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착해질 때
서정홍 지음 / 나라말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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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연이란 늘 순간이다. 오늘 아침 강변을 걸으며 본  보라빛 작은 제비꽃...  경남 합천에 사는  농부 시인 서정홍을 먼 발치서 보았다. 아이의 유치원에서 마련한 아버지 교실에서였다. 문장의 첫 단어를 한 두번 더듬는 그의 어투와 58년 개띠의 서리 맞은 은빛 머리칼이 생생하다.  리뷰는 결국 그 소소한 인연이 만든 것이다.     

 몸살 기운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약속은 지켜야했다. 첫째 아이 예찬이는 유치원 교실에서 놀았다. 아내랑 둘째 재원이랑 맨 뒷자리 앉은뱅이 의자에 앉았다. 농부 시인 서정홍은 아버지들이 이렇게 많이 모인 자리는 머리털 나고 처음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의 강의는 예상했던 '바람직한 아버지의 상' 과는 다른, 주로 생태주의적 가치에 대한 것이었다. 때로는 과격한 말로 때로는 웃음 섞인 말로, 땅과 자연, 이웃과 가치로운 삶의 문제를 자신의 귀농 경험과 섞어서  이야기했다.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대단한 각성도 없었다.<녹색평론> 한권만 펼쳐봐도 다 알 수 있는 이야기, 머리로는 수 십번도 더 이해했던 이야기.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삶....

 말문이 트여 잠시도 쉬지 않는 둘째 재원이의 이야기를 듣다가 멀리서 온 농부의 이야기를 듣다가 하면서 두어시간이 지나갔다.

 농부는 합천 가는 마지막 버스를 타야 한다며 일어섰다. 양복 입은 아버지들도 하나 둘 자리를 떳다. 유치원 교무실에는 나름 유명한 출판사에서 낸 산문집과 처음 들어보는 출판사에서 낸 그의 시집이 조신하게 놓여 있었다. 7000원,5000원의 꼬리표를 달고서. 책 좋아하는 사람의 기본적 습성은 종이 냄새를 맡으면 표지라도 한번 보거나 최소한 한번 쯤 열어보는 시늉이라도 한다는 것이다. 책이라는 것에 대한  예의 같은 것. 개인적 습성에 더하여, 마지막 버스 놓칠까 시계를 훔쳐보던 가난한 농부에 대한 예의까지 겹쳣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시집 <내가 가장 착해질 때>를 주머니에 넣고 돌아왔다.  

 아이들을 재웠다. 새로 들여온 시집을 아무데나 펼쳤다. 

'아...' 글자 읽는다는 짐승의 오만함이여... '선생님, 그 정도는 이미 다 아는 내용이라구요' 라는 식의 그 잘난 벽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한 편 두 편 세 편. 시 하나 하나가 가슴에 남는 스냅사진처럼, 또는 펑펑 울리지는 않지만 돌아와서 앉으면 눈물 고이게 하는 영화의 작은 장면들 같았다.  벤야민식의 '충격'인 셈이다. 충격이 반드시 몰고오는 내면의 붕괴 역시도. 미학적으로 거창한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미력한 나머지 책과 글 속에 깊이 허우적 거리고 있던 즈음이어서 강한 '환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좋은 인연이란 이런 것이리라.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내가 가장 착해질 때>라는 시다.  

이랑을 만들고/ 흙을 만지며/ 씨를 뿌릴 때/ 나는 저절로 착해진다.  

나는 내가 착해지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된다. 언제 흙을 만지며 씨를 뿌려본 적이 있었지? 지난해 마지못해 나가서 흐지부지하다가만 한살림 공동 텃밭? 집에 기르던 작은 물고기의 주검들만해도 그렇다. 처음에는 고운 티슈에 싸서 아들과 함께 아파트 화단에 묻어주었다.'좋은데로 가세요'라고 기도하면서. 그런데 십 여 마리 보내고 나서는 이제 휴지에 싸서 예찬이 모르게 종량제 봉투에 넣는다. 하지만 아이들도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물고기의 죽음에는 관심을 보이지만 그 주검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는다. 그런 내가 도대체 '생명'에 대해 뭘 읽고, 뭘 느끼고, 뭘 알고 있다는거지?  

<이른 아침> 

감자밭 일구느라/괭이질을 하는데/땅속에서 개구리 한 마리/툭 튀어나왔습니다// 

날카로운 괭이 날에 한쪽 다리가 끊어진 채 나를 쳐다봅니다.// 

하던 일 멈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루 내내/ 밥도 먹히지 않았습니다./물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농부는 마을에서 청년 회장을 한다고 했다. 그 날도 부산까지 강의하러 가면 마을 어르신들이 걱정이 태산이라고 했다. 십여가구 사는 산골에는 이웃이 119이고 응급대원이기 때문이란다. 지난 번에도 강의하러 멀리 간 사이 이웃의 나이 많은 어르신이 위급한 상황이 되서 아내 혼자 마산으로 창원으로 늦은 시간에 헤메었었다고. 농부는 자기에게 예수님과 부처님은 그 산골 마을에 사는 이웃집 할머니들이라고 했다. 평생을 가난과 시름 속에 살았고 온몸에 안아픈 구석이 없지만 또 해마다 봄이 되면 검정고무를 무릎에 대고 기어다니면서 씨를 뿌리는 사람들. 그의 시에는 그가 예수처럼 부처처럼 여기는 시골마을의 할머니들이 할아버지들이 많이 등장한다. '농사는 힙으로 짓는게 아니여 '라는 덕산 할아버지, 겨울 햇살 아래 낡은 포대를 기우는 인동할매, 큰 병이 스무가지나 된다고 겁주는 의사의 말에 찬조출연해준 서른가지의 병을 가지고도 일한다는 수동할매, '낮에 죽더라도 자식들 퇴근하고 나서 알려주라던' 혼자 앉아서 돌아가신 생비량 할머니, 무 열뿌리 훔쳐간 도둑이 누군지 알아도 모른척 해주는 단성 할머니. 다 예수고 부처인데 농부가 어찌 그들의 단잠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    

<완행버스 안에서> 

안의 장날, 완행버스 안에서/ 고사리 취나물 들고 이고/ 숨 가쁘게 올라온 샘골 할머니와/나는 같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할머니는 앉자마자/ 금세 코를 골았습니다./나물 냄새보다 더 진한/ 땀 냄새와 함께/헝클어진 머리가/내 어깨에 닿았습니다. 

봄나물 뜯느라/ 해보다 먼저 일어나고/ 언덕으로 무덤 사이로/ 이리저리 헤메고 다녔을/ 할머니를 생각하면/ 내 어깨가 너무 작습니다. 

할머니 단잠을 깨울까 봐/ 나는 숨조차 쉴 수 없습니다.


사랑? 연대?  글로 배운 사랑은 '접촉'을 두려워한다. 모든 혐오는 접촉에 대한 혐오라는 말을 내가 이해하는 바는 그렇다. 그럴싸한 변명을 둘러대더라고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나도 역시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면 만질 수 있다. 예수가 문둥병자를 치료한게 사랑이 아니라 예수가 그를 만지신게 사랑이다. 하지만 글로 배운 사랑은 만질 줄을 모른다. 흙을 만지지 않아서 그런것이다. 햇빛을 만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농부는 내게 계속 질책한다.  

농부의 시집<내가 가장 착해질때>에는 그 외에도 가난 속에 반짝이던 아름다운 순간들, 또 아내와 가족에 대한 감사와 믿음을 일기투의 평범한 문체로 쓴 글들이 여러편 실려있다. 가난한 집에 들어와 애지중지 모았던 상품권을 훔쳐간걸 보다가 모두 도둑의 편이 되어가는 가족들. 외식하기 전에 아이들 밥을 먹이고 나가던 아내, 고열에 생사의 고비를 넘는 순간 통장에 모아놓은 3만 7천원을 양로원에 가져다 주라던 열살 무렵의 아들, 울며 불며 곡을 하다가도 언제그랫냐는 듯 향불과 조문객들 먹을거리를 챙기는 고모, 누가 버린 쌀을 가지고 강정을 만들어온 처제등등.. 

물론 가난한 날의 아름다운 추억과 살가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뼈골빠지게 살아도 힘들기만한 농민들의 모습이, 웃음을 잃지 않으려 하지만 한편으로 씁슬해질 수 밖에 없는 장면들이 들어있다. 더 끌고 올라가면 생태문제나 농정 문제까지도 가지고 갈 수 있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다. 농부의 말마따나 쉬운 시이다. 하고싶은 말은 많겠지만 농부는 그저 담담히 자신의 눈에 비친 바를 자기의 언어로 풀어낼 뿐이다. 강의 중에 몇차레에 걸쳐 농부는 자신의 직업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직업이라고 했다.   

<농사일지2> 

"바쁜 논밭일 다 제쳐 놓고,일당 오만 원 짜리 산성 보수 작업하러 간 우리 신랑, 오늘 품삯 받아 오면 얼마나 좋을까"  

 지을 사람 없어서 내버려둔 산밭 개간하여, 고추 모종 함께 심던 희연이 엄마가 뜬금없이 던진 그 말에, 나뭇가지에 앉아 놀던 새들은 그 마음 아는 듯 울어댄다. 

그렇지, 그렇고 말고. 농촌 살림살이에 돈 오만 원이 뉘집 똥개 이름이 아니지, 그 돈이면 글자 배우고 싶다는 큰 딸 희연이 공책도 사 주고, 안의 장날 고등어라도 몇 마리 사서 고된 일에 지친 신랑 돌아오면 저녁 밥상 구워 올릴 텐데...... 

 희연이 엄마 소박한 꿈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노랑나비 너울너울 춤을 추고
 

 아득한 이야기들도 있지만  시집 <내가 가장 착해질때>가  아름다운 것은 '존재의 골다공증'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도시의 이름난 여류,남류 시인들, 비평가들과 그 친한 친구들이 남발해대는 뼈 숭숭 뚫린 시어들과는 굵기가 다르다. 마치 장기간 입원하고 나온 환자들 같은 시들이 칭송받는 시대가 아니던가?  존재의 심연을 헤메다 익사 직전 건져낸 시어들.그것들 중에도 분명 소의 정수리를 때린 것들이 있을게다. 하지만 농부의 시는 다르다. 마치 니체의 춤을 추는 현자처럼 태양 아래 춤을 춘다. 고추밭 사이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정자 나무 아래 이름도 모르고 먹는 팥빙수를 먹는다. 참꽃을 보다가 괭이자루 던지고 하루 퍼질러 앉아 쉬기도 하며 말이다.  

<모심는날> 

환갑 진갑 다 지난 밀양아지매/모심다가 흙 묻은 손 씻지도 않고/ 논두렁 가에서 오줌을 눈다 

오줌 누는 소리/ 어찌나 시원하게 '들리는지/ 함께 모심던 아지매들/한바탕 웃어 대는데/밀양아지매/당당하게 한마디 내뱉는다. 

"이년들아, 너거는 똥구녕도 없나? 웃기는 와 웃어 쌓노. 오줌만큼 좋은 거름이 어디 있다꼬." 

논 개구리 한 마리가/ 밀양 아지매 하얀 엉덩이를/ 가만히 바라보는 한낮 

산골 마을 다랑논에서 부르는/ 정겨운 노랫소리/ 봄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흘러가고.... 

나는 최근에 이렇게 아름답게 봄풍경을 묘사한 시를 보지 못했다. 봄바람처럼 시원하다.
  

이렇게 긴 리뷰를 쓰게 된 것도 결국 그 먼발치에서 본 인연때문이다. 그리고 이 정도의 수고로움은 좋은 시를 길러 주신 분에 대한 내 예의이다.  

농부는 그의 시<시를 읽다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책방에서 사천 원 주고 산 오래된 시집 속에 배우고 깨칠 게 하도 많아 사만 원 주고 사도 아깝지 않겠구나 싶다. 그럴 때는, 문득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찾아온다. 그 마음 그대로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시인이 쓴 짧은 시 한 편 읽어 드리고 싶다' 라고 말이다. (농부는 김남주 시인의 '옛 마을을 지나며'를 인용한다.)

 내가 농부 시인에게 다시 돌려드리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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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전환 -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8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 길(도서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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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공전하는 행성이다. 밤에 잠들고 나서 운동은 시작된다.  아이에 따라서 공전 궤도와 공전주기는 각각 다르다. 때론 방향에 일관성이 없기도 하다. 간혹 개성적인 아이들은 회전 궤도를 만들지 않고 베게 너머로 이탈하기도 한다. 만약 아이들이 진짜 밤하늘에 달린 별이었다면 우주는 카오스 그 자체였을 것이다. 참고로 우리 집 아이들은 하룻 밤에180도 정도만 돈다. 아침이 되면 난 내 발 밑에 있는 그들을 발견한다.   

  야간에 불규칙한 회전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부모가 시도 하는 가장 어려운 일중 하나는 '이불 덮히기'다. 무한 도전에 가깝고 대개는 실패한다. 때로는 부모들도 아이 때의 습관에 따라 이불을 걷어차며 잔다. 요즘 부모은 그래도 좀 낫다. 그 고충을 헤아려 '조끼 이불'이라는 이불 대용품이 있으니 말이다.  자동차 안전벨트 처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이들에게 기능성 의류를 입힌다. 언젠가는 이것도 귀찮아 할 테지만 말이다.  

칼 폴라니에 대한 서평에 왠 아이들과 이불 타령이냐 할 사람도 있을게다. 칼 폴라니의 핵심 개념에 대한 내 나름의 비유이다. '경제야 이불 덮고 자라. 제발'  지난 몇 년 사이 인문,사회학계에 칼 폴라니의 훈풍이 불었다. 그리고 그의 주요 개념들은 이제 상식적인 용어로도 인용될 정도다. 앞서 이불을 이야기한 것은 폴라니가 말한 '배태성(embedness)'과 관련이 있다. 그들에게 침대라면 우리에게는 이불일 테니, 사회라는 이불 속에 뛰쳐나가는 경제를 다시 묻어주자는 것이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 목적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것 처럼 폴라니는 경제라는 것에 선행하는 사회를 언급하는 학자다. 폴라니의 입장은 그가 비판하는 측을 통해 상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의 가장 큰 상대는 전통적인 고전파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 리카도,멜서스 등이다. 폴라니는 그중 아담 스미스는 살짝 구해준다. 부각되지 못한 '도덕주의자' 스미스의 모습이 있기때문이다. 그렇다고 폴라니가 마르크스 경제학을 좋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맑스 연구에 단절/연속론 논쟁을 만들기도 했던 청년 맑스/후기 맑스 중에서 전자의 인본주의에 훨씬 높은 관심을 보인다.    

폴라니의 목적은 경제를 사회에 통합하는 것이었음은 이미 말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폴라니의 이 책의 서술이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경제가 사회와 분리된 것이 근자의 매우 짧은 시간 동안에 이루어진 일임을 논증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폴라니는 인류학적 방법론을 동원한다. 즉 개인적 이익이라는 새로운 개념보다 인류 사회가 상호교환, 호혜적 관계를 중요시 했다는 인류학적 증거들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이기적 개인'과 '협조적 개인'이라는 문제는 인류학 뿐 만이 아니라 진화생물학에서도 매우 흥미롭게 진행되는 문제이다. 여기에는 그리고 모종의 선택적 친화성이 있다. 폴라니 역시 이와 유사한 말을 하는데  '개인적 이익 추구의 선천성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은 기실 '시장 자유주의와 자유방임'의 목적을 위해 소급적으로 이용된다는 것이다.  

폴라니의 연구가 경제학적으로 대단히 이질적인 것은 그것이 고전경제학이 의존하는 수리 경제학이나-이들에게 '경제는 과학이다'. 그래프와 수식으로 경제관계를 모델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는 직접적으로 인간 생활에 관여하는 형태의-후생경제학이나 케인즈주의같은- 정책적 경제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학의 거대한 조류에서 살짝 비껴나간 느낌이 있다. 쟁쟁한 경제학자들의 학문적 주장들-물론 원서로 읽진 못했으나- 에 비하면 칼 폴라니의 접근은 인문학적인 향기가 강하다. 정식화 과정은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가치론적 당위에 대한 논증이 주를 이룬다. 거기에 현재 자본주의적 작동 방식이 인류의 거대한 전제가 되어 있는 시점에서 보자면 조금은 소박하고 낭만적인 분위기 마저 느껴진다. 폴라니가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을 경유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시차적 한계는 이해할 수 있긴 하지만 말이다.  

물론 이것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경제사상가로서 폴라니의 지평을 조금은 낭만화, 극소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 폴라니가 한국의 인문사회학계에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실물경제학적인 필요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부분이 폴라니의 담당 분야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담론적 지지대가 매우 필요한 시점에서 폴라니가 살아났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역자는 후기에서 몇 가지 주요 개념 보다 '사회의 중심성'을 되살리려는 사회개혁가로서의 폴라니를 고려해야 한다는 당부의 말을 한다. 즉 현재 우리 사회의 대중들의 '필요'가 잊혀진 폴라니를 다시 불러들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 폴라니가 다시 소개된 시점을 폴라니 자신의 용어를 통해서도 설명이 가능하다.'이중운동'의 자발성 말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으로 부터 이어져온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MB정부에 들어서 매우 노골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화용론적으로 과거 정권과의 차이를 두자면 과거에는 '그래도 이런 방법 밖에 없습니다. 이게 길이라구요, 안그렇습니까? ' 였다면 지금 방식은 '원래 이런거야. 뭐라구? 이 빨갱이 자식들' 인 셈이다.(좀 희화해서 쓰다보니 너무 과거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대응에 대해 나이브하게 말한 것 같다. 마치 문제는 '소통'의 문제였다는 식으로 오해받기 좋겠다. '소통'만 잘 해결되면 이 정권도 별 문제없고, 저 정권도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소통' 문제만 다르지 신자유주의적 태도에 대해서는 비슷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  상징적 질서가 작용하는 현실의 좌표계에서 사람들은 과거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드라이브는 쉽게 잊는다. 현재 진보정치판의 일부 사람들은 과거유산의 적자인양 손을 들고 다닌다. "저요. 제가 상속자란 말이이에요. 쟤는 배신자에요. 쟤는 양자에요"  대중들의 취향에 영합해야하는게 정치라지만 창피함도 좀 알아야 할 텐데.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남북이 어찌 하나 같이 '유훈정치'맛에 길들여져 있는지.   

 어쨋거나 폴라니는 MB와 친구들의 뻔뻔한 신자유주의 슬로건이 매우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 때 재발간되었다. 신자유주의외엔 대안이 없다라는 맹폭에 대한 반대 운동의 담론은 여러 형태가 있었다. 가장 큰 저항담론은 언제나 마르크스 쪽에서 온다. 정치경제학 비판의 선두는 그였기 때문이고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한 그래서 마르크스도 갈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변태하는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도 아마 계속 갱신될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미 90년대 물건너갔다거나 또는 고도의 학문적 경향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무언가 다 뒤집어 없자는투의 마르크스 말고 신자유주의의 레토닉에 방어적 공격을 할 수 있는 '언어들'은 없을까?  출판계와 미디어 등에서 특히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에 대해 살짝 애무 당한 느낌으로 글을 쓴 것은 대중들에게 필요한 '언어들'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러한 접근은 매우 담론정치적이긴 하다.지금 그렇게 쓰고 있으니까...) 장하준의 책에 대한 인기 역시 어떻게 보면 담론투쟁의 도구적인 성격이 강하다는게 지금까지의 내 생각이다. 그리고 모든 투쟁은 담론 투쟁 부터 시작된다. 장하준을 비롯해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여러 종류의 대안적 논쟁들의 백가쟁명은 분명히 긍정적인 것이다. 최소한 역동성은 그런 와중에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사회의 건강성의 한 지표이기도 하다.     

대신 한가지 아쉬운 점은 있다. 어느 한 편에서는 도구적 성격보다는 그 텍스트 자체가 가진 한계와 문제들에 대해 좀 더 지적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한국에서 폴라니 전공자가 많지 않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다지 비중있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인지 비판적 도전이 부족한 것 같다. 물론 생존 인물인 장하준과 그의 재벌론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과 재비판들이 가해졌다. 반면 칼 폴라니의 경제사상에 대해서는 어떤 의미에서든 독특한 비주류 취급을 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듯 하다. 논쟁은 오히려 '개량'이나 '혁명'이냐는 식으로만 진행된다. 좀 더 체계적인 칼 폴라니 비판서가 출현했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다. (마이클 샌델만큼 히트 한 책이 아니어서 그럴 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상식선에서도 폴라니를 비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 단계와 전근대단계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원론적 비판이 늘 수반하는 매우 통속적인 비판이긴 하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더 생각을 다른 쪽으로 옮겨보면 어떨까? '시장'에 대한 생각 말이다. 폴라니의 이중운동의 개념을 도입하자면 이 책이 나온 1940년대 이후 세계를 지배한 것은 -일반론적이기는 하지만- 순수한 의미의 시장경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폴라리도 지적했듯이 순수한 시장경제란 없지만 '운동-반운동'의 차원에서 보자면 1940년대 이후는 세계는 '수정주의'가 승리한 시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물론 진보-보수의 주기를 10년 주기로 보는 이들도 있다. 미국적 방식이긴 하지만) 폴라니는 19세기를 분석하면서 유럽의 균형상태를 언급한다. 그처럼 1940년대 이후 냉전은 또 하나의 역설적 균형을 이루어낸다. 그것은 상호 견제를 전제해 둔 불안한 균형이었으나 양자 모두 절충적인 방식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미국과 서방은 케인즈주의에 바탕을 둔 수정자본주의적인 방식을 존중했으며, 소련과 동구권 역시 계획경제의 한계와 생산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책 수정을 가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이런 균형이 무너지며 신자유주의는 다시 기지개를 킨 것이다.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의 이름하에 말이다. 우리는 폴라니의 기원론적 고찰을 통해 이 또한 당대 역사와 상호작용하는 일시적 현상임을 이해할 수는 있다. 고전 경제학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은 물론 자유라는 기표를 전유하면서 조정 상태를 예외적 상태라고 주장한다. 그들 역시 최근 몇 년 사이 벌어진 통화위기에 잠시 수그러들고 말았다. 그런 면에서 폴라니가 '이중운동'이라고 명명해놓은 역사적인 관계는 매우 통찰력있는 방식이다. 결국 경제라는 것은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상태라는 말이다. 그것은 '이것이 전부다'라고 하는 사고에 일침을 가할 수 있으며 또한 상존하는 저항의 근거를 늘 존속시킬 수 있다. 폴라니가 이중운동의 과정 중 자유주의적 인위성과 저항의 자발성을 배치 해 놓은 것은 그의 경제학이 대단히 인본주의적 전통 하에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폴라니는 최종심급에서 '경제'로 환원해서 세기의 전환기를 읽고 있다. 거기서 핵심되는 개념은 '금본위제' 에 대한 것이다. 국내 및 국제 관계의 모든 사회적 흐름은 궁극적으로 '자기조정시장'과 '금본위제'라는 서로의 존재를 전제하는 관계 속에 이해한다. 그외 폴라니의 개념 '자기조정시장의 유토피아성','다시 묻어두기' 등과 함께 <거대한 전환>에서 돋보이는 개념은 '허구의 상품'이다. '노동,토지, 화폐'는 실제 상품이 아니며 '자기조정시장'을 탄생 시키고 유지하기 위한 역사적 필연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 부분은 현대의 시각에서 보자면 금방 이해하기 쉽지 않다. 또한 마르크스의 상품 개념과도 다르다. 마르크스는 이것의 '물신화' 경향을 비판한 것이지 이것의 발생자체를 허구화한 것은 아니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공상적 사회주의로 보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폴라니는 산업사회의 동학에 대해 선구적 혜안을 가진 사람으로 로버트 오언을 극찬한다. 반면 마르크스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산업의 위대한 힘이 자신들이 계획한 변화를 허용할지 어떨지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라고 일침을 가한다. 폴라니의 가장 큰 장점은 결국 '자기조정시장'이라는 것의 허구적 성격을 인류학적 방식을 따라 매혹적으로 서술한데 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다른 질문을 하나 던져보게 된다. 그동안 '자유시장'이란 개념의 허와 실에 대해 몰랐던 것일까? 일부 계층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시장만능주의'에 대해 그대로 믿었던 것일까? 경제학적으로 봐도 고전주의 경제학을 수렴한 신고전파 종합에서도 그런 '시장만능주의'에 대해선는 의심을 했엇다.  '시장주의'에 경도된 사람들 조차 정말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일까?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자기조정시장'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본다. 대중들의 담론 속에서 '시장주의'는 문제는 알지만 "어쩔 수 없잖아" 라고 하며 슬쩍 따라 갈 수 밖에 없는 껄끄러운 무엇이 아닐까? '세상이 다 그런거 아니야' 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결국 다시 이데올로기 문제로 들어가고 만다.  지젝은 이런 상태를  바로 '냉소주의적 주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을 하고 있다."  과거 마르크스가 이데올로기적 주체들을 표현한 "그들은 그들이 하는 짓을 모르나이다."와는 사뭇 다른 주체들이다.    

특정 세력들 또한 그것이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지 모를이 없다. 이익에 가장 눈 밝은 자들이 그것을 모를 수가 있는가? 자본주의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은 노동자이기 보다는 자본가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그렇지 않은가? 결국 그것을 잘 알면서도 하찮은 것으로 치부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숙명이고 그 숙명적 희롱을 잘 알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믿는 척, 또는 믿어 버려야  것이 대중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데올로기론은 여전히 존속될 수 밖에 없다.) '이제 누가 그런 거에 신경쓰냐'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런 냉소어린 표정에는 조숙하게 늙어버린 피곤함이 늘상 간파된다.    

폴라니의 경제학은 어떤 측면에서도 비주류다. 공시적으로도 또한 통시적으로도 그렇다. 기원론적으로 노동,토지,화폐를 허구상품이라고 논증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것이 하나의 존재로적 '전제'가된 상태다. 그것의 기원을 파헤치는 것과 그것이 전제로 작동하는 세계를 이해하고 바꾸는 방식은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폴라니의 경제학은 가치론적인 부분이 훨씬 강하다. 그런면에서 인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폴라니를 읽고 현재화하는 것이 관건인 듯 싶다. 

 조금은 역설적으로 폴라니 본인이 부정한 '유토피아'적 개념을 동원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유토피아 정치를 응원하는 바는 아니다.) 폴라니는 고전 경제학자들의 전제, '자기조정시장'이 유토피아라고 말한다. 반면 고전 경제학자들이나 신자유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식 사회주의나 코뮌 사회가 유토피아라고 한다. 그렇다고 보면 양자 모두 유토피아를 향한 운동인 셈이다. 제 3의 길을 찾는 것도 물론 방식이다. 그것도 어떤 지향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최소한의 지향을 본다면 질문은 어떤 유토피아로 가고 싶은 것인가? 조금 더 순치하면 '어디로 가고 싶은가?" 가 될 수 있다. 인류 사회의 방향성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다. 역사는 차이와 반복을 거듭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그 무늬를 만들어 왔는가? 칼 폴라니를 비롯해 마르크스,심지어 고전경제학자들까지 주장했던 답 중에 하나는 '인간 자유의 확장'이다. 공통의 문제와 공통의 답이 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더 많은, 더 넓은 '자유'를 안겨주는가에 대한 개별 답안을 작성하는 것이 과제인 셈이다. "더 넓은 시장적 자유인가 더 넓은 인민적 자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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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그램 질로크 지음, 노명우 옮김 / 효형출판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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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도시는 아름답다"   <파사젠베르크>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자궁이다. 도시는 욕망하고, 생산하며, 배출한다. 현대 대도시의 구성원들은 너무도 빨리 변하는 도시의 속도와 반복적 리듬에 몸을 싣는다. 모두들 도시의 합리성과 편리성 때문에 도시에 살긴 하지만 모두들 다른 곳을 꿈꾼다.  그곳은 도시가 아닌 곳이다. 대개 도시인들의 소망은 은퇴 후 전원에 작은 집을 짓고 텃밭 키우며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이다. 그렇데 그런 소박한 꿈마저도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곳이 도시다. 도시는 알고 있다. 실제 탈주의 달콤함을 누릴 수 있는 자는 매우 소수라는 것을 말이다. 벤야민의 지적대로 대도시는 '욕망과 꿈' 마저 기성품처럼 만들어 주고, 또 세련되게 배려해주는 판타스마고리아다.   

그램 질로크의 책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에서 우리는 세심한 눈을 가진 베테랑 산책자 발터 벤야민을 도우미 삼아 세기 초의 거대 도시들을 걷게된다. 단순히 도시의 외관을 보여주는 것은 그 안내자의 역할이 아니다.  노련한 도시의 안내자는 파스러진 낙엽같은 도시의 아케이드를 통과하며 그 근대성의 한 단면을 예리하게 보여준다. 이 책의 저자 그램 질로크는 흥미롭게도 벤야민의 작업에 일련의 일관성을 부여한다. 그는 벤야민 초기 저작부터 최후 저작과 도시와의 계를 마치 소개팅 나온 남녀처럼 일대일 대응관계로 연결시킨다. 벤야민의 생에서 중요하게 거론하는 도시는 '나폴리-베를린-모스크바-파리' 이다. 공교롭게도 이 도시들이 가르키는 지점은 지도상의 사방과 공명한다.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가?  벤야민의 최후 대작이자 미완의 역작인 파리와 <파사젠베르크>(아케이드프로젝트)의이다.  

 <파사젠베르크>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럽 최대의 도시, 아니 인류 문명의 최정예 도시였던 파리를 배경으로 한다. 그램 질로크는 '파사주 프로젝트'가 1927년부터 시작된 도시연구 계획의 연속성을 띤 프로젝트라고 공언한다. 즉 <사유이미지>를 출발점으로 하여 최종적으로 <파사젠베르크>까지 일련의 도시를 둘러싼 사유실험의 연작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각각 독립적 작품들이고 각기 어떤 연속성을 염두에 두고 씌여진 정확한 의미의 연작과는 거리가 멀다. 그램 질로크는 이를 좀 더 원경에서 바라보며 벤야민의 작업을 통해 관통하는 도시에 관련된 어떤 일관된 특징들을 사출하려는 것이다. 

그램 질로크는 벤야민의 도시 독해의 방법론을 몇 가지로 정리한다. 관상학,현상학,신화,역사,정치학, 그리고 텍스트이다. 먼저 벤야민은 사회적 총체의 축소판으로 도시를 읽는다. 일명 '도시 모나드'라고 할 수 있는데 벤야민이 수집가의 비유등을 통해서 들어낸 도시 단편을 통해 도시 전체의 특성을 이해하는 방식을 말한다. 벤야민은 이렇게 주변적인 것들을 말하게 함으로서 도시가 하나의 신화임을 폭로하는 방식을 취한다. 대도시가 판타스마고리아임을 밝히는 것이 벤야민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하지만 주의할 것이 하나 있다. 벤야민의 폭로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벤야민 사상의 매력적인 점은 부정의 상태를 그대로 끌어 안는 곳에 있다. 벤야민이 '꿈 깨우기' 위한 자명종의 비유를 든다면 이는 곧 '꿈'이라는 상태의 전제마저 동시에 긍정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벤야민은 도시의 삶을 반복에 바탕을 둔 거대한 환등상이라고 햇다. 이것은 벤야민의 정치철학에도 그대로 연장된다. 벤야민이 보기에 흔히 등장하는 진보라는 것도 결국은 '반복동일성'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역사와 진보의 역사성에 빗금을 치는 것이다. 그는 파괴의 몰락의 지지자다. 결국 하나의 꿈이 무너지는 자리에서 자유로와진 이미지와 구상이 정치 투쟁을 통해 활성화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의 정치철학이 신학적이라는 이유는 여기서 유래한다. 물론 벤야민은 정치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도시는 생존 투쟁과 계급 투쟁의 경기장이다." 라고 말했을 정도니까. 벤야민은 당시 정통파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달리 주변부적 대상에게도 가능성을 읽어낸다. 물론 나치의 등장과 함께 군중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증대하긴 하지만 말이다.  

이 책 전반부에서는 나폴리, 모스크바, 베를린을 경유하며 도시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본 역사,정치,미학 등에 대해 사유의 만화경을 펼치는 벤야민을 만날 수 있다. 그램 질로크는 각 도시와 관련된 벤야민의 저작 일부와 이에 대한 학자들의 주석을 분석하면서 벤야민의 철학을 이해하게끔 하는 일종의 유연한 홈을 파기 시작한다.나폴리는 수전 벅모스의 입장을 반영한다. 그녀는 "파사젠베르크의 기원은 파리가 아니라 19세기 이탈리아다.' 라고 했다. 도시에 대한 관심의 출발점이 나폴리였다는 것을 부각한것이다. 나폴리에서는 저자는 '다공성'(현상사이의 명확한 경계없음) 이라는 개념을 통해 도시의 혼미성과 그 속에서 방향 상실이 주는 철학적 아이디어를 계진한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대도시는 은유적으로 미로(혼미)이고 폐허(몰락)이며 극장(즉흥성과 연기)인 셈이다. 모스크바의 벤야민은 혁명 이후 러시아의 경험을 통해 현대 기술과 도시와의 관계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는다. 후에 등장하는 변증법적 이미지라는 개념 역시 러시아 영화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기때문이다. 하지만 벤야민은 모스크바에 양가적 감정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램 질로크는 베를린의 기억을 벤야민의 자전적인 이야기와 현대성의 원사가 중첩된 것으로 보는데, 이는 수전 손택과 아도르노의 입장을 공평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벤야민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로 이를 언어로 직조해 내는 과정에 착수한 것이다. 그램 질로크는 이를 통해 벤야민이 망각된 꿈과 유토피아적 충돌을 회복하고 실현시키려고 했다고 평가한다. 

<발터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는 이제 나폴리-모스크바-베를린을 거쳐 마지막 기착지인 파리에 도착한다. 흔히 <파사젠베르크>로 알려진 이 작품은 완결된 텍스트가 아니며 또한 어떤 일관된 체계를 가진 텍스트도 아니다. 하지만 벤야민은 이 작품을 두고 "나의 모든 투쟁과 이념들의 극장"이라고 말했다. 비극적 최후를 맞은 벤야민이 당시 주변 사람에게 넘겼다는 유실된 원고가 <파사젠베르크>의 미완성 부분이 아닐까 하는 추측은 그래서 사람들은 더 아쉽게 한다. 그램 질로크는 벤야민이 파리의 아케이드 연구를 통해 얻어낸 도시의 상품물신성, 근대성의 신화,판타스마고리아적 속성,반복성등을 중심으로 파리 관련 연구의 전반부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이어서 벤야민에 앞서 파리를 거닐었던 보들레르를 통해 즉 벤야민-보들레르의 인식론적 공통성을 중심으로 파리로 상징되는 현대 대도시의 특성들을 뽑아낸다. 보들레르를 경유한 벤야민은 알레고리로서의 도시 읽기, 새롭게 등장한 군중이라는 양가전 존재의 특성들을 살펴본다. 

이 책<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는 벤야민에 낯선 독자에게 커다란 지도를 제시한다. 이를 통해 벤야민이 도시연구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문제 의식과 흐름들에 대해 간파할 수 있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도르노나 수잔 벅모스등의 연구자들의 벤야민에 대한 비판적 서술을 통해 간격을 유지하며 벤야민에 접근할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벤야민에 대한 전반적인 안내서로서, <파사젠베르크>읽기의 징검다리로서  괜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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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클리드의 창 - 기하학 이야기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지음, 전대호 옮김 / 까치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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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좋아했으나 그리 수학을 잘하지는 못했다.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인과 법칙을 적용하면 이건 좀 어색한가?  '좋아함'과 '잘함'이 인과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도대체 누구의 생각인가? 이건 낭설이다. 전자는 기호나 취향 또는 욕망일 수 있으며, 후자는 결과다. 굳이 결과가 아니더라도 '결과'라는 이름으로 반영된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제는 그런 결과에 연연해 하지 않는 '좋아함'이 지복임을 알게 된다. 즐거운 일들은 언제나 어떤 과정 자체에 대한 만족이다. 결과는 부수적인 보상이지 지속적인 동력이 되진 못한다. 늘 상기 되어 있어 모종의 불안감 마저 느끼게 하는 -어떤 이는 이를 에너지가 충만한으로 표현한다만- 긴급 구호 봉사자는 '가슴이 시킨다' 라는 말로 '과정'이 주는 행복을 이야기한다. 가슴이 좋아해서 다시 수학을 즐길 수 있을까? ㅎㅎ 가끔 몇 몇 수학 기호들을 끄적여보기도 하지만, 수학을 놓은지 20년이 넘어가는 시점이다 보니 인수분해도 헷갈린다. 미적분은 말해 무엇하랴?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수학을 잘하지 못하기때문에' -하지만 현실은 '수학을 잘해야하기 때문에'-'수학을 좋아한다' 라는 생각을 어려서부터 의식적으로 내면화시킨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요즘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개 인문계 고등학교의 문과를 선택하는 학생들은 수학에 자신이 없어서 그런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내 경우는 좀 다르다. 나는 문과적 내용들이 좋아서 이걸 선택한 셈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문과생이었다. 잘 모르면서도 어려서 부터 나는 사회,역사,세계문화 같은 것들이 개미,,공룡,별,인체 같은 것 보다 좋았다.  

어린 시절 수학을 좋아했던 그렇지 않았던, 수학은 최근에 관심을 가진 영역 중에 하나이다. 정작 수학적 계산보다는 철학적 측면에서의 수학이라는 것이 더 맞는 말일게다. 그 관심의 기원은 물리학 또는 이와 깊은 관계가 있는 우주론에 대한 호기심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수학도 들춰보게 되는 셈이다. 도랑치다가 가제 잡는 것 정도로 해두자.  수학에 대한 내 기억의 잔여가 그다지 많지 않고,또한 이 관심의 지속성 조차 의심스럽기 때문에 작금의 수학에 대한 이해정도에 대해 사실 큰 기대하지는 않는다. 오지랖 넓은 속류 교양인들이 취하는 일반적 특징 중에 하나로 취급한다. 아마  대략 교양 수준으로 됐다 싶을때면- 어디가서 나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잘난 척 약간 뻥치고 나올 정도 된다면- 다음으로 버뮤다 삼각지나 크리켓의 역사와 경기 원리를 뒤쫓고 있을지도 모른다.(ㅋㅋㅋ)  하여간 나같은 얄팍한 교양 수준 독자는 출판사에는 미세먼지만큼 도움이 될 지언정 인류 발전엔 그닥 큰 영향력을 끼치긴 힘들것이다. 그나마 위안은  이 사실을 알고 즐기니 '즐겁지 아니한가'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의 <유클리드의 창: 기하학 이야기>는 나같은 얄팍한 수준의 독자를 대상으로 쓴 인류 발전에 기여한 수학자와 물리학자들의 이야기이다. 앞서 말했듯이 내관심은 이들이 열어 놓은 인식론적 지평의 확장이다.( 수학적 증명은 내 범위를 넘어서고, 이 책의 저자도 따로 설명해 주지 않는다.) 결국 과학이 추상적 차원에서 인류에게 도움을 준다면 그것은 인식론의 확장 아닌가?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그리하여 자연을 구성하는 원리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 어차피 인수분해도 헷갈려 하는 내가 고난도 수학식을 이해할 수도, 그리고 이해하려고 노력할 리도 만무하다. 또한 그것이 어떤 발견이 연쇄적으로 몰고 올 과학사적 위대함의 규모도 내가 모두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발견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 그것이 어떤 뜻을 함의하고 있는지 조금 향유할 수는 있다.  비유클리계를 알게 되었을때 사람들은 인식론적인 충격을 받게 된다. 애인이 바람났다는 것을 알 때도 인식론적 충격이 만만치 않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의 세상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니까. 물론 서너번 그런 경험을 하다보면 이젠 뭐 11차원도 이해하게 되는 법이다. 사는게 다 그렇지 뭐라고 하면서..ㅎㅎ 하여간 비유클리드는 오래된 토대를 흔들기 때문에 충격적이다. 이것은 인식의 세계를 굉장한 차원에서 전환시켜준다는 것이다. (또한 먹고사는 경험적 문제에서 점점 멀어지게도 만든다.ㅎㅎ) 중세 교회가 지동설에 대해 화형이란 방식으로 협박을 가한 것은 그들이 가진 신 중심의 인식론적 토대를 거침없이 흔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지난 100년 인간의 위대한 발견 중 하나가 된 것도 따지고 보면 휘어지며 수축하기도 하는 시공간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도입시켰기 때문이다.이런 발견에는 항상 저항과 몰이해가 따르기 마련이다. 반대는 당대 사회에서 나오기도 하고, 또 전문가 집단에서 나오기도 한다. 때로는 천재라고 하는 사람들 조차 어떤 인식론적 가설에 대해 저항한다.(물론 나름대로 그 이론이 가진 문제점들을 고찰하기 때문이다.) 이 책 <유클리드의의 창>에도 그런 도전과 응전의 역사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이미 눈치챗다시피 이 책은 기학학과 물리학의  역사에 대한 흥겨운 에세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고대 그리스 즉 BC 500 년대 부터 초끈이론,M-이론이 등장하는 1990년대까지 다룬다. 저자는 이 장구한(?) 역사에서 기하학 혁명을  불러일으킨 다섯명의 주인공을 불러 세운다. 유클리드, 데카르트, 가우스, 아인슈타인, 위튼이다. 하지만 이 다섯명의 간략한 약사로 책이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들은 저자가 이 책을 서술해가기 위한 거대한 다섯 봉우리일 뿐이다. 다섯명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한 이야기가 오고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위대한 업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했던 전후 학자들의 연구와 관계들,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다음 작업으로 이어졌는지까지 설명하는 것이다. 피타고라스 무리도 나오고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도 등장한다. 리만이나 프레게도 등장하고, 힐베르트, 마이켈-몰리, 로렌츠 등도 등장한다. 가깝게는 '으으으' 하는 스티브 호킹도 나온다. 결국 앞서 말한 기하학 혁명의 다섯 주역들만의 독립된 선분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선분의 최고점을 잇는 연속선의 궤적을 따라 이 책은 서술 되어 있다. 이 곡선은 좌표 상에서 우상승곡선으로 향하고 그 끝은 막혀있지 않다. 아마 이 책에서 저자가 어떤 단절을 상정한 곳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적으로 알렉산드리아의 몰락, 즉 히파티아의 죽음 이후 (영화<아고라>에서 매력적인 레이첼 와이즈가 역을 맡았다.정말 그렇게 예뻣을까?ㅎㅎ) 데카르트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대략의 시간들-흔히 중세의 암흑기라고 불리는 시대- 일 것이다. 중세의 과학기술의 퇴보가 있지 않았다면, 지금 쯤 인류는 태양계 바깥의 행성을 탐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투로 말한다. <코스모스>의저자 칼 세이건도 어디선가 그와 유사한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거의 천년 가까운 과학적 정체였으니 현재 인류의 발전 속도를 소급해서 생각하면 지끔 쯤 안드로메다 외계인과 커뮤니케이션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선정한 기하학의 독수리 5형제의 면면은 이렇다.  맏형 유클리드는 향후 거의 2천년간 지배하게될 유클리드 기하학의 정리자이다. 고대 그리스와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의 수학을 집대성한 셈이다. 데카르트는 유명한 '코키토'의 철학자이자 기하학과 대수학을 결합시킨 장본인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그래프와 좌표라는 개념이 데카르트때 도입된다. 그리고 천재 가우스는 당대 발표되지 못하지만 비유클리드의 싹을 발견한 사람이다. 캐릭터 셔츠로도 유명한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을 부정한 이다. 그리고 마지막- 이 사람 이야기하려고 이걸 다 쓴 것 같다- 위튼. 이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가? 이 분은 다섯명의 멤버중 유일하게 중력에 영향을 경험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다. 현대 우주론을 살짝이라도 열어본 사람이라면 그를 1세대 초끈 이론을 정리하고 2세대 초끈 이론을 이끈 M-이론의 창시자로 알고 있을 것이다. 저자를 포함한 세간의 평가는 아인슈타인에 맞먹는 천재 중에 천재인 셈이다. 저자는 <유클리드의 창>에서 위튼을 비롯한 초끈 이론의 과제와 성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면서 이 책을 정리한다. 결국 다섯 명과 주변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통해서 인류가 세계와 자연을 어떻게 인식하고 또 시간과 공간을 -기하학의 전쟁터이니까- 어떻게 대했는지 대략적으로 파악하게 된 셈이다.  

책의 구성을 보면 책 전반부는 대수학과 기하학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아무래도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이 그것에 바탕을 두니 경험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부분이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을 다루는 책 후반부 부터는 이론 물리학이 중심이 된다. 결국 이론 물리학의 증명은 수학을 통해서만 가능하기때문에 수학이 팽을 당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에 의존해야하는 더 중요한 대목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전문적 수학용어나 수식이 거의 없다. (있어도 그 수학적 증명에 관심이 있거나 이해할 수 있는 독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래서 수학이 아니라 역학만 한참 이야기하는 것 처럼 느껴진다. 저자는 나름 쉬운 방식으로- 그의 아들 두 명이 매우 여러번 찬조 출연한다- 물리학의 주요 아이디어들을 설명한다. 하지만 기본적인 지식이 없으면 이것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많이들 아는 상대성 이론-그런데 정말 상대성 이론에 대해 많이들 아나?- 역시 수학적 증명으로 설명하는 것은 물리학과 대학원이상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애초부터 거기는 포기하고 교양수준의 상대성 이론과 관련된 책들을 작심하고 좀 살펴본 적이 있다. 이유는 가장 유명한 이론인 상대성이론이 뭔지 잘 몰라서. 하여간 오고 가는 기차와 날아가는 우주선등을 통해-이 책에서도 기차 예를 쓰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기차 예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대략 그림은 좀 그려졌다. 그런데 맥스웰의 방정식이나 로렌츠의 변환등등 알려고 덤비면 알아야 할 매우 전문적인 것들이 너무 많다. 또 그 이후 등장하는 양자론이나 파인만의 QED, 초끈이론은 아직 대략적 스케치 밖에 그려지지가 않는다. 이 책에는 이 부분에 대한 도해 같은 것도 전혀 없다.(사실 그림으로 된 설명을 봐도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한편으로 저자 역시 자신의 설명으로 이 세계를 이해시키려는 의도도 없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복잡한 극미시 세계에 작동하는 힘들을 몇 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면 그것도 이상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의 장점은 잠시 후에 말할 것지만 단점 부터 말하자면, 이 책으로 알수 없는 것이 태산이니 더 많은 공부를 하라고 다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유클리드의 창: 기하학 이야기>의 장점을 말해보자.  먼저 이 책은  기하학을 중심으로 물리학사의 흐름들과 전체적인 조망도를 그린다. 그중 돋보이는 장점은 일상적인 용어를 사용하며 유머러스한 문장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의 희희낙낙한 표현들은 압권이다. 하나 하나 소개하지 못함이 아쉬울 정도이다. 가우스의 일탈, 즉 유클리드 공리계를 일탈하고 싶은 욕구를 저자는 혀에 귀고리 꽂은 아이들이나 쫒아다니는 10대의 남자아이들의 일탈 욕구와 빗대면서 표현한다. 가우스는 그런 아이들하고 다르긴 했다는 것이 그 일탈의 변별성이다. 이런 식의 재밌는 비유와 표현의 일상성은  삐꺽거리는 거대한 기계를 떠올리게 하는 기하학이란 뉘앙스에 살짝씩 달콤한 꿀을 발라주는 셈이다. 그렇지만 한가지 명싱해야 할 것은 다루는 분야 자체가 워낙 전문적이고 어려운 분야이다 보니 그 유머러스함으로도 다가설 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유머러스하다는 것이 꼭 쉽다는 뜻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한번 말했지만, 이 책에는 저자의 아들, 알렉세이와 니콜라이가 때로는 별로,때로는 관측자로, 때로는 이론적 대립자로 빈번하게 등장한다. 저자가 매우 자상한 아빠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도 이 책에 등장한 자기들의 모습에 매우 즐거워 했을 것 같다. 기하학이니 물리학이니 하는 비인간적인 내용들에 자기 방의 엔트로피를 높이는 아이들이 등장하니 훨씬 인간적인 향기가 난다. 책은 그래서 좀 더 인간적인 온기를 품게 되고 아이들은 자기 존재가 오래도록 활자로 남아있을 테니 좋고. 이런 걸 두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제잡고 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 결론만 남았다. 

"제 점수는 요..(두구둥 두구둥)... <유클리드의 창:기하학 이야기> 이 분야의 대중적인 에세이로 추천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입니다. 통과...축하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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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충분한 우주론 - 고전이론에서 포스트 아인슈타인 이론까지 비주얼 사이언스 북 1
다케우치 가오루 지음, 김재호.이문숙 옮김 / 전나무숲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학력고사 선택과목이 지구과학이었다. 개그맨을 닮은 지구 과학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조는 친구들을 보면 "마!! 너 그럼 나중에 연애 못해. 알아? " 라고 말씀하셨다. 
 "왠지 아냐..니들 같은 애쉐이들이 뭘 알겠냐? 임마..형님이 알려줄께. 니들 연애 해봐라. 밤에 싸돌아다니 다가  뭐...언덕배기에 같은데 앉아서 '저 별은 말이지 안드로메다 어쩌구..' '저 별자리는 어쩌구'....'저 별까지 거리는 어쩌구' 이런거 한 번 해주면 아가씨가 '와우' 이러는 거야.  뭘 알고 졸아. 자씩들.졸지마!! 진도 나간다 " 이런 식이었다.  

  

 하여간 지구과학을 잘한 나는 연애에는 몇 번 실패는 했지만-인류의 도전 역사는 또한 실패의 역사이기도 하기에- 그래도 결혼까지 잘해서 아들 둘 낳고 잘 살고 있다. 그 선생님이라면 "걔가 지구과학을 잘해서 그래." 라고 하실지도.  

 지구에서 한 40년 넘게 살다보니 지구 밖이 그리워져서 오랜만에 추억 어린 '지구과학' 공부를 한다. 오래 전에 배웠던 기억들은 장롱 밑 동전처럼 희뿌옇고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은 아지랑이 처럼 아롱거린다. 경험상  이런 상태에서는 과욕하지 말자가 금과옥조다. 지금 당장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묵묵히 쌓아 놓는다.그러다 보면 언젠가 "아...그거였군" 하는 날도 오는 법. 즉 반복을 동반하게 마련인 계통적 독서를 하다보면 넓은 그물코가 생기고 그 사이로 빠져나가는게 많더라도 그물망엔 이끼가 끼는 법이다.   

사실 이 책의 시리즈인 <한 권으로 충분한..> 또는 <하룻 밤에 읽는...>류의 책은 "즐겨보지 않는다." 고 이야기해야 좀 있어보인다. 그래도 책을 좀 읽는다는 자가 '한 권...'으로 뭐 어쩌겠다는 것에 현혹되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자격지심같은 것이 있다. 하지만 '한 권으로 아는 척 하지 않을테니-' 라는 조건만 달면 좀 더 너그럽게 대할 수 있다.'쪽팔림'은 대개 '실용적 목적' 에 뒤로 밀려나기 십상이다. 모르는게 죄가 아니라 알려고 하지 않는게 죄일지도 모르니까. 이런 류의 책은 새로운 분야를 접할 때 유용하다. 대부분 대중적인 기초 입문서를 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입문서를 몇 권 보다가 보면 또 거기에 뭔가 그림이 잘 안그려지거나 할 때가 있다. 마주 잡은 손가락 사이의 빈틈 같은 것들. 그럴 때는 '그림이 많이 그려진' 책들, 장황할 설명보다는 딴딴하게 이야기해 놓은 책들이 마음을 풀어준다. 그런데 여기에도 단점이 있다. 무턱 대고 '그림 많은 책'들은 매우 간략하고 핵심만 요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전 정보가 없을때는 더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앞으로 가면 절벽이요 뒤로 가면 낭떠러지니 어쩌란 말인가라고 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경험적인 정답은 책들 사이의 간극을 인정하고 이를 매우는 상보적인 독서습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입문서들을 너그럽게 읽지 않으면  '한 권'이든 '그림으로 보는'이든 제대로 아웃라인을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있는법이다.  

 

<스피처 망원경으로 찍은 안드로메다 은하. 출처:위키피디아> 

 <한 권으로 충분한 우주론>의 경우도 일련의 과학 시리즈물이다. 알라딘에서도 인기 있는 대중적인 우주론 책들이나 물리학 관련 책들을 보다가 머리 속 세포가 간질 발작할 즈음 대증처방으로 일종의 진정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구스타프 도레의 '바위에 묶인 안드로메다' 출처: 위키피디아>-안드로메다는 페르세우스의 아내이다. 희생제물로 묶여있는 것을 페르세우스가 구해주고 결혼한다. 이후 아테네 신에 의해 하늘로 올려진다.> 

책은 근대 우주론부터 해서 최신 우주론까지 중요한 내용들을 요약해 놓았다.  마치 지구과학 참고서의 하이라이트판 같은 식이다.(물론 그것보다는 좀 길다.) 또한 다른 대중적 과학책처럼 각종 수식은 거의 없다. 몇 개 나오기는 하지만 수식적 표현이 더 용이하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쉽게 말해 마치 요약된 일러스트레이션용 관광 안내 지도처럼 우주론의 역사에 대한 거대한 조감도만을 독자에게 설명한다. 이런 방식의 가장 큰 장점은 범위별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좀 더 명확히 그래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주론의 범위는 어디부터 어디까지다.' 라는 식으로 군더더기 없이 말한다. 물론 이런 과정에는 무리수가 따르기 마련이다. 초끈이론이나 브레인우주론 등에 대한 설명은 설명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개요만 그려져있다. 전체적인 조감도를 그리는 것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과감히 스케치정도만 보여주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다루는 '우주'란 무엇인가? 책 첫 부분에 나오는 한자 해석을 통해 '우주'란 말은 결국 '시간과 공간'이라고 말한다. 좀 더 부가하자면 그 두 요소를 채우고 있는 것들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이 문제는 '극대와 극소의 범위'를 갖는다. 우주론은 가장 거대한 것을 찾는 것(그 구성요소들까지 포함하는)것과 가장 작은 출발점(기원)을 찾는 것이다. 그것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어떤 원인에 의해 발생하고,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끝나게 될 것인가?  

하여간 이렇게 우주론의 범위부터 시작한 내용은 근대물리학을 거쳐 현대우주론까지의 역사와 발견등을 소개한다. 이론물리학의 정점이자 현대 우주론의 정점이라는 양자 우주론은 사람을 곤란하게 만든다. 초끈이론,M이론, 등등이 그런 것이다. 양자론도 다음 내 공부 목록 중 하나인 셈인데, 크게 상상하는 것보다 작게 상상하는 것이 더 힘들 다는 것을 보여주는게 양자론이다.하여간 양자론 덕분에 우주의 기원과 힘의 분석이 가능해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고등학교 때 세포관찰 해본게 고작인 3차원적 인간으로서 도저히 상상이 안되는 11차원의 시공간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그것도 10에 마이너서 4-50승 단위의 극소세계라면 말이다. 양자우주론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장애는 사실 이론적 난해함이 가장 크겠지만, 경험적으로 정합적인 유클리드-뉴튼의 법칙의 간섭도 큰 역할을 한다. 쉽게 말하면 극소, 극대의 세계 또는 빛의 속도라는 초광석 세계 그리고 그런 시공간에서는 뉴튼의 법칙은 달리 작용된다. 하지만 경험이 만든 상상력의 한계를 그 경험을 넘어서는 것에 계속 고개짓을 함으로써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오늘 점심 뭘 먹지? 매우 고민하는 아인슈타인 할아버지) 

실제로 양자물리학이나 우주론의 분야에세 일반인들이 가장 애 먹는 원인은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이론 물리학은 이론적으로 도출되는 시공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수학적 법칙을 모두 빼낸 아인슈타인의 특수,일반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도 그런 실제의 경험성/이론적 정합성 사이의 차이 때문이다. 상대성이론은 실험적으로도 증명이 되었는데도 말이다. 이 책에도 잠깐 나오지만, 이미 자동차 네비게이션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상대성 이론의 보정을 받고 있는 셈이다.   

가끔은 우주론이 다루는 범위가 너무 넓고 미세해서 실제 이것이 무슨 도움이 될 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우리는 대부분 우주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넓고 그 안에 인간은 미세한 점에도 미치치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점'이 누적된 노력의 결과 우주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하지만 그 가능성의 영역은 남겨두어야 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이런 우주론적인 질문들은 또한 존재의 위상과도 연결된 실존적인 질문과도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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