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인 것의 귀환
샹탈 무페 지음, 이보경 옮김 / 후마니타스 / 200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는 자본주의에 경도된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끝이 난 것 처럼 보인다.최근의 신자유주의는  초기 상인 자본주의의 재도래인 양 역사가 이룩해 놓은 민주주의적 전통 마저 숨통을 조은다.한국의 상황은 '실용주의'라는 외피를 둘러쓴 이런 '신자유주의'의 클론에 지나지 않는다.실제 좌파라고 할 수도 없는 구정권에 남의 옷을 입히며 이제 유일한 징벌자로서 역할을 자임한다.그 징벌자의 헤게모니는 다른 모든 가치있는 논의를 '구태'와 '구습'이라는 단어로 독점해 버린다.

유구한 전통의 자유민주주의의 천칭은 한국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기울어졌다.누가 그랬는가? 

2차 세계대전 중 한 독일 장교가 피카소의 작업실을 방문했다.그곳에서 독일 장교가 피카소의 걸작<게르니카>를 발견하고는 다음과 같이 피카소에게 물었다. "당신이 한 것이오?" 이에 피카소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아니 바로 당신이 한 짓이오.  .....지젝 <혁명이 다가온다>중....

자유 민주주의의 전통을 무너뜨린 것은 좌파가 아니다.한국에서 좌파는 이론적으로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것이 궁극적 대안이 아님을 말했을 뿐,실제 자유민주주의를 흔들만한 힘을 가진적이 단 한번도 없다.그렇다면 누가 흔들었는지는 명약관화하다.당신들이 입고 있는 그 옷은'자유민주주의'와는 다른 무엇일 뿐이다.무페는 말한다."그 모든 거짓 딜레마는 특정 환경들 속에서는 함께 접합되었지만 필연적으로 관계가 없는 일련의 서로 다른 담론들을 '자유주의'의 용어 아래 융합한 결과이다."

시대가 암울하다는 불평과 자조가 주위에서 많이 들린다.이것은 '역사의 종말'이 아니다.그것이 역사의 종말이 아님은 역사가 스스로 이야기해주고 있다.우리는 한숨과 실망으로 열려 있는 역사라는 강물에 허무의 방파제를 알아서 세울 필요가 없다.

 칼 슈미트의 '정치'와 '정치적인것'

  상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은 먼저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구분을 요구한다.일단 무페의  선행적인 전제가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부재로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면 이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전자는 '제도로서의 정치'다.우리가 뉴스에서 만나며 말그대로 '정치'(politics)라고 믿는 그것이다.그렇다면 '정치적인 것(the politcal)'은 무엇인가? 이 '정치적인 것'의 개념은 나치 협력자였던 칼 슈미트에게서 빌어온다.('나치' 그러니까 또 '생각의 얕음'을 드러내는 질문을 또 하고 싶지? )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을 인간 사회와 분리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 규정이라고 말한다.그것은 '적대'와 '친구'로 나뉠 수 밖에 없는, '갈등'과 '분열'의 영속적인 상태를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대다수의 '자유주의자'들은 이 지점에서 깜짝 놀란다.'적의'라는 개념이 그들에겐 낯설기 때문이다.무페는 자신의 '급진적인 자유민주주의 기획'의 주요 비판의 대상이 될 '자유주의'적 사유가 '대중들'이 표출되어 나타나는 정치 운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그들에게 이것은 병리적인 것으로 분류되거나 비합리적인 힘들의 표현일 뿐이다.무페의 기획은 여기서 시작된다.즉 정치적인 것이 필연적이며 적대가 없는 세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그리고 이 조건 하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질서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법이 그녀의 관심 주제이다.

아..무페의 자상함을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자

무페는 '적'이란 말에 '붉은 기'를 연상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자들을 위해서 친절하게도 '적'의 개념에 대해 설명해준다.(핵심은 그 '적'이란게 '인민재판 기소자'가 아니라는 뜻이다.그러니'적','적대','적의' 이런 학술적인 표현이 나오더라도 겪어보지도 않았을 '한국전쟁'의 기억은 잠시접고..붉은 깃발 좀 떠올리지 말자..제발 좀..무페 말에 따르면 그런 자가 진짜 '적이다')

'이런 질서를 위해서는 '적'과 '반대자'를 구별해야 한다.그것은 정치 공동체의 맥락에서 대립진영을 파괴해야 할 적이 아니라 그 존재의 정당성을 용인해야 할 반대자로 고려하기를 요구한다.우리는 반대자의 생각에 맞서 싸울 것이지만 그들 자신을 방어할 권리를 문제 삼지는 않을 것이다 '적'의 범주는 민주주의적 '게임규칙'을 받아 들이지 않아서 정치 공동체에서 스스로 배제된 사람들을 가르킬 때는 여전히 타당하게 남아 있다.<정치적인 것의 귀환>에서 몇 줄 밖에 할애되지 않은 내용인데  이렇게 낭비적인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쯥 하다.)

롤즈의 <정의론>을 중심으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비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허술한 합의 형태로 '자유민주주의'라는 보통명사처럼 사용된다.하지만 이 두 개념은 상호 배치되는 가치관이다.칼 슈미트나 이사야 벌린 같은 학자들이 오래전에 제기한 주장이다.이제는 거의 상식적인 개념이다.흔히 자유주의하면 '개인의 자유'를 말하지 않는가.슈미트는 엄정한 의미의 자유주의는 특정 가치관을 형성할 수 없다고 말한다.즉 모든 것이 개인에서 시작해서 개인으로 끝나야하는 것이 진정한 개인주의이고 이것은 정치적인 것을 부인할 수 밖에 없다.그런데 '민주주의'는 어떤가? '대의제'로 대표되는 '민주주의'는 불행히도 '개인의 선택'을 그대로 반영해 주지 않는다.초등학교에서도 배우는 내용인다.예를 들어 나는 '진보신당'을 지지한다.그래서 그 후보에게 투표하고 싶다.그런데 우리 동네에 '진보신당' 은 후보를 내지 않았다.선거에서 나의 정치적 자유 의지는 소멸되는 것이다.물론 다른 대타를 구할 수 도 있다. 그런데 그건 차선의 선택이지 진정한 의미의 내 '개인의 정치적 자유'의 의사표현은 아니지 않은가? '

 무페는  가장 진척된 형태의 자유주의 교과서라 할 만한 존 롤즈의 <정의론>을 텍스트로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의무론적 자유주의'에 대해 비판을 한다. 물론  롤스의 '공정으로서의 정의','좋음보다 옳음의 우선성' 이 야만적 신자유주의에 대한 방어적 테제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무페도 그 장점은 장점 대로 인정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롤즈식의 '정의'만 구현되어도 지금 보다 한결 나아질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롤즈의 <정의론>이 갖고 있는 이론적 한계를 지적한다. 롤즈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이익에 근거하여 이를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공유해낼 합의를 중요시여긴다.그는 이 시민 대중이 갖는 공통의 직관적인 도덕관념을 이미 '선험적 전제'로 상정하고 논리를 전개한다.그에게 '목적론적 자유주의자'라기 보다는 (칸트적인 의미의)'의무론적 자유주의자 '라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결국 롤즈는 '도덕의 담론'과 '정치의 담론'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슈미트는 그래서 '자유주의적 개념들이 전형적으로 윤리학과 경제학 사이에서 움직인다'라고 말했다.그럼 '정치'가 '도덕'과 분리될 수 있느냐는 문제남는다.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둘의 일치를 주장했다.그러나 근대 정치의 정초자로 보는 마키아벨리는 달랐다.그의 <군주론>이 갖는 중요 미덕은 '정치'와 '도덕'을 분리했다는 것이다.그리고 이후 근대 정치는 그 지평 위에서 발전 되어 왔다.왜 마키아벨리가 중요한지.. <군주론>을 단순히 '국왕 독재 지침서'만으로 읽어서는 안돼는 이유가 그런 맥락 속에 있다.

또한 롤즈의 <정의론>은 '정치적인 것'의 의미를 사소화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또한 도덕관념에 바탕을 둔 '합의'문제에 있어서 '구성의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롤즈에게 평등과 자유는 도덕적 인격체들로서의 인간 속성이다.그리고 이것은 이성에 바탕을 둔 직관에 기초한다.하지만 왜곡되지 않은 '합리적 소통'과 '합리적 합의'에 기반을 둔 사회적 통일성에 대한 열망은 사실은 반정치적이다.과연 우리는 '왜곡되지 않은 도덕적 인격체들의 합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신그람시주의자로서 무페의 헤게모니적인 주체를 만날 수 있다.

또한 무페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전통에서 자유주의와 항상 맞서 왔던 공동체주의자(공화주의자.공리주의자)들에게도 비판을 가한다.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이 전통적인 대립은 미국 건국 이념에서 갈등 양상을 빚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맥킨타이어나 샌들같은 이들이다.무페는 먼저 롤즈의 <정의론>에 대한 공리주의자들의 비판을 소개하고 그 비판이 담고 있는 또 다른 한계를 지적하는 형식을 따른다.공리주의자들의 정치적 스펙트럼 또한 다양해서 한 그릇에 담긴 어렵다.무페는 자신이 마르크스를 떠났던 같은 이유로 공리주의가 가진 '공동체의 선'이라는 '본질주의'에 대해 비판을 한다.기본적으로 공동체주의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을 소환한 것이다.이런 시민 공화주의적 전통은 '구성적 공동체'를 말한다.시민이 참여자로서 정치 공동체에 통합되는 것이다.참여정부가 있었을 만큼 '정치공동체의 참여'를 일종의  선으로만 여기는 한국의 진보주의 입장에서는 이게 뭔 문제가 될 까 하고 말할 수 있다.문제는 시민공화적 전통의 참여의식은 개인적 자유의 희생을 담보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것은 또한 '확실성의 표지'가 사라진 시대에 '본질주의'로서 비판 받을 여지가 있다. 무페의 비본질주의적 정치관으로 보면 시민 공화주의의 단일하고 실체적인 공동선 관념은 현대 정치의 특성을 외면하고 있는 것일뿐이다.물론 무페는 정치와 윤리의 끊어진 고리를 연결하는 것 자체에 부정적이지는 않다.대신 그것이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물을 희생해가면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무페는 오크쇼트의 "소키에르타스'의 관념을 이용하여 비본질적인 개인들이 공동의 관심사에 대한 결합으로서의 결사체를 적절한 것으로 본다.중요한 점은 절대적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하에서 분화된 주체들 사이의 관계를 중심점으로 한 구성이라는 것이다.웃자고 예를 들자면... 두산 베어스와 짜장면을 좋아하는 A와 롯데 자이언츠와 짜장면을 좋아하는 C는 결사의 형식을 이루어낼 수 있다.둘다 짜장을 좋아하니까...삼성 라이온스와 짬뽕을 좋아하는 C는....어떡게 하냐구? 피식..상상력을 동원하쇼.사실 B는 축구팀 FC서울을 좋아하고 C도 축구팀은 FC서울이 최고라고 생각한다.무페는 근대적 형식의 정치 결사체가 공동선이라는 실체적 관념이 아니라 공동의 유대,공동의 관심사에 의한 결합이라고 말한다.따라서 이것은 규정된 형태나 유대 없이 끊임없이 새로 제정되는 공동체이다.이것은 전근대적 공동체와도 자유주의적 공동체와도 다른 형식인 셈이다.이런 소키에르타스 개념은  다원주의와 개인적 자유를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규범적 측면을 사적 도덕의 영역으로 나몰라라 하지 않는다.무페는 오크쇼트가 이런 소키에르 관념을 '공통의 언어'라는 보수적 개념으로 풀이한 것에 반하여 '갈등과 적대'의 모델을 도입하여 재전유할 것을 주장한다.

무페의 급진적 자유민주주의 기획이 어떤 정체를 띄는가를 찾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이는 다른 이론들이 그렇듯이 동시대의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의미이다.무페의 의도는 "현대 민주주의의 본질로 구성된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어느 정도까지 다원주의를 옹호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그녀는 자유민주주의의 체제의 역사적 성격을 끌어안는다.특히 구좌파에게 부르주아 정치 체제를 옹호하고 사탕발림해버린 것으로 비유되곤 하던 자유민주주의의 미덕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하지만 그녀는 자유민주주의의 전통이 가지고 있는 '본질주의' '도덕주의' '허구의식' 등을 해체하길 제안한다.그 대신 '합의'와 '안정'이라는 도달할 수 없는 가치에 매달려서 자기모순에 빠진 자유민주주의를 '갈등'과 '불확정성'을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그렇듯이 '정치적인 것'을 귀환시켜야만 비로소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페스팅거의 '인지부조화'이론의 핵심은 인간은 부조화상태를 조화상태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무페는 역설적으로 실체가 없는 것을 구현하려고 하지말고 '부조화'와 함께 뒹굴라는 것이다.(이미 책상 줄 안맞는게 불편해 미치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사회를 보호하고픈' 분들.)

'긴장'-이것은 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시민으로서의 정체성간의 긴장이거나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원칙간의 긴장이다-이야말로 현대 민주주의 기획이 다원주의와 더불어 풍부해지고 살아 있을 수 있는 최상의 보증물이다.이 긴장을 해소하려고 욕망한다면 정치적인 것의 제거와 민주주의의 파괴만을 이끌어 낼 뿐이다.

P.S) 이 책은 여러 논문을 합쳐 놓은 것이라서 중복되는 내용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결과적으로 선이해가 있는 사람이라면 책 전체를 볼 필요는 없을 지도 모른다.꼼꼼히 몇 챕터만 읽어도 충분할 수 있다...처음에는 서로 서문도 써주고 친했다던 라클라우,무페 친구와 지젝이 점점 멀어지는 이유를 얼핏 알 것 같다.누군가 묻는다....무페는 빨갱이냐? ....자유민주주의를 보존하고 지키자는데 그게 빨갱이냐...하지만 그녀는 넓은 의미의 좌파다.(신사회운동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이해가 안갈 것이라고 생각한다.왜냐하면 그들에겐 제도주의자 '장하준'같은 이들도 좌파,빨갱이이기때문이다.진짜 오랜만에 '빨갱이'란 말 써본다.언제부턴가 이 단어가 다시 오르내리기 시작한다.아름다운 시절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팀전 2008-04-04 15:30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근데 이 긴 걸 다 읽으신건 아니겠지요.소중한 시간에 부디 그러지 않으셨길...(진짜루요..)
왜 자꾸 이렇게 길게 쓰는지 생각해봤는데...정리하고 리뷰를 쓰는게 아니라 정리하면서 리뷰를 써서 그런것 같아요.다음번에는 좀 짧게 해야지...

점심 먹고 날씨가 너무 좋아서...땡땡이치고 해운대 바닷가 갔다 막 돌아왔답니다.
연두빛 봄바다가 꽃물을 뚝뚝 떨어뜨린 것 같았습니다.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 Art Travel 1
이주헌 지음 / 학고재 / 200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러시아? 

그 때 그 나라는 '소련'이라고 불리웠다. 그 나라가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바로 그 때다.전 세계를 붉은 물결로 만들 야욕도,지구를 몇 번 파괴할 핵무기의 공포도 그 때보다 강하지 않았다.

영화 <백야>에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와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의 만남.

왜 나에게 이러한 야생마들이 주어졌을까?
끝까지 못살았고, 나는 마지막까지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나는 말들을 노래하리라. 못 다한 노래를 부르리라.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야생마>

 지축을 찢으며 허공을 나는 바리시니코프라는 '시각'이미지와 갈라진 땅을 타고 흐르는 '비소츠키'의 '청각 이미지'가 텅빈 무대 위에서 서로 뒤엉켰다. 죽음을 앞둔 수컷 사마귀의 사랑처럼 두 가지 이미지는 투쟁하고 화해하기를 반복했다. 물론 이들에 대해 알게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당시 나는 중학생이었으니까....하지만 그 강렬한 이미지는 어린 마음에 빗금을 그었다.

'아...저런 것.내가 아는 그 부드러운 선율들과 흥쾌한 분위기와 다른...그것이.... 있었구나.'

 나이가 들면서 음풍농월하다 보면 '러시아 예술'을 피해갈 수 없다. 그것은 서울역에 내리면 대우빌딩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그런데 '러시아 미술'은 이상하게 낯설다. 이 책의 저자 이주헌도' 러시아 음악과 문학이 비교적 체계적인 방식으로 한국에 소개된것에 비해 미술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한다. 물론 러시아 전문가들의 입장에서는 음악도 문학도 아직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 것이겠지만 장르적으로 보면 미술이 더 소외받은 듯 한 것 사실이다.

나만 하더라도 러시아 작가와 음악가에 대해 적어 보라면 그래도 몇 명 적을 수 있을 듯 했다. 그런데 미술가라고 하면 두 세명 안팎이었다.(이 책을 봐도 몇 명 더 기입하긴 쉽진않다.러시아의 '..스키' "...초프' 들은 한 두번 들어서 이름 적어내기 쉽지 않다.^^)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은 하얀 눈위에서 더 선명한 핏자국처럼 러시아 미술의 큰 족적들을 따라간다. 대중적인 글쓰기로 인기가 있는 이주헌은 러시아라는 비행기의 쌍발 엔진인 샹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두 곳 미술관을 중심으로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러시아 미술관-여행을 시작한다. 러시아가 혁명 이후 미술작품들을 국유화하면서 이 두 곳에 집중적으로 배치한 것이다. 일정에 제한을 받는 여행객들에게는 역사의 상흔이 오히려 도움이된 아이러니이다.

이 책에서는 서유럽 미술에서 변방으로 취급받는 러시아 미술의 특징적인 면모가 부각된다. 여기는 러시아가 역사와 종교면에서 서유럽의 전통과 다른 길을 걸어왔다는 것이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다. 비잔틴에 영향을 받은 러시아 정교, 벨에포크 시대에도 강력하게 존재했던 차르 통치,그리고 비참함을 견뎌야 했던 러시아 민중의 삶,나폴레옹과의 애국전쟁에서의 승리....러시아 예술은 서유럽의 문화에의 편입과 슬라브의 독자성 사이에서 풍부한 문화적 경험을 갖게된다.

이 책에서는 러시아의 이콘화,장르화,종교화,풍경화,초상화 등이 소개된다. 대제목을 장르별로 구분하고 그 안에서 작가별로 작품을 소개한다.

나의 눈길을 오래 잡아 두었던 작품들은 일랴 레핀의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자포로지예 카자흐>콘스탄틴 플라비츠키의 <타라카노바의 황녀>,알렉산드르 베네치아노프의 <봄의 들판>,미하일 브루벨의 <앉아있는 악마>니콜라이 게의 <무엇이 진리인가?>,바실리 페로프의 <수도원의 식당> 등이었다.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에서는 러시아 미술만 다루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미술관을 찾아가는 형식을 띠고 있기때문에 러시아가 콜렉션한 서유럽의 작품들도 소개가 되고 있다. 대략 책의 3분의 1정도는 거기에 할애하고 있다. 기획의도가 있기는 했겠지만 차라리 러시아 미술로만 한정시키는 것이 낫지 않았나 싶다. 물론 덕분에 루벤스의 <로마의 자비>나 램브란트의 <돌아온 탕자>같은 그림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지만 날이다.

러시아 작품들을 만나면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미술과 삶이 서로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를 응시하며 또는 서로를 고발하며서도 따뜻하게 서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서점에서 이 책을 고르면서 이진숙의 <러시아 미술사>와 무게질을 했다. 최근에 머리를 많이 움직이게 하는 책을 보다보니 쉬어가는 요량으로 고르겠다는 취지였기에 부피가 좀 더 가벼운 책을 골랐다. 그런데 결국 <러시아 미술사>도 구매하고 말았다. 뒤에  산 책은 대충 훑어보았는데 일단 중복되는 내용들이 꽤나 있다. 한 쪽에 빠진 그림이 다른 한 쪽에 비중있게 다루어지는 경우도 있다.예를 들어 일랴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러시아 미술사>는 장르를 구분하되 작가와 연계하는 방식으로 즉 사조와 작가를 최대한 가깝게 연결하는 방식으로 서술해 놓은 듯 하다. 그리고 20세기 러시아 미술에 대해서도 조금 더 할애한다. 대신 이주헌은 러시아에가서 만날 수 있는 서유럽작품들을 더 소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러시아 미술에 푹빠졌다.그와 더불어 내가 가고 싶은 도시중에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수직 상승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쟈 2008-03-21 21:30   좋아요 0 | URL
러시아 애호가가 한분 느셨네요.^^

드팀전 2008-03-21 23:52   좋아요 0 | URL
로쟈님 애호가(?)이기도 해요

비로그인 2008-11-01 11:26   좋아요 0 | URL
저는 칸딘스키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로 인해 러시아 예술을 평생 사랑할 것 같습니다. 생각난김에 두 인물의 기록들을 다시 한 번 살펴봐야겠네요~

드팀전 2008-11-01 14:58   좋아요 0 | URL
타르코프스키 영화는 예전에 즐겨(?)봤지요.
 
사도 바울 -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What's Up 1
알랭 바디우 지음, 현성환 옮김 / 새물결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알랭 바디우에게 사도 바울은 급진적이고 전복적인 문화 혁명가이다.흔히들 자주 하는 비교처럼 마르크스에게 레닌이 있었다면 예수에게는 바울이 있었다.레닌과 바울은 그들의 선지자가 세상에 던진 기획을 역사라는 지평 위에서 프로그램화 해낸다.

알랭 바디우는 서문에서 <사도 바울>을 통해 진리를 두고 벌어지는 지난 담론들에-거칠게 말하자면 근대와 탈근대 담론들-거리를 두며 이를 관통하는 그만의 접근법을 제안한다. '보편성'을 옹호하는 그는-스스로 '보편적 개별성'이라고 표현한다.-탈근대 철학의 메인스트림인,또한 우리 사회에도 적극적으로 반영되고 있는 '차이의 철학'에 대해 성찰적인 비판의 시선을 보낸다.흔히 말하는 '정체성의 정치'가 가진 한계를 들뢰즈가 말한 '자본의 지속적인 재영토화'작업으로 바라본다. '차이의 정치',또는 '정체성의 정치'라는 것은 다른 한편에서는 시장이 지닌 천편일률적인 특권들에 대해서 동일하게 노출될 권리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예를 들어 동성애의 권리를 인정하지만 따지고 보면 동성애자들이 원하는 것은 결혼과 가족이라는 전통적 가족제도 안으로의 가담을 인정해달라는 것에 멈춘다는 것이다.(바디우가 이들이 요구하는 동일한 권리에 대해 부정한다거나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바디우는 실제로 이주노동자 문제에 현실적 개입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바디우는 이제 자문한다

이 모든 것(화폐적 동질성,정체성 요구,자본의 추상적 보편성,부분 집합의 이익을 위한 특수성)과 단절하는 가운데 ...보편적 개별성의 조건은 무엇인가?

그는 그리스도교의 탄압자 '사울'에서  '바울'이 된 인물을 쫓아가면서 이 시대를 변혁할 수 있는 고정점으로 '보편성'의 가치를 역설하는 것이다.

2장에서 바디우는 바울에 대해 개략적인 설명을 시작한다.여기서 참고가 되는 성경 편들은  <고린도서>,<로마서>등이다.바디우는 뒤에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정전은 <4복음서>가 아니라 바울의 글들이라고 말한다.바디우는 바울을 통해 '진리'에 선행하는 '사건의 철학'을 말한다.그가 바라보는 진리라는 것은 '하나의 절대성'이라는 지평에서 보자면 '상대성'의 철학이다.그는 '진리 공정'이라는 말로 진리가 구성되어지는 방식을 말한다. 진리는 '사건에 대한 기입'이라고 말할 정도이다.(사실 사건과 진리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조금 더 꼼꼼히 살펴봐야할 필요가 있다.)

 어쨋거나 내가 이해하는 수준에서 바디우는 '진리'라는 것에 어떤 정체성도 어떤 법도 형성하지 않는 중심없는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그렇다면 그의 시선이 모아지고 있는 '사건'과 '바울'의 양자 관계에서 '보편주의'를 끌어 내기 위한 '사건'은 무엇인가?  바울에게 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그 사건 이외에 복음서에도 수시로 등장하는 각 종 기적,치료,예언 등등은 아무런 상관없는 사건들이다. 예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다.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라는 존재 자체도 '사건'의 측면에서는 무관한 존재일 수도 있다.

'부활'이라는 사건을 보물로 간직한 바울에게 싸워야할 두 가지 담론들이 등장한다.하나는 유대인을 중심으로 한-예수의 제자들을 포함한-율법 중심의 유대-그리스도인들이다.다른 하나는 바울을 비웃고 말았던 그리스의 철학자들이다.바디우는 이것을 두 가지 담론의 상징으로 설명한다.율법은 '표징'이고 현인들은 '철학'이다.이렇게 해서 바울은 '반철학적 보편주의'의 선구적 인물로 기록되는 것이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둔 것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 전서 2장 1-5절)

 뒤에 다시 한 번 등장하지만 바울에게 '율법'은 '죽음의 형상'이었다.실재의 삶이란 것이 죽음의 편에서 바라본 삶이 되고 죽음이라는 것이 삶의 영역에 바라본 형상이 되었다.이것을 원래의 자리로 복원시키기 위해서는 정초적인 '사건'이 요구된다.실제로 바울은 공의회를 통해 유대민족의 종교로 멈추게 될 그리스도교를 보편성에 입각해서 세계화시키는 이론적 지평을 만들어 낸다.

3장에서 바디우는 역사적 상황들-유대인의 봉기,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을 이야기하며 그리스도교의 중심이 동방의 한 도시에서 제국의 중심(로마)로 이전 되는 과정을 말한다.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건설을 보편적이고 탈중심적인 시각으로 분석하려했던 바울의 기획과 궤를 같이 하는 현상이었다.그러면서 바디우는 바울의 사회적 불평등,제국주의.노예제도에 기반한 사회 모델을 혁명적으로 타파하는 혁명가로서 이해한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를 언급한다.(영화 공부를 하다보면 꼭 거치게 되는 사람이다.) 파솔리니는 바울의 현재성에 주목을 한 사람 중에 한명이다.파솔리니는 코뮌주의와 혁명가의 문제,좀 더 쉽게 말하면 혁명의 순수성,성스러움과 이후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바울을 투사해서 설명한다.그에게 바울이 제 3인터네셔널의 투쟁가로 재현되는 것이다.그는 성경속에서 바울에 대한 배반과 체포가 결국 성스러움이 갖는 필연적 내부 배반운동으로 보고 있다.파솔리니는 바울의 텍스트를 통해 현실적 지형도 아래서 생기는 혁명과 당의 관계 설정 그리고 그 존재론적 파국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다.

4장에서 바디우는 바울이 맞선던 유대담론과 그리스담론을 다시 언급한다.이 둘 다가 지배의 동일한 현상이라고 말한다.그는 이것을 '아버지'의 담론들이라고 규정한다.그렇다면 바울이 추구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상징되는 '아들'의 담론이다.바울에게 있어 삼위일체같은 교부들의 이론과 파스칼식 논리적 종교해명은 무의미하다.그에게는 '단절'이 더 긴급하다.극단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과의 단절을 말하지는 않지만 바울은 '전복적'인 아들의 '사건'에 더 큰 비중을 둔다.또한 이를 증명하려는 시도를 무화하면서-바디우는 그것을 '기적의 담론'이라고 하여 유대담론,그리스담론,그리스도교담론에 이어 제 4의 담론으로 설명한다- 증거의 부재,주체의 허약함을 최상의 증거로 제시한다.

바울의 전복적인 특징은 바디우의 말로 압축된다.

"모든 진리는 파괴될 수 없는 젊음으로 특징지어진다." 바디우는 여기서 바울의 최대 공격자 중 한사람이었던 니체를 연상한다.니체가 말하던 그 단절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획이 바울의 그것과 닮아 있다는 것이다.이외에도 바디우는 바울과 니체의 몇 가지 공통점을 제시한다.하지만 니체는 바울을 물고 늘어졌다.바디우는 그가 바울을 왜곡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적이 아닌 경쟁자로서의 질투라고 말한다.

바울에게 사건은 단절이자 또한 은총의 형식을 띄고 있었다.여기서 바울은 사건을 통한 단절을 정식화해내는 문구 제시한다. "여러분은 율법하에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으므로(로마서 6장 14절)" 바디우는 사간을 통한 단절이 주체를 항상 ".....이 아니라 .....임'의 분열된 형태로 구성하며 이런 형식이 보편성을 담보한다고 주장한다.이것은 전자가 폐쇄적인 특수성들에 대해 잠재적 해체를 가하고 후자가 사건에 의해 열린 이 과정의 주체들을 동역자로 호명하고 있기 때문이다.바디우에게 주체는 자기적 주체는 없다.하지만 사분오열된 주체가 그 사분오렬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들게 하지않는 것이 그의 미덕으로 보인다.그의 주체는 분열을 통해 다시 보편성을 확보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바울의 확신은 일자의 표징은 모두에 대해 있는 것,다시 말해 예외가 없음이라는 것이다...이는 하나의 말 건넴의 구조에 기반해 이해되어야한다.일자는 그 말 건네는 주체들 안에 어떤 차이도 기입하지 않는다.이것이 바로 사건 속에 뿌리를 두고 있는 보편성의 준칙이다...일자에 대한 보편적이고 탈 율법적인 이해를 통해 주체에 대한 모든 특수적이거나 공동체적인 병합 그리고 주체의 구성적 분열에 대한 모든 법적,계약론적인 접근을 해체한다.주체를 정초하는 것은 주체가 당연히 받아야할 것이 아니다.왜나햐만 주체의 정립은 하나의 근원적인 우연 속에서 선언되는 것과 연결된다. 

이제 바울의 가장 유명한 말이 등장할 차례이다."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뭐 이런 것 성경 구절 말이다.바디우는 이 단어를 조금 다르게 번역하는데 믿음,희망,자애. 좀더 주체론적 접근을 위해서 확신,확신성,사랑이라고 말한다.바디우는 사건을 진리에 선행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선언하는 것과 사건에 대한 충실성을 강조한다.이런 차원에서 믿음이라는 것이 참된 것에 대한 열림그리고 그에 대한 선언이다.소망(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충실성의 근간이 되는 준칙의 확고부동함이다.그리고 사랑은 이런 과정이 보편화되어 실질성을 얻는 것이다.어떻게 보면 주체화를 설명하는 길이기도 하지만 '대중 노선'처럼 읽히기도 한다.

바디우는 책 말미에서 '은총의 유물론'이라고 해서 사건이 일어나고 그것이 주체화 하는 과정을 몇가지로 정리한다.각 문장들이 환유적이고 또한 함의한 바가 깊기때문에 각 선언만 때어놓고 보면 이해가 안될 가능성이 높다.

1.일자는 모두에 대해 있으며 율번이 아니라 사건으로 부터 유래한다.

2.율법과는 관련이 없는 우연으로서의 사건만이 그 자체를 넘어서는 다양성,즉 유한성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도래하게 할 수 있다.

3.율법은 주체를 사유의 무력함으로 구성한다.

4.구원의 문자,또는 진리 공정을 위한 문자적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5.주체는 진리의 보편적 말 건넴-자신이 이러한 과정을 지탱한다-을 문자적이지 않은 법으로 삼는다.

6.어떤 진리에 힘을 주고 그에 대한 주체적 충실성을 결정하는 것은 사건에 의해 정립된 자신과의 관계가 모두에게 말 건네는 것이지 그러한 관계 자체가 아니다.

7.진리의 주체적 과장은 그러한 진리에 대한 사랑과 동일한 것이다.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전투적 실재는 그와 같은 진리를 구성하는 모두에 대한 말 건넴이다.보편주의의 물질성은 모든 진리의 전투적 차원이다.

8.자체의 지속이라는 명령과 관련해 주체는 그를 구성하는 사건의 일어남이 보편적이며 따라서 그에게 실질적으로 관여한다는 사실을 통해 자신을 지탱할 수 있다.개별성은 보편성이 존재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그렇지 않다면 진리를 벗어난 특수자만이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바디우는 바울을 보편주의의 혁명가로 설명하고 있다.하지만 바울의 보편성은 차별성과 논쟁하는 보편성이 아니다.오히려 바울은 전술적으로 '로마에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순응자의 모습을 보이기도한다.혁명의 대중주의 전술과도 유사하다.마오주의자들이 외쳤던 농민속으로 처럼 말이다.바디우가 말하고자하는 '보편적 개별성'이라는 것은 결국 각자를 각자로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차이들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차이와 관습을 횡당하고 초월하는 것이다.대신 차이들을 그대로 두고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런 대목이 바울을 종파주의적 도덕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게 했다고 한다.이것은 이 시대 진보임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자성할 수 있는 질문이 된다.'울분의 자본주의 비판'에 대한 내 질문이기도 하다.폭발시키고 찢어버리고 분쇄시켜버리고 싶은 자본주의.천박하고 경박하며 식민적인 한국 자본주의...이런 배설형 진보가 쾌변용 이외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궁금하다.그런 성토의 자본주의 비판으로 변비가 풀린다면 의미가 있겠으나 정말 '자본주의'에 어떤식이라도 손을 대고 싶다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디우는 보편/차이의 관계 정립에 대해 이런 말로 끝을 맺는다.

'바울의 시도는 보편 지향적인 평등주의가 불평등한 규범의 가역성을 통과하도록 하는데 있다....남자든 여자든 유대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중요한 것은 차이들이 그들에게 은총처럼 도래한 보편성을 담지하는 것이다.또 거꾸로 보편성 그 자체는 차이들 안에서 그들에게 도래하는 보편성을 담지할 능력이 있음을 인정함으로써만 자신의 현실성을 사실로 확인할 수 있다.

피리나 거문고같이 생명이 없는 악기도 음색이 각각 다른 소리를 내지 않으면 피리를 부는 것인지 수금을 타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고린도 전서 14장 7절)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 고흐 효과 - 무명 화가에서 문화 아이콘으로
나탈리 에니크 지음, 이세진 옮김 / 아트북스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겨울 바람은 차가왔다.귀없는 남자의 그림을 보기 위해 귀 달린 남녀노소는 양 손으로 귀를 가려야만 했다.친절한 매표소 직원의 말을 되뇌이며 시계를 줄 곧 봐야 했다.

 "지금 티켓팅하시면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미술관 입구에 다가가는 느린 움직임이라도 없었다면 언덕 위의 1시간은 고문이었을 것이다.고흐를 만나는 길은 고행의 길이었다.사행천의 물줄기처럼 S자로 이어진 도상에서 이런 키치적인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고흐를 죽인 사람은 누구인가?-그리고 왜 사람들은 고흐에 열광하는가?"

전시회장은 거의 시장이었다.한 걸음 물러서서 볼 수 밖에 없었다.다행이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온 키 작은 아이들이 많아서 뒷줄의 불이익은 그다지 없었다.나는 고흐의 몇 몇 작품 앞에서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그 중에는 고흐의 자화상도 있었다.잠시 동안 그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나누었다.(이게 나름 뭐 좀 달라 보인다고 했는데..퍽이나 키치적인 발상이다.이 책에서는 작품을 의인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당신을 외면한 다수의 사람과 지금 당신에게 열광하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불쌍한 고흐씨"

나탈리 에니히의 <반 고흐 효과>를 읽고 나는 내가 상당히 키치적인 방식으로-마치 나는 조금 더 세련된 듯 했지만 결국엔 별반 다를 것 없는-고흐 전시회를 보고 왔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또한 긴 줄 위에서 서있으며 했던 질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답을 얻을 수 있었다.내가 했던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질문,'고흐의 사회적 살해'에 대해서는 유명한 고흐 평론에서 아르토가 이미 던졌던 문제였을 뿐이다.또한 이미 한 세기 이상 고흐의 죽음을 둘러싼 공론으로 포장된 것이었다.고흐 전시회가 내게 준 것은 사실 고흐의 그림 보다 그런 '질문'이었고 이 책을 만날 수 있게 해준 행운이었다.만약 내가 이 책을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 질문들에 대해 며칠 끙끙거리다 잊었을 것이다.

"샤갈전의 열기와 고흐전의 광분을 '고전 작품의 위대함',또는 '문화 불모지의 한계,대중들의 패거리 정신' 이런 이항적이고 편리한 구분 말고 설명할 길은 없을까?" 하면서 말이다.

나탈리 에니히의 <반고흐 효과>는 고흐의 작품을 미학적으로 설명한다거나 고흐의 미술사적 위치를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이것은 아주 잘 씌여진 예술 사회학책이다.미시적이고 분석적이며 또한 논리적이다

이 책이 '고흐 현상'에 대해 던지는 애초의 질문은 길 위에서 했던 내가 했던 질문과 유사하다.저자는 고흐의 작품과 고흐라는 인간이 두가지 차원에서 어떻게 신화의 이름을 얻는지를 하나씩 설명해 나간다.몇 가지 고흐를 둘러싼 상식적인 생각들을 에니히는 '신화의 모티프'라는 개념을 들어 이야기한다.가장 대표적인 것이 '몰이해의 모티프'이다.

누구나 고흐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모티프가 바로 그것이다.그는 동시대에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그의 작품은 물론이고 인간 고흐 역시 동시대의 완전한 소외물이었다.즉 '몰이해'되었다는 것.고흐를 위한 최고의 레퀴엠이라고 할 만한 돈 맥클린의 <빈센트>에도 그런 말이 나온다."나는 이제 당신이 무엇을 말하려는 지 알 것 같아요...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지요.어떻게 듣는지도 몰랐지요.하지만 이제는 귀를 기울일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이 곡을 참 좋아하다.하지만 이 곡이야말로 고흐에 대해 축성된 가장 전형적인 신화의 복음성가이다.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고흐에 대한  몰이해는 정상적이고 상식적이다.물론 그가 동시대에 궁핍했고 그의 작품은 문짝으로 쓰일정도로 천대받았지만 그것은 고흐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었다.고흐는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고 그 기간은 불과 10년이다.그 때나 지금이나 젊은 작가에게 당대 대중이 시선을 두는 일은 극히 드물다.만약 고흐가 60-70살까지 살았다면 고흐의 작품은 당대 인정을 받았을 수도 있다.물론 대신 지금처럼 순례객을 몰고 다니는 예술의 성인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겠지만 말이다.또한 지금처럼 한 작품이 천문학적 액수에 팔리지도 않았을 것이다.최근에 경매에 오른 작품이 800억원이라나.....

고흐 당대와 사후 오래지나지 않아 평단에서는 고흐 작품에 관심을 갖은 전문가층들이 있었다.물론 그들에게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고흐의 독창성이 그들을 매료시켰는데 그것은 전통을 거부하는 모더니스트 비평가와 반아카데미 작가의 밀월 같은 것이다.(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떠올려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들라쿠르와와 쿠르베의 '사실주의'부터 시작된 전통/현대성의 흐름에서 고흐는 '앙뎅팡당'계열로 포함된다.)

'몰이해'의 모티브와 연동되면서도 중요한 개념이 '죄의식의 모티프'이다.저작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보자.

"예술의 공공선에 이바지하기 위해 독보적인 한 인간이 치른 대가는 공동체의 입장에서 보면 빚에 해당한다.그 빚은 작품의 위대함은 물론 극단적인 희생의 성격 때문에 더욱 과중하게 여겨진다".이것은 시간을 거쳐서 대속되어야 하는 인류의 죄의식 같은 것이다.돈 맥클린의 <빈센트>의 주를 이루고 있는 정서.그리고 반 고흐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가련함 같은 것들이 대속을 위한 토대가 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이 죄의식의 형태는 논리적으로 집단적일 수 없지만 사실상 통상적 생각이라는 집단성을 띠게 된다.이 통상적 생각 혹은 상식이 특별히 고착된 지점에 반 고흐를 놓을 수 있으리라"

 물론 이런 대속에는 증여라는 과정이 필수적이다.고흐의 증여와 인류의 대속 사이에는 시간차이가 발생한다.그리고 이 대속은 만족될 수 없다.

또한 작가는 인간 고흐를 구성하는 과정에 '종교적 모티프'의 이용을 지적한다.그는 고흐 사후 전기작가와 평론가들이 13세기 성인전의 모티프와 유사한 방식으로 고흐의 삶을 목적론적으로 맞추어나가기 시작한다고 말한다.스스로 생각하는 고흐의 이미지상과 이런 단어들 사이의 유사성을 따져본다면 저자의 지적에 수긍할 수 밖에 없다. "도덕적 순결함.비범한 인물,소명의식,고립,반순응성,금욕,실제적 삶의 부적응,자기희생,순교" ...그리스도적인 성인과 고흐의 이미지는 원숭이와 인간의 유전자만큼이나 유사하다.

"소명과 금욕의 성화자라는 모티프와 극단적인 죽음의 순교자라는 모티프에 반고흐의 전설적인 생애에 투사된 그리스도의 모습이 덧붙여진다."

이것은 예술적 탁월성이 종교적 형태의 위대함으로 폭넓게 유도되는 방식을 보여준다.또한 고흐 효과라는 범주가 예술의 영역에서 윤리와 종교의 영역으로 전도되는 과정을 예시하고 있기도 하다.저자는 반 고흐가 현대 예술사에서 위대한 순교자의 존재를 최초로 보여준다라고 말한다.고흐의 사례는 이제 소급적으로 예술가들에게 적용된다.그래서 '고흐 이전과 고흐 이후'라는 말도 가능한 것이다.예를 들어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드라마에서 흔히 써먹는- 예술가의 이미지.가난하고 힘들지만 맑은 영혼과 자기 완결성의 소명을 띤 이런 예술가들이 실제 사회 영역에서 자기 자리를 얻을 수 터전이 마련된다.

이 책은 예술 사회학 책 답게 여러가지 영역을 넘나든다.예를 들어 고흐의 광기와 작품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심리학과 미학사이를 오고 간다.고흐의 광기를 바라보는 시선,작품과의 연관성들이 시간을 거치면서 어떻게 구성되어 지는 지를 흥미롭게 설명한다.아마 최근의 분위기는 정신의학적으로는 고흐가 완전히 미친 것은 아니다..왔다 갔다 했다...정도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왜 그렇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지를 이 책은 또 설명한다.고흐가 완전 미쳐버린다면 고흐의 그림은 그저 미치광이의 그림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그렇게 되면 그림의 후광은 없다.결국 고흐의 신화는 정신적 질환에도 불구하고 정신질환을 극복하여 인류 정신의 완성이라는 영광어린 스토리로 마감되어야만 한다.저자는 이 과정을 이렇게 말한다.

"광기가설로 그를 공통의 인류 밖으로 추방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희생 가설로 그를 영웅시하며 인류공동체 안에 다시 편입시켰던 것이다...거의 독보성은 정상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는 탈인간화였다.그러나 그의 광기는 예술을 위해 치른 대가였으므로 재인간화가 가능했다." 

이 책은 이 외에도 반 고흐를 둘러싸고 사후 지금까지 발생했던 현상들을 종합한다.그리고 '일탈,혁신,화해,순례'라는 큰 도구를 가지고 그가 어떻게 전설적인 반 고흐가 되는지를 그려내고 있다.하지만 이 책이 고흐를 작품을 깍아내리거나 그의 독창성을 폄하하는 것을 목적으로 씌여 지진 않았다.저자는 고흐의 예술적 독창성과 그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을 무턱대고 매도하지는 않는다.프랑스같은 곳에서는 고흐의 마을로 찾아가는 순례여행도 있다고 하니 사실 '군중성'이라고 더 매도할 수도 잇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반 고흐 효과>를  읽고 나서 오히려 고흐가 더 사랑스럽다.또한 '고흐를 죽인 사람과 길게 늘어선 대중 사이의 괴리감' 역시 많이 해소되었다.고흐에 대한 맹목적 애정이나 대중에 대한 맹목적 부정은 그런 괴리감을 더욱 키울뿐이다.또한 대중의 잘못이 아닌 것을 대중에게 전가하는 것 역시 같은 우를 범할 수도 있다.

<반 고흐 효과>는 좋은 책이다.분석의 흐름 역시 훌륭하며 논리적이다.문장이 이해가지 않는 어려운 대목들이 중간 중간 많기는 하다.원문자체가 그다지 쉽지 않았다고 하니 번역자만을 욕할 수는 없을 것이다.중간 중간 글을 놓칠 수 밖에 없는 문장들은 2% 아쉬움으로 남기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드워드 사이드의 음악은 사회적이다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최유준 옮김 / 이다미디어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출근길에 슈베르트의 가곡 <음악에>를 들었다.자동차 앞 유리에 어두컴컴한 교실 안의 풍경이 맺혔다.대학에서 트럼펫을 전공했던 스타일리쉬한 음악 선생과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유일한 음대 지망생인 친구도 떠올랐다..

오늘은 4년 마다 한 번 찾아오는 겨울의 꼬리.봄의 앞섶이다.남쪽에도 아직 꽃 소식은 멀다.하지만 곧 아가의 입김같은 따뜻한 바람이 스칠 것이다.

슈베르트와 함께 봄이 온다..."아름답고 즐거우 ..운..으 으 마 악 이여"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음악통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그가 한 때 줄리어드에서 공부를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음악을 하기에 자신이 너무 이성적이었다는 퇴교 사유가 웃음을 자아낸다.탈식민주의의 사도 바울쯤에 해당할만한 에드워드 사이드가 쓴 이 책 <음악은 사회적이다>는 '선험적'이라고 믿는 '음악예술'의 성격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먼저 사이드가 다루고 있는 음악이 특정 시기에, 특정 장소의 음악 임을 전제해야 한다.그것은 흔히 알고 있는 '클래식', 서구 고전음악이다.(그러므로 이하에 나오는 '음악'은 모두 그 '클래식'음악이다.)

음악은 사회와 무관한 자율적 존재라고 하는 견해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왔다.다른 예술 장르에서도 대중들에게 이같은 '예술 지상주의','순수예술'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잘 먹힌다.그런데 음악은 조금 더 심하다.예를 들어 문학이나 영화 만 해도 텍스트 분석이라는 이름으로 이데올로기적 접근,정신분석학적 접근 등등 이리 찢고 저리 찢어 본다.그런데 음악은 이런 텍스트 분석에서 조금 더 벗어나 있다.여기에는 음악이 예술 장르로 갖는 특성도 한 몫한다.음악은 가장 절대적 형식의 기표예술이며 시간 예술이다.음표 하나 하나는 사실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다.이런 기표들의 연쇄가 예술적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또한 대상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는 '추상의 순수'가 있다.베토벤의 '합창'에서 '인류애'를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찾을 것인가?  "딴딴딴 따아" 하는 4음표가 과연 운명의 노크소리인가? 아예 표제 조차 없으면 도대체 그 음표들이 어떤 걸 이야기하는지 어떡게 알까? 절대음악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어떻게 규정하겠는가? 비트겐슈타인 같은 사람도 이런 말도 했다. "음악이 내게 말하는 것을 말로 표현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음악이 미학적으로 갖고 있는 특수성은 흔히 음악을 사회와 분리시키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여기에 사이드는 '전문성'이란 것이 더해져 음악의 자기충족성을 만족시켜 버린다고 말한다.고전 음악의 작곡가,연주가,음악학자들은 클래식이란 음악을 전문가의 영역으로 포섭해버렸다.음악은 그렇게 저 멀리 북극성처럼 찬연하게 빛나는 무엇으로 남아있게 된다.에드워드 사이드는 아마추어음악학자로서 '인문학'이라는 사다리로 음악을 지상으로 내려오게 하려고 애쓴다.그가 가장 혐오하는 태도는 음악을 마치 선험적인 신처럼 숭배하는 태도이다.(불행하게도 음악에 미친자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꽤나 많다.음악 안에 온 우주가 있다고 믿는 광신도들 말이다.)

그가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음악이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사이드는 '세련'이라는 말로 이 과정을 설명한다.그가 보기에 지난 세기 동안 음악과 사회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가장 예리하게 들어낸 사람은 아도르노이다.그는 아도르노의 음악론을 수용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비판을 가한다.아도르노의 비관적 음악관과 대중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세계관을 비판하고 종족음악의 분석을 지지한다거나 대중음악 또는 음악의 산업적 측면까지 내포하는 작업들을 긍정한다.대표적인 사람이 토스카니니와 글렌 굴드이다.1장에서 이들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1장은 주로 퍼포먼스라는 측면에서 특이한 경험으로서의 콘서트를 다루고 있다.퍼포먼스라는 것 자체가 이미 공적 영역에 속한 부분이다.이것은 이미 일상과 사회로부터 단절된 경험을 포함한다.글렌 굴드는 이런 한계 속에 있는 음악과 음악가의 정체성을 외부로 끌어 내는 작업을 기이한 방식으로 표현해냈다.그는 피아노 콘서트를 일찌감치 접고 다른 매체를 통한 음악만들기 작업에 전념한다.레코딩이나 영화 등 비극장적이고 반미학적인 방식을 동원해서 급진적인 방식으로 사회와의 복원을 꾀한다.주어진 것만 붙들고 연마하는 수도자적인 연주가를 스스로 거부하고 예술의 지평을 전복하는 예술가로의 실험을 죽는 날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2장에서는 '순수/정치'사이의 케케묵은 논쟁이 재현된다.폴 드망이라는 학자에 대한 평가가 등장한다.과거 친나치 전력이 있었던 학자였다.이런 논쟁은 해방 이후 우리 예술계에서도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낯설지 않다.(물론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해방이후 거의 논의되지 않다가 최근 몇 십년 사이에 많이 논의된것이다.) 이런 문제가 나오면 항상 등장하는 작곡가가 바로 바그너이다.히틀러는 바그너 매니아였다. 또한 그의 음악은 게르만민족의 우수성을 알리는 프로파간다송으로 제3제국에서 즐겨 사용되었다.바그너라는 인물은 아주 복잡한 인간이라서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 쉽지 않다.이런 것 저런 것 다 떼어내고 분명 인류가 만들어낸 천재 중에 한 명일 것이다.예술가로서 그의 포부도 한 시대의 흐름을 뒤흔들 만큼 거창한 것이었다.사이드의 결론은 지극히 상식적이다.어느 한 쪽으로 폄하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그의 예술적인 측면만 살펴도 곤란하고 또한 정치적인 모습만 봐도 안된다는 것이다.그렇지만 사이드는 바그너의 음악과 텍스트가 담고 있는-그는 주로 <반지>,<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언급한다- 반유대주의,반외국주의,제국주의의 맹아가 있음을 명백히 지적한다.사이드는 '음악의 침범'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즉 음악이 관련되는 여러 영역-가족,국가.계급,남녀관계,민족문제 등 공적 영역-에 끊임없이 넘나들었다는 것이다.앞에 예를 든 바그너가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다.(베토벤 이전의 작곡가들 역시 바그너와는 다른 형태로 사회적 관계에 복속되어 있었다.)사이드는 바그너를 통해 서구의 전체화 경향에 대해 말한다.이는 궁극적으로 그의 본영역인 '서양중심주의'에 대해 한번 짚고 넘어가겠다는 의지이다.바그너의 반외국주의는 결국 타자에 대한 공포,그리고 지배를 숨기고 있다.이것은 그가 <오리엔탈리즘>에서 다루었던 주제이다.마이클 p 스타인버그의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의미>를 재인용하는 사이드는 '모차르트의 음악이 독일 문화를 독일 이외의 세계에서도 공유하도록 하겠다는 잘츠부르크 민족주의적 세계시민주의의 핵심으로 작용했다'는 말을 인용한다.물론 이에 전적으로 동의할수는 없다.모든 문화라는 것이 결국은 지역성이라는 토대에 바탕을 둔 '민족문화'이기 때문이다.이것이 확산되는 과정에 분명히 부정적의미의 '민족주의'라는 혐의도 들어갈 수 있다.하지만 이것 자체를 강조하다 보면 '문화변동''문화이동'이라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워질 수 밖에 없다.물론 저자가 말한바는 '잘츠부르크페스티벌'이라는 축제가 가진 사회적인 의미라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한다.우리도 80년대 초반에 '국풍81'이라는 행사가 있지 않았던가.잘츠부르크페스티벌의 기획자 역시 애초에 그런 정치적 의미를 담았을 가능성은 농후하다.물론 이런 계보적인 접근이 현재 페스티벌의 의미와 곧바로 연결되는 것이 아님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사이드는 여기서 슬쩍 푸코의 권력담론에 일침을 가한다.푸코의 이론이 담고 있는 서구중심주의와 자기 반성적인 자기중심성,미적 허무주의까지 아울러 비판하게 된다.

3장은 조금 읽기가 불편하다.악보가 몇 장 등장하고 개인적인 이야기가 좀 더 많다.음악을 개인의 연상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한다.브람스의 이야기로 부터 끌어내는 음악의 연속성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이다.즉 브람스를 듣는 다는 것은 그 안에 누적된 베토벤을 연상하고 또 슈만을 그리는 작업이라는 것이다.일종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음악감상이다.사이드는 프루스트를 참고해서 '선율'이라는 개념을 등장시킨다.선율이라는 것은 작곡가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무엇이며,미적 진술의 형성에 들어가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의도된 무엇이다.사이드는 이를 '음악의 음악'이라고 말한다.그러면서 말년에 이 '음악의 음악'을 말하고자 했던 비범한 작곡가로 베토벤,브루크너,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든다.그는 소나타형식과 변주곡 형식이라는 은유를 통해서 음악의 세련을 설명한다.물론 그가 관심을 갖는 스타일은 '대위와 변주'이다.베토벤의 푸가와 변주에 대한 관심,브루크너의 동일한 반복성의 반성적이고 명상적 요소,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메타모르포젠>으로 상징되는 변주와 다양성의 종합화되는 과정들이 그것이다.처음부터 음악과 사회와의 상호연계성을 주제로 이끌어온 사이드의 강의는 이제 마지막 역에 닿는다.그것은 여러문화 실천의 통합적 다양성을 통해 세련되어지는 음악이 만들어내는 유토피아적  상황이다.

<음악은 사회적이다>는 사이드의 강의록을 보강해서 만든 책이다.전문적인 음악학자들의 책보다는 읽을 만 할지 모르지만 서양 고전음악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다면 막막할지도 모른다.도대체 글렌 굴드가 누군데...이러면 읽는데 피곤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입체감도 떨어지기 때문에 답답하기도 하고.또한 사이드의 글쓰기 방식이 직접적으로 대상을 지적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한번에 때려 잡는게 아니라 포위해서 잡는 방식이어서 논점을 잡으려면 집중도도 좀 필요하다.그리고 그의 글쓰기 탓인지 번역의 탓인지 문맥이 아름답지 못한 것들이 꽤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8-03-01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