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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 -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ㅣ What's Up 1
알랭 바디우 지음, 현성환 옮김 / 새물결 / 2008년 1월
평점 :
알랭 바디우에게 사도 바울은 급진적이고 전복적인 문화 혁명가이다.흔히들 자주 하는 비교처럼 마르크스에게 레닌이 있었다면 예수에게는 바울이 있었다.레닌과 바울은 그들의 선지자가 세상에 던진 기획을 역사라는 지평 위에서 프로그램화 해낸다.
알랭 바디우는 서문에서 <사도 바울>을 통해 진리를 두고 벌어지는 지난 담론들에-거칠게 말하자면 근대와 탈근대 담론들-거리를 두며 이를 관통하는 그만의 접근법을 제안한다. '보편성'을 옹호하는 그는-스스로 '보편적 개별성'이라고 표현한다.-탈근대 철학의 메인스트림인,또한 우리 사회에도 적극적으로 반영되고 있는 '차이의 철학'에 대해 성찰적인 비판의 시선을 보낸다.흔히 말하는 '정체성의 정치'가 가진 한계를 들뢰즈가 말한 '자본의 지속적인 재영토화'작업으로 바라본다. '차이의 정치',또는 '정체성의 정치'라는 것은 다른 한편에서는 시장이 지닌 천편일률적인 특권들에 대해서 동일하게 노출될 권리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예를 들어 동성애의 권리를 인정하지만 따지고 보면 동성애자들이 원하는 것은 결혼과 가족이라는 전통적 가족제도 안으로의 가담을 인정해달라는 것에 멈춘다는 것이다.(바디우가 이들이 요구하는 동일한 권리에 대해 부정한다거나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바디우는 실제로 이주노동자 문제에 현실적 개입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바디우는 이제 자문한다
이 모든 것(화폐적 동질성,정체성 요구,자본의 추상적 보편성,부분 집합의 이익을 위한 특수성)과 단절하는 가운데 ...보편적 개별성의 조건은 무엇인가?
그는 그리스도교의 탄압자 '사울'에서 '바울'이 된 인물을 쫓아가면서 이 시대를 변혁할 수 있는 고정점으로 '보편성'의 가치를 역설하는 것이다.
2장에서 바디우는 바울에 대해 개략적인 설명을 시작한다.여기서 참고가 되는 성경 편들은 <고린도서>,<로마서>등이다.바디우는 뒤에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정전은 <4복음서>가 아니라 바울의 글들이라고 말한다.바디우는 바울을 통해 '진리'에 선행하는 '사건의 철학'을 말한다.그가 바라보는 진리라는 것은 '하나의 절대성'이라는 지평에서 보자면 '상대성'의 철학이다.그는 '진리 공정'이라는 말로 진리가 구성되어지는 방식을 말한다. 진리는 '사건에 대한 기입'이라고 말할 정도이다.(사실 사건과 진리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조금 더 꼼꼼히 살펴봐야할 필요가 있다.)
어쨋거나 내가 이해하는 수준에서 바디우는 '진리'라는 것에 어떤 정체성도 어떤 법도 형성하지 않는 중심없는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그렇다면 그의 시선이 모아지고 있는 '사건'과 '바울'의 양자 관계에서 '보편주의'를 끌어 내기 위한 '사건'은 무엇인가? 바울에게 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그 사건 이외에 복음서에도 수시로 등장하는 각 종 기적,치료,예언 등등은 아무런 상관없는 사건들이다. 예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다.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라는 존재 자체도 '사건'의 측면에서는 무관한 존재일 수도 있다.
'부활'이라는 사건을 보물로 간직한 바울에게 싸워야할 두 가지 담론들이 등장한다.하나는 유대인을 중심으로 한-예수의 제자들을 포함한-율법 중심의 유대-그리스도인들이다.다른 하나는 바울을 비웃고 말았던 그리스의 철학자들이다.바디우는 이것을 두 가지 담론의 상징으로 설명한다.율법은 '표징'이고 현인들은 '철학'이다.이렇게 해서 바울은 '반철학적 보편주의'의 선구적 인물로 기록되는 것이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둔 것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 전서 2장 1-5절)
뒤에 다시 한 번 등장하지만 바울에게 '율법'은 '죽음의 형상'이었다.실재의 삶이란 것이 죽음의 편에서 바라본 삶이 되고 죽음이라는 것이 삶의 영역에 바라본 형상이 되었다.이것을 원래의 자리로 복원시키기 위해서는 정초적인 '사건'이 요구된다.실제로 바울은 공의회를 통해 유대민족의 종교로 멈추게 될 그리스도교를 보편성에 입각해서 세계화시키는 이론적 지평을 만들어 낸다.
3장에서 바디우는 역사적 상황들-유대인의 봉기,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을 이야기하며 그리스도교의 중심이 동방의 한 도시에서 제국의 중심(로마)로 이전 되는 과정을 말한다.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건설을 보편적이고 탈중심적인 시각으로 분석하려했던 바울의 기획과 궤를 같이 하는 현상이었다.그러면서 바디우는 바울의 사회적 불평등,제국주의.노예제도에 기반한 사회 모델을 혁명적으로 타파하는 혁명가로서 이해한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를 언급한다.(영화 공부를 하다보면 꼭 거치게 되는 사람이다.) 파솔리니는 바울의 현재성에 주목을 한 사람 중에 한명이다.파솔리니는 코뮌주의와 혁명가의 문제,좀 더 쉽게 말하면 혁명의 순수성,성스러움과 이후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바울을 투사해서 설명한다.그에게 바울이 제 3인터네셔널의 투쟁가로 재현되는 것이다.그는 성경속에서 바울에 대한 배반과 체포가 결국 성스러움이 갖는 필연적 내부 배반운동으로 보고 있다.파솔리니는 바울의 텍스트를 통해 현실적 지형도 아래서 생기는 혁명과 당의 관계 설정 그리고 그 존재론적 파국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다.
4장에서 바디우는 바울이 맞선던 유대담론과 그리스담론을 다시 언급한다.이 둘 다가 지배의 동일한 현상이라고 말한다.그는 이것을 '아버지'의 담론들이라고 규정한다.그렇다면 바울이 추구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상징되는 '아들'의 담론이다.바울에게 있어 삼위일체같은 교부들의 이론과 파스칼식 논리적 종교해명은 무의미하다.그에게는 '단절'이 더 긴급하다.극단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과의 단절을 말하지는 않지만 바울은 '전복적'인 아들의 '사건'에 더 큰 비중을 둔다.또한 이를 증명하려는 시도를 무화하면서-바디우는 그것을 '기적의 담론'이라고 하여 유대담론,그리스담론,그리스도교담론에 이어 제 4의 담론으로 설명한다- 증거의 부재,주체의 허약함을 최상의 증거로 제시한다.
바울의 전복적인 특징은 바디우의 말로 압축된다.
"모든 진리는 파괴될 수 없는 젊음으로 특징지어진다." 바디우는 여기서 바울의 최대 공격자 중 한사람이었던 니체를 연상한다.니체가 말하던 그 단절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획이 바울의 그것과 닮아 있다는 것이다.이외에도 바디우는 바울과 니체의 몇 가지 공통점을 제시한다.하지만 니체는 바울을 물고 늘어졌다.바디우는 그가 바울을 왜곡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적이 아닌 경쟁자로서의 질투라고 말한다.
바울에게 사건은 단절이자 또한 은총의 형식을 띄고 있었다.여기서 바울은 사건을 통한 단절을 정식화해내는 문구 제시한다. "여러분은 율법하에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으므로(로마서 6장 14절)" 바디우는 사간을 통한 단절이 주체를 항상 ".....이 아니라 .....임'의 분열된 형태로 구성하며 이런 형식이 보편성을 담보한다고 주장한다.이것은 전자가 폐쇄적인 특수성들에 대해 잠재적 해체를 가하고 후자가 사건에 의해 열린 이 과정의 주체들을 동역자로 호명하고 있기 때문이다.바디우에게 주체는 자기적 주체는 없다.하지만 사분오열된 주체가 그 사분오렬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들게 하지않는 것이 그의 미덕으로 보인다.그의 주체는 분열을 통해 다시 보편성을 확보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바울의 확신은 일자의 표징은 모두에 대해 있는 것,다시 말해 예외가 없음이라는 것이다...이는 하나의 말 건넴의 구조에 기반해 이해되어야한다.일자는 그 말 건네는 주체들 안에 어떤 차이도 기입하지 않는다.이것이 바로 사건 속에 뿌리를 두고 있는 보편성의 준칙이다...일자에 대한 보편적이고 탈 율법적인 이해를 통해 주체에 대한 모든 특수적이거나 공동체적인 병합 그리고 주체의 구성적 분열에 대한 모든 법적,계약론적인 접근을 해체한다.주체를 정초하는 것은 주체가 당연히 받아야할 것이 아니다.왜나햐만 주체의 정립은 하나의 근원적인 우연 속에서 선언되는 것과 연결된다.
이제 바울의 가장 유명한 말이 등장할 차례이다."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뭐 이런 것 성경 구절 말이다.바디우는 이 단어를 조금 다르게 번역하는데 믿음,희망,자애. 좀더 주체론적 접근을 위해서 확신,확신성,사랑이라고 말한다.바디우는 사건을 진리에 선행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선언하는 것과 사건에 대한 충실성을 강조한다.이런 차원에서 믿음이라는 것이 참된 것에 대한 열림그리고 그에 대한 선언이다.소망(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충실성의 근간이 되는 준칙의 확고부동함이다.그리고 사랑은 이런 과정이 보편화되어 실질성을 얻는 것이다.어떻게 보면 주체화를 설명하는 길이기도 하지만 '대중 노선'처럼 읽히기도 한다.
바디우는 책 말미에서 '은총의 유물론'이라고 해서 사건이 일어나고 그것이 주체화 하는 과정을 몇가지로 정리한다.각 문장들이 환유적이고 또한 함의한 바가 깊기때문에 각 선언만 때어놓고 보면 이해가 안될 가능성이 높다.
1.일자는 모두에 대해 있으며 율번이 아니라 사건으로 부터 유래한다.
2.율법과는 관련이 없는 우연으로서의 사건만이 그 자체를 넘어서는 다양성,즉 유한성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도래하게 할 수 있다.
3.율법은 주체를 사유의 무력함으로 구성한다.
4.구원의 문자,또는 진리 공정을 위한 문자적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5.주체는 진리의 보편적 말 건넴-자신이 이러한 과정을 지탱한다-을 문자적이지 않은 법으로 삼는다.
6.어떤 진리에 힘을 주고 그에 대한 주체적 충실성을 결정하는 것은 사건에 의해 정립된 자신과의 관계가 모두에게 말 건네는 것이지 그러한 관계 자체가 아니다.
7.진리의 주체적 과장은 그러한 진리에 대한 사랑과 동일한 것이다.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전투적 실재는 그와 같은 진리를 구성하는 모두에 대한 말 건넴이다.보편주의의 물질성은 모든 진리의 전투적 차원이다.
8.자체의 지속이라는 명령과 관련해 주체는 그를 구성하는 사건의 일어남이 보편적이며 따라서 그에게 실질적으로 관여한다는 사실을 통해 자신을 지탱할 수 있다.개별성은 보편성이 존재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그렇지 않다면 진리를 벗어난 특수자만이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바디우는 바울을 보편주의의 혁명가로 설명하고 있다.하지만 바울의 보편성은 차별성과 논쟁하는 보편성이 아니다.오히려 바울은 전술적으로 '로마에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순응자의 모습을 보이기도한다.혁명의 대중주의 전술과도 유사하다.마오주의자들이 외쳤던 농민속으로 처럼 말이다.바디우가 말하고자하는 '보편적 개별성'이라는 것은 결국 각자를 각자로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차이들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차이와 관습을 횡당하고 초월하는 것이다.대신 차이들을 그대로 두고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런 대목이 바울을 종파주의적 도덕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게 했다고 한다.이것은 이 시대 진보임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자성할 수 있는 질문이 된다.'울분의 자본주의 비판'에 대한 내 질문이기도 하다.폭발시키고 찢어버리고 분쇄시켜버리고 싶은 자본주의.천박하고 경박하며 식민적인 한국 자본주의...이런 배설형 진보가 쾌변용 이외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궁금하다.그런 성토의 자본주의 비판으로 변비가 풀린다면 의미가 있겠으나 정말 '자본주의'에 어떤식이라도 손을 대고 싶다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디우는 보편/차이의 관계 정립에 대해 이런 말로 끝을 맺는다.
'바울의 시도는 보편 지향적인 평등주의가 불평등한 규범의 가역성을 통과하도록 하는데 있다....남자든 여자든 유대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중요한 것은 차이들이 그들에게 은총처럼 도래한 보편성을 담지하는 것이다.또 거꾸로 보편성 그 자체는 차이들 안에서 그들에게 도래하는 보편성을 담지할 능력이 있음을 인정함으로써만 자신의 현실성을 사실로 확인할 수 있다.
피리나 거문고같이 생명이 없는 악기도 음색이 각각 다른 소리를 내지 않으면 피리를 부는 것인지 수금을 타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고린도 전서 14장 7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