들 옮바르고 인간을 초월한 듯한 의지를 보여준다.다들 의지들은 얼마나 강한지...거기에 그들이 만들어 놓은 업적까지 보태지면 모두 모두 머리 뒤에서 후광이 비춘다.문제는 대개 그런 인간들이 좀 심심하고 그걸 떠받드는 사람들도 심심하긴 마찬가지라는데 있다.

재미있는 인간들은....그러니까 밀로스 포먼의 영화<아마데우스>에 나오는 모차르트같은 인간들이다.또 영화<불멸의 연인>,<카핑 베토벤>등에 나오는 '괴팍한 노인' 베토벤 같은 사람들이다.연암 박지원 같은 노인네들도 재미있지 않은가?  미셀 푸코같은 인간들 흥미진진하다.시대의 바람둥이이자 죽음과 늘 손잡고 다니던 로버트 카파같은 사람들은 어떤가? 또 전장에서 시집을 읽어 대던 핸섬가이 체 게바라 같은 인간들도 마찬가지이다.

고리타분한 양반들은 이 '뒤틀림'의 재미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한다.바른 생활 사나이들...^^ 아주 바람직하거나 뒤돌아서면 진상이거나 둘 중에 하나는 할 것 같다. 

하여간 소설<바덴바덴에서의 여름>에 등장하는 토스토예프스키는 '어처구니'없는 남자이다.그의 '어처구니없는' 반복되는 행각들은 구태여 언급할 필요가 없다.아이같다고 해야 하는게 딱 맞다.다괴팍하고 가련한 러시아인은 거기에 '반유대주의자'이기도 하다.정치적 옯바름을 이야기해야한다면 토스토예프스키는 '꽝'이다.작가 치프킨은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는 유태인이다.이런 딜레마를 두고 치프킨은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질문을 던진다.그리고 돌아올 수 없는 답변에 대해 스스로 답을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조금은 뻔하고 날카로움을 잃은 답변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책에 대한 소개에서 이 소설이 러시아 문학 전통에 대한 두 가지 논쟁을 재현한다는 글을 읽었다.뭐 대단히 어려운 내용일 수도 있지만 상식선에서 말하자면 '슬라브주의'와 '서구주의'의 갈등이다.이건 러시아의 모든 예술장르와 일상영역에서도 영향을 미치는 러시아의 변방성과 독자성 사이의 밀물과 썰물같은 갈등이다.치프킨은 이 책에서 도스토예프스키와 투르게네프의 대립으로 이 두 기둥의 이야기를 건넨다.그리고 시대를 훌쩍 넘어 이 영상은 솔제니친과 사하로프의 대립구도로 형상화된다.이런 대립 구도는 만들려고 하면 근대 러시아 예술의 지형도 속에 전부 넣을 수 있을 법도 하다.환원론의 오류를 범하겠지만 말이다.소설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서구파 투르게네프에게 가급적 잘 보이려고 애쓴다.그렇지만 욱하는 그가 투르게네프의 은빛 안경 너머의 조롱에 찬 눈빛을 계속 견딜 수는 없었을 것이다.

"파리에 가서 망원경을 하나 사서 그걸로 러시아를 자세히 보시지요"

소설 속에서 투르게네프는 권력과 부가 있으며 예의 바르고 신사답다.반면 도스토예프스키를 도박꾼에 가난하고 적당히 비굴하다.거기에 컴플렉스 덩어리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직접 만난다면 누구를 더 좋아할까?

이제 우리는 보험 드는 셈치고 실제 도스토예스스키 같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좀 너그럽게 봐주자.그가 언젠가 긴 시간이 흐른 후에 그를 비난했던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 올라가 있는 '돌아이'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실제 투르게네프보다 토스토예프스키가 더 유명하지 않은가? .

도스토예프스키 ...절망하고 좌절하고 낙담하고 용서빌고 후회하고 섹스하고 질투하고...휘청거리고 잘난 척하고....그림을 보고....글을 쓰고....도박을 한....인간아.당신을 어찌 사랑하지 않겠는가.

책 서문에서 수잔 손택은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을 가르켜 '지난 한 세기의 소설과 범소설(parafuction)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며 창조적인 성취를 이룬 작품 중에 하나'라고 말한다.가장 아름다운 성취인지는 모르겠으나 재미있는 작품은 확실히 맞다.

요즘 모 항공사에서 러시아 취항 광고를 하던데....

액설런트 인 플라이트....러시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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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5 1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8-02-25 15:51   좋아요 0 | URL
ㅜㅜ 맞아요.염장성이에요...
저도 (구)레닌 그라드에 가고 싶어요.샹트 페테르부르크....

2008-02-26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8-02-26 12:45   좋아요 0 | URL
맞아요...맞아.뺄셈을 잘못했군요..^^ 수정완료,.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수련 옮김 / 인간사랑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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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 읽기가 마치 '말아톤' 같다.

그와 함께한 마라톤때문에 발,다리 관절이 쑤시다.

이 책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끝을 보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중간에 설 연휴가 겹쳐서 그런 때문이기도 하다.그렇지만 실제로 페이지/sec를 구한다고 하더러도 달팽이 횡단보도 건너가는 기록이 나올 듯 하다. 마치 아마추어 건강 마라톤 생중계를 바라보듯 지루하기도 했다.물론 마라톤의 코스가 결코 지루하진 않았던 듯 하다.라캉도 있고,마르크스도 있고,헤겔도 있다.중간 중간에 급수코너에는 반가운 히치콕도 만나고 오스틴,카프카도 기다린다.또 가끔 쉬어가라고 처음 들어 보는 듯 하지만 또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한 농담의 퍼레이드도 대기하고 있었다.

결국 문제는 참가 선수의 함량 부족에 있다.동네에서 뜀박질 좀 한다고 넙죽 번호표 가슴에 붙이고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 참가 신청을 해버린 꼴이다.직접적으로 말하자면-지젝을 도용하여 실재의 중핵을 까발리면-내가 지젝이 만들어 놓은 마라톤 코스에서 완전히 바닥 드러내고 말았다는 것이다.중간 중간 숨이 막히기도 했고 또한 어떤 언덕에서는 '그냥 덮고 쉬자.'라는 생각도 들었다.특히 책 후반부쪽으로 갈 수 록 말이다. 마라톤의 35km지점부터가 진짜 힘들다고 하듯이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도 대략 7-8부 능선부터 눈 밭에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두 서너장 넘기다가 꾸벅 꾸벅 졸았다.그러다 목이 아파서 선잠에서 깨면 후회가 밀려왔다."아..이 달리기를 계속해야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울며 걸으며 인내심 테스트 하듯이 이 책을 다 읽었다.일단 팔다리가 아프다만 그래도 치워버려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든다.그리고 날 유혹하는 다른 책들의 팔랑거리는 손짓에 마음이 녹아든다.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은 지젝을 읽는데 가장 먼저 추천되는 책이다.옮긴이는 친절하게도 그의 심오한 사상을 가장 쉽게 정리해 놓았다라고 말한다.거의 모든 목록들이  지젝 읽기의 관문으로 이 책이 많이 거론된다.그런데 이건 어떻게 보면 목욕탕에서 물 안뜨겁다고 아이 꼬시는 아빠같은 이야기이다.특히 나같은 비전공자이며 아마추어 독자들에겐 말이다.

내가 지젝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그의 이데올로기 비판과 정신분석학을 정치학의 영역으로 확산하는 접근때문이다.아무래도 사회과학을 전공한 때문인지 그가 잡고 늘어지는 마르크스-라캉-헤겔이라는 미끼에서 마르크스와 관련된 내용들이 가장 쉽게 이해가 되고 손에 와닿는다.책 초반부에 지젝은 라캉의 '증상'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증상'을 고안해낸 사람은 '마르크스'라고 말한다.하지만 그가 고전적의미의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흔히들 마르크스 비판으로 일컫어지는 '혁명론'과 '목적론적 역사관'에 대해 지젝은 반마르크스적인 입장을 취한다.그는 자본주의가 마르크스가 지적했던 이전의 생산양식과는 다른 양식이라고 말한다.오히려 '자본주의는 영원하다' 라고 말하면서 자본의 내적 모순이 그 자체를 더욱 혁명화하면서 지속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역설이라고 언급한다.지젝은 라캉을 살짝 집어 넣어 그의 '향락'이 이런 잉여 속에서 나타난다고 말한다.마르크스의 잉여가치라는 것이 라캉의 대상a와 만나는 지점을 지젝은 그렇게 설명한다.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에서는 내게는 새로운 개념들이 좀 등장해서 흥미로왔다.에를 들어 '주인 기표'라든지 , '누빔점' 이라든지, '고정적 지시자' 같은 개념들 말이다.이데올로기를 하나의 큰 덩어리로 취급하던 방식에 비하면 마치 이데올로기를 정육점 고기마냥 도마위로 올려놓고 또 분해해서 부위별로 나눈 느낌마저 준다.지젝은 이데올로기 비판에서 시작되어서 현실 정치 속의 반유태주의라든지 전체주의라는 것 까지 이런 논의를 이끌어간다.지젝의 전체주의에 대한 접근은 정신분석학적 방식이다.그가 말하는 파시즘 이데올로기에 있어 핵심은 희생의 도구적 가치가 아니라 자유주의적인 희생 자체의 형식인 '희생정신이다.그는 정신분석이 형식적인 희생 행위 속에 드러나는 외설적인 향락을 드러내기때문에 파시즘의 분석에 유효하다고 말한다.

지젝은 이 책이 라캉을 포스트구조주의의 망령에서 구조해서 헤겔로의 회귀를 완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문제는 라캉이 내게 '내 머리 속의 지우개'라는 거다.라캉의 개념들은 책을 읽는 동안 어떻게 따라가다보면 알 듯 도 하다.그런데 돌아서면 가물거린다.예를 들어 '실재'라는 것에 대한 설명만 해도 여러 가닥의 꼬인 줄들의 묶임처럼 말한다.그러니까 틈사이로 보면 이것도 ''실재'에 대한 설명이고 돌려서 보면 또 이것도 그런 설명이다.라캉만이 아니다.헤겔 역시 뭐 그닥 잘 아는 바는 아니다.그렇지만 지젝이 되살리고 싶어하는 '헤겔의 곡해'가 어떤 것인지 대략 이해는 간다.대개 헤겔 하면 '절대정신'과 '이상적인 일원론'으로 알려져있지 않은가.특히 현대 철학에서는 이런 헤겔을 폐기시키는 것이 과제였다고 할만큼 헤겔로 대표되는 독일관념론에 자주포를 쏘아대지 않았던가.지젝이 참으로 신통방통한 것은 역설적인 방법론을 동원해서 쓰러져가는 헤겔과 그의 변증법을 세우려고 한다는 것이다.그의 사유와 글쓰기가 참 특이한 것은 그런 지점이다.(이런 듯 보이는데 꼭 그것만은 아니면서..실제 두드리고 있었던 것은 다른 문이었다는 ...)지젝은 책 서문에서 '푸코와 하버마스'의 논쟁을 언급한다.그는 푸코를 포함하여 '포스트 구조주의'의가 헤겔의 '악무한'의 단계로 작용한다는 점을 지적한다.내가 이 책에서 정말 고생하게 된 '주체'문제와 관련해서 '푸코와 하버마스'의 간극을 이전에 예견한 사람들로 알튀세르와 라캉을 이야기한다.지젝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가지고 있는 형식주의를 비판하며 현실 자체를 무의식적으로 구조화하고 있는 환상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라캉을 예로 든다.즉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 장치와 호명사이의 연관을 설명할 수 있는 도구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대신 라캉은 현실의 잔여물과 잉여에 촛점을 맞춘다..그는 현실을 왜곡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상식적인 답변말고 현실 자체를 외상과 실재적인 중핵으로 부터의 도피처로 제공하는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말한다.

지젝이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지루하면서도 이 마라톤을 쉽게 중단할 수 없는 매력으로 작용한다.마치 내가 대학 들어와서 마르크스를 처음만났을 때,푸코를 처음 접했을 때 느끼는 개안과도 같은 신선함이다.라캉을 인용하여 지젝은 자주 '질문에 곧 답이 있고 ...밀수품은 사실 수레다.'라는 식의 예를 든다.주체라는 것 자체도 기표들의 연쇄와 네트워크 속에서의 대답이라고 말할 정도니 형식과 틀이라는 '기표'들에 대한 접근은 '의미만이 진짜다'라고 생각하는 '진지함'을 추구한다고 가정된 주체들에게 한방 날릴 수도 있을 대목이다.또한 '스스로의 나'를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또는 '나는 타자의 모자이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아이디어를 줄것이다.실제 지젝은 주체의 사회 속의 선택 문제에 대해 부인하고 싶겠지만 "그는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것을 선택한다"라고 말한다.그리고 만약 자유선택-많은 자유주의자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주체는 정신병적 주체라고 말한다.즉 상징적 질서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고 기표의 네트워크 속에서 사로잡히지 않은 주체는 오로지 그런 주체 밖에 없다는 것이다.라캉의 재미있는 점은 -지젝은 이것을 라캉의 혁신성이라고 말하는데-여타 구조주의자들과 달리 대타자라고 하는 것 역시 빗금지어진 것이라고 말한다.하여간 역설에 역설이고 뒤집기의 또 뒤집기다.

"진리는 오인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계산하는 자가 그 계산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시저의 살해는 그 최종 결과로 시저주의를 가져온다" " "무엇을 원하는가?" "당신은 항상 두번 죽는다."

지젝이 인용하는 라캉의 말들은 참으로 오묘해서 알듯 말듯하다.그렇지만 이런 역설적인 말들이 나오기 전 단계의 이성적이라고 가정된 사고의 품안에서만 있어왔다면 옆집 강아지 짖는 소리에 귀기울여 보는 마음으로 "왜..그딴 식으로 생각하는데?" (지젝은 이런 질문이 외설성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는 것도 나쁠 바는 없을 듯 하다.

지젝 읽기는 마라톤 같았다.아마추어가 그냥 뛰기엔 분명히 버거운 길이었다.하지만 마라톤이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과학적 훈련을 받은 사람만 하는 운동은 아니다.요즘 각 지역마다 마라톤 축제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가 동호회회원들이고 일반인들이다.그들의 초기 목표는 풀코스 완주일 것이고 조금 더 쌓이면 3시간 주파를 목표로 할 것이다.달리는 사람들은 말한다.뛰다보면 어느 순간 몸이 가벼워지고 생각이 맑아지는 느낌이든다고...'러너스 하이'라고 하던가...하여간 하프도 제대로 못해대면서 풀코스를 뛰어 팔다리 고생시킨 죄는 있지만 지나가면서 만난 '지젝스러운' 풍경들은 다시 마라톤을 뛸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이 책은 누구에게나  한 번에 이해되는 책이 아닐 것이다.마라톤도 한 번에 완성되지 않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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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8-02-16 20:17   좋아요 0 | URL
이 참에 마라토너가 되실 거 같습니다.^^

드팀전 2008-02-17 18:55   좋아요 0 | URL
ㅋㅋ 그럴리가요...^^ 운동은 좀 해야하긴 하는데..아기 생기기 전에 좀 했을때는 성과도 보고 좀 좋았는데 다시 늘어나는 뱃살.

재독,삼독을 해야지 좀 더 이해가 될 듯 합니다.언제 다시 읽게 될 지는..ㅋㅋ

로쟈님의 달콤한 꾐에 빠져서 졸지에 푸하핫 거리고 있습니다.보답으로 제가 최근에 들은 퀴즈 하나 알려드리지요...따님께 물어보시길..
"비의 매니저 이름이 뭔지 아시나요?"
...
..
.
"비만관리" 라네요.크하항..전 무지 웃었는데 다 아는 이야기여도 할 수 없구

로쟈 2008-02-17 22:23   좋아요 0 | URL
딸아이는 비를 잘 모릅니다(한때 동방신기 정도를 알았죠). '비만관리'는 잘 알아듣지만.^^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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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은 '아프간 선교단체 피랍' 사건이었다.9.11 테러 주범으로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한 미국의 부시정권은 '초록은 동색'이라고 아프간 탈레반 정권을 겨냥하여 폭격을 감행했다.탈레반은 쫓겨 났고 미국의 폭격을 감싼 '인권외교'는 빛을 발휘했다.그 틈새 시장을 그냥 봐 넘길 '한국 기독교'가 아니다.어쨋거나 아프간 피랍 사건은 세상의 한 구석으로 잊혀질뻔한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했다.

소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적인 역사를 관통하는 여러 종류의 삶을 그리고 있다.그 중심에는 '여성 수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두 아프간 여성이 있다.소설은 비참한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는 마리암의 역사로 부터 시작해서 자존감 있는 라일라의 역사로 넘어온다.그리고 이 둘은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동일한 역사와 남성의 폭력 하에 놓이게 된다.적대적인 상황 속에서 만나게 되는 이 두 여인은 결국 새로운 생명과 인간의 자긍심이라는 가치 아래 만날 수 있게 된다.

소설<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놓치 않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소설의 결말에 이르기 까지 두 주인공 마리암과 라일라가 겪는 여성으로서의 고통은 참담하다.역사의 폭력에 시달려야하고 가정 내의 폭력에도 저항하지 못한다.저항은 언제나 더 큰 무력으로 잠재워질 뿐이다.이 책은 나보다 아내가 먼저 읽었다.그녀를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었기 때문이다.지난 해 말 이 책을 읽던 아내는 때론 분노하고 때론 눈물지으며 책을 봤다.아프가니스탄의 역사에서 여성이 당해야 했던 슬픔에 대한 '여성으로서의 공감'이었을 것이다.그런 면에서 보면 이 책은 역사의 가해자들(침략자거나 남성이거나 종교이거나 거대담론..)로 부터 수탈당하고 학대받는 여성들에 대한 '페미니즘'소설로 읽힐 만도 하다.특히 이 책에 대해 깊이 공감하는 여성들이 많다는 것은 두 주인공의 역사가 우리 역사에 있어서 피해자로서  '여성잔혹사'와 그다지 멀지 않다는 기억때문 일 것이다.거기에 '어머니'라는 보편적 가치가 소설의 장치로 등장한다. 적대적 관계 상황에 놓인 두 주인공 마리암과 라일라를 하나로 만들고 연대감을 심어주는 것은 '모성'이다.라일라가 불가피한 선택을 한 것도 또한 마리암이 숙연하게 만드는 희생을 한 것도 모두 '모성'의 위대함이다.인류의 유전자 속에 깊이 아로새겨진 '모성'이라는 '위대함'은 공간적 차이와 역사적 이질감에도 불구하고 깊은 감동을 준다.

또한 이 책은 영화를 연상시키는 듯이 씌여졌다.영화적이란 것은 좋게 말하자면 장면 장면의 스피드가 빠르다는 것이다.한 장 한 장 마다 새로운 사건과 새로운 가능성의 단초가 보인다.그리고 극적인 전환도 빠르게 이루어진다.헐리우드식 영화 기법에 익숙한 독자들의 구미를 맞출만한 구성의 스피디함이다.그렇기때문에 꽤 두꺼운 분량임에도 빨리 읽힌다.평이한 문체와 알기 쉬운 스토리도 물론 한 몫한다.구성은 빠르기도 하지만 그다지 복잡하지도 않다.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데 몇 장씩 씌지도 않는다.또한 과거 현재를 넘나들면서 어느 시간대에 있는지 헷갈리게 하지도 않는다.주인공의 시점을 수시로 바꾸어서 앞장을 넘겨보게 하지도 않는다.그저 두 개의 선분이 한 점에서 만나고 하나로 수렴된다.마치 다큐멘터리의 구성을 보듯이 그렇게 직선적이고 연대기 순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문득 이 작품의 영화 대본작업을 할 때-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한다-그다지 어려운 각본 수정 작업 가능하리라 생각이 들었다.얼핏 생각하면 마치 영화 제작을 상정해 두고 소설을 만든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영화적'이다.결말 역시 '해피엔딩'으로 마감하여 대다수의 독자에게 만족감을 준다.(비극적이거나 무한히 열려있는 결말은 얼마나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가!!)

'영화적'이란 것은 사실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이 작품은 헐리우드에서 무척 좋아할만한 소재이다.헐리우드는 스펙터클한 오락물.폭력물만 만들어내는 공장이 아니다.헐리우드는 다양한 소재를 다양한 그릇에 담아낼 줄 안다.그런 면에서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헐리우드산 휴머니즘 영화의 소재로 그럴싸하다.물론 이 책도 그렇지만 '인권'이란 부분에 강한 스폿라이트를 줄 것이고 '휴머니즘'과 '위대한 희생'에 촛점을 맟줄 것이다.이 '헐리우드식 프로세스'에 빠져 있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은 결국 독자가 읽어내야 하는 부분이다.

최근에 나온 영화 <찰리 윌슨의 전쟁>은 미국 하원의원이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막기 위해 아프간 정부와 무장단체들에 무기를 지원하는 내용이다.인권탄압과 문명파괴의 대명사,종교근본주의자 탈레반 역시 미국과의 밀월관계가 지속되었던 시절이 있었다.소설은 다분히 '인권'이란 보편적 주제로 세계에 호소한다.그리고 소설에서 '미국'의 역할은 거의 끝부분에만 등장한다.약간의 우려 셖인 목소리로 말이다.궁극적으로는 탈레반이라는 '큰 악'을 쫓아내고 평화를 이끌어낸 '차악'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고 있다.미국에서 이 소설이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미국의 대외관계에서 나타난 '정치적 죄의식'에 대한 눈가림이거나 (또는 무지이거나 ) 미국민들이 '보편적'으로 인권에 대한 의식이 타국민에 비해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좋은 소설을 그렇게 정치적으로 삐딱하게 읽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의 '아프간 여성 억압사'에 같이 아파하고 가해자들에게 분노하는 것이면 족하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그런 면에서 나도 아프고 공감하고 분노하고 울먹였다.)그저 그 가해자들의 목록에서 '미국'도 빠질 수 없다는 정도 까지만 이야기하자.

마지막으로 나는 일본에서 만든 한 다큐멘터리를 말하고 싶다.그전에 영화 <천상의 소녀>(영어제목 오사마)를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겠지만.이 영화는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았던 영화다.칸느와 골든글러브에서도 상을 받았다.탈레반 이후 아프간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장편영화였다. 나는 영화<천상의 소녀>를 보지 못했다.대신 몇 년전 일본 출장길에서 나는 그 영화 제작 과정을 가지고 만든 NHK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영화 제작에 일본NHK가 펀딩했기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세디그 바디막 감독의 시선에서 시작한다.촬영 종료 후 다시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왜 이 영화를 찍었는지" "어떻게 주인공을 선정하게 되었는지" "아프간의 어떤 모습을 그리고 싶었는지"...등등을 이야기한다. 주인공 마리나를 선정하게 된 장면은 인상적이었다.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담고 있는 얼굴을 찾고 싶었다고 했다.전쟁 고아들과 빈민굴을 뒤지면서 수 천명을 캐스팅하기 위해서 만났다.그러던 중 주인공이 될 마리나를 본 것이다.감독은 바로 '이 아이다'라고 계시를 받듯이 그녀를 만났다고 했다.이 주인공은 전문배우가 아니었다. 아픈 아빠와 엄마를 대신해서 일주일째 밥을 굶으며 거리를 뒤지고 다니던 아이였다.감독은 그 아이에게서 '슬픔과 분노' 그리고 그 뒤편에 이런 비참함 상황에 어쩔줄 몰라하는 '자긍심'을 담고 있는 눈을 보았다고 했다.다큐멘터리에서 본 그녀는 정말 그랬다.

다큐멘터리는 영화 촬영 장면 중간 중간 길거리 캐스팅된 거지 아이들이 엑스트라비를 받기위해 몰려드는 것부터 영화와 현실의 아프간의 모습을 동시에 비춰주고 있었다.

이 다큐멘터리의 압권은 마지막 장면이었다.영화 촬영은 끝났다.아이는 몇 주간의 배우로서의 역할을 접어야했다.그녀는 약속했던 돈 보다 조금 더 많은 돈을 두 손에 쥐어들었다.성인 남자가 6개월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라고 했다.그녀는 인터뷰에서 '영화 찍는 동안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간으로서 대접받았다.'라고 울먹였다.아이는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는 장면에서 어른스럽고 속깊어 보이던 아이가 울기시작했다.감독과 다른 스탭들도 모두 울먹였다.아이는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이 영화가 그해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한다.(이 다큐멘터리도 세계적인  TV프로그램 페스티벌에서 상을 받았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촬영이 끝나고 6개월이 흐른 시점에  제작팀은 다시 마리나를  찾는다.마리나는 어떻게 되었던 학교를 다니려고 한다고 말한다.짧은 만남이후 다시 마리나는 무너진 담과 벽돌들 사이로 사라진다.카메라는 그 장면을 무려 3분 가까이 롱테이크로 보여준다.아이는 가면서 두 서너번 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든다.카메라는 그녀가 회색빛 잔해들 사이에서 작은점이 될 때까지 계속 OFF버튼을 누르지 않는다.제작진은 그 때 마리나가 울고 있었다고 말한다.

다큐멘터리의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영화를 찍고.. 다큐멘터리를 찍고..그리곤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직장에 나오고 일을 하고 친구를 만나 농담을 하고 술잔을 기울이고...그리고 언제 우리가 그런 일들을 했었는지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삶은 계속됩니다.그래서 그 마지막 장면을 그렇게 날것 그대로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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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밤바 2008-02-11 07:59   좋아요 0 | URL
예전에 '현대 세계와 글로벌 시각'이라는 교양 과목을 들을 때가 생각나네요. 그때의 우리도 세계의 분쟁과 빈곤 문제를 다루면서 다른 학생들과 교수님이 최대한 공감할 수 있도록 많은 자료와 사례들을 다루었었죠. 더 많은 공감이 더 높은 학점을 보장해 주기 때문에 꽤나 많은 시간과 토의를 거쳐 발표자료를 만들었습니다. 수업의 듣는 학생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면서 까지 저희의 발표 내용을 역설하였지만 그 발표 후 세계의 빈곤과 분쟁 문제는 오히려 수능 치고 난 후의 참고서 마냥 지긋지긋한 것이 되었습니다.

불현듯 이것을 학점에 종속되게 만든 학교 시스템과 사회적 문제로 쉽사리 치환하며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했던 날들이 자기기만으로 느껴지네요. 물론 팀전님의 글이 그러한 치졸함을 반성하게 된 계기의 전부일 수는 없지만 좋은 자극제가 된 것 같네요. 사회 문제에 관심을 많이 두면서도 그 문제가 불러일으킨 감정적 미안함이나 심리적인 고통은 다 타인의 탓인냥 치부했던 일련의 행각들이 농도 옅은 햇살 아래에서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 라는 약간은 진부한 드라마 대사에 사랑 대신 다른 어떤 말을 집어 넣으면 너무나도 가슴 절절한 행동 서약서가 될 법도 합니다. 장하준 교수가 지승호씨와 인터뷰한 책에서 언급한 '선한일과 악한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편한일과 그렇지 않을 일이 있을 뿐이다' 라는 말도 생각나네요.^^

드팀전 2008-02-12 10:40   좋아요 0 | URL
^^ 무자년이지요.새해 복많이 받으시고...좋은 일이 많이 생기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 - 한 젊은 역사가의 사색 노트
이영남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어렸을 때는 모두 가루약을 먹는다.칼칼한 분말을 입 안에 털어넣가 쉽지 않다.때로는 씁쓸한 가루 한 줌이 입 천장에 붙어서 목구멍을 화공약품 처리장 처럼 만든다.어른이 되니 달라진 점이 약 봉투에서 가루약이 사라졌다는 것이다.언제부터인가 알약을 꼴깍 꼴깍 잘도 넘기게 되었다.약 먹는게 그나마 쉬워졌다.

역사학자 이영남이 쓴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는 당의정을 씌운 푸코 개론서이다.이 책은 '푸코'에 대해 언제나 알고 싶었지만 차마 '푸코'에 대해 물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이라면 환영할 만한 책이다.저자는 개인적 공부와 집단 학습을 통해서 자체적으로 소화한 푸코를 비교적 평이하게 서술하고 있다.먼저 번역투의 문장을 앞뒤 읽어가면서 맞추어 보지 않아서 좋다.전문적인 푸코 연구자들처럼 철학적 용어들의 남발 속에서 퍼즐 맞추듯 읽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좋다.그런 의미에서 '푸코'의 '푸'자에 대해 관심만 있었던 사람에게는 엔돌핀을 돋게 할 책인 것 만은 사실이다.

책 제목을 잘 살펴보자.책 표지의 디자인에 제법 이중적이다.보시다시피 책 제목은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이다.색깔로 구분해서 보면 앞과 뒤는 흰 글자이고 <...역사의 문법을..>은 검은 글자이다.따로 따로 떼어 보면 제목이 두 개 처럼 보인다.흰 글자 부붐만 보면 <푸코에게 배우다>.주어와 서술어만 갖는 제목이다.책 제목의 디자인에서 사실 이 책의 기회과 구성이 들어있다.재미있게 그러면서도 효과적으로 잘 뽑은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은 제목처럼 <푸코에게... 배우다>와 <...역사의 문법을...>이라는 2막으로 구성되어 있다.(실제로 책이 그렇게 1,2부로 나누어져 있다는 말은 아니다.) 저자는 푸코의 삶의 궤적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일종의 평전 하이라이트라고 보면 된다.디디에 에리봉의 저작 <미셀 푸코>가 중심적인 롤을 맡고 있다.또한 푸코의 콜레드 주 프랑스 강의와 미국에서의 인터뷰 내용들이 푸코라는 인물에 대한 조감도를 그리게 해준다.디디에 에리봉의 <미셀 푸코>를 읽었던 사람이라면 1분 30초짜리 극장판 예고를 보는 느낌을 줄 것이다.저자는 푸코의 삶을 따라가면서 개인적 삶의 역사가 어떻게 그의 작품과 관련이 있는지를 쫓는다.잘 알려져 있다시피 푸코는 '소수자들의 아더왕'이었다.푸코 자신이 총명함에도 불구하고 모난 성격으로 어렸을 때부터 광인 취급을 받아왔다.또한 청년기부터 그는 은밀하게 욕망할 수 밖에 없는 동성연애자였다.사회에서 이런 개인적 포지션이 <광기의 역사>라든가 <감시와 처벌>,<성의 역사>같은 저작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말이다.당연히 저자가 강조하고 감탄하는 것은 개인의 특수성을 내면 속의 분노나 분출로 끝내지 않고 사회적 보편성으로 확장해낸 푸코의 역량이다.저자는 푸코의 삶에 영향을 준 사건으로 앞의 두가지 외에도 정신병원에서의 근무,스웨덴 웁살라와 튀니스로의 외유,68혁명 등을 언급하고 있다.

저자가 푸코의 평전 압축에 할당된 종이를 모두 소진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푸코를 이해하기 위해,또는 푸코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위해, '호구조사' 부터 시작해준 것쯤으로 이해하면 된다.저자는 '침묵하는 역사'를 부활 시켜 '현재를 낯설게 보게 반든' , '현재의 역사가' 푸코에게 시선을 모은다.그래서 주로 언급되는 책이-푸코 저작 중 가장 많이 읽히고 또 쉽게 읽히는 -<광기의 역사>,<감시와 처벌>이다.역사-철학자로서 푸코를 상정하기에 이 두 책만큼 용이한 것도 없을 법하다.푸코가 이 두 책에서 말하고자 한 바를 따로 정리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푸코는 '계몽주의'와 '근대성' 이란 것에 시비를 좀 걸었다.그는 근대의 합리적 세계가 어떻게 배제를 통해 구축되었는지를 설명한다.푸코가 관심을 갖게 된것은 '권력-지식-담론' 이란 것들이 어떻게 신체에 작동하여 규율을 만들어내는지에 있었다.결과적으로 말하면 '권력은 모든 곳에 내재한다'는 것이었다.또한 마르크스식의 거대담론으로서의 권력이 아니라 세계의 곳곳에 나름의 정부를 세운 미시권력들이 다층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상정했다.그래서 푸코의 저항은 그런 미시적 지점에서 가능성을 본 것이다.그의 감옥정보모음GIP에서 활약과 실천적 지성인으로서의 모습은 이런 도상에서 이해되고 있다.

저자는 역사학자답게 2막으로 넘어가면서 역사가로서의 푸코를 이야기한다.<...역사의 문법을..>의 차원이다.저자는 푸코가 추구한 연구의 엄밀성과 열정을 상찬하고 실증주의적 접근에 큰 박수를 보낸다.또한 정치적 사유를 통해 임상 역사가로서 전문 역사가들에게 거대한 자극이 된 푸코의 업적을 칭찬하다.푸코의 사유를 동원하여 한국의 역사를 빗대어 보는 장도 따로 마련한다.저자는 박정희 정권의 근대적 '효율 우선주의' 프로젝트가 사회적으로 민주주의적 가치를-정치적 민주화만을 뜻하지는 않는다-부정하고 진화해 나갔다고 지적한다.우리 사회에 그동안 저류에 깔려있다가 이제 표면에 극적으로 등장할 '기업사회'가 대표적인 예가 될 터이다.이제는 더이상 숨어서 말할 필요가 없고,머뭇 거리거나,두려워 할 필요없이,극단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효율성'과 '경쟁력'의 시대 말이다.

저자는 책 말미에 가서 우리의 역사학과 역사 인식이 참고해야할 방향으로 미시사를 예로 들고 있다.저자가 부정하고 있지만 얼필 보면 푸코의 역사철학을 미시사로 끌고 오기 위해 앞에서 길게 푸코를 인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법도 하다.(저자는 분명히 푸코가 미시사가는 아니라고 말했다.) 미시사를 통해 거대담론 속에 사라진 개인들을 복원하는 것.그리고 이를 통해 '개인의 삶'과 '사회적 삶'을 네트워킹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전문역사가 뿐망이 아니라 누구나 해봄직한 이런 미시사류의 임상 역사가가 되기 위해 인문학적 자기 수양을 강조하고 있다.(저자는 미시사와 인문학적 소양의 강조를 위해 지금 서재 왼쪽 상단에 있는 긴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을 예로 들고 있다.마침 이 책을 작년에 감명깊게 읽었으니 이런 재수가...)

물론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운다>에도 기획의 특성상 약점이 없을 수는 없다.역사학자가 감동한 푸코가 되다 보니 푸코를 역사학으로 소급시켜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저자는 푸코의 책들이 도서관에서 사회과학코너에 어떤 것은 철학 코너에 어떤 것은 역사 코너에 있다고 말했다.그만큼 푸코는 멀티 플레이어다.물론 역사가의 입장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긴 했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FA 시장에 나온 푸코라는 선수를 '그는우리 쪽 사람이야'라고 외치는 섭외 에이전트의 인상이 든다.(물론 개인적 편견임을 밝힌다.내 거의 모든 글이 다 그렇듯이) 이정우 교수가 푸코가 사회과학자로 환원된 것에 대해 비판했듯이 또한 이 글 역시 역사학자로 환원되는 푸코라는 지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가 다루고 있는 푸코의 저작이란 것이 <광기의 역사>,<감시와 처벌>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도 지적할 만하다.물론 간간히 <지식의 고고학>,<성의 역사2,3>,<말과 사물> 등이 등장한다.그렇지만 상대적으로 앞의 저작에 비해 확실히 빈약하다.푸코의 중기 사상에 해당한다는 권력과 지식의 문제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또한 '푸코 용비어천가'에서 '푸코 비판'을 요구하기란 사실 어려울 수 있다.하지만 독자들을 위해 푸코에 대한 비판적 시선도 짧게 나마 언급하면서 넘어갔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욕심 아닌 욕심이 생기기도 한다.예를 들어 헤이든 화이트나 폴 베느 그리고 저자가 역사학자로서 그렇게 칭찬한 푸코의 역사적 사료 분석에 대해 엉터리라고 반대하는 학자들도 많았다.<임상의학의 역사>에 대해서는 정신분학학자들이 푸코의 지엽적인 자료 채택에 대해 비판 했다.그외에도<광기의 역사><감시와 처벌>등에서 푸코의 역사적 증거가 지나치게 선별적이고 왜곡적이고 또한 포괄적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았다.<푸코>의 저자 메르키오르는 상당히 삐딱한 시선으로 '푸코 역사의 객관성은 역사의 여신 클리오에게 일급의 칭찬을 퍼부었던 세기에 이루어졌던 일급의 역사 연구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라고 악담을 퍼붓는다.또한 저자가 푸코 사상의 특징으로 말하는 '불연속성' 즉 에페스테메의 단절에 대해서도 그 만큼의 비판이 존재한다.심지어 푸코 자신도 후기에 오면서 '불연속성'에 대해 어떤 보완적 태도를 취했다고 알고 있다.장 피아제는 푸코의 사상을 '근대성에 대한 객관적이고 타당한 혐오라기 보다는 그저 근대성에 대한 막연한 혐오'라고 평가했다. 이와 연계하여 유명한 푸코와 하버마스의 논쟁 처럼 푸코의 '반계몽주의','반이성주의'와 그것이 갖는 철학적 문제의식 등에 대해서도 저자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그저 '역사적 실증에 바탕을 둔 근대성의 반성'으로서만 푸코를 말하고 만다.

한 가지 기획에서 푸코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하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한다.존중해줘야 할것은기획 의도다..이러 저런 이유로 사실 나는 이 책에 별 셋을 주고 싶었다.그렇지만 푸코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이 책을 볼 필요도 볼 일도 없다는데 생각이 머물렀다.대신 있어 보이는 레스토랑 앞에서 머뭇거린 경험이 있는 -나를 비롯한-사람들을 떠올렸다.

 '푸코' 식당이 있다.정통 프랑스식 레스토랑이라고 한다.인테리어도 그럴싸하고 값도 비싸보인다.레스토랑의 협력업체 또는 경쟁업체로는 '바슐라르', '캉길렘','레비 스트로스','데리다','들뢰즈','하머마스' 등 그럴싸 해보이는 식당들이 있다고 한다.메뉴도 대충 어딘가에서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이야기다.그렇지만 또 낯선 요리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식당에 들어가보고 환상적인 맛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또 어떤 사람들은 먹기 너무 힘들다고,입맛에 안든다고 다신 안가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는 지나가면서 '푸코' 간판만 보고 '언제 한번 맛이나 볼까 '하는 사람에게 좋은 책이다.별로 비싸지도 않다.주방장이 대충 한국 입맛에 맞게 만들었다.가격은?.. 실제 프랑스 요리값이야 비싸겠지만 책으로 만나는 푸코야 '그래 봤자'  종이 값이다.이제 이 리뷰도 끝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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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8-01-21 15:32   좋아요 0 | URL
근사한 제목에 걸맞는 근사한 리뷰입니다.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바스코 포파 지음, 오민석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늑대가 심장을 한 웅큼 물어 뜯었다.황금빛 누런 이빨 사이로 너덜 너덜해진 심장의 살점이 보인다.더러운 입 주변으로 선홍빛 붉은 피가 그대로다.

후텁지근한 야생동물의 콧김. 100년 동안 닫혀있던 창고의 쾌쾌함을 일시에 쫓는다...번뜩인다.그 야생 동물의 회색 빛 털이...번뜩인다... 화살촉보다 날카로운 눈빛.

우아하다....모욕당한 절름발이 늑대는....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앞에 잠시 움찔하며 한 두걸음 뒷걸음질 친다.

1.모욕당한 절름발이 늑대여/그대의 굴로 돌어가라/가서 잠들라 /짖는 소리가 얼음으로 변하고/저주의 말이 녹슬고/횃불들이 흔한 사냥 때문에 죽을 때까지/모두가 빈손으로/자신 속으로 떨어져/절망 속에 자기 혀를 깨물 때까지.............(중략).....나는 네발로 기어 그대 앞으로 간다/그리고 그대의 은총 속에서 울부짖는다/마치 그대의 위대한 초록 시대 속으로 들어가듯이/

그리고 나는 내 오래된 절름발이 신,그대에게 기도한다/그대의 굴로 돌아가라고

번역된 시를 본다는 것은 낯선 이국 땅에서 처음 보는 문자로 된 도로 표지명을 보는 기분을 준다.시가 바닥을 구르며 울부짖는 소리가 외국시를 볼 때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시들은 그렇게 외친다. "네가 알고 있는 그런 느낌이 아니라고...그런 정서가 아니라구.." 모든 번역이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시의 번역은 정말로.

요즘 같은 겨울에 어울리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의 마지막 구절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어떻게 '내리고'가 아닌 '나리고'의 미묘함을 번역할 것인가..'어디서'가 아닌 '어데서'의 그 소박함을 잡아낼 것인가...어떻게 눈 덮인 오늘 밤을 '엉엉'이 아니라 '응앙응앙' 울릴 것인가..

절대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불가능하다.바스코 포파의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을 읽고 감탄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을 쿡쿡 찌르는 것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런 연유에서이다.이 책은 영역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그것이 영어로 씌여졌던 세르비아어로 씌여졌던 둘 다 모르는 내게는 마찬가지 감정을 준다.

바스코 포파.그의 시는 친절하지 않다.초현실적인 상상력과 상징주의적 표현들이 늑대 부러진 이빨처럼 불편하다.첫번째 연작 시로 등장하는 <작은상자>다.

작은 상자는 젖니를 갖고 있다/그리고 짧은 길이와/좁은 넓이와 작은 공허/그 밖의 모든 것을 갖고 있다/작은 상자는 계속 자란다/한때 상자가 들어있던 벽장이/이제 상자 안에 들어와 있다...(중략)....이제 그 작은 상자 안에/축소된 전 세계가 있다/당신은 그것을 쉽게 주머니 안에 넣을 수도 있고/쉽게 훔칠 수도 쉽게 읽어버릴 수도 있다/

작은 상자를 조심하라...

이어지는 <작은상자의 죄수들>들 중 한 구절이다.

작은 상자를 열어라/우리는 상자의 바닥과 뚜껑과/열쇠 구멍과 열쇠에 키스한다/온 세상이 그대 안에 짓밣힌 채 누워 있다/세상은 자기 자신을 제외한/모든 것을 닮아 있다/그대의 맑은-하늘 어머니조차/이 사실을 더는 모르리.....

도대체 '작은 상자'란 무엇인가?  몇 가지 단어들이 차창 밖 사람들처럼 휙 스치고 지나간다.추천의 글에서 정현종 시인은 영국 시인 테드 휴즈의 <시란 무엇인가?>를 인용한다.그 책 앞머리에 <작은상자>를 '시'에 대한 메타포로 인용하고 있다고 한다.그렇다면 휴즈나 정현종 시인처럼 '작은 상자'는 정말 '시'의 비유이기만 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시인들처럼 '작은 상자' 대신 '시'라는 말을 넣고 보면 그럴 듯 하게 들리는 것은 사실이다만...그런데 그것만이 아닐게다...

바스코 포파의 시선집에는 7편의 연작시가 실려있다.그 중에서 <흰조약돌>은 강한 시각적 인상을 남긴다.

그것은 머리도 팔다리도 없이/나타난다./호시탐탐 미친 맥박으로/시간의 뻔뻔스러 발걸음과 더불어/움직인다./정열적으로 모든 것을 껴안아/움켜쥔다.

달의 눈썹으로 미소 짓고 있는 하얗게 반들거리는 처녀시체.

이어지는 <조약돌의 심장>이라는 시다.앞의 시가 마지막 연에서 충격적인 수축의 강렬함을 남겼다면 이 시는 초현실주의적 영화기법을 이용한 이완과도 같다.수축과 이완이라는 다른 리듬을 갖고 있지만 서로 다른 색깔의 강렬함은 같다.이 두 시는 앞 뒷장 사이에 바로 붙어 있다.

그들은 돌의 심장을 열어보았다/심장 속에 뱀이 한마리/꿈도 없이 실타래처럼 잠들어 있었다/....(중략).....그들은 멀리서 쳐다보았다.뱀은 지평선을 돌아 제 몸을 감더니 계란처럼 지평선을 먹어버렸다.....(중략).....그들은 서로 쳐다보며 씩 웃었다/그들은 서로에게 윙크를 했다.

바스코 포파의 시선집은 낯선 경험과 낯선 시각으로 생각을 이끈다.이것은 일종의 환기다.환상을 통해 환상 너머와 대면하게 하는 방식이다.우리의 현존재 너머에 있는 그 무엇,또는 우리가 두고 온 오래된 기억 너머의 무엇이다.그것들을 환기 시키기 위해 자기증식을 넘어 자기를 포괄해버리는 작은 상자가 나온다.영원을 들여다 보는 조약돌이 등장한다.더러운 이빨을 드러내는 회색빛 늑대의 야생성도 그런 차원에서 경의의 대상이 된다.

포파의 시는 쉽지 않다.하지만 1월의 어느날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 얼굴을 때리는 차가운 바람처럼 영혼의 통점들을 자극한다.자코메티의 조각품들과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떠올리게 하는 시들 몇 줄 적으며 끝낸다.

이제 우리 무엇을 하리/좋았어 .이제 우리는 저녁으로 골수를 먹으리/우린 점심으로 골수를 먹었지/텅 빈 느낌이 나의 내장을 괴롭히네/그러니 음악을 만들자고/우리는 음악을 좋아하잖아/개들이 오면 우린 무엇을 해야하지/개들은 뼈다귀를 좋아하잖아/우리는 개들의 목구멍에 걸려 음악을 사랑하리. ..... <태초 이후>

무슨 일인가/살이 눈 같은 살이/나에게 달라 붙는 것 같았어/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마치 골수가 내 속을 흘러 지나가는 것 같았어/뼛 속까지 시린 어떤 골수가/ 나도 모르겠어/모든 것이 다시 출발하는 것 같았어/어떤 무서운 시작과 함께

당신은 무엇인지 알까/당신이 짖을 수 있을까 ......   <달빛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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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1-18 23:38   좋아요 0 | URL
궁금증....
보통때처럼 알라딘 리뷰쓰기를 했는데...
첫 화면에는 분명 작성당시의 작은 글자로 보입니다.그런데 잠시 로딩이 끝나고 나서 완료화면 뜨면 한글문서 작업한 것처럼 12포인트 정도의 큰 글자로 보입니다.왜일까요? 예전에 한글로 작업하고 붙여넣기를 하면 그렇게 큰 포인트로 나오던데...
오늘은 그렇게 한 것도 아니거든요.
또한 해결방법은?

프레이야 2008-01-19 09:39   좋아요 0 | URL
'암스테르담'에 이어 이 책도 보관함으로 실어갑니다. 꾸벅^^
이 글자 크기가 읽기엔 좋으네요.

드팀전 2008-01-19 12:32   좋아요 0 | URL
^^...
오늘은 괜찮은데요..이상한것이 컴퓨터 세상이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