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처리즘의 문화정치
스튜어트 홀 지음, 임영호 옮김 / 한나래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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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를 처음 보려고 했을 때 현재적 의미의 작용점은 MB정부였다. 물론 오래전 역사의 이불 속에 들어있는 추억을 다시 꺼내는게 현재 무슨 도움이 될 것이냐는 생각도 있었다. 또한 우리와 다른 정치환경 속에서 발생한 일인데 어떤 적용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처읽기'를 한 것은 30년전 영국에서 발생한 일을 그대로 가져와서 한국이라는 주형에 억지로 맞추기 위함은 아니다. '타산지석'을 '나는 그렇지 않지만 남들은 다른 산의 돌을 그대로 가져다 옮겨놓는다.'라고 이해하는 방식은 자기중심적이고 왜곡된 것이다. 러시아 혁명이든 68혁명이든 아니면 어떤 역사든 우리가 읽고 공부하는 것은 그것으로 아이디어를 얻고 성찰하려는 것이다. 결코 그것의 클론을 이 땅에 이식하려는 행동은 아니다. (일부에서 그런 이식작업으로 밥벌어 먹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의 문화정치>를 읽다보면 커다란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그것은 대처와 MB를 직접 대입하려는 유혹이다. 기본적으로 MB는 대처가 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대처가 실시한 정책과 철학의 큰 틀은 MB의 그것과 유사하다. 신자유주의, 기업하기 좋은 사회, 민영화, 복지정책의 축소 등등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처읽기'를 하다보면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자꾸 연상되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이자- 또한 희망은- MB가 대처만큼 '헤게모니적'이지 않다는것. 그만큼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여간 '대처리즘'과  MB노믹스'의 유사한 점을 중심으로 폭로성 리뷰를 쓰고 싶어지기도 한다. 나를 유혹한 방식은 그것이다. 그렇게 하면 아마 알라딘의 추천이 몇 개는 더 늘겠지만 나는 그런 유혹을 물리친다. 이유는 스튜어트 홀이 이 책에서 그람시를 경유하여 그런 기계적 대입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세와 국면'이란 것이다.  

이 책의 글들은 '철의 여인'이 몰락한 제국을 지배하던 시기에 씌여진 현장성 있는 글들이다. 때문에 후반부에가면 중복되는 느낌을 받을때도 있다. 스튜어트 홀은 먼저 대처리즘의 특성을 분석한다. 이전에 '대처읽기'에서도 몇 번 쓴 내용이어서 자세히 반복하지는 않겠다. 스튜어트 홀은 대처리즘을 두 가지의 모순적 결합체로 이해한다. '퇴행적 근대화'와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다. 앞의 것을 상징하는 구호가 '빅토리아 시대로 돌아가자'였다. 경제 이데올로기로서 신자유주의라는 개방 정책을 택하면서 내부적으로는 과거의 전통적 가치를 수호하는 도덕운동 성격을 갖는다.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은 스튜어트 홀이 풀란차스의(이 책에서는 풀랑자라고 번역한다.낯설다.) '권위주의적 국가주의'라는 개념에서 빌어온 것이다. 풀란차스의 개념은 '민주적 계급 지배의 외형들은 건드리지 않고 유지하면서, 스펙트럼에서 강제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강제/동의의 새로운 조합'(p300) 을 말한다. 스튜어트 홀은 이 개념에 몇 가지 국면적 비판을 가하고 난 이후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authoritarian populism)이란 용어를 만든다.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대처리즘을 '헤게모니 전략 프로젝트'로 이해한것이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튜어트 홀의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선 이해가 필요하다. 홀은 '이데올로기 간의 인정투쟁과 헤게모니를 얻는 과정'을 (광의의)정치로 본다. 즉 대처는 단지 집권을 하고, 신자유주의를 영국사회에 이식하는 것에만 목적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처와 당시 집권 세력의 꿈은 그것보다 원대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영국의 재구성', '상식의 재구성'이다. '대처리짐의 역사적 프로젝트는 정치지형의 재구성,재정의 하고,정치 세력들 간의 균형을 바꾸어 놓으며,새로운 종류의 대중적 상식을 만들어냄으로써 이를 통해 시장,사적,소유적,경쟁적, '인간/남성'이 미래에 어울리는 유일한 방식들이 되도록 하는 일이다.(p397 )  이를 위해 대처는 아주 긴 시간동안 그리고 집요하게 이 문제를 추진해왔다. 그리고 대처의 집권기동안 영국은 어떤 형태로든 변한다. 이제 그 변화는 좌파든 우파든 현실로 인정하고 갈 수 밖에 없는 토대가 되어 버린다. 대처 후 블레어의 동당은 상당부분 대처리즘 하의 노동당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된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스튜어트 홀의 기본적인 목적은 '좌파의 갱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홀의 작업은 대처가 숙성할 수 있었던 영국 사회의 토양과 노동당 내부와 좌파의 경직성에 대해 돋보기를 들이덴다.  

영국은 전후 '조합주의'가 하나의 사회적 상식으로 자리잡았다. 보수당이든 노동당이든 기본적으로 정도는 나르지만 케인스주의라는 휘장아래 손을 잡았다. 문제는 노동자를 대표한다는 노동당의 이념이 '대중'으로 부터 멀어진 '의회주의'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사회민주주의에는 파비안주의의 흐름이 강했다. 파비안주의는 그람시가 말한 위로부터의 혁명 즉 '수동혁명'의 변형판이다. 결국 노동당은 정도는 다르지만 현실 사회주의가 빠졌던 가장 큰 함정인 '국가주의'에 함몰되고 만다. 변화하는 사회구성체의 성격을 외면한 노동당의 국가주의는 '관료제'성격을 띠게 된다. 여기에는 당연히 비효율의 문제와 정책집행기관과 대중 사이의 괴리가 발생한다. 대처는 이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집단주의'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개인의 힘'을 강조하는 '자유'의 가치를 가지고 대중들의 상식을 장악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대처는 노동당 보다 오히려 더 그람시의 '블록' 개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노동당이 경제주의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했다고 홀은 지적한다. 즉 '노동계급=노동당' 이런식으로 생각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정책의 집행방식 역시 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홀은 -계급을 부정하진 않지만-그람시를 인용하여 여러가지 욕망과 이해의 상관관계가 불균형하게 규합되는 '역사적 블럭'을 대입한다. (가끔 분기탱천한 이런 류의 글을 본다.  왜 '계급투표'를 하지 않지? 답답하네...라는 식의 댓글들 말이다. 대개 전통좌파의 설명방식은(또는 계급 개념에 별 생각 없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들 조차) '대중들이 스스로 계급의식이 부족해서.또는 지배집단이 헤게모니작업을 통해 그들이 올바른 생각을 갖는데 방해를 하고 있기때문에..라는 식이다. 그러니까 '거품'을 물수 밖에 없다. 물론 그 지적이 전혀 거짓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계급'문제를 절대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왜 다른 계급에 투표하는지도 이해하기 힘들다. 사실 좌파들이 그람시의 블럭개념을 모를이 없다. 그런데 그런 대답을 하는 것은 지키고 싶은 다른 무언가에 대한 욕망때문이다.물론 이는 내가 가진 '비본질주의적'입장에서 하는 말일 뿐이다.) 노동당이 전통적 좌파의 중심인 남성중심의 노동자 지지층에 기댄 반면 대처는 이미지 표상의 선두에 '소규모 자영업자들'을 내세운다. 대처 스스로 그런 집안 출신이었기때문에 누구보다 강한 흡입력이 있다. 그리고 대처는-가장 능했던 방식인데-맥락의 단순화와 부정적 극단화를 통한 개념의 재배치구도로 만들어낸다. 즉 나른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며 국가의 틀에서 안주하고 파업이나 하려는 노동자들과 맘모스처럼 거대해진 국가적 기업들 속에서 자기의 가정과 성공,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소규모 자영업자들. 이런 식의 대결구도 말이다.  말이 안되는 이데올로기적 장난질이다. 그런데 이 안에는 일단의 진실이 있고 물질화하기 쉬운 대중 이미지를 만든다. 결국 이런 구도가 만들어지는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어..어..하다' 가 끌려가는 것이다.대중들과 좌파들은 이런 대처의 작업에 속수무책이었다.  

물론 스튜어트 홀의 이론들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이 책에서는 그런 비판에 대한 스튜어트 홀의 반비판도 만날 수 있다. 홀에 대한 비판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은 그가 '이데올로기 문제'를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것, 계급 문제에 대해 흐리멍텅한 태도를 취했다는 것, 대처에게 있지도 않은 어떤 일관성을 부여했다는 것 등등이다. 엘린 메이신즈 우드의 <계급으로부터의 후퇴>에서는 NTS, 즉 '뉴 트루 소셜리즘'이라고 해서 '신사회운동가'로서 스튜어트 홀을 직접 언급하며 '전통적 좌파'시각에서 비판하기도 한다. 물론 이 비판은 스튜어트 홀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문화연구를 비롯해서 68년 이후 유럽 좌파내에서 힘을 받은 '신좌파'들에 대한 성찰적 비판이다. 

<대처리즘의 문화정치>는 2,30여년전에 씌여진 글이다. 앞서 말했듯이 상이한 정치적 토대와 불균등한 자본주의 발전 국면에서 그의 논의를 그대로 이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에는 그런 국면적인 문제를 제외하고도 꽤나 설득력있는 아이디어들을 만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자유/평등이냐 묻는 질문등에 대해서와 같은...뒤에 설명하자.) 스튜어트 홀이 좌파의 재구성,진보의 재구성을 위해 제안하는 말은 현재의 우리가 보기엔 어느 정도 통속적인 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의미한 것은 이것이 제대로 실천해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선 그는 일단의 세계사적 변화의 길들을 정확히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대처리즘에게도 그가 일단의 진실이 있다고 말했다면 대처는 그 길목의 어떤 지점들에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는 좌파가 '보증받은 사회주의'를 버릴 것을 요구한다. 이어서 '급진적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하라고 주문한다. 마르크스의 '사회혁명'으로서의 사회주의를 환기시켜야 한다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좌파의 '국가주의'에 맞서서 오히려 '국가'에서 사회로의 이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노동자 계급 중심성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소수계층을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등이다. 결국 좌파의 성공을 위해서는 '새로운 종류의 역사적 블럭'들을 만드는 일이 우선이고 그것은 다양한 욕망의 결을 따라 이를 통합해낼 수 있는 정치의 역능을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좌파는 스스로의 '용어'를 가져야 한다. 이 용어들은 대중들의 상식에 바탕을 두고,또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 나갈 비전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 좌파에게 부족한 것은 결국 '능동성' 이다. 반대는 반대로서 훌륭한 가치이지만 생산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대중은 생산의 정치를 원한다.  

P.S) 가끔 '자유/평등' 중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이 질문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도덕 교과서 '더 생각해볼 문제'에도 나오는 중요한 문제이다. 이런 질문은 연원도 깊고 논의도 심도 있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철학에서 '자유주의/공동체주의'도 따지고 보면 이런 근간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사회주의도 그런 문제에 대답하는 한가지 형식이다. 그런데 이런 본질적인 질문을 받으면 좀 난감하다. 왜냐하면 질문이 어떤 '선택'을 요구하고 있기때문이다. 대처가 가장 즐겨쓰는 방식이 일면의 진실을 극단화하여 배열하는 '선택요구'이다. 나는 예전에 이런 문제들에 대한 돌파구로서 지젝이 '반유태주의'에 대해 말한 '질문의 거부'하는 방식이 유효하다고 말했다. 이런 질문 자체는 질문으로서 의미가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이데올로기적 배열에 의해 구획시켜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즉 '자유'를 선택하면 '자유주의자=민주주의자' '평등'을 선택하면 '공동체주의=(확장하면)사회주의' 라는 식이다.  스튜어트 홀은 대처가 '자유'의 이념을 어떻게 도용하는지 보여준다. 

 '자유 이념의 특정한 버전(신자유주의에 해당)을 전유하고 다른 반동적인 이념들과 연결시킴으로써 하나의 전체적인 철학을 만들어 우파의 강령과 세력들 속에 연계지었다. 이들은 소극적 자유라는 이념을 '시장의 자유'와 같은 것이고 거기에 의존하는 것이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평등 이념과 대립되는 것처럼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사회적 해방이라는 더 폭넓은 의미에서 소극적 자유나 적극적 자유는 좌파의 철학에서 항상 핵심적인 요소였다. .... 시급한 것은 소극적 자유개념을 다시 탈환한 후 민주적 삶 전체의 심화라는 맥락 안에서 거시에 대안적인 접합을 부여하는 일이다.(p435) 

누군가 '자유/평등이냐? '묻는다면 장난스럽게 응하지 마라. 그리고 잠시 숙고후 질문지를 수정하라. 1)소극적 자유 2)적극적 자유 3) 사회적 자유 4) 기회의 평등 5) 분배의 평등 6).... 7)....  이렇게 하고 여러 개에 동그라미를 친다면 좀 답하기가 쉬워진다. 질문을 거부하면서 다시 주체적인 질문을 만듦으로서 이분법을 통한 '선택'의 이데올로기로부터 피하는 거다. 그리고 동그라미 친 가치들에 대해 꾸준히 실천해 나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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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식탁 - 진화론의 후예들이 펼치는 생생한 지성의 만찬
장대익 지음 / 김영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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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쓰기 바로 조금 전에 2009년 첫번째 피셔스케이팅 대회 쇼트게임이 끝났다. 김연아는 세계 신기록으로 소띠 해 첫번째 경기를 멋지게 끝마쳤다. 차범근의 시대부터 이어진 스포츠 국민영웅의 자리는 현재 김연아의 것이다. 국민 여동생은 더 이상 문근영이 아니며 국민 요정 이효리도 불안불안하다. 이효리가 '이십대에 대한 청구서'를 정리하가 위해 시골가서 몸빼입고 마지막 불꽃을 지피는 동안 김연아는 새하얀 빙상장 위에서 한 마리 새처럼 하늘거리며 중력을 벗어난다. 

오늘 쇼트게임에서는 헤맸지만 김연아의 라이벌 아사다 마오의 프리게임도 기대된다.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 한 동안 이 라이벌전은 커다란 즐거움을 줄 것이다. 프로 스포츠가 성공하려면 이런 라이벌 구도가 명확해야 한다. <축구의 사회학>에 보면 축구가 발생한 후 초창기부터 이런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런 구도는 흥행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 한 도시내에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라' 라는 성공 원칙이 있다. 축구에서는 이런 걸 '더비'라고 말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체스터 시티의 '맨체스터더비', 인테르밀란과 AC밀란의 '밀란더비', 리버풀과 에버튼의 '머지사이드 더비', 도시는 다르지만 오래된 숙적같은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엘클라시코 더비' 등등...  

<다윈의 식탁>에서 'MBC 백분토론' 보다 훨씬 영양가 있고 또 열띤 진화론 토론을 펼치는 팀들의 대결을 '에볼루션 더비'라고 하면 어떨까 싶다. 양 팀은 D팀과 G팀으로 선수 구성이 조금씩 바뀐다. 하지만 양 팀의 주장은 바뀌지 않는다. 진화론의 김연아-아사다 마오다. 바로 <이기적 유전자>의 도킨스와 <풀하우스>의 굴드가 그들이다.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김연아-아사다 마오는 서로 험한 말을 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도킨스-굴드는 때로 얼굴을 붉히고 했다. 

<다윈의 식탁>은 진화론 내부 논쟁을 둘러싼 팩션이다. 다윈 이후 가장 유명한 진화생물학자라는 윌리엄 해밀턴의 장례식에 세계 유명 진화론자들이 모인다면 어떨까 라는 상상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들은 다윈 이후 진화론을 다시 살렸다는 '근대적 종합' 이후 진화론의 4가지 거대한 쟁점들에 대해 서로 머리채 쥐어잡는 토론에 돌입한다. 그 첫번째 주제는 '자연선택의 힘'에 대한 것이다.즉 다윈의 자연선택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이며 무엇이 적응이고 무엇이 부산물인가 하는 논쟁들이다. 두번째 주제는 협동의 진화이다. 진화가 개인 차원이냐 집단 차원이냐의 논쟁부터 시작해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론'. '다수준 선택론' 등이 토론된다. 셋째 날은 '유전자 란 무엇인가 로 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학자마다 유전자의 이미를 다르게 사용하고 있고 이해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유전자의 영향력에 대한 문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이보디보'라는 진화발생학의 유전자론도 도킨스의 이론에 대한 도전으로 제기된다. 네번째 날은 '점진론'과 '단속평형설' 사이의 논쟁이다. 연속성과 불연속성 문제에 있어서 쿤-포퍼 논쟁이나 푸코의 에피스테메의 단절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 같은 것과 유사하다. 굴드의 넓이뛰기 비유가 등장하고 도킨스팀의 '굴드씨 오바하지 마세요. 다윈의 점진론은 그렇게 좁은 개념이 아니거든요' 하는 비판이 나온다.  다섯번째 주제는 '진화와 진보'의 관계를 말한다. 도킨스는 진화에 어느 소실점이 있다는 쪽이고 굴드는 그 유명한 말-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이다- 라는 말로 이를 비판한다. 

<다윈의 식탁>의 최고의 장점은 최강의 진화론자들 사이의 가상토론을 통해 진화론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쟁점과 논쟁, 비판과 반비판의 역사를 알기 쉽게 보여주고 있다. 토론사이를 오고 가는 비유들과 어떤 이론을 비판하기 위한 과학적 사례들은 과학이 토론의 역사임을 보여준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은 사회생물학이나 진화론 논쟁의 전체적인 지도를 그리는데 큰 도움이 된다. <다윈의 식탁>이 이런 가이드 북으로 훌륭한 점은 토론에 등장하는 학자들이 쓴 저작들을 본문은 물론이고 책 부록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가상 토론에 등장하는 학자들은 편의상 도킨스-굴드팀으로 나누었지만 사실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보완적인 존재들이다. 같은 편에 있는 굴드와 르원틴도 어떤 면에서는 서로 의견이 같지만 또 서로 이견을 보이는 부분들도 있다. 책 부록에는 본문에서 언급한 5가지 주제별로 향후 더 읽어볼만한 책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다. 저자는 그렇게 하고도 아쉬웠는지 <만들어진 신>으로 이슈가 된 도킨스의 '반종교' 의 논리를 정리한다. 물론 이어서 굴드의 도킨스 비판도 이어진다.  

물론 현재 진화생물학에서 주류는 도킨스이다. 도킨스의 '유전자시각론'은 혁명적인 평가를 받는다. 물론 도킨스만의 독자이론은 아님을 말한다. 저자 역시 D팀과 G팀 사이에서 최대한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굴드 쪽 골대 뒤에 서있다.(도킨스팀의 골장면을 보고 싶어한다는 뜻이다.)도킨스만을 위해 그의 3대 저작 <이기적 유전자>,<확장된 표현형>,<눈먼 시계공>을 따로 정리한다. (주를 통해서 굴드의 저작도 다루고 싶었지만 누락시켜서 아쉽다는 유감을 뜻을 전한다.그런다고 모를줄 알고..^^) 

이 책에 토론 내용들을 하나 하나 언급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대신 이 책은 사회생물학이나 진화론 논쟁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한번 빠져 볼 용기를 줄 것이다. 과학논쟁은 분과학문의 영역을 벗어나서 전 사회의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을 보고 '과학이 역시 최고야' 라고 할 필요는 없다. 과학자들은 어떤 최종심급을 찾아다니는게 일이고 본연의 임무이지만 그런 최종심급이 -유전학의 용어를 빌자면- 모든 표현형과 그 관계들을 이해하거나 즐기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킨스의 유전자환원주의도 유전자 표현형의 어느정도의 일관성 관계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지 유전자가 무슨 의도를 갖는다거나 특정 표현형을 직접 양산해낸다거나 하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윈의 식탁>의 논쟁에 대해서 나는 결국 '절충주의적'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이기적 유전자' 논쟁같은 것에서는 도킨스의 이론이 더 매력적이다. 반면 '신'에 대한 접근 방식은 '굴드'의 주장이 평소 내 지론과 같다. 굴드는 '신'을 믿는 이들의 영역 자체를 따로 놓아두는 방식을 취한다. 도킨스는 과학자로서 미신을 방치하는 옳지 못한 퇴보라고 말한다.(내게 종교는 그냥 믿음의 영역일 뿐이다. 지적 설계론 같이 종교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고 그에 대한 과학적 반론을 제기하는 것도-사명감을 가진 과학자로서 가능한 일이나- 내게는 피곤해보이는 일이다.) 9.11을 두고 '종교적 근본주의' 때문이라고만 보는 방식이 놓치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 도킨스의 입장에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나는 인류가 다른 종이 되기 이전까지 '종교적 근본주의' 없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행여 장구한 진화의 시간을 거쳐 그런 다른 종이 되었다면 그것은 더이상 '인류'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종교 전반에 대한 도킨스의 생각에는 별 거부감이 없다. 어린 시절에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종교관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다. 언젠가 그런 종교관의 주입을 '폭력'이라고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래서 '모태신앙'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게 내게 어떻게 들리는지 알아?'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을 때도 많았다. '점진론'과 '단속평형설' 같은 논쟁은 '다윈의 재해석'을 통해 충분히 해소될 수 있는 대목이다. 인문학에서도 사실 이런 논쟁이 있어왔다. 인문학에서는 '사건'이란 개념으로 어떤 불연속성을 설명한다.(이는 물론 시간적 개념으로 진화의 시간에 비하면 정말 찰나의 것이다.) 9.11 같은 것들은 세계 역사에 있어서 어떤 '사건'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미국 대륙 한 복판으로폭탄테러 비행기가 날아들었으니 말이다. 굴드가 단속평행설을 주장하기 위해 썻던 소행성과의 충돌처럼 쌍둥이 빌딩에의 충돌은 미국민들에게 과거와는 심리적으로 다른 삶의 양상을 요구했다. 생물학이라면 '진화'라고 해야 마땅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후 벌어진 부시의 도를 넘어서는 일방외교의 강경정책은 진화의 방향에 대해 다른 적응을 요구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진화론 관련 이야기가 오고갔다. 그런데 창조론은 어디갔는가 궁금할 수도 있겠다. 창조론, 지적 설계론같은 것은 <다윈의 식탁>에선 크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지적 설계론'에 대해서는 책 후반부에 '진화론과 지적설계론'의 미국 내에서의 논쟁에 대해 한 편의 글이 있다.(도킨스와 같은 무신론적인 진화론자들이 왜 가만히 연구실이나 강의실에 있지 못하고 나서게 되는지에 대해서 이해가 간다. 한국의 뉴라이트와 비슷한 방식으로 지적설계론이 담론 공간에 비집고 들어온다.) 저자는 생전에 굴드와 도킨스가 숙적이었지만 서로 동의하는 것이 딱 두가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는 진화는 사실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는 자신들이 모두 최고의 글쟁이였다는 것이다. ^^ 나는 원론적 차원에서 무신론자이며 유물론자이다. 다윈 역시 한때 유물론자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도킨스가 '종교는 바이러스다' 라고 말했듯이 나는 오래 전부터-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종교는 인간의 정신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문학이나 예술적 차원에서 나는 범신론자에 가깝기도 하다. 내 생각에 인간 사회에서 인간은 결코 신을 쫓아낼 수 없다. 어떻게도 해도 신은 귀환한다. 신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인간은 애초부터 비이성적 존재이며(완전한 이성적 존재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환상의 영역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과학 이성이 신의 공간을 쫓아내는 순간 과학 이성은 또 신의 자리를 차지한 일종의 '대리신'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도킨스가 열심히 무신론자로 뛰는 것은 아마 서구 사회 일반에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는 종교 중심성 때문일 것이다. 한국 역시 특정 종교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지만 한국은 묘한 역학적 균형을 이루어내었다. 한국에서는 교과서에 기독교의 창조론을 싣자고 주장한다면 불교계나 유림등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내 생각에 한국은 미국이나 영국보다 훨씬 덜 종교적인 나라다. 덜 특정종교적이라고 해야 맞을 지도 모르겠다.(=제갈량과 몽테스키외가 삼분지계의 함의를 인류에 건넨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들은 이것들이 나중에 한 통속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없었겠지만) 대통령 취임식만 봐도 알 수 있다. 현 대통령도 한국을 봉헌하고 싶은 마음이야 있겠으나 취임식에서 다함께 손모아 기도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한국이 하나님의 축복을 더 많이 받지 못한다는 뚜쟁이 소리를 하는 인간들과는 아예 상종하지 않는게 내 실천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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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방랑자 - 서른 한 살 슈베르트, 그 슬픈 환희의 노래
김문경 지음 / 밀물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위대한 20세기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음악이 내게 의미하는 것을 전부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논리철학 논고>의 가장 유명한 말이 있다. "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 우리는 침묵해야만 한다."  

그래서 음악을 말로 표현해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음표들의 높낮이를 정하고 길이를 정하고 그와 유사한 어울림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동시에 운행한다. 기술적으로 보면 그게 '음악'이다. 이것은 공기를 울리고 고막을 울리고 뇌파로 전송된다. 뇌에 도착한 이 뇌파화된 진동은 사람을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고 우울하게도 하고 심오하게도 한다. 기술적으로 보자면 이게 음악이다. 이런 과학적인 방식 말고 '음악'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실로 난망하다. 다 아는 듯 하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그런 질문들이다. 또한 '왜 저 음악이 좋냐?" 라고 물어도 몇 가지 단어외엔 설명하기 쉽지 않다. 어떤 이들은 구조의 완결성을 말하고 멜로디의 탁월함을 말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구조여도 별반 반응이 없을 수 있고 뛰어난 멜로디 라인은 가끔 저속함의 상징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결국 '음악'은 언어로 말하는 것보다는 '침묵'하는 것이 나은 전술에 가까운 영역이다. 그래서일까? 사실 좋은 '음악책'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서점에 가서 만날 수 있는 좋은 음악책이라 해봐야 '가이드책'일뿐이다. '명반 100선', '음악여행 에세이' 등등 이 그런 류의 책들이다. 조금 더 학술적인 책들은 음악학에 대한 기본적 소양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조금 어렵거나 딱딱할 수 도 있다. 그런 면에서 전문가같은 아마추어 김문경의 <구스타브 말러>시리즈는 그 틈새를 잘 포착해낸 책이었다. 나 역시 그 책을 상당히 좋아하고 요즘도 말러 음악을 들을 때 가끔 펼쳐놓고 본다. 사실 김문경이 <구스타프 말러>시리즈에서 본인 스스로 이루어낸 것은 책 부록에 나오는 말러 음반 리뷰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러>시리즈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간의 방대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적당히 잘 조합해낸 아마추어의 열정과 애정때문이다. <말러>시리즈로 일약 김문경은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시선을 끄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슈베르트의 '재발견'이라고 할만한 <천상의 방랑자>는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별 두개를 겨우 줄 정도다. 그럼에도 별 하나를 더 준 것은 뒤에 붙어 있는 CD가 이 책에 소개된 곡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어서이다. 또 하나는 나름 독자도 가지고 강연도하면서 클래식 팬을 몰고다니는 사람의 책에 별 두개를 주었다가 악성댓글과 씨름해야할까봐 서이다. 일단 이 책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부분은  작가의 슈베르트의  재발견이라는 흥분에 덩달아 춤추기가  안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서두부터 음악팬들이 늘상하는 예의 그 과장된 표현들을 쓰면서 흥분에의 공감을 말한다. 

'루체른페스티벌에서 공연한 슈베르트의 현악5중주 D956는 나의 어설픈 슈베르트관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거대한 지진과도 같았다......인간사의 모든 감정을 세세히 그려내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나 역시 가끔 음악을 듣고 짧은 글을 쓸 때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해 감정을 과장하는 수사를 쓰곤 한다. 하지만 이게 상당히 쓰면서도 탐탁치 않고 듣기도 싫다. 그럼에도 음악팬들 중에는 이런 수사가  본질적 의미에 닿아있는 듯 착각하며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우선 말로 표현하기 힘든것을 표현하려는 결과이기도 하지만 본인이 '순수한 영혼', '영적인 쾌유', '존재의 그림자' 뭐 이런 단어를 어떤 음악에 씌우면서 그런 음악을 향유하고 있는 본인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그런 공간에 있는 그와 우리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내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대중들의 그런 감상태도 자체와 더불어 그를 재생산하고 확증해주는 '키치적 음악비평'의 태도이다. 대개 이런류의 음악에세이 작가들은 정서적 술어를 유추적으로 확대하여 사용한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상호관련성마저 희박해보이는 의미를 부여하여 작곡가와 곡,그리고 그걸 공유하는 청자에 아부한다. (가끔 듣는 클래식 FM의 진행자들을 보면 이런 주례사 비평을 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가 확실히 구분된다. 후자의 경우를 보면 '명연주 명음반'의 정만섭씨가 그렇다. 그는 담백하게 말하고 만다. 이런 식이다. " 이미 명연으로 소문난 음반이니 더 여러 말을 다는게 필요없겠지요....발군의 기량을 보여준 연주가 아닌가 싶습니다..등" 그런데 반대의 경우 -최근에 차를 타고 오면서 들었는데 도대체 어디까지 하나 싶어서 계속 들었다- 저녁시간 대에 하는 모 교수인지 평론가인지 하는 사람이다. 온갖 미사어구와 벅찬 감동의 수사가 흘러넘친다. 예술적 촉수가 더 발달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전체적으로 과함이 특징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곡'이라는 저속한 마케팅 구호처럼 립스틱 범벅이다.)

저자의 놀라운 발견 중 하나는 슈베르트가 아이의 세계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         ) 음악의 한쪽에는 방긋 웃는 아이가 보여주는 천사의 미소가 있고, 반대쪽에는 깊은 상처를 받은 아이의 트라우마가 존재한다." 

저자는 슈베르트만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실험해보자. 모짜르트를 넣으면 저 문장이 어색하게 들릴까? 쇼팽을 넣으면 어떨까? 심각하게 들릴 지는 모르지만 무리하자면 베토벤을 넣고도 저 문장의 의미를 강요할 수 있다. 좀 퇴폐미가 흐르지만 말러는 아닐까? 말러의 음악에도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이 묻어있는 민속리듬들이 들어간다. 군악대 행진도 들어간다. 요즘말로 하면 좀 까진 아이로 말러를 취급하면 저 문장에 끼여도 그리 어색함은 없다. 저자는 천진한 세계와 광적인 발작의 세계라는 양극성을 말하기 위해서 슈베르트만을 저 문장 속에 포획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거의 모든 예술가들이 저 스펙트럼 사이에 있다. 좀 더 넓게 보면 인간이 저 도상 위에 있을 수도 있다.    

물론 말장난처럼 들릴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는 어떤가? 저자는 이 책에서 슈베르트의 재발견 흥분감에 비추어 '예술사적 존재'로의 슈베르트의 문제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책의 3분의 1이 괴테의 <빌헬름마이스터의 수업시대>로 이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저자가 한 일이란 괴테의 소설을 요약하고, 그 안에 나오는 마뇽과 노인의 시를 정리하고, 슈베르트 자료들을 모은 것 뿐이다. 그리고 그나마 안타까와 하는 이야기가 '괴테가 슈베르트를 몰라봐줘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정도이다.  저자가 강조한 슈베르트의 특성인 '양극성'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를 재인용한 슈베르트의 '불완정성' '불연소성'의 문제는 과연 슈베르트만의 문제였을까?  이미 <클래식으로 읽는 인생>이라는 -책은 읽지 않았지만 책 추천사는 음악,인생,예술,철학을 집대성하는 이란 말이 나온다- 책을 썻다면 저자가 결코 '초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적 특성에 대해 몰랐을리가 없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관계성에 대한 부분은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아쉬운 부분이다. 슈베르트는 사실 음악예술사에서 가곡의 왕이지만 또한 낭만주의의 증인이다. 쉽게 말하면 슈베르트의 음악과 그의 예술적 교류, 세계관 등은 그런 낭만주의의 도래와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런 관련성은 직접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반면에 이 책에는 낭만주의의 숭고미를 상징하는 프리드리히 카스파르 다비트의 그림이 여러번 나온다. 이 그림들은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의 CD자켓에 아주 빈번히 사용된다. 이 그림과 슈베르트 사이의 관계는- 저자가 지난 책에서 말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 연관이 없는 것 일까?  결국 이 부분을 삭제하다 슈베르트가 마치 독자적인 예술천재로서만 그려지고 있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이 책의 전체적 시각은 서가에 꽂힌 책을 폈다가 이제는 기억도 없는 멋진 문장에 친 밑줄을 보고 감동하는 것과 유사하다. 나쁜 의미만은 아니다. 그런 정도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내게는 그 점이 <말러>시리즈에 비해 아쉽다는 것이다.

슈베르트의 시대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시대이다. 아놀드 하우저같은 경우에 이 시기의 예술가들이 자기 나라에서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고향상실, 고독한 감정들은 세계적인 정서가 되었다고 말이다. 이것은 고향에 대한 향수, 무한에 대한 동경, 미지의 것에 대해 일종의 숭고함을 갖는 반응으로 나타난다. 결국 이것은 생의 낭만화 경향으로 조응하고 낭만적 유토피아 건설에 대해 꿈을 꾸기도 한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에서 저자는 이 곡이 영원한 아웃사이더의 노래라고 말한며 한과 자기혐오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과거에 '그까짓 사랑때문에 한심한 지식인 같으니"라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깊은 속을 헤아린 겨울나그네는 존재의 상처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이것이 비단 슈베르트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단 한번도 지적하지 않는다.  

앞서 말한 슈베르트의 '양극성' 측면도 보자. 저자는 슈베르트가 기괴함과 아름다움 사이를 오고간 작가였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가곡들도 많지만 '난장이'같은 (불륜과 파멸을 소재로 한다.)곡들도 상당량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미의 역사>의 한 대목을 그대로 인용해 보자. 낭만주의 미학을 잘 정리한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낭만주의의 무엇보다도 독창적인 면은  다양한 형식들 사이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관계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이성에 의해 맺어진 것으로 모순점들을 배제시키거나 반명제(유한/무한, 전체/일부, 삶/죽음, 정신/마음)를 해소시키지 않고 그것들을 공존하게 하는데 낭만주의의 진정한 특성이 있다.'

유명한 소설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이 씌여진 것이 1818년 슈베르트 21살때 일이다. 왜 <프랑켄슈타인>을 예로 들었는지는 알아서 생각해 볼 일이다. 음산함, 그로테스크 함 같은 것들은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아이템이 된다. 음악교과서에서 표제음악의 선두로 말하여지는 -그리고 단두대 장면으로 유명한-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이 1830년 ,즉 슈베르트 사후 2년 뒤에 나온다. 만약 슈베르트가 살아있었다면 33살이다. 

저자는  독일 가곡이 슈베르트 이후 퇴보했다고 말한다. 이유는 저자가 곡과 멜로디가 최적상태를 유지하는 고전주의적 가곡관을 지향하고 있기때문이다. 바그너나 말러는 물론이고 볼프같은 이들도 이 최적상태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언어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이런 류의 문장은 내 기억에  이 책에서 두 번이 등장한다. 문제는 '슈만'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것이다. 첫번째에는 슈만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왜 슈만을 언급하지 않지? ' 라고 벼루면서 보고 있었는데 책 후반부에 다시 슈베르트 가곡의 고전적 완성미를 강조하며서 단 한번 비로소 슈만이 등장한다. 슈만은 그나마 가곡의 황태자 대접은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멜로디라인에서 대중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앞으로도 슈베르트 가곡의 수준에 이르지는 호응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동감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저자는 특이하게도 슈베르트의 재발견에 들어가면서 멜로디 라인이 떨어져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슈베르트의 곡들에 힘을 실어서 말한고 있다. 슈베르트와 슈만의 비교에서 슈만이 멜로디 라인이 대중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인기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걸 그대로 슈베르트의 곡들 사이의 비교로 적용해 본다면 어떨까? 현재 인기가 없는 슈베르트의 곡은 그런 단점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슈베르트의 가곡이 최고 수준은 아니다. 책 전체적으로는 겨울나그네나 들장미,아베마리아 같은 곡들이 있지만 저자의 시선은 숨겨진 곡을 찾는데 있다. 저자가 인정하듯이 음악팬들의 '지적 스노비즘' 의 한 예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고 있다. (그런 방식에는 나도 자유롭지 못하다.) 

저자의 슈베르트에 대한 과잉은 가곡 '마왕'의 예에서 나타난다.'마왕'은 드라마라는 구조뿐만이 아니라 성악과 반주면에서 탁월한 곡이다. 딱 떨어지는 느낌을 준다. 저자는 4분짜리 완벽한 곡을 만든 이가 어떻게 기악곡 등에서는 구조의힘이 떨어졌는지 묻는다.  요즘 말로하자면 CF 잘 만드는 감독이 왜 극영화는 실패하냐는 투다. 질문부터 웃음이 묻어났다. CF 잘만드는 것과 영화 잘만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 호흡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물로 저자는 하루키를 인용하면서 스스로 답을 제기한다. 베토벤식의 튼튼한 구조에 대한 애착이 전도된 질문이라는 것이다. 베토벤식의 구조는 슈베르트에게 의미 없었음을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우리는 낭만주의의 일부 특징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낭만주의는 기본적으로 어떤 종류의 객관적 예술법칙의 타당성도 부인한다.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일종의 집단에 대한 개인의 투쟁이었고 이런 흐름은 현재까지도 예술가들의 작업을 규정하는 한 축이 된다. 당연히 개성적 표현법칙과 기준은 개인화된다. 그렇다면 하이든,모차르트 시대의 고전적 양식으로 부터의 탈피는 슈베르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게 된다. 베토벤의 작품 속에서도 이리 그러한 변화의 징조들이 나타난다는 것이 교과서적 접근 아닌가. 슈베르트의 '불연소성', '반복성' 같은 것은 그런 전체 차원에서 조망해 볼 수도 있을 법하다.  저자 슈베르트 개인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결론을 맺는다. 물론 구조와 개인의 상호 관계문제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슈베르트라는 개인 하나만 놓고 보면 음악계에 있어서 낭만주의의 원인이자 결과이기 때문이다. 요점은 슈베르트라는 개인을 둘러싼 영향들에 대해 저자는 사적인 관계들 외에 거의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슈베르트라는 한 천재의 작품으로 낭만주의 음악과 슈베르트의 작품들을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 지점이 못내 아쉽다는 것이다.

슈베르트를 말할 때 '슈베르티아데' 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슈베르트가 여인보다 친구들과의 예술적 관계를 더 소중히 여겼다고 말한다. 이것 역시 슈베르트에게만 일어난 일은 아니다. 혁명 이후 과거 예술계층에 분화가 오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시민적 예술애호층들이 늘어나고 그룹으로 발전하게 된다. 슈베르트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저자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든 슈베르트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그 모임 자체를 상당히 수준높은 예술가들의 모임정도로만 말한다. 그리고 슈베르트의 사인-매독에 의한-같은 것들은 날라리 친구 한 명의 꾐에 빠진 한 번의 실수라는 식으로 대충 지나간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저자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언가를 생각해보면 슬쩍 웃음이난다. 영웅적인 베토벤 상이 후대의 이미지이듯 천상의 방랑자, 순결한 청년의 영혼 슈베르트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한 노력말이다.  요즘 대세가 '퀴어'라서 그런지 나는 슈베르티아데에서 '퀴어'의 향기가 난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영화적 상상력으로 슈베르트 영화를 만든다면 나는 '퀴어'로 만들겠다. 요즘같으면 매독이 아니라 AIDS라 해야 이해받을지도 모르겠다. 요즘이야 매독으로 죽는 이들은 거의 없을테니...좀 모독적이라는 생각이들기도 한다. 밀로스 포먼이 아직도 모짜르트와 소송 중이라니 그 판례를 보고 수위를 조절해 볼 생각이다. 

이 책은 내가 최근 가장 빨리 읽은 책이다. 그다지 어려운 내용도 많지 않고, 나는 읽지 않을 <빌헬름마이스터>를 읽느라 고생한 흔적도 보인다. 여러가지 안좋은 소리를 해서 좀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하자. 이 책의 표지는 정말 최악이다. 디자인에 대한 아무런 고민이 없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지 여실히 보여준다. 리어카에서 파는 CD 자켓도 이 책의 디자인보다는 낫다.  

슈베르트에 대한 책이 거의 없다는 저자의 문제의식에는 공감을 한다. 그런면에서 또 한번 틈새를 노린 점은 훌륭했다. 그러나 결코 좋은 점수를 주긴 힘들다. 말러에서 보여준 공력을 기대어 다음 번 슈베르트 책은 진일보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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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 페일리 : 진화론도 진화한다 지식인마을 1
장대익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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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생물선생님이셨다. 젊은 나이에 도전하셨던 사업은 보기좋게 실패했다. 동거동락을  하며 형제같았던 절친한 친구는 그나마 있던 몇 푼마저 훔쳐서 야반도주했다. 아버지는 백수 상태로 꽤 지냈다. 그리고 그 맘때 그의 첫아들이 세상에 나왔다. 외갓집에서 조금씩 분유값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촌에 새로 생기는 사립고등학교 교원모집을 보고 이력서를 냈다. 북한에서 내려온 자수성가한 이사장은 성실해보이는 사람이 고생하는게 딱해보였는지 취직을 시켜주었다. 그리고 몇 해 전 퇴직하시기 전까지 아버지는 한 학교에서 30년이라는 시간을 생물선생으로 지냈다. 교장 교감은 해보지도 못했다. 퇴직할 때 주는 이름 모를 훈장과 선심쓰듯 이름만 주는 교감 호칭만이 남았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 때 지구과학 선택이어서 생물선생을 아버지로 둔 덕을 그다지 보진 못했다. 나와 생물학은 내 아버지와 나의 거리만큼 가까왔지만 늘 강 건너 있었다.

 <과학동아>는 올해 첫 번째 기획특집으로 '다윈과 진화론'을 다루었다. 당연한 일이다. 올해는 다윈 탄생 200주년이 아니던가.  현재의 한국지질연구원 출신의 권영인 박사는 다윈의 비글호 항로기를 따라 탐사여행을 하고 있다. 그가 타고 있는 요트의 이름은 '장보고호'이다. 하여간 올해는 전세계적으로 다윈과 진화론에 대한 좋은 책들과 좋은 다큐멘터리들이 많이 제작될 듯 하다. 대중문화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이런 돈되는 아이템들을 놓칠 일은 거의 없다. <과학동아>에서는 몇 권의 진화론 관련 서적들을 소개했다. 이 쪽 분야에 문외한이라 메모를 들고 서점에 가서 한 권 씩 확인을 했다. 에른스트 마이어의 <진화란 무엇인가>는 작은 판형이 보기 좋았지만 책형태처럼 너무 딱딱해보였다. 데이빗 버스의 <욕망의 진화>같은 책들은 진화심리학에 대한 이야기이기때문에 지금 맞추고 있는 내 핀트와 맞지 않았다. 찰스 다윈이 쓴 <나의 삶은 천천히 진화해왔다> 도 아니었고, 결국 <종의 기원>을 뒤적이기도 했다. 그리고 결론은 " 쉽게 가자" 였다. 어차피 진화론에 코박을 것도 아니고 진화론의 내부논쟁에 달려들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생물학을 포함한 과학은 중요한 부분이지만 내가 독서하는 방향의 메인스트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동아>를 비롯한 여러 군데서 추천한 <다윈의 식탁>을 바구니에 넣었다. 하지만 <다윈의 식탁> 역시 내가 시작하고 싶은 출발선과는 조금 달랐다. <다윈의 식탁>의 메뉴는 '근대적 종합' 이후 진화론 내부의 4가지 주요 쟁점들이기 때문이다. <다윈의 식탁>과 이 책 <다윈 & 패일리>의 저자인 장대익은 논쟁의 4대 기둥을 '변이의 생성, 자연선택의 힘, 이타성의 진화, 진화의 속도에 관한 논쟁' 이라고 정리한다. 실제 <다윈의 식탁>은 가상 토론회 형식을 빌어 이 4가지 주제를 놓고 '도킨스 팀 vs 굴드 팀' 이 서로 으르렁거리게 만든다. (실제로도 이들은 으러렁 거렸던 듯 하다.) 결국 <다윈의 식탁>에 다윈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후예들은 우글거리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가장 만만해 보이는 <다윈 & 패일리>를 <다윈의 식탁>과 함께 계산대에 올렸다. 

<다윈 & 페일리>는 시간을 150여년전으로 돌린다. 다윈이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로 가기 이전에 흰색 출발선을 긋는다. 우리는 다윈이 '진화론'의 출발점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 이전부터 진화론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었다. 물론 지배적인 것은 '창조론'이거나 '지적 설계론'이었다. 하지만 다윈이든 페일리든 용불용설로 다윈마저 걸려넘어지게 했던 라마르크든 모두 같은 질문을 고민했다. 위대하며 세대 유전되는 본원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 이렇게 정교한 기능을 가진 생명체들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세상사 모두 그렇지만 문제는 하나인데 답은 여러개로 나뉘었다. 페일리는 도킨스가 돌려치기 한 시계공의 비유를 들면서 '지적인 존재의 설계'를 주장한다. '창조론'과 '지적설계론'은 신학 논쟁에도 가끔 나오는 것인데 거칠게 그 차이를 말하자면 '설명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창조론을 강하게 주장하는 측에서 신의 영역은 불가지의 영역이다. 결코 '설명'의 영역이 아닌 믿음의 영역이다. 반면 신학 내부에서도 이를 지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종교전통이다. '지적 설계론'과 '창조 과학'은 신의 조각들을 가지고 귀납적인 설명을 통해 신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한다. 실제로 '창조론'과 '지적 설계론'은 같은 선상에 있다. 다만 그 표현방식에서 다른 논증을 택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이건 내가 거칠게 이해한 방식이다.) 

다이제스트판 책답게 <다윈 & 페일리>는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공적을 몇 가지로 정리한다. 첫번째 진화에서 자연선택의 중요성을 발견한 것. 진화의 패턴을 계단형에서 수목형으로 바꾸어 이해한 것. 그리고 성선택의 중요성에 대해 인지한 것이다.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은 아니지만 곰곰히 생각해 볼 수록 혁신적이다. 다윈이 20년 동안이나 <종의 기원>의 출간을 두고 끙끙거리고 또 여러차례에 걸쳐서 판본을 바꾼것이 단지 그의 소심함때문만은 아닐 듯 하다. 별 것 아닌 아이디어같지만 다윈의 생각은 세상을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보는 지평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진화심리학자여서 팔이 안으로 감겼다는 비판을 가할 수는 있지만 다니엘 대닛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아이디어를 준 사람으로 다윈을 꼽은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프로이트 덕분에 인간은 의식 영역 말고 빙산 아래 가라앉은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세계를 얻은 것이다. 그보다 더 실제적인 관점에서 다윈은 인간을 전혀 새로운 물질과 장구한 진화의 시간 위에 던져놓았다. 다니엘 대닛은 물질영역과 생명영역을 통합한 공이 인류 역사에 다윈이 준 선물이라고 말한다. 

<다윈 & 페일리>의 책 절반은 앞서 말한 다윈의 학문적 성과와 그에 바탕이되거나 영향을 받은 동시대인들의 상호관련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다윈이 영향을 받은 지질학자 라이엘, 인구론의 멜서스, 사회진화론이라는 말을 말들어낸 스펜서 등등이 그들이다. 물론 다윈과 다른 지평에서 상호관계된 페일리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의 나머지 절반 부분은 '다윈 이후' 진화론의 분화와 관련된 것이다. 앞서 말한 진화론의 4대내부논쟁을 중심으로 이후 중요한 진화론의 범주 확장과 중심인물들을 다룬다. 크게는 '적응주의자'와 '반적응주의자'로 구분하여 구분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기적 유전자>의 도킨스, 집단유전학의 해밀턴, <마음의 진화>의 다니엘 대닛, <사회생물학>,<통섭>의 윌슨등이 전자이다. 반대쪽으로는 <풀하우스>의 굴드, <DNA독트린>의 르윈튼 등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다윈의 식탁>에서 조금 더 흥미진진하게 다루어진다.  

<다윈 & 페일리>는 입에 쏙 들어갈 크기만큼의 작은 주먹밥처럼 다윈을 이야기한다. 한 권 안에 진화론의 여러 주제에 대해 언급해야 하다 보니 다윈에게 약간의 양보를 요구할 수 밖에 없었던 듯 하다.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이나 최근에 나온 굴드의 <다윈 이후>가 어떨지 모르겠다.) <다윈의 식탁> 부록에 저자는 이 책이나 중고서점에서 상당히 싼 가격에 산 칼 짐머의 <진화>를 논쟁적인 진화론으로 들어오기 위한 에피타이저라고 말한다.(칼 짐머의 <진화>는 그렇게 에피타이저는 아니다. 설명은 평이하나 판형이나 분량이 부답스럽다.) 어쨋거나 에피타이저는 맛을 봤으니 이제 슬슬 포크를 들어볼까. 주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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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리스 (반양장) 렘 걸작선 2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김상훈 옮김, 이부록 그림 / 오멜라스(웅진)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솔라리스>를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은 러시아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이다. 그는 1972년 동명의 영화를 만들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혁명이 영상에 자리를 내준 90년대를 거쳐온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보다 영화를 볼 수 있는 창구가 적었던 시절이다. 자고로 금지는 더 큰 열망을 낳는 법이다. 그 당시 타르코프스키는 매니아들 사이에서 올림포스에 사는 신족처럼 취급되었다. 그의 영화<희생>,<노스탤지아> 같은 작품들은 일종의 신탁이었던 셈이다. 실제 그의 영화는 중독성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강한 수면제가 발라져있다. 가끔 졸다가 눈을 떠보아도  상징적인 이미지가 언뜻 언뜻 지나간다. 뻑뻑한 눈을 비비며 보는 시적인 영상들은 '장자'와 '나비'를 서로 혼동케 하기도 한다. 내가 알던 한 지인은 타르코프스키의 기획은 그런 '몽매'의 상태를 영화적 장치로 이용하여 자신의 영화를 초현실적 단계로 이끌어가는 것은 아닐까라며 웃었다. 하여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명성은 어떤 의미로든 강력했다. 그 때문일까 <솔라리스>의 원작자도 그의 그림자에 가렸다.

옮긴이의 글에도 원작 <솔라리스>가 그 동안 SF팬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원작시나리오 정도로 취급받는 역전된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고 말한다. 나 역시  타르코프스키 때문에 <솔라리스>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영화 전체를 보진 못했다. 내게 직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따로 있다. 지젝의 <기묘한 영화강의>라는 영상물이다. 그 영상물에서 지젝은 직접 내레이터로 출현한다. 그는 그의 책에서 예로 들었던 영화물들을 직접 설명하면서 정신분석학적인 영화 비평을 시도한다. 영화<솔라리스> 역시 그렇게 소개된다. 지젝은 프로이드의 리비도에 대한 왜곡을 먼저 비판하면서-리비도 결정론적인 곡해-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로 들어간다. 닫힌 문을 뚫고 나오는 레야의 모습도 나오고 책과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결말도 나온다. 타르코프스키의 결말에서 지젝은 '아버지의 법'에 복종하는 프로이드적 결말을 읽어 낸다.  

스타니스와프 램의<솔라리스>는 일종의 정신분석학 텍스트이다. 나는 최근에 읽었던 지젝의 책들의 복습 문제처럼 이 텍스트를 읽었다. ( 편의적이고 작위적인 방식이어서 그다지 권할 만한 것은 아니다.) 대신 어떤 개념들을 자기화 해내는 방식- 학문적 엄밀함을 요구하기란 어렵다-으로, 소설을 즐기며 분석의 틀들을 대입해 본다는 것은 책을 읽는 또 다른 방식의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먼저 영화 예고식으로 줄거리를 그려보자.

지구로 부터 한참 떨어진 우주. 솔라리스라는 스테이션에 주인공 캘빈이 도착한다. 그렇지만 무언가 이상한 예감이 든다. 스테이션이 마치 유령의 집같다. 켈빈은 자기의 스승이자 동료였던 기바리안이 이상증상을 보이며 죽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리고 스테이션에 있는 나머지 두 동료들인 스노우와 사토리우스도 공통되었지만 각기 다른 이상 증상을 겪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그 증상은 캘빈에게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먼저 매혹적인 것은 '솔라리스 '라는 행성이다. 아니 생물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두 개의 태양이 떠있는 행성에 사는 '바다' 가 '솔라리스'다.  '생각하는 바다'는 밀물과 썰물을 바라보며 혀를 낼름거린다는 동화적 상상력을 극한으로 확정시킨다. 그 바다는 안개에 휩싸여 있고 끈적한 물질처럼 되어있다.그리고 가장중요한 것인데 인식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한계를 훨씬 넘는 형태의 고등진화된 생물이다. 렘은 솔라리스라는 행성이 발견되고 나서 지구에서 있었던 각종 연구들을 장황하게 설명해준다. '솔라리스학' 이 그것이다. 모두 각종 가설들이다. 하지만 어느 하나 명확하지 못하다. 모두 이런 생명 행성의 존재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언어로 담을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바다'를 둘러싼 다양한 과학적, 또는 철학적 주제들을 켈빈이 읽는 솔라리스 관련 저서들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조금 지루할 수도 있지만 상당히 흥미롭다. 마치 과학사 논쟁이나 철학사 논쟁을 보는 듯 하다. 

흥미롭지만 또한 미지의 것이 가져다 주는 공포로 인해 '생각하는 바다'는 양가적 대상이다. 하지만 승무원들이 공통으로 겪는 증상이 확인되면서 '생각하는 바다'는 상상하기 힘든 공포가 된다. 이것은 우리의 트라우마, 음침함, 타나토노스적 욕망등을 물질화하기 시작한다.  

머릿속에만 있던 그것이 어느 순간 피와 살이 되어 현실로 나타나지. 문제는 그게 전부야...우리는 현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곳에'도착하게 되고 곧 진실-우리가 가능한 언급하기를 꺼리는 진실-과 맞부딪치는 거야. 이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지.....우리 자신의 추악함을 마치 현미경으로 보듯 몇 백 배나 확대한 것과 말야        

나는 공포영화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또한 SF소설은 쥘 베른 이후에는 거의 본적도 없는 듯 하다. (물론 SF영화가 더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하지만 이런 설정은 정말 최악의 공포다. 소설이 안타까운 건 음악이 없다는 것이다.그렇지만 자기 트라우마의 물질화라는 설정은 가히 최고 공포를 연상시킨다.(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는 음악으로 이런 긴장상태를 잘 유지했던 것 같다.) 나는 사실 이 소설을 보다가 어둠 한 편에서 나의 어떤 트라우마들이 형상화되어서 나오면 어떨까 생각하고 소름이 돋기도 했다. (물론 '나는 트라우마같은 것이 없어요.'라고 하는 사람은 앞으로도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면서 잘 먹고 잘 살면 된다. 그러니까 나같은 이를 비롯해서 인간에 대해 뭘 해도 이해가 잘 안되는거다. 또한 심리학 실험에서 거짓말 반응에 걸려서 실험 비적격 대상자가 될것이기도 하다. 심리학 실험에는 실험자의 정직도를 알아보기 위한 문항들이 몇개씩 있다고 알고 있다.)  

주인공 캘빈은 그의 자살한 아내를 만난다. 캘빈이 그냥 홧김에 던진 말이었는데 그것때문에 그녀는 자살한 것이다. 그녀는 캘빈이 자고 있는 동안에 나타났다. 잠이라는 소재는 프로이트의 주전공 아닌가.(잠을 자야 꿈을 꾸지)그렇지만 이 존재는 꿈과는 다르다. 앞서 말했듯이 이미지가 아닌 물질화된 대상이다. 지젝은 '살아 있는 시체들의 귀환'이라는 말을 썻다. 그는 현대 대중문화의 근본적인 환상이라고 말한다. 즉 죽음에 머무르려 하지 않고 거듭거듭 산 자를 위협하기 위해 귀환하는 사람들에 대한 환상이다. 소설 속에서 귀환한 레야는 직접적으로 캘빈을 위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무의식의 귀환은 자살만이 탈출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미치게 한다. 그렇다면 왜 죽은자들이 돌아오는가?  지젝은 라캉이 이에 대해 아주 쉽게 답변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제대로 매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죽은 자의 귀환은 상징화 과정(이게 제대로 이루어져야 맘고생 없지 뻔뻔하게 잘살 수 있다.)에 있어서의 교란을 나타내는 기호이다. 라캉은 <햄릿>의 햄릿왕과 <안티고네>의 안티고네가 이 상징적 채무를 물질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레야라는 존재를 일종의 '실재'의 침입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캘빈은 솔라리스 스테이션에서 일종의 사물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이다. 즉 존재가 고통 속에서 고집하는 금지된 경계 영역으로 말이다. 무의식은 어떤 비지식의 토대 위에서 그 일관성을 유지해야하는 것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우리의 상징화 작용 속에 비상징화되는 중핵들이 봉쇄되어야 한다. 지젝은 '징후'로 이를 설명한다. 즉 주체가 자신에 관한 어떤 근본적 진실을 무시해야만 존해하는 어떤 특정한 형성물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캘빈처럼 실재의 조각 정도가 아니라 실재가 전면적으로 침입할 때 그런 징후는 스스로 와해된다.  

'생각의 바다'가 끌어낸 레야라는 대상-나중에 이런 대상들을 '파이-생물'이라고 부른다.재미있는 것은 실재계에서 상상계로 향하는 관계를 지젝이 파이라고 부르고 있다. - 은 정확히 말하자면 캘빈의 증상으로서의 레야이다. '여자는 남자의 증상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여성이 남성에게 일관성을 부여하는 한에서만 남성이 존재함을 가리킨다. 남성의 존재는 사실 그 자신에 대해 외부적이며 여성은 무이다. 이 '무' 를 통해서 실재적인 주체성의 창출이 가능한 것이다. 지젝은 1930년대 필름 느와르의 팜므 파탈이라는 여성 존재를 통해 이 과정을 설명한다.('여자는 없다.'라는 말을 페미니스트적 오해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솔라리스>속에서 캘빈의 죄책감에 의해 만들어진 레야는 여기서 특이한 행동을 통해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레야는 캘빈의 머릿 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캘빈의 의식 밖의 영역에 대해서는 '무'에 가깝다. 아무런 코딩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것은 레야가 스스로 '비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생각의 바다'가 주체의 트라우마를 통해 구축해낸 물질화된 '시뮬라르크'가 특별한 매게 없이 자기 인식을 시작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유령이 유령인지 스스로 아는 것이다.' 이거야 말로 '죽은 신도 못하는 일'을 스스로 해내고 있는 것 아닌가? 레야는 몇 몇 특정한 동물과 인간만이 한다는 '자살'을 시도한다. 그렇지만 그녀의 육체화,정신은 금새 다시 복원된다. 자해와 복원의 고통스러움을 복기해야하는 캘빈은 이제 돌아온 그녀가 '비존재'임을 알면서도 혼동을 겪게 된다. 여기서 스타니스와프 렘의 매력이 나온다. 만약 레야라는 존재를 단지 캘빈의 무의식정도로만 취급했다면 이 책 <솔라리스>의 매력은 절반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생각의 바다'는 원래 상호주관성이 결여된 영역이다. 즉 '레야'라는 존재가 대상/응시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단순한 '시뮬라르크'만은 아니란 것이다. 이것은 상호주관성이라는 인식영역에서는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쉬운일이다. 하지만 '생각의 바다'는 완전히 '비인격적' 존재이다. 그렇기때문에 '존재론적' 고민을 하는 레야의 탄생은 마치 진화론의 지적 설계론을 풀어낸 것 같다. 실제로 책 후반부에서 스노우와 캘빈은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 

그 신은 무한을 창조했지만 자신의 능력의 척도여야할 무한이 결국은 그 자신의 끊없는 패배를 가능하게 하는 척도가 되버렸던 거지....불와전한 신 ..이거야말로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 속죄나 구원이 목적이 아닌,아무 목표도 없이 다만 그곳에 존재할 뿐인 신이기 때문이지

스타니스와프 렘을 비롯해서 외계인 또는 미지의 세상과 조우하는 인류를 다룬 영화들은 일련의 공통된 주제들이 있다. 조금씩 다른 변주를 취하고 있지만 결국 '인간'에 대해 어떤 종류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지? 우리는 과연 진리와 독대할 수 있는지? 의식의 한계는 어디까지 인지? 그 영역 밖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또한 우리는 어떤 형식으로 타자에 접근해왔는지? 어떤 접촉 양식을 취해왔으며 어떤 소통의 방법들을 이룩해왔는지?  이 과정에서 우리의 이성과 이로부터 추출되기도 하는 폭력은 어떤 패턴을 밟아왔는지? 소설<솔라리스>에서 우리는 수시로 이런 질문들을 추출해낼 수 있다.

 <솔라리스>의 원작자 스타니스와프 렘은 타르코프스키와 2002년에 있었던 소더버그의 리메이크 작업에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논쟁의 핵심은 두 영화가 공히 '소통과 인간 인식의 한계' 문제보다는 '로맨스'쪽으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있다. 두 영화 모두를 보지 않은 입장이라 무어라 말하기 어렵지만 내가 영화 감독이었어도 그런 방향으로 따라가기 쉬울 성 싶다. 원작 <솔라리스>의 후반부는 다분히 설명적이고 철학적이다. '솔라리스학'이라는 것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과 서술들은 드라마적 진행에 있어서는 방해가 된다. 물론 이런 논쟁의 함의를 읽고 지적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 역시 많을 것이다. 요는 렘의 <솔라리스> 후반부는 드라마라는 측면에서 취약하다는 것이다.  2% '행동'이 부재하거나 이펙트가 약하다. 이미지의 결합과 분배를 통해 초현실주의적인 영화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면 감독들은 이런 드라마 구조에 대해 고민하기 마련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는 '예술은 모방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 미학을 한 줄로 요약한 이런 말이 나온다.

비극은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삶, 행복과 불행을 모방한다....우리가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은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 

영화<솔라리스>의 감독들이 '생각하는 바다'인 솔라리스보다 주인공인 캘빈과 레야의 문제로 자꾸 시선을 옮겨가려는 것도 어느정도 이해해 줄 수는 있다. 영화<솔라리스>를 최근에 구하고 있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또 다른 방식의 리뷰도 가능해지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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