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 굴드, 나는 결코 괴짜가 아니다 예술 거장 시리즈 1
브뤼노 몽생종 지음, 임동현 엮음 / 모노폴리(monopoly)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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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난해 글렌 굴드의 새 음반이 출시되었다. 죽은이의 개인 창고에서 발견된 새로운 음원이었을까? 아니다. 그것은 '재탕'이었다. 새 음반은 55년 글렌 굴드의 첫 레코딩 <골드베르크 변주곡>를 리메이크 한 것이다. 통상적인 구분을 위해서 '젠프 음반' 이라고 한다.  '젠프'는 리메이크에 사용된 컴퓨터 시스템의이름이다. 이 음반은 55년 모노로 녹음된 음원을 컴퓨터로 데이팅화한 것이다. 굴드의 타건, 패달링, 음량 정도를 그대로 수치화하여 '야마하' 피아노로 다시 녹음한 것이다. (55년 녹음은 애칭이 '치클링'이었던 스테인웨이 피아노 아니었나 싶은데...'치클링'은 굴드 생전에 사망 신고가 내려졌고, 이후 굴드가 찾은 것이 '야마하' 피아노로 알고 있다. 정확히 잘 모르겠다) '음악 재현의 수량화'라는 측면에서는 거의 혁신적 방식이다. 이 작업은 모노를 스트레오로 듣는다는 꿈을 이룬 것 이외에 다양한 미학적 질문을 던진다.

"과연 그것은 글렌 굴드의 음악인가?" 에는 전문가들과 음악팬들 사이에 이견이 많다. 미학관 전체를 반영해서 답해야 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 "글렌 굴드 라면 자신의 과거 녹음이 이렇게 복제되어 재생산되는 것에 동의했을 것인가?" 에는 비교적 쉽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결코 괴짜가 아니다>에 나오는 굴드의 인터뷰를 보자.

"기대한 만큼의 결과를 얻을 수만 있다면, 2백군데를 연결해서 하나의 곡을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그것이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계적인 수단으로 만들어진 연주를 속임수라고 이야기하는 사고방식에는 짜증이 납니다. 환상이나 조작을 최대한 이용해서 이상적인 연주를 만들어냈다면, 그 일을 멋지게 해낸 사람에게 경의를 표해야 할 것입니다."

실황 공연을 싫어한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기벽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음악 미학과 관련된 부분을 제외하고 부차적인 부분에서는 언론들의 입방아가 만든 스캔들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책 초반부에는 굴드가 그의 괴이한 행동들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는 글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한 여름에도 코트를 입고 다닌다.' '썩어빠진 의자를 신주단지처럼 모신다.' 등등..이런 가십들을 제외하고도 글렌 굴드가 좀 특별한 사람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어린 시절 부터 30대에 라이브 무대에서 은퇴하겠다고 말했고, 실제로 32살에 공연장 밖으로 몸을 빼냈다. 사실 비범한 30대피아니스트라면 국제적 인지도를 높여 나가며 세계를 무대를 누비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런데 그런 나이에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이것은 '무대 공포증' 때문이 아니다. 여기에는 음악 예술에 대한 글렌 굴드의 '미학'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대개 클래식 연주가들은 '실황 연주'를 '레코딩'보다 '진정성' 있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음악이라는 시간적 예술이 갖는 '1회적 재현'에 대해 아우라를 부여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음악가들은 '실황/스튜디오'를 병행하면서 부와 명성을 쌓는다. 간혹 나타나는 극단적인 '레코팅 혐오가'-예를 들어 세르지우 첼리비다케 같은-역시 '레코드형 인간' 글렌 굴드 만큼이나 희귀하다.

굴드가 음악을 대하는 방식은 다분히 북구의 수도승 같다. 그는 음악팬들을 위해서도, 무대 앞의 관객을 위해서도 음악을 하지 않는다. 그에게 음악은  그를 통해 져핸되어야 하는 신의 형상과도 같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면의 고요'가 필요하다. 청중의 피드백이라던가, 흥분과 광기 같은 것은 '음악의 음악' 을 만들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음악과 만나는 것이지, 사람들 앞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청중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나는 실제로는 나 자신을 위해서 연주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기술의 발전(예를 들자면 '매체 저장기술'이나 '매스 미디어'의 도입같은) 불러온 예술사회학적 변화에 대한 그의 신념을 말한다.

" 음악이란 개인적 형태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음악이 집단요법으로서, 또 그것과는 다른 어떤 공동체험으로 이용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음악을 듣는 사람들을-그리고 연주자까지도- 명상 상태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주위에 앉은 2999명의 사람과 함께 이런 상샅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글렌 굴드는 결코 피아니스트로만 머물 수 없는 인간이었다. 대개의 위대한 연주자들은 '악기의 사제'가 된다. 면벽수도하는 심성이 있지 않으면 거장이 되기 힘들다고도 한다.(물론 간혹 날라리 천재들도 나온다.) 글렌 굴드 역시 이런 수도회 소속이다. 하지만 그는 매일 매일 예배하고 묵상하는 전형적인 수도승이 아니다. 예를 들어 그는 레코딩 전에 48시간 동안 피아노를 손에 대지도 않는다고 한다. 또 피아노에 멀어지면 멀어질 수록 더 좋은 음악을 하게 된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주인공 윌리엄처럼 이것 저것 들쑤시고 다녀야하는 수도승이다. 글렌 굴드가 라디오 다큐멘터리나 글쓰기,작곡등에 더 깊은 관심을 갖은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그렇지만 그가 가장 잘한 것은 '피아니스트'였다.)  글렌 굴드 역시 피아노에 자기를 가두어 놓기에는 몸이 근질 근질 거렸을 게다. 간혹 TV에 나와서 웃음을 주시는 임동창 선생처럼 말이다. 임동창은 자신이 뭐하는 사람인가 물으면 "그냥 임동창이오"라고 답한다고 한다. (요즘은 빡빡머리 그보다 그의 아내가 더 유명해진 듯 하다)

글렌 굴드는 피아니스트이면서 피아노적인 음악을 싫어했다. 여기서 피아니노적인 음악이란 것은 -그는 낭만주의 음악을 주로 말하는데-'화성적'인 음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굴드 스스로 이에 대칭적인 의미로 '대위법적 음악가'라고 칭했으니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그가  피아노를 위한 작곡가다로 할만한 '쇼팽, 슈만, 리스트" 를 싫어했던 것은 논리적 귀결상 당연해 보인다. 그는 이들 음악에 별다른 매력을 못느끼고 설령 녹음을 하더라도 통념을 벗어나는 해석을 보여주었다.(그의 쇼팽은 들어 본 적도 없다.) 물론 후기 낭만주의시대에 브루크너나 말러 같은 이들이 폴리포니에 대한 가능성을 확장한다. 하지만 그 시대는 '오케스트라의 시대'였다. 그 위대한 작곡가들은 피아노를 위한 곡에 그다지 애정을 쏟지 않았다. 결국 글렌 굴드에게 피아노라는 악기는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면서도 자신이 넘어서야 하는 도구였다.  그는 평생에 걸쳐서 피아노와의 '거리 두기'를 통해서 음악을 성취해 나아갔다. '피아노 음악' 을 포기하는 댓가로 '음악'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그도 좋아하는 작곡가들이 있다. '바흐-베토벤-리하르트 슈트라우스-쇤베르크' 등이다. 그에게 쇤베르크는 현대판 바흐였을 따름이고 20세기의 베토벤같은 경계인이었다. 현대음악에 대한 그의 견해는 읽어 둘 만하다.( 단 내가 쇤베르크나 베베른에서 머뭇거리고 있기 때문에 책 후반부에 나오는 글렌 굴드의 현대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제대로 이해했나 의심은 간다.)

글렌 굴드는 '경계선'에 서 있는 인간이었으며 그런 사람들을 좋아했다.

"나는 항상 '세기말적'인 사람에게, 한 시대의 마지막에 있으면서 그 작품 속에서 언뜻 대립된 두가지 경향을 화해시키는데 성공한 사람에게 생생한 애정을 품어 왔습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테크닉적으로 가장 큰 애정을 품는 사람은 바흐지만 정신적으로는 올랜드 기번스' 라고 말한다. (글렌 굴드의 기번스/버드 음반은 아주 좋다.) 이는 자신의 '자아 이상'을 말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역시 세기말 속에 살았던 음악가였다. 또한 하나의 이름에 머물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시대와의 소통'을 위해 '시대와의 단절' 을 자청하는 형용모순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이다.  

그는 '지성'과 '순수'라는 양발 엔진을 부착하고 차가운 겨울 하늘 나는 조종사와도 같았다. 아무도 선뜻 가보지 않았던 그 코발트 빛 고독 속에서 그는 신의 얼굴을 보고 있었을까?  

글렌 굴드, 그는 피아니스트가 아니다.

그는 살아서 음악가였으며 이제는 전설이 되어간다. 

첨언)) <나는 결코 괴짜가 아니다>는 2부로 구성된 인터뷰집이다. 앞의 인터뷰는 실제 인터뷰 모음이고 2부는 가상 인터뷰 형식으로 편집된 실제 인터뷰이다. 여기에 나오는 내용들은 글렌 굴드의 전기나 그를 다루는 글에서 몇 번 언급된 것들이다. 전기작가들도 결국 그의 인터뷰를 통해서 그를 구성한 셈이었을테니까. 번역자는 음악전공자이다. 그러므로 글렌 굴드가 말하는 음악 이야기와 미학적인 부분에 대한 선이해는 어느 정도 믿어도 좋을 것 같다. 문제는 그의 국어이다. 좋은 번역은 기본적으로 외국어에 대한 이해와 충분한 국어능력이 필요하다. 하나만 갖추면 TRAS..라는 단어의 양방향적인 어원이 무색해지지 않는가? 원본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고, 인터뷰 특성상 회화체로 중언부언 했을 가능성도 있다. 말이란게 원래 그렇지 않은가? 잠깐씩 첨삭도 하고 다른 단어들을 끼워넣기도 하고... 하지만 번역하지 않은 단어들도 있고( 예를 들어 굴드의 '퍼스펙티브'..한 단어로 규정하기 어려운 '퍼스펙티브'라면 최대근사치의 단어를 찾아야 한다.) 또 국문법에 어색한 문장들도 간혹 읽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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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11-14 14:21   좋아요 0 | URL
굴드에 관한 오스왈트(Ostwald)의 평전을 읽으며 그에 대한 편견을 바로 잡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간 너무 명성이 부풀려진 연주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요. 지금은 처음의 선입견을 많이 없애고 많은 피아니스트 가운데 독특한 존재로 그를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와 그의 연주를 좀 더 균형 있게 바라보기 위해 이 책도 한 번 읽어봐야겠군요.(여전히 그가 남긴 말들 가운데 몇몇은 전혀 수긍할 수 없지만요.)

드팀전 2008-11-14 18:00   좋아요 0 | URL
그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이 않을겝니다.굴드리언들을 빼놓고는요. 말씀 하신 대로 '독특한'피아니스트였지요. 그 독특함이 튀기위함이 아닌 음악과 사회와의 관계 내지는 미학에 대한 깊은 자기 사유에서 나왔고 또한 보편성을 얻을 수 있었다는데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굴드적인 미학관이 여전히 소수적인 가치로 평가받는 것은 여전하지요.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망
박호성 지음 / 책세상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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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본주의의 쓰디쓴 바다에 사회 개량적인 레몬을 한 병씩 부어서 사회주의의 달콤한 바다로 변화시키려는 환상적 노력일 뿐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민주주의는 동네 아이들이 발로 차는 깡통같다. 우파는 ' 기회주의적 빨갱이'라고 해드락을 하고 좌파는 '개량주의적 변절자'라고 암바를 건다. 그 역사적 기원도 깊다. 앞에 인용한 로쟈 룩셈부르크가 직접적인 예이다. 좌파의 '백가쟁명' 시대라고 할 만한 제 2인터내셔널 시기,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 개혁인가? 혁명인가 ?> 에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와 카우츠키의 '개량주의적 중도파'에 대해 파워슬램(로프반동을 이용하여 아래에서 들어 360도 던지는 기술)을 시도한다.

링 위에서의 난투극, 그리고 그 승부의 결과는?  20세기를 어떤 형태로든 변형된 자유민주주의, 현실사회주의(스탈린주의), 그리고 사회민주주의로 한 지붕 세 가족을 만들었다. (여기서 한 지붕은 유럽의 지붕이다.)

한국이라고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80년대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고민한 '좌파' 들은 마르크스주의 학습에 열기를 보였다. (이 열기의 문제점은 이 책에도 지적되고 있다. 학문적 조급증에 대한 비판이다.)  90년대 스탈린주의의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그 비판과 대안으로 '사회민주주의' 에 대한 관심이 잠깐 일었다. 하지만 역시 '깡통' 취급 받았다. 윤건차는 <한국 현대 사상의 흐름>에서 사회민주주의자로 '?' 를 쳐놓았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법하다. '사회민주주의'의 '개량주의' 에 대한 '좌파'내의 공격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한국 좌파 내의 '이념적 선명성'에 대한 강조와 그에 따른 분위기는 '개량'에 대해 날끗을 세웠다. 그래서 '개량주의=변절자' 라는 도식으로 공격하기 용이하다. 이 책의 저자 역시 현실에서 '개량주의'가 그런 의미로 이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최근 몇 년전 부터 '사회민주주의'의 연대도 생겨나고 숨어 있던 '사민주의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일종의 '징후' 같다. 패배를 모르는 신자유주의의 광풍과 그 전도사(아니..장로던가) MB정권이 오히려 '사민주의' 에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면 '더이상 대안이 없어보인다'는 절망적인 현실인식이  '사민주의'라는 '개량'에 대해 한 번쯤 더 관심을 갖게 한다. 그리고 이런 추세는 앞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좀 지나치게 나아가는 사람들은 'MB만 아니라면'주의자가 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사민주의'를 현실적 대안으로 생각 하게끔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혁명적 변혁'에 대해 현실적으로 정리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민주의' 를 비판하는 하나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사민주의'는 이미 '자본주의의 패배불가능성'에 대해 인정한 것, 즉 '대안부재론'을 받아들인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사회민주주의'는 국정 교과서에서도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의 하나로 그려진 적이 있다. 물론 국정 교과서는 '사회민주주의' 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들이 애용한 말은 '복지국가'였다. 그래서 지금도 진보적인 대중들에게 '복지국가'는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우리가 도달해야할 목표쯤으로 여겨진다. 이 말은 다시금 정리해 보면, (정치적으로 엄밀하게 분석하기 힘든) 한국의 진보대중들은 '사회민주주의'에 '친화적'이다. 독일 사민당의 사민주의 전형이 된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살펴보자. 대략적으로 이 책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망>에 나온 부분을 정리하면

1) 결정론적 사고,세계관적 동질성의 폐기  2) '혁명'을 거부하는 개량주의  3) 부르주아 질서 안에서의 가치 실현 4) 의회주의와 사회적 법치국가에 대한 신봉  4) 사회적 전 영역의 민주화 5) 사회적 국가 추진 5) 사회적 다원주의 6) 혼합경제

듣고 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진보적 대중들은 '그래. 나는 이제부터 사회민주주의자 내지는 사회민주주의적 지향'이라고 말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궁금하면 이 강령을 가지고 "예/아니오" 테스트를 해보시라..^^...재밌는건 어느 정당의 '강령'을 가지고도 예스가 많게 나온다.^^ 강령이란게 중요한 부분이지만 신학적이기도 하기 때문에 )

사민주의에 대한 논쟁을 여기서 다 하는 것은 무리다. 이 책은 주로 제 2인터내셔널기를 중심으로 사민주의의 탄생과 논쟁의 역사를 설명한다. 이런 논쟁은 따지고 보면 그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현재도 인터넷 등에는 그런 논쟁이 치열하다. 진보신당 내에서 평등파 그룹의 도발적 문제제기와 주대환의 '구좌파 척결론' 등이 그런 것이다.  나는 그동안 여러 번 한국 정당운동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이 '진보정당의 대중화'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의 한 자릿수 득표율은 한국정치의 기형적인 보수화의 영향이 크다.  하지만 그걸 욕만 한다고 아침이 오는가?  내 개인적 생각이지만 과거 운동권중심의 강철대오는  '진보정당의 대중화'에 저해가 된다. 정당은 하나의 정파가 아니다. 한 정당의 강령은 중요하지만 한 정당 안에는 다양한 이념그룹이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해야만 한다. 내가 민주노동당을 또는 진보신당을 지지한다고 집행부나 당의 어떤 방향에 반드시 박수를 보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물론 그 차이의 임계점이 오면 갈라 설 수 도 있다. 반대로 당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안고 가야하는 의무도 있다.  1891년 게오르크 폰 폴마의 개량주의적인 '엘도라도선언'에서 당에 대한 부분을 나는 현실정치적 입장에서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종파와 학파는 절대성과 함께 일하며, 그들의 요구를 실행가능성과 상관없이 내세우기만 하면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일하는 정당은 그렇게 행동할 수 없다...."

이 말에 동의하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종파와 학파의 비판도 겸허히 수용되어야 한다. 민주노동당의 분당과정에서 회사의 한 직원이 내게 물었다. "어...진보신당 지지하시나 봐요. 그러면 PD파인가 보네"  "...^^;"  무식한 친구가 신문 보고 웃자고 한 이야기였지만 발끈 해서 '아...무슨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에는 전부 NLPD만 있는 줄 알아요." 라고 대답했다. 거기에는 사민주의자, 자율주의자, 생태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진보적 자유주의자, 반 한나당주의자 ...별별 사람이 다 있는거에요"  난 지금도 이 생각이 맞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종의 도가니탕 같은 민주적인 '당'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보정당이 성공하려면 '사회민주주의당'을 선언해야하는 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진보정당의 대중화' 에 분명히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꼭 그래야하는 가에서는 아직 고민 중이다. 왜냐하면 당 강령이나 지향때문에 진보정당 대중화가 느려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가 라는 문제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진보정당들이 대중화에 성공하려면 분명히 좀 더 '대중적인 시각'과 '대중적인 정치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2002년 <사회비평>이 주도한 대담에서 진중권은 '진보정당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과감히 '사민주의정당론'을 이야기했다. 당시 진중권은 '민노당이 당당히 사민주의 강령'을 내걸야야 된다는 쪽이었다. 역사 속에서 유일하게 현실 정치에서 성공한 '좌파' 이념이 '사회민주주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진중권= 사회민주주의자' 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이념에 사람이나 현실을 맞춘다는 것은 그리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니다. 대충 이 정도 이야기하면 진보적 인사라면 '사회민주주의'를 해야할 것 같다. 그렇다. 야만적 자본주의 하에서 그리고 사회적 안전망이라고는 부실한 한국에서 공공성의 확보와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데 반대할 이유가 뭐가 있나 싶다. 이 책의 저자도 말하는 '이념적 과격성'은 주머니에 넣어두고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념적 과격성'에 대해서는 나도 참 할 말이 많다. 

 사회주의와 사민주의 사이에 '국가'문제는 중심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었었다. 이걸 좀 빌려오자.  진보적인 사람들 중에 의외로 '국가 폐지론자'가 꽤나 있다. 지난 시절 '국가폭력'에 대한 '상흔' 때문이다. 또 '국가주의/국가'를 구분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좌파의 경우 마르크스의 '국가폐기론'(그는 국가를 부르주아 지배도구로 보았으니) 과 '포스트주의'의 영향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장 많은 것은, 이것 저것 다 떠나서  존 레논의 '이메진' 에 영향을 받은 ' 무정부주의적 낭만주의자'이다. 그런데 여기에 자신의  '진보'를 물리적으로 결합시킨다. 그러면 이제 완전히 이론상 모순적이 된다. '현재 폭력적인 자본주의 하에서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공공성을 높이기 위해 국가의 기능이 강화되어야 한다.'( 차원은 다르지만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나온 것 역시 독일 사민당 내의 '이론적 과격성'과 '현실적 개량' 사이의 이론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베른슈타인은 후자의 이론적 통일성을 모색해 낸 것이다.)

뭐 어쩌라는 것인가? 나올 수 있는 궁색한 답변은 '장기적으로 국가를 없애고 그 전까지는 이윤에 눈 먼 사기업을 통제하기 위해 국가의 기능을 강화한다.'  차라리 사민주의처럼 '국가=중립' (이것도 말도 안되는 접근이다.) 하는게 낫지 않을까 싶다. 공상적 사회주의는 맑스가 비판한 것이기도 하다. 책의 저자는 '이념적 과격성'이 좌파 내에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주로 '골방좌파'들을 타깃으로 하였지만 이것이 꼭 '골방' 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가장 혁명적인 사람들은 술자리에 있다. 그들은 가끔 '전쟁으로 전 인민의 절반'을 죽이기도 하고, '청와대에 확 불질러서 MB를 쥐포'로 만들기도 한다. 뭘 못하겠는가?   

잠시 삼천포로 갔다 왔다. 다시 '사민주의'로 가자. 그럼 복지국가를 만들 '사민주의'에 대한 확신이 들었는가? 그렇다면 ....그런 확신에 찬물을 끼얹자.

책의 저자 역시 사민주의의 자체 모순에 대해 스스로 누차에 걸쳐 말한다. 여러번에 걸 등장한다. 사민주의자가 스스로 '자기모순'이 있다고 강조한다면 이건 그냥 겸손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자본주의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을까?', '사회적 분배를 위해 자본주의 소수에 호소해야하는데 그것이 가능한가?'  저자 역시 사회민주주의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제3의 길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사회민주적 개량주의는 '사회주의의 탈을 쓴 자본주의'에 가깝다고 말한다. 물론 사회민주주의 내부에도 우파와 급진파가 나뉠 수는 있지만 기본적인 모순은 동일하다. 전통적인 사민주의에 대한 지적처럼 사민주의는 '분배' 차원에만 집중하고 있다. '복지' 라는 개념 자체가 '평등한 분배'이다. 그러면 여기서 잊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코헨은 이렇게 말한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중에 대한 착취의 결과에 대해서는 민감하지만 착취의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사민주의를 주장하는 저자 역시 이 말이 사회민주주의의 실체를 정확히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사민주의자들도 공장내에서의 노동자들의 의사결정권 확충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자본가의 양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 결국 자본주의와의 대결을 최소화하려는 사회민주주의의 모습 말이다.

그외에도 현실적 사민주의적 성취를 이루어냈던 역사적 상황에 대한 분석도 들어 둘 만하다. 사민주의는 경제적으로 보자면 케인즈주의적 실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정성진의 <케인즈주의인가? 21세기 사회주의인가?> 에서는 '사민주의'가 유럽에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세계경제의 호황기'에 두고 있다. 그러나 70년대 석유파동이후 세계 경제는 불황의 그래프를 따라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민주의의 중심이 될 '노사의 평화로운 조합주의'가 이루어지기 쉽지 않다. 또한 그 경제 활성화 시기는 영구전쟁경제(냉전)에 힘입은 바 크다. 다시 재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금융자본주의의 세계화에서 일국내의 사회민주주의적 실천 역시 예전만큼 편안하지 못하다. 스웨덴 모델같은 경우도 이미 절정을 지나간 것이고 그것이 다시 반복될 수 있는 정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스웨덴 모델에 대한 사이크의 분석은 재미있는 사실을 보여준다. 스웨덴의 순사회적 임금이 '제로'에 가까왔다는 것이다. 즉 벌어서 세금내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합의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뜻하는 바는 또 있다. 바로 사회복지정책의 재원이 실제 노동자의 지갑에서 전부 나왔다는 것이다. 자본/노동의 계급적 소득재분배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 내부의 분배라는 점이다.  

하여간 우리 사회에서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를 논하는 것은 다분히 이론적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의미가 없지는 않겠으나 현실 정치와 정세 그리고 변화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  그런면에서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어도 사회민주주의적 실천은 꾸준히 이루어지는데 동의해야만 한다. 홍세화는 사회주의/사민주의의 논쟁에 대해 쓸모없는 짓이라고 말한다. '서울에서 부산 가는데, 대구 쯤 가서 어디로 갈라질 지 이야기해도 되는데 미리 창원갈지 마산갈지 가지고 싸운다.'라고 말이다. 다시금 말하지만 이념적인 틀이 현실을 먼저 재단해서 준비해 놓을 수는 없다.  

책에 대한 이야기 하자. 책 제목이 책의 중요한 두 부분을 나누어서 이야기 해준다.<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망>. 즉 하나는 사회민주주의의가 역사적으로 걸어온 길(배경, 태동, 성장, 논쟁, 실패, 재도약, 국가간 비교 등) 을 보여준다. 그리고 후반부는 우리나라에서 사민주의의 전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책 서문에서 '저널리스틱한 접근'과 '아카데믹한 접근'을 병행하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이론의 상아탑 주의대신 이론의 '공설시장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취지에 얼마나 충실했는가는 독자의 몫이지만 비교적 쉽게 쉽게 씌여진 것은 사실이다. 특히 전반부 '사민주의의 역사'는 간략하면서도 이론적 쟁점들을 일목요연하게 쓰고 있다. 이 점은 책의 후반부에 대해서도 기대를 갖게 한다. 그렇지만 책 후반부는 바람빠진 풍선 같다. 이 글들이 '민노당의 의회진출'이라는 지지난 총선의 흥분된 분위기를 바탕으로 씌여진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보다는 글이 주목하고 있는 부분이  '사회민주주의적 실천'이라는 것에 이르지 못하는데 궁극적 한계가 있다. 저자는 결론에서 '제 2의 민주화 운동'이나 '국가보안법 폐지' '복지국가 체계와 3생의 정치' 등을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회교과서의 마지막 장같은 모습이다. '이래 저래 하여 밝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자."라는 식이다. 전반부의 거대한 이론적 영역을 일괄적으로 요약하는 것이-이미 나와 있는 사실들이니까- 학자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사회민주주의의 역사 부분만 요약할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 전반부만 읽도록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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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8-09-22 16:43   좋아요 0 | URL
'로자 룩셈부르크'인데요.^^

드팀전 2008-09-22 17:32   좋아요 0 | URL
뭐 별로 차이를 모르겠는데요.^^ 그렇게 쓴다면이야..ㅋㅋ

로쟈 2008-09-22 21:26   좋아요 0 | URL
'로자(Rosa)'와 '로쟈(Rodya)'이니까 차이가 없는 건 아니죠. 안 그래도 제가 오해를 많이 받아서...^^;

드팀전 2008-09-23 09:14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그런 의중인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라스콜리니코프님

노이에자이트 2008-09-27 15:40   좋아요 0 | URL
사회민주주의 논쟁은 19세기말 20세기 초엔 일급의 논쟁가들이 가담했기 때문에 그 때를 다루면 박력이 있지만 최근의 지나치게 개량화된 뒤의 역사는 다소 맥이 빠지니까 저자로서도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저도 말은 많이 들었지만 북구 사민주의는 아직 책을 안 사 놨거든요.계급과 민족문제를 다룬 책들도 룩셈부르크-베른슈타인-카우츠키 논쟁,레닌-카우츠키 논쟁,그 뒤에 반파시즘을 둘러싼 코민테른 논쟁 이런 식으로 다루지 현대사민주의를 다루진 않아서 따로 전후 사민주의에 관한 책은 사지 않았어요.유용한 글 잘 읽었습니다.

드팀전 2008-09-29 09:11   좋아요 0 | URL
^^ 주요한 논쟁의 근거들은 그 시기에 거의 다 다루어진 듯 합니다.그나마 대처리즘에서 어떻게든 살겠다고 나온 '제3의길'논쟁이 -친자본경향에 더 가까와진 지평에서 나온- 최근의 사민논쟁이 아닐까 싶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2 12:37   좋아요 0 | URL
최근에 트로츠키 주의자인 토니 클리프 부자가 영국노동당,특히 블레어를 엄청나게 비판하는 영국노동당사를 펴냈더라구요.굳이 좌익이 아니라 해도 블레어같은 사람이 노동당 출신이라니 이상하죠.대처의 아류인 것 같은데...

드팀전 2008-10-02 15:28   좋아요 0 | URL
사민주의 역사에서 보면 영국 노동당 역시 기본적으로 비마르크스주의 의회주의에 뿌리를 두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대안이 없다'는 담론적 지배상황에서는 '대처리즘'과 '노동당 내 우파담론' 사이에 그런 친화성도 나올 수 있을 법합니다. 결국 '연속적 개량'은 소실점에서 그들이 싸우려는 대상과 동일해질 수도 있다는 교훈을 주는 것 같기도 하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3 00:39   좋아요 0 | URL
40-50년대의 영국 노동당 브레인이던 토니,라스키 등의 책을 읽으면 노동당 냄새가 꽤 났는데 제3의 길인가 그런 것은 통 노동당스럽지가 않아서 뭐 저래...하는 생각만 들죠.대처가 요즘은 망령이 들었다네요.상태가 점점 심각해져가고 있답니다.철의 여인도 세월엔 어쩔 도리가 없나봐요.

드팀전 2008-10-03 21:03   좋아요 0 | URL
^^ 대처는 집권할때부터 망령이있던것 같아요. MB정권의 기본적정서는 대처리즘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물론 당시 영국과 현재의 한국이 '공공성'에 대한 정치권의 인식, 세계 경제의 상황,사회영역의 발전정도등에서 현격히 차이가 나기 때문에 같은 취급을 할 수는 없지만요.
그런 점에서 MB와 현정권실제들은 더 골때리는 거지요. 전 개인적으로 진보의 연속 패배를이해하기 위해 대처리즘(레이거니즘)의 당시의 성공-물론 그 실패가 지금 드러나고있는 금융 시장의 붕괴지요-을 살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의외로 신자유주의가 어느날 갑자기 떨어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변하지 않을 경험이라고 절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역사 속에서 힘들의 작용에 의해 특정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한시적 경향이라는 점을 알게되면 '영원한 절망'같은 것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텐데...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역사가 주는 교훈에 대해 늘 민감해야 할 듯 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03 22:21   좋아요 0 | URL
뉴라이트가 대처리즘을 숭배하면서 대처 전기도 새로 나오고 하더군요.이 방면엔 박지향 씨가 앞장서더군요.박 씨도 한때 대처를 싫어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런 게 아니라면서 대처리즘을 옹호하는 선두에 섰죠.이 양반이 노동운동과 영국사를 전공해서인지 상당히 치밀한 논리를 전개하죠.대처리즘의 기본적인 경제정책을 알아보려고 맥아더 점령 당시 일본에 실시한 덧지라인을 공부하고 있어요.대략 재정과 세금정책을 알기 위해서입니다.덧지는 트루먼의 전권위임을 받고 일본에 파견되어 강력한 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하는데 대처리즘과 유사한 것 같아요.

드팀전 2008-10-04 16:01   좋아요 0 | URL
^^ 안그래도 제가 지금 기파랑에서 나온 박지향의 책을 보고 있습니다. 스튜어트 홀의 책을 보기 위한 앞 단계로 보는 성격이 강하지요. 몇 달 전에 동아TV에서 하는 <세기의 위대한 여성>중 대처편도 관심을 가지고 봤었지요.대처와 관련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박지향의 책 서문에도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예전에 자기는 영국좌파에 영향을 받았지만 지금은 아니다..그리고 젊은 날 믿었던 진실을 아직도 믿는 다는 건 철부지들이나 하는 짓이다..라는 식으로 '좌파유아론'같은 뉴라이트들의 상투적 글을 서문에 쓰고 있습니다.
뉴라이트의 어머니로서 대처를 다루고 있지만 대처의 한계에 대해서도 살짝씩 언급합니다. 박지향이 칭찬하는 특징들은 다른 측에서 보면 공격할 수 있는 대목이 되기도 하구요.

제가 걱정하는 것은 MB정권의 연속집권입니다.대처의 보수당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들은 비판하고 '타산지석'하지 않으면 한국에서 그럴 가능성이 짙어보입니다.어쩌면 이 정권 말기에 발생할 사회적 혼란을 더 강력한 '대처리즘'으로 돌파하려는 세력들도 나올 수 있겠구요. 대처가 계급적 갈등을 '애국주의'와 '전통적 도덕관'으로 돌파했던 것 처럼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4 23:35   좋아요 0 | URL
홀이 이데올로기론을 다루는 학자라 좀 어렵더라구요.그가 쓴 대처리즘의 승리를 다룬 책도 저는 못보고 그런 건 계급배반 투표로 생각해서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정도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박지향 씨의 제국주의라는 책을 보면 영국의 최근 제국주의론이 소개되어 있는데 간단히 말하면 제국주의가 착취했다는 학설은 잘못된 것이다...제국주의 노선을 걸었다고 영국이 이득본 것도 없다...그런 식이더군요.하여튼 영국인들도 제국주의 정당화하는 기질을 아직도 못버렸어요.존 키건의 2차대전사를 보면 용감한 전투는 다 영국군이 하고,영국은 침략전쟁을 안 했다나...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노골적으로 하더라구요.

드팀전 2008-10-05 23:27   좋아요 0 | URL
이모티콘으로 비웃음은 어떻게 그려야하는지...^^
대처가 이용한 것이 '대영제국'에 대한 향수를 북돋는 '애국주의' 였잖아요. 보수당 내부에서도 반대하던 '포틀랜드 전쟁'같은 것에 국민여론은 흔쾌히 동의를 했지요. 뉴라이트들의 전술은 '우기다 보면 언젠가는 진실이 된다' 라는 장기적 계획인 것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07 16:58   좋아요 0 | URL
뉴라이트 계간지 시대정신 여름호에 박지향 씨가 대처의 경제정책에 대해 논문을 썼는데 결론은 우리나라에도 그와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했더군요.외모와는 달리 영 과격한 주장을 하더라구요.

드팀전 2008-10-07 18:13   좋아요 0 | URL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지는군요.^^ <해방전후사 재인식>을 비롯해서 교과서포럼까지 역사를 중심으로 한 뉴라이트의 난동이 시끄럽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8 16:34   좋아요 0 | URL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은 직접적인 뉴라이트 냄새는 안 나는 논문도 많아요.탈 민족주의 계열의 논문들도 있구요.<시대정신>은 좀 더 우파 이데올로기 냄새가 강한 글이 많이 실리죠.
 
고양이 대학살 - 프랑스 문화사 속의 다른 이야기들 현대의 지성 94
로버트 단턴 지음, 조한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좋은 역사가는 전설 속의 식인귀를 닮았다. 인간 육체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이라면 그는 자신의 제물을 그곳에서 발견할 것임을 알고 있다."    .... 마르크 블로크, <역사를 위한 변명>.

 서재에서 오랫동안 숙성된 책이다. 예상했겠지만 오크향이 묻어나지는 않는다. 향 싼 종이에선 향 냄새가 난다는데 서재에 꽂혀있던 책에서는 그냥 책 냄새만 난다. 그래도 생활의 향기가 묻어서인지 새 책 냄새는 사라졌다.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은 편안하게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니다. 이 책의 방법론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상업적으로 활용된 각 종 <조선의 0000>,<기담00> 시리즈들에 비하면 말이다. 이런 류의 역사책은 서점가에서 인기다. 하나의 트랜드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 책들은 조선시대나 근대화 초기의 기담이나 일상사들, 또는 숨겨진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를 통해 '태종태세'의 조선이 조금 더 화사한 색깔로 다가온다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이다. 그렇지만 그런 트랜드에서는 결코 로버트 단턴의 진지함과 깊이 있는 성찰을 만나기 쉽지 않다. 대중적인 역사서와 역사학계에 한 획을 그은 저작을 단순비교하는 것 부터가 사실 잘못일 지도 모른다. 더우기 18세기 프랑스의 문화사, 그 중에서도 망텔리테의 역사를 거내들기 때문에 녹녹치가 않은 것이다. 

로버트 단턴의 역사적인 방법론은 일종의 고전적 아날학파 비판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숫자와 통계, 구조와 장기분석에 치중하는 전대의 방법론에 그는 돋보기를 들고 들어간다. 일종의 미시사로 이야기할 수 있다. 역자 서문은 단턴의 방법론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1) 밑으로부터의 역사, 2) 민속학과 인류학의 결합 ,3) 문화 흐름의 쌍방향성이 그것이다. 쉽게 말하면, 갑돌이, 갑순이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 사료로서 가치가 없어보이는 자료들로 부터 그 시대와 그 이상을 읽는다는 것. 한 시대의 문화가 지배/피지배의 일방통행이 아니라 그 안에 문화적 소통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양이 대학살>의 첫번째 이야기 '마더 구스 이야기' 에서 마지막 '문화적 소통'의 적절할 예를 찾을 수 있다.

 '마더 구스 이야기'는 동화책에 나오는 '빨간 모자 소녀'의 원텍스트이다. 늑대가 집에 있는 할머니를 잡아먹고 빨간 모자를 기다린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것은 원래 구술전통 속의 민담이다. 이것이 '마더 구스'라는 형태로 기록된다. 이 와중에 텍스트는 변형된다. 원래 구술 전통의 민담들은 '잔혹극'에 가깝다. 로버트 단턴은 이 책들이 귀족들이 글로 쓰고 향유하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작가들은 어디서 이 이야기를 들었을까? 로버트 단턴의 탁월한 점은 이렇게 소실점으로 향해 치밀하게 돋보기를 밀어서 어떤 결론을 끌어낸다는 것이다. 그 귀족작가들은 어린 시절 유모들 손에 컸다. 그 유모들은 평민이거나 하인출신이다. 그녀들은 그녀의 할머니로 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다. 이것이 단턴이 말하는 문화적 교류의 한 예이다. 조금 차원을 달리하지만 부르주아들의 생활문화에 귀족들이 동화되어 가는 과정도 그런 엘리트들 속에서 일어나는 교류의 한 예가 된다.

이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2장 '노동자들은 폭동한다: 생 세브랭 가의 고양이 학살', 4장 '한 경찰 수사관은 그의 명부를 분류한다: 문필 공화국의 해부' ,6장 '독자들은 루소에 반응한다: 낭만적 감수성 만들기를 흥미롭게 읽었다.

2장 '고양이 학살'은 인쇄소 직공들이 부르주아에 대한 불만을 그들의 애완고양이를 죽이고 이를 공연하며-그들의 용어로는 '복사'하며 -즐기는 모습을 그린다. 일종의 민중저항의 극장판 형식을 보여준다. 로버트 단턴은 '이것을 '민중저항의 현명한 예'이다.' 라고 승리에 가뿐 목소리로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축하연만 즐기는 것은 얼마나 얄팍한 일인다. 단턴의 텍스트에 대한 질문은 더 다양하다. 그는 텍스트를 통해 가내수공업이 공장제로 바뀌어가던 시기의 장인과 도제의 사회정치적 상황에 대해 읽어낸다. 임금노동자들의 발생과 함께 장인들의 위상이 흔들리는 과정도 그린다. 또한 임금 노동자들이 상당히 유동성을 갖고 있다는 것도 읽어낸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고양이를 죽였을까에도 질문을 던진다. 단턴은 이것이 '보수적 안정성과 체제 유지'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을 말한다. 카니발의 사육제와 순종의 사순절의 배치를 통해서 말이다. 또한 직인들이 부르주아를 공격했던 방식이 '명예훼손'이었다는 점도 의미있게 짚는다. 그들은 부르주아에게 보복당하지 않을 선을 경험적으로 파악하고 그 안에서 문화적 저항을 실천한다. 거기에는 박장대소의 웃음이 있다. 그리고 이 웃음은 결정적인 봉기의 순간까지 상징적 단계로 국한된다. 로버트 단턴은 직인들의 이 상징적 저항의 소재인 이 잊혀진 웃음이 저 멀리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까지 이어질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4장 '문필공화국의 해부'는  요즘말로 하면 한 정보과 형사의 목록을 분석한 글이다. 조세프 데므리라는 사람은 문필가들에 대한 정보동향을 파악한다. 그 안에는 현재 우리에게도 익숙한 디드로, 몽테스키외, 루소, 볼테르 등도 포함된다.1750년 당시 30대 중반의 작가들이 프랑스의 문필계를 쥐고 흔들었다. 또한 이들은 파리와 프랑스 북부쪽에 주로 거주했다. 그들 중 대다수는 관료들이나 하급관리들의 자제들이었다. 농민 출신은 거의 없었다. 단턴은 대충 이런식으로 통계적으로 당시 지식인들을 그려낸다. 그리고 또 하나 씩 더들어가기 시작한다. 데므리의 자료는 건조한 보고서 형식이 아니라 자기만을 위한 목록이었다. 그렇기때문에 데므리의 개인적 평가나 주변 평가등 비객관적 요소들이 들어있다. 그 만큼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지식인층에 대해 다층적인 접근이 가능하게 되었다. 데므리는 마치 영화<타인의 취향>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문필가들과 어느 정도 세계관을 공유하기도 하고 그들을 비판하기도 또 동정하기도 한다. 데므리의 자료를 통해 우리는 당시 문필가들의 경제적 토대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또 그들이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경찰의 목록은 이후 계몽주의라는 혁명을 주도할 새로운 계층인 지식인층을 바라보는 당대의 어떤 시각을 읽을 수 있게 한다. 마치 지식인의 출범을 알리는 '서막'같은 인상말이다. 책을 읽고 있으면 이런 움직임들 속에서 계몽주의가 시작되는구나..혁명이 시작되는 구나..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6장은 긴즈부르크의 <치즈와 구더기>처럼 상인  장 랑송의 독서주문 목록을 분석하는 글이다. 그는 종교,문학,아동교육 등등 다양한 장르의 책을 구매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이 아동 교육책이다. 처음에는 '자상한 아버지였군'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점차 읽다보면 이것이 어떤 한 세계관과 동화된 주문목록이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부르주아 상인 장랑송이 동화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장 자크 루소'였다. 그의 도서목록에는 루소의 책들이 많다.그리고 단턴은 랑송의 개인적 편지글을 공개한다. 그 안에서 랑송은 끊임없이 '루소'에 대해 묻고 그 소식을 궁금해한다. 요즘말로 하면 일종의 '루소 팬'이다. 이걸 밝히기 위해 단턴이 이 글을 쓴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단턴은 루소의 소설<신엘로이즈>를 둘러싼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루소가 보여주고자 했던 '작가-독자'의 관계( 이것은 일종의 루소의 세계관이기도 하다.)의 새로운 지평을 말한다. 루소는 일부 식자층과 귀족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신엘로이즈>를 통해 도덕적 이상에 대한 동화를 독자에 요구했다. 그는 그만의 수사학적 방법을 통해 독자와 직접 소통한다. 마치 프로메테우스처럼 말이다. 그는 추상적 도덕성을 넘어서 일상에서 경험해야하는 도덕성의 터널로 독자를 빠뜨린다. 랑송과 이 책에 등장하는 수 많은 <신엘로이즈>에 대한 편지들은 이 책이 당시 폭발적인 명성을 누렸고 사람들의 삶에 어떤 자극을 도모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소설은 이것이 사실인가의 여부를 묻는 질문이 대다수를 차지할 만큼의 강력한 흡입력을 갖었다. 장 랑송은 '루소'의 열혈팬들 중 하나였고, 그는 루소의 메시지를 그대로 실천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그의 주문목록에 교육분야가 늘어난 것은 결국 루소의 '작가-독자'의 직접적 관계 맺음의 한 예가 된다. 루소가 글을 통해 그의 영혼을 열어놓고 독자들 역시 그것을 읽고 일상적 존재의 불완전성을 넘는 것이다.

로버트 단턴<고양이 대학살>의 결론에서 그의 역사방법론에 대해 언급한다. 앞에 말했던 아날학파에 대한 성찰로부터 시작된 길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그 한계에 대해서도 말한다. 하나는 증거의 문제, 또다른 하나는 표본성의 문제이다. 학자적 솔직함이다. 미시사에 대한 비판의 가장 큰 틀도 아마 이 정도 선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더 덧붙일 설명이 필요없을 듯 하다. 어떤 길을 진지하게 걷는다는 것은 그 길이 가진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다른 누구보다 더 성찰하면서 간다는 것이다. '나는 이 길을 가고, 이 길이 진리이니 그 외에 나는 모른다.' 는 학자이든 일반인이든 지양해야 되는 방식이다. 설령 내가 이 길을 가더라도 나는 길 위에 있으므로 계속 질문할 수 있다. 로버트 단턴은 그가 앞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이 '텍스트와 컨텍스트'사이를 오고가는 것이라고 솔직히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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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과 마르가리타 대산세계문학총서 69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김혜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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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게오르그 루카치, <소설의 이론>

그렇다. 자동차 배기가스 때문이다. 아니 술집의 네온 싸인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 도심에서 별을 볼 수는 없다. 작은 곰을 찾겠다고 옥상 위로 올라가는 소년이 없으니 밤하늘을 쳐다보는 어른은 더더욱 드물 수 밖에.

하지만 소년!  실망할 필요는 없다. 너무 오랫동안 굳은 상처는 굳은 살이되어서 아프지도 않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알라딘 천장에 뜨는 별이 있지 않은가?  또한 매주마다 시대의 교양인을 위한 영화 잡지에도 별이 뜬다. 안도의 한숨을 쉬자....oh! no.no. . 기침을 하고 가래를 뱉자.

'떠 봤자. 별은 다섯뿐이다.'

청천 하늘엔 잔 별도 많구요.이내 가슴엔 수심도 많다. 이미 간파하셨을 것이다.

"왜 별은 다섯뿐일까?" 가 내 수심의 뿌리이다. '많아봐야 고작...다섯이라니. 이건 부당하다'

나는 고전을 읽을 때 머릿 속에 환청이 들린다. 그 음악은 '감탄'을 도입부에 베이스 라인으로 깔고 간다.'둥 둥 둥둥' . 그리고 이어서 색소폰과 트럼펫같은 생각이 잼을 한다. 하나는 이런 감사의 멜로디를 쫓아간다. '이걸 읽지 않고 죽었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랄라라'  그리고 또 다른 멜로디는 탄식의 가사를 쫓는다. '도대체 뭘 하다가 이걸 이제야 본 거야. 띨띨띨..'

미하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에 대한 나의 소견은 다 밝혔다. 할머니 손등같은 인문학의 리뷰를 던지고 쾌청발랄 리뷰를 쓰니 9월 아침처럼 좋다.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해도..너의 목소리가 들려어어..너의 목소리가 들려어...너의 목소리..너의 목소리이이... .  - 델리스파이스 <차우차우>

모스크바 거리에 나타난 볼란드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매력적인 -이름이 여럿인 -친구가 전 서리이자 하-노리츠(예수)의 제자라고 자임하는 마태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너는 마치 그림자들을, 그리고 악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어.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한번 생각해보는 건 어떤가. 만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너의 선은 무슨 일을 하게 될까? 또 만약 이 지상에서 모든 그림자들이 사라진다면, 그때 지상의 모습은 어떻게 될 것 같나? 그림자는 사물과 인간들로부터 만들어지지. 여기 내 검의 그림자처럼. 그림자가 존재하는 것은 나무와 살아 있는 존재들이 있기 때문이야. 그런데 너는 지구 전체를 벗겨버리며고 하고 있어! 벌거벗은 빛을 즐기려는 너의 환상으로 이 지상의 모든 나무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벗겨내버리고 싶은 건가? 너는 어리석어."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여기다. 나는 물론 메피스토펠레스의 발푸기르스의 밤에도 볼란드의 아파트에서 열린 만월의 무도회에도 초청받지 못했다. 내가 설마 이 부분을 좋아했다고 '선 의지'로 무장한 '계몽주의자'들이 비난한다면 나는 당당히 꼬리를 내릴 터이다. "아니요. 그냥 취소할께요.  선이 반드시 승리하는 권선징악의 전래동화와 헐리우드 영화가 좋아요." 라고 사상전향을 할 것이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에 볼란드 일당을 따라가다가 이게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핏 검색에는 나와 있지 않다.( TV 드라마 이야기는 나와있다. )볼란드 일당의 행각을 보다가 문득 떠오른 감독이 '팀 버튼'이다.  볼란드 일당의 캐릭터는 마치 '팀 버튼 표' 영화에 나오는 악당들과 거의 흡사하다. 귀여운 그로테스크함도 그렇고, 베헤못과 코르비예프의 장난끼어린 짓도 그렇다. 악마 대장 볼란드와 고양이 베헤못의 체스 두는 장면은 진짜 배를 잡고 넘어지게 만든다.

나는 팀 버튼이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분명히 봤을 것이라고 내 맘대로 추측하고 싶다. 아니 크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내 맘대로 우겨버리고 싶다. 소설이 다루는 주제와 풍자는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더라도, 지금 유명한 헐리우드 감독 중에서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가장 그럴싸 하에 영화로 만들어 줄 사람 하나를 뽑자면 당연히 '팀 버튼' 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약간은 환상적이며서, 만화같은 미장센들도 너무 잘 어울린다. 그러므로 국내에 불가코프의 팬들보다 대략 11배쯤 많을 팀 버튼의 팬이라면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읽고 팀 버튼에게 제작 압력 이메일을 보내자...물론 팀 버튼이 영화를 잘만들어도 결코 불가코프의 소설을 따라잡기 힘들겠지만 말이다. 영화와 소설을 단순 비교하는 초등학교 방학 숙제형 감상만 피한다면 팀 버튼이 만든 영화도 즐거울 것이다. 원작이 뛰어나니까 말이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볼란드와 일당이 도착한 후 나흘 간의 소란과 거장이 쓴 본디오 빌라도의 이야기다. 모스크바와 예루살렘이 시공간을 확확 건너뛰며 아주 빠르게 진행된다. 역자 해제를 보면 이 시공간은 대칭적으로 배치된 것이다. 뭐 구조를 몰라도 흰 눈이 내릴 것 같은 모스크바 거리와 타는 목마름의 예루살렘을 오고가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다. 거기에 2000년 정도이 시간 이동까지 있다. 이런 시간여행을 기획하다니, 미하일 불가코프는 '볼란드'의 일행이 되어버린 '거장'이다.(중의법인거 알지..밑줄 쫘악)

 모스크바는 좌충우돌이다. 검은 마술사 볼란드의 등장 이후에 생긴 일이다. 이 일당은 재기발랄,깜찍하다. 특히 인간들이 '서류'에 얽매이는 것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 그래서 뭐든지 '서류조작'을 통해 인간들을 설득한다. 도저히 믿지 못할 일도 '서류' 보여주면 다 통한다. 근대사회에서 '서류'는 어쩌며 '존재'에 선행하는지도 모른다. 즉 '서류'가 있어야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주민등록증' 없으면 '비존재'가 되는거다.  TV 다큐멘터리나 진보적 잡지에 실린 '서류' 없는 '호모사케르' 들의 삶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면 좋을 듯 하다. 하여간 스탈린의 러시아 역시'서류' 한 방이면 다 된다. 거기에 볼란드 일당은 필요하면 알리바이까지 만들어주는 친절한 악마들이다. 그러니 모스크바가 몇 일 동안 헤괴한 일을 수습정리하게 위해 바둥거린 것은 당연하다.

'빌라도의 이야기는 거장의 소설을 통해, 또 볼란드의 입을 통해 액자소설처럼 구성된다. 페르 라게르비스크가 예수 대신 사면된 바라바를 모티브로 상상력을 펼쳐 <바라바>를 썼다. 이걸로 노벨상도 받았다. 소설 속 거장은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림으로 영원히 예수와 함께 이름을 남긴 본디오 빌라도 총독에게 상상력의 면류관을 씌운다. '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의 외아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조기 교육이 중요한게 초등학교 때 외운건데도 아직 기억이난다. 하여간 빌라도, 이렇게 운빨이 없을 수가 있나 싶다. 어쩌다가 저 기도문에까지 이름을 남겨서 만대에 이렇게 오명을 남기는가? 아마도 불가코프 역시 그런 빌라도가 불쌍했고 그에 대한 처벌이 너무 가혹했다 싶었나 보다. 거장을 통해 빌라도의 울먹이는 소리를 대신 들려준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주인공들은 불행한 거장과 그의 연인 마르가리타이다. "사랑은 골목길에서 갑자기 살인자가 튀어나오 듯이 우리 앞에 나타나 우리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난 사람들이니 주인공은 주인공이다.그런데 도대체 왜 그들이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받아야 하는 건가? 나는 볼란드와 그의 일행이 조연상 후보에 올르 수 밖에 없는 것이 아쉽다. 물론 그들이 아쉬워할 일이야 없겠지만...어쨋든 그들이 수상 무대에 오른다면 분명히 모스크바에서 했던 것 보다 더 깜찍한 흑마술 쇼를 보여줄 텐데 말이다.

전 세계에 중계되는 최고의 쇼가 될게 뻔하다.ㅋㅋ

사족))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몇 몇 구절을 썩먹었는데..."진실을 말하는 것은 쉽고 기분 좋은 일이다."같은 것들 말이다. 덧붙이자면 강 건너에서 말이다. '이명박은 쥐다 ' 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쉽고 기분 좋은 일인가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안한다. (알겠지만, 사회와 냉전중인 부적응자가 하는 말이니 무시해도 된다.흐흐 )

또 한가지 잠결에 있는 와이프에게 ' 운명을 함께 나누는 이' 라고 불러주었더니 잠결에도 웃으면서 좋단다.ㅋㅋ "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운명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에서 훔쳐왔다. 거 봐라.. 고전 읽으면 다 좋은거라구..연애하려면 고전을 읽으라구, 소년!! 이 책이 고전이냐구?  "몰라. 하지만 고전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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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8-09-01 13:00   좋아요 0 | URL
팀버튼과 거장 마리가리타라! 강한 포스가 느껴지는군요. 팀 버튼은 저도 좀 좋아하는 사람이라...읽어보고 싶군요. 기억하겠슴다.^^

드팀전 2008-09-01 15:12   좋아요 0 | URL
저도 예전에는 좋아했었지요. 지금은 뭐 그냥 저냥...
오랜만이지요.^^

mong 2008-09-01 16:43   좋아요 0 | URL
주말에 다크 나이트를 보고와서 드팀전님 글을 읽는데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옮겨 놓은 구절 보고 무릎을 탁 쳤어요 ^^
팀버튼은 저도 예전에만...

드팀전 2008-09-02 09:16   좋아요 0 | URL
몽님...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지난 번 서울 갔을 때 몽님도 봤으면 좋았을 것을...

mong 2008-09-02 17:32   좋아요 0 | URL
흐흐 드팀전님은 거북이 등껍질에 얼굴은 구여운 이미지세요
요즘은 뭐 어떻게 이놈의 일을 때려치고 먹고 살까...
고민 중이에요
그러나 어렵네요-

드팀전 2008-09-03 07:40   좋아요 0 | URL
거북이 등껍질에 귀여운 이미지....
전 그게 누군지 압니다.

"닌자 거북이들"... 아니야,난 절대. 우우우 ㅜㅜ

로쟈 2008-09-01 20:32   좋아요 0 | URL
유튜브에서 2005년에 제작된 <거장과 마르가리타> 10부작을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드팀전 2008-09-02 09:16   좋아요 0 | URL
러시아에서 만든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한번 구경은 해야겠지요. 자막이 있나 모르겠군요.

드팀전 2008-09-02 10:14   좋아요 0 | URL
^^ 자막은 없군요...원작에 충실하게 만들어낸 것 같은 느낌은 주었습니다. 물론 영화가 소설적 표현을 따라잡지는 못하겠지만요..장면을 보니까 소설 속 어느 부분이었는지 기억이 납니다. 못알아들으니 뒤로 확넘어가서 무도회 장면을 보고 말았습니다.ㅋㅋ

아하..영어자막이 있는 걸 찾았아요.흐흐흐..

2008-09-01 2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8-09-02 09:17   좋아요 0 | URL
마르께스도 저는 좋았는데...아 원래 전공이 이 쪽이시군요.

메르헨 2008-09-01 23:23   좋아요 0 | URL
님의 글 마지막 구절에서 웃음이 납니다.
신랑에게 고전을 좀 읽으라 해야겠습니다.^^
책에 관한 맛깔스런 글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네요.
읽어야겠다는 강한 압력이...^^

드팀전 2008-09-02 09:18   좋아요 0 | URL
^^ 반가와요. 재미있는 책이어서 즐거운실 거예요.

바람돌이 2008-09-02 01:25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서 빌려놓은 책인데 빨리 읽어야겟군요. ㅎㅎ

드팀전 2008-09-02 09:19   좋아요 0 | URL
알라딘 MD서재에서는 '한 철 나기 좋은 책' 이라고 썻더군요. 그런데 속도가 붙어버리는 책이어서 한 철 내내 보기는 힘들어요.

nada 2008-09-02 10:34   좋아요 0 | URL
다크 나이트를 좋아하시는 취향하고도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문예출판사 버전보다 번역이 더 나은 건가요?
일단 한 권으로 합쳐져 나왔다는 점에서 이쪽 버전이 더 솔깃하긴 한데, 중요한 건 외장보다 내용일 테니..
어쨌든 드팀전님 리뷰를 읽으니, 이 책도 더 이상 미루면 안 될 것 같다는 조바심이 생깁니당.


드팀전 2008-09-02 10:43   좋아요 0 | URL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둘 다 비슷한 시점에 본 건..
제가 우스워하는 건 '착함'과 '선'에 대한 강박증적 환상이에요. 가끔 그런 생각도 하지요 '나의 선한 행동이 타인에게 죽음을 불러올 수 도 있다.' 는...좀 엉뚱하과 과장되었나요?

제가 싫어하는 잡지가 <좋은 생각>이라고 예전에 이야기했던가요...물론 가끔 그런 항생제들도 필요하고 저도 복용합니다만...

번역에 대한 질문은 제가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쟈님이나 다른 러시아문학 전공자들께서 답해주시겠지요.^^

아...그리고 제가 그 앨범 좋아한다는 이야기했던가요?

찐빵 2008-09-05 12:48   좋아요 0 | URL
읽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집니다. 허나 시간이나 능력이 없는 이들은 이 리뷰만으로 흐뭇해지는군요.
감사합니다. 무얼로 감사를 드릴지 고민하다 시 한 모금 권합니다.
추석이 가까워지는데 이 시는 어떨까요.


코스모스 - 김사인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드팀전 2008-09-05 13:00   좋아요 0 | URL
^^ 감사합니다. 천천히 읽으시면 되지요.
제가 좋아하는 김사인 선생의 시라서 반갑군요.

Jade 2008-09-24 16:56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 리뷰에 혹해서 읽고 있어요! 재밌는데요 흐흐

드팀전 2008-09-24 17:10   좋아요 0 | URL
^^..다행이군요.
 
단테 신곡 강의 - 서양 고전 읽기의 典範
이마미치 도모노부 지음, 이영미 옮김 / 안티쿠스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아직 단테의 <신곡>을 읽지 않았다.

  아무리 각종 단체에서 수 십년 동안 '필독' 이니 '100대 명작'이니 해도 돌아앉은 돌벅수처럼 끄떡하지 않았다. 필름을 이 십여년 전으로 돌려보자. '레드 썬.!!'

  고등학교 다닐때 사실 단테 표 <신곡>라면의 겉봉지를 뜯은 적이 있다. 요즘처럼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팔팔 끓는 날씨 속에서도 단테표 라면이 끓였다. 면발 넣고 스푸 넣고...그러나 뚜껑한번 열어보고 지옥문 닫히듯 '쿵' 닫아버렸다. <정석수학>과 <성문종합영어>의 익숙함이 차라리 나았다.  의고투의 말투와 발음도 안돼는 주석 속에 등장하는 수 많은 인물들은 최악이었다. 역시 '라면은 몸에 않좋다.'는 고금의 진리 되뇌이며 <신곡>과 돌아섰다. 내게 <신곡>은 DIVIINA COMMEDIA가 아니라 '신 한번 보려다가 곡소리나는 책' 이었다.

그리고 이제 " 우리네 생명길 한 가운데에서/어두운 삼림에 있음을 알았을 때 (도모노부 역)' 다시 <신곡>을 만나려고 한다. 단테 시대보다 인간의 평균 연령이 늘었을 테니 단테가 말한 '인생의 반고비' 가 물리적으로도  내 나이 즈음이 아닐까 한다. 이제 다시 단테의 <신곡>을 만날 용기가 생긴 것이다. (내 나이가 이제 그렇게 되어서 일지도)

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 mi ritrovai per una selva oscura/ che la diritta via era smarrita.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는 <신곡>으로 가기 위해 먼저 만난 책이다. 어린 시절 한 번 채한 음식은 나이가 들어도 먹기가 꺼려진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가르시아 효과'라고 한다고 들었다. <신곡>에 이미 데인 나 역시 조심스럽게 가고 싶어서 이 책을 고른 것이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나처럼 <신곡>에 소화불량을 겪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은 훌륭한 소화제가 될 듯 하다. 물론 단테 전공자이거나 각종 서지분석의 대가들에게 이 책은 시시할 수도 있다. '뭐 다 아는 얘기를 하네.' 라고 말할 수도 있을 법하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강의에 직접 참가해서 질의 응답을 하던 일본의 노교수들의 겸허함 정도는 책을 읽고 배워도 될 듯 하다.

도모노부 교수 역시 단테 전공자는 아니다. 저자의 약력과 본문 내용을 살펴봐도 어림짐작 할 수 있다. 그는 철학전공이었고 주로 철학이나 미학관련 책들을 펴냈다. 그런 그가 단테에 대해 전문가가 된 것은 순전히 개인적 관심과 그에 이어지는 '토요공부법'에 의한 것이다. 철학 공부에도 빠듯했던 그는 스스로 규칙을 정해 매주 토요일 밤 3시간씩 단테와의 연애를 한다. <신곡>을 읽고 비교분석하고 정리작업을 한다. 이 책은 그렇게 오래 숙성된 개인적 노력의 결과이다.  

저자는 단테의 <신곡>으로 곧바로 들어가지 않는다. 단테의 동반자가 되어주는 베르길리우스를 먼저 말한다. 그리고 베르길리우스가 서사시 전통에서 영향을 받았던 호머를 되짚어간다. 그러닉까 계보로 말하자면 "호머-베르길리우스-단테' 로 이어진다. 도모노부 교수는 서사시의 전통과 각 작가들의 차이점을 비교분석하면서 <신곡>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준다. 강유원의 <서구정치사상 읽기>라는 책에도 보면 '호머-베르길리우스-단테'의 문장을 비교하면서 시대적 에피스테메의 차이를 예로 드는 장면이 있다. 도모노부 교수의 분석틀과 거의 똑같다. 다른 책에는 과문하니까 이것이 일종의 서사시 전통을 해석하는 고전적인 방식이 아닌가 짐작해본다.

<단테 신곡 강의>는 이렇게 호머와 베르길리우스의 그리스.로마문화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그리스도교의 전통이 단테의 신곡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책 초반부에 이야기한다. 그리고 4번째 강의 부터 '지옥'으로 들어간다. 저자는 매 강의 도입부에 지난번 장에서 언급했던 것들을 복습하는 차원에서 정리해 준다. 너무 많은 내용으로 두서가 없어진 뇌세포들을 짧고 간단하게 줄맞춤해주는 셈이다. 도모노부는 단테를 대단한 문학가로만 평가하는 것에 반대한다.그가 평가하는 단테는 비록 실패했으나 현실의 정치가였으며 성찰적인 철학자이다. 시적 영감은 자기 개혁으로 이어진다.그리고 이것은 역사의 목적으로서 구원에 이르는 사고의 원형을 형성한다. 도모노부는 단테의 이러한 사상이 비코까지 이어진다고 말한다.     

단테는 이제 지옥문 앞에 서 있다.

"영원한 것 외에는 나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 없으며, 그리하여 나 영원토록 서 있으리라, 너희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야마카와 역)

아주 유명한 지옥문의 자기 소개식 문장이다. 나는 이 문장을 수 십번도 더 읽었다. 그런데 너무 좋다. 읽으면 읽을 수 록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것이 '고전'의 포스가 아닌가 싶다. 또한 단테 이후 동서양의 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장을 읽고 감동하고 좋아했을 것을 상상하면서 나 역시 그들과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는데 무한한 동류의식을 느꼈다. 내가 '고전'을 읽고 나면 뿌듯해지는 것 중 하나는 이런 황당한 상상력도 한 몫을 한다. 단테를 버나드 쇼도 읽지 않았을 까, 오스카 와일드도 읽었겠지,토마스만도, 카잔차키스도...햐...나도 그들이 본 걸 같이 보는구나. (우리는 같은 독자!!) 이런 생각들을 하면 인류의 위대한 인물들과 한 무리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주어서 무엇보다 흐뭇하다. (물론 다짜고짜 내맘대로 하는 상상이지만...^^ )  도모노부 선생은 지옥의 공간성을 이야기하면서 지옥이 멀리 있는 곳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의 상상이 고착화되서 지옥은 땅 속 깊이 천국은 하늘 저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내게 '그건 아니지' 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단테가 뒤에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빛의 천국이야 나는 모르겠다만 지옥은 이 땅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인류가 겪어온 수많은 전쟁, 기아, 살육, 착취, 배신 등을 생각하면 지옥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단테는 '희망'에 주목한다. 즉 '희망'을 버린 모든 곳이 '지옥' 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별'을 '희망'의 상징으로 읽어서 천국,연옥,지옥에 나타나는 별의 이미지를 그때 그때 상기시킨다.

연옥편에서는 단테의 텍스트와 르 고프의 명저 <연옥의 탄생>(바람구두님의 리뷰를 본 적이 있다.)를 소개하면서 그리스도교가 세속적 질문들에 대응하는 방식들을 이야기 한다.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태어난 사람들과 태어나자 죽은 아이들의 사후심판같은 것들 말이다. 르 고프는 그런 문제에 대한 답변을 찾는 과정에서 13세기 이후 연옥 개념이 일반화된다고 말한다. 단테에게 연옥은 '불로서 정화하는 곳'이며 지옥처럼 완벽하게 닫힌 구조는 아니라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이 열려 있는 곳으로 정의한다.

도모노부 선생은 <천국>편이 철학적이고 교리적인 내용이 많아서 <지옥>편에 비해 외면받는다고 아쉬워한다. 그가 보기에 단테의 궁극적 목적은 '천국'에 이르는 길을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목적을 잊고 과정의 흥미진진함만을 쫓는 것은 주객이 전도되는 것인 셈이다. 단테는 천국의 진리를 인간의 진리 범주 밖에 두고 있다. 인간의 격과 신의 격은 다르기때문이다. <천국>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진리관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야 한다. 다행히 어려서부터 고등학교때까지 교회를 다녔던 삐딱한 교인이었기이 한결 이해하기 좋았다. 일단 내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신곡>에는 '인간의 희망과 의지가 우주를 움직이는 신의 사랑에 의해 작동'된다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가 있다. <신곡>가지고 고등학교 학생처럼 종교논쟁을 할 것이 아니라면 그 신이 왜 그의 아들을 내려 보냈는지. 그리고 대속의 과정이 인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같은 것들에 대한 선이해는 필요할 듯 하다.

<단테 신곡 강의>를 읽다보면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낭독의 즐거움'의 문제이다. 단테의 <신곡>은 일종의 정형시이다. (로쟈님의 단테 페이퍼를 참고하시길..) 압운이 규칙적으로 반복된다. 랩에서 '라임'이라고 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냥 저냥 이태리어 발음이야 대충 따라 간다해도 도저히 그 '운율'을 흉내내지 못하겠다. 책에는 '딴따 딴따'하면서 초등학교 음악시간처럼 몇 개의 예를 보여주고 있지만 실제 귀로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으니 '과연 이렇게 읽는게 맞나? ' 싶다. 누군가 멋드러진 이탈리아어로 읽어주는 몇 몇 구절을 들어보고 싶다. (인터넷 검색을 해서 좀 찾아봐야 겠다.)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은 '독도'와 관련이 있다. 단테와 '독도'라니 '소주'와 '야채 비빕밥' 같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보면서 '일본 이기기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일본에만도 단테 <신곡>의 번역본이 20여종이 넘는다고 한다. 그것이 중역을 포함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쪽발이' 일본은 '밥통' 과 '자동차' 만 잘만드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인문 사회적 토대는 상당히 깊고 저력이 있다. 일본의 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게다짝' 신고 '전자제품' 판 돈으로  문화 강국이 되었다는 식의 발상은 아주 저열하다. 그런 발상 머물고 있다면 '독도'를 지킬 수 없을 것 같다. 

요즘 기업에서도 인문사회학에 관심을 갖는 듯 하다. 기업들이 직원들을 위해 강좌를 열기도 하고 의식있는 직장인들도 관심을 갖고 그런 가보다. 그런 관심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결국 '말 잘 듣고, '돈 잘벌어 올' 예비 CEO들을 창출하기 위해 인문학이 '이윤창출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는 인상이 있어서 의심쩍은 눈빛을 거둘수가 없다. 인문학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저마다 다른 답들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제 단테의 <신곡>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니던 <신곡>에 대한 '가르시아 이펙트'로 부터는 벗어났다. 그리고 덤으로 한줄 한줄 아주 천천히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마음 속에 담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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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8-08-14 16:55   좋아요 0 | URL
"강유원의 <서구정치사상 읽기>라는 책에도 보면 '호머-베르길리우스-단테'의 문장을 비교하면서 시대적 에피스테메의 차이를 예로 드는 장면이 있다. 도모노부 교수의 분석틀과 거의 똑같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강유원씨가 이 책의 교정을 봤습니다. 저는 읽으면서 '인용'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