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식동물의 딜레마
마이클 폴란 지음, 조윤정 옮김 / 다른세상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제주도에 처음 갔을 때 일이다. 

 서쪽으로 돌았던 우리들은 여행 마지막 날, 함덕 해수욕장에 다다랐다. 일행은 푸른 잉크빛 바다에 몸과 기억을 염색하려는 듯 바다를 즐겼다. 동네 아이들에게 물장난도 치면서 말이다. 물놀이에 숨이 차질 무렵이었다. 소년 하나가 바윗가 근처에서 손바닥 절반쯤 되는 게를 한마리 잡았다. 집에서 먹던 꽃게에 비하면 흉칙하게 생긴 것이었다. 이것이 식탁에 오르던 게와 같은 종이라는 것이 의심스럽게 생겼다. 우리는 바닷가의 장난감을 톡톡 건드리며 놀았다. 그때 게를 발견했던 제주 소년이 한마디 했다.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면 안됀데요."

우리는 조금은 흉칙하게 털이 난  볼품 없는 게를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치 않았다. 그래서 도시인의 무감각한 자신감으로 " 야...이걸 먹는 건지 못먹는 건지 니가 어떡게 아냐? " 라고 웃으며 답했다.

그 때 제주도의 태양과 바람덕분에 까맣고도 건강한 피부를 갖고 있던 소년은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 음...음....몰라요. 근데 조상때 부터 먹었어요"

우리는 제주 소년이 쓴 '조상' 이란 말에 박장대소했다.

그 제주 소년은 마이클 폴란이 말한 '잡식동물의 딜레마' 를 해결하는 인류학적 방법을 이미 알고고 있었던 것이다. 조상이나 주변 어른에게 직접 배운 것은 책이나 도감보다 더 확실하다.버섯을 따 놓고 식용인지 식용을 가장한 가짜 버섯인지 고민하던 폴란도 이 말에에 공감을 표한다.그는 도감과 책을 펴놓고도 우왕좌왕한다.결국 생명과 관련된 먹을 거리의 선택문제에서 '도감'과 '책'은 무용지물이었고 주변의 전문가의 한마디가 더 큰 신뢰를 준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란  음식에 대한 선택의 다양성이 이중의 칼날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어떤 버섯은 먹어도 되고 어떤 버섯은 먹으면 배가 아픈지 고민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먹을 때 마다 이런 고민을 해야 한다면 정말 머리가 아플 것이다.하지만 인간은 '문화'라는 장치를 통해서 매번 식탁 에서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게끔 만들어 놓았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분했다. 또 다양한 요리법을 통해서 먹기 불편할 것들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놓았다. 동물 살해라는 윤리적 함정을 살짝 망각하게끔 해주는 방식들도 장치들도 제공해 놓았다.그런데 마이클 폴란은 이런 '잡식동물의 딜레마'가 풍요로와진 세기에 다시 반복되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구석기 인간들의 고민보다 한결 세련되게도 대형마트에서 카트를 끌면서 현대인들은 같은 종류의 고민에 빠진다. '유기농? 무농약? 칠레산? 중국산? 아니 한국산? '

마이클 폴란은 우리 식탁에 오르는 먹을 거리들의 계보학을 추구한다. 이를 '음식 사슬'이라고 한다. 즉 아침 식사에 오른 닭가슴살이 어떤 과정을 거쳐 사육,도축,포장,유통되어 오르는지를 거꾸로 찾아가는 것이다. 저자는 저널리스트답게 '음식사슬의 로드무비'를 찍는다. 좀 더 성찰적인 '체험 삶의 현장'인셈이다. 그는 '산업적' '전원적' '수렵 채취'의 음식사슬의 한 쪽 끝을 직접 체험한다. 산업적 생산물의 경우 오하이오의 대규모 옥수수 공장을 탐방한다. 이 과정에서 신대륙에 옥수수가 퍼지는 과정과 산업농에 맞춰 옥수수가 진화하는 과정, 한 알의 옥수수가 옥수수 바다에 들어가고 이것이 어떤 어떤 곳에 씌여지는 지를 재미발랄하게 묘사한다. 정말 재기발랄하다. 환워론적인 오류가 있겠으니 미디어적으로는 충분히 재미 있는 '옥수수인간' 같은 개념은 우리가 대규모 단일재배되는 옥수수에게 얼마나 의존적인지 보여준다.

또한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소와 관련해서 윤리적으로 위생학적으로 가장 건강한 육식의 공급방식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그것은 가축 내장을 먹이거나 옥수수를 먹여서 공장에서 소고기로 키운 소가 아니다. 권정생 선생의 말로 하자면 '가장 소답게 키운 소'를 먹는 것이 최선의 방법임을 말한다. 즉 소답게 풀을 먹고소답게 풀 위에 똥을 싸면서 큰 소 말이다. 마이클 폴란도 사육과 도축이란 딜레마에서 어쩔 수 없이 인간을 위해 희생되지만 가장 그 종의 본성과  어울리게 키워진 방식을 권장한다. 즉 소는 소 답게 닭은 닭 답게 키우고 그렇게 키운 것들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고기로 키운 소나  닭고기로 키운 닭. 계란을 낳게하기 위한 제품처럼 키워진 닭과 그 생산품은 닭에게도 인간에게도 비윤리적이다. (불행히도 한 동네에 대 여섯군데씩있는 닭집은 모두 양계장에서 대량생산되는 불운한 닭들이다.)

마이클 폴란은 폴리페이스 유기농 농장에서 흥미있는 질문을 던진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자본주의의 가장 부가가치 높은 산업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산업적 유기농'에 대한 질문이다. 그는 '과연 산업적 유기농이 유기농인가?" 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의 결론은 '산업적 유기농'이 유기농이 의미가 있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유기농의 지속가능한 순환론적 세계관에 어긋난다고 지적한다.그는 유기농 운동의 세가지 철학적 조건을 말한다.즉 대안적 생산방식,대안적인 유통시스템,그리고 대안적인 소비방식이다.그는 이 세가지가 유기농 운동이라는 혁명적 프로그램을 떠받치는 버팀목이라고 말한다. 이 기준에서 보자면 단지 '생산방식' 만을 유기농화한 기업형 유기농 공장은 결코 유기농운동의 철학과 궤를 같이 할 수 없다.

흔히들 유기농 운동같은 것을 하는 단체에서는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의 세계관이다' 라는 말을 한다. 내가 처음으로 한살림 강의를 들었을 때도 담당자는 그 이야기로 첫문을 열었다. 마이클 폴란도 말하지만 유기농을 선택하는 것은 정치적 함의가 들어있다. 단지 '웰빙'을 위해 유기농을 먹는 것은 이기적인 선택일 뿐이고 비정치적이다. 유기농 운동은 생태주의 운동의 먹을거리 판본이다. 또한 대규모 생산을 꿈도 꾸지 않는다. 이것은 다분히 소농과 지역중심의 운동이다.격주로 들어오는 한살림 소식지에는 땅과 소농 그리고 지역을 살리기 위한 한살림 운동의 취지가 적혀있다.나는 먹는 행위가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음에 동의한다. 나는 오늘 아침에  경남 밀양에서난 고추와 경남 함안에서난 쌀과 경남 남해의 마늘을 먹었다. 나는 거리에서 시위를 하듯 정치를 먹어 삼킨 것이다.(하지만 의미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누가 그 맛있고 싱싱하고 비싼 음식을 먹으며 매번 정치를 염두에 두겠는가.)  내가 먹은 음식들은 모두 비싸고 모두 경남 지역에서 났다. 그리고 농작물을 키운 농부에게서 조합을 거쳐 바로 내 식탁으로 왔다. 나는 마이클 폴란의 글을 읽다가 장일순 선생을 비롯해서 한산림 운동을 시작했던 분들의 혜안을 다시금 되새겨보았다.

이 책에서 가장 껄끄러운 부분은 결국 잡식성 동물이 피해갈 수 없는 '사육동물의 도축'이다. 물론 우리는 이것을 담장 너머의 누군가에게 맡기기때문에 뚝뚝 떨어지는 소들의 핏방울이나 향기롭지 못한 내장, 그리고 죽음을 앞둔 동물의 눈망울을 볼 필요가 없다. 거기에 우리는 적당하게 이런 과정을 잊게 만들 풍부한 요리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마이클 폴란은 직접 닭의 목을 따는 용기를 선보인다. 무척이나 주저하면서 말이다. 저자는 채식주의자이지만 채식주의가 윤리적이라고 옹호하지는 않는다. 인간이 육식을 하고 가축을 기른 것은 진화의 결과이다. 그리고 자연은 인간의 윤리적 잣대로 측정할 수 없는 다른 층위의 윤리가 작용한다. 극단적인 채식주의자들의 주장에는 동물섭취를 청교도적 윤리로 제단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자연의 모든 동물은 먹고 먹히는 관계를 기본으로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연은 종 자체를 유지하면서 순환하게끔 한다. 그런데 극단적 채식주의 휴머니즘은 동물 종이 아니라 동물 개체 하나 하나에 윤리를 적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감정적인 차원에서는 옳고 박수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연의 법칙에는 어긋난다. 실제로 야생의 동물들 중에서 편안하게 자기 수명 다 누리고 자식들 보는 앞에서 임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대개는 어린 동물일 때 또는 늙거나 병들어서 또는 재수가 없어서 더 큰 육식동물들에게 희생된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자에게 잡혀먹히는 어린 영양이 불쌍하다고 모든 사자와 고양이과 포유류를 우리에 가두어 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중간 과정의 코미디는 알아서 상상해보고 ....결국 생태계의 흐름은 무너지고 만다.마이클 폴란은 이런 문제에 관해서 동물애호가인 피터 싱어에게 메일을 보내 답을 구한다. 피터 싱어 역시 극단적인 방식으로 동물섭취를 반대할 수는 없다는 유보적인 입장을 보낸다.

폴란의 여정은 수렵 채취 과정까지 간다. 멧돼지 잡기와 곰보 버섯따기가 그것이다. 이 장은 실제로 조금은 실험적인 것이다. 멧돼지를 잡고 버섯을 직접 따러 간다. 여기서는 그 의미보다 책 전체에 걸쳐 있는 폴란의 위트있는 문장력을 칭찬하고 싶다. 앞서서도 그는 여러가지 재미있는 비유와 구체적인 상황 묘사로 글의 흡입력을 높였다. 난생 처음 총을 쏘아 보는 폴란이 멧돼지를 사냥하는 장면은 오히려 다큐멘터리화면이 묘사하지 못하는 글의 생생함이 담겨있다. 첫 사격을 양보하고 느낀 후회부터 돼지를 잡고나서의 흥분,그리고 죽은 돼지를 앞에 두고 찍은 사진을 본 뒤 생긴 후회감.돼지를 분해하는 작업에서의 역겨움..그리고 동료에게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한 잔머리..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잘만든 다큐멘터리보다 더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폴란이 가진 흥미있고 감각적인 문장력때문이다. 가볍지 않으면서도 재미를 지속시킬 수 있는 이런 능력은 정말 훔쳐오고 싶다.

결론에서 폴란은 이 모든 음식사슬의 시작과 끝을 경험하고 직접 식탁을 차린다. 동료들을 불러모아서 '이야기'가 있는 저녁 식사의 즐거움을 함께 나눈다. 저자가 서문에서 '음식의 즐거움'에 대해 말하겠다고 했을 때 " 까다롭고 때론 역겨운' 과정을 지켜본 후 무슨 즐거움은 즐거움이냐?" 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그의 로드무비를 다 보고 나서 그가 만든 식탁을 보면서 나 역시 그 즐거움에 동참 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폴란은 그렇게 말하는 듯 하다. '무지의 식탁을 성찰하고 앎의 즐거움으로 식탁을 채우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아들 예찬이와 그를 힘들게 했던-아직도 숨어있을지 모를-아토피에게 감사했다. 나와 아내는 그전부터 한살림이나 유기농 운동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아는 것이었다. 아이가 아토피가 생기고 나면서 우리 부부는 음식에 훨씬 많이 신경을 쓸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주저하는 나를 '자연요법과 유기농'으로 설득한 것은 아내의 공이다. 당시 나는 주저주저하는 사람이었고 아내는 확신범이었다. 그것 때문에 몇 번 충돌도 있었다. 하지만 나 역시 아내의 선택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때 처음으로 한살림에 가입했다. 부산의 한살림은 또한 자랑스럽다. 다른 곳은 그저 인터넷으로 가입하고 돈만 내면된다. 그러나 부산 한살림은 사람 귀찮게 한다. 꼭 사무실에 방문해서 1시간 이상 강의를 들어야 한다.강의라는게 뭐 대단한 건 아니고 한살림의 취지-이기적 웰빙만은 아닌-를 듣고 이해시킨다. 우리집은 주로 한살림에서 기본적인 부식거리를 산다. 당연히 마트는 한 달에 한번이나 갈까 말까이다.또 가끔은 예찬이가 좋아하는 바나나를 위해 동네 산업유기농 판매하는 유기농점포에서 돌에서 만든 유기농 바나나를 사먹인다. 바나나는 한살림에서 나오지 않는다.그렇다보니 유기농과 산업유기농의 차이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예찬이의 아토피는 거의 나은 듯 보인다.하지만 아토피는 낫는다는 개념이 아니다. 그래서 요즘도 먹는 것은 관리한다. 아이는 과자도 아직 한번도 먹어보지 않았고 오렌지 주스나 사탕,아이스크림같은 것은 말한 것도 없다. 그런데도 아이는 다른 또래 보다 주먹 하나가 더 크다.그리고 어찌나 밥을 씩씩하게 잘먹는지 어디 가든 칭찬받는다. 아이는 한번도 항생제를 맞지도 바르지도 않았다. 예방주사 역시 마찬가지다.(언젠가는 맞힐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이에 대한 정보는 예방주사를 우려하는 사람들의 모임같은데 가보면 안다. 돌이켜 보면 아토피가 우리 부부에게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해 한 번 더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준 셈이다. 나와 아내는 가끔 닭을 시켜먹기도 하고 피자도 먹는다. 내가 조금 더 나쁜 음식을 자주 먹는다. 바쁠 때는 햄버거로 때우기도 하고 조미료 마구 들어간 김치찌개도 잘 먹는다. 예찬이도 앞으로 커가면서 그럴 것이다. 그런 상황을 애써 피할 필요는 없다. 대신 알고 나면 조금 더 줄이게 되고 가급적 멀리하게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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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8-06-08 15:49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의 리뷰만 보면 항상 사고싶어 근질근질해져요...ㅎㅎ

드팀전 2008-06-09 10:57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책입니다.재미있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그러면서도 깊이 있는 성찰이 들어있습니다.특히 폴란의 웃음담긴 문체는 즐겁게 하지요.

zzanga62 2008-07-16 03:28   좋아요 0 | URL
사실 저자는 채식주의자이지만 채식주의가 윤리적이라고 옹호하지는 않으며,

피터 싱어를 통해서도 극단적인 방식으로 동물섭취를 반대할 수는 없다는 유보적인 입장의 답변을 받아냈다는 리뷰를 보고 의견을 올린다.

극단적 채식주의자란 '당신 꼭 채식을 해야 합니다'라고 하는 사람을 말할까요?
그러나 대개의 채식인들은 채식의 좋은 점을 홍보하고 동참하기를 권하거나,
육식을 줄일 것을 권하는 정도가 아닐까요?
왜냐면 현실적으로 당장 모든 축산을 금하고 모든 육식을 중단하자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먹이사슬을 인정하고 자연에서도 불쌍하고 고통스런 죽음들도 많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저나 피터싱어가 채식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를 이해해보는게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산업축산은 너무나 반자연적이고 반생명적이며, 사육과 도축 과정에서
상상하기 힘든 고문을 통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또 환경파괴외 인류기아에 상당한 기여를 합니다.
기본적으로 육식동물일지라도 평생 가둬키우다 잡아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축산이 점차 대형화되며 값싸게 많이 생산하기위해
동물을 생명취급하지 않고 작업속도도 엄청나게 높입니다.
도살장의 경우만 해도 그 업체의 직원들조차 엄청난 신체적,정신적 위험 속에 일하고,
너무 빠른 작업속도로 동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줄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로 자연스레 동물을 일부러 학대하기까지에 이를 정도이니,
동물학대가 얼마나 많이 다양하고 끔찍하게 일어나는지는 차마 입에 다 담기 어려운 지경이며, 결국 그 생산물을 먹고 인간은 광우병, O-157, 조류독감과 같은 끔찍한 질병에 감염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도살장> 읽어보세요)

신자유주의 추세 속에 축산업체는 점차 합병되어 대형화되는데,
그럴수록 선진적이고 수준 높은 생산과정과 결과물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국 정부와 나아가 전세계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힘이 세져서
어떤 윤리도 고려하지 않고 마음껏 이윤 높이고 작업속도를 높일 수 있게 될 뿐입니다.
은막 뒤에서 이뤄지는 동물과 인간에 대한 끔찍하고 잔혹한 학대와 비리들은
점차 강도가 높아지고 다양해지며 그들을 건드리기는 점점 더 힘들어집니다.

그들의 감독자이며 축산과 동물보호법을 관장하는 농림부는 국민건강이나 동물복지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축산업체 경영자들의 이윤창출만을 비호해줄 뿐입니다.

축산업체에 대한 규제 완화와 합병의 허용은 레이건, 부시 등 시장주의자,
극우적 대통령 집권기에 더욱 진행되었습니다.
물론 초국적 자본들은 육류 외에 모든 음식에 걸쳐 전세계에 죽음의 밥상을 강요합니다.

그래서 유기농 식물과 로컬푸드를 지향합니다.

자연친화적 축산이 보편화되려면 지금처럼 고기를 싸게 많이 먹으려 해서는 안되고,
가끔씩 제값 주고 먹어야 합니다.
암튼 이런 현실들을 알면서 되도록 고기 소비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내가 한 마리라도 극단적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기, 우유, 다단식 닭장에서 생산된 달걀 등을 먹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꼭 채식해야 합니다라고 말 하지는 않지만,

육식을 줄여가지 바라며 채식은 현재 최선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자들의 실체를 드러내고 우리도 신자유주의에 깊이 쩔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축산에 있어서도 미국과 같이 대형화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한미FTA는 우리가 꼼짝없이 노예화되게 만들 것입니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양장)
정성진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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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는 지금은 '비운의 트로츠키'로 불리우는 된 깡마른 안경잡이의 이름이다. 인생의 질곡이 남극의 크라바스보다 깊다보니 자기를 자기라 부르지 못하고 저작권도 안주고 깜방간수 이름을 도용했다. 이름도용 당한 오뎃사의 교도관은 어쨋거나 이름 하나는 길게 남기게 되었다. 최소한 자본주의가  여름날 아침 풀입에 대롱대롱 달린 이슬처럼 햇살 아래 한순간 소멸하지 않는한 트로츠키는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윤건차의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의 지식인 지도를 보면 이 책의 저자 정성진의 이름이 발견된다. 구좌파의 트로츠키주의자에 그를 포함시켜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내용에서는 트로츠키주의자 정성진에 대해 다루고 있는 양은 그다지 많지 않다. 주로 알튀세르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로 가끔 인용될 뿐이고 좌파 사상의 메인스트림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윤건차가 정성진과 술 한잔 안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윤건차가 트로츠키주의를 강건너 불보듯 다루고 넘어가는 것은 80년대 이후 한국 좌파 사상 흐름을 나름대로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러시아에서나 한국에서나 또 그 어디서나 소수였을 뿐이다.

정성진식으로 말하자면 80년대까지 스탈린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던 PD와 NL의 한국좌파는 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좌충우돌 상황에 들어가 버렸다. 대략 이제 마르크스의 재전유라는 이름으로 신사회 운동이라는 좌파흐름으로 옮겨탄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고전 마르크스의 전통은 지식인 지도에서 흐지부지되고 신좌파와 개량주의가 좌파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대략적으로 정성진의 울부짖음을 정리하자면 그런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사게 된 것은 책의 3부에 해당하는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자원들>때문이었다. 한마디로 하면 트로츠키주의 입장에서 세계체제론이나 위기종식론,자율주의 등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글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내용들은 이미 <이론>,<마르크스연구> 등에 게재되었던 글이고 나 역시 이너넷을 통해서 접했다. 세대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문화접변 세대인지라 밑줄 못 긋는 한때문에 책을 사들었다. 물론 모니터로 읽다가 눈알이 빨게 지는 것을 막기 위한 보건위생적 차원도 한 몫을 했다.그러므로 안구가 튼튼하거나 밑줄의 강박이 없는 분이라면 굳이 이 책을 살 필요가 없다. 약간의 인터넷 파도타기를 한다면 이 책에 씌여진 정성진의 글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아니면 한국의 IS그룹인 '다함께' 홈페이지를 이용하던지 말이다.

책은 치즈냄새 폴폴 풍기는 쥐가 쫓는 미로 같다. 미로 곳곳에 마르크스 사상 논쟁사가 있다. 길을 따라가다보면 신좌파들의 마르크스 해석에 대한 비판을 거쳐 최종 목적지인 트로츠키와 고전적 트로츠키를 발전시킨 토니 클리프의 '국제사회주의 경향까지 이르게 된다. 정성진의 정치적 입장도 이와 같다. 스탈린 치하에서 부관참시 당한 트로츠키를 살려냄과 동시에 제4인터내셔널의 '구 트로츠키'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트로츠키인가?

 마르크스주의의 적통이 스탈린이 아니라 트로츠키에 있기때문이다. 그렇기때문에 역사적으로 과거 좌파나 우파가 마르크스주의라고 불렀던 스탈린주의는 변종이 주인 행세를 한 것 뿐이다.트로츠키는 "볼세비즘과 스탈린주의 사이에는 단지 한 줄기의 피가 아니라 피의 강이 흐르고 있다.'라고 본인 입으로 하늘 아래 양립할 수 없는 간극을 강조한다.트로츠키주의에서 보자면 마르크스의 계보는  '마르크스.엥겔스-레닌-스탈린-붕괴' 가 아니라 '마르크스.엥겔스-레닌-트로츠키- ... ' 이다.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가 '역사의 종말'일 리 없듯이 해방의 가치로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살아난다. 그래서 이 책의 1차 주적은 스탈린 주의이다. 제 5장 <소련 사회의 성격>을 비롯해서 책 곳곳에서 수 십 차례에 걸쳐 '스탈린은 마르크스와 관계가 없다.' '스탈린의 1928년은 반동적 혁명이다' 가 강조된다. 즉 소련이 무너진 것은 사회주의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인 '스탈린주의'가 붕괴된 것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정치적 악연으로만 나온 것이 아니다. 지젝 역시 <혁명이 다가온다>에서 소련 사회가 트라우마적인 트로츠키를 삭제했다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소련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동안 내내 그랬다. 고르바초프 역시 트로츠키를 복권시키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스탈린 비판에 올인했지만 정성진은 여기서 소련 사회의 성격 분석에서 트로츠키의 분석을 따르지 않는다. 트로츠키는 스탈린 하의 소련사회를 '관료적으로 퇴보한 노동자국가'로 보았다. 1917년 혁명으로 노동자 국가가 되기는 했으나 고립된 상황에서 당의 관료들이 망쳐놓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내에서 트로츠키의 전투 방향은 사회 혁명이라기 보다는 정치혁명이 될 수 밖에 없었다.이 점은 트로츠키의 한계로 지적 되기도 한다. 정성진은 영국 사노당의 중심이라고 할만한 토니클리프의 '세계체제론적인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으로 소련사회 성격을 설명한다. 쉽게 말하자면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중심으로 봤을 때 세계체제론적인 입장에서 소련은 국가가 주도하는 자본주의 양식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트로츠키가 계승 발전하고 있는 마르크스 일가의 무공은 스탈린주의를 비롯해서  여러 신좌파 이론들과의 논쟁에 무기로 등장한다. 다른 비책없이 '교과서에 충실하고, 기본기가 힘이지요'를 연상시키는 초식이다. 마르크스의 공황론,시장론,가치론,계급론,혁명 주체론,국제주의 등이 중심이된다.특히 트로츠키하면 연상되는 '영구혁명론'은 '일국 사회주의'가 마르크스의 전통과 관련이 없음을 이야기한다. 레닌에게 '사건'이라고 할 말한 1차세계대전과 '혁명적 패배주의'의 전통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이 '영구 혁명론'이다. 이것을 단순히 '국가의 소멸'로 이해하는 것도 트로츠키에 대한 오해이다. 마르크스가 기존의 사회학과 달리 자신의 이론을 '과학'이라고 했듯이 그 가문의 아들 트로츠키도 과학을 이어간다. 영구혁명이 일어나는 장소는 일국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트로츠키는 직시하고 있다.

신좌파 마르크스 이론에 대해서도 이 책은 트로츠키주의적인 입장에서 '비마르크스 이론이며 개량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스탈린주의에 이어 이 책에서 공격하고 있는 제 2 주적이 자본주의 하에서 진보의 이름으로 거론되는 개량주의 흐름이다. 제 6장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 경제학 비판에서는 앰허스트학파의 '반본질주의'에 문제를 제기한다. 계급의 현실체에 대해서 부정하고 분석의 입구로서만 이용한다는 점도 도마에 오른다.이들은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의 이론을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으로 읽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이들이 이론적으로 기대고 있는 알튀세르의 중층결정과 최종심급으로서의 '경제'까지도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또한 마르크스 전통에서 가장 핵심이라고 할 만한 변혁 주체로서 '노동자 중심성'을 부정하는 것이 마르크스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체제론 역시 분석단위의 범위를 넓히고 새로운 방법론을 제기한 것 까지는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이행론에서 계급의 역사적 인과관계 설정에 오류를 범함으로서 신고전파 경제학에 가깝와져 버린다고 비판한다.또한 자본주의 순환적인 자본주의 위기론에 있어서도 콘트라티예프 곡선에 의지한 나머지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법칙을 외면하고 있다고 본다. <제국>논쟁과 관련되서는 항간의 세계화론을 포스트구조주의 방식으로 재서술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제 2인터내셔널의 황제였던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의 재판이라고 폄하한다.당연히 모호한 개념인 '다중'은 '노동자 중심성'의 부재로 비판당하고 '제국'의 강조는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면죄부로 비판당한다. 트로츠키주의의 경우 자본주의를 끝내는 혁명의 핵심은 로쟈 룩셈부르크의 대중파업론의 전통에 있다고 본다. 슬라보예 지젝의 <제국>비판을 인용하여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은 전(pre) 마르크스주의적이며 혁명없는 혁명을 이야기할 뿐이라고 말한다. 하트와 네그리에 대해 정성진은 '급진적인 아나키즘 수사학으로 무장한 개량주의' 라고 칭하고 있다. 물론 각각의 이론들은 비판만큼이나 많은 반비판을 담고 있을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이것들을 모였다가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과정 중에 걸러지는 것들이 -내게는-생길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녹색평론식 생태공동체주의가 그런 과정을 거쳐 내게서 비판적 거리로 재구성된 생각들 중에 하나다. 현실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적 대안으로 정성진은 책 마지막에 <참여계획경제론>을 들면서 몇 가지 이론들간의 차이를 비교한다.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예를 들자면 한 사람의 인생 동안 몇 개의 다른 노동 형태를 계획한다거나, 대의제에 대한 비판으로 그리스 민주주식 공무원 제비뽑기 선발 제도 등은...글쎄 더 따라가기 힘들었다. 정성진이 극렬히 싫어할 말이지만 좋은 의미든 나쁜의미든 유토피아적이다. 결국 나의 시선은 마지막 장 보다 그 지난과 현재의 담론 분석에 더 큰 비중을 둘 수 밖에 없었다.. 

 김동춘은 80년대 이후 좌파의 흐름을 '완고파'와 '개량파'로 나누었는데 트로츠키주의는 완고파의 흐름에 속해있다. 한켠에서 보자면 마르크스를 교조화해서 '이것은 마르크스가 아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주장과 다르다'라는 식으로 비판과 주장의 근거를 '마르크스'에게만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완고한 주장이 시대조류에 어긋하는 훈고학적인 것으로만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나 역시 고전적인 마르크스보다는 포스트쪽에 더 관심이 많은 측면에서 이런 책들은 여러모로 질문과 고민점들을 되짚어보게 한다.

 그런 측면에서 신자유주의와 관련되어 '케인즈주의인가 21세기 사회주의인가'는 '자본주의 이외 대안부재론'에 대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의 답변이다. 즉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담론은 기본적으로 '나쁜자본주의'와 '좋은 자본주의'를 상정하고 시작된다. 진보적인 사람들 입에서 '그래도 신자유주의보다 낫지 않냐'고 이야기하면 ..더 이상 할 말 없어지는 거다.

 내가 생각하는 알라딘 진보의 문제가 그것이다. '케인즈주의가 신자유주의보다 못하냐? 그럼 현실적으로 그거면 됐지.' 이런 식 말이다. 근본적인 질문에 왜 우파 초딩같은 댓글 밖에 못할까가 문제 제기인거다. 우파보고 초딩같다고 비판만 할 것이 아니다. (2MB가 바보짓 하니까 갑자기 노무현이 성군이 된다. 물론 한끗 차이로 노무현이 이명박보다 낫다. 그런데 문제를 이런식으로 설정하는 것은 초딩 짓이다. 한미FTA를 반대하다고 하면서도 '그래도 역시 노무현이 낫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뇌세포에 박수를....물론 2MB보다는 낫다. 이 말이 그렇게 듣도 싶다면 천 번 쯤은 더 해줄 수 있다.) 이 책은 다분히 경제 이론을 중심으로 역사적 평가들이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권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11장 케인즈주의인가,21세기 사회주의인가? >는 인터넷으로라도 읽어 보길 바라는 부분이다. <나쁜 사마리아인>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론적 방파제가 된 듯 한 장하준 교수의 제도주의 학파도 크게 보면 케인즈주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정성진은 케인즈주의가 '나쁜 자본주의'를 '좋은 자본주의'로 대체하자는 제안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본주의 착취 자체를 거부한다고 비판한다.그런데 왜 케인즈주의가 다시 진보의 이름으로 등장할까? 정성진은 기본적으로 케인즈주의의 자본주의 친화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가짜 사회주의의 종말과 함께 '대안'이 없다는 광범위한 믿음이 '자본주의 수정,개량론'을 진보 진영의 과제로 상승 시킨 역사적 실망의 결과라고 본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정성진은 제2 인터내션널의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등의 수정주의 노선을 비마르크스적이라고 공박한다. 이미 정성진과 장하준은 몇 차례 논쟁도 했다.(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작금의 야만적 자본주의보다 케인즈주의가 결과적으로는 낫다...하지만 그러니까 그게 뭐가 왜 나빠요?... 라고만 이야기하지는 말자.) 정성진은 케인즈주의의 이론적 한계가 신자유주의를 몰고 왔으며 케인즈주의의 역사적 조건들이 재현 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리고 카르체디의 말을 인용하여 진보 진영의 선택을 묻고 있다. "마르크스인가,아니면 케인스인가?"  로쟈 룩셈부르크가 "사회주의인가,야만인가?' 를 물었던 것의 업그레이드된 반복같으나 사실 전자가 더 많은 선택의 고민을 담고 있을 수 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비판적 지지'나 '개량주의'만큼 잠시나마 사람 심사 복잡하게 하는 것이 또 없기 때문이다. 

정작 마르크스의 적자 트로츠키에 관한 책인데 트로츠키 이야기는 별로 하지 못했다.국제사회주의경향의 주된 흐름을 읽어내면 그 안에 트로츠키 사상이 들어가 있으리라 생각된다.국내에서는 <다함께>가 바로 IS그룹니다. 가끔 그 완고성때문에 좌파 내에서 비판이 되기도 하고 논쟁의 중심이 되기도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영국 사회주의 노동당의 2006년 where we are stand 내용이다. 자본주의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투쟁,사회주의,국제주의,인종주의,제국주의 및 억압에 대한 반대,혁명정당......과거 강령에 비해 의회주의와 개량주의 비판이 조금 줄어들었다고 한다. (1992년에는 '독립적인 노동자계급 행동,개량이 아닌 혁명,의회적 길은 없다...등이 있었다) '완고파'도 시대의 정세를 정확히 읽어 내야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그것이 마르크스와 레닌의 뛰어났던 점 아니었던가? 

 .....미친 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나가 아니다.그 안에는 여고생도 있고,민주당 당원도 있고, 진보 신당 당원도 있다. 생태주의자도 있고 트로츠키주의자도 있고 자율주의자도 있다.행동은 같이 할 수 있지만 함께 줄 설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명확하다...나는 내가 무슨 주의자인지 몰라서 '범좌파'라고 두리뭉실 이야기한다. 그런데 '무슨 주의자가 뭐가 중요하냐? '고 묻는 '결과주의',','반지성주의' 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만은 없다. 이론은 세계관이다. 그래서 중요하다. 역사가 그렇게 알려 준다. 하루 하루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디로 가는지 무얼 위해 가는지 알고 하루 하루 가는 것이 더 낫다. (하도 쓸모 없는 오해가 많아서 이런 사족까지  단다. 앉아서 책상 물림하는 것이 전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론과 행동의 상호침투라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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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 예술사 이야기 지식전람회 21
조중걸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키치란 무엇인가?>에서 아브라함 몰르는 키치에 대하여 '인간 존재 방식의 한 유형으로 키치를 이해하는 것이 키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했다. 키치를 사전적 의미인 '저급한 싸구려 예술품','이발소그림'에서 존재 조건으로 급상승 시킨 것이다. 그런 신분상승이 있었다고 키치가 싸구려의 옷을 훌훌 벗어 던지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 몰르의 키치에 대한 지적은 작품이라는 대상에만 한정되어 있는 상식적 '키치'를 재전유하는 것이다. '키치가 존재 조건'이라는 것은 '그건 키치적이야' 라고 말하는 주체 역시 일정정도 '키치'라는 조건에서 벗어 나지 못한 다는 뜻이다. 마치 '키치 근본주의'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지적처럼 앎의 시작은 그런 존재 조건에 대한 각성부터 일 지도 모른다.

"키치는 어떤 세계관에 의해 뒷받침된 미학,거의 철학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건 인식이 제외된 아름다움이고 사물을 아름답게 만들어 남에게 환심을 사려는 의지이며 총체적인 순응주의입니다" (밀란 쿤데라)

다른 이들도 많이 그런 것 같던데 나 역시 '키치'라는 말을 밀란 쿤데라의 세계적 베스트셀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아름다움>에서 처음 만났다. 이미 십 여년전 일이어서 정확히 뭐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쿤데라가 거의 한 챕터를 자신의 '키치론' 에 할애하고 있었다는 것은 기억이 난다. 먼저 '키치'란 무엇인가? 내가 그동안 기억하는 가장 짧고 확실한 키치에 대한 서술은 "키치적 인간의,키치적 작품에 대한 요구' 이다. 이것은 아브라함 몰르의 인식론과 같은 지평이다. 수용자와 대상 사이에 상호관계와 그것의 외연화에 시각을 맞춘 것이다.

"키치는 하나의 작품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태도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작품으로서의 키치보다는 작품을 대하는 감상자의 태도와 작품과 맺는 그의 심적 관계가 오히려 키치의 본질이다."

<키치,우리들의 행복한 세계>에서 저자 역시 이같은 방식을 취한다. 저자는 우선 예술의 양식을 3가지로 구분한다. 쾌락과 배설 욕구에 호소하는 통속 예술, 수용자와의 거리두기를 통해 존재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수예술, 그리고 자기만족을 통해 환상을 창조하는 키치이다.

키치가 현 존재의 삶의 양식이라는 것은 두가지 토양을 갖는다. 하나는 '신'의 부재가 선언된 근대성에 있다. 이성을 댓가로 자연에서 소외된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허공에 색칠을 해야만 했다. 키치는 진실에 대한 절망적 요구를 거짓된 답변으로 응한다.

키치의 출발은 산업혁명 이후 불어난 프티부르주아적 소비주의와 깊은 관려이 있다. 근본적으로 키치는 노동의 소외를 소비를 통해 만회하려는 자본주의적 형식에서 시작한다. 고된 노동을 한 노동자에게 정서적 만족감을 주는 것은 통속 예술이지 많은 시간과 경험을 요구하는 순수예술은 아니었다. 통속 예술은 합목적적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여 소비된다. 하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잉여가 존재한다.  좀 더 교육받은 자들의 문화적 소비는 일종의 차별화를 요구한다.

"키치는 민주적이고 중간적이고 조촐한 것,즉 프티 부르주아적인 것이다. 키치는 단지 숫자만을 고려하며,절대 다수의 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민주적,공리적 예술 양식이다." " 사물에 대한 키치적 이념은 행복의 반예술이다. 키치는 위장된 예술로서 진정한 예술을 소멸시키고 그 속물근성으로 사용가치마저 전락시킨다.이러한 키치의 주요 고객은 중산층이다. "

나는 '정치미학'이라는 측면에서 한국 사회 진보 내에서의 '키치적인 정치 미학'이 반드시 논의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소박,조촐한,자기만족적 진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센티멘털에 의한 정치 아닌가 하는 점을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잃을 것이 없으면 문제될 것 없는 진보' , ' 내 지붕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유토피아도 허용할 수 있는 진보'. 슬라보예 지젝은 그런 키치적인 '정치 미학'을 두고 '휴가 기간 중에 하는 좌파'라는 말로 비꼬았다. 쉽게 말하면 정치적 이념의 토대가 분명히 자유주의적 개량주의 지평에 서 있는데 실제로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적 아나키즘'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본다. 마르크스가 비판하기도 했던 '하부구조'가 빠진, '과학성'이 결여된 즐거운 '혁명' 상상이다. 나 역시 가끔 그런다. 그리고 이런 질문도 해본다.'이것은 키치적이 아닌가?" 현재로서 나의 답은 그것은 '키치적'이다. 지젝은 <혁명이 다가온다> 서문에서 예를 들었듯이 '월스트리트에서도 <자본론>을 즐겨 읽는다' 는 것은 혁명적 사상 또한 키치적으로 탈취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키치는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한 위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소 여물통이 외양간에 있으면 키치가 아니지만 식당 한 구석에 박혀 있으면 키치가 된다. 월스트리트 증권맨들에게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 변혁 사상의 핵심이 아니라 '키치적 요구' 정도 였을 것이다.

 키치는 우동 먹은 포만감에 기생한다. 곧 꺼져 버리고 마는 밀가루 국수 처럼 작품 자체와 소통하지 못하고 자신의 환상과 소통하며 비위를 맞추는 태도와 결합한다. 키치는 '이차적 눈물이다.' 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키치적 감상자들에게 예술은 자기 센티멘털리즘을 위한 하나의 기회일 뿐이다....키치는 통속적인 예술에 있어서의 단순한 감상보다는 훨씬 더 증대된  반성적인 거리를 가진다.그러나 그 반성적 거리는 작품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을 지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자신에게로 집중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키치는 사이비 예술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인의 존재 조건을 어떡게 전복시킬 것인가가 남는다.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에서는 인상주의를 시작으로 예술사에서 키치를 전복하기 위한 시도들을 소개한다. 그런 실천작업들 속에서 전복가능태의 아이디어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상주의의 주관성의 소멸은 표현주의와 기능주의에 와서 진화한다.표현주의에서는 정신의 자발성과 이념을 추가하여 키치를 넘어서려고 한다.기능주의적 입장은 꾸밈없는 아름다움이라는 목적론적인 유용성을 강조하여 키치적 너덜거림을 업앤다. 다다이즘은 키피를 적으로 규정하고 달콤한 쾌락 대신 혐오를 선택했다. 미적 혐오를 통해 허위의식을 까발리는 역설적인 방식이다. 아방가르드 미학을 옹호했던 수잔 손택이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선보였던 '캠프'라는 개념은 이런 '혐오의 미학'이 대중화 또는 유희화되는 과정을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저자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키치적 해체를 위한 실천들을 엿본다.  모더니즘이 가진 절대성과 내재적 통일성을 그리스 플라톤 시대로의 회귀로 본다.그리고 메타 픽션이라는 형태의 자기부정을 통해 가공의 세계를 만들고 '창조와 삭제'의 놀이를 통해 키치를 극보하는 포스트모던 예술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나보코프,마르케스, 바셀미, 존 파울즈 등의 작품들을 통해 환각과 유희를 통한 자기구원에 열중인 포스트모던 소설들을 이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그것이 '키치'적이라는 것을 알고 그 실험을 극으로 밀고 가서 삭제하거나 놀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지극히 키치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존재 양식으로 피할 수 없는 키치에 대한 유희적 탈출방식으로 읽을 수도 있다. 

저자는 궁극적으로 키치를 해체할 수 있는 방법을 고급 예술의 창조성 안에서 찾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처음부터 '예술천하삼분지계' 를 해버린 상황에서 키치를 극복하는 방식이 통속 예술에서 찾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키치에 대한 자기 인식과 그를 해체하고자 하는 현대 예술의 미학에 대한 거리감을 좁힐 필요가 있다. 저자가 '시대착오적'인 모든 예술은 '키치'라고 저자가 말한 이유는 과거의 미술이 결코 수준이 낮다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인들의 달콤,상쾌한 접근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요한다는 것으로 읽혀야 한다. 즉 현대 예술은 난해하다고 고개를 돌리고 허구한 날 고흐나 르느와르가 주는 '자기감동'에 묶여 있으면 키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21세기는 고흐나 고갱이 살았던 시대보다 더 많은 사고와 감정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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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5-02 23:00   좋아요 0 | URL
한국 문화로 치자면... 궁중화가에 상대되는 민화가 키치고,
정악에 상대되던 민속극, 판소리 등이 키치였고,
광대들에 의해 전승되던 온갖 놀음들이 키치문화라고 볼 수도 있겠죠.
우리집 거실에도 제가 그린 키치가 한편 있습니다. ㅎㅎㅎ

드팀전 2008-05-04 21:55   좋아요 0 | URL
그런 개념은 아닌 듯 합니다.키치라는 문화적 현상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는 미적 개념이기 때문에 전자본주의적 단계에 무조건적으로 적용해서는 곤란합니다.키치는 다분히 근대적 개념으로 접근해야될 듯 합니다.
글샘님이 쓰신 개념은 귀족 예술/민중 예술이라는 역사적 개념에 가까와 보이는군요.오히려 그런 개념을 적용하자면 그것은 키치가 아니라 대중예술의 성격과 유사해 보입니다.

비로그인 2008-05-02 23:03   좋아요 0 | URL
예술이 뭔데
詩가 뭔데
지가 무슨 예술이라고

어느 시인이 자신의 시에 그러셨다 하시니
여기다 한 표 던집니다

드팀전 2008-05-04 15:32   좋아요 0 | URL
예술의 자기부정 정신이 키치를 드러내고 탈출하는 한가지 방법이라고 저자가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인상주의나 표현주의 그리고 다다같은 것들은 역사적으로 한 시대의 주류적 예술이 담고 있는 가치관에 대한 '부정의 정신'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이 시대에 필요한 '부정의 정신'은 무엇일까 라는 겁니다.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삶,예술,가치들의 문법들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그것이겠지요.

비로그인 2008-05-05 09:04   좋아요 0 | URL
너머 어려우믄 무서와서
도망가고 자퍼져요
어려우믄 무서와요
 
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
윌리엄 케네디 지음, 장영희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는 LED 옥외광고 간판처럼 이름을 수시로 갈아입는다.이 책의 원제목은 'Ironweed' 이다. 이 책이 처음 번역되었을 때는 '억새인간' 이었다고 한다. 20여년전 일이다. 이 책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잭니콜슨 주연의 영화<ironweed>의 한글제목은 '엉겅퀴 꽃'이다.장영희 교수는 '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라고 예감있는 제목을 달았다. '억새인간' 이나 '억새풀' 보다는 나은 제목같다. 원제목인 <ironweed> 자체가 외설적이라고 생각한다. 뭔가 좀 숨기는게 있어야지 에로틱이 될 터인데 '노숙자=억새풀' 이란 연쇄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직접적인 상징작용이 왠지 탐탁치 않다.

원문과 비교해서 읽는 수준은 못되기 때문에 번역에 대해 뭐라고 할 만한 위치는 아니다.그러나 장영희 교수의 번역이 비교적 매끄럽게 읽히는 것은 사실이다. 윌리엄 케네디의 문장이 갖고 있는 위트와 유머러스함을 표현해 내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것이 느껴진다. 인문사회 서적이 아닌 문학 책의 번역에 있어서도 가끔은 한국어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들을 경험한다. 그런 마당에 작가가 가진 문장의 깊은 속내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때가 많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한국 소설을 읽을 때 느껴지는 편안함을 준다.  

이제 조금 삐닥하게 나가보자.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이 왜 '퓰리처상'을 받았고 또 '20세기 영문학 100선'에 들었는지 의문이다. 식견 높은 분들의 견해이기 때문에 수상을 취소하라고 일인 시위를 하지는 않겠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 일이니까 공소시효도 지났다. 이 소설은 내게 그저 그랬다. 잭 니콜슨의 얼굴만 잔뜩 떠오른다.나는 영화를 보진 못했다.그렇지만 스틸 사진 몇 컷으로도 잭 니콜슨이 주인공 프랜시스를 덮어 버린다. 꽤나 어울리는 캐스팅이었음에 틀림없다.  영상 이미지의 전제성이 문자를 장악해버리는 것이 어제 오늘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책의 문장들이 갖고 있는 뛰어난 유머와 삶을 통과하는 서걱거리는 재미들이 헐리우드식 결말로 가기 위한 소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 처럼 느껴질 때이다. 이 책의 인물들과 인물들 간의 관계,그리고 장치들은 전형적인 헐리웃표다.'돌아온 탕아, 따뜻한 가족의 품에 안기다." 

이 책이 퓰리처상을 받은 해인 84년은 레이건의 시대이다. 카우보이 정부 밑에서 '레이거노믹스'와 '강한 미국' 이 대표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70년대 미국을 교란시킨 유약한 진보의 시대가 문을 내리고 전통적 가치의 회복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건강한 미국의 상징인 '가족주의'로의 복귀였다. 모든 보수적 이데올로기의 근간이기도 하다. 이 소설이 그런 흐름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죄책감으로 떠돌던 주인공이 결국 따뜻한 가족의 품에서 불안한 행복을 얻는 결론은 그런 상관관계를 자꾸 떠올리게 한다.이런 스토리야 말로 소시민의 감수성을 젖게하는 전형적인 '잔잔한' 헐리우드 영화의 단골 메뉴 아니던가? 싸가지 없는 부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인격적으로 성숙한 인간이 된다던가, 재능은 있지만 사고뭉치 운동선수가 동료애를 통해 하나로 된다거나.....이 모든 것들이 '통과의례'의 형태만 달리했지 상징적인 '가족'의 이름으로의 통합을 목표로 한다. 그게 뭐 딱히 나쁘냐고?  길게 토론하면 여러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겠다.그렇지만 이해하기 쉽게 이렇게 말하자.나는 이런 스타일에 지루함을 느끼는 취향을 가졌다.

도대체 처음과 마지막에 바람처럼 왔다가 들꽃처럼 사라진 루디는 왜 그렇게 억지로 나와야 되는지? 그의 우발적인 죽음에 '그는 은하수가 어딘지 아는 사람이었다'라는 키치적인 답변은 무슨 코미디인가? 프랜시스의 귀가를 위해 반드시 사용되어야 하는 소품처럼 루디와 헬렌은 죽는다. 모텔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는 헬렌이 가진 영혼의 고귀성을 표현하기 위해 쓰인 장치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이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지만 그녀가 떠돌이가 되기 훨씬 전,사랑에 배신 받기 훨씬 전,그녀의 마음을 영혼을 휘감았던 곡. 작가는 이 곡을 통해 너덜너덜한 부랑아 헬렌의 삶에 빛이 있었고 그 빛을 안고 가게끔 만든다.(왜? 그래야 우리가 덜 불편하니까..) 죽음의 순간에 헬렌은 부랑아에서 성녀로 뒤바뀐다. 베토벤LP와 가지런히 펼쳐진 머리칼 등은 헬렌을 고귀한 영혼으로 만든다.가련을 넘어 숭고로 넘어가려는 의도가 너무 직접적이다.

나는 이 소설을 사회적 관점에서 노숙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읽지는 않는다. 실제 그들은 5미터 밖에서도 냄새가 난다. 물론 이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탈취 되었다. 탈취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하나는 '탈취됨'으로 우리가 그들이 가진 영혼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한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탈취됨'으로 인해 노숙자로서 그들의 존재는 무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실재 이 인물들에게 냄새가 난다면 이것은 르포타쥬가 될 터이지 소설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불만을 갖지는 않으련다. 탈취를 통해서라도 그들의 영혼과 접촉했다면 이 아니 좋을쏘냐....다른게  '키치'가 아니다.

내게 이 소설에서 두 가지 인상적인 것은 '야구'와 '죄책감'이다. 프랜시스의 과거를 구성하는 두가지 중요한 요소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새로 사서 얼마 쓰지 않았던 야구 글러브가 다시 만저 보고 싶어졌다. 아직 집에 고이 모셔 놓고 있다. 그 글러브로 공을 받고 던지고 해보고 싶어졌다. 다른 하나는 '죄책감'이다. 나는 원래 이 리뷰를 쓸 때 '리뷰' 대신 그 '죄책감'에 대해 쓰려고 했다.

 만약 비오는 어제 이 리뷰를 썻다면 나는 식모 '정금'이와 관련된 나의 '죄책감'에 대해 썻을 것이다. 책에 대한 지루한 이야기는 몇 줄로 압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 많은 이들의 관음증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리뷰는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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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다가온다 -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 프런티어21 3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서원 옮김 / 길(도서출판)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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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도장을 찍었다. 붉은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이다. 무림을 통일한 맹주 '자본주의'는 자기 내공의 한계점을 확인하려는 듯 맹렬히 팽창한다. 목적론적이라고 비판 받는 마르크스는 그 팽창의 임계점이 바로 자본주의가 끝장나는 지점이라고 예견했다.  즉 자본주의는 이미 그 안에 붕괴의 요소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고전 <사기>에 보면 '치솟아 오른 용은 떨어지기 마련이고 달은 차면 기운다' 고 했다. 결국 인류의 역사가 빙하기 얼음의 침묵속으로 사그라들 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자본주의도 다른 형식에 그 길을 열어 주어야 할 것이다. 요즘 봐서는 그 전에 빙하기가 올 것 같다.자본주의가 내적인 모순으로 붕괴된다고 하더라도 가만히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그렇다면 뭐하러 이런 책을 읽겠는가. 그냥 두면 터질터인데..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는 레닌을 이야기한다. 마르크스를 형식화해내고 현실화해내는 기획가이자 정치 지도자로서의 레닌이다. 끈에 묶여 광장에서 질질 끌려 다니던 레닌 동상의 이미지를 생각할 때 '뭐 별 구태의연한' 이란 생각이 들 법도 하다. 그렇지만 지젝은 우리가 다시 레닌에게 돌아가기를 요구한다.그것은 책 결론에서 말하고 있듯이 '레닌을 반복하기'가 아니다. 그것은 레닌으로 되돌아가서, 레닌을 복기하면서, 레닌을 가지고 현실을 가로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 <혁명이 다가온다> 를 쉽게 읽기 위해 레닌의 행적을 알아야 하는가?  절반은 그렇고 또 절반은 그렇지 않다. 특히 20세기 초반 러시아의 역사와  러시아 사회 민주당 내의 이념적 갈등 등에 대한 선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 책에 나오는 '레닌의 고독' 같은 말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고독'의 상황을 돌파해낸 실천가이자 이론가로서 레닌을 관뚜껑 열고 부활시킨 지젝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레닌과 러시아 혁명사에 대해 논문을 쓸 필요는 없다. 책의 부제가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이지만 정작 레닌이 이 책의 주인공은 아니다. 지젝은 기존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마르크스,라캉,헤겔을 가지고 '탈출구가 없는 자본주의','혁명의 전망이 사라진 자본주의' 를 헤집는다. 그는 많은 이들에게 '폐쇄 갱도'로 생각되는 '현재 대해 다시금 전복의 가능성을 타진한다.이 책의 목적은 바로 그것이다.

지젝은  현 시점에 서구 좌파가 놓여 있는 서글픈 상황을 적시한다. 진정한 노동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 문화전쟁을 해방의 정치학에서 주요 영역으로 승인하는 것.복지국가의 성과물을 지키는 순수한 방어적 입장,사이버 공산주의에 대한 순진한 믿음,그리고 최종적으로 항복 자체인 제 3의 길....결국 지젝은 레닌에게서 다른 단초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해방구는 아니어도 돌파구 같은 것 말이다.

이 책<혁명이 다가온다>를 나는 한국적 상황에 놓인  진보주의자들(?) 이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매일 동어반복적인 '약자', '독재', '저항' 등의 단어에 익숙해져서 자신의 정체성을 그 단어와의 '동일시'를 통해 확인하기 여념없는 진보주의자들에게 이 책은 필수적이다. 이것은 그 단어들이 의미가 없다는,괜한 짓 한다는 의미의 보수주의적 시각에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정치적으로 올바른 단어'들을 해체하고 재전유하여 앞으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진보주의 알라디너들이 좋아하는 노암 촘스키나 하우드 진, 피터 싱어 같은 이들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서 지젝은 비판한다. 그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말이다. 나는 이 지점에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선'이 '선'이 되어 멈추는 순간 우리의 사고 역시 멈춘다. (나는 이 문제를 오프라인 상에서 설명하려다가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생태주의'는 왜 나빠요? ..내가 언제 나쁘다고 했냐...인간과 자연이 함께 살자는 것이 좋은 거 아니에요...누가 좋지 않다고 했냐...결국 나온 말은 '생각이 너무 많으면'..   쯥쯥 ) 아마 온라인 상에서도 비슷할 것이다. 그저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남겨 놓는 것에서 더 가보고 싶지 않느냐는 말만 남기자. 선불교에서 하는 말 중에 '백척간두 진일보'라는 말이 있다.

지젝은 이 책에서 '탈산업화 자본주의'에 대한 좌파의 합의에 대해 먼저 말문을 연다.그것은 레닌의 유령을 지우는 것이다. 비타협적 계급투쟁,전위당 노선,폭력 혁명에 의한 권력 쟁취 등에 대한 폐지..지젝은 이런 공통된 합의를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사회주의 정당들의 '애국주의 전선' 과 이에 대항하던 레닌의 '혁명적 패배주의' 전선과 병치시킨다. 이런 예 이외에도 레닌의 주장과 이론은 멘세비키 사이에서도 또한  볼세비키 사이에서 언제나 소수자의 그것이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현실의 상황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안목과 그것을 이론화하여 실천의 방향타를 만들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또한 그걸 만들어낼 수 있는 정치적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강단좌파들과 다른 위대한 점이 거기에 있다.

지젝은 레닌의 유령을 복기하기 위해 탈근대 자본주의의에서 주를 이루는 진보적 가치들을 먼저 도마위에 올린다. 다문화주의에 바탕을 둔 포스트 식민주의는 고통을 '서사할 권리'만 가진다고 비판한다. 지젝의 칼카로운 송곳니는 이렇다.

 "착취당하는 소수를 위한 진정한 사회적 참여와 미국의 급진 강단에서 번창하고 있는 ,위험하지도 결함도 없는,여가 시간에 혁명을 하는 듯한 다문화적이고 포스트 식민주의적 작업은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

다들 '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관용'에 대한 지젝의 비판을 들어보자.

"우리가 트라우마적인 차원을 건드리는 순간 관용은 끝난다.간단히 말하면 관용은 타자가 '불관용적인 근본주의자'가 아닌 한 유효한 타자에 대한 관용이다.이는 곧 실재적 타자가 아닌 한 관용된다는 뜻이다. 관용은 실재의 타자,자신의 '향유'에 실체적 무게를 가진 타자에게는 '무관용'이 된다....(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자는) 이런 향유때문에 불편해지고,이런 이유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전반적인 전략으로 삼는다."

아닌가? 나는 타인에 대한 '관용'을 당연히 해야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지젝의 지적이 맞다고 생각한다.물론 민주노동당을 '한나라당 2중대'라고 비난했던 '열린 우리당'의 전례를 흉내내서 "기본적 '관용'도 없는 곳에서 거기까지 나아가는 것은 결국 '관용'의 가치를 희석시킨다...너무 생각이 많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라는 식으로 말할 분도 있을 것이다. 그 분들께 정말 싸가지 없게도 지젝은 한 걸음 더 나가는 질문을 한다.

"타인의 믿음에 대한 존중이 실제로 궁극적인 윤리의 영역인가?" (너무 생각이 없으면 이런 질문 자체도 생각하지 않을 듯 하다.)

고통받는 타인들에 대한 거리두기도 지젝은 이런 식으로 말한다.그것은 타인을 추상적 사회기능의 담지자로 축소시키고 거기에 대한 주체의 차가움을 풍부한 개인의 정서적인 삶이라는 유령으로 대체시키는 것이다.여기서 말하는 주체는 '나 몰라'하는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래도 그들에게 무언가 해' 라고 말하는 주체에 더 가깝다. 지젝의 말을 그대로 들어보자

"우리는 고통받는 타인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현실로부터 우리의 안전한 고립이 위협받지 않은 채 정서적인 공감에 빠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희생자들의 분할이 바로 희생담론의 진실이다. " 결국 이것은 지젝이 비판하는 키에르케고르의 '죽은 이웃에 대한 사랑'일 뿐이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이웃은 죽은 이웃이다...지젝은 이제 오늘날 좌파 자유주의자들의 상황까지 비웃는데...(나는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에게도 적용되리라고 본다.) "그들은 체제를 위험하게 하지 않으면서 보수주의자들에게 대응하여 점수를 얻기 위해 인종주의,환경주의,노동자의 불만을 자극한다."라고 다분히 위험한 발언을 서슴치 않는다.

다들 좋아하라하는 반세계화 운동에 대해서도 지젝은 지젝거린다.그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자기확신적 위임을 문제삼는다.그는 자유민주주의가 선험적으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체제임을 지적해야만 실제로 반자본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반세계화 운동 내에 존재하는 실재를 확인하지 못하는 개량주의적 태도들에 대한 지적으로 읽힌다.그는 급진성의 유무를 떠나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식을 문제삼지 않는 반자본주의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또한 자유민주주의적 유산을 붕괴시키지 않고도 자본주의를 붕괴시킬수 있다고 믿는 믿음이야말로 요즘 사랑받는 환상이라고 말한다.

문화자본주의에 대한 지젝의 비판에서는 제러미 리프킨이 링 위에서 스파링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리프킨은 이미지가 상품을 대표하는게 아니라 상품이 이미지를 대표한다는 말을 한다.이런 역설적인 방식이 또한 매력적이다.하지만 지젝은 리프킨의 전망이 탈산업적 질서를 너무 앞서서 나아가고 잇다고 지적한다.즉 문화적 경험의 상품화만이 아니라 '실제적' 물질 생산까지 포괄해야만 총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물질적 생산은 탈산업화 시대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대 뒤로 숨을 뿐이라는 것이 지젝의 올바른 지적이다. 지젝은 그 예로 '헐리우드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생산장면' 과 우리들이 쓰는 상품 뒤에 존재하는 '메이드 인 차이나,인도,인도네시아' 등에 주목하라고 이야기 한다.(조만간에 그건 것고 삭제될 것이다.그렇게 무대 뒤로 숨기려는 의도와 그 영향을 읽어야한다.)

지젝은 이제 레닌의 가진 '진실의 정치학'을 찾자고 한다. 탈근대적인 상대주의가치관 속에서 뻔뻔하게 진실의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로 점프하자....1차 세계대전 당시 당신이 러시아에 있었다면 레닌처럼 '혁명적 패배주의'를 주창하는 편에 설 수 있었는가...그렇다고 말한다면 지금도 같은 급의 질문을 할 수 있다.....'혁명은 그렇게 불가능한가? ) 이제 본격적으로 지젝은 상대주의적 가치관의 철학자들에 대해 훅을 던질 준비를 한다.특히 정치적인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 지젝과는 그래도 가까와 보이는 알랭 바디우는 자코뱅당적이라고 비판받는다. 자크 랑시에르,에티앙 발리바르등도 문화연구와 인정투쟁 중심자들로 경제 영역의 몰락을 공유한하고 비판한다. 지젝은 여기서 조금 더 마르크스에 뿌리를 견고히하고 이들 프랑스 정치철학자들이 정치로 환원될 수 없는 경제의 영역을 실증적인 사회 영역의 하나로 축소하고 정치적인 것을 규정하고 있다고 말한다.일종의 '신사회 운동'의 적자들에 대해 지젝은 '혁명 없는 혁명을 꿈꾸는 자' 들이라고 비난한다.그러면서 일련의 반세계화운동(또는 반자본주의 운동)이 교화되어 단지 또 하나의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의 장소'로 이용되는 것은 아닌가 우려한다.지젝은 레닌을 그대로 적용하여 '당이라는 형식어 없는 운동은 저항의 악순환'에 빠진다고 말한다.즉 정당이라는 조직의 형식 없는 정치는 정치 없는 정치라는 셈이다.그는 이어서 레닌의 예를 들어 '극단적인 정치 전략가 레닌과 생산의 과학적인 재조직을 꿈꾼 테크노라트 레닌이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라고 정치경제학에 바탕을 둔 연타를 날린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제목은 <슈베르트를 듣는 레닌>이다. 지젝의 좌충우돌형 글쓰기의 즐거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실제 레닌이 듣는 슈베르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겨울나그네>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이데올로기가 자리바꿈을 통해서 어떻게 작용하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지젝은 고급문화와 정치적 야만이 아무런 문제 없이 일체화된다는 점을 이야기하면서 권력 투쟁 가운데서 예술이 가진 '적대 관계'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 레닌을 말하고 있다.또한 고급 문화의 공유를 위한 또하나의 토대인 외설적 연대가 낳는 배제에 대해 지적한다. 즉 풍월당에서 클래식을 듣는 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함께 고급 와인을 마셔야지 되며,거기서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은 배제된다는 것이다.또한 자본주의적 주체에 대한 영화'파이크 클럽'을 텍스트로 한 분석은 쉬우면서도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절단이나 자기구타는 아니어도...다들 겨울의 칼바람 맞으며 '아...살아 있구나.'의 물질성을 느껴보았다면 이해할 수 있을 내용이다.9/11 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는 트라우마적 사건에 대한 <현실의 사막에 온것을 환영하네> 역시 그 자장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시의성 있는 내용이다.마지막 장에 해당하는 <삭제의 정치학은 존재하는가>에서는 바디우의 용어 '20세기는 실재의 열정'이다 라는 말을 이용하여 그 두 측면 '정화'와 '삭제'라는 개념으로 새로운 지평을 모색한다.즉 폭력적으로 껍질을 벗겨 실재를 드러내는 정화와 텅 빈 영역으로서의 삭제를 중립적으로 지켜내었던 레닌의 모습을 통해 '사라진 혁명'에 대한 기획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 책<혁명이 다가온다>에서 지젝은 정말 조자룡이 헌 창 쓰 듯이 각종 문화적 콘텐츠들을 자신의 주장을 이해시키기 위해 동원한다. 21세기형 철학자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것이다..... '지젝은 어떻게 혁명을 상품화 했는가?' 과연 '그의 혁명'은 또다른 동유럽'강단좌파'의 출몰은 아닐까?" "우리에겐 레닌의 시대와 다른 어떤 종류의 혁명을 준비해야 하는가?"  질문거리는 많고 지젝은 여전히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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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8-05-11 19:19   좋아요 0 | URL
뒤늦게, 재밌게, 읽었습니다.^^ 동유럽'강단좌파'란 비판은 지젝이 가장 혐오할 만한 것인데요.^^; 지젝에 대한 그런 식의 '수용'이 있을 뿐이죠. 특히나 국내에서의 '동유럽의 인문학 천재'라는 특이한 비아냥(천재다! 하지만 그래봐야 '동유럽'!)...

드팀전 2008-05-11 23:25   좋아요 0 | URL
^^..제가 지젝을 그렇게 생각치는 않습니다. 지젝에 대한 그런 비판들이 있다는 것에 어떤 답변이 필요한 가를 생각해본 것이지요. 물론 현재 돌아다니는 '지젝 비판'이 그에 대한 몰이해나 오독에서 오는 일방적인 것일 수 도 있겠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